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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2-03)


유대인의 불신앙

로마서 2장 17-29절

 


 

‘전문가적 변형’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 분야를 잘 알고 있는 전문가이기에 더 타락하기 쉬운 경향을 말합니다. 가령 의사이기에 환자의 고통에 더 둔감하고, 법조인이기에 위법이나 탈법, 편법에 능숙하고, 목사이기에 말씀을 더 소홀히 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율법을 맡은 유대인들도 그랬습니다.

 

바울은 율법과 할례를 언약 백성의 표지로 삼고 그것이 하나님 백성의 지위를 보장해준다고 여기는 유대인들의 통념을 비판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신실하게 반응하지 않았고 결국 그들의 소명을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이제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받은 새로운 언약 백성이 출현하였음을 암시합니다.

 

백성의 지위를 보장하지 않는 율법(17-24)

신앙생활은 하다 보면 다양한 성도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는 성경 지식이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데 삶은 세속적인 상태로, 많은 영적 지식으로도 말씀대로 살지 않을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죽은 지식은 생명을 살릴 수 없습니다. 율법의 소유가 그들을 저절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17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3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17-24)

 

이제 바울은 본격적으로 유대인의 문제를 다룹니다. 그 논증의 초점은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도 전혀 핑계할 수 없이 하나님의 진노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로마서에서 언약 백성인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을 가장 잘 묘사한 소단락입니다.

 

⑴ 유대인의 자부심(17-20)

바울이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1)라고 지칭한 사람들 가운데는 도덕적인 이방인뿐 아니라 유대인도 포함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17)라고 하면서, 이제 이야기 주제를 이방인에서 유대인으로 전환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하늘로부터 계시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이곳에 등장한 세 가지 다른 표현들은 유대인들에게 사실상 동일한 의미입니다. 즉, ‘스스로를 유대인이라 부르는 것’, ‘율법에 의지하는 삶’, ‘그들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는 특권’은 옛 언약 속에서 살아가는 유대인들의 삶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묘사한 것들입니다.

본 단락의 핵심 단어는 ‘율법’입니다. 2:12에서 처음 등장한 단어 ‘노모스’를 통해, 바울이 정확하게 무엇을 가리키는지와 그가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을 어떻게 재해석하게 되었는지는 오랜 논쟁의 대상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바울이 말하는 ‘노모스’가 유대인들의 토라, 즉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구체적인 규례들을 말한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문서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언약과 마찬가지로 율법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합니다(갈라디아서 2:21을 보라. 바울은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변명합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오히려 하나님 은혜를 폐하려 한다고 공격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최고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대인 됨과 율법에 대한 의지는 하나님에 대한 자랑과 같은 말입니다.

18절에서 말하는 대로, 율법은 하나님의 뜻과 가치를 분간케 합니다. 바울은 17-20절 단락에서 율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자세와 자기 정체성을 설명하다가 의도적으로 두 개의 분사구문을 사용합니다. 그것은 ‘율법의 교훈을 받아’(17)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지고서’(20)인데, 두 구절 모두 유대인들을 위한 절대적 삶의 기준으로서의 율법을 말합니다. 구속사 전체 속에서 볼 때, 율법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되, 그 뜻을 유대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시대적, 문화적, 지리적, 인종적인 옷에 입혀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토라는 자연히 구속사 속에서 시대적인, 문화적인, 인종적인 한계를 지닌 계시의 도구였습니다. 그것이 모든 민족에게 보편적인 윤리로 주어지기 위해서는 유대적인 외피(外皮)를 벗겨내는 해석의 작업이 요청되었습니다.

19-20절은 이러한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19절에서 사용된 비유, ‘맹인의 인도자와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은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들이 자기 정체성과 소명을 설명하기 위해 흔하게 사용하던 표현들입니다. 20절에서는 이를 더 직접적으로 ‘어리석은 자의 교사’와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풀어놓았습니다.

 

⑵ 유대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모독 받으심(21-24)

21-24절은 율법과 이스라엘의 상태에 대해 달라진 바울의 이해를 보여줍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유대인이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을 말합니다. 21-22절은 율법으로 이방인을 가르치고 선도해야 할 유대인이 이방인과 동일한 도둑질, 간음, 이방 신전에 대한 도둑질 등의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범함으로 인해, 이방인들 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다고 평가합니다(23-24). 유대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율법과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에 대한 바울의 평가는 분명 다메섹 이전의 그것과는 달라졌습니다. 다음 단락에서 바울은 율법을 범한다면 할례도 무익하며(25),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고 할례는 마음에 해야 할 것(28,29)이라고 과감하게 선포합니다. 사실상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으로부터 율법과 할례를 분리합니다.

자신들을 통해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유대인들의 소명이 성취되지 않았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삶의 체계에 대한 확신을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럴수록 율법에 대한 열심을 더욱 강조했습니다. 언약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 유대인은 율법을 준수해야 하고, 율법은 그것을 지키는 자에게 생명을 약속합니다(레위기 18:5). 다메섹 이전의 바울도 자신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립보서 3:6)라고 생각하고 동족들이 모두 자신과 같다면 하나님 나라가 곧 올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2:21 이하에서 바울이 율법과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으실 가능성을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결론적으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능력과 의로움을 이미 나타내 보이셨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고 완성된 하나님의 이야기 전체 속에서 이스라엘과 율법이 가지는 구속사적 기능을 비로소 완전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율법과 할례와 상관없이, 심지어 유대 민족 전체가 아니라 유대인 중 예수라는 한 사람만을 통해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다메섹 경험 이후, 구속사의 놀라운 성취를 깨닫게 된 바울은 유대인과 율법에 대해서 이전에 알지 못했던 문제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인간의 문제(죄, 사망)를 해결하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종말적 계획을 이루기에는 율법이 턱없이 ‘연약한’ 도구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바울이 발견한 ‘율법의 연약함’(8:3)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다메섹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 성령의 오심을 통해서 주신 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율법과 이스라엘이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의 실체를 깨닫습니다.

 

백성의 지위를 보장하지 않는 할례(25-29)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내면의 변화입니다.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이 율법의 정신을 따르면 참할례 받은 자처럼 됩니다. 육체가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손으로 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말씀에 순종할 때 영적인 유대인,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25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26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28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25-29)

 

어떤 이유에서건 유대인들이 여전히 이해하지 못할까 봐 바울은 유대인의 종교적 유산 중에서 가장 개인적이고 친숙한 면인 할례를 거론합니다. 할례는 유대인들의 시조 때부터 유대인 남자들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참여한다는 상징이었습니다.

 

⑴ 진정한 할례(25-27)

25-26절에서 바울은 할례를 받은 유대인은 율법을 범하지만, 정작 무할례자인 이방인이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온전히 지키는 상황을 설정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은 이후의 단락들에서 주어지는 바울의 설명 때문에 하나씩 풀려나갑니다. 로마서 5:12-21에서 바울은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이 죄와 사망의 종이 되었음을 밝히는데, 로마서 7장이 말하는 대로 그 노예 됨의 딜레마는 역설적이게도 율법을 소유하는 유대인에게 가장 극명하게 표출되었습니다. 결국,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서 율법의 요구를 모두 이루셨고,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차별이 없음을 밝혀나갑니다.

 

⑵ 내면적 유대인(28-29)

25-29절 단락도 다메섹 이후 바울의 선이해가 반영된 진술들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이 ‘율법의 요구’를 이룹니다(8:4).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그러한 자들이야말로 이면적 유대인이며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들입니다(28-29). 29절에서 바울은 마음의 할례가 ‘프뉴마’, 곧 성령의 사역에 달려 있다고 말하면서, 8장에서 다룰 성령의 사역을 미리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할례를 받았는지의 여부 자체는 무의미합니다. 실제로 성령을 좇아 ‘율법의 요구’,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온전히 이루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율법과 할례를 소유하고 있지만 정작 그리스도와 성령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유대인들은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들에 의해서 ‘판단’받게 될 것입니다(27). ‘판단’(27)과 함께 ‘칭찬’(29)은 종말적 심판대의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지 결정적으로 판가름할 마지막 심판을 이기게 하는 것은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 성령의 인 지심에 있습니다.

2장 전체를 통해 바울은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선포하는 동시에, 율법과 할례를 소유하고 있지 않은 이방인들이 오히려 ‘율법의 요구’를 이루고 하나님 백성의 자격을 갖추는 것이 성령을 통해 가능하다는 복음의 핵심을 제시하였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으로 장담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유대인에게 율법이 그러하였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성경이, 교회가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습니다. 심지어는 ‘복음’마저도, 우리가 마음을 바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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