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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6-03)


광야에서 만나를 공급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6장 30-44


 

댐이나 저수지를 만들면그 댐에 물이 가득 찰 때까지는 물을 방류하지 않습니다사역이란 억지로 짜는 것이 아니라 흘러나오는 것입니다쉼과 사역에 균형을 맞추지 않으면사역자는 큰 탈이 날 것입니다좋은 차일수록 브레이크가 좋습니다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육적 감정적 영적 재충전을 계속하면서 사역해야 합니다충만한 은혜를 받고 그 은혜에 힘으로 사역하는 절묘한 균형의 원리를 주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 전도 여행에서 돌아와 치진 제자들에게 안식을 줍니다. 제자들을 통해 많은 것을 보았던 무리들은 예수님의 일행을 쫓습니다. 그들에게 광야에서 오병이어로 먹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의 광야 잔치는 헤롯왕의 잔치와 비교됩니다. 세상에 속한 헤롯왕은 방탕한 생일 잔칫상에서 선지자를 죽이는 참극을 벌렸지만,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께서 마련한 광야의 풍성한 식탁은 목자 없는 양무리 같은 무리에게 배부름과 만족을 주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통한 메시아 잔치의 풍성함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제자들의 사역 후 휴식(30-32)

하나님의 사역을 집중하면 신나게 할 수 있습니다사역에 집중하게 되면 흥분됩니다신바람이 나서 감정이 넘쳐나기 시작합니다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정신없이 일에만 집중합니다제자들도 전도 사역을 통해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30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30-32)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들이 필요한 것들을 잘 알고 계십니다전도 사역을 나갔던 제자들은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옵니다성공리 마친 사역의 결과를 보고합니다그들은 사역에서 귀신이 축사되고 병든 자들을 치유하는 사역을 할 때기분이 들떠 있을 것입니다그들은 육신이 지친 줄 모르고 일을 했을 것입니다그들은 흥분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상적으로 행한 일이지만 제자들은 처음 경험해 본 일이기 때문에 신나서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간증들을 잘 들어주셨을 것입니다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셨을 것입니다그리고 집중해야할 것은 사역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영혼에 대한 관심을 집중하라고 가르쳐 주셨을 것입니다제자들은 사역은 신이 났겠지만그들의 육신은 점점 지쳐 가고 있었습니다더욱 제자들의 성공적인 사역만큼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일행들에게 몰려들었습니다무리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너무 많이 나옴으로 제자들이 식사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선에서 수고한 제자들을 위해 한적한 곳 즉 광야를 마련해 주셨습니다제자들을 성공 직후에 광야로 보내신 것을 단지 육체적인 휴식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그들이 사역에 성과에 너무 취하지 않고 그 의미를 되새겨 보게 하려는 것입니다제자들에게도 그 시간이 필요했습니다자신이 이룬 성공적인 삶과 자신과는 별개입니다성공에 취하여 그 일이 마치 자신이라고 착각해서 교만스러워 버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오는 영광스러운 취임식을 가졌습니다그러나 그 후에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쫓으셨습니다그곳에서 단독으로 하나님과 대면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 동편 한적한 곳 광야로 보내십니다이것은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배려와 사랑을 보여 줍니다예수님께서는 인간의 한계와 필요에 대해 잘 알고 계십니다.

 

종종 우리들은 광야와 같이 혼자 남겨진 상황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고독해 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그 시간은 자신을 철저하게 돌아보는 시간입니다자신의 사역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과 별개라는 것입니다성공적인 사역에 취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입니다그럼으로 세례 요한처럼 자신의 사역에 충성하는 제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동행하시며 가르치신 예수님(33-34)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나온 무리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그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풍족하게 채우시는 선한 목자이심을 보여주십니다본문 말씀을 통해 선한 목자를 만나보겠습니다.

 

33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34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33-34)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선지를 알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먼저 걸어서 도착합니다그들이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들을 휴식을 방해하는 사람들이라고 귀찮게 여기지 않으십니다오히려 그들을 보시면서 영적 지도자가 없어서 영적으로 갈 길을 모르고 굶주려가는 양들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 예수님 당시의 무리들과 같이 영적으로 갈 길을 모르는 양의 무리들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안식을 소홀히 여겨서가 아니라로마 식민지 아래서 사회 경제적인 안식뿐 아니라 영적인 안식마저 잃은 갈릴리 사람들이 자신보다 돌보는 것을 더 중요하다고 보신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피곤하시지만굶주린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많이 가르쳐 주셨습니다그들의 영혼을 하늘 양식으로 풍족하게 채워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만약 기적이 효과적인 방법이었다면 가르치지 안 했을 것입니다그 당시나 우리 시대나 충격적인 기적보다는 오래도록 전하는 바른 지식이 사람들의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바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영적 필요와 육체적인 필요를 채어 주셨습니다오늘도 예수님께 나오는 자들은 모든 것을 채워주실 것입니다그분 앞으로 간절히 필요들을 간구해 나아가시길 바랍니다그러나 눈에 보이는 육적인 필요만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필요로 한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아서 영육이 강건한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제자들을 시험하시는 예수님(35-37)

하나님 나라는 믿는 사람들의 헌신순종을 통해서 그곳에 주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이뤄집니다제자들에게 광야에 모인 수많은 무리를 먹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하지만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께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부요와 기쁨을 보여 주시고자 했습니다.

 

35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36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35-37)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사이에 저녁이 되었습니다무리들은 충동적으로 따라왔기 때문에 먹을 것을 준비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제자들은 이러한 무리들을 보면서 저녁 식사를 마을 근처로 내려가서 사먹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정말 합리적인 제안입니다걱정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직접 먹을 것을 주라고 황당한 명령을 하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렇게 하려면 돈이 200데나리온이나 너무 많은 돈이 드는데 어떻게 하겠냐고 따졌습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가진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제자들은 무리가 가진 것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라고 대답합니다그러나 제자들은 현실성 없어 보여도 명령에 한편으로 난색을 표합니다제자들은 200데나리온이나 든다고 불평했지만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로 충분했습니다주님께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으로 드리면나머지는 주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당신이 가진 오병이어를 하나님께 드리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표정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방금 전까지 귀신을 축사하고 병든 자들을 치유한 사람들입니다그리고 그들이 전도 여행을 떠날 때먹을 것을 준비하지 안 해도 채워주셨던 체험하셨습니다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시와 명령에 순종하라고 권합니다아무리 현실의 문제를 잘 분석해도 예수님이 그것에 계시지 않으면 해답이 없습니다현실을 잘 알면 알수록 절망만 깊어진 뿐입니다그러기 때문에 골방에서 단독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제자들과 같은 반응을 보인 사람들이 이미 구약 성경에서도 기록하고 있습니다출애굽 후에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고기를 달라고 불평했습니다모세는 하나님께 몰맨 기도합니다.

 

13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이르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14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 21모세가 이르되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육십만 명이온데 주의 말씀이 한 달 동안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22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민 11:13-14,21-22)

 

그렇게 기도하는 모세에게 무엇이라고 응답하셨습니까?

 

23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민 11:23)

 

이 대답은 모세의 믿음을 책망한 말씀입니다이 사실을 보면서 우리들의 믿음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가능성을 한정시킬 때가 많습니다제자들의 말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습니다현실을 잘 분석했습니다정보도 정확했습니다하지만 그들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그들은 예수님을 몰랐습니다예수님을 모른 채 현실만 잘 알면 절망만 깊어집니다한숨과 불평만 늘어갑니다두려움만 자라갑니다.

 

때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당혹스런 명령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그러나 현실을 직시하지 마시고 그 명령을 주신 하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주님께 왜 그것을 원하시는지 대답을 들으시고그것을 이루기 위한 능력과 자원도 주시길 위해 간구해야 합니다.

 

오병이어로 먹이신 예수님(38-44)

한 소년이 자신의 작은 도시락을 아낌없이 내놓았습니다작은 헌신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그들에게 새로운 만나를 공급해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38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9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41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42다 배불리 먹고 43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38-44)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오십 명씩백 명씩 나누어 질서정현하게 앉혔습니다제자들이 가지고 나온 오병이어를 감사 기도를 드린 후에 나눠 주였습니다신기하게도 남자만 헤아려도 5000명이 넘는 무리를 먹였는데도 남았습니다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나 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그 떡을 나누어준 일에 제자들도 참여했습니다제자들은 끊임없이 나오는 떡을 나누면서 자신들이 얼마나 믿음이 없는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신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첫 출애굽 후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먹이셨듯이새로운 출애굽의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도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왕되신 새로운 이스라엘이 얼마나 풍족한 하나님 나라가 될 것인지를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 함께 하시자 광야가 초장으로 변화되었습니다광야에서 목자 없는 무리에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그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또한 가난하고 주린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목자가 푸른 초장으로 양들을 인도하듯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에게 광야에서 천국의 향연을 만끽하게 해주셨습니다.

 

세상 왕인 헤롯이 주관하는 왕궁의 잔치는 화려하고 방탕 했습니다그리고 세상의 권력자들만의 유흥이었으며오만과 미움 그리고 살기 가득한 잔치였습니다하지만 참된 왕 예수께서 마련하신 광야의 밥상은 소박하지만 풍성했습니다아무 자격없는 자들에게 베푸신 예기치 않은 은혜의 잔치였고하나님 나라를 열망하는 소외된 자들의 연회였습니다.

 

당신은 어떤 잔치에 참여하길 원하십니까세상에 탐욕스런 잔치에 참여하시길 언하십니까은혜의 잔치 자리에 참여하시길 원하십니까참여하기 전에 당신의 작은 겨자씨만한 믿음을 주님께 보여드려야 합니다그것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졌을 때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큰 복으로 되돌아오게 되어 집니다.


오늘도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주리고 있는 영혼들이 있습니다주님은 모든 영혼들에게 목자로 영육간에 양식을 공급해 주신 분이십니다때를 따라 풍성하게 공급하신 잔치로 당신도 초청하십니다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소유한 작은 것이라도 주님께 기쁘게 드리시길 바랍니다그러면 상상치 못할 놀라운 역사들을 만날 것입니다참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잔치에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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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6-02)


순교 당하는 세례 요한

마가복음 6장 13-29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지만 건강한 사람들과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을 봅니다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밥 입맛이 없어서 밥을 멀리합니다하지만 건강한 사람들은 밥맛이 넘쳐서 밥을 가까이합니다영혼도 건강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가까이 합니다말씀과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이 건강한 믿음을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본문에는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 나옵니다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떠남으로 영적인 큰 실수를 하게 되었습니다그가 바로 헤롯이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서 복음 전도하는 일에 파송했었습니다. 그 일은 대단히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스승인 예수님의 이름도 유명해졌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제자들의 활동상을 다양하게 해석했습니다. 본문은 분봉왕 헤롯이 예수님의 반응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 소식은 자신이 목 베어 죽인 세례 요한의 영혼이 살아나서 예수 속에서 역사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사역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헤롯의 생각(14-16)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어 전파하게 후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전국으로 더욱 확산되어 갔습니다이러한 사실은 최고지도자였던 헤롯왕에게까지 보고가 되어 집니다하지만 그에게는 예수님의 사역을 들으면서 두려움에 쌓이게 됩니다.

 

14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 15어떤 이는 그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16헤롯은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14-16)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점차적으로 퍼지자 헤롯왕에게까지 알려졌습니다사람들은 저마다 예수님에 대한 평가를 살아난 세례 요한하늘로 올라간 엘리야 또는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이러한 소문은 헤롯을 괴롭혔습니다그는 잊혀진듯했던 과거에 자신의 악행이 악몽처럼 다시 살아나고 있었습니다그는 자신이 목 베어 죽인 세례 요한이 살아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헤롯의 만행은 이복형 빌립의 집을 방문해서 그의 아내인 헤로디아에게 반하게 됩니다그는 15년 동안 살던 아내와 이혼하고 이 헤로디아를 아내로 맞아서 결혼했습니다세례 요한은 최고 권력자인 헤롯에게 선지자의 심령으로 부당성을 지적했습니다헤롯은 자신의 부당성을 지적한 세례 요한의 말이 가슴에 찔리긴 했지만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그리고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옥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세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죽이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말을 잘 이해했고 권위를 인정했습니다하지만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지 않았습니다그는 정당히 불편하지 않을 만큼만 실천하고서 불순종의 불씨를 남겨 두었습니다헤롯의 모습 속에서 현대인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들을 때 맞는다는 것은 인정합니다하지만 자신의 방종하고 타락한 삶을 지적하는 것은 듣지 않습니다.

 

혹시 당신도 정당히 필요한 부분만 순종하고 불순종을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허물을 들어내는 빼 아픈 지적이라 할지라도 순종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헤롯을 비판했던 세례 요한(17-20)

헤롯의 생각과는 반대로 헤로디아는 다른 생각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그녀는 원하는 것은 다 얻어야 하는 여인이었습니다그래서 자신의 일을 반대하는 요한을 죽이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요한을 죽일 기회만 틈타고 있었습니다그녀에게 세례 요한을 죽일 좋은 기회가 다가왔습니다.

 

17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18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19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20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17-20)

 

헤롯은 세례 요한을 죽었던 이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그 이유를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첫째는 세례 요한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암시합니다제자들의 활동은 세례 요한의 환생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다시 재현될 것임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암시하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헤롯은 세례 요한의 선한 말과 그의 권위를 인정했고양심에 가책을 느꼈습니다그래서 헤로디아의 청을 거절해 왔던 것입니다양심에 가책을 느끼면서도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그래서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과 진정으로 회개를 하는 것은 다릅니다진정으로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왔던 것입니다헤롯처럼 사탄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작 자신에게 들려진 메시지는 적용하지 않았습니다그리고 그 말씀을 확산되지 않도록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그는 불편하지 않을 만큼만 말씀을 적용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헤롯은 절반의 순종으로 불순종을 정당화하는 사람이었습니다우리들이 말씀을 거절한 것은 말씀이 틀려서가 아니라 대부분 순종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그 말씀을 받아 들렸을 때자신의 생각과 패턴을 포기해야하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공격합니다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부정적인 부분을 부각시킵니다그리고 그 사람이 하는 말은 맞지만그런 말할 자격이 없다.’고 말씀을 매도 시켜버립니다헤롯도 세례 요한의 말은 맞고 의로운 사람이지만왕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버릇없다고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누구를 통해서 말씀하시든지 그 말씀이 사실이거나 죄를 들추어내거든 인정하고 말씀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하길 바랍니다그런 사람을 통해 말씀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일리 없다고 부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세례 요한의 행동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부도덕한 왕을 책망하던 때와 같습니다특별히 아합 왕의 죄를 책망한 엘리야와 흡사합니다아합 왕도 이세벨의 치마폭에서 놀아난 사람입니다이세벨 때문에 엘리야가 공격을 많이 당했습니다세례 요한도 헤롯왕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에 곤욕을 당합니다.

헤롯은 세례 요한의 목숨만은 살려주길 다짐했지만그것만이 최소한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하지만 그 같은 최소한 양심은 그리 오래 지켜낼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도 말씀에 대한 태도가 매우 중요합니다때로는 말씀이 당신을 잘했다고 격려할 것입니다그러나 때로는 헤롯을 책망하듯이 당신을 책망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그것까지 믿음으로 받아 들려서 하나님께 회개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그러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실 것입니다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하지만 헤롯과 같이 말씀을 적당하게 순종하면 그것에 걸림돌이 되어질 것입니다.

 

참수와 매장을 당한 세례 요한(21-29)

악한 자들은 굶주린 사자들처럼 삼킬 자를 찾아 항상 기회만 옆보고 있습니다악한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을 죽이려고 치밀한 계획을 세웁니다그리고 헤롯의 생일잔치에서 기회를 잡습니다.

 

21마침 기회가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22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그와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소녀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23또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24그가 나가서 그 어머니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머니가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25그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니 26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27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28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다가 소녀에게 주니 소녀가 이것을 그 어머니에게 주니라 29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21-29)

 

헤롯은 무절제와 방종으로 특징지어지는 생일잔치를 열었습니다헤롯이 자신의 생일잔치에 헤로디아의 딸에게 재롱의 대가로 무엇을 요청이든지 다 들어주겠다고 말합니다세례 요한을 죽일 기회를 찾던 헤로디아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합니다.

 

구하는 것을 다 주겠다고 허세를 부리고 있습니다헤롯은 자신의 혀를 다스리지 못한 채 어린 딸에게 놀아나고 있었습니다이러한 오만이 사탄에 무너지는 도구가 되어 집니다딸과 손님들 앞에서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려고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인 줄 알면서도 선지자를 죽였습니다세상의 권력자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살아가지 않습니다다만 대중의 눈을 두려워하고 인기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헤로디아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남편도 자식도 이용했습니다그것을 방해하면 선지자도 죽였습니다이렇게 한 상황에서 딸에게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도록 시켰고헤롯은 이를 거절할 수 없어서 세례 요한을 참수형에 처하게 됩니다왕궁의 방종한 분위기와 무절제한 헤롯의 약속이 무죄한 사람의 생명을 무책임하게 죽이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의인의 죽음을 허락하십니다요한의 죽음은 억울하고 가슴 아픕니다그러나 이 죽음을 통해 요한은 등장부터 퇴장까지 철저히 예수님의 길을 준비했습니다당장은 권력자 헤롯이 힘없는 요한을 이긴 듯합니다그러나 이 사건의 진정한 승리자는 세례 요한이라는 사실이 복음서 끝부분의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결 결과에서 사시됩니다.

 

말씀이 역사하도록 허용하도록 허용하지 않고 가둬두면언제가 그 말씀을 아예 무시하게 될 것입니다회개는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아닌 죄와 단절하고 떠나지 않으면 죄가 자신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정하는 하나님의 사람은 사람들의 비유를 맞추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용기 있게 행하는 사람입니다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사명으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며 회개를 외쳤던 선지자였습니다세례 요한처럼 거룩한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말씀이 전달될 때모든 것을 내려놓고 말씀에 완벽하게 순종해야 합니다삶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강력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당신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혹시 세례 요한처럼 억울한 일이 생기더라도 그 상황을 주관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끝까지 인내하고 감당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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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6-01)


고향에서 배척당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6장 1-13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사탄은 성도들을 주저앉히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 끝까지 보내시는 분이십니다이 일을 위해 우리에게 능력도 주시고귀한 동역자들도 붙여주십니다행동하지 않고 묵상만 신앙이 병이 들게 되어 집니다.

 

  •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집을 떠나서 고향 나사렛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고향에서 기적을 베푸시고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하지만 고향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인간적으로 잘 알아온 예수님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보다는 배척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을 즉시 다른 곳으로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제자들을 둘씩 파송하시고 복음을 전파하게 하십니다.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당하신 예수님(1-3)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셨지만동시에 항상 핍박과 고난을 받으셔야만 했습니다고향을 방문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큰 수모를 당하셨습니다.

 

1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1-3)

 

고향 나사렛을 방문하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고향의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고향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그 지혜가 너무나 놀랐습니다하지만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목수였다는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혔습니다그 선입견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기적을 믿지도 않았습니다오히려 예수님을 무시하고 배척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으로 누구보다 더 예수님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자신들의 선입견에 사로잡혀 예수님의 진정한 권위를 깨닫지 못하고 배척하는 실수를 범합니다이것은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식에 예수님의 친족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대하려 했던 실수를 연상하게 합니다(3:21).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배척을 당한 것은 그의 제자들도 얼마든지 배척을 당할 것을 의미합니다우리들도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고난을 받고 세상에서도 거부당하면서도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바보 취급을 받지 않으면 제대로 살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아이니 하게도 그리스도인들이 바보처럼 살 때그들이 전하는 복음은 환영을 받습니다반대로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어울려 살면그들이 친구로 받아주긴 하지만우리들이 전하는 예수님은 믿지 않습니다심지어 우리들의 신앙마저도 진실하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이나 사람들을 대할 때선입견으로 대하면 안 됩니다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시길 바랍니다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다리시길 바랍니다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족들을 잘 안다는 이유만으로 정작 온 세상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배척했습니다혹시 당신도 적은 경험과 지식으로외모로 사람을 쉽게 판단하지는 않습니까?

 

고향에서 사역하지 않은 예수님(4-6)

믿음이 있는 곳에서만 역사가 나타납니다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의 문제점을 분명히 지적하십니다그리고 그들이 의심하고 영접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사역도 행하지 않습니다.

 

4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5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4-6)

 

구약의 선지자 중에 예레미야처럼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렘 11:21). 믿음이 없는 고향 때문에 예수님은 발걸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셨습니다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을 초인간적인 사역으로 받아들이지만 예수님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모든 사물은 너무 가까이 보면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예수님의 가족들이 그랬습니다고향 사람들은 예수님 대한 알량한 지식과 오만한 생각이 예수님을 과소평가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고향 사람들의 마음을 믿음 없음이라고 평가하십니다그리고 그 지역에서는 거의 기적을 행하시지 않습니다기적은 비유처럼 믿음으로 이해할 수 있고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믿음이 없던 고향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뒤따라가는 제자들 역시 가시밭길을 갈 수 밖에 없습니다고난 없이 영광도 없고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기 때문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이들이 고난의 제자도가 아니라 부와 영광의 제자도를 추구하려 합니다조롱과 멸시의 길을 가신 예수님께 영광과 명예를 구하며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앞에서 일신의 안락과 성공을 구하려 듭니다.

 

열두 제자를 파송시키신 예수님(7-13)

진정한 리더십은 책상에 앉아서 배운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뛰면서 직접 체험해 본 것입니다주님께서도 그렇게 하셨습니다지금까지는 예수님께서 직접 사역하셨지만이제는 주님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서고 제자들을 앞장 세워서 사역의 현장으로 인도하십니다.

 

7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8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9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10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11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12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13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7-13)

 

예수님께서는 고향을 떠나 다른 마을들을 두루 다니며 가르치십니다그리고 열두 제자들을 불러 두 사람씩 파송하여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둘씩 보내신 이유는 같이 협력하라고 하신 것입니다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능력을 행하며 많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친 권세도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나가기 전에 알아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그것은 예수님께서 성공적인 사역을 살 수 있었던 것을 예수님의 믿음 때문이었다는 사실입니다예수님을 항상 성령님과 동행하셨고세상이 주는 영광을 구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사역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제자들도 그래야 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여행할 때는 최대한 간편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단 벌 옷과 신발만 가지고 갈 것을 명령하셨습니다너무 많은 것을 챙기다 보면 실제로 사역할 시간이 없고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것에 기대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제자들이 생계에 매어서 사명을 망각하거나 먹고 살기 위해서 듣는 사람들의 취향에 맞추어 복음을 변질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취해야할 태도는 예수님처럼 환영도 받겠지만 배척도 받을 것입니다하지만 더 나은 대접을 찾아서 이집저집 기웃거리지 말아야 합니다성도들이 직장에서 연봉 때문에 기웃거리지 말아야 합니다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좋은 제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나갔습니다그리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겼습니다그들의 사역은 성공적인 사역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을 고쳐주었습니다병을 고쳐 주며 회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이것은 훗날에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이어갈 제자들의 사역을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복음을 전파해야할 사명이 이곳에 있습니다. “회개하라는 것은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주인을 받아 들리라는 요구입니다세상을 향해서 거짓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외치려면 자신이 먼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내가 먼저 세상 앞에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보여주어야 합니다그래야 세상도 돌아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통해 복음을 전하십니다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셨을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 큰 능력을 주시고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셨습니다예수님은 당신을 통해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길 원하십니다복음을 잘 전할 수 있는 능력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사람을 외모만 보고 쉽게 평가했습니다그 결과로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알량한 경험과 지식 대문에 주님의 능력과 지혜를 제한하지 않도록 겸허함이 있어야 합니다누구를 통해서든지 파송된 제자들처럼 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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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5-03)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예수님

마가복음 5장 35-43절


 

오늘날 체감 경기는 매우 좋지 않습니다. 다들 너무나 어렵다고들 아우성입니다. 그렇지만 한 번도 쉬었던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안해하고 힘들어 하는 것은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노력해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있겠지만, 능력 밖에 일들은 노력해도 불가능합니다. 이때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까지는 아직 소망이 남아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기도하길 바랍니다. 본문에서는 소망이 끊어진 순간에도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붙잡는 놀라운 믿음의 승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던 도중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 걸린 여인을 치료하십니다. 지체하는 시간 동안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에게 딸이 죽었다 할지라도 믿음을 흔들리지 말라고 권고하십니다. 야이로의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딸을 살려내십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생명까지도 주관하신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절망에서 믿음을 촉구하신 예수님(35-36)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을 만날 때, 직면한 상황에서 아무리 절망적일지라도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당신에게 들려주셨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하늘이 무너진 것과 같은 소식을 듣고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두려움과 믿음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두려움은 문제를 더 확대 해석해서 문제에 빠지게 합니다. 하지만 믿음은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35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35-36)

 

회당장 야이로는 딸의 위급한 상황에서 딸을 치료하기 위해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하지만, 도중에 열 두해 혈루증 걸린 여인의 문제로 인해 지체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회당장의 집에서 전갈하는 사람들이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라고 아주 절망적인 보고합니다. 열두 해 혈루증 걸린 여인은 살았지만, 야이로의 딸은 죽었습니다. 상황이 아주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라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께 원망을 쏟아놓고, 야이로에게는 믿음을 포기하라고 권한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더 이상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모든 상황은 종료된 것 같고, 야이로의 집에서 온 사람들이 말 것처럼 더 이상은 이 일에 관해서 희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등장했던 이적 이야기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귀신 들린 사람에게 더는 희망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5:3-5). 혈루증을 앎은 여인의 소개에서도 그녀가 병은 치료하지 못하고 가산만 탕진하며 보낸 12년간의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그녀의 절망적인 상황을 말해주었습니다(5:25-26). 인간적인 희망이 더 이상 없는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연출됩니다. 아마 일반적인 사람들은 예수님이나 혈루증 여인이 원망스러웠을지 모릅니다. ‘혈루증 여인 때문에 지체하지 않았다면, 딸이 살았을 것인데...’라고 푸념이나 불평했을지 모릅니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에게 부정적으로 반응할 시간도 주시지 않습니다. 즉시 개입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것이 더 극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중병에서 이미 죽었습니다. 이 헬라어 동사는 모두 현재 명령법으로 계속해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어야 한다는 명령을 담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어야 한다는 명령을 담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은 누가 보더라도 이 상황이 회당장에게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발생한 순간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도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풍랑 앞에서 두려워했을 제자들을 연상시킵니다.

 

인간적인 상식으로는 이미 끝난 상황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시작은 인간의 끝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어려운 문제는 사람들이 노력하면 해결할 수 있지만, 불가능한 문제는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셔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해주실 것을 신뢰하고 매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는 문제라면 당신도 포기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치유하실 능력뿐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능력까지 있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딸의 생명뿐만 아니라 회당장의 믿음까지도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믿음을 더욱 성장시켜 주실 것입니다. 혈루증 여인을 통해 야이로의 믿음을 성숙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통해 당신의 믿음을 성장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고 붙드시길 바랍니다.

 

말씀에 대한 반응하는 사람들(37-40)

세상이 어려울 때 일수록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는 자꾸 믿음을 흔드는 불신앙의 소리만 들립니다. 이런 말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더 집중해야 합니다. 흔들림 없는 기준은 환경이나 세상에서 온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결정하시길 바랍니다.

 

37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37-40)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람만 데리고 야이로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이들은 9장에 언급된 변화산 사건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을 가장 지근거리에서 볼 수 있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참석시키셔서 자신의 하신 일들에 대한 분명한 목격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야이로의 집에 도착한 예수님께서는 일반적인 장례집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야이로는 종교 지도자이기 때문에 지역 사람들이 야이로의 집으로 많이 몰려와 문상(聞喪)을 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어린 아이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통곡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39)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아마도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는 표현은 아마다 이 아이의 죽음은 영원한 것일 수 없다는 말일 것입니다. 야이로의 집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딸을 보지도 않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신 예수님을 볼 때 정말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그를 비웃더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웃는 사람들을 집밖으로 다 내보내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기 위해 세 제자들을 데리고 그 아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사역을 직접 목격한 증인으로서, 나중에 확실한 복음 전도자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자리에서 구약의 엘리야와 엘리사처럼 죽은 아이를 일으키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죽은 소녀를 일으키신 행위는 요한복음의 나사로 사건과 더불어 하나님의 종말적 통치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이 땅 가운데 시작되고 있음을 일려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전부터 제자들은 이 사역들을 온전하게 이해한 것은 아닙니다.

 

혈루증 여인을 통해서 야이로의 믿음을 세우셨던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의 믿음을 세워주시고 계십니다. 이 일을 통해서 예수님의 세 제자들에게 특별교육을 실시하셨습니다. 그 제자들ᅟᅳᆫ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야이로의 딸이 살아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을 성숙 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회가 있음 때마다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통한 설교와 성경공부 그리고 말씀묵상을 통해 가르치십니다. 이러한 훈련들을 통해 성도의 믿음을 성숙시키신 것입니다. 당신은 그러한 훈련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석하십니까! 제자들에게 야이로의 딸을 통해 특별 신앙 훈련을 시키신 것처럼, 당신도 하나님께서 훈련시켜 좋은 제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딸을 살리신 예수님(41-42)

기적은 불신이 아니라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살아가다보면 돈, 지식, 권력도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절박한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믿음은 무엇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까? 더 높은 확률이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인격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으지를 믿는 일입니다. 그분께 다 맡기는 일입니다.

 

41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41-42)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내어보내시고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소녀야 일어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명령에 12년 된 혈루증 앓던 여인에게서 증상이 ‘곧’ 사라졌듯이, 죽었던 소녀도 ‘곧’ 살아나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엄청난 기적이 아주 간단하게 일어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우리들이 믿는 예수님은 상상할 수 없이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당신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에 흥분되지 않습니다. 이 시간에도 당신에게 ‘달리다굼’이라고 명령하십니다.

 

한마디 말씀으로 죽은 소녀를 살리신 예수님의 기적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적이니 마땅히 놀라고 놀랄 일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명령하여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명령에 생명이 없던 것들이 생명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야이로의 딸에게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명령하여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것처럼,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처럼 당신의 삶에 부활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도 이 사실을 믿지 못한 사람들은 비웃고 비아냥거릴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달리다굼’이라고 명령하십니다. 잠자거나 죽은 영혼들이 향해 명령하십니다. 주님의 명령에 일어나고 깨어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일으켜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침묵을 명령하신 예수님(43) 

믿음은 눈에 보이는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하신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야이로는 세상의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따름으로 놀라운 축복을 얻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또 다른 부탁을 하십니다.

 

43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43)

 

예수님은 부활이며 생명이십니다. 야이로는 현실성 없어 보이는 예수님의 권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열두 해 혈루증 걸린 여인을 치유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묵묵히 따라갑니다. 결국 그의 딸이 살아나는 은혜를 누립니다.

살아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인간의 일상적 필요에 대한 세밀한 관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당신도 예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시며 묵묵히 따라가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면 회개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능력으로 당신이 상상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일들을 체험하게 되어질 것입니다.

 

야이로의 딸을 통해 일어난 일처럼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곳에는 야이로의 집에 역사하신 뜻이 있었던 것처럼, 당신에게도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섣불리 서두르지 말아야 합니다. 끝까지 묵묵히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놀라운 기적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당신의 삶에 일어날 부활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흥분이 될 것입니다. 이제 부활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우리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시길 바랍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의 죽음 앞에서도 믿음의 선택을 했습니다. 그래서 딸이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희망이 사라질 때, 주위에서 포기하라고 말할 것입니다. 바로 그때에 아버지의 음성을 듣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당신이 하나님께서 하신 두려워말고 믿음을 포기하지 말라는 명령에 순종함으로 놀라운 권능을 경험할 것입니다. 말씀을 확실히 믿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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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5-02)


 예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

마가복음 5장 21-35절


 

우리들이 주님 앞에 나올 때, 베드로가 그물을 버려두고 나갔던 것처럼 버려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세상에서 수여한 훈장과 세상에 붙여 준 명예들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갈 때는 이 모든 것들을 모두 벗어놓고 나아가야 합니다. 반대로 주님 앞에 나아갈 때, 가지고 나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처, 아픔, 상한 마음, 무거운 짐과 걱정 그리고 염려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가지고 오라고 주님께서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해결해 주시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 앞에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가지고 갈 것은 가지고 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광풍을 뚫고 거라사 지방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에서 광인을 치유하시고 또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돌아오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지만, 간절함을 가지고 나온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간절히 나온 사람들 중에 딸이 죽어가고 있는 회당장 야이로와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않는 여인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신분이 달랐지만, 모두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딸의 치료를 위해 간구하는 회장당(21-24)

인생은 자신의 권력과 부와 지위에 있을 때는 하나님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 큰 세력인 병이나 죽음 앞에 직면할 때에야 비로소 무능한 자신을 알고 겸손하게 하나님께 나아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사탄의 나라를 결박하고 강력하게 이 세상에 침노하였음을 보여주십니다.

 

21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21-24)

 

예수님께서 자기 지역을 떠나달라는 요구에 이방 지역에서 다시 유대 지역으로 배를 타시고 다시 이동하셨습니다. 이번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선창에 무리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나아가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밀며 따랐지만, 그들 중에는 간절하게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갈릴리에 도착하자 예수님을 간절히 만나고 싶었던 야이로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간구합니다. 그는 회당장이었습니다. 회당의 모든 건물과 예배를 관리하고 집례하는 업무를 감당하는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종교지도자로서 이렇게 예수님을 인정한 사람은 그가 처음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회당장이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비판거리가 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무리 앞에서 예수님께 엎드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위치, 직위, 체면 그리고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망가진 모습으로 무리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간청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문제의 해결하실 예수님 앞에 엎드리어서 간구한 것입니다.

 

야이로가 얼마나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그는 매우 간곡하게 사정합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23) 그 딸에 대한 소개는 42절에 보면, 그 딸의 나이가 12살이며 외동딸(누가복음 8:42)이라고 소개합니다. 이 딸은 아직은 중병으로 죽지 않았고 죽어가고 있다고 소개합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그 문제를 위해 예수님을 찾아와서 살려 달라고 간청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두 가지, 즉, ‘자기 집에 들어와 달란 것’과 ‘손은 얹어서 딸을 고쳐 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는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병을 고치실 수 있습니다. 굳이 병자에게 손은 얹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가 믿는 대로 원하는 대로 해주십니다.

딸의 죽음 앞에서 이 아버지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재물이든, 명예든, 체신이든, 아무 것도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딸의 목숨과 바꿀 수 있다면, 그는 버리지 못할 것이 없었습니다. 회장당이라면 이미 예수님께서 여기저기서 행하셨던 일들을 다 들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위와 체면을 내던지고, 그 앞에 엎드릴 만큼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서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인 이방여인이지만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마가복음 7:25-30). 자신의 귀신 들린 딸을 위해 예수님께 강청했습니다. 예수님에게 모진 소리를 들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 딸에게 있는 귀신을 쫓아내달라고 간구했던 여인입니다.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시길 간구했던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딸을 희생시키면서 세상의 것을 지키고 싶은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딸의 목숨을 살릴 수만 있다면 버리지 못할 것이 없었습니다. 딸의 죽을 병을 통해 회당장에게 인간의 무능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예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절히 구하는 야이로와 함께 그의 딸을 치유하기 위해 그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이처럼 구하고 찾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겠지만, 구하는 사람들에게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닥친 시련과 고난은 당신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합니다.

 

병을 고쳐달라고 간구하는 여인(25-29)

인간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인간의 모든 방법이 절망으로 끝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할 최적의 시간입니다. 무리들 중에 간절히 예수님을 찾고 있었던 사람은 혈루증 걸린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수많은 의원을 만나고 전 재산으로 고침을 받지 못한 질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도 예수님을 간절히 만나길 원했습니다.

 

25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25-29)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가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 길은 한시라도 빨리 가야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발길을 잡는 일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무리 가운데는 열 두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온 여인이 있었습니다. 혈루증은 하혈이 멈추지 않고 계속적으로 나오는 병입니다. 당시에 이런 병은 부정하게 생각하고 죄인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 여인은 다른 사람과 접촉해서는 안 되는 병이었습니다. 이 병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질병을 가진 사람은 부정한 사람이 되어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외면 받으면서 살아야 했습니다(레위기 15:25-33). 이 혈루증은 부정한 병이기 때문에 사람들과 함께 다닐 수 없었습니다.

 

만약 당시에 이 여인의 정체를 알았다면 가만히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여인도 회장장처럼 혈루증을 치료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다 사용해보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재산도 병 때문에 탕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효험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몸도 상하고 병만 악화되었을 뿐입니다. 점점 깊은 좌절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는 여인에게 자신처럼 부정한 나병환자를 고치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소문은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을 치유하시고 귀신 들린 사람을 축사(逐邪)하셨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참으로 이 소식은 그녀에게 복음(Good News)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예수님을 만나길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만나길 사모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소문을 듣는 것은 복음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아닙니다. 이제는 예수님 앞에 나가야 하는 믿음의 선택이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가는 길에 ‘무리들’이라는 장애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딸을 고쳐주시기 위해 가시는 중입니다. 예수님을 멈출 수도 없습니다. 여러 가지 상황 가운데 이 여인은 결정합니다.

그녀는 오직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자신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또 그 믿음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질병 때문에 예수님 뒤에서 몰래 손길을 내밀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것이라는 단순한 믿음이 그녀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자 12년 동안 알았던 혈루증인 나았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짐으로 긴 고통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가는 길에는 많은 방해가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장애 앞에 예수님께 나가는 소망을 무너뜨리고 맙니다. 그러면서 복잡한 핑계거리를 늘어놓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나가는 길은 아주 단순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앞에 나아가지 못한 것에 대한 우리들은 핑계를 늘어놓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치유에 역사를 맛보길 원하신다면 현재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영혼까지 고침 받은 여인(30-34)

필사적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의 간절한 행동과 믿음이 기적을 낳게 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찾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30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30-34)

 

위험을 무릎 쓴 믿음 위에 예수님께서는 화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이 나간 줄 아셨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시고 모든 무리가 이 여인을 주목하게 만드십니다. 모든 무리 앞에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들 앞에서 물으신 것은 무엇이 믿음인지 가르쳐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자신을 만지기 전에 그녀의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고쳐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예수님의 옷을 만져서 나았다고 믿을 것입니다. 모든 치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믿음이 있어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여인과 무리들에게 알려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인의 연약한 믿음과 불안전한 지식을 온전하게 해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을 세상 앞에 공개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너무 많은 무리가 에워싸 밀어서 누군가 예수님께 닿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왜 손을 내밀어 만진 자가 누구냐고 물으시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그 여인만은 그 질문이 옳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두려워 떨면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이실 직고를 합니다.

아마 많은 무리들도 밀치면서 예수님의 몸을 만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은 이 여인뿐이었습니다. 믿음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것입니다. 교회에도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지만 주님을 만나고 그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무리에 있지 아니하고 한 영혼에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누가 나를 만졌느냐?’라는 말씀에 두려워했습니다. 부정한 여인으로서 거룩한 분을 만진 것 때문에 분명히 그녀는 책망을 받을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사정을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모든 무리들에게 여인과 같은 신앙고백을 가르치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놀랍게도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무리 앞에서 여인의 치유를 선언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뿐만 아니라 그의 사회적인 관계까지도 회복해 주시고 계십니다. 더욱이 여인이 예수님을 마술적인 치유자로 아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영적인 회복까지 주신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치유는 육적인 치유, 정시적인 치유, 사회적인 관계 치유, 영적인 치유까지 다 망라하는 전인적인 치유였습니다. 그 여인은 혈루증만 치유된 것이 아니라 믿음의 행위를 통해 영혼 구원의 은혜까지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 여인의 모든 비참함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벗겨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과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 12년 동안 고치지 못했던 여인은 혈루증이 나았습니다. 당신도 혈루증처럼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다면, 믿음으로 예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질 각오로 믿음으로 나간다면, 반드시 놀라운 기적적인 역사를 경험할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회당장 야이로와 열 두 해 혈루증을 앓은 여인, 이 두 사람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과 열두 해 혈루증에 시달린 여인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만 의지하며 나가면 예수 그리스도부터 오는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어떤 문제를 만나더라도 물러서지 않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놀라운 능력을 체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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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5-01)


 광인을 온전케 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5장 1-20절


 

요즘 우리 주변에는 중독으로 삶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알콜 중독, 마약 중독, 도박 중독, 게임 중독 그리고 음란 중독까지 다양합니다. 중독자들은 자신은 스스로 절제하려고 하지만 할 수 없는 것을 봅니다. 그들의 어려움은 마음은 끊고 싶지만, 끊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중독 증세는 독이 되어서 자신의 삶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오늘도 사탄은 중독을 통해 사람들을 무엇인가에 사로잡혀서 인생다운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도록 인생들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광풍’을 말씀으로 잔잔케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천지만물을 다스린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거라사 지방에 도착하자 짐승처럼 살아가는 귀신 들린 ‘광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축사하고, 그 귀신을 돼지 떼에게 들어가서 바다에 빠져 죽은 사건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다시 영적인 세계까지 통치하신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거라사에 도착하신 예수님(1-5)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영원토록 교제하면서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타락한 후에 하나님의 형상을 잊어버리고 귀신의 형상대로 어두운 인생길을 살아갑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형상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거라사인의 광인과 같습니다.

 

1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3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1-5)

 

예수님의 일행은 전날에도 많은 사역 때문에 피곤했고, 특히, 갈릴리 바다를 건너면서 광풍 때문에 밤새도록 고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광풍이 부는 바다를 잠잠케 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그 충격은 그들에게 진한 여운의 질문,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잠잠하는가?’라는 질문 하나를 남겼습니다.

 

본문에서는 귀신들린 광인을 고쳐주십니다. 이것을 통해 보여주신 기적에 대해 상반된 반응을 보여주십니다. 그 반응들 속에서 우리의 신앙을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는 큰 바람과 파도를 뚫고 도착한 곳은, 갈릴리 바다 건너편 지방은 거라사인(Gerasenes)들이 사는 땅이었습니다. 이 장면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이방지역에 들어가서 사역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앞으로 벌어질 일들과 신학적으로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세주일 뿐만 아니라 새 이스라엘의 대표로 살아가고 계십니다.

앞에서 광풍을 잠잠케 한 사건은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사건을 재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첫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뒤쫓아 오는 바로의 군대를 홍해에 수장시켰습니다. 그 사건이 본문에서 재현됩니다. 예수님께서 쫓아낸 귀신의 이름이 다름 아닌 ‘군대’였습니다. 이 ‘군대’라는 단어 ‘레이온’은 3,000-6,000명 정도에 이르는 로마 군대의 단위를 말합니다. 이런 엄청난 귀신이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서 바다 속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곳에는 예수님의 일행들을 편하게 쉴 수 있는 안식할 장소나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가 기다리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러운 귀신 들인 사람이 예수님의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의 군대처럼 그들도 수장되었습니다. 첫 출애굽을 이끄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셨다면, 이제 영적인 새 출애굽을 이끄실 분이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이방 땅 거라사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맞이한 사람은 놀랍게도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그는 아무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세력이었습니다. 쇠사슬로 매면 끊어버렸고, 고랑은 깨뜨려 버렸습니다. 그럴 수 있는 능력은 그 사람 안에 엄청나게 많은 귀신이 들어 있어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더러운 귀신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귀신 들린 사람은 죽음을 상징하는 무덤들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혼자 살았고, 혼자처럼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5절에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고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산에서나 들에서 항상 소리를 지릅니다.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습니다. 그리고 돌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15절에서 ‘옷을 입었다’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평상시에는 옷을 벗고 살았던 것처럼 보입니다. 아주 강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수치도 모른 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보기 좋았던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이것이 죄 아래에 맺어 있는 인간의 실존입니다. 타인에게는 강하지만 사실 자기 하나 추스르지 못하는 존재가 하나님을 떠난 인간입니다.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정도로 자기 세계가 강한 사람, 혼자 밖에 모른 사람, 그는 무덤 곁에서 이미 죽은 자나 다름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절대 하나님을 떠나는 성공을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난 불안하고 두려운 실존을 감추려고 세상의 것(옷, 명예, 집 등)으로 혼자 밖에 모르는 사람, 그는 이미 무덤 곁에서 죽은 자나 다름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절대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부요나 성공을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난 불안한 실존을 외모로 꾸미려는 것뿐입니다.

 

영적인 세력은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강력합니다. 사탄은 이렇게 강력한 힘을 좋지 못한 곳에 사용하여 자신이나 타인을 파괴하는데 사용합니다. 이것이 죄로 물든 인간의 근본 모습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떠난 결과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정욕을 따라 살아갑니다. 욕심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하나님께서 내어버려 두시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그들의 삶은 짐승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참고 로마서 1장). 마귀가 하는 일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파괴하는 일을 합니다. 인격을 파괴시키고 비참하게 만듭니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해쳐서 결국 파괴와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오늘날 사탄에 사로잡힌 이단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사역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 사람들끼리의 관계를 파괴시키며 서로 불신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새로 들어온 형제들을 먼저 아낌없이 사랑하기 보다는, 일단은 한 번 정도는 의심에 눈초리로 살펴본 후에 받아들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사랑해야할 형제들까지 어떻게 먼저 불신을 할 있겠습니까! 사탄의 힘은 누구도 통제(제어)할 수 없습니다. 영적 세력은 물리적 힘보다 훨씬 더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귀신과 대면하신 예수님(6-8) 

영적 세계는 두 나라가 항상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어두움의 권세를 가진 귀신과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영적 전쟁에 대해 어떻게 진행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사탄에 의해 파괴된 세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6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8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6-8)

 

귀신은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며 예수님을 극진히 환영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알아보지 못한 예수님을 귀신이 먼저 알아보고 경배하였습니다. 귀신은 어떤 사람들보다 예수님을 먼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왜 왔는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한다고 믿음은 아닙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반대하고 훼방하는 존재였습니다.

 

이렇게 저 자세로 나온 귀신의 본색은 서서히 들어나고 있습니다. 귀신은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7)라고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합니다. 귀신 스스로는 한 인간을 완전히 파괴하고 괴롭게 해놓고, 이제 예수님께서 자신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요구하다니 말입니다. 강한 자 앞에서는 약하고, 약한 자 앞에서는 강한 것이 사단에서 사로잡힌 이 세상에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귀신에게 파괴된 인생을 불쌍히 보셨습니다. 그리고 창조주의 권세로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8)고 명하셨습니다. 아무리 강한 귀신이라고 할지라도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주관하신 예수님의 권세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파괴된 사람은 누구라도 예수님 앞에 서면 온전하게 회복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동일하게 창조주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름으로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고 회복시키고 계십니다. 사탄에 의해 파괴된 영혼들은 예수님으로 온전하게 회복되는 능력이 있습니다. 주변에 중독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변화시킬 방법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생을 바르게 살 수 없고 대부분 인생을 파괴시켜 가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면 창조주이시며 치유자이신 예수님께 완전히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필요합니다. 순종하는 삶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의 신앙고백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짐승처럼 파괴시켜놓은 귀신의 고백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사랑이 없는 지식, 믿음이 없는 형식적인 고백 그리고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존재하지 않는 예배 등과 같은 영적인 형식들은 받으시지 않습니다.

 

돼지 때를 몰살한 귀신(9-13)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바다에서 광풍을 말씀으로 잔잔케 하심으로 친지를 다스리신 분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가라사에서 귀신 들린 사람의 귀신을 축사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세계까지도 주인임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면서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 영혼을 회복시켜 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점차적으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9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10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11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12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13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9-13)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향해 ‘네 이름이 무엇이냐?’(9)라고 묻습니다. 이름을 묻는 것은 자신이 더 강한 자란 것을 재확인하는 통상적인 방법입니다. 놀랍게 그 귀신은 자신을 ‘군대’ 귀신이라고 소개했습니다. 한 사람에게 들어간 귀신이 ‘레기온’의 규모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귀신의 힘은 막강하고, 막강한 힘으로 사람들의 삶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힘은 일반적인 사람의 능력으로는 그 귀신을 대항하기란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모든 세상의 힘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귀신을 제압하고 쫓는 권세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아무리 강력한 귀신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권세 앞에서 굴복하여 나아갈 것입니다.

 

귀신은 자신의 신분이 들어나자, 마침 산 곁에서 먹고 있는 돼지 떼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12)라고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허락하시자, 더러운 귀신들이 부정한 짐승으로 간주되었던 그 돼지 떼에게 들어갔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2000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혼돈의 공간인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다 몰살되고 맙니다. 귀신은 예수님께서 허락하지 않는 일까지 가맹한 것입니다. 귀신은 처음부터 예수님께 순종할 의도가 없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기적을 보고나 듣거나 알게 된 사람들은 다양하게 반응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출애굽 때 홍해가 갈라지고 뒤쫓던 애굽 왕 바로의 부대가 그 홍해에 수장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출애굽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 때문에 바람과 바다가 잠잠해진 후(4:35-41), 그 바다에 ‘군대’ 귀신을 바다에 수장시키고 계십니다.

 

귀신을 쫓아냄에 대한 반응(14-20)

아무리 악의 세력이 여러 모양으로 신앙을 뒤흔들더라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를 통해 회복되어 가는 사역을 막을 순 없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14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15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16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17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18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20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14-20)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를 알리기 위해 사역하셨습니다. 광풍을 통해 광인의 사역을 통해서도,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지만, 그 기적을 보고 사람들은 서로 믿음과 불신의 반응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1) 부정적인 반응(14-17)

 

거라사의 군대 귀신을 통해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서, 2,000마리가 넘는 수많은 돼지 떼가 바다에 몰살당해 죽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재물의 손해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귀신 들렸던 자는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15)라고 소개합니다.

 

이 과정에서 돼지 떼의 주인들은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돼지를 치던 자들이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 소식을 주인들이 이 관경을 보기 위하여 달려왔습니다. 그들에게는 돼지 떼에 대한 시험의 순간입니다. 그들이 도착해서 보니, 전에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 곁에서 얌전하게 앉아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놀랐을 뿐만 아니라 두려웠습니다.

그들 앞에서는 두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건이 놓여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 때문에 귀신 들린 자가 온전해졌습니다. 둘째는 예수님 때문에 돼지 2,000마리가 수장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는 좋은 현상이고, 다른 하나는 불행한 현상입니다. 그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하나는 죽은 것이 다른 없던 사람을 온전하게 새 창조하신 예수님, 귀신을 쫓아내신 그 예수님을 믿을 것인지, 아니면, 돼지 2000마리나 잃게 만든 요주의 인물을 배척할 것인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17)고 우리의 기대와는 정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반대로 예수님을 자기 지역에서 떠나시길 간청했습니다. 경제적인 관심사 하나 때문에 예수님을 쫓아내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찾은 것보다는 잃어버린 돼지로 인해 기쁘지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고도 오히려 더 많은 재산이 없어질 걸 더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조용히 떠나 주시길 원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손해를 본 재물에 있었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한 영혼을 돌아보셨습니다. 종종 사람들은 물질에 눈이 멀어서 한 영혼의 귀중성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제자들에게 물질과 영혼 중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가르치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권세를 분명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2) 긍정적인 반응(18-20)

 

돼지 떼 주인은 예수님을 거부했지만, 귀신 들렸던 사람은 순한 양처럼 변했습니다. 귀신 축사를 받은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있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의 수종자가 되겠다는 제안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19)고 명령하십니다. 그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서 순종합니다. 가족은 물론이고 데가볼리 지역을 두루 다니면서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일을 전했습니다. 그에게 선교지는 자신의 집과 지역이었습니다. 그 데가볼리 지역은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다니면서 예수님의 놀라운 구원의 사역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사실을 듣는 놀랐습니다.

 

불안 속에 빠져 있던 한 인생이, 이제는 사람들의 감탄과 감동을 주는 존재로 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이방 땅에 최초의 선교사로 세우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이 아니라 귀신 들렸던 사람이 이방인을 향한 첫 번째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함께 있고 따라 다니는 것만 제자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제자는 자신에게 주신 사명과 선교지에서 최선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주신 은혜를 체험하고, 자신의 사명을 순종하는 사람이 진정한 제자임을 가르칩니다. 오늘도 하나님 나라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간증하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탐욕의 종이 되었던 비참한 삶에서 구원해주셨습니다. 약하고 비천했지만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셨습니다. 귀신으로부터 치유 받은 사람들을 통해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육신에 연약한 다른 지체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며, 그들을 예수 앞으로 나아서 온전하게 치유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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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4-04)

  

 


광풍을 잔잔케 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4장 35-41절


 

영어권에 있는 나라를 여행하면 영어가 절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어를 모르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맙니다. 자신의 뜻을 바디랭기지(body-language)로 손짓발짓하면서 힘들게 뜻을 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영어를 잘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외국인을 만나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도움을 청해서 자신의 의사를 바르게 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폭풍을 잔잔하게 하실 수 있는 분임을 믿었다면 제자들은 폭풍우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  지금 것 하나님 나라의 비유에 대해서 살폈습니다. 본문부터 6장 6절까지는 기적으로 눈으로 보는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기적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사탄의 나라를 이기고 역사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녁에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시는 중에 큰 광풍을 만났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자연 세계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신 분이신 것을 보여주시지만, 제자들은 그분의 절대적 권위를 믿지 못하는 반응을 보입니다.

 

갑자기 닥친 폭풍(35-38)

예수님께서는 행하시는 기적들은 눈으로 보는 비유의 역할을 합니다. 기적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가 사탄의 나라를 이기고 이 땅에서 역사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런 기적들을 보고도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이해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싶다고 말한 것도 아닙니다. 눈으로 보는 사람들의 반응도 각양각색이었습니다.

 

35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35-38)

 

예수님께서는 날이 저물 때까지 배 위에서 청중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배에 몸을 실고 갈릴리 동쪽으로 가자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열광한 무리들이 그대로 물러 설리 없습니다. 그들도 배를 타고 예수님을 뒤따라 왔습니다.

 

(1) 생생한 제자훈련을 계획하시는 예수님(35-36)

 

직전 단락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서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미스터리’를 비유를 통해서 설명했습니다. ‘그날 저물 때에’란 표현은 문맥 속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서 제자들을 가르치셨던 날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예수님의 제자훈련이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비유를 통해 가르치셨던 주님은 이제 시작할 여행을 통해서 가르치려고 계획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나 궁중을 대상으로 사역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제자들에게만 가르침을 제한하는 것을 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에 모시고 출발하는 것을 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에 모시고 출발하자 무리들이 탄 것으로 보이는 다른 배가 예수님 일행을 따라 옵니다. 생생한 제자훈련을 위한 예수님의 계획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찬사를 받으나 부당한 고난을 받으나 요지부동으로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신뢰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렸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큰 인기를 얻을 때는 그들도 덩달아서 출세한 것 마냥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시련의 파도가 밀려올 때면 처음부터 믿음이 없었던 사람들처럼 행동했습니다. 사단은 그렇게 돌밭에 떨어진 씨 같은 제자들을 노렸습니다.

 

(2) 광풍과 제자들의 구조 요청(37-38)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떠나서 갈릴리 호수의 다른 곳으로 건너거자고 제안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바다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와의 동행하는 것은 모든 것이 순탄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는 도중에 갑자기 폭풍을 만났습니다. 그 바람은 배를 집어삼킬 만한 광풍이었습니다. 큰 파도가 배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배에 ‘큰 광풍’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강한 바람, 사나운 파도, 요동하는 배, 차가운 물이 들어 왔습니다. ‘큰 광풍’이라는 표현은 이 풍랑이 일반적인 풍랑이기보다는 매우 것은 바람을 동반한 돌풍이었음을 시사 합니다. 실제로 갈릴리 호수는 갑작스럽고 사나운 돌풍으로 유명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바다나 바람은 혼돈의 세계, 즉 사탄의 세력을 의미했습니다. 바다는 사탄이 사는 장소라고 믿기도 했습니다. 그 바다의 이름을 성경에서는 ‘리워야단’이나 ‘라합’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신 사건도 이 악한 세력을 이긴 사건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석한다면, 사탄이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탄 배를 습격한 것입니다. 앞에서는 마음에도 없으면서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거룩한 자라도 거짓으로 칭송하여 예수님의 길을 방해하더니(마가복음 3:11), 이번에는 자연의 혼돈 세력으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노린 것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그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비유를 통해 제자들을 가르치신 후에 갈릴리 호수의 다른 곳으로 떠나고자 말씀하셨는데, 마침 돌풍이 불었다고 하는 것은 이 돌풍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고안된 것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합니다. 마치 구약에서 요나 선지자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각각 바람과 큰 물고기와 박 넝쿨을 준비하신 것과 비슷합니다. 갈릴리 호수는 큰 호수가 아닙니다. 통상 한 두 시간 정도면 여행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주님과의 동행이 우리에게 순탄하지만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도리어 세상이 그렇게도 미워하는 예수님과 같이 다니니 안 당해도 되는 부당한 고난까지 당할 수 있고, 희생까지 치르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상황을 알 수 없었던 제자들은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왜 주님이 계신 배인데 큰 광풍이 일어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황당한 것은 물결이 일어나 배가 침몰할 것 같을 때에도 주님은 주무시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제자들로서는 절규하며 주님을 깨우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기막힌 노릇이었습니다. 주무시는 예수님을 원망하여 깨웠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무관심하고 아무런 대책도 없으신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광풍이 이는 바다로 나가게 했겠습니까? 제자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숨은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때로는 뜻하지 않는 일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삶에 원하지 않는 광풍으로 인해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로 벼랑 끝에 서있는 느낌을 든 사람과 홍해와 같은 일들로 절망하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혹시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할지라도 한 가지 잊지 말아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처한 상황은 하나님께서 그곳까지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숨어 있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반응해야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장소라고 한다면 지금보다 더 어렵다고 할지라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자훈련 하신 예수님(39-41)

어려운 환경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황하는 제자들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모습을 우리들에게 교훈하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능력해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원망과 불평에도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사역을 이루어 가십니다.

 

39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39-41)

 

위험 속에 빠진 제자들은 예수님께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곧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셔서 바다와 바람을 꾸짖으시고 이내 바람도 그치고 바다가 잠잠해졌습니다.

 

(1) 제자들을 꾸짖는 예수님(39-40)

 

제자들은 자신의 처지를 돌보지 않고 주무시는 주님을 향해 불평을 쏟아내는 제자들 때문에 주님은 잠에서 깨어나십니다. 잠에서 깨어나 행하신 예수님의 행위를 마가는 특징적으로 묘사해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바람을 꾸짖으셨습니다. 여기서 ‘꾸짖으셨다’라는 표현은 피조 세계의 주인이며 창조주이신 예수님의 권위를 암시합니다. 물론 마가복음은 요한복음 1장처럼 로고스이신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창조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셨다고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피조 세계에 관여하고 다스리신다는 말만 직접적으로 하지 않을 뿐 실제로는 예수님께서는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꾸짖자 바람이 그칩니다. 또한 바다를 향해서 잠잠하고 고요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바다마저 오용해졌습니다. 피조물은 주인의 명령에 즉시 반응하는 종과 같이 묘사됩니다. 이 두 표현은 1:25에 나오는 축사의 말과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악한 세력을 상대하듯 바람과 바다를 꾸짖고 조용해지라고 명령하십니다. 실제로 대자연의 세계가 악한 세력으로 묘사되는 것은 제2성전기 유대교에서 종종 발견됩니다(제2에녹서 40:9;43:1-3; 제4에스라 6:41-42; 희년서 2:2 등).

 

지금 예수님께서 행하는 모든 행위들은 41절에서 제기될 ‘저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세계관 속에서 바다와 파도를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심에 틀림없습니다(시편 89:8-9).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에게서만 기대할 수 있는 모습을 보았기에 놀랐을 것입니다.

마가를 비롯한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자신들의 백성을 향해서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하셨던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저자의 구체적인 상황 묘사는 ‘예수님은 도대체 누구신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상징이며 회화적이지만 매우 노골적인 방식으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40절에서 이제 예수님의 관심은 제자들을 향합니다. 요동하던 제자들을 향해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 없는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광풍을 만나자 그들의 근본적인 믿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무서워하고 두려워한 것은 직전에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쳐주셨는데도 여전히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앞 단락에서 자신의 인격과 사역 안에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여전히 그 가르침에 합당한 반응을 보이는 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겨내야 했지만, 작은 믿음마저 광풍 앞에서 포기하고 말아야 합니다. 바람과 파도를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본 제자들은 놀라워하며, 예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강한 바람과 거친 파도 속에서도 편안히 주무셨으며, 또 광풍이 불 때 말씀으로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감당하실 수 없는 상황은 없습니다. 혹시 감당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 나가서 하나님의 힘을 공급받길 바랍니다. 흥미롭게도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로마로 가는 길에 광풍을 만났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을 위로하는 위로자 역할을 담당합니다.

 

(2) 제자들의 반응(41)

 

광풍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아는 것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관건이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꾸짖음에 바람과 바다마저 순종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구약에서 바다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는 표현이었습니다(욥기 38:8-11; 시편 65:5-8; 89:8-9 등). 이러한 구역 본문의 빛에서 이 본문이 갖는 함의는 혁명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틀림없이 메시아지만 메시아를 넘어서는 정체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신 것처럼 자신의 백성에게 돌아올 것이라 말씀하셨던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광풍의 시험을 허락하심으로써 제자들이 예수님 자신에 대해 다시 한 번 질문하게 하십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대상은 광풍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당신에게 허락된 문제들을 통해 무엇을 두려워하고 계십니까? 두려움의 대상은 환경이나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당신에게 허락하신 문제는 자신뿐 아니라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한 지식과 관계를 돌아보게 합니다.

  

홍해처럼 가로막힌 장애물 앞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당신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홍해를 가르시며 마른 땅같이 걷게 하신 것처럼 당신도 걷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믿음이 중요합니다. 어려운 상황을 당신의 경험을 통해 해결하려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해결이 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십니까?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렇게 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나오시길 바랍니다. 어려움을 만날 때 어려워하거나 두려워한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은 믿음이 없는 자라고 책망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선장으로 모시고 믿음의 항해를 떠납니다. 선장에 인도하심을 받으면 우리는 평화롭게 운항할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들으시고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도움을 구할 때 예수님께서 당신을 도와주십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보호해 주시는 예수님을 믿고 흔들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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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4-03)


하나님 나라를 가르친 비유(3)

마가복음 4장 26-34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자동차가 들어왔을 그 이름을 말없는 마차라고 불렀습니다왜냐하면 사람들이 마차는 알았지만자동차는 몰랐기 때문입니다당시에 최신형 마차에 말이 없는 것은 대단한 이슈가 되었습니다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시는 이유도 그와 같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농부가 뿌린 씨앗은 스스로 땅에서 자라나듯이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께서 성장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장은 작은 겨자씨가 땅에 뿌려져 크게 자라듯 처음과 다르게 큰 나무처럼 성장할 것입니다. 그 영향력이 대단할 것입니다. 앞에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는 인간의 책임을 강조했다면, 이 두 비유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씨앗의 성장과 같은 하나님 나라(26-29)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포였습니다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중심도 항상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선지자들과 하나님의 일군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나가시길 원하십니다.

 

26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26-29)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땅에 씨를 뿌림과 같다고 비유하셨습니다이 비유는 농부는 씨를 뿌리지만 그것을 성장하게 할 순 없습니다땅에서 싹이 나고 이삭이 자라고 그리고 충실한 곡식이 되는 것을 지켜볼 뿐입니다그래서 밭에 뿌려진 씨앗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싹이 나고 자라 때가 되면 추수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도 이와 같습니다씨가 뿌려져서 성장하듯이 조용히 시작되며 점점 성장해 갑니다하나님 나라의 진행도 인간의 능력과 지혜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신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장시켜 나가실 것입니다농부가 곡식이 성장해 가는 과정을 모르듯이우리들도 하나님 나라가 성장해 가는 것을 매번 확인할 수 없습니다하지만 인간의 생각과 계산논리와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 나라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습니다그리고 최후 승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하나님 나라의 시작이 있으면 그 완성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성장을 에베소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신앙의 열매는 사람의 노력으로 열매가 맺는 것이 아닙니다다만 성도들에게 복음인 생명이 안에 거함으로 열매는 자연스럽게 맺습니다절대로 자신의 믿음에 대한 성장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당신에게도 복음의 씨가 뿌려졌다면 하나님께서 영적인 성장시키길 것입니다언제 어떻게 자라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언젠가는 싹이 나고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사람들은 열매가 맺기까지 인내가 필요합니다인내가 없이는 열매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영적으로 성장하고 있습니까당신을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겨자씨와 같은 하나님 나라(30-32)

생명은 언제나 성장합니다생명은 씨의 크기가 문제가 아닙니다예수님께서는 복음의 시작이 세상처럼 광대하거나 위대한 것은 아닙니다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매우 작게 시작된 복음이지만 그의 결과를 설명하십니다.

 

30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31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32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30-32)

 

예수님께서는 또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셨습니다이는 겨자씨가 매우 작아서 나무처럼 크게 자랄 것이라고 상상하기 어렵습니다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보면매우 미약해 보이기 때문에 창대할 것이라고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하지만 처음에는 작고 미약해 보잘것없어 보여도 나중에는 크고 강한 나라가 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로마 제국의 수도가 아닌 식민지 이스라엘의 한 촌 갈릴리의 젊은 목수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그의 제자들은 어부와 세리들로 구성되어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시작된 복음은 미래가 매우 미약해서 불안해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보잘것없었지만 이후에 그들의 복음 사역은 놀라운 결과를 낳았습니다 보잘것없던 복음이 한 세기가 지나서는 로마 제국의 수도까지 퍼졌습니다그리고 지금은 그 말씀대로 온 세상 곳곳에서 예수님의 통치를 받으며 복종하는 자들이 그분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개인적인 영적 성장이나 교회 성장에 대해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지금은 부족해 보이지만 때가 되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기다리다 보면 성장해서 삼 십배육십 배 그리고 백배의 열매를 거둘 때가 있을 것입니다그리고 복음 전파에 대한 열매도 마찬가지입니다낙망하지 않고 씨를 뿌리면 놀라운 열매를 맺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연약하고 부족해 보일 수 있겠지만작은 믿음이라도 정말 소중합니다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돌아온 적이 있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그 겨자씨만한 믿음이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20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태복음 17:20)

 

그러므로 자신의 믿음이 작다고 실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부족하다고 포기하지 마시길 바랍니다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고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지금은 볼품없지만 그 믿음을 가지면나중에는 큰 나무처럼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산을 옮길 뿐만 믿음으로 자랄 것입니다지금은 아주 미미한 겨자씨만한 믿음을 자졌다 할지라도 주님의 큰 나무와 같이 수많은 사람들을 세울 재목(材木)으로 세우실 것입니다.

오늘의 수고가 매우 미약해 보일 수 있지만점점 성장해서 새들이 깃들 수 있도록 큰 영향력을 미칠 것입니다그래서 미래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횐경에 절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영적 부흥 운동은 겨자씨와 같이 작은 곳에서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의 회심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습니다그래서 부흥의 불길로 타오릅니다교회의 성장도 당신의 작은 헌신부터 시작한 것입니다하나님 나라는 규모로 성패를 나누는 세상이 아닙니다충성과 순종을 보십니다하나님의 기준에 따라우리도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비유로 가르쳐 주신 예수님(33-34)

우리들은 삶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 순 없습니다그 결과 때로는 방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할 때는 방황해야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가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33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34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33-34)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랐지만제자들에게도 여전히 비유는 수수께끼와 같은 것이었습니다그래서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따로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더 잘 준비시켜 자신의 일을 맡기기 위해서였습니다더 잘 준비시켜 자신의 일을 맡기기 위해서였습니다예수님을 배울 기회를 얻었거든 더 잘 순종하고 더 오래도록 충성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 주시고 설명해 주십니다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많은 비유를 사용해서 가르쳐 주셨고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리들은 복음의 능력을 믿습니다복음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면 언젠가는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그러기 때문에 지금 부족한 부분에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주님께서 함께하시면 승리하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최후까지 인내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작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작은 헌신과 섬김을 통해 큰일을 행하실 것입니다그 하나님을 기대하시길 바랍니다그리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날마다 복음의 씨를 뿌리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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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4-02)


하나님 나라를 가르친 비유(2)

마가복음 4장 13-25


 

하나님의 말씀이 씨라면 열매는 그 말씀으로 인한 사람들의 삶의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사탄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되는 것을 싫어합니다그 때문에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막고 방해하고 있습니다그리고 더 나가서 말씀에 순종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당신에게도 그런 사탄의 방해 현상은 없습니까?

 

  • 예수님께서는 비유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그 중에 네 종류의 땅에 떨어진 씨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통해 예수님은 성도들이 좋은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이어서 등불의 비유로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세상에 확실하게 드러나도록 전파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후에 말씀을 듣는 태도의 중요성을 설명하십니다.

 

씨 뿌린 자의 비유에 대한 설명(13-20)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우리들이 어떤 영적 상태에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십니다예수님은 항상 일상 생활 속에서 접할 수 있는 사물들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들을 비유를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본문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설명해주십니다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하셨던 모든 비유들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기초적인 비유입니다.

 

13또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14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13-14)

 

예수님께서 하셨던 모든 비유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비유이기 때문입니다이 비유를 먼저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씨앗이 땅에 떨어지면싹이 나고 열매를 맺듯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 있으면 그 마지막에는 완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작은 출발이 큰 완성을 이루기까지 성숙한 과정이 필요합니다어떤 일이든지 작게 출발하지만 미래에 큰 완성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일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원리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현실에 완주하지 않고 미래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것입니다작은 출발이 미래에 큰 꿈을 이루는 성도들로 살아간다면 희망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땅에 뿌려진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각종 땅들은 말씀에 대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의 심령을 의미합니다하나님의 말씀은 전파되어지지만 때로는 배척을 받기도 합니다그러나 결국에는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어 집니다그것은 씨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심령에 따라 달라집니다그래서 본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해 주었을 때사람들의 다양한 반응들을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1) 길가에 뿌려진 씨

 

15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15)

 

길가의 땅을 의미하는 사람은 딱딱한 마음을 자신 사람입니다아예 처음부터 말씀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말씀이 전파되어지지만 사탄이 말씀을 빼앗고 맙니다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것과 같습니다(막 3:6). 그리고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치유를 부정했던 사탄의 역사과 같습니다(막 3:22).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보았습니다만그것들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가짐으로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그들은 보고 들은 것들로 예수님을 대항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받은 즉시 아무런 반응이 없거나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그래서 세상에는 항상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인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이들 때문에 박해 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2) 돌무더기에 뿌려진 씨

 

16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16-17)

 

돌무더기에 비유된 사람은 말씀을 들을 때는 처음에는 기쁨과 감격으로 듣지만마음 속 깊이 믿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길가에 뿌리진 씨보다는 오래 남습니다평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것 같습니다하지만 환란이나 박해가 닥치면 곧 믿음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랍니다그 다음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사람들과 똑같습니다(막 11:18). 주위의 환경과 변화에 따라서 춤추는 사람입니다은혜를 받을 때는 혼자 다 믿는 것처럼 행동하다가 시험이 들었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비난하는 사람들과 똑같습니다그들은 어떤 환경에 자신의 유익이 있으면 예수님의 가르침에 잘 따라 순종하다가어려움이 오면 배반하는 사람들이 돌밭에 뿌린 사람들과 같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입니다즉흥적인 사람들이 대부분 돌밭에 뿌려진 사람들처럼 반응합니다말씀에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합니다그래서 고난을 거치지 않는 믿음은 장담하거나 자신해서는 안 됩니다성도들에겐 평탄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고난은 찾아올 수 있습니다믿음을 지키면서 어떤 환경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그래서 평탄할 때더 깊이 말씀을 배우고 경험하고 말씀의 능력을 확신해야 합니다.

 

(3)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

 

18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19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18-19)

 

가시덤불에 비유된 사람은 마음속에 가시덤불과 같은 걱정과 욕심이 가득한 사람입니다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세상의 염려와 제물의 욕심이 가득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삶이 바쁜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마가복음 10장에는 부자 청년이 나옵니다(막 10:17-22). 부귀와 재물에 유혹을 받아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잘못된 선택을 하는 사람들입니다세상의 것들이 가득 차 있어서 하나님의 것들이 들어올 여유가 없다면가시밭에 뿌려진 사람들과 똑같습니다그들은 밖에서 오는 고난은 잘 견뎌내지만 내면에서 일어나는 세상 염려와 재물 유혹에 스스로 무너진 것입니다그래서 안락함과 번영이 항상 축복은 아니며 더 무서운 시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잠시 동안 말씀에 살아있긴 하지만끝까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열매가 없는 삶은 살아있는 동안 의미가 없습니다열매가 없으면 실패입니다열매는 결실입니다종종 신앙의 경륜만을 열매로 보며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4) 좋은 땅에 뿌려진 씨

 

20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20)

 

좋은 땅에 비유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말씀을 마음에 깊이 심어두어 삶에 순종함으로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외적인 환란이나 내적인 유혹을 모두 말씀으로 이기고 끝까지 살아남습니다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들을 잘 전파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 삭개오와 같은 인물입니다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변화되었다면 세상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이 좋은 땅과 같은 사람들입니다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덕을 세우지 못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이러한 시대에 좋은 땅에 심은 씨처럼풍성한 열매를 통해서 좋은 영향력을 미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씨앗들이 결실한 양이 삼십 배육십 배백배로 다르듯이제자들이 순종하여 맺는 성령의 열매들은 그들의 능력과 처지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열매를 위해 오늘도 잘 인내하고 승리하시길 바랍니다좋은 땅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마음 밭에 잘 받은 자는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난 다음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말씀에 대한 믿음의 반응을 보이는 것이 중요합니다말씀을 잘 듣는 것도 중요합니다하지만 듣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말씀의 씨가 땅에 뿌려진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라서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합니다당신은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들을 과감하게 제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그러한 것들을 이겨 내야 합니다.

 

비유를 대하는 자세(21-25)

예수님께서는 비유는 목적이 진리를 숨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있습니다비유를 듣고 마음에 새기는 사람들은 더 큰 은혜를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1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22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23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21-23)

 

하나님 나라는 지금은 숨겨 있지만 언젠가는 등불의 목적처럼 들어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등불은 등경 위에 두고서 어두움을 비추는 것이 목적입니다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드러내는데 목적이 있습니다언젠가는 반드시 하나님 나라는 성취되어갈 것입니다그러므로 믿음의 귀로 이것들을 들어야 합니다우리는 말씀을 잘 배우고 묵상하여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4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25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24-25)

 

씨를 받는 땅이 중요하듯이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받는 사람들의 태도가 중요합니다말씀에 대한 태도에 따라서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어집니다말씀을 듣고도 그것은 헤아리고만 있다면 헤아림을 받게 되어질 것입니다말씀을 겸손하게 받으면 받은 만큼 열매를 맺습니다비유를 통해 더 분명히 깨닫겠지만거부하면 비유를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그들의 삶은 더 완악해질 뿐입니다.

 

말씀이 너무 흔하거나 너무 귀해서 잘 듣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오늘 당신의 말씀을 듣는 태도를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시길 바랍니다그리고 열매 맺는 좋은 땅과 같은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사탄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하지만 좋은 영적인 사람들이 하나님의 비밀을 들었을 때에 깨닫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갑니다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좋은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하실 것입니다그들에게는 기적적인 일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일어날 것입니다어떤 말씀이든지 받아들이기 부족함이 없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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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4-01)


하나님 나라를 가르친 비유(1)

마가복음 4장 1-12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직접 설명할 수 없을 때다른 비슷한 것으로 설명합니다다른 것을 빗대어 설명한 것을 비유(比喩)’라고 합니다예수님께서는 많은 비유를 통해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특히 하나님 나라를 설명할 때는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이렇게 가르쳐야할 이유는 일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면서 비유로 시작합니다. 여러 가지 비유를 하시는데, 농사, 등경 그리고 겨자씨 등 일상에게 친숙한 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맨 먼저 네 종류의 밭을 비유로 밭에 떨어진 씨가 각기 다른 결과를 소개하면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를 밝히십니다.

 

가르치신 예수님(1-2)

예수님께서 말씀의 비유는 천국의 비밀입니다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것은 알려야할 사람들에게는 알리고몰라야할 사람들에게는 모르도록하기 위한 방법이십니다우리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대한 말씀을 모른다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예수님을 비유를 통해 가장 쉬운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셨습니다.

 

1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 2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1-2)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다시 바닷가로 가셨습니다(참조 1:16; 2:13; 3:7). 바닷가에 계신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주변에는 점점 배에 오를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바닷가는 가르침의 장소로서 집에 비해 두 가지 면에서 장점이 있었습니다첫째는 집은 공간적인 제약이 있는 반면(2:2), 바닷가는 더 넓어서 아주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습니다둘째는 먼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배를 타고 몰려오기 쉽고(3:8) 또한 가르침을 가른 곳으로 빨리 전파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르침의 장소로 바닷가를 선택하셨습니다.

 

무리가 많이 모여들자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주변에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셨습니다그리고 그들에게 비유를 통해 많은 것을 가르치셨는데그 중에 하나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3-9)

하나님 나라는 씨 뿌린 비유처럼 임한다고 소개하십니다하나님의 왕권의 통치가 임할 때 성도들이 어떤 반응을 하느냐 태도를 말씀합니다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한 심령이 되길 원한다면과거를 통해서 교훈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3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8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9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3-9)

 

먼저 예수님께서는 바닷가에 모인 무리들에게 비유가 시작되는 3절과 9절을 통해 들으라라고 촉구하십니다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실 때처럼 같은 의미를 부여합니다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말씀을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쳤던 내용이 신명기에 나타납니다.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 6:4-5)

 

이 신명기에서 들으라이스라엘아!(쉐마이스라엘!)’라고 말씀하신 다음 부분에 무슨 내용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순종하는 사람들은 복을 받고불순종하는 사람들은 화가 미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하게 귀로 듣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데까지 나아가라는 요구입니다말씀에 대한 태도는 어떤 반응을 하든지 성도들의 자유입니다하지만 그 성도들의 말씀에 대한 태도에 따라 하나님께서 내리는 화()와 복()의 갈림길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호기심의 대상이 아닙니다들은 말씀을 순종하고 실천하면 성품이 되어서 열매를 삼십 배육십 배 그리고 백 배를 수확합니다열매를 맺기까지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당시에는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릴 때에 가로질러 다니면서 뿌렸습니다농부들은 어깨에 큰 주머니를 매고 한 줌씩 씨를 집어 들고 뿌렸습니다그러기 때문에 씨가 바람에 날려서 길가나 둘 무더기가시덤불 속에 떨어졌습니다그리고 좋은 땅에도 떨어지기도 했습니다따라서 열매의 수확은 씨가 어디에 떨어지느냐에 따라서 달랐습니다.

성도들의 환경은 예나 지금이나 길가나 돌짝밭과 같고 가시나무가 가득한 환경들입니다이러한 환경 속에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그렇게 어려운 환경이라고 한단지라도 말씀의 씨는 뿌려지고 그 가운데서 열매는 맺게 되어 있습니다.

씨 뿌리는 농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의미합니다어려운 환경에서도 씨앗이 좋은 심령들에게 떨어지면 열매는 삼십 배육십 배 그리고 백 배를 맺게 될 것입니다들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백 배의 축복을 주신 것처럼당신의 삶 가운데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좋은 열매 맺는 좋은 밭이 되길 원한다면좋은 마음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묵은 심령을 새로운 좋은 심령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시편 기자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10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시편 51:10-13)

 

정직한 영혼에 말씀의 열매가 있습니다그래서 말씀을 듣는 자세가 중요합니다어두운 세상에 물들려진 심령이나더러운 죄악으로 물들려진 심령으로 그리고 자신의 생각으로 가득한 가운데 말씀을 받으면 말씀을 왜곡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9)고 말씀하셨습니다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받아 들릴 믿음의 마음이 필요합니다믿음의 마음이 준비가 된 사람들은 마음에 옥토가 되어서주님의 비유를 알아듣고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어집니다그래서 주님의 마음을 아는 자들은 옥토에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그들은 주님의 말씀과 응답에 목말라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하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목회자와 관계에서 시험이 들면자신의 마음이 닫히고 굳어집니다그래서 목사님이 아무리 좋은 말씀을 해도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그것은 누구에 손해입니까자신의 손해가 됩니다당신이 목사님을 사랑하고 존경한다면목사님이 어떤 말씀을 해도 자신의 심령에 감사함으로 말씀이 깊이 심어지고그 말씀이 자신의 삶을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똑같은 씨지만 어떤 땅에 떨어지느냐에 따라서 결과도 달라지듯이똑같은 말씀이라도 어떤 마음으로 듣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확연히 달라집니다그러므로 말씀 앞에서는 당신의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당신의 심령은 좋은 땅과 같이 준비되어 있길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비유(10-12)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어지만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그래서 조용한 시간에 예수님께 무슨 내용인지 묻습니다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10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 11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12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10-12)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그래서 무리들이 없을 때제자들은 조용한 시간에 왜 비유로 말씀하셨는지 그리고 씨를 뿌리는 비유의 의미가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물었습니다이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의 특권입니다성경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와 같이 조용한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묵상의 시간을 통해 설명해주시고 이해되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그래야 말씀을 통한 열매를 거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보여주셨습니다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만 보여주시고 깨닫게 하셨습니다그래야만 알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기에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조카 롯이 살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서도 먼저 말씀하셨습니다아브라함은 마음에 걸려서 하나님께 의인이 있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간구합니다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킬 때아브라함을 기억하면서 롯을 구출시키셨습니다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려 주셨습니다비유를 통해 가르치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하셨습니다당신은 하나님 나라에 얼마나 깊이 알고 계십니까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예수님께 물어보시길 바랍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 반응은 다양했습니다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주님은 우리가 말씀에 진실하게 반응하고 순종함으로 삶이 변화하기를 기대하십니다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말씀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돌아보아야 합니다어떤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말씀을 지키고 우리 인격과 삶으로 말씀의 씨를 뿌리는 충성스러운 자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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