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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9-02)


예후의 혁명을 통한 요람의 죽음

열왕기하 9장 14-26절


요즘 한국교회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한국 교회의 타락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라고 염려와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거룩한 나라를 부패시킨 죄를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영화에 취하여 역사의 교훈을 망각한다면,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어떻게 심판하실 것인지 가슴 조여집니다.

 

 

  • 엘리사의 제자가 예후에게 왕이 될 것을 말하고 기름을 부은 후 도망가자, 예후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자 주변에 있던 요람의 신하들이 예후를 왕으로 세우며 반역을 일으킵니다. 이 여세를 몰아 예후와 그의 무리는 요람 왕이 있는 이스르엘로 진격합니다.

 

이스르엘에 있는 요람 왕(14-16)

복잡하고 다양한 세상에서 여러 가지 관계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권력의지와 불신, 반역과 우정, 미움과 사랑 등으로 복합적인 요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소를 모두 사용하여 자신의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14이에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가 요람을 배반하였으니 곧 요람이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아람의 왕 하사엘과 맞서서 길르앗 라못을 지키다가 15아람의 왕 하사엘과 더불어 싸울 때에 아람 사람에게 부상한 것을 치료하려 하여 이스르엘로 돌아왔던 때라 예후가 이르되 너희 뜻에 합당하거든 한 사람이라도 이 성에서 도망하여 이스르엘에 알리러 가지 못하게 하라 하니라 16예후가 병거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요람 왕이 거기에 누워 있었음이라 유다의 왕 아하시야는 요람을 보러 내려왔더라(14-16)

 

이 본문에서는 새로운 이스라엘 왕이 등장합니다. 예후가 엘리사가 보낸 제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아 여호와께 왕으로 선택되고, 무리가 예후를 왕으로 추대하는 동안, 요람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님시의 손자이며 여호사밧의 아들인 예후가 그의 무리와 요람에 대해 반역을 모의하고 있을 때, 요람은 유다 왕 아하시야와 함께 아람 왕 하사엘에 맞서서 길르앗 라못에서 전쟁을 하다가 부상을 입어 이스르엘로 돌아왔습니다. 아람과 전쟁을 하던 길르앗 라못에는 예후가 군사들과 남아있었습니다. 이곳을 반란의 본거지로 삼았습니다. 반란하기로 결정한 예후는 입단속부터 철저하게 시킵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반역이 성공하길 원한다면, 이스르엘에 반역 소식이 알려지지 않도록 단 한 명의 도망자도 없게 하라고 당부합니다. 반란의 성공 여부는 비밀 유지가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할지 결정한 뒤에 예후는 병거를 타고 요람이 병으로 누워 있는 이스르엘로 갑니다. 마침 그때 유다 왕 아하시야도 요람을 병문안하기 위해 그곳으로 와있었습니다. 이스르엘에 요람과 예후와 아하시야까지도 모두 모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예후가 병거를 몰고 갔다는 것은 군대를 이끌고 갔다는 의미입니다.

 

예후에게 보낸 사자가 돌아오지 않음(17-20)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지 않는 자는 사람을 잃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곁에 있던 사람들을 빼앗으심으로써 교회를 타락시킨 죄를 심판하십니다. 죄를 멈추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진정한 평안이 하나님의 공동체에 찾아옵니다.

 

17이스르엘 망대에 파수꾼 하나가 서 있더니 예후의 무리가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내가 한 무리를 보나이다 하니 요람이 이르되 한 사람을 말에 태워 보내어 맞이하여 평안하냐 묻게 하라 하는지라 18한 사람이 말을 타고 가서 만나 이르되 왕의 말씀이 평안하냐 하시더이다 하매 예후가 이르되 평안이 네게 상관이 있느냐 내 뒤로 물러나라 하니라 파수꾼이 전하여 이르되 사자가 그들에게 갔으나 돌아오지 아니하나이다 하는지라 19다시 한 사람을 말에 태워 보내었더니 그들에게 가서 이르되 왕의 말씀이 평안하냐 하시더이다 하매 예후가 이르되 평안이 네게 상관이 있느냐 내 뒤를 따르라 하더라 20파수꾼이 또 전하여 이르되 그도 그들에게까지 갔으나 돌아오지 아니하고 그 병거 모는 것이 님시의 손자 예후가 모는 것 같이 미치게 모나이다 하니(17-20)

 

이스르엘 망대에 파수꾼 하나가 서 있더니 예후의 무리가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본문에선 그가 본 것을 그대로 보고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파수꾼의 말을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그대로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요람에게 ‘내가 한 무리를 보나이다’라고 알립니다. 이런 보고를 들은 요람은 말 타는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맞이하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말 타는 사람은 왕의 사자이며, 왕은 빨리 가서 어떤 상황인지 알아보게 하려고 보낸 것입니다. 병거를 타고 군대를 이끌고 오는 경우는 적들로부터 도망쳐 오는 것이거나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왕은 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준비하기 위해 빨리 움직일 수 있는 먈 타는 사람을 보낸 것입니다. 여기서 보낸 병사에게 ‘평안하냐?’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무슨 일이 있느냐?’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예후는 ‘너는 무엇이고 샬롬은 무엇이냐?’며 자신의 뒤로 돌아서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슨 일인지 알 필요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뒤에 서라는 것은 왕에게 알리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의미입니다.

예후는 이스르엘에 도착할 때까지 자신의 의도를 알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말 타는 사람을 돌아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이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던 파수꾼은 사자가 그들에게 갔지만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요람에게 보고합니다.

요람은 다시 사람을 보내어 ‘평안하냐?’고 묻지만, 또다시 예후는 그 질문을 무시하고 사자를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파수꾼이 왕에게 다시 보낸 사람도 돌아오지 않는다고 보고합니다. 그러면서 병거를 모는 모양새가 미친 듯이 모는 것이 님시의 아들 예후같다고 보고합니다. 아마도 예후는 평소에도 병거를 거칠게 모는 것으로 유명했던 것 같습니다.

 

왕은 누군가 병거와 군대를 몰고 이스르엘 성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무슨 일인지 알기 위해 사자를 보내어 평안한지를 계속 물었지만 대답을 듣지 못하였고, 마침내 그 정체가 예후라는 것을 알아낸 것은 예후가 이스르엘에 가까이 온 후였습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맡 타는 사람을 보내 상황이 평안한지를 물어보는 요람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요람이 하사엘과의 전쟁을 매우 걱정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합의 아들 요람을 죽인 예후(21-26)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부패시킨 자는 생명까지 잃게 됩니다. 예후가 추구했던 ‘샬롬’은 전쟁의 승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와 부순종을 통해 이스라엘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아함 가문을 심판하는 것이 참된 평안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21요람이 이르되 메우라 하매 그의 병거를 메운지라 이스라엘 왕 요람과 유다 왕 아하시야가 각각 그의 병거를 타고 가서 예후를 맞을새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토지에서 만나매 22요람이 예후를 보고 이르되 예후야 평안하냐 하니 대답하되 네 어머니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하더라 23요람이 곧 손을 돌이켜 도망하며 아하시야에게 이르되 아하시야여 반역이로다 하니 24예후가 힘을 다하여 활을 당겨 요람의 두 팔 사이를 쏘니 화살이 그의 염통을 꿰뚫고 나오매 그가 병거 가운데에 엎드러진지라 25예후가 그의 장관 빗갈에게 이르되 그 시체를 가져다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밭에 던지라 네가 기억하려니와 이전에 너와 내가 함께 타고 그의 아버지 아합을 좇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그의 일을 예언하셨느니라 26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제 나봇의 피와 그의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노라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이 토지에서 네게 갚으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의 시체를 가져다가 이 밭에 던질지니라 하는지라(21-26)

 

병거를 몰고 오는 사람이 예후라는 것을 알게 된 요람은 유다 왕 아하시야와 함께 각각의 병거를 타고 예후를 맞이하러 나갑니다. 상황이 너무 궁금했던 요람 왕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직접 마중을 나간 것입니다. 이런 요람의 모습을 보면 그는 예후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별다른 방비를 하지 않은 채 병거를 타고 예후를 만나러 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을 읽는 독자들은 요람이 자신의 생명을 재촉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병거를 이끌고 가서 만난 곳이 마침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 자리였습니다. 지금은 아합이 빼앗아 아합 집의 소유가 되었지만, 성경에서는 그곳을 나봇의 기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이 불법적으로 빼앗은 것을 인정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밧세바를 항상 우리아의 아내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합니다. 비록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았지만, 성경은 여전히 밧세바를 우리아의 아내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아는 아내 밧세바의 호칭 속에 여전히 살아있어, 솔로몬의 이름이 거론될 때, 의인 우리아도 기억되게 하였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이라는 장소적 배경은, 왜 하나님께서 예후를 왕으로 선택하고 아합의 가문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셨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그 밭을 소유하기 위해 무죄한 나봇을 여호와를 저주하였다는 누명을 씌워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죄에 대해 나봇의 무죄 한 피 값을 반드시 되갚아줄 것이 라고 선언하셨다. 물론 아합의 회개로 그 벌이 지연되었지만, 이제 그 죗값을 아합의 집에 물을 시간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털도 세실 만큼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이기에, 우리의 죄악도 모두 아십니다. 다만 오래 참으시며 회개하기를 기다리시기에, 그 진노가 더디게 올 뿐 심판을 생략하지는 않으십니다. 예후를 만나자 요람은 또다시 평안하냐고 묻습니다. 요람이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것은 예후가 미친 듯이 달려온 것이 별일 아니기를 바라는 소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요람의 질문에 예후는 매우 무례하고 도전적인 대답을 합니다. 당신의 어머니인 이세벨의 우상숭배와 이교 행위들이 널리 시행되고 있는데, 어떻게 평안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예후의 이 말은 이세벨의 우상숭배와 이교 행위 때문에 자신이 반역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요람은 예후가 반란을 일으키고 자신을 죽이기 위해 군대를 몰고 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러고는 재 빨리 자신의 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자신과 함께한 아하시야에게도 반역이 일어났다고 경고합니다. 이렇게 도망하는 요람을 향해 예후는 있는 힘껏 활을 당겨 요람의 어깨 사이를 향해 쏘았고, 그 화살이 그의 심장을 뚫고 나왔습니다. 우리말은 ‘염통’이라고 번역했는데, 염통은 주로 동물의 심장을 일컫는 말로 사람에게 쓰기에 적절한 단어는 아닙니다. 그는 병거 가운데 엎어졌습니다. 즉, 예후의 화살 한 발에 심장을 맞고 즉사하였습니다. 아합도 도망하다가 우연히 한 병사가 쏜 화살에 맞아 죽었는데, 부자 모두 하나님의 심판의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심판하기로 작정하신 사람을 놓치는 법이 없으십니다.

 

이렇게 요람은 너무 허무하게 죽었고, 예후는 그 시체를 나봇의 밭에 던지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이전에 아합에게 심판을 선언하실 때 하신 말씀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아합이 나봇의 토지를 빼앗기 위해서 나봇과 그의 아들의 피를 흘렸기 때문에 아합의 아들의 피로 갚으신 것입니다. 예후가 여호와의 심판 예언에 대한 성취를 선언하며 요람의 시체를 나봇의 토지에 버린 것은, 자신의 반란이 개인적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합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드러내려는 의도이며, 또한 자신의 반란은 여호와의 지지를 받는 정당한 반란이라는 것을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한 행동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아합의 탐욕스러운 죄를 예후의 손으로 갚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죄를 잊지 않으시며 자신의 말씀을 잊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성품이 억울한 자에겐 소망이 되며 악한 자에겐 두려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교회를 훼손한 죄를 묵과하지 않으십니다. 심판이 임하면, 개인이나 권력은 순식간에 위기에 처하고, 하루아침에 사람을 잃고, 정치적, 사회적 생명이 끝나며, 결국 생명마저 위협을 받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신판을 두려워하고 깨어 각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악한 것들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함으로서 하나님의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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