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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2-01)


죄 사함을 보여주신 예수님

마가복음 2장 1-12절


 

세상을 살아가보면 난관(難關)에 부딪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앞에서 사람들의 태도가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대체적으로 두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부정적으로는 뒤로 물러서거나 포기하고 원망하며 분노합니다. 반대로 문제 앞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단 것입니다. 난관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긍정적인 태도를 취할 것입니다.

 

  • 본문은 2:1-3:5까지 등장하는 다섯 가지 논쟁 이야기의 첫 번째 해당합니다. 가버나음에서 벌어진 중풍병자의 치유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신 예수님의 사역이 그의 백성들에게 실제적인 것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를 경험하는 수단으로서 믿음에 대한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신 예수님(1-5)

하나님께 포기하지 말고 은혜를 간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성도들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하는지,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이 세상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성도들을 향해 조롱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결해 나가면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1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1-5)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친 후, 며칠이 지나서 가버나움에 다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한 집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계실 때, 그곳에는 입추의 여지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곳에서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한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나오는 과정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방법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1) 가버나움으로 가신 예수님(1-2)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진행하셨스니다. 이 사역은 고통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사역이었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선포뿐 아니라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귀신들인 사람들을 치유해주는 사역도 같이 수반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의 대중적인 인기는 상종가를 쳤던 것 같습니다.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시자,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불신앙의 도시’로 낙인찍힌 가버나움에도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왔던 것입니다. 얼마나 운집했던지 문 앞까지도 사람들이 들어설 수 없을 정도로 가득 차서 용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수 일전에 진행되었던 그의 갈릴리 사역의 여파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곳에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지속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를 가르침과 치유의 형태를 통해서 증거 하셨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도’라는 표현은 문맥상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3-4)

 

마가복음은 중풍병자 치유 이야기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 마태복음보다 더 자세하게 소개합니다. 마태에서는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이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 이 사람을 예수님께로 접근시켰는지에 대한 묘사가 없습니다. 반면에 마가의 본문은 중풍병자가 함께 온 사람들이 수 많은 사람들 때문에 지붕을 통해서 중풍병자를 달아 내렸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당시 팔레스틴의 가옥은 주로 평지붕이었고, 그 지붕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습니다. 지붕은 흙과 짚 나무 등을 이겨서 만들었기 때문에 중풍병자를 달라 내린 사람들이 지붕을 해체하기가 콘크리트로 지은 현대적 구조물에 비해서 손쉬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업은 매우 곤란한 상황을 야기하는 작업이었을 것입니다. 남의 집 지붕을 훼손한다는 생각은 어느 누구도 쉽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사건으로 돌아가서,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한 중풍병자가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쉽지 않습니다. 중풍병자는 친구들에 의해 예수님께서 계신 곳까진 왔지만, 많은 무리 때문에 집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했던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한 방법은 지붕을 걷어내고 중풍병자가 누어있는 침상 채 예수님께서 계신 집안으로 내려 보낸 방법이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중풍병자를 친구로 둔 네 사람의 믿음을 봅니다. 지붕을 뜯어서라도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나온 이들의 모습 속에서 행동하는 믿음과 사랑의 모습을 배웁니다. 자기들의 문제가 아닌데도 중풍병자를 고쳐 주기 위해 그곳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저돌적인 행동을 취한 이들의 모습은 예수님께서도 인정하시는 신앙이었습니다.

 

(3) 죄 사함을 선포하시는 예수님(5)

 

예수님께서 보신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에서 그들이 누구를 이야기하는지 그 자체로는 분명해 보이지 않습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가리킬 수도 있고, 중풍병자까지도 포함된 사람들을 언급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전자를 의미한다면 믿음이 가지고 있는 공동체적인 성격에 대한 강조를 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붕 해체 작업이 짧은 시간 안에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고 네 친구들과 함께 누워 있는 중풍병자의 동의 없이 진행되었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아마도 ‘그들의 믿음’에서 ‘그들’은 중풍병자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끝까지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이방여인이 부스러기 운혜라고 사모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을 만지실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내놓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부스러기 은혜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당신을 만지시고 치유하며 세우실 것입니다.

 

간절히 치유 받기 위해 남의 지붕을 부스면서 까지 예수님께 나오는 중풍병자와 네 친구들의 행동을 믿음으로 간주하십니다. 그들의 행동은 일반적인 상식이나 관념을 벗어난 급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체면이나 염치, 사회적인 통념 안에 갇혀있는 세상 가치관을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아신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가는데, 당신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중풍병자의 네 친구들의 믿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져야할 믿음입니다. 뜻하지 않는 난관에 부딪히면, 쉽게 포기할 수 있습니다. 포기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포기가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주님의 제자들이 나가는데 뚫어내야 할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담대하게 통과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을 갖기 원한다면,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가는 것입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주님께 나아가길 머뭇거리진 않습니까?

  

잘못된 믿음을 꾸짖는 예수님(6-10)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모르면서 자신의 경험과 지식으로 하나님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으로 성령의 역사를 제한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판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필요합니다. 비판이나 경험을 말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6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6-10)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모든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반응한 것은 아닙니다. 같은 일이지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죄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보여주시고 게시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고 계십니까?

 

(1) 서기관들의 도전(6-7)

 

서기관들은 자신의 생각에 다른 것에 예수님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관점과 가치관과 신학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진단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의 마음을 아시고 자신의 정체성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분명히 죄 사함에 대한 관점은 서기관들의 생각이 맞습니다. 메시아 시대가 되면 죄 사함의 은혜가 있을 것임을 구약의 선지자들이 공통적으로 외쳤던 내용입니다(이사야 29:18; 예레미야 31:34; 에스겔; 미가 7:18-19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성경에서 죄 사함의 주체는 의심할 나위 없이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이사야 43:25; 출애굽기 34:6 이하). 하나님께서는 죄 사하는 권세는 사람들에게 주지는 않으셨습니다. 죄는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범죄한 인생들은 스스로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 죄 사함의 권세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이와 같은 행위가 신성을 모독한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는 종교지도자들의 생각은 이러한 맥락과 맞닿아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께서 지적한 대로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패역함과 외식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종교지도자들이 그와 같지는 않았으며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현실성 있는 독법입니다. 패역한 지도자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행위와 말씀에는 당시 종교적 전통에서 신성 모독으로 느낄 법한 것도 있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2) 예수님의 응답(8-10)

 

서기관들이 이러한 생각을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에게 도전에 대해서 응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둘 다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이 더 어렵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그 말의 효력이 나타났는지를 어느 누구도 즉각적으로 알아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죄 사함의 선포는 절대로 쉬운 발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라 여겼기에 그 말이 야기할 수 있는 파장은 정상적인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내 죄 사람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유대인의 정서상 훨씬 어려운 말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죄 사함의 말씀을 선포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불신은 마음 밭에 거친 독초들입니다.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보면서 마음속에 불신앙과 적의의 독초를 키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믿음과 사랑을 키우고 실천하는 사람의 극명한 대조를 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지금 주님과 함께 집 문 안에 있지만 실제로 그들은 주님의 문 밖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비록 집 바깥에 있었지만 주님이 칭찬하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처럼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서라도’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나아가는 믿음의 행동은 주님이 보시고 기억하시며 칭찬하시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치유와 사람들의 반응(11-12)

적극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적극적으로 찾고 구하는 자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푸십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신성모독죄로 정죄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 치유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11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11-12)

 

예수님께서는 죄 사함을 선포하셨을 때 서기관들의 생각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의 논쟁을 정리하시면서, 자신이 죄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의도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11)고 명하셨습니다. 아마도 서기관들은 눈에 보이는 중풍병자를 치유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현대의학에도 중풍병자를 완치할 순 없습니다. 마비되었던 기관이 움직인다던지 조금의 차도가 있을 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질병을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요한복음 9장). 물론 모든 질병을 직접적으로 특정 죄에 대한 결과로만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풍병자에게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죄 사함을 선포하신 것은 그의 경우에 있어서 죄와 질병 사이에 연관성이 있음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즉, 이 경우에 있어서 질병이 치유된 것은 죄 사람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우려와 상관없이 중풍병자에게 침상을 가지고 걸어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는 ‘곧’ 일어나 침상을 들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나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중풍병이 완전하게 나아 건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속에 있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가는 이 중풍병자 치유기적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단순히 ‘이적 행하는 자’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강조점은 선지자들이 예견했던 하나님의 종말론적통치의 한 부분인 죄 사함의 사건이 예수님을 통해 실제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리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사함하는 권세가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죄로 물든 몸과 마음을 모두 치료하십니다.

마가의 이러한 묘사는 이 이야기의 초점이 단순히 기적 이야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신 예수님의 실체적인 통치사역에 맞추어져 있음을 보게 합니다. 또한 그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를 경험하는 수단으로 믿음에 대한 강조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강조점은 불신앙적인 태도를 보이는 서기관들과 사람들의 믿음이라는 적절한 대조를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가버나움에 찾아온 중풍병자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들어내고 있었습니다. 중풍병자와 그를 메고 온 자들은 거침없는 믿음으로 반응하였지만, 서기관들은 신성모독으로 간주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못 알아본 그들이 도리어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우리 앞에 다가온 새로운 시대에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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