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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4-03)


선지자로 인정받은 엘리사⑶

열왕기하 4장 38-44절


하나님께서는 예배당 안에만 계신 분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과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창조하신 전 우주에 어느 곳에나 계시는 분입니다. 더욱 자신이 창조한 만물에 생명을 공급해 주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모든 곳에 계시며,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만나고 함께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 엘리사가 선지자로 인증된 사건들을 계속 소개합니다. 그가 길갈에서 도착했을 때, 이스라엘 전역은 흉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엘리사 앞에 모였습니다. 그들에게 양식을 공급하기 위해 죽을 끌렸는데, 독 있는 식물이 들어가 죽어가고 있을 때, 그들을 살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보리떡 스무 개와 약간의 채소로 기근 중에 백 명의 제자들이 먹고도 만을 만큼 넉넉하게 해줍니다.

 

독을 없애는 엘리사(38-41)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주관하신 분이십니다. 주관하셨던 내용을 기록한 것들 중에 하나가 열왕기입니다. 열왕기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엘리사에 대한 내용을 길게 하례합니다. 이것은 엘리사가 엘리야 다음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내용입니다.

 

38엘리사가 다시 길갈에 이르니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의 앞에 앉은지라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큰 솥을 걸고 선지자의 제자들을 위하여 국을 끓이라 하매 39한 사람이 채소를 캐러 들에 나가 들포도덩굴을 만나 그것에서 들호박을 따서 옷자락에 채워가지고 돌아와 썰어 국 끓이는 솥에 넣되 그들은 무엇인지 알지 못한지라 40이에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였더니 무리가 국을 먹다가 그들이 외쳐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솥에 죽음의 독이 있나이다 하고 능히 먹지 못하는지라 41엘리사가 이르되 그러면 가루를 가져오라 하여 솥에 던지고 이르되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하매 이에 솥 가운데 독이 없어지니라(38-41)

 

본문에는 엘리사와 관련된 에 가지 사건 중에 두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들은 예수님을 닮은 엘리사의 따뜻한 심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죽음의 시대에서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 생명의 역사를 진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는 바알 신이 살고 죽는 것을 결정하고 번영과 자산을 보장해준다고 믿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가지 못한 수넴 여인에게 잉태하게 하신 것도, 죽은 그 아들을 살리신 것도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엘리야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 자신을 살아계심을 엘리야를 통해 증명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엘리사를 통해 그 역사를 이어감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쉬지 않고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일을 계속하신다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선지자로서 인정받는 세 번째 사건으로 그 배경적 장소는 가나안 땅에 있는 길갈이었습니다. 이곳에도 흉년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흉년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축복하실 때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통해 풍년을 주십니다. 당시는 바알이 풍년을 주는 신이라고 믿던 시대였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믿음인지를 알려주시려고 하나님께서는 흉년을 주신 것입니다. 흉년은 바알의 무능을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방법이었습니다.

 

흉년이 들면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매우 힘든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길갈에 있는 생도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엘리야에 관한 네 가지 사건 중에 첫 번째 사건에서는 선지자의 제자와 그 가정은 빚 때문에 시달렸습니다. 또한 선지자는 누군가의 부양을 받아야만 하는 처지였습니다. 경제적으로 선지자와 그 공동체가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또 흉년이 들었습니다. 흉년은 언약에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일 것입니다.

 

엘리사는 북이스라엘 지역을 돌아다니며 사역하고 있었고, 돌아다니다가 길갈에 종종 들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엘리사가 다시 길갈로 도착한 것은 길갈도 그의 순회 도시 중 하나였음을 의미합니다. 길갈은 2:1에서 언급한 것처럼 벧엘 북쪽 중앙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으로 엘리야가 승천할 때 엘리야와 엘리사가 같이 출발한 지역입니다. 엘리사가 이 지역에 다시 방문했을 때 이 땅엔 심각한 기근이 들어 있었습니다.

 

선지자의 제자들은 엘리사 앞에 앉았습니다. 여기서 선지자의 제자들이 같이 모여 있는 것은 흔치 않은 일입니다. 선생님 앞에 제자들이 앉아 있다는 것은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선지자의 제자들이 모인 것입니다. 그러나 극심한 기근 때문에 그들에게는 당연히 먹을 것이 부족했습니다. 제자들의 몰골을 보니 말이 아니었습니다. 제대로 밥도 먹지 못한 선지자의 제자들을 본 엘리사는 말씀을 가르치는 것보다 먼저 이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것이 더 급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엘리사는 굶주린 제자들에 대한 연민을 느꼈습니다.

 

엘리사는 사환에게 국을 끓일 큰 솥을 걸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런 명령에 따라서 먹을 만한 야채를 채집하기 위해서 들로 나갑니다. 이러한 모습은 기근이 심해 밭에서 나는 채소나 곡식이 없고, 들이나 산에서 식물과 열매를 채집하여 연명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상황이 우리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해서 굶어 죽을 수도 있는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들로 나간 한 선지자는 야생 포도나무를 찾아내었고, 그것에서 들호박을 따 왔습니다. 우리말에서 들호박으로 번역된 것은 노란 조롱박으로 독성이 강해 위험한 식물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자신의 옷에 가득 따 와서 그것을 썰어 국솥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국 속에 노란 조롱박이 들어갔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국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 국을 받아 먹던 사람들이 갑자기 국 안에 죽음이 있다고 소리칩니다. 이것은 국 안에 죽음에 이를 만한 치명적인 독이 있다는 뜻입니다. 배고픈 제자들에게 변변치 않지만 따뜻한 죽 한 그릇이라도 먹이려고 준비한 음식 때문에 제자들이 죽음의 위험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엘리사는 호의를 베풀려고 하다가 뜻하지 않은 어려움에 빠지게 되는데, 이것은 수넴 여인에게 아들을 낳을 수 있도록 호의를 베풀었다가 아이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곤란하게 된 것과 유사한 상황입니다. 엘리사는 그 말을 듣자마자 급히 제자들에게 밀가루를 가져오라고 명령하고, 그것을 바로 솥에 넣은 후 국을 퍼서 먹으라고 합니다. 밀가루를 넣음으로 국의 독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나쁜 물에 소금을 넣은 것(열왕기하 2:21)과 유사한 사건으로, 죽음의 국이었던 것을 배고픔을 면할 수 있는 생명의 국으로 변했습니다. 다시 엘리사가 원했던 선한 일로 마무리된 것입니다. 수넴 여인의 아들 사건과 이 사건은 호의를 베풀었지만 뜻하지 않게 사람들을 절망에 빠지게 하거나 위험에 빠지게 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역경이나 실패가 없이 순탄한 것만은 아닙니다. 삐걱거리는 과정을 보면서 의심도 하고 주저도 하는 과정이 있지만,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의 기대와 스케줄에 따라서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필요 없을 만큼 안전한 삶은 신앙의 공식이 아닙니다. 믿음은 항상 예측과 기대를 뛰어 넘어서 역사합니다.

 

결국 엘리사는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처음에 가졌던 선한 목표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런 엘리사의 모습은 항상 하나님의 일을 정학하게 행하던 다른 선지자들과는 다릅니다. 이런 모습을 통해 우리는 엘리사 선지자의 연민, 좌절, 극복 등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도 관심 갖고 돌보십니다. 엘리사를 통한 하나님의 능력은 국을 끓이고 배고픔을 해결하는 일상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주일 교회에서뿐 아니라 평일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과 함께하십니다.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도움을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백 명이 먹고도 남은 보리빵(42-44)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극한 상황에서도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심으로써 지켜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분이십니다. 자기 백성들이 궁핍했을 때 일용한 양식으로 채워주십니다.

 

42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만든 떡 곧 보리떡 이십 개와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그가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43그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44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42-44)

 

이 이야기는 바알 살리사에서 온 한 사람의 등장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실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엘리사에게 헌물로 가져 왔습니다. 그는 이제 막 보리 추수를 끝내고 첫 열매로 보리 떡 20개를 만들고, 밭에서 재배한 채소를 자루에 담아 엘리사에게 가지고 왔습니다. 얼마 되지 않지만 흉년이 상황에서 그 정도의 헌물은 바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작은 것이지만 믿음으로 드린 것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합니다.

 

여기서 엘리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는 것은 이 사람이 엘리사가 선지자라는 것을 알고는 첫 열매를 여호와께 바친다는 의미로 이것을 가져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엘리사라는 개인에게 준 것이라기보다는 여호와께 바친 제물의 일종인 것입니다. 보리는 밀 추수보다 빠른 4월에 추수가 시작되며, 보리 추수 직전이 이스라엘에서 가장 배가 고픈 시기입니다. 이 사람이 가져온 양을 보면 이 사람도 경제적으로 그다지 넉넉한 처지는 아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저 적은 양이라도 하나님 앞에 가지고 와서 추수한 것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당시 엘리사 주위에는 100여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여기에 있던 사람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특정되진 않지만, 바로 앞에 나온 사건과 연결해 볼 때 엘리사와 함께 생활하며 말씀을 배우고 전파하던 선지자 무리일 것입니다. 4장의 이야기를 보면, 엘리사 당시 선지자의 제자들이나 선지자의 형편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선지자의 자녀들과 과부는 빚 때문에 고생하고, 선지자는 누군가의 부양을 받아야 하며, 선지자 무리는 먹을 것이 없어서 산이나 들에서 먹을 것을 채집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엘리사는 사환에게 그 사람이 드린 헌물을 사람들에게 먹게 나누어 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보리떡 20개와 채소 한 자루밖에 안 되는 것을 엘리사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먹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사환은 어떻게 이것으로 100명을 먹이겠느냐고 하면서 난색을 표합니다. 사환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자신들도 먹기 힘든데 얼마 되지 않는 양을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먹느냐고 항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백성들에게 대접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런 상황이기에 엘리사는 길갈에 가서도 배고픈 제자들을 먹이는 일을 제일 먼저 했고, 여기서도 제자들을 위해 자신에게 들어온 적은 양의 양식을 나누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환의 말처럼 보리 떡 20개와 채소 한 자루는 100명이나 되는 사람을 먹이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입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사환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고 다시 말하며,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먹고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이 말을 듣고 사환이 그들에게 떡과 채소를 나누어 주었는데, 정말 여호와의 말씀대로 먹고 음식이 남았습니다. 이것은 광야에서처럼 여호와는 자신의 백성을 먹이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준 기적의 사건입니다.

엘리사는 제자들이 실제적인 어려움에 처했을 때 기도해 주겠다, 가서 배부르라, 평안히 가라, 하며 말로만 위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제적으로 먹을 것을 제공하여 제자들의 배를 채워주었고, 돈이 될 만한 것을 제공해 빚을 탕감하게 하였습니다. 엘리사는 어려운 제자들의 형편을 살피고, 이들을 실제적으로 돕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는 먼저 자기가 할 수 있는 부분을 하고 나머지는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먼저 솥단지를 걸고 들에서 식물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들어온 얼마 안 되는 식량을 제자들을 위해 먼저 내놓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엘리사가 보리떡 20개와 채소 한 자루로 100명을 먹인 사건은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사건을 기억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소년이 바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배고픈 백성들을 위해 넘치도록 풍성한 식탁을 차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엘리사의 능력보다 몇 백 배 크지만,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그들의 실제적인 필요를 채워주고 싶은 마음은 엘리사와 예수님이 동일합니다.

 

이 기적은 벳새다 광야에서 예수님께서도 오병이어로 오천 병을 먹이고도 남은 사건과 비슷합니다(요한복음 16장). 이 일들을 통하여 깨달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청중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5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태복음 6:25-26,31)

 

세상의 것들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며 모든 권능을 소유하고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돌보시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입니다. 두 번째 깨달은 사실은 하나님이 남을 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 필요를 채우셨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사용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정성을 다해 주어야 합니다. 도울 때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드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베풀 수 있도록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베풀 때는 사랑과 믿음을 가지고 베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수효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얼마나 헌신적이고 자신을 희생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한 사람의 헌신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일을 이루십니다. 믿음은 문제를 통해 발휘되고 단련됩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문제들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믿음이 더욱 견고해졌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 갔습니다. 문제를 만날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인간적인 생각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시길 바랍니다.


경건한 사람에게도 시련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삶의 힘든 순간에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마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작지만 헌신을 통해 하나님의 큰 사역을 이루어가십니다. 당신이 필요할 때 일용할 양식으로 이루어갑니다. 하나님과 날마다 동행하는 삶은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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