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마가복음(01-03)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증거들

마가복음 1장 21-34절


 

‘동상이몽(同床異夢)’이란 말은 같은 침대에 잠을 자더라도 각자 다른 꿈을 꾼다는 말입니다. 같은 말을 들어도 각자 다르게 해석합니다. 같은 일을 경험해도 배우는 교훈이 서로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왕으로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분의 사명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고난 받는 메시아요, 둘째는 영광 받는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은 영광 받는 아들로서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결과로 사단의 세력은 물러가고, 어두움에 세력이 떠나가고, 온갖 사망의 증상들이 해결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 먼저 예수님의 사역을 정리해 보면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가르침(21) 악한 영들을 축사하심(23-27) 그리고 복음 전도(35-45)가 중요한 사역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사역을 계속 진행하고 계십니다.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권위 있는 교훈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은 사역을 보고 놀랐지만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신 예수님(21-28)

많은 귀신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쫓으시고 온갖 병들이 고쳐졌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예수님의 권세로 하나님 나라가 어두움의 나라를 침노하여, 어두움과 악한 나라가 하나님 나라로 변화된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권세가 사탄의 권세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첫 사역은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일어났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으로 들어가셔서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계셨습니다.

 

21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4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21-28)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먼저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회당(會堂)’은 유대인들이 모임을 갖는 집회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특별히 가버나움 회당 가운데서 말씀과 기적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 같지 않았습니다. 있는 그대로 예수님과 그 분의 사역을 수용하지 않고 자신들이 기대한 대로 예수님을 평가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신 후에 그의 가르침을 통해서 예수님의 인견과 사역 안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설명해 나가십니다.

 

(1) 권세 있는 말씀(21-2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신 후에 그의 가르침을 통해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안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설명해 가십니다. 이전 단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 부르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내다보셨다면, 이제 그의 권위 있는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가버나움의 회당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한꺼번에 자신을 들어내지 않으시고 점진적으로 들어내셨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메시아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들었던 많은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권세 있는 자와 같았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권위 있는 새 교훈이었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율법학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가르침은 평소 율법학자들의 가르침과는 비교할 수 없이, 권세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당시에 성경 선생인 랍비들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달랐던 이유가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단순하게 성경을 지식적으로 전달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본인이 친히 말씀이셨습니다. 그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서의 권위가 예수님의 말씀과 모습에서 있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기계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역동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말씀의 특권을 지니고 있는 교만함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서기관들은 이성적으로 알지만, 그들은 말씀을 가슴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말씀의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자신의 삶이 되어졌고, 말씀을 선포하신 마음의 믿음과 확신이 있었습니다.

 

(2) 귀신을 쫓는 능력(23-26)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말씀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사역도 하셨습니다. 그곳에는 더러운 귀신들린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들 귀신들린 사람에 대해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유대교에서 가장 거룩한 날인 안식일에, 거룩한 장소인 회당에서, 거룩한 사람들인 종교지도자들이 모여 있는데도 부정한 귀신들인 사람 하나 어떻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유대교가 결코 죄인을 사탄의 손아귀에서 구원할 수 없는 무능한 종교임을 증명해 줍니다. 이미 그 종교의 수명이 다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게 말씀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더러운 귀신을 꾸짖고 내어 쫓고 있습니다. 거룩한 회당을 장악하고 있던 더러운 영은 그 시대의 영적인 상태를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어두워질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심령에 작은 죄라도 있을 때, 영적으로 어두워집니다. 거룩한 영과 어두운 영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보자,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24)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우리와 당신에게 이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수사적 질문인데, 유대인들의 언어적 배경 속에서 이 질문은 보통 지위가 낮은 자가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자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주십니다. 자신이 거룩하신 자이심을 나타나고 있습니다.

놀랍ㄷ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아인 것을 알아본 것은 종교지도자들이 아니라 귀신이었습니다. 이 더러운 귀신은 예수님을 만나자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칭호를 통해서 예수님의 신분을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라는 귀신의 질문은 예수님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사탄과 그의 세력을 물리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더러운 귀신 조차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란 사실을 알아보고 있는데, 거룩함으로 포장된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귀신에게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26)라고 명합니다. 귀신은 하나님의 아들의 명령에 순종하여 잠잠하고 사람에게서 쫓겨나옵니다. 이 축사는 단순히 이적을 말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귀신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귀신들의 쫓겨남이라는 주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귀신은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잘 아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 예수님께 순종하려는 마음은 전혀 없고,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빙해하려는 존재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할 마음이 전혀 없이 입에 발린 고백이나 성경적인 지식이나 심지어 예배나 찬양과 같은 것들을 아무리 잘해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 즉,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에 나서겠다고 하는 자만, 주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로 인정하시고 그들의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이 가버나움 회당 사건은 예수님께서 사탄에 대한 첫 번째 승리였습니다. 하나님의 권세로 가르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고 사람들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러한 사역들이 안식일에 일어나야할 사역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거룩하신 성령을 통해 하시는 사역입니다.

 

(3) 메시아에 대한 반응(27-28)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자를 사탄의 통치로부터 해방해 주었습니다. 이 치유되는 것을 본 무리들은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27)라고 감동하고 놀랐습니다. 이것은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사람들 반응 속에 ‘권위’는 단순히 말로 귀신을 제압한 예수님의 권위를 언급한 것 같습니다. 사탄의 세력을 결박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신 예수님의 이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를 묻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일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새로운 가르침이라고 규정합니다.

예수님의 이적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연관되고 있고, 이 이적과 가르침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인 하나님 나라와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러한 일이 발생했느냐는 질문은 마가복음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등장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과 같습니다. 그 시대는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 주어질 것이고 사탄의 세력이 결박당할 것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을 치유하는 이적 이야기는 종말론적 사건의 선취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자신의 선생들이 권세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귀신을 쫓아내신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듣고 체험했지만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더 이상 아무런 믿음의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모두 다였습니다. 아무도 그 사건을 통해 믿고 회개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적은 결코 감탄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을 보고 우리의 죄에 대해서 통탄하여 돌아서고, 그 권위 아래서 경탄하여 복종해야 합니다.

 

시몬의 장모를 고치신 예수님(29-31)

오늘날 과학의 발달로 인해 훌륭한 설교들을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은 더 많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설교를 감상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 설교대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려는 사람은 점점 적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능력을 체험한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감동에 감탄한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 능력이 자신의 죄를 통탄하게 하고 돌아설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 경탄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29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30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31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29-31)

 

예수님의 치유사역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제는 거룩한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장소를 옮깁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성전과 회당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중심이 성전과 회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과 제사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곳에서만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어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광야 같은 세상에서도 역사하신 것입니다. 회당을 뛰어넘어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인 시몬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서도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일어난 말씀과 기적을 보고도 배척했지만, 성전이 아닌 집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나온 야고보와 요한은 시몬 베드로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요한의 서술에 따르면 베드로 및 예수님의 제자들의 상당수는 갈릴리 벳세다 출신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 일행이 가버나움에서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결혼 후에 가버나움으로 이사한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인 시몬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시몬 베드로의 집에서는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어있었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열병으로 거동하지 못할 만큼 쇠약해진 상태였습니다. 그곳에 누어있던 시몬의 장모 손을 잡고 일으키실 때, 그녀에게 있던 열병이 떠나게 되었습니다. 열병에 누어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고침을 받은 장모는 예수님과 그 무리들을 위해 수종을 들었습니다. ‘수종을 듣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섬김을 나타내는 동사인데, 여자들에게 사용되었을 때 음식을 대접하는 등의 섬김을 의미합니다.

 

문맥에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신 이야기를 기록해주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한 기적을 말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앞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통치가 성취되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글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회복되는 것을 육신적인 질병으로부터 자유함을 받게 되는 것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마가는 이사야가 내다보았던 종말론적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이미 현실로 임했음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회복된 그녀는 예수님과 그와 함께 한 무리들을 위해 수종을 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녀의 태도를 통해서 오늘날 은혜 받은 자들의 태도를 그려볼 수 있습니다. 엄청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시몬의 장모처럼 섬김으로 삶을 나타나야 합니다. 회복 후에 이렇게 섬김은 마가복음의 제자도의 한 단면을 잘 보여 줍니다.

 

각종 병자와 귀신들린 고치신 예수님(32-34)

종종 인간의 열정으로 일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열정은 때로는 주님의 일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열정보다 중요한 것은 잘 듣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가 사망의 나라를 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는 귀신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을 함부로 허락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실지 예수님께서 스스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32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34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32-34)

 

마가는 회당에서 귀신 축출 사건을 기록한 후에 베드로의 장모가 가지고 있는 육신적인 질병을 치유한 사건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이 짧은 이야기들의 종결로 가버나움의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왔음을 언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안식일에 행하고 계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지난 저녁에 많은 사람들이 각종 병든 사람들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몰려 나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새벽이 되도록 병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의 섬김으로 인해서 안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참된 안식, 치유가 없던 사람들에게 치유를 주시기 위해 섬기셨습니다. 순식간에 베드로의 집은 영과 육신을 치료하는 병원이 되었습니다. 각종 모든 문제들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모였던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모든 문제들을 나가면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이 장소에서도 귀신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를 향해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한 말을 옳을지라도 그가 말하려는 의도는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귀신의 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쉼 없이 확장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왕권이 사역을 통해 가득한 것을 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이러한 것들을 보고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영적인 눈과 귀가 있는 자들만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아는 자만이 하나님이 주신 치유와 회복을 경험합니다. 이 회복을 경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그 결과 가버나움 회당에서, 베드로의 집에서 어두운 영혼들을 밝은 나라로 인도하셨습니다. 당시는 거룩한 성전에서조차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보다는 어두운 권세에 짓눌린 상태였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통해 유대 땅에 서서히 복음의 빛이 비추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죽은 영혼들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두운 곳을 치유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