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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2-02)


메시아를 기다린 사람들

누가복음 2장 21-40절


 

밤이라고 모두가 자는 것은 아닙니다. 야간에도 산업현장에는 불철주야 일하는 산업 일꾼들이 있습니다. 또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신문과 우유 배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24시간 깨어서 전방에는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도 있습니다. 우리들이 평안하게 잠들어 있을 수 있는 것은 이런 분들의 수고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 예수님 당시에는 대부분 영적으로 암흑기에 살고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잠에 취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깨어있는 신령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깨어서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거룩한 자로 드려지는 아기 예수(21-24)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전통과 의식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지키고 강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 헌신하고 드리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사는 것이 우리의 삶에 큰 의미와 방향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신앙 생활의 핵심으로서 우리의 영적 성장을 돕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만듭니다.

 

21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22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1-24)

 

예수님께서는 태어난 지 8일째, 산모의 부정 기간(7일)이 지난 다음 날 할례를 받습니다(1; 창 17:9-14; 레 12:28). 천사가 지시한 대로 아기의 이름은 예수가 됩니다(1:31). 그리고 누가는 아기 예수의 부모가 율법이 요구하는 두 가지 규례를 준수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21-24).

 

(1) 할례 및 작명(21)

 

하나는 산모의 정결 예식이고, 다른 하나는 장자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와 예수님 모두의 정결 예식이기 때문에 복수형을 사용해 ‘그들의 정결의 날들’로 표현합니다. 부모는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레 12장)의 날을 위해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갑니다(2; 레 13장). 주의 율법에 따르면 장자는 ‘주의 거룩한 자’가 되기 위해 주께 드려졌습니다(3; 출 13:2,12,15;34:19-20; 민 8:15-19). 주의 율법은 가난한 백성에게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정결예식을 위한 제물을 바치도록 배려했습니다(4). 예수의 부모는 가난했습니다! 아기를 예루살렘 성전에 드리는 사건은 한나가 사무엘을 실로의 성소에 드린 장면(삼상 1:11, 21-28)과 연결되는데, 한나와 비슷한 기도를 드린 마리아는 한나처럼 아들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립니다.

 

(2) 정결예식(22-24)

 

누가는 경건한 부모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아기 예수를 구별해 드리는 장면을 ‘주께 거룩한 자로 불릴 것이다’의 성취로 이해합니다. 거룩한 자로 불리게 되는 것은 천사가 마리아에게 아기의 이름을 언급하고 나서(1:31) 전했던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구별된, 즉 거룩한 자입니다. 그는 낮은 가정에서 낮은 자로 태어나 자랐지만 ‘주께 거룩한 자로 불릴 것이다’(1:35; 2:23). 흥미롭게도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귀신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4:34), “하나님의 아들”(4:41)로 부를 것입니다. 더러운 귀신들의 활동, 즉 사탄의 통치에 맞서 싸우는 점에서 예수님은 거룩한 자입니다. 다시 말해, 거룩한 자이신 예수님의 활동으로 세상에는 거대한 충돌이 일어날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구별된 분으로 온전히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전에 예수님께서 거룩한 자로 드려지는 장면은 악이 득세하는 사탄의 통치에 대한 선전포고와 같습니다.

 

시므온의 노래와 부모의 반응(25-35)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고, 그분의 타이밍을 신뢰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분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경험할 때,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루어졌음을 보며,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고 따르는 것이 중요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훈들을 통해 우리는 신앙 생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만들 수 있습니다.

 

25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34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25-35)

 

시므온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아기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보고 기쁨으로 찬양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한 빛이자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시므온은 예수님의 사역이 많은 사람에게 큰 변화를 가져올 것임을 예언했습니다.

 

(1) 시므온에 대한 소개(25-26)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25). 누가는 성령이 시므온 위에 임하여(25), 시므온이 성령의 지시를 받고(26), 성령의 감동(27)을 받은 점을 부각시킵니다. 탄생 이야기에서 성령이 임하시면 증인의 역할을 수행합니다(요한-1:15; 마리아-1:35; 엘리사벳-1:41; 사가랴-1:67). 시므온은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의 활동을 예언하기 때문에, 그의 증언은 신뢰할 수 있는 계시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한 ‘위로’(파라클레시스)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이스라엘을 이방인의 압제에서 해방시키는 것입니다(참조. 사 40:1; 49:13; 51:3; 57:18; 61:2). 기다림은 기대함을 의미합니다(2:38; 12:36; 23:51; 행 23:21). 시므온은 자신의 위로가 아니라 민족의 위로를 소망했습니다. 시므온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이 보내시는 종을 통해 실현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메시아(그리스도)를 기다렸고, 성령은 시므온에게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알리셨습니다(26).

 

(2) 아기 예수를 만난 시므온(27-28a)

 

성령의 감동으로 시므온은 “주의 그리스도”,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보러 성전에 들어갔고, 예수님의 부모는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왔습니다(27). 말하자면, 아기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그리스도입니다.

 

(3) 시므온이 찬송(28b-32)

 

시므온은 아기를 안고 이스라엘을 위로하기 시작하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28). 시므온의 노래(29-32)는 탄생 이야기에 기록된 세 번째이자 마지막 찬송입니다(1:46-55, 68-79). 시므온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보내신 그리스도를 목격했기 때문에 평안히 죽을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합니다(29). 하나님의 종 시므온에게 주어진 평생의 임무는 만민을 구원할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보기 원했던 시므온은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노래합니다(30). 특히 시므온은 ‘지금’을 넣어서 자신의 생애 마지막에 드디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이 시작된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가 기다린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만민을 위한 선물로 예고된 것입니다(31). ‘예비하다’ 또는 ‘준비하다’는 인간의 노력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라 오래전에 예고된 것이 이제 하나님의 개입으로 실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1:17,76). 시므온이 고대했던 ‘이스라엘의 위로’는 처음부터 ‘만민’을 위한 구원이었으며, ‘만민’은 32절의 ‘이방인들’과 ‘이스라엘’둘 다를 포괄합니다. 만민이 경험할 구원은 “이방을 비추는 빛”(사 42:6; 49:6)이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32). 선지자들이 예고한 구원은 처음부터 이스라엘만을 위한 해방이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시작되고 만민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4) 시므온의 예언(33-35)

 

부모가 아들의 역할에 대한 찬송을 듣고 놀라자 시므온은 예수님으로 인해 이스라엘에 분리가 일어날 것을 예고합니다(34). 예수님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걸려 넘어질 것이고(사 8:14-15) 예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사 28:13-16).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겪을 일 때문에 칼에 찔리는 것처럼 고통스러울 것입니다(35). 여기서 ‘칼’(롬파이아)은 양날 검으로, 십자가 현장에서 어머니의 영혼은 양날 검에 찢어지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는 장면이 실제로 복음서에 등장할 것입니다(예. 5:21-22; 11:17). 시므온의 예언대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은 구원의 감격을 경험하겠지만, 예수님 때문에 마음의 죄가 발각되는 자들은 그를 죽음으로 내몰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거부한 동족에게서 극심한 반대를 겪을 것입니다. 이처럼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낮고 가난한 자들이 얻을 위로와 높고 부한 자들이 겪을 운명이 극적으로 대조됩니다.

 

안나의 경배(36-40)

우리는 꾸준히 기도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믿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영적 성장과 성숙이 중요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더욱 강하고 풍성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36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40○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36-40)

 

안나는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면서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36-37). 안나가 밤낮 성전에서 기도한 것은 매일 드려지는 제사에 참여했음을 암시합니다. 누가는 38절에서 미완료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예수님을 목격한 안나가 계속 감사하고(안토몰로게이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해 계속 말한 것을 강조합니다. “예루살렘의 속량”은 “이스라엘의 위로”(25)와 같은 뜻입니다(시 130:5-8; 사 40:9; 52:8-10; 63:4). 안나는 선지자로서 예루살렘의 속량을 소망하는 모든 사람의 열망을 대변했습니다. 그녀는 평생을 하나님 앞에 나가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주의 율법에 따라 성전에 올라간 (2:21-24) 예수님의 부모는 율법을 따라 모든 것을 마치고 나사렛으로 돌아옵니다(39).

예수님의 오심은 안나의 기도가 응답받았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라는 사람들의 소망에 응답하셨습니다.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원했던 시므온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안나와 시므온처럼 평생 경건하게 살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한 사람들의 기도를 기억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게서는 율법에 따라 경건하게 사는 요셉과 마리아의 헌신을 사용하셨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고, 은혜는 헌신되고 경건한 자들의 삶과 기도에 대한 응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과 초기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와 구원의 기쁨을 배웁니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끊임없는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얻은 구원의 빛은 우리 삶에 새로운 희망과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이러한 믿음과 헌신으로 우리의 신앙 생활을 더욱 충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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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2-01)


섬기려 오신 왕 예수 그리스도

누가복음 2장 1-20절


 

오늘날 시대는 기쁨의 좋은 소식을 간절히 기대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좋은 소식이란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가 임한다는 소식입니다. 하지만 평화는 힘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재력, 학력, 인맥 등과 같은 힘을 가려고 합니다. 진정한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모든 자들에게 평화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 누가는 로마 황제 아구스도의 인구조사 칙령과 세앙의 구주가 베들레헴의 구유에 태어난 장면을 대조합니다(1-7). 주의 천사는 목자들에게 구주가 태어날 것이라는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전합니다. 구주의 표적은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태어난 것이며(8-14), 목자들은 구유에 누인 아기를 목격합니다(15-20). 낮은 곳에 임하신 구주의 탄생으로 세계의 중심과 이스라엘의 중심이 옮겨집니다.

 

베들레헴의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1-7)

어두움 가운데 걷던 사람들이 말씀의 조명을 받아서 빛 가운데 걷는 것이 구원입니다. 불안과 염려, 또 무질서 가운데 살던 사람들이 샬롬을 누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소식이 복이 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의 삶은 엉망인 죄인이고, 혼자 힘으로는 이 길목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임의로 주신 구원의 방식에 동의해야 합니다.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예수님께서 그 선물을 주시려 오셨습니다.

 

1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1-7)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을 냉혹한 세계사의 흐름에서 서술합니다. 1장이 유대의 왕인 헤롯의 때를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한 반면(1:5), 2장은 가이스 아구스도의 칙령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합니다.

누가는 본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시기와 장소를 소개합니다. 그 시기는 로마 황제 아구스도는 군대 징집과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인구 조사를 위해 천하에 호적하라고 칙령을 내렸고(1), 구체적으로 시리아 지역의 총독인 구례노가 유대 지역에 집행했던 때임을 소개합니다. 시편 87:6에서는 세계적인 호적조사 실시 때 메시아가 탄생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황제의 명령에 따라 모든 사람들은 호적하려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3).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므로 호적을 등록하려고 갈릴리 나사렛에서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4). 그때 임신 중인 마리아도 동행했습니다(5). 로마 제국의 황제가 내린 칙령 앞에 요셉과 마리아는 복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의 후손인 요셉이 다윗의 도시인 베들레헴에 간 것은 태어날 아기 예수님께서 약속된 다윗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미가 5:1-4은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으로 예언하였습니다. 가이사는 자신의 왕권을 증명하기 위해 호적하라는 칙령을 내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까지도 이용하셨습니다. 그 기간 동안 온 세상의 진정한 왕이신 예수를 베들레헴에 탄생하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베들레헴에서 구세주가 탄생할 것이라는 구약을 통해 하셨던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미 5:2). 그래서 다윗의 위(位)가 영원할 것이라는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세월은 세상의 권력자를 바꾸고 나라는 흥망성쇠를 거듭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쇠하지 않고 우리가 충성할 왕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십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빈 객실이 없었기 때문에 외양간에 머물러야 했고, 결국 약속된 메시아는 외양간의 여물통에 누였습니다. 만삭의 어린 여성이 먼 길을 와서 외양간의 여물통에 첫 아이를 낳는 장면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모습은 주의 천사가 마리아에게 고지한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로 불리고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이라는 약속(1:32)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신의 아들’이라 자처하던 로마 황제 아구스도가 통치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가난한 부부의 첫아들(출 13:2; 민 3:12-13; 18:15-16; 신 21:15-17)로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이처럼 높은 보좌에 앉아 천하에 칙령을 내리는 가이사 아구스도와 구유에 누인 메시아인 예수님은 완전히 대조됩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세상의 중심이 달라집니다. 천하를 호령하는 로마의 아구스도가 아니라 어느 시골의 외양간에서 태어난 예수님께서 세상을 다스릴 것입니다(미 5: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로마의 황제와 정반대의 방식으로 세상을 다스릴 것입니다.

 

구주의 탄생과 천사들의 찬송(8-14)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낮은 자의 모습으로 보내주셨습니다. 다윗의 왕에 이어 영원히 왕노릇하실 하나님의 아들이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비천한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를 부유케 하시려고 짐승의 구유에 오신 것입니다. 구유에 계신 예수님을 보면서 천사들은 찬양합니다.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8-14)

 

본문은 주의 천사(가브리엘)가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정면과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내용으로 구성됩니다. 목자들은 천사에게 메시아 탄생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을 달려가서 누구 집인지도 알 수 없지만 마구간에 구유 안에 누인 예수님을 찾아간 사건을 소개합니다.

 

(1) 목자들에게 탄생을 알림(8-12)

 

예수님께서 태어난 베들레헴 근처에서 목자들이 밤에 양 떼를 돌보고 있었습니다(8). 주의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났고 주의 영광이 목자들을 비추었습니다(9). 목자들은 천사를 보고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천사는 목자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천사는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러 왔기 때문입니다(10).

누가복음에서 ‘기쁨’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1:14; 2:10; 15:7,10)와 영적인 일(10:17)과 예수님의 부활(24:41,52)에 사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좋은 소식이 전해질 것이기에 목자들은 기뻐해야 합니다. 좋은 소식은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 ‘그리스도 주’가 태어난 것입니다(11). ‘다윗의 동네’는 베들레헴(삼상17:12-15)을 가리킵니다. 다윗의 동네에 태어난 예수님께서는 ‘구주’입니다. 구약에서 ‘구주’는 원수들에게서 해방시키는 구원자입니다(삿 3:9,15; 12:3; 느 9:27). 구주는 ‘그리스도 주’입니다. ‘주’는 70인역에서 하나님의 칭호이고, 로마제국에서는 ‘카이사르’가 ‘주’입니다. ‘구주’(1:47)는 구약에서 백성을 돕거나 구원하시는 하나님에게 사용된 용어였습니다(삼상 10:19; 사 45:15.21; 지혜서 4:30; 마카비1서 4:30; 집회서 51:1). 11절에서 ‘구주’의 역할을 행하는 주체는 예수님입니다(행 5:31; 13:23).

천사는 목자들에게 메시아라는 표적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12)가 그들이 보게 될 표적입니다. 구주-주-그리스도임을 입증하는 표적은 초라한 곳에서 옷(강보)에 싸여 있는 아이의 모습입니다.

 

(2) 천사들의 축하 찬송(13-14)

 

온 세상을 구원하는 너무나 초라한 그리스도의 탄생 장면이지만, 하늘에서는 정반대의 반응인 찬송이 울려 퍼집니다. 주의 천사와 함께 수많은 하늘 군대가 도열해 우렁차게 하나님을 찬송합니다(13). 하늘의 군악대는 아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주어질 평화를 노래합니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평화를 선포합니다. 평화는 구주 그리스도의 통치로 주어지는 치유와 회복이며(참조, 4:18-19; 사 52:7),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임합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택하시는 사람들입니다. 천사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광경이 펼쳐지는 장소로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인 예루살렘 성전이 걸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베들레헴 광야의 목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1세기에 온 세상에 미치는 기쁜 소식은 로마 황제의 탄생이나 등극이었습니다. 로마는 하나님의 아들과 구주로 불리는 새로운 황제가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선전했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의 생일은 세상에 주어진 복음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외양간의 구유에 누인 아이를 세상을 구원하고 이스라엘을 통치할 구주와 메시아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온 세상에 미칠 진정한 기쁨, 사람들의 평화는 시골의 외양간에서 태어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시작됩니다.

누가복음에는 ‘복음(유앙겔리온)’의 명사형은 나오지 않고 ‘좋은 소식을 선포하다’(유앙겔리조마이)라는 동사형이 10회 사용됩니다(1:19; 2:10; 4:43; 7:22; 8:1; 9:6; 16:16; 20:1; 참조. 3:18). 이는 이사야가 복음을 선포할 때 사용한 방식입니다(사 40:9; 52:7; 60:6, 61:1). 이사야는 겸손하고 고난 받는 종(42:1-4; 45:4; 49:3-5; 52:13-53:12)을 통해 복음이 전파될 것을 예고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궁핍하고 비천한 자들을 높이기 위해 예수님은 더 비천하게 낮아지셨습니다. 구주는 낮은 곳에 임해서 고난의 길을 걸었고, 결국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시는 구주를 영접하는 사람에게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를 목격한 목자들(15-20)

오늘 예수님께서 오신다면 여전히 우리의 삶의 조건보다 우리의 마음을 보실 것입니다. 말씀 앞에 겸손함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순종하는 믿음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주의 영광이 드러난 곳에 참 평화와 기쁨이 있습니다. 이러한 목자의 태도에서 오늘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의 자세를 알 수 있습니다.

 

15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18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19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20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15-20)

 

천사 합창단은 하늘로 올라가고 목자들은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으로 향합니다(15). 주의 천사가 아기의 탄생을 알렸는데도 목자들은 ‘주’(호 퀴리오스)께서 알려주신 사실을 확인하러 가자고 합니다. 그들은 천사의 메시지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믿었습니다. 메시아의 탄생 소식에 대해 마리아처럼(1:39) 목자들도 빨리 반응합니다(16). 목적지에 달려간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목격하고 천사가 말한 표적을 확인합니다. 이제 목자들은 천사가 아기에 대해 말한 내용을 전합니다(17). 다윗의 아들과 구주를 통해 온 세상에 미칠 기쁜 소식을 맨 먼저 증언한 주체는 목자들입니다! 당시 목자들의 말은 신뢰를 얻지 못했지만 아기를 둘러싼 사람들은 목자들의 증언을 진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18).

19절의 ‘간직하다’와 ‘고민하다’는 매우 긍정적이고 수용적인 의미를 내포합니다. 마리아는 주의 천사에게서 들은 메시지와 목자들의 증언을 깊이 생각합니다. 일터로 돌아온 목자들은 표적을 확인한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합니다(20). 목자들의 찬송은 하나님의 (찬란함을 뜻하는) 영광이 예수님의 겸손과 고난을 통해 드러날 사실을 예고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영광과 찬양을 돌리기에 적합한 곳은 세상의 중심인 예루살렘의 성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으로 신앙의 중심이 옮겨집니다. 하루도 일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한 목자들이 일하는 곳에 하늘의 군악대가 등장했고, 목자들은 일터로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드립니다. 낮은 자들 가운데 임하신 예수님께서는 낮은 자들의 소망이며, 하나님은 이들의 찬송을 기뻐하십니다.


목자들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이의 표적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천사의 고지 사실을 예수님의 부모에게도 전하여 그들을 놀라게 합니다. 마리아는 이 일을 마음에 담아둡니다. 이처럼 친히 주께서 하시는 일을 많이 보고 더 풍성한 찬양과 예배로 화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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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1-06)


성령으로 충만한 사가랴의 예언

누가복음 1장 67-80절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삶의 목적과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당신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한 것입니다.

 

  • 사가랴는 대제사장이자 경건한 종교 지도자로, 로마의 식민지 상황과 자식이 없는 고통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세례 요한이라는 아들을 주셨고, 사가랴는 10개월의 침묵 후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구원자보다 앞서 그 길을 준비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사가랴는 자기 아들이 예비할 주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백성을 구원하고 죄를 용서하실 것을 찬양했습니다.

 

구원의 뿔을 찬양(67-75)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서도 약속을 지키시고 신실하게 일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자비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이 은혜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분의 역사를 기억하고 찬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67○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68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69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71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72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74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75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67-75)

 

사가랴에게 주는 예언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찬양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가랴의 찬양은 마리아의 찬양과는 달리 먼저 이스라엘을 위해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시작합니다.

 

(1) 사가랴가 하나님을 찬양함(67-68)

 

사가랴는 처음에 자신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18).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전혀 보지 못하는 일까지도 믿음으로 찬양하게 된 것입니다. 단순히 개인적 경험으로 확실을 얻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인해 확신의 자리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사가랴의 찬양에서 핵심은 속량입니다. 본문에서 ‘돌보셨다’라는 뜻의 동사 ἐπισκέπτομαι(에피스렙토마이)는 출애굽기 4:31에서 고난 당하는 백성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표현합니다. 유대 문헌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방문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하고 보면, ‘돌보셨다’는 것은 고난 당하는 백성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셨다는 뜻입니다. 사가라는 이어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속량하셨다고 노래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속량’(뤠트로시스)은 팔린 가옥을 다시 회복하는 것(레 25:29), 종으로 팔린 자를 해방시키는 것을 뜻합니다(레 25:48).

 

(2) 구약성경이 성취됨(69-71)

 

사가랴가 언급한 구원의 뿔은 다윗의 집에서 일어날 것이므로(69), 레위 지파에서 태어난 세례 요한이 아니라, 마리아를 통해 다윗의 집에 태어날 아이를 가리킵니다. 사가라는 마리아가 방문했을 때 메시아가 잉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믿었을 것입니다. 뿔은 특히 군사력을 상징하므로(신 33:17), 사가라는 군사적 메시아를 연상했을 수 있습니다. 사가랴는 메시아의 오심이 구약의 성취라고 노래합니다(70). 그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라고 노래할 때, 사무엘하 7:12~13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선지자가 예언한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71). 이스라엘이 로마에 예속된 상황에서 ‘원수’는 특히 로마를 가리키는 말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3) 아브라함을 통한 약속 성취(72-7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 때문입니다(73). 그 약속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그에게 하신 약속입니다(창 22:16-18). 즉, 가나안 땅을 영원히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신다는 내용(창 17:8)입니다. 그 후손의 원수들이 정복될 뿐만 아니라 그의 순종과 믿음으로 온 세상이 복을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세례 요한의 사명(76-77)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이고, 그분이 주시는 사명을 깨닫고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그분의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76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77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76-77)

 

사가랴는 접속사 δε로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예언한 메시아와 대조하면서 자신의 아이에 관해 예언합니다. 그 아이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입니다(78). 그 아이의 사명은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사명은 이사야 40:3에 하나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으로 언급되었는데, 사가랴가 메시아에 관해 예언한 문맥에서 그 길을 메시아의 길이라고 이해하게 합니다. 사가랴는 세례 요한이 ‘주의 백성에게 그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77). 이 예언은 죄 용서를 통해 회복되는 원리(레 26:38, 40-43)를 전제합니다. 세례 요한이 주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 ‘구원의 지식’입니다. 여기서 ‘지식’은 셈족어적 의미의 실천적 지식을 의미합니다.

 

메시아의 오심(78-79)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며, 그분의 자비로 새로운 시작과 희망을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마음과 영혼에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또한, 삶에서 평화를 추구하며,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 생활의 핵심입니다.

 

78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78-79)

 

사가라는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라고 예언합니다. ‘돋는 해’로 번역된 ἀνατολή(아나톨레)는 70인역 예레미야 23:5에 사용되었는데, 개역개정에서는 히브리어 본문의 ‘체마흐’를 따라 ‘가지’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왕이 되어 새 출애굽을 이끄는 메시아적 존재를 가리킵니다(렘 23:5,8). 이 단어는 70인역 스가랴 6:12에도 쓰였습니다(개역개정에는 ‘싹’). 이 싹은 사무엘하 7:12~13의 다윗의 자손처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 메시아적 존재입니다. 70인역 스가랴 3:8에서도 이 단어는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누가복음에서도 이 단어는 메시아를 가리킬 것입니다.

‘임하여’로 번역된 ἐπισκέπτομαι(에피스켑토마이)는 68절과 7:16에서 하나님의 방문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동사이므로, 이 동사의 주어 ‘돋는 해’는 신적 주체를 가리킵니다. 이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신적 메시아가 세상 안에서부터가 아니라 세상 밖에서부터 오심을 강조합니다. 돋는 해가 ‘위로부터’(높은 곳으로부터) 온다는 표현도 그러한 의미를 전달합니다. ‘높은 곳으로부터’가 ‘하나님으로부터’를 뜻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누가복음에서 하나님을 가리키기 위해서는 ‘높은’ 대신 최상급 ‘지극히 높은’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1:32,76; 6:35; 8:28). 70인역, 구약 위경, 필로, 요세푸스, 신약성경에서도 하나님을 가리키는 경우에 ‘휩시스토스가 사용되었습니다. 그중 70인역의 용례를 살펴보면, 시편 102:20(개역개정, 102:19)에서 ‘높은 곳으로부터’는 ‘하늘로부터’와 평행합니다. 사무엘하 22:17에서 ‘높은 곳으로부터’는 ‘주’를 주어로 하는 동사와 연결되는 문장 속에 위치하므로 ‘하나님으로부터’를 뜻하지 않습니다. 시편 17:17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143:7의 “높은 곳으로부터 당신의 손을 보내셨다”에서도 ‘높은 곳’이 ‘당신’(하나님)을 가리킬 수 없고, 5절에 언급된 하나님의 거처인 하늘을 가리킵니다. 예레미야애가 1:13의 “그의 높은 곳에서부터 불을 보내셨다”에서도 ‘높은 곳’이 그(하나님)를 가리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높은 곳으로부터’는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늘로부터’를 뜻하고, 누가복음은 여기서 신적 메시아가 하늘로부터 온다고 묘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가랴의 예언에 의하면 메시아는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임합니다(79). ‘어둠과 사망의 그림자 속에 사는 자들’은 로마의 압제 아래 있는 유대인들을 묘사하는 표현일 것입니다. 이 표현이 연상시키는 구약성경의 구절들(시 107:10,14; 사 9:2)은 포로가 된 이스라엘의 상태에 관해 묘사한합니다(참조, 시 107:2-4).

 

세례 요한의 성장(80)

우리는 지속적으로 배우고 발전하며,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이해하고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중요한 사명을 수행하기 전에는 충분한 준비와 기도가 필요합니다. 때때로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하나님과 독립적으로 교제하는 시간도 중요합니다. 이러한 시간은 우리의 영적 성장을 돕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화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80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80)

 

세례 요한은 자라며 영적인 측면에서 강해졌습니다. 이것은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서 튼튼하게 자라났다고 언급하는 사무엘상 2:21을 연상시킵니다. 아이는 사역을 위해 등장하기까지 ‘빈들’(광야)에 있었습니다. 이사야 40:3에 따라 하나님의 새 출애굽 길은 광야에서 준비해야 하므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자신에 있는 고통을 아름답게 승화시키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당신을 거룩하게 만드는 도구입니다. 사가랴는 주변 환경에 물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을 하나님 나라에 크게 쓰임 받는 일꾼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당신도 그렇게 기도해 나가는 성도가 될 때, 당신을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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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1-05)


소망의 시작인 요한의 출생

누가복음 1장 57-66절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전에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있는가?’ 혹은 ‘다른 사람이나 교회는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있는가?’를 고민하며 전례를 중요시합니다. 하지만 전례를 따르는 것은 창의력을 잃게 만들고, 다른 사람이나 교회의 사역을 답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놀라운 축복을 온전히 받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에는 창의력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교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신선함과 창의력을 부어주십니다.

 

  • 본문은 세례 요한의 출생과 그의 이름을 짓는 일과 관련된 사건을 기록합니다. 엘리사벳이 아들을 출산하니 이웃과 친족이 듣고 기뻐합니다. 8일이 되어 할례를 왔을 때, 사람들이 아이의 이름을 ‘사가랴’로 하고자 하나 엘리사벳은 ‘요한’이라 하겠다고 합니다. 아이의 이름에 대한 물음에 사가랴가 서판에 요한이라 쓰자, 곧 그의 혀가 풀려 말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엘리사벳의 출산(57-58)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과 조건을 넘어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을 신뢰하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이루어주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57○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58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57-58)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을 때까지 아이를 낳지 못하던 불임(不姙) 병에 걸려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아무런 소망이 없이 이제 죽은 날만 기다리던 엘리사벳에게 희망이 찾아 왔습니다. 그녀에게 불가능했던 일들을 가능케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테를 열어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천사의 말대로 아들을 주셨습니다(13). 엘리사벳이 드디어 아들을 출산했습니다. 엘리사벳의 출산 소식을 듣고 이웃과 친족이 즐거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산임에도 불구하고 안전하게 아이를 낳게 하셨습니다. 이 소식은 이웃과 친족들에게 오랫동안 아이가 없던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가정에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이라고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라가 이삭을 낳고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라고 한 말을 연상시킵니다(창 21:6). 그리하여 사라-엘리사벳 모형론이 형성되고, 아브라함-사가랴 모형론이 암시됩니다. 이러한 모형론으로 사가랴와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세례 요한과 이삭이 연관됩니다. 또 세례 요한 뒤에 오신 예수님을 야곱(이스라엘)과 연관 지어 이스라엘(야곱)-예수 모형론의 기초를 형성합니다. 이스라엘 예수 모형론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새 이스라엘로서 새 열두 지파를 형성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명의 사도를 세우시고 그들로부터 시작해 새 이스라엘을 형성하도록 하십니다. 다만, 새 이스라엘에는 야곱-열두 지파로 이어지는 혈통적 계보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혈통과는 무관한 열두 사도와 제자들을 자신의 가족으로 간주하십니다(8:21). 그러므로 새 이스라엘은 혈통적으로 이스라엘과 무관한 이방인들이 들어 올 수 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방문한 과부가 이방 땅 시돈에 있는 과부였으며, 엘리사가 치유한 나병환자도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이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도 구원하실 메시아십니다(4:25-27).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는 이방인을 향한 사역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믿은 이방인 백부장의 종을 치유해 주시며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칭찬하셨고(7:9-10), 치유받고 감사하러 온 사마리아 나병 환자를 이방인이라고 규정하시면서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칭찬하셨습니다(17:19). 이 친족들의 기쁨은 이 요한이 전하는 예수님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누릴 새 시대의 기쁨과 즐거움의 약속의 시작입니다.

 

요한의 작명(59-63)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신앙의 일치를 이루는 것도 필수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고 따를 때, 그 계획이 완성됨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기적을 베푸실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59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60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61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62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63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59-63)

 

요한의 할례식 날, 이웃과 친척들은 그의 이름을 아버지와 같은 사가랴로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벳은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가랴도 이에 동의하며, 요한이란 이름을 쓰게 됩니다.

 

(1) 세례 요한이 할례 받음(59)

 

엘리사벳과 사가랴는 아기가 태어난 지 8일 만에 통상적인 방법으로 아이에게 할례를 주고 이름을 짓기 위해 모였습니다. 아기가 태어난 지 제8일에 할례를 줄 때, 사람들은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 주고자 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아기가 출생했을 때 이름을 지었음을 알 수 있는데, 생후 제8일에 할례를 행할 때 이름을 지으려고 한 것은 유대인들의 전통을 따른 것입니다.

당시 그리스는 아기가 출생한 지 7-10일째 되었을 때 이름을 지어 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헬라 제국의 치하에서 헬라 문화를 접한 유대인들이 이 관습에 영향을 받아 출생 후 8일째 할례를 주면서 이름 짓는 전통을 만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2) 아기의 이름은 요한(60-63)

 

엘리사벳이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으려고 하자 친족과 이웃들은 그 이름이 친족들의 이름을 따른 것이 아니라고 지적하며 반대합니다(60-61). 유대인들은 아들의 이름을 대개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지었으며,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짓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아기 이름에 대한 최종 결정을 사가랴에게 맡깁니다(62). 사람들이 신호를 하여 질문한 것이나 사가랴가 글로 답하는 것을 볼 때, 사가랴는 여전히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사가랴는 엘리사벳과 동일하게 ‘요한’이라는 이름을 선택했습니다. ‘요한’(요하난)은 히브리어로, ‘여호와는 은혜롭다’라는 뜻입니다. 사가랴는 천사 가브리엘이 전한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한 것입니다(13).

 

요한의 탄생 이후(64-66)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약속을 지키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때 우리는 찬양과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일들을 주변 사람들에게 증언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신앙을 굳건히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신앙 생활의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64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65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66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64-66)

 

사가랴가 요한이라 이름 지으면서 그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기 시작하여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 일을 목격한 이웃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이 사건은 온 유다 산간 지방에 퍼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요한의 미래에 대해 궁금해하며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1) 사가랴가 다시 말하게 됨(64-65)

 

사가라는 아기 이름을 지은 후에 다시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천사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다가 말하지 못하게 된 사가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요한이라는 이름을 아기에게 부여한 후에 다시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가랴가 다시 말하게 된 현상은 사가랴가 지은 아기의 이름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함을 사람들에게 입증하는 증표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놀라운 현상을 보고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65).

 

(2) 성령충만한 세례요한(66)

 

사람들은 ‘주의 손이 요한과 함께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주의 손’은 하나님의 능력을 뜻하는 구약성경의 표현입니다(민 11:23; 왕상 18:46; 겔 37:1). 열왕기상 18:46은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능력’이라고 번역된 부분은 70인역에서는 ‘주의 손’,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여호와의 손’으로 직역하여 표현했습니다. 에스겔 37:1은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여호와께서 권능’이라고 번역된 부분은 70인역에서 ‘주의 손’,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여호와의 손’으로 직역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호와의 손’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이 표현이 그의 영과 평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손이 세례 요한과 함께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능력 또는 성령이 그와 함께함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성령이 어린 세례 요한과 함께 함을 보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천사 가브리엘의 예언대로였습니다. 천사는 세례 요한이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15). 이 예고대로 세례 요한은 아기 때에도 성령 충만했습니다. 사람들은 성령 충만한 세례 요한을 보고 “이 아이가 장차 어찌될까?”라고 말하며 기대했습니다. 이 아이는 이러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요한의 위대한 인물 됨됨이는 예수님의 평가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7:26).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선지자 이상의 인물로 높이 평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구약시대의 인물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평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7:28).


요한의 탄생은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창의적인 일입니다. 요한의 탄생과 진행된 과정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루어져 갔습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구하며 신선함에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불순종했을 때, 입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순종을 이루었을 때, 임이 열리는 놀라운 역사를 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시면 놀라운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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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1-04)


두 여인의 축복과 찬미

누가복음 1장 39-56절


 

어린 시절에 장날이면 장이 서는 읍에서 내려오는 버스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버스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돌아오시는 어머니를 기다렸습니다. 다 자세히 말하면 어머니가 아니라 시장 보따리를 기다렸습니다. 어머니는 반드시 자녀들을 위해 군것질 거리를 사오시곤 하셨습니다. 이처럼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흥분되고 즐거운 일입니다. 그 기다림이 축복으로 연결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 본문에서 마리아는 천사가 전해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면서 아기가 태어날 것을 기다렸습니다. 이것은 마리아뿐만 아니라 당시 모든 사람들이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모든 인류가 기다렸던 그 메시아인 아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고 하나님의 언약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39-45)

우리의 믿음의 여정은 결코 혼자 걸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신앙과 삶을 공유하고 응원함으로써 우리는 더욱 강해질 수 있습니다. 인생의 길에서 서로를 지지하고 격려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러한 지지는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며, 공동체의 결속을 더욱 강화합니다. 함께할 때 우리는 더 큰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39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41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42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44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45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39-45)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예수님의 잉태에 대한 수태고지(受胎告知)를 기쁜 소식을 받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누군가에게 간증하고 싶었습니다. 자기 혼자 알고 있기에는 너무나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녀를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1) 마리아의 문안(39-40)

 

마리아에게 찾아온 천사 미가엘은 처녀인 마리아에게 청천병력 같은 소식을 전합니다. 하지만 천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라고 축복의 말을 전해 줍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몸에 ‘하나님의 아들’이 잉태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은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입니다. 그 동안 고대하던 메시아가 오신다고 알렸지만,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남녀관계를 통해서 다윗의 혈통을 통해서 온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신다고 하십니다. 그는 인간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요구사항과 인간의 필요를 모두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대국 로마 황제의 아들로 화려하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 로마의 식민지 국가인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이 반기지 않을 조건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천사를 통해 계시를 깨달은 후, 마리아는 ‘처녀가 임신하면 사람들은 자신을 어떻게 볼까?’라는 문제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놀라서 믿기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을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아마 마리아가 결정적으로 믿게 된 것은 늙은 부부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도 아이가 생겼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놀라고 벅찬 마음으로 하나님의 증거를 가지고 있는 엘리사벳에게 찾아갔습니다. 엘리사벳과 사가랴는 예루살렘 근처 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살던 곳은 북쪽 갈릴리 나사렛입니다. 나사렛에 유대까지 먼 곳을 한 걸음에 달려갔습니다. 당장 확인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엘리사벳에게 내려갑니다. 즉시 유대 산지에 동네에 사는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2) 성령 충만한 엘리사벳(41-42a)

 

마리아를 본 엘리사벳은 매우 기쁘게 맞이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를 더 기쁘게 맞이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엘리사벳 태중에 있는 요한이었습니다. 이 기쁨은 요한의 출생을 전한 천사의 메시지에서 예견되었고(1:14-17), 예수 탄생을 목자들에게 전한 천사의 메시지에 의해 선포 되었습니다(2:10-12).

 

(3) 엘리사벳의 축복(42b-45)

 

여인의 만남은 성령의 감동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도착해서 인사를 받을 때,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보자마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42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42-43)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다가온 순간 성령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래서 태중에 있는 아이가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마리아가 자신보다 어려도 더 큰 은혜를 입었음을 알았습니다.

더욱 엘리사벳의 뱃속에 있던 세례 요한은 마리아 뱃속에게 있는 아기 예수님을 보고 기뻐 뛰노는 것을 느꼈습니다. 세례 요한은 어머니 엘리사벳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성령이 충만해집니다. 엘리사벳도 역시 그 후에 성령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녀도 ‘성령 충만하여’ 자기보다 훨씬 어린 마리아에게 ‘주의 모친’이라 부르고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와의 만남에 감격합니다. 성령 충만한 곳에는 시기와 질투는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이 성취됨에 대한 순전한 기쁨만 있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임신을 축하하며, 믿음으로 순종한 마리아에게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42)라고 축복합니다. 이것은 모든 여인들 중에서 가장 명예롭다는 의미를 수반합니다. 엘리사벳은 과거에 대제사장의 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영광에 연연하지 않고 현실을 받아 들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에 잘 나가던 영화만 생각하면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금부터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다시 과거의 영광이 회복됩니다. 그리고 더 나가서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45)라고 칭송합니다. 마리아가 천사가 하늘의 소식을 전할 때, 믿지 못하고 거부했다면 놀라운 소식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는 다른 사람에게 옮겨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천사의 소식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을 훌륭하게 믿음으로 받아 들렸습니다. 순종하며 나갔습니다. 그녀는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400년에 어두운 역사를 뚫고 온전히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녀를 통해서 모든 인류에게 기쁨의 소식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메시아이신 아기 예수의 탄생의 소식이 자신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마리아처럼 믿음으로 그 사실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리아의 믿음과 겸손 그리고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마리아와 같은 마음이 당신에게 있길 바랍니다.

 

마리아의 찬양(46-55)

하나님의 계획은 때로는 이해하기 어렵고 두려울 수 있지만, 그것을 신뢰하고 따를 때 우리는 참된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여정에서 서로를 지지하고 격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킵니다. 믿음의 길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서로의 신앙과 삶을 나누고 응원함으로써 더욱 강해질 수 있습니다.

 

46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54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46-55)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들은 마리아는 기쁨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이것을 ‘마리아의 찬미’이라고 부릅니다. 곳곳에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의 기도와 비슷해서 비교가 됩니다. 지금도 교회와 성도들에서 찬양으로 불리고 주기도문 다음으로 많이 읽히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을 향한 찬양(46-50)

 

마리아는 하나님께 찬양하면서 자신의 보잘것없이 비천함을 인정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거룩하심과 자비하심으로 자신을 선택하심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겸손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마리아가 하나님께 드린 찬양을 살펴보면, 마리아는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격과 감동을 감추지 못하고 하나님께 찬양합니다. 그녀의 찬양은 비천한 여인인 자신을 하나님의 크신 그릇으로 사용하신 것에 대해 찬양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한 가지만 더 있으면 교만해져 우쭐댑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나이는 어리지만 겸손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마리아의 찬양을 분석해보면 그녀는 하나님께 쓰임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나같이 비천한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곁으로 겸손한 것 같지만, 내면에는 교만함이 까려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마리아처럼 하나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자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리아의 중심을 보시고 사용하신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셔서 보화를 담아주셨습니다. 마리아를 선택하여 그릇으로 사용하신 것처럼 우리도 존귀하게 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항상 찬양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51-55)

 

때로는 성령에 인도하심을 받아서 찬양을 한 경우가 있습니다. 마리아의 찬양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에 대해 찬양합니다. 그녀의 찬양 속에 하나님의 권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실 일들에게 찬양을 드립니다.

 

마리아의 찬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것을 찬양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실 일은, 첫째로 교만한 자들을 흩으실 것입니다(51).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렇게 모든 교만한 자들을 흩으실 것입니다. 두 번째, 권세 있는 자를 내리치시고 비천한 자들을 높이실 것입니다(52). 약한 자들을 무시하고 누르는 사람들을 공의의 하나님께서 평등하게 다스리실 것입니다. 세 번째, 주린 자들을 좋은 곳으로 먹이실 것입니다(53). 예수 그리스도이신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시면 온 세상에 온전한 평화가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습니다.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권세 있고 부유하지만 교만하면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흩으시고 낮추시고 빈손 되게 하십니다. 그러나 비천하고 주리지만 주의 돌보심을 의뢰하는 사람은 높이시고 배부르게 하십니다. 그를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3) 역사를 통한 약속(54-55)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루실 일들에게 대해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약속을 따라서 이 세상을 다스려 갑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이후 모든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약속 중에서 가장 중요한 약속은 바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마리아의 찬양 속에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성격이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입니다.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 약속을 아브라함부터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언약을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약속하셨던 내용들을 자신을 통하여 성취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점점 임하였습니다. 이 예수님을 통해 베푸실 구원은 로마 제국의 정치적인 회복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죄로부터 구원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귀향(56)

우리는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겸손과 감사는 우리의 신앙을 더욱 깊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풍성히 누리게 합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 집에서 함께 지내면서 믿음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서로 격려하며 말씀과 기도에 힘을 썼습니다. 격려는 다른 사람을 세우는 힘입니다.

 

56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56)

 

마리아는 3개월 동안 엘리사벳의 집에 지냈습니다. 엘리사벳의 집은 대제사장을 지낸 집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이 풍부한 가정입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말씀에 붙들려서 경건에 이르기를 힘썼습니다. 그리고 3개월 후에 마리아는 고향 갈릴리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신 분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어가십니다. 이 사역을 감당할 성령충만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순종하는 자들을 서로를 세우고 돕는 일을 합니다.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사람들이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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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1-03)


예수 탄생을 예고 받은 마리아

누가복음 1장 26-38절


 

복음의 핵심에 대한 바른 이해와 바른 자세를 갖는 것은 바른 신앙의 기초입니다.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녀에게 주어진 메시아 탄생에 대한 계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결혼도 하지 않는 여자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만약 마리아가 아이를 낳을 거라는 천사의 말을 의심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 세례 요한의 출생을 예고한 천사 가브리엘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을 마리아에게 알립니다. 마리아는 놀랐지만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순종하며 받아들입니다. 가브리엘이 전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가 어떤 분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탄생을 고지한 천사(26-33)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권능으로만 임하며,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은혜는 항상 아이스크림과 같은 달콤한 초대만이 아닙니다. 때로는 혹독한 터널을 통과해야만 하기 때문에 매우 가혹한 은혜일 수 있습니다. 손가락질당하면서도 해명하지 않고 침묵해야 하는 아픔이 기다리는 은혜였습니다.

 

26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28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29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30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26-33)

 

본문은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으로 향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구주께서 마리아를 통해 세상에 오시겠다고 하는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그 약속을 받은 당사자인 마리아는 순종합니다.

 

(1) 마리아에게 나타난 천사(26-30)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잉태한 지 여섯 달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리 나사렛에 보내었습니다(26).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인 성전에 나타났던 가브리엘은 다윗의 자손 요셉의 약혼녀이며 남자를 알지 못한 마리아를 시골에서 만났습니다(27). 마리아는 한 번 예고된 적이 없었던 하나님의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습니다. 누가는 ‘처녀(παρθένος) ’라는 단어는 두 차례 언급하면서 마리아가 결혼하지 않은 사태의 동정녀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27).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28)라고 인사합니다. 직역하면 ‘기뻐하라! 은혜를 입은 자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은혜는 이후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은혜를 입은 자’는 인간의 노력이나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선택받은 사실을 설명할 때 사용되는 유대적 표현입니다. 마리아는 탁월한 가문이나 높은 지위의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절정으로 쓰일 것이기에, 은혜를 입은 자며 기뻐해야 합니다.

‘주께서 함께하신다’는 하나님께서 목적을 위해 선택하신 사람을 보호하고 도와주실 것을 확인시키거나 약속하기 위해 사용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아비멜렉의 핍박을 브엘세바로 옮겼을 때에 하신 말씀에도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창 26:24)라고 하셨습니다. 참고로 성경에 나온 믿음의 인물들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말씀을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창 28:15), 모세(출 3:12), 기드온(삿 6:12), 예레미야(렘 1:8) 등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놀라자 천사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실을 언급합니다(30).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부르시고 부름 받은 자와 함께하십니다. 구원 역사를 위해 부르시고 부름 받은 사람은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은 은혜를 입은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2) 천사가 메시아 탄생을 예고함(31-33)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임한 은혜가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그 내용은 마리아가 잉태하고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경이로운 소식이었습니다.

가브리엘은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라고 합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처녀로서 이러한 제안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이의 이름은 ‘예수’며, 그는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로 불린 것입니다. ‘예수’의 뜻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것입니다(마 1:21).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입니다. 그가 왕으로 야곱의 집을 영원히 다스릴 것이며, 그의 나라가 영원할 것입니다(32-33).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그토록 고대했던 하나님 나라를 실현할 왕이 시골의 어린 소녀를 통해 태어난다는 소식입니다. 영원한 나라의 왕이 마리아의 아들이 된다는 뜻입니다.

천사의 예고를 들은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임신할 수 있는지 되묻습니다(34). 천사는 성령께서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녀를 덮어주실 것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설명합니다. 태어날 아이는 ‘거룩한 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35). 천사는 노년인 엘리사벳이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됐다고 구체적으로 알려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불가능이 없다고 선언합니다(37, 창 18:14).

 

이는 예수님이 다윗 언약의 성취자이신 메시아로 오심을 보여 줍니다(삼하 7:12-16). 그분이 오셔서 세상 모든 나라의 세력을 완전히 굴복시키실 날을 바라보며 오늘도 죄악의 세력에 밀리지 맙시다.

 

마리아의 반응(34-38)

믿음은 질문을 통과하고 회의를 극복하고 상식을 넘어섭니다. 하나님과 직면할 때만 믿음으로 가혹한 은혜를 수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하지만 마리아에게 인간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가혹한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이 처녀인 자기 몸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수용해야 하는 믿음이 요구되었습니다.

 

34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36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38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34-38)

 

마리아는 천사에게 자신이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하냐고 물었습니다. 천사는 성령이 임할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덮을 것이라며,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마리아는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 하며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한다고 응답했습니다.

 

(1) 동정녀 마리아의 질문(34)

 

마리아는 자신은 남자를 알지 못한데,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질문합니다. 잉태와 관련된 문맥상 마리아가 남자를 알지 못함은 그녀가 처녀임을 뜻합니다(27,29). 사가랴는 자신에게 아들이 있을 것임을 알리는 천사의 말에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라고 질문하며, 자신과 아내가 아이를 얻기가 신체적으로 불가능함을 지적했습니다. 따라서 이와 평행을 이루는 마리아의 질문도 자신이 처녀이므로 아이를 낳는 것이 신체적으로 불가능함을 언급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37절에서 천사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하는데, 이것도 동정녀 마리아의 잉태와 관련된 문맥에 부합합니다.

사가랴의 경우에는 예언을 의심해 벌을 받았습니다(20). 노인이 아들을 가지는 것은 아부라함의 경우와 같은 전례가 있기에 사가랴의 의심은 벌을 받을 만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문제를 제기하고도 벌을 받지 않은 것으로 보아 동정녀 잉태는 구약시대에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남자와 무관하게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이 부분을 마리아가 결혼 후에도 처녀성을 유지하고자 했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합니다”라고 현재형으로 기록한 누가의 관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녀가 결혼 후에도 처녀로 남고자 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2) 성령으로 잉태하게 됨(35-36)

 

천사는 마리아의 잉태가 성령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전하며, 하나님의 ‘능력’(뒤나미스)이 마리아를 덮는다고 한합니다. 그런데 ‘영’(프뉴마), ‘능력’(뒤나미스)은 히포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갈렌 등의 작품에서 임신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정액과 관련해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이 기록하는 천사의 설명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에게 성령을 통한 잉태를 암시합니다. 마리아는 단성생식으로 임신하여 출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하여 출산하게 됩니다.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는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칭호입니다(스 7:28; 4Q246 2:1). 그러므로 천사의 예고는 이 아들이 메시아임을 알린 것입니다. 이 아들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날 신적 메시아입니다.

엘리사벳이 임신한 지 6개월 되었을 때,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방문해 3개월동안 같이 있다가 세례 요한의 출생 전에 떠났습니다(56).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마리아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습니다(42). 그러므로 출산 전까지 임신기간 10개월을 고려하면, 마리아는 천사의 예언을 듣고 한달 내에 임신하고 엘리사벳을 방문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마리아의 순종(37-38)

 

천사는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전능하다고 말합니다. 마리아가 34절에서 남자를 알지 못한다며 의문을 제기했기에, 이에 대해 천사가 하나님의 말씀이 전능하다고 언급하며 대답하는 문맥을 고려하면 이 말씀은 동정녀 탄생과 관련된 것입니다. 마리아는 사가랴와 달리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기초하여 자신에게 이루어질 바를 믿음으로 겸손히 받아들입니다(37,38).

천사는 임신할 수 없던 엘리사벳이 여섯 달째 임신 중인 예를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가능이 없다고 강조합니다. 이에 마리아는 유대식 표현인 ‘당신의 말씀대로 되게 하소서’를 ‘주의 여종’으로서 소망합니다. 자신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될 것을 순종함으로 기다립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들을 낳는 마리아가 겪어야 할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엘리사벳이 자녀를 낳지 못해 사회적 수치를 평생 경험한 것과 대조적으로 마리아는 아이를 낳음으로써 사회적 수치가 평생 따라다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자신의 순종을 통해 비전한 자들을 돌아보시고 높이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계획이 드러나는 것에 감사합니다.

마리아는 하나님께 종속된 종이며, 특별한 관심을 받아야 할 자격이 없는데도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합니다. 52절에서는 비천한 신분인 것을 고백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처럼 낮은 자들을 구원하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은혜를 입은 마리아의 순종을 통해 구원 역사를 진행하십니다. 주의 ‘종’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동역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알고 순종하는 사람을 구원 역사의 동역자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삶을 통해 성취되며, 불가능할 것 같은 사건이 순종하는 종을 통해 이뤄집니다.


복음은 믿기지 않는 소식입니다. 인간의 힘과 상식으로는 해낼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슬픔과 압제로부터 해방과 안식을 주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믿음을 요구하는 소식입니다. 자기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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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1-02)


세례 요한의 탄생 소식

누가복음 1장 18-25절


하나님의 사역을 하다보면 자신의 힘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자칫 잘못해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평을 늘어놓을 때가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말씀하실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그때에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 본문에서 사가랴는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천사의 메시지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를 아이들을 낳을 때까지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또한 약속대로 그의 아내 엘리자벳에게 임신하게 함으로 여자로써 부끄러움을 면합니다. 그리고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세례 요한이 탄생하게 됩니다.

 

천사의 약속에 대한 사가랴(18-20)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가장 지혜로운 생각보다 더 지혜롭습니다. 그러니깐 인간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백퍼센트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인간의 눈에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라도 말씀으로 이루실 수 있습니다. 악인이 의인의 길로, 죄인이 생명의 길로 나아오는 것만큼 주님께 기쁨은 없습니다.

 

18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19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20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18-20)

 

본문에서 세례 요한의 출생에 대한 천사의 메시지(1:13-17)가 있었습니다. 이어서 사가랴는 천사와 이 일에 대해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천사의 메시지를 들은 그는 이런 일은 있을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는 계속 기도해 왔지만, 불가능한 것을 행하지 않고는, 다시 말해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면서까지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리라고는 분명히 생각지 않았습니다.

 

(1) 사가랴의 반응(18)

 

천사의 메시지에 대해 ‘나는 늙었고 나의 아내도 나이가 많은데, 어떻게 그것을 믿을 수 있겠냐?’고 믿지 못하고 항변합니다. 자신의 부부는 늙어서 자연적으로 자녀를 낳을 수 없는 상태임을 감안하면 당연한 의문일 수 있습니다. 자손에 대한 약속 불신의 ‘웃음’이었던 조상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사가랴도 역시 하나님의 벅찬 계획을 듣고는 믿지 못하고 증거를 구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경험에 더 비중을 두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2) 천사의 대답(19-20)

 

하지만, 천사는 항변하는 사가랴에게 자신의 신분을 ‘가브리엘’이라고 밝힙니다. ‘가브리엘’의 뜻은 ‘하나님의 용맹한 자’, ‘하나님께서 보내신 영웅’입니다. 유대인들의 문헌에 의하면 가브리엘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천사입니다(토비트 12:15 등). 그렇다면 천사 가브리엘이 자신을 밝힌 이유는, 가브리엘 천사가 하나님의 대리로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능력으로는 안 되는 것들도,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불신의 대가로 벙어리가 되게 합니다.

 

이것은 얼마나 역설적인 장면입니다.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제사장 역할 했던 사가랴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말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백성들은 성전 밖에서 사가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가랴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함으로 벙어리가 된 것입니다.

 

벙어리가 된 사가랴(20-23)

하나님의 참된 자녀는 모두 하나님의 손길을 통한 훈련되어짐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의 훈련은 우리 각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의 훈련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히 12:5-13)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영원히 불신하고 의심하도록 내버려 주시지 않습니다. 사가랴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훈련을 통해 더욱더 믿음이 성장하도록 배워야 했습니다.

 

21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전 안에서 지체함을 이상히 여기더라 22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하는 대로 있더니 23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21-23)

 

사가랴는 천사가 전해준 약속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9개월 동안 말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불신에 대한 ‘징계’라기보다 그의 믿음을 확증하기 위한 ‘징조’였습니다.

강요된 침묵은 제사장으로 살면서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불신과 의심의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말씀에 대해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성소 밖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성소 밖으로 나온 사가랴의 행동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어떤 이상을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사가랴는 자신의 직무를 마치고 자신의 유다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엘리사벳의 잉태(24-25)

특별한 섬김을 위한 소명은 준비 기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홀로 시간을 갖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이러한 과정이 섬김의 기초가 됩니다.

 

24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25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24-25)

 

사가랴의 아내인 엘리사벳은 남편과는 달랐습니다. 당시 자녀가 없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로 생각했습니다. 오랫동안 자녀가 없었던 사가랴 부부는 힘든 시기를 지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경려하고 그들의 부끄러움을 없애기 위해서 가장 적절한 시간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1) 엘리사벳의 잉태(24)

 

하지만 엘리사벳은 임신한 후 다섯 달 동안 숨겼습니다. 남편의 귀가 멀고 입이 막힌 일과 믿기지 않은 자신의 임신을 경험하면서, 엘리사벳은 서둘러 자랑하여 수치를 면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이 드러내실 때까지(1:36) 입을 다물기로 작정한 듯합니다. 한나처럼 불임의 여인이었던 엘리사벳의 눈물을 찬양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2) 엘리사벳의 반응(25)

 

엘리사벳은 불가능한 임신이 이루어지는 순간 이 일을 하나님의 사역으로 깨닫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임신 후에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라고 말합니다. 아기를 낳지 못해 다른 사람들에게 멸시당했던 엘리사벳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보아 주셔서 아기를 갖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구약성경에서 한나는 성전에서 돌아온 후에 임신했습니다(삼상 1:19-20). 그리고 1년 후에 사무엘을 출산하였습니다. 사가랴도 집으로 돌아온 후 엘리사벳이 약속대로 수태하였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의 말씀에 대한 태도를 보면서, 바른 말씀에 대한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의 올바른 자세가 무엇인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불가능해 보일 뿐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하나님의 사역을 바라보면 전능하신 사역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에게 필요한 것은 일에 대한 능력이 아니라 순종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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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1-01)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누가복음 1장 1-17절


 

진주가 만들어진 과정을 보면, 바다 조개가 먹이를 먹으면서 모래가 따라 들어갑니다. 그 모래는 조개의 부드러운 속살에 상처를 냅니다. 조개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액을 분비합니다. 이것이 굳어져서 딱딱한 알맹이, 즉 진주를 만들어냅니다. 보호액을 분비하지 못하면 조개는 썩어 죽어버리고 맙니다. 세상에서 대부분의 훌륭한 인물들은 고통을 통과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잠시 고통 가운데 있지만, 진주와 같은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 냅니다.

 

  • 누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은 ‘누가’입니다. 그는 의사이며 역사가입니다. 그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했습니다. 두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능력 그리고 초대교회의 생활에 대해 후대 사람들에게 바르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기록한 누가복음에서 확실한 역사성과 진실함을 기록하면서 시작합니다.

 

누가복음의 서문(1-4)

‘역사는 기록한 사람의 것이다.’란 말이 있습니다. 잉카 문명은 16세기 남아메리카 안데스 지방을 중심으로 화려한 문화를 가졌지만, 그 문화에 대한 역사적인 문헌(文獻)들이 없습니다. 점점 화려한 문화는 사라지고 구조물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화려한 역사라고 기록이 없으면 그 역사는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역사는 기록자의 것입니다.

 

1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1-4)

 

누가는 재정적 후원자로 추측되는 ‘데오빌로’에게 이 ‘누가복음’을 헌정합니다. 서문에서 이 복음서를 기록하게 된 배경과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저술 배경(1-2)과 저술 목적(3-4)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저술 배경(1-2)

 

먼저 누가는 누가복음을 기록한 자신만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 기록한 유일한 사람이며 첫 번째 사람이라고 밝히지 않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사실들을 기록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누가도 초대교회에서 잘 보존하고 있는 자료들을 모아서 예수님에 대한 내용을 살펴서 정리하여 기록했던 것입니다. 그가 기록한 모든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순서대로 정리해 나갔던 것입니다.

기록자 누가는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기록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직업이 의사(醫師)였습니다. 그는 직업 정신으로 사물을 정확하게 보고 기록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시각으로 예수님의 생애를 처음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순서에 맞게 의미를 가지고 기록한 사람입니다.

이 글을 받는 대상을 “데오빌로”라고 부릅니다. “데오빌로”가 누구인가에 대해 역사적으로 계속 연구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 확실한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는 ‘각하’라는 특별한 명칭을 사용한 것을 근거로 실제적인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이 주장이 맞는다면 분명히 그는 공직에 몸을 담고 있었던 고위관료였을 것입니다. 또 다른 생각은 “데오빌로”라는 뜻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에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기록한 글이라고 주장한 분들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대상이 누구든지 간에 깊은 관심은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누가가 누가복음을 기록한 목적입니다. 이것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데오빌로’가 누구든지 간에 그 사람을 위해 예수의 생애를 소개하려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1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고(1)

 

초대교회 당시에 예수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도대체 예수란 사람이 누구 길래, 온 유대 지방을 뒤흔들어 놓았을까?’란 관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시에 예수님에 대한 돌아다니는 수많은 자료들을 모아서 역사적이고 사실적이고 신앙적으로 정리했습니다. 그의 정리한 기록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누가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오신 그리스도로 묘사 하였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에 대해 혼란스럽지 않고 분명하게 정리되었습니다. 그는 ‘데오빌로’를 위해 수고했지만, 이 아름다운 수고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적으로 좋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수고로 그 후에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해 분명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2) 저술 목적(3-4)

 

누가는 예수님에 대해 모든 일을 처음부터 주의 깊게 살폈습니다. 그리고 데오빌로에게 정확하게 기록하여, 그 동안 데오빌로가 이미 배웠던 사실에 대해 더욱 분명해지고, 신앙이 확고해지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다른 복음서들보다 세례 요한의 출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하여 자세하게 진술합니다(1:5-2:52). 그리고 세례 요한의 등장과 예수 그리스도의 수세 사건도 상세하게 서술합니다(3:1-22).

 

오늘날은 세속 세계는 물량주의가 거센 파로로 밀려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큰 것만을 숭상하고 작은 것은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작은 것도 귀한 것이 많습니다. 특히 자신의 자리가 작아 보인 일이라도 충성하는 것은 정말 소중한 일입니다. 특히 누가처럼 한 영혼이라도 끝까지 사랑하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라도 끝까지 사랑하며 그들에게 최선을 다 해서 복음을 증거 합시다. 그러면 누가와 같은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요한의 탄생을 예고하는 주의 천사(5-17)

개인의 어려움과 고통이 있습니까? 본문의 경우를 보시길 바랍니다. 한나도 아이를 낳지 못하는 고통이 있었지만, 그녀는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훌륭한 믿음의 사람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을 이끌러갈 사무엘 선지자가 한나의 기도를 통해 탄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고통을 통해 민족적으로 크게 사용할 것입니다. 고난은 숨겨놓은 보물입니다. 고난의 기간에 불평하는 사람은 크게 쓰임받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엘리사벳처럼 한나처럼 크게 쓰임받기 위해 넓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5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5-7)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전에 메시아를 예비한 사람들을 먼저 소개합니다. 그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의 일생과 사역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려 오신 메시아임을 증명합니다. 그는 세례 요한의 출생에 대해 다음과 설명합니다.

 

누가는 중보자인 세례 요한에 대해 거론하면서 그의 출생 시대와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그 시간적인 배경을 ‘유대 왕 헤롯(주전 37년~주후 4년)’라고 배경을 언급합니다.

세례 요한의 부모인 사가랴와 엘리사벳에 대해 먼저 소개합니다. 헤롯왕 통치 말기에 아비야 반열에 속한 제사장으로 그의 아내는 엘리사벳은 아론의 자손이며, 경건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불행이도 노년까지 자녀가 없는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을 구원의 역사에 크게 사용하셨습니다.

당시에 자녀가 없는 부부는 수치와 조롱 거리었습니다. 그들은 평생 동안 바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자녀가 없는 고통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녀가 없는 상황에 대해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경건하게 섬겼습니다.

 

모든 말씀을 따라 경건하게 살았지만, 자식이 없는 고통이 따랐습니다. 엘리사벳이 늙어서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지만 그들은 소망을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때로는 개인의 작은 고통이 큰 역사를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개인적인 고통을 통해 큰 사람을 만드십니다. 그렇게 훈련된 사람들을 통해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요한의 탄생 예고(8-17)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혼돈에서 질서를 만들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고통을 통한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갑니다. 자녀가 없는 사가랴 부부에게도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절망 가운데 있던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시려고 찾아오셨습니다.

 

8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9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10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11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12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13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4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15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16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17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8-17)

 

사가랴가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때, 천사가 나타나 그의 기도가 응답되어 아들 요한이 태어날 것을 예고합니다. 요한은 큰 자로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 그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와서 백성을 준비할 것입니다

 

(1) 성전에서 섬기는 사가랴(8-10)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었지만 자녀가 없었습니다.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의지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긍휼을 기다리는 사s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주실 때, 영예로운 회복은 시작될 것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발휘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어려움을 결코 외면하시지 않았습니다.

 

(2) 사가랴에게 나타난 천사(11-14)

 

두 사람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다 끊어진 후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메시아의 선구자가 될 세례 요한을 잉태를 예고하십니다. 사라의 죽은 태에서 생명을 내셨으며, 라헬과 한나의 불임(不姙)을 창조의 모판으로 삼으셨습니다.

한편 사가랴의 반응은 성소에서 주님의 사자를 만나자 무척 두려워했습니다. 이는 습관화된 제사 행위로 그가 제사의 참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그분의 임재 속에서 온 마음을 다해 드리는 산 제사가 돼야 합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의 간구에 응답하시어 ‘요한’을 약속합니다. 이것은 부모의 기쁨에 그치지 않고 이스라엘의 구속을 기다리는 의인 모두에게 종말론적인 기쁨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3) 세례 요한의 부모님 준비(15-17)

 

요한을 태에서부터 종말의 선물인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었습니다(렘 33장; 겔 36장). 장차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단 12:3), 아비의 마음을 아는 자녀가 되게 할 사람으로 준비시키실 것입니다.

출생이 예고된 세례 요한은 나면서부터 구별된 나실인이었고, 엘리야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길을 준비할 자였습니다. 또 요한은 백성들이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고 주님을 맞을 준비가 되게 할 것입니다(말라기 4:5,6). 성도들이 고된 삶 속에서도 절망하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때가 되면 세상 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풍성한 상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에 앞서 메시야를 예배한 세례 요한의 출생을 먼저 다르고 있습니다. 한 가정의 아픔이었지만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가장 강력한 사역을 이루어 가신 것입니다. 고난이나 환란은 하나님께서 예비한 축복의 과정입니다. 불평과 불만으로 그 과정을 망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감사함과 기도함으로 축복을 이루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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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31-01)


블레셋과 전쟁에서 전사한 사울

사무엘상 31장 1-13절


 

인생에 있어서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면, 대부분 죽음이라고 답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마지막이요 이별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인생의 최후를 맞이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 목숨이 다하면, 새로운 세상을 시작합니다. 인생은 새로운 탄생에 즐거움도 있지만, 죽음을 통한 인생의 궁극적인 방향과 목적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 본 장은 사울의 최후를 소개합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망했습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길보아 산에서 죽임을 당했는데, 사울의 세 아들들도 죽었습니다. 블레셋 병사가 쏜 화살에 사울도 맞아서 중상을 입고 쓰러졌습니다. 사울은 살아날 가능성이 없음 깨달고 스스로 칼 위에 엎드려져 죽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 매달았는데, 야베스 사람들이 그 사울과 아들들 시체를 야베스로 가져다가 장사지냈습니다.

 

블레셋 전쟁에서 패배한 사울(1-2)

반복되는 실수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면 겸허하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신의 야망과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게 되어지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처음 실수할 때, 하나님께 자신을 내려놓고 매 순간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더 큰 문제를 야기하지 않습니다.

 

1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2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추격하여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1-2)

 

본문이 ‘사무엘상’의 마지막입니다. 연극으로 말하면 한 막을 끝내고, 서서히 막을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내용으로 2막이 전개될 것입니다. 사무엘상은 전반부는 사무엘 선지자의 인생에 대해, 후반부의 주인공은 사울의 전 생애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울의 최후를 그림으로 끝내고 있습니다.

 

(1) 도망하는 이스라엘(1)

 

본문 31장은 28장에서 엔돌의 신접한 여인에게 신탁을 받은 사울의 이야기와 다시 연결됩니다.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불안한 사울은 전쟁이 어떻게 될지 묻기 위해 여호와를 찾았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고, 결국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신탁을 듣게 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하고 내일 전투에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죽을 것이라는 신탁을 받습니다. 사울은 이런 기막힌 신탁을 듣고 그 밤에 돌아갔고, 그 다음 날이 바로 31장의 블레셋과의 전쟁입니다.

그런데 31장에서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투는 아주 간단하게 서술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쳤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하였고, 일부는 길보아 산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참고로 고대 전투의 무기는 칼이나 활, 창 등 모두 관통상을 입히는 무기들이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자’라는 단어는 ‘관통상을 입은 자’라는 단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변변하게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하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것은 28:19의 예언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 넘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손에 아말렉을 넘기셔서 아말렉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간 것과 반대되는 모습입니다.

 

(2) 사울의 세 아들(2)

 

블레셋 군사들은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합니다. 예언대로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세 아들 요나단, 아비나답, 말기수아를 함께 죽습니다.

2절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사울의 세 아들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집요하게 추적하여 이들을 죽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예언하신 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요나단도 같이 죽는데, 그는 비록 아버지의 뜻을 어겨 다윗을 살려주고, 자신과 아버지의 왕위를 위태롭게 하여 원수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아버지의 창에 죽을 뻔도 하였지만, 끝까지 아버지를 떠나지 않고 충성하며 사울의 아들로 살다 사울의 아들로 죽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살았던 이유는 인생의 우선순위를 잘 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생에서 우선순위의 첫째를 여호와 하나님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다윗을 살려준 것입니다. 다음 순위는 왕이자 아버지인 사울에 대한 충성과 사랑입니다. 사울이 자신을 미워하고 싫어했지만, 아버지의 아들로서, 한 나라의 왕자로서 의무를 다하며 아버지 곁에 머물렀고, 아버지와 같이 죽었고, 죽어서도 아버지가 받는 수치와 모욕을 함께 받았습니다. 요나단은 자신이 섬기는 두 아버지, 하나님과 사울에게 충성하며 살다 용사로서 전사하였습니다.

 

사울의 죽음(3-7)

나이가 들수록 힘이 생길수록 조심해야 합니다. 인생 끝에는 정말로 하나님만이 우리의 왕이시고 주인이시라고 진심으로 고백하고 다 내려놓고 그분만이 높임을 받으시도록 모든 것을 쏟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평생 했는데, 말년의 모습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못하다면 비극적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섬기는 교회들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보다 못하다면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입니다.

 

3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잡으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에게 중상을 입은지라 4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 5무기를 든 자가 사울이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6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를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 7골짜기 저쪽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요단 건너쪽에 있는 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도망한 것과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죽었음을 보고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하매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러 거기에서 사니라(3-7)

 

아들들의 죽음을 간단하게 언급한 것과는 달리 사울이 어떻게 죽었는지 본문은 자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울 왕은 아마도 자신이 패했다는 것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로는 적에게 붙잡혀 처참하게 모욕을 당하며 죽임당하게 될 것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1) 사울의 죽음(3-4)

 

3절에서 ‘사울이 패전하매’로 번역되었는데, 원문의 뜻을 살려 해석하면 전쟁이 사울에게는 감당할 수 없이 무거운 것이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동안 사울의 전쟁은 하나님께서 함께해주셨거나 요나단이 함께하거나 다윗이 함께 싸웠습니다. 그동안은 하나님께서 함께해주셨기 때문에 무거운 줄 모르고 감당할 수 있었지만, 혼자 싸우는 지금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겁고 힘든 짐이 된 것입니다. 결국 지금은 하나님께서 사울과 함께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사울은 싸우다 힘에 부쳐 도망하였고, 도망하다가 활에 맞아 중상을 입었습니다. 사울은 더는 도망할 수 없다는 것과 오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신탁이 이루어질 것임을 간파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왕 죽을 바에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의 손에 모욕적으로 죽지 않고 덜 모욕적인 죽음을 택하고 싶었습니다.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란 표현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을 비하하여 부를 때 쓰는 표현으로, 다윗이 골리앗에게 사용했었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무기 든 자인 수행원에게 죽여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는 무서워서 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사울은 스스로 자기 칼 위에 넘어져 죽습니다.

 

(2) 전쟁의 결과(5-7)

 

사울의 무기 든 자도 사울의 죽음을 보고 따라 죽습니다. 6절은 사울과 그의 아들들과 무기 든 자의 죽음을 다시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신탁대로 같은 날 모두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사울은 평생을 블레셋과 싸우다 결국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7절은 전쟁이 완전히 끝난 후의 상황을 설명하는 부분으로 이스르엘 골짜기 건너편에 있던 사람들은 모든 것을 남겨두고 도망갔고, 요단 동편에 있던 사람들도 도망하였습니다. 사울이 죽은 후에 블레셋은 북으로 이스르엘 지역과 동쪽으로 요단 동편까지 진출하여 살았다고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런 블레셋의 확장은 사울이 왕권을 잡은 초기 상황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입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세워달라고 요청한 이유가 블레셋의 강성함을 보고 그들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는데, 사울의 마지막 순간의 상황은 왕을 세운 효과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강성하기 위해서는 왕정제도가 이스라엘을 강하게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줍니다.

 

사울의 죽음과 장사(8-13)

아무리 좋은 자리에 앉아있어도, 아무리 권력과 재물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삶은 비참한 말로(末路)를 걷게 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끝까지 움켜쥐려고 애써도, 그것들도 인생은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진솔하게 내려놓을 때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고 자신의 야욕에 매여 몸부림쳤던 사울 왕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입니다.

 

8그 이튿날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벗기러 왔다가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길보아 산에서 죽은 것을 보고 9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의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백성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땅 사방에 보내고 10그의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그의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으매 11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12모든 장사들이 일어나 밤새도록 달려가서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내려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가서 거기서 불사르고 13그의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하고 칠 일 동안 금식하였더라(8-13)

 

전쟁에서 승리한 블레셋은 사울 왕의 시신을 확인하고 시신을 능욕합니다. 이 사실은 신전에 고함으로써 자기 신 아스다롯이 여호와를 이긴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울의 패배는 하나님의 패배가 dsl라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신 결과였습니다.

 

(1) 벧산 성벽에 매달린 사울(8-10)

 

사울의 시체를 모욕하는 블레셋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다음 날 블레셋 사람들은 전리품을 챙기기 위해서 전쟁터를 돌아다녔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물건이 귀했기 때문에 죽은 병사들이 입고 있던 갑옷이나 무기들을 전리품으로 챙겼습니다.

이렇게 돌아다니던 중에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과 세 아들이 길보아 산에서 죽은 것을 발견합니다. 사울의 죽음을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의 머리를 베고, 갑옷을 벗기고 사자들을 보내어 블레셋 전역과 산당에 사울의 죽음을 알립니다. 이스라엘의 왕 사울의 죽음은 블레셋에게는 큰 경사이며 축하할 일이기 때문에, 산당에 알려 감사의 제사를 드리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의 죽음을 감사하기 위해 사울의 갑옷은 아스다롯 신전에 보관합니다. 이전에 골리앗을 죽여 머리를 베고 그의 칼을 놉에 있는 성소에 둔 것과 비슷합니다. 이제 상황이 역전되어 블레셋에게 모욕을 주던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모욕을 받고 있는 모습이 더 잘 드러냅니다. 그의 시체는 이스르엘 산지에 있는 벧산 성벽에 못 박아 놓는데, 12절을 보면 사울의 시체와 함께 세 아들의 시체도 같이 못 박아 놓았습니다.

이것은 사울의 시체가 안장되지 못하게 하여 죽은 자를 철저하게 욕보이는 행동입니다. 사울이 두려워하던 일이 죽은 후에 자신의 시체에 행해진 것입니다.

 

(2) 장사하는 야베스(11-13)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의 장례를 치름이 소식이 요단 동편 지역에 살고 있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알려집니다. 사울은 이전에 암몬의 손에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구해준 적이 있었습니다(삼상 10:27-11:15), 그것에 보답하기 위해 길르앗 야베스의 용사들은 먼 길을 밤새 달려와 죽음을 무릅쓰고 사울과 사울의 세 아들의 시체를 수습합니다. 시신을 야베스로 가져가 그곳에서 화장하고 야베스에 있는 에셀나무 밑에 그의 뼈를 묻어주고, 그를 위해 7일 동안 금식하며 애도를 표합니다.

12-13절에서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행동을 자세히 설명하는데, 이들이 사울에 대해서 매우 용감하고 신의 있고 예의 있게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처음 왕이 되어 아직 순수할 때 이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열망 하나로 이스라엘 사람을 모아 암몬과 전쟁해서 이들을 구했는데, 그 은혜를 자신이 죽은 후에 이와 같은 정중한 장례로 보답 받게 된 것입니다. 선을 선으로 갚으시고 악을 악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아 왕으로 뽑혔던 늠름하고 순수했던 사울은 왕권을 잡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하나님께 버림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사울은 하나님만이 진정한 왕이시자 우리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잊는 순간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때를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사울은 40년이라는 통치를 했지만, 그의 마지막은 매우 비참했습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면서 살아갈 때 하나님께 잘했다 칭찬받은 성도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인생의 결말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도 가장 큰 숙제입니다. 아름다운 인생으로 마감하려면, 처음부터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최후까지 책임을 져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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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30-02)


아멜렉과 전투에서 승리한 후 나누는 다윗

사무엘상 30장 21-31절


 

요즘 우리나라에 지도자들을 향해 ‘리더십이 부족하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풀러신학교 교수인 로버트 클린턴은 ‘리더십이란 일정 기간 리더의 특정한 행동을 통하여 팔로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 그리고 리더와 팔로워 모두 상호 이익을 주는 목표를 수행하는 것, 그 역동적인 과정을 말한다’라고 주장합니다. 오늘날 많은 리더들이 리더라는 이름으로 팔로워에게 순종을 강요하고 팔로워들에게는 전혀 이익이 되지 않고 리더에게만 이익이 되는 그런 목표들을 강요하는 잘못된 리더십이 보여지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 아멜렉과의 전쟁이 끝난 후 다윗이 취한 전쟁의 후속 절차에 관해 기록합니다. 다윗은 시글락으로 돌아오는 길에 브솔 시내에서 전에 너무 피곤하여 따라오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도 전리품의 같은 분량을 몫으로 나누어 주었는데, 이것이 규례가 되었습니다. 또 ㄷ윗은 노략물 중에서 일부를 취하여 자기와 관계있던 헤브론을 포함하여 여러 지역의 유다 장로들에게 선물로 보냈습니다.

 

전리품 분배의 원칙(21-25)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혜택은 자기 수고의 결과만이 아니라 하나님 은혜의 결과이고 다른 사람들 희생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는 물론이고 어떤 사람 앞에서든 우리가 겸허해야 하며 소유나 지식의 여부로 판단하지 않고 쌓은 일보다 나누는 일을 위해 더 기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21다윗이 전에 피곤하여 능히 자기를 따르지 못하므로 브솔 시내에 머물게 한 이백 명에게 오매 그들이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을 영접하러 나오는지라 다윗이 그 백성에게 이르러 문안하매 22다윗과 함께 갔던 자들 가운데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 다 이르되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자의 처자만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 하는지라 23다윗이 이르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24이 일에 누가 너희에게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25그 날부터 다윗이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21-25)

 

다윗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이 전쟁이 마치 자신들의 능력으로 승리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고생했기 때문에 자신들만 수혜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1) 브술 시내에 머물렀던 사람들(21)

 

다윗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빼앗겼던 모든 것을 되찾습니다. 덤으로 아말렉이 노략한 것까지 가지고 귀환하던 다윗 부대는 브솔 시내로 오게 되었습니다. 고, 그곳에서 죽을 것같이 힘들어서 그곳에 머물게 했던 이백 명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은 금의환향하는 다윗 일행을 이곳에서 맞이합니다. 본문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남은 이백 명의 군인들은 일종의 퇴로를 확보하는 역할도 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시글락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예비부대로 남았던 것입니다. 이들의 만남은 참으로 가슴 찡한 장면입니다. 남아 있던 이백 명은 혹시라도 다윗의 부대가 잘못되지는 않았을지 혹은 자신들이 안 가서 전쟁에 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며 한편으로는 싸우게 될지도 모를 상황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다윗이 무사히 돌아오자 반갑게 다윗 일행을 마중하였습니다.

 

(2) 악한 자들의 비난(22)

 

다윗도 이들을 보자 가까이 가서 ‘잘 있었느냐’며 인사합니다. 이 말은 이제 몸은 괜찮은지, 다른 곳에서 공격을 받은 것은 아닌지 하는 다윗의 모든 걱정이 담긴 인사입니다. 이번 전투에는 함께하지 못했지만 다윗과 늘 동고동락하던 전우이기 때문에, 서로의 무사함을 보고 반가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훈훈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다윗과 같이 아말렉과의 전투에 참여했던 자들 중에 몇몇 사람이 남아있던 이백 명은 함께 전투에 가지 않았으므로 이들에게는 전리품을 나누어주지 말자는 것입니다. ‘도로 찾은 물건’이라고 번역하였지만, 단순히 원래 빼앗겼던 물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말렉 사람에게서 빼앗아온 모든 전리품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대신에 되찾아온 그들의 아내와 자녀들만 데리고 가게 하자고 요구합니다. 본문은 이들을 ‘모든 악하고 불량한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유배 명의 군사들 사이에 특별히 약하고 불량한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렇게 동료들에게 노획물을 하나도 나누어 주지 말자는 사람들을 ‘악하고 불량한 자들’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호칭 속에 이미 이들에 대한 화자의 평가가 들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화자가 종종 인물의 성격이나 상품을 평가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25장의 별과 아비가일의 경우입니다. 화자의 집이나 평가 기준은 하나님의 관점과 동일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들의 평가를 우리는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말을 들은 다윗은 자신의 모든 군사들을 향하여 ‘나의 형제들’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육백 명 모두가 그동안 함께 고락을 나는 동료이자 형제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표현입니다. 다윗은 이 전쟁이 우리가 싸워 승리를 얻은 전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며 적군을 우리 손에 넘겨주신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전리품도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전투에 직접 참여한 자들이든 후방에서 미물러 있던 자들이든 동일하게 분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동안 다윗은 전쟁이 여호와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몸소 실천하면서 살았습니다. 혼자 싸우는 것도 소수의 병사로 싸우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다윗은 그 사실을 자기와 함께한 군사들에게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전쟁이 여호와의 손에 있기에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도 여호와께서 거저 주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백 명이 전쟁에 나갔는지 여부가 승패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뜻이며, 전쟁에 참여한 사백 명 대신에 이 이백 명이 나갔어도 이겼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전쟁을 이기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전쟁에 참여한 자들만 전리품을 갖고 참여하지 않은 자들은 기여도가 없기 때문에 전리품을 나누어 주지 않는 것이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모두 잘 살 수 있도록 골고루 나누어 가져야 한다고 가르쳐줍니다.

 

(3) 다윗의 규례(23-25)

 

다윗은 이것을 이스라엘의 규례와 율례로 삼았는데, 오늘날까지 그 원칙이 지켜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의 원자들로 법률을 만들고 배상을 다스리는 왕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지위나 제품이나 아직 등을 자신이 잘해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것이 하나님께서 거지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좋은 가정환경, 좋은 부모 자랑스러운 외모, 지적 능력, 적당한 시기 좋은 친구나 선생님, 좋은 배우자, 훌륭한 자식 등 우리 인생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들은 내 노력을 통해서 얻은 것보다 하나님께서 거지 주신 것들이 더 많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처음부터 가진 게 별로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은 그것을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이웃들과 나누라고 주신 것이며, 서로를 도움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을 느끼며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전리품을 유다의 장로들에게 보내는 다윗(26-31)

우리의 삶에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로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후대에 두고두고 원리로 삼을 만큼 항상 자신의 승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알아야 합니다. 삶에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없으면 그곳에는 반드시 차별이 찾아오고 인간이 영광을 얻게 됩니다.

 

26다윗이 시글락에 이르러 전리품을 그의 친구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어 이르되 보라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에게 선사하노라 하고 27벧엘에 있는 자와 남방 라못에 있는 자와 얏딜에 있는 자와 28아로엘에 있는 자와 십못에 있는 자와 에스드모아에 있는 자와 29라갈에 있는 자와 여라므엘 사람의 성읍들에 있는 자와 겐 사람의 성읍들에 있는 자와 30홀마에 있는 자와 고라산에 있는 자와 아닥에 있는 자와 31헤브론에 있는 자에게와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왕래하던 모든 곳에 보내었더라(26-31)

 

다윗은 전리품을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나누어 주었고, 전쟁과 전혀 상관없는 유다 13지역의 장로들에게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누어줍니다. 다윗에게 중요한 것은 승리 후에 얻은 진리품이 아니라, 승리를 주신 여호와의 이름이 유다 각처에 알려지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구하는 자는 전리품에 초연할 수 있습니다.

 

(1) 유다 장로들에게 전하는 다윗의 말(26)

 

다윗은 군사들과 함께 전리품을 가지고 시글락으로 돌아온 뒤에 그중 일부를 유다의 장로들에게 선물로 보냅니다. 그는 유다의 장로들을 ‘동료’ 혹은 ‘친구들’이라고 부르는데, 다윗도 유다 지파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노획한 물건들을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유다 사람들과 나누며, 여호와께서 자신을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이기게 하셨다는 사실을 널리 알렸습니다.

 

(2) 선물을 받은 성읍들(27-31)

 

다윗이 노획물들을 유다 장로들에게 보낸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첫째는 아말렉에게 노략 당한 유다 지파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말렉이 이번에 노력한 지역에 유다 지방과 갈렙 남방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가지고 있는 물품들 중에는 아말렉이 유다 지방에서 빼앗아 온 것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유다 장로들에게 선물한 것은 아말렉에게 빼앗긴 것의 일부를 돌려주면서 그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입니다.

둘째로, 본문에서 언급된 성들은 모두 유다 남부에 위치해 있는데, 이것은 결국 다윗이 왕으로 등극할 때를 대비해서 지지 세력을 만들어 놓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31절을 보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왕래하던 곳’에 보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다윗이 블레셋에 있는 동안 틈틈이 이들과 교류하며 자신이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맨 마지막에 언급된 헤브론은 겐 사람의 지역이며, 후에 다윗이 왕으로 추대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유다 지파 사람들은 후에 그가 왕으로 등극할 때 확실한 그의 세력이 되어주었습니다.

 

다윗은 아주 곤란한 상황에 놓였던 아벡에서 극적으로 빠져나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감사하며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끔찍하기 그지없었고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왕이라고 하는 나에게 계속해서 시련을 주실까 하고 생각하며 원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지나고 현재의 시점에서 일련의 사건들을 되돌아보면, 아말렉의 노략질로 인해 그가 잃은 것은 하나도 없었고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목도하였으며, 더 많은 노획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왕으로서 위엄을 세우고 또한 유다 지파 사람들과도 돈독한 유대관계도 형성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마 유다 사람들은 사울과 비교하며 다윗을 왕의 재목으로 생각하고 지지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닥친 시련을 전부 바꾸어 다윗이 왕이 되기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것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는 기회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며 사는데, 왜 이렇게 많은 시련과 어려움이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평탄한 길만 걷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원래 주어진 인생의 험한 길을 안전하게 만들어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움켜잡으면 없어지지만 연약한 자들을 위해 쓰고 나누어주면 더욱 풍성해집니다. 지금까지 당신이 움켜잡으려고만 했다면 이제부터는 나누어 주는 훈련을 하시길 바랍니다. 움켜잡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소외된 사람이 없습니까! 그들을 먼저 배려해주는 성도가 되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풍성하게 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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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30-01)


아말렉 공격에서 회복한 다윗

사무엘상 30장 1-20절


 

모든 조건이 다 준비되어 있을 때,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좋지 않은 가운데 일을 이루어 내는 사람들이 더 위대합니다.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바이올 리스트인 파가니니(Paganini)가 프랑스에 첫 번째 연주하러 갔을 때, 바이올린 줄이 끊어져 버리는 불상사를 겪었습니다. 그것에 연연하지 않고 조(調)를 바꾸어가면서 연주를 했습니다. 나중에 줄이 끊어져서 하나만 가지고도 열심히 연주를 했습니다. 프랑스의 귀족들을 그를 보면서 찬사를 보냈던 것입니다. 조건 때문에 걱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조건 때문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거나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전쟁하기 위해서 군대를 소집할 때 아기스를 따라 전쟁터에 불려갔던 다윗은 블레셋 방백들의 반발로 전쟁에 참여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아기스는 매우 유감스러워하였지만,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다윗의 입장에서는 잘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이지 않는 손길로 도와주신 것입니다. 다윗은 그 길로 군사들을 이끌고 시글락으로 돌아오지만, 시글락은 다윗이 출전한 동안 아말렉 사람들에 의해 노력을 당한 상태였습니다.

 

아말렉이 시글락을 공격(1-6)

이 시대는 자신을 믿으라고 압력을 가하고 마취제처럼 긍정의 삶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참된 긍정은 하나님께만 기초해 있습니다. 그것은 부정적인 삶의 조건과 자신의 부정적인 한계에 대한 솔직한 시인에서 시작합니다. 아무리 절망스러운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패배를 주시지 않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께선 주시는 확신으로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1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사흘 만에 시글락에 이른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네겝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2거기에 있는 젊거나 늙은 여인들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3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읍에 이르러 본즉 성읍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4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5(다윗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도 사로잡혔더라) 6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1-6)

 

시글락에 돌아온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아말렉 사람들이 시글락을 침략하여 불사르고 모든 여인들을 사로잡아 갔음을 보았습니다. 소리를 높여 울고 백성들이 자기들의 자녀로 인하여 마음이 슬퍼 다윗을 치고자 하였습니다. 다윗은 다급하였지만,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어서 제사장 아비야달에게 에봇을 가져 와 아말렉 군대를 좇아가면 미치겠느냐고 여호와께 묻자 반드시 미치고 빼앗긴 것을 도로 찾으리라는 응답을 받습니다.

 

(1) 아말렉의 약탈(1-2)

 

다윗은 이스라엘과 전쟁하지 않게 되자 자신의 거주지인 시글락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벡과 시글락의 거리는 대략 3일 거리이기 때문에, 다윗과 그의 군사들은 사흘 만에 시글락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다윗과 군사들이 모두 빠져나간 사이에 아말렉 사람들이 유다 남방과 시글락을 쳐들어와 노략합니다. 특히 시글락을 불사르고 그곳에 있는 모든 여인들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사로잡아 갔습니다. 이것은 지난번에 다윗이 아말렉의 거주지를 쳐들어가 모두 죽이고 가축들을 노략한 것에 대한 보복입니다. 다윗과 그의 군사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이스라엘과 전쟁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돌아오고 있었고, 성읍에 도착하고서야 사태를 눈으로 확인합니다. 여기서 2절에 나온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은 아말렉이 시글락에서 저지른 만행을 다윗과 그의 군사들의 눈으로 다시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2) 사로 잡혀간 사람들(3-5)

 

2절에서는 젊거나 늙은 여자들이라고 표현된 여자들이 3절에서는 그들의 아내와 자녀들이라고 표현됩니다. 이를 통해 이들이 느끼는 분노와 슬픔을 좀 더 잘 느끼게 해줍니다. 이 모습을 본 다윗과 및 함께한 백성들이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그와 함께한 백성’들은 군사들뿐만 아니라 시글락에 살아남은 일반 사람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시글락에 살면서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이들의 슬픔과 낙심이 얼마나 컸는지 기운이 없을 때까지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성경에서 괄호에 들어있는 5절은 후대 저자가 설명을 삽입하였다는 표시이며, 이것을 보면 사무엘서가 원래 있던 본문이 후대에 한 번 이상 누군가에 의해 편집되어 현재의 최종 본문으로 확정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흔적은 신명기에서도 종종 나타납니다(신 3:11,13-14). 여기서 백성들의 아내들이나 자식뿐만 아니라 다윗의 아내들인 아히노암과 아비가일도 사로잡혀 갔다고 설명함으로써 다윗도 이번 노략질의 희생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현실에 대한 백성들의 상실감과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 이들은 다윗을 돌로 치자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로 인해 다윗은 목숨과 지도력에 큰 위협을 받게 됩니다.

 

(3) 여호와를 의지하는 다윗(6)

 

다윗의 입장에서는 어려움 하나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극적으로 해결하고 돌아왔는데 더 심각한 재앙에 직면한 것입니다. 백성들과 함께 울며 망연자실하던 다윗은 백성들이 죽이자고 자신을 향해 덤비는 고함에 정신을 차립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도와주시고 조금 전에도 도와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여 다시 용기를 얻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또다시 여호와를 부르고 여호와를 의지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윗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위기를 만났을 때 울며 한탄만 하면서 무기력하게 있을 것이 아니라, 살아계시며 우리가 부르짖을 때 응답하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말렉을 추적하는 다윗(7-10)

예수님께서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합당한 모습입니다. 오늘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속도 때문에 외면당하고 무시당하고 상처 받은 영혼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한 소자에 대한 사랑, 철저한 순종을 통해 마지막 믿음의 시험을 잘 통과한 것입니다.

 

7다윗이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비아달이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가매 8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 9이에 다윗과 또 그와 함께 한 육백 명이 가서 브솔 시내에 이르러 뒤떨어진 자를 거기 머물게 했으되 10곧 피곤하여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하는 이백 명을 머물게 했고 다윗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쫓아가니라 11무리가 들에서 애굽 사람 하나를 만나 그를 다윗에게로 데려다가 떡을 주어 먹게 하며 물을 마시게 하고 12그에게 무화과 뭉치에서 뗀 덩이 하나와 건포도 두 송이를 주었으니 그가 밤낮 사흘 동안 떡도 먹지 못하였고 물도 마시지 못하였음이니라 그가 먹고 정신을 차리매 13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에게 속하였으며 어디에서 왔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애굽 소년이요 아말렉 사람의 종이더니 사흘 전에 병이 들매 주인이 나를 버렸나이다 14우리가 그렛 사람의 남방과 유다에 속한 지방과 갈렙 남방을 침노하고 시글락을 불살랐나이다 15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그 군대로 인도하겠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당신이 나를 죽이지도 아니하고 내 주인의 수중에 넘기지도 아니하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당신을 그 군대로 인도하리이다 하니라(7-15)

 

동족과의 전쟁을 피했지만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거주하였던 시글락에은 불타고 여인들이 사로잡혀 가게 되는 충격적인 상황을 맞이하고 통곡속에 빠진 그들의 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돌로 치려고 하는 다급한 상황 속에서도 다윗은 여호와를 힘입어 용기를 얻어 하나님께 묻고 응답을 받아 아말렉을 추격하는 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1) 여호와의 응답(7-8)

 

정신을 차린 다윗은 자신과 함께 있는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에봇을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을 앞두고 이에 대해 여호와께 묻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군대를 따라잡을 수 있을지를 물었을 때,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쫓아가라고 명령하시면서 그들을 따라잡을 뿐만 아니라 빼앗긴 것 모두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이번 전쟁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여호와의 응답을 받지 못했던 사울의 모습과 대조됩니다. 여호와께로부터 오는 응답이 여호와와 함께한 자가 누리는 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다윗은 군사를 이끌고 브솔 시내로 갑니다.

 

(2) 지친 이백 명의 사람들(9-10)

 

여기서 다윗은 군사를 두 부대로 나누는데, 너무 지쳐 계속 행군하기 어려운 이백 명은 브솔 시내에 남기고 사백 명만 추려서 계속 추격하였습니다. 다윗과 그의 군사들은 사실 3일을 걸어서 아벡에서 돌아온 직후이기 때문에 체력적으로 힘든 상태였습니다. 이들 중에 좀 더 약한 군인들은 계속되는 추격전을 감당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본문에 따르면 이들은 거의 죽을 만큼 피곤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들을 배려하여 이백 명은 브솔에 남겨 두었습니다. 사실 육백 명도 아말렉을 추적하여 그들의 거주지를 공격하기에는 많은 숫자가 아닙니다. 17절에 따르면 도망한 아말렉 군사들의 숫자만 사백 명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아말렉 군대의 숫자는 다윗의군사 숫자보다 훨씬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전쟁은 여호와의 손에 있을 뿐 사람 수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의 약속을 믿었기에 이백 명의 연약한 군사들을 남겨둘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광야에서 아말렉의 종을 만남(11-15)

 

다윗 일행은 가던 길에 우연히 애굽 소년을 만나게 됩니다. 소년이 너무 기력이 없어 보였는지 데려다가 먹을 것과 마실 물을 주며 그 소년을 도와주었습니다. 다윗 일행은 지금 아말렉 부대를 급히 쫓고 있어서 여유가 없는 상황이지만, 길에서 만난 다 죽어가는 소년을 외면하지 않았고, 그에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양식과 물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11-12절에 소년에게 준 양식을 자세히 기록한 것은 다윗이 소년에게 먹을 것을 넉넉하게 주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3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여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었던 소년은 음식을 먹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고, 그 후에야 다윗은 소년에게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묻습니다. 이에 대해 소년은 자신은 애굽 소년이고 아말렉 사람의 종이었는데, 병이 들어 3일 전에 버려졌다고 합니다. 또 자신들이 그렛 남방과 유다와 갈렙 남방을 노략하였고 시글락을 불살랐다는 놀라운 정보를 줍니다. 바로 이 소년이 있던 부대가 자신이 쫓고 있는 바로 그 부대였던 것입니다. 놀라운 우연의 일치입니다. 이 말을 들은 다윗은 아마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소년에게 아말렉 부대가 있는 곳으로 인도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이에 소년은 자신을 죽이지 않고 옛 주인의 손에 넘기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알려주겠다고 합니다. 소년의 입에서 옛 주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을 보면 병든 자신을 헌신짝 버리듯 버린 주인에 대한 원망이 상당히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옛 주인을 배신하고 다윗에게 아말렉에 대한 정보를 넘기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길에서 우연히 만나 목숨을 살려준 애굽 소년에게서 다윗의 군대는 결정적인 정보를 얻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한 것으로 볼 때 이 소년과의 만남도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예비해주신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 사람에게서 버림받은 병든 소년을 통해서 다윗의 길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아말렉을 치고 가족과 가축을 되찾아옴(16-20)

거듭되는 위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통해 힘과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힘이 되신 여호와를 의지하여 힘과 능력을 공급받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세상과는 달리 자신의 방법이나 세상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을 통해 하나님께 앞 일을 묻는 믿음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아야 합니다.

 

16그가 다윗을 인도하여 내려가니 그들이 온 땅에 편만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땅과 유다 땅에서 크게 약탈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먹고 마시며 춤추는지라 17다윗이 새벽부터 이튿날 저물 때까지 그들을 치매 낙타를 타고 도망한 소년 사백 명 외에는 피한 사람이 없었더라 18다윗이 아말렉 사람들이 빼앗아 갔던 모든 것을 도로 찾고 그의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19그들이 약탈하였던 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모두 다윗이 도로 찾아왔고 20다윗이 또 양 떼와 소 떼를 다 되찾았더니 무리가 그 가축들을 앞에 몰고 가며 이르되 이는 다윗의 전리품이라 하였더라(16-20)

 

아멜렉 사람들은 블레셋뿐만 아니라 유다까지도 많은 지역에서 탈취를 했습니다. 그래서 승리에 취해서 많은 탈취한 재물로 잔치를 벌이고 밤새도록 즐기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아말렉 사람들을 새벽부터 이튿날 저물 때까지 공격해서 치열한 싸움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큰 승리를 주셨습니다.

 

(1) 잔치를 벌리는 아말렉(16)

 

소년의 인도를 받아 아말렉의 부대에 도달한 다윗의 군사들은 많은 노략물을 얻은 것을 축하하며 먹고 마시고 춤을 추고 있는 아말렉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말렉 사람들은 다윗이 추적하는지도 모르고 흥겨운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2) 다윗의 공격과 승리(17)

 

이렇게 무방비로 잔치를 벌이고 있는 아말렉 군대를 다윗은 새벽(혹은 저녁)에 기습하여 하루 이상을 꼬박 싸웠고 그 결과 아말렉 병사 사백 도망하고 모두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빼앗아 갔던 모든 것을 되찾았고 다윗의 아내도 무사히 구할 수 있었습니다.

 

(3) 되찾은 사람들과 가축과 재물(18-20)

 

19절에서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다고 함으로써 다윗이 아말렉을 완전히 이겼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것은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게 보호하셨고 다시 찾을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20절에서 보면 자신의 것뿐만 아니라 아말렉이 다른 곳에서 빼앗은 전리품까지 모두 챙겨서 오히려 더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완벽하게 지켜주신 것입니다.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모두 되찾도록 하셨을 뿐 아니라, 아말렉의 재산까지도 진리품으로 취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려움 중에도 잃은 것 뿐 아니라 잃은 것 이상으로 다한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시련의 때에 어떻게 극복하십니까? 주만 바라보십시오. 사태 수습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합니까?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만 힘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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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29-01)


다윗이 전쟁 출정을 거부하는 블레셋 장군들

사무엘상 29장 1-11절


 

세상의 일은 자기 생각과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생각지 않는 일들은 속수무책으로 언제든 닥칩니다. 어디에서도 우리 편을 찾아볼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지혜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때 바랄 것은 그 둘러싸인 적들이 순식간에 자신의 아군으로 변하든지, 적들끼리 자중지란에 빠지는 길뿐입니다. 다윗에게도 경우의 수는 단 하나뿐이었습니다.

 

  • 블레셋에 거주하는 다윗이 이스라엘과의 전투에 참전하라는 아기스의 명령을 받고 고민하는 동안 이스라엘에서는 사울이 사무엘의 영을 만나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질 것이고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받습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쟁은 사울에게도 다윗에게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다윗은 블레셋 편에서 이스라엘과의 전투에 참전하게 됩니다.

 

블레셋 군대의 소집(1-2)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도우십니다. 당신의 상황이 하나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다윗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1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군대를 아벡에 모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르엘에 있는 샘 곁에 진 쳤더라 2블레셋 사람들의 수령들은 수백 명씩 수천 명씩 인솔하여 나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아기스와 함께 그 뒤에서 나아가더니(1-2)

 

이 다윗의 이야기는 28장 1-2절과 연결되는 것으로 사울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는 정면은 블레셋에서 이스라엘과의 전투를 준비하는 다윗의 이야기를 중간에 끊고 삽입된 이야기입니다. 28장 1-2절은 다윗의 위기를 보여주고, 28장 3-23절은 사울의 위기를 나란히 보여줍니다.

 

(1)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대치(1)

 

뒤에 이어지는 29-30장은 28장의 다윗의 위기가 어떻게 해결되는지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는 사람의 형통을 보여주고 있고, 31장은 28장에서 받은 사울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통해 여호와께 버림받은 사람의 비극적 죽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29-31장의 이야기는 다윗과 사울의 운명을 대조적으로 보여줍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전쟁하기 전에 아벡에 모이는데, 이곳은 가드에서 42킬로미터 북쪽에 있으며 샤론 평지에 위치합니다. 이들은 이곳에 집결한 뒤 이스르엘 산지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이스르엘에 있는 샘 곁에 진을 쳤습니다. 이스르엘에 있는 하롯 샘은 이스르엘에서 동남동 방향 약 2.5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길보아 산지 북쪽 기슭에서 흘러나오는 샘으로 기드온이 미디안과 전쟁하기 위해 진을 친 곳입니다.

 

(2) 블레셋 군대의 행진(2)

 

블레셋의 수령들이 100명씩 혹은 1000명씩 부대를 이루어 행진하였고, 다윗과 그의 군사들도 아기스와 함께 그들 뒤에서 행진하고 있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다윗과 그의 군사들도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아벡으로 집결하였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수령들’이라고 말한 것을 볼 때 이번 전투는 블레셋 다섯 성읍의 군주들이 거의 모두 참여하는 대규모 전쟁이었던 것 같습니다.

 

블레셋 장군의 반대(3-5)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가 무엇을 하든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하나님 나라를 배신하고 블레셋을 도울 수밖에 없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신실하게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어쩔 수 없다고 말하기 전에 하나님을 원 없이 믿어보시길 바랍니다.

 

3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이 이르되 이 히브리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느냐 하니 아기스가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에게 이르되 이는 이스라엘 왕 사울의 신하 다윗이 아니냐 그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여러 날 여러 해로되 그가 망명하여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노라 4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에게 노한지라 블레셋 방백들이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을 돌려보내어 왕이 그에게 정하신 그 처소로 가게 하소서 그는 우리와 함께 싸움에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가 전장에서 우리의 대적이 될까 하나이다 그가 무엇으로 그 주와 다시 화합하리이까 이 사람들의 머리로 하지 아니하겠나이까 5그들이 춤추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던 그 다윗이 아니니이까 하니(3-5)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용맹함을 칭송하며 부른 노래를 기억하던 블레셋 방백들을 통해 다윗을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싸울 위기에서 건져 내십니다. 다윗이 사울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1) 아기스의 변호(3)

 

블레셋의 방백들이 다윗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제동을 겁니다. 그들은 다윗과 그의 군사들을 ‘히브리 사람’이라고 낮추어 부르는데, 이 용어는 이방인들이나 사회적 소외계층의 사람들을 비하하여 부르는 호칭이. 즉 방백들은 다윗과 그의 군사들을 완전히 이방인 취급을 하면서 아기스에게 이들이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아기스가 다윗을 데리고 전쟁터에 온 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기스도 방백들이 무엇을 걱정하고 묻는 것인지 알고 있기에, 다윗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다윗이 원래 이스라엘 왕 사울의 신하였지만 자신에게 망명하여 온 후 일 년 넘게 보았는데 아무 허물도 찾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아기스의 입장에서 다윗은 유다 지역을 노략하고 자신에게 전리품을 가져다주며 충성을 바치고 있는 인물이기에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글락과 가드가 멀기도 하고 다윗이 정보를 철저히 차단하는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아기스는 다윗이 유다 지역이 아닌 유다의 적들을 노략하고 다닌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2) 블레셋 장군들의 반대(4-5)

 

이런 아기스의 말에 블레셋의 방백들은 분노합니다. 그들은 아기스에게 다윗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합니다. 이들은 다윗이 전쟁터에서 자신들의 대적이 되어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울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다윗이 블레셋 사람의 머리를 가지고 가서 사울과 다시 화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블레셋의 방백들은 사울과 다윗의 심각한 불화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전에 다윗이 사울과 함께 골리앗과 블레셋을 친 후에 백성들에게서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칭송했던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21장에서 아기스가 다윗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했던 그 사건으로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블레셋 사람들의 뇌리에 다윗은 골리앗을 죽인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말 속에 블레셋 사람들의 다윗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이 잘 나타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블레셋의 방백들이 오히려 아기스보다 다윗이 어떤 사람인지 더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결코 블레셋 편이 될 수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다윗은 미래에 이스라엘의 왕이 될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전투에 출정하지 못하게 됨(6-11)

어려운 상황에는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편 42:11)라는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본의 아니게 난처한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심에는 하나님께 있어야 합니다. 중심이 하나님께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십니다.

 

6아기스가 다윗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정직하여 내게 온 날부터 오늘까지 네게 악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으니 나와 함께 진중에 출입하는 것이 내 생각에는 좋으나 수령들이 너를 좋아하지 아니하니 7그러므로 이제 너는 평안히 돌아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수령들에게 거슬러 보이게 하지 말라 하니라 8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당신 앞에 오늘까지 있는 동안에 당신이 종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내가 가서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시나이까 하니 9아기스가 다윗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내 목전에 하나님의 전령 같이 선한 것을 내가 아나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은 말하기를 그가 우리와 함께 전장에 올라가지 못하리라 하니 10그런즉 너는 너와 함께 온 네 주의 신하들과 더불어 새벽에 일어나라 너희는 새벽에 일어나서 밝거든 곧 떠나라 하니라 11이에 다윗이 자기 사람들과 더불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떠나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돌아가고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르엘로 올라가니라(6-11)

 

전에는 아기스 앞에서 미치광이처럼 행동하여 위기를 벗어난 것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전쟁에 나가지 못한 것에 크게 실망한 듯 연기하여 위기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이 속임수는 라합의 속임수(2:4)와 에훗(삿 3:20-21)과 야엘(4:18-21)과 삼손(16:1-3, 26-27)의 속임수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는 지돠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통쾌한 속임수였습니다.

 

(1) 다윗을 돌려보내는 아기스(6-7)

 

방백들의 생각지 못한 반발로 아기스는 다윗을 불러 같이 전쟁터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는 다윗에게 매우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다윗의 고향인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당시는 여러 신들을 섬기는 다신 사회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른 나라의 신들의 존재도 인정하고 여러 신들을 함께 섬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아기스가 여호와를 믿어서가 아니라 다윗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다윗을 믿고 있는지를 피력합니다. 자신이 보기에 다윗은 옳고 지금까지 어떤 악한 일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방백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블레셋의 수령들이 다윗이 함께 전쟁터에 나가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윗을 돌려보내야 한다고 통보합니다.

아기스의 이런 말 속에는 다윗에 대한 미안함과 이 사태에 대한 유감스러움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는 최대한 다윗이 기분 나쁘지 않게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는데, 이번 일로 자신과 다윗의 관계가 나빠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전쟁터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이렇게 미안해하는 이유는 다윗과 그의 군사들은 현재 용병의 신분으로 전쟁 노획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고 전쟁에서 승리해야 명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용병에게 전쟁터에 오지 말라는 것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과 같았기에 아기스는 다윗에게 매우 조심스럽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왕은 다윗에게 조용히 돌아가서 블레셋 수령들이 싫어할 어떤 행동도 하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고 충고합니다. 이것은 다음 기회를 노리자는 뜻입니다. 다윗이 이런 부당한 처사에 어떤 항의도 하지 않고 돌아가서 얌전히 지낸다면 블레셋의 수령들이 다윗을 신뢰하고 다음에는 기회를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2) 다윗의 항변(8)

 

다윗은 아기스의 말을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셔서 이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셨다고 생각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전혀 내색하지 않고 아기스 앞에서 연극을 합니다. 마치 이전 아기스 앞에서 미친 척 연극을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일단 아기스에게 항의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는 데 대한 서운함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자기 주인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느냐고 말합니다. 다윗은 아기스를 자신의 주인으로 그리고 이스라엘을 주인의 원수로 표현하며 아기스에 대한 충성심을 다시 한 번 표현합니다.

 

(3) 아기스의 강요(9-11)

 

이런 다윗의 항의에 아기스는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자신은 다윗을 하나님의 사자처럼 진실하다고 믿는다는 표현까지 사용합니다.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블레셋 방백들의 생각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들의 말을 직접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단호하게 내일 새벽에 일어나 서둘러 떠나라고 명령합니다.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다음 날 아기스의 명령대로 일찍 일어나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갔고,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땅인 이스르엘로 올라갔습니다. 두 집단의 대조되는 행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전쟁에 가지 못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생각하여 기뻤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내색을 할 수 없는 형편이기에 서운한 척 연극을 하였고 아기스는 다윗의 속마음도 모르고 다윗을 달래기 위해 쩔쩔매고 있습니다. 이런 아기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이 상황의 코믹성과 함께 하나님께서 상황을 다루시는 놀라운 솜씨를 볼 수 있습니다. 분명 이 상황은 다윗에게 너무나도 잘된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다윗이 불만스러워하고 아기스는 쩔쩔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비록 형편 때문에 블레셋 사람 아기스의 수하에 들어가 있지만, 그곳에서 무시당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이스라엘과 싸우는 진퇴양난의 어려움 속에서도 건져주신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는 아기스의 입에서 나온 ‘여호와’라는 말 이외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모습이 드러나지 않지만, 절묘한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시며 돕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절묘한 한 수가 아니었다면 다윗은 어느 쪽으로든 그 난관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인생이 위기를 겪으면서도 지금까지 순항한 것은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묘수가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는 시대입니다. 그만큼 지혜로운 삶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자기 백성들을 위해 세세하게 눈동자와 같이 돌아봐 주십니다. 그 하나님만 신뢰하시면 다윗처럼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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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28-01)


신접한 여인을 찾는 사울

사무엘상 28장 3-25절


 

속담에 물에 빠진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려워진 상황에서 무엇이나 동원해서 문제를 해결해보려는 마음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조급성은 매우 금물입니다. 욕심을 부리고 하나님을 떠나면 모든 관계가 다 무너집니다.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형통함이 있을 것입니다.

 

  • 블레셋으로 도망간 다윗은 가드 왕 아시스에게 의탁을 하였고, 그에게서 시글락이란 성읍도 봉토로 받게 됩니다. 다윗은 그곳에서 이스라엘의 적들을 노략하여 이스라엘에게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필요한 비용과 아기스에게 바칠 노획물도 얻었습니다. 아기스에게는 유다를 쳐서 얻은 노획물이라고 거짓말을 하여 더욱 신뢰를 얻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아기스의 신뢰는 다윗이 이스라엘과 전쟁하는 곳으로 가게 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신접한 자를 다시 찾는 사울(3-7)

우리는 욕심을 부려서 하나님을 떠나면 모든 관계가 다 무너집니다. 정서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건강도 잃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선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죄에 둔감해지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이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잘 붙잡아 매어 두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3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두고 슬피 울며 그의 고향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 4블레셋 사람들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 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 쳤더니 5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의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6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7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3-7)

 

앞에서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전쟁하려고 준비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블레셋 진영에서는 다윗과 아기스가 서로 협력하겠다고 연출되었습니다. 이 블레셋을 맞이할 이스라엘은 어떻게 준비하고 있겠습니까?

 

(1) 배경 설명(3-4)

 

본문은 다시 사무엘의 죽음이 언급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사무엘을 통해서 받았던 하나님의 신탁을 더는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울이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냈다는 사실은 아주 과거의 일인데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이스라엘 내에서 사울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상황임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언급한 신접한 자나 박수는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 정보를 얻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며, 신명기 18:11에 따르면 이들은 이스라엘 내에서의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고, 사울도 이에 순종하여 이들을 이스라엘에서 모두 쫓아내었던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전쟁하기 위해 수넴에 모여 진을 치자, 사울은 이에 맞서기 위해 길보아에 진을 칩니다. 수넴과 길보아는 지정학적으로 블레셋과 접한 가장 북쪽 지역입니다. 하지만 그는 막강한 블레셋 군대를 보는 순간 너무 두려워졌습니다. 사울의 두려움은 그가 여호와의 신탁을 구하는 원인이 됩니다.

 

(2) 응답하지 않으시는 여호와(5-6)

 

사울이 비로서 하나님을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찾고 있는 여호와는 그가 간절히 의지하고 있는 여호와는 아닙니다. 그는 여호와를 찾기 전에 해야 할 회개가 반드시 있었는데, 그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뜻을 알기 원했지만,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철저히 침묵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완전히 버리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가 놉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해주는 제사장들을 죽였기 때문에 우림으로 대답하지 않으셨고, 하나님과 사울의 관계가 끊어졌기에 꿈으로 계시를 주시지 않았고, 선지자 사무엘도 죽고 없었기에 사울은 하나님에게서 아무 계시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3) 신접한 여인을 찾는 사울(7)

 

이런 상황에서 사울은 전에 자신이 철폐한 죽은 영혼을 불러내어 예언을 듣는 방법을 사용하려고 하였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쫓아냈던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고 명령합니다. 신하들은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다는 것을 사울에게 알려줍니다. 이것은 사울이 하나님께 완전히 버려졌을 뿐 아니라 영적 파탄에 이르렀음을 보여줍니다.

 

엔돌의 여인에게 사무엘을 불러달라는 사울(8-14)

하나님을 떠난 악한 사람들은 자기 한 약속을 가장 먼저 지키지 않고 어깁니다. 하나님께나 사람에게나 마찬가지로 신뢰를 주지 않습니다. 강하게 주장했던 것들을 자기 스스로 깨뜨려 버린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말과 행동이 일치할 때, 그 말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8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서는 사울이 이르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 올리라 하니 9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사울이 행한 일 곧 그가 신접한 자와 박수를 이 땅에서 멸절시켰음을 아나니 네가 어찌하여 내 생명에 올무를 놓아 나를 죽게 하려느냐 하는지라 10사울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이 일로는 벌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1여인이 이르되 내가 누구를 네게로 불러 올리랴 하니 사울이 이르되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하는지라 12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13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하니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하는지라 14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의 모양이 어떠하냐 하니 그가 이르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하더라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8-14)

 

하나님을 찾은 것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가식적인 행동에 불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위급할 때만 찾는 분이 아닙니다. 매일 생활 속에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없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1) 사울의 명령(8-10)

 

사울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변장하고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신접한 술법으로 자신이 말하는 사람을 불러올리라고 합니다.

 

(2) 두려워하는 신접한 여인(11-12)

 

여인은 놀라서 사울이 금지시킨 일을 왜 자신에게 시켜 죽음에 이르게 하려는지 묻습니다. 이 여인의 반응을 보면 사울이 신접하는 일을 매우 강력하게 금지시켰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인의 말에 사울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절대 이 일로 벌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울은 지금 자신의 명령을 스스로 깨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본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말에 안심한 신접한 여인은 누구를 불러올릴지 묻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불러올리라고 명령합니다. 여인은 사무엘을 불러올렸고, 그를 보는 순간 자신에게 의뢰한 사람이 사울이라는 것을 알고 두려워합니다. 여인이 사무엘을 보는 순간 자신의 의뢰인이 사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인은 의뢰인이 사울이라는 사실을 알고 두려워하였고, 사울은 이 여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심시킨다. 사실 이 본문 자체가 신학적으로 풀기 어려운 여러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죽은 자가 정말 현 세계로 귀신의 모습으로 올 수 있는 것인지,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귀신은 사탄의 졸개가 아니라 죽은 사람의 영인지, 그리고 사후 세계와 현 세계는 어떤 관계 속에 있는지에 대한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이런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3) 사울 앞에 나타난 한 영(13-14)

 

본문은 다른 여지를 주지 않고 올라온 영이 사무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그 영이 진짜 사무엘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데, 여인에게 올라온 영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묻습니다. 노인이고 겉옷을 입고 있다고 하자 사울은 그가 사무엘인 것을 바로 알아봅니다. 사무엘은 항상 겉옷을 입고 다녔기 때문입니다(삼상 2:19; 15:27). 올라온 영이 사무엘이라는 것을 확인한 사울은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최대한의 경외감을 보여주는데, 사무엘 귀신에게 절하고 있는 사울의 모습은 읽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예언(15-19)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를 멈추라고 여러번 실패를 주셨습니다. 혼도 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에 화인 맡은 사람처럼 좀처럼 마음을 바꾸지 않습니다. 더 이상 자기 마음을 통제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죄를 멈추고 회개하고 주님께 업드린 것 말고는 모든 종교 행위들을 다하려고 하는 것이 타락한 인간입니다.

 

15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 하니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다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하지 아니하시기로 내가 행할 일을 알아보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하더라 16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17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18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19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 하는지라(15-19)

 

하나님을 떠난 결과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천하게 여겼던 우상숭배자들을 찾아가서 머리를 내는 우스운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경종을 울려줍니다.

 

(1) 사울의 호소(15)

 

15-19절은 사무엘의 예언 부분입니다. 여기서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선지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지는 본문이 대답해주지 않습니다. 다만 사무엘은 예언하였고 그 예언은 후에 정확하게 성취됨으로써 사무엘이 참 선지자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2) 사울의 죄와 하나님의 선고(16-19)

 

사무엘의 영은 사울을 보자 자신을 왜 흔들어 깨웠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왔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떠나서 전혀 계시하지 않으시니 어찌할 바를 몰라 불렀다고 대답합니다. 사울은 분명 하나님께서 자신을 떠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울에게 사무엘은 하나님이 너를 떠났는데 왜 나에게 묻느냐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떠났는데 왜 하나님께 묻느냐는 말과 같습니다.

17절에서 사무엘은 사무엘상 15:28에서 한 말을 다시 언급하는데, 다만 15:28에서 ‘너의 이웃’이라고 한 말을 17절에서는 구체적으로 너의 이웃 다윗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27:9에서 다윗이 아말렉을 진멸한 일을 기억나게 합니다. 결국 현재 일어난 괴로움은 사울이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여기서는 아말렉 사건만 말하고 있지만, 사울이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사건은 많이 있고 특히 무죄한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닌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큰 죄였습니다. 이것은 사무엘상 24장과 26장에서 다윗이 계속 하던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자신과 사울 사이를 판단해달라고 했는데 결국 하나님은 그간의 사울의 행동을 달아 보시고 이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 19절에서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사울과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기실 것이고, 사울과 사울의 아들들이 죽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늘 승리의 확신을 주셨는데, 이번에는 블레셋의 승리를 선언하십니다. 이번 블레셋과의 전투는 하나님께 불순종한 사울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될 것입니다.

 

예언의 내용을 듣고 두려워하는 사울(20-25)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에 대해서 즉시 심판하시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업신여긴다면 언제 가는 꼭 하나님께서는 그 대가를 치르게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신 분이시고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악을 미워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20사울이 갑자기 땅에 완전히 엎드러지니 이는 사무엘의 말로 말미암아 심히 두려워함이요 또 그의 기력이 다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루 밤낮을 음식을 먹지 못하였음이니라 21그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가 심히 고통 당함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여종이 왕의 말씀을 듣고 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왕이 내게 이르신 말씀을 순종하였사오니 22그런즉 청하건대 이제 당신도 여종의 말을 들으사 내가 왕 앞에 한 조각 떡을 드리게 하시고 왕은 잡수시고 길 가실 때에 기력을 얻으소서 하니 23사울이 거절하여 이르되 내가 먹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그의 신하들과 여인이 강권하매 그들의 말을 듣고 땅에서 일어나 침상에 앉으니라 24여인의 집에 살진 송아지가 있으므로 그것을 급히 잡고 가루를 가져다가 뭉쳐 무교병을 만들고 구워서 25사울 앞에와 그의 신하들 앞에 내놓으니 그들이 먹고 일어나서 그 밤에 가니라(20-25)

 

하나님께서 버리셨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사울은 식음을 전폐하고 결국 탈진합니다. 신접한 여인은 사울이 자신의 말을 ‘청종하였으니’ 음식을 먹으라는 말도 들으라고 권합니다.

 

(1) 쓰러진 사울(20)

 

사무엘의 예언을 들은 사울은 너무 두려워 땅에 완전히 엎어집니다. 내일이면 자신과 자신의 아들들이 죽는다는 말을 듣고 두렵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2) 음식을 먹고 힘을 얻는 사울(21-25)

 

사울이 하루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기력이 없었다고 보충설명을 해줍니다. 사울이 음식을 안 먹은 것이 죽은 사람을 불러내는 의식을 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전쟁의 상황이 너무 걱정스러워 못 먹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기운이 없어 완전히 엎어진 사울의 모습은 불쌍하고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이런 사울을 보고 여인은 자신이 사울의 말을 들은 것처럼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고 말한 뒤에 음식을 만들어 올 것이니 먹고 힘을 내서 가라고 말합니다. 이 여인은 사울의 불쌍한 모습과 비극적인 죽음 예고를 듣고 가슴 아파하며 뭐라도 그의 마지막 가는 길에 위로를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거절하는 사울을 강하게 설득하여 자신의 집에 있던 송아지를 잡고 무교병을 만들어 사울의 마지막 만찬을 푸짐하게 준비해 줍니다.

사울과 신하들은 그녀가 차려준 음식을 서둘러서 먹고 지체하지 않고 일어나서 전쟁이 일어날 길보아로 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다 버림받은 사울이 얼마나 비참한 마지막을 보내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여호와의 선택으로 왕이 되었던 늠름하고 용감했던 사울은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힘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버림받아 두려움에 떨고 있는 힘없는 한 늙은 남자만 남았습니다. 이런 모습은 비록 사울에게 쫓겨 다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여 적국에서도 승리하며 돌아다니는 씩씩한 다윗과 비교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의 원천이 나나 나의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하나님께 항상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때로는 다급한 상황에서 기도하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응답을 하지 않습니다. 응답지 않는다고 다급해진다고 사울처럼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방법으로 구하게 되면, 결과는 뻔한 것입니다. 자신의 성공이나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은 미신적이 태도입니다. 참 신앙인이라면 항상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서 인격적인 교제를 만들어 가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당신도 다윗처럼 항상 하나님께 응답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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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27-01)


블레셋 망명 생활 중에도 돌보시는 주님

사무엘상 27장 1절-28장 2절


 

살다보면 ‘하나님께 모든 것을 구하라!’, ‘하나님께 의논하라!’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좋은 말씀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종종 잊어버립니다. 모든 시간이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하는 시간임을 알면서도 살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음에도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계획한 대로 일해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하나님과 의논하고 모든 일을 행하는 믿음의 선택에 함께하시길 소망합니다.

 

  • 사울을 두 번이나 살려준 사건과 나발의 사건을 통해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죽이는 것이 죄라는 것과 원수 갚는 것은 여호와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하지만 사울을 두 번이나 살려주면서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는 마음을 돌이키지 않을 것임을 깨닫습니다. 오히려 두 번째 만남을 통해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더욱 죽이려고 쫓아다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일단 블레셋으로 도망갑니다.

 

블레셋으로 도망가는 다윗(1-4)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은 계속 변화하게 마련입니다. 과거에는 어리석은 선택이 지금은 지혜로운 선택이 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 가운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의 모습은 이 질문에 대해 상당히 의미 있는 통찰을 제공합니다.

 

1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2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3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저마다 가족을 거느리고 가드에서 아기스와 동거하였는데 다윗이 그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자 아히노암과 나발의 아내였던 갈멜 여자 아비가일과 함께 하였더니 4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매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아니하니라(1-4)

 

사울과의 두 번째 만남 이후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였습니다. 머잖아 사울의 손에 잡힐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어디로 가든 사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한 다윗은 사울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블레셋으로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면 사울이 자신을 추적하는 것을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이 블레셋을 도피처로 삼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사무엘상 21:10에서도 가드 왕 아기스에게 도망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다윗은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간다고 말하는데, 둘은 다른 인물로 보입니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아기스’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블레셋 왕 혹은 블레셋의 지도자에 대한 공식 명칭이라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21장에서는 일반 명칭인 아기스로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27장에서는 마옥의 아들 아기스라는 한 인물로 특정됩니다. 21장에서 아기스는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이스라엘의 영웅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다윗은 그 앞에서 미친 척을 해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아기스는 다윗을 받아줍니다. 27장에서 아기스는 사울이 계속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다윗이 이스라엘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으로 들어갈 때 21장에서는 다윗 혼자였지만 이번에는 군사 600명과 자신의 두 아내와 군사들의 가족들까지 거느리고 갔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시간도 많이 흘렀고, 그 사이에 다윗의 세력이 강해졌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아기스와 평화롭게 잘 지내는데, 아기스는 다윗과 사울 사이가 나쁘기 때문에 다윗이 사울의 나라인 이스라엘도 싫어할 것이라는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블레셋의 땅인 가드로 도망갔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후 사울은 다윗의 예상대로 다윗을 추적하지 않았습니다.

 

아기스가 시글락을 다윗에게 줌(5-7)

자신에게 유리한 선택을 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유리한 선택이 항상 유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는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항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는 않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해야 합니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찾아 순종해야 합니다. 다윗은 수백 명의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로서 더 이상 이스라엘 땅에서는 사울의 추격을 피할 수 없다고 여겨 안전을 위해 블레셋 땅으로 넘어가는 선택을 합니다.

 

5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바라건대 내가 당신께 은혜를 입었다면 지방 성읍 가운데 한 곳을 내게 주어 내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종이 어찌 당신과 함께 왕도에 살리이까 하니 6아기스가 그 날에 시글락을 그에게 주었으므로 시글락이 오늘까지 유다 왕에게 속하니라 7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산 날 수는 일 년 사 개월이었더라(5-7)

 

가드에서 아기스와 함께 지내던 다윗은 아기스에게 지방 도시 한 곳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명목상의 이유는 자신들과 같은 이방인들이 왕이 거하는 수도에 사는 것이 과분한 대접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속마음은 이야기하지 않고 예의를 갖춰 외교적 화법을 사용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가드를 떠나 좀 한적한 지방으로 내려가려는 것은 아기스의 눈을 피해 좀 더 자유롭게 활동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요청에 아기스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날로 다윗에게 시글락을 주었습니다.

‘그날에’라는 표현은 즉시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의 요청을 바로 들어주었다는 것은 아기스가 다윗을 매우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래 시글락은 여호수아 15:32에서 유다 자손에게, 그리고 19:5에서 시므온 자손에게 주어진 땅으로 이 당시에는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있었던 것을 다윗이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 시글락이 훨씬 후대인 사무엘서를 기록한 당시까지 유다 왕에게 속해 있다고 설명해 줍니다. 시글락은 가드에서 남쪽으로 48km 정도 떨어진 네게브 지역 성읍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지역입니다. 가드에서 충분히 먼 지역이었기에 아기스의 간섭 없이 다윗이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 지역에서 대략 1년 4개월 동안 평안히 지냈습니다. 만약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다면, 그는 평범한 목동으로 아버지 집에서 살았을 것이고, 사울의 신하로 혹은 사울의 사위로 인정받으며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다음 왕으로 선택되면서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의 책임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혼자서는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다윗은 힘든 상황 속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미래의 이스라엘 왕으로서의 책임을 충실하게 짊어지고 갑니다.

 

아기스를 속이는 다윗(8-12)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이든지 최선을 다해 주어진 사명을 다한다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결국 우리를 있어야 할 자리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복음으로 인해 박해받을 때 순교하기까지 고난을 피하지 않았던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영혼의 안식처와 피난처가 되심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8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노하였으니 그들은 옛적부터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지방의 주민이라 9다윗이 그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와 의복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와 아기스에게 이르매 10아기스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누구를 침노하였느냐 하니 다윗이 이르되 유다 네겝과 여라무엘 사람의 네겝과 겐 사람의 네겝이니이다 하였더라 11다윗이 그 남녀를 살려서 가드로 데려가지 아니한 것은 그의 생각에 그들이 우리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다윗이 행한 일이 이러하니라 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거주하는 동안에 이같이 행하는 습관이 있었다 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12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되었으니 그는 영원히 내 부하가 되리라고 생각하니라(8-12)

 

다윗은 시글락에 자리를 잡자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적이었던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들이 사는 곳을 쳐들어가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소나 양이나 낙타나 옷 등의 노획물을 얻어 왔습니다. 여기서 그술은 블레셋 남쪽 네게브에서 살던 사람들로 블레셋과 좋은 협력관계에 있다는 것 이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고, 기르스 사람은 여기 한 번만 언급됩니다. 다만 아말렉 사람의 경우는 이스라엘과 오랜 적으로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진멸을 명하신 족속입니다.

다윗이 이곳의 모든 사람을 죽였다는 보고는 사울이 아각을 살려 포로로 데리고 온 모습과 대조됩니다. 다윗이 전쟁을 하러 다닌 것은 시글락에 있는 자신의 군사들과 가족을 부양하고, 아기스에게 공물을 바쳐서 자신의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약탈 전쟁은 고대 근동에서 재물을 얻고 세력을 확장하는 하나의 삶의 방식이었기에, 현대의 관점에서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평가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다윗은 약탈한 재물을 일단 아기스에게 가져가 자신의 충성심을 보여주었고, 아기스는 재물들을 보면서 다윗이 어디를 노략하고 다녔는지를 묻습니다. 이에 다윗은 유다 지파의 영역인 네겝과 여라무엘 사람의 네겝과 겐 사람의 네겝을 약탈하였다고 말합니다. 이 지역들은 모두 유다 지파에 속한 곳으로 유다의 네겝은 브엘세바 근처이고, 겐 사람의 네겝은 드빌과 헤브론 근처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렇게 다윗은 자신의 동족 중에서도 자신의 고향인 유다 지역을 노략하고 다녔다고 거짓말합니다.

이런 다윗의 거짓말은 매우 전략적이고 치밀하게 준비된 것으로, 11절에서 다윗이 노략한 지역의 사람들을 모두 죽인 이유가 바로 이런 거짓말을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만일 사람들을 노예로 데리고 오면, 다윗이 유다 지역을 노략한 것이 아니라 블레셋의 우방 지역들을 노략하고 다닌 것이 들통 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이 거짓말을 한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첫째, 다윗이 비록 블레셋을 의지하고 있지만 미래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이기 때문에 동족을 노력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기왕 노력할 거라면 이스라엘의 적의 것을 노략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미래 이스라엘 왕으로서의 생각입니다. 셋째는 만일 이것이 겉으로 드러나게 되면 아기스와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을 싫어하게 되고 그곳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실제로는 이스라엘의 적을 노략하면서 겉으로는 유다 지역을 노략한 것처럼 속여 아기스와 블레셋 사람들의 의심을 피할 뿐만 아니라, 12절에서 보듯이 아기스의 확실한 신뢰를 받게 됩니다. 어쨌든 다윗의 이런 계획은 성공하였고, 아기스는 다윗이 영원히 자신의 부하가 되었다며 다윗을 전적으로 믿게 됩니다. 이렇게 다윗은 비록 고향에서 쫓겨나 적에게 의탁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사이 다스리는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고, 이스라엘을 좀 더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과의 전투에 다윗을 참전시키려는 아기스(28:1-2)

성경은 우리에게 생각을 많이 할 것을 권고하지 않습니다. 오직 한 가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라고 말씀합니다. 많은 생각은 우리의 삶을 혼란스럽게 하지만, 오직 한 분 그리스도만을 생각하고 그분의 뜻만을 좇을 때, 우리 삶은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세워질 것입니다.

 

1그 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군대를 모집한지라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밝히 알라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 함께 나가서 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 2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그러면 당신의 종이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하니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그러면 내가 너를 영원히 내 머리 지키는 자를 삼으리라 하니라(1-2)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며 살아가던 다윗은 거짓말로 인해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다윗의 거짓말에 완전히 속은 아기스는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할 때, 다윗도 자신과 함께 전쟁터에 나가야 한다며 다윗을 부릅니다. 이에 다윗은 왕이 시키는 대로 행하겠다고 말합니다.

‘종이 행할 것을 아신다’는 표현은 왕이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아기스는 너무 감격하여 만일 그렇게만 한다면 평생토록 자신의 호위대장으로 삼겠다고 선언합니다. 아기스 입장에서는 다윗에게 매우 높은 지위를 주는 것으로 최대한의 호의를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아기스의 제안은 다윗을 진퇴양난의 입장에 빠뜨렸습니다. 동족과 전쟁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기스의 명령을 거절할 수도 없는 어려운 상황 속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성도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사명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때때로 시글락에서 다윗과 같은 상황이 있을 것입니다. 원치 않는 곳에 거하고 원치 않는 사람들과 함께해야 하며 원치 않는 일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인생의 시글락이 있을 것입니다. 그 시글락에서 삶이 앞으로 보상받지 못하고 흑역사로만 남을 것 같은 그때, 도저히 입에서 찬양이 나올 수 없고, 자기 인생이 어떻게 하다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졌을까 절망하는 순간 본문의 다윗처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선택을 사지 않도록 힘쓰기를 원합니다. 비록 그 상황을 역전 시키고 뒤집는 일을 할 만큼 능력이 없을지라도, 그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서 선택받은 자로써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수고한 것을 우리 주님께서는 기억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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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26-02)


무력 대신 믿음으로 이긴 다윗

사무엘상 26장 13-25절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먼저는 인간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인위적인 방법이 있고, 다음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신본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다윗과 사울의 모습을 보면서 이 두 가지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인본적인 생활의 대표적 사람이며, 다윗은 하나님 중심의 생활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 다윗은 십 광야까지 자신을 죽이러 온 사울을 보고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밤에 아비새 한 사람만 데리고 사울의 진으로 들어가 사울의 물병과 창을 들고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진의 모든 사람들이 깊은 잠이 들게 하셨기 때문에 사울은 또다시 다윗에게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지만, 다윗은 이번에도 사울을 살려줍니다. 그리고 멀리 도망간 후에 지난번과 같이 사울을 불러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행동이 여호와 앞에 죄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다윗의 첫 번째 말(13-16)

하나님께서는 심은 것을 온전히 거두게 하신 분입니다. 사람들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공의와 신실함으로 사람들을 대하게 될 때,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그 신실함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윗은 끝까지 신실하게 사울 왕을 대하였습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이러한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13이에 다윗이 건너편으로 가서 멀리 산 꼭대기에 서니 거리가 멀더라 14다윗이 백성과 넬의 아들 아브넬을 대하여 외쳐 이르되 아브넬아 너는 대답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아브넬이 대답하여 이르되 왕을 부르는 너는 누구냐 하더라 15다윗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용사가 아니냐 이스라엘 가운데에 너 같은 자가 누구냐 그러한데 네가 어찌하여 네 주 왕을 보호하지 아니하느냐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이 네 주 왕을 죽이려고 들어갔었느니라 16네가 행한 이 일이 옳지 못하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너희 주를 보호하지 아니하였으니 너희는 마땅히 죽을 자이니라 이제 왕의 창과 왕의 머리 곁에 있던 물병이 어디 있나 보라 하니(13-16)

 

다윗은 사울의 진에서 멀리 떨어진 언덕 꼭대기로 건너가 아브넬을 불렀습니다. 다윗은 아브넬이 사울 왕을 보호해야 하는 자신의 임무를 소홀히 하여 왕의 생명을 위태롭게 했다며 아브넬을 꾸짖었습니다. 그는 죄악을 충동질해서 사울로 하여금 범죄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직무 유기를 했습니다. 목숨을 바쳐 왕을 보호해야 했습니다.

 

(1) 다윗의 이동(13)

 

다윗과 아비새는 사울이 자는 진영으로 들어가 물병과 창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충분히 죽일 수 있었지만,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증거를 가지고 나왔던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사울의 진영을 빠져나온 후에, 이번에는 진에서 먼 산 위로 갑니다. 본문에서 거리가 멀다는 말을 두 번이나 함으로써 다윗이 안전한 거리로 도망하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 아브넬을 부르는 다윗(14)

 

안전한 곳에 도망한 다윗은 사울의 군사들과 사울의 군대 장관인 아브넬을 부릅니다. 이에 아브넬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묻습니다.

 

(3) 아브넬을 책망하는 다윗(15-16)

 

다윗은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아브넬에게 이스라엘에서 가장 뛰어난 용사가 주군인 왕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였다고 책망합니다. 그러면서 누군가 왕을 죽이려고 들어갔었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자신들이 사울의 진에 들어갔다 나온 이야기를 하면서 아브넬이 근무에 태만했다고 질책합니다. 다윗은 사울에 대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표현하며, 이런 왕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군대 장관과 군인들은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심하게 책망합니다. 이렇게 아브넬을 책망한 후에 자신이 사울에게 다녀간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이 들고 온 물병과 창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는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했고 여기서는 보호받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본문의 의미상으로 볼 때는 일차적으로 자신이 사울을 죽일 수 없는 이유이며, 이차적으로는 사울이 자신을 죽여서도 안 되는 이유입니다. 자신도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목회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 같은 제사장이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형제자매를 함부로 모욕하거나 해치려고 해서는 안 되며, 그들을 수단이나 도구로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사역자가 왕적인 특권을 갖고 군림해서도 안 되며, 서로 존중하고 보호해야 합니다.

 

다윗의 두 번째 말(17-20)

사람들이 죄의 늪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불가능합니다. 죄는 우리를 노예와 같이 만들어 끊고 갑니다. 죄의 강력한 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은혜의 지배를 받아야 자유케 됩니다.

 

17사울이 다윗의 음성을 알아 듣고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음성이냐 하는지라 다윗이 이르되 내 주 왕이여 내 음성이니이다 하고 18또 이르되 내 주는 어찌하여 주의 종을 쫓으시나이까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손에 무슨 악이 있나이까 19원하건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마는 만일 사람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고 오늘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이니이다 20그런즉 청하건대 여호와 앞에서 먼 이 곳에서 이제 나의 피가 땅에 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이는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음이니이다(17-20)

 

사울 왕은 자신의 생명을 살려준 다윗을 향해 죄를 고백했습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 일어난 사울 왕은 먼 곳에서 아브넬을 향해 책망하는 다윗의 외치는 책망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다윗의 손끝에서 살아났다는 것을 깨닫고 고백합니다.

 

(1) 다윗을 부르는 사울(17)

 

다윗의 말을 듣고 있던 사울은 이것이 다윗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윗을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너의 목소리냐’며 묻는데, 이것은 24:16과 동일합니다. 사울은 다윗의 소리를 들으면서 기시감을 느꼈고, 그래서 동일하게 질문한 것입니다. 이런 동일한 상황의 반복을 통해 사울이 변함없이 어리석은 인물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2) 다윗의 무죄 주장(18-19)

 

다윗은 이런 질문에 대해 ‘왕이여 내 목소리입니다’라며 동일한 문장 순서로 대답합니다. 이어서 24장과 동일하게 왜 자신을 계속해서 뒤쫓고 있는지 물으면서 자신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음을 주장합니다. 24:10에서는 사울이 다윗을 쫓아다니는 것은 사울의 곁에서 충동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라는 사실만을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19절에서는 만일 자신을 죽이도록 충동질한 분이 여호와이시면 자신은 기꺼이 여호와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물이 되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죽음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신은 기꺼이 죽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사람들에 의해 충동질된 것이라면 그 사람들이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이 땅에서 쫓아내어 다른 땅으로 가라는 것은 우상을 숭배하라고 하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는 이스라엘 땅과 여호와 하나님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땅에서 쫓겨나는 것은 여호와 앞에서 쫓겨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윗은 함부로 사람을 모함하여 하나님의 기업에서 쫓아내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3) 다윗의 호소(20)

 

여호와 앞에서 먼 곳에서 나의 피가 땅에 흐르지 말게 해달라는 요청의 핵심은 죽이지 말아달라는 것보다는 여호와 앞에서 먼 곳인 이방 땅에서 죽게 하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20절 하반절에서 다윗은 자신을 메추라기에 비유하며 사울을 메추라기 사냥꾼에 비유하는데, 메추라기를 사냥할 때 메추라기가 지칠 때까지 쫓아다니다 지쳐서 더 이상 못 날게 되면 잡는 것처럼 자신을 지치도록 끊임없이 쫓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의 왕이 벼룩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이렇게 노력할 필요가 있냐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왕과 벼룩 한 마리를 대조함으로 존귀한 왕이 자신처럼 하찮은 존재에게 이렇게 신경 쓰며 고생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24장에서도 자신을 벼룩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 다윗의 말은 자신의 무죄를 천명하기보다는 자신을 잡으려고 쫓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이며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지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세 번째 말(21-25)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우리의 생명을 중요하게 여겨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 안에 영원한 보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으로 하나님과 원수였던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생명을 크고 중요하게 여기사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21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하게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 하는지라 22다윗이 대답하여 이르되 왕은 창을 보소서 한 소년을 보내어 가져가게 하소서 23여호와께서 사람에게 그의 공의와 신실을 따라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내 손에 넘기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24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라 25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하니라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21-25)

 

다윗은 공의와 신실을 따라 갚아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생명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신실함을 따라 갚아주시는 것을 고백합니다. 다윗은 심은 것을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서 다윗이 사울의 생명을 크게 보아 중요하게 여긴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중요하게 여기사 모든 환란에서 구해주시길 바란다고 사울을 향해 오쳤습니다.

 

(1) 사울의 자책(21)

 

이렇게 다윗이 사울의 죄를 지적하자 사울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다시 다윗을 나의 아들이라고 부르며 돌아오라고 요청합니다. 다윗이 오늘 자신의 생명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자신도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다시 한 번 자신이 정말 바보 같은 행동을 했으며 매우 심각하게 잘못했다고 다윗에게 용서를 빕니다.

 

(2) 다윗의 무죄 주장(22-23)

 

다윗은 사울에게 가지 않습니다. 더 이상 사울의 말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울이 하는 말이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는 변명이거나 다윗을 잡기 위한 술책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진심이라 해도 지금 당장은 다윗이 살려주었기 때문에 진심일 수 있지만, 그 마음이 언제 변할지 알 수 없습니다. 지난번에도 자신이 잘못했다고 인정하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말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다윗은 자신이 가져갔던 장을 돌려주겠다고 합니다. 당장은 사울 왕이 늘 가지고 다니던 단장으로 보이며, 이것은 사울 왕의 상징이자 왕권의 상징물이기 때문에 다윗은 왕권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창을 돌려주겠다고 합니다. 23절에서 다윗은 다시 한 번 자신이 사울을 죽이지 않은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께서 사람의 행동에 따라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여호와를 의지하는 다윗(24)

 

다윗은 이번에도 분명히 하나님께서 자신이 사울을 죽일 기회를 주셨지만, 자신은 여전히 여호와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기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자신도 치지 않았다고 천명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왕의 생명을 중히 여긴 것처럼 여호와께서 자신의 생명을 귀중히 여기시고 모든 환란에서 구원해주시길 기원합니다.

 

(4) 사울의 축복(25)

 

그리고 25절에서 사울은 다윗의 말을 들은 후에 더 이상의 추적을 포기하고 돌아갑니다. 차마 자신을 살려준 다윗을 다시 죽이겠다고 쫓지는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를 신뢰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을 살려줍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행위대로 갚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은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이 우리보다 약한 사람이면 가차 없이 보복하기도 하고, 우리보다 강한 사람에 대해서는 억울해서 밤잠을 설치며 그가 망하기만을 바랍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을 우리 하나님께서는 보고 계시고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들의 행위를 따라 판결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의 방법에는 사법적 판결이나 사회적 판결 같은 것도 포함됩니다. 다만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억울함을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하나님의 손에 넘긴 후에 하나님께서 판결해주실 것을 믿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임무들을 완수하기 위해서 선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원수는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믿으면서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받았던 은혜를 그들도 누리기를 기대하면서 기도하지 않으면, 악한 사람과 싸우다가 내가 악해지고 또 다른 악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데 그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히 행하는 자의 생명을 붙잡아 주시고, 모든 환란에서 구하여 내십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과 환경이 조금 불편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만큼은 철저했습니다. 그토록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은혜로 갚아 주십니다. 원수를 죽이기 위해 힘쓰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목숨을 가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붙잡아 주시고 모든 환란에서 구해내 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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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26-01)


다시 다윗을 죽이기 위해 쫓는 사울

사무엘상 26장 1-12절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항상 깨어 있을 것에 대해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는다’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이것은 베드로 시대에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쉬지 않고 공격해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베드로전서 5:8)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 십 사람들이 다시 사울에게 다윗의 은신처에 관한 정보를 고발하였습니다. 사울은 선발한 삼천 명의 군사를 데리고 광야로 가서 진을 쳤습니다. 밤중에 다윗이 아비새와 함께 사울의 진영에 잠입하여 잠자고 있는 사울 곁에 이르렀습니다. 아비새는 창으로 사울을 찔러 죽이겠으니 허락해달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기름부음 받은 자를 해할 수 없다고 말하며, 사울의 머리맡에 있는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다윗을 잡기 위해 십 광야로 온 사울(1-5)

사람의 마음과 약속은 매우 쉽게 변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불안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언제나 그리고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에 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들의 사랑과 다르게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이 기쁘고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를 영원히 사랑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1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매 2사울이 일어나 십 광야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과 함께 십 광야로 내려가서 3사울이 광야 앞 하길라 산 길 가에 진 치니라 다윗이 광야에 있더니 사울이 자기를 따라 광야로 들어옴을 알고 4이에 다윗이 정탐꾼을 보내어 사울이 과연 이른 줄 알고 5다윗이 일어나 사울이 진 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사령관 아브넬이 머무는 곳을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에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 진 쳤더라(1-5)

 

다윗은 나발에게 사사로운 복수를 해서 큰 실수를 범할 뻔했는데, 지혜로운 여인인 나발의 아내 아비가엘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하고 있는지 깨닫고 즉시 돌이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나발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앞으로 사울 역시 처리해 주실 것을 믿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은 계속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 십 사람들의 고발(1)

 

사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며 울었습니다. 심지어 다윗이 미래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까지 시인했습니다. 자신의 후손들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맹세를 요구하기까지 했습니다(삼상 24:16-22). 그러나 사단은 사울을 주변 사람들을 통해 또 충동질합니다. 다윗에게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도록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다윗으로부터 하나님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사무엘상 23:19에 등장했던 십 사람들이 여기 다시 등장하여 또다시 다윗이 하길라 산 수풀에 있다고 사울 왕에게 알려줍니다. 23장과 연결해서 보면 사울이 이들에게 다윗이 숨은 곳을 찾아 확실해지면 자신에게 보고하라는 명령이 아직도 유효했기 때문에 십 사람들이 여전히 다윗에 대한 정보를 사울에게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24장에서 사울은 다윗에게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 다윗이 자신을 살려준 일에 감격하여 다윗을 의롭다고 이야기하고, 다윗을 다음 왕으로 인정하기까지 하였습니다.

 

(2) 사울의 군사 이동(2-3a)

 

26장에서 사울은 십 사람들의 말을 듣자마자 다시 충동질이 일어납니다. 그는 바로 다윗을 잡기 위해 병사 3,000명을 이끌고 십 광야로 갑니다. 다윗을 죽이겠다는 사울의 생각은 사무엘서 안에서 시종일관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24장에서 다윗을 ‘내 아들아’하고 부르던 사울의 모습이 비정상적이고 특별한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면 사람은 변하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울의 군사 3,000명은 24장에서 특별히 선별하여 모은 바로 그 군사들입니다. 사울은 다윗이 숨어 있다고 알려진 하길라 산 길가에 진을 칩니다. 다윗은 그 근처 광야에 있다가 사울이 자신을 쫓기 위해 광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정탐꾼을 보내어 사울이 가려는 최종 목적지가 어딘지 확인합니다. 이것은 우연히 사울과 만나게 된 24장과 다른 점으로, 다윗의 행동이 적극적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다윗의 감시(3b-5)

 

사울이 진 친 곳을 알게 된 다윗은 그곳으로 가서 직접 사울의 진을 정탐합니다. 5절은 다윗이 사울의 진을 관찰한 내용으로 다윗은 여러 진들 중에 특히 사울과 군대장관 아브넬이 자리 잡은 진을 관찰하였는데, 사울이 진 가운데 누워있고 나머지 군사들이 그를 호위하며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특히 아브넬이 사울 옆에 있는 것을 보면, 사울이 아브넬의 호위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동안 사울이 다윗을 추적할 때는 아브넬이 동행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처음 사울과 동행하였습니다.

 

사울의 진영을 정탐하는 다윗(6-7)

하나님의 사명은 수많은 사람이 환영하는 자리이기보다 죽음을 무릅쓴 위험한 자리가 많습니다. 그러나 실시한 사명자들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목숨을 걸고 순종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제자의 사명을 따라 말씀에 순종하기를 기뻐하십니다.

 

6이에 다윗이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물어 이르되 누가 나와 더불어 진영에 내려가서 사울에게 이르겠느냐 하니 아비새가 이르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7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혀 있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6-7)

 

아비새는 다윗의 부름 앞에서 죽을 수 있는 위험한 사명이었지만 순종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3,0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왔다는 소식을 듣고 정탐꾼들을 보내 확인했습니다. 정탐꾼들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왔다고 보고합니다.

 

(1) 자원한 아비새(6)

 

사울의 진을 관찰한 다윗은 밤에 진에 있는 사울에게 가려고 하였고 자신과 함께 다니는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누가 자신과 같이 가려는지 묻습니다. 그동안은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여기서는 다윗의 사람들의 이름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군대도 점점 체계를 갖추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고, 여기서 이름이 언급되는 인물들은 군대 내에서 지위가 높고 다윗과 가까운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헷 사람 아히멜렉의 이름은 여기서 유일하게 등장하는데, 돈으로 고용된 용병으로 추측됩니다. 아비새는 여기서 처음 등장하는데, 그는 다윗의 여자 형제인 스루야의 아들로 다윗의 조카이며, 그의 형제는 요압과 아사헬이 있습니다. 다윗의 질문에 조카 아비새가 같이 가겠다고 자원합니다. 헷 사람 아히멜렉은 같이 가겠다고 하지 않는데, 사실 밤에 사울의 진영으로 가자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아무리 밤이어도 망을 보는 사람들이 있고 수많은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달랑 둘 혹은 셋만 적 진영 중심에 있는 사울에게 간다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한 아히멜렉은 침묵하였고, 대조적으로 아비새는 용감하게 다윗을 따라가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이후에도 아비새는 항상 돌격대장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2) 사울 진영에 잠입(7)

 

밤이 되자 다윗과 아비새는 사울의 군대가 있는 곳으로 갑니다. 다윗이 가서 보니 낮에 본 것과 같은 대형으로 사울은 진 가운데서 누워 자고 있고 아브넬과 병사들은 그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점은 창이 사울의 머리 쪽 땅에 박혀 있는 것입니다. 위험한 상황이 생겼을 때, 사울이 창을 쉽게 잡기 위해서 머리맡에 박아놓은 것입니다. 이런 진의 모습은 사울을 철저하게 보호하기 위해 배열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은 전에 다윗에게 죽을 뻔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나름대로 자신을 방어하는 데 상당히 신경을 쓴 것입니다.

 

사울의 창과 물병만 들고 나오는 다윗(8-12)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며 구원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오늘도 이 세상에 공의과 정의를 베풀어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감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8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니 9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10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11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12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아무도 보거나 눈치 채지 못하고 깨어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더라(8-12)

 

하나님께서는 사울과 모든 군사들을 깊이 잠들게 하심으로 다윗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다윗과 아비새는 사울이 잠들어 있는 적진 가장 깊은 곳으로 침투했습니다. 사울은 진영 한가운데 모든 군사들에게 둘러싸여 보호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1) 아비새의 말(8)

 

다윗과 아비새는 사울의 진에 들어섰습니다. 그곳에서 무방비로 사울이 자고 있는 모습을 본 아비새는 이번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24:4에서 변을 보기 위해 혼자 동굴에 들어온 사울을 보고 다윗의 사람들이 한 말과 같습니다. 이번에도 사울은 다윗에게 무방비로 노출된 것입니다. 아비새는 허락만 하면 자신이 창으로 한 번에 죽이겠다고 장담합니다. 다시 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이 상황에서 사울을 죽이는 것은 너무 쉽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봐도 여호와께서 사울을 다윗의 손에 주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다윗의 대답(9-11)

 

하지만 다윗은 이번에도 사울을 죽이겠다는 것을 말립니다. 지난번처럼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죽이는 것은 죄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의문문으로 ‘무죄하겠느냐?’고 물었는데, 이것은 분명하게 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왜 죽이지 말라고 하는지 설명합니다.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면서 여호와께서 사울을 치실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래서 그의 생명이 다해서 죽든지 아니면 전쟁터에서 망하든지 어쨌든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3) 떠나가는 다윗(12)

 

이것은 지난번과 달라진 것으로 다윗은 나발 사건을 겪으면서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며 그분이 선한 것은 선한 대로 악한 것은 악한 대로 갚아주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다시 한 번 아비새에게 여호와께서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손대는 것을 금하신다고 설득하며 물병과 창만 가져가자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다윗은 이전과 동일하게 사울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병과 창은 물과 무기를 상징하며,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윗이 가져간다는 것은 사울의 생명을 가져간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 물건을 가지고 나오는 것에 대해 어떤 심적인 동요도 없습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행동일 뿐 지난번처럼 직접 해를 가하려는 시도를 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물건들은 후에 자신이 사울을 죽일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다는 증거품들로 사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대담하게 적진 중앙을 돌아다니는데 아무도 보거나 알아채 사람도 없고 심지어 깨어있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윗과 아비새는 모두가 깊이 잠들어 있는 조용한 진에 들어가서 물병과 창만 들고 나온 샘입니다. 이에 대해 화자는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전부 깊은 잠에 빠지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호와께서 사울이 있는 적진으로 들어가는 다윗을 보호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을 잠재워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여호와의 적극적인 개입이 나타납니다. 26장은 24장과 거의 비슷한 사건이지만, 지난번에는 수동적인 모습이 강했던 다윗이 이제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자신이 주도적으로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사울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아비가일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생명 싸개 속에 넣고 보호해주시는 반면, 자신의 원수인 사울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동일한 상황이라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는 상태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상태의 우리 삶의 모습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다윗의 경험을 통해, 그리고 나와 내 주변의 신앙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 손에 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나의 생명을 지켜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우리도 다윗처럼 세상과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절호의 기회를 죄를 짓는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하나님께 범죄하는 유혹으로 생각하면서 아비스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다윗은 나발 사건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수를 하나님의 손에 심판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손에 사울을 죽여서 피흘림을 통한 자신의 노력으로 왕이 되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그러한 방법이 왕이 빨리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지는 모르지만, 다윗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혹시 우리도 환경과 조건에 따라 편한 쪽으로 말씀을 적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건이 허락된다면 언제나 범죄할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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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25-02)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조언

사무엘상 25장 23-44절


 

속담 중에 ‘난세(亂世)에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위기 앞에 닫쳤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숨어있던 본성이 들어납니다. 어려운 시기에 지혜로운 사람은 더욱 지혜롭게, 용감한 사람은 더욱 용감하게 행동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악한 사람은 더욱 악하게 행동합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더욱 이기적으로, 어리석은 사람은 더욱 어리석은 행동만 하도록 환경은 만들어 갑니다.

 

  • 아비가일이 다윗을 만나서 나발을 낮추고 다윗을 칭송합니다. 다윗이 나발을 직접 죽이는 것은 이스라엘의 주권자에게 좋지 않은 일이 되리라고 설득합니다. 다윗은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말에 크게 고무되어 나발을 죽이지 않기를 바라는 그녀의 청을 받아들입니다. 나발은 하나님의 치심을 받아 죽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이 아비가일을 자기 아내로 데려옵니다.

 

지혜로운 말을 한 아비가일(23-31)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통해 누군가의 생명을 지켜주고 보호해주며,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고 이웃의 생명을 구원하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비가일은 예수님처럼 남편의 죄악을 자신에게 돌려달라고 고백했습니다.

 

23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엎드려 그의 얼굴을 땅에 대니라 24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에게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25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께서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26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27여종이 내 주께 가져온 이 예물을 내 주를 따르는 이 소년들에게 주게 하시고 28주의 여종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29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30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 31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복하셨다든지 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실 때에 원하건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하니라(23-31)

 

남편 나발의 실수를 해결하는 아비가일의 지혜와 용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담대하게 다윗을 만나려 나섰습니다. 야곱이 에서를 보자 땅에 엎드려 절한 것처럼 다윗을 보자 땅에 내려서 엎드려 다윗 앞에 완전하게 복종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1) 자신과 남편을 낮추는 아비가일(23-25)

 

아비가일이 다윗을 만났을 때, 그녀는 계속 엎드리면서 절했습니다. 다윗을 ‘내 주’라고 부르며, 자신을 ‘당신의 여종’이라 칭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책망하기를 바라면서, 당신의 여종이 당신의 귀에 말하리니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아비가일이 하는 말의 내용은 여섯 가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 불량한 사람 나발에게 마음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발은 그의 이름 그대로인 사람이니 그에게 어리석음이 항상 함께 따라다닙니다. 둘째, 당신의 여종인 아비가일은 주께서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나발과 아비가일을 언급함으로써 나발의 가문에 대한 다윗의 복수가 불필요함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을 살생하는 것은 아깝다는 것입니다.

 

(2) 직접 복수하는 것을 막으시는 여호와(26)

 

셋째, 여호와의 사심과 주의 사심으로 맹세하는 바, 여호와께서는 주 다윗이 친히 피를 흘리면서 복수함을 막으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직접 복수하지 않더라도 주의 원수들과 주께 해를 끼치려는 자들은 나발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아비가일은 나발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 너무나 당연하여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전제하고 이야기합니다.

 

(3) 다윗의 원수를 멸하시는 여호와(27-29)

 

넷째, 준비해온 예물을 받고 여종의 허물을 용서해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전쟁들을 싸우며 평생 악을 멀리하는 다윗을 위해 든든한 집을 세우실 것이므로, 조급하여 작은 손해에 분노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일어나 다윗을 쫓으며 그의 생명을 뺏으려 하더라도 주의 생명은 여호와의 돌보심으로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당신의 원수들은 물매에 실어 던져버리실 것입니다.

 

(4) 이스라엘의 주권자인 다윗(30-31)

 

다섯째, 여호와께서 이미 하셨던 말씀대로 모든 선을 당신을 위해 행하시고 당신을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주권자로 임명하실 때에 무죄한 피를 흘렸다든지 친히 복수하였다든지 하는 일로 흠이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권자는 다음 왕으로 확정된 왕 후보자를 가리키거나, 혹은 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비가일은 무죄한 피를 흘림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같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나발을 죽이는 것은 무죄한 피를 흘리는 것이라는 암시가 있으며, 나은 죽어야 할 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섯째, 여호와께서 주께 선을 베푸신 때에 여종 아비가일을 기억해달라는 것입니다. 아비가일의 이러한 많은 나발과 그 가족을 살려달라는 것이 아니라, 친히 복수하여 마음에 거리낌이 생기지 않도록 하라는 요청입니다. 즉 다윗을 위한 요청이었으므로 다윗의 마음을 기쁘게 했습니다.

 

나발의 죽음(32-38)

우리는 한두 번 실수할 수 있고, 사심을 품고, 잘못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사람과 환경과 말씀을 통해 알려주십니다.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누구든지 상관하지 않고,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32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하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33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34나를 막아 너를 해하지 않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급히 와서 나를 영접하지 아니하였더면 밝는 아침에는 과연 나발에게 한 남자도 남겨 두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라 35다윗이 그가 가져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고 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평안히 올라가라 내가 네 말을 듣고 네 청을 허락하노라 36아비가일이 나발에게로 돌아오니 그가 왕의 잔치와 같은 잔치를 그의 집에 배설하고 크게 취하여 마음에 기뻐하므로 아비가일이 밝는 아침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다가 37아침에 나발이 포도주에서 깬 후에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말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38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32-38)

 

다윗은 아비가일 여인의 말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리고 보복을 멈추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함입니다. 다윗은 아비가일을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성 잃고 복수하겠다고 나선 자신과는 다르게 아비가일의 바른 판단력을 칭찬합니다.

 

(1) 복수를 중단하는 다윗(32-35)

 

다윗은 아비가일을 자신에게로 보내어 만나게 하신 이가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여호와께 찬송을 돌립니다. 찬송을 돌리는 것은 바루크로 표현되는데, 이는 ‘축복을 빌다’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아비가일의 지혜에 대해 칭찬하고, 자신이 스스로 복수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 복을 받도록 빌었습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이 친히 복수하지 못하도록 그를 가두었습니다. 다윗은 또 자기를 막아 아비가일을 해치지 못하게 하신 분이 여호와라고 고백합니다.

3-4절의 ‘막다’는 ‘저지하다’, ‘억제하다’라는 의미입니다(삼하 13:13). 아비가일의 말과 선물에 크게 만족한 다윗은 평안히 돌아가라고 말하면서, 그녀의 요청을 수락했습니다(그녀의 얼굴을 들었다).

 

(2) 잔치 끝에 죽음을 맞이한 나발(36-38)

 

한편 나발은 왕의 잔치 같은 잔치를 배설하고 기뻐하면서 대취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다윗에게 인색했으나 자신에게는 풍성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너무 과한 음식을 준비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요구한 적은 음식은 인색했습니다.

아비가일은 아침에 나발이 술에서 깨어난 뒤, 그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순간 그의 마음이 죽었고(낙담하여), 그 몸이 돌처럼 되었습니다. 열흘 후 여호와께서 치시므로 그가 죽었습니다. 나발의 죽음은 사울의 충실한 종이었던 사람이 하나님께서 다윗을 재 왕으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여호와의 심판을 받았다는 점에서 의미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왕국이 망해가는 절차를 밟으십니다. 처음에는 유다 지파의 한 사람이 망하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점차 다윗을 거부하는 모든 자가 같은 결말을 겪게 될 것입니다.

사무엘서의 저자는 다윗이 사울 왕국의 멸망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음을 나타내려 하는데, 이런 점에서 사울의 충신 나말의 죽음에 다윗이 연루되지 않았음을 설명하였습니다.

 

아비가일과 결혼하는 다윗(39-44)

하나님께서는 악하고 미련한 자들에게 자신의 머리에 돌리십니다. 우리의 영원한 재판장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대신하여 악한 자들의 악행을 정의롭게 심판하십니다. 인색하고 탐욕스러운 죄악을 가만히 두지 않으시고 그들의 머리에 돌리고, 죽음에 이르게 하십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나발을 향한 심판을 묵상하며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깨달라야 합니다.

 

39나발이 죽었다 함을 다윗이 듣고 이르되 나발에게 당한 나의 모욕을 갚아 주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의 머리에 돌리셨도다 하니라 다윗이 아비가일을 자기 아내로 삼으려고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말하게 하매 40다윗의 전령들이 갈멜에 가서 아비가일에게 이르러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당신을 아내로 삼고자 하여 우리를 당신께 보내더이다 하니 41아비가일이 일어나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이르되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전령들의 발 씻길 종이니이다 하고 42아비가일이 급히 일어나서 나귀를 타고 그를 뒤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전령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 43다윗이 또 이스르엘 아히노암을 아내로 맞았더니 그들 두 사람이 그의 아내가 되니라 44사울이 그의 딸 다윗의 아내 미갈을 갈림에 사는 라이스의 아들 발디에게 주었더라(39-44)

 

다윗은 나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손으로 보복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보복해 주신 것을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나발에 받은 모욕에 대해서 친히 갚아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그는 이번 일을 통해 확실하게 원수갚는 것은 여호와의 손에 달려있음을 깨달았습니다.

 

(1) 다윗의 찬양(39)

 

다윗은 나말의 죽음을 여호와께서 자신의 모욕당함에 대하여 복수해주신 것으로 받아들이고 여호와를 찬송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다윗이 스스로 보복하는 것을 막으시고, 나의 악행을 그의 머리에 되돌리셨습니다. 다윗은 부하들을 보내 아비가일에게 결혼을 제의했습니다.

 

(2) 아비가일과 결혼(40-42)

 

다윗의 부하들이 갈멜의 아비가일에게로 가서 다윗의 의중을 전달했습니다. 아비가일이 일어나 코를 땅에 대고 절하며 주의 여종인 자기는 주의 신하들의 발을 씻겨야 하는 여종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결혼을 승낙하면서, 아내로서 보다는 종처럼 섬기겠다는 겸손한 태도를 표현한 것입니다. ‘아마’와 ‘쉬프’하는 교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유사한 단어이지만, 발 씻는 것과 관련된 것처럼 낮은 여종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다윗의 급한 성격을 잘 아는 아비가일은 서둘러 일어나서 자기를 따르는 다섯 소녀와 함께 다윗의 전령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아비가일과의 결혼은 다윗에게 큰 재물을 안겨주었을 것입니다.

 

(3) 다윗의 다른 아내들(43-44)

 

다윗이 이스르엘 사람 아히노암을 아내로 취했습니다. 아마도 아히노암이 아비가일보다 먼저 아내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아히노암은 다윗의 장자 암논의 어머니입니다(삼하 3:2). 다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여기 이스르엘은 나봇의 포도원이 있던 이스르엘이 아니라, 마온과 십이나 갈멜 근처에 있는 유다 지파에 속한 한 장소일 것입니다(수 15:56). 다윗의 첫째 아내는 미갈입니다. 사울이 미갈을 갈림 사람 라이스의 아들 발디(발디엘, 삼하 3:15)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했습니다. 갈림은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마을 중 하나로 언급됩니다(사 10:30). 이후 다윗은 다시 미갈과 재결합하지만, 이것은 실질적으로 모세의 법에 저촉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신 24:4).


나발의 사건을 통해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에 대한 최후를 볼 수 있습니다. 잠언처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혜가 있었던 아비가일은 삶과 행복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없고 어리석었던 나발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아비가일을 통해 다윗이 어리석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도우셨을 뿐만 아니라, 선을 악으로 갚는 악한 나발을 죽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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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25-01)


다윗을 모욕한 어리석인 나발

사무엘상 25장 1-22절


 

성경에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마가복음 2:22)고 말씀하십니다. 시대가 변하면 새로운 시대에 맞는 그릇을 필요로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시대의 변화를 알지 못하고, 이전에 쓰였던 옛 그릇에 집착하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지혜로운 사람은 시대의 변화를 읽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그릇을 만들어 내는 사람입니다. 본문은 지혜로운 한 여인과 어리석은 한 남자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이 죽어 라마에 장사되었습니다. 다윗은 바란 광야로 내려갑니다. 그 지역에는 마온 사람 나발이 살고 있었습니다. 나발은 갈멜에서 양털 깎는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소년들을 보내 도움을 구합니다. 하지만 나발은 다윗을 모욕합니다. 이를 전해 들은 다윗은 칼을 차게 하고 400명가량 데리고 올라갑니다.

 

사무엘의 죽음과 나발 등장(1-3)

성도들은 모든 분들이 서로 하나로 유기적(有機的)인 관계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유기적인 관계라는 것은 서로가 한 몸처럼, 반드시 필요한 존재로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공동체 안에 문제를 인식하면,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세우는 일이, 곧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진실하게 사랑하면 하나가 되어집니다.

 

1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두고 슬피 울며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한지라 다윗이 일어나 바란 광야로 내려가니라 2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생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의 양 털을 깎고 있었으니 3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며 그는 갈렙 족속이었더라(1-3)

 

우리는 사명을 다할 때까지 최선을 다하되, 물러서야 할 때를 준비해야 합니다. 위대한 사사, 마지막 선지자인 사무엘은 사명을 다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정치적 리더십을 사울에게 넘겼고, 그의 죽음을 이을 지도자 다윗을 세우고는 하나님께로 돌아갔습니다.

 

(1) 사무엘의 죽음(1)

 

사무엘의 죽음에 대한 보고가 나옵니다. 사울과 다윗의 갈등이 점점 첨예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윗이 후원자였던 사무엘이 죽습니다. 그의 죽음에 온 이스라엘 백성이 모여 애곡하였습니다. 이것은 백성들이 함께 사무엘의 죽음에 조의를 표했다는 것으로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로서 온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는 라마의 자기 집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영적으로 혼란에 빠진 이스라엘을 바로잡고 왕정의 기반을 세운 사무엘은 자신의 임무를 끝내고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다. 라마 그의 집에 장사되었다는 표현은 마치 아기 때 집을 떠난 사무엘이 자신의 모든 임무를 마치고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한편 자신의 중요한 후원자를 잃어버린 다윗은 이 소식을 듣고 바란 광야 혹은 다른 이름으로 마온 광야로 내려가는데, 이곳은 엔게디보다 더 남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과 좀 더 멀어지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갔고, 이제 마온에서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2) 나발과 아비가일에 대한 소개(2-3)

 

이 부분은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배경과 인물들을 소개하는 단락으로 마온에 사는 매우 부유한 나발과 그의 아내 아비가일이 소개됩니다. 그는 갈멜에서 목축업을 하는 사람으로 얼마나 부유한지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갈멜은 마온에서 북쪽으로 1.6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곳입니다. 화자는 나발과 아비가일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아비가일에 대해서는 총명하고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다고 하고, 나발에 대해서는 완고하고 행실이 악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나발은 어리석은 사람이고 아비가일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가진 특징은 앞으로 진행될 이야기의 전제가 되며, 각각 죽음과 삶으로 끝나는 어리석음과 지혜의 두 길의 결과를 암시합니다.

 

나발에게 양식을 부탁하는 다윗(4-13)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한 것이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 은혜를 기억하면서 은혜를 나누며 연약한 자들에게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자기만을 위해 물질과 시간을 사용한다면 사람들에게 대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배은망덕한 삶입니다.

 

4다윗이 나발이 자기 양 털을 깎는다 함을 광야에서 들은지라 5다윗이 이에 소년 열 명을 보내며 그 소년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갈멜로 올라가 나발에게 이르러 내 이름으로 그에게 문안하고 6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7네게 양 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해하지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8네 소년들에게 물으면 그들이 네게 말하리라 그런즉 내 소년들이 네게 은혜를 얻게 하라 우리가 좋은 날에 왔은즉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하더라 하라 9다윗의 소년들이 가서 다윗의 이름으로 이 모든 말을 나발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10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11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12이에 다윗의 소년들이 돌아서 자기 길로 행하여 돌아와 이 모든 말을 그에게 전하매 13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 하니 각기 칼을 차매 다윗도 자기 칼을 차고 사백 명 가량은 데리고 올라가고 이백 명은 소유물 곁에 있게 하니라 (4-13)

 

나발의 염치없는 거절에 다윗은 즉시 나발을 진멸할 결심을 할 만큼 분노합니다. 하지만 사울에게 그토록 관대했던 다윗답지 않은 모습입니다. 그간 숱하게 참아왔는데 이제 약자를 행해서는 자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1) 나발에게 문안하라고 지시하는 다윗(4-6)

 

이스라엘은 양털을 깎는 시간은 풍요로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눈 시간입니다. 마치 우리나라 추수할 때, 세참을 나는 그런 풍경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발의 가정이 양털을 깎는다는 소식을 듣고 열 명의 사람들을 보냅니다.

다윗은 나발이 갈멜에서 양털을 깎는다는 소리를 듣는데, 양털을 깎을 때는 보통 잔치를 벌이고 많은 사람들이 축하하며 수고한 목동들에게 임금을 계산해 줍니다. 창세기 38장에서도 유다가 양털 깎을 때, 잔치를 벌이고 술을 먹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때 다윗은 자신의 하인 열 명을 보내어 자신의 이름으로 문안하고 나발을 ‘나의 형제’라고 친근하게 부르면서 그와 그의 가족과 그의 모든 소유에 대한 평안을 빌어줍니다. 이 인사는 자신은 나발과 그의 가족과 그의 소유에 대해 어떠한 손해를 입힐 의도가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으로 다윗은 최대한 예의를 지키며 조심스럽게 나에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2) 나발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다윗(7-8)

 

본론으로 갈멜에 있을 동안에 나발의 목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자신의 수하들이 나발의 양을 지켜주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종들에게 물어보면 알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풍성하게 수확하는 좋은 날 자신의 수하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먹을 것을 좀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합니다. 나발의 부유함은 하나님께 받은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양도 나발이 주고 싶은 만큼 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을 최대한 낮추어 ‘나발의 아들’이라고 표현하여 나발에 대한 존경을 표하고 있습니다. 관례적으로 목동들에게 임금을 주는 날, 그동안 양을 지켜준 사람들에게도 일정 부분 사례를 하기 때문에 비록 정식 계약은 하지 않았지만, 상식적으로 나발도 자신들의 수고를 인정하고 얼마간의 양식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정중하고 겸손하게 나발에게 얼마간의 양식을 부탁한 것입니다.

 

(3) 나발의 반응(9-13)

 

다윗의 종들은 충실하게 다윗의 이름으로 다윗이 한 말을 잘 전했습니다. 하지만 나발의 반응은 다윗이 예상한 것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다윗의 이름으로 문안한 다윗의 종들에게 다윗이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며 다윗을 주인에게서 도망친 종이라고 조롱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떡과 물과 고기는 자신과 자신의 양털 깎는 자의 것이기 때문에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자에게 줄 수 없다고 매몰차게 거절합니다. 거절만 한 것이 아니라 다윗을 도망친 종이라고 비아냥거리며 엄청난 모욕을 주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나발은 사울 정권을 지지하고 그에게 반역적인 모습을 보이는 다윗을 반대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결국 다윗의 소년들은 빈손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그들은 다윗에게 나발에게서 들은 말을 그대로 전합니다. 다윗은 생각지도 못한 나발의 모욕과 거절을 당하자 엄청나게 분노를 하는데, 그의 분노는 후에 나오는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침까지 남겨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삼상 25:22)라는 다윗의 맹세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이전에 사울에게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삼상 24:12)라고 말한 것과 대조됩니다. 여기서 다윗의 부정적인 모습이 처음으로 나타납니다. 그는 나발을 죽이기 위해 사백 명의 군사에게 칼을 차라고 명령하고 자신도 칼을 차고 갈멜로 올라갑니다. 자신을 거절하고 자신에게 모욕을 준 나발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출발한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나타나는 다윗은 자신보다 힘세고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인 사울에게는 너그럽고 신앙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자신이 보기에 만만한 상대에 대해서는 신앙을 떠나 힘으로 해결하려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줍니다.

 

아비가일에게 이 사건이 전해짐(14-22)

우리의 죄악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추악한 존재들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 진노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보자로 오신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죄인들 사이에 중재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비가엘의 모습 속에 예수님의 중보자 역할을 아비가일 볼 수 있습니다.

 

14하인들 가운데 하나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우리 주인에게 문안하러 광야에서 전령들을 보냈거늘 주인이 그들을 모욕하였나이다 15우리가 들에 있어 그들과 상종할 동안에 그 사람들이 우리를 매우 선대하였으므로 우리가 다치거나 잃은 것이 없었으니 16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 17그런즉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지를 알아 생각하실지니 이는 다윗이 우리 주인과 주인의 온 집을 해하기로 결정하였음이니이다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 하는지라 18아비가일이 급히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서 요리한 양 다섯 마리와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이백 개를 가져다가 나귀들에게 싣고 19소년들에게 이르되 나를 앞서 가라 나는 너희 뒤에 가리라 하고 그의 남편 나발에게는 말하지 아니하니라 20아비가일이 나귀를 타고 산 호젓한 곳을 따라 내려가더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자기에게로 마주 내려오는 것을 만나니라 21다윗이 이미 말하기를 내가 이 자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도다 22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침까지 남겨 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14-22)

 

나발의 종은 그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찾아가서 주인 나발의 어리석은 행동에 대해 보고합니다.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그의 아비가엘 찾아갑니다. 아비가일은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1) 종들의 보고(14-17)

 

이렇게 다윗이 분노하여 나발을 죽이겠다고 쳐들어오는 상황에서 나발의 집에서는 하인 하나가 여주인 아비가일에게 다윗이 나발에게 축복의 인사를 하러 광야 먼 곳에서 사자들을 보냈다는 것과 나발은 이렇게 찾아온 다윗의 사자에게 소리를 지르며 모욕한 후에 빈손으로 돌려보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러면서 다윗과 그의 군사들이 양을 칠 때에 자신들을 보호해주었다는 사실도 알립니다. 여기서 좋은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다’라는 표현을 하며 다윗과 그의 군사들이 얼마나 성실하게, 그리고 든든하게 자신들을 보호해주었는지 부연설명 해줍니다. 이 말은 나발의 처사가 매우 부당하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이 하인의 말을 통해 아비가일은 다윗의 요청이 정당하다는 것과 나발의 행동이 다윗의 분노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2) 아비가일의 준비(18-20)

 

종은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여주인 아비가일에게 어떻게 대처하실 것인지 물으며 다윗이 나발과 나발의 집을 치기로 결정하였다는 매우 급박하고 위험한 상황을 전달합니다. 마지막으로 나발은 ‘불량한 사람’, 즉 이런 일을 의논할 만한 지혜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아비가일에게 대책을 강구하라고 요청합니다. 나발에게 다윗이 주인의 말에 분노하여 지금 군사들을 이끌고 쳐들어온다고 해봐야 화만 내고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좋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발의 집에서 일하는 종들도 주인인 나발보다는 여주인인 아비가일이 더 지혜롭고 유능하며 믿음직스럽다고 생각하며 중요한 일은 나발이 아난 여주인인 아비가일과 의논하여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다윗의 결심(21-22)

 

이렇게 나발은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해 죽음의 위기를 맞게 되었고, 다윗은 자신을 무시하는 나발에게 분노하여 이성을 잃고 자신의 손으로 복수하겠다고 달려오는 위급한 상황이 전개됩니다. 두 남자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발생한 위기에 대한 해결책은 오로지 지혜로운 아비가일의 손에 달려있었습니다.


잘못된 감정은 잘못된 결정을 가져옵니다. 다윗은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혀 쉽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감정이 중요하지만 잘못된 감정은 잘못된 결정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분노로 인한 행동은 자칫 악을 불러 일으켜 그 악을 정당하게 합니다. 지금까지 사울을 죽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다윗이 이 감정에 휩싸혀 나발을 죽이라는 위험에 빠집니다. 우리가 일상 가운데 특정한 사건 때문에 분노에 사로잡혀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일상들을 놓쳐버리는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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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24-01)


앤게디 광야에서 사울을 살려준 다윗

사무엘상 24장 1-22절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길에서 선택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그 선택 앞에서 자신의 가치관과 신앙관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적어도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이 아니라 영원히 좌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원수를 보복하는 일이 당연한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에서는 원수 갚는 것도 하나님 속한 권한이라고 가르칩니다.

 

  • 다윗은 자기 목숨을 노리는 원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위대한 선택을 합니다. 다윗과 사울은 모두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고 왕으로 세워졌습니다. 그 때문에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했지만, 다윗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선택에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옷자락을 베는 다윗(1-7)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이러한 기회를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을 사용해야 하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것이 무엇인지 주님께 칭찬받고 믿음의 공동체를 세워야 합니다.

 

1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2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3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4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5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6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7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1-7)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쉽게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얻습니다. 그 앞에서 주님의 뜻을 분별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양의 우리에 가까운 굴 깊숙한 곳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용변을 보기 위해 그 굴로 들어섰습니다.

 

(1) 동굴에 들어간 사울(1-3)

 

다윗은 십 광야에서 앤게디 광야로 이동하였습니다. 십 광야에서 다윗을 거의 잡을 뻔하다가 블레셋의 침략으로 실패한 이후로도 사울은 계속해서 다윗을 잡으려는 노력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전쟁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이스라엘 군사 삼천 명을 선발하여 다윗을 잡기 위해 들염소 바위로 갑니다. 선발된 삼천 명의 군사는 다윗의 육백 명에 비하면 다섯 배나 되는 엄청난 규모입니다. 이번에는 반드시 잡고야 말겠다는 그의 의지를 반영한 것입니다.

그런데 입구에 양 우리가 있는 굴을 발견한 사울은 그곳에 잠시 볼일을 보러 들어갑니다. 앞에 양들이 얌전히 있는 것을 보고 굴에 아무도 없으며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침 그곳에는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동굴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다윗과 그 일행들이 있었습니다. 무방비 상태로 혼자서 변을 보고 있는 사울을 본 다윗의 군사들은 여호와께서 다윗의 손에 원수를 넘겨주신다는 것과 다윗의 눈에 좋은 대로 행하라는 약속을 해주셨는데, 지금이 바로 그 기회라고 말합니다. 군사들이 말하는 이 신탁은 그일라에서 블레셋을 칠 때 다윗에게 주신 말씀으로, 이때는 블레셋을 다윗의 손에 넘겨주신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을 본 군사들은 이 신탁을 블레셋뿐만 아니라 다윗의 원수인 사울도 다윗의 손에 넘기신다는 것으로 확대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사울의 옷자락을 벤 다윗(4-7)

 

다윗도 눈앞에 일어난 우연한 상황을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일어나 가만히 사울의 겉옷 자락을 베었습니다. 겉옷 자락을 베었다는 것은 사울을 충분히 죽일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그를 죽이려고 다가갔다가 차마 죽이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다시없을 좋은 기회를 날려버립니다.

 

(3) 후회하는 다윗(5-7)

 

다윗은 사울의 겉옷 자락을 벤 것에 대해 심하게 자책합니다. 겉옷 자락을 베었다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 종종 불충성과 반역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기 군사들에게 자신이 사울을 죽이지 않은 것과 겉옷만 자르고도 심한 죄책감을 느끼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는 자’라는 표현을 두 번이나 반복하면서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함부로 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다윗은 사울을 죽이자고 하는 사람들을 막았고, 사울은 아무것도 모른 채 무사히 동굴을 나갔습니다.

 

다윗의 억울함에 대한 호소(8-15)

우리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일에만 하나님의 뜻만 입에 올리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불평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순간에 조심해야 할 것은 자신의 생각대로 상황이 돌아간다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지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진실한 하나님의 선한 뜻을 찾아야 합니다.

 

8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이르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9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10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11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베었은즉 내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12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13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14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의 뒤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15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8-15)

 

다윗이 사울을 제거할 기회가 왔습니다. 사울을 제거함으로 자신을 괴롭게 하는 요인을 없앨 수 있었습니다. 순전하게 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처음부터 사울을 제거하여 왕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1) 상황 설명(8-11)

 

다윗이 사울을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이기 때문에 죽이면 안 된다고 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직접 선택한 여호와의 종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직접 해를 가하는 것은 자칫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선악 간에 심판하시도록 맡겨야 합니다. 하지만 다윗과 대조적으로 사울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놉의 대제사장 아히멜렉을 죽이면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둘의 이런 대조적인 태도를 통해 다윗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는 사실과 사울이 여호와를 무시하는 자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둘째 이유는 다윗 자신도 여호와의 기름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사울을 죽이고 반정에 성공하면 후대 사람들도 다윗의 본을 따라 얼마든지 왕을 죽이고 반정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기 행동이 왕정 제도를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자제한 것입니다. 후에 북왕조 이스라엘에서는 남유다의 다윗 왕조와는 달리 계속해서 왕을 죽이는 반정이 일어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기회도 마다하며 하나님의 선하심과 주인 되심과 정의로움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그런 모습을 닮고 싶었던 것입니다. 다윗에게 중요한 것은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칙을 지키며 그의 자녀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2) 다윗의 결심(12-13)

 

이 단락은 다윗이 사울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장면으로 그동안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며 많은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그동안의 억울함을 사울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사울과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지게 되자 다윗은 사울을 부른 뒤에 땅에 엎드려 절하며 최대한의 예의를 갖춥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이 왕을 해하려고 한다는 사람들의 말에 왜 귀를 기울이느냐고 묻습니다. 사실 이 말은 사람들이 한 말이 아니라 사울 자신이 직접 생각한 것이지만, 다윗은 사울의 책임을 덜어주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손에 있는 사울의 겉옷 자락을 보여주면서 사울이 굴에 들어왔을 때, 여호와께서 왕을 자기 손에 넘기셨고 사람들은 왕을 죽이라고 말하였지만, 자신은 왕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죽이지 않고 왕의 겉옷 자락만 베었다며, 죽일 기회가 있음에도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비록 왕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지만 자신은 왕에게 무죄하다고 다시 한번 선언한 후에, 자신과 왕에 대한 심판을 여호와의 손에 맡깁니다. 자신과 왕 사이의 시시비비는 여호와께서 판단하셔서 여호와께서 자신을 위해 복수해주시길 기원하며, 자기 손으로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이후로도 자신은 사울을 해하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것은 여호와의 손에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다윗의 말의 핵심이자 사무엘서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복수는 여호와의 것이며 인간의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13절의 속담은 자신은 악인이 아니기 때문에 악한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3) 여호와께 호소(14-15)

 

14절에서 다윗은 자신을 죽은 개로 비유하는데, 이것은 왕에 비하면 자신은 매우 하찮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존재로 비하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은 왕에게 전혀 해가 되지 않는 존재이니 추적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다윗이 여호와의 심판과 판단을 언급하는 것은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왕의 손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하며 긴 연설을 마칩니다.

 

다윗이 왕이 될 것을 인정하는 사울(16-22)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폭력이 아니라 복음과 사랑으로써 세계를 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폭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세상을 지배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써 모든 사람들을 대해서,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16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17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18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넘기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19사람이 그의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 내게 행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20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21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라 하니라 22다윗이 사울에게 맹세하매 사울은 집으로 돌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요새로 올라가니라(16-22)

 

진실한 사랑은 악한 사람까지도 감동을 줍니다. 다윗의 진실한 변호 앞에서 사울의 마음이 감동됩니다. 다윗을 향한 미움과 증오로 가득 찬 사울의 마음에 한줄기 사랑의 빛이 가슴에 비추었습니다. 자기가 죽이려고 했던 다윗이 자신에게 변함없는 사랑으로 행한 사실을 알고 난 후에 목 놓아 울면서, 자기 잘못을 인정합니다. 다윗이 진정으로 승리한 것입니다.

 

(1) 사울의 판결(16-17)

 

다윗에게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죽이지 않고 살려 보내준 것과 앞으로도 왕을 죽이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는 다윗의 말을 들은 사울은 감동을 받습니다. 그는 다윗을 ‘내 아들 다윗아’라고 친근하게 부르는데, 이것은 이제까지 ‘이 새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과 대조됩니다. 다윗의 말에 감동을 받은 사울은 울면서 다윗이 자신보다 의롭고, 자신은 늘 다윗에게 악한 짓만 했는데 다윗은 자신에게 이렇게 선한 행동만 하였다고 하며, 하나님께서 다윗의 행동을 선하게 갚아주시길 기원해줍니다.

 

(2) 사울의 축복(18-19)

 

본문에서 사울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원수를 만나면 평안히 가게 하지 않는다는 예를 들며, 다윗이 원수인 자신을 살려준 것에 대해서 깊게 감동 받았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의 생명을 다윗의 손에 주신 하나님의 행동을 보면서 사울은 부인하고 싶었던 사실을 입으로 시인하는데, 그것은 다윗이 다음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3) 맹세를 요구하는 사울(20-22)

 

사무엘상 23장 17절에서 요나단이 한 말이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사울은 요나단이 했던 것처럼 다윗이 왕이 되면 자신과 자기 집을 멸하지 않을 것을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라고 요청합니다. 이런 맹세를 시키는 이유는 고대에는 반란으로 왕이 되면 이전 왕족들을 몰아넣고 한꺼번에 죽여 반란의 싹을 자르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런 사울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여 맹세합니다. 사울과 다윗은 각자의 길로 갑니다.

이제 다윗과 사울 간의 평화가 찾아온 듯합니다. 하지만 사울의 이런 마음은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다윗을 죽이려고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의 신앙고백이 힘 있는 자에 대한 힘없는 자의 변명인지, 아니면 진실한 고백인지 다음 나발의 이야기에서 시험을 받게 됩니다.


모든 일을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려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억울하고 답답한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기도하시고 하나님께 맡기는 일을 하시길 바랍니다. 감정은 중요하지만 잘못된 감정은 잘못된 결정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분노로 인한 행동은 자칫 악을 불러 일으켜 그 악을 정당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른 선택을 하실 것입니다. 비록 승리할 때까지는 힘들겠지만, 지속적으로 선한 선택을 하면 언젠가는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괴롭게 했던 사람들도 사울과 같이 자기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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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23-02)


다윗을 죽이려고 십까지 찾아간 사울

사무엘상 23장 15-29절


 

진실한 성도는 자신의 소명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이 땅에서 감당해야할 역할을 아는 사람은 인생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보내고 있는 모든 시간, 만나는 모든 사람,자신이 당한 모든 일들이 자신의 소명이라는 결과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조성하신 환경이라고 믿기 때문에 항상 감사하고, 항상 자신을 더 낫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 그일라가 블레셋의 침략을 받았다는 소식에 다윗은 그일라를 구원하러 갑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사울은 다윗을 잡을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군사를 모아 다윗을 잡기 위해 그일라를 공격하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여호와께 뜻을 묻고 그일라를 무사히 탈출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겨줄 생각이 없으시지만, 사울은 끝까지 다윗을 잡으려고 하였기에 사울의 추격전은 계속됩니다.

 

십 광야에서 다시 만난 요나단(15-18)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을 부러워하고, 다른 사람들의 앉은 자리를 탐하고 시기하는 사람은 자기 목숨을 스스로 쇠하게 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나갈 때와 물러설 때, 일어설 때와 앉을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런 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그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5다윗이 사울이 자기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십 광야 수풀에 있었더니 16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17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18두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언약하고 다윗은 수풀에 머물고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15-18)

 

하나님께서는 그일라에서는 직접 다윗에게 자신의 뜻을 드러내시고 피할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본문에서는 다윗의 가장 강력한 대적이 될 수 있었지만, 도리어 사랑의 맹세를 기억한 요나단을 통해 위로와 확신을 주십니다.

 

(1) 십 광야 수풀로 피신한 다윗(15)

 

요나단은 하나님 앞에서 정말 멋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적인 상식적으로는 그는 왕자이기 때문에 다음 왕이 될 사람입니다. 누구보다도 아버지 사울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요나단이 왕이 되어야 사울도 끝까지 안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 보복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왕권을 아들 요나단에게 물려주려고 합니다.

요나단의 생각은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께서 정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진행된 상황을 보면 자신이 아니라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단은 자신이 왕이 되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핍박을 피해서 십 광야로 도망갔을 때의 사건들로 십 광야로 도망한 다윗을 찾기 위해 사울도 십 광야로 옵니다. 그리고 그런 사울을 멀리서 보고 다윗은 재빨리 숲속으로 숨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의 모습을 요나단이 보았습니다. 본문에서는 말하고 있지 않지만,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쫓아다닐 때 요나단도 동행한 것 같습니다. 사울 옆에 있다가 다윗이 숨는 것을 보고 요나단은 사울과 다른 군사들의 눈을 피해 몰래 다윗을 만나러 숲으로 들어갑니다.

 

(2) 요나단의 권면(16-17)

 

이런 요나단의 행동은 다윗을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었지만, 그런 위험보다는 다윗을 보고 무사한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에 요나단은 다윗을 만나러 갑니다. 다윗을 만난 요나단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힘을 내라고 위로한 뒤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사울이 결코 다윗을 잡지 못할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14절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기지 않으셨다고 한 말과 같은 의미로 두 문장 모두에 ‘사울의 손’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지키고 계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전에 요나단은 ‘아버지에게 함께하신 하나님이 너와 함께하시길’이라고 하거나, 자신과 자신의 집안을 살려달라는 말로 암시적으로 표현하였는데, 이번에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지위도 다윗을 위한 이 인자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다윗의 신하가 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될 것을 자기 아버지도 알고 있다고 합니다.

 

(3) 요나단과 다윗의 언약(18)

 

이제 요나단은 여호와 앞에서 다윗과 언약을 맺습니다. 이것은 이전에 맺었던 언약들을 다시 한 번 여호와 앞에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잠깐 만난 후에 헤어지는데, 이것이 둘의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맙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요나단과 사울의 태도가 비교됩니다.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다윗을 주군으로 섬기겠다고 결심하고 충성을 다짐합니다. 하지만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다윗을 죽여 하나님의 의지를 막으려는 반역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윗이 자신을 반역했다고 죽이러 다니지만, 정작 자신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께 반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을 돕는 십 사람들(19-24a)

우리가 말과 삶이 일치하므로, 열매로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으로 인정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론하다고 그 사람을 신령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열매로 우리의 삶을 증명해 보이는 것입니다.

 

19그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이르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쪽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20그러하온즉 왕은 내려오시기를 원하시는 대로 내려오소서 그를 왕의 손에 넘길 것이 우리의 의무니이다 하니 21사울이 이르되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22어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그는 심히 지혜롭게 행동한다 하나니 너희는 가서 더 자세히 살펴서 그가 어디에 숨었으며 누가 거기서 그를 보았는지 알아보고 23그가 숨어 있는 모든 곳을 정탐하고 실상을 내게 보고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리니 그가 이 땅에 있으면 유다 몇 천 명 중에서라도 그를 찾아내리라 하더라 24그들이 일어나 사울보다 먼저 십으로 가니라(19-24a)

 

다윗이 도망한 십 지역 사람들은 도엑처럼 의와 불의를 따지지 않고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권력자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사람을 핍박하였습니다. 사울도 그들에게 ‘여호와의 축복’을 비는 종교적인 제스처로 화답하며 끝까지 자신을 합리화했습니다.

 

(1) 십 사람들의 고발(19-20)

 

사울은 십 광야에서 다윗을 찾지 못하자 다시 자신의 성읍인 기브아로 돌아갑니다. 그때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있는 사울에게로 와서 다윗이 자신들이 사는 지역인 여시몬 남쪽 하길라 산 숲속 요새에 숨어있다고 알려줍니다. 그러면서 왕이 내려오고 싶을 때면 언제든지 내려오시라고 말합니다. 또한 다윗을 왕의 손에 넘기는 것은 자신들의 의무 혹은 자신들의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사울에게 절대적인 충성심을 보인 것입니다.

이런 십 사람들의 말에 사울은 자신의 심정을 알아준 것에 고마워하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들을 축복합니다. 그런데 이 십 사람들은 유다 지파 사람들로 같은 지파 사람인 다윗을 지지하지 않고 사울을 지지하며 사울에게 축복을 받습니다. 이런 모습은 사울이 같은 베냐민 사람들에게 자신을 배신하고 자신에게 정보를 주지 않으며 자신을 위해 슬퍼하지도 않는다고 꾸짖던 모습과 대조가 됩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 무조건 같은 지파 사람이라고 편을 들어주는 것은 아니고, 오직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서만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십 사람들은 불안한 새로운 권력보다는 안정적인 현재의 권력을 따르기로 한 것입니다.

 

(2) 사울의 지시(21-23)

 

사울은 이들에게 다윗이 숨어있는 곳을 자세히 살피라고 당부하는데, 장소뿐만 아니라 누가 보았는지까지 아주 자세하게 조사해서 확실해지면 자신에게 보고하라고 합니다. 그동안 여러 번 소식을 듣고 움직였다가 허탕을 쳤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울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자신이 듣기로 다윗은 너무 영리하게 행동해서 그의 행방을 정확하게 알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못 잡도록 막고 계신 것을 다윗이 영리하게 머리를 써서 도망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 넓지 않은 지역에서 다윗이 사울을 피해 이리저리 숨어 다닐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돕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울은 이들의 협력에 매우 고무되었습니다. 만약 이들이 도와준다면 유다 지파 사람들 수천 명 속에서도 다윗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기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닌 사람의 도움에 의지하며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사울에게 죽을 뻔한 다윗(24-29)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잘 몰라서 불순종하는 것보다 알고도 온전히 순종하지 않는 것이 더 많습니다. 멸망이 눈 앞에 있고, 하나님의 경고가 세찬데도 듣고도 못들은척하면서 멸망의 길로 걸어가고 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알고도 순종하지 않는 권력자 사울보다는, 알고 있는 만큼 순종하고 있는 요나단 같은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24그들이 일어나 사울보다 먼저 십으로 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광야 남쪽 마온 광야 아라바에 있더니 25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찾으러 온 것을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아뢰매 이에 다윗이 바위로 내려가 마온 황무지에 있더니 사울이 듣고 마온 황무지로 다윗을 따라가서는 26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 27전령이 사울에게 와서 이르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28이에 사울이 다윗 뒤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29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머무니라(24-29)

 

사울과 십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든 상황을 다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용의주도하게 준비하고 빠질 틈 없이 촘촘히 포위망을 좁혀 다윗을 에워쌌지만, 블레셋의 출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1) 마온 황무지 피신(24-25)

 

사울의 요청을 받은 십 사람들은 다윗을 찾기 위해 사울보다 먼저 십 광야로 돌아갑니다(24a). 십 사람들이 다윗을 찾기 위해 출발한 즈음에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십 광야 남쪽에 있는 마온 광야로 이미 이동한 상태였습니다. 다윗은 항상 사울이나 그를 찾는 자들보다 한 발 앞서 움직이는데, 여기서 그 이유는 설명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일라에서 도망한 사건에서 유추해 보면, 다윗과 함께 있는 아비아달을 통해 하나님께 어디로 도망갈지를 물으면서 다녔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사울처럼 다윗에게도 소식을 전해주는 정보원들이 존재하고, 이들이 항상 사울의 움직임을 전해주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사울이 다윗을 추격함(26)

 

다윗은 사울과 그의 군사들이 자신을 찾으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절벽 혹은 바위산에서 내려와 마온 광야에 거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울은 다윗을 따라 마온 광야로 들어가서 바위산을 중심으로 한 쪽 방향으로 돌면서 다윗을 포위하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그 사실을 알고 다른 방향으로 피하려고 하였지만, 본문을 보면 사울의 인원수가 더 많기 때문에 다윗은 포위를 풀고 피하기가 어려운 상황에 몰린 것 같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다’는 표현은 다윗이 궁지에 몰렸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말한 것처럼 십 사람들의 도움으로 다윗을 찾아내어 거이 잡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게 한 발짝만 나가면 다윗을 잡을 수 있었고, 다윗은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윗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구원의 손길이 옵니다.

 

(3) 블레셋의 침략으로 돌아가는 사울(27-29)

 

사울이 다윗을 거의 잡게 된 상황에서 갑자기 전령이 나타나 블레셋 사람들이 노략질하기 위해 쳐들어왔다는 급박한 소식을 전해줍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울은 다윗을 추적하는 것을 멈추고 블레셋 사람들과 전투하기 위해 셀라하마느곳(나누어진 바위)으로 갑니다. 아마도 사울이 다윗을 포기하고 달려가야 할 만큼 블레셋의 침략이 매우 심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다윗이 블레셋과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사울이 달려간 것입니다. 일단 나라가 있어야 왕권 다툼도 할 수 있기 때문에, 블레셋부터 막기로 결정한 것 같습니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블레셋이 쳐들어와 다윗은 사울의 포위에서 풀려나 도망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도망하여 북쪽에 있는 엔게디 요새에 머물게 됩니다. 엔게디 요새는 샘이 풍부하고 동굴이 많은 지역으로 도망하기에 적당한 곳입니다. 블레셋이 이 시점에 쳐들어온 것은 우연이 아니라 다윗을 사울의 손에서 건져내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겨주지 않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에 위험한 순간에 그를 건져주시고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람은 원수의 손과 악인들의 덫에서 건져주시고 구원해주시며 안전하게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주십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날마다 체험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알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전에 말씀으로 먼저 찾아오십니다. 다윗은 요나단을 만나 위로의 말씀을 먼저 들었습니다. 그 후에 사울이 다윗을 추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새겨들어야만 고난 속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요나단을 통해서 들었던 위로의 말씀이 있었기에, 다윗은 사울이 이리저리 쫓아오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손길을 경험하고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힘들어하는 것은, 혹시 고난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고난 가운데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말씀을 붙들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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