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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13-02)


요단 동편 지파들의 기업 분배

여호수아 13장 15-33절


 

요단 동편 땅을 분배받은 르우벤과 갓, 므나셋 반 지파의 영토를 상세히 서술합니다. 동편 지역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합법한 기업이며 거룩한 통치의 영역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정의로 살아가야 합니다. 은혜로 주신 기업임을 믿는다면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합니까?

 

장면은 다시 시간을 거슬러 이미 정복한 약속의 땅을 열두 지파에게 분배한 시간으로 되돌아옵니다. 정복하지 못한 땅에 대한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땅 분배 이야기도 요단 동편에 서 시작됩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요단 동편은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에게 할당되었습니다. 요단 동편은 애초에 요단강 너머 서편에 군한된 일차적 약속의 땅은 아니었지만, 이미 여러 차례 확장된 약속의 땅으로 약속된 바 있습니다.

 

요단 동편의 땅 분배(15-33)

하나님의 군사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을 신뢰하며 땅을 차지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우리 안에 있는 불순종의 죄악을 걷어 내야 합니다. 제거해야할 악한 습관이 있습니까? 어떻게 걷어 내시겠습니까?

 

15모세가 르우벤 자손의 지파에게 그들의 가족을 따라서 기업을 주었으니 16그들의 지역은 아르논 골짜기 가에 있는 아로엘에서부터 골짜기 가운데 있는 성읍과 메드바 곁에 있는 온 평지와 17헤스본과 그 평지에 있는 모든 성읍 곧 디본과 바못 바알과 벧 바알 므온과 18야하스와 그데못과 메바앗과 19기랴다임과 십마와 골짜기의 언덕에 있는 세렛 사할과 20벳브올과 비스가 산기슭과 벧여시못과 21평지 모든 성읍과 헤스본에서 다스리던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의 온 나라라 모세가 시혼을 그 땅에 거주하는 시혼의 군주들 곧 미디안의 귀족 에위와 레겜과 술과 훌과 레바와 함께 죽였으며 22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살륙하는 중에 브올의 아들 점술가 발람도 칼날로 죽였더라 23르우벤 자손의 서쪽 경계는 요단과 그 강 가라 이상은 르우벤 자손의 기업으로 그 가족대로 받은 성읍들과 주변 마을들이니라 24모세가 갓 지파 곧 갓 자손에게도 그들의 가족을 따라서 기업을 주었으니 25그들의 지역은 야셀과 길르앗 모든 성읍과 암몬 자손의 땅 절반 곧 랍바 앞의 아로엘까지와 26헤스본에서 라맛 미스베와 브도님까지와 마하나임에서 드빌 지역까지와 27골짜기에 있는 벧 하람과 벧니므라와 숙곳과 사본 곧 헤스본 왕 시혼의 나라의 남은 땅 요단과 그 강 가에서부터 요단 동쪽 긴네렛 바다의 끝까지라 28이는 갓 자손의 기업으로 그들의 가족대로 받은 성읍들과 주변 마을들이니라 29모세가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을 주었으되 므낫세 자손의 반 지파에게 그들의 가족대로 주었으니 30그 지역은 마하나임에서부터 온 바산 곧 바산 왕 옥의 온 나라와 바산에 있는 야일의 모든 고을 육십 성읍과 31길르앗 절반과 바산 왕 옥의 나라 성읍 아스다롯과 에드레이라 이는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자손에게 돌린 것이니 곧 마길 자손의 절반이 그들의 가족대로 받으니라 32요단 동쪽 여리고 맞은편 모압 평지에서 모세가 분배한 기업이 이러하여도 33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었더라(15-33)

 

여호수아는 모세가 정복한 요단강 동쪽 땅의 경계와 동네 이름까지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죽은 모세가 정복한 땅이고 그곳엔 이미 르우벤, 것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들이 갈고 있었습니다. 그 두 지파 반의 지경을 살펴보겠습니다.

(1) 르우벤 지파의 기업(15-23)

 

정복하지 못한 땅이 아직 남아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정복한 땅을 지파별로 할당 받았습니다. 각 지파별로 분배된 땅의 경계선과 범위, 거기에 얽힌 몇 가지 일화가 나옵니다. 다시 과거 시점으로 돌아오면서, 요단 동편 땅의 분배가 먼저 설명됩니다.

르우벤과 갓, 르낫세 반 지파에게 할당된 요단 동편은 아모리의 두 왕 시혼과 옥을 격파한 뒤 점유한 땅이었습니다(민 32:33). 이 땅의 전체 범위는 앞서 8-13절에서 이미 설명된 바 있으며, 이제는 각 지파별로 받은 땅의 범위와 경계가 주어집니다. 먼저는 르우벤 지파에게 ‘그들의 가족을 따라 기업을 주었습니다.’ 민수기 26장에서 여호와께서 지시하신 지침입니다. 거기서 두 가지 원칙이 하달됩니다, 먼저 인구 비례에 맞게 땅을 분배합니다. 둘째는 그 땅을 제비 뽑아 정합니다(민 26:52-56). 이것은 지파들의 땅을 일단 제비 뽑아 결정하고, 이어서 지파 내의 각 가문들의 땅은 인구수에 따라 지파 내에서 나누어준다는 뜻입니다. 민수기 32장에 비추어 볼 때, 요단 동편의 분배는 제비뽑기가 아니라 마치 모세가 직권으로 두 지파 반에게 경계선을 정해 준 것처럼 보입니다(민 32:33-42). 그러나 요단 동편과 서편의 지파들의 땅 분배는 모세의 직권이 아닌 민수기 26장의 원칙을 따라 제비뽑기로 결정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요단 동편 지파들의 땅의 경계는 이미 민수기 32:33-42에서 결정된 바 있습니다. 그것이 지금의 본문에서 더 상세히 묘사됩니다. 우선 르우벤 지파의 땅의 경계입니다. 최남단의 경계선인 아르논 골짜기에서 시작됩니다(16). 앞서 12:2,9에서 설명한 대로, 아르논 계곡은 사해 ㄹ허리로 흐르는 강줄기로서 모압과의 국경선이었습니다. 그 골짜기 언저리에 아로엘 성읍이 있고 그 위로 사해 북단까지 메드바 평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 위로는 헤스본과 주변 평지가 위치합니다(17). 헤스본의 위치는 사해 북쪽의 요단 강 맞은편입니다. 이어서 그 일대의 성읍들이 나열됩니다. 먼저 디본은 아르논 계곡 언저리에 위치했던 아로엘에서 매우 가깝습니다. 바못 바알은 민수기 21장의 바못과 동일한 장소로(민 21:19-20) 모압 평지가 내려다보이는 비스가 산 근처에 소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벧 바알 므온은 단순히 바알 므온으로도 칭하는데(민 32:38; 대상 5:8;25:9) 유적지로 확인된 곳은 없습니다. 이곳 또한 르우벤 지파의 영토로 느보 산을 포함하는 비스가 산 일대의 어느 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18절의 야하스의 위치는 몇 군데 후보가 제안되었지만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아마 이곳은 이스라엘이 아직 느보 산에 도착하기 전에 숙영을 한 비스가 산악 지역 아래쪽에 위치한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데못과 메바앗도 위치가 확인된 바 없습니다. 아마 그데못은 아르논 계곡에서 약 13km 떨어진 아모리 왕 시혼 관할 하의 목초지였던 것으로 추론됩니다(참조. 수 13:18;21:37; 대상 6:79). 19절의 기랴다임, 십마 그리고 세렛 사할 또한 위치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이 성읍들 또한 비스가 산악 지대 근처일 것입니다. 20절의 벳브올은 ‘브올의 집’이라는 뜻인데, 발람이 이스라엘에 대한 세 번째 저주의 시도를 위해 올랐던 브올 산 근처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론됩니다(민 23:28). 브올은 바알브올의 음행 사건이 발생한 장소일 수 있습니다. 바알브올은 지명이 아니라 ‘브올의 바알’이란 뜻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모세가 사후에 장사된 곳이기도 합니다(신 34:6). 오경에서 자주 언급되는 비스가 산은 아바림 산맥의 북부의 산악 지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참조. 12:3) 거기서 느보 산이 가장 높은 봉우리였습니다(민 21:20; 23:14; 27:12; 33:47). 발람은 이스라엘에 대한 두 번째 저주의 시도를 위해 이스라엘이 진을 친 모압 광야가 내려다보이는 비스가 산지의 어느 한 곳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민 23:14). 이 지역들이 다시 한 번 21절에서 ‘평지 모든 성읍과 헤스본에서 다스리던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의 온 나라’로 요약됩니다.

21절에서 말한 대로, 이때 모세의 이스라엘 군대의 공격으로 시혼 왕과 더불어 몇몇 미디안 출신 군주들이 함께 죽었으며, 바알브올 사건의 주동자 발람 역시 함께 처형됩니다(민 31:8,16). 이름이 거명된 다섯 명의 시혼의 지도자들은 시혼을 보좌하고 함께 시혼의 땅 일부를 왕처럼 다스린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아마 지방 영주와 같은 존재들이었을 것입니다. 이 미디안족 ‘다섯 왕’은 당시 미디안이 단일한 군주 체제, 즉 한 왕을 정점으로 한 강력한 왕정국가가 아니라, 여러 지역들의 동맹체였음을 확인해줍니다. 모압 족속도 당시 미디안 장로들과 협력 관계에 있었으며, 발람의 획책 하에 미디안과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음행에 빠트리는 데 성공한 바 있습니다(민 22:4-7; 31:16), 당시에 미디안은 이와 같이 서로 적대 관계였던 시혼 왕과 모압 왕 둘 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시혼과 옥을 제압했던 모세와 이스라엘 군대는(민 21장) 발람의 피로 발생한 바알브올 사건에서 음행 죄로 넘어진 후, 심기일전하여 이 사건의 주동자 발람을 처단하고 발람과 협조한 아직 남아 있던 미디안 세력을 완전히 격파했습니다(민 31장). 이때 위에 언급된 미디안의 다섯 군주 혹은 왕들이 처형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요단 동편의 저항 세력은 모두 제압되어 정복이 완료되었으며, 요단강을 서쪽 경계로 건너편의 이 땅이 두 지파 반에게 할당됩니다(23).

 

(2) 갓 지파의 기업(24-28)

 

이어서 갓 지파 땅의 범위가 지정됩니다. 우선 야셀 지역인데, 민수기 32:1에 비추어 볼 때, 야셀은 아마 성읍 이름이면서 요단 동편의 모압 광야 북쪽, 곧 느보 산 너머의 땅을 가리킬 것입니다. 이어서 길드앗 모든 성읍입니다. 여기서 길르앗은 얍복 강 남쪽 땅의 의미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어서 암몬 자손의 땅 절반인 랍바 앞의 아로엘이 동쪽의 경계선으로 그어집니다. 여기서 암본의 땅 절반이 갓 지파에게 할당되었다는 뜻은 언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암몬은 혈연 민족이기에(창 19:38) 공격하지 말라고 명령하섰고(민 21:24). 고대의 땅은 영향권이 충돌하며 겹치는 지역들이 많았습니다. 아마 이 암몬 땅 절반은 한때 암몬의 세력권이었다가 아모리 왕 시혼에게 내준 지역인 곳으로 보입니다. 랍바 앞의 아로엘에서 랍바는 아마도 현대의 요르단 수도였으며 다윗이 암몬을 점령할 때 하락한 도성입니다(신 3:11; 삼하 11:1; 12:26,27.29), 26절의 헤스본 근처의 라맛 미스베와 브도님은 위치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두 진영’이란 뜻의 마하나임의 후보지도 여러 곳이 제시되었으나 확실한 단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야곱이 얍복 강 근처에서 하나님의 군대인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난 뒤 그곳을 마하나임으로 칭하였습니다(창 32:1). 드빌은 요단 서편의 성읍 드빌과는 다른 곳입니다(10:38-39; 11:21; 12:13). 17절의 도성들도 모두 위치가 불확실합니다. 숙곳은 출애굽 당시 이집트에 소재한 숙곳과는 다른 장소입니다. 사본(Zaphon)의 히브리어는 북쪽이란 뜻의 ‘차폰’인데, 숙곳과 사본은 얍복 강 북부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3) 동쪽 므낫세 반 지파의 기업(29-33)

 

동편 므낫세 반 지파의 기업이 설명됩니다. 갓 지파에게 하당된 마하나임을 경계로 멀리 북쪽의 바산 지역과 그 아래로 얍복 강 북편 길르앗 절반이 그들의 영토입니다. 야일 지역의 60개 고을이 거기에 속합니다. 바산과 야일에 대해 12:3을 보시길 바랍니다. 아스다롯과 에드레이(31), 이 두 도성에 대해서는 12:4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성읍들은 모두 바산 지역의 주요 거점들이었습니다.

요단 동편의 이 지역은 므낫세의 마길 가문에게 할당됩니다. 마길에 대해서는 17장을 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레위 지파에게는 땅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반복합니다. 14절과 대조적으로 여기서는 그 이유가 여호와 자신이 그들의 기업이 되셨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두 지파 반은 비옥한 요단 동편의 땅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그 땅이 옥토인 만큼 적들도 탐내는 땅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후에 그 지역은 지속적인 외침에 시달리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조건이 좋다고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안전과 행복은 하나님의 약속과 보호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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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13-01)


가나안 땅 정복한 지역과 정복할 지역을 정리

여호수아 13장 1-14절


 

온전한 순종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온전히 순종하지 않을 때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지금 당장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철저히 순종하지 못하고 남겨두었을 때, 미래에 오랫동안 화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속히 그리고 철저하게 내쫓아야 할 것들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그 술 족속과 마아갓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여 함께 거주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어려움과 괴로움을 겪게 됩니다.

 

  • 여호수아서 서사의 흐름은 13장에서 갑자기 여호수아의 노년기로 바뀝니다. 하나님께서는 늙은 여호수아에게 정복되지 않는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여호수아의 정복 전쟁이 사실은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물론 큰 전쟁과 주요 성읍들의 정복은 완료되었기에 실제적인 가나안 땅 점유는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단 서편의 정복하지 못한 땅(1-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기업이 있습니다. 그 기업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의 터전을 돌아보며 아직 정복하지 못하고 있는 기업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더 인내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가야겠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친히 이루실 것이며 다 이루기까지 떠나지 않으실 줄 믿습니다.

 

1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도다 2이 남은 땅은 이러하니 블레셋 사람의 모든 지역과 그술 족속의 모든 지역 3곧 애굽 앞 시홀 시내에서부터 가나안 사람에게 속한 북쪽 에그론 경계까지와 블레셋 사람의 다섯 통치자들의 땅 곧 가사 족속과 아스돗 족속과 아스글론 족속과 가드 족속과 에그론 족속과 또 남쪽 아위 족속의 땅과 4또 가나안 족속의 모든 땅과 시돈 사람에게 속한 므아라와 아모리 족속의 경계 아벡까지와 5또 그발 족속의 땅과 해 뜨는 곳의 온 레바논 곧 헤르몬 산 아래 바알갓에서부터 하맛에 들어가는 곳까지와 6또 레바논에서부터 미스르봇마임까지 산지의 모든 주민 곧 모든 시돈 사람의 땅이라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리니 너는 내가 명령한 대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되 7너는 이 땅을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라 하셨더라(1-7)

 

여호수아의 시대가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정복 전쟁을 지휘해 오던 한순간에 여호수아가 노년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이스라엘이 정복하지 못한 지역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생존해 있을 동안 그 남은 지역이 이스라엘의 손에 완전히 들어오지는 못할 것이라고 암시하셨습니다.

 

(1) 남쪽의 미정복지(1-3)

 

13장에서 갑작스럽게 여호수아가 노년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여호수아가 110세에 죽기 직전의 시점이라면, 또 갈렙과 거의 동년배라면, 땅 분배 후 약 25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볼 수 있습니다(수 14:10). 하나님께서는 아직 정복되지 많은 땅이 남아 있음을 말씀하시면서 마지막 과업 완수를 당부하십니다. 남은 땅은 요단 서편과 동편으로 나뉘어 열거되는데, 요단 서편은 다시 남과 북으로 구분되어 자세한 목록이 제시됩니다. 1-3절은 우선 남쪽의 미정 복지들입니다. 서쪽의 지중해 해안의 블레셋 족속의 모든 땅이 건재했습니다. 블레셋 세력은 일찍이 철기를 도입해 철검과 철 병거를 갖춘 강력한 세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해안 길을 통해 가나안에 진입하지 못한 이유도 바로 블레셋 때문이었습니다(출 13:17). 지금도 여호수아의 군대는 블레셋 영토에는 전혀 진입하지 못했습니다. 이어서 그술 지역의 땅 또한 아직 정복되지 않았습니다. 이 그술 땅은 앞서 12:5에서 언급된 요단 동편의 골란 고원 일대에 위치했던 그술 땅과 혼동해선 안 됩니다. 3절에 비추어 볼 때 요단 서편의 이 그술 땅은 아마 블레셋 땅과 접해 있는 가나안족의 땅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실체는 확인된 바 없습니다. 이 미정복지 그술 땅은 다윗 시대에 제압됩니다(삼상 27:8; 삼하 10:6이하). 다윗은 그술 왕의 딸과 결혼하여 압살롬을 낳기도 했습니다(삼하 3:3). 애굽 앞 시홀 시내는 애굽에 있는 나일강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의 경계 전이었던 ‘애굽 시내’를 가리킵니다(민 34:5; 수 15:4, 대상 13:5). ‘애국 시대’는 네게브와 시내 반도를 구분하는 경계선입니다. 이 하천은 계절천(wadi)으로 우기 때만 흐릅니다. 에그론은 블레셋의 다섯 개의 핵심 성읍 중 하나로 가나안 족속과의 경계선에 놓여 있었습니다.

블레셋 해안의 북쪽 해안은 멀리 페니키아까지 가나안 족속의 영향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블레셋의 핵심 거주지인 다섯 개의 성읍이 나열됩니다. 가사는 현대의 가자 (Gaza) 지구에 속합니다. 가사는 현대의 가자 북동쪽의 텔 하루베(Tel Harube)일 것입니다. 가드 또한 블레셋의 거점 도시로(참조, 11:22) 현대의 텔 에스 사피(Tel es Sahi)로 확인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최근의 그 지역 발굴에서 골리앗과 비슷한 이름이 언급된 비문이 발견되어 사무엘서의 골리앗 이야기에 역사적 신빙성을 갖게 한다는 점입니다.

아스돗은 현대의 도시 아쉬에 텔 아쉬돗(Tel Ashdod)이 남아 있기에 실체가 확인됩니다. 아스글론은 아쉬돗의 남쪽인데, 현대의 아쉬켈론 시에 텔 아쉬켈론(Tel Ashkelon)이 유적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아위는 아마 블레셋 해안 지역에서 아스글론의 남쪽 마을이었을 것입니다(18:23의 아워과 동일하다). 이 다섯 성읍을 포함한 남부 해안은 블레셋이 오래전부터 점유한 상태였습니다.

 

(2) 북쪽의 미정복지(4-7)

 

이제 미정복지의 소개는 지중해 해안을 거슬러 북쪽으로 향합니다. 가나안 족속의 세력권입니다. 원문에서 4절은 ‘남쪽으로’라는 어구와 더불어 시작됩니다. 이 표현은 지금까지 설명된 ‘남쪽 해안’에서 이제 북쪽 해안으로 눈을 돌린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여기서 가나안은 해안 지역에 세력을 형성한 종족을 뜻합니다. 므아라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시돈 지역에 속해 있었습니다. 갈멜 산 북쪽에 소재한 아벡은 12:18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벡은 페니키아의 최남단으로 갈멜 산 너머 아모리 족속과의 경계선에 놓여 있었습니다(4). 그발 땅은 현대의 레바논의 비블로스(Byblos) 시이며 베이루트 북쪽 32km 지점입니다. 갈멜 산 지역와 아백에서는 해번길을 따라 복쪽으로 무려 150km나 떨어진 곳입니다. ‘해 뜨는 곳의 레바논’이란 단순히 그발 해안으로부터 동쪽에 위치한 레바논 땅을 뜻합니다. 레바논 남부와 헤르몬 산 아래 바알갓이 있는데, 11:17에서 설명한 대로, 바알갓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맛에 들어가는 곳’은 하맛 입구라는 뜻의 고유명사 ‘르보 하맛’일 수 있습니다. 민수기 13:21에서는 이곳이 ‘하맛 어귀 르흡’으로 소개됩니다.

6절은 해안을 따라 그발 망 아래로 내려오며 미정복지를 언급합니다. 이곳은 페니키아 남부의 두로와 시돈 지역입니다. 미스로봇마임은 11:8에서 설명한 대로, 시돈 지역의 도성입니다. 시든은 고대로부터 유명한 도시로서 현대와 시돈과 일치하나 그 근처의 미스르봇마임의 위치는 불확실합니다.

해양 세력인 페니키아(베니게) 또한 블레셋처럼 이스라엘이 진입하지 못한 영토입니다. 그러나 정복되지 못한 땅은 여부스 족속과 게셀의 가나안족 등, 이외에도 더 많이 있었습니다(수 15:63,16:10; 17:12,13; 23:43; 삿 1장).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 땅에서 그들을 쫓아낼 것이며 이스라엘은 그 땅을 점유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6). 이 요단 서편 땅은 아홀 지파 반에게 분배하라고 명령하십니다(7).

 

요단 동편의 정복하지 못한 땅(8-14)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그랬듯이 가나안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서는 그 땅을 차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순종의 관계가 분배 받은 땅의 거주민들을 쫓아내는 이 원리는 에덴동산 이후 모든 세대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하나님 나라 원칙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내가 누리는 모든 축복과 연관이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8므낫세 반 지파와 함께 르우벤 족속과 갓 족속은 요단 저편 동쪽에서 그들의 기업을 모세에게 받았는데 여호와의 종 모세가 그들에게 준 것은 이러하니 9곧 아르논 골짜기 가에 있는 아로엘에서부터 골짜기 가운데에 있는 성읍과 디본까지 이르는 메드바 온 평지와 10헤스본에서 다스리던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의 모든 성읍 곧 암몬 자손의 경계까지와 11길르앗과 및 그술 족속과 마아갓 족속의 지역과 온 헤르몬 산과 살르가까지 온 바산 12곧 르바의 남은 족속으로서 아스다롯과 에드레이에서 다스리던 바산 왕 옥의 온 나라라 모세가 이 땅의 사람들을 쳐서 쫓아냈어도 13그술 족속과 마아갓 족속은 이스라엘 자손이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그술과 마아갓이 오늘까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거주하니라 14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기업으로 준 것이 없었으니 이는 그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들의 기업이 되었음이더라(8-14)

 

이어서 요단 동편의 정복하지 못한 곳들이 나열됩니다. 이 땅은 르우벤과 갓, 므낫세 반 지파에게 이미 할당된 상태입니다. 먼저 이미 정복된 요단 동편의 범위와 성읍들이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남쪽으로는 모압과의 국경인 아르논 골짜기와 그 근처에 소재한 아로엘(Aroer)이 경계선입니다. 아로엘은 아르논 계곡 주변의 거점 도시였는데 현대의 키르베트 아라이르(Khirber Arair)로 간주됩니다. 이곳은 아르논 골짜기 북쪽 경사면에 위치하며(Tigay) 사해의 아르논 강 입구에서 아로엘까지는 약 18km 정도의 거리입니다. 근처의 디본은 아로엘에서 불과 수 킬로미터 내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메드바 평지는 사해 중간인 아르논에서 사해 북부까지 펼쳐진 사해 동쪽의 고원 지대를 일컫습니다. 메드바 고원 평지는 사해 북쪽에서 남으로 아르논 계곡 고원 지대를 일컫습니다. 메드바 고원 평지는 북쪽에서 남으로 아르논 계곡의 디본까지의 영역입니다(9). 메드바는 사해 북부의 동편에 위치한 현대의 마다바(Madaba)로 인정됩니다.

거기서 북쪽으로 헤스본을 중심한 아모리 왕 시혼의 땅과 성읍이 설명됩니다. 헤스본 일대와 시혼이 다스린 모든 성읍, 그리고 암몬과의 경계까지 이미 정복되었다는 설명과 함께 11절은 계속해서 그 너머 북쪽의 지역들을 나열합니다. 그곳은 12:2,5에서 이미 언급한 길르앗, 그술, 마아갓(마아가) 땅, 멀리 헤르몬 산과 동쪽으로는 살르가에 이르는 온 바산 땅입니다. 살르가의 위치는 확실하지 않으나 종종 현대의 살크하드(Salkhad)가 제안됩니다. 만약 이곳이 맞는다면, 요단강에서 동쪽을 향해 무려 100km가 넘는 곳에 위치하여 주거지로는 동쪽의 맨 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너머는 광활한 사막 지대입니다. 남쪽의 시혼 왕과 더불어 북쪽의 요단 동편을 통치하던 옥을 격파함으로써 길르앗 땅의 아모리 족속을 모두 쫓아냈습니다(12). 앞서 말한대로 옥을 지칭하는 12절의 ‘르바의 남은 족속’이란 ‘르바임의 남은 자들’을 뜻합니다. 당시 골리앗과 같은 르바임, 즉 거인으로 불리는 장수들 중에는 바산 왕 옥이 유일하게 남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요단 동편에서도 일부 쫓아내지 못한 종족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술 족속과 마아갓(마아가) 족속입니다. 직전의 10절에서 점령지에 그술과 마아갓 지역이 포함되어 있지만, 아마도 그곳에 거주하던 그술 사람들과 마아갓 사람들은 완전히 제압하지 못해 정복이 와서 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흥미롭게도 요단 서편 블레셋 근처의 그술 땅과 요단 동편의 같은 이름의 그술 땅이 아직 점령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열두 지파 모두 요단강의 동편과 서편에서 땅을 할당받게 될 것이나 레위 지파는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바치는 ‘화제물’이 기업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4, 13:33; 참조, 신 18:1). 여기서 화제물은 흔히 알려진 대로 제사에서 태우는 제물이라기보다는 음식 봉헌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업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평생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을 정복했지만, 마무리한 시점에서 보니깐 아쉽게도 완전 정복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여호수아처럼 주어진 일을 마무리해야 할 날이 올 것입니다. 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때가 되면 하나님께 서야 합니다. 평생 동안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것이 참된 믿음이자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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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12-01)


가나안 땅 정복에 대한 정리

여호수아 12장 1-24절


옛날에는 중학과정을 마치고 고등학교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보아야 했습니다. 이 입학시험은 중학교 3년간 배운 부분에서 출제되었기 때문에 모든 3년 교과서를 다 살펴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참고서 출판사에서 “00년간 고입 총정리”이란 책이 출판되면서 교과서 전체를 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 책은 중학교 3년 과정 각 과목별로 출제된 유형에 따라 교과 과정이 잘 총정리 되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입시 가이드와 같은 책이었습니다.

 

 

  • 여호수아서 서사의 흐름은 13장에서 갑자기 여호수아의 노년기로 바뀝니다. 하나님꼐서는 늙은 여호수아에게 정복되지 않는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여호수아의 정복 전쟁이 사실은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물론 큰 전쟁과 주요 성읍들의 정복은 완료되었기에 실제적인 가나안 땅 점유는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정복한 요단 동편 지역(1-6)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들은 모두 지켜주십니다. 지금도 그 약속들을 성취해 나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는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쉽게 이루어집니다. 그 약속은 아브라함과 모세와 여호수아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진심으로 믿고 있습니까?

 

1이스라엘 자손이 요단 저편 해 돋는 쪽 곧 아르논 골짜기에서 헤르몬 산까지의 동쪽 온 아라바를 차지하고 그 땅에서 쳐죽인 왕들은 이러하니라 2시혼은 헤스본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의 왕이라 그가 다스리던 땅은 아르논 골짜기 가에 있는 아로엘에서부터 골짜기 가운데 성읍과 길르앗 절반 곧 암몬 자손의 경계 얍복 강까지이며 3또 동방 아라바 긴네롯 바다까지이며 또 동방 아라바의 바다 곧 염해의 벧여시못으로 통한 길까지와 남쪽으로 비스가 산기슭까지이며 4옥은 르바의 남은 족속으로서 아스다롯과 에드레이에 거주하던 바산의 왕이라 5그가 다스리던 땅은 헤르몬 산과 살르가와 온 바산과 및 그술 사람과 마아가 사람의 경계까지의 길르앗 절반이니 헤스본 왕 시혼의 경계에 접한 곳이라 6여호와의 종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치고 여호와의 종 모세가 그 땅을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었더라(1-6)

 

전쟁기인 여호수아의 전반부 이야기는 12장의 승전 기록과 더불어 끝을 맺습니다. 점령된 지역들이 상세히 나열됩니다. 이 목록은 모세가 정복했던 요단 동편 땅부터 시작됩니다. 요단 동편의 점령지는 ‘아르논 골까기에서 헤르몬 산까지의 동쪽 온 아라바’로 표현됩니다. 여기서 북쪽 경계는 헤르몬 산까지로 국한되지만 확장된 약속의 땅은 유프라테스 강 상류까지 이릅니다(여호수아 1:4). 여기서 아라바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사해 부근에서 헤르몬 산까지 펼쳐진 요단 동쪽의 넓은 고지대 ‘평원’을 가리킬 것입니다. 이어서 요단 동편에서 모세가 무찌른 왕들의 이름이 나열됩니다. 먼저 헤스본에 거주하던 아모리 왕 시혼이 나옵니다. 그의 영토는 남쪽으로 아르논 골짜기에서 시작됩니다. 아르논 골짜기를 경계로 남쪽은 모압 영토입니다. 아르논 골짜기의 아로엘 성읍에서 시작된 시혼 왕의 영토는 북으로 얍복 강을 지나 멀리 긴네롯 바다(갈릴리)에 이르는 요단의 동편의 평원(아라바)입니다(3). 얍복 강 하류는 길르앗 일대로 모두 아모리 왕 시혼의 영토지만, 상류는 강줄기가 남쪽으로 구부러지면서 자연스럽게 암몬과의 경계선을 형성했습니다(민 21:24).

시혼 왕은 또 다른 아모리 왕 옥과 요단 동편을 분할 통치하고 있었는데, 시혼과 옥의 영토 경계선은 갈릴리 남단으로 흐르는 야르묵 강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남으로 내려와 염해(사해) 근처 시혼 왕의 영토가 상세히 묘사됩니다(3). 남쪽의 요단 동편 평원(아라바)은 염해를 끼고 있으며, 그곳의 거점 도시는 벧여시못이었습니다. 비스가 산기슭은 모압 평지와 멀리 요단 서편을 내려다보는 산악 지대로서 느보 산이 최정상이었습니다(13:20). 야르묵 강 북쪽의 고지대 평원은 바산이라 불리는데, 아모리 왕 옥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바산의 주요 도시는 아스다롯과 에드레이였으며, 둘 중에서 수도는 아스다롯이었습니다. ‘르바의 남은 족속’은 옥이 르바임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르바임은 종족 이름이 아닌 ‘거인’을 뜻합니다. 신명기는 옥의 침상이 길이가 9규빗(4m), 폭이 4규빗(1.8m)에 이르는 거대한 철 침상이었다고 말합니다(신명기 3:11). 5절에서 바산 왕 옥이 다스리던 영토가 상세히 나열됩니다. 북쪽으로 헤르몬 산이 있고 동쪽으로 살르가가 소재해 있었습니다. 그술은 갈릴리 호수 북동쪽의 골란 고원 남부, 마아가는 골란 고원의 북쪽일 것입니다. 그술은 13:2,13에서 아직 쫓아내지 못한 요단 서편의 그술과는 다른 도성입니다. 이 성읍들은 시혼 왕의 영토와 경계선에 놓여 있었습니다(5). 이 광활한 요단 동편 전부를 모세가 시혼과 옥을 연달아 격파함으로써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이 땅은 우여곡절 끝에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에게 할당되었습니다(6). 요단 동편의 경계들과 점령된 성들의 자세한 목록은 13:8-32에서 자세히 열거됩니다.

 

여호수아가 정복한 요단 서편 지역(7-24)

하나님 나라는 순종의 나라임을 후손들에게 보여줍니다. 우리에게도 미래는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준비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대답할 차례입니다. 점령할 것인가? 점령당할 것인가? 마지막 성읍을 점령하기까지 매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며 싸워야 합니다. 어제의 승리가 오늘을 보장하지 않으며, 분투하지 않고 이길 수 있는 손쉬운 싸움은 없습니다.

 

7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 이편 곧 서쪽 레바논 골짜기의 바알갓에서부터 세일로 올라가는 곳 할락 산까지 쳐서 멸한 그 땅의 왕들은 이러하니라(그 땅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지파들에게 구분에 따라 소유로 주었으니 8곧 산지와 평지와 아라바와 경사지와 광야와 네겝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라)9하나는 여리고 왕이요 하나는 벧엘 곁의 아이 왕이요 10하나는 예루살렘 왕이요 하나는 헤브론 왕이요 하나는 야르뭇 왕이요 11하나는 라기스 왕이요 12하나는 에글론 왕이요 하나는 게셀 왕이요 13하나는 드빌 왕이요 하나는 게델 왕이요 14하나는 호르마 왕이요 하나는 아랏 왕이요 15하나는 립나 왕이요 하나는 아둘람 왕이요 16하나는 막게다 왕이요 하나는 벧엘 왕이요 17하나는 답부아 왕이요 하나는 헤벨 왕이요 18하나는 아벡 왕이요 하나는 랏사론 왕이요 19하나는 마돈 왕이요 하나는 하솔 왕이요 20하나는 시므론 므론 왕이요 하나는 악삽 왕이요 21하나는 다아낙 왕이요 하나는 므깃도 왕이요 22하나는 게데스 왕이요 하나는 갈멜의 욕느암 왕이요 23하나는 돌의 높은 곳의 돌 왕이요 하나는 길갈의 고임 왕이요 24하나는 디르사 왕이라 모두 서른한 왕이었더라(7-24)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고 떨지 말라고 하나님과 모세가 번갈아가며 연신 당부해야 할 정도로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정복 사명은 절벽 같은 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결국 해냅니다.

 

(1) 남쪽 지역 왕들의 목록(7-16)

 

모세가 요단 동편의 점령을 완수했다면, 여호수아는 요단 서편의 정벌을 마무리했습니다. 요단 서편의 남북 범위가 바알갓에서부터 할락 산까지로 설정됩니다.

이것은 11:17 진술의 반복인데, 순서가 바뀌어 있습니다. 8절의 지정학적 묘사도 앞서 설명된 것의 반복입니다. 요단 서편 땅의 전체 지형이 남에서 북까지, 요단 강에서 서쪽의 지중해 연안까지 대표 종족들과 더불어 포괄적으로 나열된다. 9절부터 점령지 왕들의 이름이 나열됩니다. 9절의 아이와 벧엘은 인접한 성읍들이었습니다. 13절의 게델은 아마도 드빌에서 가까운 지역일 것이나 실체가 전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14절의 호르마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가나안 족속과 전쟁했던 곳이기도 합니다(민 14:45;21:3; 신 1:44;12:15; 수 19:4; 삿 1:17). 아둘람은 처음 등장하는 추가된 장소입니다. 예루살렘 남서쪽 약 28km에 위치하었다. 막게다는 남방 전투에서 다섯 왕들이 처형된 곳입니다.

 

(2) 북쪽 지역 왕들의 목록(17-24)

 

이어서 북쪽 지역의 도성들과 왕들의 이름이 나열됩니다. 17절의 답부아는 확인된 바가 없으나, 현대의 작은 마을 크파르 타푸아(Kfar Tapuah)가 그곳이라며 예루살렘 북쪽 약 38km 지점에 위치해 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의 경계를 이루는데 므낫세에 속해 있습니다(16:8;17:7-8). 따라서 답부아부터는 실재지으로 가나안 북쪽 도성들의 목록입니다. 시간 순서로는 하솔 근처에서 북부 세력과 전면전을 펼쳐 제압한 뒤, 아마도 남하하여 중부권을 정복했을 것입니다. 헤벨의 후보지로는 므깃도 남쪽 약 12km 지점의 텔엘 무하파르(Telel-Muhaffar)가 나름 가능한 곳으로 제시되면서 몇 군데가 거론되지만, 확실한 단서는 없습니다. 이곳은 19:13의 가드 헤벨과 다른 곳입니다.

18절의 아벡은 텔 아펙(Tel Aphek)으로 인정됩니다. 이곳은 갈멜 산 북쪽 해안 도시 키르야트 얌(Kiryat Yam)의 동쪽에 위치합니다. 아벡은 고대로부터 이집트와 우가릿 문헌 등에서 나타날 만큼 유서 깊은 도성입니다. 랏사론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19절의 마돈을 티베리아스 서쪽의 카른 하틴(Qarn Hattin)과 동일시합니다. 20절의 시므론 므론은 앞서 언급한 대로, 아마도 메롬과 동일한 것으로 보입니다. 악삽은 몇 개의 이집트 문헌들에 나타나지만(Aharoni), 역시 위치는 몇몇 후보지가 거론될 뿐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21절 다아낙의 위치는 므깃도 남쪽 가km 지점의 텔 타나크(Tel Tanach)로 추정됩니다. 17절에서 언급된 헤벨에서 불과 북쪽으로 5km 지점일 만큼 두 성은 가까웠습니다. 고대의 므깃도는 현재 텔 므깃도 국립공원(Tel Megiddo National Park)으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22절의 게데스는 갈릴리 북쪽 하솔 근처에 있는 납달리 지파의 영역인 갈릴리 게데스(19:37; 20:7; 21:32)와 다른 장소입니다. 게데스는 잇사갈 지파의 땅에 속한 도성일 것입니다(역대상 5:72). 이곳은 다아낙, 므깃도, 욕느암과 가까운 이스르엘 골짜기 내에 위치한 곳으로 텔 아부 쿠다이스(Tell Abu Qudeis)로 추정됩니다(Junkkaala; Pitkanen). 이 유적지는 브깃도 공원에서 불과 3km의 거리입니다. 욕느암의 위치로는 텔 요크네암(Tel Yoqneam = Tel Qamun)이 재시되며 스불론 지파의 영토입니다(19:11; 21:34), 갈멜의 욕느암이란 이곳이 갈멜 산 근처에 소재했음을 말해줍니다 현대의 텔 요크네암은 므깃도에서 북서쪽으로 약 10km 지점이며 갈멜 산 남동쪽 기슭입니다.

23절의 돌(Dor)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합니다. 이곳은 팔레스타인 북부 지방의 지중해 해안에 인접한 현대의 키르베트 엘 부르지(Khirbet el-Bur)인 것으로 추론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이곳과 열왕기상 4:11에서만 나타나고 역시 둘 다 지명 돌(Dor)와 함께 ‘높은 곳들’(나포트)이 붙는데, 이것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으나 ‘언덕’을 뜻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돌(Dor) 근처의 모래 언덕들(sand dunes)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합니다(Soggin; Butler). 길갈의 고임 왕은 문자적으로 ‘길갈의 민족들의 왕’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고임은 지명으로 사용된 고유명사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고임의 위치는 우리가 알 수 없으나, 사사기 4:2의 하로셋 학고임과 동일한 도성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길갈은 위치로 볼 때 분명히 또 다른 길갈입니다.

24절의 디르사 또한 위치가 분명하지 않으나 텔엘 파라 (Tel el-Farah)가 가능한 후보 중 하나입니다(Junkkaala; Pitkanen), 이곳은 므깃도에서 상당히 남쪽으로 내려와 가나안의 중심부에 위치합니다. 세겜(오늘날의 나블루스)과는 불과 북서쪽 8km 거리일 만큼 가깝습니다. 디르사는 왕정 시대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몇몇 왕들이 수도로 삼을 만큼 중요한 도성이시도 했습니다(열왕기상 14:17: 15:21: 16:6,8,23). 남과 북의 정복된 왕들의 총계는 31명입니다(24).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가나안 땅을 정복함으로 뜻을 이루십니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뜻을 이루시고야 맙니다. 그 역사에 참여하기를 주저한다면, 다른 이를 택해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주신 기회에 감사하고, 신실한 순종과 헌신으로 섬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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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11-01)


북부 가나안 정복 진격

여호수아 11장 1-23절


어려운 상황을 만나면 벼랑 끝에 있는 기분이 들 수 있습니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움츠려 들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며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려 합니다. 그러나 참담한 패배를 딛고 일어서기 위해서는 새로운 전략으로 정면 돌파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위기를 극복한 후, 자신을 돌아보면 작은 것 하나 때문에 실패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조금만 더 노력했더라면 실패하지 않았을 것이며, 성공은 바로 눈앞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실패했다고 생각하기보단 조금 더 수고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곳에 성공이 숨어있습니다.

 

  • 11장은 북부 지역 정벌을 묘사한 뒤(1-15), 가나안 땅 전체의 정복을 요약합니다(16-23). 북부 지역의 전쟁 양상은 남부 지역과 비슷합니다.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전승 소식을 적들이 전해 듣고 동맹군을 형성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연합군이 이스라엘에게 진격해 올 때 두려워하지 말라고 여호수아의 용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북쪽의 핵심 세력들이 격파되고, 이어서 남은 지역이 모두 점령됩니다.

 

북부 지역 정벌(1-15)

어려움이 닥칠 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도와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모든 상황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인도하심과 능력을 신뢰하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십니다. 어떤 도전이든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항상 의지하며 나아갑시다.

 

1하솔 왕 야빈이 이 소식을 듣고 마돈 왕 요밥과 시므론 왕과 악삽 왕과 2및 북쪽 산지와 긴네롯 남쪽 아라바와 평지와 서쪽 돌의 높은 곳에 있는 왕들과 3동쪽과 서쪽의 가나안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산지의 여부스 족속과 미스바 땅 헤르몬 산 아래 히위 족속에게 사람을 보내매 4그들이 그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나왔으니 백성이 많아 해변의 수많은 모래 같고 말과 병거도 심히 많았으며 5이 왕들이 모두 모여 나아와서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메롬 물 가에 함께 진 쳤더라 6○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일 이맘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넘겨 주어 몰살시키리니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그들의 병거를 불사르라 하시니라 7이에 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와 함께 메롬 물 가로 가서 갑자기 습격할 때에 8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 주셨기 때문에 그들을 격파하고 큰 시돈과 미스르봇 마임까지 추격하고 동쪽으로는 미스바 골짜기까지 추격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쳐죽이고 9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그들의 병거를 불로 살랐더라 10○하솔은 본래 그 모든 나라의 머리였더니 그 때에 여호수아가 돌아와서 하솔을 취하고 그 왕을 칼날로 쳐죽이고 11그 가운데 모든 사람을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고 또 하솔을 불로 살랐고 12여호수아가 그 왕들의 모든 성읍과 그 모든 왕을 붙잡아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바쳤으니 여호와의 종 모세가 명령한 것과 같이 하였으되 13여호수아가 하솔만 불살랐고 산 위에 세운 성읍들은 이스라엘이 불사르지 아니하였으며 14이 성읍들의 모든 재물과 가축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탈취하고 모든 사람은 칼날로 쳐서 멸하여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15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하나도 행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1-15)

 

북쪽 가나안의 여러 왕들이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하지만,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들을 기습하여 승리하고 도시들을 점령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북쪽 가나안 지역을 정복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나아가야 합니다.

 

(1) 북방의 동맹군들에 대한 승리(1-9)

 

11장부터 무대가 가나안 북부 지역으로 바뀝니다. 세겜 근처의 길갈에서 하솔까지는 거의 100km의 거리입니다. 여호수아 군대의 남방 정벌에 대한 소문은 순식간에 북방 지역에 퍼졌을 것입니다. 하솔 왕 야빈은 이 소식을 듣고 남방의 예루살렘 왕처럼 동맹군을 형성합니다. 북방 동맹국들의 방대한 지리적 분포를 볼 때, 이 연합군의 규모는 남방의 연합군보다 훨씬 거대했을 것입니다. 소집된 도성들은 마돈, 요밥, 시므론, 악삽이며, 지역 명으로는 북쪽 산지, 긴네롯(갈릴리) 남쪽 광야(아라바), 평지, 지중해 연안 쪽 모래 언덕의 도성인 돌(Dor)을 포함합니다. 덧붙여 방향을 기준으로 동에서부터 서에 이르는 모든 부족, 곧, 가나안, 아모리, 헷, 브리스 족속을 비롯하여 남쪽 산지에 거하던 여부스 족속과 멀리 북쪽의 미스바 땅이라 불리는 헤르몬 산 아래에 거하던 히위 족속까지 불러 모았습니다. 이들이 규합한 동맹군의 세력은 ‘해변의 수많은 모래와 같았고 말과 병거도 심히 많았다.’ 거대한 군단이 강력한 무기인 말과 병거를 몰고 운명이 걸린 전쟁터로 출정했습니다. 해변의 모래 같다는 비유적 표현은 막대한 숫자에 대한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이 군단을 이끈 인물은 하솔 왕 야빈입니다. 8절은 하솔이 모든 나라의 머리였다고 소개하면서, 그 성읍의 강력한 영향력을 설명합니다. 하솔은 갈릴리 호수에서 북쪽으로 15km 지점에 위치하며, 당시 인구가 삼만 명 정도로 추정될 정도로 다른 성들보다 훨씬 컸습니다. 마돈을 비롯한 여러 도성과 지역들의 위치는 12장에서 살펴보기로 합니다. 이들의 격전지는 메롬 물가였는데, 그 위치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메롬 물가는 메롬에서 멀지 않은 훌라 호수(Lake Hula)와 주변의 넓은 습지로 추론됩니다. 그곳은 갈릴리 호수에서 북쪽으로 22km 거리입니다. 격전지는 그 호수 인근의 고지대로 추정됩니다. 어떤 학자는 그곳의 높고 험한 지형이 병거가 움직이기에는 매우 불리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그들의 병거를 불사르라’(6)는 여호와의 명령이 그 전쟁의 상황에 잘 부합한다는 주장입니다. 말의 발목 힘줄이 끊어진다는 것은 말이 더는 달리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적들이 무기력하게 쓰러질 것이라는 비유입니다(참조, 삼하 8:4). 이스라엘 군대는 기습 작전으로 이들을 단숨에 격파했습니다(7). 여호수아는 북쪽으로 시돈과 미스르봇 마임까지 도주한 적들을 추격했습니다. 이 지역들은 팔레스타인 북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시돈은 현대의 시돈(Sidon)과 동일한 도시로 하솔에서 북서쪽 50km 지점입니다. 아마 전쟁이 벌어진 메롬 호수 근처에서는 약 40km 거리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동쪽으로는 미스바 골짜기까지, 헤르몬 산 근처까지 추격했습니다. 엄밀하게는 추정된 전쟁터에서 북동쪽이 헤르몬 산인데, 마찬가지로 약 40km의 거리입니다.

 

(2) 하솔과 다른 성들의 점령(10-15)

 

하솔 유적지 발굴을 통해 주전 1200년대에 도성이 불타고 파괴된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하솔만 불살랐다는 보고입니다. 놀랍게도 고고학의 발굴을 통해서도 주전 13세기경 하솔만 파괴되어 불태워졌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북쪽에서는 그 외 오랜 유적지에서 파괴와 소각의 흔적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구릉지(언덕, 텔 ) 위에 세운 성읍들은 사르지 않았습니다(13). 이것이 가나안 전체에 해당하는지, 아니면 북부 지역에만 해당하는지 정확하지 않으나 아마 전체를 가리킬 것입니다. 불태워진 성읍들(예. 여리고와 아이)은 산(언덕) 위에 세워진 성읍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특히 신명기 6:10은 성읍 파괴가 아닌 보존을 통해 이스라엘이 성과 그 안에 있는 재산을 고스란히 이어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정복된 가나안의 모든 도성들이 소각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북부 지역의 도성들은 파괴되었을 뿐 불태워지지는 않았으며, 전리품도 이스라엘 백성이 취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북부에서는 매우 낮은 수위의 헤렘 전쟁이 수행되었을 것입니다.

 

정복된 지역에 대한 보고(16-23)

죄는 부메랑처럼 돌아옵니다. 오늘 방치한 죄악은 언젠가 되돌아올 것입니다. 안일하게 남겨둔 죄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태연하게 남겨둔 죄악은 피할 수 없습니다. 죄악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경각심을 가지고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죄는 우리의 삶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16○여호수아가 이같이 그 온 땅 곧 산지와 온 네겝과 고센 온 땅과 평지와 아라바와 이스라엘 산지와 평지를 점령하였으니 17곧 세일로 올라가는 할락 산에서부터 헤르몬 산 아래 레바논 골짜기의 바알갓까지라 그들의 왕들을 모두 잡아 쳐죽였으며 18여호수아가 그 모든 왕들과 싸운 지가 오랫동안이라 19기브온 주민 히위 족속 외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화친한 성읍이 하나도 없고 이스라엘 자손이 싸워서 다 점령하였으니 20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을 진멸하여 바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을 멸하려 하심이었더라 21○그 때에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들을 멸절하고 그가 또 그들의 성읍들을 진멸하여 바쳤으므로 22이스라엘 자손의 땅에는 아낙 사람들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남았더라 23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온 땅을 점령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분에 따라 기업으로 주매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16-23)

 

이스라엘은 북부 전투에서도 주요 거점 지역들을 격파하여 실질적인 승리를 ‘이미’ 거두었습니다. 이 결론은 족장들에 대한 약속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진술됩니다. 요지는 가나안 남부 지역 전체가 정복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17절에서 ‘세일로 올라가는 할락 산에서부터 헤르몬 산 아래까지’라고 표현됩니다. 세일의 할락산은 현대의 예벨 할락(Jebel Halaq)일 것인데, 이곳은 가데스 바네아의 동쪽으로 에돔과 접한 가나안의 최남단 경계선이었습니다. 반면에 가나안의 최북단은 헤르몬 산 근처의 바알갓입니다. 이렇게 해서 여호수아가 정복한 지역의 범위가 최남단 할락 산에서부터 최북단 바알갓까지로 확정됩니다. 이것은 12:7에서도 반복됩니다.

18절은 여호수아의 남쪽과 북쪽 정벌이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말합니다. 물론 남쪽 정벌은 매우 단시간에 끝났음이 암시되곤 합니다(10:42). 그러나 북방의 전면전을 승리로 이끌고 남은 소규모 전투까지 모두 마칠 때까지는 갈렙의 나이로부터 약 5년의 세월이 소요된 것으로 추산됩니다. 오직 기브온 주민들만이 살아남았으며 다른 모든 족속들은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와서 진멸되었습니다(19). 그런데 완악한 그들의 이런 저항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부연 설명합니다(20). 이것은 열 차례나 마음을 바꾸며 완악하게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지 않은 애굽의 바로를 연상케 합니다. 파라오의 마음이 완악해진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이었습니다. 특히 거인족인 아낙 자손이 살던 헤브론 지역의 승전이 강조되고 있습니다(21). 아낙 자손이 격파되고, 이제 블레셋 영토 내의 가사와 가드, 아스돗에만 남아 있었습니다. 제1세대는 아낙 자손이 두려워 그 땅 입성을 포기했으나,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그들이 비로소 제압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헤브론 지역에 갈렙이 완전히 쫓아낸 아낙 자손의 잔존 세력이 남아 있지만(수 15:14), 세력은 이미 꺾인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음을 상징적으로 말해줍니다.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땅에 안식이 찾아왔습니다. 여호수아서는 동시에 현실적으로 정복하지 못한 땅이 아직 많이 남았고, ‘쫓아내지 못한’ 종족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보고를 남깁니다(수 13:1-7,13; 15:63;16:10; 17:12,13; 23:4; 삿 1장). 분명히 여호수아 기자의 종전 선언은 그 땅의 정복이 ‘아직’(not yet) 완료되지 못했음에도 ‘이미’(already) 실현된 실제적인 점유에 대한 승전 선언입니다.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이 북쪽 가나안 지역을 정복하는 과정을 다룹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함께하시며, 이스라엘은 연합군을 기습하여 승리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어려움이 닥쳐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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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10-03)


남부 가나안 정복 전쟁 마무리

여호수아 10장 29-43절


 

일기는 쓰는 사람과 쓰지 않는 사람과는 삶을 임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일기는 쓰는 사람은 하루 동안 자신의 생활의 장단점들을 정리하고 분석합니다. 다음날에는 더 가치 있게 살려고 생활을 정리합니다. 하지만 일기를 쓰지 않는 사람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아갑니다. 문제는 반성한 것이 없기 때문에 다음에 똑같은 문제에 넘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한 번 정도는 정리해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삶을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장단점을 분석하고, 지금까지 영적 상태에 대해 살펴본 후에 인생에 새로운 좌표를 설정하고 뛰어가야 합니다.

 

  • 이 본문에는 다섯 왕들을 물리친 여호수아는 계속해서 남부 가나안을 정복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어디까지 점령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복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데, 이것을 기록한 이유는 역사적인 기록물로 남기려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약속하셨던 약속들을 하나씩 성취하신 것을 설명하려는 목적으로 기록했습니다.

 

남부 지역 정벌(29-43)

하나님께 순종은 항상 일관되고 온전한 순종이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순종이 부분적인 순종에 그칩니다. 진정한 승리를 원한다면,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일관된 순종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순종일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싸우는 적은 달라도 여호수아의 순종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29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막게다에서 립나로 나아가서 립나와 싸우매 30여호와께서 또 그 성읍과 그 왕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신지라 칼날로 그 성읍과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쳐서 멸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그 왕에게 행한 것이 여리고 왕에게 행한 것과 같았더라 31여호수아가 또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립나에서 라기스로 나아가서 대진하고 싸우더니 32여호와께서 라기스를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 주신지라 이튿날에 그 성읍을 점령하고 칼날로 그것과 그 안의 모든 사람을 쳐서 멸하였으니 립나에 행한 것과 같았더라 33그 때에 게셀 왕 호람이 라기스를 도우려고 올라오므로 여호수아가 그와 그의 백성을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 34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라기스에서 에글론으로 나아가서 대진하고 싸워 35그 날에 그 성읍을 취하고 칼날로 그것을 쳐서 그 중에 있는 모든 사람을 당일에 진멸하여 바쳤으니 라기스에 행한 것과 같았더라 36여호수아가 또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에글론에서 헤브론으로 올라가서 싸워 37그 성읍을 점령하고 그것과 그 왕과 그 속한 성읍들과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칼날로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그 성읍들과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진멸하여 바친 것이 에글론에 행한 것과 같았더라 38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돌아와서 드빌에 이르러 싸워 39그 성읍과 그 왕과 그 속한 성읍들을 점령하고 칼날로 그 성읍을 쳐서 그 안의 모든 사람을 진멸하여 바치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드빌과 그 왕에게 행한 것이 헤브론에 행한 것과 같았으며 립나와 그 왕에게 행한 것과 같았더라 40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그 온 땅 곧 산지와 네겝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호흡이 있는 모든 자는 다 진멸하여 바쳤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과 같았더라 41여호수아가 또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사까지와 온 고센 땅을 기브온에 이르기까지 치매 42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으므로 여호수아가 이 모든 왕들과 그들의 땅을 단번에 빼앗으니라 43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길갈 진영으로 돌아왔더라(29-43)

 

여호수아는 남부 가나안 모든 성을 쳐서 그 성과 성읍에 있는 왕과 모든 거민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정복한 후 그 동안 정복 과정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1) 립나와 라기스 점령(29-33)

 

막게다에서 다섯 왕들과 그들의 군대를 무찌른 이스라엘 군대는 립나로 진격합니다. 아세가는 고고학자들이 추정하는 위치가 지정되어 있으나 막게다의 위치는 확인된 바 없습니다.

여호수아의 군대는 거기서 더 남쪽으로 진격해서 립나 성읍에 도착 했을 것입니다. 군대의 행진은 아세가에서 막게다를 거쳐 립나를 향해 점점 남하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립나 성은 여리고 성과 같은 운명을 맞습니다. 립나의 왕이 처형되고 성은 정복되어 여리고 성처럼 불살라진 듯합니다. ‘여리고에게 행한 것과 같았다’는 표현은 남부 지역 성읍들을 정복할 때 자주 반복됩니다. 이것은 여리고 전쟁이 가나안의 첫 번째 전쟁으로 이후 모든 전쟁의 모범임을 말해줍니다(여호수아 8:2: 10:1,28,30).

남부의 성읍들은 도미노처럼 차례로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섯 왕들의 성읍들을 하나씩 점령해갑니다. 그 성들은 이재 왕과 군대가 없는 빈집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립나에 이어 라기스로 향합니다. 이미 라기소 왕 아비아는 처형되고 군대는 궤멸된 후였기에 그 성은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라기스 성은 이 만에 정복되었습니다(32). 이스라엘 군대는 빈집털이 하듯 점령하여 심의 주법을 진멸하였습니다. 아마 주민 대부분은 패전 소식을 듣고 피신한 상태로 보입니다. 따라서 이 헤렘 전쟁의 ‘진멸’을 반드시 대 학살극으로 볼 필요는 없으며, 실제로 더 흔하게는 승전의 결과로 거주민이 ‘내쫓기는’ 양상으로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라기스는 직전에 점령될 때, 직전 성을 모범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32). 라기스부터는 정이 경형될 때, 직전 성을 모범으로 제시합니다. 그리나 립나를 비롯한 모든 성들의 중의적 보법은 여리고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때 라기스가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계셀 왕 호람이 지원군을 이끌고 올라왔습니다. 게셀(Gezer)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30km 지점입니다. 현대의 게셀은 게젤 키부츠(Kibbutz)와 더불어 공원화되어 있습니다. ‘추앙받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호람’이 라기스까지 지원군을 이끌고 올 정도면 그가 대단한 위세를 떨친 왕이었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라기스는 게셀의 남쪽 30km 거리였으니, 호람은 상당한 거리를 군대를 끌고 온 것입니다. 라기스가 고대로부터 가나안 지역의 주요 도시 국가 중 하나였음은 1400년대의 이집트 비문에서도 확인됩니다. 비문들은 당시에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이곳까지 통제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자연히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의 시기에 대한 논쟁과 맞물려 있는데, 업적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기에 실제 파라오들이 얼마나 통제권을 가졌는지, 또한 통제권이 항시적으로 발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한편 주전 700년대의 아시리아(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 3세(혹은 불 왕이라 부름)의 왕실 벽면 부조에 아시리아 군대가 게셀을 포위하는 장면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만큼 게셀은 역사적으로 강하고 영향력이 큰 도성이었습니다.

게셀 왕 호람은 특별히 라기스 성과 돈독한 관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라기스 왕이 체포되어 죽었다는 소식과 더불어 성들이 차례로 함락되고 있음을 알고 이스라엘에 맞서기 위해 지원군을 끌고 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호람의 군대 역시 이스라엘 군대에 의해 궤멸되고 말았습니다.

 

(2) 에글론과 헤브론 그리고 드빌의 점령(34-39)

 

라기스 전투를 마무리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대는 에글론으로 진격합니다. 에글론은 동맹군에 합세했던 성으로서 군사들이 거의 없는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그 전투는 더욱 쉽게 단 하루 만에 끝났으며(34) 라기스처럼 진멸되었습니다(35). 그 다음 정복된 성은 동맹군에 합세한 헤브론이었습니다. 헤브론은 직전의 글론처럼 진멸되었습니다(37).

다음 목표는 드빌입니다. 이 성은 다섯 동맹국을에 속한 성운 아닙니다. 드빌이 에글론 왕의 이름이었음을 살펴본 바 있는데 드빌은 특정한 성읍의 이름이 기도 합니다. 이곳은 현재의 키로베트 아즐란(Khirhet Ajlan) 근처의 텔 엘 헤시(Tel el-Hes)가 유력합니다.

그곳은 유다 지파의 서쪽 변방에 있는데, 블레셋 영토와 인접해 있으며, 라기스 남서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드벌 생읍은 키로베트 라부드(Khirbet Rabad)일 수 있으나(Ahargei)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헤브론에 이어 드빌과 그곳의 왕은 헤브론과 립나처럼 진멸되었습니다. 드빌 왕 역시 동맹국의 다섯 왕에 들진 않았으므로 이때 왕이 처형되었다고 언급됩니다. 드빌은 왕이 건재했음에도 군사력이 약해 쉽게 점령된 것 같습니다. 이상에서 게셀의 호람 왕을 중앙에 배치하면서 총 일곱 개의 성읍과 왕이 정복됩니다. ‘7’은 구약에서 완전함을 가리키는 숫자인데, 의도가 엿보입니다. 다시 말해 점령된 성들이 더 많았을 것인데, 완전한 정복을 암시하기 위해 일곱 군데가 선택되었을 것입니다.

 

(3) 남부 광야와 해안 지역 점령(40-43)

 

여리고, 아이 그리고 기브온을 기준으로 여호수아의 군대는 남부 지역들로 진격해서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합니다. 그 범위가 산지, 네겝(남방), 평지, 경사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어서 몇몇 지명들과 더블어 대략적인 경계선이 묘사됩니다. 가데스 바네아는 가데스라고도 불리는데, 민수기의 광아 여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지역입니다. 민수기의 어떤 곳에서 가데스 바네아는 바란 광야에 위치한다고 말하지만(민수기 10:12,16, 13:3,26) 다른 곳에서는 신(Zin) 광야의 일부로 진술합니다(민수기 20:1). 가데스 바네아가 그 두 광아 차하에 위치해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곳은 바란 광야(신 광야)의 최북단으로 가나의 최남단인 네겝(남방) 지역과 접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여경 초기에 이곳에서 열두 정탐꾼을 가나안 행으로 보낸 바 있습니다. 자사(Gaza)는 해안 지역의 중요한 성읍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은 해양 세력인 블레셋이 오래전부터 점유한 채 이스라엘을 괴롭혔다고 보고합니다. 아마 여호수아의 정복은 가사 근처까지 완성되고 해안의 블레셋 영역은 아직 장악하지 못했다고 봐야 합니다. ‘온 고센 땅’에서 고센은 이스라엘의 조상이 떠나온 이집트의 고센 땅이 아닌 가나안의 지명입니다. 고센은 도시 이름이 아닌 네겝에서 기브온까지 이르는 남부 지역에 대한 포괄적인 지역 명으로 추정되는데, 이 지역의 실제는 전혀 확인된 바 없습니다.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는 이 모든 지역의 정복을 마치고 길갈의 본 진영으로 돌아왔습니다.


승리의 길은 그리 멀리 있지 않지만, 그 길을 찾는 이가 적습니다. 순종하되 온전히 순종하고 일관되게 순종한다면, 여호수아와 함께하신 하나님을 우리와도 함께하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존중해야 합니다. 당신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께 드리시길 바랍니다. 드리지 않는 부분으로 실패를 자초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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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10-02)


남부 아모리 왕들을 정복한 여호수아

여호수아 10장 16-28절


사람들은 어떤 일을 성공하면 성취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성공 뒤에 함정이 있습니다. 성공에 자아 도취되어 버린 것입니다. 다음 해야 할 일을 준비함으로 실패하는 경우를 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성공 시간에도 도취하지 않고, 다음 할 일들을 점검합니다. 손자병법에서는 ‘전쟁을 잘하는 사람은 승리했을 때, 지혜롭다거나 용감하다는 공적이 들어나지 않는다’(軍形篇)라고 말합니다. 여호수아가 남부지역 왕들과 전쟁해 나가면서 세운 전략을 오늘날 배워야할 교훈들이 무엇입니까?

 

 

  •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대는 가나안 땅의 남부 지역을 먼저 정복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애초에 계획된 전략이 아니었고, 그 땅에서 발생한 상황에 따라 진행된 과정이었습니다. 기브온 주민들이 이스라엘에 투항했다는 소식을 들은 남부 지역 부족들과 왕들이 먼저 군사 행동을 시작했으며, 이에 맞서 이스라엘 군대가 남부 전선으로 힘을 쏟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공에 도취하지 않음(16-21)

실패를 교훈 삼아 성공을 이룬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실패는 ‘할 수 있다’는 자심감도 심어 줍니다. 하지만 작은 성공에 도취해서 큰 실패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성공에 취하지 말고 자신에게 주신 사명에 충성해야 합니다. 성공에 도취되면 교만해집니다. 여호수아는 자만하지 않고 남부 지역 아모리 왕들을 정복해 나갑니다.

 

16그 다섯 왕들이 도망하여 막게다의 굴에 숨었더니 17어떤 사람이 여호수아에게 고하여 이르되 막게다의 굴에 그 다섯 왕들이 숨은 것을 발견하였나이다 하니 18여호수아가 이르되 굴 어귀에 큰 돌을 굴려 막고 사람을 그 곁에 두어 그들을 지키게 하고 19너희는 지체하지 말고 너희 대적의 뒤를 따라가 그 후군을 쳐서 그들이 자기들의 성읍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고 20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크게 살륙하여 거의 멸하였고 그 남은 몇 사람은 견고한 성들로 들어간 고로 21모든 백성이 평안히 막게다 진영으로 돌아와 여호수아에게 이르렀더니 혀를 놀려 이스라엘 자손을 대적하는 자가 없었더라(16-21)

 

기브온의 투항 소식을 들은 남부 지역은 동맹군을 형성해서 이스라엘에 공동 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브온의 긴급한 구조 요청을 받은 이스라엘은 밤새 달려가 남부 동맹군을 격퇴합니다.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으로 동맹군을 궤멸합니다.

 

(1) 막게다 굴로 피신한 아모리 왕들(16-17)

 

남부 동맹군 왕들은 패한 후에 막게다까지 도망하였습니다. 그들은 ‘막게다의 굴’에 숨었습니다. 오늘날 막게다의 위치가 어직 확인되지 않지만, 아마 아세가 근처일 것입니다. 아세가는 아얄론 계곡에서 남쪽으로 11km 지점이므로, 거기서 더 남쪽의 가까운 위치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시는 전쟁이시만, 한시라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최선을 다해 끝까지 싸운 것입니다. 전쟁에서 왕이나 적장을 사살하거나 체포하면 그 전쟁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그러면 대부분은 전쟁을 마치고 승전 잔치에 들어갑니다.

 

(2) 전멸된 아모리 군대(18-21)

 

탈영병일 수 있는 한 사람이 이 사실을 여호수아에게 알려주어 은신처가 발각됩니다. 여호수아는 다섯 왕이 굴에 숨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굴을 막아 보초로 지키게 합니다. 여호수아는 전쟁 승리에 도취되지 않았습니다. 남아 있는 패잔병들을 진멸하기 위해 군대를 풀어 계속 진군합니다. 후퇴하는 적들이 견고한 성으로 들어가 성문을 닫고 저항하면 곤란해지므로, 여호수아는 그 전에 패잔병을 쓰러뜨릴 것을 지시합니다.

‘견고한 성’(2)은 요새화된 성을 가리키므로, 성문을 닫고 저항하면 어려움을 당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가나안 지역은 여러 종족들의 오랜 투쟁으로 많은 성들이 요새화되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대는 재빠른 작전 개시로 적들을 거의 전멸시켰고 소수의 생존자만이 견고한 성에 들어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패잔병을 소탕하러 갔던 군사들이 막게다의 본진으로 복귀하여 여호수아에게 돌아왔습니다. 적들은 궤멸되어 더는 이스라엘 군대를 향해 혀를 놀리는 자가 없었습니다(21). 여기서 혀를 놀리는 행위는 조롱의 의미라기보다 개다 으르렁거리듯이 으름장을 놓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더는 이스라엘을 위헙하는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사명에 충실한 여호수아는 자신의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합니다. 실질적으로 이스라엘의 승리는 자신들의 능력이나 전략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래서 교만하지 않고 끝까지 전투에 임했던 것입니다. 가나안 남부 지역을 승리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모든 백성이 평안히 막게다 진으로 돌아와 여호수아에게 이르렀으나 혀를 놀려 이스라엘 자손을 대적하는 자가 없었더라’(21)고 말씀하십니다. 함부로 이스라엘을 넘볼 자가 없도록 위상을 높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거짓 소문이 아닌 그들의 능력을 체험하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처형된 아모리 왕들(22-27)

이스라엘이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사명에 끝까지 충실했던 것입니다. 당신의 삶 속에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것을 없습니까? 마땅히 진멸시켜야할 것들은 뜻에 굴복시켜야할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패잔병을 진멸한 후에 굴에 있던 다섯 왕은 처형시킵니다.

 

22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르되 굴 어귀를 열고 그 굴에서 그 다섯 왕들을 내게로 끌어내라 하매 23그들이 그대로 하여 그 다섯 왕들 곧 예루살렘 왕과 헤브론 왕과 야르뭇 왕과 라기스 왕과 에글론 왕을 굴에서 그에게로 끌어내니라 24그 왕들을 여호수아에게로 끌어내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을 부르고 자기와 함께 갔던 지휘관들에게 이르되 가까이 와서 이 왕들의 목을 발로 밟으라 하매 그들이 가까이 가서 그들의 목을 밟으매 25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라 너희가 맞서서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 하고 26그 후에 여호수아가 그 왕들을 쳐죽여 다섯 나무에 매달고 저녁까지 나무에 달린 채로 두었다가 27해 질 때에 여호수아가 명령하매 그들의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그들이 숨었던 굴 안에 던지고 굴 어귀를 큰 돌로 막았더니 오늘까지 그대로 있더라(22-27)

 

여호수아는 남부 지역을 점령한 후에 돌아와서 모든 군사들을 모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아모리 남부 다섯 왕들을 숨어 있는 굴속에서 끌어내었습니다. 모든 군사들이 본 앞에서 지휘관들을 불러내 그 왕들의 목을 발로 밟도록 명령합니다. 그들은 적장들의 목을 발로 밟아 적들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당시 고대 사회에서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지휘관들은 보복을 두려워하여 왕들의 목을 밟기를 주저합니다. 여호수아는 군장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셨던 말씀으로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라 너희가 맞서서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25)고 권고합니다. 이렇게 가나안 왕들을 물리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앞으로 남은 가나안 정복 전쟁에 용기를 갖다 주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아모리 다섯 왕을 쳐서 죽었습니다. 그 시체들을 나무에 달아 저주를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이렇게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암묵적인 상징이었습니다. 여호수아 8장 29절에서 아이 왕도 나무에 매달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체들을 해질녘에 끌어내려져 그들이 숨었던 동굴 속에 다시 던져 넣고 큰 돌로 입구를 막고 그 굴을 봉하도록 하였습니다. 성경에서는 기록할 당시까지 그 굴 무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주변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이후로는 함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넘볼 수 없도록 한 것입니다. 그 굴은 역사적인 산 기념비가 된 것입니다.

 

막게다를 점령한 여호수아(28)

전쟁은 오래 끌면 손해입니다. 만약 기회를 놓치게 되면, 남북의 보급선이 연결되어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이스라엘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에베소서 4:27)고 권고했던 것처럼, 마귀로 다시 설 수 있는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뒤로 미루지 않았습니다.

 

28그 날에 여호수아가 막게다를 취하고 칼날로 그 성읍과 왕을 쳐서 그 성읍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사람을 진멸하여 바치고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막게다 왕에게 행한 것이 여리고 왕에게 행한 것과 같았더라(28)

 

여호수아는 그곳에 멈추지 않고, 남부 지역에 남아있던 잔당들을 공격합니다. ‘막게다’라는 지역은 남부 연합군으로 출전한 다섯 왕이 아닌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유를 주면 순간적으로 공격해 올 수 있었기 때문에, 한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막게다’를 공격해서 완전히 점령하였습니다. 여리고에서 그랬던 것처럼 막게다의 모든 성읍을 완전히 진멸하고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 막게다 성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핵심부인 여리고, 벧엘, 기브온 그리고 막게다로 이어지는 가나안 중부지역을 동서로 잇는 축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막게다 공격은 남쪽 가나안과 북쪽 가나안의 연결 통로를 끊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마치 한국 6.25전쟁 때,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 작전을 통해 북쪽에서 남쪽 내려가는 보급로를 차단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고 더 나가서 남쪽 가나안 지역에 남아 있는 잔당들을 모두 소탕해 버린 것입니다. 이 공격으로 가나안에는 어떤 반대 세력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성들이 아직 있었지만, 실체적인 의미에서 가나안 남부지역의 모든 전투는 종료되었고, 마무리를 할 시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것만으로 우리는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참된 영광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사명에 충실한 사람들입니다. 끝까지 순종함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대적할 사람이 없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승리를 얻기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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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10-01)


남부 가나안을 정복해 나간 여호수아

여호수아 10장 1-15절


성공하는 사람들 중에 어려운 상황을 겪어보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살다보면 참으로 억울하고 낙담되는 때를 만나기 마련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저앉아서 일어서지 못하지만, 그 자리를 박차고 힘을 내다보면 오히려 훨씬 좋은 결과를 맺는 것을 경험합니다. 중요한 것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내는 결단과 힘일 것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앞 글자 하나만 바꾸면 삶은 변합니다. 어려운 상황이 더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고 합니다.

 

  • 본문에서 이스라엘과 화친한 기브온 거민의 소식은 그 주변 사람들에게 그렇게 좋은 소식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을 중심으로 남부지역 아모리 왕들을 연합군을 결성하여 기브온을 공격합니다. 기브온은 여호수아에게 도움을 구합니다. 이 전투에 여호수아는 참여하여 전무후무한 사건 속에서 가나안 남부 왕들을 정복하고 승승장구합니다.

 

남부 연합군의 공격 받는 기브온(1-5)

하나님을 믿고 피한다고 해서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탄은 항상 성도들을 넘어트릴 기회를 찾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파고들어 넘어트리려 합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1그 때에 여호수아가 아이를 빼앗아 진멸하되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한 것과 또 기브온 주민이 이스라엘과 화친하여 그 중에 있다 함을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듣고 2크게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기브온은 왕도와 같은 큰 성임이요 아이보다 크고 그 사람들은 다 강함이라 3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헤브론 왕 호함과 야르뭇 왕 비람과 라기스 왕 야비아와 에글론 왕 드빌에게 보내어 이르되 4내게로 올라와 나를 도우라 우리가 기브온을 치자 이는 기브온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화친하였음이니라 하매 5아모리 족속의 다섯 왕들 곧 예루살렘 왕과 헤브론 왕과 야르뭇 왕과 라기스 왕과 에글론 왕이 함께 모여 자기들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올라와 기브온에 대진하고 싸우니라(1-5)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정복 사실을 들은 기브온 족속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기 위해 항복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수하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에 필요한 물을 깁고 나무를 패는 종으로 살면서 살아갑니다. 기브온 족속은 가나안 사람이 보기에 보통이 아닌 중요한 위치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여리고와 아이가 점령된 소식과 더불어 들려온 기브온의 투항 소식에 예루살렘 왕 아도니 세덱은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그 사실을 ‘기브온은 왕도와 같은 큰 성임이요 아이보다 크고 그 사람들은 다 강함이라’(2)라고 설명합니다. ‘기브온 성(城)’은 벧엘이나 아이 성보다 크고 강력했습니다. 기브온은 아이보다 훨씬 큰 ‘왕도와 같은 큰 성’이고 그들은 강한 힘을 자랑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왕이 살 수 있는 성읍이었고, 위치로는 가나안을 남북으로 양분하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브온은 자신의 힘을 믿고 교만하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정확한 모습을 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투항하여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의탁했던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작은 나라가 움직여도 힘들 텐데, 큰 나라가 싸우지도 않고 이스라엘에게 항복하니 매우 배신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가나안 남부 왕들을 크게 당황하게 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위협적인 존재인데, 기브온 사람들까지 가세해서 동맹군이 되어 자신들을 공격해올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오래전 아브라함 당시 살렘 왕 멜기세덱이 통치하던 성읍으로 확인되는 등 고대로부터 가나안의 강력한 중심 세력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창 14:18).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은 인근에 있는 네 명의 왕들과 군대를 규합하여 동맹군을 결성합니다. 그들은 헤브론 왕 호함, 야르 왕 비람, 라기스 왕 야비아, 에글론 왕 드빌입니다. 네 곳의 도성들은 모두 예루살렘 남서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것은 가나안 남쪽 지역의 도성들이 본격적으로 남쪽으로 진격해오는 이스라엘 군대에 연합 전선을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다섯 왕의 연합군을 결성한 아도니세덱은 배신을 한 기브온을 먼저 치자고 제안합니다(4). 예루살렘 왕의 전갈을 받고 합류한 주변의 동맹국들은 연합군을 이끌고 기브온을 치러 올라갔습니다(5). 이제 전쟁은 전면전으로 확전되어 가나안 남부 전체가 전쟁터로 바뀝니다.

 

기브온을 도운 이스라엘 군대(6-11)

자신을 정확하게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공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어느 한 순간에 실패할 수 있습니다. 조금 성공했다는 조건 때문에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사람이 중요합니다. 주변 환경은 항상 변합니다. 지금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입니까? 아니면 조건 때문입니까?

 

6기브온 사람들이 길갈 진영에 사람을 보내어 여호수아에게 전하되 당신의 종들 돕기를 더디게 하지 마시고 속히 우리에게 올라와 우리를 구하소서 산지에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왕들이 다 모여 우리를 치나이다 하매 7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와 용사와 더불어 길갈에서 올라가니라 8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그들 중에서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하신지라 9여호수아가 길갈에서 밤새도록 올라가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니 10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게 하시므로 여호수아가 그들을 기브온에서 크게 살륙하고 벧호론에 올라가는 비탈에서 추격하여 아세가와 막게다까지 이르니라 11그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하여 벧호론의 비탈에서 내려갈 때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우박 덩이를 아세가에 이르기까지 내리시매 그들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 많았더라(6-11)

 

예루살렘 왕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의 공격을 받게 된 기브온 사람들은 이러한 일은 예견했겠지만, 너무 빨리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을 자기 힘으로는 대항할 수 없음을 판단하고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여호수아에게 약속을 지켜줄 것을 요청합니다.

동맹군의 공격 소식을 들은 기브온 사람들은 길갈로 사람을 급파해 이스라엘 군대의 지원을 요청합니다(6). 여호수아는 군대를 이끌고 길갈에서 기브온으로 올라갑니다. 이때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 1장에서처럼 전쟁에 출정하는 여호수아의 용기를 북돋으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십니다. 이 권면은 기브온을 위한 전쟁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겼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여호수아의 수중에 넘겼으며, 누구도 여호수아를 당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승리를 확정하십니다. 여기서 여호수아가 ‘길갈에서 밤새도록 올라가 갑자기 그들에게 도착했다’는 언급은 중요합니다. 그것이 논쟁이 되는 길갈의 위치에 대한 중대한 정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길갈은 요단강을 건넌 직후 최초로 진을 쳤던 그 길갈입니까? 에발 산 언약식을 마친 후 진영을 구축했던 세겜 인근의 다른 길갈입니까? 성경의 다른 곳에서 제2의 길갈을 시사하는 설명들이 등장합니다. 신명기 11:30은 세겜을 사이에 끼고 있는 그리심 산과 에발산이 ‘길갈 맞은편’, 모레 상수리나무 곁에 있다고 말합니다. 창세기 12:6 또한 이와 동일하게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라고 진술합니다. 이 경우 길갈은 세겜과 가까운 곳으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이 길갈은 여호수아서에서 요단강 도하 직후 이스라엘이 진영을 구축한 길갈, 곧 여리고에서 가까운 길갈과는 다른 길갈처럼 읽힙니다. 한편, 여호수아서 서사의 흐름을 따르자면, 아이 성 정복 후 에발 산의 언약식을 위해 이동한 이스라엘이 예식을 마치고(8:30-35) 현재 길갈에 있습니다(9장 이하). 만일 이 길갈이 여리고 근처의 길같이 아닌 세겜 근처의 길갈이라면, 기브온에서 그곳까지 거리는 약 40km입니다. 반면에 기브온에서 여리고 근처의 길갈까지는 약 28km의 거리입니다. 통상적으로 고대 기록에서 하룻밤의 여행 거리는 평균 24km 정도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10:9에서 여호수아의 군대가 기브온을 돕기 위해 ‘길갈에서 밤새도록 올라가서’ 그곳에 도착했다고 언급합니다. 따라서 선발된 이스라엘 군대가 밤을 새워 급히 달려갈 경우 약 40km를 하루만에 주파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적어도 여호수아서에서는 두 군데의 다른 길갈이 나타나는데, 이스라엘은 현재 두 번째인 북쪽 세겜 근처의 길갈에 위치해 있는 것입니다.

군대를 끌고 급히 달려온 여호수아는 예루살렘 연합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10). 이스라엘 군대는 기브온에서 동맹군에게 일격을 가한 뒤 서쪽 벧호론의 높은 능선으로 도망가는 그들을 쫓아 벧호론의 오르막길에서부터 내리막길까지 공격을 계속 감행했을 것입니다(11). 이스라엘은 추격전을 계속하여 멀리 남쪽의 아세가와 막게다까지 따라가면서 적을 궤멸했습니다. 벧호론은 위와 아래의 두 마을로 나뉘어 각각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에 있었다는 것은 오늘날의 지형에서도 확인됩니다. 아세가는 벧호론 남쪽 약 35km 지점인데, 그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막게다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인상적인 장면들에 주목해야 합니다. 먼저 벧호론의 내리막길에서 추격전이 전개될 때, 여호와께서 직접 전쟁에 개입하십니다. 하늘에서 엄청나게 큰 우박이 쏟아지더니 아세가까지 적군의 퇴로를 따라 우박 재앙이 계속된다. 결국 우박에 맞아 죽은 군사들의 수가 칼에 맞아 죽은 수보다 더 많았습니다(11). 히브리어로 돌덩이로 표현된 이 커다란 우박은 현대에도 이스라엘 지역에서 드문 일이 아닌데, 특히 10월과 5월 사이에 종종 쏟아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06년도에 기상 이변으로 야구공 크기의 우박이 몇 시간 동안 쏟아져 무려 약 90cm나 쌓였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아마 기브온 전투에서 이 같은 엄청난 우박이 하나님의 섭리로 바로 그 시각에 쏟아졌을 것입니다.

 

태양과 달이 멈춘 기적(12-15)

자연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어떤 환경이나 전쟁에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승리를 기대하세요.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브온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가나안 남부 지역을 정복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세요.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편입니다.

 

12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넘겨 주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아뢰어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이르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하매 13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기까지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14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15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길갈 진영으로 돌아왔더라(12-15)

 

기브온 전투에서 두 번째 인상적인 장면은 바로 태양이 기브온 위에 머무르고 달이 아얄론 골짜기에서 멈춘 사건입니다. 아세가는 아얄론에서 남쪽으로 10km를 더 내려가므로 이 사건은 아세가까지 추격하기 전에 일어난 기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기브온의 위치는 예루살렘 북서쪽 약 10km 지점인데, 그곳은 아얄론 골짜기의 동쪽입니다. 기브온과 아얄론 골짜기는 동서로 거의 일직선상에 놓여 있는데, 둘 사이는 약 17km의 거리입니다. 따라서 태양이 기브온 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해 뜨는 방향인 동쪽에 태양이 떠 있는 오전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동시에 서쪽 아얄론 골짜기 쪽에는 달이 떠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어떤 학자는 이 묘사를 보름달이 뜰 때 동쪽에 해가 떠있는 상태에서 동시에 보름달이 서쪽에서 육안으로 관찰되는 자연 현상으로 봅니다. 실제로 대낮에 보름달뿐 아니라 심지어 초승달이 떠있는 광경도 흔하게 관찰됩니다.

이 기적에 대해 너무 오랫동안 거짓 이야기가 회자되어 왔습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미국 나사(NASA)에서 초대형 컴퓨터로 지구의 날짜를 계산하던 중 놀랍게도 정확히 24시간이 사라진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24시간의 사라진 공백은 히스기야 왕 때 태양이 10도 물러간 것과 태양이 기브온에 머문 사건이 합하여 정확히 채워진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아무런 근거가 없는 루머인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미국 나사는 이 어처구니없는 루머에 대해 그런 일이 없었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해주었습니다. 나아가 가장 보수적인 한국창조과학회에서조차 이 이야기의 출처를 추적한 끝에 이것이 조작이자 허구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였습니다.

이 현상은 일단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종종 관찰되는 자연 현상인데, 그것이 매우 특수하게 발생한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무난합니다. 해가 떠 있을 때 달이 선명히 관찰되는 조건은 공기가 탁하거나 어떤 특수한 기상 여건으로 인하여 해가 흐릿해질 때라 합니다. 만일 이때가 무더위가 시작되는 즈음의 초여름이었다면(음력 1월, 즉 양력 3월의 요단 도하를 기점으로 가능한 추론이다), 대낮의 전쟁은 매우 힘겨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특수한 기상 조건으로 태양빛이 많이 흐리고 서쪽에는 보름달이 매우 오래도록 선명히 떠 있는 보기 드문 자연 현상이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나아가 이런 조건이라면 오랜 시간 전투가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 기적 이야기는 어쩌면 바로 이러한 특이한 기상 현상에 대한 시적 묘사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성경 속의 ‘야살의 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안위와는 상관이 없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언약한 기브온 백성들을 도와서 전쟁에 나가는 여호수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선한 모습을 아름답게 보십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아낌없는 헌신할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격려하시고,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수고에 대가를 지불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박을 내리시고 해와 달을 멈추시므로 놀라운 축복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당신도 하나님을 위한 헌신된 일꾼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면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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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9-02)


거짓말이 드러나는 기브온

여호수아 9장 16-27절


 

많은 목사님을 만나서 함께 사역했습니다. 대부분 아버지와 형님 같은 인간미 넘치는 지도자로서 긍정적인 영향을 준 분들도 있었지만, 일부는 부정적인 교훈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주로 욕심 때문에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거나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여 성도들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진실은 가슴으로 전달되지만, 거짓말은 결국 탄로 납니다.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목사님들의 목회를 살펴보면, 제대로 풀리지 않았습니다.

 

  • 기브온 족속에게 속은 것을 알고 이스라엘은 군대를 끌고 그들의 거주지로 달려 왔습니다. 하지만 이미 체결된 조약으로 인해 공격할 수는 없었습니다. 신명기 법에 따르면, 가나안 족속과의 고약은 허용될 수 없었지만, 이미 여호와의 이름으로 조약에 서명을 한 상태입니다. 이스라엘은 기브온 족족을 성전을 섬기는 종신 노예로 삼겠다고 선언하고 목숨을 보전한 기브온 족속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조약에 참여한 기브온 성읍들(16-21)

이스라엘은 성급하게 결정함으로 실수를 범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실수를 통해서도 역사를 지속적으로 이루어가십니다. 혹시라도 삶의 실수가 있을 때, 자책감에 빠지기 보단 하나님의 깊으신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기브온 족속의 거짓말을 알게 됩니다.

 

16그들과 조약을 맺은 후 사흘이 지나서야 그들이 이웃에서 자기들 중에 거주하는 자들이라 함을 들으니라 17이스라엘 자손이 행군하여 셋째 날에 그들의 여러 성읍들에 이르렀으니 그들의 성읍들은 기브온과 그비라와 브에롯과 기럇여아림이라 18그러나 회중 족장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치지 못한지라 그러므로 회중이 다 족장들을 원망하니 19모든 족장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하였은즉 이제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리라 20우리가 그들에게 맹세한 맹약으로 말미암아 진노가 우리에게 임할까 하노니 이렇게 행하여 그들을 살리리라 하고 21무리에게 이르되 그들을 살리라 하니 족장들이 그들에게 이른 대로 그들이 온 회중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가 되었더라(16-21)

 

언약관계는 사람들 개인의 약속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본 것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만약 무시하고 진멸할 수 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변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1) 조약에 참여한 기브온 성읍들(16-17)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브온 족속과 언약한 후에 3일 만에 밝혀집니다. 그들은 멀리 사는 민족들이 아니라, 30km밖에 되지 못한 거리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군대를 이끌고 기브온 지역의 성읍들로 달려왔습니다. 주도(主都)인 기브온을 중심으로 그비라, 브에롯, 기럇여아림이 주변에 포진해 있었습니다. 이곳은 아이와 여리고에서 멀지 않은 지역이기에 이스라엘이 진격해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에게 속히 퍼졌을 것입니다.

기브온 족속이 자신들을 속인 것을 알았지만, 그들을 진멸할 수 없었습니다. 여호수아와 지도자들이 기브온과 평화 조약을 맺고 살려주기로 맹세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려는 핵심적인 의도는 일단 불합리한 조약일지라도 언약한 것은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2) 조약을 지켜야 하는 이스라엘(18-21)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일로 기브온 족속을 칠 수 없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 여호수아와 족장들에게 원망했습니다. 족장들은 열두 지파의 대표인 지파장들로 추정됩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헤렘 규칙을 어겼으며, 그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이 임할까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여리고 성과 아이 성 전투에서 이간의 범죄로 헤렘 법을 지키지 않은 대가를 혹독히 치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명기에서 가나안의 여러 부족들을 진멸하고 완전히 내쫓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특히 신명기 7:1-4에서는 가나안 족속과 결코 조약을 맺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시면서 그 결과는 통혼과 우상숭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치명적이게도 가나안 족속과 언약을 맺어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금령을 어겼습니다. 그렇다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한 서약을 깨트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 서약에 걸린 여호와의 이름을 결과적으로 더럽혀 진노가 그들에게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20). 만약 그들을 죽인다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는 일입니다. 그래서 족장들은 항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리가 그들에게 맹세한 맹약을 인하여 진노가 우리에게 임할까 하노니 이렇게 행하여 그들을 살리리라”(20)고 말합니다. 사무엘하 21장을 살펴보면, 나중에 사울 왕이 이 언약을 무시하고 기브온 사람들을 멸하려 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크게 진노하셨습니다. 3년간 큰 기근을 주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삼하 21:1-9). 이 기브온 거민들은 변함없이 계속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돕습니다. 약 400년 후인 다윗의 시대에도 여전히 가나안 살고 있었습니다(삼하 4:3). 더 먼 훗날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려 할 때, 예루살렘 성 재건을 돕기도 했습니다(느 3:7). 그들은 변질되지 않고 꾸준하게 하나님의 제사를 수중 드는 사람들로 봉사를 하게 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건 맹세와 서원은 매우 중요하므로 경솔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양측의 조약을 따라 이스라엘은 그들을 살려주어야만 했습니다(21). 대신 조약 내용대로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종노릇을 할 것입니다. 그들은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다는 것은 종들의 모든 노역으로 이스라엘을 섬길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기브온 사람들의 노역이 특히 제단과 관련되었다고 언급되는 것은 그들의 노역이 매우 특별했음을 암시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약속에 대한 중요성을 가르칩니다. 성도들은 약속은 자신이 손해가 난다고 할지라도 약속을 지켜야합니다. 특히 불신앙인들과의 약속은 더 철저하게 지켜야합니다.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수한 지도자들이지만, 그들에게 그들을 ‘그들을 살리라’는 조치를 내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받아들이고 그들을 자신들의 종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개인의 종이 아니라 성소에서 하나님께서 제사할 때 땔감을 준비하도록 나무를 패며, 제사에 필요한 물을 긷는 자들이 되도록 함으로서 순종합니다(21). 이 기브온 거민들은 거짓말을 했지만,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 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종이 된 기브온 족속(22-23)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요청할 때에는 우리의 연약함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자세를 취하여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승리의 축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22여호수아가 그들을 불러다가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우리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어찌하여 심히 먼 곳에서 왔다고 하여 우리를 속였느냐 23그러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나니 너희가 대를 이어 종이 되어 다 내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가 되리라 하니(22-23)

 

여호수아는 기브온 족속들(아마도 대표)을 불러내어 그들의 속임수를 비난하고 대대로 자신들의 종이 될 것을 선언합니다. 아마 종주국은 속국의 태도에 따라 훨씬 더 무거운 요구를 할 권리가 있었기에,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람들에게 저주를 들먹이면서 가혹한 종노릇을 선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그들에게 성전을 위해 나무를 패고 물 걷는 일을 해야 한다고 공포합니다. 아마도 성전에서 사용되는 땔감과 물을 공급하는 일은 훨씬 더 까다로운 일이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수아가 그들을 향해 ‘저주’를 선언하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분명 함의 아들 가나안을 향한 노아의 저주의 성취합니다(창 9:24-27). 기브온 사람들인 허위 족속은 가나안 자손들 중 하나였습니다(창 10:17; 대상 1:15). 이들은 아마 호리 족속과 동일한 민족일 것입니다(창 14:6; 36:20,29; 신 2:12,22). 가나만의 후손인 히위 족속 일부가 이스라엘의 종이 된다는 것은 이며 가나안에게 내려진 저주에서 확인됩니다.

23절의 ‘너희가 저주를 받나니’는 창세기의 이 저주에 비추어서 해석해야 합니다. 함에 대한 노하의 자주는 오래도록 백인 신학자들에 의해 혹인 저주론의 성경적 근기로 약용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흑심 노예 제도를 정당화하기 위한 신학적 왜곡이며 날조된 성경 해석입니다. 노아에게는 셈, 함, 야벳의 세 아들이 있었는데, 함은 아버지 노아의 드러난 하체를 덮어주지 않은 잘못으로 저주를 받습니다. 함에게는 내 명의 아들인 구스, 붓, 미스라임, 가나안이 있었는데, 앞의 세 명의 거주지가 아프리카이고, 가나안은 아프리카 종족들과 무관합니다. 그린데 함의 저주는 가나안에게 내려집니다(창 9:24-27). 따라서 할의 저주는 인의 저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게다가 이 저주는 여호수아 시대 이후로 열왕기 시대에 점차적으로 성취되어 유효기간이 끝났습니다(수 15:63: 17:13 왕상 9:21, 대하 8:8). 사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구속이 아니고는 가망 없는 저주 받은 존재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롬 3:9).

 

기브온 거민의 거짓으로 조약을 맺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기브온 거민들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보시고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항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경배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고 사람의 힘이나 지혜, 그리고 권세만을 두려워하면 필경 실패하고 넘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참 힘의 근원되시며 권세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며 그 분을 섬겨야겠습니다.

 

기브온 족속의 변명(24-27)

많은 사람들이 ‘현대는 깨끗해서는 살기 곤란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속임수요 거짓말입니다. 시대가 어두울수록 빛이 더욱 필요합니다. 비록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당장 손에 들어오는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거짓으로부터는 벗어나야 합니다. 기브온 족속은 여호수아에게 거짓된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에 변명합니다.

 

24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사 이 땅을 다 당신들에게 주고 이 땅의 모든 주민을 당신들 앞에서 멸하라 하신 것이 당신의 종들에게 분명히 들리므로 당신들로 말미암아 우리의 목숨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하여 이같이 하였나이다 25보소서 이제 우리가 당신의 손에 있으니 당신의 의향에 좋고 옳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소서 한지라 26여호수아가 곧 그대로 그들에게 행하여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의 손에서 건져서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 27그 날에 여호수아가 그들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회중을 위하며 여호와의 제단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들로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24-27)

 

기브온 사람들은 여호수아에게 속임수를 변명하면서 이 속임수가 불가피했음을 적극적으로 설명합니다. 24절은 그들이 신명기에서 모세가 선포한 가나안 정복의 실재성과 헤렘 전쟁 수칙을 정확히 알고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결국 그들의 해명은 여호와께서 명령한 법에 따라 가나안의 모든 부족들은 진멸을 당할 것이 분명하므로, 생존을 위한 최후 수단으로 속임수를 써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이스라엘의 처분에 맡기겠다면서 자세를 더욱 낮춥니다(25).

여호수아는 조약에 따라 목숨을 보장해주면서도 다시 한 번 공신 종노릇의 운명을 선언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섬기되 구체적으로 여호와의 재단을 위해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일을 감당할 것입니다. 성전을 위한 종노릇은 일반 직무보다 훨씬 더 까다롭고 힘든 직무일 수 있습니다. 예컨대, 미쉬나(Mishna)와 희년서(jubilee)는 제단용 땔감으로 잘 타지 않는 올리브 나무와 포도나무를 제외한 대부분의 나무를 허용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무화과나무, 잣나무, 소나무, 삼나무, 월계수 등을 선호합니다.

병들고 흉한 나무는 금했으며, 금이 가거나 색깔이 어두운 나무, 벌레가 먹었거나 싹은 부위가 있는 나무는 금했습니다. 향이 거의 남지 않은 오래된 목재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성전의 물도 가장 깨끗한 물을 썼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가 부여한 기브온 족속의 성전을 위한 종살이는 기브온 족속과 그들의 생존을 은근히 우호적으로 보게 합니다.

이 기브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부주의하게 헤렘 수칙을 위반한(출 34:11-13; 신 7:1-5; 20:16-17) 이스라엘의 잘못을 고발하고 비난하기 위한 목적을 지닌다고 전통적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지 못한’ 실패에 대한 기록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 기사는 기브온의 이스라엘로의 편입을 긍정적으로 보게 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 기사의 초점은 이스라엘의 잘못보다는 기브온이 이스라엘에 편입되는 과정에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기브온 족속의 말에서 수차례 여호와의 명성과 위대한 업적에 대한 신앙이 고백되고 있으며, 그분에게의 전적인 투항과 굴복의 자세가 나타납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9장 서두의 다른 모든 가나안 족속들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모두가 이스라엘에 맞서는 공동 전선에 합류했지만, 기브온 사람들만 전혀 다른 선택을 한다. 그들의 결단은 라합의 결단과 비견됩니다. 라합의 개인적인 신앙의 결단의 민족적인 확장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라합이 여리고 군사들을 속여서 목숨을 부지했다면, 기브온 족속은 이스라엘을 속여 목숨을 부지합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묻지 않은 부주의한 실수마저 그들의 언약 공동체로의 편입을 위한 섭리로 볼 수 있게 합니다. 실제로 본문은 여호와께 묻지 않은 것에 대해 아무런 책임 추궁이나 처벌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아가 기브온 족속의 결단과 속임수마저 불사한 과감한 행동은 라합과 같은 개인만이 아니라 민족적 단위의 구원 가능성을 열어 놓습니다. 이 이야기는 ‘진멸이 아니라 진멸로부터 구원받는 한 길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사람들을 겉으로 들어난 모습으로 사람을 대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실수할 수 있습니다. 외모는 거짓으로 꾸밀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약 2:9)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겉모습으로 들어난 사람을 대함으로 실수해서 기브온 사람들과 언약을 했지만,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킴으로 기브온 사람들이 신실하게 자손대대로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섬기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기브온 거민이 살아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믿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를 섬겨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며 날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다른 의미는 비록 하나님의 백성들은 손해를 본 다고 할지라도 모든 일에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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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9-01)


기브온 사람들과 맺은 계약

여호수아 9장 1-15절


 

등산가인 엄홍길 씨는 ‘등산에서 성공한 직후 방심하면 꼭 사고’라고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1988년 7월에 그는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한 후 자만심이 들었습니다. 그 후로 1989년부터 93년까지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에 6번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실패 후에 다시 14번을 도전해서 히말라야 8000m 이상의 14좌 완등을 했습니다. 작은 성공은 실패 없이도 가능하지만, 큰 성공을 위해서는 뒤편에 쓰라린 실패가 있습니다.

 

  • 본격적인 가나안 전쟁이 시작됩니다. 여리고와 아이가 점령 되였다는 소식이 가나안 전역에 펴졌을 것입니다. 모든 가나안 부족들이 연합군을 형성하여 이스라엘에 맞서는 상황에서 기브온 족속은 이스라엘에 투항하는 결단을 내립니다. 그러나 기브온 족속은 헤렘 전쟁 수칙을 알고 있었기에 위장술과 거짓말로 속여 조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합니다.

 

가나안 남부 동맹 연합군(1-2)

그리스도인의 삶은 끝임 없는 영적인 전쟁입니다. 당신을 넘어뜨리기 위해 마귀는 연합전선을 펴서 공격합니다. 우리 힘으로 대항하기 힘들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능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넘어뜨리는 적들을 대적해 나가야 합니다. 가나안 정복에는 이스라엘에게는 토착민의 반항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1이 일 후에 요단 서쪽 산지와 평지와 레바논 앞 대해 연안에 있는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모든 왕들이 이 일을 듣고 2모여서 일심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 맞서서 싸우려 하더라(1-2)

 

이스라엘에 의해 여리고와 아이 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가나안 살고 있었던 족속들에게는 매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생존의 문제가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중부 지역을 강타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방향을 돌려서 가나안 남부로 기수를 돌리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가나안 남부에 살고 있던 다섯 족속들은 이스라엘을 대응하려고 연합 전선을 펴서 군사적인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표 족속으로 등장하지만 실제적으로는 훨씬 더 많은 가나안 종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 투항하는 기브온 족속(3-15)

신앙이 타락하는 것은 눈으로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타락한 생활에 대해 도덕적으로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신앙 타락은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 자신들을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곳에 영적인 함정이 있습니다.

 

3기브온 주민들이 여호수아가 여리고와 아이에 행한 일을 듣고 4꾀를 내어 사신의 모양을 꾸미되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5그 발에는 낡아서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다 마르고 곰팡이가 난 떡을 준비하고 6그들이 길갈 진영으로 가서 여호수아에게 이르러 그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우리는 먼 나라에서 왔나이다 이제 우리와 조약을 맺읍시다 하니 7이스라엘 사람들이 히위 사람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 가운데에 거주하는 듯하니 우리가 어떻게 너희와 조약을 맺을 수 있으랴 하나 8그들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하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묻되 너희는 누구며 어디서 왔느냐 하니 9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심히 먼 나라에서 왔사오니 이는 우리가 그의 소문과 그가 애굽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들으며 10또 그가 요단 동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들 곧 헤스본 왕 시혼과 아스다롯에 있는 바산 왕 옥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들었음이니이다 11그러므로 우리 장로들과 우리 나라의 모든 주민이 우리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여행할 양식을 손에 가지고 가서 그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당신들의 종들이니 이제 우리와 조약을 맺읍시다 하라 하였나이다 12우리의 이 떡은 우리가 당신들에게로 오려고 떠나던 날에 우리들의 집에서 아직도 뜨거운 것을 양식으로 가지고 왔으나 보소서 이제 말랐고 곰팡이가 났으며 13또 우리가 포도주를 담은 이 가죽 부대도 새 것이었으나 찢어지게 되었으며 우리의 이 옷과 신도 여행이 매우 길었으므로 낡아졌나이다 한지라 14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는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15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조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3-15)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처럼 무서운 병이 없습니다. 외상이나 골절을 치료가 쉽지만, 암(癌)은 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심하게 고통을 느낄 때까지 잘 알 수 없습니다. 심각하게 병세가 깊을 때만이 병이 들어납니다. 질병이 무서운 것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무섭습니다.

 

(1) 기브온 족속의 위장 거짓말(3-11)

 

‘기브온 주민들이 여호수아가 여리고와 아이에 행한 일을 듣고’(3)라고 기록합니다. 기브온 족속은 다른 가나안 백성들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한 하나님의 행하신 일에 대해 소문을 들었습니다. 정면 대결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남부 동맹군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과 화친하는 방법을 꾀하였습니다.

기브온은 아이에서 남서쪽으로 약 11km 지점에 있었습니다. 남쪽 예루살렘을 기준으로 북서쪽으로 약 10km에 위치합니다. 이곳은 가나안 정복기에 히위족의 거점 지역이었는데, 7절에서 확인되듯이 기브온 주민들은 히위 족속입니다. 히위 족속도 반-이스라엘 연합군에 합세한 상태였습니다. 기브온 지역은 정복 후 베냐민 지파에게 할당 되였고, 기브온 성읍은 레위 도성의 하나로 지정되었습니다(여호수아 18:25; 21:17). 또한 기브온에 있는 산당에서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릴 만큼 대형 산당이 자리한 종교적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이 산당은 여호와께 합법적 제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기브온 족속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대적해 보았자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죽지 않고 살아남은 방법이 무엇인지 나름대로 대책을 강구 했습니다. 그 결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알고 있지 않았지만, 기생 라합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렴풋하게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 거리에 있는 사람들과는 화평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신명기 20:10-13). 그리하여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여호수아를 속이는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먼저, 그들은 화친을 위한 사절단을 보내었습니다. 가나안 족속이 아닌, 마치 먼 나라에 사는 사람인 것처럼 꾸몄습니다. 낡은 옷으로 꾸미고, 헤어진 전대와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실고, 음식도 곰팡이가 난 빵을 준비했습니다(4-5). 당시에 신발은 샌들과 같았으며, 질긴 가죽으로 제작되어 여행자들은 꼭 신고 다녔습니다. 또한 곰팡이가 핀 떡을 가져왔는데, 이 떡은 식량이었으며(12), 14절에서 이스라엘이 그 떡을 받았다는 것으로 보아, 조공을 위해 준비한 떡이기도 한 것입니다.

기브온 사절단은 먼 곳에서 온 것처럼 행장을 꾸미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는 길갈에 있는 이스라엘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여호수아와 조약을 맺자고 간청합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거절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기서 머물지 않고, 여호수아에게 나가서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8)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여호수아에게 대답하길, ‘9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심히 먼 나라에서 왔사오니 이는 우리가 그의 소문과 그가 애굽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들으며 10또 그가 요단 동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들 곧 헤스본 왕 시혼과 아스다롯에 있는 바산 왕 옥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들었음이니이다’(9-10) 이러한 고백은 기생 라합이 정탐꾼에게 같은 고백이었습니다(2:9-11).

이스라엘은 처음에는 그들을 의심하여 조약체결을 거부했습니다(7). 그러나 기브온 사절단은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의 종주국으로 모시고 속국이 되겠다고 자처합니다. 이스라엘이 주인이 되고 자신들은 종이 되겠다고 종주권 조약을 부탁한 것입니다. 그들은 ‘먼 나라에서 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9). ‘먼 나라’는 신명기 20:15의 ‘멀리 떠난 성읍’과 관련된 용어인데, 이것은 신명기의 전쟁 수칙에서 중요한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대상에 따라 두 가지 전쟁 수칙을 따라야 합니다. 첫째는 비가나안 족속과의 전쟁이고 둘째는 가나안 족속과의 전쟁입니다. 가나안 족속에 대해서는 평화 협정의 과정 없이 즉시 헤렘 전쟁이 수행됩니다. 비가나안 족속은 대체로 가나안 땅 변방에 있는 ‘먼 곳의’ 나라들이다(신명기 20:15). 그들에게는 즉각 선전포고를 통한 전쟁을 시작하지 않고 먼저 평화 협정을 제안해야 합니다. 평화 제안을 받아들이면 속으로 삼아 종주국으로서 조공을 받았습니다. 평화 제한을 거부하면 전쟁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을 종복하고 모든 남자를 진멸하되 다른 사람들, 곧 여자와 유아들은 살려줘야 합니다. 성인 남자들만 전멸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군사들은 가축을 비롯하여 그 성의 모든 물건을 전리품으로 거두어 올 수 있습니다. 비가나안 족속과의 전쟁은 성인 남자들만 모두 죽이기 때문에 엄밀하게 헤렘 전쟁은 아닙니다. 아래 24절에서 기브온 사람들이 하는 말을 볼 때, 기브온 사절단은 이 전쟁 수칙을 정확히 알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신명기의 전행 수적에 따라 비가나안 족속과는 형상을 통해 종주 골계를 형성하여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인근 가나안 족속 중 하나였기 때문에 속임수를 써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와 이스라엘 군대의 명성을 듣고 미리 항복하러 왔다고 설득합니다. 여호와가 애굽에서 행한 일과 요단 동편의 강력한 두 아모리 왕들을 굴복시킨 일을 들었다고 털어놓습니다. 기브온 족속은 매우 영민했습니다. 그들은 두 아모리 족속의 왕인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격파한 일을 꺼내면서도 여리고와 아이 성이 점령된 사실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 소식을 이미 들었다고 하면, 자신들이 가까운 곳에서 왔다는 사실이 발각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절단은 장로들과 주민들이 의견을 모아 종주권 조약을 맺기로 결정하여 자신들이 대표로 이스라엘을 만나려 왔다고 말합니다.

 

(2) 기브온 족속에게 속은 이스라엘(12-15)

 

기브온 사절단은 장거리 여행의 증거물들을 내놓습니다. 먼저 떡을 내놓으면서 출발할 때는 양식으로 챙겼던 떡이 이제 다 말라서 딱딱해졌고 곰팡이가 피었다고 설명합니다. 포도주를 담은 가족 부대도 다 찢어질 지경이며, 옷과 신발도 다 헤지고 낡았음을 보여줍니다. 시기적으로 요단 동편의 두 왕을 격파한 지 몇 달이 흘렸기 때문에, 장시간 여행을 해서 옷과 신발이 낡고 음식도 모두 상하게 되었다고 그들의 말이 먹혀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에게서 양식을 취했습니다. 이것은 떡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받았을 수 있지만, 조공의 표시로 받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여호와께 묻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도취에 빠져 있었습니다. 너무도 감정에 휩쓸려 분별하지 못합니다. 설마 적들이 친구로 위장하고 찾아오리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방법이 다를 뿐이지 적들은 화친을 가장한 위장전술로 여호수아를 대적하고 나선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족속들과 화친을 맺어 살려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알았으나, 기브온 거민들의 거짓된 행동에 속아 화친을 맺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여호수아가 그 일에 대하여 어떻게 처리해야할 것인지를 ‘여호와 하나님께 묻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저질러진 실수였습니다. 이는 명백히 이스라엘의 커다란 잘못이자 신중치 못한 처사로 읽힙니다. 여호수아는 아이 성 전투 시에도 정탐꾼의 말만 듣고서 싸움을 시작하였다가 실패한 쓰라린 경험이 있었습니다. 큰 일을 앞에 두고서 하나님께 물어 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추진하는 것은 이처럼 큰 잘못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 이것이 결과적으로 어쩌면 하나님의 뜻일 수 있었다는 사실이 이어지는 후대의 기브온 족속 이야기에서 암시됩니다. 여호수아는 그들과 평화 협정을 체결하여 그들의 목숨을 살려주고 주종 관계의 조약을 맺었습니다. 회중의 모든 족장들이 기브온 사절단과의 조약을 인중하며 맹세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공 후에 아이 성을 공격할 때처럼 방심했습니다. 방심은 긴장을 풀어놓습니다. 결국, 전쟁에서 긴장이 살아져버리면 결국에는 실패를 불러옵니다. 당신은 스스로 성공에 도취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성도들은 무슨 일하기 전에 먼저 기도로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무엇이며, 또한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는 일인지 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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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8-03)


가나안 땅에 선포된 축복과 저주

여호수아 8장 30-35절


 

자전거나 자동차를 처음 배울 때, 가장 어려운 것이 안전거리 시야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가르쳐준 사람은 ‘시야를 멀리보라!’고 하지만, 운전자는 코앞도 확보하기 힘듭니다. 능숙해지면서 시야가 확보됩니다. 나중에는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삶의 목적도 멀리 보면 본만큼 안전시야를 확보한 것입니다. 근시안적 목적은 넘어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10년 후, 20년 후를 바라보고 계획하면 안정적으로 설계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금생을 넘어 내세까지 바라보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 이 단락은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사이에 위한 세겜에서 거행된 언약식이 분명합니다. 세겜 예식과 여호수아 24장 언약식의 관계는 모호합니다. 이 언약식은 아이 성이 정복한 뒤 새로운 정면과 더불어 흐름이 단절된 느낌을 줍니다. 더구나 세겜은 아이에서 상당히 먼 거리의 성읍입니다. 그러나 이 언약식에는 아이 성 사건과 이후 사건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고리들이 있습니다.

 

에발산에서 쌓은 단(30-31)

전쟁 중에 멈추고 다른 일은 한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부담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생존권이 걸린 중대한 정복전쟁들을 중단하고, 먼저 단을 쌓고 하나님께 순종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예식을 행한 것은 바로 그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고 헌신하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30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 31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제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그 위에 드렸으며(30-31)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최초의 전쟁인 아이 성을 정복한 후에 정복 전쟁을 마치고, 여호수아는 매우 중요한 예식을 진행합니다. 그것은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한’ 대로, 즉 신명기 11:26-32과 27장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유언으로 남긴 대로,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며 진행되는 언약식을 거행합니다. 빠른 시일 내 다른 성들을 정복해야 하지만, 가나안 정복 전쟁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한 것입니다. 순종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경험했기에 전쟁을 중단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새롭게 하기 위해 북상하여 에발 산으로 올라갑니다(30).

여호수아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구체적으로 출애굽기 20:24-26의 제단 축조법을 따라 에발 산에 다듬지 않은 돌로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은 오늘날 ‘나블루스(Nablus)’라는 도시 양쪽에 쌍둥이처럼 펼쳐진 산들이며 나블루스는 성경에 나오는 고대의 세겜입니다. 그리심 산은 남쪽, 에발 산은 북쪽에 위치합니다. 에발 산은 아이 성에서 북쪽으로 23km나 상당히 떨어진 사마리아 지역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언제 가나안 족속들의 기습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위험 부담을 안고 올라갑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아이 성의 경험으로 전쟁의 승패가 인간의 지혜나 계략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의 회복임을 알고 그 일을 최우선적으로 감당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마 아이 성과 벧엘 성을 정복하지 않았으면 에발 산까지 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이 성을 정복하자 그 동안 이행하지 못했던 모세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백성들과 함께 에발 산에 이른 것입니다.

에발 산에 도착한 여호수아는 규례를 따라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자연적인 돌로 단을 쌓고 그 위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자이심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과 끝을 하나님 안에서 갖는 성숙한 여호수아의 모습입니다. 이 후로는 결코 아이 성 실패처럼 불신앙의 행동은 하지 않겠다는 선언도 담겨 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에발 산에서 쌓은 단은 스스로 생각하여 쌓은 것이 아니라 모세는 명령에 의한 것입니다. 모세는 신명기 27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에발 산에 제사를 드리고 다음 에발 산과 그리심 산에서 각기 저주와 축복을 선포하도록 지시한바 있습니다(신 27:1-26).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인 여리고 성, 아이 성 정복 그리고 라합과 아간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에서 제시하는 중요한 메시지는 ‘순종’입니다. 지금까지 역사를 통해 순종을 배웠고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때도 필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이 사실을 각인시키기 위해 모세의 명령대로 에발 산에 가서, 율법을 하나도 빠짐없이 낭독했으며, 이 율법을 잘 지키면 축복이요, 그렇지 않으면 저주가 임합니다. 이러한 사실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멘”으로 응답했던 것입니다.

 

돌에 기록한 율법(32)

살아갈 때 열정적이고 뜨거운 믿음도 좋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빠져 버린다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매일 같이 드려지는 신앙고백을 점검해 보며 마음에 새긴 믿음으로 주님께 나가나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말씀의 은혜를 되새기며 말씀이 중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32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32)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장로들과 백성을 통해 에발 산에 큰 돌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 돌에다 석회를 바르고 그 위에 율법을 기록케 합니다. 이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땅으로 하나님의 율법이 시행되어야 할 땅입니다. 돌 위에 기록한 것은 율법을 준행하면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나님께 맹세해야 했던 것입니다.

 

성도들의 삶의 중심에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삶에 중심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자신의 마음을 견주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후 3:3)고 말씀했습니다.

 

세겜 언약: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사이(33-35)

성도들은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된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은 생명의 길을 걷게 되지만, 불순종하는 사람은 영원한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말씀을 따라 살아감으로 세속에 빠지지 않고 거룩함을 유지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33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한 대로 함이라 34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35모세가 명령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 앞에서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33-35)

 

에발 산과 그리심 산은 에발 산은 저주가 선포된 곳이며, 그리심 산은 축복이 선포된 산입니다. 그리심 산은 숲이 우거진 곳이지만, 에발 산은 돌만 있는 산으로, 갈보리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서로 마주보고 있어 약 3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지역적으로 가나안 땅 가운데 위치해 있어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거나,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는 길 중간에 있어서 꼭 걸쳐가야 하는 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세기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1) 돌에 기록된 율법과 언약식 자리 배치(32-33)

 

여호수아는 ‘돌들’(복수)에 모세의 율법을 기록합니다. 이 돌들은 분명 제단의 돌들과 다릅니다. 이 돌들에 새겨진 율법의 내용과 범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명기의 율법 부분일 수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24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언약 예식에서 법궤가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두 산 사이의 세겜 평지에 법궤를 놓고 궤의 좌우로 열두 지파를 절반씩 나누어 배치합니다. 법궤가 놓였다는 것은 거기에 성막이 조립되어 세워졌다는 뜻입니다. 현재의 에발산 언약식(세겜 언약식)은 여러 모로 신명기를 전제로 하고 있기에 많은 내용들을 생략한 채 언급하지 않습니다. 지파들의 자리 역시 절반씩 나누었다고 말할 뿐 구체적인 정보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명기 27:12-14에 이미 상술되어 있습니다: 그리심 산-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요셉, 베냐민; 에발 산-르우벤, 갓, 아셀, 스불론, 단, 납달리. 신명기 27:14은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라’고 지시하는데, 여기서 레위 사람은 제사장들을 의미합니다. 이때 본토인(이스라엘)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각 지파에 합류하여 자리를 배정받았습니다. 이 이방인은 35절의 정확한 번역대로 ‘거류민’(게르)을 의미하며,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상당한 권리와 법적 의무를 공유합니다. 그들은 가나안 민족들 중에서 흡수된 사람들이 아니라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의 대열에 합류했던 애굽 인이나 애굽에서 체류하던 여러 민족들이었던 것으로 이해됩니다(출 12:28; 레 24:10-11; 민 32:12). 흥미롭게도 신명기 27장을 보면, 먼저 12-13절에서 축복과 저주의 선언이 지시되지만, 정작 14절 이하에서는 축복의 선언은 생략되고, 열두 가지 연쇄적인 저주가 선언되면서 백성에게 ‘아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신 27:14 이하). 반면에 여호수아서는 축복을 선포했다는 것만 보고한 뒤 34절은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 둘 다를 낭독했다고 말합니다. 이 둘은 상호모순이 아닌 강조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저주의 선언에는 이미 순종에 따른 축복이 보장되어 있고, 축복의 선언에는 불순종에 따른 저주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2) 축복과 저주가 담긴 율법 낭독(34-35)

 

여호수아는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축복과 저주를 낭독합니다. 신명기 27:14은 ‘레위 사람’, 곧 제사장들이 이것을 낭독해야 한다고 명령하므로 실제적으로는 제사장들이 했을 것입니다. 두 산의 배치는 실제로 음향학적으로 사람의 육성이 자연적으로 멀리 전달될 수 있는 구조라 합니다. 낭독된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대로’의 축복과 저주의 내용은 신명기 27-28장에 반포된 말씀의 순종과 불순종에 따른 축복과 저주의 선포이거나(특히 저주 목록은 30여 가지의 구체적인 저주들을 쏟아낸다), 신명기 전문일 수도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 에발 산의 세겜 언약은 24장의 세겜 언약과 명백히 동일한 언약으로 생각됩니다. 왜이 언약식이 여기에서 진행되고 여호수아가 죽기 전에 다시 반복되는지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크게 두 가지 이유로 이 언약식 장면을 끼어든 본문으로 간주합니다. 첫째, 길갈에서 세겜까지는 약 50km로 상당히 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아이 성 정복 후 가나안과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시점에서 과연 온 이스라엘이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이 있는 세겜까지 이동했는지 의문입니다. 둘째, 이 언약식은 언뜻 앞뒤 문맥과 어울리지 않으며 갑자기 끼어든 이질적 요소처럼 보입니다(70인경은 9:1-2 뒤에 배치했다).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세겜 언약은 정복이 거의 다 마무리된 시점에 체결되었는데(24장), 신학적 기능을 위해 탈시간적 기법으로 시간을 거슬러 여기에 배치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쿰란 사본은 이 단락을 요단 강도하 직후의 상황인 5:2앞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 언약식은 현재의 문맥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 당장 아간과 더불어 하나님의 언약이 위반되었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 관계의 회복을 위한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둘째, 가나안의 첫 번째 도성들을 점령한 후, 언약식을 진행하면서 가나안 땅에 대한 소유권을 확증하였으며, 축복과 저주의 맹세를 통해 그 땅에서의 언약적 삶의 실천을 다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돌들을 세운 이유는 가나안 땅의 소유권을 표시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왕이 신하에게 땅을 하사할 때 돌비석을 세우는 ‘땅 하사 의식’(a divine land grant ceremony)이 거행되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은 왕이신 하나님께 땅을 하사받았기에 그들은 돌들로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여호수아의 사망 직전인 24장의 세겜 언약은 이 언약의 재확증일 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에발 산과 그리심 산에서 진행된 말씀의 잔치에서 “아멘”으로 응답 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살아가면서 불순종은 죽음이고, 순종은 생명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같은 상황입니다. 여러 가지 상황 속에는 불신앙의 유혹을 많이 받습니다. 이 유혹을 이기고 살아가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으로 생각하고 성경을 말하며 상경으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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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8-02)


성공적으로 아이 성을 점령

여호수아 8장 18-29절


조립해야할 전자제품을 조립할 때,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이럴 땐 사용설명서를 자세히 참고하거나 서비스 센터에 문의하는 것이 좋습니다. 인생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인생의 사용설명서인 성경을 주셨습니다. 성경을 통해 고민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성경은 인생의 길잡이가 됩니다.

 

  • 본문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아이 성을 다시 공략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능력을 일으키는 매체로 지팡이를 사용했다면, 여호수아는 이 전쟁에서 단창을 사용합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든 것처럼 여호수아는 단창을 높이 들고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합니다. 이스라엘은 복병의 기습으로 순식간에 아이 성을 점령하고 쫓아온 아이 군대를 반격하여 격파합니다.

 

아이 성의 승리(18-25)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 전략적 계획의 중요성, 그리고 협력과 단결의 힘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교훈들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 큰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도록 격려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지혜와 인내로 나아가는 신앙의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할 것입니다.

 

18○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내가 이 성읍을 네 손에 넘겨 주리라 여호수아가 그의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그 성읍을 가리키니 19그의 손을 드는 순간에 복병이 그들의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성읍으로 달려 들어가서 점령하고 곧 성읍에 불을 놓았더라 20아이 사람이 뒤를 돌아본즉 그 성읍에 연기가 하늘에 닿은 것이 보이니 이 길로도 저 길로도 도망할 수 없이 되었고 광야로 도망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그 추격하던 자에게로 돌아섰더라 21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이 그 복병이 성읍을 점령함과 성읍에 연기가 오름을 보고 다시 돌이켜 아이 사람들을 쳐죽이고 22복병도 성읍에서 나와 그들을 치매 그들이 이스라엘 중간에 든지라 어떤 사람들은 이쪽에서 어떤 사람들은 저쪽에서 쳐죽여서 한 사람도 남거나 도망하지 못하게 하였고 23아이 왕을 사로잡아 여호수아 앞으로 끌어 왔더라 24○이스라엘이 자기들을 광야로 추격하던 모든 아이 주민을 들에서 죽이되 그들을 다 칼날에 엎드러지게 하여 진멸하기를 마치고 온 이스라엘이 아이로 돌아와서 칼날로 죽이매 25그 날에 엎드러진 아이 사람들은 남녀가 모두 만 이천 명이라(18-25)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을 나누는 과정에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의 경계를 설정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 구절은 각 지파가 자신의 땅을 차지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받는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교훈으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각자의 소명을 다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과, 공동체의 조화로운 분배가 중요하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 강조됩니다.

 

(1) 복병의 기습 공격(18-20)

 

아이와 벧엘 연합군은 아마 20-30km거리의 요단강 유역 광야(아라바)까지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를 추격했습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직접 작전을 지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손에 쥐고 있는 단창을 높이 들어 아이 성을 가리키라고 하십니다. 아이 성을 하나님께서 넘겨주신다는 신호였습니다(18).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뻗으라 하신 것처럼, 여기서 여호수아에게 단창을 들고 뻗으라고 명하십니다. 이 모습은 모세가 손에 든 지팡이를 뻗어 갖가지 이적을 일으키고(출 9-11장) 홍해를 가르는 이적을 일으키는가 하면(출 14장) 아말렉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을 연상케 합니다(출 17장). 특히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두 손을 뻗고 있을 때 승리한 것처럼, 여호수아는 전투가 완료될 때까지 단창을 잡아 든 손을 거두지 않습니다(26). 여호수아가 단창을 아이를 향해 뻗자 복병들이 일제히 일어나 아이 성을 기습합니다. 이때 복병들은 어떻게 여호수아의 신호를 알아차렸습니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주력 부대는 이미 아이와 벧엘 동맹군을 유인하기 위해 멀리 광야 길로 위장 도주를 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아이 성을 향해 단창을 뻗은 것은 전면 공격에 대한 신호이고, 아마 주력 부대와 떨어진 복병들에게는 다른 방식으로 그 명령이 전달되어 일제히 일어나 기습을 감행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손을 드는 순간 복병들이 일제히 일어났다는 표현은 여호수아의 명령과 지시 하에 전투가 진행되었음을 드러내기 위한 문학적 기법입니다. 복병들은 군대가 모두 빠져나간 아이 성을 쉽게 점령하고 불을 놓았습니다. 아이의 군대는 성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목격하고는 함정에 빠진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양쪽 이스라엘 군대 사이에 낀 아이와 벧엘 동맹군은 사면초가에 몰렸습니다. 진퇴양난에 빠진 아이 군대를 향해 여호수아가 반격을 개시합니다(20).

 

(2) 여호수아의 반격과 아이성 정복(21-25)

 

복병이 아이 성을 점령하여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사기가 오른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 군대는 전열이 흐트러진 아이 군대를 공격했습니다. 빈 성을 점령했던 복병 부대도 나와 아이 군대를 반대쪽에서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양쪽으로부터 협공을 받은 아이 군대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지리멸렬하여 도주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효과적으로 그들을 봉쇄하여 전멸시켰으며, 왕을 포로로 잡아 여호수아 앞으로 끌고 왔습니다(22-23). 여호수아는 아이로 달려가 복병 부대와 합류해서 아이의 모든 것을 불사르고 사람들을 진멸함으로써 아이에 대한 헤렘 전쟁을 완수합니다. 그날 전쟁에서 죽은 아이 주민의 숫자가 만 이천 명입니다. 이 인원은 벧엘에서 합세한 군대를 포함한 숫자일 수 있습니다.

 

아이 전쟁의 마무리(26-29)

우리는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정의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고 전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신앙 생활에 중요한 지침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은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합니다.

 

26아이 주민들을 진멸하여 바치기까지 여호수아가 단창을 잡아 든 손을 거두지 아니하였고 27오직 그 성읍의 가축과 노략한 것은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이 탈취하였더라 28이에 여호수아가 아이를 불살라 그것으로 영원한 무더기를 만들었더니 오늘까지 황폐하였으며 29그가 또 아이 왕을 저녁 때까지 나무에 달았다가 해 질 때에 명령하여 그의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그 성문 어귀에 던지고 그 위에 돌로 큰 무더기를 쌓았더니 그것이 오늘까지 있더라(26-29)

 

여호수아는 아이 성 전투가 완료될 때까지 단창을 잡은 손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단창은 여호와의 지시가 계속되고 있다는 징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리고 정복 때와는 달리 아이 성의 모든 전리품들, 곧 가축과 물건들을 노략해서 이스라엘이 취하도록 허용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헤렘 전쟁은 경우에 따라 전리품이 허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리품은 승자인 왕의 소유로 귀속되었으므로 전리품의 하사는 전적으로 왕의 선물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아이를 불사른다(사라프)이 불사름은 어떤 것을 완전히 태워서 없애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사법에서 제단에 올릴 수 없는 부적절한 것이나 제의적으로 더럽혀진 물건들을 모두 밖으로 반출해 불살랐는데 이때 이 동사를 사용합니다(출 12:10; 레 4:12; 6:30; 7:17; 13:52 등). 헤렘으로 불사른 성읍은 황폐화되어 주민의 주거는 허용될 수 있으나, 더 이상 요새화되어선 안 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거주민이 살지 못하고 방치되며, 결국 세월이 흐르면서 커다란 돌무더기로 남게 됩니다(28). 모든 성읍이 다 불태워진 것이 아니며, 특히 가나안 북쪽 정벌에서는 단지 하솔 성만 불에 태워졌습니다(수 11:13-14).

여호수아는 처형된 아이 왕을 저녁까지 나무에 매달아 놓은 뒤 해 질 때 시체를 치우도록 명령했습니다. 그의 지시를 따라 아이 왕의 송장은 성문 어귀에 내던져지고 거기에 돌무더기를 쌓아 매장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장례에서 송장은 당일에 매장하는 것이 관례였음을 시사합니다(신 22:22-23; 수 10:26-27;Talmud - Bavli Bava Kama 82b). 이것은 송장이 강력한 부정결의 오염원으로서 접촉을 통해 사람들에게 널리 부정결을 퍼트리므로 즉시 처리되어야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체를 묻은 성문 어귀(페타흐)는 성문 입구를 의미하는데, 70인경은 그 히브리어를 ‘파하트’로 읽으면서 ‘구덩이’로 옮깁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히브리어 사본들의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것을 구덩이로 보는 것은 상당히 그럴듯한 해석인데, 아마 성문 근처의 구덩이에 시체를 던져 돌을 쌓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이 돌무더기(갈)는 성읍 전체가 거대한 황무지 언덕이 된 ‘텔’과 다른 작은 돌무더기를 가리킵니다. 아이 왕의 무덤이 된 이 돌무더기는 후대의 교훈을 위한 기념물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와 같은 전승 기념물들은 가나안 옛 질서의 종말을 가리킵니다.

아이 성 주민 만 이천 명이 진멸되었는데, ‘남녀가 모두’ 포함된 숫자였습니다. 헤렘 전쟁에서는 여성과 유아까지 죽이거나 내쫓아야 하므로 유아 역시 포함되었습니다. 헤렘 전쟁은 현대인의 정서상 매우 불편하지만, 신학적 관점에서는 심판 전쟁이며, 인간이 죄로 인해 징벌을 받는 일입니다. 창세기 15:16과 신명기 9:5에서도 확정되고 있는 중요한 신학적 주제입니다. 아브라함 때에는 아모리 족속(가나안 족속)의 죄가 아직 가득 차지 않았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까지 약 400년(창 15:13)을 기다려야 했습니다(창 15:16). 그 후 가나안 족속의 악이 가득 차게 되어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땅에서 쓸어내셨으며, 이것은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셨던 맹세를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신 9:5). 진멸의 심판을 당한 이유는 가중한 죄악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가 임계량을 넘겼을 때, 하나님은 결국 심판을 실행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노아 홍수도, 소돔과 고모라의 불심판도 또한 장차 있을 인류 최후의 심판도 하나님의 정당한 헤렘 심판이기에 심판자 하나님을 잔인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땅에서의 준엄한 집단 심판과 별개로 무고한 개인과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유아들의 최종적 운명은 사후에 별개로 하나님이 판정하실 것입니다.

앞서 강조한 대로, 여기서 우리는 ‘진멸’의 방식이 반드시 대량 학살만을 의미했던 것이 아니라, 피신과 도주, ‘내쫓음’이 포함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반복적으로 ‘그들을 쫓아내었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아마도 완강한 저항이 있을 경우 진멸이 실행되나 많은 경우 실제적인 전쟁은 주민들과 민족들의 ‘추방’ 형식으로 진멸이 실행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추방’은 실제로 고대 전쟁에서 흔히 실천된 승전국들의 조치이기도 합니다.

진멸의 반대는 상생 혹은 공생입니다. 상생은 쌍방의 약조를 통해 우호적 관계가 정립됨으로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속과 결코 상생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들과 어떠한 언약도 맺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십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겨 그들과의 상생의 길을 택함으로써 그들의 사악한 문화가 이스라엘에 침투하게 해선 안 됩니다. 그러나 구약은 아간의 길과는 정반대로 라합의 사례와 같이 개인적인 신앙의 투항을 통해 언약 백성에 합류하고, 심지어 기브온 족속과 같이 민족적 단위에서도 집단 개종을 통해 언약 백성에 합류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습니다. 이것은 쌍방의 상생과 교류를 위한 타협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악이 제거되어지니깐 하나님께서 즉시 동행하시고 아이 성을 정복케 하시는 승리를 주셨습니다. 보너스로 벧엘 성까지 승리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당신의 삶 속에 실패의 인생을 맛보고 살아갑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사용설명서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그 방법대로 살아가갈 바랍니다. 과거에 매어있는 것들을 십자가로 벗어버리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은 새롭게 된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있는 강력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항상 삶 속에 승리하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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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8-01)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아이 성 공격

여호수아 8장 1-17절


 

실패는 성공을 위한 배움의 기회입니다. 실패를 통해 우리는 더 강해지고 지혜로워집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다시 도전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실패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회복과 재도전의 힘을 믿고 나아갑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긍정적인 태도로 임합시다. 성공은 실패를 딛고 일어설 때 이루어집니다.

 

  • 아간 사건이 마무리되자 여호와께서는 다시 여호수아에게 아이 성 공격을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처음 요단강을 건널 때와 마찬가지로 용기를 북돋으며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올라갈 것을 명령하십니다. 앞서 패배한 전투에서는 아마 이스라엘이 자만하여 여호수아가 직접 전투를 이끌지 않았던 것으로 추론됩니다. 아이 성 전체에서 법궤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데 전쟁에 따라 법궤의 출정 여부는 달랐습니다.

 

아이 성 재공격을 명령(1-2)

우리 삶에서도 실패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다시 도전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를 통해 배우게 하십니다. 또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고 나아갑시다. 실패는 새로운 시작의 기회입니다.

 

1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의 백성과 그의 성읍과 그의 땅을 다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2너는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하되 오직 거기서 탈취할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가지라 너는 아이 성 뒤에 복병을 둘지니라 하시니(1-2)

 

하나님께서는 다시 아이 성 공략을 지시하십니다. 아이 왕과 그의 백성, 아이 성과 아이의 관할지를 이미 여호수아에게 넘겨주었다고 하십니다. 완료형 동사 ‘나탄’(주었다)은 아이 성 정복이 확정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이를 위해서는 정상적인 전투 수칙과 전술을 알려주십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아이를 정복한 뒤 그 성과 아이 왕은 여리고의 사례와 동일하게 처분하지만, 물건과 가축은 전리품으로 취하여 나누라고 지시하십니다. 여기서 ‘헤렘(진멸)’이란 단어가 사용되지 않지만,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 같이’에서 실제적으로 진멸을 명하고 있습니다. 아이 성 전쟁은 여리고 성보다 낮은 수위의 헤렘 전쟁입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군사적 전술로 매복을 지시하시되 매복 방법에 대해서는 여호수아에게 맡기십니다. 뒤에 여호수아가 지시하는 상세한 매복 방법과 전략도 어쩌면 여리고 성 전투 수칙처럼 하나님께서 이미 그에게 알려주셨는지도 모릅니다.

 

여호수아의 작전 하달(3-9)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공동체 내에서 협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지도자는 지혜롭게 계획하고 준비하며 공동체를 이끌어야 합니다. 협력과 존중이 신앙 공동체의 성장을 도모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지혜와 준비가 필요합니다.

 

3○이에 여호수아가 일어나서 군사와 함께 아이로 올라가려 하여 용사 삼만 명을 뽑아 밤에 보내며 4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성읍 뒤로 가서 성읍을 향하여 매복하되 그 성읍에서 너무 멀리 하지 말고 다 스스로 준비하라 5나와 나를 따르는 모든 백성은 다 성읍으로 가까이 가리니 그들이 처음과 같이 우리에게로 쳐 올라올 것이라 그리 할 때에 우리가 그들 앞에서 도망하면 6그들이 나와서 우리를 추격하며 이르기를 그들이 처음과 같이 우리 앞에서 도망한다 하고 우리의 유인을 받아 그 성읍에서 멀리 떠날 것이라 우리가 그들 앞에서 도망하거든 7너희는 매복한 곳에서 일어나 그 성읍을 점령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너희 손에 주시리라 8너희가 그 성읍을 취하거든 그것을 불살라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였느니라 하고 9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매복할 곳으로 가서 아이 서쪽 벧엘과 아이 사이에 매복하였고 여호수아는 그 밤에 백성 가운데에서 잤더라(3-9)

 

여호수아는 아이를 공격하기 위해 삼만 명의 군사를 선발합니다(3). 히브리어 숫자로는 ‘30 천의 군사’인데 30,000을 의미합니다. 앞서 4:13과 7:3에서 살펴보았지만, 어떤 이들은 병력 삼만 명에 대해 ‘천’의 히브리어 ‘엘레프’를 부대 단위로 간주하여 30개의 부대로 볼 것을 제안하지만, 여기서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앞서 정탐꾼들이 제안한 병력 이삼천 명이 그보다 훨씬 축소된 두세 개의 부대에 불과하다고 보기에는 인구 만 이천 명에 이르는 아이 성의 규모에(8:25) 비추어 볼 때 너무 적습니다. 아이가 벧엘과 연합작전을 구사하고 있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여호수아는 삼만 명의 군사를 뽑았는데, 이들에게 성읍 뒤쪽에 매복할 것을 명령합니다(4). 그러나 12절에서는 매복병이 오천 명으로 언급되므로 언뜻 서로 상충되어 보입니다. 추정컨대, 아마 삼만 명 모두가 매복을 한 것이 아니라, 그중에 오천 명이 매복병으로 선발된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수아의 작전이 매우 구체적으로 하달됩니다. 두 가지 전술이 구사되는데, 매복과 유인입니다. 여호수아는 매복병을 성 뒤쪽에 배치한 뒤 본대를 이끌고 성문 앞에 가서 아이 성을 공격하는 시늉을 낼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으로 패주하여 성으로부터 멀리 유인합니다. 아이 군대는 첫 번째 전투처럼 이스라엘이 겁을 먹고 도망간 것으로 오해하고 맹렬히 추격할 것입니다. 그때 빈 성을 매복 부대가 공격하여 순식간에 점령한 뒤 불을 질러 (야차트) 본 부대에 승전보를 보냅니다(8). 여호수아는 매복병들을 보냈고, 그들은 서쪽 벧엘과 아이 사이에 매복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날 밤 진영에서 군사들과 함께 밤을 지냈습니다(9).

 

아이성 전투의 개시(10-17)

우리의 삶에서도 문제 해결과 목표 달성을 위해 지혜롭고 신중한 계획이 필요합니다. 단순한 힘의 사용보다는 전략적이고 지혜로운 접근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공동체가 협력할 때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협력과 순종은 성공의 열쇠입니다. 지혜롭고 전략적인 태도가 필수적입니다.

 

10○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백성을 점호하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더불어 백성에 앞서 아이로 올라가매 11그와 함께 한 군사가 다 올라가서 그 성읍 앞에 가까이 이르러 아이 북쪽에 진 치니 그와 아이 사이에는 한 골짜기가 있더라 12그가 약 오천 명을 택하여 성읍 서쪽 벧엘과 아이 사이에 매복시키니 13이와 같이 성읍 북쪽에는 온 군대가 있고 성읍 서쪽에는 복병이 있었더라 여호수아가 그 밤에 골짜기 가운데로 들어가니 14아이 왕이 이를 보고 그 성읍 백성과 함께 일찍이 일어나 급히 나가 아라바 앞에 이르러 정한 때에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나 성읍 뒤에 복병이 있는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15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이 그들 앞에서 거짓으로 패한 척하여 광야 길로 도망하매 16그 성읍에 있는 모든 백성이 그들을 추격하려고 모여 여호수아를 추격하며 유인함을 받아 아이 성읍을 멀리 떠나니 17아이와 벧엘에 이스라엘을 따라가지 아니한 자가 하나도 없으며 성문을 열어 놓고 이스라엘을 추격하였더라(10-17)

 

다음 날 아침 여호수아는 군대를 점호한 뒤 장로들과 함께 아이로 출정하여 아이 북쪽에 군대를 포진시켰습니다(10). 이스라엘 군대와 아이 사이에 골짜기가 있었는데(11), 이 골짜기는 여호수아가 내려간 13절의 골짜기(에메크)와 히브리어가 다릅니다. 11절의 ‘하가이’는 단순히 아이의 히브리어 ‘하아이’의 말놀이를 위한 의도적인 단어 선택일 뿐 그 둘은 동일한 골짜기인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히브리어에서 골짜기는 우리나라 지형의 계곡 개념이 아닌 큰 산이나 산맥 사이의 넓은 평지를 뜻합니다. 여호수아는 본대에서 오천 명의 매복병을 선발하여 아이 서쪽에 매복시켰습니다. 그곳은 벧엘과 아이 사이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벧엘이 만일 현대의 베이틴(Beitin)이고 아이가 에트 텔(et-Tel)이라면, 둘 사이는 약 2-3km 정도의 거리에 불과합니다. 매복을 완료한 뒤, 여호수아는 그날 밤 골짜기로 내려갔는데, 일부 사본들의 기록대로 그는 본진을 이끌고 골짜기(낮은 평지)로 내려가 거기서 밤을 지낸 것입니다. 여기서 3절과 차이가 나는 듯 보이는 매복병의 숫자와 더불어 또 한 가지 문제는 3-9절과 10-17절이 연속적으로 이어진 군사 작전으로 해석되는지, 아니면 3-9절의 군사 작전이 10-17절에서 구체적으로 다시 묘사되고 있는지에 대한 논쟁입니다. 사람들은 전체를 하나로 읽으면서 두 가지 가능한 해석을 제안합니다. 첫 번째 견해에 의하면, 여호수아는 군사들을 먼저 성읍 주변으로 보내 매복시켰습니다(4,9a). 여호수아 자신은 진영에서 하룻밤을 잤습니다(9b). 다음 날 아침 일어나(10) 장로들과 주력 부대를 이끌고 아이 성 북쪽으로 가서 진을 쳤습니다(11). 12-13절에 복병들을 매복시키고 여호수아가 골짜기로 들어갔다는 것은 이미 전날 밤에 여호수아가 매복병을 보낸 일을 다시 묘사하는 것이므로, 그 동사들은 과거 완료로 해석되어야 합니다(‘여호수아가 오천 명을 택하였었고…매복시켰었다’). 전날 매복병을 숨긴 뒤 여호수아와 본진 군사들은 이튿날 골짜기에서 숙영했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작전대로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이 경우 매복은 이틀 동안 계속되었기에 과연 효과적인 전술인지 의문을 품게 합니다. 또한 복병이 삼만 명(3)인지, 오천명(12)인지는 여전히 문제로 남습니다. 다른 학자들은 두 번째 견해를 제안합니다. 그들은 10-17절을 3-9절의 군사 작전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로 해석합니다. 즉, 일단 3-9절은 여호수아가 군사들에게 작전 지시를 내린 뒤 복병을 배치했다는 설명과 더불어 전체 줄거리를 요약합니다. 이어서 10-17절은 동일한 사건을 더 자세히 반복해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먼저 여호수아와 전 군대가 함께 아침에 출정해서 아이 성 근처로 갔습니다. 그날 밤 여호수아는 매복병을 배치하고 자신은 골짜기에 위치한 본진으로 내려와 잤습니다. 이스라엘 군대의 출현을 알게 된 아이 왕이 다음날 아침 급히 일어나 이스라엘을 치러 나왔습니다. 이 해석의 장점은 복병들이 하룻밤만 매복한 뒤 다음 날 기습 작전을 펼친 것으로 무리 없이 이해된다는 점입니다. 물론 여전히 복병 삼만 명과 오천 명 사이의 숫자 차이가 문제로 남습니다.

첫 번째 견해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다만 삼만 명이 오천 명의 필사상의 오류라는 근거는 어떠한 사본학적 지지를 받지 못하므로 두 숫자를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본문은 9절에서 여호수아가 잠을 잤으며, 10절은 그가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기에 서사의 흐름은 9절과 10절 사이가 단절되지 않은 채 매우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따라서 두 번째 견해는 배제되어야 합니다. 여기서는 첫 번째 견해를 받아들이면서 숫자에 대해서는 앞서 설명한 대로 삼만 명 중에 오천 명이 매복병으로 선발되었다고 해석할 것을 제안합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여호수아는 삼만 명의 군대를 소집했으며, 그중에 오천명을 매복병으로 뽑아 전날 밤 미리 아이 성 근처에 매복시킵니다. 결국 아이 성 근처로 출정한 여호수아와 본진은 그날 전투가 발생하지 않아 골짜기에서 하룻밤을 숙영했습니다. 오천 명의 매복병들은 이틀 밤을 숨어 있는 셈입니다. 이것은 전쟁에서 쌍방 간의 전략 싸움 와중에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아이 성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므로 매복이 쉽게 발각될 리 없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출정한 그날 아이 성 앞에 자신의 군사들을 배치하여 아이 왕이 군사를 이끌고 나오기를 기대했는데, 아이 왕은 그날은 일단 신중히 탐색전을 한 것으로 추론됩니다. 따라서 여호수아는 그 밤에 다시 골짜기의 본진으로 내려가 밤을 보냈습니다. 이튿날 아침 위협을 느낀 아이 왕의 긴급한 공격이 개시되었습니다(14, ‘급히 나가’). 이후 전쟁의 양상은 여호수아의 전략대로 진행되어 이스라엘 복병들이 아이 성을 기습하여 점령하였습니다. 아이 왕은 이스라엘 군대를 요단강 유역의 아라바 근처까지 추격하여 거기서 일전을 벌이려 합니다. 이 추격전에서 갑자기 벧엘이 아이의 동맹군으로 등장합니다. 아이는 이미 인근 성들과 연대하여 이스라엘에 대응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실패 후에도 다시 도전하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협력할 때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실패를 통해 배우고,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지혜와 계획, 인내와 신뢰가 성공의 열쇠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승리를 향해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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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7-02)


아간의 죄와 이스라엘의 교훈

여호수아 7장 16-26절


 

가나안 땅은 아름다운 땅이지만, 그만큼 죄의 유혹이 강한 곳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왔다고 저절로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간은 실토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회개의 고백이 아니라 추궁 끝에 나온 자백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행한 첫 번째 범죄였습니다.

 

 

  •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 레위 지파를 포함하면 열세 개의 지파로 구성되어 있으나, 각 지파는 또한 몇 개의 계파, 즉 문중으로 나뉩니다. 헤렘 물건에 손을 댄 범인을 색출하는 제비뽑기 과정은 이러한 민족 집단의 조직 체계를 상세히 보여줍니다. 최종적으로 이간이 범인으로 뽑히고 그는 자신의 범죄 사실을 모두 털어놓습니다. 그는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았기에 심판을 모면하지는 못합니다.

 

법인으로 재비 뽑힌 아간(16-19)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죄가 클 뿐입니다. 어리석은 계산이고 무모한 용기입니다. 죄의 혜택을 압수하고 죄의 공범자들을 같이 처형합니다. 죄는 구체적으로 지적받고 철저하게 해결되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단호하게 불순종한 사람을 찾아내기 시작합니다. 이제 점점 폭이 좁혀지더니 결국 아간의 정체와 그가 훔친 것의 진상이 드러납니다.

 

16이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그의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가 뽑혔고 17유다 족속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세라 족속이 뽑혔고 세라 족속의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가 뽑혔고 18삽디의 가족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더라 19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청하노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가 행한 일을 내게 알게 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 하니(16-19)

 

이튿날 아침 여호수아는 각 지파들을 소집해서 제비를 뽑았습니다. 구약에서 흔히 ‘온 회중’이 모였다는 의미는 대표들의 회집인 많은데(레 8:3; 9:1), 이때도 아마 각 지파의 대표들인 장로들이 소집되었을 것입니다. 제비뽑기의 결과 유다 지파가 뽑혔습니다. 다시 유다 족속 중의 문중 대표들이 소집되어 제비뽑기가 실행되어 세라 족속이, 이어서 세라 족속 중에서는 삽디 집안이 뽑혔습니다. 문중부터는 아마 가장들이 대표로 소집된 것으로 추론됩니다. 최종적으로 아마도 삽디 일가의 가장들이 모인 가운데 제비를 뽑은 결과 아간이 범인으로 드러났습니다.

여호수아는 범인으로 결정된 아간을 ‘내 아들아’라고 부른다. 당시 전통에서는 흔히 권위자가 아랫사람을(삼상 4:16; 18:22), 스승이 제자를 ‘아들’로 칭했습니다(삼상 3:6; 잠 1:8; 전 12:12; 딤후 2:1; 히 12:5). 이것은 매우 인격적인 관계를 포함하는 호칭이므로 현재 여호수아는 아간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자백을 유도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아간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 앞에서 자복하라고 요청합니다. 여기서 ‘너는 자복하라’는 히브리어 명령형 동사 토다는 주로 시편에서 등장하는데, 대부분 ‘너는 찬양하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반면에 죄를 자백하며 회개하는 동사는 흔히 같은 어근 동사의 히트파엘형인 ‘히트봐다’가 사용됩니다(레위기 5:5; 레위기 16:21; 26:40; 민수기 5:7; 다니엘 9:4; 느헤미야 1:6 등), 이 동사의 ‘찬양하라’라는 의미는 직선의 ‘영광을 돌리라’와 짝을 이루며, 무엇보다 구두섬인 분리 악센트 아트나(atnah)가 둘을 묶어 문장을 공고 있어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다시 말해, 이 문장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 앞에서 찬양하라. 그리고 네가 행한 일을 내게 알리라’로 번역하는 것이 옳아 보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의 자백은 이어지는 그 일을 ‘내게 알리고 숨기지 말라’는 명령에서 분명하게 요구됩니다.

 

아간의 자백과 징벌(20-26)

탐욕을 충족시키는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심판을 수행하는 대의명분이 있을 때 허용되는 것이 진멸 전쟁입니다. 명품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명분을 위한 전쟁이어야 합니다. 가나안에서는 철저히 진멸할 것은 진멸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희생제물이며, 따라서 그것은 거룩한 제물이어야 합니다.

 

20아간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참으로 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이러이러하게 행하였나이다 21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하더라 22이에 여호수아가 사자들을 보내매 그의 장막에 달려가 본즉 물건이 그의 장막 안에 감추어져 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는지라 23그들이 그것을 장막 가운데서 취하여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가지고 오매 그들이 그것을 여호와 앞에 쏟아 놓으니라 24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과 더불어 세라의 아들 아간을 잡고 그 은과 그 외투와 그 금덩이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딸들과 그의 소들과 그의 나귀들과 그의 양들과 그의 장막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25여호수아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오늘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물건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26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의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20-26)

 

아간은 자신의 죄를 자백했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아간과 그의 가족을 처벌했습니다. 이는 죄를 숨기지 말고 고백하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또한, 죄의 결과가 심각하다는 것을 경고하며, 공동체의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죄를 제거하는 것이 필요함을 가르칩니다. 이러한 교훈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1) 아간이 자백하다(20-21)

 

아간은 자신의 범죄를 고백한다. 그는 자신이 어떤 헤렙 품목을 빼돌렸는지 자세히 털어놓습니다. 가장 먼저 언급된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가 아마 최고가의 물건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시날 산은 시날에서 만들어진 물건을 의미합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시날 지역은 가장 문명이 발달한 지역으로 그곳에서 생산된 각종 진귀하고 사치스런 물건들은 주변에 수출되기도 한 것으로 보입니다. 혹은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는 매우 비싼 옷이라는 당시의 관례적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아간은 매우 비싼 옷을 탐내 훔쳤습니다. 또 200세겔의 은덩이와 50세겔 무게의 금덩이를 훔쳤습니다. 아간의 고백 속에는 죄를 짓는 심리 과정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어떤 귀한 것을 보고 탐을 냅니다. 특히 탐심은 죄의 근원이자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겨지는 시발점입니다(창 3:6; 출 20:17; 신 5:21; 7:25; 미 2:2; 잠 6:25; 12:12). 특히 탐스러운 것을 ‘보고 탐을 내어’ 구체적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은 에덴에서 최초의 범죄 과정과 동일합니다(창 3:6).

고대 근동의 전통에 의하면, 승전국의 전리품은 군주의 허락을 받아야 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현재 여리고 성 전투에서 승전국 임금은 하나님이시므로, 거기에 속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권리 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간은 멋대로 빼돌린 물건들을 자신의 막사 아래 땅 속에 숨겼습니다. 여기에 ‘진영에’를 덧붙인 70인경이 암시하는 대로, 그의 범죄는 전체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2) 징벌을 받은 아간(22-26)

 

여호수아는 즉시 아간의 막사에 부하들을 보내 현장을 확인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모든 장물들이 거기 숨겨져 있었습니다. 군사들은 그 장물들을 모두 취해 여호수아와 백성 앞에 가져왔으며, 여호수아는 그것들을 여호와 앞에 쏟아놓았습니다(23). ‘여호와 앞’은 통상적으로 성막 안쪽의 본당 건물인 회막 앞을 말하므로 성막 뜰일 것입니다. 이 행위는 그 물건들을 소유권자이신 여호와께 돌려드리는 의미를 지녔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백성은 범인인 세라의 아들 아간을 체포하였으며, 되찾은 그 헤렘 물건들과 그의 자녀들과 그에게 속한 모든 가축들과 물건들을 취하여 아골 골짜기로 갔습니다. 이 골짜기의 이름 아골은 이 사건 후에 붙여졌는데(25), 범인 아간의 이름과 비슷한 발음의 말놀이이면서 아간의 범죄로 아이 전투에서 패배를 당한 이스라엘의 고통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온 백성이 모여서 아간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돌로 치고 불살랐습니다. ‘돌을 던져 죽이다’를 의미하는 동사는 라감과 사칼의 두 가지인데, 여기서 이 둘이 모두 사용됩니다(25). 먼저 아간과 사람들을, 그리고 모든 물건들을 돌로 치고 모두 불사릅니다. 개역개정에는 빠져 있는데 불사름에 이어 다시 그것들을 돌로 칩니다. 그리고 거기에 돌무덤을 쌓습니다(26). 투석형으로 일단 사형을 집행하고 물건들도 돌로 친(라감) 다음, 죽은 시체와 부서진 물건들을 불사르고 그것들에 다시 돌을 던져(사칼) 돌무덤을 쌓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간 사건에서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됩니다. 첫째, 아간은 회개를 했는데, 왜 사형을 당했습니까? 분명히 아간은 범죄 사실을 진정성 있게 인정합니다(20). 하지만 아간은 제비뽑기로 자신이 범인으로 지목되자 그때서야 ‘내가 범죄했다’고 말하며(25) 자신의 죄를 인정했을 뿐, 그가 죄를 참회하고 회개했다는 말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이와 흡사합니다. 성령의 역사로 초대 교회에 일시적으로 공동소유 공동체가 형성되었을 때, 부부는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다가 심판을 받아 혼절하여 사망합니다. 한편, 아간의 범죄로 인하여 왜 가족들이 함께 몰살을 당했습니까? 아간 가족들이 아간의 죄를 알고도 묵인했기 때문입니다. 아간이 집에서 땅을 파고 장물을 감출 정도면 가족들 모두가 범죄를 인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나니아가 땅값을 감추었을 때, 사도행전 기자는 ‘그 아내도 알더라’라고 밝힙니다(행 5:2). 반대로 라합의 친족들은 모두 라합에 동조해서 그녀의 집에 모여 있다가 이스라엘 군사들에게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분명 구약의 연대 책임 사상은 중요합니다. 연대 책임은 수평적으로 현재의 공동체에게 적용될 뿐 아니라 수직적으로 세대 간에도 적용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재를 살던 이스라엘 백성은 조상들의 죄를 자신들의 죄로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곤 했습니다(레 26:40).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서는 이런 개인의 범죄는 빨리 해결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이렇듯 연대 책임의 원리가 작동하지만, 동시에 개인의 선택과 결단이 제외되거나 무시되지 않습니다. 헤렘의 대상이라 할지라도 개인이(라합), 혹은 집단이 민족적으로(기브온 족속, 여호수아 9장) 결단과 개종을 통해 헤렘의 심판을 면할 길은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아간의 범죄와 그의 집의 심판은 라합과 그녀의 집의 구원과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마찬가지로 고라와 그 일당이 모두 몰살을 당할 때, 고라의 아들들은 영적으로 민감하게 아버지를 떠나는 결단을 내려 생존했습니다(민 26:9-11). 후대에 고라의 후손에서 사무엘이 탄생하는가 하면, 그들은 성전 음악을 비롯한 주요 직무를 맡고 시편의 여러 시들을 남겼습니다(대상 9:19; 20:9). 언약 백성이라 해서 자동적으로 헤렘에서 면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과 마찬가지로 율법과 무관하게 이방 풍속과 규례를 따르고 하나님을 반역하며 우상을 숭배했을 때는 진멸의 심판을 당했습니다(예, 고라 일당의 진멸(민 16장); 우상숭배 성읍의 진멸(신 13:12-18)). 결국 구약성경은 죗값의 승계에 대해 공동 책임과 개인 책임 둘다 적용하여 한 사람의 죄가 전체에 영향을 주는가 하면, 각 사람은 또한 각자의 죄로 망한다(렘 31:29-30; 겔 18:19-22).


아간의 죄는 개인의 죄가 공동체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죄를 숨기지 말고 고백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죄의 결과는 심각하며,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공동체는 서로의 영적 상태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사랑과 책임감으로 돌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기억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교훈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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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7-01)


아이성 전투에서의 충격적 패배

여호수아 7장 1-15절


 

하나님의 자녀로서 칭의와 중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서만 완전합니다. 구원에 다른 공로를 추가하려는 것은 복음을 대적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행위를 정죄하고 심판하십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공로와 은혜로만 구원이 이루어짐을 강조합니다. 다른 공로를 가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훼손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우리의 구원의 길입니다.

 

  • 헤렘 전쟁을 통해 헤렘으로 헌정된 물건은 사람의 것이 아니므로 사사로이 쉬할 수 없습니다. 때로 하나님의 허락 하에 전리품을 취할 수 있었지만, 최고 수위의 헤렘 전쟁에서는 모든 물건을 소각하고 가축은 모두 죽었으며, 금속류는 성전 창고에 보관해서 성전을 위해 재활용했습니다. 여리고 성이 바로 최고 수위의 헤렘으로 봉헌되었으며, 어떤 물건도 전리품으로 취할 수 없었습니다.

 

실패한 아이 성 정복(1-5)

 

신앙 공동체는 한 사람의 작은 죄라도 방관하거나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남의 일처럼 비난하고 조롱하는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공동체는 서로의 죄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사랑과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아간의 죄 같은 것이 있는지 살펴보고, 이를 제거하기 위한 절차가 필요합니다.

 

1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2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3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 4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5아이 사람이 그들을 삼십육 명쯤 쳐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가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1-5)

 

아간의 이야기를 잘 아는 독자들은 7장 서두에서 이상한 표현을 발견할 것입니다. 아간 한 사람이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1a)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아간의 범죄에 대한 공범자라는 진술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공동 책임 사상’을 반영하는 중요한 신학적 진술입니다. 온 이스라엘을 곤경에 빠트린 당사자는 아간입니다. 그의 상세한 족보가 제시되면서 아간과 그의 집안 내력이 함께 암시됩니다. 4대가 등장하는 아간의 족보는 선택적인 신학적 족보로 축약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아간은 유다 지파이긴 하지만, 그의 조상이 다윗으로 이어지는 베레스가 아닌 세라인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족보가 명망가로서의 아간의 집안을 소개하는 목적이 있을 수도 있지만, 범죄자 가인의 뿌리를 추적하는 것을 고려해볼 때 혈통에 대한 부정적인 암시에 목적이 있는 듯합니다.

아간은 ‘온전히 바친 제물’에 손댔습니다. 이 물건은 ‘헤렘’인데, 하나님께 ‘전적으로 바쳐진 것’을 뜻합니다. 아간이 헤렘 물건에 손을 대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이 범죄는 특별히 ‘마알’로 지칭되는데, 이것은 특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위반’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보통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 서약을 위반하는 범죄들을 ‘신실치 못하여 저지른’ 마알의 범죄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레 6:2). 이것은 서약 당사자인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현재 아간의 범죄 역시 마알인데, 이것은 11절에서 하나님께서 꾸중하고 있듯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는, 더 구체적으로는 모든 것을 헌정해야 하는 헤렘 전쟁의 서약을(수 6:17-19) 위반하는 행위였음을 암시합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체에 분노를 뿜어내셨습니다. 범죄에 대한 상세한 내막과 설명은 아이 성 정복 실패담 이후로 유보됩니다.

1-3절은 아이 성 공략이 실패한 두 가지 원인을 서론적으로 꺼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헤렙의 규칙을 위반한 아간의 범죄(1)와 아이 성을 하찮게 본 이스라엘의 교만이었습니다(2-3). 실패한 아이 성 이야기의 서두에 아간의 범죄가 가장 먼저 언급된 이유는 실패의 주요 원인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이어지는 진술에서 교만함이 부각됩니다. 요단강 근처 저지대의 여리고를 정복한 이스라엘은 가나안 내륙의 고지대 초입에 자리한 아이 성을 공략하기 위해 밀정들을 보냅니다. 아이 성의 정탐꾼의 숫자가 명시되지 않고 정탐 과정이 생략된 채 결과만 보고되는데, 이는 아이 성의 경우 정탐부터가 매우 느슨하고 허술했음을 암시합니다. 이스라엘의 오만함이 엿보입니다. 정탐꾼들이 파견된 아이의 위치는 벧엘 동쪽 벧아웬 근처입니다. 벧엘과 벧아웬은 아이보다 더 서편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 두 성의 위치에 대해 많은 제안이 있었습니다. 여리고는 해수면 아래 계곡에 위치했지만, 아이는 급격히 높아진 산악 지대 초입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정탐을 마친 밀정들이 돌아와 여호수아에게 지나치게 낙관적인 보고를 합니다(3). 그들은 소수 병력만으로도 아이 성 공략이 충분하다고 말하면서 불과 이삼천 명을 제안합니다. ‘그들은(아이 성 주민) 소수이니’라는 말에서 정탐 활동이 철저하지 못했음이 드러납니다. 나중에 아이 성 주민이 남녀 만 이천 명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수 8:25). 정탐꾼들의 제안대로 선발된 군사 삼천 명이 아이로 올라가 전투를 벌이지만 쉽게 패주하여 36명의 군사를 잃습니다(4). 아이의 군사들은 ‘채석장’이라는 뜻의 지명을 가진 스바림까지 쫓아가 내리막길에서 이스라엘 군대를 쳐부수었습니다. 냉정히 평가하면, 불과 36명의 전사자가 치명적 타격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중지란에 빠진 이스라엘은 그들이 얼마나 느슨한 정신으로 전쟁에 임했는지를 잘 암시해줍니다. 예상치 못한 패배 소식에 온 백성의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마음이 녹은 상태를 표현한 마사스(분해되다)는 앞서 2:9에서 여호와의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들은 여리고 주민들과 가나안 땅의 거주민들에게 사용된 바 있습니다. 이제 여기서 그 동사가 이스라엘에게 사용됩니다. 그들은 완전히 사기를 잃었습니다. 반면에 아이 성 가나안의 사기는 충천했습니다.

세 번의 정탐 활동을 비교해보면 극명하게 대조에는 흥미로운 특징들이 나타납니다. 민수기에서 가데스 바네아로부터 파견된 열두 명의 밀정들은 불신의 비고를 가져와 백성을 낙담케 했습니다. 반면에 여리고를 탐문한 두 명의 밀정은 믿음의 보고로 백성의 사기를 진작시켰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정탐한 밀정들은 교만한 보고로 백성을 방심케 했습니다. 정탐 행위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단지 정탐의 동기와 태도, 정탐 후의 평가가 중요했을 뿐입니다.

 

패배 후 여호수아의 탄원(6-9)

공동체 내에서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보게 되면, 우리는 종종 그들을 정죄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도 그 일에 대해 기도하지 않은 공범자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 못한 죄는 크며, 나중에 자신이 조롱한 대로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6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7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8주여 이스라엘이 그의 원수들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9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6-9)

 

패배의 소식을 들은 여호수아와 장로들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옷을 찢고 법궤 앞에서 땅에 엎드리며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는 행위는 전형적인 애도와 슬픔의 표현입니다. ‘법궤 앞에서’ 엎드렸다는 것은 여호와 앞에서 그들이 온종일 탄식하며 부르짖었음을 뜻합니다.

여호와를 향한 그들의 항변은 광야에서 조상들이 반복적으로 쏟아낸 불평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그때마다 그들은 ‘애굽 땅에서의 생활이 더 좋았다’는 말을 덧붙이곤 했습니다(출 14:10-12; 민 14:1-3). 여기서도 여호수아와 장로들은 왜 여호와께서 우리를 요단 강을 건너오게 해서 다 죽게 만드시느냐고 따지면서 ‘우리가 요단 저쪽에서 사는 것이 더 나을 뻔했다’고 덧붙입니다. 나아가 그들은 역시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압력을 행사하면서 흥정을 시도합니다. ‘우리가 적들에게 망해 이 소문이 세상에 퍼진다면, 당신의 명성에 스스로 먹칠하는 셈이 아닙니까?’ 이것은 물론 시편에서도 흔히 보이는 전형적인 탄식 기도의 수사학입니다. 그러나 이미 영적으로 태만해졌던 그늘의 항변은 시편 기자의 탄식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이집트를 떠나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요단 동편을 떠나 요단을 건너게 하신 하나님 탓이다!’ 그들도 결국 제1세대의 조상들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범인 색출과 징벌(10-15)

온전히 하나님께 바친 물건, 즉 진멸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들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을 떠나겠다고 하십니다. 진멸하지 않고 가져온 물건과 사람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것을 훔친 사람을 진멸할 때 이스라엘로부터 수치가 떠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돌릴 때 그들 몫의 축복을 반ㄷ을 수 있습니다.

 

10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11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12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3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희 가운데에 온전히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너희가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가운데에서 제하기까지는 네 원수들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리라 14너희는 아침에 너희의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 뽑히는 그 지파는 그 족속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족속은 그 가족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그 가족은 그 남자들이 가까이 나아올 것이며 15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진 자로 뽑힌 자를 불사르되 그와 그의 모든 소유를 그리하라 이는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이라 하셨다 하라(10-15)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반응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왜 무기력하게 아이 성에서 실패했는지 알려주시면서 그들을 질책하십니다. 요지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조항의 하나인 헤렘 규칙을 어기고 헤렘의 물건을 도둑질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그들이 패한 이유입니다(12). 아간은 해이해진 백성의 정신적, 영적 상태를 대표로 보여줍니다. 여기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공범자로 취급하시면서 이스라엘이 공동 책임을 지고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덧붙여 하나님께서는 만일 헤렘 물건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으면, 더는 이스라엘과 함께하지 않겠다고 경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범인 색출을 위한 구체적 방법과 절차를 알려주십니다. 모든 백성이 스스로 성결케 하고 다음 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성결케 하는지는 출애굽기 19장에 암시되어 있는데, 옷 세탁과 부부관계의 금지입니다. 통상적으로 옷을 빨아 정결케 할 때는 목욕이 전제되어 있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성결케 된 백성 중에서 하나님이 차례로 ‘취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여호와께서 취하실 지파’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결정되는 방식은 본문이 말해주지 않지만, 아마 제비뽑기일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흉패 속에 보관했던 우림과 둠밈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합법적인 제비뽑기는 분명 이방의 마술이나 점술과는 의미가 달랐습니다. 잠언은 ‘사람이 제비를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라고 천명합니다. 제비가 뽑히는 순서는 큰 단위의 집단부터 작은 단위로 내려가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제비를 통해 특정 지파가 뽑히고, 그 지파 안에서 다시 제비를 통해 특정 가문이 뽑히고, 그 가문 내에서 다시 제비뽑기에 의해 범인이 뽑힙니다. 가문의 남자들이 가까이 온 가운데, 최후의 제비뽑기를 통해 범인이 드러납니다(14-15). 그는 형을 당할 것이고,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이 함께 불사름을 당할 것입니다(15).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죄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그것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해야 합니다. 아간의 죄는 이스라엘 전체에 고통을 가져왔으며, 이는 한 사람의 죄가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하며, 죄를 방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제거해야 합니다. 공동체의 영적 상태에 책임감을 가지고, 서로를 사랑과 책임감으로 돌봐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기억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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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6-02)


하나님의 기적과 여리고의 붕괴

여호수아 6장 8-27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순종하지 않을 때, 그 결과는 심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명령을 존중해야 하며, 불순종은 경고로 남아야 합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받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순종의 결과를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 이스라엘 백성은 기이한 하나님의 전쟁 수칙을 묵묵히 따릅니다. 여기서 11절의 ‘여호와의 궤가 성을 한 번 돌았다’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전쟁의 주체는 백성들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법궤와 제사장들이 앞장서고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진행되는 침묵의 행진은 이것이 군사적 행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거룩한 예식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여리고 성 주변을 행진하는 백성(8-14)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신앙 생활에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공동체가 하나 되어 협력할 때 큰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신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신앙의 태도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듭니다.

 

8○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나아가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9그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행진하며 후군은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더라 10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11여호와의 궤가 그 성을 한 번 돌게 하고 그들이 진영으로 들어와서 진영에서 자니라 12○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니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13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계속 행진하며 나팔을 불고 무장한 자들은 그 앞에 행진하며 후군은 여호와의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니라 14그 둘째 날에도 그 성을 한 번 돌고 진영으로 돌아오니라 엿새 동안을 이같이 행하니라(8-14)

 

여호수아의 명령을 받은 백성은 본격적인 행동에 들어갑니다. 그들은 지침대로 특별한 대열을 갖추고 여리고 성을 향해 행진합니다(8-9). 군사들은 행진 중에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이러한 기괴한 침묵의 행진은 여리고 백성에게 엄청난 공포심을 불러일으켰을지 모릅니다.

여기서 최전선에서 행진하는 ‘무장한 자들’은 누굽니까? 원래 민수기의 진영 배치와 행진 대열 배치의 규정에 따르면, 행진 시에는 유다 지파가 법궤 뒤를 따라 모든 지파의 선봉에 섭니다(민 10:14). 전쟁 시에도 하나님께서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고 지시하는 것으로 보아 유다가 선봉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삿 1:2). 그러나 모든 전쟁에서 유다가 선봉에 설 필요는 없습니다. 민수기 32장의 요단 동편 지파들과 모세의 협상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떤 지파가 자원해서 선봉에 선다면 허용될 수 있었습니다. 민수기 32:16-27에서 요단 동편의 소유권을 부탁한 르우벤과 갓 사람들이 선봉대로 전투에 임하겠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그들이 다짐한 대로 ‘여호와 앞에서 가서’ 싸울 것을 요구합니다(20). 여기서 ‘여호와 앞에서 싸운다’는 표현은 주목할 만합니다. 이것은 바로 법궤 앞에서 선봉대로 나가 싸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민 32:20-22; 27,29,32). 따라서 현재 여리고 행진 대열 맨 앞의 무장한 자들은 요단 동편 두 지파 반의 군사들이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침묵 속에서 행진하는데, 이 침묵은 6일 동안, 일곱째 날에 여호수아가 함성을 외치라는 명령을 내릴 때까지 유지됩니다(10). 우리는 여기서 여리고 성 행진에 동원된 ‘모든 군사’(6:3; 참조. 5:6)와 ‘백성’(6:5,7,16)을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리고 성의 둘레의 규모에 맞는 군사들이 출동하여 그들이 온 백성을 대표해서 성곽을 돌았을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성을 둘러싸기 위해서는 수만 명의 병력이 동원되었을 것입니다.

 

무너진 여리고 성과 진멸 전쟁(15-21)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기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격한 입장을 상기시키며, 우리는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거룩하고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는 열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합니다.

 

15○일곱째 날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 성을 일곱 번 도니 그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 날뿐이었더라 16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17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 18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19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하니라 20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21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 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15-21)

 

일곱째 날 새벽이 되었습니다. 행동 지침대로 일곱 바퀴를 돌았습니다. 제사장들이 나팔을 아주 길게 불 때,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함성을 지르라고 지시합니다. 백성의 함성 소리와 함께 여리고 성벽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무너진 성벽을 타고 군사들이 여리고 성안으로 올라갔습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정복은 진멸 전쟁임을 주지시킵니다. 진멸은 ‘헤렘’을 옮긴 말인데, 헤렘의 기본 의미는 ‘온전히 바친 것’을 뜻합니다. 헤렘 전쟁에서는 여리고 성의 사례에서 보듯이 물건 중에 금속류는 제외하는 것이 관례였을 것입니다. 가장 수위가 높은 우상숭배를 한 성읍에 대한 헤렘 심판은 금속류도 허용되지 않습니다(신 13:12-18). 때로 가축과 재산은 전리품으로 허용된 아이 성과 같은 좀 더 수위가 낮은 사례도 발견됩니다(수 8:2). 여리고 성은 가나안 족속에 속하므로 헤렘 전쟁의 규칙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금속류는 ‘여호와의 곳간(창고)’(오차르 아도나이)으로 옮겨 하나님께 바쳤는데, 이것은 여호와께 구별된 것(코데쉬), 곧 ‘성물’로 취급되어 녹여서 성막/성전의 시설에 재활용되었을 것입니다.

헤렘으로 바쳐진 물건에 누군가 손을 댄다면, 이것은 여호와의 전쟁 수칙을 어긴 것으로 이스라엘 진영이 오히려 ‘바치는 것’, 곧 헤렘으로 바쳐진 바가 되어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성에 있는 모든 것을 헤렘으로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데, 여호수아는 정탐꾼들의 약조를 주지시키면서 라합과 그녀의 집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살려주라고 명령합니다(17).

 

구원받은 라합과 가족들(22-25)

공동체가 하나 되어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도 협력과 연대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고 도우며,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공동체의 협력은 신앙을 강화시키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22○여호수아가 그 땅을 정탐한 두 사람에게 이르되 그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라 하매 23정탐한 젊은이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의 부모와 그의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고 또 그의 친족도 다 이끌어 내어 그들을 이스라엘의 진영 밖에 두고 24무리가 그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을 불로 사르고 은금과 동철 기구는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더라 25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22-25)

 

라합 한 명의 결단으로 그와 모든 살붙이가 함께 구원을 받습니다. 이러한 집단의 연대성은 구약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분명히 그의 부모와 가족, 친족들이 자동으로 라합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들 각자는 아마도 그녀의 행위를 알고 동조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라합은 가족과 친족들에게 몰래 이 사실을 알려 자신의 집으로 소집했을 것이며, 그들이 그녀에게 동의하여 여호와를 받아들이고 이스라엘에 합류하기로 결단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그들 모두가 라합의 집에 모여 구출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인지력과 분별력이 없는 유아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더라도, 신앙과 구원은 궁극에는 언제나 각자의 결단의 문제입니다. 라합과 그의 친족들은 구출된 뒤 이스라엘 ‘진영 밖’에 임시로 거하게 했습니다(23). 이는 그들이 아직은 부정한 이방인이었기에, 당장 진영 안에 들어와 이스라엘 공동체에 합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언약 백성이 헤렘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언약 밖의 백성이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라합의 위대한 결단은 여호수아서가 쓰인 ‘오늘날까지’ 칭송되고 있습니다. 그녀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고 있다는 말을 라합이 영구적으로 정착했음을 뜻하는 표현으로 해석하면서 ‘오늘’을 그녀의 후손이 살던 시기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NEB). 그러나 이것은 라합과 그녀의 가족이 현재 생존 중인 시기를 가리키는 진술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이 ‘오늘까지’는 가나안 입성 후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인 것이 명백합니다. 놀랍게도 기생이었던 라합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합류한 뒤 살몬과 결혼하여 다윗의 가문에 들어갔으며,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여리고 성에 내려진 저주(26-27)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 결과는 심각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권위와 말씀의 신성함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따라야 합니다. 불순종은 경고로 남아야 하며, 후대에 교훈이 됩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세대를 넘어 지속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26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 27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26-27)

 

헤렘은 일시적이 아닌 영속적으로 유효합니다. 따라서 헤렘의 심판을 당한 대상을 누군가 복원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어떠한 성이라도 헤렘 심판으로 무너진 성은 영구히 폐허가 되어 재건축이 금지됩니다(신 13:16). 따라서 누군가 여리고 성을 재건한다면, 그 사람은 저주를 받아 기초를 쌓을 때(건축이 시작될 때) 맏아들을, 성문을 달 때(건축이 끝날 때) 막내아들을 잃을 것입니다(26). 이것은 무너진 성을 다시 쌓아 강력한 요새를 만들지 말라는 의미이며, 사람이 그 성에 거주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수 18:21; 삿 3:13; 삼하 10:5). 후대에 이 예언은 현실이 되어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 성벽을 재건축할 때, 그의 맏아들 아비람과 막내아들 스굽을 잃습니다(왕상 16:34).

여기서 추가로 여리고 기사에서 중요한 두 가지 쟁점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성을 일곱 바퀴 돌았던 ‘일곱째 날’에 대해 탈무드는 안식일일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일부 학자들은 이에 동의합니다. 물론 안식일에 성을 일곱 바퀴 돌고 진멸 전쟁을 수행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안식일이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의 전쟁은 특별히 신성한 전쟁이었으며 나아가 특수한 예전으로 간주되어 성곽 돌기와 전투가 허용되었는지 모릅니다. 둘째, 여리고 성 붕괴는 역사적 사실입니까? 현대인의 관점, 그리고 제국의 거대한 성들의 규모에 비해 작은 성들이지만, 여리고와 같은 성읍은 이중으로 15m에 이르는 높은 성벽을 둘러쳐 중무장한 성으로 결코 공략이 쉬운 성은 아니었습니다. 여리고의 인구를 따져보면, 아마 성안의 주민들은 삼천 명 내외로 추정되며, 다만 성밖의 둘레에도 넓은 주거지가 발견되어 여리고 성과 그 땅의 총 인구는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많은 학자들이 여호수아의 역사성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지만, 그것을 지지하는 고고학적 해석과 견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일각의 학자들은 지진으로 성벽이 크게 무너진 흔적을 발견했는데, 그 붕괴 원인이 자연적 측면에서는 강력한 지진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믿음과 인내로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며, 그분의 능력과 영광을 신뢰해야 합니다. 또한, 공동체와 협력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교훈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고, 그분의 지혜와 능력을 신뢰하는 신앙의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 생활을 더욱 깊고 풍성하게 만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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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6-01)


여리고 성을 향한 하나님의 전략

여호수아 5장 13절-6장 7절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습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전략은 다소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성을 정복하기 위해 성벽을 돌며 나팔을 불고 소리치는 것은 전쟁의 일반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방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한정된 시야를 넘어선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놀랍고 깊은지 깨닫게 합니다.

 

  • 첫 번째 전투와 더불어 가나안 땅의 본격적인 입성을 앞두고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여호수아를 대면하십니다. 앞서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여호수아에게 명령을 내리며 용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직접 그에게 출현하시는 대신 전령을 보내셨습니다. 이 장면은 여러모로 이상한 대화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군대 대장과 마주친 여호수아(13-15)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영적으로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따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신앙의 태도는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자세는 우리의 신앙을 강화합니다.

 

13○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14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15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13-15)

 

이 이야기는 갑자기 문맥을 끊고 끼어든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비평학자들은 갑작스런 지리적 변화(길갈에서 여리고로)와 새로운 시간의 지시, 여호수아만 등장하는 장면과 같은 요소들로 인해 다른 자료와 구별되는 독립적 자료라고 말합니다. 또한 양자간의 대화가 마치 불완전하게 끝나는 듯해 뭔가 어색합니다. 여호수아는 경외하는 마음으로 전달되는 말씀을 들으려 하는데(14), 군대 장관은 단지 그 장소가 거룩한 곳이니 신발을 벗으라는 명령만 내리고 대화가 종결됩니다. 그로 인해 어떤 사람들은 6:1이 삽입구이며, 이 단락이 6:2-7의 여호와의 지시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단락은 그 자체로 적절한 위치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여호와를 만난 장면과 병행을 이루며(출 3장), 두 만남이 몇 가지 비슷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비교됩니다. 첫째, 출애굽기 3장에서는 ‘여호와의 사자’가 모세에게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나는가 하면(출 3:2),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 떨기나무 가운데 임재하여 모세를 부릅니다(출 3:4).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현현과 ‘여호와의 사자’의 출현 사이에 경계선 뚜렷하지 않은 경우가 흔합니다(창 16:7-11; 18장;22:11,15; 48:16; 3:2; 14:19; 32:34; 22:31-35). ‘여호와의 사자’는 전적으로 신뢰해야 할 하나님 임재의 대행자이면서 동시에 여호와로 행세합니다(창 18장). 출애굽기 3장과 달리 여호수아 6장에서는 여호와의 사자가 아닌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 앞에 나타나며, ‘여호와’라는 말도 직접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여호와의 군대 장관’은 여호와를 대신하며 여호와와 동등한 권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둘째, 두 장면 모두에서 신현이 발생한 곳을 ‘네가 선곳은 거룩하니라’로 칭합니다(출 3:5; 수 5:15). 개역개정은 두 표현 사이의 번역이 약간 다르나 히브리어 원문은 정확히 같습니다. 이것은 두 장면에서 출현한 신적 존재가 본질상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은 자동적으로 거룩한 장소가 됩니다. 셋째, 두 장면 모두에서 신적 존재가 인간 존재에게 ‘신발을 벗으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것은 당시 문화권에서 권위자에 대한 예법이기도 합니다.

칼을 빼들고 서 있는 ‘여호와의 사자’는 보통 경고의 목적으로 등장합니다(발람 앞에 그의 길을 막은 칼 든 사자가 나타나는데, 그는 또한 ‘여호와’이기도 하다[민 22:31-35];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할 때 칼을 든 사자가 예루살렘 하늘을 향해 칼을 뻗는다[대상 21:16]). 군대 장관의 칼은 여호수아에 대한 경고의 의미입니다. 그 칼은 가나안 족속을 향할 수도, 반대로 이스라엘을 향할 수도 있습니다. 순종을 결심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게 그 칼은 천군만마와 같은 지원의 칼입니다. 여호수아는 자신 앞에 칼을 빼들고 나타난 신적 존재에게 그가 누구 편인지를 묻습니다. 여호수아는 아직 그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밝힙니다.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다.’ 이것은 마치 어떤 위엄 있는 장군이 지원병을 이끌고 도착했음을 통보하는 뉘앙스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나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에게 임재할 때는 반드시 전할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체를 파악한 여호수아는 즉각 여호와의 사자 앞에서 엎드려 말씀을 듣겠다는 태도를 취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갑자기 대화가 끝나면서 불완전하게 이 장면이 막을 내립니다. 정작 여호와의 사자가 무슨 말을 전달하려 했는지, 그가 왜 여호수아 앞에 나타났는지 본문은 공백으로 남겨둡니다. 아마 이 장면이 6장의 여리고 전쟁 직전에 끼어든 이유는 독자들로 하여금 여리고 전쟁에서 여호와가 직접 개입하고 있음을 간파하도록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여호와는 ‘전쟁의 주’이십니다. 여리고 전쟁, 나아가 가나안 정복 전쟁의 총사령관은 결국 여호수아가 아닌 여호와이십니다. 따라서 더 이상의 대화는 군더더기일 수 있습니다. 독자들은 이 장면만으로도 곧 시작될 여리고 전쟁과 이후의 가나안 정복을 진두지휘할 분이 여호와이심을 깨닫습니다.

 

여리고성 함락을 위한 기이한 명령(6:1-5)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함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할 때, 기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항상 완전하고 선하십니다.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의 기적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신뢰하며 살아야 합니다.

 

1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2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3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1-5)

 

장면은 여리고 전쟁의 무대로 바뀝니다. 여리고의 성문은 철저히 봉쇄되어 철통같은 수비로 이스라엘의 공격에 대비 중입니다. 여리고가 굳게 닫혔다는 의미는 이중벽을 갖추고 있던 여리고 성벽의 특징을 반영한 묘사입니다. 여리고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정탐꾼이 첩보활동을 하고 도망갔기 때문에 전쟁이 임박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명성을 듣고 넋이 나간 상태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넘겼다’는 완료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여호수아에게 이미 여리고는 함락된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여리고 공략을 위한 전투 수칙을 알려주십니다.

(1) 모든 군사가 매일 성 주위를 한 바퀴 도는데, 육일 동안 반복합니다. (2) 일곱 명의 제사장이 양각 나팔을 불며 언약궤 앞에서 행진합니다(8). (3) 선봉대가 일곱 명의 제사장들보다 앞에, 즉 맨 선두에 섭니다(7,9). (4) 나머지 군사들은 침묵하면서 언약궤 뒤를 따릅니다. (5) 일곱째 날에는 성을 일곱 바퀴 돈 뒤 양각나팔을 길게 붑니다. (6) 이때 군사들 모두가 큰 소리를 외칩니다. (7) 이때 성벽이 무너지면 군사들이 올라가서 점령합니다.

이것은 전투 수칙으로 보기에는 매우 기이합니다. 이런 군사적 행동은 전쟁터에서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군사적 행진은 여리고 성이 통상적인 군사적 방식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정복된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전쟁이며, 백성 편에서는 믿음의 전쟁입니다. 이것이 앞으로의 모든 가나안 전쟁의 기본 원리가 될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은 이 전쟁을 통해 이 교훈을 깊이 새겨두어야 합니다. 실제로 여리고 전투는 추후에 다른 가나안 남부 지역 성들을 정복할 때 자주 모범으로 등장합니다(수 8:2; 10:1,28,30). 행동 지침에 따르면, 선봉대가 맨 앞에 서고 그 뒤에 일곱 명의 제사장이 ‘양각 나팔’을 불면서 대열을 이끕니다. 이 ‘양각 나팔’의 히브리어는 여기서만 사용되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모든 군사들이 매일 한 바퀴씩 성을 도는데,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아야 합니다. 여기서 숫자 ‘7’이 거듭 반복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7명의 제사장과 7일째의 7바퀴 행진. 익히 알려졌듯이, 성경에서 ‘7’은 완전수로 흔히 일의 성취를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숫자 ‘7’들의 배열은 여리고 성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완전히 정복될 것을 암시합니다.

원래 일반 행진에서는 법궤가 가장 선두에 서지만(민 10:33-36), 전투 행렬에서는 법궤는 선봉대의 뒤로 빠집니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선봉대가 맨 앞에 서 있으며, 양각 나팔을 부는 일곱 명의 제사장이 그 뒤를 따릅니다(7,9). 역시 제사장들이 어깨에 멘 법궤가 나팔 부는 제사장 뒤를 따라가고 나머지 군사들은 법궤 뒤에서 행진합니다. 참고로 구약의 여러 곳에서 확인되듯이 법궤가 모든 전쟁터에 출정했던 것은 아닙니다(7장의 아이 성 전투; 삼상 4장; 삿 20:27 등).

 

여호수아의 명령하달(6:6-7)

세상 지도자는 주로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며 권력을 행사합니다. 반면, 영적인 지도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먼저 순종하며, 신앙과 도덕적 가치에 따라 공동체를 이끕니다. 세상 지도자는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하지만, 영적인 지도자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강조합니다. 세상 지도자는 물질적 성과를 중시하지만, 영적인 지도자는 영적 성장과 공동체의 신앙 강화를 우선시합니다. 영적인 지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행동하며, 본이 되어야 합니다.

 

6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가라 하고 7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그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갈지니라 하니라(6-7)

 

여호수아는 여호와로부터 받은 여리고 전투 수칙을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 하달합니다. 제사장들의 임무가 둘로 나뉘어 먼저 주어집니다. 일곱 명의 제사장이 선봉대와 함께 선두에서 나팔을 불며 행진합니다. 그 뒤를 제사장들이 운반하는 법궤가 따릅니다. 군사들의 행진 대열도 둘로 나뉩니다. 먼저 중무장을 한 선봉대가 나팔수 제사장들보다 앞장서 맨 선두에 섭니다. 다음 본문에서 보듯이 이 선봉대는 동편의 두 지파 반일 것입니다. 나머지 군사들은 후방 부대로 법궤 뒤에서 법궤를 따라갑니다. 이런 대열은 전쟁터에서 총사령관이 안전하게 선봉대의 뒤에 서는 일반적인 군사 배치와 비슷합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신뢰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군대 대장을 만나고,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기 위한 기이한 명령을 받습니다. 이는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지혜를 신뢰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고, 그분의 계획을 따를 때 기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중요한 일을 앞두고 영적으로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신앙의 자세는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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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5-01)


약속의 땅을 향한 첫걸음

여호수아 5장 1-12절


 

우리의 믿음은 단지 개인적인 경험에 그치지 않습니다. 믿음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전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강화합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 1절은 이야기의 흐름과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요단강 도하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으로 간주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요단강의 기적에 대한 소문이 서편의 가나안 땅 전역에 퍼졌습니다. 긴장이 흐르며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긴박한 상황에서 할례 의식을 단행하고 며칠 후 가나안 땅에서 최초의 유월절을 지킵니다.

 

가나안 족속들에게 알려진 요단강 기적(1)

하나님의 역사는 그 자체로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알리는 중요한 기회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적과 역사를 경험할 때, 우리의 믿음이 강화됩니다. 또한,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1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1)

 

본문은 요단강 이야기의 결론으로 묶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요단 도하 기적에 대한 소식을 들은 가나안 부족들의 반응입니다. 두 종족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이 가나안의 대표 종족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오경의 관례입니다. 아모리 종족은 많은 경우 가나안 종족과 번갈아 가며 가나안 부족들의 목록에서 먼저 등장하고(창 15;21; 출 13:5; 23:23; 33:2;34:11) 가끔은 가나안 족속 전체가 아모리 족속으로 지칭되기도 할 만큼 강력한 부족이었습니다(창 15:16;48:22 신 1:19,20,27). 아모리 족속은 세력이 강했으며, 오래전부터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이란 표현에서도 아모리 종족이 가나안 내륙의 대표 종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모리 족속은 요단 동편을 차지하여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이 분할 통치를 하고 있었고, 서편에서도 여러 곳에서 세력을 구축하여 위세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해변에는 남쪽의 블레셋 족속과 북쪽의 페니키아가(두로와 시돈)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70인경(LXX)은 해변의 가나안 왕들을 페니키아 왕들로 대체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해변의’(알 하얌)이라는 말은 ‘바다에서 가까운 곳’, 즉 해변에 인접한 내륙 지역을 말할 것입니다. 그 해변 쪽 가나안 사람의 왕들은 일반적 의미의 가나안 여러 족속의 왕들을 가리킬 것이며, 아모리 사람의 왕들도 마찬가지로 여러 부족의 총칭일 것입니다. 내륙과 해안의 가나안 땅 전역이 요단강 사건에 대해 전해 듣고 술렁거린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녹아내리고 정신을 잃었다’는 것은 그들의 혼(루아흐, 정신)이 나가 혼비백산했다는 뜻입니다.

 

길갈에서 제2세대의 할례(2-9)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야 할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는 것은 우리 신앙 생활에서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을 인도하는 나침반과도 같으며, 이를 따를 때 우리는 올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는 우리의 삶을 향한 완벽한 계획을 담고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이끄시는지 경험하게 됩니다.

 

2○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3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4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죽었는데 5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다만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6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음성을 청종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이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 십 년 동안을 광야에서 헤매었더니 7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8또 그 모든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머물며 낫기를 기다릴 때에 9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2-9)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백성 남자들을 할례 받게 하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들은 할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을 새롭게 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갈 준비를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에 순종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는 중요한 순간을 나타냅니다.

 

(1) 할례를 행하라는 여호와의 명령(2-3)

 

길갈에서 ‘할례의식’을 거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재할례가 아니라 할례를 받지 못한 제2세대의 할례입니다(5). 3절은 이 할례식을 행한 장소가 ‘할례 산’이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산’은 사실 ‘언덕’(기아)을 가리키므로 ‘할례의 언덕’이 더 나은 번역입니다. 이 지명은 길갈의 어떤 야산에서 실행된 이스라엘의 할례식을 기념하기 위해 붙인 이름인 것으로 보입니다. 할례는 아브라함 언약의 징표였습니다(창 17:9-14).

 

(2) 제2세대가 할례를 받지 못한 이유(4-7)

 

광야는 남자아이들의 할례를 시행하기가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할례를 받은 후 일주일 정도의 회복 기간이 필요했을 것인데, 광야의 삶은 언제 하나님의 구름 기둥이 움직여 이동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의 연속이었습니다. 따라서 새로 태어난 남자아이들의 할례는 안정된 정착이 완료될 때까지 보류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유보되었던 제2세대의 할례가 이제 길갈에서 시행됩니다. 어떤 사람은 광야에서의 거듭된 언약 파기와 불순종, 반역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할례를 허용하지 않았다고 보지만, 그것보다는 5절과 7절의 진술을 볼 때(‘길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다’;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못하였다’), 그들의 무할례는 오히려 예고 없이 이동해야 하는 광야의 특수한 상황 때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어쨌든 조상들인 제1세대는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약속의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기는커녕 보지도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군인들(‘전쟁의 남자들’), 곧 장정들이 광야에서 40년간 유랑하다가 결국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제2세대는 광야 여정이라는 사정 때문에 할례를 받지 못하여 무할례자로 요단강 건너 길갈에 이를 때까지 유랑 생활을 해야만 했는데, 이제 그들이 드디어 할례를 받을 때가 되었습니다.

 

(3) 할례의 완수와 지명 길갈의 기원(8-9)

 

할례식이 끝난 뒤 모든 백성은 할례 부위가 낫기를 기다렸습니다. 포경 수술의 회복 기간은 통상적으로 일주일이므로, 이때의 할례도 회복을 위해 비슷한 기간이 요구되었을 것입니다. 길갈에서 할례가 필요했던 이유는 세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유월절 규정에 따라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는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출 12:48). 1세대는 모두 율법을 따라 생후 8일 째에 할례를 받았던 세대이며, 그들은 출애굽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 최초의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2세대는 아직 할례를 받지 않았기에 유월절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의 첫 번째 유월절을 앞두고 할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두 번째 이유로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위해 그들은 언약 백성의 표지인 할례를 받고 새로운 백성으로 출발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할례와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애굽의 수치가 떠나게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고 할례를 받음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완전히 애굽의 속박과 비참한 삶과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그곳 지명을 ‘구르기’, ‘굴러감’을 뜻하는 ‘길갈’이라 불렀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가나안 땅에서의 첫 번째 거룩한 전쟁을 앞두고 몸과 마음을 깨끗케 하는 성결한 전쟁 준비를 하기 위함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국가 간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었고, 군인들은 거룩한 종교심을 품고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한 전쟁 중에 군인들의 성관계를 금지시켰고(삼상 21:5-6), 진영 내에서는 배변을 못하게 했으며, 몽정을 했을 경우도 진영 밖으로 나가 자신을 정결케 해야 했습니다(신 23:9-14).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한 법궤의 권위와 지휘 아래 부정결을 멀리하고 깨끗한 심신으로 전쟁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여리고 전쟁을 앞둔 그들의 할례의 시행은 이러한 준비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쟁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할례의 시행은 사실상 군사 전략적 측면에서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회복 기간에 적들이 기습한다면 순식간에 무기력하게 쓰러질 것입니다. 그러나 할례는 하나님의 명령이었기에 자신들의 상식과 어긋난다 해도 순종해야만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할례를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반드시 보호해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직전에 여호와께서는 요단강의 기적을 행하셔서 온 가나안 족속의 마음이 녹아내리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중단된 만나와 그 땅에서 첫 번째 유월절(10-12)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음을 상기시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의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성취됩니다.

 

10○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11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12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10-12)

 

며칠 후 약속의 땅에서 첫 번째 유월절을 맞았습니다. 음력 1월 14일 저녁부터 시작되는 유월절에는 유월절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르고 그 고기를 구워서 무교병과 쓴 나물을 곁들여서 먹었습니다(출 12장). 1월 15일부터 7일간은 무교절 기간으로 누룩이 들어간 유교병은 일절 먹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었으며’라는 진술에 이어서 ‘다음날 만나가 그쳤다’는 진술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유월절 이튿날’은 무교절 첫날을 의미합니다. 그날 그 땅의 소산물로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는데, 볶은 곡식(칼루이)은 보리입니다. 이 기간에 수확되는 곡식은 보리입니다. 유월절-무교절 기간의 첫 번째 안식일 다음 날이 보리의 초실절인데(레23:10-15), 정통 유대교에서는 그날이 음력 1월 16일입니다. 이날 이스라엘 백성은 첫 보리 이삭을 수확한 뒤 그것을 볶아 가루로 만들어 하나님께 소제물로 바쳤습니다(레 2:14; 23:10-15). 현재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에서 첫 번째 음식을 먹었던 날은 유월절(1월 14일) 다음날인 1월 15일로 이날은 무교절 기간(1월 15-21일)의 첫날입니다. 그 직후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주신 하늘 음식인 만나가 그쳤습니다. 그들이 유월절 이후 보리의 초실절을 포함하여 무교절을 온전히 지켰다고 보기는 어려운 듯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분의 약속이 반드시 성취됨을 배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 도착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고, 유월절을 지키며 감사함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의 계획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적과 인도하심은 우리의 삶에 언제나 함께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과 감사는 우리의 신앙을 굳건하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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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4-02)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기념물

여호수아 4장 15-24절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순종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그분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순종은 신앙의 중요한 요소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따를 때,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가십니다. 따라서 순종은 우리 신앙 생활의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무사히 요단강을 건너자 하나님께서는 범람한 강을 틀어막은 자신의 기적을 거두어들이십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지시하여 제사장들이 요단강을 벗어나게 하십니다. 여호수아가 명령하자 제사장들은 법궤를 메고 요단강으로부터 뭍으로 올라왔습니다. 제사장들의 발이 육지에 닿는 순간 요단강이 다시 세차게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종료된 것입니다.

 

다시 흐르는 요단강(15-18)

기념석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경외심을 표현하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과거의 은혜를 기억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태도를 갖게 됩니다. 감사의 마음은 신앙 생활에서 중요한 요소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합니다. 기념물은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은혜를 나누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러한 감사의 표현은 공동체의 결속력을 높이고, 서로를 격려하는 데 기여합니다.

 

15○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6증거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요단에서 올라오게 하라 하신지라 17여호수아가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요단에서 올라오라 하매 18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에서 나오며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는 동시에 요단 물이 본 곳으로 도로 흘러서 전과 같이 언덕에 넘쳤더라(15-18)

 

이스라엘 백성의 도하가 완료되자 요단강은 놀랍게도 다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홍해가 갈라지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육지처럼 변한 바닷길 건너기를 완료한 뒤, 홍해가 뒤쫓아 오던 애굽 군사들을 모두 수장하면서 다시 제자리로 원상 복귀되었던 기적을 연상시킵니다. 오늘날과 달리 상류에 댐이 없던 시대에 요단강은 홍수기에 크게 범람하곤 했습니다. 당시 불어난 강을 건너는 수단으로 튼튼한 배를 이용했을 것으로 추론되는데, 그 외에 앗수르 문헌에는 전투 중에 각 사람이 술을 담는 가죽 부대에 공기를 채워 그것을 튜브처럼 이용해 강을 건넜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고대에는 요단강이 크게 범람하는 우기에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대규모로 그 강을 건널 만한 기술적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이때는 산사태나 신적인 기적만이 요단강 도하가 가능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범람하던 요단강 물이 끊겨 강바닥이 드러나고 그들이 강을 건넌 것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이토록 넓은 강폭과 깊은 수심의 요단강이 멈춘 기적은 홍해가 갈라진 기적에 못지않은 놀라운 기적이었으며, 게다가 홍해가 그랬던 것처럼 강바닥은 육지처럼 마른 땅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특이한 자연 현상으로 보고 폭우로 인해 거대한 산사태가 발생하면서 범람하던 요단강이 가끔 일시적으로 끊기곤 했을 것으로 추론합니다. 그러한 해석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그 강을 건너려던 바로 그 시점에 하나님의 섭리로 엄청난 산사태가 일어나 강물이 끊긴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도 그 지역에서 부는 강력한 동풍이 특수하게 불면서 발생한 기적일 수 있습니다(출 14:21). 다만 이것들은 자연 현상이 사용된 기적들이긴 하지만, 엄청난 양의 물이 터져 나오고 바다 밑바닥이 마르는 등, 그 과정에서 단순히 자연 현상으로 설명될 수 없는 특이한 현상들이 동반되었다는 점에서 과학적으로 설명이 불가한 놀라운 기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길갈에 세운 기념석(19-21)

기념석은 다음 세대에게 하나님의 역사하신 일을 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여호수아는 이 기념물의 의미를 자녀들에게 설명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를 듣고, 그들의 신앙이 더욱 깊어지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기념석은 단순한 돌이 아니라,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역사와 신앙의 유산을 전하는 매개체가 됩니다. 자녀들이 기념석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과 함께하셨는지를 배우게 되고, 이는 그들의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는 데 기여합니다.

 

19○첫째 달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 여리고 동쪽 경계 길갈에 진 치매 20여호수아가 요단에서 가져온 그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21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묻기를 이 돌들은 무슨 뜻이니이까 하거든(19-21)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도하한 날짜는 1월 10일로 적시되어 있습니다(19). 정확히는 출애굽 후 제41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제1세대는 모세를 지도자로 삼아 광야 40년의 생활과 더불어 모두 광야에서 죽었으며, 이제 여호수아와 더불어 제2세대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요단강 도하를 실행한 날이 1월 10일이라면, 여호수아서 1장에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요단강 도하와 가나안을 향한 행진을 명령한 날은 새로운 세대의 막이 열린 제41년 1월 1일일 가능성이 큽니다. 요단강을 건넌 당일인 1월 10일(4:3), 그들은 여리고 동쪽에 위치한 길갈에 진영을 구축했습니다. 길갈은 고고학적 발굴에 따라 몇 군데 후보지가 거론되어 왔지만,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리고 북동쪽 2km 정도의 지점인 ‘키르베트 엘메프지르(Kirbet el-Mefjir)’라고 말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북쪽(아마도 세겜과 가까운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길갈을 거점으로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공략한 점과 요단 도하 직후에 도착하여 진영을 구축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전자의 가능성이 더 커 보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강을 건넌 직후 여리고 인근 동쪽(정확히는 북동쪽)에 위치한 길갈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며칠이 지나면 이스라엘은 1월 14일의 유월절, 곧 가나안 땅에서의 최초의 유월절을 맞습니다(5장). 요단강을 건넌 날이자 길갈에 정박한 당일인 1월 10일은 유월절 양을 골라서 준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출 12:3). 이스라엘 백성은 길갈에서 유월절을 보낸 뒤 가나안 입성을 위한 첫 번째 전투를 시작할 것입니다. 이러한 타이밍은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으로 역사적-신학적 목적을 내포합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할 때 1월 14일 유월절을 보내고(출 12-13장), 다음날 1월 15일에 즉시 애굽을 떠났습니다(민 33:3). 이때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규례를 알려주셨는데, 백성들은 1월 10일에 유월절 양/염소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들은 애굽 땅에서 최초의 유월절을 보내고 그 땅을 빠져나왔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이제 40년이 지나 약속의 땅에서 최초의 유월절을 보내고 그 땅을 정복할 것입니다. 정복은 출애굽과 마찬가지로 유월절이 기념된 뒤에 실행될 것이며, 이 점에서 ‘정복은 출애굽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길갈에 도착해서 진을 구축한 후, 여호수아는 요단 강에서 골라온 열두 개의 돌을 거기에 세웁니다. 그 돌들의 용도가 여기서 분명해집니다. 그 돌들은 하나님의 기적으로 요단강을 건넜다는 것을 증거하는 ‘기념석’입니다. 여기서 이 열두 개의 돌은 요단강 한복판에 세운 열두 개의 돌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많은 비평학자들은 서로 상이한 열두 돌에 대한 전승이 뒤섞인 결과라고 설명합니다. 반면에 어떤 학자들은 열두 개의 돌이 요단강에 잠시 세워졌다가 나중에 동일한 돌들이 길갈로 옮겨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명백히 서로 다른 종류의 열두 개의 돌들이 각각 요단강과 길갈에 세워졌음을 명확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길갈 기념석의 목적(22-24)

기념물은 공동체 내에서 신앙의 연대를 강화하는 데 기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기적을 함께 경험한 공동체로서, 기념물을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념물은 공동체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은혜를 나누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는 신앙 공동체의 결속력을 높이고, 서로를 격려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22너희는 너희의 자손들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23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서 마르게 하사 너희를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24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22-24)

 

장차 자녀들이 길갈에 세워진 돌들의 의미를 물을 때, 아버지들은 바로 이 역사적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아버지들은 그들이 이 약속의 땅에 들어와 그 땅을 점유한 것은 처음부터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로 인한 것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고대 근동의 전통과 관례에서 종교적 의미를 부여한 기념석들이 세워진 곳은 모두 국가와 민족의 제의적 중심지로 여겼습니다. 이 돌들에는 그들의 신이 임재해 있으며, 따라서 그 돌은 숭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 그 돌들은 전혀 우상과 무관하게 오로지 증거석과 기념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신명기는 반복해서 주상(주로 석상)과 목상, 조각된 신상을 우상으로 섬기지 말라고 경고합니다(신 7:5;12:3;16:21-22;27:15). 특히 돌기둥인 주상(마체바)은 모두 제의적 용도로 만들어져 세워졌으며 때로 표면에 우상들을 묘사하는 다양한 조각이 새겨져 그 자체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설사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증거하는 기념석으로 세워진 돌들이라 할지라도 우상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언제나 기념석의 용도와 관련해서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습니다. 기념석이 세워진 이후로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의 중요한 성지가 되어 대대로 여호와 신앙을 위한 중요한 역사적 순례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열두 개의 돌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하나씩 골라서 세운 돌입니다. 여기에는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돌들은 이스라엘 전체가 함께 간직해야 할 기억을 위한 공동의 유산입니다. 이 돌들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언제까지 보존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모든 이스라엘의 부모들은 자녀들을 데리고 길갈을 방문할 때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그들에게 가르쳐야 했습니다. 1세대 조상들이 애굽을 탈출할 때,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마르게 하셔서 그들이 건너가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2세대 조상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 요단강을 멈추게 하시고 마르게 하셔서 그들이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기적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온 땅의 주인이고 가장 강한 분임을 알게 하셨으며 가나안 온 땅이 그분의 명성을 듣고 마음이 녹아내리게 하셨습니다. 이 돌들을 볼 때마다 이스라엘은 대대로 그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함을 상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듯이, 우리도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기념의 필요성을 통해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고,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우리는 공동체의 힘을 통해 서로를 격려하며 신앙을 다져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교훈들을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들어 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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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4-01)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념하며

여호수아 4장 1-14절


시골 마을을 방문하면 마을 입구에 ‘효자비’나 ‘열녀비’가 종종 있습니다. 이 비를 세운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당대의 훌륭한 효자가 자기 마을에서 나왔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둘째, 후대 사람들에게 효자를 본받아 충효사상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비석은 마을의 자부심과 교육적 가치를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강 도하를 완료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여 각 지파에서 열두 명의 사람을 택하여 각자 하나씩 열두 개의 돌을 취하라 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해 그들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십니다. 그들은 요단강에서 각자 돌 하나씩을 취해 총 열두 개의 돌을 그날 밤 유숙할 곳인 길갈로 옮겨야 합니다.

 

요단강에서 취한 기념석(1-9)

순종은 단지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믿고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러한 순종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목도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을 더욱 깊고 강하게 만들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며, 그분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1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가기를 마치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백성의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사람을 택하고 3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 곳에서 돌 열둘을 택하여 그것을 가져다가 오늘밤 너희가 유숙할 그 곳에 두게 하라 하시니라 4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준비한 그 열두 사람을 불러 5그들에게 이르되 요단 가운데로 들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궤 앞으로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대로 각기 돌 한 개씩 가져다가 어깨에 메라 6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물어 이르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7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원히 기념이 되리라 하라 하니라 8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수아가 명령한 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의 수를 따라 요단 가운데에서 돌 열둘을 택하여 자기들이 유숙할 곳으로 가져다가 거기에 두었더라 9여호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둘을 세웠더니 오늘까지 거기에 있더라(1-9)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넌 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강에서 12개의 돌을 가져와 기념비를 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돌들은 각 지파에서 하나씩 가져와서, 후대에 요단강을 건너는 기적을 기념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하게 합니다. 이러한 기념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신실하심을 되새기는 역할을 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기적을 잊지 않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1) 요단강에서 기념석을 취하라는 명령(1-7)

 

앞서 미리 뽑아놓은(3:12) 열두 사람의 할 일이 지시됩니다. 각자 제사장들이 서 있는 요단강 한복판의 그 자리에서 열두 개의 돌을 골라 와야 합니다. 그 돌들을 그날 밤 그들이 진영을 구축할 장소로 옮겨놔야 합니다. 4:19에 의하면, 그곳은 인근에 위치한 길갈입니다. 그들이 각자 그 돌을 어깨에 메고 옮길 정도였다면, 아주 크고 무거운 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 돌들의 용도를 알려줍니다. 그것들은 장차 대대의 후손들에게 표징으로 삼기 위해 세울 돌들입니다(6: 4:20 이하). ‘표징’(오트)은 앞서 정탐꾼들이 라합에게 건넨 약조의 표시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요단강에서 취한 열두 개의 돌들은 요단강의 멈추어 백성이 마른 땅을 지났다는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한 돌입니다. 이 돌들이 표징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은 후손 대대로 자신들이 가나안 입성 과정에서 어떻게 요단강을 건넜는지를 기억할 것입니다(6-7).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7월 10일 동쪽 길갈에 진을 친 뒤 여호수아는 그곳에 열두 개의 돌을 기념석으로 세웠습니다(4:20 이하). 그들은 약속의 땅에 안착하기 위해 홍수로 범람하던 요단강을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넜습니다. 이것은 다시 한 번 가나안 땅은 사람의 노력과 군사적 행동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물로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여리고 성점령 과정에서도 다시 분명히 드러납니다. 사람 편에서 필요한 것은 믿음에 따른 절대적 순종뿐이며, 견고한 여리고도 통상적인 군사 작전이 아닌 비상식적인 방식으로 점령됩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세운 공로는 전혀 없습니다. 이 점에서 분명히 가나안 입성원리는 인간의 구원 원리와 상응하는 점이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구원은 스스로의 공로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다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땅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이 열두 개의 돌은 대를 이어 그것을 항상 잊지 않게 만드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으로 바다가 갈라져 그들은 애굽을 탈출했으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물이 멈추어 드디어 가나안에 입성했습니다. 종종 어떤 사람들은 ‘이중 구원론’의 근거로 이 장면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출애굽은 구원의 완성이 아니며 광야 40년의 훈련이 필요하고, 궁극에는 가나안 입성을 해야 구원이 완성된다는 논지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에게 현재의 삶은 광야 생활과 같으니 아직 구원이 보장된 삶이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중 구원론은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으며, 필연적으로 행위 구원론과 율법 종교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2) 요단강에 세워진 별개의 기념석(8-9)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의 명령대로 요단강의 제사장들이 선 자리에서 열두 개의 돌을 고른 뒤 그날 밤 진을 구축할 장소로 옮겨왔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이 돌들 외에 또 다른 열두 개의 돌을 표징으로 세웁니다(9).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서 있던 자리에서 열두 개의 돌을 취해 갔는데, 이제는 바로 그 자리에 여호수아가 별개의 열두 개의 돌을 세웁니다. 여기서 두벌의 열두 개의 돌이 등장하므로 이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4:15-24에서 살펴볼 것인데, 결론만 말하자면, 이 새로운 열두 개의 돌들은 분명히 거기서 취해서 옮겨간 열두 개의 돌과 별개의 기념석들입니다. 열두 개의 돌이 없어진 자리를 열두 개의 다른 돌이 채운 것입니다. 그들은 기적이 일어난 바로 그 현장의 한복판, 즉 제사장들이 제자리에 서자 요단 강물의 흐름이 멈췄던 바로 그 장소에 그 돌들을 기념으로 세웠습니다. 이 돌들은 여호수아 이후의 어느 시기까지(‘오늘까지’) 우기 때에는 물에 잠겼다가 건기 때에 드러나곤 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은 여호수아로부터 먼 후일로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 그 사이 홍수가 반복되고 특별히 큰 물살을 동반하는 큰 홍수가 발생할 때는 세워놓은 돌들이 휩쓸려 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요단강 도하 이야기의 요약(10-14)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능력을 신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요단강을 건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안전하게 보호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따를 때, 그분의 보호 아래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고 그분의 능력을 신뢰해야 합니다.

 

10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사 백성에게 말하게 하신 일 곧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명령한 일이 다 마치기까지 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에 서 있고 백성은 속히 건넜으며 11모든 백성이 건너기를 마친 후에 여호와의 궤와 제사장들이 백성의 목전에서 건넜으며 12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는 모세가 그들에게 이른 것 같이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들보다 앞서 건너갔으니 13무장한 사만 명 가량이 여호와 앞에서 건너가 싸우려고 여리고 평지에 이르니라 14그 날에 여호와께서 모든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여호수아를 크게 하시매 그가 생존한 날 동안에 백성이 그를 두려워하기를 모세를 두려워하던 것 같이 하였더라(10-14)

 

이 단락은 현재의 극적인 요단강 도하 사건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선 요단강 도하와 가나안 진격 명령이 내려진 순서가 간결하게 정리됩니다. 모세는 죽음 직전에 여호수아에게 이제 백성을 이끌고 그 땅에 들어가라고 명령합니다(신 31:7-8).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께 지시를 받고 내린 명령입니다. 모세의 명령은 곧 언제나 그를 통해 말씀을 전하셨던 여호와의 명령이었습니다. 여기서 요단강 도하의 진행 과정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묘사됩니다. 법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강 한복판에서 있고, 강물이 멈추고 마른 땅이 드러나자 모든 백성이 속히 강을 건넜습니다(10). 백성이 강을 모두 건넌 뒤,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고 있던 법궤를 들고 강을 빠져나왔습니다. ‘여호와의 궤와 제사장들이 백성의 목전에서 건넜다’는 말은 먼저 건너간 백성이 뒤따라 강을 빠져나오는 법궤와 그것을 멘 제사장들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공동번역과 타나크 번역(TNK)은 법궤와 제사장들이 ‘백성 앞으로 나갔다(advanced to the head of the people)’고 번역하는데, 이것은 행진 시에는 법궤가 언제나 선두에서야 하기에, 요단강에서 빠져나온 법궤와 제사장들이 다시 백성들 맨 앞으로 이동했음을 반영한 번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선두에는 백성과 거리를 두고 법궤와 그것을 멘 제사장들이 앞장서고, 백성의 대열에서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가 중무장을 하고서 선두에 섰습니다(12). 이 두 지파 반은 요단강을 건널 때부터 모든 지파의 선봉대로 앞장선 것으로 보입니다. 두 지파 반의 무장 병력은 총 사만명이었으며, 그들이 선두에 서서 법궤의 이동 경로를 따라가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 평지에 도착했습니다.

민수기 32장에서 두 지파 반은 요단 동편의 광활한 목초지인 길르앗 땅을 자신들에게 할당해줄 것을 부탁합니다. 대신 그들은 좋은 목초지를 먼저 배당받은 만큼 자신들이 요단 서편 땅을 점령하는 데 가장 적극적으로 앞장서겠다고 다짐합니다. ‘우리가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그곳으로 인도하기까지 그들의 앞에서 가겠소’(민 32:17). 이 말의 의미는 그들이 전쟁에서 공격의 선봉대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장하고’에는 단순한 무장이 아니라 선발대로 뽑혔다는 의미를 표현하는 중간태 니팔형 ‘네할레츠’가 사용되며, 뒤에 신속함을 가리키는 ‘후쉼’이란 단어가 붙어 있습니다. 이것은 신속한 무장을 지시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마치 특공대와 같이 특수정예 부대로 선발되어 신속한 무장을 갖추고 전쟁터에서 앞장서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 정복이 완료되고 그 땅이 각 지파들에게 분배될 때까지 요단 동편의 길르앗, 곧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민 32:18). 동편 지파의 이런 제안은 상당한 희생을 각오함으로써 자신들이 받을 땅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다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사전 약속대로 지금 두 지파 반은 요단강 도하에서부터 백성의 대열의 선두에서 행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숫자는 총 사만 명으로 집계되는데, 이는 실제 전투가 가능한 현역 전투 병력으로 보아야 합니다.

요단강 도하의 기적과 더불어 여호수아의 지도권이 확고해집니다. 앞선 세대는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하시어 그의 지팡이의 권능으로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고,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카리스마적 권위 앞에 두려워 떨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앞서 3:7에서 예고하신 대로, 2세대 백성 앞에서 여호수아의 행진 명령과 더불어 요단강이 갈라지게 함으로써 그의 권위를 크게 높여주셨습니다. 온 백성이 여호와를 힘입은 여호수아의 행진 명령과 더불어 요단강이 멈추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여호수아 앞에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능력을 신뢰하고, 믿음과 순종으로 나아가며,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그분의 임재를 삶 속에서 느껴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원칙들을 우리의 일상 속에서 실천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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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3-01)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라

여호수아 3장 1-17절


 

대부분의 일들에는 중요성만큼 위험부담이 따릅니다. 위험부담이 없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위험부담이 큰 일을 할 때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중요한 일에는 쉽게 나서지 않습니다. 하지만 선뜻 나서서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은 큰 인물로 인정받습니다. 중요한 일을 감당하는 데는 용기와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 무사히 귀환한 두 정탐꾼의 보고를 받은 여호수아는 아마도 다음날 아침에 백성을 이끌고 싯딤을 떠나 요단강 강변으로 이동해 거기에 진을 쳤습니다. ‘사흘이 지난 후’ 관리들은 백성에게 요단강 도하를 위한 행동 지침을 내리고 주의사항을 알립니다. 앞서 말했듯이 날짜를 기준으로 할 때는 1-3장의 흐름이 잘 들어맞지 않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장소를 기준으로는 서사의 흐름이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요단강 도하를 예고하다(1-6)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 마음과 행동을 정결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정결한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우리는 올바른 길로 인도받습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면, 그분의 계획이 이루어집니다. 이로 인해 우리의 삶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완벽하고 신실합니다.

 

1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 2사흘 후에 관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3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4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5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6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나아가니라(1-6)

 

서사의 순서를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1장에서 요단 강 도하의 명령을 받은 여호수아와 백성은 2장에서 싯딤에 진을 치고 있는 가운데 두 정탐꾼을 보냅니다. 3장에서 싯딤으로부터 요단강 강변으로 다시 이동합니다. 요단강 도하의 행동 지침은 여호수아에 의해 관리들에게 하달되고(1장) 이어서 관리들을 통해 백성들에게 전달됩니다(2). 우선 제사장들이 언약궤, 즉 법궤를 메고 앞장서야 합니다(3). 여기서 ‘레위 사람 제사장’이라는 표현과 관련하여, 제사장은 신명기에서도 분명히 레위인과 다른 특별한 직책으로 구분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아마도 평상시의 일반적인 법궤 운반은 레위의 고핫 가문이 맡았지만, 특별한 상황에서는 제사장들이 직접 법궤를 멨던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물론 신명기는 법궤 운반을 레위의 아들들인 제사장들이 맡았다고 설명합니다(신 31:9). 이것을 민수기 신명기의 모순과 차이로 이해할 필요는 없으니, 이는 성막의 모든 비품의 관리와 운반 책임은 제사장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법궤와 뒤따르는 백성 사이의 간격이 이천 규빗(약 900m)으로 설정됩니다. 법궤에 ‘가까이 가지 말라’는 경고는 둘 사이 간격을 이천 규빗보다 좁히지 말고 언제나 그 간격을 유지하라는 뜻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천 규빗의 간격은 아마 최장 거리로 그 간격 내에서 법궤가 앞장서 행진했을 것입니다. 접근 금지의 경고는 군사들이 법궤에 너무 근접해서 혹시라도 법궤와 접촉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를 당부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후대의 유대교에서는 안식일에 여행 가능한 거리를 이 규정에 근거하여 이천 규빗으로 제한하였습니다. 여기서 법궤는 내비게이션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출애굽기-민수기는 물론이고 신명기에서도 확인되는 바로는 신적 구름이 법궤 위에 현현하여 그들의 갈 길을 지시해주었습니다(신 1:33). 여호수아서는 성막과 법궤 위에 출현한 그 신적 구름의 현현을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신명기 전통을 잇는 여호수아서는 선두에 선 법궤의 행진에서 그 신적 구름의 현현을 전제하거나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법궤/구름 기둥은 광야에서 생소한 환경 속에서 길에 익숙지 않아 갈 바를 모르던 이스라엘 백성을 친히 인도했습니다. 이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이동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마찬가지로 이전에 지나가 보지 못한 길을 지나가야 합니다(4). 이때 법궤가 이스라엘 백성이 가야할 방향의 이정표 역할을 했습니다. 생소한 길을 가는 백성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믿음과 절대 순종뿐입니다.

또한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준비 사항은 ‘성결함’입니다. 이것의 히브리어는 문자적으로 ‘스스로를 거룩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성결케 되는 방법이 여기서는 전혀 제시되지 않지만, 출애굽기 19장은 이것에 대한 암시를 제공합니다. 그것은 옷을 깨끗이 빨고(출 19:10,14; 흔히 옷을 빨 때 목욕도 전제되는 경우가 많다) 남녀 간의 잠자리를 갖지 않으며(출 19:15) 하나님께서 정하신 경계선(여기서는 법궤와의 간격)을 넘지 않는 것입니다(출 19:12-13, 21, 23-24).

 

요단강 도하를 명령하다(7-8)

하나님의 권위 아래서 지도자를 따르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할 때, 우리는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의 보호와 인도는 우리가 힘든 시기를 이겨내는 데 도움을 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7○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8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7-8)

 

여호수아의 명령대로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 행진하여 요단강을 걸을 것입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개인적인 말씀을 통해 용기를 북돋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앞서 모세의 시대에는 자신이 모세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여러 이적과 기사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애굽에서의 열 가지 재앙과 홍해가 갈라진 기적, 그리고 광야에서의 숱한 이적과 기사가 모세의 손과 지팡이를 통해 발생했습니다. 이제 요단강의 기적을 통해 여호와께서 분명하게 여호수아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물이 갈라지는 이 기적은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홍해를 가른 사건의 재현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물을 가른 것처럼 이제 여호수아가 동일한 능력으로 물을 가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하신 것처럼 여호수아와 함께하신 것을 모든 백성이 알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담대한 요단강 도하를 지시하시고, 이제 여호수아는 제사장들에게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에 들어서라고 명령합니다(8).

 

백성을 독려하는 여호수아(9-13)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따를 때, 우리는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행동으로 옮기면, 그분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하며, 그분의 놀라운 일을 체험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과 순종은 우리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과 기적은 우리의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9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10또 말하되 살아 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실 줄을 이것으로서 너희가 알리라 11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나니 12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명을 택하라 13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쌓여 서리라(9-13)

 

여호수아는 제사장들에게 명령을 내린 뒤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독려합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제 요단강 도하의 기적이 일어날 것인데, ‘이것으로서’ 그들은 가나안의 모든 족속들을 하나님께서 쫓아내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신명기에서 지목한 가나안의 일곱 족속이 다시 등장합니다(신 7:1; 20:17). 가나안 땅의 종족들을 대체로 ‘가나안의 일곱 족속’으로 분류하지만, 실제로 구약은 때로 그보다 적은 대여섯 족속을, 때로는 훨씬 많은 족속들의 이름을 나열합니다(예를 들어 창세기 15:19-21에는 열 족속이 나열된다). 구약에 나오는 가나안 족속은 열다섯 종족이 넘습니다. 따라서 가나안 일곱 족속은 ‘7’이라는 완전수에 맞춘 대표 종족들로 보아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각 지파에서 한 명씩 총 열두 명의 남자를 선발하라고 명령합니다. 이 선발된 사람들이 할 일은 4장에서 드러나는데, 요단강 한복판에 열두 개의 돌을 세우기 위함입니다(4:1-9). 여호수아는 미리 백성에게 예고합니다. 백성은 이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강에 닿는 순간 강물이 멈추고 흐름이 중단되어 한 곳에 물이 쌓이게 될 것입니다.

 

요단강이 멈춘 기적(14-17)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우리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할 때, 기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믿음과 순종이 우리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14○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15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16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17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14-17)

 

여호수아의 명령과 함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과 온 백성이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계절적으로 이 시기는 성서력 음력 1월초로서 현대 태양력의 3-4월에 해당하며 봄철의 우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몇 개의 댐들로 수량이 조절되는 오늘날과 달리, 고대에는 따뜻한 우기 막바지에 요단강이 급격히 범람하고 헤르몬 산 일대의 고산 지대에서 눈이 녹으면서 큰 홍수가 발생했습니다(15). 고대에 크게 범람하던 요단강이 멈춘 기적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발생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4:15-24에서 더 자세히 논할 것입니다.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강에 닿자 거대한 강줄기의 급류가 갑자기 멈췄습니다. 강물이 쌓이면서 사르단 근처 아담 성읍의 변두리까지 뒤덮었습니다. 아담의 위치는 거의 확실하게 오늘날의 텔 에드-다미예(Tel ed-Damiyeh)로 추정되는데, 얍복 강이 요단강에 합류하는 곳입니다(텔[Tel]이란 도시나 주거지였던 곳이 흙더미가 되어 유적지가 된 곳을 말하며 고고학자들이 발굴된 ‘텔’마다 고유의 이름을 붙인다). 그러나 사르단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으나 아하로니(Y. Aharoni)를 비롯한 다수의 학자는 아담에서 가까운 얍복 강 너머의 텔 움하마드(Tel Umm-Hammad)로 추정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북쪽의 텔 엘사이디예 (Telel-Saidiyeh)로 간주합니다. 본문을 사르단과 아담이 가까이 위치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전자가 더 타당해 보입니다. 이 경우 강물은 아담 성읍과 사르단 성읍 사이의 요단강 지류인 얍복강을 채우면서 쌓인 것으로 보입니다.

백성들은 물이 끊긴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놀랍게도 강바닥은 마른 땅처럼 변했습니다(17). 이것 역시 홍해가 바닥까지 마르면서 갈라졌던 기적의 재현입니다. 언약궤를 메고 앞서 가던 제사장들은 마른 강바닥에 멈춰섰습니다. 그들은 모든 백성이 계속 행진하여 요단을 다 건널 때까지 강 한가운데에 서 있었습니다. 이때만큼은 법궤가 백성들 선두에 서지 않고 오히려 뒤 편에 위치했는데, 결국 법궤는 백성을 인도하면서도 때로 특별한 경우에는 백성의 뒤편에서 백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능력을 신뢰해야 함을 배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요단강을 건넜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며,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의 명령에 응답해야 합니다. 순종과 믿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따를 때, 기적과 축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훈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능력을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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