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2-02)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요한복음 12장 12-19절
오래전 역사를 다룬 영화들을 보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장군을 ‘개선장군(凱旋將軍)’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부러움 속에 당당히 말 위에 앉아 환호를 받으며 성에 들어갑니다. 참으로 장엄하고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많은 이들의 환호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은 개선장군과 같지 않았습니다. 화려하지 않고, 오히려 겸손하고 초라해 보이는 입성이었습니다.
- 본문은 나사로가 사는 곳에서 최후의 만찬을 마친 다음 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리와 제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은 흰 군마가 아니라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눈으로는 만왕의 왕이 나귀를 타고 입성한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환영 속에 입성하신 예수님(12-13)
어떤 특별한 존재감을 지닌 인물이 나타나거나, 시대의 흐름을 바꿀 만한 중대한 사건이 눈앞에 펼쳐질 때면,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 깊이 간직했던 간절한 희망과 미래에 대한 부푼 기대를 오롯이 그 대상에게 투영하며,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폭발적인 열광과 압도적인 지지를 쏟아붓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집단적인 열정은 사회 전체에 엄청난 활력과 추진력을 불어넣으며 긍정적인 변화의 불씨를 지필 수 있는 강력한 에너지원이 될 수 있습니다.
12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12-13)
지난 본문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이 예수님의 장례를, 곧 예수님의 고난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는 그 고난의 현장이자 마지막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장면입니다.
(1) 예루살렘 입성(12)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이튿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저자가 이 사건을 마리아의 행위와 연결한 이유는, 마리아가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했듯이 이제 예수님께서 실제로 그 죽음의 현장인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심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맞이한 무리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미 예수님께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11:55-56), 특히 나사로의 부활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더욱 열렬히 영접했습니다(17-18). 그들은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나아가 환영했습니다.
(2) 입성을 환영한 무리(13)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모였던 무리는 예수님께서 입성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나가 “호산나”를 외치며 맞이했습니다. 초막절에는 시편 118편을 낭송할 때마다 ‘호산나’라는 말이 나오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 무리 역시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을 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시편 118:25-26을 따라 히브리어로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뜻의 환호성을 외치며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본래 시편에서 순례자들을 가리키던 “주의 이름으로 오는 이”라는 표현을, 이들은 예수님께 적용하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오시는 분’(1:27; 6:14; 11:27)으로 소개하며, 이는 특별히 하나님의 이름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는 칭호가 덧붙었습니다. 저자는 이 고백을 제자들이 뒤에 가서야 깨달았다고 기록합니다(16). 그러나 빌라도의 심문에서 드러나듯이(18:36), 예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속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런 오해를 막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때로 무리를 피하셨습니다(6:15).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도, 무리가 그분을 단순히 정치적 왕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하시려는 뜻이었습니다.
나귀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14-15)
때로는 세상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화려함이나 강력한 권위와는 전혀 다른, 소박하고 겸손한 모습 속에 진정한 의미와 중요한 가치가 숨겨져 있을 때가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적인 것에만 집중하다 보면, 그 안에 담긴 깊은 본질과 진정한 리더십의 가치를 놓치기 쉽습니다. 중요한 변화나 통찰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때로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소박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14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4-15)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세상의 왕들이 흔히 보여주던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과는 달리 지극히 겸손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비록 당시 수많은 군중이 그분을 향해 환호성을 지르며 열광했지만, 그 환호 속에는 그분께서 오신 참된 의미와 깊은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면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 속에 있음을 분명하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1) 나귀를 선택하신 예수님(14)
당시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나 세상의 왕들이 화려하게 장식된 백마를 타고 성대한 환영 속에서 위풍당당하게 입성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사람들이 초라하게 여길 만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습니다. 이는 세상적인 권위와 명예를 내려놓고 자신을 지극히 낮추신 겸손한 왕의 모습이었으며, 세상의 통치자들이 군림하려 했던 것과 달리 오직 자기 백성을 섬기기 위해 오셨음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역사적인 입성이었습니다.
(2) 예언대로 오신 예수님(15)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가장 가까운 제자들조차 그 모습의 참된 의미를 즉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비로소 그들은 나귀를 타고 오신 것이 이미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예언된 말씀의 성취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스가랴 9장 9절에 기록된 것처럼,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예수님께서는 이 예언대로 겸손한 왕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왕권은 단순히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것으로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비록 마리아가 발에 향유를 붓는 의식이 이미 왕으로서의 등극을 암시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비로소 완벽하게 왕권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너무나도 평범했습니다. 베들레헴 마구간의 가장 낮은 곳에서 어린아이로 오셨고, 당시 천하게 여겨지던 갈릴리 지역에서 목수의 아들로 성장하셨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메시아의 조건이 될 수 없는 이러한 낮은 모습들은, 사실 세상의 낮고 천한 사람들을 친히 찾아오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그분의 지극한 사랑과 헌신이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광 후에 비로소 열리는 영안(16-19)
우리는 삶의 중요한 순간이나 새로운 변화의 본질적인 가치를 그 순간에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모든 결과가 드러난 후에야 비로소 그 사건이나 가르침의 깊은 의미와 중요한 의도를 깨닫게 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이는 즉각적인 판단보다는 성찰과 인내의 시간이 중요하며, 멀리 내다보는 지혜로운 시각이 필요함을 시사합니다.
16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17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18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19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찌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16-19)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타내 보이신 행동과 그 안에 담긴 깊은 의미를 처음에는 온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비로소 그들은 비로소 모든 퍼즐이 맞춰지듯 그 모든 상황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제서야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이 바로 예수님을 가리켜 기록된 예언이었음을 명확히 인식하였고, 당시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라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했던 그 외침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녔는지도 깨닫게 된 것입니다.
(1) 요한의 해설(16-18)
요한복음 저자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지니는 참된 의미를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비로소 깨달았다고 강조합니다(16). 이러한 깨달음은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것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7장 39절에서 이미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는 기록은 예수님의 영광 이후에 성령이 임하심을 예고하며,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요한복음 20:22).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기억나게 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며(요한복음 14:26), 궁극적으로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중요한 역할을 하셨습니다(요한복음 16:13). 그러므로 제자들은 성령의 조명하심 아래에서야 구약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이 바로 예수님께 적용되는 예언이며, 예수님께서 평화와 겸손의 왕으로 이스라엘에 오셨음을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셨다는 사실은 성령께서 확증해주신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요한은 당시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그토록 열렬히 환영했던 이유도 설명해 줍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실 때 그 자리에 함께했던 사람들이 나사로의 부활을 직접 증언하였고, 또한 유월절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이 그 놀라운 표적에 대해 이미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고 간청하며 ‘이스라엘의 왕’으로 불렀던 배경에는, 죽은 나사로에게 생명을 다시 주신 이 엄청난 표적이 지니는 의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마르다의 고백(요한복음 11:27)처럼, 예수님께서 바로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따라서 무리는 예수님을 죽은 자까지도 살릴 수 있는 전능하신 분으로, 자신들을 억압과 고난에서 구원해 주실 그리스도로 이해했던 것이며, 그렇기에 그분을 ‘이스라엘의 왕’이라 부르며 구원을 간청했던 것입니다(13).
(2) 바리새인들의 반응(19)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으로 인해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하며 깊은 불안에 휩싸였습니다(요한복음 11:47-48). 그들의 두려움은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라는 말 속에 그대로 드러납니다(19). 이 불안은 이미 드러났던 모습으로, 그들은 예수님을 수배하였고(요한복음 11:57), 심지어 나사로까지 죽이려 했습니다(10-11). 결국 11:47에서 자책하던 불안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 자신들의 예상이 현실이 되자 절망으로 바뀌었습니다. 19절은 예수님을 박해하려 했던 그들의 수고가 헛된 일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일은 그 누구도, 어떤 수단으로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행 4:27-28). 비록 바리새인들의 입술에서 나온 말은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모이는 것을 본 한탄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실 사명을 이루실 것임을 증언하는 고백이 되었습니다(요한복음 3:16-17). 그러나 당시에는 누구도 그 뜻을 깨닫지 못했고, 예수님 홀로 철저한 무지와 반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이사야 53:3, 요한복음 12:23-24).
예수님께 대한 열렬한 환호 속에서도 제자들과 군중은 그분의 진정한 왕권을 즉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성령을 보내주신 후에야 모든 것이 분명해졌으며, 구약의 예언처럼 겸손과 희생으로 백성을 섬기러 오신 진정한 왕이셨음이 드러났습니다. 심지어 반대하던 이들조차 온 세상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 이 영광스러운 왕을 온전히 이해하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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