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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8-02)


아합의 집을 따른 유다 왕들

열왕기하 8장 16-29절


 

하나님 나라를 구하며 사는 길은 좁은 길이어서 찾는 이가 적지만,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습니다. 유다 왕 여호람과 아하시야는 쉽고 편한 길을 선택하였으며, 그 귀결은 비참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는 결국 어떤 길을 가게 되겠습니까?

 

  • 열왕기상 19장부터 엘리야의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열왕기의 전형적인 문학 형식이 깨지고,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작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그런데 열왕기하 8장 16-24절에서 유다 왕 여호람의 통치 이야기는 전형적인 등극 공식과 죽음 공식을, 다음 왕 아하시야는 전형적인 등극 공식을 보여줍니다. 이는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를 하던 중간에서 시대적 배경을 좀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 엘리사 당시 유다 왕들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집어넣은 것입니다.

 

유다 왕 여호람의 통치(16-23)

하나님 앞에서 ‘연합’은 그 자체로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무슨 가치를 위한 것인지에 따라 더 큰 악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몸집을 키워 권력을 누리는 데만 여념이 없는 뒤틀린 이합집산은 또 하나의 바벨탑을 쌓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6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 요람 제오년에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었을 때에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니라 17여호람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삼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통치하니라 18그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가서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이라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19여호와께서 그의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16-19)

 

이 단락은 유다 왕 여호람의 등극 공식으로, 그가 등국할 당시에 북이스라엘 왕은 아합의 아들 요람이며 요람이 통치한 지 5년 되던 해 왕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교차적으로 서로의 왕을 언급하여 연대기적 정보를 주고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여호람이 등극할 당시 그의 아버지인 여호사밧이 여전히 살아 있었고 왕이었습니다. 여호사밧이 섭정 왕으로 물러나면서 아들인 여호람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실제적인 통치는 여호람이 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선 여호사밧과 여호람을 모두 왕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람이 왕이 되었을 때의 나이는 32세이며, 레위인의 경우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는 성인이 되었다고 인정되는 나이인 30세를 넘겼습니다.

여호사밧은 여호람이 성인으로서 왕이 되기에 충분한 나이가 되자 그를 왕으로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8년을 통치합니다. 여호람은 그리 오래 살지는 못했는데, 열왕기 신학에서 왕들의 이른 죽음은 여호와의 심판 중 하나입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입니다. 여호람이 악하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아합 가문이 행한 것처럼 행했기 때문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악함의 기준이 이전에는 여로보암이 단과 벧엘에 황금 송아지를 만들고, 이것을 여호와 대신 섬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합의 우상숭배와 불의가 더 악했기 때문에, 새로운 악함의 기준으로 등장했습니다. 유다 왕 여호람이 북이스라엘의 아합 집처럼 행한 이유는 그가 아합과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와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달랴와 결혼하면서 북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따라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선 유다의 집을 아합의 집을 멸망시키는 것처럼 멸망시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에게 그의 자손들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등불은 이스라엘에서 종종 생명과 번영을 비유적으로 상징했습니다. 즉 등불을 주셨다는 말은 다윗 왕가가 계속해서 지속되고 번영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는 뜻이며, 이는 사무엘하 7장에서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주셨던 약속과 연결됩니다. 이 말은 현재 유다의 상황도 북이스라엘의 상황과 별반 다를 것이 없지만, 다윗과의 약속 때문에 유다를 참아주지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유다 왕 여호람의 행적과 죽음(20-24)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약속하신 것은 변치 않으십니다. 항상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으며 그 약속을 따라 변치 않는 사람으로 사람들을 대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 앞에 조아리게 하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20여호람 때에 에돔이 유다의 손에서 배반하여 자기 위에 왕을 세운 고로 21여호람이 모든 병거를 거느리고 사일로 갔더니 밤에 일어나 자기를 에워싼 에돔 사람과 그 병거의 장관들을 치니 이에 백성이 도망하여 각각 그들의 장막들로 돌아갔더라 22이와 같이 에돔이 유다의 수하에서 배반하였더니 오늘까지 그러하였으며 그 때에 립나도 배반하였더라 23여호람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4여호람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조상들과 함께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20-24)

 

이 단락은 여호람의 대표적 행적을 언급하는데, 여호람 때에 에돔이 유다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왕을 세웠습니다. 사무엘하 8장에 따르면, 다윗이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팔천 명을 죽이고 에돔에 수비대를 두면서 에돔을 속국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면서 사무엘서 기자는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다고 평가합니다. 즉, 다윗이 에돔을 속국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를 성실하게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호람 때 에돔이 속국에서 벗어나 독립했다는 것은 여호람의 범죄 때문에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주셨던 호의를 거두셨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이 승승장구하고 그가 참여한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며 이스라엘을 크게 번성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여호와 앞에서 신실하였고,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셨기 때문일 뿐 다윗 자신의 능력이 출중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사람들이 보기에 성공으로 보이는 결과가 나오면 하나님보다는 그 사람 자신에게 능력이나 비법이 착각하여 그 비법을 배우려고만 합니다. 하지만 여호와 앞에 신실하게 살면서 여호와와 동행하는 것이 다윗이 형통할 수 있었던 유일한 비법이었습니다.

 

여호람은 에돔의 배신을 응징하고 다시 되찾기 위해 모든 병거를 모아 사일로 갑니다. 그리고 자신을 에워싸고 있던 에돔 군사들과 병거들을 밤에 기습하여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 문장은 여호람이 적극적으로 전쟁을 지휘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결과는 완전한 패배였습니다.

군사들은 모두 흩어져 각자 집으로 도망가기에 바빴습니다. 여호람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도 여호람을 돕지 않았기에, 이전에 누리던 영화가 하나둘씩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에돔은 유다의 통치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습니다(22). 또한 여호람 때 립나도 유다에게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립나는 여호수아 10:30에서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시에 싸워 점령한 지역인비다. 그런데 오랫동안 점령지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던 립나도 독립하려고 반역하였습니다. 여기서 립나와 에돔이 같은 시기에 반역하였다는 것을 강조하여 여호람 때 유다의 힘이 매우 약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더는 유다를 지키지 않으셨음을 의미합니다.

23-24절은 죽음 공식입니다. 여호람 왕에 대한 기록은 에돔과의 전쟁이 전부입니다. 여호람을 이어서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

 

유다 왕 아하시야의 행적(25-29)

하나님께서는 악을 근절하기 위해 심판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하십니다. 당장은 악이 이기는 것처럼 보일 수 있고, 심판을 잘 피해 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한순간도 잊지 않고 심판을 준비하십니다.

 

25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 요람 제십이년에 유다 왕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니 26아하시야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일 년을 통치하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달랴라 이스라엘 왕 오므리의 손녀이더라 27아하시야가 아합의 집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니 그는 아합의 집의 사위가 되었음이러라 28그가 아합의 아들 요람과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아람 왕 하사엘과 더불어 싸우더니 아람 사람들이 요람에게 부상을 입힌지라 29요람 왕이 아람 왕 하사엘과 싸울 때에 라마에서 아람 사람에게 당한 부상을 치료하려 하여 이스르엘로 돌아왔더라 유다의 왕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아합의 아들 요람을 보기 위하여 내려갔으니 이는 그에게 병이 생겼음이더라(25-29)

 

25-26절은 유다 왕의 등극 공식입니다. 여호람이 죽은 후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고, 왕이 될 때 나이는 22세였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은 1년에 불과했습니다. 유다의 다른 왕들처럼 어머니 이름이 소개되고 있는데, 아하시야의 어머니는 아달랴이며 그녀는 오므리의 손녀, 즉 아합의 딸입니다. 열왕기 저자가 오므리의 손녀로 아달랴를 소개한 것은 오므리 왕이 시작한 결혼 동맹 때문에 우상숭배의 영향이 손녀와 아달랴에게까지 미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므리 왕조의 죄가 유다까지 강하게 영향을 미쳤으며, 그 결과 유다 왕조도 하나님에게서 더욱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27절은 아하시야에 대한 평가입니다. 아하시야에 대해서도 여호람과 동일한 평가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하시야도 가장 악하다고 평가받은 아합의 집과 동일합니다. 그 이유는 아하시야가 아합의 사위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하시야는 아달랴의 아들이고 아합의 외손자입니다. 여기서 ‘사위’는 ‘사위의 후손’이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아하시야가 부정적인 평가를 받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어머니 아달랴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여호람과 아하시야 모두 아달랴로 인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는데, 아달랴가 어떤 인물인지는 열왕기하 11장에 나옵니다. 아하시야는 아합의 아들 요람을 돕기 위해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하사엘과 전쟁하였고, 요람이 부상을 입습니다. 그로 인해 전쟁은 중단됩니다. 여기서 요람은 열왕기하 3장에 등장하는 아합의 아들 여호람과 동일한 인물입니다. 요람은 대략 주전 852-841년까지 재위했고, 이때 남유다의 왕은 여호사밧, 여호람, 아하시야였습니다.

이 전쟁에서 북이스라엘 왕 요람은 부상을 입습니다. 아마 아하시야는 북왕조와 아람의 계속되는 갈등 속에서 북왕조를 돕기 위해 참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서로 친밀했던 것은 아달랴라는 연결의 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하시야와 요람은 외삼촌과 조카 사이입니다. 이렇듯 친밀한 친족 관계라서, 요람이 아람과의 또 다른 전쟁에서 부상을 입자 그를 보기 위해 아하시야가 이스라엘을 방문합니다. 열왕기 저자는 이런 두 왕국의 교류가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오히려 아합 왕조의 악한 영향이 남유다까지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합니다. 이것은 오므리와 아합이 바알 선지자인 이세벨을 이스라엘에 들인 죄가 얼마나 큰지 보여주고 있으며, 다음 장에 등장할 오므리 왕조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은 선택과 태도, 결단으로 나타납니다.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우며 힘을 추구하는 동맹은 분열과 배신과 파멸을 낳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혈연, 지연, 학연을 의지하여 세를 키우는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정직한 길을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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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8-01)


온 땅의 주권자 하나님

열왕기하 8장 1-15절


운동 경기의 정신, 기술, 전술 등은 선수들에게 지도하고 훈련시키는 일, 또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 코치(coach)라고 합니다. 최고의 운동선수 뒤에는 반드시 훌륭한 코치가 있습니다. 훌륭한 리더의 첫째 조건은 남들을 리드하기 전에 좋은 ‘셀프-리더’여야 합니다. 스포츠를 보면 좋은 코치란 꼭 선수보다 더 운동능력이 뛰어나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스로가 변화의 도구가 되기 위해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 이 단락에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오는데, 1-6절에서는 4장에서 나온 수넴 여인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녀는 엘리사를 통해 아들을 얻고 아들이 다시 사는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한 인물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 후 얼마가 지난 뒤의 이야기입니다. 둘째 이야기에서 엘리사는 하사엘을 만나 하사엘이 아람 왕이 될 것을 전하고, 하사엘은 벤하닷을 죽이고 아람의 왕이 됩니다.

 

기근을 피해 고향 떠난 여인(1-2)

 

사람들은 갈수록 자신만 사랑하고 교회 안팎에서도 이기주의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는 듯 보이는 행동까지도 사실은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을 교묘히 숨긴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도 다른 사람의 순수하지 못한 의도를 느낄 수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1엘리사가 이전에 아들을 다시 살려 준 여인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서 네 가족과 함께 거주할 만한 곳으로 가서 거주하라 여호와께서 기근을 부르셨으니 그대로 이 땅에 칠 년 동안 임하리라 하니 2여인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행하여 그의 가족과 함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땅에 칠 년을 우거하다가(1-2)

 

8장에서는 수넴 여인이 다시 등장합니다. 여기서 수넴 여인을 가리켜 아들을 살려준 여인이라고 소개하는데, 현재 이야기가 4장의 내용을 전제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엘리사는 그녀에게 가족과 함께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 거주하라고 명령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에 7년 동안 기근이 생기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기근을 부르신 것은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심판하기 위해서인데, 엘리사는 여호와를 신실하게 섬기는 수넴 여인에게 이 심판을 피할 길을 알려준 것입니다. 수넴 여인은 선지자의 말씀에 순종하여 정말로 고향을 떠나 블레셋 사람들의 땅에서 7년을 거주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2)는 수넴 여인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인물인지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엘리사 이야기를 보면 여호와를 믿고, 여호와의 능력을 체험하며, 순종하는 인물들은 전부 사회 주변인들이다. 여성, 노예 소녀, 가난한 선지자의 과부, 가난한 선지자의 제자들, 이방인 나아만, 이름 없는 왕의 신하, 나병 환자가 그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누가복음 6:20)라고 하셨습니다.

 

대조적으로 왕이나 지도자들은 항상 여호와의 말씀을 의심했고, 여호와의 권능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믿음이 없는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신분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셨습니다.

 

땅을 되찾은 수넴 여인(3-6)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대로 따랐는데도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 때 너무 상심해서 원망하고 불평하기 쉽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신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소망하는 일이 우리가 생각한 때에 이루어지지 않아도, 주님께서는 가장 적절한 시기와 상황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3칠 년이 다하매 여인이 블레셋 사람들의 땅에서 돌아와 자기 집과 전토를 위하여 호소하려 하여 왕에게 나아갔더라 4그 때에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 게하시와 서로 말하며 이르되 너는 엘리사가 행한 모든 큰 일을 내게 설명하라 하니 5게하시가 곧 엘리사가 죽은 자를 다시 살린 일을 왕에게 이야기할 때에 그 다시 살린 아이의 어머니가 자기 집과 전토를 위하여 왕에게 호소하는지라 게하시가 이르되 내 주 왕이여 이는 그 여인이요 저는 그의 아들이니 곧 엘리사가 다시 살린 자니이다 하니라 6왕이 그 여인에게 물으매 여인이 설명한지라 왕이 그를 위하여 한 관리를 임명하여 이르되 이 여인에게 속한 모든 것과 이 땅에서 떠날 때부터 이제까지 그의 밭의 소출을 다 돌려 주라 하였더라(3-7)

 

선지자의 말대로 7년 동안 블레셋에서 지낸 수넴 여인은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옵니다, 자신의 집과 땅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되찾아 달라며 왕에게 재판을 청구합니다. 수넴 여인이 직접 왕에게 나온 것을 보면 남편은 죽었고, 아들은 아직 사회적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미성년인 것으로 보입니다.

 

수넴 여인이 왕에게 직접 재판을 요청하러 나올 때, 마침 왕은 엘리사의 사환인 게하시와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는 게하시에게 엘리사가 행한 큰 이적에 대해 이야기해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게하시는 엘리사가 죽은 자를 다시 살린 이야기를 했고, 그 이야기를 하는 도중 마침 다시 살아난 아이의 엄마인 그 여자가 왕에게 호소하기 위해서 들어온 것입니다. 놀라운 우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를 본 게하시는 왕에게 이 여성이 바로 엘리사가 살린 아이의 엄마라고 소개합니다. 그러자 왕은 그녀에게 정말 그런지 물었고, 그녀는 왕에게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왕은 그녀를 위해 관리 하나를 세우고, 그녀에게 속한 모든 것과 7년 동안 생산한 소출까지 돌려주라고 명령합니다.

 

수넴 여인에게 일어난 모든 우연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여인과 그의 아이를 기근에서 보호하셨고, 돌아와서도 어려움 없이 자신의 기업을 찾을 수 있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이런 수넴 여인의 풍족한 모습은 기근 속에서 자기 자식을 잡아먹어야 했던 엄마의 울부짖음과 그 울부짖음을 들으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옷만 찢으며 가슴을 치던 이스라엘 왕의 모습과 대조됩니다. 순종하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의 결말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엘리사를 찾아간 하사엘(7-10)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교회에서는 그의 백성을 못 찾고 교회 밖에 찾으실 수 있습니다. 교회가 지금처럼 부패와 타락을 거듭한다면 교회 내에서 소망이 없습니다.

 

7엘리사가 다메섹에 갔을 때에 아람 왕 벤하닷이 병들었더니 왕에게 들리기를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 여기 이르렀나이다 하니 8왕이 하사엘에게 이르되 너는 손에 예물을 가지고 가서 하나님의 사람을 맞이하고 내가 이 병에서 살아나겠는지 그를 통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9하사엘이 그를 맞이하러 갈새 다메섹의 모든 좋은 물품으로 예물을 삼아 가지고 낙타 사십 마리에 싣고 나아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당신의 아들 아람 왕 벤하닷이 나를 당신에게 보내 이르되 나의 이 병이 낫겠나이까 하더이다 하니 10엘리사가 이르되 너는 가서 그에게 말하기를 왕이 반드시 나으리라 하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가 반드시 죽으리라고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 하고(7-10)

 

7-15절은 하사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사엘은 열왕기상 19:15에 처음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세 가지 사명을 주시는데, 첫째가 엘리사를 제자로 삼는 것이며, 둘째가 하사엘을 아람의 왕으로 세우는 것이고, 셋째는 예후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엘리야는 엘리사를 제자로 삼는 것만 실행하고 하늘로 승천합니다. 이제 제자인 엘리사가 엘리야를 대신해서 하사엘을 만납니다. 장소는 다메섹입니다. 엘리사가 다메섹으로 갔을 때 마침 아람 왕 벤하닷이 병이 듭니다.

이 벤하닷은 7장에서 사마리아를 포위했던 바로 그 인물입니다. 병든 벤하닷에게 누군가가 엘리사가 이곳에 왔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그러자 벤하닷은 자신의 심복인 하사엘을 불러 명령하는데, 예물을 들고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서 자신의 병이 나을 수 있을지에 대해 여호와의 신탁을 받아오라고 시킵니다.

 

아람이 여호와를 섬기는 나라는 아니지만, 이미 나아만의 일과 사마리아 포위와 도망 사건에서 여호와의 권능을 경험한 아람 사람들은 여호와가 참 신이라는 것을 알고 인정하고 있었기에, 아람 나라의 신이 아닌 여호와께 물어보라고 한 것입니다. 이 모습은 난간에서 떨어져 병이 들었을 때에 에그론의 신인 바알세불을 찾아가라던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와 대조를 이룹니다(열왕기하 1:2). 이방 아람 왕은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데, 이스라엘 왕은 우상을 찾고 있습니다.

 

왕명을 받은 하사엘은 다메섹에 있는 모든 좋은 것을 낙타 40마리에 싣고 엘리사를 만나러 갑니다. 마치 나아만이 금과 은을 잔뜩 싣고 엘리사를 만나러온 것과 유사합니다. 엘리사를 만난 하사엘은 아들 벤하닷의 병이 나을 수 있을지 묻습니다. 여기서 벤하닷을 신의 아들로 표현한 것은 이스라엘 왕이 엘리사를 나의 아버지라고 부른 것처럼 최대한 겸손하게 자신과 벤하닷을 낮추는 표현입니다.

 

엘리사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너는 가서 벤하닷에게 반드시 살 것이라고 전하라고 한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그가 반드시 죽을 것임을 자신에게 보이셨다고 합니다. 즉 벤하닷이 죽을 것이라는 말이 참이고 살 것이라는 말은 거짓이며, 이 거짓말은 벤하닷을 속이기 위한 것이고 참말은 하사엘에게 그가 왕을 죽이고 왕이 될 것이라는 신탁을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사엘을 위해 예언하는 엘리사(11-13)

택함을 받았을지라도 순종치 않는 자는 자비 없는 심판으로 징계하십니다. 슬피 우는 시간이 닥치기 전에 정의와 인애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1하나님의 사람이 그가 부끄러워하기까지 그의 얼굴을 쏘아보다가 우니 12하사엘이 이르되 내 주여 어찌하여 우시나이까 하는지라 대답하되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할 모든 악을 내가 앎이라 네가 그들의 성에 불을 지르며 장정을 칼로 죽이며 어린 아이를 메치며 아이 밴 부녀를 가르리라 하니 13하사엘이 이르되 당신의 개 같은 종이 무엇이기에 이런 큰일을 행하오리이까 하더라 엘리사가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네가 아람 왕이 될 것을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 하더라(11-13)

 

엘리사는 하사엘이 부끄러워할 정도로 쳐다본 후 웁니다. 하사엘이 왜 우냐고 묻자 엘리사는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할 악행을 알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엘리사가 예견한 하사엘의 악행은 그가 이스라엘을 점령할 때 어린이와 태아까지도 죽이는 끔찍한 살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본문을 직역하면 ‘그들 곁에 너는 불을 보내고 그들의 젊은이를 너는 칼로 죽이고 그들의 어린이를 너는 던지고 그들의 임산부를 너는 가를 것이다’입니다. 엘리사는 젊은 사람에서 어린이 및 태아의 죽음까지 언급하며, 하사엘이 이스라엘 자손을 철저히 진멸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동족을 잔인하게 죽일 당사자에게 이런 끔찍한 예언을 전하면서 엘리사는 비통한 마음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사엘은 이 말을 듣고 개 같은 자신이 어떻게 이런 큰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엘리사에게는 통곡할 일인 그것을 하사엘은 큰 일 혹은 위대한 일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그가 아람의 왕이 될 것을 여호와께서 알려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할 사람으로 하사엘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엘리사의 통곡은 하나님의 통곡일 것입니다. 자신의 백성을 심판할 인물을 자신의 손으로 선택하는 하나님의 마음과 자신의 입으로 그 예언을 전해야 하는 엘리사의 마음은 같기 때문입니다.

 

아람의 왕이 된 하사엘(14-15)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역사는 없습니다. 능력을 제한할 존재도 없습니다. 그분만 의지해야 할 이유입니다.

 

14그가 엘리사를 떠나가서 그의 주인에게 나아가니 왕이 그에게 묻되 엘리사가 네게 무슨 말을 하더냐 하니 대답하되 그가 내게 이르기를 왕이 반드시 살아나시리이다 하더이다 하더라 15그 이튿날에 하사엘이 이불을 물에 적시어 왕의 얼굴에 덮으매 왕이 죽은지라 그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14-15)

 

예언을 듣고 벤하닷에게 돌아간 하사엘은 엘리사가 말한 참말 대신 거짓말을 전달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엘리사의 예언을 받아들이고 왕이 되겠다고 작정했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숨기기 위한 대답입니다.

 

다음 날 하사엘은 물에 적신 이불을 왕의 얼굴에 덮어 왕을 질식시켜 죽게 하고 자신이 왕이 됩니다. 그는 엘리사의 예언처럼 아람의 왕이 되었습니다. 하사엘이 아람 왕이 되었다는 것은 엘리사가 한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 역시 모두 이루어질 것임을 보여주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이 하사엘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여호와를 신실하게 믿는 수넴 여인을 세심하게 돌보신 것과는 매우 대조됩니다.


 

역사의 주인이며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코치를 더욱 잘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겸손히 찾는 이는 평생도록 지켜주시지만, 오만하게 행하며 거절하는 자는 징계하십니다. 국가 또는 겸손한 정의로 행할 때는 긍휼을 입지만, 오만한 폭력과 불의로 행할 때는 심판하십니다. 개인만, 오만한 폭력과 불의로 행할 때는 심판하십니다. 개인뿐 아니라 사회가 정의로울 수 있도록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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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7-01)

 


생명의 소식을 알린 나병환자들

열왕기하 7장 3-20절


 

나병은 하늘에서 내린 병으로 간주되어 그 병에 걸린 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불쌍해 보인 나병환자들이지만 그들의 영혼은 살아 있었습니다. 평소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 수 없지만, 오늘 그들이 보여준 모습이 주의 백성의 삶에 대해 우리에게 귀한 도전을 줍니다.

 

  • 극심한 기근을 겪은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께 회개하며 부르짖는 대신 엘리사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며 그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왕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자신을 죽이려고 온 사람들에게 내일 하나님께서 식량을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왕의 신하는 하나님의 신탁을 믿지 않음으로써 심판의 신탁을 받습니다. 본문은 이 신탁이 성취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퇴각을 알게 된 나병환자들(3-8)

헤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어려움도 하나님은 간단한 방법으로 해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고 하나님의 때에 기적을 베푸시는 목적은 믿음이 성장시키시려는 것입니다. 단지 기적을 체험하는 것으로는 믿음이 자랄 수 없습니다(민수기 14:1-3). 믿음은 능력의 하나님을 신뢰하며 말씀 속에서 순종을 연습함으로 성장합니다.

 

3성문 어귀에 나병환자 네 사람이 있더니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4만일 우리가 성읍으로 가자고 말한다면 성읍에는 굶주림이 있으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만일 우리가 여기서 머무르면 역시 우리가 죽을 것이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그들이 우리를 살려 두면 살 것이요 우리를 죽이면 죽을 것이라 하고 5아람 진으로 가려 하여 해 질 무렵에 일어나 아람 진영 끝에 이르러서 본즉 그 곳에 한 사람도 없으니 6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 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그들을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7해질 무렵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영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 8그 나병환자들이 진영 끝에 이르자 한 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거기서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다시 와서 다른 장막에 들어가 거기서도 가지고 가서 감추니라(3-7)

 

사마리아 성안에서 극심한 식량난으로 고생하는 동안 이런 성안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성문 어귀에 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네 명의 나병 환자들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부정한 자로 간주되기 때문에 성안에서 살지 못하였습니다. 이 들은 성안 사람들이 주는 것을 먹고 살았으며, 성안에 기근이 드니 이들은 더욱더 어려워져 목숨 부지하는 것도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시절이 되면 약한 자들이 더욱 고통당하고 희생당합니다. 아이들은 살육당하고 병자들은 완전히 버려진 것입니다. 나병 환자들의 대화는 이들의 절망적인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성읍으로 들어가도 식량이 없어 죽고, 성문 어귀에 있어도 어차피 죽을 것이니, 차라리 아람 군대에 항복해서 살려주면 사는 것이고 죽이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래저래 죽는 건 마찬가지니 차라리 시도라도 해보고 죽자는 말입니다. 이들은 살길을 찾기 위해죽을 각오를 하고 해 질 무렵 아람 진영으로 갔는데, 가보니 놀랍게도 그곳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6-7절에서 화자는 왜 아람 진영에 사람이 한 명도 없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과거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아람 군대에게 말소리, 병거 소리, 많은 군사들의 소리를 들려주신 것입니다. 엄청난 군대의 진군 소리를 들은 아람 사람들은 이스라엘 왕이 돈을 주고 헷 왕과 애굽 왕에게서 용병을 사서, 그들이 자신들을 치러 오는 것이 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느닷없이 들려오는 커다란 진군 소리에 겁을 먹고 군대가 오는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이들은 이런 생각이 사실인지 확인할 정찰병을 보내거나, 군대가 눈에 보이길 기다리며 싸울 전략을 세우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두려움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두고 급히 도망해 버렸습니다.

화자는 그들이 목숨을 위해 이렇게 필사적으로 도망하였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여호와께서 들려주신 군대 소리가 이성적인 판단을 마비시키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할 만큼 크고 위협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이나 나귀나 장막 등을 챙길 새도 없이 몸만 간신히 빠져나간 형국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떠난 황혼 무렵은 네 명의 나병 환자가 아람 진으로 출발한 시간입니다. 아람 군대와 네 명의 나병 환자는 같은 시간에 출발하였고, 나병 환자들이 진에 도착했을 때는 아람 군대가 막 사라진 직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병 환자들이 출발한 시간에 맞추어 아람 군대를 쫓아낸 것처럼 저자는 묘사하고 있습니다.

 

8절은 다시 현재로 돌아와 나병 환자들이 진영에 들어와 이 장막 저 장막을 돌아다니며 음식을 배불리 먹은 후 금은 의복까지 느긋하게 약탈하는 행운을 누리는 장면입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온 아람 진영에서 이런 행운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람 진영을 정탐한 (9-15)

세상은 눈에 보이는 만큼 견고하지 않습니다. 돈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막강하지 않습니다. 돈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막강하지 않습니다. 의지할 데 없어 불안하고, 두려워서 더욱 성장의 노예가 되고,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자들입니다.

 

9나병환자들이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하고 10가서 성읍 문지기를 불러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아람 진에 이르러서 보니 거기에 한 사람도 없고 사람의 소리도 없고 오직 말과 나귀만 매여 있고 장막들이 그대로 있더이다 하는지라 11그가 문지기들을 부르매 그들이 왕궁에 있는 자에게 말하니 12왕이 밤에 일어나 그의 신복들에게 이르되 아람 사람이 우리에게 행한 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그들이 우리가 주린 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 진영을 떠나서 들에 매복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그들이 성읍에서 나오거든 우리가 사로잡고 성읍에 들어가겠다 한 것이니라 하니 13그의 신하 중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청하건대 아직 성중에 남아 있는 말 다섯 마리를 취하고 사람을 보내 정탐하게 하소서 그것들이 성중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온 무리 곧 멸망한 이스라엘 온 무리와 같으니이다 하고 14그들이 병거 둘과 그 말들을 취한지라 왕이 아람 군대 뒤로 보내며 가서 정탐하라 하였더니 15그들이 그들의 뒤를 따라 요단에 이른즉 아람 사람이 급히 도망하느라고 버린 의복과 병기가 길에 가득하였더라 사자가 돌아와서 왕에게 알리니(9-15)

 

배고픔도 해결하고 노략물을 가득 챙긴 후, 네 나병 환자들은 정신을 차리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이 좋은 소식을 같이 나누어야 하며, 만일 자신들만 알고 있거나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는 것은 잘못이며, 그랬다가는 벌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합니다.

그래서 빨리 가서 왕궁에 알리자고 말합니다. 이들은 나병 때문에 성안에 들어가 살 수 없었으며 성안 사람들보다 더 죽음의 위협을 당했지만, 성안에 있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많은 식량을 보고 성 안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느꼈으며,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가 발각되었을 때 받을 심판에 대한 두려움도 있던 자들입니다. 나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이지만, 인간에 대한 연민과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들은 성으로 가서 문지기를 불러 자신들이 본 것을 그대로 전합니다.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문지기에게 전달한 것입니다. 그러자 문지기는 다른 문지기들을 불렀고, 그들은 왕궁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 소식을 알립니다. 매우 급하고 중대한 소식이기에, 왕은 밤에 일어나 신하들을 불러 상황 파악을 하려고 회의를 한다. 갑자기 모든 것이 그대로 있는 채 아람 진영이 비었다는 말을 듣고 왕은 자신들을 성읍에서 유인하기 위한 술책이 아닌지 의심했습니다. 비록 엘리사가 내일 많은 양식을 얻을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왕은 그 사실을 믿지 않았기에 말과 식량이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아람 진영이 비었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자 신하 중 한사람이 그럼 남은 다섯 마리의 말과 사람을 보내 정탐을 해보자고 제안합니다. 어차피 지금 남아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말 다섯 마리 아낀다 해도 모두 죽을 것 같은 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이 말은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마찬가지이니 아람 진영에 가보자는 나병 환자들의 말과 유사합니다. 이 말에 병거둘과 말을 택하여 아람 군대를 추적하도록 보냅니다. 정탐꾼들이 아람 군대를 요단까지 추적하여 정탐하였습니다. 사마리아에서 요단까지의 거리는 대략 64킬로미터 정도입니다. 사마리아 정탐꾼은 상당히 멀리까지 정탐한 것입니다. 아람 군대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요단강을 건너야 하기에 요단까지 추적하였고 그곳에 도착해서 보니 아람 사람들이 도망하면서 버린 의복과 병기들이 길에 가득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람 사람들이 정말 혼비백산하여 몸만 간신히 도망갔다는 것과 아람 군대가 완전히 이스라엘 땅을 떠난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사신은 이 사실을 왕에게 알려줍니다.

 

엘리사의 예언이 성취됨(16-20)

여호와를 기다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복음이 복음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복음의 역사는 인내하며 믿는 자를 통해 역사합니다. 이러한 일꾼들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그 주변 사람들이 누릴 수 있습니다. 왕은 정탐꾼을 보내 확인하고서야 나병환자들의 전한 소식을 믿었습니다.

 

16백성들이 나가서 아람 사람의 진영을 노략한지라 이에 고운 밀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되고 보리 두 스아가 한 세겔이 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고 17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였던 그의 장관을 세워 성문을 지키게 하였더니 백성이 성문에서 그를 밟으매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죽었으니 곧 왕이 내려왔을 때에 그가 말한 대로라 18하나님의 사람이 왕에게 말한 바와 같으니 이르기를 내일 이맘 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한즉 19그 때에 이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 일이 있으랴 하매 대답하기를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였더니 20그의 장관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으니 곧 백성이 성문에서 그를 밟으매 죽었더라(16-20)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성 밖으로 나가서 아람 진영을 노략합니다. 여기서 ‘노략하다’라는 전쟁에서 승리한 후 노획물을 취할 때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입니다. 아람은 여호와의 개입으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스라엘 땅에서 도망감으로써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지금 이스라엘은 싸워보지도 않고 승리의 노획물을 얻게 된 것입니다.

아람 진영에서 많은 곡식을 얻게 되니, 정말 여호와의 말씀처럼 밀가루 한 스아가 한 세겔이 되고 보리 두 스아가 한 세겔이 되었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생각지도 못한 기적이 사마리아 성에 일어난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17절은 여호와의 예언의 두 번째 성취다. 여호와의 말씀을 믿지 않았던 장관은 성문에서 백성들에게 밟혀 죽습니다. 백성들의 발에 밟혀 죽었다는 것은 식량을 얻기 위해 다급히 밀고 나가는 군중에게 떠밀려 죽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18-20절에서 다시 한 번 엘리사의 예언이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반복함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왕과 지도자들이 살아계신 여호와의 권능을 믿든지 안 믿든지 여호와께서는 여전히 살아 계시며, 그 권능을 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열왕기는 계속해서 왕들과 지도자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백성들이 고통 받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왕도 여호와의 말씀을 의심하였고 그의 심복도 여호와의 말씀을 의심하였습니다.

그 결과 왕과 지도자들은 이 처참한 재난 속에서 철저하게 무능했습니다. 대조적으로 이 상황에서 좋은 소식은 사마리아 성에서 버림받은 나병 환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가장 먼저 좋은 소식을 알려주시고 이들의 입을 통해 좋은 소식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나아만 집의 이스라엘 노예 소녀를 통해 구원의 소식을 알려준 것과 유사합니다. 지도자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버리고 여호와를 버리고 철저히 무능할 때, 여호와께서는 노예 소녀나 나병 환자처럼 사회 주변인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복음을 계속해서 전하십니다.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아무 데나 붙일 순 없지만, 나병환자들에게는 손색이 없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걸고 살길을 찾았고 사람들에게 생명의 소식을 전한 그들은 참 건강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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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6-03)


사마리아 성을 포위한 현실

열왕기하 6장 24절-7장 2절


 

아람 왕 벤하닷이 사마리아를 포위하였는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안타깝다 못해 처참하기까지 합니다. 너무나 극단적인 모습이지만 엄연한 현실입니다. 혹 이것이 우리 시대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 아람과 얽힌 새로운 에피소드가 소개된다. 열왕기하 6:24-7:20은 하나의 단위로 벤하닷이 사마리아 성을 포위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이 안에 자식을 먹는 이야기, 양식을 찾은 나병 환자의 이야기, 성문을 지키던 관리의 운명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호람 시대가 아닌 여호아하스 시대의 이야기지만, 여호와의 권능과 무능한 왕이란 주제로 계속 연결되고 있기에 여기에 위치했을 것입니다.

 

아람의 포위로 심각해진 사마리아(24-25)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기에 처절한 아픔을 허락하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시고 멸망의 길에서 돌이키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서 백성에게 고난이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백성에게 임할 저주를 분명히 말씀하시고(레위기 26:23-26; 신명기 28:49-57), 저주가 임할 때 자신을 돌아보도록 하셨습니다.

 

24이 후에 아람 왕 벤하닷이 그의 온 군대를 모아 올라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니 25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비둘기 똥 사분의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 하니(24-25)

 

그 후에는 아람군이 엘리사에게 큰 굴욕을 당한 사건 이후를 말합니다. 아람 왕 벤하닷은 소규모의 습격으로는 이스라엘을 점령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번에는 전면적인 대규모 공격을 감행한다. 아람의 ‘온 군대’를 모았다는 것은 아람이 사마리아와의 전면전을 선포했다는 의미입니다.

벤하닷은 아람의 전군을 끌고 와 시마리아를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완전히 포위했습니다. 이렇게 포위된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사마리아 성안에 극심한 기근이 왔습니다. 기근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화자는 나귀 머리 하나에 은 80세겔이고 비둘기 똥 사분의 1갑에 은 5세겔이나 한다고 말합니다. 나귀 머리는 가장 맛이 없는 요리를 말하는 것으로, 이런 맛없는 요리에 은 80세겔을 주었는데, 한 달 월급이 은 1세겔이고 성인 남성이 서원할 때 내는 값이 50세겔인 것을 감안하면, 음식 한 그릇에 80세겔은 대단히 비싼 값입니다. 비둘기 똥을 식용으로 사용했는지 연료로 사용했는지 분명하진 않습니다. 1갑은 0.5리터 정도이므로 1/4은 125밀리리터 정도 되는 아주 적은 양입니다. 이렇게 적은 양에 은 5세겔을 주어야 할 성도로 사마리아의 물가는 지나치게 높았다고 말합니다. 물가가 이 정도면 거의 사람이 살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의 무능(26-30)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자비로운 공급자 역할을 중단하시면, 참극이 벌어집니다. 하지만 아무리 극단적인 아픔 속에 있더라도, 하나님을 내 삶의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그분의 말씀을 덮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현실에 대한 믿음으로 반응한 것도 중요합니다.

 

26이스라엘 왕이 성 위로 지나갈 때에 한 여인이 외쳐 이르되 나의 주 왕이여 도우소서 27왕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타작 마당으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포도주 틀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하니라 28또 이르되 무슨 일이냐 하니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놓아라 우리가 오늘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29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그 여인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내놓아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그가 그의 아들을 숨겼나이다 하는지라 30왕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자기 옷을 찢으니라 그가 성 위로 지나갈 때에 백성이 본즉 그의 속살에 굵은 베를 입었더라(26-30)

 

이런 심각한 상황을 살피기 위해 왕이 성 위로 지나가며 시찰할 때, 한 여성이 자신을 도와달라고 외칩니다. 왕은 백성들의 요청을 듣고 일을 해결해주거나 재판을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왕을 찾습니다. 그래서 이 여성이 왕을 부르며 이 상황에서 구원해달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여기서 ‘외치다’는 주로 고난 중에 구원해달라고 외칠 때 사용됩니다. 구원해 달라는 외침을 들은 왕은 여호와께서 돕지 아니하시면 자신은 도울 수가 없다고 대답합니다. 이 백성을 살리고 죽이는 문제에서 자신은 철저히 무능력함을 토로한 것입니다.

‘타작 마당으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포도주 틀로 말미암아 하겠느냐’에서 타작 마당이나 포도주 틀은 풍요의 원천을 가리키며,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이 있어도 여호와께서 곡식을 주시고 포도를 풍성하게 주셔야 타작 마당에서 타작을 하고 포도주 틀에서 포도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심각한 기근과 전쟁을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한 분뿐이며,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여인이 무슨 일 때문에 불렀는지 구체적으로 묻습니다. 이에 대해 다른 여인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 오늘은 너의 아들을 잡아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잡아먹자고 이야기해서 자신의 아들을 삶아 먹었고, 다음날 네 아들을 내놓으라고 하니 자기 아들은 숨겼다는 것입니다. 정말 끔찍한 상황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심한 기근이 있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아이를 잡아먹는 일이 가끔 있었습니다. 이런 참혹한 이야기를 들은 왕은 옷을 찢으며 애도를 표합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이 재앙의 상황을 애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 성에서도 베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신명기 28:53-57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할 벌 가운데 심각한 기근으로 자기 아이를 먹는 재앙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재 사마리아에서 벌어지는 이런 비인간적이고 끔찍한 일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약소국이기에 일어난 일도 아닙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벌어진 비극이며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서 숱하게 경고하시고 자신의 놀라운 권능을 보여주셨는데도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아서 생긴 결과인 것입니다.

 

엘리사에 대한 분노(31-33)

포위된 성읍에 인간이 살고 있지만 인간성이 사라졌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자기 자식을 잡아먹다니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삶이 팍팍해지더라도 하나님이 부여하신 존귀한 주의 자녀로서의 품위와 인간다움은 지켜나가야 합니다.

 

31왕이 이르되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지로다 하니라 32그 때에 엘리사가 그의 집에 앉아 있고 장로들이 그와 함께 앉아 있는데 왕이 자기 처소에서 사람을 보냈더니 그 사자가 이르기 전에 엘리사가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이 살인한 자의 아들이 내 머리를 베려고 사람을 보내는 것을 보느냐 너희는 보다가 사자가 오거든 문을 닫고 문 안에 들이지 말라 그의 주인의 발소리가 그의 뒤에서 나지 아니하느냐 하고 33무리와 말을 할 때에 그 사자가 그에게 이르니라 왕이 이르되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31-33)

 

이스라엘 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참혹한 상황에 처한 것이 엘리사의 책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분노하며 그를 오늘 반드시 죽이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엘리사가 사마리아로 사로잡아 온 아람 군대를 처리하지 않고 놓아주었기 때문에 아람 왕 벤하닷이 아람 군대가 받은 굴욕을 갚으려고 이처럼 전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왕은 엘리사를 죽임으로써 이 재앙으로 인한 죽음의 책임을 모두 엘리사에게 돌리려 합니다.

 

그때 엘리사는 사마리아에 있는 자신의 집에 있었고, 왕은 엘리사를 죽이려고 사람을 보냅니다. 하지만 왕이 보낸 사람이 도착하기 전에 엘리사는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장로들에게 살인자의 아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사람을 보냈다며, 망을 보다가 사람이 오면 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이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여기서 왕을 ‘살인자의 아들’로 지칭한 것은 일차적으로는 ‘아합 왕의 아들’이란 의미이지만, 그가 곧 살인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죽여 화풀이를 하려는 왕에 대해 엘리사는 살인자라고 부른 것입니다.

여기서 엘리사는 왕의 사자에게 죽지 않기 위해 장로들에게 보호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전에 불만과 불병거의 호위를 받던 엘리사의 모습은 안 보이고, 장로들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취약한 엘리사의 모습이 나옵니다. 하지만 불말과 불병거는 없어도 여전히 엘리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말하자마자 왕이 그를 죽이려고 보낸 사자와 함께 도착하였고, 그들은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왔는데 언제까지 여호와를 기다려야 하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더는 기다릴 수 없고 기다리지도 않겠다는 말입니다. 더는 여호와의 말씀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판단대로 엘리사를 죽이겠다는 뜻입니다. 이는 왕이 스스로 여호와께 대한 소망을 거두었음을 의미합니다.

 

엘리사의 응답과 장관의 불신(7:1-2)

하나님을 향한 기대감이 사라지면 그의 삶은 황폐하게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희망적인 메시지가 전해져도 그것은 현실 앞에 막혀서 들리지 않습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한 것입니다. 왕의 장관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도 막상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라고 하자 믿지 못합니다.

 

1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 2그 때에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더라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7:1-2)

 

더는 여호와께 희망을 걸지 않는 왕에게 엘리사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엘리사는 여기서 처음으로 선지자의 신탁 형식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내일 이맘때 극심한 기근이 해결될 것입니다. 한 스아는 대략 7.3리터이며, 6:25에서 언급된 한 갑의 여섯 배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밀가루 한 스아가 비둘기 똥의 1/20 가격밖에 안 되는 셈입니다. 이 둘을 대조함으로써 양식이 풍성해질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왕의 측근인 장관은 이런 엘리사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창문을 내신다 해도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비아냥거릴 뿐입니다. 이런 불신앙에 대해 엘리사는 네가 반드시 이 일을 볼 것이지만, 그것을 먹지는 못할 것이라는 심판을 선언합니다.

 

이런 장관의 불신앙적인 모습은 그 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의 모습을 대표합니다. 분명히 엘리사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씀을 선포했는데도, 고위 관리가 여호와의 말씀을 대놓고 무시한 것입니다. 왕은 물론이고 장관의 이 같은 반응은 그 시대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둔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업신여기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임을 암시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악한 세상은 본문이 말하는 대로 변해갈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백성인 우리는 시대를 거슬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귀함을 지키고,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기대감을 끝까지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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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6-02)


눈을 열어서 보게 하소서

열왕기하 6장 15-23절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아주 작은 세균이나 바이러스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현미경과 같은 특수한 장비가 있어야만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있어야만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육신의 눈은 때로 정말 소중한 진실을 놓치기도 합니다.

 

  • 아람의 공격이 번번이 막히지 아람 왕은 간첩의 소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신하는 엘리사가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알려줍니다. 이에 아람 왕은 곧바로 말과 병거까지 동원한 대규모 군데를 보내 엘리사를 잡아 오라고 명령합니다. 아람 군대는 밤사이에 엘리사가 있는 도단을 에워쌌고 엘리사는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불말과 불병거를 보게 한 엘리사(15-17)

육신의 눈이 가장 자주 놓치는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엘리사 시대의 백성들은 성읍을 들러싼 아람 군대는 또렷하게 보았지만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 그들과도 함께하셨듯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15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16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17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15-17)

 

밤사이에 아람 군대가 도단 성을 에워쌌습니다. 사실을 모르던 엘리사의 사환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가 아람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싸고 있는 상황을 발견하고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바로 엘리사에게 알립니다.

 

사환은 열왕기하 3:10에서 광야에서 물이 없는 재난을 만났을 때나 6:5에서 제자가 쇠도끼를 물에 빠뜨리고 절망에 빠져 한탄한 것처럼 이 재난을 엘리사에게 알립니다. 그는 이 상황에 대해 매우 절망하며 자신들의 무능력함에 대해 탄식한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절망에 빠진 사환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하며, 이렇게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우리와 함께한 존재들이 그늘이 이끌고 온 군대보다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엘리사는 하나님께 제자의 눈을 열어 그도 그 존재들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이 기도가 응답되어 제자의 눈이 열리자, 그는 산에 가득할 정도로 많은 불말과 불병거가 엘리사를 보호하기 위해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이미 아람 왕의 명령과 아람군대의 움직임을 아시고, 엘리사를 지키기 위해 하늘의 군대를 파견하신 것입니다. 아마도 이 제자는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놀랐을 것이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로 영적 눈이 열린 사람만 볼 수 있을 뿐이었고, 일반인들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항상 눈앞에 보이는 적이 얼마나 많은지,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만 보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해나갈 때, 세상의 힘과 권세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고 계심을 보게 하시고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과 권세에 맞서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아람 군대를 사마리아로 인도한 엘리사(18-19)

주의 백성은 약하지 않습니다. 때로 거친 광야에 홀로 내던져진 듯 고립감이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를 통해 진실이 선포되게 하십니다. 시대가 우울할 때 하나님의 사람들은 시대를 환하게 밝힐 소명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수많은 거룩한 친구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18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 19엘리사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그 길이 아니요 이는 그 성읍도 아니니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가 찾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리라 하고 그들을 인도하여 사마리아에 이르니라(18-19)

 

아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보호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모른 채 엘리사를 공격하기 위해서 내려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엘리사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이 번에는 그들의 눈을 멀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제자의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한 것과 정반대로 기도한 것입니다. 이 기도 역시 응답됩니다. 눈먼 아람 군대는 하나님의 불말과 불병거는 고사하고 자신들이어디 있는지도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화자가 ‘엘리사의 말대로’라는 말을 기록한 것은 하나님께서 엘리사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에게 응답하고 계시며, 엘리사는 하나님의 진정한 선지자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눈을 멀게 한 것은 실제로 전혀 볼 수 없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현혹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할 것입니다. 엘리사가 자기 앞에 서 있고 자신들이 엘리사가 사는 도단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사가 길을 잘못 들었고 이곳은 도단이 아니라고 말하며, 자신이 너희가 찾는 사람에게 인도하겠다고 말하는데도 말하는 사람이 엘리사라는 것과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나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뜬장님이란 말이 여기에 잘 어울립니다. 이렇게 눈뜬장님이 된 아람 군대는 엘리사가 인도하는 대로 이끌려 사마리아까지 갑니다.

도단에서 사마리아까지는 대략 16킬로미터 떨어져 있는데,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중앙 산지를 통과하여 가파르게 올라가는 길입니다.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독자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찾고 있는 엘리사를 따라 엘리사를 찾겠다고 멀고 험한 길을 수고스럽게 걸어가는 모습이 한 편의 희극을 보는 것과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하지만 아람군대는 눈이 멀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는 행동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 알지 못했습니다. 엘리사는 지금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아람 군대와 아람 왕을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바로 분별하지 못하고 영의 눈이 어두워지면, 아람 군대처럼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을 하면서도 그 행동이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인지 모르는 어리석은 자가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은 채 역사의 주인을 자처하는 세력들은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스스로 조롱을 자처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되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아람 군대를 돌려보낸 엘리사(20-23)

주의 백성은 약하지 않습니다. 세상 군대가 겉보기에는 거대하고 강해보여도 더욱 강한 군대가 있으니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우리입니다. 수많은 아람 군대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하나를 당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악한 세력의 공격은 지금껏 그랬듯이 앞으로도 거세고 위협적인이겠지만, 그들이 한 번도 주의 교회를 완전히 무너뜨린 적이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20사마리아에 들어갈 때에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여 이 무리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들의 눈을 여시매 그들이 보니 자기들이 사마리아 가운데에 있더라 21이스라엘 왕이 그들을 보고 엘리사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 하니 22대답하되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들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려보내소서 하는지라 23왕이 위하여 음식을 많이 베풀고 그들이 먹고 마시매 놓아보내니 그들이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아가니라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20-23)

 

엘리사는 아람 군대를 사마리아까지 인도하였고, 그들이 도단에 도착하자 다시 하나님께 그들의 눈을 열어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사의 기도대로 그들의 눈을 열어 보게 하셨습니다.

정신 차린 아람 군대는 자신들이 사마리아 성 가운데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상황이 끝나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가운데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군대에 포위당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엘리사를 잡기 위해 따라왔지만, 오히려 엘리사에게 낚여 자신들이 잡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한편 이스라엘 왕 입장에선 엘리사가 이끌고 온 아람 군대는 손쉬운 먹잇감이었습니다. 이 호시탐탐 기회를 보며 이스라엘을 쳐들어오는 상황에서 아람의 주력부대를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였으니 이스라엘 왕 입장에선 얼마나 흥분되고 마음이 급했겠는가, 따라서 엘리사에게 ‘내가 공격할까요’라고 재차 물으며 엘리사의 허락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엘리사를 ‘나의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엘리사에 대한 존칭으로 엘리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존중한다는 의미입니다. 선지자들 중에 왕들에게서 ‘아버지’라는 호칭을 들은 사람은 엘리사가 유일한데, 이것은 엘리사가 다른 선지자들에 비해 왕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쳤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적들을 죽이려고 흥분한 이스라엘 왕에게 엘리사는 치지 말라고 단호하게 명령합니다.

왕에게 명령문을 사용하여 금지하는 것은 엘리사가 왕에 대해서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칼과 활로 사로잡힌 자들’이란 포로를 의미하는 관용구로 엘리사는 포로로 잡힌 자들을 죽이지 말고, 오히려 관용을 베풀어 음식을 먹이고 다시 그들의 왕에게 돌려보내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왕은 엘리사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들에게 커다란 잔치를 베풀어주었고, 그들의 주인에게 돌려보냈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왕은 엘리사의 이런 처사가 매우 불만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왕은 하나님의 권능과 엘리사의 권위를 인정하기에 순종하였습니다.

이렇게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여 아람 군대를 돌려보내자 왕의 예상과 달리 아람 군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을 습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엘리사를 통해 여호와의 권능을 맛본 아람 군대는 국지 적인 습격 정도로는 엘리사와 여호와께서 지키시는 이스라엘을 점령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앙의 길이 외롭고 힘겹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친구이신 하나님께서 계시기에 우리는 외롭지 않고 약하지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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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6-01)


이스라엘의 예언자 엘리사

열왕기하 6장 1-14절


 

사람의 힘은 약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강합니다. 약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우리들이 상상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누구의 손에 붙잡혀 있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신 일이라면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 6-8장은 선지자의 능력을 보여주는 다섯 대의 이야기로 구성됩니다. 물위로 떠오른 도끼(6:1-7), 저지당한 아람의 습격자들(6:8-23), 풀린 포위망과 예언의 성취(6:24-7:20), 회복된 수넴 여인의 재산(8:1-6), 왕으로 선택된 하사엘(8:7-15) 이야기입니다. 6-7장은 5장에서 엘리사에게 병고침을 받고 여호와만 섬기겠다고 선언하고 돌아간 나아만의 고향인 아람과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집을 지으려는 엘리사 제자들(1-4)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목적, 방법은 오직 성령의 뜻을 분별하여 순종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평범한 일상에서도 뜻밖의 질문이나 문제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고 영접하는 순간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분의 음성을 듣고자 애쓰며 또한 그 분이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1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주하는 이 곳이 우리에게는 좁으니 2우리가 요단으로 가서 거기서 각각 한 재목을 가져다가 그 곳에 우리가 거주할 처소를 세우사이다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가라 하는지라 3그 하나가 이르되 청하건대 당신도 종들과 함께 하소서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내가 가리라 하고 4드디어 그들과 함께 가니라 무리가 요단에 이르러 나무를 베더니(1-4)

 

아람 사람 나아만이 치료받은 이야기 후에, 다시 선지자 수련생들을 도운 엘리사의 기적을 보여줍니다. 엘리사를 통해 점점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였습니다. 엘리사는 혼자 다니던 엘리야와는 다르게 늘 사환이나 제자들과 함께 생활합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수련생들이 점점 모여들어서 선지자 수련생들이 사는 집이 너무 작았습니다.

이렇게 선지자의 제자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것은 일찌감치 사무엘상 10:10에서 등장하는 선지자 무리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와 함께 생활하던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서인지, 제자들은 엘리사에게 현재 처소는 함께 지내기 좁으니 요단으로 가서 그곳에다 처소를 짓겠다며 매우 공손하게 엘리사의 허락을 구합니다. 이런 언어적인 표현을 보면, 이들은 엘리사를 매우 존경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자 제자 중 한 사람이 엘리사도 같이 가면 어떻겠냐고 매우 조심스럽게 요청합니다. 엘리사는 나도 반드시 가겠다며 제자들의 말을 따릅니다. 엘리사는 자신이 말한 대로 제자들과 함께 거하던 곳을 떠나 요단으로 갔고, 그들은 그곳에서 집을 짓기 위한 나무를 자르게 되었습니다.

 

도끼를 떠오르게 한 엘리사(5-7)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한 사람을 귀히 여기시고 세심하게 돌보십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마음인 모든 사람들을 긍휼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웃의 아픔이 사소해 보이고 하찮아 보인다면, 아직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엘리사는 제자의 실수로 곤경에 처한 상황에서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5한 사람이 나무를 벨 때에 쇠도끼가 물에 떨어진지라 이에 외쳐 이르되 아아, 내 주여 이는 빌려온 것이니이다 하니 6하나님의 사람이 이르되 어디 빠졌느냐 하매 그 곳을 보이는지라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 쇠도끼를 떠오르게 하고 7이르되 너는 그것을 집으라 하니 그 사람이 손을 내밀어 그것을 집으니라(5-7)

 

요단 강가로 엘리사와 선지자의 제자들과 함께 선지자의 무리가 집을 짓기 위해 나무를 베려고 도끼를 빌려왔습니다. 한 제자가 나무를 베다가 도끼를 물에 빠뜨렸습니다. 문장에서 목적어인 ‘도끼’를 앞에 놓아 물에 빠뜨린 것이 도끼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제자는 매우 절망적인 목소리로 ‘아아, 내 주여’라는 외쳤습니다. 그의 절망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엘리사를 부르며 빠뜨린 도끼는 빌려온 것이라고 외칩니다. 집을 짓기 위한 변변한 도구도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물건을 빌려서 간신히 일하고 있던 상황에서 값비싼 쇠도끼를 잃어버렸으니 이 제자는 너무 절망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엘리사 일행의 빈궁한 상태를 잘 드러냅니다. 곤란한 상황에 처한 선지자의 제자는 빌려온 값비싼 철제 도끼를 변상할 능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제자의 부름에 응답하며 어디에 빠졌느냐고 묻고, 나뭇가지를 잘라 도끼가 빠진 곳에 던졌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쇠도끼가 물 위로 떠올랐고, 제자가 그것을 잡아서 건져낼 수 있었습니다. 매우 곤란한 상황에 빠졌을 때 엘리사는 그가 도끼를 찾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엘리사 체포 작전(8-14)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많은 지략에 뛰어난 지혜로운 장수라도 할지라도 하나님의 지략을 맞설 수 없으며, 숱한 군사와 말과 병거가 하나님께 사로잡힌 한 사람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한 사람만 있어도 자신이 속한 곳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8그 때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싸우며 그의 신복들과 의논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아무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 하였더니 9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은 삼가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 아람 사람이 그 곳으로 나오나이다 하는지라 10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에게 말하여 경계한 곳으로 사람을 보내 방비하기가 한두 번이 아닌지라 11이러므로 아람 왕의 마음이 불안하여 그 신복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12그 신복 중의 한 사람이 이르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을 이스라엘의 왕에게 고하나이다 하는지라 13왕이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엘리사가 어디 있나 보라 내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잡으리라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보라 그가 도단에 있도다 하나이다 14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그들이 밤에 가서 그 성읍을 에워쌌더라(8-14)

 

아람의 침입이 이스라엘 왕에게 계속 알려져서 이스라엘 침입이 계속 실패하자 아람 왕은 매우 화를 내었습니다. ‘불안하다’는 ‘폭풍이 일다’라는 뜻으로 ‘화를 내다’, ‘격분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람 왕은 번번이 자신의 계획이 막히자 자신들 가운데 간첩이 있어서 회의한 내용을 이스라엘 왕에게 전달하는 것 아니냐며 심하게 화를 낸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아람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 왕을 도왔습니다. 아람 왕이 신하들과 회의를 해서 군대를 배치하면 엘리사가 알아차리고 이스라엘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곳을 잘 지키도록 했습니다. 아람 왕 입장에선 자신들이 침입하기로 정한 그곳에 족집게처럼 이스라엘 군대가 막고 있으니, 이런 의심이 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아람 왕은 신하 중 한 사람이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 사람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 사이에서 간첩을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왕의 신하 중 한 사람이 이 일을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준 사람은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라고 말합니다. 그는 심지어 가장 은밀한 곳인 왕의 침실에서 하는 말까지도 알 수 있고, 그 말을 이스라엘 왕에게 전달해준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엘리사가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주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나아만의 병은 아람의 의술이나 신들이 고칠 수 없는 나병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아만이 나병을 고치기 위해 이스라엘로 가게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신하들은 반신반의하며 그를 보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치료를 받고 돌아왔을 때, 아람 왕과 그의 신하들도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능력과 엘리사의 능력에 매우 놀랐을 것이다. 그중 몇몇은 나아만에게 엘리사에 대해 자세히 물어봤을 것이고, 또 그중 몇몇은 엘리사가 어떤 사람인지 이스라엘 사람들을 통해 조사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아람 사람들에게 엘리사가 얼마나 뛰어난 하나님의 선지자인지 알려지게 되었고,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 아람 왕에게 이렇게 보고한 것입니다. 엘리사의 명성은 이미 이스라엘을 넘어 주변 나라까지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이 말을 듣자 아람 왕은 엘리사를 잡으려는 생각을 합니다. 아람 왕도 엘리사의 능력을 믿었으므로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엘리사를 제거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어디 있는지 알아보라고 합니다. 그러자 한 신하가 그가 도단에 있다고 알려줍니다. 이 말을 들은 아람 왕은 엘리사 한 사람을 잡기 위해 말과 병거와 많은 용사들을 도단으로 밤에 도단을 에워쌌기 때문에 성읍에 있는 사람들은 아람 군대가 온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의 사환이 아침에 아람 군대를 보고 놀라서 소리칩니다.

 

아람 왕이 엘리사 한 사람을 잡기 위해 이렇게 많은 군대를 보낸 것은 엘리사와 엘리사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엘리사라는 선지자 한 사람의 존재로 인해 이스라엘은 천만 군대가 지키는 것보다 더 든든하게 지켜지고 있었고, 적들은 두려움에 떨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며, 과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온전히 드러내며 사는지,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는지, 아니면 내가 오히려 세상의 위협에 두려워 떨고 사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영적 싸움에서 이기는 비결은 하나님께서 대적을 상대하시게 하는 것이다. 내가 싸워야 할 것은 상대방을 하나님 보다 더 두려워하는 불신앙입니다. 영적 싸움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나의 한계와 상대방의 강함을 아는 것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통해 하람 왕의 작전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대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면 모든 계획과 준비는 헛수고가 되고 맙니다. 어떤 일을 계획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도움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소한 기도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무 크고 어려운 기도도 없습니다. 하나님 뜻을 따라서 이 모든 세상이 섭리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자의 태도입니다. 진심과 신뢰를 담아드리는 기도에 주님을 기쁘게 응답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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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5-02)


탐욕으로 망하는 게하시

열왕기하 5장 15-27절


 

작은 불씨가 무섭다는 것은 그것이 불로 발화가 되었을 알 수 있습니다. 산에 던진 작은 불씨가 점점 커져 큰 산불이 되듯이 순간적인 욕심으로 시작한 거짓말이 점점 커져 감당키 어려운 큰 죄가 되기도 합니다. 불은 커지기 전에 꺼야 합니다. 죄도 마찬가지로 시작할 때 멈추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가 온 몸을 불사를 때가 있습니다.

 

  •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갔을 때 엘리사는 나와 보지도 않고 시종을 보내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면 나을 것이란 말만 전합니다. 나아만이 엘리사의 무례함과, 기대와 달리 너무나 간단한 방법 때문에 화를 내며 돌아가려고 할 때, 또 다시 종의 말을 듣고 요단강에 들어가서 병 고침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병 고침을 받은 나아만은 여호와가 어떤 분인지 알게 되었고 여호와에 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예물을 거절하는 엘리사(15-16)

견물생심은 죄인의 본성입니다. 사람의 눈을 가리는 가장 짙은 어둠은 재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6:24). 재물은 복이 될 수 있지만 재앙의 근원이 되기도 합니다.

 

15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하건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하니 16이르되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 앞에서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나아만이 받으라고 강권하되 그가 거절하니라(15-16)

 

엘리사의 말대로 행하여 병이 낫게 된 나아만은 군대를 이끌고 엘리사에게 다시 옵니다. 그때 나아만은 엘리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엘리사 앞에 선 나아만은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땅에는 신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나아만은 이전의 교만하고 자기 과시적인 모습에서 변하여 매우 겸손하게 이스라엘에 계신 신만이 진정한 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며, 자신을 당신의 종'이라고 칭합니다. 나병에서 치유되는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맛보자 바로 태도가 바뀐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준비한 예물을 받아달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자신이 섬기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절대로 그 예물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나아만이 엘리사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예물을 받으라고 강요하다시피 하였지만, 엘리사는 끝끝내 거절합니다.

4장에서 본대로 당시 엘리사나 엘리사의 제자들은 경제적으로 늘 어려웠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왕과 귀족들을 비롯하여 일반 백성들까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선지자 엘리사와 선지자의 제자들을 돌보는 사람도 없었고, 은 몇 개, 떡 몇 덩이를 가져와 하나님의 신탁을 구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기에 선지자들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습니다. 엘리야도 늘 쫓겨 다니며 어려운 생활을 했다. 그렇기에 나아만이 주는 어마어마한 예물은 선지자와 선지자 생도들의 삶을 좀 더 편안하고 윤택하게 바꿔줄 수 있었지만, 엘리사는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돈과 바꾸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거저 행하라고 명하신 대로 아무것도 받지 않고 하나님의 권능을 행했으며,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믿고 하나님께서 살라고 하신 가난한 삶을 선택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로서의 합당한 반응을 나타내야 합니다. 하나님만 인정하며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부요함을 보지 못하고 이 땅의 재물을 집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호와만 섬기겠다고 맹세한 나아만(17-19)

새롭게 교회에 출석한 성도들은 넘어지기 쉽습니다. 옛 습관을 버리고, 거룩과 순결로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그들을 조금만 더 배려하고, 더 사랑하며, 더 소중히 여기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결단한 나아만에게 엘리사는 그를 지혜롭게 인도하고 있습니다.

 

17나아만이 이르되 그러면 청하건대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18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신당에 들어가 거기서 경배하며 그가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19엘리사가 이르되 너는 평안히 가라 하니라 그가 엘리사를 떠나 조금 가니라(17-19)

 

엘리사가 완강하게 거절하자 나아만은 엘리사의 말을 따르기로 합니다. 다만 노새 두 마리에 실을 수 있을 만큼 흙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본문에서는 정확하게 그 이유를 말하고 있지 않지만, 흙을 달라고 하면서 이제부터는 다른 신을 위한 번제와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고 오직 여호와만을 위해 제사를 드리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여호와의 놀라운 권능을 체험한 순간 여호와만이 참 신이 라는 것을 고백하고 여호와만을 섬기겠다고 말하며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나아만이 여호와께 제사드릴 제단을 만들기 위해 이스라엘의 흙을 가지고 가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신들은 각 지역에 묶여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살고 계시는 이스라엘의 흙을 아람으로 가지고 와서 자신이 사는 곳에서도 문제 없이 하나님을 섬기려는 신앙의 발로에서 나온 요청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나아만의 모습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과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 수많은 권능을 보고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스라엘의 왕과 지도자들과 백성들과 달리, 나아만은 단 한 번 기적을 체험하고도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한 가지 양해를 구하는데, 자신의 주인인 아람 왕이 림몬 신당에 들어가서 절할 때 왕이 자신의 손을 의지하기 때문에, 자신도 림몬 신당에 들어가 절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왕이 자신의 손을 의지한다는 것은 자신이 왕의 오른팔 역할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비록 지금 여호와만을 섬기겠다고 신앙을 고백했지만, 그의 육신의 주인인 아람 왕을 완전히 떠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림몬신을 섬기지 않기 위해 아람 왕을 떠나는 것은 결심한다고 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개인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 군사적인 문제 등 여러 고려 사항들이 얽혀 있다. 따라서 여호와만을 섬기기로 회심하고 영적 주인을 바꾸었지만, 육신의 주인인 아람 왕은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대신 나아만 앞뒤로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길 원한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매우 조심스럽게 엘리사의 허락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나아만의 간곡한 요청에 엘리사는 ‘평안히 가라’고 답해줍니다. ‘평안히 가라’라는 구문은 출애굽기 4:18에서 이드로가 모세의 요청을 허락하는 의미로 한 말이고, 사무엘상 1:17에서는 엘리가 한나의 말을 듣고 그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엘리사가 나아만에게 ‘평안히 가라’고 말한 것은 나아만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할 때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죄에 대해서 유보 조항을 둔다는 것은 온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는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에서 과감하게 떠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엘리사가 나아만의 요청을 승인해준 이유는, 그가 이제 막 개종한 이방인으로 신앙이 아직 연약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비록 개종을 하였지만, 이스라엘에서 살지 않고 아람으로 돌아가 다른 신을 섬기는 이방인들 사이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막 개종한 나아만에게 완전한 율법 준수를 요구한다면, 어려움 속에서 믿음을 잃거나 그와 그의 가족이 전부 죽을 수 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엘리사는 어쩔 수 없는 그의 처지를 인정해준 것입니다. 이방 땅에서 목숨을 내놓고 믿음을 지킨 다니엘과 세 친구와 같은 순교적 믿음을 갓 회심한 나아만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나아만에게서 예물을 받은 게하시(20-23)

‘소탐대실(小貪大失)’이란 말이 있습니다. 작은 것을 챙기려다가 큰 것을 잃어버린 것을 말합니다. 작고 하찮은 것을 내려놓고 크고 귀중한 것을 잡는 것이 지혜고 신앙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이 지혜입니다. 게하시는 작은 돈 챙기려다가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20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가 가지고 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 하고 21나아만의 뒤를 쫓아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서 내려 맞이하여 이르되 평안이냐 하니 22그가 이르되 평안하나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제자 중에 두 청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로 왔으니 청하건대 당신은 그들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23나아만이 이르되 바라건대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고 그를 강권하여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 벌을 아울러 두 사환에게 지우매 그들이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20-23)

 

20절부터는 나아만에게서 게하시에게로 초점이 바뀝니다. 그는 주인 엘리사가 나아만의 병을 고쳐주고도 그가 가지고 온 예물을 하나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분개합니다. 따라서 그 뒤를 달려가서라도 반드시 뭐든지 받아내겠다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이런 게하시의 맹세는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는 엘리사의 맹세와 분명히 대조됩니다. 엘리사는 여호와의 권능을 돈을 얻는 일에 이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게하시는 이런 호의를 베풀었으면 많은 돈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나아만은 이방인이고 부자이니 돈을 받는 것은 더욱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게하시는 나아만의 뒤를 쫓아가서 인사를 한 뒤 나아만에게 엘리사가 자신을 보냈고, 선지자의 제자 두 명이 왔으니, 그들을 위해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달라고 말씀하셨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아무것도 안 받겠다고 맹세까지 한 엘리사가 말을 번복할 법한 핑계를 만들기 위해 갑자기 두 명의 제자를 들먹이는 재치까지 보입니다.

이런 게하시의 말을 나아만은 의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건네줍니다. 나아만의 입장에서는 엘리사가 워낙 강하게 거절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드리지 못하고 온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을 것이고, 이런 참에 게하시를 통해 엘리사가 무엇을 달라고 하자 기쁜 마음으로 준 것입니다. 그는 게하시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겸손하고 정직한 마음을 요구하십니다. 겸손히 순종한 나아만에게는 병 고침의 은혜를 베푸셨지만, 욕심에 이끌려 거짓을 행한 게하시에게는 문둥병을 주셨습니다. 지금 당신의 마음과 태도는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과 태도를 점검하시길 바랍니다.

 

나병이 발병한 게하시(24-27)

종종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속여서 재물을 얻습니다. 그것을 밭에 숨길 수 있겠지만, 그 탐욕의 형태마저 숨길 순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중심까지 보시는 하나님을 보며 깨끗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게하시는 부패한 욕심으로 재물을 얻었지만 또 한 가지 나병도 얻었습니다.

 

24언덕에 이르러서는 게하시가 그 물건을 두 사환의 손에서 받아 집에 감추고 그들을 보내 가게 한 후 25들어가 그의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하니 대답하되 당신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26엘리사가 이르되 한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이할 때에 내 마음이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 27그러므로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하니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나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24-27)

 

나아만에게서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챙긴 게하시는 엘리사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언덕쯤에서 미리 전대와 옷을 받아 자신의 집에 숨깁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모를 엘리사가 아니었습니다.

엘리사는 게하시를 불러 어디 다녀오느냐 묻습니다. 마치 하나님에서 가인에게 동생이 어디 있냐고 묻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엘리사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게하시가 회개할 기회를 주려고 한 질문입니다. 엘리사의 물음에 거짓말을 했지만, 엘리사는 이미 다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게하시는 그 기회를 놓치고 결국 엘리사를 통해 나아만이 해방된 나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치유의 사건을 개인적인 탐욕의 기회로 삼은 게하시는 결국 그의 욕심과 거짓말의 결과로 저주를 받아 몸에 문둥병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들의 운명이 바뀐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불신앙과 이방인의 신앙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얼마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보여줍니다.

 

탐심을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의 마음에 생긴 욕심은 자라서 거짓말을 낳았고, 그 거짓말은 그의 몸에 문둥병을 가져왔습니다. 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점점 자라 죽음을 가져옵니다(야고보서 1:15). 지금 당신이 욕심내는 것들을 무엇입니까? 욕심에 이끌리지 않기 위해선 깨어 있어야 합니다.


견물생심, 소탐대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실천적 무신론은 죄인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어리석은 게하시는 하나님을 지워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없는 것처럼 만들어버렸습니다. 그의 삶은 자신의 고백과 지식을 배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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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5-01)


하나님을 소개 받은 나아만

열왕기하 5장 1-14절


 

세상에서는 사람의 크기나 능력은 재산이나 지위의 높고 낮음으로 평가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능력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깊이로 평가해야 하고, 그분을 향한 믿음의 무게로 잴 수 있어야 합니다. 왕좌에 앉아있어도 초라한 신앙인이 있고, 걸레질하는 어린 여종이어도 거대한 신앙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 열왕기하 5장은 전체적으로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에 관한 이야기로 이루어졌습니다. 본문은 나아만이 나병에서 치료된 이야기입니다. 그는 장관이지만 나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출신 하녀의 말을 따라 이스라엘의 선지자인 엘리사에게로 찾아갑니다. 요단강 물에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말에 순종하자 나병이 나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넘어서 이방인들까지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소녀가 엘리사를 소개(1-3)

인간이라면 아픔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 두 개쯤은 다 있습니다. 저마다 그 아픔을 감추느라고 애쓸 뿐입니다. 어떤 자리에 오르기만 하면, 돈을 많이 벌기만 하면, 자식 잘 키우기만 하면, 그런 문제들이 감쪽같이 살라질 것이라고 최면을 거는 것뿐입니다. 장관 나아만도 그러한 아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2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3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1-3)

 

수넴 여인과 선지자 생도들에게 일어났던 하나님의 기적은 이제 다른 이방나라 사람에게까지도 일어납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아람 왕의 군대 장관인 나아만(Naaman)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아람에 이미 구원을 주신 일이 있었습니다(1).

 

나아만은 아람 왕의 군대 장관으로 왕 앞에서 크고 존귀함을 받는 이물인데, 그 이유는 아람을 구원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아만이 아람을 구원한 것은 여호와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열방을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사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용사이고 왕에게 존귀함을 받는 강한 군대 사령관이었지만 그에겐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심각한 피부병 환자라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나병’은 성경에서 나병으로 변역되었지만, 일반적으로 하얗게 각질이 일어나는 건선이나 습진 등 심각한 피부병이며, 한센병과는 다릅니다. 만약 피부가 괴사하고 손가락이나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한센병을 앓고 있었다면, 군대 장관도 할 수 없고 왕의 제의에도 참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병의 고통은 나아만의 모든 권위와 명예를 하찮게 만들었습니다.

 

병들어 있는 나아만과는 다른 새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녀를 통해 나아만에게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3)라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렇게 소개한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아내의 시중을 들던 이스라엘에서 잡아온 소녀였습니다.

 

종종 아람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변경을 침략해 재산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끌어가 노예를 부리곤 했습니다. 나아만의 집에서 일하던 이스라엘 소녀도 그러한 경우였습니다. 곁으로 보면 나아만과 이 여종을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이 소녀는 이방 신을 숭배하는 아람에 비천한 노예에 불과하지만, 선지자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지금 지위가 높으며 남성이고 군인 장관인 나아만과 비교할 수 없지만, 그녀는 종이며 이름도 없는 이방인인 이스라엘 소녀가 대조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해 평생 문둥병으로 고생하는 주인을 보며 안타까워했고, 나아만의 아내에게 엘리사 선지자라면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을 고칠 수 있다고 소개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이방인을 향한 안타까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여종은 알고 있는데, 나아만은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누리고 있는데, 나아만은 못 누리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입니다. 이스라엘 소녀 뒤에는 하나님이 계셨고, 나아만 뒤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성경은 여종인 소녀가 더 가치 있는 것을 알고 있고 나아만보다 더 복된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엘리사를 찾아 이스라엘로 간 나아만(4-7)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하는 방법으로 곧 위대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잘것없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도 그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들어내 오셨고, 주의 나라 사역을 감당해 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거란 사역을 통해 군대장관 나아만은 움직이고 있습니다.

 

4나아만이 들어가서 그의 주인께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하니 5아람 왕이 이르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하더라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6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하였더라 7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4-7)

 

아람의 군대 장군 나아만은 여호와께서 크게 승리하게 하신 까닭에 아람 왕에세 존귀한 자가 됩니다. 그런데 그는 나병환입니다. 노예로 붙잡혀 온 이스라엘 소녀는 자신의 주인 나아만에게 엘리사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소개합니다.

 

⑴ 이스라엘로 가기로 결심함(4-5)

 

이 소식을 들은 나아만은 무시할 수 있었지만, 그 말을 흘려듣지 않았습니다. 참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만큼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아람 나라가 주는 특권으로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나아만은 자신의 주인인 아람 왕을 찾아갑니다. 왕에게 여종의 말을 전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이스라엘의 엘리사를 만나겠다고 요청합니다(4).

 

아람 왕은 자신의 사랑하는 부하를 고치기 위해 엘리사를 만날 수 있도록 공식적인 추천서를 써주었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아람에게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왕은 추천서와 엄청난 선물인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선물로 줍니다. 선지자가 고쳐 주면 그것을 담례로 주라는 뜻이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간 예물의 양은 현제의 단위로 볼 때 은은 340kg이고, 금은 90kg 정도가 됩니다. 이렇게 많은 양의 예물을 준비하여 나아간 것인데, 이는 나아만이 얼마나 간절하게 질병에서 낫고 싶어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⑵ 추천서를 받은 이스라엘 왕(6-7)

 

군대장관 나아만은 먼저 아람 왕의 추천서를 이스라엘 왕에게 보냅니다. 먼저 보내어 일을 준비하도록 할 의도였습니다. 그 추천서의 내용은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아만이 들고 온 추천서를 읽고 이스라엘 왕은 매우 당황합니다. 받고 낙담하여 자기 옷을 찢으며 말합니다. 마치 큰 재앙이 닥친 것처럼 행동합니다. 이스라엘 왕은 아람 왕이 자신에게 직접 나아만의 병을 고쳐주라고 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나님도 아닌데 어떻게 나병을 고치냐며 한탄하고 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아람 왕이 전쟁할 빌미를 찾기 위해 이런 터무니없는 서신을 보냈다고 말합니다. 우리들은 이미 여종과 나아만과 아람 왕의 대화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 왕의 오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를 모르는 이스라엘 왕에게는 느닷없이 닥친 재앙이자 아람 왕의 선전포고로 보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은 나아만이 가지고 온 아람 왕의 추천서를 읽고 큰 고민에 빠집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민족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이방인 아람 왕과 나아만을 보면서 오해합니다. 아람 왕이 불가능한 일을 핑계로 전쟁을 일으키려는 것으로 오해하고 괴로워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왕은 엘리사가 그의 왕도에 거주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의 상황만 보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의 생각은 아람에서 노예로 살고 있는 한 소녀와 대조를 이룹니다.

 

엘리사를 만난 나아만(8-12)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생각 안에 한정시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와 모든 족속을 다스리시며,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8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9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11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8-12)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나타납니다. 엘리사는 이방인인 나아만의 치료 과정에서 모든 인위적 방법이 개입할 가능성을 배제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마술적인 영력, 주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에 달려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사는 왕에게 심부름꾼을 보냅니다. 그리고 나아만을 자신에게 보내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찾아온 나아만을 엘리사는 직접 나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환을 보내어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면 나을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의 말을 듣고 화가 난 나아만이 그냥 돌아갑니다. 나아만은 강대국 아람의 모든 군사력을 가졌고, 많은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더욱 아람 왕의 추천서까지 가지 왔는데 이런 푸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 능력을 기대했던 나아만은 먼저 해야 할 일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식 필요했습니다. 나아만이 하나님의 축복을 잃을 뻔했던 이유는 헛된 자존심 때문이었습니다.

 

현대인들이 아주 작은 일에도 쉽게 분노합니다. 대부분 분노는 자신들의 익숙한 삶을 거슬리는 것들에 대해 분노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의견이 조금만 다르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쉽게 분노합니다. 원인은 순종하는 훈련보단 대접을 받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순종을 통해 문둥병을 고침(13-14)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 축복을 누릴 수 없도록 하십니다. 만약 나아만 장군이 화가 나서 엘리사의 말대로 하지 않고 그냥 집으로 돌았다면 문둥병이 낫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의 생각과 말씀이 다를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당신의 편견은 무엇입니까?

 

13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14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13-14)

 

처음에는 나아만은 분노하면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지혜로운 종들이 나아만을 만류하였습니다. 종들은 선지자 엘리사 어려운 일을 하라고 보냈으면 하지 않았겠냐며, 어려운 일도 아니고 씻으면 깨끗하게 된다고 하니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하여 주인을 설득합니다.

나아만은 이 종들의 말을 듣고 물로 내려가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일곱 번 물에 몸을 담갔고, 정말 엘리사의 말대로 피부가 회복되었습니다. 어른의 피부도 아닌 어린아이처럼 기대 이상으로 완벅하게 회복되었습니다. 순종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문둥병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나아만이 엘리사를 만나기 위해 이스라엘에 온 것도 여종의 말 때문이었고, 나아만의 병이 나은 것도 종들의 설득 덕분이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왕이나 나아만처럼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사항만 보고 어리석은 판단을 하고 과장되게 행동하는 반면에, 포로로 잡혀온 여종이나 나아만의 종들 같이 가장 낮은 자들이 오히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더 잘 알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사람의 말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 이야기는 이 세상의 다수를 이루는 작은 자들의 믿음이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고, 하나님의 기적이 이 땅에 일어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말을 겸손히 들어야 합니다. 나아만은 군대 사령관이라는 높은 위치에 있었음에도 포로로 끄려온 이스라엘 어린 소녀의 말과 동들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잘 들었습니다. 그리고 종들의 조언으로 요단강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주변 사람의 말을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 혹시 당신보다 어리거나 못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 말을 무시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나라와 모든 민족을 주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한정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사람의 조언에 귀 기울이고 따름으로써 말씀의 축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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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4-03)


선지자로 인정받은 엘리사⑶

열왕기하 4장 38-44절


하나님께서는 예배당 안에만 계신 분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과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창조하신 전 우주에 어느 곳에나 계시는 분입니다. 더욱 자신이 창조한 만물에 생명을 공급해 주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모든 곳에 계시며,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만나고 함께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 엘리사가 선지자로 인증된 사건들을 계속 소개합니다. 그가 길갈에서 도착했을 때, 이스라엘 전역은 흉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엘리사 앞에 모였습니다. 그들에게 양식을 공급하기 위해 죽을 끌렸는데, 독 있는 식물이 들어가 죽어가고 있을 때, 그들을 살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보리떡 스무 개와 약간의 채소로 기근 중에 백 명의 제자들이 먹고도 만을 만큼 넉넉하게 해줍니다.

 

독을 없애는 엘리사(38-41)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주관하신 분이십니다. 주관하셨던 내용을 기록한 것들 중에 하나가 열왕기입니다. 열왕기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엘리사에 대한 내용을 길게 하례합니다. 이것은 엘리사가 엘리야 다음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내용입니다.

 

38엘리사가 다시 길갈에 이르니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의 앞에 앉은지라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큰 솥을 걸고 선지자의 제자들을 위하여 국을 끓이라 하매 39한 사람이 채소를 캐러 들에 나가 들포도덩굴을 만나 그것에서 들호박을 따서 옷자락에 채워가지고 돌아와 썰어 국 끓이는 솥에 넣되 그들은 무엇인지 알지 못한지라 40이에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였더니 무리가 국을 먹다가 그들이 외쳐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솥에 죽음의 독이 있나이다 하고 능히 먹지 못하는지라 41엘리사가 이르되 그러면 가루를 가져오라 하여 솥에 던지고 이르되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하매 이에 솥 가운데 독이 없어지니라(38-41)

 

본문에는 엘리사와 관련된 에 가지 사건 중에 두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들은 예수님을 닮은 엘리사의 따뜻한 심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죽음의 시대에서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 생명의 역사를 진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는 바알 신이 살고 죽는 것을 결정하고 번영과 자산을 보장해준다고 믿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가지 못한 수넴 여인에게 잉태하게 하신 것도, 죽은 그 아들을 살리신 것도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엘리야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 자신을 살아계심을 엘리야를 통해 증명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엘리사를 통해 그 역사를 이어감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쉬지 않고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일을 계속하신다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선지자로서 인정받는 세 번째 사건으로 그 배경적 장소는 가나안 땅에 있는 길갈이었습니다. 이곳에도 흉년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흉년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축복하실 때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통해 풍년을 주십니다. 당시는 바알이 풍년을 주는 신이라고 믿던 시대였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믿음인지를 알려주시려고 하나님께서는 흉년을 주신 것입니다. 흉년은 바알의 무능을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방법이었습니다.

 

흉년이 들면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매우 힘든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길갈에 있는 생도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엘리야에 관한 네 가지 사건 중에 첫 번째 사건에서는 선지자의 제자와 그 가정은 빚 때문에 시달렸습니다. 또한 선지자는 누군가의 부양을 받아야만 하는 처지였습니다. 경제적으로 선지자와 그 공동체가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또 흉년이 들었습니다. 흉년은 언약에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일 것입니다.

 

엘리사는 북이스라엘 지역을 돌아다니며 사역하고 있었고, 돌아다니다가 길갈에 종종 들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엘리사가 다시 길갈로 도착한 것은 길갈도 그의 순회 도시 중 하나였음을 의미합니다. 길갈은 2:1에서 언급한 것처럼 벧엘 북쪽 중앙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으로 엘리야가 승천할 때 엘리야와 엘리사가 같이 출발한 지역입니다. 엘리사가 이 지역에 다시 방문했을 때 이 땅엔 심각한 기근이 들어 있었습니다.

 

선지자의 제자들은 엘리사 앞에 앉았습니다. 여기서 선지자의 제자들이 같이 모여 있는 것은 흔치 않은 일입니다. 선생님 앞에 제자들이 앉아 있다는 것은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선지자의 제자들이 모인 것입니다. 그러나 극심한 기근 때문에 그들에게는 당연히 먹을 것이 부족했습니다. 제자들의 몰골을 보니 말이 아니었습니다. 제대로 밥도 먹지 못한 선지자의 제자들을 본 엘리사는 말씀을 가르치는 것보다 먼저 이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것이 더 급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엘리사는 굶주린 제자들에 대한 연민을 느꼈습니다.

 

엘리사는 사환에게 국을 끓일 큰 솥을 걸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런 명령에 따라서 먹을 만한 야채를 채집하기 위해서 들로 나갑니다. 이러한 모습은 기근이 심해 밭에서 나는 채소나 곡식이 없고, 들이나 산에서 식물과 열매를 채집하여 연명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상황이 우리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해서 굶어 죽을 수도 있는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들로 나간 한 선지자는 야생 포도나무를 찾아내었고, 그것에서 들호박을 따 왔습니다. 우리말에서 들호박으로 번역된 것은 노란 조롱박으로 독성이 강해 위험한 식물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자신의 옷에 가득 따 와서 그것을 썰어 국솥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국 속에 노란 조롱박이 들어갔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국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 국을 받아 먹던 사람들이 갑자기 국 안에 죽음이 있다고 소리칩니다. 이것은 국 안에 죽음에 이를 만한 치명적인 독이 있다는 뜻입니다. 배고픈 제자들에게 변변치 않지만 따뜻한 죽 한 그릇이라도 먹이려고 준비한 음식 때문에 제자들이 죽음의 위험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엘리사는 호의를 베풀려고 하다가 뜻하지 않은 어려움에 빠지게 되는데, 이것은 수넴 여인에게 아들을 낳을 수 있도록 호의를 베풀었다가 아이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곤란하게 된 것과 유사한 상황입니다. 엘리사는 그 말을 듣자마자 급히 제자들에게 밀가루를 가져오라고 명령하고, 그것을 바로 솥에 넣은 후 국을 퍼서 먹으라고 합니다. 밀가루를 넣음으로 국의 독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나쁜 물에 소금을 넣은 것(열왕기하 2:21)과 유사한 사건으로, 죽음의 국이었던 것을 배고픔을 면할 수 있는 생명의 국으로 변했습니다. 다시 엘리사가 원했던 선한 일로 마무리된 것입니다. 수넴 여인의 아들 사건과 이 사건은 호의를 베풀었지만 뜻하지 않게 사람들을 절망에 빠지게 하거나 위험에 빠지게 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역경이나 실패가 없이 순탄한 것만은 아닙니다. 삐걱거리는 과정을 보면서 의심도 하고 주저도 하는 과정이 있지만,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의 기대와 스케줄에 따라서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필요 없을 만큼 안전한 삶은 신앙의 공식이 아닙니다. 믿음은 항상 예측과 기대를 뛰어 넘어서 역사합니다.

 

결국 엘리사는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처음에 가졌던 선한 목표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런 엘리사의 모습은 항상 하나님의 일을 정학하게 행하던 다른 선지자들과는 다릅니다. 이런 모습을 통해 우리는 엘리사 선지자의 연민, 좌절, 극복 등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도 관심 갖고 돌보십니다. 엘리사를 통한 하나님의 능력은 국을 끓이고 배고픔을 해결하는 일상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주일 교회에서뿐 아니라 평일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과 함께하십니다.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도움을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백 명이 먹고도 남은 보리빵(42-44)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극한 상황에서도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심으로써 지켜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분이십니다. 자기 백성들이 궁핍했을 때 일용한 양식으로 채워주십니다.

 

42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만든 떡 곧 보리떡 이십 개와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그가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43그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44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42-44)

 

이 이야기는 바알 살리사에서 온 한 사람의 등장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실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엘리사에게 헌물로 가져 왔습니다. 그는 이제 막 보리 추수를 끝내고 첫 열매로 보리 떡 20개를 만들고, 밭에서 재배한 채소를 자루에 담아 엘리사에게 가지고 왔습니다. 얼마 되지 않지만 흉년이 상황에서 그 정도의 헌물은 바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작은 것이지만 믿음으로 드린 것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합니다.

 

여기서 엘리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는 것은 이 사람이 엘리사가 선지자라는 것을 알고는 첫 열매를 여호와께 바친다는 의미로 이것을 가져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엘리사라는 개인에게 준 것이라기보다는 여호와께 바친 제물의 일종인 것입니다. 보리는 밀 추수보다 빠른 4월에 추수가 시작되며, 보리 추수 직전이 이스라엘에서 가장 배가 고픈 시기입니다. 이 사람이 가져온 양을 보면 이 사람도 경제적으로 그다지 넉넉한 처지는 아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저 적은 양이라도 하나님 앞에 가지고 와서 추수한 것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당시 엘리사 주위에는 100여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여기에 있던 사람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특정되진 않지만, 바로 앞에 나온 사건과 연결해 볼 때 엘리사와 함께 생활하며 말씀을 배우고 전파하던 선지자 무리일 것입니다. 4장의 이야기를 보면, 엘리사 당시 선지자의 제자들이나 선지자의 형편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선지자의 자녀들과 과부는 빚 때문에 고생하고, 선지자는 누군가의 부양을 받아야 하며, 선지자 무리는 먹을 것이 없어서 산이나 들에서 먹을 것을 채집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엘리사는 사환에게 그 사람이 드린 헌물을 사람들에게 먹게 나누어 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보리떡 20개와 채소 한 자루밖에 안 되는 것을 엘리사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먹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사환은 어떻게 이것으로 100명을 먹이겠느냐고 하면서 난색을 표합니다. 사환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자신들도 먹기 힘든데 얼마 되지 않는 양을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먹느냐고 항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백성들에게 대접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런 상황이기에 엘리사는 길갈에 가서도 배고픈 제자들을 먹이는 일을 제일 먼저 했고, 여기서도 제자들을 위해 자신에게 들어온 적은 양의 양식을 나누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환의 말처럼 보리 떡 20개와 채소 한 자루는 100명이나 되는 사람을 먹이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입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사환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고 다시 말하며,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먹고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이 말을 듣고 사환이 그들에게 떡과 채소를 나누어 주었는데, 정말 여호와의 말씀대로 먹고 음식이 남았습니다. 이것은 광야에서처럼 여호와는 자신의 백성을 먹이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준 기적의 사건입니다.

엘리사는 제자들이 실제적인 어려움에 처했을 때 기도해 주겠다, 가서 배부르라, 평안히 가라, 하며 말로만 위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제적으로 먹을 것을 제공하여 제자들의 배를 채워주었고, 돈이 될 만한 것을 제공해 빚을 탕감하게 하였습니다. 엘리사는 어려운 제자들의 형편을 살피고, 이들을 실제적으로 돕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는 먼저 자기가 할 수 있는 부분을 하고 나머지는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먼저 솥단지를 걸고 들에서 식물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들어온 얼마 안 되는 식량을 제자들을 위해 먼저 내놓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엘리사가 보리떡 20개와 채소 한 자루로 100명을 먹인 사건은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사건을 기억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소년이 바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배고픈 백성들을 위해 넘치도록 풍성한 식탁을 차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엘리사의 능력보다 몇 백 배 크지만,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그들의 실제적인 필요를 채워주고 싶은 마음은 엘리사와 예수님이 동일합니다.

 

이 기적은 벳새다 광야에서 예수님께서도 오병이어로 오천 병을 먹이고도 남은 사건과 비슷합니다(요한복음 16장). 이 일들을 통하여 깨달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청중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5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태복음 6:25-26,31)

 

세상의 것들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며 모든 권능을 소유하고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돌보시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입니다. 두 번째 깨달은 사실은 하나님이 남을 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 필요를 채우셨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사용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정성을 다해 주어야 합니다. 도울 때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드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베풀 수 있도록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베풀 때는 사랑과 믿음을 가지고 베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수효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얼마나 헌신적이고 자신을 희생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한 사람의 헌신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일을 이루십니다. 믿음은 문제를 통해 발휘되고 단련됩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문제들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믿음이 더욱 견고해졌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 갔습니다. 문제를 만날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인간적인 생각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시길 바랍니다.


경건한 사람에게도 시련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삶의 힘든 순간에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마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작지만 헌신을 통해 하나님의 큰 사역을 이루어가십니다. 당신이 필요할 때 일용할 양식으로 이루어갑니다. 하나님과 날마다 동행하는 삶은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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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4-02)


선지자로 인정받은 엘리사⑵

열왕기하 4장 18-37절


절망적인 순간을 만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낙담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렇기만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포기하면 상황은 결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믿음이란 절망적인 순간이라도 희망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의 결과를 축복으로 되어 갈 것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희망을 포기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끝까지 소망을 놓지 않으면 어려운 상황이 희망으로 바뀔 것입니다.

 

  • 스승 엘리야에게 두 배나 영적인 능력을 요구했던 엘리사는 네 가지 기적을 모아서 소개합니다. 이 이적들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혹은 ‘하나님께서 행하셨다.’는 말이 빠져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엘리사가 하나님께서 주신 권능을 행하는 참 선지자라는 사실입니다. 이 단락에서는 수넴 여인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집니다. 엘리사의 예언대로 아들을 얻었지만, 수넴 여인에게 아들의 죽음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생깁니다.

 

수넴 여인의 아이 죽음(18-20)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리는 중에도, 때로는 뜻하지 않는 어려움이 닥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믿음의 진가는 평온할 때보다 고난을 당할 때 더 빛이 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18그 아이가 자라매 하루는 추수꾼들에게 나가서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렀더니 19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머리야 내 머리야 하는지라 그의 아버지가 사환에게 말하여 그의 어머니에게로 데려가라 하매 20곧 어머니에게로 데려갔더니 낮까지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있다가 죽은지라(18-20)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해 수넴 여인에게 기적적으로 아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던 시대에 이 수넵 여인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대접함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우상인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만이 살아계신 참 신이라고 믿었던 의미입니다.

그러나 수넴 여인마저도 가망 없는 자신에게 생명을 주실 것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아이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전했을 때, 처음에는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 시대가 어둡고 불신이 가득하면 아무리 개인이 노력해도 신앙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교회와 상관없이 혼자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습니다.

 

엘리사의 예언대로 하나님께서 수넴 여인에게 아이는 하나님의 선물로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렇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을 또 데려가십니다. 기적처럼 생긴 아들이 자라던 어느 날 갑자기 죽었습니다. 하루는 아이가 자기 아버지가 추수하려 나간 사이,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며 비명을 지릅니다. 아버지는 일꾼들을 시켜 그의 어머니에게로 보냅니다. 아이에게 손도 써보지 못하고 정오쯤에 어머니의 무릎에서 아이는 죽고 맙니다.

 

‘정오’란 시간 표현은 아이가 발병한 지 한나절도 못되어서 급작스럽게 죽었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침 잘 먹고 아버지와 추수하러 갔던 아이가 갑자기 업혀 오더니 손써 볼 틈도 없이 정오 무렵에 품에서 죽은 것입니다.

수넵 여인은 두 가지의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하나는 아직 어린 아들의 죽음 자체에 대한 고통이며,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왜 아들을 얻는 기쁨을 주시고는 이렇게 무참하게 빼앗아 가시는지, 그 뜻을 알 수 없어서 겪는 고통입니다. 수넵 여인은 아들의 죽음을 순순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엘리사을 찾아가는 수넴 여인(21-28)

문제가 발생하면 지체 없이 하나님 앞으로 달려 나가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희망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 희망을 멈추지 않고 나가면 어려운 현실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또한 그 어려운 과정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됩니다.

 

21그의 어머니가 올라가서 아들을 하나님의 사람의 침상 위에 두고 문을 닫고 나와 22그 남편을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사환 한 명과 나귀 한 마리를 내게로 보내소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달려갔다가 돌아오리이다 하니 23그 남편이 이르되 초하루도 아니요 안식일도 아니거늘 그대가 오늘 어찌하여 그에게 나아가고자 하느냐 하는지라 여인이 이르되 평안을 비나이다 하니라 24이에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몰고 가라 내가 말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위하여 달려가기를 멈추지 말라 하고 25드디어 갈멜 산으로 가서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멀리서 그를 보고 자기 사환 게하시에게 이르되 저기 수넴 여인이 있도다 26너는 달려가서 그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27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안은지라 게하시가 가까이 와서 그를 물리치고자 하매 하나님의 사람이 이르되 가만 두라 그의 영혼이 괴로워하지마는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 하니라 28여인이 이르되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 하니(21-28)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것들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가져가시는 것이 당연한데도 우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든 경우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절대 행복도 절대 불행도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방인인 수넴 여인의 태도를 보면서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⑴ 엘리사를 찾는 수넴 여인(21-24)

 

수넴 여인은 죽은 아들을 엘리사의 방으로 데리고 올라가 엘리사의 침상에 눕히고 문을 닫고 나와 다른 사람들이 아이에게 접근할 수 없게 합니다. 그러고는 남편을 불러 자신에게 종 한 사람과 나귀 한 마리를 주어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달려갔다 올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갈멜산에 머물고 있는 엘리사를 만나기 위해 다녀오겠다고 말합니다. 남편은 초하루도 아니고 안식일도 아닌데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는 것에 대해 걱정합니다.

이런 아내의 요구에 남편은 초하루나 안식일처럼 특별히 선지자를 찾아가 신탁을 받는 날도 아닌데, 왜 엘리사에게 가려느냐고 반문하며 만류합니다. 원래는 예배와 교훈을 얻기 위해서는 선지자의 집에 나아가는 날은 정해져 있었습니다(참고, 아모스 8:5; 민수기 28:9-15). 하지만 그 여인은 남편의 염려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형식적인 종교 규례에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나귀를 타고 갈멜산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녀에게는 오로지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에게 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수넴 여인과 남편의 관계를 보면, 남편에게 말하는 22절은 전체적으로 청유형(請誘形) 문장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수넴 여인이 엘리사에게 다녀올 수 있도록 매우 공손하게 남편에게 요청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남편에게 예의 바른 아내였던 것입니다. 반면에 23절을 보면 이 수넴 여인은 남편이 가지 말라고 말리는 말을 듣고는 아무 설명 없이 다녀오겠다는 인사만 하고 바로 출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수넴 여인은 예의 바른 아내인 동시에 매우 독립적이고 의지가 강한 인물로 보입니다.

여기서 수넴 여인은 ‘달려가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급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집을 출발하면서 그녀는 사환에게 자신을 배려해서 나귀 모는 속도를 늦추지 말라고 합니다. 도리어 최대한 빨리 가자고 재촉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며 간절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갈멜산으로 재촉한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볼 수 없었던 믿음입니다. 이방여인이었던 수넴 여인에게서 찾아 볼 수 있었습니다.

 

⑵ 수넴 여인의 원망(25-28)

 

수넴 여인이 갈멜 산에 도착했을 때, 엘리사가 먼저 알아봅니다. 선지자는 게하시를 보내 수넴 여인에게 남편과 아이의 안부를 물어보라고 합니다.

여기서 ‘평안하냐?’는 안부를 묻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게하시의 안부 인사를 들은 여인은 그냥 간단한 인사만 하고는 가던 길을 멈추지 않고 지나칩니다.

수넴 여인의 목적은 엘리사를 만나는 것이 기에 곧장 산으로 달려가 엘리사를 만나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를 만나자마자 그의 발을 끌어안습니다. 여기서 발을 안는 것은 자신을 낮추고 애원하는 행동입니다. 이런 행동은 구약에서는 여기에만 나오지만, 아카드 문헌에는 온갖 도망자나 간구자들이 복종이나 굴복을 나타내고 탄원하기 위해 왕의 발을 안는 예들이 매우 많이 나옵니다.

 

이런 갑작스런 행동을 본 게하시는 수넴 여인을 제지하려고 하였지만, 엘리사는 그대로 두라고 합니다. 그녀가 마음이 아프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만 무슨 내용인지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시지 않아 자신도 모른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엘리사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수넴 여인의 행동을 보며 매우 큰 비극이 닥쳤다는 것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에게 매우 날카로운 어조로 자신이 아들을 구한 적이 있느냐, 나를 속이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느냐며 원망의 말을 쏟아냅니다. 이 말은 자신이 구하지도 않은 아들을 주어서 삶에 희망과 기쁨을 품게 하고는, 이제 이처럼 무책임하게 아들을 죽게 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아들 잃은 비통함과 하나님에 대한 배신감에서 오는 아픔을 토로한 것입니다.

또한 이 말은 엘리사가 아들을 얻게 했으니 아들의 죽음도 책임지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말 속에는 엘리사라면 다시 이 아들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이 들어 있기도 할 것입니다. 그녀는 아픔을 쏟아놓기 위해 엘리사를 찾은 것이 아니라, 아들을 살릴 희망이 있기 때문에 먼 길을 급하게 달려온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수넴 여인은 아이가 죽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람라면 그 아이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믿음은 희망을 갖게 하고 그 믿음은 기적을 가져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문제만 커질 뿐입니다. 무릎 꿇고 하나님께 달려가야 합니다.

 

엘리사의 동행을 요청하는 수넴 여인(29-31)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방법을 찾습니다. 때로는 일시방책적인 해결책으로 더 큰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 방법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이방인 수넴 여인은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얍복 강가에서 기도한 야곱처럼 정말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29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이르되 네 허리를 묶고 내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라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인사할지라도 대답하지 말고 내 지팡이를 그 아이 얼굴에 놓으라 하는지라 30아이의 어머니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 엘리사가 이에 일어나 여인을 따라가니라 31게하시가 그들보다 앞서 가서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았으나 소리도 없고 듣지도 아니하는지라 돌아와서 엘리사를 맞아 그에게 말하여 아이가 깨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29-31)

 

수넴 여인의 말을 듣고 아이의 죽음을 알게 된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자신의 지팡이를 들고 급히 아이에게 가서 지팡이를 아이의 얼굴에 놓으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허리를 묶는다’는 것은 달려가는데 방해가 되지 않게 하라는 것으로 급하게 뛰어가라는 뜻입니다.

아무에게 인사하지도 받지도 말라는 것 역시 위급한 상황임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최대한 빨리 가서 아이 얼굴에 자신의 지팡이를 놓으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선지자의 지팡이는 선지자의 능력의 상징이며 지팡이를 통해 엘리사의 능력이 아이에게 임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수넴 여인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엘리사를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엘리사가 가야만 아이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는, 그가 반드시 가야 한다고 매달린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수넴 여인은 자기주장과 의지가 매우 확고한 여성입니다. 이렇듯 단호하게 매달리는 수넴 여인의 모습을 보고 엘리사도 결국 그 여인을 따라 나섭니다. 여기서 본문은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뒤를 따라갔다고 표현함으로써 이 일에서 수넴 여인이 주도권을 갖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엘리사보다 먼저 도착한 게하시는 시킨 대로 주인의 지팡이를 아이 얼굴 위에 놓았지만, 아이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습니다. 숨소리도 없고 생명의 징후를 나타내는 어떤 움직임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게하시는 엘리사에게 돌아와 아이가 깨어나지 않는다고 보고합니다. 엘리사의 지팡이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팡이는 단지 지팡이를 쓰는 사람의 신앙을 표시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게하시가 하나님께서 아이를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으면 그 지팡이는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지팡이가 아무런 효과도 없었던 것은 게하시의 믿음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수넴 여인은 문제 해결을 위해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자신의 아이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다른 어떤 수단이나 사람을 의지할 수 없었습니다. 형식적인 믿음은 있지만 열매가 없을 것입니다. 그의 삶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비아냥거립니다. 그것은 세상은 썩을지라도 성도들만이라도 썩지 않길 원하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종교는 결코 거룩함도 능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을 향해 어두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 달라고 아우성치는 것입니다.

 

죽은 아이를 살린 엘리사(32-37)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살다가 힘든 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너무 쉽게 낙심하거나 낙담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에게만 진정한 위로와 소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능히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어려운 사정을 아뢰고 해결 받아야 합니다.

 

32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33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34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의 입에,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대고 그의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35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 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36엘리사가 게하시를 불러 저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하니 곧 부르매 여인이 들어가니 엘리사가 이르되 네 아들을 데리고 가라 하니라 37여인이 들어가서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아들을 안고 나가니라(32-37)

 

엘리사는 자신의 침상에 누워 있는 아이를 보고 여호와께 기도하고 아이의 몸에 자신의 몸을 올려놓는데, 입과 입, 눈과 눈, 손과 손을 대고 아이 위에 누웠습니다. 엘리사는 지팡이 대신 자신을 아이에게 올려놓은 것입니다. 이런 행동은 열왕기상 17:21에서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이를 살리는 모습과 유사합니다. 엘리야는 아이의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기도했고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엘리사가 이렇게 하자 아이의 몸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잠시 내려와 집 안을 돌아다닌 뒤 다시 올라가 아이 위에 엎드리니 아이가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여기서 재채기를 한 것이나 눈을 뜬 것은 게하시가 지팡이를 올려놓았을 때 아무 반응이 없었던 것과 대조됩니다. 이렇게 살아난 아이는 다시 엄마 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수넴 여인은 죽은 아이가 살아난 것을 보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엘리사도 엘리야처럼 사람을 살리는 놀라운 권능을 행함으로 엘리야의 확실한 후계자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려 준 사건(열왕기상 17:17-24),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신 사건(마가복음 5:35-43) 그리고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살려 주신 사건(요한복음 11장) 등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통해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임을 다시 깨닫게 해줍니다. 이미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시는 능력은 우리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크신 능력으로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입니다. 엘리사의 기도는 들으시고 수넴 여인의 죽은 아이를 살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태에 놓여 있더라도 회복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당신을 하나님께서 치료와 회복이 필요한 부분이 어디입니까?


엘리사는 이 일로 확실한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시대적인으로 믿음을 찾아보기 힘든 상황에서 이방인 출신인 수넴 여인은 믿음을 보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누가복음 18:8)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는 믿음은 미지근한 믿음이 아니라 이 여인처럼 끝까지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상황을 볼 때, 해결자이신 하나님께서 항상 가까이 계십니다. 수넴 여인처럼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이 당신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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