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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2-03)


하늘 아버지 의지와 부모 공경

누가복음 2장 41-52절


 

사춘기는 반항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춘기 때는 부모님께 이유 없는 반항도, 동료들과 싸움을 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본인도 조용한 사춘기를 보내진 않았습니다. 무엇인가 반항하고 싶고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싶은 욕망이 밑바탕에서부터 꿈틀거렸습니다. 그러나 가출이라든지 큰 사고를 친 것은 아니지만, 부모님들의 마음을 종종 아프게 했던 것으로 생각납니다.

 

  • 예수님의 청소년 시절은 어떠했겠습니까? 소년시절이 없는 청장년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어린 시절 건강하게 자라셨습니다. 율법을 따라 해마다 유월절에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은혜가 무엇입니까?

 

성전에서 듣고 대답하는 예수님(41-47)

지혜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입니다. 이 세상을 질서 있게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또한 이 세상을 조화롭고 질서 있게 다스리는데 이 지혜가 필요합니다. 세상이 조화롭게 운행하는 그 원리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 모든 원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지혜로워지는 조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혜의 사람으로 성장해 가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1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3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41-47)

 

예수님께서 열두 살 되시던 해에 부모님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그곳에 남아 성전에서 율법 교사들과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부모님은 예수님을 찾다가 사흘 만에 성전에서 발견하였고, 예수님의 지혜와 대답에 모두가 놀랐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일에 열심히 참여하셨음을 보여줍니다.

 

(1) 예루살렘으로 상경한 예수님(41)

 

예수님의 가족은 여느 가족들처럼 해마다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41). 유월절은 오순절 초막절과 더불어 3대 절기 중 하나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나는 중요 절기였습니다. 39절과 본문에는 하나님의 규례를 철저하게 지켰던 예수님의 부모님의 경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예루살렘에 올라온 예수님(42-44)

 

소년 예수님께서는 열두 살 때도 역시 예루살렘으로 부모와 동행했습니다(42). 유대인들에게 나이 열 두 살은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13살이 되던 해에 성년식을 하였으므로, 12살은 소년에서 성년으로 넘어가는 전환기였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님들은 일주일 동안의 유월절 절기를 모든 행사를 마치고 나사렛으로 돌아갔습니다(43). 그런데 소년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예루살렘에 머물렀습니다. 당시에 강도들의 위험이 도사린 길도 있었기 때문에 여행단을 이루어 이동했고, 부모는 당연히 아들이 내려오는 무리에 섞여 있을 거라고 생각 했을 것입니다(44). 그러나 예수님의 부모님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룻길을 간 후에 아들이 동행하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됩니다(44).

 

(3) 예수님을 찾는 부모님(45-47)

 

일행 중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소년 예수님을 찾으려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갑니다(45). 아이가 없어진 줄 모르고 하루길을 갔다는 것은 유월절 순례자의 행렬이 얼마나 혼잡한 길인지 알 수 있습니다.

부모는 예루살렘을 떠난 지 3일 만에 아들을 성전에서 만납니다(46). 부모가 찾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 그들의 가르침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질문하며 토론하고 있었습니다(46). 예수님의 말을 듣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통찰력과 대답에 놀랐습니다(47). 앞에서 말한 지혜의 모습이 그대로 반영된 모습입니다.

 

성전에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학생보다 교사에 가깝다. 일반적으로 ‘학생들’이 ‘교사’의 발치에 앉아서 배웁니다. 마리아는 주의 발치에서 배웠고(눅 10:39), 바울은 가말리엘의 발치에서 공부했습니다(행 22:3, 개역개정은 ‘문하에서’로 번역함). 그러나 마치 예수님께 배우려고 선생들이 둘러앉은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 있습니다(46). 적어도 예수님은 유대 교사들과 같은 수준에서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이뿐 아니라 47절에서 ‘듣는 자들’이 예수님의 지혜와 대답에 놀랐다는 표현도 학생이 훌륭한 가르침을 듣고 보이는 반응과 비슷합니다. 이 장면은 앞으로 예수님의 주된 역할이 가르치는 것임을 예고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말씀뿐 아니라 행위와 사건을 통해서도 주어집니다. 그래서 ‘놀라다’는 예수님의 치유 행위를 본 사람들의 반응에도 사용됩니다(5:26; 8:56).

또한 예수님에게 있는 지혜와 통찰력은 그가 약속된 메시아임을 입증합니다. 47절의 ‘쉬네시스(σύγεσις)’는 ‘지혜’, ‘이해’, ‘판단’, ‘분별’, ‘통찰’ 등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지혜’(소피아σοφία)는 예수님의 성장을 요약한 40절과 52절에 반복됩니다. 이사야는 ‘통찰력’(σύγεις)과 ‘지혜’(σοφία)를 메시아에게 임하는 속성으로 예고했습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σοφία)와 총명(σύγεσις)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사 11:2). 메시아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영’(프뉴마 투 쎄우 πγευμα του θεου)은 지혜와 통찰력의 영입니다.

흥미롭게도, 예수님께서는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61:1-2을 인용해 ‘주의 영’(πνευμα κυριου)이 자신에게 임한 내용으로 시작한 메시아 취임 설교를 마치고 앉아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4:20-21). 사람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은혜의 말씀에 놀랄 것입니다(4:22).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는 사람들이 모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계시를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 집에 있는 예수님(48-50)

자신이 속한 곳과 사명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가족과의 소통을 통해 이해와 신뢰를 쌓고, 서로의 사명을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교훈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살아가는 데 중요한 가르침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상에서 이러한 덕목들을 실천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48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48-50)

 

예수님의 말을 들은 사람들뿐 아니라 그의 부모도 놀랍니다(48a). 누가는 47절의 ‘엑시스테미(ἐζίστημι)’가 아니라 ‘에크플레쏘(εκλησσω)’를 사용합니다. 두 단어가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지만, 예수님의 부모가 47절의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반응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통찰력에 놀랐지만, 부모는 아들이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성전에서 활동하는 현장을 보고 놀랍니다. 이는 실망하여 화를 내는 뉘앙스입니다. ‘왜 너는 우리를 이와 같이 취급했느냐?’는 말은 성경에서 속았을 때 나오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창 20:9; 26:10; 29:25; 출 14:11; 민 23:11; 삿 15:11), ‘이와 같이’(후토스 οὔτως)는 부모에게 말도 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아 성전에서 대화한 것을 가리킵니다. 이어서 마리아는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고통스럽게 찾았다’고 말합니다. ‘근심하여 찾았다’의 오뒤나오(όδυνάω)는 고통, 아픔, 분노를 느끼는 의미입니다. 마리아는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아들 때문에 크게 실망하고 화를 냅니다. 말하자면, 마리아는 어린 예수님의 불효를 질책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시므온의 예언을 떠올립니다(35). 예수님의 일생은 부모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길을 가므로 마리아는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머니가 ‘왜?’(τί)라고 묻자 예수님도 ‘왜?’(τί)라고 되묻습니다. ‘왜 저를 찾고 다녔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의 핵심 용어인 데이(δεί, ‘반드시 해야 한다’)를 사용해 아들이 마땅히 아버지의 집, 곧 성전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마리아가 요셉을 ‘네 아버지’(48)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부릅니다(‘내 아버지 집’, 49).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암시합니다. 마리아와 예수님의 대화는 독자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생각하도록 합니다. ‘누가 예수님의 아버지인가?’, ‘예수님께서는 누구의 집에 있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신 내용은 무엇을 의도하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예수님의 정체성입니다. 유대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아버지는 권위의 상징이었으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데 우선권을 둡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버리는 순간까지 ‘아버지의 뜻’ (22:41)에 순종하실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데이(δεί)를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소명을 강조할 때 사용하실 것입니다(예. 4:43; 9:22; 13:33; 17:25; 19:5; 21:9; 22:37; 24:7; 24:44).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최고의 교육 장소인 성전에서 가르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말씀과 행위로 표현됩니다. 아들의 열정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눅 19:46)는 아버지의 뜻과 목표를 행위로 가르치는 것으로(19:48-22:38), 백성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20:1). 무엇보다 ‘나의 아버지’(파트로스 무 πατρος μου)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친밀하고 신뢰적인 관계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로서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는 순종의 길을 가는 예수님의 정체는 곧이어 등장할 세례 장면에서도 확인됩니다(3:22; 시 2:7; 사 42:1). 흥미롭게도 예수님께서는 부활 이후 ‘내 아버지께서(πατρός μου) 약속하신 것’을 제자들에게 약속함으로써 하나님과 친밀함을 다시 한 번 나타내실 것입니다(24:49).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친밀성과 신뢰성에 근거해 공생애를 준비하고 마치실 것입니다(2:49; 24:49). 이와 같이,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한다는 말씀은 성자와 성부의 친밀한 관계, 성부의 자비와 성자의 순종을 함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모는 아들의 말을, 예수님의 통찰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들의 정체와 역할에 대한 계시를 직접 들은 마리아가 이해하지 못하는 점은 특이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낳을 아기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천사로부터 들었습니다(1:32). 천사는 태어날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1:35)라고 거듭 확인시켰습니다. 그러나 12년이 지난 시점에 마리아는 아들의 행동과 말을 자신이 받은 예언과 연결하지 못합니다. 계시를 직접 들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정체와 사명을 이해하기 위해 고민해야 했다면(51) 제자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소년 시절(51-52)

부모님을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은 우리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지혜와 인격의 성장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는 데 필수적입니다. 이러한 교훈들은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할 중요한 덕목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상에서 이러한 덕목들을 실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어린 시절을 알려줌으로 완전하신 인간으로 이 세상을 섬기려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줍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성장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51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51-52)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으로서 부모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성전에서 아들이 했던 말의 의미를 두고 계속 고민합니다(51). 52절은 요한과 예수님의 성장에 대한 내용을 요약한 1:80, 2:40과 비슷합니다.


성도는 시간이 흐르면서 성장해야 합니다. 성장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성도의 소원이 눈에 보이는 것만 기도하면 진정한 성장을 이룰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물보다 보이지 않는 공기가 더 중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과 권세를 구하기보다는, 솔로몬처럼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지혜는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지혜’가 풍성히 성장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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