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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20-01)

 


히스기야 기도를 응답하신 하나님

열왕기하 20장 1-11절


아무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왜 기도하겠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는 분이 시다 동시에 뜻을 돌이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이 두 가지 성품은 기도하는 우리 안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까?

 

  • 20장에서 히스기야가 병 고침을 받은 사건은 18-19장에서 일어난 산헤립의 침공 이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시간 순서로 보면 회상에 해당합니다. 이전의 이야기가 후에 언급된 것은 이전부터 계속된 앗수르의 공격에 대해 히스기야가 어떻게 신앙으로 잘 넘겼는가에 집중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20장은 히스기야가 어떻게 여호와께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었는지를 알려 줍니다.

 

죽을 병에 걸린 히스기야(1)

 

가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잘못된 태도를 고치시기 위해 육신적인 고통을 보내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고통을 보내실 때는, 항상 그들이 무슨 태도를 고치시기 원하시는지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치유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곧 알게 될 것입니다.

 

1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1)

 

20장의 이야기는 ‘그때에’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그때’는 앗수르의 산헤립이 쳐들오기 건어지만 정확히 언제인지 알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에서 ‘날들’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한 것은 일부러 시간의 모호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이야기를 보면 대략 히스기야가 죽기 15년 전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히스기야는 나이가 39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병에 걸렸는데 죽을 정도로 심각한 병이었습니다.

본문은 히스기야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병명에 대한 많은 추측들이 있지만, 무화과 반죽을 상처에 놓으니 나았다는 계의 보고를 통해 추측해보건대 일종의 피부 질환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선지자 어사야가 히스기야를 찾아옵니다. 여기서 19장에서 한 이사야에 대한 소개를 반복하는 것은 이사야의 선지자적 역할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9장에서는 히스기야가 이사야를 불렸지만 여기서는 이사야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하기 위해 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에게 죽음을 선언하며 집을 정리하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집을 정리하라’는 말은 다음 왕을 지명하여 알리라는 의미로 이사야는 히스기아에게 반드시 죽을 것이니 후계자를 지명하여 왕권에 혼란이 없게 하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한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기도(2-3)

진실한 기도는 날것 그대로를 하나님께 드러내며 자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 여부에 상관없이 정해진 대로 행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변함없는 하나님 사랑이 변화의 근거입니다. 삶을 정리하라는 진단이 떨어졌으나 히스기야는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다른 모든 가능성으로부터 얼굴을 돌린 채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봅니다.

 

2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3.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2-3)

 

하나님께 죽음 선언을 들은 히스기야는 얼굴을 벽으로 돌리고 여호와께 기도합니다. 얼굴을 벽으로 돌렸다는 것은 임박한 죽음 선언에 매우 상심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낙심하고 체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비록 하나님의 말씀에 거짓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실현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혹시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리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갖고 기도합니다.

 

3절은 히스기야의 기도 내용으로 제발 지금 여호와께서 기억해달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구원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이 그동안 하나님 앞에서 진실함과 온전한 마음으로 행했던 것과 하나님의 눈에 선하게 행동한 것은 ‘진실함’이란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했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온전한 마음’은 다른 신은 섬기지 않고 오직 여호와만을 온전하게 섬겼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선하게 행했다는 것은 열왕기하 18:3에서 열왕기 저자가 평가한 것과 거의 같습니다. 이렇게 히스기야가 자신이 하나님만을 성실하게 섬겼다는 것을 기억해 달라는 것은 공로로 거래를 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본인이 하나님 앞에서 선하게 살려고 애쓴 것을 기억하시고 불쌍히 여기신다면 좀 더 살 수 있는 시간을 주실 수는 없겠는지 하고 매우 겸손하게 요청하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히스기야가 큰 소리로 울면서도 살려달라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살고 죽는 문제를 여호와의 손에 맡겼기 때문입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과정이며, 나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가며 순종하는 과정이지 나의 뜻을 하나님께 강요하여 무엇인가를 얻어내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응답(4-7)

공동체가 직면한 절망적인 상황이 우리 미래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히스기야의 15년 생명 연장은 개인적 치유 이상의 경험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앗수르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 예시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준 사건입니다.

 

4이사야가 성읍 가운데까지도 이르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5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6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 7이사야가 이르되 무화과 반죽을 가져오라 하매 무리가 가져다가 그 상처에 놓으니 나으니라(4-7)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에 즉각 응답하십니다. 4절에서 이사야가 성읍 가운데 이르지 못했을 때 말씀이 임했다는 것은 이사야가 말씀을 전하고 성읍을 빠져나가기 전에 매우 신속하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돌아가서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하십니다. ‘주권자’라는 표현은 사사 시대 말기와 초기 왕정 시대의 전통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지도자의 칭호입니다. ‘너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호칭도 초기 왕정 시대의 다윗 언약을 기억하게 합니다. 사무엘하 7:8에서 여호와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 왕조 언약을 내리실 때 다윗을 부르신 용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입니다. 즉, 5절은 다윗 언약을 근간으로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와 자신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듣고 눈물을 보았다고 하시는데, 이 말은 19:16에서 히스기야가 기도할 때 ‘들으시고 보소서’라고 한 것의 근거가 됩니다. 히스기야는 이 말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과 행동을 듣고 보신다는 것을 더 확실하게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병을 낫게 해주고, 3일 만에 성전에 올라갈수 있게 하며 15년을 더 살게 해주겠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며 예루살렘 성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과 다윗을 위해 예루살렘 성을 보호하시겠다는 말은 19:34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 전달한 이사야는 염증 부위에 무화과 으깬 것을 얹어놓았습니다. 무화과가 상처를 치료하는 데 어떤 효능이 있다기보다는, 상처를 낫게 하는 상징적인 행동으로 예수님께서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신 행동(마가복음 8:23), 진흙을 눈에 바르는 행위(요한복음 9:6) 등과 유사합니다.

 

징표를 구하는 히스기야(8)

하나님의 징표는 회복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의심할 여지없이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응답해주시는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시기 전에, 자신이 얼마나 믿을 만한 분임을 말씀으로 사건으로 친밀한 관계로 증명해 주십니다.

 

8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낫게 하시고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게 하실 무슨 징표가 있나이까 하니(8)

 

그러나 히스기야는 이런 이사야의 말을 믿지 못하고 징표를 구합니다. 히스기야는 아직 여호와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전쟁에 나가면 이길 것이라는 약속을 주신 하나님께 징표를 구한 기드온과 유사합니다. 이것을 보면 히스기야가 처음부터 여호와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 앗수르의 대군 앞에서도 오직 여호와만을 의지하는 담대한 믿음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9-11)

하나님께서 시간과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 너머에게 계시는 동시에 시간 속으로 들어오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시간과 역사 속에 들어오시길 요청하는 행위입니다. 시간 속으로 들어오신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9이사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실 일에 대하여 여호와께로부터 왕에게 한 징표가 임하리이다 해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갈 것이니이까 혹 십도를 물러갈 것이니이까 하니 10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가기는 쉬우니 그리할 것이 아니라 십도가 뒤로 물러갈 것이니이다 하니라 11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아하스의 해시계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십도 뒤로 물러가게 하셨더라(9-11)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요청을 들어주십니다.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질 때 징표가 임할 것인데, 해 그림자를 십도 나아가게 할 것인지 아니면 해 그림자를 십도 뒤로 가게 할 것인지 선택하라고 합니다. 즉, 해 그림자로 징표를 삼겠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해 그림자가 십도 앞으로 가는 것은 쉬우니 뒤로 가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즉, 시간이 뒤로 돌아가는 초자연 적인 일을 해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해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천지를 주관한다는 의미이고, 결국 천지를 창조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임을 눈으로 보게 해달라는 말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정말 해 그림자가 십도 물러나게 하셨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고 히스기야의 병이 나았다는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해그림자를 십도 뒤로 가게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생명을 연장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므로 당연히 히스기야의 병은 나았습니다. 과연 우리는 해도 뒤로 가게 하실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아니면 구조와 현실 속에서 아무것도 못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히스기야의 구원 기사는 모든 기도가 불치병을 낫게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기도의 능력을 말하기보다 기도할 이유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이자 근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기도를 듣고 뜻을 돌이키실 만큼 변함없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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