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14-01)
고난의 메시아로 기름 부음을 받음
마가복음 14장 1-11절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들의 성취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당하신 수난과 죽음은 적대자들의 승리 사건이 아닙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승리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신 일은 예수님께서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수난과 죽으심을 미래 아시고 그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신 것입니다.
-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민란을 우려해 명절을 피해서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예수님이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한 여인이 그분 머리에 향유를 붓습니다. 예수님은 그분 장례를 준비한 여인의 행동이 복음과 함께 전해지리라 하십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넘길 기회를 찾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한 사람들(1-9)
예수님의 죽음은 무기력한 패배의 죽음이 아니라 적극적인 순종의 표시였고, 승리의 관문이었습니다. 복음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그런 동일한 의미가 있습니다.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는 성도들의 고난의 의미를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을 통해서 가르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1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2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3예수께서 베다니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1-9)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로 세상에 오셨을 때,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은 정작 그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예수님을 환영하고 모셔드려야 할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고 이제는 죽일 음모까지 꾸몄습니다. 종교적 기득권에 사로잡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배척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 사이에 샌드위치 가운데처럼 헌신하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을 죽이려는 종교지도자(1-2)
예수님을 죽이려 한 자들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입니다. 그 시기는 아이러니하게 ‘유월절’과 ‘무교절’ 이틀 전입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이 어떤 날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 백성으로 세워진 날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시적으로 보인 것은 ‘유월절’과 ‘출애굽’이었습니다.
유대인이 지키는 ‘유월절’은 니산월 14일 낮에 유월절 양을 잡으면서 시작되고 15일 저녁 유월절 식사로 끝납니다. 또한 이 유월절이 종료됨과 함께 니산월 15일부터 니산월 21일까지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는 무교절 축제가 진행됩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시켜서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백성을 세우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고, 무교절은 이스라엘이 급하게 애굽에서 나오느라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유월절 식사에는 불에 구운 고기와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을 함께 먹었는데, 여기서 쓴 나물은 애굽에서의 고난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유월절과 무교절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지도자들이 언약 백성의 대표로 오신 예수님을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는 것은 문학적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제거할 방법으로 모의하면서 명절을 피하려 한 이유는 백성이 예수님에게 보여준 환호나 대중적 인기를 고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명절은 피하기로 합의합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세우심을 받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나라 백성의 지도자들을 통해서 죽임을 당할 운명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종말론적 하나님의 백성을 세우는 계기가 됩니다.
(2)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3-9)
예수님께서는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셨습니다. 시몬을 나병환자로 소개하는 것으로 봐서 그는 아마도 예수님을 통해 나병이 나은 것으로 보입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4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며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을 때 빈번히 거하시던 처소였습니다.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이 등장해서 값비싼 나드를 가져와 머리에 붓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나드는 인도산 최상품 발향성 기름으로 값이 매우 비쌉니다.
본문에서도 이 나드의 값어치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으로 설정합니다. 당시 일꾼의 하루치 품삯이 한 데나리온인 것을 감안하면 1년 치 연봉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이것을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기름부음의 의미를 자신의 장사를 예비한 것으로 설명하십니다. 머리에 부은 기름이 몸까지 흘렀다면 이 여인은 옥합의 긴 주둥이 부분을 깨서 기름 전부를 예수님께 부은 것으로 보입니다. 마태의 본문에서는 화를 낸 자들이 제자들이었고, 요한복음에서는 가룟 유다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의 본문에서는 화를 낸 주체가 무명의 사람들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눈에 여인의 행동은 허비로 보였습니다. 그들은 약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더 지혜로운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여인의 행위를 책망한 것입니다. 실제로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지대한 관심을 생각해봤을 때, 이들의 반응에 일리가 있습니다. 더욱이 삼백 데나리온은 한 번에 예수의 머리에 붓기에는 지나치게 큰 액수였기 때문입니다.
한 여인이 식사 중이신 예수님께 와서 옥합을 깨뜨려 값비싼 고급 향유인 ‘나드’를 붓습니다. 옥합의 목 부분이 가늘었기에 그 부분을 깨뜨렸을 것입니다. 옥합을 깨뜨린다는 것은 옥합에 담긴 향유를 남김없이 다 붓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허비가 아닙니다. 사랑은 남김없이 다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기름 부은 여인의 행위를 통해 예수님이 메시아(‘기름 부음 받은 자’란 뜻)이심이 드러납니다. 또한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실 분(메시아)임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 일이 예수님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이라는 말씀은, 이 여인이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합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이 한 일이 전해져서 기억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3) 예수님의 반응(6-9)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들로부터 책망을 들은 여인을 보호하십니다. 그들의 책망을 멈추게 하십니다. 물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난한 자들은 늘 제자들의 주변에 있을 것이지만, 예수님께서는 항상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행위를 사람들의 평가와는 달리 허비나 낭비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헌신의 관점에서 보십니다.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그 좋은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8절에서 설명하십니다. 그것은 이 여인의 행위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준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유대인의 장례에서는 시체에 기름을 바르는 의식이 진행되었는데, 여인의 행위는 바로 그런 의식을 미리 한 것과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인의 행위는 낭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행위가 됩니다. 종종 이 여인의 기름부음을 메시아를 위한 기름부음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예수님 자신의 해석은 그러한 여지를 남기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름부음이 장례를 위한 예식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낭비로 해석되기도 하고 장례를 위한 선한/좋은 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이 여인의 행위는 예수님의 선언을 통해서 더욱 부각됩니다. 복음서에서 이름도 밝혀지지 않은 여인의 행동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기억될 것이라는 선언이 놀랍습니다. 실제로 유대 묵시문학에서는 의인의 행위가 기억될 것이라는 언급이 있습니다(다니엘 20:19; 제 1에녹 104:1).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유대인의 큰 명절에 모여서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는데, 한 무명의 여인은 매우 값비싼 향유를 부어서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 둘을 극명하게 대조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9절은 구문상 이 여인을 특별히 강조해서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10-11)
미술전시회에 가면 관람객들이 멀리서 작품을 바라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까이 보면 확실하게 볼 것 같지만,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 옆에서 수종 들던 가룟 유다는 가장 먼저 알아보고 예수님을 영접해야할 사람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가장 먼저 배반하고 있습니다.
10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1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10-11)
마가는 다시 예수님을 죽이려고 시도했던 음모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이 음모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해답을 얻게 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잡을 방책을 구했지만 상황이 녹록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틈을 노리고 있었는데 전혀 생각지 못한 방법이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 유다를 통해서 제시됩니다.
마가는 유다를 열둘 중의 하나로 언급함으로써 8-10장에서 보여준 제자들의 어리석음과 유다의 어리석은 행위를 연결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대한 메시아의 모습과 예수께서 이야기하는 메시아의 모습 속에서 상당한 불일치를 봅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이 구약에 근거해서 형성하였을 언약적 메시아 기대와 예수님을 통해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 사이에는 큰 격차가 존재한 것도 사실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세례 요한입니다. 메시아의 길을 위해서 평생을 준비했던 세례 요한도 자신의 생애 마지막 시점에 이러한 격차를 실감했습니다(마태복음 11:3).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자들은 자신의 야망과 속셈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마가복음 8-10장). 아마도 이러한 괴리 속에서 유다도 매우 실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발적으로 대제사장들을 찾아가 예수님을 넘겨줄 음모를 꾸밉니다. 이에 대해서 대제사장들이 얼마나 기뻐했을지는 본문에 서술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기뻐했다고 하는 사실은 그들이 유다의 행위에 돈을 제시하는 모습에서 좀 더 분명해집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어떻게 넘겨줄지 기회를 모색하게 됩니다. 여기서 ‘찾았다’라는 동사는 미완료시제(과거의 반복적인 동작을 나타내는 시제)이며 유다의 시도가 지속적인 음모와 시도였음을 보여줍니다. 마가의 스토리가 전개됨에 따라 이제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에 그의 제자까지 합류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가 죽음에 넘겨질 때가 거의 다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동일하지만,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출발점은 같아도 시간이 흐르면서 두세 갈래로, 여러 타래로 나뉘곤 합니다.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와 무엇 때문에 사랑했는지, 어떤 사랑을 부여드릴 수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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