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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3-02)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누가복음 3장 18-38절

 

 

사람들은 옷차림이나 겉모습으로 대부분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수수한 옷차림이나 평범한 옷차림을 입고 있으면 낮게 잘못 판단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화려한 옷차림과 뛰어난 외모를 보고 높게 판단했다가 스스로 속기도 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 시대에 함께 사셨다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겠습니까!

 

 

  • 본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세례를 받으시는 모습을 소개합니다. 세례는 죄씻음을 의미하는 의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세 가지를 통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더 강한 이를 소개한 요한(15-17)

우리를 변화시키는 복음은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나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궂은 소식’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분명한 고백이 있을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겸손함이 없이는 변화도 없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도 없습니다. 모세는 왕궁에 있는 세상의 능력으로 덧입었지만, 그는 광야에서 철저하게 낮아졌을 때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고 능력자가 되었습니다.

 

15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16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7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15-17)

 

이스라엘의 회복을 간절히 기다리면서 광야에 몰려 온 백성은 임박한 심판을 피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질 뿐 아니라(3:10-14) 요한이 ‘선지자’를 넘어서 ‘그리스도’가 아닌지 궁금해 했습니다(15). 이스라엘의 자유를 소망하며 해방의 통로인 광야로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요한을 해방을 이끄는 ‘그리스도’(기름 부음받은자)로 세우신 것은 아닌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보다는 다른 한 사람을 지위와 역할에 초점을 맞추어 소개합니다(16-17). 첫째, 그리스도로 오시는 이는 요한보다 강한 분이기에 요한은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되지 못합니다. 당시 주인이 식사하려고 앉을 때 신발 끈을 풀어주는 일은 하인이 몫이었습니다. 요한은 오시는 이와 자신의 지위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밝힌 것입니다. 둘째,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입니다. 요한의 물 세례는 죄 용서와 구원을 상징했습니다. 물은 더러운 것을 씻는 정화의 역할을 합니다. 씻음 받기를 거부하면 심판으로 귀결됩니다. 회개하는 자는 세례를 받고 회개를 거부하는 자는 세례를 거부합니다. 요한은 실제로 죄를 용서하는 능력을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물 세례는 죄 용서의 상징이었습니다. 오시는 이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과 불은 물과 같은 정화와 씻음의 기능을 의미합니다. 다만 물 세례는 구원의 상징이지만, 성령과 불 세례는 실제로 구원을 주는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오는 자를 구원하기 때문에 구원의 상징인 물 세례를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의 세례와 경고를 받고 회개하여 예수님에게 가는 사람들은 곳간에 모이는 알곡과 같게 됩니다. 반면에 요한의 경고를 거부하여 예수님의 불과 성령 세례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쭉정이로 간주하여 심판하실 것입니다.

 

누가는 요한의 겸손과 예수님의 능력을 강조합니다. 요한이 회개를 외치고 그리스도가 시작한 나라에 초대하지만, 그에게는 죄를 용서하고 구원할 능력이 없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태어나 자랐고 일생토록 광야에서 경건의 훈련을 받고 있어도 구원을 줄 수는 없습니다. 수많은 무리가 몰려와도 자신은 구원하는 사람이 아님을 분명히 밝힙니다. 요한은 구약의 예언대로 태어나고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이지만(7:26-28),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예수님에게로만 향하게 했습니다. 그분만이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거짓 선지자는 예수님의 능력을 빌미로 사람들을 자신에게 향하게 합니다.

 

투옥된 세례 요한(18-20)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몸을 입고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겉모습만 보면, 예수님을 우리와 같은 사람인 요셉의 아들로만 여길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은 구원을 가지고 온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복음은 어느 누구에게나 남녀노소, 빈부귀천, 방방곡곡 구분 없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요한처럼 누구에게든지 담대하게 전파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길 바랍니다.

 

18또 그밖에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19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20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18-20)

 

요한은 16-17절의 내용 외에도 많은 경고와 교훈을 받아들이도록 권고했으며,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복음’(기쁜 소식)은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나라가 왔다는 소식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전령으로서 모든 계층에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다스리는 나라가 왔으므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최고 권력자도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요한은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며 회개에 알맞은 변화를 요구했습니다. 뿌만 아니라 분봉왕(tetrach) 헤롯의 잘못도 책망합니다. 갈릴리 지역의 권력자인 헤롯은 형제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했을 뿐 아니라 악한 행위를 일삼았습니다. 헤롯의 악은 절대 권력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는 경고(9)에 예외를 두지 않았고, 헤롯의 범죄를 단호히 책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는 ‘악’(포네로스 πονηρός, 19)이 지배하는 나라를 물리치는 식으로 확장되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요한을 투옥시키는 악한 일을 또 다시 행했습니다. 요한은 기쁜 소식을 전했으나 이 일로 참수형으로 소명을 다할 것입니다. 요한은 끝까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합니다. 이처럼 요한의 생애는 세례와 투옥으로 요약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증거(21-22)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세례를 하나님의 용서로 인한 죄 씻음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낮아지셨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죄인같이 되셨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기도의 삶이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21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21-22)

 

누가는 다시 시신을 광야의 요단강으로 돌립니다.

광야에 나온 사람들은 모두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주실 자인데도 당신이 친히 회개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백성과 동일시하십니다. 죄인들의 자리까지 낮아지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례는 예수님의 낮아짐을 의미하며, 그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나서 기도하는 중에 세 가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첫째, 하늘이 열렸습니다. 유대 전통에서 하늘이 열리면 하늘의 비밀이 계시되고 천상의 존재가 강림합니다(예. 사 64:1). 여기서는 예수님의 정체가 하늘로부터 알려지고 성령께서 강림하십니다. 둘째,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님 위에 내려오셨습니다. 누가는 성령의 임하심을 ‘비둘기 같은 형체로’라고 함으로써 시각적으로 묘사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령을 실제로 경험했음을 의미합니다. 창세기에서 비둘기가 새로운 창조를 알린 것처럼(창 8:8-12; 참조. 창 1:2의 하나님의 영)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창조, 곧 회복의 나라를 실현하실 것입니다. 또한 성령이 예수님 위에 임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인 사실을 입증합니다(사 61:1).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성령의 능력이 예수님에게 임한 것입니다. 셋째,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늘의 소리는 구약의 언어에 근거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시 2:7)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종(사 42:1)으로 예수님의 정체를 알립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할 하나님의 아들이며, 종으로서 아들의 사명을 완수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공생애 사역을 위한 준비 단계에 해당합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위해 죄인처럼 낮아져 세례를 받으십니다. 베들레헴의 여물통에 태어나신 모습처럼 멸시와 수치의 자리까지 낮아져 죄인들을 섬기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종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 헌신하실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며 고난의 길을 완수하실 것입니다. 왕의 대관식 모습을 보여주는 세례에서 예수님은 수치와 고난의 길로 왕의 임무를 수행하실 것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낮아짐과 겸손을 통해 시작되고 확장됩니다.

 

예수님의 계보(23-38)

세상이 자신보다 더 칭송할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부인하려하지 않고 가만히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보다 더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려고 곁모습을 꾸미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축복의 자리를 부정한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실수한 것이며 더 낫다고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정확하신 분입니다. 스스로 교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이 세상에 겸손히 내려오셨습니다. 그 과정을 예수님의 족보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23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24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얀나요 그 위는 요셉이요 25그 위는 맛다디아요 그 위는 아모스요 그 위는 나훔이요 그 위는 에슬리요 그 위는 낙개요 26그 위는 마앗이요 그 위는 맛다디아요 그 위는 서머인이요 그 위는 요섹이요 그 위는 요다요 27그 위는 요아난이요 그 위는 레사요 그 위는 스룹바벨이요 그 위는 스알디엘이요 그 위는 네리요 28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앗디요 그 위는 고삼이요 그 위는 엘마담이요 그 위는 에르요 29그 위는 예수요 그 위는 엘리에서요 그 위는 요림이요 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30그 위는 시므온이요 그 위는 유다요 그 위는 요셉이요 그 위는 요남이요 그 위는 엘리아김이요 31그 위는 멜레아요 그 위는 멘나요 그 위는 맛다다요 그 위는 나단이요 그 위는 다윗이요 32그 위는 이새요 그 위는 오벳이요 그 위는 보아스요 그 위는 살몬이요 그 위는 나손이요 33그 위는 아미나답이요 그 위는 아니요 그 위는 헤스론이요 그 위는 베레스요 그 위는 유다요 34그 위는 야곱이요 그 위는 이삭이요 그 위는 아브라함이요 그 위는 데라요 그 위는 나홀이요 35그 위는 스룩이요 그 위는 르우요 그 위는 벨렉이요 그 위는 헤버요 그 위는 살라요 36그 위는 가이난이요 그 위는 아박삿이요 그 위는 셈이요 그 위는 노아요 그 위는 레멕이요 37그 위는 므두셀라요 그 위는 에녹이요 그 위는 야렛이요 그 위는 마할랄렐이요 그 위는 가이난이요 38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23-38)

 

누가는 예수님의 정체를 하나님의 아들로 밝히고 나서 예수님의 계보를 소개합니다. 첫째, 독특하게도 계보는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 아담에까지 올라갑니다. 마지막은 하나님입니다. 계보에는 77명의 이름이 나오고 인간의 맨 위가 아담이며 78번째는 하나님입니다.

누가는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족보를 통해 증거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 나옵니다. 이 족보들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과 달리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께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연결을 끝맺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담의 아들로서 온 인류와 결속된 아들이며(롬 5:14; 고전 15:22, 45-49), 참 인간입니다. 아담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시험을 이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23절의 ‘여겨진 것처럼’(호스 에노미제토 ὡς ἐνομίζετο)은 사람들의 이해를 가리키는 표현인데, 사람들은 그를 요셉의 아들, 즉 평범한 인간으로 이해했으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초월적 존재인 하나님의 아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태어났습니다. 둘째, 누가는 예수님과 다윗 사이에 있었던 통치자들(예. 솔로몬)의 명단을 의도적으로 뺏습니다(스불바벨과 스알디알만 예외). 누가는 두 번째 책 사도행전에서도 바울의 비시디아 안디옥 설교(행 13:16-37)에서 천 년을 뛰어넘어 다윗과 예수님을 연결합니다. 이와 같이 누가는 예수님의 계보를 통해 그가 초월적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아들인 사실과 약속된 다윗의 아들로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임을 강조합니다.


온 인류를 구원할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도와줄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요한은 단지 메시아 예수님을 예배하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을 위한 메시아이지만, 그가 메시아인 소식은 모두에게 복음이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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