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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3-01)


모압과 전쟁하려는 세 나라

열왕기하 3장 1-12절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 중요한 선택의 순간부터 시작해서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뜻과 인도를 따라 선택해야 합니다.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설익은 밥과 같은 반쪽짜리 신앙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되 온전히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섬기되 온전히 섬기지 못하고, 죄악을 버리되 온전히 떠나지 못하는 반쪽짜리 신앙으로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 엘리야의 후계자가 된 엘리사는 엘리야와 같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길에 여리고에서 백성들의 요청을 받고 열매를 못 맺게 하는 원인이 되는 물을 고쳐줍니다. 그러나 벧엘에서는 아이들이 엘리사를 대머리라고 놀리며 따라오자 여호와의 저주를 내려 42명의 아이들이 곰에게 죽게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심판을 내리시는 분임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 여호람의 행적(1-3)

죄가 위험한 것은 그것이 ‘선’을 품은 ‘악’이기에 언제든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심하지 않은 죄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악의 언저리를 서성거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악은 어떤 모양이라고 버리라고 권고합니다(데살로니가전서 5:22).

 

1유다의 여호사밧 왕 열여덟째 해에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을 열두 해 동안 다스리니라 2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의 부모와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그의 아버지가 만든 바알의 주상을 없이하였음이라 3그러나 그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를 따라 행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1-3)

 

아하시야 왕이 죽은 뒤에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여호람(요람)의 이야기로 연결됩니다. 아하시야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동생 여호람이 왕으로 등극했습니다. 그가 왕으로 등극한 때와 재위 기간, 수도 이름, 여호람에 대한 여호와의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의 부모는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우상 숭배자였던 아버지 아합과 어머니 이세벨이었습니다. 정도는 아니었지만, 여로보암의 죄를 그대로 따라서 악을 행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긴 했지만 전적으로 따르지 않은 미지근한 사람이었습니다.

 

여호람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같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것은 바알을 섬기던 부모의 길을 버리고 바알 주상을 없앤 것입니다. 즉, 여호람은 바알 신앙을 바리고 여호와께 돌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완전하게 돌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여로보암이 세워 놓은 단과 벧엘의 송아지 우상을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우상은 북 왕조가 세워질 때부터 가지고 있는 태생적 한계를 드러냅니다. 북왕조 초기부터 단과 벧엘의 송아지를 여호와라고 부르며 섬겼기 때문에 없애기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북왕조는 이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여호람은 완전하진 않지만 여호와를 바라보기 시작한 왕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죄가 위험한 것은 그것이 ‘선’을 품은 ‘악’이기에 언제든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부터 완전히 떠나길 원하십니다. 여호람 왕은 아함이 세운 우상들은 없앴지만, 여로보함의 죄는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온전히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은 실패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며 죄를 멀리하려고 하지만, 온전히 죄를 없이할 때는 실패할 때가 많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거나,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안하며 합리화하여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을 실패합니다. 아직까지 버리지 못한 죄가 있으면, 혹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어느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는 모습은 아주 작은 죄라도 없이 거룩한 자녀의 모습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모압의 전쟁(4-7)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은 바람 빠져가는 풍선마냥 점점 약해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악한 왕들에게 군사력과 동맹군 그리고 전략까지 있으면 다 갖추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전쟁에 대해 물을 필요도 없이 전쟁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다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전쟁과 함께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4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 5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 왕이 이스라엘 왕을 배반한지라 6그 때에 여호람 왕이 사마리아에서 나가 온 이스라엘을 둘러보고 7또 가서 유다의 왕 여호사밧에게 사신을 보내 이르되 모압 왕이 나를 배반하였으니 당신은 나와 함께 가서 모압을 치시겠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올라가리이다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고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으니이다 하는지라(4-7)

 

이런 여호람 왕은 이스라엘을 배반한 모압을 공격하기 위해, 유다의 여호사밧 왕과 에돔 왕과 함께 에돔의 광야 길로 나갑니다.

 

모압 왕 메사는 이스라엘이 점점 약해지자 이스라엘로부터 독립하려는 반란을 시작합니다. 모압은 다윗이 완전히 굴복시킨 후(사무엘하 8:2)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있으면서 조공을 바쳤습니다. 4절에 따르면 목축업을 하던 모압 왕 메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매년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바쳤습니다. 모압은 매년 상당한 양의 조공을 바치며 충성하다가 아합 왕이 죽은 후 이스라엘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아합 왕이 죽은 뒤 아하시야가 이스라엘 왕이 되었지만, 이스라엘의 국력은 약해 졌고 급기야 아하시야가 병까지 들면서 모압의 반란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모압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여호람이 왕이 되기 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왕이 된 여호람은 반란한 모압을 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모읍니다. 모든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정규군은 물론이고 백성들로 구성된 일반 군대까지 모두 모았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으고 상황을 살핀 뒤 그는 유다의 왕 여호사밧에게 사자를 보내어 배반한 모압 왕을 치기 위한 전쟁을 같이 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군대를 소집하고 유다에게 연합을 의뢰하는 것을 보면, 여호람은 모압을 반드시 되찾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람의 요청에 여호사밧 왕도 매우 흔쾌히 참여할 것을 약속합니다.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고 내 말은 당신의 말과 같다'는 말에서 ‘백성’은 군사를 의미하므로, 이 문장은 내 군대가 당신의 군대와 같다는 의미이며, 한마음으로 같이 싸우겠다는 의도를 전하고 있다. 이렇게 남북 왕조가 힘을 합쳐 모압을 치려는 것은 모압의 독립은 남북 왕조 모두에게 위협과 손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악한 왕에게는 전쟁을 위해 완전히 구비되어 승리를 위해 꼭 필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물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다 갖추었다고 해도 한 가지 핵심적인 것이 빠진 것은 전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빠진 전쟁이었습니다.

 

물이 없어 고생하는 연합군(8-10)

이 세상에 ‘완벽함’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가졌다고 자만하지 말고, 무엇을 잃었다고 절망하지 않을 일입니다. 오늘 내 걸음을 멈추게 하는 일이나 사람이 무엇이든, 그것 때문에 나 자신의 실상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8여호람이 이르되 우리가 어느 길로 올라가리이까 하니 그가 대답하되 에돔 광야 길로니이다 하니라 9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과 에돔 왕이 가더니 길을 둘러 간 지 칠 일에 군사와 따라가는 가축을 먹일 물이 없는지라 10이스라엘 왕이 이르되 슬프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는도다 하니(8-10)

 

남북이 같이 싸우기로 결정한 후, 두 왕은 어떤 길로 가서 어떤 전술을 사용하여 싸울지 의논합니다. 그래서 여호람이 여호사밧에게 어느 길로 가는 것이 좋은지 묻습니다. 여기서 여호사밧이 더 연장자이고 전쟁 경험도 많기에 여호람은 여호사밧을 의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에돔 광야 길로 가자고 제안합니다. 북 이스라엘에서 모압으로 가려면 북에서 모압으로 바로 가는 길도 있지만, 예루살렘, 헤브론, 아랏을 통과하여 에돔 광야를 거쳐 모압의 남쪽을 치는 길도 있습니다. 여호사밧은 두 번째 길을 제안한 것입니다. 좀 더 많은 군사가 움직일 수 있고 에돔의 힘도 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군사들을 데리고 에돔 길을 지나가려면 에돔의 동의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에돔도 자동적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됩니다. 모압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에돔의 입장에서도 모압이 강성해지는 것이 반갑지 않을 것이므로 도움을 받기가 쉬웠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 왕은 모압을 치기로 동맹을 맺고, 연합군은 빠른 산길이 아닌 남쪽으로 내려가 사해를 둘러 에돔 광야로 진군하였습니다.

그러나 광야를 진군하던 중에 뜻밖의 장애물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물 부족 문제였습니다. 남쪽 지방은 광야 지역으로 많은 군사를 이끌고 지나면서 물이 없는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연합군은 많은 군사들이 우회로로 움직였기 때문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고, 생각지 않게 물 부족을 겪게 된 것입니다. 9절에서 언급된 따라가는 가축은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되는데, 하나는 군사들을 위한 양식이고 또 하나는 제사를 위한 제물입니다. 고대에는 전쟁을 하기 전에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물어 신탁을 받고 전쟁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전쟁을 하러 다닐 때 가축들도 많이 이끌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일정이 지체되어 물이 있는 곳에 도달하지 못하였고, 물 부족 때문에 고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적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심각한 재난을 만나게 되면서 큰 절망에 빠집니다.

결국 세 나라가 연합하여 수적 우세를 통해 모압을 정벌하려던 삼국의 계획은 뜻하지 않은 재난으로 전쟁을 해보기도 전에 길에서 자멸할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이런 어려움에 빠지자 여호람은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모압 왕의 손에 넘기기 위해 불러 모으셨다며 여호와를 원망하고 탄식합니다. 사실 이 모든 일을 할 때 여호람과 여호사밧은 모압과 전쟁할지 여부를 하나님께 전혀 묻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수직 우위만 믿고 전쟁을 감행하려다가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히자 ‘슬프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는도다’라고 여호와를 원망한 것입니다. 위기 앞에서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종종 성도들 중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결연한 의지와 믿음의 결단은 없는 것을 봅니다. 이런 성도들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무늬만 신앙인인 반쪽짜리 신앙일 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을 온전히 누리지 못합니다. 온전히 여호와만은 섬기는 사람에게는 복이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기업을 영원토록 지키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시편 37:18).

 

엘리사를 찾아가는 왕들(11-12)

살아가면서 뜻하지 않게 힘든 일을 만나서, 전혀 예기치 않은 상황을 만납니다. 이 문제를 사람들이 스스로 예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여호와를 찾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문제 해결의 길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11여호사밧이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하는지라 이스라엘 왕의 신하들 중의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2여호사밧이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있도다 하는지라 이에 이스라엘 왕과 여호사밧과 에돔 왕이 그에게로 내려가니라(11-12)

 

여호와를 원망하고 있는 여호람 왕과 달리 유다 왕 여호사밧은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을 만나자 여호와를 찾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예전에 여호람의 아버지 아합과 함께 아람과 전쟁할 때도 아합에게 여호와의 뜻을 먼저 묻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선지자들이 긍정적인 대답을 하자 혹시 다른 선지자는 없는지 물으면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는 최소한 아합이나 여호람보다는 여호와를 더 의지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모압과의 전쟁에서는 압도적인 군사력 때문에 하나님께 묻는 것을 잊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위기 앞에서 자신이 잊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려움 속에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없는지 물으면서 그에게 여호와의 뜻을 알아보자고 제안합니다. 그러자 북이스라엘의 신하들 중 한 사람이 엘리사를 소개합니다. 여기서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이란 표현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 사용된 용례가 없기 때문에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이 문맥에서 볼 때 엘리야의 제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라는 사실로 참 선지자라는 신분을 확인받고 있는 것입니다. 당대에 엘리야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엘리사의 신분은 충분히 증명되었고,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전쟁하러 올라가던 길을 돌이켜 엘리사에게 내려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신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왕과 주권자가 되셔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길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직면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사인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 가능한 것입니다. 어려울수록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자신의 힘을 의지한 요람 왕은 어려움에 처하자 낙심했지만,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선지자를 찾았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날 때 당신의 반응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할 때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녀들의 삶을 항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적당히 반절만 순종하는 신앙은 싫어하십니다. 반쪽짜리 신앙을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볼 때 하나님의 인도와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온전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에 온전한 사랑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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