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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5-01)


 광인을 온전케 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5장 1-20절


 

요즘 우리 주변에는 중독으로 삶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알콜 중독, 마약 중독, 도박 중독, 게임 중독 그리고 음란 중독까지 다양합니다. 중독자들은 자신은 스스로 절제하려고 하지만 할 수 없는 것을 봅니다. 그들의 어려움은 마음은 끊고 싶지만, 끊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중독 증세는 독이 되어서 자신의 삶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오늘도 사탄은 중독을 통해 사람들을 무엇인가에 사로잡혀서 인생다운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도록 인생들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광풍’을 말씀으로 잔잔케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천지만물을 다스린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거라사 지방에 도착하자 짐승처럼 살아가는 귀신 들린 ‘광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축사하고, 그 귀신을 돼지 떼에게 들어가서 바다에 빠져 죽은 사건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다시 영적인 세계까지 통치하신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거라사에 도착하신 예수님(1-5)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영원토록 교제하면서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타락한 후에 하나님의 형상을 잊어버리고 귀신의 형상대로 어두운 인생길을 살아갑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형상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거라사인의 광인과 같습니다.

 

1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3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1-5)

 

예수님의 일행은 전날에도 많은 사역 때문에 피곤했고, 특히, 갈릴리 바다를 건너면서 광풍 때문에 밤새도록 고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광풍이 부는 바다를 잠잠케 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그 충격은 그들에게 진한 여운의 질문,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잠잠하는가?’라는 질문 하나를 남겼습니다.

 

본문에서는 귀신들린 광인을 고쳐주십니다. 이것을 통해 보여주신 기적에 대해 상반된 반응을 보여주십니다. 그 반응들 속에서 우리의 신앙을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는 큰 바람과 파도를 뚫고 도착한 곳은, 갈릴리 바다 건너편 지방은 거라사인(Gerasenes)들이 사는 땅이었습니다. 이 장면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이방지역에 들어가서 사역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앞으로 벌어질 일들과 신학적으로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세주일 뿐만 아니라 새 이스라엘의 대표로 살아가고 계십니다.

앞에서 광풍을 잠잠케 한 사건은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사건을 재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첫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뒤쫓아 오는 바로의 군대를 홍해에 수장시켰습니다. 그 사건이 본문에서 재현됩니다. 예수님께서 쫓아낸 귀신의 이름이 다름 아닌 ‘군대’였습니다. 이 ‘군대’라는 단어 ‘레이온’은 3,000-6,000명 정도에 이르는 로마 군대의 단위를 말합니다. 이런 엄청난 귀신이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서 바다 속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곳에는 예수님의 일행들을 편하게 쉴 수 있는 안식할 장소나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가 기다리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러운 귀신 들인 사람이 예수님의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의 군대처럼 그들도 수장되었습니다. 첫 출애굽을 이끄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셨다면, 이제 영적인 새 출애굽을 이끄실 분이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이방 땅 거라사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맞이한 사람은 놀랍게도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그는 아무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세력이었습니다. 쇠사슬로 매면 끊어버렸고, 고랑은 깨뜨려 버렸습니다. 그럴 수 있는 능력은 그 사람 안에 엄청나게 많은 귀신이 들어 있어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더러운 귀신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귀신 들린 사람은 죽음을 상징하는 무덤들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혼자 살았고, 혼자처럼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5절에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고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산에서나 들에서 항상 소리를 지릅니다.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습니다. 그리고 돌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15절에서 ‘옷을 입었다’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평상시에는 옷을 벗고 살았던 것처럼 보입니다. 아주 강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수치도 모른 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보기 좋았던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이것이 죄 아래에 맺어 있는 인간의 실존입니다. 타인에게는 강하지만 사실 자기 하나 추스르지 못하는 존재가 하나님을 떠난 인간입니다.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정도로 자기 세계가 강한 사람, 혼자 밖에 모른 사람, 그는 무덤 곁에서 이미 죽은 자나 다름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절대 하나님을 떠나는 성공을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난 불안하고 두려운 실존을 감추려고 세상의 것(옷, 명예, 집 등)으로 혼자 밖에 모르는 사람, 그는 이미 무덤 곁에서 죽은 자나 다름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절대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부요나 성공을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난 불안한 실존을 외모로 꾸미려는 것뿐입니다.

 

영적인 세력은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강력합니다. 사탄은 이렇게 강력한 힘을 좋지 못한 곳에 사용하여 자신이나 타인을 파괴하는데 사용합니다. 이것이 죄로 물든 인간의 근본 모습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떠난 결과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정욕을 따라 살아갑니다. 욕심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하나님께서 내어버려 두시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그들의 삶은 짐승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참고 로마서 1장). 마귀가 하는 일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파괴하는 일을 합니다. 인격을 파괴시키고 비참하게 만듭니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해쳐서 결국 파괴와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오늘날 사탄에 사로잡힌 이단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사역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 사람들끼리의 관계를 파괴시키며 서로 불신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새로 들어온 형제들을 먼저 아낌없이 사랑하기 보다는, 일단은 한 번 정도는 의심에 눈초리로 살펴본 후에 받아들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사랑해야할 형제들까지 어떻게 먼저 불신을 할 있겠습니까! 사탄의 힘은 누구도 통제(제어)할 수 없습니다. 영적 세력은 물리적 힘보다 훨씬 더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귀신과 대면하신 예수님(6-8) 

영적 세계는 두 나라가 항상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어두움의 권세를 가진 귀신과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영적 전쟁에 대해 어떻게 진행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사탄에 의해 파괴된 세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6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8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6-8)

 

귀신은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며 예수님을 극진히 환영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알아보지 못한 예수님을 귀신이 먼저 알아보고 경배하였습니다. 귀신은 어떤 사람들보다 예수님을 먼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왜 왔는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한다고 믿음은 아닙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반대하고 훼방하는 존재였습니다.

 

이렇게 저 자세로 나온 귀신의 본색은 서서히 들어나고 있습니다. 귀신은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7)라고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합니다. 귀신 스스로는 한 인간을 완전히 파괴하고 괴롭게 해놓고, 이제 예수님께서 자신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요구하다니 말입니다. 강한 자 앞에서는 약하고, 약한 자 앞에서는 강한 것이 사단에서 사로잡힌 이 세상에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귀신에게 파괴된 인생을 불쌍히 보셨습니다. 그리고 창조주의 권세로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8)고 명하셨습니다. 아무리 강한 귀신이라고 할지라도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주관하신 예수님의 권세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파괴된 사람은 누구라도 예수님 앞에 서면 온전하게 회복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동일하게 창조주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름으로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고 회복시키고 계십니다. 사탄에 의해 파괴된 영혼들은 예수님으로 온전하게 회복되는 능력이 있습니다. 주변에 중독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변화시킬 방법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생을 바르게 살 수 없고 대부분 인생을 파괴시켜 가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면 창조주이시며 치유자이신 예수님께 완전히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필요합니다. 순종하는 삶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의 신앙고백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짐승처럼 파괴시켜놓은 귀신의 고백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사랑이 없는 지식, 믿음이 없는 형식적인 고백 그리고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존재하지 않는 예배 등과 같은 영적인 형식들은 받으시지 않습니다.

 

돼지 때를 몰살한 귀신(9-13)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바다에서 광풍을 말씀으로 잔잔케 하심으로 친지를 다스리신 분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가라사에서 귀신 들린 사람의 귀신을 축사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세계까지도 주인임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면서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 영혼을 회복시켜 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점차적으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9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10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11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12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13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9-13)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향해 ‘네 이름이 무엇이냐?’(9)라고 묻습니다. 이름을 묻는 것은 자신이 더 강한 자란 것을 재확인하는 통상적인 방법입니다. 놀랍게 그 귀신은 자신을 ‘군대’ 귀신이라고 소개했습니다. 한 사람에게 들어간 귀신이 ‘레기온’의 규모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귀신의 힘은 막강하고, 막강한 힘으로 사람들의 삶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힘은 일반적인 사람의 능력으로는 그 귀신을 대항하기란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모든 세상의 힘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귀신을 제압하고 쫓는 권세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아무리 강력한 귀신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권세 앞에서 굴복하여 나아갈 것입니다.

 

귀신은 자신의 신분이 들어나자, 마침 산 곁에서 먹고 있는 돼지 떼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12)라고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허락하시자, 더러운 귀신들이 부정한 짐승으로 간주되었던 그 돼지 떼에게 들어갔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2000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혼돈의 공간인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다 몰살되고 맙니다. 귀신은 예수님께서 허락하지 않는 일까지 가맹한 것입니다. 귀신은 처음부터 예수님께 순종할 의도가 없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기적을 보고나 듣거나 알게 된 사람들은 다양하게 반응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출애굽 때 홍해가 갈라지고 뒤쫓던 애굽 왕 바로의 부대가 그 홍해에 수장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출애굽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 때문에 바람과 바다가 잠잠해진 후(4:35-41), 그 바다에 ‘군대’ 귀신을 바다에 수장시키고 계십니다.

 

귀신을 쫓아냄에 대한 반응(14-20)

아무리 악의 세력이 여러 모양으로 신앙을 뒤흔들더라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를 통해 회복되어 가는 사역을 막을 순 없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14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15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16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17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18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20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14-20)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를 알리기 위해 사역하셨습니다. 광풍을 통해 광인의 사역을 통해서도,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지만, 그 기적을 보고 사람들은 서로 믿음과 불신의 반응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1) 부정적인 반응(14-17)

 

거라사의 군대 귀신을 통해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서, 2,000마리가 넘는 수많은 돼지 떼가 바다에 몰살당해 죽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재물의 손해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귀신 들렸던 자는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15)라고 소개합니다.

 

이 과정에서 돼지 떼의 주인들은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돼지를 치던 자들이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 소식을 주인들이 이 관경을 보기 위하여 달려왔습니다. 그들에게는 돼지 떼에 대한 시험의 순간입니다. 그들이 도착해서 보니, 전에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 곁에서 얌전하게 앉아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놀랐을 뿐만 아니라 두려웠습니다.

그들 앞에서는 두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건이 놓여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 때문에 귀신 들린 자가 온전해졌습니다. 둘째는 예수님 때문에 돼지 2,000마리가 수장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는 좋은 현상이고, 다른 하나는 불행한 현상입니다. 그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하나는 죽은 것이 다른 없던 사람을 온전하게 새 창조하신 예수님, 귀신을 쫓아내신 그 예수님을 믿을 것인지, 아니면, 돼지 2000마리나 잃게 만든 요주의 인물을 배척할 것인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17)고 우리의 기대와는 정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반대로 예수님을 자기 지역에서 떠나시길 간청했습니다. 경제적인 관심사 하나 때문에 예수님을 쫓아내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찾은 것보다는 잃어버린 돼지로 인해 기쁘지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고도 오히려 더 많은 재산이 없어질 걸 더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조용히 떠나 주시길 원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손해를 본 재물에 있었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한 영혼을 돌아보셨습니다. 종종 사람들은 물질에 눈이 멀어서 한 영혼의 귀중성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제자들에게 물질과 영혼 중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가르치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권세를 분명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2) 긍정적인 반응(18-20)

 

돼지 떼 주인은 예수님을 거부했지만, 귀신 들렸던 사람은 순한 양처럼 변했습니다. 귀신 축사를 받은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있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의 수종자가 되겠다는 제안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19)고 명령하십니다. 그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서 순종합니다. 가족은 물론이고 데가볼리 지역을 두루 다니면서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일을 전했습니다. 그에게 선교지는 자신의 집과 지역이었습니다. 그 데가볼리 지역은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다니면서 예수님의 놀라운 구원의 사역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사실을 듣는 놀랐습니다.

 

불안 속에 빠져 있던 한 인생이, 이제는 사람들의 감탄과 감동을 주는 존재로 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이방 땅에 최초의 선교사로 세우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이 아니라 귀신 들렸던 사람이 이방인을 향한 첫 번째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함께 있고 따라 다니는 것만 제자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제자는 자신에게 주신 사명과 선교지에서 최선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주신 은혜를 체험하고, 자신의 사명을 순종하는 사람이 진정한 제자임을 가르칩니다. 오늘도 하나님 나라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간증하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탐욕의 종이 되었던 비참한 삶에서 구원해주셨습니다. 약하고 비천했지만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셨습니다. 귀신으로부터 치유 받은 사람들을 통해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육신에 연약한 다른 지체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며, 그들을 예수 앞으로 나아서 온전하게 치유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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