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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11-02)

 


심판을 예고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11장 20-33절


 

열매가 풍성한 나무를 보면 얼마나 기쁩니까? 목회자들도 처음에는 구도자적 태도를 유지하다가 점점 현실과 타협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제자의 각오는 희미해지고 현상 유지에 만족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좋은 열매를 기대하고 심은 나무인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어떤 열매를 기대하십니까?

 

  • 다음 날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은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게 됩니다. 무화과나무가 상징하는 옛 이스라엘이 종결되고 새로운 하나님의 통치가 도래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무효화 사건을 기도와 용서에 대한 교훈으로 연결시키십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성전과 관련하여 행하신 일에 대해서 불안함을 느낍니다.

 

말라버린 무화과나무(20-21)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세상을 향하여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메시지를 가장 짤막하게 요약하면, 그것은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을 받은 너희도 사랑으로 살아야 사람답고 행복하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과 일행은 길가에 가면서 저주 받은 무화과 나무를 보았습니다.

 

20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1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20-21)

 

제자들은 전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말라비틀어진 것을 목격했습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마가복음에서 나타납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로부터 더는 열매를 구할 수 없는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에 반응합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이 문장에서 흥미로운 것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주체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그것이 상징하는 바를 저주하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마가의 문맥 속에서 분명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나타냅니다(예레미야 8:13; 호세아 9:10; 미가 7:1). 이스라엘로부터 더는 열매를 구할 수 없는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심판을 고한 것입니다. 보기에 따라 당혹스러워 보일 수 있는(열매를 맺을 때가 아닌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기에) 예수님의 행위를 상징적 행위로 보면 예수님께서 이러한 행위를 하신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22-23)

‘믿음’이란 기도하는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참다운 기도는 기도를 드리는 자와 기도를 받는 대상과의 신뢰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런 신뢰 관계가 있을 때 신자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될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성전이 파괴되어도 새 시대의 공동체는 여전히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있고, 그 기도는 그 관계에 근거하여 응답될 것임을 예수님께서 분명히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22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22-23)

 

베드로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것에 주목하기보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하루 만에 현실이 된 사실에 집중합니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믿음과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으라.’(22)라는, 이 문맥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언급된 것은 흥미롭습니다. 직전에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과 성전 무효화를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제자들의 관점에서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성전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과 성전을 회복할 것이라고 기대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심판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와 성전 청소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어떻게 그 심판을 피할 수 있을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가 기도 주제와 연결되지만, 예수님의 성전 무효화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성전이 있었던 성전 산’이 바다에 통째로 던져지는 것은 성전에 대한 심판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는 것이 마치 산을 바다에 던지는 것과 같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믿으면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산’은 분명히 ‘시온 산’을 의미합니다. 그 시온 산 위에 있는 성전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바다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 없는 예배와 기도에 장소가 되었던 성전이 있던 시온 산이 바다에 던져질 수 있는 충격적인 이미지를 더해 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있더라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하신 약속들을 파기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하시는 새로운 구원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상징적인 비유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하시는 새로운 일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기도와 용서(24-25)

우리가 누군가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은 채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받은 우리는 마땅히 형제자매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열매 맺는 신앙인의 바른 모습임을 기억합시다. 뿌리가 죽은 외식적 형식주의자가 되지 말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24-25)

 

구약의 언약적 기대를 성취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시대, 즉 예수님께서 왕으로 통치하시는 시대를 ‘기도’라는 주제를 통해서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대목에서 기도에 대한 확신을 말씀하신 것은 매우 적절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성전의 무효화를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대해 기존 유대인의 생각과는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유대인들의 생각에는 성전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잘 들어주시는 기도의 장소로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믿음의 기도를 가르치십니다. 어떤 곳에서 기도 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기도 하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핵심은 이루어질 줄 믿는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즉, 기도의 장소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었습니다(17). 그러므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서 성전의 무효화를 선언하신 후에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매우 시의적절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물리적 성전이 사라지더라도 여전히 기도가 유의미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성전이 없더라도 하나님께 믿고 기도한 것은 받은 줄로 믿어야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기도 응답의 확신이라는 주제를 용서라는 주제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것도 매우 시의적절한데,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경험하고 언약 백성 상호간의 용서를 경험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서로 용서하라는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우리가 용서해야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먼저 용서하신 것이 전제되어 있고, 이 용서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우리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뜻임을 기억해야 합니다(마태복음 18:23-27).

다른 이를 용서하지 못하는 자는 아직 자신이 받은 용서의 깊이를 모르는 철부지입니다. 물리적 성전이 사라져도 새로운 성전 되신 예수님 안에서 제자들은 하나님께 믿음의 기도를 드릴 수 있고, 서로 용서하며 하나님께 받은 용서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축복을 누립니다.

 

권위에 대하여(27-33)

우리는 하늘로부터 온 구원의 은혜를 받고 누리고 있음을 어떻게 확증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한 몇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신 분임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오르셔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신 분임도 믿습니까?

 

27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거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28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29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30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31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32그러면 사람으로부터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는지라 33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27-33)

 

예수님과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본문에 등장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논쟁 장소인 성전으로 다시 돌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행위에 분노를 느끼고 있었고, 도대체 무슨 권위로 이러한 행위를 하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여기서 ‘이런 일’은 성전과 관련해서 예수님께서 보인 급진적인 행위와 선포를 말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신적 권위에 의지하여 이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면, 종교지도자들은 신성모독으로 즉시 그를 고소하였을 것입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는 종교지도자들의 질문은 그 자체로 매우 정교하게 구성된 함정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라고 말하면 신성모독이 되고, ‘사람으로부터’라고 하면 정당성이 상실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 뒤에 도사리는 함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시고 즉답을 피하십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반응은 당대 랍비들이 즐겨 쓰던 토론 방식으로 상대방의 논리적 모순을 역질문을 통해서 드러냅니다. 이 ‘노련한’ 질문으로 이슈에서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요한의 권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던진 질문은 요한의 세례의 기원에 관한 것입니다. 질문을 받은 종교지도자들이 이 문제를 사적으로 의논했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당혹스러워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기원했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은 그 세례가 하늘로부터 기원했다는 대답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오실 자’로 언급한 요한의 사역에 대해 공개적으로 인정하신 바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 역시 요한의 메시지와 궤를 같이합니다(‘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의 세례가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랬다가는 군중의 예측할 수 없는 태도로 곤경에 빠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함정을 놓으려고 질문한 종교지도자들은 도리어 함정에 빠져버립니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사역과 일치하는 요한의 사역에 대해 공식적인 판단을 거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지혜로 권위에 대한 지도자들의 질문을 효과적으로 물리치셨고, 자신의 권위의 근원이 하늘로부터라는 것을 효과적으로 증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도 없이 종교적 형식주의와 외식주의에 접은 유대 교권 사회에 사망 선교를 내리셨습니다. 잎만 무성한 그들의 종교 형태를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 앞에 진실하시길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진짜 신앙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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