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열왕기하(22-01)


요시야의 개혁과 회개

열왕기하 22장 1-20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에 맞서 싸워온 데스몬드 투투 주교는 ‘성경을 금서목록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 독재자들의 최대 실수’라고 말했습니다. 율법이 므낫세 왕 시절이 아닌 요시야 왕 때 발견된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입니다. 악을 폭로하고 굽은 것을 바로잡는 데 성경 말씀보다 더 강력한 것은 없습니다.

 

  • 21장이 뮤다 최악의 왕인 므낫세에 관한 이야기라면 22장은 이외 대조적으로 유다 역사상 최고로 신실한 왕인 요시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므낫세 왕에 대해서 열왕기 저자는 신명기 율법을 근거로 가증한 우상숭배를 한 인물로 비난하며 그로 인해 유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평가합니다. 이렇게 심판의 길로 빠르게 가는 도중에 요시야라는 신실한 왕을 맞이하게 되면서 유다의 운명이 바뀔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감이 생기게 됩니다.

 

요시야의 등극과 평가(1-2)

종종 우리는 남들이 변하지 않는다고 체념하며 푸념을 늘어놓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변하기 전에 자신부터 변해야 합니다. 남의 허물만 들추기 전에 자신부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도록 노력합시다. 때가 되면 거룩성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유다를 깨끗하게 할 요시야를 세워주셨습니다.

 

1요시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팔 세라 예루살렘에서 삼십일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디다요 보스갓 아다야의 딸이더라 2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1-2)

 

므낫세와 아몬이 다스리는 동안 유다는 이방 나라보다 더 악했습니다. 하지만 좌우로 치우치지 않은 왕 요시야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요시야는 왕이 되었을 때 여덟 살이었고 31년간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디다요 보스갓 아다야의 딸입니다. 요시야에 대한 평가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했고 다윗의 길로 행했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평가를 받은 왕은 역사상 히스기야와 요시야 둘 뿐입니다.

 

성전 수리를 명령한 요시야(3-7)

위선의 냄새는 불신보다 고약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나라의 타락은 아예 안 믿는 나라보다 더 악독하고 그래서 더 하나님의 분노를 자아냅니다. 므낫세와 아몬이 다스리는 동안 유다는 이방나라보다 더 악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시야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3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왕이 므술람의 손자 아살리야의 아들 서기관 사반을 여호와의 성전에 보내며 이르되 4너는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올라가서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에 드린 은 곧 문 지킨 자가 수납한 은을 계산하여 5여호와의 성전을 맡은 감독자의 손에 넘겨 그들이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작업자에게 주어 성전에 부숴진 것을 수리하게 하되 6곧 목수와 건축자와 미장이에게 주게 하고 또 재목과 다듬은 돌을 사서 그 성전을 수리하게 하라 7그러나 그들의 손에 맡긴 은을 회계하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진실하게 행함이니라 (3-7)

 

요시야가 국정을 책임질 나이(26살)가 되자 성전을 수리하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예배의 회복을 개혁의 출발로 삼은 것입니다. 새로운 제도를 만들기보다는 성전 수리비용을 조달하는 기존 제도가 잘 운용되도록 챙겼습니다. 이 땅의 교회도 하나님과의 교제, 예배, 섬김, 말씀 순종의 갱신을 통해 나와 우리 공동체가 성전의 기능을 회복하도록 애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았습니까?

요시야는 왕이 된 지 18년이 되던 해에 사반에게 성전 수리를 명령합니다. 성전 수리는 고대 사회에서 왕의 일상적인 일이지만 열왕기에서는 요아스와 요시야만 성전 수리를 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성전 수리의 책임을 맡은 사반은 왕의 서기관으로 그의 아들 아히감은 예레미야 26:24에서 예레미야를 도운 인물이고 또 다른 아들인 그마랴는 여호야김 시대에 예루살렘의 귀족이었습니다(렘 36:12,25). 그리고 사반의 손자 그달랴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함락당한 뒤에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람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반은 예루살렘에서 상당한 권력을 가진 귀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시야는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성전 문에서 걷은 은의 합계를 내서 감독관에게 건네주는 역할만 하고 성전 수리에 대한 전체적인 감독은 성전 수리를 맡은 감독관에게 넘기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작업자들에게 돈을 주어 성전을 수리하게 했습니다. 이런 방식은 요아스 시대(열왕기하 12:12-13)에 만들어 진 것으로 아마도 요아스 이후에 이런 방식이 관례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7절에서 그들 손에 맡긴 은을 회계하지 말라고 하며 그들은 늘 믿을 만하게 일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도 열왕기하 12:15과 동일합니다. 이는 성전 수리가 매우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요시야가 여호와의 성전 수리에 힘썼다는 것은 여호와께 대한 신앙이 돈독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시기에 앗수르가 혼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이전 왕들처럼 조공을 바쳐야 하는 부담도 줄어들어 성전을 수리하는 데 쓸 은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8-13)

말씀이 말씀 그대로 선포되고, 말씀의 영광이 회복되고, 말씀의 능력이 역사하여 가슴을 찢고 회개할 때, 우리 가운데 참다운 개혁과 회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사반이 읽어주는 율법을 듣고 요시야는 말씀을 듣고 옷을 찢었습니다.

 

8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힐기야가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 9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돌아가서 보고하여 이르되 왕의 신복들이 성전에서 찾아낸 돈을 쏟아 여호와의 성전을 맡은 감독자의 손에 맡겼나이다 하고 10또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사반이 왕의 앞에서 읽으매 11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의 옷을 찢으니라 12왕이 제사장 힐기야와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 미가야의 아들 악볼과 서기관 사반과 왕의 시종 아사야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3너희는 가서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진노가 크도다(8-13)

 

성전을 청소하던 중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했다며 사반에게 줍니다. 당시 책은 양피지에 쓰인 두루마리 형태입니다. 제사장들은 토라를 가르칠 의무가 있었기에 토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되는 것은 당연한데 이것이 이슈가 된 것은 므낫세 통치 기간 동안 토라를 성전 구석에 처박아두고 읽거나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보고를 받은 사반은 왕에게 돌아와 왕의 명령대로 돈을 감독자의 손에 나누어 준 것을 말하고, 대제사장 힐기야가 책을 주었다면서 그 책을 왕 앞에서 읽었습니다. 사반은 이 책을 받고 바로 읽었으므로 내용을 알고 있었고 왕에게 읽어드려야 할 만큼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왕은 율법책의 말들을 듣고는 자신의 옷을 찢습니다. 옷을 찢는 행동은 재앙이 닥쳤을 때나 회개할 때 하는 행동으로 요시야는 율법책을 들으면서 이 책의 말이 사실이라면 유다의 현재 상황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있는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지난 70년 동안 율법을 무시하고 듣지 않았기에 유다가 이방보다 더 악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요시야 왕은 힐기야와 아히감과 악볼과 사반과 아사야에게 자신과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해 이 책의 내용에 대해 여호와께 물으라고 명령합니다. 왜냐하면 요시야는 율법책의 말씀을 들으며 현재 유다의 종교 윤리적 상황과 종교 전통이 여호와의 진노를 불러일으킬 만큼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신명기를 통해 백성에게 계속해서 요구하신 것으로 요시야는 들음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요시야는 종교개혁을 단행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한지 확인합니다. 말씀이 말씀 그대로 선포되고, 말씀의 영광이 회복되고, 말씀의 능력이 역사하여 가슴을 찢고 회개할 때, 참다운 갱신과 회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요시야는 성전 수리를 명령할 만큼 이미 경건한 사람이었으면서도 율법을 듣자 당장에라도 심판을 받을 것처럼 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래도 아직 희망이 남아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여호와께 묻습니다.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평가하고 안일하게 살지는 않습니까? 말씀 앞에 벌거벗은 듯 드러나지 않으면 자신을 알 수 없습니다.

 

홀다 선지자가 율법책을 확증해줌(14-20)

개혁은 마음의 회개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선포하신 처음의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였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회개는 곧 개혁의 출발점입니다. 회개 없는 개혁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을 의지한 진정한 회개는 새로운 개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14이에 제사장 힐기야와 또 아히감과 악볼과 사반과 아사야가 여선지 훌다에게로 나아가니 그는 할하스의 손자 디과의 아들로서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라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주하였더라 그들이 그와 더불어 말하매 15훌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너희를 내게 보낸 사람에게 말하기를 16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이 읽은 책의 모든 말대로 하리니 17이는 이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들의 손의 모든 행위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곳을 향하여 내린 진노가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18너희를 보내 여호와께 묻게 한 유다 왕에게는 너희가 이렇게 말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들은 말들에 대하여는 19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대하여 빈 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 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20그러므로 보라 내가 너로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 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 눈이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사자들이 왕에게 보고하니라(14-20)

 

요시야 왕의 명령에 따라 그들이 찾아간 곳이 바로 여선지자 홀다입니다. 홀다는 여선지자이며 살룸의 아내로 살룸은 할하스의 손자 디과의 아들이며 예복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홀다가 성전 하급 관리의 아내라고 말해주는 것은 결혼한 여자를 소개하는 관습적 구문입니다.

그녀는 예루살렘 성의 신도시인 둘째 구역에 살고 있었는데 이 장소적 배경은 그녀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선지자였음을 나타냅니다. 이들이 왜 여선지자인 홀다에게 갔는지에 대한 많은 논란들이 있습니다. 당시 예레미야나 스바냐 선지자가 이미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사장이 포함된 왕의 대규모 사절단이 주저하지 않고 그녀에게 찾아가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는 것을 보면 당시 홀다는 무척 잘 알려져 있고 국가의 신임을 받는 예언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왕의 말을 홀다에게 알렸고 홀다는 그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홀다의 예언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유다 왕이 읽은 책의 모든 말대로 유다에 재앙이 내린다는 것으로 유다의 멸망에 대한 예고입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들의 손의 모든 행위로 여호와를 격노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신에게 분향했다는 것은 히스기야를 제외한 유다 모든 왕들이 산당을 없애지 않아 백성들이 그곳에서 분향하게 한 우상숭배의 죄를 말합니다. 또한 손의 모든 행위는 율법의 정신인 공의롭고 정의롭고 자비로운 삶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사회적 정치적 도덕적인 죄도 지적하십니다. 종교적인 삶과 윤리적인 삶 모두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며 하나님의 율법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요시야 왕 개인에 대한 예언으로 요시야 왕이 유다가 빈 땅이 되고 저주거리가 된다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겸비하며 웃을 찢는 모습을 보였기에 하나님께서 요시아의 말을 들으셨다고 합니다. 요시야의 행동은 마음으로부터 철저히 회개하는 모습입니다. 먼저 마음의 상태를 언급한 후에 웃을 찢은 것을 마지막에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 상태와 진정성을 보신다는 의미다. 11절에서 요시야가 옷을 찢는 겉모습만 서술했다면 19절에서는 요시야의 옷 찢는 행위 이면의 속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요시야의 회개는 이전에 심판 선언을 듣고 회개한 히스기야와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요시야 왕의 기도도 들으시고 요시야는 임박한 심판을 보지 않고 평안히 선조들의 묘실로 들어갈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평안히’란 말은 논란거리입니다. 요시야는 애굽과의 전쟁 중에 갑작스럽게 전사하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천수를 다 누리고 죽은 사람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평안히’라는 말을 적용하는 것이 적절하나는 것입니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요시야는 평안히 죽었다고 보기 힘듭니다. 하지만 임박한 심판 속에서 요시아는 심판을 다 보지 않고 바벨론에게 포로가 되는 치욕을 겪지 않았다는 면에서는 ‘평안히’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끝나고 심판은 이제 미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시야가 아무리 경건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회개 기도를 한다고 할지라도 그동안 유다가 쌓아온 죄가 너무 커서 요시야 한 사람의 회개로는 심판의 수레바퀴를 멈출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는 분이 지만 영원히 참는 분은 아니며 그러나 심판 중에도 여호와를 찾는 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말씀에 기초하지 않은 개혁은 공허하며 심지어 해로울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개혁이어야 합니다. 개혁가가 아닌 개혁의 말씀이 드러나야 합니다. 말씀의 창조를 허용하는 일, 그것이 개혁의 출발입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베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