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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19-02)


이사야를 통해 응답 받는 히스기야

열왕기하 19장 20-37절


죄 중에 가장 큰 죄가 있다면 교만일 것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고자 하는 원죄의 중심핵입니다. C.S. 루이스의 표현에 의하면, 교만은 동물적 본성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서 곧장 나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언제 주로 교만해집니까?

 

  • 앗수르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히스기야는 여호와 앞에 기도하며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의 예언을 받았습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앗수르 군대는 돌아가는 듯했습니다. 그러다가 유다 땅에 머물며 여전히 히스기야를 위협하자 히스기야는 좌절합니다. 그리고 다시 여호와 앞에 기도합니다. 여호와의 명예를 위해 유다를 구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사야는 다시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여호와의 응답을 전달합니다.

 

앗수르 왕에 대한 심판(20-28)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고만장합니다. 자신의 힘만 믿고 화려한 전과를 믿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이며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일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교만은 자신의 된 것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인정하지 않을 때 찾아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앗수르 왕에 대해 심판하십니다.

 

20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보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때문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하셨나이다 21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너를 비웃었으며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22네가 누구를 꾸짖었으며 비방하였느냐 누구를 향하여 소리를 높였으며 눈을 높이 떴느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그리하였도다 23네가 사자들을 통하여 주를 비방하여 이르기를 내가 많은 병거를 거느리고 여러 산 꼭대기에 올라가며 레바논 깊은 곳에 이르러 높은 백향목과 아름다운 잣나무를 베고 내가 그 가장 먼 곳에 들어가며 그의 동산의 무성한 수풀에 이르리라 24내가 땅을 파서 이방의 물을 마셨고 나의 발바닥으로 애굽의 모든 강들을 말렸노라 하였도다 25네가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은 내가 태초부터 행하였고 옛날부터 정한 바라 이제 내가 이루어 너로 견고한 성들을 멸하여 무너진 돌무더기가 되게 함이니라 26그러므로 거기에 거주하는 백성의 힘이 약하여 두려워하며 놀랐나니 그들은 들의 채소와 푸른 풀과 지붕의 잡초와 자라기 전에 시든 곡초 같이 되었느니라 27네 거처와 네 출입과 네가 내게 향한 분노를 내가 다 아노니 28네가 내게 향한 분노와 네 교만한 말이 내 귀에 들렸도다 그러므로 내가 갈고리를 네 코에 꿰고 재갈을 네 입에 물려 너를 오던 길로 끌어 돌이키리라 하셨나이다(20-28)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의 협박 편지를 가지고 기도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드린 기도에 대한 응답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 히스기야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들려주십니다. 첫째는 앗수르 왕에 대한 심판입니다(19:20-28). 앗수르 왕에 대한 심판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20-24절은 앗수르 왕에 대한 고발이고, 25-28절은 앗수르 왕에 대한 심판입니다.

 

⑴ 앗수르 왕에 대한 고발(20-24)

 

하나님께서는 시온의 처녀 딸이 앗수르 왕을 멸시하고 비웃을 것이며, 예루살렘의 딸이 머리를 흔들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문장은 평행법으로 앗수르 왕이 여자들에게 비웃음당하고 조롱당하는 치욕을 겪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면 여성들이 나와 승리를 축하하며 노래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장면은 그 반대로 전쟁에 패한 후에 적의 여성들에게 조롱당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머리를 흔든다’는 것은 그 대상을 경멸하고 조롱한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를 조롱하고 비방한 앗수르 왕이 제일 먼저 받을 벌이 경멸과 조롱입니다.

22절에서 앗수르 왕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단 하나님을 비방하고 꾸짖은 앗수르 왕의 오만함에 대해 꾸짖으신 뒤, 그 오만함의 대상이 바로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인 자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소리를 높이다’, ‘눈을 높이 뜨다’는 교만한 자의 행동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표현하는 것은 가장 이사야적인 표현입니다.

23-24절은 앗수르 왕의 말을 직접 화법으로 인용하며 앗수르 왕의 오만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앗수르 왕이 많은 전차를 가지고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를 정복하고, 그곳을 전부 파괴하고 수풀만 무성한 숲의 가장 깊은 곳까지 갔다는 표현은 앗수르 왕의 군대가 땅의 모든 곳을 정복했다고 자랑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24절에서는 앗수르 왕이 물을 조종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내가 땅을 파서 이방의 물을 마셨고’는 많은 지역을 정복하여 그곳을 새롭게 건설할 때, 자신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물을 얻을 수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나의 발바닥으로 애굽의 모든 강들을 말렸다’는 것은 24절 상반절과 대조되는 것으로 자신은 수량이 풍부하기로 유명한 애굽의 물도 말려버릴 수 있다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발바닥으로 말린다는 것은 자신의 군대가 그 지역을 점령하면 완전히 초토화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앗수르 왕의 모습은 홍해를 가르시고, 비구름을 몰고 오시며, 땅에 풍요의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모습과 유사하게 그리면서, 자신에게 신적인 능력이 있다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⑵ 앗수르 왕에 대한 심판(25-28)

 

이런 앗수르 왕의 오만한 말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25절부터 등장으로 시작하는 것은 남들은 다 알고 있는데, 너만 모른다는 뉘앙스의 조롱입니다. 그러면서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행하시고 옛날부터 정하신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앗수르 왕이 아무도 침략할 수 없었던 강한 성읍들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정복당한 백성들은 두렵고 부끄러워 마치 시든 풀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정복당한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 앞에선 시든 풀 같은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을 다스리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인간은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하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나타냅니다. 온 세상의 진정한 왕은 세상을 정복했다고 자랑하는 앗수르 왕이 아니라, 그가 세상을 정복하게끔 계획하시고 실행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27절에서 다시 하나님은 앗수르 왕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그가 하나님께 분노를 품고 있다는 것도 알고 계십니다. 앗수르 왕이 말한 분노와 교만한 말을 하나님께서 다 듣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다 듣고 계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방신들처럼 돌이나 나무로 만들어진 우상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알고 계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는 앗수르 왕의 한계와 어리석음과 대조됩니다. 앗수르 왕의 악한 말을 들으신 하나님의 판결은 갈고리를 네 코에 꿰고 재갈을 입에 물려 오던 길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앗수르가 관행적으로 포로를 다루던 모습으로 자신들이 포로에게 행한 것처럼, 이제 앗수르 왕이 이런 치욕을 당할 것이란 뜻입니다. 앗수르로 돌아갈 것이라는 말은 산헤립이 더 이상 유다를 공격하지 못하고 퇴각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오만하고 악한 산헤립에게 벌을 내리심으로써 산헤립의 정복은 실패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유다를 지키실 것을 약속하심(29-34)

사람들에게 의해 고난을 당한 사람들은 비록 상처는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회복의 시간은 그리 오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열심 때문입니다. 교만은 자신의 열심히 하나님의 열심을 앞서려고 할 때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29또 네게 보일 징조가 이러하니 너희가 금년에는 스스로 자라난 것을 먹고 내년에는 그것에서 난 것을 먹되 제삼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원을 심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30유다 족속 중에서 피하고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을지라 31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32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을 가리켜 이르시기를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이리로 화살을 쏘지 못하며 방패를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하며 치려고 토성을 쌓지도 못하고 33오던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시라 34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더라(29-34)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부르짖음에 사랑과 긍휼로 반응하시고, 악인들의 교만에 대해서는 심판으로 응징하실 것입니다. 이 확신을 품고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구하시면, 자신보다 더 잘 알고 계시는 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⑴ 곡식을 풍성하게 허락하심(29-31)

 

두 번째 하나님의 약속은 유다의 초목들의 회복을 징조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앗수르에 의해 파괴된 유다의 초목과 과실들이 3년에 걸쳐서 회복될 것을 말씀하시는데, 올해와 내년은 씨를 뿌리지 않았는데도 그냥 자란 곡물들을 먹을 것이고, 3년째가 돼서야 비로소 농사지은 것을 먹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30절에서는 농사 이미지를 통해 유다의 남은 자들도 회복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남은 자들은 앗수르의 침략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로 이 들은 예루살렘에서 나오고, 시온으로 도망간 사람들도 다시 유다로 돌아올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에 대한 보증으로 하나님께선 자신의 이름을 거신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자신이 직접 이 모든 일을 성취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의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⑵ 앗수르가 못 쳐들어오도록 약속(32-34)

 

세 번째 약속은 앗수르 왕이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32절에서 이 성에 오지 못하고, 화살도 쏘지 못하고, 방패도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하고, 토성을 쌓지도 못한다고 하는데, 여기 언급된 것은 고대 사회에서 성을 점령하기 위해 하는 모든 전쟁 방식을 열거한 것입니다. 33절은 한걸음 더 나아가 공격은 고사하고 성에 오지도 못하고 되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에 이 모든 것이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확인시켜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호하시는 이유는 여호와 자신과 여호와의 총 다윗 때문이다, 하나님과 다윗이 세운 언약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대표되는 유다를 보호하시고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유다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자신이 세우신 언약에 충실하신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기반이 우리 마음이나 우리 자신의 의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 예언의 성취(35-37)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오만한 인생이 추락하는 것은 하루아침에도 가능합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심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이 모든 일을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일해 가신다고 소개합니다.

 

35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36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37그가 그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쳐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그들이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35-37)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지키십니다.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 군대를 치기 위해 나왔고, 여호와의 전쟁으로 십팔만 오천 명이 하룻밤 사이에 죽었습니다. 화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데, 이것이 구약성경이 여호와의 전쟁을 서술하는 방식입나이다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자신이 자랑하던 군대를 일은 산헤립은 앗수르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아들들에게 살해당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들이 성취되면서 유다에 대한 앗수르의 위협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히스기야는 기도로 앗수르의 무서운 군대를 물리치고 유다와 예루살렘을 지켰습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이루십니다. 나를 위한 일이기 이전에 하나님 당신의 이름과 영광을 위한 일입니다. 구원이 나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일인 줄 착각할 때, 교만은 나를 패망의 길로 이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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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19-01)


어려움 속에 이사야를 찾은 히스기야

열왕기하 19장 1-19절


‘하나님의 전능을 마주하는 일이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면 우리의 무능을 마주하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위협 앞에 철저히 자신과 그의 나라의 무능함을 깨닫습니다. 진정한 기도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 랍사게의 예루살렘 공격 사건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랍사게의 말은 예루살렘의 백성들을 위협하여 항복하게 만들기 위한 수사학적 연설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여호와께서 개입하지 않으시면 여호와가 이방의 우상들과 다를 바 없는 무능한 신이 되고 마는 신학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히스기야는 이 문제를 들고 여호와 앞에 나가 여호와의 도움을 구합니다.

 

히스기야가 이사야를 찾음(1-5)

참담한 치욕을 당해도 입을 다물어야 하는 약소국의 비애입니다. 그러나 출산할 기력이 없는 여인의 기도만큼 간절한 기도는 없을 것입니다. 힘이 남아서가 아니라 힘이 없기에 기도합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될 만큼 유능한 사람은 없습니다.

 

1히스기야 왕이 듣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두르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2왕궁의 책임자인 엘리야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장로들에게 굵은 베를 둘려서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내매 3그들이 이사야에게 이르되 히스기야의 말씀이 오늘은 환난과 징벌과 모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 4랍사게가 그의 주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와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비방하였으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말을 들으셨을지라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들으신 말 때문에 꾸짖으실 듯하니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소서 하더이다 하니라 5이와 같이 히스기야 왕의 신복이 이사야에게 나아가니(1-5)

 

신하들에게 랍사게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히스기야는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가린 후 여호와의 전에 들어갑니다.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두른 것은 커다란 재앙이 임했다는 상징으로 히스기야는 재앙이 임하자 여호와를 의지하기 위해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갑니다. 현재의 상황을 여호와께 알립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신탁을 받기 위해 랍사게의 말을 들은 엘리야김과 셉나와 제사장 중 연장자들에게 회개를 상징하는 굵은 베로 몸을 가리게 한 후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 보냅니다.

이사야에게 간 이들은 오늘은 환란과 징벌과 모욕의 날인데, 이는 아기들이 출구까지 왔는데 낳을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히스기야의 말을 그대로 전달합니다. 아기가 자궁 입구까지 나왔으나 출산할 힘이 없다는 속담은 재앙과 연결된 것으로, 아기를 출산할 때 산모가 제대로 힘을 주지 않으면 아기와 산모가 모두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는 이사야에게 특별히 랍사게가 하나님을 비방한 것에 대해 고발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허무한 우상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존재하는 분이며, 그렇기 때문에 적들의 비방하는 말을 들으시고 옳고 그름을 판결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요청한 것은 하나님께서 함부로 말한 앗수르를 심판해주실 것과 랍사게와 앗수르 왕의 위협에 떨고 있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남아 있는 자’는 앗수르의 침략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예루살렘 사람을 의미 합니다. 이렇게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여호와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선지 자 이사야를 찾아갑니다. 그래도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을 때 여호와를 찾고 그의 말씀을 구하는 것은, 아직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에 희망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만 빼고 세상의 논리들은 맞습니다. 그때 성도들이 많은 말로 반박하려고 해도 이길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개입이나 전제하지 않는 논쟁에 공연히 기어든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그때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조용히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전한 이사야(6-7)

구약 시대는 나라의 무능이 그들이 믿는 신에 대한 무능으로 생각했습니다. 정복한 나라는 지배한 나라의 신을 무시하고 깔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의지할 여러 대상 중 더 나은 대상이 아니라 유일한 대상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따라갈 때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6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말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 바 나를 모욕하는 말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7내가 한 영을 그의 속에 두어 그로 소문을 듣고 그의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의 본국에서 그에게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더라(6-7)

 

히스기야가 전한 말을 들은 이사야는 그들에게 앗수르의 신하들이 한 여호와를 모욕하는 말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랍사게의 말을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 바 나를 모욕하는 말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은 그들의 말에 신경 쓰지 말라는 말입니다. 사실이 아닌 말이 성취된 듯 보이는 것이 세상의 역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상의 참 주인이시기에 그런 말이 역사가 되지 않도록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나라가 그런 헛된 말에 의해서 무너지도록 그냥 두고 보실 분이 아닙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는 다시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 왕보다 약하다고 하는 말은 여호와에 대한 지식 없이 전략적으로 내뱉은 말로 그런 말이 하나님께 어떤 영향력을 미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 여호와를 조롱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보응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속에 거짓 소문을 퍼뜨려 본국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며, 또한 앗수르 왕은 본국에서 칼에 죽게 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조롱한 자를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는 약속하셨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앗수르 왕은 풍문에 속아서 죽게 될 것입니다. 헛된 말로 함부로 하나님께 지껄인 자를 하나님께서는 헛된 말이 비수가 되어 돌아오게 하실 것이란 뜻입니다. 이사야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랍사게의 말에 흔들렸던 히스기야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주고 안심하게 해 주었습니다. 여기서 ‘그 속에 두시겠다’는 영은 열왕기상 22:22에서도 나오는데, 하나님의 명령으로 ‘거짓말을 하는 영’입니다. ‘거짓말하는 영’이 만든 소문은 거짓 소문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헛되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조롱하던 인간들이 오히려 아무것도 아닌 거짓말에 놀아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인지를 드러내시려는 것입니다.

‘랍사게가 돌아가다가’(8)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앗수르 진영에 이상한 소문이 퍼졌고, 그로 인해 갑자기 예루살렘에 대한 포위를 풀고 앗수르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은 물거품처럼 없어졌지만, 다른 이들이 지어내는 헛된 말에는 사로 잡혀 죽게 될 것입니다. 거짓말을 잘 지어낸 자들이 거짓말에 잘 속는 것과 같은 위치였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첫 번째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예가 높아졌을 때 우리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우리에게도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예가 진정하게 회복 될 때, 교회도 부흥을 이룰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명예를 위해 살 때,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명예는 땅에 떨어집니다. 이것은 곧 교회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때, 교회도 살고, 우리도 살 것입니다. 이 단순한 진리가 침묵을 강요하고 있는 시대가 이 시대입니다.

 

앗수르 왕이 다시 협박함(8-13)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세상의 위협과 회유, 그리고 핍박까지도 도리어 자신들을 죽이는 ‘풍문’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만 믿고 위협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안개처럼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있는 성도들은 세상을 향해 더욱 담대해야 합니다.

 

8랍사게가 돌아가다가 앗수르 왕이 이미 라기스에서 떠났다 함을 듣고 립나로 가서 앗수르 왕을 만났으니 왕이 거기서 립나와 싸우는 중이더라 9앗수르 왕은 구스 왕 디르하가가 당신과 싸우고자 나왔다 함을 듣고 다시 히스기야에게 사자를 보내며 이르되 10너희는 유다의 왕 히스기야에게 이같이 말하여 이르기를 네가 믿는 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앗수르 왕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겠다 하는 말에 속지 말라 11앗수르의 여러 왕이 여러 나라에 행한 바 진멸한 일을 네가 들었나니 네가 어찌 구원을 얻겠느냐 12내 조상들이 멸하신 여러 민족 곧 고산과 하란과 레셉과 들라살에 있는 에덴 족속을 그 나라들의 신들이 건졌느냐 13하맛 왕과 아르밧 왕과 스발와임 성의 왕과 헤나와 아와의 왕들이 다 어디 있느냐 하라 하니라(8-13)

 

랍사게는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앗수르 왕이 라기스를 정복하고 립나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앗수르 왕의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 립나로 방향을 돌립니다. 그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예언이 성취되는 듯하다가 중단되었습니다. 산헤립은 랍사게의 군대와 합류하여 립나를 함락하고 더 큰 규모의 군대로 예루살렘을 다시 공격하려고 랍사게를 불러들인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다시 위협을 받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앗수르 왕은 자신과 싸우기 해서 구스 왕 디르하가가 온다는 말을 듣고 히스기야를 다시 위협하기 시작합니다. 구스 왕 디르하가는 애굽의 바로로 앗수르와는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앗수르 왕 입장에서 구스 왕의 등장은 예루살렘 정복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의 입장에서 보면, 때마침 등장한 우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다와 애굽이 동맹 관계에 있지는 않지만, 앗수르라는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앗수르 왕은 이런 곤란한 상황 속에서 다시 히스기야에게 사자를 보내어 앞서 랍사게를 통해서 했던 협박을 다시 하고 있습니다. 그 협박한 편지의 내용은 두 가지로, 첫째는 하나님께서 앗수르 왕의 손에 예루살렘을 넘기지 않을 것이란 말에 속지 말라며, 둘째는 앗수르의 손에서 스스로 구원을 한 신들이 있었느냐고 협박한 것입니다.

왕이 전쟁하러 왔다고 하여 혹시라도 구스와 유다가 협공하면 앗수르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히스기야가 앗수르와 전쟁하러 나올지 모른다고 예상한 것입니다. 그것을 막기 위한 앗수르 왕의 술책입니다. 다만 여기서는 ‘진멸’이란 말을 첨가하여 전쟁하러 나오면 모두 죽이겠다고 강하게 협박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14-19)

하나님의 이름이 훼손당하는 것을 보고 영적인 분노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을 하나님 되심이 알려지길 위해 강력하게 요청하면, 그를 높여주실 것입니다. 기도는 자신의 욕심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제자리에 세우는 것입니다.

 

14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서 히스기야가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고 15그 앞에서 히스기야가 기도하여 이르되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16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비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 17여호와여 앗수르 여러 왕이 과연 여러 민족과 그들의 땅을 황폐하게 하고 18또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니 이는 그들이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곧 나무와 돌 뿐이므로 멸하였나이다 19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하니라(14-19)

 

히스기야는 이런 앗수르 왕의 서신을 받고 다시 기가 막혔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대로 랍사게가 예루살렘 포위를 풀고 앗수르로 돌아가는 것 같아 안심했는데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산헤립의 군대와 합류하여 더 큰 위협을 가하는 상황을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 헛된 것 인가 하는 회의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전으로 올라가서 앗수르 왕의 편지를 하나님 보시라고 펴놓고 기도했습니다.

히스기야는 제일 먼저 여호와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시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근본으로 이런 하나님만이 세상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시며, 악한 자는 심판하시고, 의로운 주의 백성은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뒤 히스기야는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눈을 뜨고 봐달라고 요청 합니다. 여기서 히스기야가 보고 들어달라고 요청한 것은 산헤립이 하나님을 비방한 말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들으시고 이들의 무례함과 오만함을 직접 심판해달라는 암시가 들어있습니다. 앗수르 왕이 여러 나라들을 점령하고 그들의 신을 불태워버렸지만, 그들은 신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12절에서 앗수르 왕이 자신이 정복한 나라의 신들이 아무도 구원하지 못했다고 말한 것에 대한 반박입니다. 히스기야의 이런 주장은 이사야 44장의 주장과 유사합니다. 즉, 여호와만이 신이지 우상들은 단지 돌이고 나무일뿐입니다. 오직 여호와만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기에, 귀로 들을 수 있으로 볼 수 있으며 구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스기야는 여호와께 자신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렇게 되면 천하 만민이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게 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런 고백은 이전에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그리고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싸울 때 한 말과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자신의 이름으로 싸우는 자들을 지키시는 이유는, 여호와가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명예와 이름과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기도할 때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싸울 때, 하나님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싸울 때,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싸울 때, 하나님께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가장 무기력한 상황에서 가장 강력한 기도가 나옵니다. 참된 기도는 나의 무능함에 대한 뼈저린 고백과 하나님의 전능함에 대한 찬양이 만나는 지점에서 들려집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이유는 약해서가 아니라 충분히 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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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18-02)


랍사게의 회유와 협박

열왕기하 18장 17-37절


신앙의 오솔길에 우군은 드뭅니다. 마치 이리 떼 속에 던져진 양을의 처지와 같습니다. 주위를 들러봐도 아무도 없는 것같이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그 나라의 도래와 구현을 열망하는 교회는 매 순간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합니까? 누그의 말을 들을 것입니까?

 

  • 앗수르의 산헤립이 국내의 혼란한 상황을 정비한 후 군사를 이끌고 다시 팔레스틴으로 침입하였고 블레셋 지역을 되찾았으며, 유다의 성들까지 정복하며 무서운 기세로 유다를 정복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히스기야는 산헤립이 요구하는 공물을 바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였고, 예루살렘은 함락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앗수르가 예루살렘을 공격함(17-18)

우리의 신앙적 결단은 애굽과 앗수르 사이에서 줄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냐 다른 것이냐 사이의 선택일 뿐입니다. 세상은 지금도 우리를 아는 채하지만, 사실은 왜 여호와를 의뢰하는지에 대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반대로 조롱합니다. 항상 성도들은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는지를 점검하면 승리하게 됩니다.

 

17여호와여 앗수르 여러 왕이 과연 여러 민족과 그들의 땅을 황폐하게 하고 18또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니 이는 그들이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곧 나무와 돌 뿐이므로 멸하였나이다(17-18)

 

산헤립이 앗수르의 왕정을 정리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갖게 되자, 팔레스틴 정복에 나섭니다. 자신이 직접 출정하는 대신 다르단과 랍사리스와 랍사게로 하여금 대군을 끌고 라기스부터 예루살렘까지 정복하라고 보냅니다. 라기스 성은 강력한 수비성이거나 왕의 요새였습니다. 이곳은 르호보암이 요새화한 곳으로 유다 산지와 해안 평야 사이의 세펠라 기슭에 있으며, 사방으로 깊은 골짜기에 둘러싸인 천연 요새이고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라기스는 예루살렘으로 쳐들어가는 주요 관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산헤립의 명령을 받은 랍사게의 대군은 이런 견고한 요새인 라기스를 함락하고 예루살렘까지 진격합니다. 이 것은 당시 앗수르 군대의 전력이 매우 강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루살렘 성 근처까지 온 이들은 왕을 불러냅니다. 고대 전쟁에선 무력으로 싸우기 전에 먼저 말로 항복하라고 설득하거나 협박하는 말싸움을 먼저 합니다. 그러자 왕을 대신해서 왕궁 책임자 엘리야김과 서기관 셉나와 사관 요아가 대응하기 위해 나갑니다.

 

랍사게의 선동 Ⅰ(19-27)

세상은 하나님께서만 줄 수 있는 풍요와 번영을 자신들이 줄 수 있다고, 그리고 쉴 새 없이 ‘너희에게 풍요를 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일종의 신성모독입니다. 오늘날 광고와 선전 문구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는 말을 진리인 양 제시하고 있습니다. 랍사게의 선동, 또한 그러한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19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하니라 20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보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때문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하셨나이다 21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너를 비웃었으며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22네가 누구를 꾸짖었으며 비방하였느냐 누구를 향하여 소리를 높였으며 눈을 높이 떴느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그리하였도다 23네가 사자들을 통하여 주를 비방하여 이르기를 내가 많은 병거를 거느리고 여러 산 꼭대기에 올라가며 레바논 깊은 곳에 이르러 높은 백향목과 아름다운 잣나무를 베고 내가 그 가장 먼 곳에 들어가며 그의 동산의 무성한 수풀에 이르리라 24내가 땅을 파서 이방의 물을 마셨고 나의 발바닥으로 애굽의 모든 강들을 말렸노라 하였도다 25네가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은 내가 태초부터 행하였고 옛날부터 정한 바라 이제 내가 이루어 너로 견고한 성들을 멸하여 무너진 돌무더기가 되게 함이니라 26그러므로 거기에 거주하는 백성의 힘이 약하여 두려워하며 놀랐나니 그들은 들의 채소와 푸른 풀과 지붕의 잡초와 자라기 전에 시든 곡초 같이 되었느니라 27네 거처와 네 출입과 네가 내게 향한 분노를 내가 다 아노니(19-27)

 

앗수르 왕의 사신 랍사게는 히스기야의 전의를 꺾기 위해 그가 의뢰하는 대상이 얼마나 미덥지 못한지를 지적합니다. 그러니 싸울 계교와 용력이 있다는 말도 입에 붙은 말뿐이라고 폄훼합니다.

 

⑴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19-25)

 

랍사게는 앗수르 왕의 말을 그대로 전달하는데, 너희가 믿은 것이 무엇이냐고 합니다. 19절과 20절에서 반복적으로 질문하는 것은 너희가 누구를 믿고 반역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유다 왕이 싸울 능력이나 계략이 있다는 말은 오직 말뿐이라고 하며, 유다 자체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전채합니다. 유다가 의지한다고 생각하는 대상들을 21절부터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21절에 따르면 앗수르 왕은 유다가 애굽과 동맹을 맺고 앗수르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히스기야가 애굽과의 동맹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선지자 이사야의 비난으로 이 동맹이 성공하진 못했습니다. 랍사게는 애굽을 상한 갈대 지팡이로 비유하면서, 애굽은 동맹국을 도울 힘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동맹들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라고 조롱합니다. 당시 애굽은 이전의 힘을 어느 정도 회복한 상태이지만, 앗수르에 맞설 만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22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다의 믿음의 근간이 되는 여호와 신앙도 히스기야 때문에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비난합니다. 히스기야가 산당과 제단들을 제거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예배하라고 한 것이 여호와의 분노를 일으켜, 여호와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유일신 종교인 여호와 신앙의 특징을 제대로 알지 못했거나, 설혹 알았더라도 그동안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에 불만이 있거나 불안한 마음을 가진 백성들에게 히스기야에 대한 불신을 만들기 위해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내기를 하자며 말 타고 싸울 수 있는 병사 이천 명을 세울 수 있다면, 자기가 기꺼이 말 이천 마리를 주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너희는 말 탈 병사 이천 명도 없는 주제에 무슨 전쟁을 하겠다고 버티느냐고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전쟁은 여호와의 손에 있다는 이스라엘의 신학을 이용해 놀립니다. 자신이 이곳에 전쟁을 하러 온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며 자신은 유다를 멸망시키라는 신탁을 받았다고 허풍을 칩니다. 즉,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제대로 섬기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여호와의 명을 받고 유다를 치러 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랍사게의 말은 매우 교묘하고 간교합니다. 이스라엘의 신학을 비틀어 자신의 공격을 합리화하는 데 사용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뜻을 바로 알고 있지 못하면 속아 넘어갈 만큼 랍사게는 탁월한 언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⑵ 유다 관리들과 랍사게의 협상(26-27)

 

랍사게의 교묘하고 탁월한 언변에 당황한 히스기야의 신하들은 랍사게에게 아람 말로 말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으니 백성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히브리 말이 아닌 아람어로 말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랍사게의 말을 듣고 백성들에게 히스기야 왕에 대한 불신이 생겨서 불만이 커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국제 통용어는 아람어있기 때문에 앗수르도 아람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랍사계는 이런 요청을 무시하는데, 성에 있는 군인들이나 백성들도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자기의 소변을 먹고 대변을 먹는다는 말은 앗수르의 철통같은 포위로 식량이 떨어져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며, 예루살렘이 곧 이런 운명에 처할 것을 백성들도 알아야 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이 모든 책임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히스기야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열왕기하 6장에서 극심한 기아에 시달려 자신의 아이를 잡아먹는 모습이 떠오르게 합니다.

 

랍사게의 선동 Ⅱ(28-37)

세상이 교회를 공격하고 세속화가 교회를 유혹할 때, 유일한 대응전략은 침묵입니다. 세상의 제안과 논리를 거부해야 합니다. 세상은 결코 우리의 말을 들어줄 용의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목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대꾸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 때로는 가장 큰 용기와 울림이 됩니다.

 

28네가 내게 향한 분노와 네 교만한 말이 내 귀에 들렸도다 그러므로 내가 갈고리를 네 코에 꿰고 재갈을 네 입에 물려 너를 오던 길로 끌어 돌이키리라 하셨나이다 29또 네게 보일 징조가 이러하니 너희가 금년에는 스스로 자라난 것을 먹고 내년에는 그것에서 난 것을 먹되 제삼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원을 심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30유다 족속 중에서 피하고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을지라 31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32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을 가리켜 이르시기를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이리로 화살을 쏘지 못하며 방패를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하며 치려고 토성을 쌓지도 못하고 33오던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시라 34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더라 35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36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37그가 그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쳐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그들이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28-37)

 

랍사게는 간교한 회유와 협박으로 계층간의 불화를 조장하고 저항 의지를 꺾으려 했습니다. 항복하면 좋은 땅과 안전을 선물할 것이라고 회유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앗수르의 손에서 살아남은 나라가 없었던 역사를 상기시키며 여호와를 의뢰하라는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고 위협합니다. 누구의 말을 따르시렵니까?

 

⑴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28-35)

 

하지만 랍사게는 이런 요청을 무시하며, 더 크게 유다 말로 위대한 앗수르 왕의 말을 들으라고 외칩니다. 이 형식은 선지자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형식과 동일한데, 이것은 앗수르 왕이 여호와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말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과 상당히 유사한 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대조적으로 히스기야의 말에 속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 이유는 히스기야가 너희를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믿으라고 해도 듣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여호와가 앗수르 왕의 손에서 반드시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해도 듣지 말라고 반복적으로 경고합니다. 대신 앗수르 왕의 말을 들으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31절에서 앗수르 왕의 말을 그대로 전달합니다. 만일 항복하면 너희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각기 우물물을 마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함락 후 볼모로 끌고가고 성읍과 포도원이 완전히 파괴되는 것과 반대의 모습입니다. 또한 더 좋은 곳으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이 가득한 지역으로 인도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이것은 신명기 8:78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실 때 하신 말씀을 랍사게가 인용하면서 여호와께서 주신 땅보다 더 좋은 땅으로 앗수르 왕이 인도해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앗수르 왕을 믿으라고 하며 반복적으로 여호와와 히스기야를 믿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33-35절에서는 앗수르 왕의 손에서 자신의 땅을 구한 신이 없다는 사실을 실제 예를 들어가며 반복적으로 말합니다. 이제 히스기야 대신에 직접적으로 여호와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랍사게는 여호와가 앗수르 왕보다 무능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앗수르 왕이 정복한 땅의 어떤 신도 앗수르 왕의 손에서 자신의 나라를 구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경험적으로 보면 매우 설득력이 있습니다. 유다보다 강한 나라들과 도시들도 모두 멸망당했고 특히 같은 여호와를 믿은 사마리아도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상황 속에서 여호와께서 유다를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신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랍사게는 이렇게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말로 예루살렘의 항복을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를 믿는다는 것은 이런 논리와 통계와 합리적인 것을 넘는 일입니다.

나라가 흥하고 멸망하는 것이 여호와의 손에 있고, 전쟁의 승패가 여호와의 손에 있으며, 사람의 살고 죽는 것이 여호와의 손에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 여호와를 의지하면 주께서는 결코 그런 믿음의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며, 이 모든 상황을 뛰어넘으실 것입니다.

 

⑵ 유다 백성의 반응(36-37)

 

유다 백성들은 이런 랍사게의 말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왕을 신뢰하고 그 명령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랍사게의 이간질은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심각하기 때문에 신하들은 옷을 찢고 히스기야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립니다.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느끼는 지성’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세상을 읽는 감수성이 필요합니다. 애통의 언어가 필요하고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용도도 필요합니다. 교회의 교회됨을 유지하고 살려내기 위해서 시대를 분별하고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영적 실력이 절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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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18-01)

 


히스기야의 등극과 평가

열왕기하 18장 1-16절


 

무시로 성령 안에서 깨어 하나님을 의식하며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속도와 영상의 시대에 자신의 내면을 살피면서 사는 것은 신앙 유지하고 성장하는 열쇠입니다. 경건의 연습은 일상과 일터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여정에 제대로 지름길은 없습니다.

 

  • 열왕기 기자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단순히 강대국 앗수르의 침략에 의한 멸망으로 보지 않고, 여호와와 언약을 맺은 여호와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고, 여호와의 율법을 업신여겼기 때문에 여호와의 징벌을 받아 망했다고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의 흥망성쇠는 주변 강대국의 손에 갈린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손에 달렸다는 신명기적 관점을 드러낸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등극과 평가(1-4)

 

하나님의 진실한 백성은 얄팍한 피상성을 거부합니다. 중심으로부터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 때 그 사람의 가치나 나타납니다. 질기고 질긴 우상숭배를 과감하게 단절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히스기야는 전통과 관행과 풍습의 이름으로 자행되던 악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1이스라엘의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 제삼년에 유다 왕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되니 2그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비요 스가리야의 딸이더라 3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4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1-4)

 

히스기야는 이스라엘 왕 호세아 3년에 유다의 왕으로 등극합니다. 그가 왕이 되었을 때의 나이는 25세로 예루살렘에서 29년간 다스렸고,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비요 스가리야의 딸이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되던 시기는 이스라엘이 전체적으로 앗수르의 지배를 받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는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고 이스라엘의 길로 행하며, 우상숭배를 열심히 하였던 자신의 아버지 아하스와는 달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는데,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처럼 정직하게 행했다는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히스기야 왕에 대한 매우 긍정적인 평가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결국 멸망하게 된 이스라엘의 왕들과 대조가 됩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것이 동 시대에 이스라엘이 망하는 사이에 유다는 망하지 않은 이유라고 열왕기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구체적인 일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4). 첫째로 여러 산당을 제거하였습니다. 그동안 많은 왕들이 우상들은 제거하였지만, 산당을 제거하지 않아 백성들이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게 만듦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가장 문제가 되었던 산당을 제거했다는 말이 제일 먼저 나옵니다. 둘째, 주상을 깨뜨리고 아세라 목상을 잘라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섬기던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우상을 제거했다는 것입니다. 아세라의 경우는 매우 끈질기게 이스라엘 초기부터 이스라엘에게 신앙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셋째, 모세가 만든 놋뱀을 부수었습니다. 모세가 만든 놋뱀은 민수기 21:6-9에 등장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놋뱀을 보면 치료되었습니다.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놋뱀을 병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는 우상으로 섬기며 분향하였던 것 같습니다. 놋뱀에 대한 이야기는 민수기 이후 여기서 처음 언급되지만, ‘이때까지’란 말 속에서 놋뱀을 섬기는 것이 매우 오래된 전승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에 놋뱀을 보면 산다고 하는 것은 놋뱀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놋뱀을 보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앙 행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게 하는 역할이 끝나면 놋뱀은 없어져야 했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눈으로 보여준 놋뱀을 부수지 못하고 지금까지 간직하며 하나님이 아닌 놋뱀을 섬기는 지경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꾸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어떤 물건이나 제도나 의식 등 눈에 보이는 것에 의존하는 것으로 대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의지한 히스기야(5-8)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분과 연합하여 그분을 떠나지 않으면 여호와께서도 항상 동행하여 주십니다. 그 결과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고,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담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담대하게 앗수르 왕을 섬기지 않기로 결단할 수 있었습니다. 항상 골칫덩이였던 블레셋마저도 적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5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6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7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반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8그가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가사와 그 사방에 이르고 망대에서부터 견고한 성까지 이르렀더라(5-8)

 

이 단락은 구체적으로 히스기야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었는지 설명합니다. 히스기야는 우상을 섬기고 놋뱀을 의지하던 사람들과 달리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우리말에서 ‘의지하다’는 ‘믿다’라는 뜻으로 여호와 신앙에 바르게 서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6절은 ‘들러붙다’와 ‘떠나지 않다’라는 구문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믿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6절 하반절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다는 신명기적 강조점으로 그의 믿음은 말씀을 지키는 행함이 동반된 믿음이었음을 나타냅니다.

7-8절은 하나님을 믿은 결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여호와께서 그와 항상 함께하셨고 그가 전쟁하는 모든 곳에서 그는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면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는 신명기 20:1-4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렇게 여호와를 의지했기 때문에 히스기야는 이스라엘 왕과는 달리 앗수르를 섬기지 않았고, 오히려 블레셋과 싸워 이기기까지 하였습니다. 히스기야는 사르곤 2세가 전사하고 산헤립이 왕권을 강화하는 시기, 즉 앗수르가 혼란기에 있을 때 앗수르에게 독립을 선포하고 블레셋과 전쟁하여 승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모든 사건에 대해 열왕기 저자는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와 함께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의 멸망(9-12)

하나님의 백성들이 언액을 멸시하고 율법을 따르지 않으면 형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의 나라는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말씀 대접 받을 때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되고, 성도는 성도가될 수 있습니다.

 

9히스기야 왕 제사년 곧 이스라엘의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 제칠년에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이 사마리아로 올라와서 에워쌌더라 10삼 년 후에 그 성읍이 함락되니 곧 히스기야 왕의 제육년이요 이스라엘 왕 호세아의 제구년에 사마리아가 함락되매 11앗수르 왕이 이스라엘을 사로잡아 앗수르에 이르러 고산 강 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성읍에 두었으니 12이는 그들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그의 언약과 여호와의 종 모세가 명령한 모든 것을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더라(9-12)

 

히스기야가 여호와와 함께하며 형통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이 단락에서는 사마리아의 멸망을 다시 한 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 4년 곧 이스라엘 왕 호세아 7년에 앗수르의 왕 살만에 셀이 사마리아로 올라와서 포위하였고, 3년 동안 버티다 결국 호세아 9년 히스기야 6년에 사마리아가 함락됩니다. 10절은 문장 앞뒤로 ‘함락하다’는 사마리아가 함락된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1절은 앗수르 왕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고산 강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성읍에 포로로 끌고 갔다는 것을 보고합니다. 12절은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함락당한 이유를 설명하는데, 그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언약과 모세가 명령한 것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멸망한 사마리아는 현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전쟁에 이긴 히스기야와 대조됩니다. 이것은 열왕기 저자의 관점이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면 형통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멸망한다고 말하는 신명 기적 관점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친 히스기야(13-16)

사람들은 항상 완전할 수 없습니다. 현실 속에서 마음이 흔들이기도 합니다. 특히 어려운 일을 만나면 그 사람의 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히스기야는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점령당하자 하나님을 신뢰하던 마음이 흔들렸고 가장 현실적인 대안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의 행동은 하나님을 무기력하고 초라한 분이 되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13히스기야 왕 제십사년에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점령하매 14유다의 왕 히스기야가 라기스로 사람을 보내어 앗수르 왕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시는 것을 내가 당하리이다 하였더니 앗수르 왕이 곧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정하여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내게 한지라 15히스기야가 이에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 주었고 16또 그 때에 유다 왕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성전 문의 금과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 모두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라(13-16)

 

이야기는 다시 히스기야로 돌아옵니다. 히스기야 14년에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유다에 쳐들어와 유다의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점령합니다. 산헤립이 쳐들어온 이유는 이전에 빼앗긴 블레셋에 대한 통제권을 다시 얻고, 유다의 요새화된 성읍들을 파괴함으로써 블레셋 평야의 동쪽에 가해지는 유다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 있습니다. 산헤립의 기록에 따르면,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채들과 수많은 마을들을 비롯해서 유다의 요새화된 성읍 46개를 점령했다고 하는데, 점령된 많은 성읍들은 해안 평야에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산헤립의 공격이 강해지자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 산헤립에게 항복하고 그에게 조공을 바치겠다고 약속합니다.여기서 ‘죄를 지었다’는 표현은 왕의 말을 어겼다는, 즉 항복한다는 의미입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은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은 300달란트와 금 30달란트를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이 돈을 충당하기 위해 다른 왕들처럼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의 은을 주었다. 하지만 이것으론 모자라 성전 문의 금과 기둥에 입힌 금까지 모두 벗겨서 앗수르 왕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은 산헤립이 이끄는 앗수르 군대가 매우 강성하여 히스기야가 갑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유다도 이스라엘과 같은 운명이 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하나님을 잘 믿는 히스기야도 결국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아 멸망당한 사마리아와 같은 운명이 될지 여부가 궁금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강대국 앗수르의 손에서 히스기야를 구원하실지, 아니면 유다를 망하게 하실지 궁금한 상태로 다음 부분을 기대하도록 남겨두고 있는 것입니다.

 

종종 위기가 닥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에 인간적인 방법으로 위기에서 벗어나고 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 모습은 히스기야의 모습으로 사실 오늘 우리들의 모습에서도 위기와 고난의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어떤 분으로 다가옵니까! 어떤 상황 속에서도 유일한 힘이시고 능력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신뢰해야 합니다.


배움은 회심을 낳고 회심은 배움을 통해 일어납니다. 배움은 사실에 대한 얄팍한 읊조림이 아니라 죽음을 거부하려는 생명을 향한 투신과 몰입입니다. 배움이 멈춘 곳에는 두 마음으로 충만한 영적 간음이 계속됩니다. 회심은 근본적인 사상의 전환이고 욕망의 재조정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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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17-02)

 


사마리아에 거주한 이방인들

열왕기하 17장 24-41절


코카콜라 사장은 피 속까지 콜라가 흐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이처럼 참된 회심을 경험한 사람은 가장 깊은 무의식적인 영역까지 하나님의 이야기가 작동해야 합니다. 외형적인 종교행위만 무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가치 체계가 하나님으로 다시 형성되어야 합니다.

 

  • 열왕기하 17장은 이스라엘이 호세아 왕을 마지막으로 앗수르에 멸망당한 것과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앗수르 이곳저곳으로 사로잡혀간 강제 이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7-23절에서는 이스라엘의 흥망성쇠의 이유가 무엇인지, 이스라엘이 망한 원인과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를 다루고, 24-33절에서는 사마리아에 정착한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34-41절에서는 사마리아 공동체에 대한 평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이주민에게 여호와를 가르침(24-28)

우상숭배의 본질은 ‘여호와 플러스 알파’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으면서 다른 것들을 삶의 근거로 삼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나 풍요의 신 바알과 아세라를 믿는 것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확보하려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온 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을 따르려는 태도가 아닙니다.

 

24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그들이 사마리아를 차지하고 그 여러 성읍에 거주하니라 25그들이 처음으로 거기 거주할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사자들을 그들 가운데에 보내시매 몇 사람을 죽인지라 26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앗수르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왕께서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옮겨 거주하게 하신 민족들이 그 땅 신의 법을 알지 못하므로 그들의 신이 사자들을 그들 가운데에 보내매 그들을 죽였사오니 이는 그들이 그 땅 신의 법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니라 27앗수르 왕이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그 곳에서 사로잡아 온 제사장 한 사람을 그 곳으로 데려가되 그가 그 곳에 가서 거주하며 그 땅 신의 법을 무리에게 가르치게 하라 하니 28이에 사마리아에서 사로잡혀 간 제사장 중 한 사람이 와서 벧엘에 살며 백성에게 어떻게 여호와 경외할지를 가르쳤더라(24-28)

 

앗수르에 멸망당한 뒤에 사마리아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앗수르 왕은 사마리아를 점령한 뒤, 이곳에 바벨론 지역 성읍인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 사람들과 아람 지역 성읍인 하맛과 스발와임 사람들을 사마리아의 여러 성읍으로 이주시킵니다.

여기서 사마리아는 이스라엘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 이방인들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땅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자신들이 섬기던 종교를 그대로 가지고 왔고, 이곳에서 자신들의 신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이방신들을 섬기는 것을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곳에 사자(獅子)를 보내어, 몇 사람을 죽이셨습니다. 갑자기 사자가 사마리아에 나타나 사람을 죽이는 사건은 흔한 일이 아니라 일종의 재앙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런 재앙은 신의 벌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재앙을 만난 사람들은 이 재앙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하였고, 결국 그 땅의 주인인 여호와로부터 왔다는 것과, 여호와의 법을 알지 못해서 내려진 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방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는데, 이미 25절에서 사자를 보낸 분이 여호와라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각 지역에는 그 지역을 다스리는 신들이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어떤 지역에 오면 그 지역의 신을 올바로 섬겨야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깨달음은 매우 역설적인데 그 땅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닥쳐 온 전쟁이나 기근의 재앙을 여호와께서 내리셨다고 깨닫지도 못했고, 여호와를 바로 섬김으로 그 재앙을 해결할 생각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이들에게 닥친 그리고 닥칠 재앙은 여호와의 벌이라고 거듭해서 말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방인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재앙이 이 땅의 신인 여호와께서 내린 벌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리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대상이 다를 뿐 신앙심은 이방인들이 더 깊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앗수르 왕은 포로들 가운데 제사장 한 명을 데리고 가서 그곳에 거주하게 하고, 그 땅의 하나님의 법규를 가르치도록 하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법규는 여호와께 예배드리는 방식과 여호와의 율법 전반에 관한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한 제사장이 선발되었고, 그는 벧엘에 거하면서 백성들에게 여호와 경외하는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단과 벧엘은 원래 이스라엘의 종교 중심지로 제사장들이 활동하던 지역이기에 벧엘로 돌아간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25-28절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A 여호와 경외를 하지 않음

    B 여호와의 법을 알지 못함

    B' 여호와의 법을 가르치라

A' 여호와 경외를 가르침

 

이 구조를 통해 여호와 경외와 여호와의 법을 아는 것이 이 단락의 핵심 주제라는 것과, 여호와 경외는 여호와의 법을 아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호세아와 이사야에서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과 연결됩니다.

 

종교 혼합주의가 성행한 사마리아(29-33)

‘여호와 신앙’은 전심으로 하나님께서 원하는 가치와 그 이야기를 붙잡고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배타적 사랑이 그 밑바탕에 있습니다. 신앙은 항상 선택이고 결단입니다. 진리의 존재를 부정한 채 모호함을 관용의 이름으로 추구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29그러나 각 민족이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이 지은 여러 산당들에 두되 각 민족이 자기들이 거주한 성읍에서 그렇게 하여 30바벨론 사람들은 숙곳브놋을 만들었고 굿 사람들은 네르갈을 만들었고 하맛 사람들은 아시마를 만들었고 31아와 사람들은 닙하스와 다르닥을 만들었고 스발와임 사람들은 그 자녀를 불살라 그들의 신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에게 드렸으며 32그들이 또 여호와를 경외하여 자기 중에서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택하여 그 산당들에서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니라 33이와 같이 그들이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29-33)

 

이 단락은 이방인이 여호와를 섬기는 것에 대한 한계를 잘 보여줍니다. 이 당시는 다신 사회였기에, 여호와를 섬기면서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은 여호와의 법을 배웠지만 여호와만을 섬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여호와를 섬기지만, 자신들이 섬기던 이방신을 포기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각 민족들마다 각기 자신들의 신상을 만들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만들어둔 산당 안에 신상들을 안치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만든 산당이란 이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기 위해 만들었던 산당들을 말합니다. 17:10에 따르면 호세아 왕 시대에도 이스라엘에 산당을 세우고 모든 산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 목상과 아세라상을 세웠습니다. 그 산당들이 앗수르의 침략에도 남아 있었고 현재 이주한 이방인들이 우상을 섬기는 장소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이주로 인해 이스라엘은 우상이 넘쳐나는 장소로 변했습니다. 30-31절은 이스라엘 땅에서 섬기던 이방신들의 명단으로 이 신들이 어떤 신들인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스라엘 땅에서 다양한 신들을 섬겼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32절은 여호와를 경외하여 산당의 제사장을 택하였다고 하지만, 그것보다는 여호와 경외와 산당의 제사를 겸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즉, 여호와를 경외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여호와만을 배타적으로 섬기지는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33절에서는 여호와도 경외하였고 섬겼다고 표현함으로 사마리아의 종교가 혼합주의 종교였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사마리아의 종교에 대한 비판(34-41)

기억은 하나님께서 누구시며 무엇을 하셨는지를 되새기며 즉각적인 순종을 위한 고도의 영성입니다. 기억과 순종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해 경청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오늘날도 서로 자기 말을 하려고 할 뿐 들으려고 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들음에서 신실한 순종이 나옵니다.

 

34그들이 오늘까지 이전 풍속대로 행하여 여호와를 경외하지 아니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라 이름을 주신 야곱의 자손에게 명령하신 율례와 법도와 율법과 계명을 준행하지 아니하는도다 35옛적에 여호와께서 야곱의 자손에게 언약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다른 신을 경외하지 말며 그를 경배하지 말며 그를 섬기지 말며 그에게 제사하지 말고 36오직 큰 능력과 편 팔로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만 경외하여 그를 예배하며 그에게 제사를 드릴 것이며 37또 여호와가 너희를 위하여 기록한 율례와 법도와 율법과 계명을 지켜 영원히 행하고 다른 신들을 경외하지 말며 38또 내가 너희와 세운 언약을 잊지 말며 다른 신들을 경외하지 말고 39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만을 경외하라 그가 너희를 모든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리라 하셨으나 40그러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오히려 이전 풍속대로 행하였느니라 41이 여러 민족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또 그 아로새긴 우상을 섬기니 그들의 자자 손손이 그들의 조상들이 행하던 대로 그들도 오늘까지 행하니라(34-41)

 

34-41절에서 열왕기 저자는 이런 상황에 대해 평가하는데, 이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아니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와 법도와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열왕기 저자는 지금까지도 이런 혼합주의가 계속되는 것을 질책하며, 여호와께서 야곱의 자손들과 언약을 세우시면서 여호와만을 경외하라고 명령하셨다고 합니다.

 

35절과 36절에서는 이방신을 섬기지 말 것과 여호와만을 섬기라는 것을 대조하기 위해, 다른 신을 경외하지 말고 그를 경배하지 말며, 그를 섬기지 말고, 그에게 제사하지 말라고 사중적으로 금지한 후에 여호와만 경외하고 그를 경배하고, 그에게 제사 드리라고 말합니다. 36절에서 ‘예배하다’라고 번역한 단어는 35절에서 ‘경배하다’로 번역한 단어와 동일합니다. 그리고 37-38절에서는 ‘다른 신을 경외하지 말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39절에서 다시 여호와만을 경외하라고 말합니다. 35-39절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언약을 맺으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것과 여호와만을 경외할 것을 명령하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40-41절은 지금 사마리아에 있는 사람들의 행동으로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여호와만 섬기지 않고 당시의 풍습대로 여호와도 섬기고 자신들의 조상들의 신도 섬겼습니다. 결국 신명기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 열왕기 저자는 사마리아에 있는 사람들은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결론을 짓습니다.

 

이 결론은 에스라 느헤미야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때 사마리아 사람을 성전 건설에서 배제하는 이유가 되며, 신약 시대에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여호와만을 섬기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마태복음 6:24에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 재물을 같이 섬길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비단 눈에 보이는 우상만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이 우상이며,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힘을 잃어가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만을 섬기지 않기 때문이라고 열왕기 저자는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배움은 회심을 낳고 회심은 배움을 통해 일어납니다. 배움은 사실에 대한 얄팍한 읊조림이 아니라 죽음을 거부하려는 생명을 향한 투신과 몰입입니다. 배움이 멈춘 곳에는 두 마음으로 충만한 영적 간음이 계속됩니다. 회심은 근본적인 사상의 전환이고 욕망의 재조정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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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17-01)


북 이스라엘의 멸망과 그 원인

열왕기하 17장 1-23절


죄는 맹목적인 상향과 근시안적인 시각을 만듭니다. 무딘 칼처럼 변화의 시대를 놓치고 안주와 현상유지에 빠집니다. 교회가 자기만족적인 향우회나 상조회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전격적이고 근본적인 인지구조(mentality)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어떤 상태였습니까?

 

  • 이스라엘은 호세아 왕 때 앗수르에게 망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앗수르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망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함께 망하게 된 원인을 열왕기 저자가 신명기적 신학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이스라엘의 멸망 부분(1-6)과 이스라엘 멸망의 신학적 해석(7-23)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1-6)

 

공동체의 위기는 원칙과 진리를 정도라고 생각하지 않을 때 찾아옵니다. 주의 말씀에 대한 경청과 순종을 잃게 되면 분별력이 저하되고 세속이 독버섯처럼 퍼집니다. 조상이 남긴 죄악의 적폐들을 청산하지 못하고 누적시켜 온 북이스라엘은 이제 대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1유다의 왕 아하스 제십이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구 년간 다스리며 2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다만 그 전 이스라엘 여러 왕들과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더라 3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이 올라오니 호세아가 그에게 종이 되어 조공을 드리더니 4그가 애굽의 왕 소에게 사자들을 보내고 해마다 하던 대로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드리지 아니하매 앗수르 왕이 호세아가 배반함을 보고 그를 옥에 감금하여 두고 5앗수르 왕이 올라와 그 온 땅에 두루다니고 사마리아로 올라와 그 곳을 삼 년간 에워쌌더라 6호세아 제구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고산 강 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1-6)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인 ‘호세아’는 ‘구원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앗수르에 의해 세워진 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앗수르의 속국 처지가 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이 단락은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역사적 기술을 하고 있습니다. 1-2절은 등극 공식으로 호세아는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었고, 9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지만, 이전 이스라엘 여러 왕들과 같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호세아 시대에 종교적으로 이전 왕들보다는 우상숭배를 덜 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그가 우상숭배에서 돌아서서 이전 왕보다 여호와를 의지한 것이 이스라엘의 멸망의 수레바퀴를 멈추지는 못했습니다. 이미 이전의 수많은 악한 왕들이 쌓아 놓은 악을 호세아 한 사람이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유다 왕 요시야도 유다의 멸망을 멈출 수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호세아는 앗수르 왕이 이스라엘을 침입하여 베가를 죽이고 세운 왕으로 친 앗수르 정책을 폈습니다. 이 정책은 디글랏 빌레셀 3세 다음 왕인 살만에셀 때까지 이어져 계속해서 앗수르에 충실하게 조공을 바치며 봉신국의 예를 갖추었습니다.

하지만 4절에서 갑자기 상황이 바뀌어 호세아는 앗수르에 반기를 듭니다. 먼저 호세아는 애굽의 왕 소에게 사신을 보냅니다. 사자를 보낸 이유는 본문에서 설명하지 않지만, 애굽과 동맹을 맺고 애굽의 원조를 받아 앗수르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앗수르에게 보내던 조공을 보내지 않습니다. 애굽에는 사자를 보내고 앗수르에는 조공을 보내지 않은 이 행동들은 앗수르 왕이 보기에 호세아가 반역했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앗수르 왕은 호세아를 사로잡아 자기나라 감옥에 감금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인 호세아는 사로잡혀 적국의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였고, 이스라엘 왕조는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애굽의 힘을 의지하여 앗수르의 압제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시도가 이스라엘과 자신의 멸망을 앞당긴 것입니다. 당시 유다에서 활동하던 이사야 선지자는 애굽에 의존하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호세아는 하나님이 아닌 애굽을 의지하였고 그 시도는 결국 실패하였습니다.

결국 호세아를 폐위한 후 앗수르는 이스라엘로 쳐들어와 이스라엘을 점령하였고, 마지막에 사마리아 성을 3년이나 포위하고 공격하여 결국 함락합니다. 앗수르는 주로 완벽하게 포위하고 오랫동안 기다리며, 그곳이 기근으로 자멸하는 전법을 사용하였는데, 열왕기하 6장의 사마리아 포위 전쟁에서 보듯이, 이는 매우 효과가 있는 전법입니다. 결국 사마리아는 앗수르의 고사 작전에 견디지 못하고 호세아 9년인 주전 722년에 함락되어 이스라엘은 점령되고, 백성들은 앗수르에 포 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들은 앗수르의 여러 지역에 분산해서 거주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배교 상황(7-12)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받은 은혜를 저버리고, 하나님 말고 다른 신들도 숭배했으며, 이방 사람들의 규례를 좇아 살았고, 실패한 선왕들이 걸어간 길을 뒤따라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믿고 우상도 믿었습니다. 율법도 지키고 죄도 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속지 않으셨고 눈감지 않으셨고 격노하셨습니다.

 

7이 일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애굽의 왕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또 다른 신들을 경외하며 8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규례와 이스라엘 여러 왕이 세운 율례를 행하였음이라 9이스라엘의 자손이 점차로 불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를 배역하여 모든 성읍에 망대로부터 견고한 성에 이르도록 산당을 세우고 10모든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목상과 아세라 상을 세우고 11또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물리치신 이방 사람 같이 그 곳 모든 산당에서 분향하며 또 악을 행하여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으며 12또 우상을 섬겼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행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일이라(7-12)

 

7-23절은 이스라엘 멸망에 대한 신학적 해설로 신명기적 신학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7절 시작에서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를 명시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첫째 죄는 다른 신을 섬긴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직접 구원해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런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경외하였습니다. 십계명의 제1계명이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1계명부터 어기고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둘째 죄는 가나안 사람의 규례와 이스라엘 왕들의 규례를 행한 것입니다. 여로보암이 단과 벧엘에 황금 송아지를 만들고, 이것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새로운 규례들을 만든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9절부터는 이들이 저지른 죄를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을 비밀리에 행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지 말라는 것’은 우상숭배로 처음에는 비밀리에 행하던 우상숭배가 점차 이스라엘에 만연해졌습니다. 모든 곳에 산당을 만들고 목상과 아세라 상을 세웠습니다. 혼합주의와 우상숭배로 변질된 것이 하나님을 진노케 만든 궁극적인 원인입니다

 

하나님의 경고와 이스라엘의 배교(13-18)

이방신에게 절하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제의를 넘어 불평등한 공동체를 만들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과 아세라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은 풍요를 독점하고 싶은 욕심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힘을 이용해서 착취를 일삼았습니다.

 

13여호와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지정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하고 또 내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너희에게 전한 모든 율법대로 행하라 하셨으나 14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의 목을 곧게 하기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던 그들 조상들의 목 같이 하여 15여호와의 율례와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들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과 경계하신 말씀을 버리고 허무한 것을 뒤따라 허망하며 또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따르지 말라 하신 사방 이방 사람을 따라 16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 자기들을 위하여 두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고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 성신을 경배하며 또 바알을 섬기고 17또 자기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복술과 사술을 행하고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를 격노하게 하였으므로 18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심히 노하사 그들을 그의 앞에서 제거하시니 오직 유다 지파 외에는 남은 자가 없으니라(13-18)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배교의 길로 가는 이스라엘을 그대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13-14절에서는 많은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시며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지만 듣지 않은 이스라엘의 모습을 그립니다. 이스라엘에는 엘리야와 엘리사 같은 뛰어난 선지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망하기 직전에도 아모스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들의 외침에 회개했다는 보고가 예언서나 역사서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요나서를 보면 앗수르의 니느웨가 회개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15절에서 헛된 것을 따라가며 헛되게 되었다는 것은 우상숭배를 말합니다. 우상은 실재하지 않는 허상이며 나무나 돌로 인간이 만든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헛된 것을 따라갔습니다. 16-17절은 이스라엘이 행한 우상숭배를 열거하는데, 우상숭배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단과 벧엘에 황금 송아지를 만든 것을 시작으로 우상들이 점점 늘어나고, 심지어는 자녀를 번제로 드리는 죄까지 저지릅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때문입니다. 이것이 열왕기 저자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국제 정세나 주변 나라들의 강성함에 영향을 받을 수는 있지만, 흥하고 망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버리신 여호와(19-23)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한 어떤 선택을 하든지 그 판단은 오판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판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유다 모두 그 말씀을 듣지 않았고 여호와를 믿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 명령을 ‘버린’ 자들을 하나님께서도 ‘버리셨고’, 악한 되를 ‘떠나지’ 않은 사람들을 이방 땅으로 ‘떠나게’ 하셨습니다.

 

19유다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든 관습을 행하였으므로 20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온 족속을 버리사 괴롭게 하시며 노략꾼의 손에 넘기시고 마침내 그의 앞에서 쫓아내시니라 21이스라엘을 다윗의 집에서 찢어 나누시매 그들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았더니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을 몰아 여호와를 떠나고 큰 죄를 범하게 하매 22이스라엘 자손이 여로보암이 행한 모든 죄를 따라 행하여 거기서 떠나지 아니하므로 23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든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드디어 이스라엘을 그 앞에서 내쫓으신지라 이스라엘이 고향에서 앗수르에 사로잡혀 가서 오늘까지 이르렀더라(19-23)

 

19-23절은 이스라엘을 버리신 이유를 다시 정리합니다. 19절은 유다와 관련된 죄로 이스라엘의 죄를 유다까지 퍼트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합 가문의 악행과 우상숭배가 유다 왕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던 것을 말하며, 이것이 이스라엘이 유다보다 먼저 망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21-23절은 간략하게 이스라엘의 역사를 신학적으로 요약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다윗 왕가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에게 나누어 주신 것인데, 여로보암이 이 사실을 잊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여호와를 떠났고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내쫓으신 것입니다. 20절과 23절에서 ‘여호와께서 쫓아내다’라는 말을 반복함으로 이스라엘의 멸망은 신명기 28:36과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징벌이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이런 열왕기 저자의 신학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왜 망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지금까지 앗수르에 사로잡혀 있다는 말을 보면 열왕기는 포로기에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타국에서 포로로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왜 망했는지에 대한 신학적 물음을 가졌고, 열왕기 저자는 역사를 신명기 언약의 축복과 징벌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면서 우리가 망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신학이란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와 시간 속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신학적 물음에 대답하기 위한 해석 작업입니다.


우리는 맘몸과 소비주의가 주입하려는 얄팍한 소비자의 정체성을 거부해야 합니다. 이기적인 자유는 인간을 고립시키고 괴물로 만들어 두려움이라는 동굴에 갇히게 합니다. 성령의 분별력을 시리시간 작동하며 살려면 하나님과 이웃과의 세밀한 관계망을 형성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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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16-01)

 


잘못된 배교 길로 가는 아하스

열왕기하 16장 1-20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보기도를 할 때,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식의 신앙은 훌륭한 기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도는 교회가 능력을 잃게 만드는 독이 되고 있습니다. 성공과 번영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한 것입니다. 돈과 권력이 호령하는 시대에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 신앙을 유지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지배하면서 이스라엘 왕 베가는 죽임을 당하고 그를 대신해서 친앗수르 인물인 호세아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했기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았고 앗수르의 지배하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요담 이후 왕이 된 아하스부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면서 유다도 어려움에 처하기 시작합니다.

 

유다 왕 아하스의 등극(1-4)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두려움에 빠지면 자신을 지켜줄 다른 것을 찾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강국의 힘을 더 의지하게 됩니다. 친앗수르 정책으로 잠시 반앗수르 동맹국의 위협에서 벗어났지만, 결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1르말랴의 아들 베가 제십칠년에 유다의 왕 요담의 아들 아하스가 왕이 되니 2아하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간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하고 3이스라엘의 여러 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4또 산당들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1-4)

 

유다 왕 요담의 뒤를 이어 요담의 아들 아하스가 왕이 됩니다. 아하스가 왕이 될 때의 나이는 20세 이미 예루살렘에서 16년을 다스립니다. 하지만 이전의 왕들과 그의 조상 다윗과 달리 그는 이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않았습니다.

 

3-4절은 구체적으로 이하스가 행한 죄로 첫째는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들의 길이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이로보암처럼 이호와 예배와 이방 제의를 혼합하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단과 벧엘에 황금 송아지라는 우상을 만들어놓고 여호와 제의라고 하며, 에루살렘에서의 제사를 대신하려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아합처럼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아하스는 이 두 가지 죄를 모두 지었습니다.

3절에서 아하스는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이라고 서술하는데 신명기 18:10에 따르면 이런 행위는 하나님께서 본받지 말라는 가나안 민족의 가증한 행위 중 하나입니다. 사람을 불 가운데 지나가게 하는 것은 불로 태워 번제로 드린다는 의미입니다(에스겔 20:31). 이것뿐만 아니라 그는 산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와 같은 이 분향하면서 이방신 섬기는 데 매우 열정적인 있습니다. 이전의 왕들은 백성들이 산당에서 분향하는 것을 막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매우 적극적으로 이방신을 섬기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가 이렇게 여호와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이방신을 열심히 섬긴 이유는, 당시 앗수르가 매우 강성해져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침입하고 압박했기 때문입니다. 아람과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맺고 유다도 이에 참여하라고 압박합니다. 주변 나라들의 압박으로 유다 정세가 불안해지자 아하스는 여호와튼 이방 종교든 종교적 힘으로 이 위기를 넘기려고 제사를 드리는 데 열심을 냈던 것입니다.

유다의 위기는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은데서 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하스와 당대의 지도자들은 그것을 모른 채 더욱 헛된 열정으로 죄를 지은 것입니다. 미가 6:7-8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앗수르의 도움을 청한 아하스(5-9)

모든 삶을 해석하기 어려운 것은 모든 일이 깔끔한 인과응보의 공식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의가 제때 심판을 당하지 않고 도리어 더 잘되는 일이 세상에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들키지 않은 죄가 아니라, 아직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되지 않고 연기된 심판임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5이 때에 아람의 왕 르신과 이스라엘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싸우려 하여 아하스를 에워쌌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6당시에 아람의 왕 르신이 엘랏을 회복하여 아람에 돌리고 유다 사람을 엘랏에서 쫓아내었고 아람 사람이 엘랏에 이르러 거기에 거주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더라 7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 이르되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하건대 올라와 그 손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8아하스가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냈더니 9앗수르 왕이 그 청을 듣고 곧 올라와서 다메섹을 쳐서 점령하여 그 백성을 사로잡아 기르로 옮기고 또 르신을 죽였더라(5-9)

 

앗수르의 세력을 막기 위해 아람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동맹 하였고, 이에 함께 하지 않은 아하스를 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옵니다. 하지만 연합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아람 왕 르신은 엘랏을 회복하고, 그곳에 있던 유다 사람을 쫓아내고, 아람 사람을 그곳에 거주하게 하였습니다.

역대하 28:5에 따르면, 아람 왕은 유다 사람을 사로잡아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이렇게 유다가 아람에게 점령당할 위기에 처하자, 아하스는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그는 자신을 왕의 신하요 왕의 아들이라고 하며 앗수르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할 것을 약속한 뒤 아람과 이스라엘의 손에서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아하스는 앗수르에게 복종을 맹세하며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요청하는데,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이지만, 신앙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섬기며, 그에게 복종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청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하스는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이 아닌 눈에 보이는 인간 왕에게 의지하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 대가로 여호와의 전과 왕궁에 있던 금은을 모두 가져다 뇌물로 보냅니다. 여기서 ‘예물’이란 단어 대신 ‘뇌물’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아하스의 행동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뇌물’은 신명기 10:17과 16:19 등에서 금지된 범죄로, 뇌물로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옳지 않은 것이 라고 분명히 합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의뢰하는 정정당당한 방법 대신 이방 왕에게 뇌물을 주고 그의 도움을 구하는 불법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런 시도는 일시적으로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앗수르 왕이 그 요청을 듣고 올라와서 아람이 점령한 다메섹을 쳐서 점령하였고, 다메섹에 있던 사람들을 기르로 사로잡아 갑니다. 이것은 아람 왕 르신이 엘랏을 점령하고 유다 사람들을 사로잡아 간 것과 반대로, 이번엔 아람 사람들이 앗수르로 끌려간 것입니다. 아람 왕 르신은 죽임을 당합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아람은 더는 유다의 위협이 되지 못했습니다.

 

성전에 새로운 제단을 만든 아하스(10-16)

제단은 하나님의 임재하는 곳입니다. 이 제단을 성전에서 멀리 떨어지게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포기한 배역입니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무시하고 버리는 행위였습니다.

 

10아하스 왕이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제단을 보고 아하스 왕이 그 제단의 모든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냈더니 11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보낸 대로 모두 행하여 제사장 우리야가 제단을 만든지라 12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와 제단을 보고 제단 앞에 나아가 그 위에 제사를 드리되 13자기의 번제물과 소제물을 불사르고 또 전제물을 붓고 수은제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14또 여호와의 앞 곧 성전 앞에 있던 놋 제단을 새 제단과 여호와의 성전 사이에서 옮겨다가 그 제단 북쪽에 그것을 두니라 15아하스 왕이 제사장 우리야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침 번제물과 저녁 소제물과 왕의 번제물과 그 소제물과 모든 국민의 번제물과 그 소제물과 전제물을 다 이 큰 제단 위에 불사르고 또 번제물의 피와 다른 제물의 피를 다 그 위에 뿌리라 오직 놋 제단은 내가 주께 여쭐 일에만 쓰게 하라 하매 16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의 모든 명령대로 행하였더라(10-16)

 

앗수르가 다메섹을 점령하자 아하스는 다메섹으로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갑니다. 전쟁 승리에 대한 축하와 아람을 물리쳐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아하스가 직접 앗수르 왕을 알현하기 위해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갔다가 아하스는 제단을 보고 그것의 구조와 양식을 그려서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냅니다. 역대하 28:23에서는 이 단을 아람 신들을 위한 제단이라고 하면서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열왕기에서는 다메섹의 제단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만 하고 있을 뿐 제단이 이 신을 위한 것이라는 언급은 없습니다. 오히려 왕은 다메섹 양식으로 만들어진 제단을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 이전의 제단이 있던 곳에 두고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사 드리는 데 사용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15절에서 아하스가 새로운 제단에서 드리는 각종 제사의 종류를 언급한 것은 새로운 제단을 공식적인 제단으로 삼으라는 의미입니다. 새 제단에 대해 ‘커다란'이란 수식어를 붙이는데, 이것은 제단이 이전 제단에 비해 크고 화려했음을 나타냅니다. 12-13절에 따르면 왕이 제단에 올라가서 제사를 지낼 만큼 매우 규모가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메섹에 있는 제단이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작고 단순한 놋제단에 비해 크고 화려했기 때문에, 이 제단이 아하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같습니다. 이전의 놋제단은 자신이 직접 하나님의 신탁을 받을 때 사용하겠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전에 사용한 놋제단의 권위를 더 인정했다는 의미입니다. 이 일은 아하스 혼자 한 것이 아니라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우리야와 함께 진행하였습니다. 이런 아하스의 행동에 대해 열왕기 저자는 이러저러한 평가를 내리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아하스의 행동이 앗수르의 제사 양식을 가져온 우상숭배나 혼합주의 종교라고 비난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아하스가 예루살렘 구조를 옮김(17-20)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된다는 생각이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교회도 점점 이러한 세속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효율성과 생산성을 하나님의 뜻보다 더 중시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기준에 따라 성공을 거둘 때 세속적인 요소들이 교회로 들어옵니다. 세상과 타협하거나 동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17아하스 왕이 물두멍 받침의 옆판을 떼내고 물두멍을 그 자리에서 옮기고 또 놋바다를 놋소 위에서 내려다가 돌판 위에 그것을 두며 18또 안식일에 쓰기 위하여 성전에 건축한 낭실과 왕이 밖에서 들어가는 낭실을 앗수르 왕을 두려워하여 여호와의 성전에 옮겨 세웠더라 19아하스가 행한 그 남은 사적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0아하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다윗 성에 그 열조와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17-20)

 

아하스는 성전 뜰에 있던 물두멍의 구조를 바꾸고 놋바다를 놋으로 만든 소 형상의 받침대에서 내려 돌판 위에 두었습니다. 이 것은 예루살렘 성전 기명들을 재배열 하면서 물두멍과 바다의 놋 지지대를 없앴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이동을 순조롭게 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부족한 놋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재배치에 대해 열왕기 저자는 어떤 평가도 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는 앗수르 왕에게 복종하는 의미로 안식일에 사용되었던 별궁과 밖에서 들어가는 별궁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 세웁니다. 이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지만, 현재 아하스는 비록 아람의 위협에서는 벗어났지만, 앗수르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아하스는 한편으로는 여호와를 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앗수르 왕을 섬기는 이중적인 면을 드러냅니다. 19-20절은 죽음의 공식으로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위를 잇습니다.


교회는 항상 ‘누구를 위해서?’와 ‘무엇을 위해서?’라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성찰과 분별없는 신앙은 외적인 결과만으로 감사와 영광을 돌리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현해가는 과정에서 세상과 다르지 않다면, 좋게 보이는 결과가 도리어 교회를 망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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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15-02)


멸망 직전 북이스라엘의 대혼란

 

열왕기하 15장 23-38절


우리 사회는 최근 정치의 무질서와 혼돈을 경험했습니다.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진물들이 쏟아졌습니다. 열왕기를 읽고 묵상해야 하는 중대한 이유가 분명해졌습니다. 성경 역시 인간의 정치와 하나님의 배후 정치를 생생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므나헴 이후 이스라엘의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계속해서 반란이 일어나 베가, 호세아가 반란을 일으키고 왕이 됩니다. 앗수르의 침략은 더욱 거세져 이스라엘 땅을 점령하고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가는 지경이 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격동의 마지막 시기를 겪고 있지만, 유다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한 왕인 웃시야와 요담으로 인해 이스라엘보다는 덜 불안정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왕 브가히야의 통치(23-26)

‘여로보암의 길’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진리와 계시, 역사를 왜곡하거나 권력에 종교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권력은 우상이 되고, 과정은 무시됩니다. 아무리 국가적 번영의 주역이었습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권력은 모두 헛된 것이 됩니다.

 

23유다의 왕 아사랴 제오십년에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 년간 다스리며 24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 25그 장관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반역하여 사마리아 왕궁 호위소에서 왕과 아르곱과 아리에를 죽이되 길르앗 사람 오십 명과 더불어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었더라 26브가히야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23-25)

 

므나헴이 죽은 후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단지 2년간 다스립니다. 므나헵이 매우 잔인하게 백성들을 다루었기 때문에, 그의 통치 기간에 불만을 품고 있던 세력이 어린 새 왕이 등극하자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브가히야에 대한 평가도 이전의 이스라엘 왕과 동일하게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브가히야에 대한 다른 업적은 언급되지 않고, 단지 그의 부하인 베가가 길르앗 사람 50명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고, 사마리아에 있는 왕궁의 요새에서 브가히야와 그의 부하인 아르곱과 아리에를 죽였다는 사실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위소’로 번역된 ‘아르몬’는 왕궁 내에 있는 구조물로 종종 요새로 번역됩니다. 즉, 반란이 일어날 경우 성내에서 방어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이런 성내 방어 요새도 최측근의 배신에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가는 브가히야의 군대 장관 혹은 신하로 소개되는데, 이것은 그가 므나헴의 최측근 신하로서 보좌하던 인물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므나헴은 상당히 잔인하게 백성을 다루고 전쟁을 한 인물입니다. 그의 죽음 이후 그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인물들이 므나헴의 측근이었던 베가를 중심으로 모여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베가의 반란을 가장 지지한 곳이 길르앗으로 그곳에서 50명의 용사를 보내 베가의 반란을 도왔습니다, 이렇게 브가히야는 길가나 전쟁터가 아닌 자신의 왕궁 요새 안에서 최측근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면 광야 길도, 저들이 에워싼 전쟁터도 안전하지 하나님께서 지켜주지 않으시면 자신의 왕궁 요새도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왕 베가의 통치(27-31)

참된 권위가 상실된 곳에 권위를 무시하는 경향이 독버섯처럼 펴집니다. 책임이 사라지고 반역을 향한 권리만 주장됩니다. 유지되고 계승되어야 할 가치와 정신은 사라지고, 무질서의 혼돈만 남습니다. 부패와 혹정은 혁명을 부르지만, 권위 상실은 공동체의 와해를 가져옵니다.

 

27유다의 왕 아사랴 제오십이년에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이십 년간 다스리며 28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29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 30웃시야의 아들 요담 제이십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반역하여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쳐서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31베가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28-31)

 

이스라엘 왕 베가가 왕이 되었을 때 유다는 아사랴(웃시야) 52년입니다. 베가는 20년간 이스라엘의 왕로서 다스렸지만, 그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고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베가 때 앗수르의 왕은 디글랏 빌레셀 3세이며, 당시 앗수르는 가장 강력한 국력을 가진 상태였습니다. 결국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이스라엘 북쪽 도시들을 점령하였습니다.

29절에서 언급된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는 이스라엘의 북쪽 지역 지명들로서 이스라엘이 북쪽 지역을 거의 전부 앗수르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앗수르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때가 주전 733년경이며, 기록에 따르면 만 삼천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앗수르로 끌고 갔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가는 것은 이스라엘이 다시는 경제, 군사적으로 회복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이 시기에 호세아는 반란을 일으켜서 베가를 죽이고 대신 왕이 됩니다. 호세아의 반란은 단순히 왕권을 차지하기 위한 이전의 반란과 성격이 다릅니다. 디글랏 빌레셀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자신들의 왕인 베가를 폐위했고, 내가 그들을 다스릴 왕으로 호세아를 세웠다고 합니다. 즉, 베가는 앗수르의 손에 의해 제거되었고, 앗수르의 하수인인 호세아가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으로 등극한 것입니다. 31절은 베가의 죽음 공식으로 베가도 비록 반란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지만 정식 왕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유다 왕 요담의 통치(32-38)

불순종에 빠진 권력자를 하나님께서 버리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기 위해 선택된 자가 그 뜻을 거역하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불러서 버린 사람을 대신하게 하십니다. 소명과 사명에의 충성이 생명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32이스라엘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 제이년에 유다 왕 웃시야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되니 33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루사라 사독의 딸이더라 34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35오직 산당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요담이 여호와의 성전의 윗문을 건축하니라 36요담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37그 때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아람 왕 르신과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셨더라 38요담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조상 다윗 성에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 아들 아하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32-38)

 

이야기는 유다 왕조로 넘어갑니다. 유다 왕조는 이스라엘 왕 베가 2년에 웃시야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됩니다. 요담은 아버지 웃시야가 나병에 걸려 별궁에 격리되었기 때문에, 웃시야를 대신해 여러 해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그리고 웃시 야가 죽고 나서 정식으로 왕위에 오릅니다. 그의 어머니는 사독의 딸 여루사입니다.

이전 유다 왕의 태후는 출신 지역으로 소개한 반면, 요담의 어머니는 사독 가문의 딸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사독 가문은 유다의 대제사장 가문으로 웃시야가 사독 가문의 딸과 결혼했다는 것은 왕실과 제사장 가문의 결혼으로 유다 왕정이 여호와 신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완전하게는 것은 아닌데, 34절에서 요담에 대한 평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전의 왕들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였지만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고, 백성들이 여전히 우상에게 분향하게 하였습니다. 한 번 잘못 들어온 우상숭배는 제거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 시대에 유다에서 활동하던 이사야 선지자는 당시 유다에 대해 비판하면서 자신의 하나님인 여호와를 모르고 우상을 섬기는 것에 대해 비판합니다(이사야 1:29). 요담의 업적은 예루살렘의 위쪽 문을 건축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독 가문의 어머니의 영향으로 예루살렘 성전 제의를 중요하게 여겨 설전을 보수하고 개축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요담의 모습은 하나님을 섬기면 서도 뿌리 깊은 악습을 뽑아내지 못하는 모습으로, 호세아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면 산당까지 완전히 제거했을 것입니다.

 

유다 왕국에서 여호와의 산당까지 제거하며 올바른 신앙으로 돌아간 인물은 후에 등장하는 히스기야 왕과 요시야 왕뿐입니다. 히스기야의 경우는 우상을 제거하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였고요시야의 경우는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개혁해야 한다고 이야기해 준 훌다 선지자의 말을 믿고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요담 당시에도 이사야 선지자가 유다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6장에 나오는 이사야의 소명 기사는 웃시야가 죽고 요담이 왕으로 즉위하던 때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담은 이사야의 말을 온전하게 순종하진 못했습니다. 요담이 우상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순종하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아람과 이스라엘의 동뎀담은 이사야의 말을 온전하게 순종하진 못했습니다. 요담이 우상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순종하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아람과 이스라엘의 동맹군을 보내 유다를 공격하게 하십니다. 당시에는 앗수르가 너무 강력하여 이에 위협을 느낀 아람과 이스라엘이 동맹을 맺고 앗수르에 대항하였고, 이 동맹에 유다가 참여하기를 촉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촉구에 응하지 않았기에 이들은 유다를 공적하게 되는데, 열왕기 저자는이 모든 일을 여호와께서 주관하고 계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38절은 요담에 대한 죽음 공식입니다. 요담은 죽은 후에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아하스가 그를 대신해 왕이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이스라엘이 반란과 대조적으로 유다는 평안하게 왕위가 계승되었습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여호와 잎에서 정직하게 행한 왕들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서 저자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시고 보호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원대한 구원의 계획은 그 뜻과 이야기를 알고 순종한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은 인간의 자유로운 결정 속에서 드러납니다. 생명을 위한 우리의 선택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歷史)와 만나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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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15-01)

 


북이스라엘의 혼란과 아사랴 

열왕기하 15장 1-22절


권력이 사유화될 때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의 몫이 됩니다. 이 무서운 파괴력 때문에 우리는 권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둠의 세력들은 이런 영적 비밀 때문에 권력에 집착하는 자를 우는 사자와 같이 찾고 있습니다. 교회는 영적인 분별력뿐만 아니라 역사적 정치적 분별력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 때 최고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하지만 열왕기 저자는 그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왕이라고 평가하였습니다. 그도 역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로보암 2세 시대에 유다에서는 아사랴(웃시야)가 왕이 되었고, 그거 52년간 왕으로 통치합니다. 이 시기가 이스라엘과 유다 양쪽 왕국 모두 평화와 번역의 시대였습니다.

 

유다 왕 아사랴의 통치(1-7)

모든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은 부패하기 쉽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할 수 있으므로 국가 권력에 대한 적절한 규제와 제한은 필수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력이 남용되면 국민들이 피해를 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오는 큰 악행입니다.

 

1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제이십칠년에 유다 왕 아마샤의 아들 아사랴가 왕이 되니 2그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십육 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이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골리야라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3아사랴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4오직 산당은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고 5여호와께서 왕을 치셨으므로 그가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어 별궁에 거하고 왕자 요담이 왕궁을 다스리며 그 땅의 백성을 치리하였더라 6아사랴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7아사랴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다윗 성에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요담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1-7)

 

본문은 더욱 급박하게 요동치는 남북 이스라엘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소용돌이치는 두 나라 모두 더 깊은 죄악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점차 멸망의 길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나라의 멸망의 길을 끊을 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문화가 중요합니다. 악이 만연하면 처음에는 괴롭지만 나중에는 내성이 생겨서 견딜 만해집니다. 자신도 생존하기 위해 자신도 악을 범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자신도 악한 문화의 일부가 되어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심판이 닥치면 옴짝달싹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여로보암의 통치 아래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때, 남 유다는 아사랴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16세에 왕으로 등극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52년을 다스리는데,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사랴의 통치 기간이 긴 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공동으로 통치한 기간이 포함되었기 때문으로 해석됩니다. 열왕기 왕들의 연대기는 정확하게 밝히기 어렵기 때문에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릅니다. 아사랴의 평가는 아마샤와 동일한데,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신실하지는 못했습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었는데도, 그의 아버지처럼 산당을 제거하지 않아 백성들은 지도자의 묵인 아래 그 산당에서 분향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왕은 하나님만 믿기에는 그의 믿음이 적었고, 백성들은 혼합주의입니다.

 

아사랴의 가장 기억할 만한 사건은 여호와께서 그를 치셔서 나병에 걸리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된 원인을 열왕기에서는 생략하지만, 역대기에선 그가 마음이 교만해져 성전에 들어가 직접 향단에 분향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역대기에 따르면 아사랴가 암몬을 쳐서 조공을 바치게 하였고 나라의 영토를 넓혔으며, 예루살렘 성에 망대를 세우고 견고하게 하는 등 많은 업적을 세웠지만, 바로 그런 번성과 성취 때문에 그가 교만해졌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열왕기는 업적이나 자세한 사항보다는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성했는지 악했는지에 대한 평가 자체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놀랍게도 52년 동안 이룬 업적과 사건들은 모두 생략하고 있습니다. 왕이 하는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사랴의 나병은 나아만의 나병과 다른 병으로 보이는데, 나아만의 경우는 격리되지 않고 공적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사랴는 레위기에서 부정 하다고 간주되어 다른 곳에 홀로 격리되어야하는 종류의 나병으로 더욱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교만하게 얼굴을 들던 아사랴는 사람들 앞에 서도 얼굴을 들지 못하는 철저히 낮아진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7절에서 바로 아사랴의 죽음에 대해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는 무사히 다윗 성에 있는 조상의 묘실에 안장되고 그의 아들 요담이 왕위를 계승합니다.

 

이스라엘 왕 스가랴의 통치(8-12)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지만, 인간의 자기중심적 욕망은 모반과 살인으로 얼룩진 권력을 만듭니다. 북 이스라엘의 왕실은 쿠데타로 피범벅이 되었고, 갖은 왕권 교체로 왕의 자리는 더는 권위 있는 영적인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8유다의 왕 아사랴의 제삼십팔년에 여로보암의 아들 스가랴가 사마리아에서 여섯 달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며 9그의 조상들의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 10야베스의 아들 살룸이 그를 반역하여 백성 앞에서 쳐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11스가랴의 남은 사적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12여호와께서 예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네 자손이 사 대 동안 이스라엘 왕위에 있으리라 하신 그 말씀대로 과연 그렇게 되니라(8-12)

 

여기서부터는 이스라엘 왕국에서 계속 반란이 일어나 왕들이 짧은 시간에 계속해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후에게 약속하신 4대가 지나자 이스라엘은 반란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왕국은 혼돈에 빠집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왕과 왕가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유다 왕 아사랴의 통치 38년에 여로보암 2세가 마침내 죽고 그의 아들 스가랴가 왕이 됩니다. 그런데 그의 통치 기간은 6개월밖에 되지 않습니다. 스가랴 왕도 이전의 선조들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스가랴의 경우는 그의 조상들의 행위대로'라는 문구가 추가되었는데, 이것은 그동안 예후 가문이 계속해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으며 이제 그 결과 예후 왕조는 망하고 이스라엘도 망하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점점 임계점에 이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스가랴가 통치한 지 6개월 정도 되었을 때 야베스의 아들 살룸이 반역하였고, 살룸은 백성들 앞에서 스가랴를 공격하여 죽이고 대신 왕이 됩니다. 스가랴의 업적은 일절 언급되지 않고 있으며, 다만 그가 왕이 되었고 또 때가 되어 죽었다는 언급이 전부입니다. 열왕기 저자는 이 반역 사건으로 예후 가문에 네 명의 후손이 이스라엘 왕위에 있으리라는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열왕기 저자의 사상을 보여 주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 살룸의 통치(13-16)

권력이 집중되면 갑질을 하고 상처를 주고 안하무인으로 아랫사람을 대하게 됩니다. 공익보다는 사익을 추구하기 쉽습니다. 권력을 남용하는 사람은 권력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음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고, 그런 권력에 대항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 됩니다.

 

13유다 왕 웃시야 제삼십구년에 야베스의 아들 살룸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한 달 동안 다스리니라 14가디의 아들 므나헴이 디르사에서부터 사마리아로 올라가서 야베스의 아들 살룸을 거기에서 쳐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15살룸의 남은 사적과 그가 반역한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16그 때에 므나헴이 디르사에서 와서 딥사와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사람과 그 사방을 쳤으니 이는 그들이 성문을 열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므로 그들이 그 곳을 치고 그 가운데에 아이 밴 부녀를 갈랐더라(13-16)

 

이 단락은 살룸 왕의 통치에 대한 단락으로 유다 왕 웃시야 제39년에 야베스의 아들 살룸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었지만, 그는 겨우 한 달을 통치하는데 그칩니다. 북이스라엘에서 가장 짧은 기간 왕위에 있었던 사람은 시므리인데 그는 단 7일간 통치하였습니다(왕상 16:15-20). 살룸이 반역하여 왕이 된 지 한 달만에 가디의 아들 나헴이 디르사로부터 사마리아 왕궁으로 쳐들어와서 살룸을 죽이고 왕이 됩니다. 반란이 일어난 지 한 달 만에 또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은 이때가 정치적으로 얼마나 불안정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한 달밖에 안 다스린 살룸도 다른 왕들과 동일한 등극 공식과 죽음 공식을 갖는 것을 보면, 그 역시 왕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6절은 므나헴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므나헴은 딥사를 점령할 때 문을 열고 자신을 환영하지 않았다는 이 유로 딥사 성과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과 그 성에 속한 모든 지역을 다 공격하고 죽였으며, 심지어 그곳에 있던 임산부의 배를 갈라 죽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반대한 딥사를 완전히 파괴하고 그곳 사람들의 씨를 말린 것입니다. 이것은 나헴이 얼마나 잔인한 인물인지를 보여줍니다. 므나헴이 얼마나 잔인한 인물인지를 보여줍니다. 므나헴의 이름 뜻은 ‘위로자’인데, 이름과는 정반대로 잔인한 살인자로 행동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왕 므나헴의 통치(17-22)

악한 자들의 통치하는 방법은 약한 자들에게는 혹독하고 가혹할 만큼 착취하여, 강자들에게 비굴해지는 것밖에 없습니다. 남의 희생을 밟고 얻는 부요와 지위를 축복이나 성공이라고 부르지 않고 ‘불의’라고 부릅니다. 북 이스라엘 왕 므나헴이 그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17유다 왕 아사랴 제삼십구년에 가디의 아들 므나헴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십 년간 다스리며 18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평생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19앗수르 왕 불이 와서 그 땅을 치려 하매 므나헴이 은 천 달란트를 불에게 주어서 그로 자기를 도와 주게 함으로 나라를 자기 손에 굳게 세우고자 하여 20그 은을 이스라엘 모든 큰 부자에게서 강탈하여 각 사람에게 은 오십 세겔씩 내게 하여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니 이에 앗수르 왕이 되돌아가 그 땅에 머물지 아니하였더라 21므나헴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2므나헴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고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17-22)

 

잔인한 반란으로 왕이 된 므나헴은 사마리아에서 10년간 다스렸습니다. 반란이 성공하여 10년간은 안정적인 통치를 하였지만, 그 역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여로보암의 죄에서 평생 떠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계속해서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의 죄가 쌓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므나헴이 왕이 되었을 때의 앗수르 왕은 ‘불’이라는 사람인데(19), 그는 디글랏 빌레셀 3세와 동일 인물입니다. 앗수르는 디글랏 빌레셀 3세 때부터 강성해지기 시작했고, 이스라엘을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므나헴은 앗수르가 쳐들어오자 은 천 달란트를 공물로 바치고, 이스라엘의 귀족들과 부자들에게서 강제로 은을 빼앗아 한 명당은 오십 세겔을 주고 앗수르의 용병을 데리고 옵니다. 그는 공물을 바치고 용병을 사음으로 왕권을 유지하고 영토를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시도는 성공하였고 앗수르는 이스라엘에서 떠납니다. 앗수르의 기록에 따르면, 앗수르는 사마리아의 므나헴으로부터 한 차례 이상 조공을 받았다고 합니다.

 

므나헴이 돈으로 앗수르의 환심을 사고 앗수르의 용병으로 왕권을 강화하려고 한 것은, 그가 여호와 의지하지 않고 주변 강대국을 의지하려 한 것입니다. 므나헴은 이스라엘의 왕권은 여호와께서 주시고 거두지는 것이며, 이스라엘의 운명도 여호와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잊은 것입니다. 이로써 므나헴은 왕권을 유지했지만, 이스라엘의 힘은 점점 약해져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므나헴이 죽고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왕위에 오르지만,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반란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점점 불안정한 상태가 되어갔지만, 그들은 여호와께 돌아오거나 부르짖지 않고 주변 강대국을 의지하며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무지와 어려석음이 권력을 악용하는 오용하는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정치는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인간의 반역과 오만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영역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권한을 제대로 사용하는지 예언자의 눈으로 감시하고 불의한 권력에 저항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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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14-02)


새로운 지도자 아사랴의 등극

열왕기하 14장 17-29절


죄가 더할수록 은혜가 깊어진다는 말씀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은혜를 받으려고 죄를 더 지어야 한다는 말합니까? 그럴 리 제대로 없습니다. 둘은 떼려야 뗄 수 없지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은혜가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은혜 아니면 안 되는 인간의 철저한 무능과 부패 때문입니다.

 

  • 엘리사는 죽기 직전에 요아스에게 아람을 이길 기회를 주지만, 요아스는 그의 믿음 없음으로 말미암아 아람을 완전히 진멸할 수 있는 기회를 잃습니다. 하지만 엘리사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은 아람을 세 번 이김으로써 빼앗겼던 성읍들을 되찾습니다. 이때 유다는 요아스의 아들 아마사가 새로운 왕으로 등극합니다. 이 두 왕국 간에 이전의 동맹관계는 사라지고 전쟁을 하게 됩니다.

 

아마샤의 죽음과 아사랴의 등극(17-22)

성경에서 말하는 착한 왕의 기준은 세상을 향해 얼마나 많은 기여도가 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어떤 태도로 살았느냐 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상관없는 업적은 기억될 가치가 없습니다. 계명 준수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17이스라엘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죽은 후에도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십오 년간을 생존하였더라 18아마샤의 남은 행적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19예루살렘에서 무리가 그를 반역한 고로 그가 라기스로 도망하였더니 반역한 무리가 사람을 라기스로 따라 보내 그를 거기서 죽이게 하고 20그 시체를 말에 실어다가 예루살렘에서 그의 조상들과 함께 다윗 성에 장사하니라 21유다 온 백성이 아사랴를 그의 아버지 아마샤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으니 그 때에 그의 나이가 십육 세라 22아마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잔 후에 아사랴가 엘랏을 건축하여 유다에 복귀시켰더라(17-22)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죽음 이후에 아마샤는 15년간 더 살았습니다. 요아스가 예루살렘을 침략하고 약탈한 뒤 아마샤를 예루살렘에서 풀어주고 되돌아왔기 때문에, 아마샤는 그 후로도 계속해서 유다의 왕으로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쟁에서 지고 15년 후에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전쟁에서 진 것을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삼기는 어렵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전쟁에서 진 이후 아마샤는 이전 권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서서히 내부 갈등이 생기면서 반역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화자가 반란을 일으킨 주동자나 세력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무리’라고 한 것은,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이 일부 반역 세력이 아니라 아마샤의 통치를 반대하던 상당수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역을 당한 아마샤는 예루살렘에 있다가 라기스로 도망갑니다. 라기스는 아모리 족속이 살던 다섯 성읍 중 하나로 예루살렘 남서쪽에 위치한 요새화된 큰 성읍이었기에 반란 세력을 막고 안전하게 몸을 숨기기에 적합한 곳입니다. 하지만 이 도주는 성공하지 못하고, 아마샤 왕은 이곳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요새화된 성읍을 뚫고 들어가 아마샤를 죽였다는 것은 아마샤를 잡기 위해 상당히 많은 군사를 보냈음을 보여줍니다. 자객을 보내는 방법이 아니 라면 요새화된 성읍을 공격하기 위해 많은 군사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아마샤의 죽음은 백성들 상당수가 왕에 대한 반역을 지지한 결과였던 것입니다. 아버지 요아스처럼 반란 세력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지만, 그의 시신은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 성에 장사됩니다. 반란으로 죽음을 당했어도 장례만큼은 왕으로서의 합당한 대우를 받은 것입니다. 그가 살아서는 백성들에게서 왕 대접을 받지 못하다가 죽어서는 왕 대접을 받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아마샤는 피살당했지만 유다 백성들은 아마샤의 아들 아사랴를 왕으로 세웁니다. 그의 나이가 당시 16세였습니다. 축출된 왕의 아들이 온 유다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왕이 되는데, 이는 반란 세력이 아사랴를 지지했다는 뜻입니다. 아사랴의 모친 가문이 반란 세력의 주축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문장입니다.

아사랴는 왕위에 오른 후 아마샤처럼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을 처형했다는 보고가 없는 것을 볼 때 이렇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아사랴의 최대 업적을 엘랏을 건축하여 유다로 복귀시킨 것이 라고 합니다(22). 아사랴는 웃시야라고도 불리는데, 그는 역대하 26:6-15에 따르면 엄청나게 영토를 확장하는 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엘랏의 회복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엘랏은 솔로몬이 아카바 만 꼭대기에 건설한 항구이며, 인근에 있는 에시온게벨 항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유다가 아라비아, 아프리카, 인도와 교역을 시작하게 한 항구입니다. 그러므로 아사랴가 이곳을 회복한 것은 솔로몬 시대에 시작한 홍해 무역을 되살리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엘랏의 회복은 솔로몬 시대의 영화를 회복했다는 상징 적인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가장 큰 업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로보암의 등극과 업적(23-27)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의 신비는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랍습니다. 불순종한 사람들에게도 물질적인 풍요를 주시기도 하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주시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복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23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제십오년에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사십일 년간 다스렸으며 24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25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26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27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23-27)

 

유다 왕 아마샤가 등극한 지 15년 후에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수도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41년을 다스립니다. 이때의 여로보암을 우리는 이스라엘 1대 왕 여로보암과 구별하기 위해 통상적으로 여로보암 2세라고 부릅니다.

24절은 여로보암 왕에 대한 열왕기 저자의 평가입니다.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평가합니다. 아모스와 호세아 선지자가 이방신을 섬기는 것과 단과 벧엘에서 제사 지내는 것과 정의를 행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하라고 외치던 시기가 여로보암 2세 때입니다.

열왕기에서는 여로보암 2세의 죄에 대해 여호와 보시기에 악했다는 말로 요약하고 있지만, 이 시기는 물질적 풍요와 함께 사회, 종교적 타락이 극에 달했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이때에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포기하신 것은 아니었기에, 선지자들은 주로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25절은 여로보암이 영토를 회복하였는데, 여호와의 종 아밋대의 아들 요나 선지자가 예언한 것처럼 이루어졌다고 보고합니다. 아밋대의 아들 요나는 요나서의 주인공입니다. 하맛어귀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이스라엘 영토가 회복될 것이라는 요나의 예언은 본문에 나오지 않지만, 열왕기에서는 이런 예언이 있었고 그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다고 알려줍니다. 여기서 하맛 어귀는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이고, 아라바 바다는 남쪽 경계입니다. 북쪽 경계부터 남쪽 경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는 것은 솔로몬 시대의 땅을 모두 회복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여로보암 2세 시대 이스라엘의 국력이 솔로몬 시대와 비교할 수 있을 만큼 강했다는 것입니다. 26-27절은 왜 이렇게 여로보암시대에 이스라엘이 강성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유가 설명됩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엄청난 고난의 시간들을 보냈는데, 그 시 절을 보내면서 스스로 매고 풀 수도 없으며, 그들을 도와줄 사람도 없는 절대적인 곤경에 처해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매는 자도 없고 푸는 자도 없다는 표현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철저히 무능력한 상태를 표현하는 관용구입니다.

그런데 더 나쁜 것은 이렇게 무능하고 곤경에 빠진 이스라엘을 도와 줄 동맹도, 이방신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비웃음인데, 그동안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을 섬기고 다른 나라들과 동맹을 맺으며 부국강병을 꾀하였지만, 그 결과는 철저한 무능과 고난이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 대해 관심 갖고 보고 계신 분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이들의 이름을 천하에서 제거하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기에,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의 손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고 열왕기 저자는 고백합니다. 아직은 하나님께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남아 있었기에, 고통 속에 있는 이스라엘을 버릴 수가 없었고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로보암 2세 시대의 풍요는 철저히 여호와의 긍휼과 자비의 산물이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보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마지막 신호였고, 이스라엘의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풍요가 자신들의 힘과 이방신 덕분이라고 생각하며, 더욱 하나님을 멀리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였다. 결국 여로보암 2세 때 하나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셨고 여로보암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은 국내외 정세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의 죽음(28-29)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는 한 동전의 양면입니다. 정의 구현하는 사랑은 정의 그 자체보다 용량이 더 큽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불의를 인정하지 않지만 불의 속에서도 변함없이 주어집니다. 사랑은 율법적인 정의를 넘어섭니다. 기계적인 정의가 아니라 궁극에는 사랑과 긍휼이 이기기 때문입니다.

 

28여로보암의 남은 사적과 모든 행한 일과 싸운 업적과 다메섹을 회복한 일과 이전에 유다에 속하였던 하맛을 이스라엘에 돌린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9여로보암이 그의 조상 이스라엘 왕들과 함께 자고 그의 아들 스가랴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28-29)

 

여로보암 2세는 이스라엘 왕 중에서 솔로몬에 버금가는 영토를 얻고, 풍요를 누리고, 주변 나라들과 활발하게 무역하여 널리 이름을 날렸습니다. 하지만 열왕기 기자에게 그런 업적은 전혀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기에, 전쟁한 것과 다메섹과 하맛을 회복한 일 정도만 간단하게 언급한 채 여로보암 2세 이야기를 마무리 합니다. 열왕기 기자에게 중요한 것은 이 같은 업적이 아니라 여호와 보시기에 선했느냐 약했느냐 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를 평가하시는 기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업적과 스펙으로 평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과 삶으로 평가하십니다. 여로보암이 죽고 그의 아들 스가랴가 왕이 되었지만, 이후로 이스라엘은 엄청난 내란에 휩싸이게 됩니다.


권선징악과 인과응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주권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작동합니다. 가장 악한 시대가 누린 최대의 번영은 하나님 은혜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또한 심판의 일종이기도 합니다. 죄악에 둔감해지게 하는 심판이요, 죄악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푼 은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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