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요한복음(04)

결핍에서 시작되는 더 좋은 은총
- 요한복음 2장 1-12절-
인생은 흔히 잔치에 비유되곤 합니다. 기쁨과 환희, 축복이 가득한 순간을 꿈꾸며 우리는 각자의 삶이라는 잔칫상을 정성껏 차려냅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잔치의 절정에서 우리는 예상치 못한 ‘결핍’을 마주하곤 합니다. 요한복음 2장에 등장하는 가나의 혼인 잔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의 실존을 관통하는 묵직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잔치의 끝에서 마주한 결핍
유대인의 혼인 잔치는 보통 일주일간 지속됩니다. 그 기쁨의 핵심은 ‘포도주’였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단순히 음료가 부족해진 사건을 넘어, 잔치의 흥이 깨지고 혼주에게는 지울 수 없는 수치와 낭패가 닥쳤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네 삶도 이와 닮아 있습니다. 건강, 재정, 관계, 혹은 열정이라는 포도주가 넉넉할 때는 모두가 친구이고 모든 것이 낙관적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예고 없이 ‘포도주가 떨어지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가장 화려해야 할 때 찾아온 결핍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인간적인 계산과 노력으로는 더 이상 상황을 되돌릴 수 없음을 깨닫게 합니다.
문제의 발견과 신뢰의 의탁
잔치의 위기를 가장 먼저 감지한 것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였습니다. 그녀는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을 보고 즉시 예수께 나아가 사실을 고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마리아의 태도입니다. 그녀는 예수께 “이 문제를 이렇게 해결해 달라”고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들에게 포도주가 없다”는 결핍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내어놓았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우리가 설계한 해결책을 승인이나 결제해 달라고 조르곤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믿음은 내 삶의 결핍을 주님 앞에 정직하게 노출하고, 그분께서 일하실 여백을 남겨두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아들 예수가 단순한 인간을 넘어, 이 결핍을 채우실 능력이 있음을 신뢰했습니다.
상식을 뛰어넘는 ‘비움과 채움’
예수께서는 하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그곳에는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위한 돌항아리 여섯이 있었습니다. 하인들은 그 명령이 얼마나 비논리적인지 따지지 않았습니다. 포도주가 필요한 상황에서 물을 채우라는 명령에 그들은 ‘아귀까지’ 물을 가득 채웠습니다.
순종은 ‘이해’가 될 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권위’를 믿을 때 일어납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의 정점은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는 말씀에 순종했을 때입니다. 항아리 속의 물이 언제 변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발걸음을 뗐을 때, 비로소 기적이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나중 포도주가 더 좋은 이유
연회장은 나중에 나온 포도주를 맛보고 감탄하며 신랑에게 말합니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세상의 원리는 ‘점점 쇠해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화려하고 달콤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빛이 바래고 가치가 떨어집니다. 그러나 주님이 개입하시는 인생은 다릅니다. 주님은 우리의 결핍을 재료 삼아 이전보다 ‘더 좋은 것’을 만들어내십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나중 포도주가 더 좋다”는 고백처럼,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주님 안에서 더욱 풍성해질 것을 기대하는 소망의 종교입니다.
글을 맺으며
가나의 혼인 잔치는 예수께서 행하신 ‘첫 번째 표적’입니다. 요한은 이를 통해 예수께서 만물의 주인이시며, 우리 삶의 결핍을 창조적인 풍요로 바꾸시는 분임을 선포합니다.
지금 당신의 인생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져 낙심하고 계십니까? 주님은 바로 그 결핍의 자리에 초대받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의 빈 항아리에 말씀의 물을 채우십시오. 상식을 내려놓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가십시오. 세상이 줄 수 없는, ‘가장 좋은 포도주’가 당신의 삶에서 빚어질 것입니다.
가나의 기적은 2천 년 전의 사건으로 박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도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순종의 걸음을 내딛는 모든 이들에게,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반전의 은총’은 현재진행형으로 역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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