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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14-06)

 


심문에서 자신을 드러내신 예수님

마가복음 14장 53-52절


 

세상은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떠나서 적대적인 생각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에 대해 대비하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예수님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리스도와 교회를 싫어하고 부인하고 공격해 왔습니다. 이런 현실을 인식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전해야 합니다.

  

  • 예수님께서는 체포되신 뒤 산헤드린 공회에 잡혀가십니다. 이 모임은 재판이 아니라 증거를 얻기 위한 심문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공회는 예수님을 로마에 기소할 죄목을 찾았습니다. 마가는 공회와 빌라도에게 심문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사이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에 걸쳐서 부인하는 이야기를 보도합니다.

 

공회 앞에 서신 예수님(53-59)

어떤 문제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넓은 식견을 가지고 있고, 그 상황을 판단하는 높은 사람을 고수(高手)라고 합니다. 고수의 반대말은 하수(下手)입니다. 고수와 하수는 역량의 실력이 상당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고수와 하수에 명백하게 차이가 납니다. 대게 하수들은 성급하고 고수는 신중합니다. 본문에서 성급한 대제사장과 차분한 예수님의 대화를 볼 수 있습니다.

 

53그들이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54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55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56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못함이라 57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여 이르되 58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59그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더라(53-59)

 

예수님을 체포한 무리들은 예수님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갑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체포할 방법을 찾아 궁리하고 죽일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공회로 모였다는 것은 산헤드린을 언급하는 것인데, 종종 야간에도 심의가 진행되기는 했지만, 로마의 통치 하에서 산헤드린은 사형을 언도할 권한이 없었습니다(요한복음 18:31).

 

54절에서는 이 때 베드로가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란 것이 밝혀질까 두려워하면서 제자 중에서는 유일하게 멀찍이 따라가서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갑니다.

마가는 이 장면에서 베드로와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대조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마가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왔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예수님 사이에 거리가 있기는 했지만,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한 상황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은 체포 전에 그가 했던 말이 진정성 있는 고백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후에 등장하는 베드로 이야기는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나약한지를 여지없이 드러냅니다.

특별히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했다는 55절의 기록은 이 모임이 가진 불법적인 성격을 여과 없이 드러냅니다. 재판이란 심문을 열어서 증거를 확보하고 그 증거에 적합한 형벌을 내리는 것이 상례인데, 이 모임은 심문을 열어서 증거를 확보하기도 전에 죽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증거를 짜 맞추려는 불법적인 성격의 모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한 목적을 달성한 세력들은 이제 예수님을 죽일 증거를 찾기 시작합니다. 유대 땅을 통치하고 있던 로마 빌라도를 설득할 수 있는 증거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증거를 찾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거짓 증언들이 난무했지만 증언들이 서로 엇갈려서 증거로 삼을 수 없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온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을 죽일 만한 증거를 찾았지만 얻지 못합니다. 이것을 보면 이 모임은 재판이 아니라 증거를 얻기 위한 심문의 성격을 띠었던 것 같습니다.

 

엇갈리는 증언들 속에서 고소자들은 예수님께서 성전과 관련해서 언급한 내용들을 근거로 그를 기소할 죄목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성전과 관련된 예수님의 언급은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적 교제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였기 때문에, 이것을 헐어버리라고 말하는 것은 유대인의 종교 시스템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습니다.

본문은 그 증언들 중에 하나를 증언합니다.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58) 이 증언이 예수님의 주장한 것을 정확하게 보고했다고 볼 수 없지만, 그 비슷한 내용이 요한복음에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 자신이 성전을 헐겠다 라는 내용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 안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예루살렘 성전과 이스라엘의 종교 시스템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57절이 성전에 관련된 사람들의 기소가 거짓 증거라고 설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되어 있고, 마태복음 26:60-61도 이 증언이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의 증언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 해석 가능성은 59절에 나타나는데, 성전과 관련된 예수님의 혐의에 대해서 고발자들의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증언이 거짓이라고 두 번이나 강조해서 말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거짓 증언으로 예수님을 모함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마가가 거짓 증언이라고 한 것은 성전과 관련된 발언 자체를 예수님께서 하지 않았다기보다는 그 증언에 대한 고발자들의 증거들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겠다고 말한 적은 없으나 성전을 향한 그의 태도는 대부분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증언이 정확하지는 않았고 일치하지도 않았지만,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증언이 거짓이었다는 결정적인 이유는 예수님께서 한 번도 성전을 땅 위에 다시 짓겠다고 말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성전이 파괴되어 속죄의 기능이 끝났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은 이제 건물이나 장소와는 상관없다는 것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심문(60-65)

사람이 살아가면서 객관성을 갖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객관성은 공정함도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인 기호, 취향, 이해관계로 판단한다면 그것은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건 앞에서 공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객관적인 사실에 따라 판단한다면 공정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공정성을 잃고 예수님을 심문하는 대제사장을 볼 수 있습니다.

 

60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이르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1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62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3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64그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65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60-65)

 

세상에서 가장 공평해야할 사람들은 법을 다루는 사람들과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이 공평치 않을 때, 정말 과다하게 왜곡되기 쉽니다. 본문에서 대제사장은 예수님께서 부인할 수 없는 질문을 던져 사지에 몰아넣으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를 모르실 리 없으나, 당당하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요, 영광중에 강림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1) ‘네가 그리스도냐?’(60-62)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거짓으로 증언하는 사람들에 대해 침묵하십니다. 그의 침묵은 거짓 증거에 대한 항거의 한 방법이며, 성경적인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노래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대답해 주시길 원했던 것입니다.

이제 급기야 대제사장이 나서서 예수님의 죄를 찾기 위해 심문합니다. 성전과 관련된 혐의에 대해서 예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엇갈리는 증언과 예수님의 침묵으로 심의 과정이 녹록치 않았을 것인데, 이 시점에서 대제사장이 질문합니다.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대제사장의 질문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언어 속에 등장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 1:11, 9:7에 하늘에서 난 소리를 통해서 기록되었고, 마가복음 3:11, 5:7에는 귀신들의 입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 등장했습니다.

 

성전에 관한 기소로부터 그리스도라는 칭호로의 연결은 얼핏 보면 매우 임의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나라를 완성하시는 종말의 때에 종말론적인 성전이 회복될 것을 기대했습니다(이사야 2:2-4; 에스겔 37:26-28; 미가 4:2). 물론 이러한 일들은 다윗 왕가의 아들(메시아)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에스겔 37:24). 따라서 대제사장은 이러한 연결 고리에 근거해서 예수님께서는 만일 성전에 대한 주장을 했다면, 이것이 필연적으로 메시아적 주장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고 초정한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처음으로 예수님께서 명확하게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고백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그니라’라고 대답합니다. 처음으로 자기가 메시아임을 공적으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질문에 등장한 ‘그리스도’라는 용어를 심판주로 오실 ‘인자’라는 칭호로 바꾸어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시편 110:1과 다니엘 7:13 이하를 반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이며 인자로서 하나님께 세상을 통치할 권위를 부여받은 자임을 분명하게 밟히십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신분을 철저하게 감추어 왔는데, 이제 자신의 신분을 분명하게 드러내십니다.

 

(2) 정죄 당하심(63-65)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의 발언이 신성모독이라 외쳤습니다. 신성모독에 대한 말을 들었을 때 유대인들의 자연스런 반응은 옷을 찢는 행위입니다. 대제사장은 신성모독이라고 외치면서 자신의 옷을 찢습니다. 옷을 찢는 행위는 극한 비통과 회개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대제사장의 행동은 산헤드린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의견을 따르도록 하려는 과장된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에서 예수님의 발언은 죽임을 당할 만한 신성모독이며, 이제 더는 증거를 찾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산헤드린은, 그것에 동의해 예수님의 죄가 사형에 해당한다고 정죄하였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 종말의 심판주로 다시 오실 ‘인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편 2:7, 사무엘하 7:14에 예언하고 있는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은 이스라엘의 왕을 넘어서 하나님 우편에 만민을 심판하려 구름 타고 다시 오실 심판주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오는 것을 보리라고 확언하십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의 이 예언은 그의 죽음을 확실케 하는 신성모독으로 정죄 받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산헤드린 회원 중 몇 명은 자신들의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 예수님을 모욕하고 침을 뱉기까지 했습니다. 얼굴을 가리고 가격한 후에 ‘선지자 노릇을 하라’고 모욕했습니다. ‘선지자 노릇하라’는 말은 가격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맞히어 보라는 뜻입니다.

 

세 번 부인하는 베드로(66-72)

성경에서 통곡하며 울었다는 내용은 많습니다. 그런데 서럽게 처절하게 통곡한 장면도 많습니다. 대부분 큰 실수를 통해 깨닫는 후회로 통곡하게 됩니다. 평상시는 자신이 가장 잘한 줄 알았는데, 돌아놓고 보니 큰 실수를 한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한 뒤, 그의 통고하고 있는 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66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67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68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69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70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71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72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66-72)

 

다시 장면이 전환되어 이제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는 일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 잠든 것과 병행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여종 중 하나가 등장해서 베드로를 주목하며 알아보고 ‘당신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말은 당시 나사렛에 대한 인식으로 생각해볼 때 경멸적인 언어입니다.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님의 무리 가운데 눈에 띄는 역할을 감당했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급해진 베드로는 필요 이상의 말을 내뱉습니다. 그녀에게 무슨 말인지 알지도 깨닫지도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표현 속에는 제자의 실체가 들어 있습니다. 그들은 정말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또 왜 오셨는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님의 무리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대제사장의 여종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합니다. 여종은 분명히 베드로의 신분을 파악하였으나 베드로는 부인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정치범으로 몰릴 경우 그와 함께했던 사람들도 정치범의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첫 번째로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한 후 앞뜰로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불 주변에 있었을 것이기에, 사람들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은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곳이 도주해야 하는 상황이 닥치면 도주로를 더 쉽게 확보할 수 있는 곳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동일한 여종이 불을 쬐며 서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재차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폭로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반복해서 부인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동사의 시제는 미완료형인데, 베드로가 지속적으로 부인했음을 나타냅니다.

베드로가 두 번째로 예수님을 부인했지만, 그의 부인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로 부인하게 된 것은,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를 고소하며, 그가 예수님과 함께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사용하는 아람 말이 갈릴리 사람들의 방언이었음을 시사합니다. 사람들이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님의 당이라고 확신하는 정도가 세어지는 만큼,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부인의 성도도 세어집니다. 사태가 급박해졌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드디어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저주하기에 이릅니다. 베드로의 부인과 저주에서 베드로의 주도면밀함이 드러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하며 맹세하면서 결코 그를 알지 못한다고 말했을 때 닭이 두 번째 울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자신에게 말씀하셨던 그 상황과 말씀이 생각난 것입니다. 자신은 결단코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그 장담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서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닭의 울음소리는 절망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닭 울음소리는 베드로에게 자신의 잘못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베드로는 그 자리에서 회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그만 숯불은커녕 온통 사방에서 뿜어내는 냉대와 냉기로 혹독한 겨울을 맞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걷는 그 걸음에서도 한 치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무엇이 우리를 두럽게 하고 정신을 혼미하게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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