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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4-01)


선지자로 인정받은 엘리사⑴

열왕기하 4장 1-17절


사람들이 누리는 모든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복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길 원하시지만, 더욱 자녀들에게 복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비가 내려와도 그릇이 엎어 놓으면 빗물을 한 방울도 담을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아무리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실지라도 마음 문을 열지 않으면 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 엘리야가 떠난 자리에 엘리사가 남았습니다. 4장부터는 엘리야의 제자란 말은 나오지 않고 엘리사라고만 나옵니다. 스승 엘리야에게 두 배나 다 많은 영적인 능력을 요구했던 엘리사는 네 가지 기적을 행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엘리사가 하나님의 능력을 실현하는 종임을 입증합니다. 그 첫 번째 기적이 죽은 제자의 아내를 돕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운 제자의 가정을 돌봄(1-7)

오늘날 부정적 관행의 온상임을 모르는 이는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부조리하고 이해하시 어려운 처지에서 성도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 대한 마땅한 반응은 세상을 향한 간절한 기도요 강청입니다. 엘리사는 한 제자의 부인의 강청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영적 위치를 증명해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선지자의 제자들의 아내 중의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빚 준 사람이 와서 나의 두 아이를 데려가 그의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하니 2엘리사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말하라 그가 이르되 계집종의 집에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하니 3이르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 4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 하니라 5여인이 물러가서 그의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그들은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오고 그는 부었더니 6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아들이 이르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 7그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말하니 그가 이르되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 하였더라(1-7)

 

엘리사는 북이스라엘과 두 나라가 모압과의 전쟁을 통해서 선지자로서의 권위를 확고하게 확보하였습니다. 이곳에서부터는 엘리사가 ‘엘리야의 제자’란 표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4장에 있는 네 가지 기적인 ‘가난한 제자의 고부의 궁핍한 문제’(1-7),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림’(8-37), ‘독이 든 음식을 고치는 일’(38-41), ‘한 솥을 끓여 200명을 먹이는 일’(42-44) 등이 등장합니다. 엘리사가 사역한 네 가지 일들은 생명을 살리고 궁핍을 벗어나게 하는 이야기를 모아놓은 모음집이기 때문에 화자는 시간적 배경에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첫 이야기는 선지자 중에 엘리사의 한 제자의 아내가 엘리사를 찾아와 부르짖으면서 시작됩니다. 이 여인은 엘리사의 제자의 아내였습니다. 여기 본문에서 ‘부르짖다’는 어려운 상황에 빠진 사람이 간저하게 도움을 청할 때 사용하는 말로서, 제자의 아내는 매우 다급하게 엘리사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이 엘리사의 제자의 아내는 남편이 죽고 그의 아내는 두 아들과 살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했습니다. 먹고살 것도 난감한데 빚까지 있어 경제적인 생활고를 호소했습니다. 제자의 아내는 자신의 남편이 죽은 사실과 그가 하나님을 경외한 선지자로 엘리사의 종이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것은 남편의 죽음이 죄로 인한 것이 아니며, 신실하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다가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아마 남편이 병들어 죽어가는 과정에서 많은 간호비와 생활비가 들어갔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빚을 졌는데, 갚지 못했던 것입니다. 빚을 준 사람이 종으로 삼기 위해 두 아이를 데려가려 상황이 벌려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모른 척한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여인은 엘리사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선 빚을 갚지 못하면 노예가 될 수 있었기에 율법에도 히브리 노예에 대한 규례가 언급 됩니다(출애굽기 21장). 신실한 하나님의 종으로 살았지만, 그 가족에게 만은 것은 비극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살아있을 때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서 권력자들의 비위나 맞추고 호의호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그 여인에게 집에 무엇이 있냐고 묻습니다. 엘리사는 그것을 기반으로 도움을 주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자신의 집에는 기름 한 그릇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제자의 아내의 궁핍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이웃에게서 그릇을 빌리되 될 수만 있으면 많이 빌려오라고 권고합니다. 혹시라도 적게 빌려와 그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염려한 것입니다.

 

엘리사는 여인에게 문을 닫고 빌려온 그릇들에 기름을 부어 채우라고 지시하였고, 여인은 지시대로 기름을 부어 그릇을 채우기 시작하는데, 빌려온 그릇을 다 채울 동안 기름이 계속해서 나왔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손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보면서, 또 아이들은 눈앞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보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자비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릇이 다 차자 기름은 멈추었고, 엘리사는 이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돈으로 두 아이와 함께 살 생활비로 쓰라고 합니다.

여기서 엘리사가 직접 행하지 않고도 놀라운 이적이 일어나는 것을 통해 엘리사의 능력과 하나님의 권능이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사역자의 가족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여기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인 예수님의 기적처럼, 하나님께서는 한 그릿 기름으로 여인의 모든 빚을 탕감하고 두 아들과 생활할 수 있을 만큼 넘치게 해주셨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이 자졌는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얼마나 곧이곧대로 순종했는지가 중요합니다.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도움(8-10)

하나님께서 먹여주신다는 믿음이 없으면, 더 이상 사역자가 될 수 없습니다. 사역자가 돈에 밝은 사람이 되면, 돈을 버는 것이 사역에 목적이 되면 더 이상 마음을 지킬 수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사명에 집중하고 따라 살아가는 삶만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8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에 이르렀더니 거기에 한 귀한 여인이 그를 간권하여 음식을 먹게 하였으므로 엘리사가 그 곳을 지날 때마다 음식을 먹으러 그리로 들어갔더라 9여인이 그의 남편에게 이르되 항상 우리를 지나가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 10청하건대 우리가 그를 위하여 작은 방을 담 위에 만들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두사이다 그가 우리에게 이르면 거기에 머물리이다 하였더라(8-10)

 

선지자의 제자 아내 이야기 다음으로 수넴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집니다. 수넴 지역은 이스르엘 마을 북쪽에 위치하며, 모레 산기슭에 있는 마을로 잇사갈 지파 땅입니다.

 

엘리사가 갈릴리 남쪽 지역을 여행할 때 수넴 지역을 지나는데, 어느 날 그곳에 이르렀을 때에 그곳에서 부유하고 신분이 높은 한 여성이 엘리사에게 자신의 집에서 식사하라고 강하게 권유하였습니다. 덕분에 엘리사는 수넴을 지날 때마다 이 여성의 집에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엘리사에게 음식을 제공한 이유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9)라고 설명합니다. 엘리사가 하나님의 사람, 즉 참 선지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란 말에는 엘리사를 하나님의 참 선지자로 생각한다는 것과 이런 선지자를 보내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녀는 음식 대접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남편에게 엘리사를 위한 방을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요청합니다.

 

본문에서 방에 침상, 책상, 의자, 촛대를 둔다는 것은 언제든지 와서 불편하지 않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배려가 넘치는 행동입니다. 이 집은 가끔 오는 손님을 위해 방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을 가진 부유한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 나온 선지자의 아내와 대조적입니다.

 

여기서 남편의 대답이 나오지 않고 바로 방에 누운 엘리사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이 이야기의 중심은 수넴 여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로도 남편은 어떤 역할도 하지 않습니다.

 

수넴 여인에게 원하는 것을 묻는 엘리사(11-13)

진정한 하나님의 일꾼이라면 자기 입장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입장만 생각하면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지만,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사람은 타인을 위한 배례와 중보기도가 끊기지 않습니다. 두 번째 나온 수넴 여인은 영적인 안목과 자신의 넉넉함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섬길 만큼 열정적인 헌신이 있었습니다.

 

11하루는 엘리사가 거기에 이르러 그 방에 들어가 누웠더니 12자기 사환 게하시에게 이르되 이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하니 곧 여인을 부르매 여인이 그 앞에 선지라 13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너는 그에게 이르라 네가 이같이 우리를 위하여 세심한 배려를 하는도다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하랴 왕에게나 사령관에게 무슨 구할 것이 있느냐 하니 여인이 이르되 나는 내 백성 중에 거주하나이다 하니라(11-13)

 

수넴 여인의 넘치는 호의로 수넴에 올 때마다 편한 생활을 하던 엘리사는 그녀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사환 게하시에게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수넴 여인과 엘리사가 직접 말하는 것이 아니고 게하시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신분이 높은 여성의 경우 남편이 아닌 남성을 대면하여 말하는 것이 당시 예절에 어긋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엘리사는 수넴 여인에게 자신을 위해 매우 신경 써서 세심하게 준비해준 것에 대해 감사의 표시를 한 후 자신이 이에 대해 어떤 보답을 해주면 좋을지를 묻습니다.

 

그러면서 엘리사는 혹시 왕에게 넣을 청이 있다거나 그 지역의 군사령관에게 넣을 청이 있는지 묻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아무리 어려운 요청이라도 들어주겠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당시 엘리사가 왕이나 군대 장관들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수넴 여인은 자신이 자신의 백성 중에 거한다고 말하면서 엘리사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나는 내 백성 중에 거주하나이다.’라는 것은 자신이 어려움에 처하면 가까이에 사는 친척들에게서 얼마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왕이나 군사령관처럼 권력 있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이 여성은 자신의 삶에 자신감이 있으며 만족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 여성의 삶에 결핍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에게는 아들이 없는 심각한 결핍이 있었고 그것은 당시 여성에겐 수치스런 일이었음에도 그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현재의 삶에 감사하고 욕심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걸 보면 수넴 여인은 엘리사의 덕을 보기 위해서 도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순수하게 도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순수하게 하나님을 위해 일할 때 가장 기뻐하십니다.

 

수넴 여인이 아들을 낳을 것을 알려줌(14-17)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면 벌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돈으로 자신의 만족을 채우지는 못합니다. 만족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행복감을 느낄 수도 없는 것입니다. 행복은 물질 자체에 있거나 물질을 모으는 행위에 있지 않음을 기억합시다. 진정으로 삶을 충만하게 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14엘리사가 이르되 그러면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할까 하니 게하시가 대답하되 참으로 이 여인은 아들이 없고 그 남편은 늙었나이다 하니 15이르되 다시 부르라 하여 부르매 여인이 문에 서니라 16엘리사가 이르되 한 해가 지나 이 때쯤에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하니 여인이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 하니라(14-17)

 

이런 수넴 여인의 마음을 알게 된 엘리사는 그녀에게 무엇이 필요하지 알고 꼭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엘리사는 그녀에게 어떻게 해주면 좋을지 자신의 시종인 게하시에게 묻습니다.

 

게하시는 그녀에게 아들이 없고 남편은 늙어서 아들을 가질 수 없는 상태임을 알려줍니다. 고대 가부장 사회에서 아들이 없다는 것은 그들의 이름을 이어갈 상속자가 없는 매우 불행한 상황입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수넴 여인을 다시 불러 내년 이맘때 품에 아들을 안을 것이라는 예언을 합니다. 여기서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17절에서 실제로 아들을 낳은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해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장에서의 엘리사의 이적 사역에는 여호와가 직접 말씀하시거나 행하신다는 언급 없이 오직 엘리사가 행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이 것은 엘리사가 큰 권능을 행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 뿐 여호와의 도움 없이 엘리사가 자신의 권능만으로 행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어떤 힘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엘리사의 예언을 수넴 여인은 믿지 않았고 속이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아마도 수넴 여인은 자신이 먼저 엘리사에게 아들을 요청했을지도 모릅니다. 수넴 여인은 하나님을 경외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은 잘 몰랐던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사의 말처럼 이 여인은 1년 뒤 아들을 품에 안음으로써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대로 주신 것이 아니라 믿음 그 이상으로 주심으로서 그 은혜에 어울리는 믿음으로 만들어 가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믿음에 어울릴 믿음으로 반응하시길 바랍니다. 어디에 있든지, 누구와 함께 하든지, 무슨 하든지 엘리사의 하나님과 동행하시고 하나님께서 예비한 축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주의 일에 충성합니다. 마땅한 충성이고 섬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우리가 당신에게 행한 것보다 훨씬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이 넉넉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결코 거래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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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3-02)


이스라엘 연합군과 모압과의 전쟁

 

열왕기하 3장 13-27절


모 스포츠 회사 광고 문구 중에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Impossible is Nothing)이라는 문구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복싱 선수인 알리가 했던 말입니다. 세상에 많은 일들 앞에서 연약한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자신의 사역을 위해서 합당한 일꾼을 찾으시고 계십니다.

 

  • 북이스라엘의 왕이 된 여호람은 반란을 일으킨 모압과 전쟁을 하기 위해 군사를 모으고, 유다의 여호사밧 왕과 동맹을 맺습니다. 하지만 예정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면서 광야에서 물 부족을 겪게 되고 연합군이 위기를 겪게 되는 가운데 드디어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의 선지자를 찾습니다. 이때 소개된 선지자가 바로 엘리사이고, 엘리사는 여호람 왕과 여호사밧 왕을 처음 만나게 됩니다.

 

여호람을 반기지 않는 엘리사(13-14)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이루어 가실 때, 사람들을 부러서 사용하십니다. 사역자의 기준은 얼마나 많은 중요한 일을 감당했었느냐, 그 사람이 어떤 중요한 인물이냐를 중요하게 보지 않습니다. 다만 사역을 감당할 사람이 얼마나 깨끗한 그릇인지를 살펴보실 뿐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기 원하신다면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13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의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로 가소서 하니 이스라엘 왕이 그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나이다 하니라 14엘리사가 이르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만일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얼굴을 봄이 아니면 그 앞에서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이다(13-14)

 

원래 모압은 북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받치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 아합이 죽자, 모압이 반역을 해서 더 이상 조공을 받치지 않았습니다. 위협을 느낀 북이스라엘 왕이 여호람은 남 유다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남유다는 북이스라엘을 도와서 전쟁에 참여하고, 에돔 역시 이스라엘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세 연합군들은 전쟁에서 큰 어려움을 만나서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옵니다.

 

북 이스라엘의 왕 여호람을 본 엘리사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습니다. 그는 여호람에게 굉장히 쌀쌀맞게 대합니다.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있냐’며, 그러면서 ‘당신의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로 가소서’고 빈정거립니다. 여기서 여호람의 부친인 아합의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들을 말합니다.

열왕기상 22장에 따르면 아합이 아람과 전쟁하기 위해 400명의 선지자를 불렀지만, 이들은 모두 아합이 이길 것이라는 거짓 예언을 합니다. 자신에게 좋은 말만 해주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만 듣었습니다. 여호람의 모친인 이세벨의 선지자는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입니다. 이세벨은 결혼하면서 바알 선지자와 제사장들을 데리고 이스라엘에 왔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바알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애를 쓴 인물입니다.

이렇게 아합과 이세벨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하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지자이자 엘리사의 스승인 엘리야를 죽이려고 찾아다닌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아들이 와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에 대해 엘리사는 여호람이 정말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은 건지 빈정거리며 의구심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런 엘리사의 말에 여호람은 그럴 수 없다며,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나이다’라고 자신들이 위기에 처해서 찾아왔다고 고백합니다. 여호람은 자신들의 위기를 여호와께서 모압과의 전쟁에서 지게하려는 뜻으로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여호람은 전쟁을 준비하면서 여호와의 뜻을 묻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에 처하자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모압의 손에 넘기기 위해 부르셨다면서 하나님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이런 여호람에게 엘리사는 자신의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라고 부르며, 유다 왕 여호사밧 때문에 여호람을 보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여호람 쪽으로 얼굴도 돌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냉정하게 말합니다. 엘리사는 여호람을 전혀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는 모든 전쟁의 주관자이자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이 라는 것을 나타내는 호칭입니다.

 

이 장면만 보면, 엘리사는 무례한 사람이고 여호람 왕은 매우 착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더욱이 열왕기하 3:2에서 여호람이 자신의 아버지 아함이 만들었던 바알의 주상을 없앴다고 나옵니다. 이런 모습으로 여호람은 괜찮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여호람에게 쌀쌀맞은 것은, 그 이유가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의 부모와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으니’라고 여호람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아함이나 이세벨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사의 태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악인을 대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물을 주심(15-20)

뜻하지 않는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을 중심으로 살라고 권고합니다. 어려울 때는 무엇인가 도움을 찾고 누구에게 인가 도움을 구할 때가 있습니다. 상황에 집착하면 힘들고 어렵지만, 눈앞의 상황에 함몰되기보다 말씀 앞에 서서 돌파구를 찾아야 합니다. 자신의 신뢰의 깊이와 너비는 얼마나 됩니까?

 

15이제 내게로 거문고 탈 자를 불러오소서 하니라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의 손이 엘리사 위에 있더니 16그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하셨나이다 17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너희가 바람도 보지 못하고 비도 보지 못하되 이 골짜기에 물이 가득하여 너희와 너희 가축과 짐승이 마시리라 하셨나이다 18이것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작은 일이라 여호와께서 모압 사람도 당신의 손에 넘기시리니 19당신들이 모든 견고한 성읍과 모든 아름다운 성읍을 치고 모든 좋은 나무를 베고 모든 샘을 메우고 돌로 모든 좋은 밭을 헐리이다 하더니 20아침이 되어 소제 드릴 때에 물이 에돔 쪽에서부터 흘러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15-20)

 

엘리사는 거문고 탈 자를 불러오라고 요청합니다. 여기서 ‘거문고 탈 자’는 ‘현악기를 타는 자’라는 뜻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사용되던 현악기는 일반적으로 수금으로 번역됩니다. 아마도 다윗이 사울을 위해 연주한 것과 같은 종류의 악기 일 것입니다. 엘리사가 수금 타는 자를 불러 달라고 한 이유는 하나님의 신탁을 받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선지자들이 정확히 어떤 의식을 통해 하나님의 신탁을 받았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사무엘상 10:5에 따르면 선지자 무리가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수금을 연주하는 사람들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올 것이라는 신탁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면 선지자들이 예언을 받을 때 음악으로 분위기를 만드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이 음악을 매개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고, 꿈이나 환상 혹은 음성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신탁을 받습니다(예레미야 1:11,15). 음악이 연주될 때 여호와의 손이 엘리사에게 임합니다. 손은 구약에서 권능의 상징으로 여호와의 손이 엘리사 위에 임했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엘리사에게 신탁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엘리사는 이 골짜기에 개천을 파라고 명령하며, 하나님께서 너희가 바람도 보지 못하고 비도 보지 못하지만 이 골짜기에 물이 가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바람도 비도 보지 못하고’란 말은 골짜기에 물이 가득 차는 것이 자연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라는 의미입니다. 물의 양이 넉넉하여 군인들뿐 아니라 그들이 데리고 온 모든 가축들까지 먹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하십니다. 이 정도의 일은 여호와께 매우 사소한 일이며, 이제 세 나라 연합군의 손에 모압을 넘겨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구체적으로 연합군이 모압의 모든 성읍을 헐고 완전히 폐허로 만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즉, 물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모압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주실 것에 대한 징표인 것입니다. 엘리사가 말한 대로 아침 소제 드릴 때 물이 에돔으로부터 흘러와 그 땅을 가득 채웠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연합군이 모압을 이김(21-25)

멸망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우상의 힘을 의지할 뿐입니다. 때로는 우상의 경배하는 방식은 자녀를 불살라 바치는 끔찍한 인신제사까지도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이들의 최후는 이토록 비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승리를 주십니다.

 

21모압의 모든 사람은 왕들이 올라와서 자기를 치려 한다 함을 듣고 갑옷 입을 만한 자로부터 그 이상이 다 모여 그 경계에 서 있더라 22아침에 모압 사람이 일찍이 일어나서 해가 물에 비치므로 맞은편 물이 붉어 피와 같음을 보고 23이르되 이는 피라 틀림없이 저 왕들이 싸워 서로 죽인 것이로다 모압 사람들아 이제 노략하러 가자 하고 24이스라엘 진에 이르니 이스라엘 사람이 일어나 모압 사람을 쳐서 그들 앞에서 도망하게 하고 그 지경에 들어가며 모압 사람을 치고 25그 성읍들을 쳐서 헐고 각기 돌을 던져 모든 좋은 밭에 가득하게 하고 모든 샘을 메우고 모든 좋은 나무를 베고 길하레셋의 돌들은 남기고 물매꾼이 두루 다니며 치니라(21-25)

 

21-23절은 모압의 관점으로 모압 사람들은 세 나라 연합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전쟁을 할 만한 남자들을 모두 소집하여 전쟁을 준비합니다. ‘갑옷 입을 만한 자’는 무장한 사람이란 뜻으로 주로 가볍게 무장한 사람들을 나타내는데, 이것은 소집된 사람들이 훈련된 정규군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란 의미입니다.

22절은 20절과 같은 시간으로 20절은 연합군의 시점에서 본 것이고, 22절은 모압의 시점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경계를 서던 모압 사람들은 골짜기에 흐르는 물에 태양이 떠오르며 붉게 비치는 모습을 보고 피라고 착각합니다. 전날 밤까지 골짜기에 물이었기 때문에 붉게 흐르는 물을 그냥 물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여호와의 역사가 갑작스럽게 일어났다는 의미입니다. 붉은 물을 피 라고 착각한 모압 사람들은 세 연합군의 왕들이 서로 싸워 살육하였고, 그 결과 피가 이렇듯 강처럼 흐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판단을 한 모압 군대는 이런 추론을 확신합니다. 그래서 서로 죽여 초토화된 진영에 들어가서 노략하자면서 이스라엘 진으로 쳐들어갑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진으로 쳐들어갑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진은 모압 사람들이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르게 잘 준비되어 있었고, 모압 사람들을 쳐서 죽이고 도망가는 사람들을 쫓아 모압 지역 까지 밀고 들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모압 지역을 초토화합니다. 연합군은 밭에 돌을 가득 던져 넣고 샘을 메워 유실수들을 베어버림으로 모압 지역을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마지막에 남은 백성들은 칼이나 활이 아닌 물매꾼들이 던진 물매에 맞아 죽습니다. 이것은 모압이 매우 처참하게 패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압 왕이 아들을 번제로 드림(26-27)

권력과 신앙이 잘못된 만남의 결과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성도들을 핍박하고 탄압합니다. 잘못된 사상은 하나님을 내려놓고 피조물을 우상화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이 막히기 때문에 점점 악한 방법으로 그들의 우상을 섬기게 되어 집니다. 대표적인 모습을 모압 왕에게서 봅니다.

 

26모압 왕이 전세가 극렬하여 당하기 어려움을 보고 칼찬 군사 칠백 명을 거느리고 돌파하여 지나서 에돔 왕에게로 가고자 하되 가지 못하고 27이에 자기 왕위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데려와 성 위에서 번제를 드린지라 이스라엘에게 크게 격노함이 임하매 그들이 떠나 각기 고국으로 돌아갔더라(26-27)

 

상황이 심각하여 연합군에게 전멸당할 위기에 처하자, 모압 왕은 칼 찬 군사, 즉 잘 훈련된 정예 병사 700명을 이끌고 연합군의 진을 돌파하여 에돔 왕에게 가려고 시도하였지만 실패합니다. 현재 에돔 왕도 연합군에 속해 있기 때문에, 모압이 에돔 왕에게 피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렇게 죽을 위기로 몰리자 모압 왕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데, 자신의 뒤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성 위에서 번제로 드렸습니다.

자식을 신에게 번제로 바치는 풍습은 구약에서 몰렉에게 자식을 드리지 말라는 율법의 금지 조항에 등장합니다. 이 제사는 이스라엘에선 금지되었지만, 고대 근동에선 종종 행해지던 것으로 위급한 상황에서 신에게 최대의 충성을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이런 행동을 본 모압 사람들은 맹렬한 분노를 품고 죽기 살기로 연합군에게 대항하였고, 결국 연합군은 이들에게 밀려 각자의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결국 모압을 완전히 멸망시키거나 진멸하지 못하고 전쟁에 승리하는 수준에서 전쟁을 마치고 돌아갑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압을 진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자신의 언약에 대해 신실한 한 사람, 전심으로 기도하는 한 사람, 모든 인간적인 계산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열어 가실 시간을 기대하고 상상하는 한 사람, 그 한 사람을 보시고 용서하시고, 그 한 사람을 인하여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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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3-01)


모압과 전쟁하려는 세 나라

열왕기하 3장 1-12절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 중요한 선택의 순간부터 시작해서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뜻과 인도를 따라 선택해야 합니다.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설익은 밥과 같은 반쪽짜리 신앙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되 온전히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섬기되 온전히 섬기지 못하고, 죄악을 버리되 온전히 떠나지 못하는 반쪽짜리 신앙으로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 엘리야의 후계자가 된 엘리사는 엘리야와 같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길에 여리고에서 백성들의 요청을 받고 열매를 못 맺게 하는 원인이 되는 물을 고쳐줍니다. 그러나 벧엘에서는 아이들이 엘리사를 대머리라고 놀리며 따라오자 여호와의 저주를 내려 42명의 아이들이 곰에게 죽게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심판을 내리시는 분임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 여호람의 행적(1-3)

죄가 위험한 것은 그것이 ‘선’을 품은 ‘악’이기에 언제든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심하지 않은 죄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악의 언저리를 서성거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악은 어떤 모양이라고 버리라고 권고합니다(데살로니가전서 5:22).

 

1유다의 여호사밧 왕 열여덟째 해에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을 열두 해 동안 다스리니라 2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의 부모와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그의 아버지가 만든 바알의 주상을 없이하였음이라 3그러나 그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를 따라 행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1-3)

 

아하시야 왕이 죽은 뒤에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여호람(요람)의 이야기로 연결됩니다. 아하시야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동생 여호람이 왕으로 등극했습니다. 그가 왕으로 등극한 때와 재위 기간, 수도 이름, 여호람에 대한 여호와의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의 부모는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우상 숭배자였던 아버지 아합과 어머니 이세벨이었습니다. 정도는 아니었지만, 여로보암의 죄를 그대로 따라서 악을 행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긴 했지만 전적으로 따르지 않은 미지근한 사람이었습니다.

 

여호람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같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것은 바알을 섬기던 부모의 길을 버리고 바알 주상을 없앤 것입니다. 즉, 여호람은 바알 신앙을 바리고 여호와께 돌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완전하게 돌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여로보암이 세워 놓은 단과 벧엘의 송아지 우상을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우상은 북 왕조가 세워질 때부터 가지고 있는 태생적 한계를 드러냅니다. 북왕조 초기부터 단과 벧엘의 송아지를 여호와라고 부르며 섬겼기 때문에 없애기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북왕조는 이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여호람은 완전하진 않지만 여호와를 바라보기 시작한 왕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죄가 위험한 것은 그것이 ‘선’을 품은 ‘악’이기에 언제든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부터 완전히 떠나길 원하십니다. 여호람 왕은 아함이 세운 우상들은 없앴지만, 여로보함의 죄는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온전히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은 실패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며 죄를 멀리하려고 하지만, 온전히 죄를 없이할 때는 실패할 때가 많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거나,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안하며 합리화하여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을 실패합니다. 아직까지 버리지 못한 죄가 있으면, 혹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어느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는 모습은 아주 작은 죄라도 없이 거룩한 자녀의 모습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모압의 전쟁(4-7)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은 바람 빠져가는 풍선마냥 점점 약해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악한 왕들에게 군사력과 동맹군 그리고 전략까지 있으면 다 갖추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전쟁에 대해 물을 필요도 없이 전쟁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다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전쟁과 함께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4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 5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 왕이 이스라엘 왕을 배반한지라 6그 때에 여호람 왕이 사마리아에서 나가 온 이스라엘을 둘러보고 7또 가서 유다의 왕 여호사밧에게 사신을 보내 이르되 모압 왕이 나를 배반하였으니 당신은 나와 함께 가서 모압을 치시겠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올라가리이다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고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으니이다 하는지라(4-7)

 

이런 여호람 왕은 이스라엘을 배반한 모압을 공격하기 위해, 유다의 여호사밧 왕과 에돔 왕과 함께 에돔의 광야 길로 나갑니다.

 

모압 왕 메사는 이스라엘이 점점 약해지자 이스라엘로부터 독립하려는 반란을 시작합니다. 모압은 다윗이 완전히 굴복시킨 후(사무엘하 8:2)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있으면서 조공을 바쳤습니다. 4절에 따르면 목축업을 하던 모압 왕 메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매년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바쳤습니다. 모압은 매년 상당한 양의 조공을 바치며 충성하다가 아합 왕이 죽은 후 이스라엘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아합 왕이 죽은 뒤 아하시야가 이스라엘 왕이 되었지만, 이스라엘의 국력은 약해 졌고 급기야 아하시야가 병까지 들면서 모압의 반란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모압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여호람이 왕이 되기 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왕이 된 여호람은 반란한 모압을 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모읍니다. 모든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정규군은 물론이고 백성들로 구성된 일반 군대까지 모두 모았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으고 상황을 살핀 뒤 그는 유다의 왕 여호사밧에게 사자를 보내어 배반한 모압 왕을 치기 위한 전쟁을 같이 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군대를 소집하고 유다에게 연합을 의뢰하는 것을 보면, 여호람은 모압을 반드시 되찾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람의 요청에 여호사밧 왕도 매우 흔쾌히 참여할 것을 약속합니다.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고 내 말은 당신의 말과 같다'는 말에서 ‘백성’은 군사를 의미하므로, 이 문장은 내 군대가 당신의 군대와 같다는 의미이며, 한마음으로 같이 싸우겠다는 의도를 전하고 있다. 이렇게 남북 왕조가 힘을 합쳐 모압을 치려는 것은 모압의 독립은 남북 왕조 모두에게 위협과 손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악한 왕에게는 전쟁을 위해 완전히 구비되어 승리를 위해 꼭 필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물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다 갖추었다고 해도 한 가지 핵심적인 것이 빠진 것은 전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빠진 전쟁이었습니다.

 

물이 없어 고생하는 연합군(8-10)

이 세상에 ‘완벽함’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가졌다고 자만하지 말고, 무엇을 잃었다고 절망하지 않을 일입니다. 오늘 내 걸음을 멈추게 하는 일이나 사람이 무엇이든, 그것 때문에 나 자신의 실상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8여호람이 이르되 우리가 어느 길로 올라가리이까 하니 그가 대답하되 에돔 광야 길로니이다 하니라 9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과 에돔 왕이 가더니 길을 둘러 간 지 칠 일에 군사와 따라가는 가축을 먹일 물이 없는지라 10이스라엘 왕이 이르되 슬프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는도다 하니(8-10)

 

남북이 같이 싸우기로 결정한 후, 두 왕은 어떤 길로 가서 어떤 전술을 사용하여 싸울지 의논합니다. 그래서 여호람이 여호사밧에게 어느 길로 가는 것이 좋은지 묻습니다. 여기서 여호사밧이 더 연장자이고 전쟁 경험도 많기에 여호람은 여호사밧을 의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에돔 광야 길로 가자고 제안합니다. 북 이스라엘에서 모압으로 가려면 북에서 모압으로 바로 가는 길도 있지만, 예루살렘, 헤브론, 아랏을 통과하여 에돔 광야를 거쳐 모압의 남쪽을 치는 길도 있습니다. 여호사밧은 두 번째 길을 제안한 것입니다. 좀 더 많은 군사가 움직일 수 있고 에돔의 힘도 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군사들을 데리고 에돔 길을 지나가려면 에돔의 동의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에돔도 자동적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됩니다. 모압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에돔의 입장에서도 모압이 강성해지는 것이 반갑지 않을 것이므로 도움을 받기가 쉬웠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 왕은 모압을 치기로 동맹을 맺고, 연합군은 빠른 산길이 아닌 남쪽으로 내려가 사해를 둘러 에돔 광야로 진군하였습니다.

그러나 광야를 진군하던 중에 뜻밖의 장애물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물 부족 문제였습니다. 남쪽 지방은 광야 지역으로 많은 군사를 이끌고 지나면서 물이 없는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연합군은 많은 군사들이 우회로로 움직였기 때문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고, 생각지 않게 물 부족을 겪게 된 것입니다. 9절에서 언급된 따라가는 가축은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되는데, 하나는 군사들을 위한 양식이고 또 하나는 제사를 위한 제물입니다. 고대에는 전쟁을 하기 전에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물어 신탁을 받고 전쟁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전쟁을 하러 다닐 때 가축들도 많이 이끌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일정이 지체되어 물이 있는 곳에 도달하지 못하였고, 물 부족 때문에 고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적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심각한 재난을 만나게 되면서 큰 절망에 빠집니다.

결국 세 나라가 연합하여 수적 우세를 통해 모압을 정벌하려던 삼국의 계획은 뜻하지 않은 재난으로 전쟁을 해보기도 전에 길에서 자멸할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이런 어려움에 빠지자 여호람은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모압 왕의 손에 넘기기 위해 불러 모으셨다며 여호와를 원망하고 탄식합니다. 사실 이 모든 일을 할 때 여호람과 여호사밧은 모압과 전쟁할지 여부를 하나님께 전혀 묻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수직 우위만 믿고 전쟁을 감행하려다가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히자 ‘슬프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는도다’라고 여호와를 원망한 것입니다. 위기 앞에서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종종 성도들 중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결연한 의지와 믿음의 결단은 없는 것을 봅니다. 이런 성도들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무늬만 신앙인인 반쪽짜리 신앙일 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을 온전히 누리지 못합니다. 온전히 여호와만은 섬기는 사람에게는 복이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기업을 영원토록 지키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시편 37:18).

 

엘리사를 찾아가는 왕들(11-12)

살아가면서 뜻하지 않게 힘든 일을 만나서, 전혀 예기치 않은 상황을 만납니다. 이 문제를 사람들이 스스로 예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여호와를 찾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문제 해결의 길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11여호사밧이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하는지라 이스라엘 왕의 신하들 중의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2여호사밧이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있도다 하는지라 이에 이스라엘 왕과 여호사밧과 에돔 왕이 그에게로 내려가니라(11-12)

 

여호와를 원망하고 있는 여호람 왕과 달리 유다 왕 여호사밧은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을 만나자 여호와를 찾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예전에 여호람의 아버지 아합과 함께 아람과 전쟁할 때도 아합에게 여호와의 뜻을 먼저 묻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선지자들이 긍정적인 대답을 하자 혹시 다른 선지자는 없는지 물으면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는 최소한 아합이나 여호람보다는 여호와를 더 의지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모압과의 전쟁에서는 압도적인 군사력 때문에 하나님께 묻는 것을 잊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위기 앞에서 자신이 잊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려움 속에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없는지 물으면서 그에게 여호와의 뜻을 알아보자고 제안합니다. 그러자 북이스라엘의 신하들 중 한 사람이 엘리사를 소개합니다. 여기서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이란 표현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 사용된 용례가 없기 때문에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이 문맥에서 볼 때 엘리야의 제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라는 사실로 참 선지자라는 신분을 확인받고 있는 것입니다. 당대에 엘리야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엘리사의 신분은 충분히 증명되었고,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전쟁하러 올라가던 길을 돌이켜 엘리사에게 내려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신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왕과 주권자가 되셔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길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직면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사인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 가능한 것입니다. 어려울수록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자신의 힘을 의지한 요람 왕은 어려움에 처하자 낙심했지만,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선지자를 찾았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날 때 당신의 반응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할 때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녀들의 삶을 항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적당히 반절만 순종하는 신앙은 싫어하십니다. 반쪽짜리 신앙을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볼 때 하나님의 인도와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온전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에 온전한 사랑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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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2-02)


엘리야의 다음 지도자인 엘리사

열왕기하 2장 15-25절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모든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하지만 항상 인간 사역자를 통해서, 그들과 함께 일하고 계셨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사역자들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들을 대하는 우리 태도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 하나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엘리야와 50명의 선지자의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사라집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외투로 요단강을 기름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를 엘리야의 후계자로 인정하셨음을 알게 해줍니다. 하지만 엘리야의 승천에 대한 예고를 들었던 선지자의 제자들은 엘리야의 승천을 믿지 못하고 엘리야의 시신을 찾겠다고 나섭니다.

 

후계자로 인정받은 엘리사(15-18)

하나님의 사역자이지만 사람 자체를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사명자의 수명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때까지입니다. 하지만 사명을 주실 때는 분명히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시는 분입니다. 아무리 현실이 암담하고 절망적일지도, 사명자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붙들고 일어서야 합니다.

 

15맞은편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그를 보며 말하기를 엘리야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엘리사 위에 머물렀다 하고 가서 그에게로 나아가 땅에 엎드려 그에게 경배하고 16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에게 용감한 사람 오십 명이 있으니 청하건대 그들이 가서 당신의 주인을 찾게 하소서 염려하건대 여호와의 성령이 그를 들고 가다가 어느 산에나 어느 골짜기에 던지셨을까 하나이다 하니라 엘리사가 이르되 보내지 말라 하나 17무리가 그로 부끄러워하도록 강청하매 보내라 한지라 그들이 오십 명을 보냈더니 사흘 동안을 찾되 발견하지 못하고 18엘리사가 여리고에 머무는 중에 무리가 그에게 돌아오니 엘리사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가지 말라고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였느냐 하였더라(15-18)

 

엘리야가 승천할 때 요단 건너편에 있던 제자들은 엘리사가 엘리야와 동일하게 외투로 요단강을 치자 강물이 갈라졌습니다. 이렇게 요단강을 가르고 돌아오는 엘리사의 모습을 선지자의 제자들이 보았습니다. 이 일을 통해 그 제자들은 엘리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이 엘리사에게 동일하게 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엘리사 앞에서 엎드리고 경배하며 최고의 경의를 표합니다. 이전에 엘리야에게 가졌던 외경심을 엘리사에게 보인 것입니다. 강가에 있던 50명의 제자들은 엘리사가 엘리야의 확실한 후계자라는 것을 증언해줄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16절에서 보면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엘리야의 시체를 찾을 수 있게 해달라는 강청을 합니다. 이들도 강 건너편에서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지만, 엘리야가 하늘로 갔다는 것은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를 데리고 가신 방법이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영이 하늘로 올렸다가 엘리야를 중간에 던져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한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살아서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나라에 들어간 사람이 없기에 의심할 만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선지자의 제자들로 선지자들이며,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보여주신 마지막 기적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살아 있는 상태로 하늘에 올리신 이유는 바로 이런 믿음 없는 세대에 하나님의 권능이 얼마나 큰지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모습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살았던 시대가 믿음을 잃어버린 시대였음을 잘 보여줍니다. 이들의 믿음을 잃어버린 시대였음을 잘 보여줍니다.

 

이들의 믿음 없는 요청에 엘리사는 사람들을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선지자의 제자들은 엘리사의 말을 듣지 않고 엘리사가 당황스러운 정도로 강청하였습니다. 엘리사는 할 수 없이 허락합니다. 이들은 엘리야가 회리바람에 삼키는 것을 보았지만, 불말과 불병거는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이들이 보낸 50명이 3일 동안 찾았지만, 엘리야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용사 50명이 3일 동안 찾았다는 것은 그 근처를 철두철미하게 수색했다는 것이고, 역설적으로 이는 엘리야가 정말로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을 증명해주었습니다. 허탕치고 여리고로 돌아온 그들에게 엘리사는 자신의 말을 믿지 않고 듣지 않은 것에 대해 책망합니다. 이를 통해 무리는 엘리사가 진정한 엘리야의 후계자로서 진실한 말을 하는 선지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선지자의 제자들의 모습은 마치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빈 무덤을 보고도 근심하던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은 참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의 증인마니 믿음의 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부활의 증인입니까? 누가 당신의 삶을 보더라도 이 부활을 믿는다고 생각할만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혹시 시신을 찾느라고 수고하는 선지자의 제자들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하지만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것이 믿음 없는 인간에 연약한 모습입니다. 그럴 때면 얼마나 고집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고집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할 수 있는 겸손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물을 깨끗하게 한 엘리사(19-22)

하나님의 일꾼들에게 대해 사람을 의지해서는 안 되지만, 그를 통해 일하실 하나님에 대해서는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군들 위에 성령이 임하시고 그를 통해서도 놀라운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사역자로 부르실 때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할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협력해야 합니다.

 

19그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우리 주인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20엘리사가 이르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21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22그 물이 엘리사가 한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에 이르렀더라(19-22)

 

엘리사가 엘리야보다 ‘갑정의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를 여리고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언급되는 성읍은 여리고입니다. 엘리사가 여리고에 머물고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여리고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와서 성읍의 위치는 좋지만, 물이 나빠서 땅이 소산을 내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하소연합니다. 땅이 소산을 내지 못한다는 것은 곡식이나 과일 등을 키울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물이 죽은 것입니다. 죽은 물을 살리는 것은 오직생명의 하나님, 창조의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여리고가 이렇게 곡식이 자랄 수 없는 저주의 땅이 된 것은 이전에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복할 때 내렸던 저주를 기억하게 합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를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저주했습니다. 이 저주에도 불구하고 엘리사 당시에는 여리고 성읍이 건축되어 있었고, 사람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지만, 물이 안 좋아 예전과 같은 영화를 누리진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엘리사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는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서 가져오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새 그릇은 부정한 것을 접하지 않은 정결한 것이며, 소금은 부패와 발효를 막는 기능이 있기에, 죄를 막거나 저주를 제거하는 기능이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즉, 이 두 물건은 어떤 과학적이거나 약리적 작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리고에 내려져 있던 저주를 제의적으로 제거하는 데 사용되는 상징적 물건들이다. 엘리사는 이 물건들을 들고 물의 근원으로 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그는 여기서 여호와의 영이 임한 이후 처음으로 여호와의 신탁을 전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물을 고쳐주셨고,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여호수아 때 여리고에 내리셨던 죽음의 저주에서 해방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의 능력을 믿고 그에게 나아가 여호와의 도우심을 구하는 이들에게 여호와께서는 자비를 베푸시고, 그곳에 내렸던 저주를 풀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겸손히 나오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오직 말씀으로 성읍 하나를 살리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셨다. 이 이적은 모세가 나뭇가지를 던져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꾼 것과 유사합니다. 이 이적은 그 순간에만 효력을 발휘한 것이 아니라 영구적으로 그 물을 고쳤습니다. 화자는 엘리사의 말처럼 고쳐졌고 오늘까지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엘리사의 말처럼 고쳐졌다는 것은 엘리사가 참 선지자라는 것을 화자가 인정한 것입니다.

 

엘리사는 죽은 아들을 살렸던 엘리야의 능력을 그대로 엘리사가 이어받은 것입니다. 그는 이제 죽음 땅, 어둠에 땅에서 생명의 하나님을 전하고 증명할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면 그는 참 선지자로 인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엘리사가 사람들에게 참 선지자로 인정받은 사건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엘리야와 엘리사의 능력을 이어 받은 선지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목회자만이 선지자가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입증할 선지자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주에 대한 무서운 결과(23-25)

사람은 누구와 함께 사느냐에 따라서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엘리사 주변에도 함께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의 삶을 빛나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엘리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신 하나님이시지만 반대로 심판하신 하나님이심을 볼 수 있습니다.

 

23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24엘리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의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 25엘리사가 거기서부터 갈멜 산으로 가고 거기서 사마리아로 돌아왔더라(23-25)

 

엘리사에게 엘리야의 사역을 계승하셨음을 또 실증해 보이는 마지막의 사건이 나옵니다. 언뜻 보면 차라리 없었으면 더 나았을 것처럼 보이는 당황스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벧엘에 도착했을 때, 엘리사는 모욕적인 일을 경험합니다.

 

벧엘에서 일어난 사건은 앞 여리고의 사건과 대조됩니다. 엘리사는 여리고를 떠나 벧엘로 가는데, 그는 엘리야와 함께 왔던 길을 거슬러 가고 있습니다. 벧엘은 산지에 있기 때문에 여리고에서 벧엘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벧엘에 거의 다 왔을 때, 젊은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엘리사를 향해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하면서 조롱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말하는 ‘작은 아이들’은 철없는 어린 아이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엘리사는 털이 많았던 엘리야와는 대조적으로 털이 없는 대머리였던 것 같습니다. 신명기에서 머리 미는 것을 금하고 있으므로 엘리사는 원래 대머리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엘리사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가부장 문화가 엄격한 이스라엘 사회에서 어린아이들이 외모 때문에 어른을 조롱하고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도덕과 윤리가 얼마나 해이해진 상태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젊은이들은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한 것은 외모를 가지고 놀리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들은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엘리사에게도 하늘로 올라가라고 비아냥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엘리사를 엘리야의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 엘리사에게 반말하고 모욕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고, 하나님의 종을 조롱하는 것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매우 가혹하게 대하십니다. 이러한 죄가 얼마나 무섭고 심각한 죄인지를 잘 보여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사는 그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였고, 곧바로 수풀에서 암곰 두 마리가 나와 아이들 중 42명을 찢어 죽이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아이들을 매우 귀중하게 생각하는 요즘의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일은 철저한 가부장 사회에서, 즉 아이들이 부모와 어른들을 존중하며 철저하게 복종해야 하는 것을 당연시하던 시대에 일어난 일입니다. 신명기에 따르면 부모에게 패역한 자식은 장로들 앞에서 재판을 받게 하고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어른이 선지자를 놀린 사건은 심각한 도덕적, 영적 해이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에 대한 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생명을 누리게 되지만, 하나님을 미시하는 자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

이 사건은 열왕기하 1장에서 엘리야를 강압적으로 데리러 온 오십부장과 50명의 군사들이 죽은 것과 유사합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경고하기 위해 무서운 처벌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많은 아이들이 죽었기에 현재 우리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이지만 본문은 엘리사의 이런 행동에 대해 부정적인 뉘앙스가 없습니다.

 

이 사건은 여리고 사건과 대조되는데, 엘리사는 여리고에서는 여호와께서 내린 죽음의 저주를 없애는 일을 했지만 벧엘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를 내려 죽음이 오게 하였습니다. 이런 대조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오는 자들은 생명을 얻지만, 하나님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자들에겐 죽음이 온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도 엘리사의 시대와 같이 하나님을 무시하는 분위기가 가득합니다. 엘리사가 당했던 조롱과 핍박이 기다입니다. 그렇다고 이처럼 즉각적인 심판이 임하는 시대도 아닙니다. 다만 치이고 당하고 인내한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일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생명의 근원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성도들은 함부로 다른 사람을 놀려서는 안 됩니다. 벧엘의 어린 아이들은 엘리사와 그를 세우신 하나님을 조롱하다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놀리는 것은 곧 그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놀리는 것과 같습니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을 조롱하고 있다면, 그것을 멈추시길 바랍니다. 그에게 사과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안에 따라서, 때를 따라서 일꾼을 구별하여 세우십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사람 자체를 과도하게 의지하지 않아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끝까지 의지하고 기대할 지도자는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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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2-01)

 


엘리야의 뒤를 잇는 엘리사

열왕기하 2장 1-14절


 

인생에서 좋은 스승과 제자를 만나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그만큼 스승으로부터 바른 정보와 노하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스승을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배움으로써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스승에게 제자들은 많은 것을 배우려는 열정과 성장하려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좋은 스승으로 모시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까? 엘리사에게 엘리야는 좋은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려고 했습니다.

 

  • 이스라엘은 뒤를 이을 후계자도 없이 아하시야 왕은 죽지만, 영적 지도자 엘리야는 후계자인 엘리사를 세워둡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던 엘리야를 사명을 마감한 후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서 하늘로 승천합니다. 이후에는 엘리사를 세워 예언자직의 계승을 엘리야를 대신하게 하십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감의 두 배를 받고 큰 능력을 행합니다.

 

승천을 앞둔 엘리야(1-6)

날마다 말씀이 이끄는 대로 사는 것, 그것이 가장 죽음을 잘 준비하는 일입니다. 고단한 현실 앞에서도 참다운 주권자와 실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의 조상들은 한결 같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영원히 사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엘리야에게 맡겨졌던 소명의 때가 다했습니다. 그의 시간표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1여호와께서 회오리 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와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 2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는지라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 3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로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 하니 이르되 나도 또한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하니라 4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엘리사야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라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매 5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6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는지라 이에 두 사람이 가니라(1-6)

 

엘리야를 통한 주신 말씀을 무시하고 죽은 우상 바알을 섬기던 아하시야 왕은 죽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산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영원한 집으로 들어갑니다. 아하시야가 죽은 후 이야기의 초점은 다시 선지자인 엘리야와 엘리사에게 향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무시했던 아하시야는 죽음으로 끝이 나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순종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시길 원하십니다.

 

엘리야는 아하시야에게 죽음을 선언하는 것으로 지상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합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이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사명을 정리하기 위해 곳곳을 방문합니다. 이런 엘리야의 마지막 시간들을 그의 제자 엘리사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영원한 집으로 데려가려고 하십니다. 본문에서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으로 하늘로 올리실 때’라고 표현합니다. 지상에서 살다가 죽지 않고 하나님께서 데려가신 인물은 성경 전체에서 에녹(창세기 5:24)과 본문의 나온 엘리야뿐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께서 데리고 가셨다’고 표현하고 있는 반면, 엘리야는 ‘하늘로 올리셨다.’고 표현합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지상을 떠나야 할 때가 온 것을 알고 그동안 지내던 길갈에서 출발합니다. 이 때 엘리사가 자신과 동행하려고 하자, 그에게 여기 머물라고 간곡히 부탁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벧엘로 보내시니 자신만 가겠다고 합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떠나는 모습을 제자인 엘리사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엘리야와는 달리 자신은 절대 엘리야를 떠나지 않겠다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제자로서 스승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같이 벧엘로 갑니다.

 

벧엘에 있던 선지자의 제자들 50명도 엘리야의 마지막을 알고 있었습니다. 엘리사에게 나와 ‘엘리야를 여호와께서 데려가실 것을 하느냐?’고 질문합니다. 엘리사는 자신도 안다고 말하면서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주닙니다. 이런 제자들의 말은 엘리야의 승천이 확실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의 영이 엘리야뿐 아니라 엘리사와 선지자의 제자들에게까지 엘리야의 승천 소식을 알려준 것입니다. 엘리사는 자신도 알고 있으니 이 일로 수선 떨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잠잠히 바라보라는 의미에서 조용히 라라고 당부합니다.

 

4-5절은 2-3절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다만 장소가 여리고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5-6절도 또다시 반복적인 사건을 보여줍니다. 이번에는 엘리야가 요단으로 갑니다. 엘리야와 엘시의 움직이는 경로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길갈은 벧엘 북쪽에 있는 도시이며, 여기서 시작하여 남쪽의 벧엘로 가고 여기서 여리고로 내려갔다가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이런 반복적인 예언 확인과 이동은 무엇을 보여주었습니까? 첫째 엘리사가 엘리야와 헤어질 준비를 하는 시간을 버는 역할을 합니다. 둘째는 엘리야가 죽은 것이 아니라 승천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엘리야 시대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또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고 살겠다고 결단한 것입니다. 영적 열망과 함께 살아가야할 현실은 너무나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엘리야 시대 못지않게 어두운 시대입니다. 엘리야와 같은 결단적인 신앙이 필요합니다.

 

능력을 두 배 요청하는 엘리사(7-10)

하나님 앞에 헌신을 다하는 사람은 상황과 여건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의 길을 묵묵히 순종하며 나갈 뿐입니다. 그냥 나가는 것이 아니라 열정과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달려가는 삶을 살아갑니다.

 

7선지자의 제자 오십 명이 가서 멀리 서서 바라보매 그 두 사람이 요단 가에 서 있더니 8엘리야가 겉옷을 가지고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마른 땅 위로 건너더라 9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 10이르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고(7-10)

 

엘리야의 승천으로 하나님의 사역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엘리야의 사역은 그의 제자 엘리사에게 온전히 승계됩니다. 엘리야는 그의 제자 엘리사를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엘리사는 끝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엘리야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스승에 대한 사랑으로 아쉬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후에 엘리야에게 임한 성령의 능력을 구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던 스승에게서 떨어지는 것은 마치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끝까지 엘리야를 따라갔던 것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드디어 마지막 여행자인 요단 강가에 도착했습니다. 선지자의 제자들 50명이 요단 강가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엘리사와 함께 엘리야의 승천을 증언할 증인들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엘리사는 엘리야의 사역을 승계 받기 위한 시험을 받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엘리야가 겉옷을 벗어 요단 강물을 쳤습니다. 그러자 강물이 양쪽으로 갈라졌고 마른 땅이 들어났습니다. 그 사이로 두 사람은 걸어서 강을 건넜습니다. 물을 처서 강을 가르는 모습은 모세가 지팡이를 들어 홍해를 가르는 모습이나 제사장들이 법궤를 들고 요단강에 발을 담갔을 때 요단강에 마른 땅이 드러나던 모습과 같습니다. ‘마른 땅’은 물 밑에 있던 땅이 들어날 때만 드물게 사용하는 단어이며, 출애굽기 14:21과 여호수아 4:17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강하게 임하고 있다는 상징이며, 여기서는 모세의 막대기 대신 엘리야의 옷이 능력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엘리야가 향하였던 기적을 보았고, 마지막 순간에 요단강을 가르는 놀라운 기적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함께 요단강을 건넜던 사람이 엘리사였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 열정이 잘 다듬어지고 검증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귀한 일꾼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넌 후, 엘리야는 자신의 승천이 가까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의 뒤를 따르는 엘리사를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9)고 질문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한결같은 소원을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9)라고 구합니다. 엘리야를 수행하던 엘리사는 그가 떠난 후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역을 앞두고 앞에 캄캄했을 것입니다. 그는 엘리야와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자신의 부족함을 느꼈고, 그에 비해 하나님의 사역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끝까지 쫓아다니며 갑절의 영감을 간청합니다. 여기서 ‘갑절’은 장자가 다른 이들에 비해 두 배의 유산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적 지도력을 계승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원하는 것은 사역의 기술이나 비법이 아니라 영성을 요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셨던 능력의 원천, 하나님을 따를 수 있었던 삶의 철학 그리고 하나님을 따르면서 배웠던 사상들을 온전히 배우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는 영적인 통찰력을 구하면서 엘리야에게 나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구하면서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나가고 있습니다(10). 영감의 갑절은 사람들이 줄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한 시대를 이끌고 갈 수 있는 영적 지도력은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오는 것입니다.

 

하늘로 승천한 엘리야(11)

하나님께서는 하늘위에 초월적인 하나님이십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 하늘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사람들이 알아듣는 말로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하늘에서만 전투를 벌이신 것이 아니라 땅에서 인간의 역사에 관여하신 하나님으로 자신을 들어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하늘로 부르시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11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11)

 

엘리야의 승천은 매우 급작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는데, 갑자기 불수레와 불말이 나타나 둘 사이를 갈라놓고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에 휩싸여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이것은 엘리사의 관점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여기서 불수레와 불말은 전승에서 여호와께서 타고 다니신다고 여겨지는 것들이며,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데리고 가셨음을 보여주기 위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많은 선지자들에게 예고하신 것처럼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선지자로서 지상에서 사역할 때, 그 많은 하나님의 권능을 행하고도 아합과 이세벨 같은 악한 지도자들로부터 너무 많은 고난과 멸시를 당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가장 영광스러운 방법으로 데려가신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엘리사(12-14)

궁극적인 기도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있습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인간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인간 지도자는 통로일 뿐이지 실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점점 세상은 어둡고 음란한 우상의 땅에서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최고의 지도자는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지도자입니다.

 

12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고 13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지고 돌아와 요단 언덕에 서서 14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의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이르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그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12-14)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자, 엘리사는 놀라서 부르짖습니다. 그는 엘리야를 향해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하며 부릅니다. 여기서 ‘내 아버지’란 표현은 스승을 부르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아버지’란 단어와 병거와 마병이란 단어가 같이 결합되면서, 아버지는 보호자의 의미를 갖게 됩니다. 지금 엘리사는 이스라엘을 지키던 보호자로 엘리야를 부른 것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데리러 온 불말과 불수레를 보고 엘리야에 대해 이런 보호자의 이미지를 갖게 됩니다.

하지만 그가 부르는 사이에 엘리야는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엘리사가 다시는 그를 보지 못했다는 것은 엘리야가 단지 강한 바람에 휩싸여 다른 곳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간 것을 확인한 엘리사는 혼자 남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옷을 찢습니다. 여기서 옷을 찢은 것은 스승인 엘리야를 잃은 슬픔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다만 엘리야가 죽은 것이 아니기에 애곡하거나 재를 뒤집어쓰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엘리야의 겉옷을 집어 와서 그의 옷으로 엘리야와 동일하게 물을 치며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를 부르는데, 이것은 자신이 엘리야에게 부탁한 소원을 하나님께서 들어달라고 외친 것입니다. 물을 치니 엘리야가 한 것처럼 물이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엘리사의 소원을 들어주셨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는 엘리사가 엘리야의 계승자로 인정받는 순간입니다. 엘리야에게 주어진 시험을 통해서 엘리야에게 주셨던 능력이 엘리사에게도 임하였습니다. 그가 엘리야의 사역을 계승 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승천하고 엘리사가 사역을 계승한 장면에 등장한 ‘불’, ‘바람’의 성령의 이미지는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 강림 사건을 생각나게 함입니다.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시자 불의 혀와 같은 것이 각 사람에게 임하고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했습니다. 엘리야의 사역이 엘리사에게 계승된 것처럼, 예수님의 사역이 그의 제자들에게 계승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된 우리에게까지 계승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갑절의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과 함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참으로 훌륭한 지도자가 그리운 시절입니다. 훌륭한 하나님의 일꾼 엘리야에 이어서 엘리사가 나왔습니다. 그 다음으로 지도자다운 지도자의 이름이 섣불리 떠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지속적으로 좋은 지도자를 세워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사명을 감당했던 엘리야처럼, 하나님을 무시하고 교만함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우리와 함께 하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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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1-02)


엘리야를 잡으려는 아하시야 왕

열왕기하 1장 13-18절


 

오늘날 시대를 권위가 사라진 시대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는 과거에 권위가 가득하였던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권위주의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권위주의가 있는 곳에는 그것을 배격하고자 하는 행동들이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이 시대에 권위가 살아 있어야 함을 느끼게 되어 집니다. 권위는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권위는 어디로부터 나와야 하겠습니까?

 

  • 하나님의 신탁을 전달받은 아하시야 왕은 엘리야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이나 사람들을 보내서 잡으려고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돌이키지 않고 세 번째 군대를 보냅니다. 세 번째 나갔던 오십부장은 엘리야에게 자비를 구하여 자신과 부하들의 생명을 보존하지만, 아하시야 왕은 끝까지 대적함으로 죽임 당하고 맙니다.

 

왕보다 높은 영성을 가진 신하(13-14)

하나님을 떠나 세속적인 안목을 가진 아하시야에게 그의 문제점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심판을 선언한 엘리야는 비판적 종교 지식인에 불과했습니다. 아하시야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를 존경하지도, 그 말을 경청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하들 중에는 지혜로운 자들도 있어 화를 면하기도 합니다.

 

13왕이 세 번째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보낸지라 셋째 오십부장이 올라가서 엘리야 앞에 이르러 그의 무릎을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하건대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 명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14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전번의 오십부장 둘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살랐거니와 나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하매(13-14)

 

엘리야를 잡으러 갔던 두 부류의 군대가 모두 실패하고 하늘에서 떨어진 불로 타 죽었습니다. 아하시야 왕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엘리야를 연행해 와서 그를 심문해 제거하거나 혹은 그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하시야의 명령을 수행하려던 사람들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완고한 독재자는 그의 주변 사람들도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두 번이나 오십부장과 그의 부하들이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아하시야 왕은 포기하지 않고 또 다시 오십부장과 50명의 부하들을 세 번째 엘리야를 체포하려고 보냅니다. 그러나 세 번째 파송된 오십부장은 이전의 오십부장들과는 다른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전에는 왕의 명령을 전하면서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엘리야를 만났을 때, ‘하나님의 사람이여!’라고 부르면서 엎드려 무릎을 꿇었습니다(13). 자신과 자신의 신하들의 목숨을 살려줄 것을 두 번이나 강청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태도입니다.

그는 앞에 행한 두 무리에게 임한 재앙을 자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새롭게 하나님 앞에 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대적하고 불순종했을 때 자신들에게 찾아올 결과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하들의 죽음은 아랑곳하지 않는 아하시야 왕과는 달리, 부하의 생명을 살려달고 호소한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권위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한 것입니다.

 

살아가다보면 자존심이 다른 사람들 앞에 무릎을 꿇지 못하도록 만든 경우들이 있습니다. 분명히 자신이 권위에 순종하고 명령에 따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많은 이유들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의 질서 속에 살아갈 때 그 권위가 인격적인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신 지도력의 질서 때문에 순종해야 한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순종함으로 한 팀워크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겸손한 자들을 돌아보신 하나님(15-16)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겸손함 뿐입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나오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십니다. 아하사야 왕은 하나님의 보호를 거절했지만 그 신하 오십부장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합니다. 그에 대한 응답이 본문에 나타납니다.

 

15여호와의 사자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내려가라 하신지라 엘리야가 곧 일어나 그와 함께 내려와 왕에게 이르러 16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사자를 보내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 하니 이스라엘에 그의 말을 물을 만한 하나님이 안 계심이냐 그러므로 네가 그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니라(15-16)

 

엘리야에게 이 오십부장은 자기 부하들의 생명을 아끼는 마음으로 간청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의 간청을 듣고 무시하지 않습니다. 두 번이나 동일한 일로 간절하게 행하는 모범적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한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자를 보내어 그들의 생명을 살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들과 함께 내려가고 있습니다(15). 엘리야는 선입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천사의 지시에 따라 그와 함께 아하시야 왕에게 갔습니다. 엘리야는 아하시야 왕 앞에 서서 담대하게 하나님을 무시한 왕의 잘못을 지적하고 왕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엘리야를 통해 아하시야에게 담대하게 전하는 하나님의 네 번째 메시지가 임하였습니다(16).

하나님의 네 가지 메시지는, 첫째, 모압이 독립을 선포하고 나갔고, 다음으로 자신이 난간에서 떨어져서 큰 병이 들었고, 세 번째는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자신들의 부하들을 통해 들려졌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종인 엘리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집니다. 이것은 아하시야에게 마지막 회개의 기회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하시야는 엘리야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하시야의 행위는 하나님을 인정할 수 없어서 우상 바알세붑에게 물으려고 했습니다. 그는 결국 마지막 하나님의 경고도 무시하고 맙니다. 그 결과는 파멸이었습니다.

 

앞선 일들을 통해 세 번째 오십부장은 앞선 두 오십 부장의 죽음을 통해 교훈을 얻은 것입니다. 그는 엘리야에게 겸손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세를 보임으로써 자신과 부하들의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하시야 왕은 마지막 기회까지 저버림으로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자신과 가족의 파멸(17-18)

우상을 숭배하면 결국은 죽습니다. 우상을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을 섬겨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회개의 기회를 주었지만 거절한 아하시야를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17왕이 엘리야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죽고 그가 아들이 없으므로 여호람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니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둘째 해였더라 18아하시야가 행한 그 남은 사적은 모두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17-18)

 

결국 엘리야의 경고,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하야시 왕은 죽게 되었습니다(참고 열왕기상 21:21). 그의 죽음은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자신의 대를 이을 수 있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엘리야의 예언대로 그의 가문인 오므리 왕조가 끊어졌습니다. 다음으로 여호람이 뒤를 아하시야 왕에 이어서 왕이 되었습니다.

아하시야는 엘리야로부터 직설적인 심판 선언을 들으면서도 엘리야를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심판 선언대로 죽었고, 그의 직계 가족의 왕위 계승도 단절되었습니다. 그와 그의 직계 가족은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에서 끊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경고든지 축복이든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아하시야 왕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하신 말씀대로 죽었습니다. 왕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결코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들도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하시야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살아계심을 보이셨습니다. 성도들의 태도는 믿음의 태도인지 불신의 태도인지를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잘못된 자존심은 자신을 파괴합니다. 하나님께 겸손히 간청해 용서하시고 당신을 세우실 것입니다.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합니다. 세상의 권세나 명예도 추락하는 운명들을 봅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주신 증거들 앞에 길을 멈추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잇다면 방향을 바꾸어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지금이 하나님만 의지하고 순종해야할 때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으며 겸손히 그리고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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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1-01)


추락한 왕권을 가진 아하시야 왕

열왕기하 1장 1-12절


 

우리 몸은 몸의 컨디션에 따라 신호를 보냅니다. 크게 아프기 전에 전조 증상으로 몸에서 이상 신호들을 보냅니다. 전조 징후들을 무시하다가 발병하게 됩니다. 발병한 후에, 관리를 잘할 걸하고 나중에 후회하는 것을 봅니다. 영적으로도 하나님께서는 작은 신호들을 통해 영적 상태에 대해 신호를 보냅니다. 작은 신호 속에서 하나님의 경고를 들을 수 있을 때, 좀 더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열왕기상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악한 왕인 아합이 죽은 것으로 마쳤습니다. 그리고 열왕기하는 아합에게 내리신 심판들이 실현되면서 시작합니다. 그이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면서 문제는 시작됩니다. 첫째는 속국이던 모압이 반역했고, 두 번째는 왕은 난간에서 떨어져 중병에 걸렸습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서기보다 우상을 찾아갔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그에게 죽음이 선포합니다.

 

모압의 반역(1-2a)

인생을 살아가다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련과 어려움이 닥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생각지 않는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시련의 순간과 어려움의 순간에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디서부터 온 신호인지를 분별해 내고 그것에 맞게 대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리석은 아하사야를 통해 우리들은 긍정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1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 2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1-2a)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배반한 왕조를 싫어하신다는 사실이 여기서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엘리야가 선고한 대로(왕상 21:29) 오므리 왕조는 ‘추락하기’ 시작합니다. 아합 왕이 죽고,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는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합과 어머니 이세벨과 똑같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들을 행합니다(참고 열왕기상 22:51-53).

 

성경에서는 아합이 자주 거론됩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훌륭한 지도자인 것처럼 보입니다. 정치적으로 안정되었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각에서 그는 성실하지 못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상을 섬기도록 이끌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것은 정치적인 어려움으로 도래합니다. 결과로 이스라엘은 점점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추락하기 시작합니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에게 두 가지 어려움을 통해 추락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이 점점 약해짐으로 그 틈을 타서 다윗 시대 이후로 수년 동안 속국이던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합니다(1). 종교적인 배반이 결국 정치적인 불안정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다음으로 설상가상으로 모압의 조공 중단으로 경제적 타격을 받고 있던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마저 자신의 부주의로 다락방 난간에서 추락해서 크게 다쳤습니다(2). 이것은 단순히 몸이 떨어졌다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부분에서 추락했음을 의미합니다. 다친 후 하나님이 아닌 우상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에서 보여 집니다.

이와 같이 국가적으로 그동안 통치해 오던 속국인 모압 떠나가게 되고, 또한 왕이 병들게 되는 이중고의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아무것도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계속적으로 주변에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임할 때,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신호입니다. 그 때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구할 때,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긍휼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추락을 막는 인위적 노력(2b-4)

하나님의 경고의 신호를 느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찾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처음에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것처럼 보이지만, 점점 힘겨우면 절대자를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점점 우상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아하시야 왕입니다.

 

2…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3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4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2b-4)

 

하나님의 경고 신호를 느꼈을 때, 아하사야 왕은 하나님 앞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점점 여러 가지 힘든 상황 속에서도 아하시야의 선택은 하나님께서 주신 왕위와 언약적 의미를 부정했습니다. 신하들을 보내어 이방신 바알세붑에게 자신의 병이 나을지 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부인하는 것은 사소한 죄가 아닙니다. 주를 부인하는 것은 바로 죽음이란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우상을 선택한다는 것은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어리석인 아하시야는 하나님께서 주신 신호에도 무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는지 단편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 또한 인정하지 않고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아하시야 왕은 자신이 병들었을 때, 하나님께 뜻을 물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리신 경고의 표징에 둔감해 어리석게도 회복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살아지고, 하나님의 선지자를 찾을 필요성이 없을 때, 그들은 이방 신상에 의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격노케 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고 살아가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문제가 생길 때 자신이 ‘가장 먼저 누구를 찾는가?’, ‘어떤 방법을 강구하는가?’가 하나님에 대한 태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판가름할 수 있는 것은, 문제가 생겼을 때, ‘주변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아가는가?’ 그러지 않으면, ‘인간적으로 유익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가?’가 중요한 기준점인 것입니다. 주위에 있는 인간적인 사람들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와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혹시 한 번 정도,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인간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걸음을 돌이켜야 된 때가 되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신호들에 귀를 기우려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죄를 행하고 있는 일들은 없는지, 삶에서 고쳐져야 할 부분은 없는지, 더 깊은 순종으로 나가야할 부분은 없는지 등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파악하시길 바랍니다. 헛된 것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붙드시던 손을 놓으면 누구든지 하나님 대신 붙들던 것과 함께 추락하고 말 것입니다.

 

사형 선고를 들은 사람(5-8)

하나님을 찾아야할 사람들이 잘못된 우상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있지 않고 반응하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에 반응하십니다. 아하사야의 불신앙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5사자들이 왕에게 돌아오니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돌아왔느냐 하니 6그들이 말하되 한 사람이 올라와서 우리를 만나 이르되 너희는 너희를 보낸 왕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고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네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고 보내느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더이다 7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올라와서 너희를 만나 이 말을 너희에게 한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더냐 8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5-8)

 

아하시야 왕은 그의 아버지 아합 왕과 어머니 이세벨을 닮아서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합니다. 외부적으로 힘들고 자신이 육체적으로 병든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 우상을 찾았습니다. 그는 에그론 신 바알세붑에게 자기 신하들을 보냈습니다. 단순히 다른 의견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대신에 섬기는 행위입니다. 우상 신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 앞에 가장 큰 범죄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죄의 대가는 무섭고 엄격하게 처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도움을 구해야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곳에 도움을 청하려 가는 곳에 하나님의 사자들을 보내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자인 선지자 엘리야를 올려 보내십니다.

그 아하사야의 사자들을 중간에서 만나서 두 사자들이 충돌합니다. 엘리야는 하늘같이 높아 보이는 왕의 정치권력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왕의 사자들에게 아하시야 왕이 죽음을 선언합니다. 담대하게 살아계신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고 죽은 신 바알세붑을 좇는 아하시야 왕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의 신하들을 꾸짖고,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왕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아하시야의 신하들이 우상 바알세붑에게 묻기 위해 가던 도중에 엘리야를 만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신하들은 결국 바알세붑에 가서 묻지도 못하고 엘리야를 만나고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아하사야 왕은 자신에게 돌아온 신하들에게 질문합니다.

 

5사자들이 왕에게 돌아오니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돌아왔느냐 하니 6그들이 말하되 한 사람이 올라와서 우리를 만나 이르되 너희는 너희를 보낸 왕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고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네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고 보내느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더이다(5-6)

 

아하사야 왕은 마땅히 기대했던 바알세붑의 응답이 아닌 다른 응답을 받고 온 신하들에 대한 그의 질문이었습니다. 신하들은 엘리야가 자신들에게 전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왕에게 전합니다.

그 내용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6). 첫째는 마땅히 기도해야할 대상에게 기도해야할 것이고, 두 번째는 아하시야가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범죄하게 되면 자신의 삶을 지탱해 주던 생명의 줄이 끊어지게 됩니다. 나무가 햇볕을 공급받지 못하면 점점 죽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질 때 일어나는 일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사람들은 마땅히 찾아야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찾지 않고, 세상에 다른 것들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동일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향한 경고는 절망이고 사망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나라에는 번영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회에서는 회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하시야 왕은 신하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반응을 듣게 됩니다. 그 사실을 듣고 크게 놀라고 두려워합니다. 에그론에 있는 바알세붑을 찾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범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집니다.

 

7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올라와서 너희를 만나 이 말을 너희에게 한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더냐 8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7-8)

 

아하시야 왕은 신하들이 길거리에서 만났던 사람의 말을 전하고 있을 때, 그 말을 할 만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하들은 몰랐지만, 왕은 분명하게 그가 바로 엘리야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엘리야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인지를 기억합니다. 자신의 아버지 아합과 어머니 이세벨과의 적대적인 관계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점점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하사야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7). 어리석은 아하시야는 엘리야를 알면서도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함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성도들은 오늘날 거짓이 무성한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담대히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 것을 쫓아가는 삶이, 마치 우상을 찾아가는 모습이 없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아마 그런 길로 가고 잇는 사람들에게 도중에서 가로 막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하나님이 없어서 그걸 의지하느냐?’고 호통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와서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권위를 무시하는 어리석은 왕(9-12)

하나님을 떠나 세속적 안목을 가진 아하사야에게 그의 문제점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심판을 선언한 엘리야는 비판적 종교 지식인에 불과했습니다. 아하시야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를 존경하지도 그 말을 경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생각을 거슬리므로 제거의 대상일 뿐입니다.

 

9이에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매 그가 엘리야에게로 올라가 본즉 산 꼭대기에 앉아 있는지라 그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10엘리야가 오십부장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너의 오십 명을 사를지로다 하매 불이 곧 하늘에서 내려와 그와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살랐더라 11왕이 다시 다른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니 그가 엘리야에게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속히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하니 12엘리야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너의 오십 명을 사를지로다 하매 하나님의 불이 곧 하늘에서 내려와 그와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살랐더라(9-12)

 

아하시야 왕은 자신의 신하들에게 심판을 경고할 사람은 엘리야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외모의 특징만으로도 충분히 엘리야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언을 듣고 큰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죽음의 공포로 인해 아하시야가 특별한 행동을 취합니다.

 

아하시야 왕은 엘리야를 연행해 와서 그를 심문해서 제거하거나 혹은 입에 재갈을 물려서 아무 말을 못하도록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두 차례나 오십부장과 오십 명의 군사를 보내 엘리야를 강제로 생포해 오도록 했던 것입니다.

 

왕의 명령을 받은 첫 번째 오십부장과 군사들이 갈멜산에 있던 엘리야에게 가서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라고 외칩니다. 이곳에 두 가지 모순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엘리야를 향하여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들은 진정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해서 그렇게 부른 것은 아닐 것입니다. 두 번째는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고 한 것입니다.

갈멜산은 아버지 아합과 영적인 전투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준 산이었습니다. 그들은 아하사야 왕의 명령이기 때문에 엘리야는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높으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낮은 지상의 왕의 명령으로 복종시키려 한 것입니다. 왕의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을 굴복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겟세마넷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잡으려 왔던 로마 병사들과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의 반응은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불을 떨어뜨려서 너를 불살라 버릴 것이다.’(10)라고 경고합니다. 이미 갈멜산에서 전투와 같이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더 나가서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자인 것을 증명해 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엘리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권위가 높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엘리야의 성품이나 능력 때문에 순종한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아하시야 왕은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라 명령을 듣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엘리야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아하사야 왕의 명령을 집행하러 온 오십부장에게 말했던 것처럼 오십부장과 모든 군사들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그들을 태워 죽었습니다.

 

그러나 아하사야 왕은 쉽사리 포기하지 않고, 다른 오십부장과 군사 50명을 갈멜산의 엘리야에게 보냈습니다. 그들은 엘리야에게 가서 동일한 말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전과 같이 하늘에서 불을 내려 불태울 것을 말하고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또 하늘에게 불을 내려서 그들을 태워 죽였습니다. 엘리야는 왕의 마음대로 할 대상이 아닙니다. 엘리야를 체포하기보다는 엘리야가 전한 말씀을 붙들어야 할 하나님의 사람임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아하시야 왕은 계속적으로 어려움을 맛보다면서도 교만한 마음을 꺾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대변인인 엘리야를 무력으로 제압하려는 하나님을 향한 적대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좌우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순종의 대상임을 거부한 채,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재촉하였습니다. 완악한 독재자는 주변 사람들도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대항하는 사람들은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을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보호해줄 다른 신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받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도 아하시야 왕처럼 다른 길로 가고 있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제 그만 멈추고 포기하고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절대적인 명령은 순종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왕의 명령에만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 일로 인하여 불어 타서 죽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에게 누구의 음성에 순종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특히 성도들은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올바른 영적인 질서를 맺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작은 신호 메시지들을 감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을 때에 돌아섰어야 했습니다. 마치 히스기야가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갔던 것처럼 아하시야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으로 가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만 믿고 담대히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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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왕기하 서론


》열왕기하 서론《


열왕기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왕위를 이어받고 통일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범죄로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이스라엘은 다윗 왕조의 남유다와 여로보암이 세운 북이스라엘로 나뉘게 됩니다. 이후로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왕들이 교차적으로 기록되며 열왕기상은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인 아합의 죽음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열왕기하는 북이스라엘의 멸망과 남유다의 멸망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마치고 있습니다.

 

1. 명칭

‘열왕기하’는 원래 히브리 원전에서는 열왕기상과 분리되지 않은 한 권의 책입니다. 열왕기하의 명명 과정에 대해서는 열왕기상의 서론에서 언급하였습니다.

 

2. 저자와 기록 연대

⑴ 기록 연대

현재 열왕기는 포로기 중간쯤인 주전 561년 이전으로 사료를 제공해 줍니다. 그리고 본서에는 주전 538년 이후의 사실들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주전 538년은 유대인들이 스룹바벨의 영도 하에 바벨론으로부터 1차 귀환했던 해입니다. 본서의 저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이 사실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전 561년 여호야긴 왕의 석방 사건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서 본 서의 저작 연대는 열왕기상과 함께 주전 537-561년 사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⑵ 기록 저자

저자는 다양한 옛 전거들을 인용하는 것으로 보아 열왕기는 분명 바벨론 포로 기간의 자유로운 창작품이 아니라 자료에 근거한 역사서입니다.

저자가 이용할 수 있는 자료들의 범위와 여호야긴 왕의 운명에 대한 관심으로 볼 때 저자는 아마도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10년 전인 주전 597년에 여호야긴 왕과 포로로 끌려간 고위직의 귀족들이나 서기관으로 추측됩니다.

열왕기 사관은 신명기의 가르침에 뿌리는 두고 있어 언약에 대한 충성, 율법의 준수, 우상숭배와 하나님의 징벌과 땅에서 쫓겨남 등 신명기적 용어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3. 배경

열왕기 상·하서는 원래 히브리 원전에 한 권의 책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기록 내용의 관련 연대나 범위의 차이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열왕기상과 동일한 집필 동기와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참고로 당시 주변 강대국들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 고대 최강국이었던 이집트가 쇠퇴하면서 이스라엘 주변에는 이렇다 할 강대국이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주전 730년경 앗수르가 갑자기 강성해지기 시작해 주전 722년에 사르곤 왕이 북이스라엘을 점령하기에 이릅니다.

한편 앗수르의 남쪽에 바벨론의 세력이 서서히 확대되기 시작했는데, 느부갓네살 왕 때에 이르러 갈그미스 전투에서 이집트와 앗수르의 연합군을 무찌르고 최강국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느부갓네살은 곧이어 팔레스틴을 침공했고, 예루살렘을 세 번씩이나 공격하여 마침내 주전 586년 남유다를 정복하였습니다.

 

4. 내용

전반부는 남북 왕국이 서로 공존하다가 북왕국이 먼저 앗시리아에게 주전 722년에 함락됨으로써 분열 왕국 시대가 종결될 때까지, 즉 주전 840-722년 사이의 남북 왕국 각각의 역사를 번갈아 가며 다룹니다.

왕을 중심으로 하자면 북왕국은 제8대 왕 아하시야로부터 마지막 제19대 왕 호세아까지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남왕국 유다는 제5대 요람 왕 때부터 제12대 아하스 왕 때까지의 역사입니다.

이런 일련의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계속 강조되고 있는 두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계속 오래 참으시며 사랑의 보호와 심판의 경고를 주심으로 백성들이 돌아올 기회를 주셨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남북 왕국이 공히 범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늘 남왕국 유다에 대해서는 더 기회를 주셨고, 또한 징계도 약하게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다윗 왕가가 잘해서가 아니라 그 옛날 다윗에게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에게까지 다윗 왕가의 왕권을 연결시켜 주심으로 결국 다윗 왕가를 영원한 왕가로 삼아 주시겠다고 하신 언약의 말씀을 성실히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후반부는 일단 북왕국이 앗수르에게 하나님이 심판으로 함락된 이후에, 그래도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각됩니다.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 남유다 왕국은 잔존하였지만, 그들도 역시 타락하여 바벨론 제국에게 멸망할 때까지의 역사를 다룹니다. 즉 주전722-586년까지의 136년간의 역사를 이룹니다. 왕을 중심으로 아야기하자면 제12대 아스하에서 제20대 히스기야 시대까지의 역사입니다.

본 서의 특이한 점은 이러한 인간의 타락을 통렬하고도 여실히 드러내시는 하나님이 유다 왕국의 멸망이라는 결정적 심판을 가하면서도 이스라엘 민족은 결코 멸절시키지 않고 선민의 역사를 계속시키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열왕기하는 주전 970-840년경까지 솔로몬의 통일 왕국 시대에서 분열 왕국 초기의 역사를 다룬 상권에 이어 주전 840-586년까지 남북왕국 후기 역사를 보도하고 있습니다.

본 서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게 멸망할 때까지의 남북 완조의 역사를 다루는 전반부 1-17장과 그 이후 주전 586년 남왕국 유다까지도 바벨론 왕에 멸망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 후반부 18-25장으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본 서는 이사야에서 말라기까지 이르는 대부분의 주요 선지서의 시대적 배경을 이루고 있음에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5. 구속자적 의미

다윗 왕조 사람들도 북왕조 사람들처럼 타락했고 부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왕조가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즉 예수그리스도에까지 이어질 다윗 언약과 그를 통한 구속사의 성취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선민 이스라엘을 향하여 회개와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였던 엘리사 등의 선지자들과 타락한 선민 국가의 종교를 개혁하며, 또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의 역할을 담당했던 히스기야나 요시아 같은 선한 왕들은 택한 성도에게 선지자요, 왕으로서의 사역을 담당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예표해 줍니다.

 

6. 내용 분해

Ⅰ. 남북 분열 왕국 공존 시대(1-17장)

    1. 아하시야의 북이스라엘 통치(왕상22:51-왕하1:18)

     2. 여호람의 북이스라엘 통치(왕하2:1-8:15)

     3. 요람과 아하시야의 남유다 통치(왕하8:16-9:29)

     4. 예후의 북이스라엘 통치(왕하9:30-10:36)

     5. 아달랴와 요아스의 남유다 통치(왕하11:1-12:21)

     6. 여호아하스와 요아스의 북이스라엘 통치(왕하13:1-25)

     7. 아마샤의 남유다 통치부터 북이스라엘의 멸망 까지(왕하14:1-17:41)

Ⅱ. 남왕국 유다의 잔존 시대(18-25장)

     1. 히스기야의 남유다 통치(왕하18:1-20:21)

     2. 므낫세, 아몬, 요시아의 통치(왕하21:1-23:30)

     3. 여호아하스의 유다 통치와 애굽의 포로됨(왕하23:31-34)

     4. 여호야김의 유다 통치와 바벨론 제1차 포수(왕하23:35-24:7)

     5. 여호야긴의 유다 통치와 바벨론 제2차 포수(왕하24:8-16)

     6. 시드기야의 유다 통치와 바벨론 제3차 포수 및 남유다 멸망(왕하24:17-25:21)

     7. 그달리야 총독의 유다 통치(왕하25:22-26)

     8. 여호야긴의 석방(왕하25: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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