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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2-01)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

로마서 2장 1-8절


 

다른 사람에 대한 범죄 사실이나 처벌을 논의할 때, 매우 흥분해서 열변을 토하면서 사람을 정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이 정죄된 사람보다 더 많은 죄를 범하면서도, 쉽게 정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은 거룩하다고 자부할지 모르겠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죄가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치부가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죄를 논할 때, 그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앞에서 이방인의 죄를 지적했던 바울은, 이제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유대인에게 돌아섭니다.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우월감에 빠져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판단하십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 없이 심판할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셨던 율법으로,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남을 정죄하는 사람들(1-5)

 

교만한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기준 또한 스스로 자기 기준에 맞추었을 뿐이지 그렇게 우수한 편은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모두 그만그만한 ‘도토리 키 재기’일 뿐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자신들이 다른 이방인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영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유대들에게 경고합니다.

 

1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1-4)

 

지금까지 로마서 1:18-32까지 ‘이방인들에 대한 죄’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보다 높은 윤리적 기준과 도덕적 삶을 유지하면서 당시 만연한 도덕적 부패를 비난했을 것입니다. 로마서 2장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바울이 바라보는 초점이 이방인으로부터 유대인에게로 집중합니다. 먼저, 남을 정죄하는 도덕주의자들도 죄 아래 있으며(1-16), 다음으로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 역시 죄의 능력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17-29).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보다 훨씬 더 낫다고 손을 들어주신 것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을 같은 조건으로 취급하신 것입니다.

 

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심판(1-2)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기준은 변함없는 진리로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약속의 백성이므로 구원을 받지만,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멸망에 이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앞에서 이방인의 죄와 심판을 논할 때, 유대인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눈을 돌려 유대인들에게로 향합니다. 바울이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1)라고 선언합니다. 이방인의 죄악을 지적할 때, 도덕적인 사람들과 유대인들은 죄악으로 범람한 로마 사람들을 보면서 동의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죄 또한,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선민(選民)’이라고 자처했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유대인에게는 일반적으로 비판적인 성향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의 우상숭배와 도덕적인 탈선을 혐오하며 정죄하였습니다. 자신들은 이방인보다 도덕적으로 훨씬 우월하다고 확신합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특권을 내세우며, 자기들은 정죄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태도 속에 빠진 자들을 향해 자기기만을 드러냅니다. ‘모든 사람’은 특히 도덕적인 이교도나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정죄합니다. 사람들은 빈도와 한계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모두 한결같이 하나님에게서 돌이켜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들은 거룩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죄악, 또한 이방인의 죄악만큼 중합니다. 특히 이방인들을 향해 정죄했던 유대인들은 더한 것입니다. 도덕주의자들과 유대인들은 적극적으로 비판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의 비판은 자신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은 자신의 죄와 잘못이 발각되는 것을 모면해보려는 흔한 술책이기 때문입니다.

 

(2) 진리로 판단하신 하나님(3-4)

바울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신적인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진리(2:2-4), 공정함(5-11),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이 기준으로 모든 사람을 심판하는 절대적이고 무한한 기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진리’라고 하셨습니다(요한복음 14:6). 또한,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자신을 ‘영’이시며(요한복음 4:24), ‘빛’이시고(요한일서 1:5), ‘사랑’(요한일서 4:8,16)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진리의 하나님’(시편 31:5; 이사야 65:15)이라는 소개합니다. 절대적이고 무한한 진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 중 하나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심판은 진리대로 이루어집니다. 모든 사람에게 임할 이 심판은 어떤 사람도 피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핑계할’ 수 없고(로마서 2:1)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도덕적일 수 있고 자기 시대를 타락한 시대라고 정죄할 수도 있겠지만, 그도 역시 같은 일을 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까지도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아래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서 선악을 분별하고 있었고, 율법에 어긋나지 않도록 의로운 척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삶 속에서는 이방인들과 다를 바 없는 동일한 죄를 범하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셨을 때, 유대인들의 행동은 가증한 것들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을 정죄할 수 있는 판단력을 가지고 범죄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죄를 핑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을 정죄하였던 정죄로 스스로 정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비슷한 교훈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면서 경고합니다.

 

45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6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7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0:45-47)

 

바리새인들은 도덕적인 수준이 상당히 높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암송하고, 금식과 길거리 기도도 하였고 작은 것 하나까지도 십일조도 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상숭배나 음란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겉으론 정말 깨끗하게 경건한 성도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강도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율법을 잘 지키고 있기 때문에 구원의 반열에 설 것이지만,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잘못된 생각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자기 허물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남의 허물에 대해서는 바늘처럼 예민하고 냉혹했던 것입니다.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족집게로 빼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 ‘판단(判斷)’이란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판단은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판단력,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갈 판단력,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는 판단력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혹독하게 평하고 있는 ‘판단’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치로 올라서서 상대방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모습을 죄악이라고 평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주저하지 않고 혹평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겉으로 나타내지 않는 판단이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그의 이면에는 상대방을 시기하거나 증오하는 마음이 있거나 무정함과 무자비함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할 기준이 있다면, 그 기준으로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자(尺)로 사용하기 전에, 가장 먼저 자신의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준으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을 먼저 평가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정한 하나님의 심판(5-8)

하나님께서도 혹시 잘못된 실수하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이는 것으로만 가지고 평가하신다면 당연히 실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외모로만 판단한다면 공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의문점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본문에는 자세하게 하나님의 심판이 왜 의로운지에 대한 언급하고(5), 다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어떤 점에서 의로운 심판인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5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6-8)

 

우리가 당시에 유대인이라고 한다면, 사도 바울과 반박하고 논쟁할 것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변명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신앙과 행동에 대해 정당화시키려 시도할 것입니다. 그러한 시도를 감지한 바울은 단호하게 설명을 이어갑니다.

 

(1) 심판이 미루어진 이유(5)

바울이 주장한 심판에 관한 내용을 듣는 사람들이 의문점이 생깁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죄악상들을 다 보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왜 심판하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모르신 사실이 있는 것이 아니냐!’라는 비아냥거리는 반론일 것입니다. 그런 질문할 사람들에게 바울은 반박합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 길게 참고 계신 것을 비웃고 있느냐? 그 고집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그냥 넘어가실 것 같은가? 진노의 날 모든 것이 다 드러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향해 회개를 기다리시며 오래 참으로 용납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날은 계속될 것은 아닙니다. 결국 ‘그 날’에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 원인을 바울은 ‘네 고집(문자적으로 ‘완고함’)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 때문이라고 아주 혹독하게 평가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그분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까지 거대한 저수지와 같이 쌓아가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멈춘 것은 잠시일 뿐이지, 결국에 진노의 뚝이 쌓아진 높이만큼 심판의 뚝이 터지면 강력하게 임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6-8)

바울은 시편과 잠언의 말씀을 인용하게 그날에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실 것’(6)입니다(시편 62:12; 잠언 24:12). 하나님의 심판은 진리에 기준을 두고 공정하게 실행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냉철했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서 사랑도 용서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죄를 범해도 이방인들과 같이 심판을 받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성도 중에는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인데 설마 심판하시겠어!’ 또는 ‘하나님의 자녀니깐 죄를 지어도 봐주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사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심판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심함으로 조건에 따라 봐주기나 용서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사람의 기준으로 외적인 혈통이나 많은 봉사 그리고 헌신으로 죄과를 덮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구제역 때문에 돼지를 살처분합니다. 살아있는 짐승들을 땅에 묻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그 짐승을 묻은 근처에서 지하수에 핏물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죄악은 절대로 어떤 것으로 덮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돌아가야 함을 알면서도 죄안에 머물러서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떠나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죄는 즐거움을 줄 수 있겠지만, 절대로 만족을 줄 순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항상 죄를 쫓아가면서 죄의 노예로 살게 됩니다. 당신은 죄의 노예로 살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누리고 살기를 바랍니다. 죄를 즐기는 삶에서 떠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충만한 삶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온갖 불의하고 추악한 일들을 당장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은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길 바라시기 때문입니다(베드로후서 3:15). 절대로 하나님의 심판은 없거나 더딘 것이 아닙니다. 세속적인 일과 무리에 동조하지 않고 거룩함을 유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항상 예수님처럼 그의 선한 모습을 닮아가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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