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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1-05)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결과

로마서 1장 24-32절


현대인의 삶을 보면, 굶주린 하이에나 무리와 같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모습은 비슷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이 따로 없습니다. 죄악을 찾아 어슬렁거리며 헤맵니다. 아주 고상한 죄를 찾아서 죄악의 쓰레기통을 찾아다닙니다. 죄악만 들통나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쓰레기통을 뒤진 짐승들은 음식물 냄새가 배듯이, 말하지 않아도 삶의 악을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1:18)고 했습니다. 본문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진노를 나타내신 네 가지 방식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네 가지 방식 모두가 사람에게 임하는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경건치 않음과 불의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써, 그 진노가 사람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 중 세 가지는 현제적 심판이며, 이것들은 오늘날 우리의 삶에 일어나고 있습니다(24-31). 마지막 심판은 미래적인데, 사람에게 임할 최후의 심판이 될 것입니다(32).

 

더러움에 버려두신 하나님(24-25)

요즈음 문명이 발달하여 한겨울에도 싱싱한 채소를 먹을 수 있습니다. 인류는 비닐로 열을 보호하는 방법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겨울철에 강한 바람에 의해 비닐이 걷히면, 식물은 얼어 죽습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비닐하우스처럼 보호받습니다. 하나님 아래 있으면 항상 안전하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보호 손길을 거두시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쓰러집니다.

 

24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24-25)

 

‘복음’에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도 포함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한동안 악을 심판하지 않으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심판을 미루거나 악을 용인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악에 대한 타협도 아닙니다.

 

⑴ 방치로 심판하신 하나님(24a)

이방인들의 죄를 지적한 바울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신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나 벗어나려고 하지만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반대하고 어기는 자들은 자신들의 죄의 결과를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데, 바로 그 점에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것입니다. 이 진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내버려 두신’ 것으로 표현됩니다. 이 표현은 후렴처럼 세 번이나 반복되어 나타납니다(1:24a; 26a; 28b).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라고 생각하면 하늘 날벼락 같은 혼쭐을 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들의 생각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임합니다. 사람들이 우상숭배 할 때, 하나님의 반응은 ‘버려두심(방치)’의 법칙입니다. ‘내버려 두심(παραδιδωμι)’은 문자적으로 ‘넘겨주다(hand over)’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⑵ 방치된 인류(24b)

‘어떻게 ‘방치(放置)’ 또는 ‘유기(遺棄)’가 하나님의 진노가 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그대로 놓아두는 것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방치한 것이 좋지 않으냐?’, ‘자유스럽게 사는 것이 얼마나 좋지 않으냐?’고 반문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제대로 깨닫지 못한 질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24b)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방치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싫어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보호(保護)’하심을 ‘간섭(干涉)’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격리하여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비극적인 상황에 빠져들어 가게 그냥 방치해 두셨습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의도한 대로 막대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지만, 그것 때문에 자기 자신을 파멸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눈이 어두우니 하는 일마다 망할 짓이었습니다. 마치 청소년들이 부모의 간섭이 싫어서 가출한다고 전해듭니다. 부모의 보호로부터 떠난 순간부터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을 보호해야하고, 자신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며,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결정해야 합니다. 아직 삶을 결정할 수 없는 시기에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니깐 대부분 가출 청소년들이 탈선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가장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부자 관계가 깨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부양의 의무를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능력이 자녀들에게 공급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좋은 충전 전자기기는 점점 시간이 지나면, 그 전원이 소진되어 방전되면, 아무 소용없는 일도 할 수 없는 거추장스러운 물건에 불과합니다.

 

⑶ 진리를 거짓으로 변환(25a)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상태를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로마서 1:21)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들도 삶의 기준이 있습니다. 바울은 ‘더러운 정욕’이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않는 인간의 마음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가 되어버립니다. 브레이크 없는 차는 속도를 내면 낼수록 무서운 흉기로 변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범하는 죄의 정도에 따라 더욱 부패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습니다.

가장 불쌍한 성도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가르침을 받지 않으려는 사람입니다. 누구도 가르칠 수 없기 때문에, 아직 영적으로 성숙하지 않는데도,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해 나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삶은 얼마나 힘들고 어렵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강력하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갈라디아서 5:16-18)

성도들이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지 않을 방법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육신의 소욕을 이길 수 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⑷ 인간들이 버리려는 하나님(24b)

바울이 부정적이고 무거운 교훈을 하다가, 잠시 밝은 분위기로 전환합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다시 짧게 설명합니다. 아무리 인간들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거부하여도 인간이 어떠한 거짓 행위도 하나님의 고유하고 변하지 않는 영광을 손상시킬 수 없습니다. 절대로 하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은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분이시다’(25b)고 찬양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분이 행하신 놀라운 일에 대하여 오직 찬양하는 방식으로만 하나님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버려두심으로 진노하신 하나님(26-27)

뿌려진 씨앗은 언젠가는 싹이 날 환경이 알맞으면 납니다. 싹은 성장하고, 시간이 흐르면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은 자연 순리의 ‘뿌려짐의 법칙’입니다. 사람의 행위도 그렇습니다. 선한 씨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씨도 뿌려면 반드시 그 열매가 맺습니다. 지금 당신은 무엇을 뿌리고 계십니까?

 

26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26-27)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간 인간들의 특징은 정욕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께서 대응하신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방탕한 삶에 ‘내버려두심’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을 무엇을 하든지 그대로 ‘내버려두심’, ‘방치’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가 이를 때까지 악 가운데 방치 하십니다.

 

⑴ 방치된 인간들(26-27a)

하나님을 떠나간 인간들에게 먼저 나타나는 현상은 ‘성적인 욕망’입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성적인 욕망과 흥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제어할 수 없는 발정난 암나귀와 같습니다(예레미야 1:24).

하나님께서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보면, 대부분 기본적으로 인간의 도리인 성적인 윤리를 벗어납니다. ‘불륜’도 부끄럽지만, 본문에서는 ‘동성애’까지 거론합니다. 그래서 ‘성적 타락’으로 가득합니다. 이것은 저보다 독자들이 더 잘 알 것입니다.

범죄한 사람들은 관계가 파괴됩니다. 첫 번째 관계 파괴는 ‘하나님과의 관계 파괴’되고, 다음으로 ‘사람들과 관계 파괴’가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을 순리대로 쓰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버리신 처음 파괴된 예로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동성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동성애’라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반하여 ‘부자연스러운(역리)’ 행동을 하게 합니다. 인간들이 하나님 대신에 자기들이 만든 우상으로 바꿔치기 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바울이 본보기로 보여주는 것이 ‘동성애’입니다. 당시에 망령된 문화는 ‘동성애’을 용인하고 심지어 높이 기리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부끄러운 죄인 줄 모르고 ‘동성애’가 합법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동성애’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죄라고 명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동성연애’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거나 창조하신 뜻대로 사는 형태가 아니라고 보여줍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이것이 죄 중에 가장 큰 죄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동성애’를 본보기로 사용하는 이유는 아마도 당시 이방인 상류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문화가 이방인의 죄성을 잘 보여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말할 필요도 없이 ‘동성애’는 죄었습니다. 레위기 18:22-23에 이미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목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가장 큰 죄는 아니지만 죽어 마땅한 죄인 것이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개인의 모습에 관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동성애를 들고 있습니다. 정욕으로 가득 찬 인간들은 동성애의 갈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여자와 남자들이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서로를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였습니다(26,27).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입니다. 남성과 여성이 인격체로서 사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함께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수컷이 수컷의 관계로, 암컷과 암컷의 관계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⑵ 방치된 인간들의 결과(27b)

바울은 그들이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창조질서를 교란하고 무질서하게 한 ‘상당한 보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창조질서 가운데 있는 ‘관계 회복’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 구원의 파괴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뿐만 아니라 모든 것들과의 관계가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건강을 잃어갑니다. 다른 사람과 협력관계가 아니라 투쟁 관계가 형성합니다. 그리고 물질이 수고해도 열매를 제대로 먹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모든 만물과 관계 회복을 의미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자신과의 바른 관계, 다른 사람과의 바른 관계 그리고 다른 피조물들과 관계에 대해 온전한 인격체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성적인 문란으로 인해 가정과 사회가 파괴되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바르게 섬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이 세대를 보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심(28-32)

모든 시대의 유혹은 에덴동산에서 사단이 하와에게 유혹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악의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습니다. 유혹을 허락하는 것은 성문을 열어준 것입니다. 죄는 사단에게 틈을 줄 때 생각이 들어오고 죄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28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28-32)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길 싫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방치하셨습니다. 방치되었기 때문에, 무너집니다. 어떤 사람은 한 순간에 무너진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점점 빈집처럼 퇴락해 갑니다. 바울은 그들의 열매들을 나열합니다.

 

⑴ 상실한 마음으로 방치(28b)

두 번째 진노는 진리를 거부하는 자들을 ‘상실한 마음으로 두셨다’(28b)라고 표현합니다. ‘상실한 마음’이란 올바른 도덕적 결정을 내리기에 부적격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피조물의 마음은 하나님의 계시의 빛에 의존해야 적절하게 기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난 마음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행동을 하기에 부적절한 마음입니다.

 

⑵ 산실한 마음의 결실(29-31)

바울은 본문을 통해 우리들에게 개념도 없던 악덕의 목록까지도 등장합니다. 성경에서는 비슷한 목록들을 소개합니다. 그 내용으로 참고할만한 성경들이 있습니다(로마서 13:13; 고린도전서 10-11; 고린도후서 12:20-21; 갈라디아서 5:19-21).

 

29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29-31)

 

이 제목들을 읽어가다 보면, 벌레가 가득한 재래식 화장실 내부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것에는 어떠한 질서나 구조도 없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 목록에 열거되어 있는 악덕들이 대부분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사회악’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수많은 악행들이 사사로운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소한 행동들이 공동체 구성원들의 신뢰를 깨뜨리고 사회에 독을 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들을 숭배하는 것은 모든 악의 시작이고 근원입니다. 우상숭배는 악덕의 홍수를 가져옵니다. 그리하여 인간 사회를 파괴하고, 창조 세계를 무서운 혼란의 구렁텅이에 빠뜨립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들이 되어 자기의 존재와 가치만 주장하다가 무차별하게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고 서로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⑶ 결론(32)

바울은 죄에 대한 결과로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32)라고 합니다. 그렇게 행동하는 인간들까지도 ‘하나님의 정하심’과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1:19). 그런데도 그들은 그런 일을 행합니다. 마치 아담이 하나님의 경고를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거침없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처럼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두둔해 줍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가 단순히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순간적인 불복이 아니라, 아주 의도적이고 계산된 도적임을 의미합니다. 결과적으로 32절에서 21-31절까지의 모든 행위에 대한 최종적인 결과는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말합니다. 죄의 대가는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롬 6:23).

그래서 하나님도 무가치한 것으로 채워진 상태로 하나님을 싫어하는 인간들을 버려두십니다. 그들의 잔인성은 자신들뿐 아니라 타인들도 이 일들을 행하도록 부추기는 데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진실함으로 채워져 있습니까? 아니면 허망한 것으로 채워져 있습니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변덕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 자신의 죄를 알 만한 것을 보내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거절하고 받지 않았습니다. 이제껏 인간은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며 스스로 의롭다고 속여 왔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자초한 것입니다. 사랑에도 한계가 있고, 기다림에도 끝이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자는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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