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마가복음(14-04)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14장 32-42절


 

살아오시면서 많은 일들을 만났겠지만, 지금 생생하게 옛날 생각이 나는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몇 년 전, 심지어는 10년, 20년, 아니 어렸을 때 일이지만, 마치 지금도 생생하게 그 때 심정이나 상황을 기억이 나는 그런 일이 있습니다. 대부분 좋은 일이든지 나쁜 일이든지 충격적인 일들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상징적인 장면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로 가시는데 기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능하면 이 죽음을 당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특징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의 뜻을 바꿔달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뜻을 바꿔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깨어 있으라’는 권면에도 불구하고 잠들어 있었습니다.

 

아버지 뜻을 구하시는 예수님(32-34)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할 수 있도록 힘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시험을 감당할 지혜와 힘은 기도를 통해 얻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께서는 습관을 따라 기도하십니다.(누가복음 22:39).

 

32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3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32-34)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모습은 마가복음 1:35과 6:46에서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두 번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행하고 나서 드린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준비하는 기도였습니다. 이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사역에 앞과 뒤를 기도로 채우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감람산(올리브산)에 가신 예수님과 제자들인, 특별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이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십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중요한 사건마다 예수님과 함께 한 핵심 제자 그룹입니다(33). 그들이 여기에서 맡은 역할은 예수님의 기도를 증거 하는 일입니다.

 

‘겟세마네’는 아람어로는 ‘기름 짜는 곳’이라는 의미이며, 감람산의 서편에 위치한 곳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곳에서 종종 모임을 갖곤 했던 듯합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도 이 장소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요한복음 18:2). 나중에 가룟 유다는 겟세마네에서 기도하고 계신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수님께서 이곳에 가신 목적은 기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기도는 예수님의 여느 기도와는 달랐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다’고 소개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심리적 고통을 표현입니다. 이에 더해서 예수님께서는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34)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즉, 이 기도가 자신 앞에 드리워져 있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기 위한 기도임을 예수님께서는 아셨고, 인간으로서 그가 느낀 심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편 42:5,11에 43:5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라는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의 표현은 시편의 애가(哀歌)와 비슷합니다. 그 고통은 예수님께서 땅에 엎드리어 기도하는 모습 속에 나타납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손을 들고서 기도한 것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성경에서는 극심한 기도의 모습이 다윗을 통해 나타납니다. 사무엘하 12:16에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라는 장면에서도 극심한 고통 가운데 했던 기도로 나타난 것입니다. 매우 극심한 것이라 그의 목숨까지 위협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돌리려는 불순종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믿음의 표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의 자리에 자신의 세 제자, 즉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려가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기도함으로 위로와 격려를 얻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이들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자리에도 예수님과 동행했고(5:37-43), 변화산에도 동행했는데(9:2), 이 기도의 자리에 그들을 데려가셨다는 것은 여러 가지를 시사합니다. 먼저 이들은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가장 지근거리에서 예수님과 함께한 자들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죽음의 잔을 자신들도 마시겠다고 공언한 사람들입니다(10:38-39; 14:29, 31).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죽음의 길을 가기 위해 기도하러 간 자리에 초청받았습니다.

물론 3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시적으로 기도하라고 하지는 않고 다만 ‘깨어 있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나 37-38절의 근접 문맥의 빛에서 ‘깨어 있으라’는 예수님의 분부는 ‘깨어 기도하라’는 명령과 같습니다. 이들은 제자의 길을 걷기 위해서 그들의 스승처럼 기도하기 위해서 초청받았지만(37-38) 그들은 기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지만 함께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그러나 이 기도의 자리로의 초청은 그들이 실패한 후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후 그들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을 것입니다.

  

기도로 순종하신 예수님(35-42)

고난 앞에서 담대함과 능력을 얻기 위해 얼마나 자주 기도합니까? 시험에 들지 않는 최선의 방법은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아도 마음이 담대해집니다. 오직 기도로만 고난을 끝까지 이겨 낼 영적 의지력을 얻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앞으로 닥쳐올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하고 육신의 피곤함에 지쳐 자고 있습니다.

 

35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9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0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41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2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35-42)

 

예수님께서 극심하게 기도하고 제자들에게 돌아왔을 때, 발견한 모습은 제자의 자는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극심한 십자가 고난 앞에서 매우 힘든 고민을 기도로 이겨 내고 계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자고 졸고 있었습니다.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다면, 영적 의지력이 연약한 육신을 움직이도록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1) 첫 번째 기도(35-36)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느끼셨던 고통은 그가 기도하시는 모습 속에 고스란히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남겨두고 나아가서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어떠한 모습으로 기도하셨는지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해준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자세한 기술은 예수님의 심리 상태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누가복음 22:41은 돌 던질 만큼의 거리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기도 내용을 들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이런 간절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기도는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의 구체적인 내용은 36절에서 직설화법으로 표현됩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아버지께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언급은 하나님께서 그럴 능력이 있느냐 여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럴 의지가 있으시냐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에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로 기도하는 것을 ‘아빠 아버지’(36)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이 표현이 아이들이 아비를 부르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지만, 본문이 아람어를 그대로 전달했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가졌던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표현이 최대교회의 신학에 영향을 준 것은 바울이 그의 편지 로마서 8:15과 갈라디아서 4:6에서 두 번이나 이 아람어 표현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잔을 옮겨 달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10:38-39 세베대의 아들들과의 대화에서 이미 ‘이 잔’이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잔이 가진 하나님의 진노와 그의 따르는 심판의 이미지를 고려해 보면, 예수님께서 다가오는 죽음을 얼마나 괴롭게 생각하셨는지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겪을 극한 고난으로 인해 심히 고민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셨을 때, 자신을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아버지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십니다(히브리서 5:7).

 

예수님의 기도의 특징은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36)라고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의 뜻을 바꿔달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뜻을 바꿔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대로가 아닌 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순종할 것을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원하는 것과 필요를 하나님께 구하지만, 결론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복종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앞에 정렬시키는데 집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 뜻을 이루는 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 뜻에 온전히 순종할 힘도 주십니다.

이 처럼 ‘기도’란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의 뜻을 바꿔달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선하시고 완벽한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자신의 뜻을 바꿀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고난과 죽음이라는 엄혹한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돌아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고통스러운 시간에 제자들에게 기도가 무엇인지 몸소 보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돌아오셨을 때, 그의 제자들은 ‘깨어 있으라’는 권면에도 불구하고 잠들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잠들어 있었다는 마가의 보도는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하게 합니다. 먼저 그들이 육신적으로 피곤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상징들을 주의 깊게 사용했던 마가는 ‘잠들어 있음’을 통해서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묘사하고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무지와 부족한 깨달음은 지금까지 마가의 글 속에서 꾸준히 부각되어왔습니다. 그들은 ‘깨어 있으라’고 예수님께서 당부하셨음에도 이 고뇌의 순간에 잠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깨어서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접속사 ‘히나’절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여러 능력 가운데 하나가 우리가 시험받을 때에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데 있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이 기막힌 시험의 순간에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는데, 제자들은 이 기막힌 시험의 순간에 기도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맙니다.

 

(2) 두 번째 기도(37-40)

 

마가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후에 두 번째로 나아가서 엎드리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 똑같은 내용으로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순간에 다른 기도 제목이 있는 것이 오히려 이상합니다. 아다 더 했다면 연약한 제자들을 위한 기도했을 것입니다.

 

기도 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돌아와 보니 여전히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이나 깨어서 기도하라고 당부하셨는데도 여전히 잠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40)고 설명합니다. 제자들이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여 먹고 겟세마네 동산까지 올라온 것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들이 예수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라고 기술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한데, 제자들이 매우 피곤하고 잠이 덜 깬 상태임을 묘사하는 것일 수 있고, 두 번이나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하셨는데도 여전히 자고 있었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지 제자들이 유구무언이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심하게 고통당하고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곤을 견디지 못해 자든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3) 세 번째 기도(41-42)

 

세 번째 기도의 내용과 모습은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습니다. 다만 문맥이 예수님의 세 번째 기도를 암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시 제자들에게 왔을 때도 발견한 것은 제자들의 자는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는 자고 쉬라’고 번역된 이 문장을 ‘아직도 자면서 쉬고 있느냐?’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에게 임할 때가 왔음을 알립니다. 그 때를 묘사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그 때’란 다름 아닌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지는 때’라는 것을 밝히십니다. 그러나 누구에 의해서 넘겨지는지 밝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을 볼 때, 바로 가룟 유다에 의해서 넘겨진다는 사실입니다.

동사 ‘넘겨지다’는 마가복음 1:14에서 요한이 잡혔다고 할 때 사용된 단어와 같습니다. 요한이 넘겨진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죄인들의 손에 넘겨집니다. 넘겨진 후에 요한이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이미 독자들에게 이것이 예수님의 이야기의 마지막이 아님을 줄곧 강조해 왔습니다. 그는 넘겨지지만(파라디도타이)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이때는 분명 신랑을 빼앗기는 슬픔의 때이지만, 실패와 패배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메시아의 죽음과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승리의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 모든 것이 사람들에 의해서 잡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의해서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마가복음 14장의 전개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제에 의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주제를 강하게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를 던지는 기도만큼 힘들고 아름다운 기도가 또 있겠습니까? 잠에 익숙한 우리로 인해 주님의 기도 시간만 늘리고 있진 않습니까? 고난주간을 순례하면서 기도하러 올라간 때나 내려올 때 그 차이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