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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0-04)


예수님의 제자도를 배우는 길

누가복음 10장 32-52절


 

성도들 가운데 세상과 하나님 나라 질서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해 여전히 세상의 질서와 상식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세상의 질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 예고가 제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제자들의 감추어져 있던 노골적이고 불순한 동기가 전면에 부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과는 다른 참된 제자도에 대해서 인내하면서 가르치십니다. 예루살렘으로의 여행 이야기의 마지막은 맹인 바디매오를 치유하는 이야기로 끝맺습니다. 세인에게 주목받지 못한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치유를 경험하고 길에서 예수님을 따릅니다.

 

죽음과 부활을 예고(32-34)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과 전혀 다른, 자신이 바라는 것만을 구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기도는 응답을 받지 못한다고 단언합니다(약 4:3). 그러므로 성도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32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33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34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32-34)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예고가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장면은 이전과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수난과 죽임을 당할 장소로 예루살렘이 명시적으로 언급됩니다(33). 둘째로, 수난 당하시는 절차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등장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제자 가룟 유다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에게 넘겨지고, 후에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집니다. 셋째로, 이방인들이 그를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라는 언급이 등장하는데, 이 장면은 예수님의 수난 장면에서 그대로 실행됩니다. 그런데 수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부활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부활은 종말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나타나게 될 신원의 중요한 표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종말론을 잘 알고 있었을 예수님의 제자들은 메시아 예수님께서 죽는다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메시아는 유대종말론 안에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신적 통치의 대리자로서 악과 악에 동조한 자들을 심판하고 의와 의로운 자들을 신원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분인데, 그러한 분이 죽임을 당한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이었습니다. 메시아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왕권이 세워진다는 계시는 부활의 아래서만 이해할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35-40)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당신의 생명을 주시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는 주님의 십자가의 도를 따라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섬기듯이 이웃을 섬기는 제자의 도를 행해야 합니다. 자기 욕망을 버리지 못하면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35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35-40)

 

예수님의 1, 2차 수난 예고가 등장하고 난 후에 제자들의 어리석은 모습들이 등장했었는데, 이번에도 여지없이 제자들의 영적인 어두움과 무지의 모습들이 부각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모습이 훨씬 더 노골적이고,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는 제자들 속에 감춰진 불순한 동기가 전면에 부각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수난예고가 주어지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놀라운 청탁을 합니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제자도에 대한 예수님의 거듭되는 인내의 가르침을 생각한다면, 세 차례의 수난예고 후에 이러한 청탁을 예수님께 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영적 무지의 깊이를 밝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들이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의 의미를 얼마나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어두움에 빛을 비춰주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구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는 질문은 앞으로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을 표현합니다. 실제로 야고보와 요한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등극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왕의 즉위식 장면은 그들의 기대와 다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해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역설적으로 그의 왕위 즉위식이 될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에 담긴 합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할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예언적인 말씀이 이어집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이 예수님께서 마신 잔과 그가 받는 세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세베대의 아들들은 순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는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그들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의 청탁을 알게 된 나머지 제자들은 분개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분개했던 이유는 예수님의 지속적인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이 두 명이 어리석은 요청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도 차지하고 싶던 자리를 그들이 선점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제자들이 분개했다고 하는 것은 그들도 세베대의 아들들과 같은 야망에 붙들려 있었음을 보여주는 강한 증거입니다. 만일 야망이 없었다면 그들이 분개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제자들의 반응(41-45)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큰 자가 되고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는 종이 되기 위해 이 자리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종으로 오셨고, 겸손히 그 길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야고보와 요한의 행동에 열 제자들이 화를 냈습니다. 그들 역시 같은 욕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41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42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41-45)

 

이렇게 한심한데도 예수님은 이전처럼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참된 제자도가 무엇인지 인내하며 가르치십니다. 통치자들은 자기 야망을 위해서 자기 힘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가치 체계를 정면으로 반대하시고 전복시키는 가르침을 제시하십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하나님 나라의 제자도에서 큰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본받아야 할 궁극적인 섬김의 본보기로 자신을 제시하십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갖는 성격을 대속물로 규정하십니다. 제자들은 비록 예수님의 죽음이 갖는 대속적 성격까지 따를 수는 없겠지만, 그의 삶이 보여주는 본보기는 따라야 합니다.

 

소경에서 치료 받은 바디매오(46-52)

 

사람들은 육신의 질병을 치유 받는 성령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면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고 있는 구원의 가치를 기억하고 구원을 베푸신 주님께 끊임없는 찬송과 영광을 돌려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46○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46-52)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에 이르렀습니다. 마가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예수님의 여정에서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직전에 있었던 일로 맹인 바디매오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가의 보도에 따르면 그는 맹인이었고 걸인이었습니다. 길가에 앉아 있었다고 하는 표현은 그가 나중에 그 길을 따라 나서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마가의 의도적인 표현으로 보입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듣고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지릅니다.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고백했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구약이 예견했던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가져올 다윗 왕가의 아들이라고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의 꾸짖음 속에서도 바디매오는 더욱 크게 예수께 호소합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난 후, 여정을 멈추시고 그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자신을 부르자 맹인은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옵니다. 이 모습은 흡사 1장에서 시몬과 그의 형제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입고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께 나아온 것과 세베대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삯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은 장면을 생각나게 합니다. 실제로 거지의 겉옷은 그에게 전 재산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그 겉옷을 내버리고 나아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에게 물으셨습니다.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 맹인은 다시 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포하십니다. 이 선언의 결과로 바디매오는 시력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마가는 이 치유의 원인이 그의 믿음이었음을 밝힙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보도할 때마다 그 기적이 믿음에 근거했음을 줄곧 강조해왔습니다. 이 이야기를 종결하면서 마가는 바디매오가 보게 되었고 예수님을 ‘길에서 따랐다’고 보도합니다. 제자들은 이 여정을 갈릴리로부터 시작해서 죽곧 따라왔습니다. 그들은 시작할 때 모든 것을 버려두고 그를 좇았습니다. 흥미롭게도 제자들은 실제로 이 여정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다 도망가는데(14:50),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맹인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고 그에게 합당한 믿음을 표현합니다. 믿음에 근거해서 치유를 경험한 후에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십자가와 죽음의 길에서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이러한 미묘한 대조는 마가복음 독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진정한 제자도의 길이 무엇이며, 진정한 제자란 과연 누구입니까? 물론 마가의 원래 독자들은 이 제자들이 변화되어서 초대교회의 기둥 같은 사도들로 쓰임 받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도들의 부족한 모습을 드러내는 데에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제자도란 이름과 명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계속 따라가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세상의 헛된 것을 구하는 잘못된 신앙을 기복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잘못된 신앙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을 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힘쓰는 참된 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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