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마가복음(02-02)


 죄 사함을 보여주신 예수님

마가복음 2장 13-28절


 

하나님을 만난 경험은 사람마다 모두 다릅니다. 당신이 만난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라고 분명하게 소개할 수 있습니까? 신앙 간증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잘 구성되어 있어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어둠 속에 삶, 예수님을 만날 때의 변화된 과정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삶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롭게 거듭난 삶은 과거의 삶에 분명한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새로운 문을 여십니다. 이제 새로운 문으로 들어온 사람과 거부한 사람을 설명합니다. 먼저 세리를 제자로 부르셨고, 세리와 함께 집에서 잡으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율법에 매인 사람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어 비난을 받았습니다. 또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가면서 이삭을 꺾었던 일에 대해 또 안식에 대한 문제로 제기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예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임함을 입증하셨습니다.

 

레위를 부르신 예수님(13-17)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평이 좋지 않는 사람과는 같이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외모로 보고 판단하는 선입견(先入見)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외모를 보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중심으로 살펴보셨습니다. 그래서 종종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오해를 사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13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5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16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13-17)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면 누구나 환영을 받을 수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 가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지만, 반대로 그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고 증오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1) 새로운 제자를 부르심(13-14)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 시내로 들어가시면서, 세관을 지나치셨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인 레위라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라는 사람의 마음의 눈에서 그 사람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14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14)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베드로와 안드레처럼, 야고보와 요한처럼,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곧 바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죄인 취급을 받았지만, 누구보다도 넉넉하게 살 수 있었던 세리라는 직업을 버리고 가난하지만 떳떳하고 자유롭게 사랑 받으면서 인간답게 대접받을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레위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집에서 잔치를 배설하고 친구들까지 초청하였습니다. 공동체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하며 살던 친구들인 동료 친구들을 초청한 것입니다. 당시 세리들은 칭찬 받거나 존경받은 직업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반대로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멸시와 혐오에 대상이었습니다. 심지어는 로마 정부에 협조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 매국노로 여겼던 사람들입니다. 그들과 상대하여 얻는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과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도 죄인을 용서하시고 받아주신 자비의 사람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곳은 순식간에 회개와 사죄가 선포되는 부흥회 자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들을 보셨을 때, 은혜와 긍휼이 필요한 죄인일 뿐이었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러한 죄인들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므로 유대인들이 쌓았던 정결법의 담을 헐어버리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만든 부정과 정결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다시 쌓았던 것입니다.

 

(2) 새로운 시대의 가치관(15-17)

 

하지만 그들의 기쁨을 멸시하고 증오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유대사회는 사람들을 구분했습니다. 그 당시에 죄인들과 세리들과 같이 한 식탁에 앉은 것은 불경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바리새인들에게 불온한 사람으로 증오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16)라고 단지를 겁니다. 그들에게 경건한 사람은 세리와 죄인들과 상종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옷깃만 쓰처도 부정해진다고 믿었습니다. 사람들이라면 그럴 수 있지만, 예수님을 다르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은혜와 구원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그들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7)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기들은 건강하고 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죄를 회개할 필요도 없고, 구원 받을 필요도 없고, 메시가 오시면 가장 먼저 축복을 받고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자기 동족 유대인들을 비판하고 잘못을 지적하고 판단하는 것 그것이 그들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죄인인 레위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지만, 의인이라고 자부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메시아를 못 알아보고 대적했습니다. 그들이야 말로 회개해야 될 진짜 죄인이고 병든 자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세리인 레위가 바로 우리에게 마태복음을 기록한 세리 마태로 알려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 마태와 친구들인 같은 사람들을 환영하기보다는, 사람들이 멸시하는 사람들을 무시할 때, 예수님께서는 큰 인기를 얻으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의 인기와 평판보다도 자신이 이 세상에 보냄 받은 사명을 위해서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인은 실제적인 의인이 아니라 ‘자칭 의인’을 지칭한 것입니다(참고 누가복음 7:36-47).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이 치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예수님 앞에 나오면,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변화시켜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건설은 회개와 믿음으로 이루어진 나라임을 보여줍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문제를 제기하는 데 익숙했습니다. 혹시 당신도 다른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기보다는 비판하는 데 익숙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모든 행동을 이해하셨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차별 없는 은혜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차별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실천해야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차별 없이 하나님 나라의 일군으로 삼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 다양한 사람들을 부르셔서 하나님 나라에 확장하는 일에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차별을 두고 있다면, 예수님의 뜻과 반대되는 길로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 대한 선입관을 버리고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금식에 대한 논쟁하신 예수님(18-22)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이 왕을 인정하고 왕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새로운 가치관과 삶의 방식, 새로운 인생 목표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진정한 새로운 삶입니다. 바울도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롭게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라고 말했습니다. 새 날이 새로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새롭게 됩니다.

 

18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9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1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18-22)

 

세리의 집에서 만찬에 초대되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있을 때, 바리새인들이 요한의 제자들과 함께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한 번 대속제일에 금식을 했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을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했습니다. 하지만 금식했다고 자신들이 더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문제였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금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 왔습니다. 이 일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증거를 제시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평할 때, 세리와 죄인 친구며,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못마땅한 것으로 평가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라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이것은 과거의 금식과 경건 생활에 대한 관습의 문제였습니다. 그 당시 유대 종교에는 세 가지 관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구제, 다음은 기도이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금식이었습니다. 이것을 그들의 경건 생활에 판단 기준이었습니다. 과거의 규정을 지키지 않은 제자들의 행동을 문제를 삼았던 것입니다.

 

(1) 혼인잔치 비유(19-20)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예를 들어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혼인잔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도 절대로 금식을 혼인날과 겹치지 않도록 했습니다. 오히려 실컷 먹고 마시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나 신랑을 잃을 때가 올 텐데, 그 때는 금식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신랑에 비유하고 이스라엘을 신부에 비유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신랑으로 이스라엘을 신부로 비유한 것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음란한 신부 이스라엘이 우상 신랑과 바람이 나서, 신랑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부부관계가 깨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신부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다시 보냈던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라 그 구원에 대해 감사하고 기뻐하고 잔치할 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가 올 때인데 그 때는 금식해야 합니다.

 

(2) 새로운 부대의 비유(21-22)

 

원래 포도주 부대는 염소가죽으로 만들었습니다. 낡은 부대는 신축성이 떨어져, 새 포도주를 담으면 가스 압력 때문에 떠져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21)라고 말씀하십니다. 새 부대와 같은 풍요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왔는데, 옛 것만 고집하고 그 나라를 영접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참된 종교는 의식 같은 종교 행위로 자기 의를 과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겸허하게 인격적으로 신랑 예수님을 영접하며 그 분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찌든 우리 생각과 가치관을 버리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 나라를 만끽할 수 없고, 예수님께서 우리에 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자신만 아니라 공동체도 예수님의 복음을 담을만한 열린 마음과 겸허한 마음으로 늘 성령의 역사를 기다려야 합니다.

 

회개는 과거의 잘못된 삶들을 버림 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생사가 달린 문제라도 버림으로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물을 세리 테이블 그리고 아버지까지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과거를 돌아보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62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2)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세 가지를 통해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신랑의 비유, 생베 조간의 비유 그리고 새 포도주와 새 부대의 비유를 통해서 종교 지도자들에 잘못된 생각에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결혼식 잔치를 예로 들면서 금식은 필요할 때에 정당한 이유로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사역 상황이 메시아 잔치 상황이기에 지금은 금식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점을 밝히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22)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는 옛 시대를 ‘헌 가죽 부대’와 ‘낡은 옷’으로 비유하고, 새 시대는 ‘새 포도주’와 ‘새 부대’ 그리고 ‘생베 주각’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옛 시대의 방법으로 살았다면, 새로운 시대는 비통에 금식이 아니라 잔치와 같은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야 합니다. 새 시대에 맞은 행동이 요구된 것입니다. 새로운 전환의 배움에 겸손한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새 포도주를 과거의 낡은 율법의 부대에 가두어 둘 수 없었습니다. 과거에 것으론 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부대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거나 새로운 시대를 읽어야 될 때가 있습니다. 옛날 방법만 고집한다면 세상을 쉽게 다가갈 수 없습니다. 이 시대에 걸맞은 행동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기독교가 이 시대에 좋은 영향력을 미치고 못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 시대를 보는 안목이 부족해서 기독교가 홀대 받고 있습니다. 세상에 기독교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어려움이 이런 부분입니다. 이런 것들을 잘 생각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안식일에 대한 논쟁하신 예수님(23-28)

하나님 나라는 과거에 억매인 나라가 아니라 아닌 새로운 나라입니다. 과거의 잘못된 제도로부터 회개이며, 잘못된 형식적인 종교로부터 회개입니다. 잘못된 생활에 매여 있으면서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는 바리새인의 어리석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종교는 생명이 빠진 형식에 집착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것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마음은 가물어 간 것입니다. 그곳에 새로운 단비를 부어주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23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24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25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6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27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23-28)

 

예수님께서는 새 시대의 특징으로 한 가지 더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안식’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안식의 나라이고, 구원은 안식을 얻는 안식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안식일에 대한 논쟁입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가던 중 이삭을 꺾어 먹었습니다. 이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안식일 규례와 관련하여 문제를 제기 합니다. 바리새인들의 법으로 치면, 그것은 추수행위고 탈곡행위로 안식일을 어기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일행이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제단 진설병(빵)을 먹어 던 일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사무엘상 21:1-6). 이러한 일도 문제가 되지 않았던 예를 통해 반박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이것은 안식일의 제도나 규례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주인도 정죄하지 않는 일을 바리새인들이 정죄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39가지의 할라카라든지 234가지의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이 규례들을 지키도록 요구하였습니다. 이것은 안식일에 사람들을 노예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새 시대에는 안식일 노예의 날이 아니라 축복의 날로 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 법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장차 메시아를 보내서 죄와 사망 아래서 안식을 잃어버린 인류에게 태초의 안식을 회복시켜 주려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 메시아가 왔고, 그 메시아 안에 있는 제자들에게는 모든 날이 안식일입니다. 그래서 ‘인자는 안식일에 주인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성도들이 쉬고 있을 때 무능하다고 말합니다. 끊임없이 일하고 생산하고 성취해야 잘한다고 칭찬합니다. 결국에서는 쉬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하다가 죽게 됩니다. 죽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처럼 죽을 만큼 힘들게 일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시러 오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처럼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지만, 속은 썩어 문드러진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던 제자의 삶처럼, 우리들도 그러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초청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