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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3-02)


진정한 가족을 가르쳐 준 예수님

마가복음 3장 20-35


 

초대교회 로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오해를 받았습니다네로 황제 시대에 성찬식에 사용된 피를 어린이를 잡아서 피를 먹고 마신다고 오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그리고 미치광이 네로 황제의 로마에 대화재를 낸 후그들에게 방화의 누명을 씌워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처형을 받기도 했습니다이러한 오해는 과거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동일하게 일어납니다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비난을 받거나 핍박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그러나 위로를 받으시길 바랍니다주님도 오해와 비난과 핍박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와 축사를 하셨지만 서기관들은 매도했습니다. 친족들도 서기관들과 같이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진정한 영적인 가족이 누구인지를 설명합니다. 그의 가족은 육신의 친족도 아니고 율법을 잘 아는 사람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모함을 받으신 예수님(20-27)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와 귀신 들린 자들을 고치셨습니다이 소문은 순식간에 펴져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사람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주길 원했습니다그러나 주님의 곁에는 항상 호의적인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예수님을 모함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20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21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22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20-22)

 

예수님의 사역은 점점 힘을 더해 가고 있었습니다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께서 식사할 겨를도 없이 그들을 돌보셨습니다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친족들은 예수님께서 정신이 이상하단 말을 들었습니다그래서 예수님을 고향으로 데려가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입니다가족이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예수님을 위한 일처럼 보이지만그것은 십자가의 길을 가로 막는 일이었습니다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실 것을 예언했을 때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서 십자가의 길을 말렸지만그것은 결국 하나님 나라를 방해했던 것입니다.

 

더욱 예수님의 친족들을 괴롭힌 것은 서기관들의 태도였습니다그들 또한 예수님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알려고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성경에 정통하다고 한 서기관들은 한 술 더 떠서 예수님이 바알세불이 들렸고귀신의 왕을 힘을 빌려서 귀신을 쫓아내고 기적을 행한다고 모함했습니다하지만 그들은 더 율법을 가장 잘 알고 진리를 지키는 자로 자처하면서도 정작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영혼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지 못하는 지식이라면아무리 많은 것을 알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들도 살아가면서 오해는 받을 수 있습니다하지만 가까운 사람이나 권위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오해를 받으면 우리를 더 힘들게 만듭니다하나님 나라의 일하다가 오해와 모독을 받을 때 억울함을 당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것 때문에 침체되거나 괴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예수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이 열심히 일하셨지만이런 일로 모함을 당하셨습니다사탄은 활동하는 성도들을 주저앉히려고 노력하지절대로 잠자고 있는 성도들을 깨우진 않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가까운 가족도성경을 많이 아는 서기관들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던 것입니다성급하게 다른 사람을 겉모습만 가지고 평가한 태도는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계속해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모략하고 죽음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23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25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26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27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23-27)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이 하지 못한 일을 하셨습니다귀신을 명하여 내어 쫓으셨습니다그런 모습을 보면서 서기관들은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했습니다귀신 논쟁은 일반적으로 기득권자들이 자신의 반대 세력에게 사용하는 가장 혹독한 사회적인 공격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흥분하거나 분통을 터드리지 않습니다오히려 말씀으로 침착하면서도 분명하게 비유를 통해 변호하셨습니다본인이 귀신의 힘을 입어 쫓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씀합니다비유로 나라가 나라 안에집이 자기들끼리 싸우면 설 수 없음을 설명합니다그러한 잘못된 논쟁을 일축시키십니다예수님께서 귀신을 축사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사탄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 결박하여 승리한 사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사탄의 세력은 여전히 막강하지만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는 이미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가공할 만한 사탄의 힘을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지만과대평가할 필요도 없습니다예수님의 능력은 강하여서 사탄을 멸하기 시작해서 무릎 꿇게 만들었습니다.

 

성령 훼방죄를 설명하신 예수님(28-30)

성령은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그래서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은 성령이 하는 일들을 훼방하는 것입니다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방해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계십니까?

 

28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29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30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28-30)

 

예수님의 사역을 귀신의 사역이라고 진리를 왜곡하는 서기관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경고로 이어집니다이런 행위는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행동입니다그들을 향해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서 이 사실을 더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30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31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0-32)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용서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하지만 구원의 진리를 매도하고 훼방하는 것만큼은 결코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성령 훼방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태도를 가리킵니다서기관들은 예수님의 기적의 능력을 성령이 아니라 사단의 능력으로 돌림으로써 성령을 훼방했습니다메시지 전달자에 대한 거부는 용서받을 수는 있지만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방해하는 것을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성령께서 행하신 권능의 역사들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명백한 선포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조롱하고 핍박하는 일은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하지만 구원의 진리를 매도하고 훼방하는 것만을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그래서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5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마 18:5-8)

 

영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분별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진정한 가족을 설명하신 예수님(31-35)

예수님의 사역에 가장 이해하고 후원해 주어야할 사람들은 예수님의 친족들일 것입니다그러나 주님은 가족들로부터 오해를 받아 배척을 당하기도 했습니다이처럼 가장 가까워야할 사람들이 가장 비난하고 오해한 적은 없습니까그때 본문의 주님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31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31-35)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이 이상하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습니다예수님은 모친과 동생들이 찾고 있다는 말에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라고 대답하셨습니다예수님의 발언은 혈족 중심이었던 당시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당시에는 가족을 거부하거나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으면 삶의 기반을 잃는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잘못 오해하면 인간적인 육신의 관계를 부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절대로 예수님은 육신의 어머니에게 불효자가 아닙니다주님은 십자가에서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어머니를 걱정했던 분이십니다그의 형제들은 지금은 오해했겠지만나중에 사역을 이해합니다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가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함께 앉아있는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그들이 가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하나님 나라의 가족은 육신의 가족도 아니고 율법을 잘 아는 사람도 아닙니다진정한 하나님의 가족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35)이라는 말씀합니다예수님의 참된 가족은 혈통으로 맺어진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임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은 인종과 계층을 넘어서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습니다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은 한 형제요 자매라는 사실입니다마가는 예수님의 육신의 가족들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묘사함으로써 이러한 주제를 더 분명하게 전달합니다.

 

믿음 때문에 종종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어려운 관계에 있습니다그런 분들이 있다면 예수님의 모습을 보시며 위로를 받으시길 바랍니다주님을 통해서 용기와 힘을 내시길 바랍니다지금은 당신의 가족이 이해해 주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가족을 미워하거나 저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당신을 이해해줄 때를 바라보면 끝임 없는 사랑을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밖에 있던 당신을 부르셨습니다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하늘 가족이 되게 불러주셨습니다당신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대접받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배척을 받으셨습니다삶 가운데서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 때고난이 임할 것입니다이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기뻐하실 바랍니다믿음의 가족들이 더욱 소중히 여기며 사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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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3-01)


열두 제자를 세우신 예수님

마가복음 3장 1-19


하나님께서는 우리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길 원하십니다그 관계는 막연한 관계가 되지 않고 계십니다그저 그런 관계도 원치 않습니다항상 주님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관계로 살아가시길 원하십니다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하나님과의 관계 단절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끝낸다는 것입니다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이 기뻐하신 삶이 무엇입니까본문은 그 대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 2장부터 시작된 논쟁은 장소가 바뀌면서 더욱 경렬해집니다. 예수님의 주변에는 항상 예수님을 비판하고 죽이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이 그런 계획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한번 종교 지도자들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의 반응을 살피고, 그 사건을 통해 죽일 모의를 꾸몄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사역을 지속하십니다. 그리고 함께 사역할 열두 명의 사도를 선택하십니다.

 

 

안식일에 손을 고치신 예수님(1-6)

예수님의 초기 사역은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하셨습니다갈릴리라는 지역은 이스라엘에서 소외되어지고 아픔이 있는 배경을 가지고 이었습니다이런 곳에서 많은 사역들을 이루어가시지만반대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가 나타나 있습니다.

 

1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4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6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1-6)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그곳에 손 바른 사람이 있어 긍휼하게 보시지만바리새인들은 연약한 사람을 통해 예수님을 잡을 미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안식일에 악한 일과 선한 일을 대조하고 질문하고 있습니다선한 일로 생명을 살리는 일이 예수님의 사역이라면악한 일로 죽이는 일은 바리새인들의 일들이라고 대조하며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평강과 긍휼 그리고 축복의 사역이지만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대적하면서 죽이려는 음모만 꾸미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이 무슨 날입니까하나님께서 6일 동안 세상을 만드신 후에 마지막 날은 쉬신 날입니다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쉬며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예배를 드리도록 하기 위해 안식일을 주셨습니다그리고 이 날에는 하나님 안에서 쉬면서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날입니다.

그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어느 것이 옳으냐”(4)라고 묻습니다악으로 가득한 심령들은 아무 대답도 못합니다예수님께서는 그 손 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주셨습니다죄로 인해 오그라든 인간의 몸과 영혼을 온전케 만들어 주셨습니다하나님과 인간이 조화로운 관계를 누리게 하는 사명을 성취하고 계십니다안식일은 편안히 쉴 수 있는 날이었지만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오히려 사람을 괴롭게 하는 날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고소할 빌미를 잡으려는 의도를 아시면서도손 바른 사람을 공개적으로 고쳐 주셨습니다예수님은 손이 바른 사람을 통해 안식일에 잘못된 규례를 바로 잡으시길 원하셨습니다그들에게 안식일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 주고 싶었습니다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예수님의 사랑하심과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오히려 그들은 자신들과 종교적 신념이 전혀 다른 헤롯당과 협력하여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가장 중요한 원리는 사랑의 원리입니다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일에 맺어있어서 안식일의 규정을 내세우며 고통 받는 사람은 조금도 배려하지 않았습니다그들의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그래서 종교는 형식적이 되고 이권이 주인 되어 생명을 죽이는 일에 혈안이 되어버렸습니다연약한 손 마른 자의 고통만 더 증가시켰습니다당신의 신앙은 생명을 살리는 믿음입니까형식만 남아있는 종교입니까? 21세기의 신종 바리새인처럼 종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동행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평안 그리고 회복이 있기를 바랍니다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놀라운 능력 있는 삶이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많은 사람들(7-12)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자유를 맛보지 못하고 있습니다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유를 주셨지만 그것을 가지고 방종하면서 살아갑니다반대로 율법을 통해서 억압을 당하면서 살아갑니다예수님께서는 규모 있는 삶을 위해 오셨습니다.

 

7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8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9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10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11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12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7-12)

 

바리새인들의 못된 의도에도 불구하고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적의를 피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았습니다제자들과 함께 다시 갈릴리 호숫가로 나갔습니다그곳에서도 가르치고 병든 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두움에 있던 사람들에게 광명을 찾아서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말라기 선지자 이후 복음의 빛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영적으로 어두워졌습니다예수님의 가르침은 생명을 주는 말씀이었습니다이러한 소문은 각처에 펴졌습니다꿀이 있는 벌이 모여들듯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점점 더 사람들이 곳곳에서 예수님의 행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왔습니다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먼 거리에 있던 이두매와 두로와 시돈처럼 먼 거리에서도 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그렇게 나온 사람들을 예수님은 하나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몸과 마음을 고쳐주셨습니다그러므로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를 아로새겨 주셨습니다.

그 가운데는 귀신 들린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귀신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져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아직까지도 제자들도 깨닫지 못한 놀라운 영적 지식을 귀신들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매우 흥미롭습니다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신분이 무리에게 널리 알려지는 것을 아직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을 세우신 예수님(13-19)

예수님께서는 한 영혼 한 영혼을 사랑하셨지만수많은 무리를 바라보지 않으셨습니다예수님의 사역 중에 갈릴리에서 중요한 사역은 사도들을 선택하신 일입니다사역의 전반부에서는 대중을 상대로 사역하지만후반부로 갈수록 제자들에게 많은 시간을 집중하십니다.

 

13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16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17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18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19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13-19)

 

예수님께서 자신을 찾아온 무리를 떠나 산 위에 올라가셨습니다산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있는 일군을 세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이 사건은 구약성경에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서 하나님의 사명을 받는 것과 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무리 중에서 자신이 원하시는 열두 명을 선발해서 그들을 사도로 세우셨습니다이 열두 명을 세움으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육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두 명의 아들들을 통해서만 이스라엘이 이루어졌습니다하지만새로운 영적으로 이스라엘은 새로운 열두 명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그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회개와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로 이루어졌습니다예수님께서 세우신 열두 제자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기초가 됩니다이들은 새로운 신앙 공동체의 대표자들입니다출신성격직업 관심사 등 모든 것이 달랐지만하나님 나라를 전할 사명자로 부르셨습니다.

많은 무리들은 따른 것은 흥분을 일으키고 인기를 얻습니다그러나 반면 착각을 일으키게 됩니다군중에 많은 무리에 휩싸여서 자신이 가야할 많은 방향들을 놓칠 때가 많이 있습니다주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은 혼자 담당하지 않으셨습니다사역에 많은 부분을 제자들과 공유하길 원하셨습니다제자들을 구분시켜서 그들을 훈련시키시길 원하셨습니다.

 

그 사도들을 구별하신 목적을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14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14-15)

 

예수님께서 열두 명의 제자를 세우셨습니다그들을 따로 세운 목적은 첫째는 주님과 함께 있게 하고다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시도록 하였습니다그리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까지도 허락해 주셨습니다주님과 함께 한 제자가 된다는 것은 믿음과 삶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제자로 세우셨습니다아주 평범하고 배척 받던 당신을 불러 세우셨습니다또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우리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예수님의 선택 때문입니다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즉 임마누엘 되는 삶입니다그리고 주의 명령을 가지고 나가서 증거 하는 것입니다결과적으로 당신이 복음을 증거할 때 더러운 귀신들을 쫓겨나는 능력을 맛볼 것입니다.


어떤 수고를 감내하더라도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형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이 필요합니다하나님을 찾는 무리들 중에서 제자로 세우며 자신의 사명을 부여해 주셨습니다우리는 불러서 제자를 삼아주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주님의 권능을 선포하는 능력 있는 성도들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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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2-02)


 죄 사함을 보여주신 예수님

마가복음 2장 13-28절


 

하나님을 만난 경험은 사람마다 모두 다릅니다. 당신이 만난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라고 분명하게 소개할 수 있습니까? 신앙 간증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잘 구성되어 있어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어둠 속에 삶, 예수님을 만날 때의 변화된 과정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삶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롭게 거듭난 삶은 과거의 삶에 분명한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새로운 문을 여십니다. 이제 새로운 문으로 들어온 사람과 거부한 사람을 설명합니다. 먼저 세리를 제자로 부르셨고, 세리와 함께 집에서 잡으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율법에 매인 사람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어 비난을 받았습니다. 또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가면서 이삭을 꺾었던 일에 대해 또 안식에 대한 문제로 제기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예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임함을 입증하셨습니다.

 

레위를 부르신 예수님(13-17)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평이 좋지 않는 사람과는 같이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외모로 보고 판단하는 선입견(先入見)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외모를 보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중심으로 살펴보셨습니다. 그래서 종종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오해를 사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13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5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16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13-17)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면 누구나 환영을 받을 수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 가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지만, 반대로 그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고 증오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1) 새로운 제자를 부르심(13-14)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 시내로 들어가시면서, 세관을 지나치셨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인 레위라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라는 사람의 마음의 눈에서 그 사람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14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14)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베드로와 안드레처럼, 야고보와 요한처럼,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곧 바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죄인 취급을 받았지만, 누구보다도 넉넉하게 살 수 있었던 세리라는 직업을 버리고 가난하지만 떳떳하고 자유롭게 사랑 받으면서 인간답게 대접받을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레위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집에서 잔치를 배설하고 친구들까지 초청하였습니다. 공동체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하며 살던 친구들인 동료 친구들을 초청한 것입니다. 당시 세리들은 칭찬 받거나 존경받은 직업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반대로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멸시와 혐오에 대상이었습니다. 심지어는 로마 정부에 협조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 매국노로 여겼던 사람들입니다. 그들과 상대하여 얻는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과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도 죄인을 용서하시고 받아주신 자비의 사람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곳은 순식간에 회개와 사죄가 선포되는 부흥회 자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들을 보셨을 때, 은혜와 긍휼이 필요한 죄인일 뿐이었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러한 죄인들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므로 유대인들이 쌓았던 정결법의 담을 헐어버리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만든 부정과 정결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다시 쌓았던 것입니다.

 

(2) 새로운 시대의 가치관(15-17)

 

하지만 그들의 기쁨을 멸시하고 증오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유대사회는 사람들을 구분했습니다. 그 당시에 죄인들과 세리들과 같이 한 식탁에 앉은 것은 불경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바리새인들에게 불온한 사람으로 증오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16)라고 단지를 겁니다. 그들에게 경건한 사람은 세리와 죄인들과 상종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옷깃만 쓰처도 부정해진다고 믿었습니다. 사람들이라면 그럴 수 있지만, 예수님을 다르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은혜와 구원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그들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7)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기들은 건강하고 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죄를 회개할 필요도 없고, 구원 받을 필요도 없고, 메시가 오시면 가장 먼저 축복을 받고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자기 동족 유대인들을 비판하고 잘못을 지적하고 판단하는 것 그것이 그들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죄인인 레위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지만, 의인이라고 자부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메시아를 못 알아보고 대적했습니다. 그들이야 말로 회개해야 될 진짜 죄인이고 병든 자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세리인 레위가 바로 우리에게 마태복음을 기록한 세리 마태로 알려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 마태와 친구들인 같은 사람들을 환영하기보다는, 사람들이 멸시하는 사람들을 무시할 때, 예수님께서는 큰 인기를 얻으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의 인기와 평판보다도 자신이 이 세상에 보냄 받은 사명을 위해서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인은 실제적인 의인이 아니라 ‘자칭 의인’을 지칭한 것입니다(참고 누가복음 7:36-47).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이 치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예수님 앞에 나오면,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변화시켜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건설은 회개와 믿음으로 이루어진 나라임을 보여줍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문제를 제기하는 데 익숙했습니다. 혹시 당신도 다른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기보다는 비판하는 데 익숙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모든 행동을 이해하셨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차별 없는 은혜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차별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실천해야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차별 없이 하나님 나라의 일군으로 삼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 다양한 사람들을 부르셔서 하나님 나라에 확장하는 일에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차별을 두고 있다면, 예수님의 뜻과 반대되는 길로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 대한 선입관을 버리고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금식에 대한 논쟁하신 예수님(18-22)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이 왕을 인정하고 왕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새로운 가치관과 삶의 방식, 새로운 인생 목표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진정한 새로운 삶입니다. 바울도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롭게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라고 말했습니다. 새 날이 새로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새롭게 됩니다.

 

18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9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1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18-22)

 

세리의 집에서 만찬에 초대되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있을 때, 바리새인들이 요한의 제자들과 함께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한 번 대속제일에 금식을 했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을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했습니다. 하지만 금식했다고 자신들이 더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문제였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금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 왔습니다. 이 일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증거를 제시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평할 때, 세리와 죄인 친구며,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못마땅한 것으로 평가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라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이것은 과거의 금식과 경건 생활에 대한 관습의 문제였습니다. 그 당시 유대 종교에는 세 가지 관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구제, 다음은 기도이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금식이었습니다. 이것을 그들의 경건 생활에 판단 기준이었습니다. 과거의 규정을 지키지 않은 제자들의 행동을 문제를 삼았던 것입니다.

 

(1) 혼인잔치 비유(19-20)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예를 들어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혼인잔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도 절대로 금식을 혼인날과 겹치지 않도록 했습니다. 오히려 실컷 먹고 마시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나 신랑을 잃을 때가 올 텐데, 그 때는 금식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신랑에 비유하고 이스라엘을 신부에 비유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신랑으로 이스라엘을 신부로 비유한 것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음란한 신부 이스라엘이 우상 신랑과 바람이 나서, 신랑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부부관계가 깨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신부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다시 보냈던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라 그 구원에 대해 감사하고 기뻐하고 잔치할 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가 올 때인데 그 때는 금식해야 합니다.

 

(2) 새로운 부대의 비유(21-22)

 

원래 포도주 부대는 염소가죽으로 만들었습니다. 낡은 부대는 신축성이 떨어져, 새 포도주를 담으면 가스 압력 때문에 떠져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21)라고 말씀하십니다. 새 부대와 같은 풍요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왔는데, 옛 것만 고집하고 그 나라를 영접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참된 종교는 의식 같은 종교 행위로 자기 의를 과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겸허하게 인격적으로 신랑 예수님을 영접하며 그 분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찌든 우리 생각과 가치관을 버리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 나라를 만끽할 수 없고, 예수님께서 우리에 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자신만 아니라 공동체도 예수님의 복음을 담을만한 열린 마음과 겸허한 마음으로 늘 성령의 역사를 기다려야 합니다.

 

회개는 과거의 잘못된 삶들을 버림 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생사가 달린 문제라도 버림으로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물을 세리 테이블 그리고 아버지까지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과거를 돌아보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62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2)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세 가지를 통해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신랑의 비유, 생베 조간의 비유 그리고 새 포도주와 새 부대의 비유를 통해서 종교 지도자들에 잘못된 생각에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결혼식 잔치를 예로 들면서 금식은 필요할 때에 정당한 이유로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사역 상황이 메시아 잔치 상황이기에 지금은 금식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점을 밝히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22)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는 옛 시대를 ‘헌 가죽 부대’와 ‘낡은 옷’으로 비유하고, 새 시대는 ‘새 포도주’와 ‘새 부대’ 그리고 ‘생베 주각’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옛 시대의 방법으로 살았다면, 새로운 시대는 비통에 금식이 아니라 잔치와 같은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야 합니다. 새 시대에 맞은 행동이 요구된 것입니다. 새로운 전환의 배움에 겸손한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새 포도주를 과거의 낡은 율법의 부대에 가두어 둘 수 없었습니다. 과거에 것으론 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부대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거나 새로운 시대를 읽어야 될 때가 있습니다. 옛날 방법만 고집한다면 세상을 쉽게 다가갈 수 없습니다. 이 시대에 걸맞은 행동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기독교가 이 시대에 좋은 영향력을 미치고 못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 시대를 보는 안목이 부족해서 기독교가 홀대 받고 있습니다. 세상에 기독교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어려움이 이런 부분입니다. 이런 것들을 잘 생각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안식일에 대한 논쟁하신 예수님(23-28)

하나님 나라는 과거에 억매인 나라가 아니라 아닌 새로운 나라입니다. 과거의 잘못된 제도로부터 회개이며, 잘못된 형식적인 종교로부터 회개입니다. 잘못된 생활에 매여 있으면서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는 바리새인의 어리석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종교는 생명이 빠진 형식에 집착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것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마음은 가물어 간 것입니다. 그곳에 새로운 단비를 부어주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23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24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25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6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27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23-28)

 

예수님께서는 새 시대의 특징으로 한 가지 더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안식’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안식의 나라이고, 구원은 안식을 얻는 안식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안식일에 대한 논쟁입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가던 중 이삭을 꺾어 먹었습니다. 이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안식일 규례와 관련하여 문제를 제기 합니다. 바리새인들의 법으로 치면, 그것은 추수행위고 탈곡행위로 안식일을 어기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일행이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제단 진설병(빵)을 먹어 던 일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사무엘상 21:1-6). 이러한 일도 문제가 되지 않았던 예를 통해 반박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이것은 안식일의 제도나 규례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주인도 정죄하지 않는 일을 바리새인들이 정죄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39가지의 할라카라든지 234가지의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이 규례들을 지키도록 요구하였습니다. 이것은 안식일에 사람들을 노예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새 시대에는 안식일 노예의 날이 아니라 축복의 날로 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 법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장차 메시아를 보내서 죄와 사망 아래서 안식을 잃어버린 인류에게 태초의 안식을 회복시켜 주려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 메시아가 왔고, 그 메시아 안에 있는 제자들에게는 모든 날이 안식일입니다. 그래서 ‘인자는 안식일에 주인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성도들이 쉬고 있을 때 무능하다고 말합니다. 끊임없이 일하고 생산하고 성취해야 잘한다고 칭찬합니다. 결국에서는 쉬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하다가 죽게 됩니다. 죽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처럼 죽을 만큼 힘들게 일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시러 오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처럼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지만, 속은 썩어 문드러진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던 제자의 삶처럼, 우리들도 그러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초청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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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2-01)


죄 사함을 보여주신 예수님

마가복음 2장 1-12절


 

세상을 살아가보면 난관(難關)에 부딪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앞에서 사람들의 태도가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대체적으로 두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부정적으로는 뒤로 물러서거나 포기하고 원망하며 분노합니다. 반대로 문제 앞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단 것입니다. 난관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긍정적인 태도를 취할 것입니다.

 

  • 본문은 2:1-3:5까지 등장하는 다섯 가지 논쟁 이야기의 첫 번째 해당합니다. 가버나음에서 벌어진 중풍병자의 치유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신 예수님의 사역이 그의 백성들에게 실제적인 것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를 경험하는 수단으로서 믿음에 대한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신 예수님(1-5)

하나님께 포기하지 말고 은혜를 간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성도들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하는지,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이 세상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성도들을 향해 조롱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결해 나가면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1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1-5)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친 후, 며칠이 지나서 가버나움에 다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한 집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계실 때, 그곳에는 입추의 여지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곳에서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한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나오는 과정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방법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1) 가버나움으로 가신 예수님(1-2)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진행하셨스니다. 이 사역은 고통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사역이었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선포뿐 아니라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귀신들인 사람들을 치유해주는 사역도 같이 수반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의 대중적인 인기는 상종가를 쳤던 것 같습니다.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시자,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불신앙의 도시’로 낙인찍힌 가버나움에도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왔던 것입니다. 얼마나 운집했던지 문 앞까지도 사람들이 들어설 수 없을 정도로 가득 차서 용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수 일전에 진행되었던 그의 갈릴리 사역의 여파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곳에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지속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를 가르침과 치유의 형태를 통해서 증거 하셨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도’라는 표현은 문맥상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3-4)

 

마가복음은 중풍병자 치유 이야기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 마태복음보다 더 자세하게 소개합니다. 마태에서는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이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 이 사람을 예수님께로 접근시켰는지에 대한 묘사가 없습니다. 반면에 마가의 본문은 중풍병자가 함께 온 사람들이 수 많은 사람들 때문에 지붕을 통해서 중풍병자를 달아 내렸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당시 팔레스틴의 가옥은 주로 평지붕이었고, 그 지붕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습니다. 지붕은 흙과 짚 나무 등을 이겨서 만들었기 때문에 중풍병자를 달라 내린 사람들이 지붕을 해체하기가 콘크리트로 지은 현대적 구조물에 비해서 손쉬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업은 매우 곤란한 상황을 야기하는 작업이었을 것입니다. 남의 집 지붕을 훼손한다는 생각은 어느 누구도 쉽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사건으로 돌아가서,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한 중풍병자가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쉽지 않습니다. 중풍병자는 친구들에 의해 예수님께서 계신 곳까진 왔지만, 많은 무리 때문에 집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했던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한 방법은 지붕을 걷어내고 중풍병자가 누어있는 침상 채 예수님께서 계신 집안으로 내려 보낸 방법이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중풍병자를 친구로 둔 네 사람의 믿음을 봅니다. 지붕을 뜯어서라도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나온 이들의 모습 속에서 행동하는 믿음과 사랑의 모습을 배웁니다. 자기들의 문제가 아닌데도 중풍병자를 고쳐 주기 위해 그곳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저돌적인 행동을 취한 이들의 모습은 예수님께서도 인정하시는 신앙이었습니다.

 

(3) 죄 사함을 선포하시는 예수님(5)

 

예수님께서 보신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에서 그들이 누구를 이야기하는지 그 자체로는 분명해 보이지 않습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가리킬 수도 있고, 중풍병자까지도 포함된 사람들을 언급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전자를 의미한다면 믿음이 가지고 있는 공동체적인 성격에 대한 강조를 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붕 해체 작업이 짧은 시간 안에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고 네 친구들과 함께 누워 있는 중풍병자의 동의 없이 진행되었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아마도 ‘그들의 믿음’에서 ‘그들’은 중풍병자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끝까지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이방여인이 부스러기 운혜라고 사모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을 만지실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내놓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부스러기 은혜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당신을 만지시고 치유하며 세우실 것입니다.

 

간절히 치유 받기 위해 남의 지붕을 부스면서 까지 예수님께 나오는 중풍병자와 네 친구들의 행동을 믿음으로 간주하십니다. 그들의 행동은 일반적인 상식이나 관념을 벗어난 급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체면이나 염치, 사회적인 통념 안에 갇혀있는 세상 가치관을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아신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가는데, 당신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중풍병자의 네 친구들의 믿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져야할 믿음입니다. 뜻하지 않는 난관에 부딪히면, 쉽게 포기할 수 있습니다. 포기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포기가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주님의 제자들이 나가는데 뚫어내야 할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담대하게 통과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을 갖기 원한다면,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가는 것입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주님께 나아가길 머뭇거리진 않습니까?

  

잘못된 믿음을 꾸짖는 예수님(6-10)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모르면서 자신의 경험과 지식으로 하나님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으로 성령의 역사를 제한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판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필요합니다. 비판이나 경험을 말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6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6-10)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모든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반응한 것은 아닙니다. 같은 일이지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죄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보여주시고 게시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고 계십니까?

 

(1) 서기관들의 도전(6-7)

 

서기관들은 자신의 생각에 다른 것에 예수님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관점과 가치관과 신학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진단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의 마음을 아시고 자신의 정체성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분명히 죄 사함에 대한 관점은 서기관들의 생각이 맞습니다. 메시아 시대가 되면 죄 사함의 은혜가 있을 것임을 구약의 선지자들이 공통적으로 외쳤던 내용입니다(이사야 29:18; 예레미야 31:34; 에스겔; 미가 7:18-19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성경에서 죄 사함의 주체는 의심할 나위 없이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이사야 43:25; 출애굽기 34:6 이하). 하나님께서는 죄 사하는 권세는 사람들에게 주지는 않으셨습니다. 죄는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범죄한 인생들은 스스로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 죄 사함의 권세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이와 같은 행위가 신성을 모독한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는 종교지도자들의 생각은 이러한 맥락과 맞닿아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께서 지적한 대로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패역함과 외식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종교지도자들이 그와 같지는 않았으며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현실성 있는 독법입니다. 패역한 지도자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행위와 말씀에는 당시 종교적 전통에서 신성 모독으로 느낄 법한 것도 있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2) 예수님의 응답(8-10)

 

서기관들이 이러한 생각을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에게 도전에 대해서 응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둘 다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이 더 어렵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그 말의 효력이 나타났는지를 어느 누구도 즉각적으로 알아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죄 사함의 선포는 절대로 쉬운 발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라 여겼기에 그 말이 야기할 수 있는 파장은 정상적인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내 죄 사람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유대인의 정서상 훨씬 어려운 말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죄 사함의 말씀을 선포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불신은 마음 밭에 거친 독초들입니다.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보면서 마음속에 불신앙과 적의의 독초를 키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믿음과 사랑을 키우고 실천하는 사람의 극명한 대조를 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지금 주님과 함께 집 문 안에 있지만 실제로 그들은 주님의 문 밖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비록 집 바깥에 있었지만 주님이 칭찬하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처럼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서라도’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나아가는 믿음의 행동은 주님이 보시고 기억하시며 칭찬하시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치유와 사람들의 반응(11-12)

적극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적극적으로 찾고 구하는 자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푸십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신성모독죄로 정죄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 치유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11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11-12)

 

예수님께서는 죄 사함을 선포하셨을 때 서기관들의 생각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의 논쟁을 정리하시면서, 자신이 죄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의도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11)고 명하셨습니다. 아마도 서기관들은 눈에 보이는 중풍병자를 치유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현대의학에도 중풍병자를 완치할 순 없습니다. 마비되었던 기관이 움직인다던지 조금의 차도가 있을 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질병을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요한복음 9장). 물론 모든 질병을 직접적으로 특정 죄에 대한 결과로만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풍병자에게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죄 사함을 선포하신 것은 그의 경우에 있어서 죄와 질병 사이에 연관성이 있음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즉, 이 경우에 있어서 질병이 치유된 것은 죄 사람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우려와 상관없이 중풍병자에게 침상을 가지고 걸어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는 ‘곧’ 일어나 침상을 들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나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중풍병이 완전하게 나아 건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속에 있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가는 이 중풍병자 치유기적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단순히 ‘이적 행하는 자’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강조점은 선지자들이 예견했던 하나님의 종말론적통치의 한 부분인 죄 사함의 사건이 예수님을 통해 실제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리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사함하는 권세가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죄로 물든 몸과 마음을 모두 치료하십니다.

마가의 이러한 묘사는 이 이야기의 초점이 단순히 기적 이야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신 예수님의 실체적인 통치사역에 맞추어져 있음을 보게 합니다. 또한 그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를 경험하는 수단으로 믿음에 대한 강조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강조점은 불신앙적인 태도를 보이는 서기관들과 사람들의 믿음이라는 적절한 대조를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가버나움에 찾아온 중풍병자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들어내고 있었습니다. 중풍병자와 그를 메고 온 자들은 거침없는 믿음으로 반응하였지만, 서기관들은 신성모독으로 간주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못 알아본 그들이 도리어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우리 앞에 다가온 새로운 시대에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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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1-03)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증거들

마가복음 1장 21-34절


 

‘동상이몽(同床異夢)’이란 말은 같은 침대에 잠을 자더라도 각자 다른 꿈을 꾼다는 말입니다. 같은 말을 들어도 각자 다르게 해석합니다. 같은 일을 경험해도 배우는 교훈이 서로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왕으로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분의 사명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고난 받는 메시아요, 둘째는 영광 받는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은 영광 받는 아들로서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결과로 사단의 세력은 물러가고, 어두움에 세력이 떠나가고, 온갖 사망의 증상들이 해결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 먼저 예수님의 사역을 정리해 보면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가르침(21) 악한 영들을 축사하심(23-27) 그리고 복음 전도(35-45)가 중요한 사역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사역을 계속 진행하고 계십니다.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권위 있는 교훈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은 사역을 보고 놀랐지만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신 예수님(21-28)

많은 귀신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쫓으시고 온갖 병들이 고쳐졌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예수님의 권세로 하나님 나라가 어두움의 나라를 침노하여, 어두움과 악한 나라가 하나님 나라로 변화된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권세가 사탄의 권세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첫 사역은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일어났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으로 들어가셔서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계셨습니다.

 

21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4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21-28)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먼저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회당(會堂)’은 유대인들이 모임을 갖는 집회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특별히 가버나움 회당 가운데서 말씀과 기적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 같지 않았습니다. 있는 그대로 예수님과 그 분의 사역을 수용하지 않고 자신들이 기대한 대로 예수님을 평가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신 후에 그의 가르침을 통해서 예수님의 인견과 사역 안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설명해 나가십니다.

 

(1) 권세 있는 말씀(21-2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신 후에 그의 가르침을 통해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안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설명해 가십니다. 이전 단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 부르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내다보셨다면, 이제 그의 권위 있는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가버나움의 회당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한꺼번에 자신을 들어내지 않으시고 점진적으로 들어내셨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메시아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들었던 많은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권세 있는 자와 같았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권위 있는 새 교훈이었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율법학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가르침은 평소 율법학자들의 가르침과는 비교할 수 없이, 권세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당시에 성경 선생인 랍비들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달랐던 이유가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단순하게 성경을 지식적으로 전달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본인이 친히 말씀이셨습니다. 그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서의 권위가 예수님의 말씀과 모습에서 있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기계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역동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말씀의 특권을 지니고 있는 교만함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서기관들은 이성적으로 알지만, 그들은 말씀을 가슴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말씀의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자신의 삶이 되어졌고, 말씀을 선포하신 마음의 믿음과 확신이 있었습니다.

 

(2) 귀신을 쫓는 능력(23-26)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말씀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사역도 하셨습니다. 그곳에는 더러운 귀신들린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들 귀신들린 사람에 대해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유대교에서 가장 거룩한 날인 안식일에, 거룩한 장소인 회당에서, 거룩한 사람들인 종교지도자들이 모여 있는데도 부정한 귀신들인 사람 하나 어떻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유대교가 결코 죄인을 사탄의 손아귀에서 구원할 수 없는 무능한 종교임을 증명해 줍니다. 이미 그 종교의 수명이 다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게 말씀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더러운 귀신을 꾸짖고 내어 쫓고 있습니다. 거룩한 회당을 장악하고 있던 더러운 영은 그 시대의 영적인 상태를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어두워질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심령에 작은 죄라도 있을 때, 영적으로 어두워집니다. 거룩한 영과 어두운 영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보자,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24)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우리와 당신에게 이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수사적 질문인데, 유대인들의 언어적 배경 속에서 이 질문은 보통 지위가 낮은 자가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자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주십니다. 자신이 거룩하신 자이심을 나타나고 있습니다.

놀랍ㄷ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아인 것을 알아본 것은 종교지도자들이 아니라 귀신이었습니다. 이 더러운 귀신은 예수님을 만나자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칭호를 통해서 예수님의 신분을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라는 귀신의 질문은 예수님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사탄과 그의 세력을 물리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더러운 귀신 조차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란 사실을 알아보고 있는데, 거룩함으로 포장된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귀신에게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26)라고 명합니다. 귀신은 하나님의 아들의 명령에 순종하여 잠잠하고 사람에게서 쫓겨나옵니다. 이 축사는 단순히 이적을 말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귀신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귀신들의 쫓겨남이라는 주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귀신은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잘 아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 예수님께 순종하려는 마음은 전혀 없고,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빙해하려는 존재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할 마음이 전혀 없이 입에 발린 고백이나 성경적인 지식이나 심지어 예배나 찬양과 같은 것들을 아무리 잘해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 즉,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에 나서겠다고 하는 자만, 주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로 인정하시고 그들의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이 가버나움 회당 사건은 예수님께서 사탄에 대한 첫 번째 승리였습니다. 하나님의 권세로 가르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고 사람들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러한 사역들이 안식일에 일어나야할 사역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거룩하신 성령을 통해 하시는 사역입니다.

 

(3) 메시아에 대한 반응(27-28)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자를 사탄의 통치로부터 해방해 주었습니다. 이 치유되는 것을 본 무리들은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27)라고 감동하고 놀랐습니다. 이것은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사람들 반응 속에 ‘권위’는 단순히 말로 귀신을 제압한 예수님의 권위를 언급한 것 같습니다. 사탄의 세력을 결박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신 예수님의 이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를 묻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일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새로운 가르침이라고 규정합니다.

예수님의 이적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연관되고 있고, 이 이적과 가르침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인 하나님 나라와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러한 일이 발생했느냐는 질문은 마가복음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등장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과 같습니다. 그 시대는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 주어질 것이고 사탄의 세력이 결박당할 것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을 치유하는 이적 이야기는 종말론적 사건의 선취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자신의 선생들이 권세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귀신을 쫓아내신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듣고 체험했지만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더 이상 아무런 믿음의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모두 다였습니다. 아무도 그 사건을 통해 믿고 회개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적은 결코 감탄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을 보고 우리의 죄에 대해서 통탄하여 돌아서고, 그 권위 아래서 경탄하여 복종해야 합니다.

 

시몬의 장모를 고치신 예수님(29-31)

오늘날 과학의 발달로 인해 훌륭한 설교들을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은 더 많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설교를 감상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 설교대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려는 사람은 점점 적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능력을 체험한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감동에 감탄한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 능력이 자신의 죄를 통탄하게 하고 돌아설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 경탄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29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30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31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29-31)

 

예수님의 치유사역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제는 거룩한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장소를 옮깁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성전과 회당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중심이 성전과 회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과 제사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곳에서만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어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광야 같은 세상에서도 역사하신 것입니다. 회당을 뛰어넘어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인 시몬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서도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일어난 말씀과 기적을 보고도 배척했지만, 성전이 아닌 집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나온 야고보와 요한은 시몬 베드로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요한의 서술에 따르면 베드로 및 예수님의 제자들의 상당수는 갈릴리 벳세다 출신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 일행이 가버나움에서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결혼 후에 가버나움으로 이사한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인 시몬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시몬 베드로의 집에서는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어있었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열병으로 거동하지 못할 만큼 쇠약해진 상태였습니다. 그곳에 누어있던 시몬의 장모 손을 잡고 일으키실 때, 그녀에게 있던 열병이 떠나게 되었습니다. 열병에 누어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고침을 받은 장모는 예수님과 그 무리들을 위해 수종을 들었습니다. ‘수종을 듣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섬김을 나타내는 동사인데, 여자들에게 사용되었을 때 음식을 대접하는 등의 섬김을 의미합니다.

 

문맥에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신 이야기를 기록해주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한 기적을 말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앞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통치가 성취되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글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회복되는 것을 육신적인 질병으로부터 자유함을 받게 되는 것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마가는 이사야가 내다보았던 종말론적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이미 현실로 임했음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회복된 그녀는 예수님과 그와 함께 한 무리들을 위해 수종을 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녀의 태도를 통해서 오늘날 은혜 받은 자들의 태도를 그려볼 수 있습니다. 엄청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시몬의 장모처럼 섬김으로 삶을 나타나야 합니다. 회복 후에 이렇게 섬김은 마가복음의 제자도의 한 단면을 잘 보여 줍니다.

 

각종 병자와 귀신들린 고치신 예수님(32-34)

종종 인간의 열정으로 일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열정은 때로는 주님의 일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열정보다 중요한 것은 잘 듣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가 사망의 나라를 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는 귀신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을 함부로 허락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실지 예수님께서 스스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32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34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32-34)

 

마가는 회당에서 귀신 축출 사건을 기록한 후에 베드로의 장모가 가지고 있는 육신적인 질병을 치유한 사건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이 짧은 이야기들의 종결로 가버나움의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왔음을 언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안식일에 행하고 계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지난 저녁에 많은 사람들이 각종 병든 사람들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몰려 나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새벽이 되도록 병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의 섬김으로 인해서 안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참된 안식, 치유가 없던 사람들에게 치유를 주시기 위해 섬기셨습니다. 순식간에 베드로의 집은 영과 육신을 치료하는 병원이 되었습니다. 각종 모든 문제들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모였던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모든 문제들을 나가면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이 장소에서도 귀신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를 향해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한 말을 옳을지라도 그가 말하려는 의도는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귀신의 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쉼 없이 확장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왕권이 사역을 통해 가득한 것을 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이러한 것들을 보고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영적인 눈과 귀가 있는 자들만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아는 자만이 하나님이 주신 치유와 회복을 경험합니다. 이 회복을 경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그 결과 가버나움 회당에서, 베드로의 집에서 어두운 영혼들을 밝은 나라로 인도하셨습니다. 당시는 거룩한 성전에서조차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보다는 어두운 권세에 짓눌린 상태였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통해 유대 땅에 서서히 복음의 빛이 비추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죽은 영혼들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두운 곳을 치유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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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1-02)


하나님 나라를 위한 부르심

마가복음 1장 12-20절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있다.’ 또는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를, 혹은 무엇을 따느냐에 따라 생활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예수님을 따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다보면 삶이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가나가십니다. 비록 인간적으로 훌륭하지 못하고 평범할지라도 예수님의 부르심에 따를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듯, 지금도 당신을 부르십니다.

 

  •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은 후, 광야에서 40일 동안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런 동안 세례 요한은 헤롯왕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광야의 시험을 승리하신 예수님께서는 본격적인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을 전파하십니다. 함께 할 일꾼들을 갈릴리 바다에서 어부로 살던 안드레와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 형제 네 명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12-13) ⁂【 마태복음 4:1-11, 누가복음 4:1-13 】

 

하나님의 일꾼들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라는 정체성을 확고히 해야 합니다. 종종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어떤 일을 시작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 안에 감춰진 다른 동기들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자신은 철저히 낮추면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12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12-13)

 

복음을 전파하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에서 40일 동안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마태복음 4:1-11). 예수님께 찾아온 공생애의 시작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예루살렘이나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영혼들은 없고 죽음의 그림자가 회오리바람처럼 감돌며 생명을 위협을 느끼는 광야로 나가셨습니다.

마가는 ‘곧’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마태도 ‘그 때에’(마태복음 4:1)란 단어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즉시 광야로 나가서 시험받으셨음을 암시합니다. 이 시험을 이끄시는 주체는 ‘성령’이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권세를 무너뜨리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단편적으로 예수님의 광야 40일은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 동안 모습을 보여줍니다. 시내산에서 모세처럼(출애굽기 24:18), 엘리야 이야기처럼(열왕기상 19:8)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죽음과 소외를 맛보았던 장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시험의 시간을 통과하셨습니다(마태복음 4:2).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것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본질과 결말을 예시합니다. 시종 드는 천사들과 함께 사탄에 대한 영적 전쟁을 수행하셨습니다. 복음서 시작과 더불어 소개되는 예수님과 그 대적들 사이의 대면은 복음서가 앞으로 진술해 나갈 사탄에 대한 예수님의 전쟁을 미리 내다보게 합니다(3:23-30). 그리고 마지막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최종적으로 사탄을 승리하시면서 복음서가 막을 내립니다.

 

시조인 아담의 불순종함으로 에덴동산을 광야로 만들었고,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광야에서 불순종함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었습니다. 광야를 죽음의 장소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장소에 인간을 억류하고 그 위에 군림하고 있는 사탄과 싸워야 했습니다.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기 위해 바로를 만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권세에 매여 있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사탄을 먼저 만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 승리는 자녀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실 확증인 것입니다.

 

성도들의 삶은 항상 에덴동산과 같지 평안하지는 않습니다. 시험이 없으면 좋겠지만, 예수님께서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던 것처럼, 성도들도 시험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성령님과 천사들과 함께 시험을 무사히 통과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적인 전쟁이 가득한 세상에서 승리함으로, 광야와 같이 삭막한 세상을 행복 가득한 에덴동산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갑시다.

 

천국을 선포하신 예수님(14-15) ⁂【 마태복음 4:12-17, 누가복음 4:14-15 】

하나님 나라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그 나라를 모두가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 나라를 들어가려면 회개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왕과 백성의 관계로 들어가게 해줍니다. 그래서 당신이 세상을 향하여 외쳐야 할 것이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죄악의 길에서 돌이켜서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자.’고 외쳐야 할 것입니다.

 

14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14-15)

 

마가는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시험을 받으시고, 본격적으로 공생애 사역이 시작되었다고 소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공생애를 소개하기 전에, 세례 요한이 헤롯왕에게 체포된 사실을 소개합니다. 철저히 순종한 세례 요한을 왜 체포와 순교로 사역을 마무리 시켰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게 역사하는 분이십니다.

 

(1) 세례 요한의 체포(14a)

 

세례 요한이 헤롯왕에게 체포당했습니다. 그는 헤롯왕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맞습니다. 그 불의한 일들을 세례 요한이 지적하다가 잡혔습니다(마태복음 14:3).

비록 헤롯왕은 자신의 뜻대로 세례 요한을 투옥한 것으로 진행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숨겨진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세례 요한의 사역이 마무리 졌고, 자연스럽게 사역의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옮겨갑니다. 이것은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의 시대가 마무리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신약 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마태는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마태복음 11:13)라고 말씀합니다. 이제부터 세례 요한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넘어가는 것입니다.

 

(2) 갈릴리로 오신 예수님(14b-15)

 

예수님께서는 광야의 시험을 받으신 후, 갈릴리로 옮기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체포는 예수님의 공생애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으로부터 공생애의 메시지를 전해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첫 메시지에는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에는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① 하나님의 때(15a)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때가 찾고’는 ‘그리스도 시대’를 의미하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왕권 통치’를 뜻합니다. 이 복음은 창세 이후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멈추지 않고 계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복음이 성취되어 가고 있습니다.

 

②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15b)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우리들 앞에 도래한 상태의 표현입니다. 어두움이 물러가기 위해 빛이 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사적으로 그렇게 많이 기다리던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소적인 하나님 나라’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선포하신 그 나라는 ‘통치적인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이 미치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사람들이 어두움의 권세 아래에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심령에 이루이지는 예수님께서 주인 되신 나라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이면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우리 심령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임재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을 이루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3:15).

 

③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5c)

예수님께서는 이제 어두움의 세상 나라는 물러갈 때가 이르렀다는 선언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로 오셨고,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서 왕노릇하실 때가 가까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 왕을 영접하는 것은 회개와 믿음입니다. 회개(悔改)는 자신의 주권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 복종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그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함께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해 이제 그의 백성은 합당한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와 ‘믿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의 기초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자격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동안의 삶으로부터 돌아서는 회개로 바른 반응을 해야 합니다. 이제는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점검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겠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이 시대를 향해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 선포에 반응하여 회개하고 복음을 믿도록 초청하시는 분입니다. 지금도 당신을 초청하시고 그 초청에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하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천국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16-20) ⁂【 마태복음 4:18-22, 누가복음 5:1-11 】

세상 나라는 모든 세상이 마치 자신의 것처럼 과시하면서 화려하고 웅장하게 시작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그렇게 시작하지 안 했습니다. 그의 나라는 조용하고 차분하게 그리고 지속적이고 점진적인 방법으로 임합니다(4:30-32).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매우 조용하고 차분하게 시작됩니다. 그 시작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심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방법이 매우 독특합니다.

 

16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9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16-20)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어 가시면서 차분하게 제자들을 찾으셨습니다. 12제자들 가운데서 먼저 주목 받을 만한 네 명의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제자들을 선택하는 방법은 당시 전통적인 방법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선택하십니다.

 

(1) 매우 평범한 제자들(16,19)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선택할 때는 세상에서 똑똑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화려한 이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사람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들은 직업도 매우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실 때 장면을,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고 소개합니다. 그들은 한가로이 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꾸준하게 자신의 일, 그물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아주 평범하지만 자기를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일꾼의 자격은 뛰어난 재능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철저히 순종할 사람을 찾고 계셨던 것입니다.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고기 잡던 어부 베드로나 세금을 착취하던 세리 마태 등과 같은 사람들을 선택해서, 위대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군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완벽한 사람을 찾으신 것이 아니라 평범하지만 충성스럽게 일할 일꾼을 찾으셨습니다. 지금도 그런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일꾼으로 찾아 부르십니다.

 

(2) 스승이 부르신 제자들(17,20)

 

일반적인 유대인의 풍습에서는 제자들이 위대한 스승을 찾아가서 제자가 되는 방식을 취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를 선택하신 방법은 일반적인 방법과 차이가 있었습니다. 스승이 제자들을 직접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을 거닐다가 바다에서 어부로서 일하고 있던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셨습니다. 그들이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17)고 명령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잠시 머뭇거림 없이 즉각적인 순종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제자의 길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순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권위와 주도권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버려야 따를 수 있는 제자도(18)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먼저 자신들의 생업과 가족을 버려두고 다음으로 예수님만 따라야 합니다. 이것은 마가복음 전체를 통해 강조되는 제자의 길입니다(8:34-37;10:28-30).

모든 제자들은 부르심이 임했을 때, 한결같이 버리고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18)라고 소개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시 배와 그름과 아버지 그리고 일꾼들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어부에게 있어서 배와 그물은 자신의 생명과 같은 매우 중요한 재산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에 자신의 소중한 모든 것들을 버렸습니다.

물론 그들이 생업과 가족을 버렸다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가족과 모든 관계를 끊어 버렸다는 뜻이 아닙니다(1:29-31).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방해가 되지 않도록 모든 방식과 관계를 새롭게 재정립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삶이 정리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는 그분의 삶과 사역에 철저하게 동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의 경우처럼 소유가 많으면 순종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청년에게 주님께서는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태복음 19:21)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22)고 반응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초대에 응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을 준비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하게 순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 가운데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제자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이 부르심을 받을 때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중요한 도구인 그물을 버렸던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보다 더 좋게 생각하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무나 많은 것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다면,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순종이 되지 않는 것은 포기하지 못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도 네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순종하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들은 버려두는 대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당신을 예수님께서 부르시는데 아직 내려놓지 못한 것이 남아 있습니까? 먼저 부르신 예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버려놓고 온전하게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4) 사람 낚는 제자들(17)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르셨습니다. 부르심에 순종한 제자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고기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에서는 제자로 요구하심과 그 요구에 반응하는 것이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각 사람들을 부르시고 또한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건설과 확장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전수하고 그분의 선교 사역에 동참할 것이 기대되는 것입니다(3:4, 6:7).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사람 낚는 어부들에 대한 언급합니다(렘 16:16). 그런데 예레미야를 통해 사람들은 모으는 목적은 사람들을 심판하시기 위한 것인데,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 사람들을 모으는 목적은 심판에서 구원하기 위합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다 움켜지고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뒤를 돌아보면서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당신이 내려놓아야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제자들에게 풍성한 것으로 더 많이 채우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천국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통해 회개하고 믿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순수하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따랐습니다. 세상의 것들이 많으면 무거워서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세상의 자랑거리들은 모두 내려놓고 제자로 따라갔습니다. 당신도 예수님의 부르심에 내려놓을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르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광야 같은 세상이 에덴과 같은 삶으로 변화되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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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1-0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마가복음 1장 1-11절


성경에서는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선고합니다. 그리고 죄의 대가는 사망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형수들에게 가장 좋은 소식을 석방일 것입니다. 왜 복음이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했겠습니까? 마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리기 위해 마가복음을 기록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영생으로 인도하는 복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을 통해 당신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복음 사역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셨는지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 세례 요한을 보내셨습니다. 요한은 세상에 오실 메시아를 위해 그의 사역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세상을 위한 공생애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1)

하나님의 역사는 즉흥적이거나 무계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사역들이 태초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완벽하게 성취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까지 계속적으로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 일들을 이루어 가신 역사의 주인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에게 복음입니다. 마가는 이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복음’을 다음처럼 정리합니다.

 

1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1)

 

마가는 예수님에 대한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먼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1)고 선언합니다. ‘복음(ευαγγελον)’이란 ‘좋은 소식’입니다. 병든 사람에게 좋은 소식은 자신의 병을 치료할 의사를 만나는 것이며, 재정이 궁핍한 사람에게 좋은 소식을 자금을 조달할 부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적인 복음보다 더욱 고차원적인 복음이 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 복음은 새로운 생명을 공급해 줄 수 있는 분을 만나는 것입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류는 죄 아래서 태어났지만, 죽음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류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었습니다. 이런 인류에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생명을 공급해 구원할 구세주(救世主)를 보내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진짜 ‘복음(福音)’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모든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재물로 돌아가심입니다. 당시에 ‘신의 아들’로 섬김과 칭송 받던 로마 황제는 화려한 궁궐 안에 생활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낮고 천한 마구간에 오시고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15:39).

 

타락한 이스라엘에게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사백 년 동안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계속적으로 정신이 들지 않는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정복을 당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이 점점 잊혀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따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냈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을 묵묵히 감당하셨습니다.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마가는, 제자들이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정리하고 기록했습니다, 이 정리한 것을 당시 황제를 숭배하던 로마제국에 전해졌는데, 바로 이 ‘마가복음’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황제를 신의 아들로 숭배했는데, 가짜 신의 아들이 아닌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충격적인 보고서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오늘날 너무나 익숙한 상투어이지만, 마가가 이 책을 기록할 당시에는 죽음을 각오해야만 할 수 있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마가는 서두에서 복음에 대한 정의로, 짤막하게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정의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복음은 로마 제국의 인간인 황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시며, 이 세상을 구원하신 분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란 것입니다. 하지만 마가복음에서 소개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역은 백성 위에 군림한 왕이 아니라 백성을 섬기는 종처럼 오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등장과 사역(2-8) ⁂【 마태복음 3:1-12, 누가복음 3:19,15-17 】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을 빛내기 위해 주인공보다 먼저 준비한 엑스트라들이 있습니다. 복음의 역사에 주인공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보다, 먼저 그 사역을 준비한 엑스트라가 있었습니다.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비록 엑스트라이지만 자신의 사역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였습니다. 무슨 사역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고 있었는지 살펴보겠습니까?

 

2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3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6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족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되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8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2-8)

 

예수 그리스도 앞에 먼저 보낸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며, 예수님과 제자들이 살아갈 삶을 미리 사는 존재였습니다. 죄인들이 세례를 통해 죄 용서를 받게 함으로써 주의 오실 길을 예비합니다. 제사장 집안의 사람이면서도 타락한 성전 체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요단강 세례를 통하여 백성들이 죄 사람을 받게 해줍니다.

 

(1) 세례 요한의 등장(2-3)

 

당시 로마 제국의 군대들은 전쟁에서 승리하면 먼저 전령(傳令)을 통해 승전보를 알렸습니다. 이처럼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곧 승전보를 알리는 전령사입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인 성경 교육을 통해서 대부분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먼저 엘리야가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전령사로 와서,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언급된 내용을 두 곳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3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이사야 40:3)

 

5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라기 4:5)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외치는 자’나, 말라기 선지자가 말한 ‘엘리야’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전하는 전령사(傳令使)를 의미합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 사람들을 죽음의 광야에서 생명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준비시킵니다.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면 나갔습니다. 하지만 불순종을 통한 광야 40년이란 기간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보다 현실에 급급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들의 삶은 평탄지 못한 환경에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았지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대로 가나안 땅으로 입성시켰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엘리야의 역할도 모세와 같은 역할일 것입니다. 왜곡된 이스라엘을 바른 상태로 회복시켜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엘리야처럼 메시아의 길을 예비합니다(누가복음 1:7).

 

세례 요한의 등장은 엘리야의 삶처럼 등장합니다. 엘리야나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명을 위해 부름 받았지만, 화려하지 않고 초라한 선지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화려한 제사장의 옷이 아니라, 광야에서 낙타털과 가죽 띠를 띤 낮은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던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출애굽을 준비한 인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 3:2)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가 준비하는 것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죄악에 빠진 사람들을 영적 출애굽 사건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이사야를 통해 예언하신 대로 그리스도 앞서 세례 요한을 보내셨고 그리고 준비케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신실하게 지키셨습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아야 합니다. 세례 요한을 통해 엘리야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사역에 협력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것 외에, 세례 요한처럼 그리스도의 사역을 감당하길 원하십니다.

 

(2) 세례 요한의 사역(4-8)

 

세례 요한의 등장은 구약에서 약속하셨던 엘리야 모습처럼 등장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둘 다 사명은 위대했지만, 삶은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열악한 가운데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① 회개 세례를 통한 구원(4-5)

첫째는 회개의 세례를 통해 구원받도록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을 향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쳤습니다. ‘회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첫걸음입니다. 과거 잘못된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새로운 거룩한 삶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그래서 거룩한 삶에 들어가기 위한 하나님의 초청이 바로 ‘세례’입니다.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께 돌이키는 역사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와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전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으로 주어진 새로운 삶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나온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면서 하나님 백성으로 되도록 준비시켰습니다. 세례를 베푸니 많은 사람들이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죽음의 광야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면 요단강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의 세례식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던 일을 재현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몸은 약속의 땅에 들어갔지만, 영적으로 여전히 노예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례는 새로운 출애굽의 상징이요 여호와께 돌아가는 의식이었습니다.

 

② 예수 그리스도를 높임(6-8)

두 번째 그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사역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언약의 메시아로 오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고 있었습니다. 자신 뒤에 오실 메시아를 위해 준비하는 사역을 충실하게 감당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평판이나 인정이 아니라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역할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할 정도로 겸손한 삶을 살았습니다.

강퍅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들을 마음을 여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그 사역은 마치 정글에서 새로운 길을 닦는 작업과 같았습니다. 그리스도의 행차 앞에서 외치는 소리로서 길을 준비하도록 하였습니다. 비록 그는 사역을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해주신 사명을 충실히 감당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바르게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충성했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자신을 따랐지만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많은 지도자들이 자신을 조롱했지만, 의기소침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자세의 근원은 사역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라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쳐주는 엑스트라 역할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역할에 만족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주어진 사명이 비록 작아 보일지라도 쉽게 생각하지 말고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합니다. 맡겨주신 사명을 완성될 때까지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에서 세례 요한과 같은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9-11) ⁂【 마태복음 3:13-17, 누가복음 3:21-22 】

세례 요한이 메시아의 길을 예비했던 사역을 살폈습니다. 그 분이 다름 아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 또한 화려한 만왕의 왕으로서 등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평범한 모습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시작하셨습니다.

 

9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9-11)

 

마가는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사적인 탄생과 같은 내용은 생략하고, 곧장 공식적인 예수님의 사역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죄인 아닌데도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을 통해 두 가지의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대속적인 세례(9)

 

첫째는 예수님께서는 죄인도 아니신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을 세례 요한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태복음 3:14)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15)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말씀에 표현한 대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의를 이루기 위함입니다(신명기 6:25).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죄를 담당하시기 위함입니다(이사야 53:4-6).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십자가의 사건을 예고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능력이 더 크신 분으로 기대되던 예수님께서 오히려 더 적은 능력을 가진 자에게 물로 세례를 받는다는 점은 매우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가장 낮아지심인 십자가에 죽으심을 내다보는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죄인을 대신하기 위한 ‘대속적인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려 하심이니라’(고린도후서 5:21)고, 죄에 대한 회개와 세례가 필요 없었던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타락한 인간과 자신을 일치시켰고, 죄인을 대신하는 속죄 사역의 시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죄인과 함께 죽음으로써 죄인을 살리고 하나님 백성으로 새롭게 창조하는 사명에 충성하신 것입니다.

결국 고난 받는 종으로서 죽음까지 받아들려야 할 사명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만이 ‘세상 나라’를 이기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길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임을 알고 순종하셨습니다.

 

(2) 왕의 대관식(10-11)

 

두 번째는 예수님의 세례는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역의 시작을 알리는 ‘그리스도의 대관식(戴冠式)’이었습니다(요한복음 1:31-34). 마가는 예수님의 세례 받으신 장면에서 세 가지 현상에 집중합니다. 먼저, 하늘이 갈라지고, 다음으로 성령이 임했고, 마지막으로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아들 되심에 대한 확증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대관식(戴冠式)’이란 왕이 처음으로 왕위에 올라가는 예식입니다. 그 예식은 매우 화려하고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드는 예식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관식은 아주 평범한 소박한 예식이었습니다. 대관식의 핵심은 하늘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옴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이 음성은 시편 2편 7절에서 미리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7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편 2:7)

 

시편 2편의 배경은 왕의 대관식이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취임하는 대관식을 진행하는 장면입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성령님이 예수님에게 강림하셨습니다. 이 일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인지 그 정체성을 들어내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나타난 현상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백성들을 회개라는 것을 통해 십자가로 초청하였습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왕으로서 자신의 나라를 통치하신 분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겸손하게 출발하신 것을 묵상해야 합니다. 복음을 위한 헌신과 함께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는 자로서 겸손하게 사명을 감당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받은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가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해주셨습니다. 모든 인류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제 진심으로 옛 사람의 길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처럼 묵묵히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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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서론

 

》 마가복음 서론 《

 

‘기록이 없으면 역사도 없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다.’

 

모든 사실을 기록한 일은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진행해야 합니다. 어떤 사실을 기록한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후대 사람들에게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어떤 역사적인 사실을 문자로 기록한 것은 매우 유익합니다.

 

신약성경 중 복음서인 예수 그리스도의 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복음서들도 그 역사적인 근거를 가지고 기록했던 것입니다. 특히,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자로 일하면서, 사도 베드로가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교훈을 체계적으로 수집하여 기록한 복음서가 바로 ‘마가복음’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그 분량은 적지만 그 내용은 힘이 넘치고 신선합니다. 이 ‘마가복음’은 다른 세 마태, 누가, 요한복음서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복음서의 ‘원조’로 인정해 왔습니다.

 

마가복음의 제목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본들은 이 복음에 대하여 단순히 ‘마가에 의하여’라는 표제를 붙이고 있습니다. 후에 ‘복음’이란 용어가 예수의 생애와 봉사에 관한 이야기에 적용되었으므로, 이 책의 표제에 덧붙여졌습니다. 「제임스왕역(KJV)」에 나타난 ‘성(聖) 마가에 의한 복음’이란 표제는 단지 후기의 사본에서만 발견됩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마가복음’은 한문성경에서 ‘马可福音’이라 부른 것을 번역하여 ‘마가복음’이라 부른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저자

전통적인 기독교의 입장은 이 책의 이름 그대로 이 복음서의 저자가 마가 요한임을 만장일치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마가’라는 이름은 마르쿠스(Marcus)란 라틴어에서 왔으며, 그것은 이 기록자의 성(姓)입니다(사도행전 12:12,25). 그의 히브리식 이름은 요한(사도행전 13:5,13)이었으며, 그 어머니의 이름은 마리아였습니다(사도행전 12:12). 마가는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에 살았으며, 초대교회의 탄생지인 마가 다락방의 집의 유복한 청년이었습니다. 이 요한 마가가 본 서의 저자임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1) 내적인 증거 : 마가는 마가복음 안에 저자로서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베드로의 수제자로 ‘베드로의 아들’로 불렀기 때문입니다(베드로전서 5:13). 그는 예수님의 직계 제자는 아니므로, 예수님과 활동한 내용을 기록한 곳에는 당연히 등장하지 않습니다.

 

(2) 외적인 증거 : 사도 바나바의 생질인 ‘요한 마가’라는 사실은 초대교회 때부터 의심 없이 인정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소아시아 교회 감독이었던 파피아스(Papias A.D. 140년)는 사도 요한으로부터 마가복음이 마가가 베드로의 교훈을 토대로 그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그 기록은 아주 정확한 것이라는 언급을 들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또 주후 150년경의 순교자 저스틴(Justine), 185년경의 이레나이우스(Irenaeus)도 마가가 베드로 사도의 통역자였으며, 그의 교훈과 증언을 토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서를 기록했다고 증언했습니다.

 

마가복음의 기록 연대

마가복음의 저작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언급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13장에 나온 성전 파괴와 예루살렘 초토화되리라는 말이 있는데(1,2,14-23), 이 말이 장차 닥칠 비극을 예고하는 예언이냐, 아니면 이미 닥친 비극을 서술하는 기록이냐에 따라서 기록 연대가 달랍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 본 서는 4복음서 중 가장 일찍 기록된 책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따라서 그 시점도 주후 63-70년경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주후 7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그 복음서들이 마가복음을 근거로 기록되었다는 것이 복음서 기록 연대의 배경이 됩니다. 그러므로 기록 연대가 주후 70년 전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기록 장소

본 마가복음이 기록된 장소는 대체로 ‘로마’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기록될 당시 마가는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에 의해 로마로 가게 되었으며(디모데후서 4:11), 베드로와 함께 로마에서 활동했습니다(베드로전서 5:13). 초대교부들도 본 서를 마가가 로마에서 기록했다고 증언했는데, 이레나이우스와 클레멘트가 대표적입니다. 그리므로 마가는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한 이방인 신자를 위해 로마 제국의 심장인 로마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첫 독자

마가복음이 로마 사람들에게 보낸 복음이라는 데에는 일반적으로 의견이 일치합니다. 마가가 습관적으로 유대적인 용어와 관습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이방인 독자들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마가복음 5:41;7:2-4,11,34).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말하기를, 베드로의 설교를 직접 들었던 로마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자기들에게 문자로 기록된 복음을 전해준 사람은 바로 마가였다고 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사실은 이 복음서의 서론 부분에서 확실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본서의 서론 부분을 보면, 본서의 독자가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당연히 알고 있는 것들은 설명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세례 요한이 소개될 때 그의 신분 확인을 위한 어떤 절차도 없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례 요한의 투옥도 이미 독자들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언급되어 있고, ‘세례’(1:4)라든가 ‘성령’(1:8) 등의 용어도 이미 독자들이 알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 것처럼 아무런 설명 없이 바로 쓰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배경과 동기

본 마가복음을 기록한 배경을 살펴보면, 기록 동기와 목적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 본토는 거의 약탈에 가까운 로마 제국의 세금 정책으로 인해 큰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으며, 이방인 교회들도 네로 황제의 박해로 인해 환난과 순교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사도들은 점차 사라져 갔으며 그리스도 예수의 사역과 교훈을 실제로 체험한 성도들도 희귀해져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외적으로 역경에 처한 교회에 신앙적 격려를 해줘야 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교훈을 기록하여 남겨 둘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본 서는 하나님 아들이신 메시아 그리스도께서도 ‘고난의 종’으로 오셔서 고난 받는 삶을 사셨습니다. 끝내는 하나님의 의와 권능으로 승리하사 부활 승천하게 외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격려할 목적으로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특징

처음으로 기록된 마가복음의 내용은 다음으로 기록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기록하는데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에서는 다른 복음서와는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를 종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섬기려 오신 예수님이므로 말씀보다 행동을 강조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이방인(로마) 성도를 위한 복음서

 

본 서가 유대 본토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 특히 로마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록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본서 자체가 그 사실을 입증합니다. 본 서에는 유독 라틴어에서 출처된 언어가 많습니다. 본 서만이 로마 교회 성도인 루포를 언급합니다(마가복음 15:21). 핍박과 순교에 특별한 관심을 지니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당시 로마 교회가 당면하고 있던 고난적 정황과 부합됩니다. 그리고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유대교의 풍습과 지리를 따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마가복음 1:5; 7:3,4,11).

 

(2) 사역과 행동 중심의 복음서

 

본서에는 ‘즉시, 그리고’라는 단어가 50회 이상 나타나며 그리스도 예수의 행동과 사역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본서에 예수의 비유가 4회만 언급된 것을 보더라도 본 서가 예수의 행동과 사역 중심의 복음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사색보다는 행동을 중시하는 라틴 계열 성도들의 취향을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상정해 볼 수 있습니다.

 

(3) 사실적인 묘사의 복음서

 

본 서에는 약 150여 회나 역사적 현재 용법이 나타납니다. 과거의 역사를 현재 일어나고 있는 듯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 본 서의 특징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본 복음서를 ‘정열의 삶의 복음서’라고 칭합니다. 예수와 그 전도단이 음식 먹을 틈도 없이 사역했다는 사실을 두 번씩이나 언급한 것은 본 복음서밖에 없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마가복음의 구조

Ⅰ. 봉사를 위한 준비, 가을, AD 27년, 1:1~13

 

Ⅱ. 갈릴리 봉사, 유월절에서 유월절까지, AD 29~30년, 1:14~7:23

A. 초기 갈릴리 봉사, 1:14~34

B. 첫 번째 선교 여행, 1:35~45

C. 가버나움과 그 주변에서의 봉사, 2:1~3:19

D. 두 번째 선교 여행, 3:20~5:43

E. 세 번째 선교 여행, 6:1~7:23

 

Ⅲ. 공적 봉사에서 물러나심, 봄에서 가을까지, AD 30년, 7:24~9:50

A. 갈릴리 변경 지방에서의 봉사, 7:24~8:10

B. 십자가를 내다보심, 8:11~9:50

 

Ⅳ. 페래아 봉사, 가을에서 봄까지, AD 30~31년, 10:1~52

 

Ⅴ.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봉사, 유월절, AD 31년, 11:1~15:47

A. 서기관 및 바리새인과의 갈등, 11:1~12:44

B.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의 재림에 대한 예언, 13:1~37

C. 예수의 체포와 심문, 14:1~15:20

D. 예수의 못박힘과 장사, 15:21~47

 

Ⅵ. 부활과 부활 후의 출현, 16: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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