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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16-01)

 


잘못된 배교 길로 가는 아하스

열왕기하 16장 1-20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보기도를 할 때,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식의 신앙은 훌륭한 기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도는 교회가 능력을 잃게 만드는 독이 되고 있습니다. 성공과 번영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한 것입니다. 돈과 권력이 호령하는 시대에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 신앙을 유지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지배하면서 이스라엘 왕 베가는 죽임을 당하고 그를 대신해서 친앗수르 인물인 호세아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했기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았고 앗수르의 지배하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요담 이후 왕이 된 아하스부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면서 유다도 어려움에 처하기 시작합니다.

 

유다 왕 아하스의 등극(1-4)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두려움에 빠지면 자신을 지켜줄 다른 것을 찾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강국의 힘을 더 의지하게 됩니다. 친앗수르 정책으로 잠시 반앗수르 동맹국의 위협에서 벗어났지만, 결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1르말랴의 아들 베가 제십칠년에 유다의 왕 요담의 아들 아하스가 왕이 되니 2아하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간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하고 3이스라엘의 여러 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4또 산당들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1-4)

 

유다 왕 요담의 뒤를 이어 요담의 아들 아하스가 왕이 됩니다. 아하스가 왕이 될 때의 나이는 20세 이미 예루살렘에서 16년을 다스립니다. 하지만 이전의 왕들과 그의 조상 다윗과 달리 그는 이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않았습니다.

 

3-4절은 구체적으로 이하스가 행한 죄로 첫째는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들의 길이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이로보암처럼 이호와 예배와 이방 제의를 혼합하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단과 벧엘에 황금 송아지라는 우상을 만들어놓고 여호와 제의라고 하며, 에루살렘에서의 제사를 대신하려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아합처럼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아하스는 이 두 가지 죄를 모두 지었습니다.

3절에서 아하스는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이라고 서술하는데 신명기 18:10에 따르면 이런 행위는 하나님께서 본받지 말라는 가나안 민족의 가증한 행위 중 하나입니다. 사람을 불 가운데 지나가게 하는 것은 불로 태워 번제로 드린다는 의미입니다(에스겔 20:31). 이것뿐만 아니라 그는 산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와 같은 이 분향하면서 이방신 섬기는 데 매우 열정적인 있습니다. 이전의 왕들은 백성들이 산당에서 분향하는 것을 막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매우 적극적으로 이방신을 섬기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가 이렇게 여호와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이방신을 열심히 섬긴 이유는, 당시 앗수르가 매우 강성해져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침입하고 압박했기 때문입니다. 아람과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맺고 유다도 이에 참여하라고 압박합니다. 주변 나라들의 압박으로 유다 정세가 불안해지자 아하스는 여호와튼 이방 종교든 종교적 힘으로 이 위기를 넘기려고 제사를 드리는 데 열심을 냈던 것입니다.

유다의 위기는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은데서 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하스와 당대의 지도자들은 그것을 모른 채 더욱 헛된 열정으로 죄를 지은 것입니다. 미가 6:7-8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앗수르의 도움을 청한 아하스(5-9)

모든 삶을 해석하기 어려운 것은 모든 일이 깔끔한 인과응보의 공식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의가 제때 심판을 당하지 않고 도리어 더 잘되는 일이 세상에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들키지 않은 죄가 아니라, 아직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되지 않고 연기된 심판임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5이 때에 아람의 왕 르신과 이스라엘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싸우려 하여 아하스를 에워쌌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6당시에 아람의 왕 르신이 엘랏을 회복하여 아람에 돌리고 유다 사람을 엘랏에서 쫓아내었고 아람 사람이 엘랏에 이르러 거기에 거주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더라 7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 이르되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하건대 올라와 그 손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8아하스가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냈더니 9앗수르 왕이 그 청을 듣고 곧 올라와서 다메섹을 쳐서 점령하여 그 백성을 사로잡아 기르로 옮기고 또 르신을 죽였더라(5-9)

 

앗수르의 세력을 막기 위해 아람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동맹 하였고, 이에 함께 하지 않은 아하스를 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옵니다. 하지만 연합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아람 왕 르신은 엘랏을 회복하고, 그곳에 있던 유다 사람을 쫓아내고, 아람 사람을 그곳에 거주하게 하였습니다.

역대하 28:5에 따르면, 아람 왕은 유다 사람을 사로잡아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이렇게 유다가 아람에게 점령당할 위기에 처하자, 아하스는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그는 자신을 왕의 신하요 왕의 아들이라고 하며 앗수르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할 것을 약속한 뒤 아람과 이스라엘의 손에서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아하스는 앗수르에게 복종을 맹세하며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요청하는데,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이지만, 신앙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섬기며, 그에게 복종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청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하스는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이 아닌 눈에 보이는 인간 왕에게 의지하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 대가로 여호와의 전과 왕궁에 있던 금은을 모두 가져다 뇌물로 보냅니다. 여기서 ‘예물’이란 단어 대신 ‘뇌물’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아하스의 행동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뇌물’은 신명기 10:17과 16:19 등에서 금지된 범죄로, 뇌물로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옳지 않은 것이 라고 분명히 합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의뢰하는 정정당당한 방법 대신 이방 왕에게 뇌물을 주고 그의 도움을 구하는 불법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런 시도는 일시적으로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앗수르 왕이 그 요청을 듣고 올라와서 아람이 점령한 다메섹을 쳐서 점령하였고, 다메섹에 있던 사람들을 기르로 사로잡아 갑니다. 이것은 아람 왕 르신이 엘랏을 점령하고 유다 사람들을 사로잡아 간 것과 반대로, 이번엔 아람 사람들이 앗수르로 끌려간 것입니다. 아람 왕 르신은 죽임을 당합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아람은 더는 유다의 위협이 되지 못했습니다.

 

성전에 새로운 제단을 만든 아하스(10-16)

제단은 하나님의 임재하는 곳입니다. 이 제단을 성전에서 멀리 떨어지게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포기한 배역입니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무시하고 버리는 행위였습니다.

 

10아하스 왕이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제단을 보고 아하스 왕이 그 제단의 모든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냈더니 11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보낸 대로 모두 행하여 제사장 우리야가 제단을 만든지라 12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와 제단을 보고 제단 앞에 나아가 그 위에 제사를 드리되 13자기의 번제물과 소제물을 불사르고 또 전제물을 붓고 수은제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14또 여호와의 앞 곧 성전 앞에 있던 놋 제단을 새 제단과 여호와의 성전 사이에서 옮겨다가 그 제단 북쪽에 그것을 두니라 15아하스 왕이 제사장 우리야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침 번제물과 저녁 소제물과 왕의 번제물과 그 소제물과 모든 국민의 번제물과 그 소제물과 전제물을 다 이 큰 제단 위에 불사르고 또 번제물의 피와 다른 제물의 피를 다 그 위에 뿌리라 오직 놋 제단은 내가 주께 여쭐 일에만 쓰게 하라 하매 16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의 모든 명령대로 행하였더라(10-16)

 

앗수르가 다메섹을 점령하자 아하스는 다메섹으로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갑니다. 전쟁 승리에 대한 축하와 아람을 물리쳐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아하스가 직접 앗수르 왕을 알현하기 위해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갔다가 아하스는 제단을 보고 그것의 구조와 양식을 그려서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냅니다. 역대하 28:23에서는 이 단을 아람 신들을 위한 제단이라고 하면서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열왕기에서는 다메섹의 제단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만 하고 있을 뿐 제단이 이 신을 위한 것이라는 언급은 없습니다. 오히려 왕은 다메섹 양식으로 만들어진 제단을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 이전의 제단이 있던 곳에 두고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사 드리는 데 사용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15절에서 아하스가 새로운 제단에서 드리는 각종 제사의 종류를 언급한 것은 새로운 제단을 공식적인 제단으로 삼으라는 의미입니다. 새 제단에 대해 ‘커다란'이란 수식어를 붙이는데, 이것은 제단이 이전 제단에 비해 크고 화려했음을 나타냅니다. 12-13절에 따르면 왕이 제단에 올라가서 제사를 지낼 만큼 매우 규모가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메섹에 있는 제단이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작고 단순한 놋제단에 비해 크고 화려했기 때문에, 이 제단이 아하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같습니다. 이전의 놋제단은 자신이 직접 하나님의 신탁을 받을 때 사용하겠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전에 사용한 놋제단의 권위를 더 인정했다는 의미입니다. 이 일은 아하스 혼자 한 것이 아니라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우리야와 함께 진행하였습니다. 이런 아하스의 행동에 대해 열왕기 저자는 이러저러한 평가를 내리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아하스의 행동이 앗수르의 제사 양식을 가져온 우상숭배나 혼합주의 종교라고 비난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아하스가 예루살렘 구조를 옮김(17-20)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된다는 생각이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교회도 점점 이러한 세속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효율성과 생산성을 하나님의 뜻보다 더 중시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기준에 따라 성공을 거둘 때 세속적인 요소들이 교회로 들어옵니다. 세상과 타협하거나 동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17아하스 왕이 물두멍 받침의 옆판을 떼내고 물두멍을 그 자리에서 옮기고 또 놋바다를 놋소 위에서 내려다가 돌판 위에 그것을 두며 18또 안식일에 쓰기 위하여 성전에 건축한 낭실과 왕이 밖에서 들어가는 낭실을 앗수르 왕을 두려워하여 여호와의 성전에 옮겨 세웠더라 19아하스가 행한 그 남은 사적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0아하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다윗 성에 그 열조와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17-20)

 

아하스는 성전 뜰에 있던 물두멍의 구조를 바꾸고 놋바다를 놋으로 만든 소 형상의 받침대에서 내려 돌판 위에 두었습니다. 이 것은 예루살렘 성전 기명들을 재배열 하면서 물두멍과 바다의 놋 지지대를 없앴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이동을 순조롭게 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부족한 놋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재배치에 대해 열왕기 저자는 어떤 평가도 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는 앗수르 왕에게 복종하는 의미로 안식일에 사용되었던 별궁과 밖에서 들어가는 별궁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 세웁니다. 이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지만, 현재 아하스는 비록 아람의 위협에서는 벗어났지만, 앗수르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아하스는 한편으로는 여호와를 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앗수르 왕을 섬기는 이중적인 면을 드러냅니다. 19-20절은 죽음의 공식으로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위를 잇습니다.


교회는 항상 ‘누구를 위해서?’와 ‘무엇을 위해서?’라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성찰과 분별없는 신앙은 외적인 결과만으로 감사와 영광을 돌리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현해가는 과정에서 세상과 다르지 않다면, 좋게 보이는 결과가 도리어 교회를 망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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