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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14-02)


새로운 지도자 아사랴의 등극

열왕기하 14장 17-29절


죄가 더할수록 은혜가 깊어진다는 말씀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은혜를 받으려고 죄를 더 지어야 한다는 말합니까? 그럴 리 제대로 없습니다. 둘은 떼려야 뗄 수 없지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은혜가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은혜 아니면 안 되는 인간의 철저한 무능과 부패 때문입니다.

 

  • 엘리사는 죽기 직전에 요아스에게 아람을 이길 기회를 주지만, 요아스는 그의 믿음 없음으로 말미암아 아람을 완전히 진멸할 수 있는 기회를 잃습니다. 하지만 엘리사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은 아람을 세 번 이김으로써 빼앗겼던 성읍들을 되찾습니다. 이때 유다는 요아스의 아들 아마사가 새로운 왕으로 등극합니다. 이 두 왕국 간에 이전의 동맹관계는 사라지고 전쟁을 하게 됩니다.

 

아마샤의 죽음과 아사랴의 등극(17-22)

성경에서 말하는 착한 왕의 기준은 세상을 향해 얼마나 많은 기여도가 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어떤 태도로 살았느냐 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상관없는 업적은 기억될 가치가 없습니다. 계명 준수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17이스라엘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죽은 후에도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십오 년간을 생존하였더라 18아마샤의 남은 행적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19예루살렘에서 무리가 그를 반역한 고로 그가 라기스로 도망하였더니 반역한 무리가 사람을 라기스로 따라 보내 그를 거기서 죽이게 하고 20그 시체를 말에 실어다가 예루살렘에서 그의 조상들과 함께 다윗 성에 장사하니라 21유다 온 백성이 아사랴를 그의 아버지 아마샤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으니 그 때에 그의 나이가 십육 세라 22아마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잔 후에 아사랴가 엘랏을 건축하여 유다에 복귀시켰더라(17-22)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죽음 이후에 아마샤는 15년간 더 살았습니다. 요아스가 예루살렘을 침략하고 약탈한 뒤 아마샤를 예루살렘에서 풀어주고 되돌아왔기 때문에, 아마샤는 그 후로도 계속해서 유다의 왕으로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쟁에서 지고 15년 후에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전쟁에서 진 것을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삼기는 어렵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전쟁에서 진 이후 아마샤는 이전 권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서서히 내부 갈등이 생기면서 반역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화자가 반란을 일으킨 주동자나 세력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무리’라고 한 것은,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이 일부 반역 세력이 아니라 아마샤의 통치를 반대하던 상당수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역을 당한 아마샤는 예루살렘에 있다가 라기스로 도망갑니다. 라기스는 아모리 족속이 살던 다섯 성읍 중 하나로 예루살렘 남서쪽에 위치한 요새화된 큰 성읍이었기에 반란 세력을 막고 안전하게 몸을 숨기기에 적합한 곳입니다. 하지만 이 도주는 성공하지 못하고, 아마샤 왕은 이곳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요새화된 성읍을 뚫고 들어가 아마샤를 죽였다는 것은 아마샤를 잡기 위해 상당히 많은 군사를 보냈음을 보여줍니다. 자객을 보내는 방법이 아니 라면 요새화된 성읍을 공격하기 위해 많은 군사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아마샤의 죽음은 백성들 상당수가 왕에 대한 반역을 지지한 결과였던 것입니다. 아버지 요아스처럼 반란 세력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지만, 그의 시신은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 성에 장사됩니다. 반란으로 죽음을 당했어도 장례만큼은 왕으로서의 합당한 대우를 받은 것입니다. 그가 살아서는 백성들에게서 왕 대접을 받지 못하다가 죽어서는 왕 대접을 받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아마샤는 피살당했지만 유다 백성들은 아마샤의 아들 아사랴를 왕으로 세웁니다. 그의 나이가 당시 16세였습니다. 축출된 왕의 아들이 온 유다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왕이 되는데, 이는 반란 세력이 아사랴를 지지했다는 뜻입니다. 아사랴의 모친 가문이 반란 세력의 주축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문장입니다.

아사랴는 왕위에 오른 후 아마샤처럼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을 처형했다는 보고가 없는 것을 볼 때 이렇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아사랴의 최대 업적을 엘랏을 건축하여 유다로 복귀시킨 것이 라고 합니다(22). 아사랴는 웃시야라고도 불리는데, 그는 역대하 26:6-15에 따르면 엄청나게 영토를 확장하는 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엘랏의 회복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엘랏은 솔로몬이 아카바 만 꼭대기에 건설한 항구이며, 인근에 있는 에시온게벨 항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유다가 아라비아, 아프리카, 인도와 교역을 시작하게 한 항구입니다. 그러므로 아사랴가 이곳을 회복한 것은 솔로몬 시대에 시작한 홍해 무역을 되살리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엘랏의 회복은 솔로몬 시대의 영화를 회복했다는 상징 적인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가장 큰 업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로보암의 등극과 업적(23-27)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의 신비는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랍습니다. 불순종한 사람들에게도 물질적인 풍요를 주시기도 하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주시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복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23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제십오년에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사십일 년간 다스렸으며 24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25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26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27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23-27)

 

유다 왕 아마샤가 등극한 지 15년 후에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수도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41년을 다스립니다. 이때의 여로보암을 우리는 이스라엘 1대 왕 여로보암과 구별하기 위해 통상적으로 여로보암 2세라고 부릅니다.

24절은 여로보암 왕에 대한 열왕기 저자의 평가입니다.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평가합니다. 아모스와 호세아 선지자가 이방신을 섬기는 것과 단과 벧엘에서 제사 지내는 것과 정의를 행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하라고 외치던 시기가 여로보암 2세 때입니다.

열왕기에서는 여로보암 2세의 죄에 대해 여호와 보시기에 악했다는 말로 요약하고 있지만, 이 시기는 물질적 풍요와 함께 사회, 종교적 타락이 극에 달했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이때에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포기하신 것은 아니었기에, 선지자들은 주로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25절은 여로보암이 영토를 회복하였는데, 여호와의 종 아밋대의 아들 요나 선지자가 예언한 것처럼 이루어졌다고 보고합니다. 아밋대의 아들 요나는 요나서의 주인공입니다. 하맛어귀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이스라엘 영토가 회복될 것이라는 요나의 예언은 본문에 나오지 않지만, 열왕기에서는 이런 예언이 있었고 그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다고 알려줍니다. 여기서 하맛 어귀는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이고, 아라바 바다는 남쪽 경계입니다. 북쪽 경계부터 남쪽 경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는 것은 솔로몬 시대의 땅을 모두 회복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여로보암 2세 시대 이스라엘의 국력이 솔로몬 시대와 비교할 수 있을 만큼 강했다는 것입니다. 26-27절은 왜 이렇게 여로보암시대에 이스라엘이 강성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유가 설명됩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엄청난 고난의 시간들을 보냈는데, 그 시 절을 보내면서 스스로 매고 풀 수도 없으며, 그들을 도와줄 사람도 없는 절대적인 곤경에 처해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매는 자도 없고 푸는 자도 없다는 표현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철저히 무능력한 상태를 표현하는 관용구입니다.

그런데 더 나쁜 것은 이렇게 무능하고 곤경에 빠진 이스라엘을 도와 줄 동맹도, 이방신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비웃음인데, 그동안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을 섬기고 다른 나라들과 동맹을 맺으며 부국강병을 꾀하였지만, 그 결과는 철저한 무능과 고난이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 대해 관심 갖고 보고 계신 분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이들의 이름을 천하에서 제거하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기에,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의 손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고 열왕기 저자는 고백합니다. 아직은 하나님께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남아 있었기에, 고통 속에 있는 이스라엘을 버릴 수가 없었고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로보암 2세 시대의 풍요는 철저히 여호와의 긍휼과 자비의 산물이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보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마지막 신호였고, 이스라엘의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풍요가 자신들의 힘과 이방신 덕분이라고 생각하며, 더욱 하나님을 멀리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였다. 결국 여로보암 2세 때 하나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셨고 여로보암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은 국내외 정세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의 죽음(28-29)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는 한 동전의 양면입니다. 정의 구현하는 사랑은 정의 그 자체보다 용량이 더 큽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불의를 인정하지 않지만 불의 속에서도 변함없이 주어집니다. 사랑은 율법적인 정의를 넘어섭니다. 기계적인 정의가 아니라 궁극에는 사랑과 긍휼이 이기기 때문입니다.

 

28여로보암의 남은 사적과 모든 행한 일과 싸운 업적과 다메섹을 회복한 일과 이전에 유다에 속하였던 하맛을 이스라엘에 돌린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9여로보암이 그의 조상 이스라엘 왕들과 함께 자고 그의 아들 스가랴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28-29)

 

여로보암 2세는 이스라엘 왕 중에서 솔로몬에 버금가는 영토를 얻고, 풍요를 누리고, 주변 나라들과 활발하게 무역하여 널리 이름을 날렸습니다. 하지만 열왕기 기자에게 그런 업적은 전혀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기에, 전쟁한 것과 다메섹과 하맛을 회복한 일 정도만 간단하게 언급한 채 여로보암 2세 이야기를 마무리 합니다. 열왕기 기자에게 중요한 것은 이 같은 업적이 아니라 여호와 보시기에 선했느냐 약했느냐 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를 평가하시는 기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업적과 스펙으로 평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과 삶으로 평가하십니다. 여로보암이 죽고 그의 아들 스가랴가 왕이 되었지만, 이후로 이스라엘은 엄청난 내란에 휩싸이게 됩니다.


권선징악과 인과응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주권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작동합니다. 가장 악한 시대가 누린 최대의 번영은 하나님 은혜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또한 심판의 일종이기도 합니다. 죄악에 둔감해지게 하는 심판이요, 죄악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푼 은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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