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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20-02)


다시 교만해진 히스기야

열왕기하 20장 12-21절


 

소셜 미디어(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하는 이들에게 자기 과시의 욕망은 피할 수 없는 유혹입니다. 지나친 자기 과시는 정체성 왜곡의 부작용까지 낳습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로 사는 것입니다. 끝없는 가면의 전시장입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을 이길 험은 어디서 오는가?

 

  •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병을 고쳐주시고 15년 더 생명을 연장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다윗의 가문을 지키겠다고 약속하신 그 언약을 따라 히스기야와 그 성읍 예루살렘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병이 나은 것을 축하하러 온 사절단과의 만남에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바벨론 사신에게 모든 것을 보여줌(12-15)

하나님의 능력보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는 방심은 금물입니다. 받은 은혜를 소개하기보다 자신의 소유를 소개하는 모습은 교만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일어났던 히스기야가 다시 넘어집니다. 하나님의 능력보다 자신의 국력과 군사력을 자랑합니다.

 

12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의 왕 브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 들었다 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그에게 보낸지라 13히스기야가 사자들의 말을 듣고 자기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의 군기고와 창고의 모든 것을 다 사자들에게 보였는데 왕궁과 그의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히스기야가 그에게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더라 14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부터 왕에게 왔나이까 히스기야가 이르되 먼 지방 바벨론에서 왔나이다 하니 15이사야가 이르되 그들이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내 궁에 있는 것을 그들이 다 보았나니 나의 창고에서 하나도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나이다 하더라(12-15)

 

이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의 왕 브로닥발라단입니다(12). 당시 바벨론은 앗수르의 속국으로 브로닥발라단은 앗수르 왕의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남 유다의 히스기야와 동맹을 맺고 같이 앗수르 왕에게 대항하기를 원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앗수르 제국을 무너뜨리고 제국의 왕이 됩니다. 이러한 모습을 볼 때 그는 용의주도한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히스기야 왕은 매우 순진한 왕이었습니다. 바벨론 왕 브로닥발라단은 히스기야가 병이 들었다는 소리를 듣자 편지와 예물을 보낸 것입니다. 이처럼 왕이 병들었다는 사실은 엄청난 기밀인데, 아주 멀리 있는 나라인 바벨론에서도 알고 있다면 그는 뛰어난 정보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사신을 보내는 것은 단순한 위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다 의도가 있는 호의입니다.

용의주도한 바벨론 왕과는 대조적으로 히스기야는 경솔했습니다. 선물과 편지를 받은 히스기야는 브로닥발라단이 보낸 사자들에게 매우 호의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앗수르의 강력한 압박에 같이 연합할 동지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보물을 쌓아둔 창고의 금은과 향품과 무기 그리고 창고에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열왕기 저자는 히스기야가 그의 왕궁과 그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보여주지 않은 것이 없다고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히스기야의 경솔한 행동을 비난하는 말입니다. 히스기야가 자신의 모든 물품과 무기를 보여준 것은 바벨론 사자에게 유다의 전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완전히 노출한 행동입니다. 히스기야 입장에서는 바벨론과 동맹을 맺는 입장에서 자신이 얼마나 많은 부와 무기를 가지고 있는지 자랑하여 좀 더 유리한 위치를 점유하려는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부와 군사력이 남 유다를 지켜주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가장 의지하는 것은 이것들이 아니라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보여주지 못한 것입니다. 당시는 아직 앗수르의 산헤립이 쳐들어와 조공으로 왕실과 성전의 모든 은금을 가져가기 전입니다. 그래서 왕궁의 창고에는 물건들이 많았던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히스기야의 행동에 선지자 이사야는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찾아와 사자들에게 무슨 말을 하였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습니다. ‘어디서 왔는지’묻는 것은 그들이 누군지를 묻는 말입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그들이 멀리서 왔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바벨론에서 왔다고 대답합니다. 먼 지방 사람들은 진멸의 대상은 아니지만 경계의 대상입니다. 그들은 종종 심판의 도구로서 쓰임받기도 하기 때문입니다(신명기 29:21), 히스기야가 멀리서 왔다는 말을 강조하는 것은 진멸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동맹을 맺을 수도 있지 않느냐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그들이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히스기야 왕이 무엇을 의지하고 무엇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내 궁에 있는 것을 그들이 다 보았나니 나의 창고에서 하나도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나이다’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히스기야가 바벨론과 동맹을 맺기 위해서 바벨론 사자들에게 매우 적극적으로 행동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입장에서는 앗수르의 심각한 군사적 위협 속에서 바벨론이 동맹을 맺자고 손을 뻗어온 것이 매우 반갑고 든든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론 왕이 동맹국으로서 유다를 유익한 나라로 여겨주길 바라면서, 있는 것을 다 보여주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바벨론과 손잡으면 자신의 나라 유다는 더 안전하게 이끌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살다보면 자신들이 사랑 받을 만하다고 증명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될 때가 분명이 있습니다. 자식들에게 교육을 많이 시키거나 우리들이 일하는 것들도 모두 인정받으려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게 선택을 받으면 이것을 성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그것이 모든 것이 아니라 생각해야 합니다. 다 보여주었지만, 자기 안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히스기야의 실수를 우리도 되풀이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고, 그리스도께서 전능하신 주라는 사실을 동시에 인상을 주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는 자신과 자신의 나라의 위엄만 증명하려고 했을 뿐, 여호와 하나님의 증인이 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여호와의 심판 선언(16-18)

자기 과시는 자기 파괴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자신을 들러내고자 하는 욕망은 자신을 포장하려는 유혹으로 이어지고 결국 ‘자신’은 남김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과시는 교만으로, 교만은 심판을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 시련을 이겨냈지만 자만하다가 시험에 넘어졌습니다. 교만보다 더 큰 인생의 위기는 없습니다.

 

16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17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18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16-18)

 

이사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라는 명령으로 매우 심각하고 준엄하게 여호와의 심판 선언을 전달합니다. 심판의 날이 올 것이며, 그날에는 왕궁의 모든 것과 조상들이 창고에 쌓아두었던 모든 것이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이고, 물건이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 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로 말을 맺는데,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16)와 짝을 이루어 자신이 한 말이 여호와의 말씀이란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한 말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란 의미입니다.

계속해서 히스기야의 직계 후손, 즉 아들이나 손자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뿐만 아니라, 그들 중에는 왕궁의 환관이 되는 자도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환관’은 거세되어 궁에서 일하는 사람들로 이것은 왕이나 왕자들이 바벨론 궁의 종이 되는 굴욕을 겪을 것이라는 의미 이상입니다. 신명기 23:1에 따르면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의미로 왕의 직계 후손들이 거세가 되는 것은 다윗 가문의 후손이 끊긴다는 생물학적 문제와 함께 다윗 가문의 후손이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된다는 신학적 문제를 같이 야기합니다. 이것은 물건을 모두 빼앗기는 것보다 더욱 수치스럽고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예언은 이스라엘이 결국 바벨론에게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히스기야가 19장에서 보여준 것처럼 다른 주변의 강대국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적을 물리쳐주셨습니다. 그런데 20장에서 히스기야는 여호와가 아닌 바벨론을 의지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히스기야에게 그가 의지하려는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치욕을 당할 것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아마 히스기야는 이런 경험을 토대로 앗수르가 쳐들어왔을 때는 오로지 여호와만을 의지하고 기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유다는 앗수르의 공격은 막을 수 있었지만, 바벨론의 침략은 막을 수 없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고 의지하는 모든 것이 바로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현재 한국교회는 하나님보다 권력과 돈과 숫자와 규모에 의지하여 교세를 확장하려는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교회는 약해지고 기독교의 영향력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려 하기보다는 외부적인 원인에 그 책임을 돌리려고만 합니다. 그러면서 정치와 사회 등 곳곳에서 기독교의 힘을 이용해 소위 기독교의 가치라고 생각되는 것을 강요하고 밀어붙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은 사람의 생명을 주관하시고 천지를 주관하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 다른 것을 의지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망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는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그 어떤 힘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의 반응(19)

회개는 죄에 대한 자백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며 하나님의 처분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기를 과신하고 세상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을 자책하며 하나님께 온전히 신실하지 못했음을 자인합니다. 자신의 허물을 변명하거나 징벌이 가혹하다고 항변하지 않았습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심판 선고를 겸허히 수용합니다.

 

19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전한 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 하고 또 이르되 만일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 하니라(19)

 

이런 하나님의 유다에 대한 심판 선언에 대해 히스기야의 반응은 매우 미지근합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하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떤 이의도 제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히스기야는 자신의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평안과 진실함을 주시면 그걸로 만족하겠다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 ‘평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호하심을 말하는 것이며, 진실은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히스기야와 언약관계 속에 계시며 성실함을 보여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자신이 사는 날 동안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지켜주시는 것으로 만족하겠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히스기야의 한계를 볼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믿음의 인물로 여호와와 동행하며 신실하게 살았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지만, 이것은 자신에게 한정된 삶이었습니다. 그는 자식들과 가족들에게 여호와 신앙에 대한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후손들도 대대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도록 관심을 갖고 인도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그의 관심이 그 자신의 인생에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모 시대는 부흥의 시대 마지막을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직도 조국교회가 얼마나 힘든지 피부에 와 닫도록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 젊은 세대가 사라진 현실에 대해 걱정은 하지만, 심각한 위기로 여기진 않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빚을 내서 큰 건물을 짓겠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위기의 시기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교회가 살아나지 않습니다. 교회들이 일군을 키워야 합니다. 자녀들이 세상이 좋아할만한 존재로 자라길 기대하기보다도 하나님의 증인이 되도록 키워야 합니다.

 

히스기야의 죽음(20-21)

사람은 떠나도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 남아 있습니다. 어제 이룬 성취나 오늘 내 손에 쥔 자원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오만하고 무례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늘 경계합시다. 은혜로 살아야 사람답게 살아갑니다. 히스기야의 마지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0히스기야의 남은 사적과 그의 모든 업적과 저수지와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인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1히스기야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고 그의 아들 므낫세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20-21)

 

이 단락은 히스기야의 죽음 공식으로 특별히 저수지와 연못을 만든 것을 그의 업적으로 말하는데, 저수지와 연못은 앗수르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역대하 32:2-8에서는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히스기야의 여러 가지 준비가 등장하는데, 물 공급이 중요한 것은 고대 공격이 주로 오랜 기간의 철통 포위를 통해 고사시키는 전략을 썼기 때문입니다. 15년 수명을 연장 받았지만, 결국 히스기야도 죽고 그의 아들 므낫세가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남김없이 보여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기 자랑과 자기 과시의 유혹은 내 삶에 남은 것이 오직 은혜뿐임을 망각할 때 찾아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도에게 성도로서 살아가야할 기본 자세를 갈라디아서에서 소개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라디아서 6:14).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고 신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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