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요한복음(02)

비워냄으로 채워지는 존재의 역설
요한복음 1장 19-34절
우리는 이름이 남겨지길 원하는 시대를 삽니다. 내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내가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인지를 증명하기 위해 날마다 보이지 않는 무대 위에서 안간힘을 씁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의 한 인물이 그 무대의 화려한 조명과 시끄러운 세상을 스스로 끄고 어두움의 광야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나를 부정함으로 시작되는 진실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이 광야의 요한에게 찾아온 사람들은 묻습니다. "네가 누구냐?" 이 질문은 우리 삶에 끊임없이 던져지는 유혹의 목소리와 닮아 있습니다. "너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냐? 네가 메시아처럼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느냐? 네가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느냐?"
하지만 요한은 망설임 없이 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요 1:20)
그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증명하기보다 '무엇이 아닌가'를 고백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누구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수식어를 붙입니다. 직함, 재산, 경력... 그러나 요한은 그 모든 껍데기를 벗겨내고 오직 진리 앞에 선 단독자로서의 자신을 마주합니다. 나를 향한 과장된 기대를 내려놓는 순간, 비로소 참된 평안이 시작됩니다. 내가 하나님이 아님을 인정할 때, 비로소 내 삶에 하나님의 자리가 마련되기 때문입니다.
‘소리’라는 숭고한 운명
정체가 무엇이냐고 다그치는 이들에게 요한은 자신을 "소리"라고 정의합니다(23절).
소리는 참 묘한 존재입니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즉시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져야만 제 역할을 다한 것이 됩니다. 만약 소리가 공중에 머물러 자기를 고집한다면, 다음에 올 진짜 '말씀'은 들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의 등장을 알리는 짧은 예고편임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을 수 있을까요? 내 이름이 기억되기를 바라는 욕망을 넘어, 나라는 존재를 통과한 '예수의 사랑'만이 타인의 가슴에 남기를 바라는 마음. 내가 사라진 자리에 그분의 온기만 머물기를 바라는 그 '소리의 영성'이 그리워지는 계절입니다.
"보라", 시선의 혁명
요한은 예수를 향해 손가락을 치켜들며 외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29절)
이 고백은 시선의 혁명입니다. 요한은 사람들의 시선을 자기에게서 예수께로 옮겨놓습니다. 그는 예수를 위대한 왕이 아닌, '어린 양'으로 소개합니다. 우리의 죄와 고독, 말 못 할 상처를 묵묵히 어깨에 메고 골고다로 걸어가실 그 연약하고도 강인한 사랑의 실체를 본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며 살고 있습니까? 내 결핍과 상처, 혹은 남들의 화려한 겉모습만 바라보느라 우리 곁을 지나시는 '어린 양'을 놓치고 있지는 않나요? 요한의 외침은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너 자신을 보지 말고, 너의 연약함을 대신 지고 가는 그분을 보라."
하늘이 머무는 자리
요한은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합니다(32절). 성령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라, 그분 위에 깊이 뿌리내린 임재였습니다.
우리의 삶이 소란스러운 이유는 무언가에 깊이 머물지 못하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요한이 광야의 고독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의 사명이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이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 오셨음을 확신하며 자신의 사역을 기쁘게 마감합니다.
글을 맺으며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다 사라졌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비극적인 조연의 삶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신랑의 음성을 듣는 신랑 친구의 기쁨이 그에게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세상은 우리에게 "네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 질문 앞에 "나는 그저 소리일 뿐입니다. 내 곁을 지나는 어린 양을 보십시오"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우리의 광야는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작아질수록 그분이 커지며, 내가 사라질수록 사랑은 선명해집니다. 그 거룩한 비움의 신비가 당신의 오늘 하루에 잔잔한 평화로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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