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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요한복음(07)


빛으로 걸어가는 용기

-요한복음 316-21-


어둠이 짙게 깔린 밤, 유대인의 지도자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사회적 체면과 신학적 고민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그가 던진 질문들에 대해, 예수는 기독교 신앙의 정수이자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가장 위대한 선언으로 답합니다. 요한복음 316절에서 21절에 이르는 이 짧은 텍스트는 단순한 교리의 나열이 아니라, 길을 잃은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강렬한 '사랑의 초대장'이자 '존재의 보고서'입니다.

 

사랑, 그 불가해한 시작점

그 초대장의 첫 문장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세상(Cosmos)’은 단순히 아름다운 자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이기심으로 얼룩진, 스스로를 구원할 힘을 상실한 망가진 현장을 의미합니다. 그 결핍의 세계를 향해 하나님께서 던진 승부수는 정죄가 아닌, 자신의 가장 소중한 독생자를 내어주는 투신이었습니다. 이는 계산기를 두드리는 이성적 사랑이 아니라, 대가 없이 쏟아붓는 불가해한 낭비이며 전적인 헌신입니다.

 

정죄가 아닌 구원을 향한 목적

많은 이들이 기독교를 심판과 정죄의 종교로 오해하곤 합니다. 하지만 17절은 그 오해를 단번에 불식시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복음의 본질은 파멸이 아닌 회복에 있습니다. 마치 치명적인 질병에 걸린 환자에게 의사가 찾아온 목적이 사망 선고를 내리기 위함이 아니라 치료하기 위함이듯, 예수의 오심은 우리를 고발하기 위한 서류가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한 생명줄입니다. 우리가 삶의 무게에 눌려 스스로를 자책하고 세상의 잣대로 자신을 심판할 때, 성경은 오히려 우리를 향한 구원의 손길이 이미 뻗쳐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빛과 어둠, 그리고 인간의 선택

이어지는 구절은 인간 내면의 날카로운 모순을 조명합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는 지적입니다. 우리는 왜 빛보다 어둠을 편안해할까요? 어둠 속에서는 나의 부끄러움과 위선, 추한 욕망이 감추어지기 때문입니다. 빛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나의 민낯을 온전히 드러내야 한다는 두려움을 동반합니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심판은 신이 내리는 가혹한 형벌이라기보다, 빛을 거부하고 어둠 속에 머물기로 결정한 인간의 '자발적 선택'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나아옵니다.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가 결국 예수님의 장례식에 향품을 가지고 나타나 빛의 아들로 변화되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빛은 우리의 허물을 태워 없애는 소멸의 불이 아니라, 상처를 어루만지고 새살이 돋게 하는 치유의 광선입니다.

 

결론: 당신은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현대판 니고데모들이 많습니다. 종교적 배경도 있고 성경 지식도 해박하지만, 정작 생명의 생동감을 잃어버린 채 밤거리를 헤매는 영혼들입니다.

구원의 문은 지식의 열쇠로 열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들려진 십자가를 바라보는 믿음의 눈으로 열립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단 한 걸음의 용기입니다. 나를 가리고 있던 어둠의 외투를 벗어 던지고, 나를 향해 쏟아지는 그 생명의 빛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입니다. 어둠의 밤을 지나 찬란한 하나님 나라의 아침을 맞이하십시오. 그 사랑을 신뢰하며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본질이자 삶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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