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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14-04)

 


  십자가 보혈로 이룬 영원한 새 언약

마가복음 14장 22-31절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너무 쉽게 맹세나 약속 그리고 다짐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맹세하는 것은 굉장히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어떤 약속했다면 그 약속을 꼭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하지 않는 것이 좋고, 또 말로 한 약속은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신실한 모습으로 언행에[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겠습니다.

 

  • 유월절 식사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갖는 신학적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구약에서 예견된 새로운 언약 갱신을 위한 희생적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 이후에 제자들의 흩어짐을 예고하십니다. 베드로의 지나친 확신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베드로가 자신을 세 번에 걸쳐 부인할 것을 예고하십니다.

 

성찬을 통한 신학적 교훈(22-26)

교회는 세상에서 행하지 않은 특별한 예식을 거행합니다. 그것은 성례식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세례, 견신례, 성찬, 참회, 안수, 혼인, 종유 같은 7가지 성례를 거행하지만, 개신교에서는 세례와 성찬 두 가지의 성례를 거행합니다. ‘성례(聖禮)’란 뜻은 거룩한 예식이란 뜻인데, 예수님께서 직접 행하시고 또 제자들에게 계속 행하라고 하신 예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만찬을 통해 제자들에게 신학적인 교훈을 전합니다.

 

22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3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6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22-26)

 

예수님의 유월절 만찬의 절정은 성만찬입니다. 주님께서는 유월절 만찬을 통해서 두 가지의 의식을 가르쳐 주시고 몸소 행하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세족식이었고, 또 유월절에 나누는 빵과 포도주를 통한 성만찬의 의식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참석한 유월절 식사는 니산월 15일에 거행되는 식사보다 하루 먼저 진행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우러절 양이 없는 상태로, 먼저 떡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잔을 가지고 감사기도 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원래 유월절 식사는 유대인 가장들이 포도주 잔을 들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림으로 시작되곤 했습니다. 가족 구성원은 유월절 밤이 다른 밤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질문하고 가장은 이에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행하신 일을 설명했습니다. 자신들을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구원해내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설교한 것입니다(m.Pes. 10.4-5).

마치 유대인들의 유월절 식사와 설교를 연상시키는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장으로서 여느 유대인 가장처럼 유월절 설교를 시작하십니다. 유대인 가장은 옛 언약 속에서 누룩 없는 빵, 양, 쓴 나물 등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며, 하나님의 간섭과 보호 속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새 언약 속에서 새 언약 백성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마치 유대인들의 가장처럼 새 언약(참조. 누가복음 22:20) 속에서 떡과 포도주가 가지는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물론 마가는 ‘새 언약’이라는 말 자체를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언약의 피’라는 말을 사용하여서 같은 개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림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을 체결하곤 했습니다(참조, 창세기 15:1-11).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피를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새로운 언약을 위한 피 뿌림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 유월절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설명하시는 떡과 포도주의 구체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과거 이스라엘은 이러한 언약적 배경 속에서 하나님의 토라를 지킴으로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을 보여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토라를 지킴으로 자신들과 언약의 신인 여호와와 언약적 관계에 충실히 머물게 될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신 원래의 뜻, 열방을 향하여 빛이 되라는 그 원뜻은 충실히 성취됩니다. 그러나 주전 587년 이스라엘은 언약의 신인 여호와의 계명을 지속적으로 불순종했고, 그 결과 이스라엘 성전은 무너졌고,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고, 이스라엘의 약속의 땅은 황폐해졌습니다. 이로써 열방을 향하여 빛이 되라 하셨던 언약의 하나님의 소명은 이방인들 앞에서 철저히 짓밟혔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이 언약의 하나님의 계명인 토라에 불순종해서 토라를 깨트렸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구약성경의 예언서가 모세오경을 비롯한 역사서와 맞닿아 있습니다. 이 절망의 시기에 구약의 예언자들은 언약적 소망의 회복을 외치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이 선포하였던 메시지는 이러한 언약적 이야기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새 시대의 도래, 성전의 회복, 자기 땅으로의 회복, 토라의 회복 등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종말론적인 기대, 즉 하나님 나라의 도래이며,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이스라엘의 회복이었습니다. 예레미야 31:31-40에 등장하는 하나님이 말세에 세우실 새 언약에 대한 언급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떡을 주며 하시는 말씀이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의 관점에 볼 때, 가히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무교병을 근본적으로 재해석해 그것을 자신의 몸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의 피가 그의 희생적인 죽음을 의미한다면, 그의 몸은 예수님 자신이며 그가 제자들과 항상 함께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23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잔을 들어 감사하는 기도를 하십니다. 이러한 언약 갱신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 설명합니다. 미쉬나에 의하면 유월절에 잔을 들어 감사하는 기도에는 하나님을 송축하고 하나님께서 전 우주의 왕인 것과, 포도나무에서 난 열매의 창조주인 것을 감사드린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를 다 마시매’라고 했을 때, 그들은 잔 하나로 마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포도주를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불렀습니다. 이 문장은 출애굽기 24:8에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는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옛 언약이 피로 인해 봉인되었다면, 그리스도의 피는 새로운 언약을 채결한 것입니다. ‘흘리는’(24)이라 번역된 단어는 ‘부어지는’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사를 통한 속죄 언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은 내 몸이다.’ 또 ‘이것은 피다’라고 간단히 말했기 때문에 제자들은 얼마나 그 의미를 알았는지 불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같이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 떡’이 문자적으로 그의 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구약에서 피를 마시는 것은 철저히 금했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 잔’이 예수님의 피라는 것을 문자적으로 받아 들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가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그의 죽음은 하나님께 속죄를 위해 바치는 새로운 제사입니다. 더 이상 구약 율법에 따라 짐승의 피가 뿌려지는 일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임이 가까이 와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것이 제자들과 나누는 마지막 식사라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25절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이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말한 종말에 있을 메시아 잔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그의 거룩한 산에 베풀 이 잔치에서는 최고의 음식과 포도주가 제공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 것’이란 표현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새 포도주’, ‘새 몸’, ‘새로운 세계’ 등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가까운 의미는 ‘다시 마신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마시거나 먹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누가복음 22:16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유월절을 다시 지키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이 끝나고 감람산으로 가십니다. 제자들은 찬송을 부르면서 감람산으로 이동했을 것입니다. 유월절 식사를 마무리하는 찬송은 아마도 시편 113-118편까지 기록되어 있는 찬송일 것입니다. 감람산으로 자리를 옮긴 시간은 자정 정도 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유월절 절기는 예루살렘 영역 안에서 지내는 것이 통례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베다니로 돌아가지 않고 그 중간 지점은 감람산으로 가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배반을 예언하심(27-31)

종종 성도들 중에 호언장담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겸손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모든 진행한 것이 아니라 교만해져서 함부로 말할 때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은 끝까지 예수님을 따를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27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28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29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30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1베드로가 힘 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27-31)

 

예수님과 제자 일행은 예루살렘 동쪽으로 이동해 감람산 서쪽 비탈길로 올라갔고, 그곳에 겟세마네 동산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질 것과 예수님께서는 살아나신 후에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과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1) 흩어짐과 인도하심(27-28)

 

감람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모두 자신을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버릴 것이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에 걸려 넘어짐’을 일컫는 말입니다. 문맥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본래 의도가 더 잘 살아난다. 이 ‘넘어짐’은 스가랴 13:7을 반향하고 있는데, 즉 목자가 쓰러질 때 양들도 흩어진다는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즉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할 때 제자들도 양들처럼 흩어지게 되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넘어짐’은 문맥 속에서 ‘흩어짐’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28절을 통해서도 지원받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제자들은 양들처럼 흩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28절의 ‘그러나’라는 어구를 통해서 반전을 말씀하신다.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라고 예고하십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제자들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게 되실 것입니다. 이것은 마가복음 16:7에서도 천사에 의해 다시 한 번 확인됩니다. 그런데 목자와 양의 은유 속에서 이 단어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목자를 잃고 흩어진 양 무리 같은 제자들을 부활하신 후에 다시 갈릴리로 이끄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께서는 좋으셨음을 입증할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소망과도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목자를 빼앗김으로 그들은 흩어지게(걸려 넘어지게 되지만, 목자가 다시 부활했을 때 그 목자는 다시금 자신의 양 무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가진 의미를 설명하신 후에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서 제자 무리의 일시적인 흩어짐을 예고하시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 즉각적으로 회복할 것입니다. 양들은 잠시 근심하고 슬퍼하게 되겠지만, 그들은 목자의 세밀한 인도를 다시금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목자와 양의 은유 속에서 이 단어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목자를 잃고 흩어진 양 무리 같은 제자들을 부활하신 후에 다시 갈릴리로 이끄실 것입니다.

 

(2) 오만과 경고(29-31)

 

이어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는 말씀에 베드로의 항변과 예수님의 꾸짖음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흡사 8:31-33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 이후에 제자들이 목자 잃은 양처럼 흩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하자, 제자들의 대변자 역할 했던 베드로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확신에 차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며 장담합니다. 원문은 ‘나는’이라는 인칭대명사를 강조해서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좀 의역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다 넘어져서 흩어질지라도 베드로 자신은 절대로 그러지 않겠다’는 의지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물론 베드로가 이 시점에서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어떠한 정황도 포착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베드로의 진심이었을지 모릅니다. 그것이 진심이었다 할지라도 베드로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수행해낼 만한 실력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지나친 확신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좀 더 구체적인 예언으로 응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그가 언제 부인하게 될 것인지 명시하여 강조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베드로가 부인하는 장면을 전할 때, 닭이 두 번 우는 것을 모두 기록하지 않았지만, 마가복음 14:72에는 닭이 두 번 울 때 베드로가 부인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거듭되는 예고에도 베드로는 무모하리만치 지나친 확신을 버리지 못합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마가복음 10:39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서 마시는 잔을 기꺼이 마시겠다고 한 것처럼,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힙니다. 이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을 제자들도 베드로의 무모한 확신에 동조하며 동일하게 예수님께 충성을 다짐합니다. 여기 ‘말하다’에 사용된 시제는 미완료로 그들의 확신이 지속적인 확신이었음을 드러냅니다.

제자들의 반복적인 말은 흩어짐과 부인에 대한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어리석고 연약한 자기 확신이 얼마나 무모한지를 증명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무모한 확신과는 달리 예수님을 부인하며 저주하게 됩니다.


마지막은 어떤 의미에서 또 다른 출발이듯, 헤어짐도 다른 의미에서 마주침이라 하겠습니다. 주님과의 마지막 만찬은 새 만찬을 예고하고, 주님과의 헤어짐은 부활하신 에수님과 실패한 나와의 마주침을 예고합니다. 과거의 나의 결별하고 새롭게 주를 만날 준비를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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