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2-01)

진심 어린 사랑을 보여 준 마리아
요한복음 12장 1-11절
이 세상은 모든 것을 평가할 때 효율성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능률적이면 가치 있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금세 평가절하되곤 합니다. 그러나 효율성으로는 결코 평가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때로는 낭비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계산하지 않고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기에, 세상의 눈에는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교회에서 수고하고 헌신하는 것도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가치 없는 일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드려도 결코 아깝지 않습니다.
- 본문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엿새 전에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신 사건을 기록합니다. 그 자리에서 마르다는 봉사로 섬기고,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닦으며 헌신적인 사랑을 드렸습니다. 가룟 유다는 그것을 낭비라며 불평했지만, 예수님은 그녀의 행위를 장례를 준비하는 의미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 일로 많은 유대인들이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대제사장들은 예수님과 함께 나사로까지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향유를 붓는 마리아(1-3)
참된 사랑은 계산하지 않고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헌신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때로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 낭비처럼 보일 수 있지만, 진심에서 나온 사랑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또한 사랑과 섬김은 말이 아니라 실제 행동을 통해 드러나며, 그 모습은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시킵니다. 결국 진정한 가치는 효율성이나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과 태도에 있으며, 사랑으로 드려진 헌신은 시간이 지나도 향기처럼 오래 남게 됩니다.
1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2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쌔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1-3)
예수님께서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오셨습니다. 나사로와 그의 자매들은 감사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환영하며 잔치를 베풀었고,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닦으며 자신의 헌신과 사랑을 드렸습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잔치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난 참된 사랑과 헌신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본보기입니다.
(1) 베다니에 도착하신 예수님(1-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피하시며 에브라임(11:54)에 숨어 계셨습니다. 그리고 “유월절 엿새 전”이라는 시점에 조용히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1). 이 시간적 배경은 토요일 안식일 즈음에 예수님께서 기름 부음을 받으신 사건이 일어났음을 암시합니다(마태복음 26:6-13, 마가복음 14:3-9).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이 사건이 유월절 이틀 전에 일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 예수님은 다시 나사로의 집으로 들어가십니다(2).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나사로의 가족은 곧바로 잔치를 준비했습니다(2).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예수님이 자주 방문하시던 곳이었고, 무엇보다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하는 세 남매인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11:1-2). 예수님은 이곳에서 쉬시며 그들과 삶을 나누셨고, 제자들 역시 큰 안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2).
마리아의 가족이 준비한 잔치는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 이후, 예수님께 감사를 표하기 위해 베풀어진 것이었습니다(요한복음 11:38-44, 12:2). 그들은 예수님이 베푸신 은혜를 잊지 않고, 나사로를 살려주신 일에 깊이 감사하며 예수님을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덕분에 온 집안은 순식간에 잔칫집과 같은 활기찬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2).
(2) 향유를 붓는 마리아(3)
예수님을 위해 베풀어진 잔치 자리에서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부은 것입니다(3). 이 양은 로마 시대의 도량으로 약 320g에 해당하며, 그 값은 무려 300데나리온, 즉 노동자 1년치 품삯과 같은 엄청난 가치였습니다(마태복음 26:7, 마가복음 14:3). 단순히 향유를 부은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는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털을 풀어 발을 닦았습니다(3).
이 행동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습니다(마태복음 26:7-13, 마가복음 14:3-9).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메시아로서의 기름 부음이나, 집주인의 환대를 상징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발에 향유를 붓는 것은 장례를 준비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3). 누가복음에서는 한 여인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았다는 장면이 나오는데(누가복음 7:38), 여기서 마리아의 행위 역시 요한복음 13장의 세족식과 연결해 볼 때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요한복음 13:4-5). 발을 닦는 행위는 지극한 사랑과 헌신의 표현이었으며, 당시 여인의 머리는 가장 영광스러운 부분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것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다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최고의 사랑을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관심사가 달라집니다. 마리아는 온 마음이 자기 가정에 베풀어진 예수님의 사랑에 있었기에, 장례를 준비하는 그 깊은 헌신의 행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3). 우리의 예배와 삶 역시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그분의 은혜를 얼마나 감사히 여기고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요한복음 12:3, 마태복음 26:13).
마리아를 비난하는 가룟 유다(4-8)
진정한 헌신은 외부의 평가나 세상의 시선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과 태도이며, 물질적 가치나 형식적인 기준보다 진심에서 우러나는 사랑과 헌신이 더 큰 의미를 갖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불평이나 비판에 흔들리지 않고 올바른 선택을 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때로 사랑과 헌신은 편안함을 포기하고 희생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지만, 그 행동 하나가 주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과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4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8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4-8)
사람들은 예수님을 온전히 섬긴 마리아를 향한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진심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헌신과 사랑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세상의 평가보다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이 참된 섬김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1) 가룟 유다의 반응(4-6)
가룟 유다는 마리아가 드린 향유를 두고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비난했습니다(5). 유다는 무엇이든 돈으로 환산하는 능력이 있었고, 수치 계산이 빠르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동체에서 회계를 맡았습니다(6).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들이 불평했지만(마가복음 14:4-5, 마태복음 26:8-9), 요한복음에서는 유다가 제자들을 대표해 말했으며, 다른 제자들도 그의 의견에 동조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6).
마리아가 드린 향유는 300데나리온으로, 한 데나리온은 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마태복음 26:7). 이렇게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는 행동은 제자들에게 이해되지 않았고, 낭비처럼 보였기에 마리아를 책망한 것입니다(5). 제자들은 차라리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룟 유다의 진심을 꿰뚫어 보셨습니다(6). 그의 관심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오직 돈이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았던 사람으로, 공동체의 재정을 조금씩 횡령하며 자신의 탐욕을 채워 왔습니다. 마리아를 비판한 것도 자신의 수입이 줄어들 것을 염려했기 때문으로, 겉으로는 정의와 자선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욕심과 도둑질을 감추기 위한 위선적인 비판이었습니다.
유다는 계산이 빠르고 총명해 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속 거짓과 탐욕을 보셨습니다. 진실하지 않은 모습을 더 진실한 것처럼 꾸미며, 예민하게 반응하고 거짓을 계속 덧붙였던 것입니다.
(2) 두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7-8)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행동을 제재하지 않으셨습니다(7). 오히려 그녀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고, 다른 사람들이 막지 않도록 하셨습니다(마태복음 26:10-11).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행동에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7).
첫 번째 의미는, 마리아의 행동이 단순히 향유를 붓는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께 드리는 최고의 예배였다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2:3, 마태복음 26:12). 사람의 눈에는 일 년 연봉과 같은 향유를 붓는 것이 낭비처럼 보였지만,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담긴 사랑과 헌신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드리는 물질의 양이 아니라, 마음과 정성이 담겨 있는지를 보십니다(마태복음 26:13). 마음이 담긴 사랑이 드려질 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최고의 예배로 평가하십니다.
두 번째 의미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7, 마태복음 26:12-13)라는 예언적 의미입니다. 제자들은 마리아의 행동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행위임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눈앞의 풍성한 잔치만을 보신 것이 아니라,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어질 순종과 죽음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마태복음 26:12, 요한복음 12:7). 금요일 안식일 직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시체를 향유로 바를 시간이 없으셨습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행동은 장례를 준비하는 예언적 헌신이 되었던 것입니다(마태복음 26:12-13).
예수님께서는 이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하시며,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26:13, 마가복음 14:9). 마리아의 헌신은 기념비적인 신앙의 행동이었고, 2000년 전의 헌신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감동과 교훈으로 전해집니다.
가룟 유다와 비교하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유다는 배신과 탐욕의 악한 동기를 가지고 행동했지만(6), 마리아는 순수하고 최고의 예배를 드렸습니다(3). 우리도 마리아처럼 마음과 정성이 담긴 순수한 예배를 드리며, 예수님께 최고의 사랑과 헌신을 표현해야 할 것입니다(마태복음 26:12-13, 요한복음 12:3).
나사로까지 죽이려는 공회(9-11)
권력과 지위를 가진 사람들은 때로 자기 이해와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방해하거나 제거하려는 생각을 합니다. 겉으로는 정의와 공정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숨은 욕심과 이기심이 동기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다른 사람의 선한 행동을 시기하거나 방해하려는 유혹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외형적인 주장보다 그 사람의 진심과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위협과 위험 앞에서도 올바른 길과 선한 행동을 포기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9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9-11)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일은 정말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요 11:43-44). 당연히 당시에 큰 논쟁거리가 되었고, 예수님께서 병자만 고치신 것이 아니라 죽은 자도 살리신 부활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했습니다(요한복음 11:25-26). 이 사건은 구약 에스겔 선지자가 본 마른 뼈가 살아나는 사건과도 연결되며(에스겔 37:1-4), 죽음 위에 승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소식이 모든 사람에게 달가운 것은 아니었습니다(요한복음 11:53).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을 방문한 큰 무리가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모여들었습니다(9). 그들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보려 했습니다(9). 이처럼 영생을 소유한 자들은 세상 가운데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요한복음 11:25-26).
그러나 위선적인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거짓이 드러날까 두려워, 예수님뿐만 아니라 나사로까지 죽이려 계획했습니다(요한복음 11:53, 12:10-11). 나사로의 부활은 그들의 악한 마음을 더욱 부추겼고, 부활의 기적과 경건한 섬김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었고, 참 신앙인들은 이러한 거짓 종교인들로부터 박해를 받게 됨을 보여줍니다(요한복음 15:18-20).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믿게 되었습니다(11). ‘가서’라는 헬라어는 ‘떨어져 나가다’라는 의미를 가지며,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사람들이 자기들에게서 떠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11). 부활한 나사로를 보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무리들을 보며, 그들은 예수님과 나사로를 제거하려고 했습니다(10-11). 이는 무리가 자기들에게서 떠나더라도 사람들을 향한 사랑과 진리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신 예수님과 완전히 상반되는 모습입니다(요한복음 6:67).
위선적인 삶은 세상적인 것에 집중합니다. 그들에게 모든 것은 자신과 권력, 지위를 지키는 일이었고, 종교 지도자인 대제사장들은 거짓된 종교 생활이 들통나거나 자신들이 누려온 것을 빼앗길까 두려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방해하려 했습니다(요한복음 11:53, 12:10-11).
사랑은 효율로 따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구원받은 사람들은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가장 귀한 향유 옥합을 드리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낭비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하나님께 최고의 사랑과 정성으로 드리는 예배가 향기롭게 여겨집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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