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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0-02)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자

마가복음 10장 17-31절


 

창세기 타락 사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이 그 형상을 잃어버린 것, 또는 그것이 비틀려 왜곡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은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이 치유되는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공적 예배의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 또 개인적인 말씀 묵상을 훈련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아주 중요한 축복의 시간입니다.

 

  • 한 부자가 예수님께 영생에 관해 질문합니다. 계명들을 지키라는 예수님의 대답에 그는 어려서부터 지켰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근본적인 도전 앞에서 부자는 자신이 무엇을 진정으로 섬기며 살았는지 드러내고 맙니다. 재물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급진적인 제자도를 깨닫지 못한다면 결코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부자 청년의 질문(17-20)

우리는 재산이 없어서, 지위가 낮아서 할 수 없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지, 소유가 많아서, 지위가 높아서 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일, 영생의길을 가는 일은 정반대입니다. 율법적인 종교 생활만으로 영의 필요를 채울 수 없습니다.

 

17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17-20)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라는 표현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을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향해서 걸어가시는 중입니다. 이 상황에서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이 지속적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때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달려와 무릎을 꿇고 영생에 관해 질문합니다. 이 부자도 예수님을 따르는 데 진지한 관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참조. 10:21).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이 질문을 던진 부자에게 전제된 생각이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얻은 백성의 최종적인 신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백성의 신실한 반응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으로부터 줄기차게 강조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고 해서 자동적인 구원을 부여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신실하게 반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 백성의 자격을 상실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여기서 부자는 단순히 행위 구원의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19절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도 그의 생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대답을 하기에 앞서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라고 확고하게 말씀하시면서, 선함을 하나님 한 분에게만 귀속시키십니다. 뒤따르는 예수님의 대답은 십계명의 다섯째에서 아홉째 계명으로 주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을 다룹니다. 이 계명들의 정신은 레위기 19:18(‘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부자의 질문이 행위 구원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만일 부자의 질문이 행위 구원의 가르침이었다면, 누구보다 예수님이 먼저 그것을 지적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부자는 이러한 계명들을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지켰다고 주장합니다. 이 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이 말씀하셨던 십계명의 명령들은 주로 식별 가능한 행동들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이계명들을 지켰는지 어겼는지 점검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용이합니다.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부자는 자신이 모든 계명들을 지켰다고 아주 진지하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그의 교만을 나타낸다기보다는 적어도 율법에 충실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다 지켰다는 부자의 주장에 다른 특별한 악의는 없다 할지라도, 이것은 계명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에 근거한 주장임이 곧 드러납니다.

 

진짜 문제(21-22)

세상을 살아갈 때 가장 필요한 것이 재물이기 때문에 재물이 우상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정하여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1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21-22)

 

부자의 계명 이해가 피상적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증명됩니다. 예수님께서는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율법 조항을 가지고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십니다.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라는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의 계명 이해에서 빠진 요소를 지적하십니다. 그에게는 영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있었고 예수님을 따르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했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다 팔고 예수님을 좇으라는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방해가 되는 바로 ‘그 재물’을 제거하고 하나님을 섬기라는 초청입니다. 마가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동기가 사랑이었다는 점을 부각 시킵니다.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셨기에, ‘그 우상’을 제거하고 온전히 하나님만 섬기라고 초청하십니다. 그러나 자신의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예수님을 좋으라는 예수님의 사랑의 초청 앞에서 이 부자는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떠나가 버립니다. 이 부자가 진정으로 무엇을 섬기고 있었는지 여과 없이 드러납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참조. 마 6:24).

 

재물과 제자도(23-27)

구원은 하나님께부터 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내 손을 비워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른 삶, 곧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는 삶은 버림을써 가능합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어떤 것을 버려야 할 때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제자입니다. 진정한 제자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23○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6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27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23-27)

 

재물에 대한 이야기를 예수님께서는제자들에 대한 교훈으로 전환하십니다. 제자들을 둘러보시고는 제자들을 향하여 가르침을 전개하십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가 가진 함의를 비유적 이미지를 통해서 전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이 충격적인 말씀을 나름대로 해결해보려는 주석적 논의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낙타(카멜로스) 대신에 후기 사본 중에는 밧줄(카밀로스)이 종종 등장하는데,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밧줄이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됩니다. 단어가 바뀐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예루살렘 성에 ‘바늘의 귀’라는 뒷문이 있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성문이 닫혔을 때 이 조그만 간이 문을 통해서 낙타가 힘겹게라도 통과할 수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예수님의 의도를 약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뜻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26-27).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 유대주의 환경에 살고 있던 제자들에게는 놀라운 가르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부자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십니다.

 

상급의 약속(28-31)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자연스럽게 재물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우상 숭배의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성도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김으로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복을 받아 누려야 합니다.

 

28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1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28-31)

 

10:28에 등장하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다’는 베드로의 대답은 마가의 문맥 속에서 두 가지를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실제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1:16-20). 또한 과거 이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다는 것은 같은 문맥 속에서 많은 재물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부자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합니다. 비록 마가의 본문에 베드로의 보상에 대한 질문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30절의 예수님의 대답을 보면 베드로의 대답 속에 그런 함의가 들어 있음이 드러납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의 잘못된 동기는 마가복음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분명히 드러납니다. 제자들의 감추어진 동기를 이미 아셨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정한 포기의 동기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포기하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서 제자의 길을 걸어간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진정한 보상이 뒤따릅니다. 그 보상은 현세적인 것과 아울러 내세적인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보상과 함께 핍박도 겸하여 받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단락을 종결하시며 충격적인 말씀을 전하십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 말씀은 세상적 가치를 뒤바꾸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먼저 된 자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나중 되고, 세상의 관점에서 나중 된 자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먼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언급이 문맥 속에서 베드로가 한 말에 대한 결론으로 제시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베드로를 위시한 많은 제자들에게 주는 경고일 수 있습니다. 진정한 제자도의 삶은 필연적으로 영생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도의 삶이란 세상적 가치를 가지고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자신들의 희생(28)이 자신들에게 영광스러운 자리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망상을 하면 안 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마가복음의 이야기가 진행되어 가면서 분명해질 것입니다.


아직도 세상 가치관에 젖어 있다면 믿음의 사람으로서 거룩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가서 긍휼히 여겨달라고 기도하시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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