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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2-02)

 


유대인의 불신앙을 지적하는 바울

로마서 2장 9-16절


 

오래전 제주 모 지검장이 길거리에서 음란행위를 하다가 발각이 되어 사회적인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처럼 성숙해보인 사람들이 상식 이하의 범죄로 인해 충격을 주는 경우를 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존경 받을만한 분들이 신뢰와 존경을 잃은 행동을 봅니다. 일반인들은 사회지도층들의 이탈 행위에 대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로마서 3:9-18)고 단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사람은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자입니다. 유대인이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졌다고 자랑하며 선생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스스로 율법을 범하는 것은 이방인 가운데 하나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행한 대로 받는 보응(9-11)

유대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다른 민족에게 하나님을 드러내는 사명이 주어진 것이지, 배타적 지위를 얻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도라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납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외모를 보지 않으시는 주님 앞에서 거룩한 길을 따르지 않으면서 불신자들과 다른 대우를 받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9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9-11)

 

9-10절은 7-8절의 내용을 다른 언어로 되풀이하면서, 특별히 이러한 원리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9절과 10절 모두에 등장하는 ‘먼저는 유대인에게요’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이 언약의 약속을 먼저 받은 자들이었음과, 유대인들이라고 해서 그들의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음을 동시에 말해줍니다. 7절과 10절에서, 바울은 ‘선을 행하는 삶’이 ‘영광과 존귀, 썩지 않음과 평화’에 이르게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영광과 존귀’라는 표현은 시편 8편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한 종말의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즉, 시편 8편의 약속이 ‘선을 행하는’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차별 없이 실현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신다’(11). 문제는 '선을 행하는 각 사람'이라는 조건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선한 행위'란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성령을 받은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삶의 열매입니다. 그런 점에서 ‘선한 행위’는 로마서 1:5의 ‘믿음의 순종’과 같은 개념입니다.

 

하나님 심판의 보편성(12-16)

 

말씀을 잘 가르치는 사람을 보면, 거룩하고 위대해 보입니다. 자칫 사람들에게 현혹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신령한 사람은 말씀의 유무가 아닙니다. 그 훌륭한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도할 때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말씀을 들은 적이 없이 죽은 사람들의 구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12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14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2-16)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고 율법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제외될 것이라 생각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대화는 계속됩니다. 바울은 할례와 율법은 그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해 주는 배지 역할을 할 뿐, 그것이 구원의 조건은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1) 율법을 행하는 자(12-13)

바울은 로마서에서 2:12에 이르러서야 ‘노모스’(율법)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합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율법을 지닌 선민, 유대인’과 ‘율법이 없는 죄인, 이방인’이라는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구분을 벗어납니다. 2:1-11 단락, 나아가 1:18-32 단락에서도 중요하게 사용된 ‘범죄하다’와 ‘심판받다’라는 단어는 12절에서도 사용되면서 12-16절 단락을 앞 단락들과 연결시켜줍니다. 율법의 소유 여부와 상관없이, ‘범죄’한 자들은 모두 ‘망하고,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12절에서 사용된 동사 ‘하마르타노’(범죄하다)는 단순히 도덕적 기준을 어기는 행위를 넘어서서, 신의 뜻을 거역함으로써 그와의 관계를 깨뜨린다는 의미로 유대인들과 그리스-로마인들 모두에게 널리 사용된 단어입니다.

13절에서 바울은 율법 아래 사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말합니다. 의인, 곧 정상적인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단순히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자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명기 28-30장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율법을 지킴으로써 스스로 생명과 복을 선택해야 할 책임마저 면제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 율법이 중심이 되는 언약 체계 속에서 신실하게 머물러 있어야 할 책임이 유대인들에게도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13절에서 사용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동사는 미래시제로 표현되어 있다. 그 의로움은 16절의 ‘최후의 심판’에 최종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2) 양심의 법(14-15)

14-15절에서 바울은 율법 없는 이방인이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행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이 이방인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복음을 듣지 못한 이방인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가? 만약 전자라면, 10절과 함께, 율법 없는 이방인 가운데에서도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행하여 구원에 이르는 사람이 있다는 의미로 들리는데, 신학적으로 그 설명이 쉽지는 않습니다. 10절뿐만 아니라 14-15절을 이방인 그리스도인에 대한 설명으로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14절의 '본성으로'를 선행 구절과 연결해서 읽으면, ‘날 때부터 (본성으로) 율법 없는 이방인이 율법의 요구하는 바를 행할 때에는’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것은 2:27에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이라는 구절과 평행을 이룹니다. 또한 로마서 전체에서 볼 때도, 바울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율법 없이)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이루게 되었다는 점을 주장합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는데’(14), 이를 15절에서 추가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5절의 헬라어 원문은 이방인들이 ‘마음에 새겨진 율법의 행위를 나타낸다’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마음에 새겨진 율법의 행위’는 예레미야 31장의 새언약 백성에게 임할 성령의 역사를 상기시킨다. 이것은 14-15절에서 언급된 이방인이 새언약 백성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이기도 합니다.

 

(3) 다가온 심판의 날(16)

15절의 내용은 16절의 최후 심판의 문맥에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스도를 재판관으로 세워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들이 율법의 요구를 이룬 것을 증거 합니다. 이 모든 논의를 통해 바울은 율법 없는 이방인들도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는 점과, 율법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유대인들에게 더 이상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전달하려 합니다. 16절은 바울의 복음이 심판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율법과 양심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모든 사람이 불의로 진리를 막는 죄인들이 라는 사실을 고발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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