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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17-02)

 


사마리아에 거주한 이방인들

열왕기하 17장 24-41절


코카콜라 사장은 피 속까지 콜라가 흐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이처럼 참된 회심을 경험한 사람은 가장 깊은 무의식적인 영역까지 하나님의 이야기가 작동해야 합니다. 외형적인 종교행위만 무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가치 체계가 하나님으로 다시 형성되어야 합니다.

 

  • 열왕기하 17장은 이스라엘이 호세아 왕을 마지막으로 앗수르에 멸망당한 것과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앗수르 이곳저곳으로 사로잡혀간 강제 이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7-23절에서는 이스라엘의 흥망성쇠의 이유가 무엇인지, 이스라엘이 망한 원인과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를 다루고, 24-33절에서는 사마리아에 정착한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34-41절에서는 사마리아 공동체에 대한 평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이주민에게 여호와를 가르침(24-28)

우상숭배의 본질은 ‘여호와 플러스 알파’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으면서 다른 것들을 삶의 근거로 삼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나 풍요의 신 바알과 아세라를 믿는 것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확보하려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온 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을 따르려는 태도가 아닙니다.

 

24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그들이 사마리아를 차지하고 그 여러 성읍에 거주하니라 25그들이 처음으로 거기 거주할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사자들을 그들 가운데에 보내시매 몇 사람을 죽인지라 26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앗수르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왕께서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옮겨 거주하게 하신 민족들이 그 땅 신의 법을 알지 못하므로 그들의 신이 사자들을 그들 가운데에 보내매 그들을 죽였사오니 이는 그들이 그 땅 신의 법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니라 27앗수르 왕이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그 곳에서 사로잡아 온 제사장 한 사람을 그 곳으로 데려가되 그가 그 곳에 가서 거주하며 그 땅 신의 법을 무리에게 가르치게 하라 하니 28이에 사마리아에서 사로잡혀 간 제사장 중 한 사람이 와서 벧엘에 살며 백성에게 어떻게 여호와 경외할지를 가르쳤더라(24-28)

 

앗수르에 멸망당한 뒤에 사마리아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앗수르 왕은 사마리아를 점령한 뒤, 이곳에 바벨론 지역 성읍인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 사람들과 아람 지역 성읍인 하맛과 스발와임 사람들을 사마리아의 여러 성읍으로 이주시킵니다.

여기서 사마리아는 이스라엘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 이방인들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땅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자신들이 섬기던 종교를 그대로 가지고 왔고, 이곳에서 자신들의 신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이방신들을 섬기는 것을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곳에 사자(獅子)를 보내어, 몇 사람을 죽이셨습니다. 갑자기 사자가 사마리아에 나타나 사람을 죽이는 사건은 흔한 일이 아니라 일종의 재앙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런 재앙은 신의 벌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재앙을 만난 사람들은 이 재앙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하였고, 결국 그 땅의 주인인 여호와로부터 왔다는 것과, 여호와의 법을 알지 못해서 내려진 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방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는데, 이미 25절에서 사자를 보낸 분이 여호와라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각 지역에는 그 지역을 다스리는 신들이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어떤 지역에 오면 그 지역의 신을 올바로 섬겨야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깨달음은 매우 역설적인데 그 땅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닥쳐 온 전쟁이나 기근의 재앙을 여호와께서 내리셨다고 깨닫지도 못했고, 여호와를 바로 섬김으로 그 재앙을 해결할 생각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이들에게 닥친 그리고 닥칠 재앙은 여호와의 벌이라고 거듭해서 말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방인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재앙이 이 땅의 신인 여호와께서 내린 벌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리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대상이 다를 뿐 신앙심은 이방인들이 더 깊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앗수르 왕은 포로들 가운데 제사장 한 명을 데리고 가서 그곳에 거주하게 하고, 그 땅의 하나님의 법규를 가르치도록 하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법규는 여호와께 예배드리는 방식과 여호와의 율법 전반에 관한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한 제사장이 선발되었고, 그는 벧엘에 거하면서 백성들에게 여호와 경외하는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단과 벧엘은 원래 이스라엘의 종교 중심지로 제사장들이 활동하던 지역이기에 벧엘로 돌아간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25-28절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A 여호와 경외를 하지 않음

    B 여호와의 법을 알지 못함

    B' 여호와의 법을 가르치라

A' 여호와 경외를 가르침

 

이 구조를 통해 여호와 경외와 여호와의 법을 아는 것이 이 단락의 핵심 주제라는 것과, 여호와 경외는 여호와의 법을 아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호세아와 이사야에서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과 연결됩니다.

 

종교 혼합주의가 성행한 사마리아(29-33)

‘여호와 신앙’은 전심으로 하나님께서 원하는 가치와 그 이야기를 붙잡고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배타적 사랑이 그 밑바탕에 있습니다. 신앙은 항상 선택이고 결단입니다. 진리의 존재를 부정한 채 모호함을 관용의 이름으로 추구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29그러나 각 민족이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이 지은 여러 산당들에 두되 각 민족이 자기들이 거주한 성읍에서 그렇게 하여 30바벨론 사람들은 숙곳브놋을 만들었고 굿 사람들은 네르갈을 만들었고 하맛 사람들은 아시마를 만들었고 31아와 사람들은 닙하스와 다르닥을 만들었고 스발와임 사람들은 그 자녀를 불살라 그들의 신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에게 드렸으며 32그들이 또 여호와를 경외하여 자기 중에서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택하여 그 산당들에서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니라 33이와 같이 그들이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29-33)

 

이 단락은 이방인이 여호와를 섬기는 것에 대한 한계를 잘 보여줍니다. 이 당시는 다신 사회였기에, 여호와를 섬기면서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은 여호와의 법을 배웠지만 여호와만을 섬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여호와를 섬기지만, 자신들이 섬기던 이방신을 포기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각 민족들마다 각기 자신들의 신상을 만들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만들어둔 산당 안에 신상들을 안치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만든 산당이란 이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기 위해 만들었던 산당들을 말합니다. 17:10에 따르면 호세아 왕 시대에도 이스라엘에 산당을 세우고 모든 산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 목상과 아세라상을 세웠습니다. 그 산당들이 앗수르의 침략에도 남아 있었고 현재 이주한 이방인들이 우상을 섬기는 장소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이주로 인해 이스라엘은 우상이 넘쳐나는 장소로 변했습니다. 30-31절은 이스라엘 땅에서 섬기던 이방신들의 명단으로 이 신들이 어떤 신들인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스라엘 땅에서 다양한 신들을 섬겼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32절은 여호와를 경외하여 산당의 제사장을 택하였다고 하지만, 그것보다는 여호와 경외와 산당의 제사를 겸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즉, 여호와를 경외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여호와만을 배타적으로 섬기지는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33절에서는 여호와도 경외하였고 섬겼다고 표현함으로 사마리아의 종교가 혼합주의 종교였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사마리아의 종교에 대한 비판(34-41)

기억은 하나님께서 누구시며 무엇을 하셨는지를 되새기며 즉각적인 순종을 위한 고도의 영성입니다. 기억과 순종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해 경청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오늘날도 서로 자기 말을 하려고 할 뿐 들으려고 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들음에서 신실한 순종이 나옵니다.

 

34그들이 오늘까지 이전 풍속대로 행하여 여호와를 경외하지 아니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라 이름을 주신 야곱의 자손에게 명령하신 율례와 법도와 율법과 계명을 준행하지 아니하는도다 35옛적에 여호와께서 야곱의 자손에게 언약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다른 신을 경외하지 말며 그를 경배하지 말며 그를 섬기지 말며 그에게 제사하지 말고 36오직 큰 능력과 편 팔로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만 경외하여 그를 예배하며 그에게 제사를 드릴 것이며 37또 여호와가 너희를 위하여 기록한 율례와 법도와 율법과 계명을 지켜 영원히 행하고 다른 신들을 경외하지 말며 38또 내가 너희와 세운 언약을 잊지 말며 다른 신들을 경외하지 말고 39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만을 경외하라 그가 너희를 모든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리라 하셨으나 40그러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오히려 이전 풍속대로 행하였느니라 41이 여러 민족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또 그 아로새긴 우상을 섬기니 그들의 자자 손손이 그들의 조상들이 행하던 대로 그들도 오늘까지 행하니라(34-41)

 

34-41절에서 열왕기 저자는 이런 상황에 대해 평가하는데, 이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아니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와 법도와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열왕기 저자는 지금까지도 이런 혼합주의가 계속되는 것을 질책하며, 여호와께서 야곱의 자손들과 언약을 세우시면서 여호와만을 경외하라고 명령하셨다고 합니다.

 

35절과 36절에서는 이방신을 섬기지 말 것과 여호와만을 섬기라는 것을 대조하기 위해, 다른 신을 경외하지 말고 그를 경배하지 말며, 그를 섬기지 말고, 그에게 제사하지 말라고 사중적으로 금지한 후에 여호와만 경외하고 그를 경배하고, 그에게 제사 드리라고 말합니다. 36절에서 ‘예배하다’라고 번역한 단어는 35절에서 ‘경배하다’로 번역한 단어와 동일합니다. 그리고 37-38절에서는 ‘다른 신을 경외하지 말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39절에서 다시 여호와만을 경외하라고 말합니다. 35-39절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언약을 맺으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것과 여호와만을 경외할 것을 명령하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40-41절은 지금 사마리아에 있는 사람들의 행동으로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여호와만 섬기지 않고 당시의 풍습대로 여호와도 섬기고 자신들의 조상들의 신도 섬겼습니다. 결국 신명기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 열왕기 저자는 사마리아에 있는 사람들은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결론을 짓습니다.

 

이 결론은 에스라 느헤미야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때 사마리아 사람을 성전 건설에서 배제하는 이유가 되며, 신약 시대에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여호와만을 섬기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마태복음 6:24에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 재물을 같이 섬길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비단 눈에 보이는 우상만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이 우상이며,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힘을 잃어가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만을 섬기지 않기 때문이라고 열왕기 저자는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배움은 회심을 낳고 회심은 배움을 통해 일어납니다. 배움은 사실에 대한 얄팍한 읊조림이 아니라 죽음을 거부하려는 생명을 향한 투신과 몰입입니다. 배움이 멈춘 곳에는 두 마음으로 충만한 영적 간음이 계속됩니다. 회심은 근본적인 사상의 전환이고 욕망의 재조정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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