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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1-04)


이방인에 대한 심판 이유

로마서 1장 18-23절


 

한 환자에게 ‘당신은 암이지만 수술하면 나을 수 있습니다.’라고 진단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내 병은 내가 압니다. 그냥 소화제 몇 약을 먹으면 금방 건강할 것입니다.’라고 고집부렸습니다. 주변인들은 얼마나 걱정이 되겠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의 모습이 이와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사람들은 죄악이 점점 성장하였습니다. 이제는 썩어서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입니다. 사람들은 조금만 손질하면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를 사랑하지만, 거부하는 사람에게까지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 성도들을 무한한 애정으로 믿음의 진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제 복음에 관해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제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왜 필요한지를 소개합니다. 사람들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분명히 치료할 수 없는 병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 체계적으로 ①죄의 정의 ②죄의 발단 과정 ③죄의 결과 등으로 서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당한 이유 없이는 절대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이교 세계를 심판하시는 세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막음(18)

오늘날 현대인을 보면 사람들이 죄짓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누가 누가 더 죄를 짓는가?’고 경주하는 느낌입니다. 아마도 텔레비전에서 죄를 자랑하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대박 프로그램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불순종이나 죄는 절대 자랑거리가 아니라 회개할 대상입니다. 우리는 가능한 한 빨리 하나님께로 돌아서야 합니다.

 

18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18)

 

본문에서 바울은 이방인의 죄에 대해 지적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소개합니다. 18절은 18-23절의 핵심적인 문장입니다. 이것은 또한 17절과 대조되는 평행 구절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남’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의의 표출이며, 인간의 죄악에 대해 대적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사람은 죄를 거론하면 싫어합니다. 특히 자신의 죄를 드러내는 것은 더욱 싫어합니다. 성도들 역시 하나님의 축복에 관한 이야기는 좋아하지만,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 또 죄의 결과 심판을 받으리라는 것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가 듣고 싶은 내용뿐만 아니라 반드시 들어야 할 회개와 심판에 관한 내용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에 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심판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17) 끊임없이 나타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나타납니다(2:5). 구체적으로 그의 불의(不義)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하나님 진노의 대상은 불의로 하나님의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임할 심판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 좇아 나타남”으로, 누구도 진노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고 심판하지만, 죄인을 사랑하고 구원하기 원하십니다. 인간이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못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사람을 올바르게 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진노의 대상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모든 자에게 임합니다. 그것은 그분의 개인적인 의의 표현이며, 인간의 죄에 대한 대결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는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며.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기독교에 대해서도 수많은 종교가 많이 있는데, 기독교만 완고하게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하느냐고 비아냥거립니다. 그러나 비방하는 사람들은 ‘경건치 않고 불의’합니다. ‘경건’의 의미는 ‘신성한 존재 앞에서 절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불경건’이란 ‘마음에 경배의 대상이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이 죄를 사람 대 사람의 실수로만 이해하려고 합니다. 즉, 도덕적 차원에서 죄를 이해하기 때문에 성경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실수라고 정의합니다. 즉, 죄를 영적 차원에서 설명됩니다.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자마자 복음이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불의’란 ‘인간에 대한 도덕적인 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불경건’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는 것을 말하지만, ‘불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경건치 않습니다. 우리는 더욱 자신의 기준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불의인 줄 모르고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고 심판하시지만, 죄인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내용을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고 죄를 자세하게 다루십니다. 죄가 무엇이며, 그 죄를 해결할 방법은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를 알 수 없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 그리고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질병의 원인을 알면 치료법을 알 수 있듯이, 죄의 근원을 알아야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충만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라고 소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간에게 하나님께 나가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지만, 제시해주신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한 것은 죄악입니다.

참된 경건에 대해 바르게 정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정의는 야고보 사도에 의해 제대로 정의가 되었습니다.

 

26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야고보서 1:26-27)

 

바른 신앙을 가지려면 날마다 예배는 드리고 있는데, 사람이나 물질에 대한 관계가 바른 사람입니다. 물질이나 사람들과 관계가 바르게 세워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긴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정작 내면에는 불의로 가득 차 있지는 않습니까? 불의를 행하지는 않지만 불의를 묵인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의 언행이 하나님의 진리를 막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이하지 않는 죄악(19-23)

봄철에 만발한 꽃을 보면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누가 시키지도 안했지만,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하면서 콧노래를 부릅니다. 이것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든 만물 속에 하나님의 그림자를 집어넣어 놓으셨습니다.

 

19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19-23)

 

여기에서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모든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 지식은 피조 세계에 나타나 있고, 누구나 접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을 다루는 구원론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계시’라고 불립니다.

 

⑴ 능력과 신성을 인간에게 밝히 드러내심(19-20)

바울은 인간이 우상숭배자로 전략하게 된 과정이 잘 지적합니다. 먼저 사람들에게 있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보편적인 지식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는 ‘생득적 지식’과 자연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 계시’로 구분됩니다.

① 생득적 지식

먼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생득적 지식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내면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을 태어날 때부터 주셨습니다. 이것은 본능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깊은 세계에서 절대자를 찾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라도 위기에 봉착하면 ‘아이쿠 하나님!’하며 하나님을 부릅니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람이 사는 곳에는 세상 어디를 가 봐도 반드시 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흔적들이 있습니다. 인간과 종교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짐승들은 영혼이 없기 때문에 배만 부르면 만족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먹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미개한 종족이라도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혼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고 예배합니다. 사람들은 순간적인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11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도서 3:11)

 

이처럼 모든 사람들은 사후 세계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영생을 누리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할 때만 진정으로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② 일반 계시

다음으로, 인간은 자연 만물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자연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좋은 장소입니다. 사시사철을 하나님 능력의 비밀을 가지고 있습니다. 봄이면 싹이 오르고, 여름이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열매를 거두는 자연의 이치를 보면서 하나님의 오묘하신 능력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양식을 공급해 왔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살펴보면 수많은 별들이 있지만 한 번도 충돌하지 않고 운행하여 우주의 질서와 조화를 드러냅니다. 시편 기자는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다음과 같이 찬양하고 있습니다.

 

1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5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6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시편 19:1-6)

 

이처럼 만물은 소리 없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신성을 증거 합니다.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놀라운 지혜, 그의 광대하심과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천지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도 정말 대단한 믿음입니다.

 

⑵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21-22)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살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자신보다 못하고 천한 미물(微物)들을 신으로 경배한다면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다. 종종 대학교 컴퍼스 안에서 건물이나 기계를 구입해 온 후에, 교수란 사람들이 기계나 건물이 잘 사용되도록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얼마나 많은 학식과 문명이 있는데, 지금까지 신(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만 하느냐?'고 고상한 척 말합니다. 그리고 ‘죄를 범한 일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나 종교가 필요 없다.’고 하면서도, 신(하나님)이 될 수 없는 미물들에게 경배하고 있을 보면 한심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들을 사람의 양심과 자연 만물 속에 남겨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 속에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웅장한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경배하는 종교로 변화되었습니다. 자연을 경배하는 신앙을 ‘샤머니즘(shamanism)’이나 ‘범신론(汎神論)’라고 부릅니다. 자연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신성(神性)이 들어 있지만, 그 자체가 신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 위에 초월해 계십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만물을 통해서 얼마든지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경배한 것이 아니라 창조물을 가지고 경배하니깐 얼마나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한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허망한 생각과 미련한 마음으로 어두워졌습니다.

 

⑶ 영광을 우상으로 바꾼 인간(23)

절대적인 기준이 없는 사람들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을 보면 세상의 가치관을 좇아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점점 우상숭배자가 되어갑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우상으로 만들어 그것들을 경배합니다. 우상의 대상이 사람이 될 수 있으며, 짐승이 될 수 있으며 심지어는 벌레들까지도 경배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한심스럽겠습니까!

천지 만물 속에 충만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해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보다는 자기중심의 삶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것으로 대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간에게 복음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의 불의가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받을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복음은 아무에게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주셔서 받았을 분 그것은 과분하고 형언할 수 없는 혜택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감당할 것이 인간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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