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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14-01)


고난의 메시아로 기름 부음을 받음

마가복음 14장 1-11절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들의 성취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당하신 수난과 죽음은 적대자들의 승리 사건이 아닙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승리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신 일은 예수님께서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수난과 죽으심을 미래 아시고 그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신 것입니다.

 

  •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민란을 우려해 명절을 피해서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예수님이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한 여인이 그분 머리에 향유를 붓습니다. 예수님은 그분 장례를 준비한 여인의 행동이 복음과 함께 전해지리라 하십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넘길 기회를 찾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한 사람들(1-9)

예수님의 죽음은 무기력한 패배의 죽음이 아니라 적극적인 순종의 표시였고, 승리의 관문이었습니다. 복음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그런 동일한 의미가 있습니다.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는 성도들의 고난의 의미를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을 통해서 가르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1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2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3예수께서 베다니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1-9)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로 세상에 오셨을 때,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은 정작 그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예수님을 환영하고 모셔드려야 할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고 이제는 죽일 음모까지 꾸몄습니다. 종교적 기득권에 사로잡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배척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 사이에 샌드위치 가운데처럼 헌신하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을 죽이려는 종교지도자(1-2)

 

예수님을 죽이려 한 자들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입니다. 그 시기는 아이러니하게 ‘유월절’과 ‘무교절’ 이틀 전입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이 어떤 날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 백성으로 세워진 날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시적으로 보인 것은 ‘유월절’과 ‘출애굽’이었습니다.

 

유대인이 지키는 ‘유월절’은 니산월 14일 낮에 유월절 양을 잡으면서 시작되고 15일 저녁 유월절 식사로 끝납니다. 또한 이 유월절이 종료됨과 함께 니산월 15일부터 니산월 21일까지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는 무교절 축제가 진행됩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시켜서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백성을 세우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고, 무교절은 이스라엘이 급하게 애굽에서 나오느라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유월절 식사에는 불에 구운 고기와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을 함께 먹었는데, 여기서 쓴 나물은 애굽에서의 고난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유월절과 무교절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지도자들이 언약 백성의 대표로 오신 예수님을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는 것은 문학적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제거할 방법으로 모의하면서 명절을 피하려 한 이유는 백성이 예수님에게 보여준 환호나 대중적 인기를 고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명절은 피하기로 합의합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세우심을 받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나라 백성의 지도자들을 통해서 죽임을 당할 운명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종말론적 하나님의 백성을 세우는 계기가 됩니다.

 

(2)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3-9)

 

예수님께서는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셨습니다. 시몬을 나병환자로 소개하는 것으로 봐서 그는 아마도 예수님을 통해 나병이 나은 것으로 보입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4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며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을 때 빈번히 거하시던 처소였습니다.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이 등장해서 값비싼 나드를 가져와 머리에 붓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나드는 인도산 최상품 발향성 기름으로 값이 매우 비쌉니다.

본문에서도 이 나드의 값어치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으로 설정합니다. 당시 일꾼의 하루치 품삯이 한 데나리온인 것을 감안하면 1년 치 연봉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이것을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기름부음의 의미를 자신의 장사를 예비한 것으로 설명하십니다. 머리에 부은 기름이 몸까지 흘렀다면 이 여인은 옥합의 긴 주둥이 부분을 깨서 기름 전부를 예수님께 부은 것으로 보입니다. 마태의 본문에서는 화를 낸 자들이 제자들이었고, 요한복음에서는 가룟 유다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의 본문에서는 화를 낸 주체가 무명의 사람들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눈에 여인의 행동은 허비로 보였습니다. 그들은 약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더 지혜로운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여인의 행위를 책망한 것입니다. 실제로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지대한 관심을 생각해봤을 때, 이들의 반응에 일리가 있습니다. 더욱이 삼백 데나리온은 한 번에 예수의 머리에 붓기에는 지나치게 큰 액수였기 때문입니다.

 

한 여인이 식사 중이신 예수님께 와서 옥합을 깨뜨려 값비싼 고급 향유인 ‘나드’를 붓습니다. 옥합의 목 부분이 가늘었기에 그 부분을 깨뜨렸을 것입니다. 옥합을 깨뜨린다는 것은 옥합에 담긴 향유를 남김없이 다 붓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허비가 아닙니다. 사랑은 남김없이 다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기름 부은 여인의 행위를 통해 예수님이 메시아(‘기름 부음 받은 자’란 뜻)이심이 드러납니다. 또한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실 분(메시아)임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 일이 예수님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이라는 말씀은, 이 여인이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합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이 한 일이 전해져서 기억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3) 예수님의 반응(6-9)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들로부터 책망을 들은 여인을 보호하십니다. 그들의 책망을 멈추게 하십니다. 물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난한 자들은 늘 제자들의 주변에 있을 것이지만, 예수님께서는 항상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행위를 사람들의 평가와는 달리 허비나 낭비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헌신의 관점에서 보십니다.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그 좋은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8절에서 설명하십니다. 그것은 이 여인의 행위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준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유대인의 장례에서는 시체에 기름을 바르는 의식이 진행되었는데, 여인의 행위는 바로 그런 의식을 미리 한 것과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인의 행위는 낭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행위가 됩니다. 종종 이 여인의 기름부음을 메시아를 위한 기름부음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예수님 자신의 해석은 그러한 여지를 남기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름부음이 장례를 위한 예식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낭비로 해석되기도 하고 장례를 위한 선한/좋은 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이 여인의 행위는 예수님의 선언을 통해서 더욱 부각됩니다. 복음서에서 이름도 밝혀지지 않은 여인의 행동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기억될 것이라는 선언이 놀랍습니다. 실제로 유대 묵시문학에서는 의인의 행위가 기억될 것이라는 언급이 있습니다(다니엘 20:19; 제 1에녹 104:1).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유대인의 큰 명절에 모여서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는데, 한 무명의 여인은 매우 값비싼 향유를 부어서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 둘을 극명하게 대조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9절은 구문상 이 여인을 특별히 강조해서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10-11)

미술전시회에 가면 관람객들이 멀리서 작품을 바라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까이 보면 확실하게 볼 것 같지만,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 옆에서 수종 들던 가룟 유다는 가장 먼저 알아보고 예수님을 영접해야할 사람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가장 먼저 배반하고 있습니다.

 

10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1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10-11)

 

마가는 다시 예수님을 죽이려고 시도했던 음모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이 음모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해답을 얻게 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잡을 방책을 구했지만 상황이 녹록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틈을 노리고 있었는데 전혀 생각지 못한 방법이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 유다를 통해서 제시됩니다.

마가는 유다를 열둘 중의 하나로 언급함으로써 8-10장에서 보여준 제자들의 어리석음과 유다의 어리석은 행위를 연결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대한 메시아의 모습과 예수께서 이야기하는 메시아의 모습 속에서 상당한 불일치를 봅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이 구약에 근거해서 형성하였을 언약적 메시아 기대와 예수님을 통해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 사이에는 큰 격차가 존재한 것도 사실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세례 요한입니다. 메시아의 길을 위해서 평생을 준비했던 세례 요한도 자신의 생애 마지막 시점에 이러한 격차를 실감했습니다(마태복음 11:3).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자들은 자신의 야망과 속셈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마가복음 8-10장). 아마도 이러한 괴리 속에서 유다도 매우 실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발적으로 대제사장들을 찾아가 예수님을 넘겨줄 음모를 꾸밉니다. 이에 대해서 대제사장들이 얼마나 기뻐했을지는 본문에 서술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기뻐했다고 하는 사실은 그들이 유다의 행위에 돈을 제시하는 모습에서 좀 더 분명해집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어떻게 넘겨줄지 기회를 모색하게 됩니다. 여기서 ‘찾았다’라는 동사는 미완료시제(과거의 반복적인 동작을 나타내는 시제)이며 유다의 시도가 지속적인 음모와 시도였음을 보여줍니다. 마가의 스토리가 전개됨에 따라 이제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에 그의 제자까지 합류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가 죽음에 넘겨질 때가 거의 다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동일하지만,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출발점은 같아도 시간이 흐르면서 두세 갈래로, 여러 타래로 나뉘곤 합니다.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와 무엇 때문에 사랑했는지, 어떤 사랑을 부여드릴 수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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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13-02)

 


마지막 때 일어날 사건들

마가복음 13장 14-37절


 

흔히 사람들은 원하는 정보는 ‘구독’이나 ‘좋아요’를 누르지만, 원치 않는 정보는 차단이나 음소거를 통해 스스로 정보를 통제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경고도 수많은 경고 중 어떤 하나의 경고쯤으로 치부할 뿐입니다. 어떤 경고와 정보에 잠금을 설정하고 잠금을 해제하고 있습니까?

 

  • 예수님께서는 성전 파괴 직전에 일어날 일들을 좀 더 직접적인 상황들을 서술해 줍니다. ‘열방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때는 신속하게 대피해야 할 상황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이 매우 긴박한 것임을 몇 가지 예로 설명하십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성전 파괴 및 인자의 통치가 가까이 왔음을 알리십니다. 성전파괴에 대한 말씀을 마치시고는 재림에 대한 주제를 언급하십니다.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14-2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홀연히 임하실 것입니다. 그 날을 대비한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피난처 삼는 일보다 더 급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아주 잠깐만이라도 다른 일을 해도 된다고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준비하고 나서 그 후에 주님이 원하신 삶을 살겠다고 미루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재림을 대비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14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15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16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17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18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19이는 그 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0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14-20)

 

하나님께서는 환난을 예고하면서도 택한 백성을 위한 시나리오를 잊지 않으십니다. 세상을 지으신 때로부터 지금까지 없었고, 다시 없을 그날을 대비한 행동요령을 조목조목 말씀해 주십니다.

 

(1) 매우 긴박한 상황(14-18)

 

본문은 예수님께서 성전 파괴 이전에 유대 땅에서 일어날 일을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하기 전에 성전이 이방 세력들에 의해 먼저 유린 될 것입니다. 이것을 ‘14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14)라고 하십니다. 성전이 유린 되는 일이 멸망의 신호탄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선 것을 보거든’ 이라는 표현은 다니엘 9:27에 등장합니다. 이 표현 또한 문맥상 성전 파괴와 연관되어 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핵심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성전)에 선 것을 볼 때에 이것은 신속하게 대피해야 할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상황이 얼마나 긴급한 것인지를 부각하십니다. 이는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이 물건을 가지러 집으로 들어가는 것마저 허락되지 않을 만큼 긴급한 상황이라고 하십니다. 농부는 일할 때 보통 겉옷을 벗어놓는데, 이 상황은 그 옷을 찾기 위해서 뒤로 돌아서는 것도 허락되지 않을 만큼 긴박한 상황이라는 점을 부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긴박한 상황을 샬롬이 빼앗긴 상황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해 가십니다. 예수님은 이 시기가 젖먹이와 임신한 여인들에게 재앙이 될 것을 말씀하신다. 요세푸스는 주후 70년 로마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을 때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해주었는데, 예수님의 말씀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일들이 실제로 발생했다. 사실 여인이 아이를 잉태하고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그림은 샬롬의 상징인데, 그샬롬이 더는 제공되지 않는 시기가 될 것이다.

 

(2) 예루살렘 파괴 때 참상(19-20)

 

예수님께서는 그 참상이 매우 극심한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19이는 그 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19)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역사상 유래 없는 파괴와 살상이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에 임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자부심이요 자존심이던 예루살렘이 하루 아침에 황무지로 변할 것입니다.

 

실제로 구약에 이러한 표현들이 종종 등장합니다(참조. 출애굽기 10:14; 11:6). 그러나 그들이 메시아에게 행한 일을 보면,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끔찍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선택한 사람들을 살리시려고 그 심판의 날을 감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성전이 파괴되는 것 속에서도 자기 백성을 향한 관심을 놓지 않으시고 자비와 긍휼을 잊지 않으십니다.

세상 역사에서는 주후 70년 있었던 예루살렘 멸망 사건을 로마 장군 디도가 예루살렘을 정복한 사건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십니다. 과거 앗수르와 바벨론처럼 로마도 하나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환란을 집행하는 수단과 그 기한을 정하신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사소한 일상을 주관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일과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그 역사의 진행을 통해서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창조하고 계십니다. 이 주권을 믿어야 성도들이 세상 앞에서 당당할 수 있고 의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만용이나 착각이 아니라, 그것을 아는 것이 참 지혜이며 영적인 안목입니다. 세상의 역사 또한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을 통해서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갈 것입니다.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21-23)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임박할 때 더욱 기승을 부리는 일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이적과 기사로 사람들의 마음을 훔칠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모든 방법으로 사람들을 미혹할 것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환상을 심어줍니다. 우리는 미혹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21그 때에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2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23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21-23)

 

성전 파괴와 관련된 여러 어려움들은 외부적인 상황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때에 내부적으로도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출현할 것이라는 경고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혼란의 시기는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출현하기에 매우 적절한 시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혼란 가운데 있을 때가 그들을 미혹하기에 좋은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는 말이 다 거짓인 이유가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세상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이 동시에 알아볼 것입니다. 다시는 베들레헴 마구간에 오시듯이 조용히 오시진 않을 것입니다. 다 주목하여 보도록 영광중에 오실 것입니다.

실제로 기독교 역사에는 많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주후 1세기경에만 대략적으로 60여 명 정도의 거짓 메시아가 출현했습니다. 그들도 이적과 기사를 통해서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외적인 이적과 기사만을 보고 현혹되는 일은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 직전에 이러한 일들에 현혹되지 않도록 미리 말씀해주셨습니다.

 

성전 파괴와 인자의 오심(24-27)

성전 자체는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상징적인 공간입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고, 믿음의 확신과 경고를 받은 곳입니다. 거룩한 하나님께서 임재한 성전이 파괴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거하시는 집을 파괴시키며 희생하면서 까지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24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25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26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27또 그 때에 그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24-27)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성전 파괴와 관련해서 진행해 오셨습니다. 따라서 ‘그 환난 후’라는 표현은 성전 파괴와 연관해서 예루살렘에 임한 환난을 언급하는 것이 분명합니다(14-23). 구체적으로 더 묘사합니다.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언급하는 묵시적인 표현입니다. 문맥 속에서 이러한 구약 인용은 성전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데, 심판의 이유는 하나님의 메시아인 그리스도를 그들이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를 배척한 유대교와 유대 종교 시스템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언급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적절해 보입니다. 마가의 문맥에서 이 표현은 문자적 의미라기보다는 심판의 대한 상징적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귀 등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라는 표현은 다니엘 7:13-14을 반향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다니엘에서 이 표현은 인자가 땅으로 오는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예수님의 재림을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인자가 종말론적 왕으로 등극하여 권위와 영광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성전은 파괴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으로 새로운 성전을 세워서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십니다. 그 새로운 왕권과 통치는 이스라엘의 종교 시스템의 핵심인 성전이 종결을 고하는 시점에서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불러 모으는 선교 활동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을 이방으로부터 모으는 일은 성전 파괴 이전에도 일어났지만, 이제 성전 파괴는 새로운 성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새롭게 구성되는 결정적인 순간이 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비유(28-31)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오셔서 3년 동안 복음을 전파하셨지만, 이스라엘은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하며 구원의 백성이라 생각했지만, 열매 없는 과실나무처럼 영적으로 아무런 열매가 없었던 것입니다.

 

28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29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30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31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28-31)

 

앞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두 가지를 질문했습니다. 하나는 ‘성전 파괴 전에 있을 증조’였고, 다른 하나는 ‘인자의 재림’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재림에 대해 말씀하실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이 세대에 일어나겠지만, 예수님의 재림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들어서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문 앞에 이른 것을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이런 일들’이란 13-24절에 기록된 현상을 말합니다. 또한 인자가 가까이 문 앞에 이르렀다는 것은 인자의 통치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성전 파괴 및 인자의 통치가 가까이 왔음을 알리고 계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언급하고 계시다는 사실은 이 비유가 예루살렘 성전을 암시하고 있다는 매우 구체적인 힌트가 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에서 무화과나무가 마가의 내러티브 안에서 성전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밝히셨습니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이 모든 일’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문맥에서 ‘이 모든 일’은 성전 파괴 및 이와 연관된 징조들을 가리킵니다. 이 모든 일이 ‘이 세대’, 즉 예수님의 동시대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 발생할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예수님의 새로운 성전이 세워져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일이 이 세대 안에 일어날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자신의 말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로 확증하고 있습니다.

 

‘깨어 있으라’(32-37)

진심으로 주님을 믿는 모두 말세에 예수님의 재림을 맞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처럼 주님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소망합니다. 삶 속에서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사는 삶입니다. 그래서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최선을 다해 살아갈 때, 천국의 소망과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32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3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34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35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6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37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32-37)

 

마가는 이 시점에서 재림에 대한 주제를 처음으로 언급합니다. 여기서 ‘그 날과 그 때’라는 표현은 명시적으로 마가복음에서 처음 재림에 대한 주제가 등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앞 단락 17, 19, 20, 24절에는 ‘그 날들’이라는 복수 형태를 사용해서 성전 파괴와 관련된 징조들이 나타나는 날들을 복수형으로 나타냈는데, 여기서는 단수 형태의 ‘그 날’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32절의 ‘그 날’이 이전에 언급되었던 성전 파괴와 관련된 징조의 날들과 명시적으로 구분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재림의 시기는 하늘에 있는 천사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날이나 시각을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태도는 깨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깨어 있음을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십니다. 주인은 타국으로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맡깁니다. 따라서 종들은 주인이 맡기신 사무를 감당해야 하며 문지기들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나타난 강조점은 파루시아의 때가 드러나 있지 않다는 점과 가장 예기치 않던 때에 임하리라는 점입니다. 성전 파괴의 때에 관해서는 분명한 징조가 주어지고 이 세대 안에 발생하리라고 말씀하셨지만, 파루시아에 관해서는 어떠한 징조도 없을 것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시에 심판의 때를 맞이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다가올 미래도 준비가 안 된 마당에 무슨 재림의 때냐며 사람들은 인자의 날에 대해 시큰둥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예외가 아닌 상황에서 어느덧 재림은 우주여형보다 먼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미래를 향해서 빠르게 돌진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열망과 신앙에는 여전히 버퍼링만 반복하진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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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12-03)

 

 


다윗의 ‘내 주님’은 누구인가

마가복음 12장 35-44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시면서 가르치셨던 모든 가르침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사랑’, 그 안에 담겨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실천이며 삶의 변화입니다. 자신에게 물어보시면, ‘나는 오늘 얼마나 사랑하며 살 것인가?’, ‘오늘 하루의 삶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며 또 변화된 모습으로 걸러갈 것인가?’라고 다짐했을 때, 주님께서 당신을 도우실 것입니다.

 

  • 지금까지 질문만 받던 예수님께서 이제 질문을 던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을 통해 서기관들을 위선적인 가르침과 행동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일 뿐 아니라 다윗이 주(主)라고 부르셨던 것을 환기시킵니다. 그런 다음, 위선적이고 탐욕적인 서기관과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과부를 대조시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세를 가르치십니다.

 

메시야상 재정립(35-37)

사람들이 어떤 일에 중요하게 생각하면, 그 일에 자신의 시간을 냅니다. 그 일에 돈도 투자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사랑하고 자신의 마음이 가 있는 곳에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도 아깝지 않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 구약 성경을 인용하신 것은 그만큼귀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35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36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37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35-37)

 

본문의 말씀은 마태복음에서는 평행 단락이 질문과 대답의 대화 형식으로 제시됩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혼자서 독백으로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자신의 메시아적 정체성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시면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질문의 의도는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다윗의 자손’으로서 메시아의 정체성이 서기관의 전유물도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에 근거해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아가 다윗 계열의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사무엘하 7:11-16; 에스겔 34:23-24). 사실 마가복음에 묘사된 예수님의 모습은 전통적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과는 달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곳에서 당대 팽배한 메시아사상을 좀 더 풍성하게 하고자 질문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에 근거하여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팽배한 ‘다윗 왕가의 아들’로서의 메시아 기대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려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시편 110:1을 인용하십니다.

 

1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시편 110:1)

 

만일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면 성령의 감동을 받은 다윗이 메시아를 ‘내 주’라고 부른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질문하십니다. 다윗이 자신의 자손에게 ‘주’라고 호칭하였기에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만으로는 충분히 담아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논증 방식은 유대 랍비들이 즐겨 사용한 자기모순을 통한 논증 방식입니다. 메시아가 ‘다윗의 주’가 되신다는 결론은 예수님의 역할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이해에서 핵심 중 하나입니다. 기독교는 시편 110:1을 그리스도 완결적(Christotelic) 독법을 통해서 읽어냄으로써 이러한 결론을 도출해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결론은 이 시편의 저자가 다윗이며 그 내용은 메시아에 관한 것이라는 예수님의 분명한 관점(그리스도 완결적 관점)에 기초합니다.

 

시편 110:1에서 두 번째 등장하는 ‘내 주’(아도나이)라는 용어는 그의 지위가 화자인 다윗보다 탁월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함축하고 있습니다. 뒤따르는 시편의 문맥인 110:5에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내 주는 열왕을 쳐서 파하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또한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이 말을 했다고 하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이러한 이해가 단순히 인간적인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대 사람들에게 부각되지 않은 메시아의 측면을 부각하신 후에 그가 단순히 다윗의 자손일 수 없음을 질문 형식으로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물론 이 수사학적 질문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임을 부정하려는 데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더욱 풍성한 메시아상을 제시하려는 것입니다. 만일 이곳에서 마가가 예수께서 자신이 다윗의 혈통임을 부인하셨다고 생각했다면, 우리는 한 가지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는 예수님께서 다윗의 후손임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3 이러한 취지의 초기 기독교의 고백).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해도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명의 본질에 대한 호칭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는 단순히 다윗의 후계자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지상의 왕권과 비할 수 없는 높은 권위를 가진 다윗의 주(Lord)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러한 마가의 이해는 마가복음의 시작인 1:1에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복음의 시간은 예수께서 그리스도 즉 메시아이심을 아는 것이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의 왕권은 다른 사람들을 패배시키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을 통해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섬기고 그 섬김의 궁극적인 실천으로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구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으로는 메시아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담아낼 수 없다고 느끼신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과는 달리 무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즐겁게 듣고 있었습니다.

  

서기관들의 위선과 그들에 대한 심판(38-40)

종교지도자들은 많이 알고 있었지만 아는 대로 살지는 않았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는 이미 보여주신 삶과는 반대로 낮은 자리, 섬김의 자리가 아니라 대접받는 높은 자리, 외식하는 기도,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악행의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그들의 삶은 그들의 그릇된 앎의 실상을 보여주며, 가르치는 자의 이중성에 임하는 심판은 더 혹독할 것입니다.

 

38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38-40)

 

성도들에게는 멘토가 필요합니다. 그 멘토가 어떤 태도냐에 따라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일반 유대인들을 교육하고 있는 서기관들에 대해서 비판적 가르침을 이어가십니다.

 

서기관들은 긴 예복을 입고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는 일을 즐겼습니다. ‘긴 예복’이란 표현은 흡사 제사장들의 독특한 의복을 연상시킵니다. 이러한 예복을 입는 행위의 이면에는 자신들을 일반 사람들과 구분하려는 의도가 읽힙니다. 또한 그들은 시장에서 인사 받는 것을 즐깁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서기관들을 만날 때 ‘랍비’라고 불렀고, 그것은 지극한 존경의 의미를 담고 있는 호칭이었습니다. 그들의 의복과 그들에 대한 호칭을 통해서 그들의 교만한 태도와 잘못된 경건을 꼬집고 계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회당의 높은 자리란 율법 궤 앞자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자들이 앉았던 자리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연장자나 존경받는 인물들을 잔치의 상석에 앉혔는데, 서기관들은 이러한 자리에 자주 앉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문제는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그들의 진정한 문제는 그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과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 사이의 괴리에서 발견됩니다. 그들에게는 백성들을 잘 지도해야 할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길게 기도함으로써 위선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 더욱 넘치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과부의 헌금(41-44)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겉모양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면까지도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시길 기대하십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가 섬기는 직분에 만족하고 교회에 출석하는 것에 만족하면, 남들에게 보이는 겉모습에만 안주할 것이 아니라 주님이 눈여겨보시는 내면을 살피고 행위에 동기를 헤아려 봐야 합니다. 사람들의 인정이 아니라 진정으로 판단하시는 주님께 마음의 중심을 참으로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대표적으로 바로 헌금하는 여인이었습니다.

 

41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41-44)

 

서기관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있다고 언급하시고, 그들에 대한 심판을 언급하신 이후에 헌금함에 헌금하고 있는 과부가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마가복음의 구조 속에서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목 받기 원했던 서기관들이나 많은 헌금을 낸 부자가 아니라, 한 가난한 과부를 주목하십니다. 이 과부는 아주 작은 돈을 하나님께 헌금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헌신을 높게 칭찬하십니다. 과부는 헌금함에 두 렙돈을 넣었습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렙돈을 던졌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당시 헌금 궤는 쇠로 된 나팔 모양의 입구에 동전을 던져 넣는 식이었기 때문에, 이 같은 표현이 등장했을 것입니다. 이 같은 헌금 궤의 구조 때문에 헌금을 많이 넣는 것과 적게 넣는 것은 소리를 통해서 쉽게 판별이 가능했습니다.

 

렙돈은 당시 통용되던 헬라 화폐 가운데 가장 작은 동전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과부가 헌금함에 넣은 돈은 당시 화폐 가치로 생각해볼 때 지극히 미미한 액수임에 틀림없으나, 이 액수는 그녀에게는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의미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헌금이 모든 이들의 헌금보다 더 많다고 평가하십니다. 그 이유는 다른 이들은 풍족한 가운데 넣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빈궁함 속에서도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 시대 사렙다 과부의 스토리(열왕기상 17:8-16)와 달리 본문에는 그녀의 미래에 대한 아무런 보장도 등장하지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과부의 행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십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과부는 하나님 나라의 제자도를 위한 긍정적인 모델로 기능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녀의 헌금은 가난한 가운데 드려진 하나님을 향한 그녀의 사랑과 헌신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위와 명예 등 외형적인 것에 연연하고 있는 서기관과 아무런 명예도 없지만,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드리는 과부의 진실한 모습은 제자도와 관련해서 시사 하는 바가 큽니다. 또한 본문은 모범적인 과부의 헌금에 관한 내용뿐만 아니라 과부에게 힘에 지나는 헌금을 강요하고 있는 서기관에 대한 고발의 의미도 동시에 갖습니다. 왜냐하면 문맥이 이러한 해석의 가능성을 시사해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라고 이미 지적했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사람 앞에 많은 헌금에 대한 과시가 아닙니다. 생활의 전부를 원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액수가 아니라 드리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부자 청년은 가진 것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 나라를 버렸습니다. 서기관들은 만족할 줄 몰라서 과부의 재산까지 삼켰습니다. 하지만 이 과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림으로 하나님을 사랑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생활에 서기관과 같은 교만스런 행동은 없습니까? 그러한 교만한 행동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지도자들의 실수는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목회자들이 겸손한 행동으로 목회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중직자들은 연약한 성도들 앞에서 신중한 언행심사를 보여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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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12-02)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계명

마가복음 12장 12-34절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원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이웃을 사랑할수록 자신의 삶은 더욱 따뜻해지고 행복해집니다. 사람들을 살아가면 사랑하는데 에너지를 가장 많이 사용합니다. 사랑에 모든 것을 헌신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자체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그분 자체이신 말씀에 우리의 사랑을 집중해 보지 않겠습니까?

 

  •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부활에 대한 신학적인 질문을 시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두개인들의 무지를 지적하십니다. 사두개인들과의 논쟁 후에 서기관이 나아와 율법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이해의 두 기둥 하나님 사랑으로 서기관의 질문에 답하십니다.

 

사두개인들의 계략(18-23)

종종 세상에는 괴변과 같은 논리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논리를 강하게 주장하기 위해서 교묘하게 지어낸 가정들입니다. 일반적으로 일상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논리 속으로 빠져 들어가면 대답하기가 곤란한 상황이 됩니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께 빠져 나갈 수 없는 애매한 질문으로 공격하고 있습니다.

 

18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19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0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21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22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23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4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25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6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27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18-27)

 

예수님께서 활동하신 당시에 이스라엘 사회의 지도자 그룹이 있습니다. 성전에서 제사 제도를 주관하는 제사장들로 이들을 사두개인이며, 또 다른 부류는 성경을 필사하는 서기관들로, 그들은 대부분 율법을 연구하는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사두개인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나아와 질문합니다. 그들은 하스모니안 왕조를 지지하며 성전과 관련된 직분을 유지한 채 소위 기득권의 중심부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는 기득권 세력인 그들에게도 위협으로 비쳐졌습니다.

 

(1) 사두개인들의 계략(18-23)

 

본문에서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께 나와서 부활이 없음을 가지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부활을 ‘반대’하는 근거로 제시한 구절은 신명기 25:5-6의 수혼 제도였습니다. 그들은 수혼 제도가 보여줄 수 있는 최악의 예를 제시함으로써 부활의 부당성을 논증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들의 주장은 어떤 집안에 7형제가 있었는데, 맏형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런 경우 이스라엘에서는 그 동생이 대신해서 대를 이어주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도 자녀를 낳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모든 남편의 일곱 형제들을 통해서 아이를 낳는 데 실패합니다. 아마도 사두개인들은 두 명의 남편이 있는 여자의 예를 들 수도 있었을 테지만, 더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예를 통해서 부활 개념이 파생하는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만들어 내려고 한 이야기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께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그들 중에서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지를 묻는 게 아니라, 이러한 부활 개념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를 드러내려는 의도를 가진 질문입니다.

 

(2) 예수님의 대답(24-27)

 

예수님께서는 거칠 것이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는 대답하십니다. 그들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몰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두개인들은 성경을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고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해한 거라고 말씀합니다. 사두개인들의 관점은 인간의 경험을 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의 관점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성경에 대해서 바로 이해하고 있었다면 부활을 부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그들의 부활에 대한 몰이해는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에 기인합니다. 그들이 제기한 문제점은 부활 후의 삶이 이 땅에서의 삶과 동일할 것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24)은 단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를 소생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혀 새로운 형태의 삶을 창조하십니다(고린도전서 15:35-53).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추론할 수 있는 바는 부활의 때에는 출산이 필요치 않으며, 따라서 생식기능을 위한 이 땅의 관계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때에는 지금 지상에서처럼 부활의 때에 결혼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은 남자와 여자를 통해 육체적인 생식의 구조를 통해 인간의 역사가 이어지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때에는 인간의 정체성과 인간 존재가 지금의 구조하고는 다른 존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두개인들이 정경으로 받아들이는 출애굽기 3:6을 통해 논증을 이끄십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큰 틀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 이미 오래전에 죽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님께서 ‘죽은 자의 하나님’이 될 수 있겠습니까? 칼뱅이 ‘자녀가 없는 아비가 있을 수 없고 백성이 없는 왕이 있을 수 없듯이, 엄격히 말하면, 여호와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스스로 있는 자)로 계시하십니다(출애굽기 3:14-16).

이 계시의 목적은 자기 백성 가운데 임재하신 언약의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족장들에게 출애굽을 약속하셨습니다. 살아계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구원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죽음으로 끝나버릴 관계를 맺었겠습니까? ‘누구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백성과 변치 않는 관계를 맺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에서 부활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에 따라 신실하게 반응한 언약 백성을 종말에 신원하실 것입니다(이사야 26:19-21). 그리고 그 종말론적 신원의 거부할 수 없는 극명한 예가 하나님을 신되하다 죽어간 자들에 대한 부활입니다. 이것이 유대 종말론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주정한 것은 이러한 언약적 세계관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개인들의 이 같은 오해를 오경의 말씀을 가지고 언약적 관계 안에서 이스라엘 족장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설명하십니다. 구약뿐만 아니라 신약을 이러한 언약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가장 큰 계명을 묻는 서기관(28-34)

기독교 신앙에서 아주 중요한 관점 또는 기독교 신앙을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은 양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찾아 들어가서 깊이로 들어가야 그것이 기독교 신앙으로 맞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몇 년 경력이 아니라 지금 자신의 신앙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진실하고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현재 자신의 상태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질문 공격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28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28-34)

 

지금까지 마가복음에서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적대하는 세력으로 등장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이러한 적대 그룹 가운데 예수님에 대해서 다른 태도를 자진 자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두 차례나 적대적인 질문해 왔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제 긍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사람을 소개합니다.

 

(1) 가장 큰 계명을 묻는 서기관(28)

 

본문에 등장한 서기관은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태도에 어느 정도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관해 상당히 급진적인 이해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보여준 안식일의 이해나 정결 규례 등에 대한 이해는 당시의 보편적인 이해나 정결 규례 등에 대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마태복음 5:17).

이러한 관점에서 여기에 등장하는 서기관은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라고 질문합니다. 서기관의 질문은 전적으로 합법적 질문이며, 랍비들 사이에서 더 중요한 계명에 관한 논쟁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모든 계명 중에서 어떤 계명이 가장 중요한지를 물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613개의 계명 중에서 제일 되는 계명을 묻는 것입니다. 그의 질문은 다른 사람들처럼 트집을 집기 위한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논쟁하는 모습 예수님 속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고 있었습니다.

 

(2) 예수님의 답변(29-31)

 

예수님께서는 서기관의 질문에 신명기 6장 4-5절을 인용하여 대답하십니다.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 6:4-5)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할 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은 인간을 형성하는 다른 부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전인격적인 특징을 나타내는 표현 방식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러한 종류의 사랑은 그가 명하신 것에 대한 순종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온 하나님 사랑에 대한 핵심가치를 재차 확인해주고 계십니다.

 

서기관은 예수님께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 계명인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레위기 19장 18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17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18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위기 19:17-18)

 

정리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중요한 계명이고,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다음으로 중요한 계명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을 기초로 해야 합니다. 진정한 의미가 있음을 밝히신 것으로 보입니다.

 

레위기 말씀에 대한 유대인들의 해석학적 초점은 ‘네 이웃’이 과연 누구인가에 모아집니다. 물론 이웃은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싫어했던 사마리아 사람들은 물론 심지어 원수까지도 이웃의 범주에 넣어 확장하십니다(마태복음 5:43-47). 이웃 사랑의 계명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 사랑의 계명으로부터 파생합니다. 다시 표현하면 이웃 사랑의 계명은 하나님 사랑이라는 기초 위에 섰을 때에야 진정한 의미에서 그 참다운 빛을 발하게 됩니다.

 

(3) 긍정적인 반응한 서기관(32-34)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서기관은 자신의 해석을 가미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 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는 언급은 신명기 4:35을 반영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사랑이 이스라엘의 유일신 사상에 근거해 있음을 서기관은 분명히 밝힙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낫다’라는 언급을 통해서 서기관은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두 계명이 제사 제도가 제시한 계명들보다 경중에서 우선시되어야 함을 밝힌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종교지도자 그룹 가운데 매우 이례적으로 이 서기관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십니다. ‘네가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예수님의 이 같은 평가는 예수님께서 특정 그룹에 대해서 일률적인 평가를 하지 않으셨음을 보여줍니다. 마가는 우리에게 이 서기관이 후일 어떻게 되었는지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습니다. 다만 마가는 예수님과 서기관의 대화 이후에 아무도 감히 예수님께 더 이상 묻지 못했다고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놓치면 비본질적인 것에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게 됩니다. 사적 신앙에 매몰되어 스스로를 정당화하거나 균형을 잃게 됩니다. 기존의 고착된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낯선 진리를 수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새롭게 본질을 질문하고 주님의 대답을 경청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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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12-01)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죽인 농부들

마가복음 12장 1-17절


 

인간의 적대감과 뿌리 깊은 욕망은 얼마나 위험합니까? 이런 것들은 눈을 가려 보지 못하게 만들고, 진리를 외면한 채 악한 행동으로 이끕니다. 존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참혹함을 서슴지 않습니다. 무엇이 악한 조상들의 전철을 발게 했습니까?

 

 

  • 예수님께서는 종교지도자들에 의해서 제기된 질문에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답하십니다. 이 비유에서 아들의 버림받음은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보여주시는 반전으로 이해됩니다. 정치적으로 함께할 수 없는 헤롯당원들과 바리새인들은 로마 통치 하에서의 조세에 대한 민감한 질문을 예수님께 던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혜롭게 이 함정을 빠져나가십니다.

 

악한 농부의 비유(1-12)

탐욕은 종교적 위선으로 잠시 포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눈이 어두워지지 않도록 욕심의 싹을 잘라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종들만 아니라 아들을 보내 회개와 순종을 요구하셨지만, 이스라엘은 끝내 거절하였습니다. 주인의 것을 취하고 싶은 강한 욕망 때문입니다.

 

1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3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4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5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6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7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8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9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10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11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12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1-12)

 

예수님께서는 생애 마지막 주간을 예루살렘에서 보내십니다. 그 주간 동안에 매우 중요한 핵심적인 가르침들을 주십니다. 그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자신의 몸과 삶 그리고 죽음으로 보여주신 것, 바로 십자가의 가르침입니다. 그것 외에도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주시는데, 본문의 말씀도 가르침 중에 하나가 나옵니다.

 

(1) 포도원 농부 비유(1-9)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이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이전 단락에 등장한 예수님의 권위(성전과 관련된)에 도전한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 자들에게 하나의 비유를 통해서 대답하고 계십니다. 

그 비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정성스럽게 포도원을 만들어서, 이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타국으로 오랫동안 멀리 여행 중이었습니다. 포도 수확 철이 되어, 주인은 자기의 종들을 보내서 약속대로 수확한 포도에서 세를 받으려고 보냈습니다. 그러나 농사한 농부들의 반응이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세를 주기는커녕 주인이 보낸 종을 심하게 때리고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말이 안 되는 상황을 보고, 그 주인은 또 다시 종을 보냈지만, 이번에는 종을 혹독하게 때리고 능욕을 하면서 쫓아 보냈습니다. 나중에는 죽이기 까지 합니다. 종에게 보이는 태도는 주인에게 보이는 태도와 같이 취급되었습니다.

주인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들을 보내면, 농부들도 아들에게 어찌할 순 없을 것이며 세를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농부들이 그 주인의 아들이 오는 것을 보고서 서로 의논하길, ‘이 자는 상속자이니 죽여버리고, 포도원을 찾이하자.’고 못된 음모를 꾸밉니다. 그를 죽여 포도원 밖에 버렸습니다. 이런 농부들의 모습을 보고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포도원 주인이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이라고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이곳에서 말한 ‘어떤 사람(주인)’은 하나님이고, ‘포도원’은 이스라엘에 대한 풍유이며, 포도원을 맡은 ‘농부’는 종교지도자들로 묘사되었습니다. 주인은 농부들로부터 소출을 받기 위해서 종을 보냅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종을 붙잡아 때리고 빈손으로 보냅니다.

첫 번째 시도가 실패한 후 주인은 다른 종들을 보냅니다. 시간이 갈수록 종들을 대하는 농부들의 태도는 더욱 강도가 심해집니다.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습니다. 5절에서는 주인에 의해서 보내진 종을 살해하는 일까지 발생합니다. 비유 안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일상에서는 좀처럼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경우입니다. 비유 안에 등장하는 이러한 과장된 묘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심각한 패역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적절한 열매를 기대하며 예언자들을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스라엘은 회개하기는커녕 예언자들을 박대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곳의 묘사는 바로 이와 같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주인은 종들에 이어 아들을 보내기로 결심합니다.

이 내용도 일상에서는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종들에게 악행을 저지른 농부들이 아들에게도 얼마든지 악행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농부들은 종들을 대했던 것처럼 아들도 죽입니다. 이 비유는 농부들의 본질적 악함을 드러내주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 비유 안에서 아들이 농부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설정은 8-10장에서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세 차례 예고하신 예수님의 수난예고와 적절한 조화를 이룹니다. 

마태복음과는 달리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스스로 질문하시고 스스로 대답하십니다. ‘주인이 와서 그 농부를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리라.’ 예수님의 대답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악행을 저지른 종들을 진멸하는 것으로 이 비유가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포도원이 양도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21:41에서 포도원을 제때 열매 맺게 하고 소출을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주어야한다고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마가의 본문에는 이러한 설명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들이 보여준 반응으로 유추할 때(12), 그들은 포도원을 빼앗기는 농부들이 자신들을 가리킨다고 이해한 것 같습니다.

 

(2) 시편 인용과 결론(10-12)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결론을 시편 1 18편인 22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시편 118:22)를 인용하면서 내리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 인용됩니다.

예수님과 신약성경 기자들은 시편 118편의 언급이 예수님에 대한 거부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 자신의 우편에 앉게 하신 사건들 속에서 성취되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사도행전 4:11; 베드로전서 2:4,7). 하나님께서는 이 죽임 당한 메시아 아들을 통해서, 즉 이 아들을 기초로 삼아 새로운 건축물을 계획하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특성인데,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비유가 자신들을 향하고 있음을 알아차렸으나 회개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회개하기 보다는 도리어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에 찔림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탐욕에 사로잡히면 우리도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진리에 관심이 없고, 사람들의 평판과 시선 그리고 인정만을 갈망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죄라도 돌이켜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세금 논쟁(13-17) 

우리들이 고백한다고 모두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이 찬양한다고 진심을 담은 노래가 아닐 수 있습니다. 다만 진심과 차이나는 간격을 좁혀 가는 것이 신앙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기도와 진심이, 자신의 삶과 신앙고백이, 그리고 자신의 고백이 인격과 일치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생활은 외식될 수밖에 없습니다.

 

13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14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15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16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17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13-17)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후 두 번째 논쟁하신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보다 로마 당국의 심기를 건들리지 않고 싶었습니다. 첫 번째 논쟁은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11:27-33). 두 번째 논쟁에서 예수님께서는 더욱 예민하고 민감한 상황에 직면하십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상당히 민감하고 난처한 질문을 던집니다.

 

(1)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의 논쟁(13-15a)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서로 나란히 기록된 것만 해도 놀라운 일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헤롯당원을 로마와 결탁한 매국노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서로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죽이려는 데는 놀랍게 결탁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공공의 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자존심에 금이 갔습니다. 헤롯당원은 예수님이 혁명을 일으키면 로마에 부합한 자신들부터 처형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두 집단은 원수지간이었지만, 이번만은 협력해서 예수님을 넘어뜨리자고 한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환심을 사려고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14)라고 좋은 말을 늘어놓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습적으로 예수님께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라고 질문합니다. 그들이 제기한 질문은 예수님께서는 처음 받은 질문보다 더욱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민감한 이슈를 모두 담는 난해한 질문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로마의 과세를 인정하는 것은 강력한 대중적 지지를 등에 업고 진행되는 유대 민족주의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세금을 내라고 하면 지지자들을 많이 잃을 수 이었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유대고대사 18.1.1, 18.1.6)에 따르면 갈릴리 지방의 유다가 일으킨 반란은 조세제도 때문이었습니다. 유다는 이 세금을 바치는 것이 비겁한 행위이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납세 거부를 주장하면, 로마의 정치 세력에 항거하는 것이 됩니다. 세금은 통치하는 재정에 기본이 되는 것인데, 납세를 거부하면 로마에 대항하여 반역적 행위를 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은 이 질문 하나로 예수님과 백성 사이, 에수님과 로마와의 관계를 갈라놓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릴 기가 막힌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런 짓들은 분열의 영인 사탄이 하는 짓입니다. 성도들 사이를 이간질 시키고, 성도와 지도자 사이를 이간질하여 분열시킵니다. 나라와 나라를 이간질 시켜 쌔우도록 만듭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서로 원수가 되게 만드는 것이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2) 대답하시는 예수님(15b-17)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 이 무리들의 의도를 정확히 꿰뚫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의 데나리온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16)라고 물으십니다. 이 데나리온은 노동자들의 품삯을 지불하는 데 사용되었고 일반적인 거래에서 사용하던 화폐였습니다. 이 데나리온에는 황제의 형상과 함께 ‘신이요 대제사장’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황제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 이 동전 주조에 대해서 경건한 유대인들은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제2계명을 위반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동전에 새겨진 글귀는 신성모독적인 것으로 간주하였기에 엄격한 유대인은 이 동전 사용을 거부하였습니다. 일반 상거래에서는 이러한 유대인의 민감성을 존중하여 형상과 글을 제거한 특별한 구리 동전이 사용되었습니다. 질문한 자들이 데나리온을 가져왔다는 사실은 의외입니다. 그들이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것을 시사 합니다. 성전 안에까지 우상의 형상을 가져온 것은 하나님의 집에까지 우상의 형상을 가져온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드리라고 대답하십니다. 놀라운 대답입니다. 로마를 반대하면서 바리새인들조차 세금을 내고 있었습니다. 세금을 낸다고 가이사가 참 주인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가이사 위에 하나님께서 계심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가이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력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인 통치자는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대답을 통해서 지도자 그룹이 파놓은 함정을 지혜롭게 벗어나십니다. 이 대답은 보는 관점에 따라 바리새인과 헤롯당원 모두에게 만족을 주는 대답이 될 수도 있고, 양자를 다 실망시킬 수도 있는 대답이었습니다. 원래 그들이 던진 조세에 대한 질문은 바리새인과 헤롯당원 모두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대답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적 주권을 인정하면서도 세상의 권력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17절에서 사용하신 동사(아포도테, 바치다)는 이러한 사실을 강조합니다. ‘바치다’는 원래 ‘돌려주다’라는 뜻입니다. 열심당원이 로마의 세금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도 정치적 충성과 하나님에 대한 충성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십니다. 이것은 ‘거룩’과 ‘세속’에 대한 엄격한 구별이 아니라 ‘거룩’에 대한 절대적 요구 안에서 ‘세속’이 적절한 위치를 찾는다는 인식입니다. 여기서는 두 요소가 충돌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열심당원들과 달리 예수님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갈등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들의 질문에 대해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모호한 대답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재치 있는 예수의 대답을 놀랍게 여겼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예수님의 지혜로운 답변에 놀라기는 했지만, 그것이 그들의 영적인 변화로 연결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의 믿는 바를 지혜로운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분명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변화는 우리가 던진 지혜로운 몇 마디의 말로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단락에서 예수님은 재치 있고 또한 모호하게 함정을 피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상 권력의 합법성에 관한 문제에 직면할 그의 첫 제자들과 또한 후 세대의 제자들에게 중요한 원리를 제시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충성하기 위해 세속 권력에 반드시 저항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 아래서 세속적 권력도 적절한 위치와 역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로마서 13:1-5).


 땅의 차원에서 사고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새로운 세계관을 가져오셨습니다.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를 향한 이 시대의 반응을 뼈아프게 드러내십니다. 무엇이 우리로 주님을 영접하고 그분의 소유권 인정하기를 주저하게 합니까? 무엇이 그를 십자가로 끌고 갑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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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11-02)

 


심판을 예고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11장 20-33절


 

열매가 풍성한 나무를 보면 얼마나 기쁩니까? 목회자들도 처음에는 구도자적 태도를 유지하다가 점점 현실과 타협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제자의 각오는 희미해지고 현상 유지에 만족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좋은 열매를 기대하고 심은 나무인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어떤 열매를 기대하십니까?

 

  • 다음 날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은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게 됩니다. 무화과나무가 상징하는 옛 이스라엘이 종결되고 새로운 하나님의 통치가 도래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무효화 사건을 기도와 용서에 대한 교훈으로 연결시키십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성전과 관련하여 행하신 일에 대해서 불안함을 느낍니다.

 

말라버린 무화과나무(20-21)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세상을 향하여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메시지를 가장 짤막하게 요약하면, 그것은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을 받은 너희도 사랑으로 살아야 사람답고 행복하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과 일행은 길가에 가면서 저주 받은 무화과 나무를 보았습니다.

 

20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1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20-21)

 

제자들은 전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말라비틀어진 것을 목격했습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마가복음에서 나타납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로부터 더는 열매를 구할 수 없는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에 반응합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이 문장에서 흥미로운 것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주체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그것이 상징하는 바를 저주하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마가의 문맥 속에서 분명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나타냅니다(예레미야 8:13; 호세아 9:10; 미가 7:1). 이스라엘로부터 더는 열매를 구할 수 없는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심판을 고한 것입니다. 보기에 따라 당혹스러워 보일 수 있는(열매를 맺을 때가 아닌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기에) 예수님의 행위를 상징적 행위로 보면 예수님께서 이러한 행위를 하신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22-23)

‘믿음’이란 기도하는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참다운 기도는 기도를 드리는 자와 기도를 받는 대상과의 신뢰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런 신뢰 관계가 있을 때 신자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될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성전이 파괴되어도 새 시대의 공동체는 여전히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있고, 그 기도는 그 관계에 근거하여 응답될 것임을 예수님께서 분명히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22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22-23)

 

베드로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것에 주목하기보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하루 만에 현실이 된 사실에 집중합니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믿음과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으라.’(22)라는, 이 문맥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언급된 것은 흥미롭습니다. 직전에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과 성전 무효화를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제자들의 관점에서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성전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과 성전을 회복할 것이라고 기대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심판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와 성전 청소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어떻게 그 심판을 피할 수 있을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가 기도 주제와 연결되지만, 예수님의 성전 무효화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성전이 있었던 성전 산’이 바다에 통째로 던져지는 것은 성전에 대한 심판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는 것이 마치 산을 바다에 던지는 것과 같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믿으면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산’은 분명히 ‘시온 산’을 의미합니다. 그 시온 산 위에 있는 성전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바다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 없는 예배와 기도에 장소가 되었던 성전이 있던 시온 산이 바다에 던져질 수 있는 충격적인 이미지를 더해 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있더라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하신 약속들을 파기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하시는 새로운 구원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상징적인 비유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하시는 새로운 일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기도와 용서(24-25)

우리가 누군가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은 채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받은 우리는 마땅히 형제자매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열매 맺는 신앙인의 바른 모습임을 기억합시다. 뿌리가 죽은 외식적 형식주의자가 되지 말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24-25)

 

구약의 언약적 기대를 성취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시대, 즉 예수님께서 왕으로 통치하시는 시대를 ‘기도’라는 주제를 통해서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대목에서 기도에 대한 확신을 말씀하신 것은 매우 적절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성전의 무효화를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대해 기존 유대인의 생각과는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유대인들의 생각에는 성전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잘 들어주시는 기도의 장소로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믿음의 기도를 가르치십니다. 어떤 곳에서 기도 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기도 하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핵심은 이루어질 줄 믿는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즉, 기도의 장소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었습니다(17). 그러므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서 성전의 무효화를 선언하신 후에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매우 시의적절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물리적 성전이 사라지더라도 여전히 기도가 유의미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성전이 없더라도 하나님께 믿고 기도한 것은 받은 줄로 믿어야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기도 응답의 확신이라는 주제를 용서라는 주제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것도 매우 시의적절한데,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경험하고 언약 백성 상호간의 용서를 경험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서로 용서하라는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우리가 용서해야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먼저 용서하신 것이 전제되어 있고, 이 용서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우리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뜻임을 기억해야 합니다(마태복음 18:23-27).

다른 이를 용서하지 못하는 자는 아직 자신이 받은 용서의 깊이를 모르는 철부지입니다. 물리적 성전이 사라져도 새로운 성전 되신 예수님 안에서 제자들은 하나님께 믿음의 기도를 드릴 수 있고, 서로 용서하며 하나님께 받은 용서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축복을 누립니다.

 

권위에 대하여(27-33)

우리는 하늘로부터 온 구원의 은혜를 받고 누리고 있음을 어떻게 확증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한 몇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신 분임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오르셔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신 분임도 믿습니까?

 

27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거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28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29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30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31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32그러면 사람으로부터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는지라 33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27-33)

 

예수님과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본문에 등장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논쟁 장소인 성전으로 다시 돌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행위에 분노를 느끼고 있었고, 도대체 무슨 권위로 이러한 행위를 하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여기서 ‘이런 일’은 성전과 관련해서 예수님께서 보인 급진적인 행위와 선포를 말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신적 권위에 의지하여 이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면, 종교지도자들은 신성모독으로 즉시 그를 고소하였을 것입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는 종교지도자들의 질문은 그 자체로 매우 정교하게 구성된 함정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라고 말하면 신성모독이 되고, ‘사람으로부터’라고 하면 정당성이 상실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 뒤에 도사리는 함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시고 즉답을 피하십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반응은 당대 랍비들이 즐겨 쓰던 토론 방식으로 상대방의 논리적 모순을 역질문을 통해서 드러냅니다. 이 ‘노련한’ 질문으로 이슈에서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요한의 권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던진 질문은 요한의 세례의 기원에 관한 것입니다. 질문을 받은 종교지도자들이 이 문제를 사적으로 의논했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당혹스러워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기원했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은 그 세례가 하늘로부터 기원했다는 대답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오실 자’로 언급한 요한의 사역에 대해 공개적으로 인정하신 바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 역시 요한의 메시지와 궤를 같이합니다(‘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의 세례가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랬다가는 군중의 예측할 수 없는 태도로 곤경에 빠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함정을 놓으려고 질문한 종교지도자들은 도리어 함정에 빠져버립니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사역과 일치하는 요한의 사역에 대해 공식적인 판단을 거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지혜로 권위에 대한 지도자들의 질문을 효과적으로 물리치셨고, 자신의 권위의 근원이 하늘로부터라는 것을 효과적으로 증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도 없이 종교적 형식주의와 외식주의에 접은 유대 교권 사회에 사망 선교를 내리셨습니다. 잎만 무성한 그들의 종교 형태를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 앞에 진실하시길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진짜 신앙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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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0-04)


예수님의 제자도를 배우는 길

누가복음 10장 32-52절


 

성도들 가운데 세상과 하나님 나라 질서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해 여전히 세상의 질서와 상식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세상의 질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 예고가 제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제자들의 감추어져 있던 노골적이고 불순한 동기가 전면에 부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과는 다른 참된 제자도에 대해서 인내하면서 가르치십니다. 예루살렘으로의 여행 이야기의 마지막은 맹인 바디매오를 치유하는 이야기로 끝맺습니다. 세인에게 주목받지 못한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치유를 경험하고 길에서 예수님을 따릅니다.

 

죽음과 부활을 예고(32-34)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과 전혀 다른, 자신이 바라는 것만을 구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기도는 응답을 받지 못한다고 단언합니다(약 4:3). 그러므로 성도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32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33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34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32-34)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예고가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장면은 이전과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수난과 죽임을 당할 장소로 예루살렘이 명시적으로 언급됩니다(33). 둘째로, 수난 당하시는 절차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등장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제자 가룟 유다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에게 넘겨지고, 후에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집니다. 셋째로, 이방인들이 그를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라는 언급이 등장하는데, 이 장면은 예수님의 수난 장면에서 그대로 실행됩니다. 그런데 수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부활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부활은 종말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나타나게 될 신원의 중요한 표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종말론을 잘 알고 있었을 예수님의 제자들은 메시아 예수님께서 죽는다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메시아는 유대종말론 안에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신적 통치의 대리자로서 악과 악에 동조한 자들을 심판하고 의와 의로운 자들을 신원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분인데, 그러한 분이 죽임을 당한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이었습니다. 메시아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왕권이 세워진다는 계시는 부활의 아래서만 이해할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35-40)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당신의 생명을 주시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는 주님의 십자가의 도를 따라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섬기듯이 이웃을 섬기는 제자의 도를 행해야 합니다. 자기 욕망을 버리지 못하면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35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35-40)

 

예수님의 1, 2차 수난 예고가 등장하고 난 후에 제자들의 어리석은 모습들이 등장했었는데, 이번에도 여지없이 제자들의 영적인 어두움과 무지의 모습들이 부각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모습이 훨씬 더 노골적이고,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는 제자들 속에 감춰진 불순한 동기가 전면에 부각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수난예고가 주어지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놀라운 청탁을 합니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제자도에 대한 예수님의 거듭되는 인내의 가르침을 생각한다면, 세 차례의 수난예고 후에 이러한 청탁을 예수님께 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영적 무지의 깊이를 밝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들이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의 의미를 얼마나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어두움에 빛을 비춰주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구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는 질문은 앞으로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을 표현합니다. 실제로 야고보와 요한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등극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왕의 즉위식 장면은 그들의 기대와 다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해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역설적으로 그의 왕위 즉위식이 될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에 담긴 합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할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예언적인 말씀이 이어집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이 예수님께서 마신 잔과 그가 받는 세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세베대의 아들들은 순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는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그들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의 청탁을 알게 된 나머지 제자들은 분개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분개했던 이유는 예수님의 지속적인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이 두 명이 어리석은 요청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도 차지하고 싶던 자리를 그들이 선점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제자들이 분개했다고 하는 것은 그들도 세베대의 아들들과 같은 야망에 붙들려 있었음을 보여주는 강한 증거입니다. 만일 야망이 없었다면 그들이 분개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제자들의 반응(41-45)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큰 자가 되고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는 종이 되기 위해 이 자리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종으로 오셨고, 겸손히 그 길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야고보와 요한의 행동에 열 제자들이 화를 냈습니다. 그들 역시 같은 욕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41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42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41-45)

 

이렇게 한심한데도 예수님은 이전처럼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참된 제자도가 무엇인지 인내하며 가르치십니다. 통치자들은 자기 야망을 위해서 자기 힘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가치 체계를 정면으로 반대하시고 전복시키는 가르침을 제시하십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하나님 나라의 제자도에서 큰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본받아야 할 궁극적인 섬김의 본보기로 자신을 제시하십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갖는 성격을 대속물로 규정하십니다. 제자들은 비록 예수님의 죽음이 갖는 대속적 성격까지 따를 수는 없겠지만, 그의 삶이 보여주는 본보기는 따라야 합니다.

 

소경에서 치료 받은 바디매오(46-52)

 

사람들은 육신의 질병을 치유 받는 성령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면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고 있는 구원의 가치를 기억하고 구원을 베푸신 주님께 끊임없는 찬송과 영광을 돌려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46○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46-52)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에 이르렀습니다. 마가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예수님의 여정에서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직전에 있었던 일로 맹인 바디매오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가의 보도에 따르면 그는 맹인이었고 걸인이었습니다. 길가에 앉아 있었다고 하는 표현은 그가 나중에 그 길을 따라 나서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마가의 의도적인 표현으로 보입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듣고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지릅니다.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고백했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구약이 예견했던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가져올 다윗 왕가의 아들이라고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의 꾸짖음 속에서도 바디매오는 더욱 크게 예수께 호소합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난 후, 여정을 멈추시고 그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자신을 부르자 맹인은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옵니다. 이 모습은 흡사 1장에서 시몬과 그의 형제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입고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께 나아온 것과 세베대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삯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은 장면을 생각나게 합니다. 실제로 거지의 겉옷은 그에게 전 재산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그 겉옷을 내버리고 나아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에게 물으셨습니다.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 맹인은 다시 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포하십니다. 이 선언의 결과로 바디매오는 시력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마가는 이 치유의 원인이 그의 믿음이었음을 밝힙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보도할 때마다 그 기적이 믿음에 근거했음을 줄곧 강조해왔습니다. 이 이야기를 종결하면서 마가는 바디매오가 보게 되었고 예수님을 ‘길에서 따랐다’고 보도합니다. 제자들은 이 여정을 갈릴리로부터 시작해서 죽곧 따라왔습니다. 그들은 시작할 때 모든 것을 버려두고 그를 좇았습니다. 흥미롭게도 제자들은 실제로 이 여정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다 도망가는데(14:50),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맹인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고 그에게 합당한 믿음을 표현합니다. 믿음에 근거해서 치유를 경험한 후에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십자가와 죽음의 길에서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이러한 미묘한 대조는 마가복음 독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진정한 제자도의 길이 무엇이며, 진정한 제자란 과연 누구입니까? 물론 마가의 원래 독자들은 이 제자들이 변화되어서 초대교회의 기둥 같은 사도들로 쓰임 받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도들의 부족한 모습을 드러내는 데에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제자도란 이름과 명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계속 따라가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세상의 헛된 것을 구하는 잘못된 신앙을 기복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잘못된 신앙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을 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힘쓰는 참된 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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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0-02)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자

마가복음 10장 17-31절


 

창세기 타락 사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이 그 형상을 잃어버린 것, 또는 그것이 비틀려 왜곡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은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이 치유되는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공적 예배의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 또 개인적인 말씀 묵상을 훈련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아주 중요한 축복의 시간입니다.

 

  • 한 부자가 예수님께 영생에 관해 질문합니다. 계명들을 지키라는 예수님의 대답에 그는 어려서부터 지켰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근본적인 도전 앞에서 부자는 자신이 무엇을 진정으로 섬기며 살았는지 드러내고 맙니다. 재물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급진적인 제자도를 깨닫지 못한다면 결코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부자 청년의 질문(17-20)

우리는 재산이 없어서, 지위가 낮아서 할 수 없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지, 소유가 많아서, 지위가 높아서 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일, 영생의길을 가는 일은 정반대입니다. 율법적인 종교 생활만으로 영의 필요를 채울 수 없습니다.

 

17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17-20)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라는 표현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을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향해서 걸어가시는 중입니다. 이 상황에서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이 지속적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때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달려와 무릎을 꿇고 영생에 관해 질문합니다. 이 부자도 예수님을 따르는 데 진지한 관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참조. 10:21).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이 질문을 던진 부자에게 전제된 생각이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얻은 백성의 최종적인 신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백성의 신실한 반응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으로부터 줄기차게 강조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고 해서 자동적인 구원을 부여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신실하게 반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 백성의 자격을 상실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여기서 부자는 단순히 행위 구원의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19절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도 그의 생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대답을 하기에 앞서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라고 확고하게 말씀하시면서, 선함을 하나님 한 분에게만 귀속시키십니다. 뒤따르는 예수님의 대답은 십계명의 다섯째에서 아홉째 계명으로 주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을 다룹니다. 이 계명들의 정신은 레위기 19:18(‘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부자의 질문이 행위 구원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만일 부자의 질문이 행위 구원의 가르침이었다면, 누구보다 예수님이 먼저 그것을 지적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부자는 이러한 계명들을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지켰다고 주장합니다. 이 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이 말씀하셨던 십계명의 명령들은 주로 식별 가능한 행동들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이계명들을 지켰는지 어겼는지 점검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용이합니다.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부자는 자신이 모든 계명들을 지켰다고 아주 진지하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그의 교만을 나타낸다기보다는 적어도 율법에 충실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다 지켰다는 부자의 주장에 다른 특별한 악의는 없다 할지라도, 이것은 계명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에 근거한 주장임이 곧 드러납니다.

 

진짜 문제(21-22)

세상을 살아갈 때 가장 필요한 것이 재물이기 때문에 재물이 우상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정하여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1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21-22)

 

부자의 계명 이해가 피상적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증명됩니다. 예수님께서는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율법 조항을 가지고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십니다.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라는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의 계명 이해에서 빠진 요소를 지적하십니다. 그에게는 영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있었고 예수님을 따르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했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다 팔고 예수님을 좇으라는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방해가 되는 바로 ‘그 재물’을 제거하고 하나님을 섬기라는 초청입니다. 마가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동기가 사랑이었다는 점을 부각 시킵니다.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셨기에, ‘그 우상’을 제거하고 온전히 하나님만 섬기라고 초청하십니다. 그러나 자신의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예수님을 좋으라는 예수님의 사랑의 초청 앞에서 이 부자는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떠나가 버립니다. 이 부자가 진정으로 무엇을 섬기고 있었는지 여과 없이 드러납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참조. 마 6:24).

 

재물과 제자도(23-27)

구원은 하나님께부터 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내 손을 비워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른 삶, 곧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는 삶은 버림을써 가능합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어떤 것을 버려야 할 때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제자입니다. 진정한 제자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23○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6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27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23-27)

 

재물에 대한 이야기를 예수님께서는제자들에 대한 교훈으로 전환하십니다. 제자들을 둘러보시고는 제자들을 향하여 가르침을 전개하십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가 가진 함의를 비유적 이미지를 통해서 전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이 충격적인 말씀을 나름대로 해결해보려는 주석적 논의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낙타(카멜로스) 대신에 후기 사본 중에는 밧줄(카밀로스)이 종종 등장하는데,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밧줄이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됩니다. 단어가 바뀐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예루살렘 성에 ‘바늘의 귀’라는 뒷문이 있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성문이 닫혔을 때 이 조그만 간이 문을 통해서 낙타가 힘겹게라도 통과할 수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예수님의 의도를 약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뜻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26-27).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 유대주의 환경에 살고 있던 제자들에게는 놀라운 가르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부자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십니다.

 

상급의 약속(28-31)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자연스럽게 재물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우상 숭배의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성도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김으로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복을 받아 누려야 합니다.

 

28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1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28-31)

 

10:28에 등장하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다’는 베드로의 대답은 마가의 문맥 속에서 두 가지를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실제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1:16-20). 또한 과거 이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다는 것은 같은 문맥 속에서 많은 재물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부자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합니다. 비록 마가의 본문에 베드로의 보상에 대한 질문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30절의 예수님의 대답을 보면 베드로의 대답 속에 그런 함의가 들어 있음이 드러납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의 잘못된 동기는 마가복음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분명히 드러납니다. 제자들의 감추어진 동기를 이미 아셨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정한 포기의 동기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포기하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서 제자의 길을 걸어간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진정한 보상이 뒤따릅니다. 그 보상은 현세적인 것과 아울러 내세적인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보상과 함께 핍박도 겸하여 받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단락을 종결하시며 충격적인 말씀을 전하십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 말씀은 세상적 가치를 뒤바꾸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먼저 된 자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나중 되고, 세상의 관점에서 나중 된 자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먼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언급이 문맥 속에서 베드로가 한 말에 대한 결론으로 제시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베드로를 위시한 많은 제자들에게 주는 경고일 수 있습니다. 진정한 제자도의 삶은 필연적으로 영생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도의 삶이란 세상적 가치를 가지고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자신들의 희생(28)이 자신들에게 영광스러운 자리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망상을 하면 안 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마가복음의 이야기가 진행되어 가면서 분명해질 것입니다.


아직도 세상 가치관에 젖어 있다면 믿음의 사람으로서 거룩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가서 긍휼히 여겨달라고 기도하시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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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0-01)

 

 


이혼에 대한 논쟁을 벌린 바리새인

누가복음 10장 1-16절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너무 쉽게 결혼하고 헤어지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하지만 진짜 결혼 생활은 쉽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드라마나 영화가 아닌 성경적인 결혼관을 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성경적인 관점으로 결혼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한 가정을 만들어 주셨고, 그 가정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나가시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가정의 주인은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당시 큰 사회적 항의를 가지고 있던 이혼에 관해서 가르치십니다. 그레코로만 사회에서 이혼은 쉽게 행해지던 일이었고, 유대 사회에서는 이혼이 행해져야 하는지 합법적 근거에 관해서 토론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조 질서의 원리로 돌아가서 이혼이 합법적이지 않음을 선포하십니다. 그의 가르침은 혁명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혁명적 가치관을 다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는 바리새인들(1-4)

그리스도인들에게 배우는 일은 자신을 알아가고, 자신을 지으시고 통치하신 분을 알아가는 일입니다. 자신이 믿는 분을 잘 모른다면 자신의 믿음은 자신의 신념이고 자신의 바램일 뿐입니다. 주님을 잘 알고 잘 믿어야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 삶을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우려하지 않고 시험만 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배울 준비가 안 되었습니다.

 

1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2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3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4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1-4)

 

바리새인들은 겉으로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제 가면을 벗고 대놓고 예수님을 대적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과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비유하셨습니다. 실제 하나님과 백성이 맺은 언약은 결혼식 때 신랑과 신부가 맺은 혼인서약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스라엘은 바람난 신부와 같았습니다. 음란한 신부로서 신랑을 버리고 우상숭배를 일삼는 나라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음란한 신부인 이스라엘을 그들이 떠받들던 앗수르와 바벨론에 넘겨 버리셨습니다. 하지만 영영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보여주셨듯이 신랑 예수님을 보내셔서 이제 회개한 신부들과 새로운 언약, 새로운 결혼 과계를 맺게 하셨습니다. 혈통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이라도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온 자들은 예수님의 신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과연 이스라엘은 이 신랑을 잘 영접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이 오늘 본문에 배경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의 도착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갈릴리 지역을 떠나서 헤롯 안디바의 관할하는 유다 지역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런데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요단강 건너편 길로 내려오십니다. 예루살렘이 가까울수록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발언도 강해집니다. 더욱이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사람들의 반응도 더 노골적입니다.

이곳, 유다 지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을 가진 두 종류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변함없이 무리를 가르치셨다고 소개합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무리를 치유하셨다고 소개하고 있고(마태복음 19:2), 마가는 예수님께서 무리를 가르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치유와 가르침은 예수님의 사역으로 분리될 수 없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교묘하게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가르치시고 계신 예수님께 시험하기 위해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이혼에 관한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을 직역하면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적법한 것입니까?’입니다. 이 표현에는 두 가지 숨은 뜻이 들어 있었습니다. 먼저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24:1-2(1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의 관점에서 이혼이 합법적인지를 질문합니다. 이 질문을 통해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죄를 덮어씌울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또한 이 질문은 당대 정치적인 상황과 연관해서 특별히 헤롯 안티바스는 자기 형제의 아내를 취했고, 이 일(이혼 문제) 때문에 세례 요한의 강도 높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결국 마가는 요한이 이 일과 연관되어 죽임을 당했다고 기술합니다(6:14-29). 그러므로 이 이혼의 이슈는 당시 역사적 맥락에서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도리어 모세가 무엇을 명했는지 되묻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24:1-4에 근거해서 이혼 증서를 주고 내버리기를 허락했다고 답합니다. 사실 신명기 말슴은 이혼에 대한 명백한 명령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담긴 사악한 의도를 드러내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신명기 말씀은 특정한 조건이 만족되었을 때 이혼을 실제 가능한 것으로 보기는 하지만, 실제 삶을 영위해가기 위한 허용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신명기 율법은 불법적인 이혼과 재혼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약자인 여성들을 보호하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혼을 명령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다만 악한 인간들의 행위 때문에 허락하섰을 뿐입니다. 그러나 질문을 던지 바리새인들은 이혼이 하나님의 명령인 듯 다루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들의 논리적 모순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결혼에 대해 가르치신 예수님(5-9)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사랑’이 주제입니다. 남녀 간이나 부모 자녀 간에 사랑이든 등등 사랑이 주제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소설이나 연극들의 구성을 사랑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버린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반대로 보면, 가장 슬픈 이야기들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른 것에 욕심을 부리다가 정작 제일 중요한 한 가지, 이것을 놓쳐버리는 것을 듣습니다.

 

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5-9)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혼을 허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사람들에게 이혼을 허용하셨는지를 밝히십니다. 그 이유는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몰이해와 사악함을 함께 연결시키십니다.

신명기 말씀에 근거해서 아내를 버릴 구실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완악함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율법 남용 사례에 해당합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은 법을 제정하시고 수여하신 하나님의 원래 의도를 망각한 채 개별 규정에 집착해서 법을 남용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완악함에 대항해서 예수님께서는 결혼의 원리를 설명하심으로써 이혼 문제를 다루십니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최초의 모범으로 돌아가서 그 원리와 모범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진정으로 반영하는 윤리는 허용되는 원리가 아니라 근본적인 창조의 원리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 원리는 창세기 1:27과 2:24로부터 출발하는데, 이 본문들은 부부의 성적 결합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요, 유일하면서도 깨어지지 않는 원리임을 나타냅니다. ‘한 몸’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결혼이 인간의 편리나 사회적 관습 이상의 훨씬 깊은 뜻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십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해서 예수님께서는 이혼에 관해서 단호하게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유대인들은 어떠한 근거 위에서 이혼을 허락해야 하는지를 논한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이혼을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해치는 것으로 이해하십니다. 이것은 그레코만 관점과 유대적 관점에서 보면 매우 급진적인 관점입니다.

이러한 원리들에 대한 예수님의 호소는 필연적으로 성경의 어느 한 본문을 다른 본문과 대치시키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느 한쪽을 더 선호해서 다른 한쪽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각의 본문에는 고유한 기능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상적인 뜻을 말하는 본문도 있고,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서 허용된 본문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제자도는 매우 급진적입니다. 이것은 당대의 이혼 풍조를 뛰어넘는 혁명적인 가치관입니다.

 

가르침에 대한 결론(10-12)

어떤 상황을 보면서 사람들은 해석이 다릅니다. 한 사건이지만 긍정적으로 해석하는가 하면, 번대로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를 봅니다. 이 해석의 차이는 매우 큽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긍정적인 상황을 중심에 놓고 해석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10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물으니 11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12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10-12)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원래 목적을 언급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서 제정된 결혼의 기본 원리를 제시하심으로써 이혼의 부당함을 확고히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급진적 가르침의 결론으로 이혼과 재혼을 간음으로 규정하십니다. 이혼과 재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영원한 연합을 새로운 성적 연합으로 대체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혼 동기가 완악한 마음이었다면 재혼은 그 완악한 마음이 열매를 맺은 것에 해당합니다.

이런 맥락 하에서 예수님께서는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같은 원리를 적용하십니다.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것도 간음이요,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 시집가는 것도 간음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당시 남성 주도 사회에서 매우 충격적인 가르침이며, 예수님께서 이 땅에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 복음의 정신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가르침입니다. 복음의 가치는 사회적 약자인 여자의 인권을 반영하면서도 공평한 윤리적 적용을 시도합니다. 인간의 패역함이 있는 곳에 불평등이 그 결과로 드러나지만, 복음은 그 패역함을 회복시켜 평등한 인간됨을 여과 없이 드러내 줍니다.

 

제자도를 가르치신 예수님(13-16) 

어떤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이 어떤 상황 대체를 보면서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무엇에 대해 민감한지 살펴보면, 그 사람의 가치관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무시당하면 발끈한 사람은 자존감이 부족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 기뻐하시고 화내셨겠습니까?

 

13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13-16)

 

본문은 당시의 관습을 반영한 것 같습니다. 유대 관습에 따르면, 대속죄일 저녁에 아이들을 장로들에게 데려와서 기도와 축복을 받게 하곤 했습니다(미쉬나 소페림 18:5). 하지만 사람들이 데려온 아이들을 제자들이 또 막아섭니다. 그 이유를 마가는 분명히 제시하는 않고 있습니다. 다만 9:33-37의 문맥에서 제자들은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누가 더 큰지에 대해 다툰 이력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세워서 하나님 나라의 섬기는 가치관을 설명하신 적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 가르침을 받은 후에도 어린아이를 데려온 사람들을 막은 것은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음을 사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회에서, 심지어 제자들로부터도 무시당하던 아이들을 소중하게 받아들이십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소중한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사람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무시당하고 거절당한 사람들(병든 자, 소외된 자, 이방인, 여자, 어린이)이 인정받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져오신 하나님의 나라는 당시 전통적이고 남성 주심적인 가치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샬롬의 나라’이고, 그 ‘샬롬’은 사람들 사이에서 평등이라는 가치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죄악된 세상적인 가치관에 길들여진 자들이 이런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배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시며 어린이 한 명, 한 명을 안수해 주셨습니다(16).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결혼마저 거래의 대상이 되는 시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과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여, 하나님 정하신 질서대로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아무도 결혼을 통해 행복을 누릴 수 없다고 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은혜가 어니면 불가능한 것이 신실한 결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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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9-04)

 


사역 태도를 가르치신 예수님

마가복음 9장 38-50


 

다른 사람들과 일을 하다 보면자신과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그래서 종종 사역에 있어 의견이 다른 것을 사역을 반대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가 있습니다결코 그렇지만 않습니다우리 주변에는 서로 다른 것이 조화를 이룬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합창단이 합창할 때각 파트 다르게 있어 4부로 부릅니다음은 다르지만 그 다른 음들이 함께 모여서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세상에는 다름을 통해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룬 경우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길에서, 제자들은 누가 크냐는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 논쟁은 제자들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이제 본문은 제자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과 벌어진 다툼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만의 높은 장벽을 쌓음으로서 타인을 배제시키는 전형적인 세상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져야할 자세들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가져야할 자세(38-41)

하나님의 사역을 하다보면 자신과 비슷한 사역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때로는 경쟁상대로 생각할 수가 있었습니다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달란트를 따라서 서로 합력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나가시길 원하십니다그러나 제자들처럼 경쟁심리가 일어나서 문제를 일으킬 때가 있습니다.

 

38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41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38-41)

 

요한은 어떤 이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아니었지만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사람을 보았습니다이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그래서 요한은 그들에 대해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라고 보고합니다.

 

지금까지 귀신 축출 기적은 예수님과 열두 제자의 독특한 활동이었기에제자들은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자신들만 이 기적을 행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 같습니다제자들은 자신들이 우물 안 개구리였습니다자신들이 쳐 놓은 울타리 안에서 스스로 만족한 사람들입니다자신과 다른 것을 무조건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형태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첫째는 약자들은 고립주의(孤立主義)로 나타납니다교회사에서도 나타나고 지금도 나타난 수많은 분파들이 여기에 속합니다반면에 강자들은 팽창주의(膨脹主義)로 나타납니다자신들의 교리와 신조들을 동의해야만 울타리를 열어줍니다그러나 둘 다 배타주의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태도가 아닙니다.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은 귀신 축사 능력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자신들의 전매특허라고 생각했습니다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는 것을 생각지 않았습니다다만 자신들의 권한이 침애 당하고 있다는 사실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만의 은사가 아니라는 사실에 몹시 당황 했을 것입니다제자들은 얼마 전에 귀신을 쫓아내지 못해서 사람들 앞에서 무안당한 경험이 있었습니다자신들은 실패했는데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습니까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의 위신도 실추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그래서 위기감을 느껴서 금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그러한 기적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시행할 수 있다고 밝히셨습니다그리고 그들을 막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공동체는 폐쇄된 특권 공동체가 아니며 수용적인 열린 공동체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진심으로 주의 능력을 신뢰한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뜻대로 어떤 사람을 통해서든지 일하실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자신들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부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제자들의 폐쇄적인 공동체 의식과 특권 의식을 교정하십니다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섬기는 모든 이들에게 상이 있음을 약속하시면서 제자들의 편협한 생각을 고쳐 주셨습니다.

 

사역에 있어서는 다양성을 인정해야 합니다제자들은 단지 자신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일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혹시 특권의식 속에서 당신도 다르다는 이유로 시기하며 그 사람의 사역을 반대하지 않습니까모든 사역을 넓은 마음으로 받아 들려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일군이 되시길 바랍니다.

 

제자들이 멀리해야할 죄(42-48)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켜 나가는 분입니다그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십니다하지만 사람들은 사람들을 경계할 대가 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진심으로 경계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42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43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4(없음45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6(없음47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8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42-48)

 

예수님의 제자들이 경계해야할 대상은 사역을 동참하는 사람이 아니라 범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지체가 제자의 길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그들을 실족한다면 하나님의 무서운 형벌을 받을 것인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그래서 사역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아주 강력한 적군은 범죄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모든 죄를 저지르게 하는 유혹들과 당당히 맞서 싸울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우리는 에베소 교회를 기억할 것입니다사도 바울이 3년 반 동안이나 사역했던 곳입니다그 교회가 이단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그래서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 무척 노력했습니다하지만 그들은 진리는 잘 지킬 수 있었지만첫 사랑은 잊어버렸습니다무고한 피해자가 많이 나온 것입니다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첫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겨버리겠다는 경고하셨습니다(계 2:1-7).

우리 시대에도 성도들이 힘을 합쳐 싸워야할 대상은 사탄입니다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 교회들끼리 교회 지도자들끼리 집안 다툼을 하는 일은 없어야하겠습니다하나님께는 그들이 누구라도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겠다고 경고하신 것입니다예수님의 경고는 계속됩니다지체를 넘어지게 하는 자도 큰 형벌을 받지만스스로 죄에 걸려 넘어지는 자도 형벌을 받는다고 경고하십니다그렇게 신앙을 잃어버리면 그 결과가 너무 참혹하기 때문에 죄를 피하기 위해서라면 우리 몸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인 손과 발과 눈까지도 제거하라고 경고하십니다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고 과장법입니다.

 

죄악으로 오는 위험의 두 가지 측면에서 다루십니다먼저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위험입니다그래서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가 받을 형벌의 중대성을 인상적으로 강조합니다다음으로 스스로 넘어지는 문제 역시 중요한 문제입니다자기 자신 안에서 오는 위험이었습니다그래서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그 결과가 너무나도 중대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것을 피하려면 몸의 지극히 소중한 부분들까지도 제거해 버려야 할 것임을 촉구합니다차라리 손과 발을 자르고 눈을 뽑아서라도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결단 이하에 따라 생명에 들어가느냐아니면 지옥에 던져지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지옥의 불 속으로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죄악으로 영원토록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던져져서 끊임없는 고통을 받아야 하는 끔찍하고 무서운 지옥입니다예수님은 지옥에 가는 것보다 죄를 짓게 하는 손이나 발이나 눈을 없애고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에 대한 단호한 태도를 요구하십니다만약 우리의 손과 발과 눈이 죄를 짓게 한다면그것을 없앨 즉각적이고 완벽하게 죄를 끊을 것을 요구하십니다잘못인 줄 알면서도 계속 죄는 잘못은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혹시 당신은 죄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당신의 삶에서 잘라내야 할 죄는 무엇입니까?

 

제자들에게 필요한 덕목(49-50)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져야할 덕목에 대해 간략한 권면으로 마무리하십니다예수님의 제자들은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그것이 무엇입니까?

 

49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50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49-50)

 

제자들이 서로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가르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불로서 소금에 절여서 성전에 드려지는 번제물처럼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참여하는 희생제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고난의 불로 정결한 제물이 되지 않으면 지옥불에 고통을 당하는 죄악의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불로 정결함을 입지 않으면 남을 실족하는 자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금에 절여진 제자들만이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소금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것처럼 제자들도 세상에 꼭 있어야할 소금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제자들의 역할은 화목하게 하는 일입니다화목케 하는 사람들이 지체를 실족하게 하는 일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죄악을 저질러서 세상을 화목하게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세상은 서로 경쟁하지만 제자는 벽을 허물고 장벽을 부스고 차별을 철폐해야 합니다전쟁을 그치고 평화를 심어야 합니다무엇보다도 화목하기를 힘쓰며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폐쇄적인 사역이 아닙니다모두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나갑니다자신의 이권 때문에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실족케 한다면 무서운 죄악입니다당신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인 교회가 관계가 파괴되어 집니까회복되고 있습니까당신을 통해 하나님의 공동체가 화목하게 되길 바랍니다화목하게 화평하게 하는 제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일컬음을 받기에 합당한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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