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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12-02)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계명

마가복음 12장 12-34절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원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이웃을 사랑할수록 자신의 삶은 더욱 따뜻해지고 행복해집니다. 사람들을 살아가면 사랑하는데 에너지를 가장 많이 사용합니다. 사랑에 모든 것을 헌신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자체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그분 자체이신 말씀에 우리의 사랑을 집중해 보지 않겠습니까?

 

  •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부활에 대한 신학적인 질문을 시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두개인들의 무지를 지적하십니다. 사두개인들과의 논쟁 후에 서기관이 나아와 율법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이해의 두 기둥 하나님 사랑으로 서기관의 질문에 답하십니다.

 

사두개인들의 계략(18-23)

종종 세상에는 괴변과 같은 논리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논리를 강하게 주장하기 위해서 교묘하게 지어낸 가정들입니다. 일반적으로 일상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논리 속으로 빠져 들어가면 대답하기가 곤란한 상황이 됩니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께 빠져 나갈 수 없는 애매한 질문으로 공격하고 있습니다.

 

18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19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0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21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22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23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4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25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6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27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18-27)

 

예수님께서 활동하신 당시에 이스라엘 사회의 지도자 그룹이 있습니다. 성전에서 제사 제도를 주관하는 제사장들로 이들을 사두개인이며, 또 다른 부류는 성경을 필사하는 서기관들로, 그들은 대부분 율법을 연구하는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사두개인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나아와 질문합니다. 그들은 하스모니안 왕조를 지지하며 성전과 관련된 직분을 유지한 채 소위 기득권의 중심부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는 기득권 세력인 그들에게도 위협으로 비쳐졌습니다.

 

(1) 사두개인들의 계략(18-23)

 

본문에서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께 나와서 부활이 없음을 가지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부활을 ‘반대’하는 근거로 제시한 구절은 신명기 25:5-6의 수혼 제도였습니다. 그들은 수혼 제도가 보여줄 수 있는 최악의 예를 제시함으로써 부활의 부당성을 논증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들의 주장은 어떤 집안에 7형제가 있었는데, 맏형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런 경우 이스라엘에서는 그 동생이 대신해서 대를 이어주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도 자녀를 낳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모든 남편의 일곱 형제들을 통해서 아이를 낳는 데 실패합니다. 아마도 사두개인들은 두 명의 남편이 있는 여자의 예를 들 수도 있었을 테지만, 더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예를 통해서 부활 개념이 파생하는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만들어 내려고 한 이야기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께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그들 중에서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지를 묻는 게 아니라, 이러한 부활 개념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를 드러내려는 의도를 가진 질문입니다.

 

(2) 예수님의 대답(24-27)

 

예수님께서는 거칠 것이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는 대답하십니다. 그들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몰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두개인들은 성경을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고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해한 거라고 말씀합니다. 사두개인들의 관점은 인간의 경험을 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의 관점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성경에 대해서 바로 이해하고 있었다면 부활을 부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그들의 부활에 대한 몰이해는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에 기인합니다. 그들이 제기한 문제점은 부활 후의 삶이 이 땅에서의 삶과 동일할 것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24)은 단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를 소생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혀 새로운 형태의 삶을 창조하십니다(고린도전서 15:35-53).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추론할 수 있는 바는 부활의 때에는 출산이 필요치 않으며, 따라서 생식기능을 위한 이 땅의 관계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때에는 지금 지상에서처럼 부활의 때에 결혼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은 남자와 여자를 통해 육체적인 생식의 구조를 통해 인간의 역사가 이어지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때에는 인간의 정체성과 인간 존재가 지금의 구조하고는 다른 존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두개인들이 정경으로 받아들이는 출애굽기 3:6을 통해 논증을 이끄십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큰 틀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 이미 오래전에 죽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님께서 ‘죽은 자의 하나님’이 될 수 있겠습니까? 칼뱅이 ‘자녀가 없는 아비가 있을 수 없고 백성이 없는 왕이 있을 수 없듯이, 엄격히 말하면, 여호와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스스로 있는 자)로 계시하십니다(출애굽기 3:14-16).

이 계시의 목적은 자기 백성 가운데 임재하신 언약의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족장들에게 출애굽을 약속하셨습니다. 살아계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구원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죽음으로 끝나버릴 관계를 맺었겠습니까? ‘누구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백성과 변치 않는 관계를 맺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에서 부활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에 따라 신실하게 반응한 언약 백성을 종말에 신원하실 것입니다(이사야 26:19-21). 그리고 그 종말론적 신원의 거부할 수 없는 극명한 예가 하나님을 신되하다 죽어간 자들에 대한 부활입니다. 이것이 유대 종말론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주정한 것은 이러한 언약적 세계관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개인들의 이 같은 오해를 오경의 말씀을 가지고 언약적 관계 안에서 이스라엘 족장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설명하십니다. 구약뿐만 아니라 신약을 이러한 언약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가장 큰 계명을 묻는 서기관(28-34)

기독교 신앙에서 아주 중요한 관점 또는 기독교 신앙을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은 양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찾아 들어가서 깊이로 들어가야 그것이 기독교 신앙으로 맞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몇 년 경력이 아니라 지금 자신의 신앙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진실하고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현재 자신의 상태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질문 공격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28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28-34)

 

지금까지 마가복음에서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적대하는 세력으로 등장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이러한 적대 그룹 가운데 예수님에 대해서 다른 태도를 자진 자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두 차례나 적대적인 질문해 왔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제 긍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사람을 소개합니다.

 

(1) 가장 큰 계명을 묻는 서기관(28)

 

본문에 등장한 서기관은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태도에 어느 정도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관해 상당히 급진적인 이해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보여준 안식일의 이해나 정결 규례 등에 대한 이해는 당시의 보편적인 이해나 정결 규례 등에 대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마태복음 5:17).

이러한 관점에서 여기에 등장하는 서기관은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라고 질문합니다. 서기관의 질문은 전적으로 합법적 질문이며, 랍비들 사이에서 더 중요한 계명에 관한 논쟁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모든 계명 중에서 어떤 계명이 가장 중요한지를 물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613개의 계명 중에서 제일 되는 계명을 묻는 것입니다. 그의 질문은 다른 사람들처럼 트집을 집기 위한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논쟁하는 모습 예수님 속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고 있었습니다.

 

(2) 예수님의 답변(29-31)

 

예수님께서는 서기관의 질문에 신명기 6장 4-5절을 인용하여 대답하십니다.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 6:4-5)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할 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은 인간을 형성하는 다른 부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전인격적인 특징을 나타내는 표현 방식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러한 종류의 사랑은 그가 명하신 것에 대한 순종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온 하나님 사랑에 대한 핵심가치를 재차 확인해주고 계십니다.

 

서기관은 예수님께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 계명인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레위기 19장 18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17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18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위기 19:17-18)

 

정리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중요한 계명이고,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다음으로 중요한 계명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을 기초로 해야 합니다. 진정한 의미가 있음을 밝히신 것으로 보입니다.

 

레위기 말씀에 대한 유대인들의 해석학적 초점은 ‘네 이웃’이 과연 누구인가에 모아집니다. 물론 이웃은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싫어했던 사마리아 사람들은 물론 심지어 원수까지도 이웃의 범주에 넣어 확장하십니다(마태복음 5:43-47). 이웃 사랑의 계명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 사랑의 계명으로부터 파생합니다. 다시 표현하면 이웃 사랑의 계명은 하나님 사랑이라는 기초 위에 섰을 때에야 진정한 의미에서 그 참다운 빛을 발하게 됩니다.

 

(3) 긍정적인 반응한 서기관(32-34)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서기관은 자신의 해석을 가미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 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는 언급은 신명기 4:35을 반영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사랑이 이스라엘의 유일신 사상에 근거해 있음을 서기관은 분명히 밝힙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낫다’라는 언급을 통해서 서기관은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두 계명이 제사 제도가 제시한 계명들보다 경중에서 우선시되어야 함을 밝힌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종교지도자 그룹 가운데 매우 이례적으로 이 서기관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십니다. ‘네가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예수님의 이 같은 평가는 예수님께서 특정 그룹에 대해서 일률적인 평가를 하지 않으셨음을 보여줍니다. 마가는 우리에게 이 서기관이 후일 어떻게 되었는지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습니다. 다만 마가는 예수님과 서기관의 대화 이후에 아무도 감히 예수님께 더 이상 묻지 못했다고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놓치면 비본질적인 것에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게 됩니다. 사적 신앙에 매몰되어 스스로를 정당화하거나 균형을 잃게 됩니다. 기존의 고착된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낯선 진리를 수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새롭게 본질을 질문하고 주님의 대답을 경청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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