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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64-01)


풍성한 은총을 주시는 하나님

이사야 63장 15절- 64장 12절


 

이스라엘에게 임한 어두움은 하나님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죄가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택하신 백성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은혜로 그들을 기억하사 구언해 주셨습니다.

 

  • 7-14절에서 이스라엘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의 구속사를 돌아본 공동체는 하나님을 자신들의 아버지와 구속자로 고백하며 도움을 간구합니다. ‘우리의 아버지’와 ‘우리의 구속자’는 가족의 안녕을 지켜주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언약관계뿐만 아니라 사적-혈연적 관계로 맺어진 사이이기에 자격 없음에도 구해 달라고 매달릴 수 있습니다.

 

간곡한 자비와 사랑이 내게 그쳤나이다(15-19)

신앙은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어미 새가 배고픈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 주듯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구하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십니다. 믿고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신앙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15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께서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사랑이 내게 그쳤나이다 16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17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하건대 주의 종들 곧 주의 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 18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 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우리의 원수가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 19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되었나이다(15-19)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죄를 여호와께 돌립니다.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냐고 묻습니다. 바로처럼 완고한 마음을 주셔서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주님 때문에 성소에 우상이 가득하고, 주님 때문에 제사장들이 타락했고, 주님 때문에 백성이 하나님을 멀리합니다.

 

(1) 탄식과 신뢰의 고백(15-16)

 

여호와께서 사랑과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큰 은총을 돌아본 예언자는 이제 시선을 하늘로 돌립니다. 공동체를 대표해서 하늘의 하나님께서 굽어살피시고 개입해주시길 간청합니다(15; 시 80:14).

과거의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과 “간곡한 자비와 사랑”이 다시 나타나길 호소합니다. 하늘은 여호와의 처소로 이중적 의미를 갖습니다. 한편으로는 거리감 곧 그분의 물러나심을, 다른 한편으로는 그분의 전능하심과 전지하심을 함축합니다. 전자의 입장에 따라 예언자는 64:1-3에서 여호와의 강림을 간구하고, 후자의 입장에 따라 이스라엘의 절망적 현실(17-19)을 호소합니다.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는 64:11의 불에 타버린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과 대비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여호와의 왕권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하늘에서 모든 것을 굽어보시는 분은 “우리의 아버지”시고, 그분의 이름은 옛날부터 “우리의 구속자”이십니다(16).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는 구약성경에 드물게 사용되며(신 32:6),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내밀한 관계를 담은 표현입니다. 신학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양자로 삼으셨기에(참조. 출 4:22; 1:2;64:8; 렘 3:19; 호 11:1) 이스라엘은 그분을 ‘우리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의 의미는 불분명합니다.

아마도 공동체의 절망적 현실을 강조하기 위해, 곧 여호와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간절히 호소하기 위해 족장들을 언급한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족장 야곱을 가리킵니다. ‘아버지’처럼 ‘구속자’도 친족 관계에 뿌리를 둔 개념으로 하나님(아버지)께 범죄한 이스라엘(자녀들)이 그분께 매달릴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줍니다.

 

(2) 관계 회복의 호소(17)

 

이어서 예언자의 시선이 하늘의 하나님에게서 공동체로 이동합니다(17).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는 말이 아닙니다. 히브리적 사고에 따르면 땅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결정에 속합니다. 죄와 악도 그분의 능력과 통제 안에 있으며 그분의 의지에 따라 허락되거나 저지됩니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에 내재하는 긴장 관계를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6:9-10). 하나님께서 죄를 허락하셨기에 용서의 은총 또한 그분께 구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는 죄의 허락에 당혹감을 느끼면서도 그분께 대한 신뢰심을 잃지 않고 “주의 종들”을 생각하시어 돌아와 달라고 호소합니다. 하나님께서 돌아오실 때만 공동체의 죄와 죄 짐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주의 기업인 지파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에 속함을 보여줍니다.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을 움직이기 위해 예언자는 공동체가 처한 참담한 상황을 그분께 알립니다.

 

(3) 원수들에 짓밟힌 성소(18-19)

 

여호와의 성소는 주전 587년 바벨론 점령군에 의해 유린당한 이후 폐허로 남겨지고(18), 그분의 백성은 민족들의 지배를 받습니다(19). 예언자는 여호와의 종들이 민족들의 종들이 됐는데도 관심을 보이지 않으신다고 탄식합니다.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64:1-5a)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한 것은 죄를 짓는 일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공로는 한낱 누더기처럼 더러울 뿐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구속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누립니다.

 

1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2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3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 4그들이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밤을 지내며 돼지 고기를 먹으며 가증한 것들의 국을 그릇에 담으면서 5사람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자리에 서 있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 (1-5a)

 

이사야는 계속하여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이스라엘을 내버려 두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회개하도록 이끌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밖에 해결할 이가 없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민족들을 떨게 할 주의 강림(64:1-2)

 

하나님만이 공동체의 운명을 극적으로 전환할 수 있기에 “우리”는 격정적으로 그분의 개입을 호소합니다. 가려놓은 칸막이를 부수고 감추어졌던 모습을 드러내듯, 하나님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와주시길 간구합니다(la). ‘산들의 진동’과 ‘불’은 하나님께서 강림하실 때 나타나는 자연의 격변 현상입니다(1b-2a). 예언자는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고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하시길 간구합니다(2b).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민족들 가운데 더러워졌기에 이스라엘의 구원은 그분의 능력을 과시하고 인정받는 사건이 됩니다. 하나님의 현현은 그분의 성소를 유린한 민족들에게는 파멸적 재앙이기에 무서워 떨게 됩니다.

 

(2) 놀라운 일을 행하신 분(3-4)

 

‘우리’는 다시 과거를 회상합니다. 이스라엘은 예상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강림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3).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에는 공동체의 기대감과 신뢰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전에는 예기치 못한 때에 개입하셔서 구원해주셨는데, 지금도 생각하지 못한 때에 당신 백성의 역사에 개입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강림이기에 “두려운 일” 보다는 ‘놀라운 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우리’는 과거 경험으로부터 신학적-고백적 결론을 이끌어냅니다(4-5a). 여호와처럼 당신 백성을 위해 산들을 뒤흔들며 역사에 개입했던 신은 없습니다. 여호와만이 당신을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당신의 구원을 고대하는 자들에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3) 선대하시는 분(5a)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에 근거해서 바르게 행동하는 자를,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길로 성실하게 걸어가며 그분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자를 가리킵니다.

 

'아직도 가만히 계시려 하나이까'(64:5b-12)

인간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위기에 빠져 있어도 주의 이름을 부르지도, 주를 붙잡지도 못합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감히 하나님께 요청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정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로 인해 돌이키셨고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셨습니다.

 

5…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라 하나니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종일 타는 불이로다 6보라 이것이 내 앞에 기록되었으니 내가 잠잠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보응하되 그들의 품에 보응하리라 7너희의 죄악과 너희 조상들의 죄악은 한 가지니 그들이 산 위에서 분향하며 작은 산 위에서 나를 능욕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먼저 그들의 행위를 헤아리고 그들의 품에 보응하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8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포도송이에는 즙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것을 상하지 말라 거기 복이 있느니라 하나니 나도 내 종들을 위하여 그와 같이 행하여 다 멸하지 아니하고 9내가 야곱에게서 씨를 내며 유다에게서 나의 산들을 기업으로 얻을 자를 내리니 내가 택한 자가 이를 기업으로 얻을 것이요 나의 종들이 거기에 살 것이라 10사론은 양 떼의 우리가 되겠고 아골 골짜기는 소 떼가 눕는 곳이 되어 나를 찾은 내 백성의 소유가 되려니와 11오직 나 여호와를 버리며 나의 성산을 잊고 갓에게 상을 베풀며 므니에게 섞은 술을 가득히 붓는 너희여 12내가 너희를 칼에 붙일 것인즉 다 구푸리고 죽임을 당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하며 내가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나의 눈에 악을 행하였으며 내가 즐겨하지 아니하는 일을 택하였음이니라(5b-12)

 

하나님의 강림을 간구하고 그분께 대한 신뢰를 고백한 후에 공동체는 죄를 고백합니다. 현재의 비참한 형편이 자신들의 범죄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결과임을 인정합니다.

 

(1) 죄의 고백과 탄식(5b-7)

 

5b절은 죄에 사로잡힌 공동체가 자신들의 무능력을 탄식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6-7절은 공동체의 절망적인 영적 상태를 기술합니다. “더러운 옷”은 월경 중에 있는 여자의 더러운 웃이며 완전한 멸망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는 죄에 사로잡힌 자들의 필연적 결말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진노로 침묵하시기에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경배하는 자도 없고, 그분을 붙잡으려고 애쓰는 자도 없습니다. 죄에 대한 징계로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시고 외면하셨기에 더욱 죄악의 늪에 빠집니다. 구원의 지체 또는 부재가 자신들의 죄 때문임을 깨달은 공동체는 이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께 나아갑니다.

 

(2) 용서와 간구(8-9)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기에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8). 그분은 당신 손으로 지은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는 이스라엘의 출생과 존재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적임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손의 작품이기에 자신을 만드신 분께 관심을 가져주길 간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이기에 죄에 대한 의로운 분노를 풀고 용서해달라고 애원할 수 있습니다(9).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는 심판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 가엾이 여겨 용서해주시길 간청하는 말입니다. 공동체는 자신들의 절망적 형편을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3) 황폐해진 성읍과 성전(10-11)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유다의 모든 성읍이 황폐하여 광야가 됐습니다(10). “광야가 되었으며”의 반복적 사용은 폐허의 철저성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살던 성읍들이 폐허가 돼 짐승들의 차지가 됐습니다. 조상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를 드리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은 불에 타서 잔해만 흉물스럽게 남았습니다(11). “우리가 즐거워하던 곳”은 집과 밭과 포도원을 가리킨다. 공동체의 생존 공간인 예루살렘과 유다의 성읍들, 종교적 구심점인 여호와의 성전, 개인의 생존 기반에 속하는 집과 경작지가 모두 파괴돼 황무지가 됐습니다.

 

(4) 개입의 호소(12)

 

63:7에서 시작된 긴 탄식이 간절한 마음으로 개입을 촉구하는 질문으로 끝을 맺습니다(12). 성전을 비롯하여 모든 것이 폐허가 됐는데도 끝내 가만히 계시렵니까? 저희를 이토록 심히 괴롭게 하시렵니까?


이사야는 소망 없는 땅에서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찢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무너지고 파괴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오시지 않으면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민족의 미래를 고독하게 바라보는 선지자 이사야의 눈물을 읽는 자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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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63-01)


구원하시기 위해 전사로 오신 하나님

이사야 63장 1-14절


 

시온을 향한 새로운 사회 비전을 제시하는 63-66장은 심판으로 시작해서 심판으로 끝났습니다. 아는 새로운 비전은 악에 대한 정의로운 심판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심판을 통해 새로운 창조와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자이며 동시에 구원자가 되십니다.

 

  • 예루살렘의 구원 약속(62장) 다음에 에돔의 심판선언(63:1-6)이 나옵니다. 4절이 잘 보여주듯이 에돔의 멸망과 예루살렘의 회복이 하나의 사건으로 연결됩니다. 35장에서처럼 에돔은 사해 동남쪽에 위치한 특징 나라이자 이스라엘에 적대적인 민족들의 대표를 등장합니다. 에돔은 여호와의 심판을 피할 수 없지만, 민족들의 경우는 에돔의 멸망을 반면교사로 삼는다면 여호와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에돔의 심판(1-6)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특히 고난 중에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때에 따라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바란다면 그 하나님의 때를 묵묵히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1에돔에서 오는 이는 누구며 붉은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이 누구냐 그의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이가 누구냐 그는 나이니 공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니라 2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틀을 밟는 자 같으냐 3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4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으나 5내가 본즉 도와 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하게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6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취하게 하고 그들의 선혈이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1-6)

 

하나님의 길을 누가 막으며 대적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대적들에게 복수하실 때 온 땅은 피로 물들 것입니다. 원수들은 술에 취한 듯 휘청거리며 혼돈에 빠질 것입니다. 택하신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은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1) 예언자의 질문(1a)

 

예언자가 망루에서 밖을 감시하는 파수꾼이 되어 붉은 옷을 입고 에돔에서 오는 이에게 질문하고, 여호와께서는 피로 얼룩진 옷을 입고 전장에서 돌아오는 용사가 되셔서 답변하십니다.

 

(2) 여호와의 답변(1b)

 

본문은 심판의 철저한 집행에 초점을 맞추고 에돔이 심판을 받는 이유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서쪽을 바라보고 있던 파수꾼 예언자는 붉게 물든 옷을 입고 에돔에서 오는 한 사람을 보고 그의 신분에 관해 묻습니다(1). 전쟁에서 돌아오는 장수처럼 그의 화려한 의복은 피로 물들어 있습니다. 오고 있는 방향은 에돔을 심판하고 돌아오는 길임을 시사합니다.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은 이 질문에 이중적으로 답변합니다. ‘나이니’는 누구와도 비교를 거절하는 절대 권력자의 자기과시입니다(출 3:14). “공의를 말하는 이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는 여호와께서 자신을 우상들과 구별하는 자기선언입니다(참조. 45:19, 23-24). ‘진리’로 옮길 수도 있는 “공의”는 ‘미래의 예견’을 가리킵니다. 그분은 우상들과 달리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미래를 예견하시고 이를 이루시는 큰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원하는 능력”은 에돔을 심판하는 목적이 이스라엘의 구원에 있음을 시사해줍니다. 에돔은 이스라엘과 형제지간이지만(창 25:30),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 당한 후에는 철천지원수가 됐습니다. 에돔의 수도 보스라는 사해 남단에서 북동쪽에, 페트라에서 북쪽으로 45km 떨어진, 해발 1,022m의 고지대에 위치했습니다.

 

(3) 예언자의 질문(2)

 

파수꾼-예언자의 두 번째 질문은 화려한 의복의 얼룩진 색에 대한 것입니다(2). 어찌하여 의복이 붉으며, 옷이 포도즙 틀을 밟은 사람 같은가하고 묻습니다.

 

(4) 여호와의 답변(3-6)

 

바위에 판 큰 틀 안에다 포도를 넣고 발로 밟아서 그 즙을 짤 때 포도즙이 튀어 옷이 젖듯이 피에 붉게 물들었습니다. 여호와의 답변도 포도즙틀을 비유로 사용합니다(3). 포도즙틀에서 짓밟히는 포도는 민족들을, 포도즙은 피를 상징합니다. 공의로우신 그분의 ‘노함과 분함’은 불의와 폭력에 대한 그분의 징벌적 응답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홀로 포도즙틀을 밟으셨습니다. 원수의 피로 당신 옷이 붉게 물들기까지 짓밟으셨습니다. 심판의 대상이 에돔을 넘어 모든 민족에게로 확대됩니다. 에돔의 심판이 민족들 심판의 서곡이 됩니다. 민족들이 에돔처럼 이스라엘에 악을 행하고 그 땅을 탐낸다면(참조. 겔 35:10) 그분의 노함과 분함을 피할 수 없습니다. 에돔(민족들)을 심판하는 날은 여호와께서 “원수 갚는 날”이요, 그분께서 “구속할 해”이기도 합니다(4). 그분의 정의에 따라 불의한 민족은 심판에 떨어지고, 백성은 구원과 해방의 기쁨을 경험합니다. 에돔(민족들)을 심판하고 당신 백성을 구해내는 것이 그분의 계획임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내용상 3a절을 받는 5절은 59:16의 변형에 속합니다. 여호와의 심판 의지를 깨닫고 그분을 거들어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홀로 당신의 능력의 팔과 분노로 에돔(민족들)을 심판하셨습니다. “내 팔”은 애굽의 바로를 굴복시키고 당신 백성을 해방시키셨던 능력의 팔입니다. 6절은 3절을 거의 그대로 받습니다. 여호와께서 ‘노함과 분함’으로 민족들을 짓밟아 으깨셔서 포도즙이 흘러내리듯이 대적의 선혈이 땅에 쏟아졌습니다.

 

구속사의 회고(7-14)

아버지가 자녀를 들고 안아서 보호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아버지로서 이스라엘을 들어 안으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탈출시켰으며 광야에서 돌보셨습니다.

 

7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8그가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9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10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11백성이 옛적 모세의 때를 기억하여 이르되 백성과 양떼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그들 가운데에 성령을 두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12그의 영광의 팔이 모세의 오른손을 이끄시며 그의 이름을 영원하게 하려 하사 그들 앞에서 물을 갈라지게 하시고 13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광야에 있는 말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14여호와의 영이 그들을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와 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 하였느니라(7-14)

 

64:12까지 이어지는 공동체의 탄식시의 일부에 해당한다. 7-14절에서 우리 공동체는 과거 조상들에게 베푸신 여호와의 구속행위를 회상하고, 63:15-64:12에서 자신들의 비참한 형편과 죄를 고백하고 죄의 용서와 여호와의 개입을 간구합니다. 구속사의 회상은 물론 역사 공부를 위함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듭된 경고를 무시하고 완강히 귀를 막고 자기 길을 가다가 멸망에 떨어졌다면, 그분의 도움을 간구할 수 있는 길도 없어진 것입니까?

 

(1) 큰 은총을 말하리라(7)

 

구속사는 자격 없는 이스라엘이 여전히 그분의 자비와 사랑에 매달려 호소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언자는 공동체에게 역사를 되돌아보도록 초대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사랑과 큰 자비에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회상해보도록 권면합니다(7). ‘자비’(헤세드)는 언약에 늘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을, ‘찬송’은 찬양받으실 그분의 업적을, ‘은총’은 행위 가운데 구체화되는 이스라엘을 향한 그분의 호의적 성품을 의미합니다. ‘사랑’(레헴)은 자궁에서 나온 단어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모성적 자기희생과 일방적 헌신에 근거함을 시사합니다.

 

(2) 이스라엘의 선택(8)

 

하나님께서 사랑과 자비로 베푸신 은총의 첫 번째 예로 이스라엘의 선택이 언급됩니다(8).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요’가 생략된 언약 양식(레 26:12;신 29:13)의 부분 인용이고,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신뢰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선택한 이스라엘의 성실함을 의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실하신 그분께서는 언약의 상대인 이스라엘의 신실함을 믿으셨습니다. ‘자녀’(아들들)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양자결연)에 의해 법적으로 그분의 자녀가 됐음을 시사해 줍니다. ‘구원자’는 절망적인 처지에 놓인 자들에게 도움을 베풀어주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3)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9)

 

하나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모든 고난에 함께하셨습니다(9). 백성의 환난은 그분의 환난입니다. 그분은 자녀들을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사랑과 자비로 구원하셨습니다. “자기 앞의 사자”는 ’그분 얼굴의 사자’로 눈에 보이는 여호와의 현현을 가리킵니다.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는 아버지의 애정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보조해주셨음을 보여줍니다(참조, 46:3-4; 호 11:3a). 하나님의 값없는 선택과 헌신은 그분만의 일방적 사랑이었습니다. 그분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처음부터 어긋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에 이스라엘은 반역으로 응답했습니다.

 

(4) 이스라엘의 반역(10)

 

이스라엘은 그분의 거룩한 영을 배반하고 괴롭혔고, 이에 이스라엘의 구원자 하나님께서 대적이 되셔서 몸소 그들을 치셨습니다(10).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근거한 이스라엘의 선택과 돌봄이 이들의 맹목적 배반으로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았습니다. ‘성령’(10,11)은 역사에 개입해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5) 출애굽의 여호와(11-13)

 

여기서는 구속사의 출발이자 전형에 속하는 출애굽 사건, 특히 홍해의 이적이 미래 구원의 모델로 제시됩니다. 심판을 당하고 난 다음에야 이스라엘은 “옛적 모세의 때”를 기억하고 양 떼의 목자들과 함께 그들을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이’를 찾기 시작합니다(11). 환난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전에 행하셨던 구원 사건을 기억하는 것은 그분의 도움을 간구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기억하다’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순종하다’를 의미합니다. “양 떼의 목자들”은 모세와 아론 그리고 미리암을,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이”는 홍해를 가르고 마른 땅으로 만들어 이스라엘로 하여금 바다를 건널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을, “그들 가운데에 성령을 두신 이”는 이스라엘의 진영을 이끌고 회막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12절의 “그의 영광의 팔이 모세의 오른손을 이끄시며”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도와 당신 영광을 과시하셨음을 보여줍니다.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을 구출하신 사건은 여호와의 이름(명성)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공개적 사건이었습니다. 평평한 광야를 다니는 말처럼 이스라엘은 아무 어려움 없이 바다를 걸어서 건널 수 있었습니다(13).

 

(6) 가나안의 여호와(14)

 

홍해의 놀라운 도움은 가나안에서도 계속됐습니다. 여름에도 풀이 무성하게 자라는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떼처럼 여호와의 영이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편히 쉬고 풍족하게 먹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14).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이 심판으로 시작합니다. 죄와 악에 대한 분명하고 정의로운 심판은 새로운 사회가 공평과 정의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가르치고 징계하듯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 이스라엘을 가르치시고 징계하셨습니다. 끝까지 책임져 구원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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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62-01)


침묵하셨던 하나님께서 구원하심

이사야 62장 1-12절


 

시온을 향한 새로운 사회 비전을 제시하는 63-66장은 심판으로 시작해서 심판으로 끝났습니다. 아는 새로운 비전은 악에 대한 정의로운 심판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심판을 통해 새로운 창조와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자이며 동시에 구원자가 되십니다.

 

  • 예루살렘의 구원 약속(62장) 다음에 에돔의 심판선언(63:1-6)이 나옵니다. 4절이 잘 보여주듯이 에돔의 멸망과 예루살렘의 회복이 하나의 사건으로 연결됩니다. 35장에서처럼 에돔은 사해 동남쪽에 위치한 특징 나라이자 이스라엘에 적대적인 민족들의 대표를 등장합니다. 에돔은 여호와의 심판을 피할 수 없지만, 민족들의 경우는 에돔의 멸망을 반면교사로 삼는다면 여호와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구원 약속: 여호와 손의 아름다운 관(1-5)

영적 침체는 개인과 가정, 교회와 신앙공동체 모두에게 찾아올수 있습니다. 그것은 죄의 직접적인 결과일 수도 있고, 오랜 세월 누적된 영적 권태감의 발로일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영적 침체에서 회복되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어떻게 영적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영적 침체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1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2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 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3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4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5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1-5)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을 위해 기도합니다(1). 그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가 드리는 이 중보기도에 함께 동참할 파수꾼을 찾습니다(6). 우리에게 찾아온 영적 침체를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비결은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1) ‘잠잠하지 아니하며’(1)

 

예언자가 자신의 기도 의지를 단호하게 표명한다. 여호와께서 침묵을 깨고 개입하실 때까지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하고” 그분께 간구할 것입니다(1). 예언자는 자신이 선포한 시온의 구원이 더딘 것에 반응하여 구원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하나님과 기도의 싸움에 나서기로 결심한 것 같습니다. 새벽어둠을 깨고 갑작스럽게 빛이 밝아오는 것처럼 시온의 의가, 어둠을 밝히며 환하게 타는 횃불처럼 예루살렘의 구원이 갑작스럽게 드러날 것입니다. “시온의 의”는 병행하는 “예루살렘의 구원”이 보여주듯이 시온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광채’를 의미하는(겔 1:4,27,28; 10:4) ‘노가흐’(“빛”)는 종종 어둠의 대립 개념으로 사용되고(9:2;50:10; 60:2-3), “횃불”(라피드)은 신현 묘사에 자주 등장합니다(창 15:17; 출 20:18; 겔 1:13; 단 10:6). 시온의 미래가 영화롭게 묘사됩니다.

 

(2) 시온의 영광(2-3)

 

이방 민족들과 왕들이 시온의 공의와 영광을 보고, 시온은 여호와께서 지어주신 새 이름으로 불립니다(2). ‘시온의 공의’는 여호와에 의한 승리 또는 의로움의 입증을 의미합니다. ‘의, 공의’(체데크/처다카)는 이사야서 후반부의 중심 개념에 속합니다(41:2,10; 45:8,13; 51:5,6,8; 58:8; 59:17). 민족들과 그의 통치자들이 여호와의 영광을 본다는 주제도 드물지 않게 등장합니다(58:8; 59:19; 60:3). 땅의 모든 왕이 하늘 왕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새 이름”은 새 신분을 상징합니다(참조, 1:26). 미래의 시온은 현재의 시온과 구별될 것입니다. 심판으로 황폐해진 시온이 구원과 축복이 약속된 새로운 시온으로 대체됩니다. “오래 황폐하였던”(61:4) 시온이 여호와의 손에 들린 “아름다운 관”, “그분 손바닥에 놓인 왕관”이 됩니다(3). 면류관과 왕관은 통치권을 상징합니다. 시온이 여호와의 왕도가 됩니다(60:14).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왕이 되셔서(24:23) 통치하십니다(40:9-11). 성읍을 그 성읍을 수호하는 신의 (면류)관과 왕관으로 묘사하는 예는 바벨론에서도 발견됩니다.

 

(3) 시온의 새 이름(4)

 

시온에게 새 이름, 새 신분이 주어집니다. ‘버림받은 여자’(아주바)라 일컬어지던(60:15) 시온이 앞으로는 ‘내가 기뻐하는 여자’로, ‘황무지’라 일컬어지던(61:4) 시온의 땅이 ‘결혼한 여자’라 불릴 것입니다(4). 여호와께 버림을 받았던 시온이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그분의 아내로 받아들여집니다. “뿔라”의 ‘버울라’는 ‘소유하다’, ‘결혼하다’를 의미하는 동사 ‘바알’의 수동 현재분사 여성형으로 ‘남자의 소유가 된 여자’, ‘결혼한 여자’를 의미합니다. ‘버림받은 여자’의 아주바도 ‘버리다’를 의미하는 동사 ‘아잡’의 수동 현재분사 여성형입니다. “헵시바”의 ‘헤프지 바흐’는 ‘나의 기쁨이 그녀에게 [있다]’로 ‘내가 기뻐하는 여자’를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이 아니라 그 땅을 당신 아내로 맞아들이십니다. 황폐해진 땅이 비옥한 땅이 돼서 다시 결실을 얻게 될 것을 시사하는 표현입니다.

 

(4) 시온을 기뻐하시는 하나님(5)

 

청년이 처녀와 결혼하듯이 시온의 아들들이 시온과 연합하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하듯 시온의 하나님께서 시온을 기뻐하십니다(5). 신부 시온을 맞는 신랑 여호와의 기쁨에 초점을 맞춥니다. 시온이 여호와께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보여줍니다. 남편에게 기쁨을 주는 아내이기에 여호와께서 반드시 시온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파수꾼들의 쉼 없는 간구: ‘너희는 그분을 쉬시게 하지 마라’(6-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간절히 이스라엘의 회복을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적국의 포로로 끌려가 어떤 희망도 품을 수 없는 절망의 자리에 있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회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접 만드신 관으로 그들의 머리를 장식해주겠다고 말씀하시며 그들이 회복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6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7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6-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셨습니다. 파수꾼은 성을 지키며 보호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과 종들을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깨우치고 그들을 진로의 길로 인도하길 원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거룩한 신부로 만들기 위해 수고하였습니다.

 

(1)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6)

 

화자 ‘나’의 신분이 불분명하지만, 역할의 유사성에 근거해서 1절의 경우처럼 예언자로 간주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과 기도의 싸움에 나선(1) 예언자는 더 많은 사람을 참여시킵니다. 그는 여호와의 개입을 촉구하기 위해 가용자원을 모두 동원해 그분께 매달립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벽에 파수꾼을 세워 낮이고 밤이고 한순간도 잠잠하거나 쉬지 않고 여호와께 간구하게 합니다. 파수꾼으로 세워진 자들은 예언자의 동역자들이거나 구원 약속의 성취를 고대하는 자들인 것 같습니다.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은 이들의 역할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이들은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의 구원을 위해 조속히 개입하시도록 쉬지 않고 그분의 기억을 일깨우는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창 20:7)과 모세처럼(출 5:22-23; 8:12-13; 32:11-14) 중보기도의 역할이 이들에게 맡겨집니다.

 

(2) ‘그로 쥐지 못하시게 하라’(7)

 

예언자는 함께하는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세움을 받은 파수꾼은 여호와께서 쉬지 못하시도록 한순간도 잠잠하지 않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분께서 약속에 따라 예루살렘을 다시 굳건하게 세우셔서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실 때까지 귀찮아하실 정도로 그분께 매달려야 합니다. 예언자는 기도를 통한 여호와의 개입으로 가까이 온 구원(56:1)이 온전히 성취될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여호와의 응답(8-9)

우리가 기도했다고 영적 침체를 벗어나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을 한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파수꾼들과 이스라엘을 위해 함께 기도할 뿐 아니라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며 그가 해야 할 일들에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기도했다면 우리가 드린 기도에 합당한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8여호와께서 그 오른손, 그 능력의 팔로 맹세하시되 내가 다시는 네 곡식을 네 원수들에게 양식으로 주지 아니하겠고 네가 수고하여 얻은 포도주를 이방인이 마시지 못하게 할 것인즉 9오직 추수한 자가 그것을 먹고 나 여호와를 찬송할 것이요 거둔 자가 그것을 나의 성소 뜰에서 마시리라 하셨느니라(8-9)

 

우리를 영적 침체에서 회복시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놓치지 마십시오. 우리가 기도하고 우리 몫의 수고를 다할 때, 하나님은 속히 우리에게 회복의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1) 원수에게 빼앗기지 않는 양식(8)

 

예언자의 간절함과 절박함이 마침내 여호와를 움직이는 데 성공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자신을 두고 예루살렘의 구원을 장엄하게 맹세하여 구원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보여줍니다. ‘오른손을 들다’는 맹세할 때의 전형적 몸짓에 속하고(신 32:40; 단 12:7), “능력의 팔”(시 89:10)은 출애굽 전승에 나오는 강한 손과 편 팔을 회상시킵니다. 예루살렘 공동체는 곡식과 포도주를 다시는 이방인들에게 빼앗기기 않을 것입니다. 포로기 이후의 공동체는 애써 농사를 지어 수확해도 상당 부분을 세금이나 공물로 빼앗겼습니다(참조 느 5:15). 이방인에 의한 농작물의 수탈은 언약을 파기한 백성에게 임할 저주 가운데 하나로 자주 언급됩니다(신 28:30,33).

 

(2) 추수한 자가 먹게 될 양식(9)

 

구원 시대에는 원수에게 약탈당하지 않고 수확한 곡식이 모두 수확한 자의 양식이 됩니다. 이들은 수확한 곡식의 첫 열매를 성전에 감사예물로 드리고(신 26:2) 여호와의 축복을 찬송합니다.

 

권면과 격려: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10-12)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백성에게 주실 놀라운 선물이 있는데, 그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의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요 3:16).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좋은 은혜를 얻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무력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10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이 올 길을 닦으라 큰 길을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치를 들라 11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선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12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또 너를 일컬어 찾은 바 된 자요 버림 받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10-12)

 

새롭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이스라엘이 가장 먼저 무엇을 했는지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만민을 위해 깃발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임한 구원을 선포했습니다. 우리 안에 구원의 감격이 계속되기 원한다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 주신 예수님을 이웃에게 증거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1) 구원자 여호와를 맞을 준비(10-11)

 

예언자는 이미 시작된 왕의 귀환을 위해 준비할 것을 제자들에게 명령합니다(10, 40:1-11; 52:7-10). 왕이신 여호와의 귀환에 앞서 공동체는 모든 영적 걸림돌과 잘못된 관습을 제거해야 합니다. 현실적 어려움으로 인해 여기저기 파손된 길(그분께 대한 신뢰)을 다시 닦아야 합니다. 그분께로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것은 모두 깨끗하게 내다 버려야 합니다. 예언자와 그의 제자들은 중재자로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막힌 길을 다시 이어주어야 합니다. “백성이 올 길”은 ‘백성을 위한 길’로 옮겨야 합니다.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만민을 위하여(민족들위에) 기치를 들라”는 새로운 종말론적 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말로,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시는 사건에 세계사적 의미가 주어집니다. 11b절은 40:10b의 문자적 반복입니다. 지체되기는 했지만, 약속은 반드시 그대로 성취될 것입니다.

 

(2) 시온의 새 이름(12)

 

12절은 주제에 있어 26절과 4절에 연결됩니다. 시온의 백성은 ‘거룩한 백성,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들’이라, 시온은 “찾은 바 된 자, 버림 받지 아니한 성읍”이라 불릴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은 ‘여호와께 바쳐진 자들, 그분만을 경배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들”는 35:8-9의 ‘거룩한 길’로 다니게 될 ‘구속함을 받은 자들에 연결될 수 있습니다. “찾은 바 된 자요 버림 받지 아니한 성읍”은 운명의 극적 전환을 시사해줍니다. 여호와께 버림받고 그분이 찾지 않던 시온이 그분께서 기뻐 찾으시는 성읍이 됩니다(4).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타락 때문에 침묵하셨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백성에게 계속해서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을 찾아오시며 그들의 구속자가 되십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에는 아무런 조건도 없습니다. 아무 공로 없이 회복과 구원의 은혜를 당신의 택하신 백성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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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61-01)

 


회복하시는 여호와의 영

이사야 61장 1-11절


 

살다보면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듯한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누구에게나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침묵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기간에 침묵하셨습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 여호와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고 그분의 영으로 무장한 종이 여호와의 개입에 의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립니다.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갇힌 자, 모든 슬픈 자가 여호와의 은혜에 참여합니다. 자유를 상실하고 억압 가운데 힘겹게 사는 자들에게 고대하던 안식년과 희년이 선포됩니다.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가 됩니다.

 

종의 사명과 선포(1-7)

하나님께서는 회복의 영이십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임하셔서 치유하고 회복하십니다. 이사야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십니다. 오랜 후에 그리스도는 이 본문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이 아름다운 소식이 곧 복음임을 상기시킵니다.

 

1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4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옛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5외인은 서서 너희 양 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6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 7너희가 수치 대신에 보상을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몫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그들의 땅에서 갑절이나 얻고 영원한 기쁨이 있으리라(1-7)

 

이사야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전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합니다. 놀랍게도 위로는 역설적입니다.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이 교차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보복하심으로 은혜의 해가 도래하게 하십니다.

 

(1) 종의 자기소개 (1a)

 

종은 자신을 여호와의 영이 함께하고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 소개합니다(la). 좋은 자기 힘을 의존하지 않고 여호와께 능력을 받아 사명을 완수하는 자입니다(42:1; 48:16). 그에게는 여호와의 영이 지속적으로 함께합니다. 현재 문맥에서 기름 부음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지속적 권위’에 관한 비유적 표현입니다. 구약에서 영의 수여는 주로 통치자에게 나타나고, 기름 부음은 제사장의 서임식이나 왕의 대관식 때 행해지고, 예언자는 열왕기상 19:16에서 한 번 언급됩니다. 갇힌 자의 해방을 선포하는 사면권은 왕의 권리에 속합니다. 따라서 여기 좋은 예언자 이상의 왕적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종의 오중적 사명(1b-3a)

 

이어서 좋은 자기의 사명을 다섯 가지로 요약합니다(1b-3a). 첫째는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52:7-8; 40:9; 41:27). 율법은 가난한 자의 권리를 보장해주지만, 현실에서 이들의 법적 권리는 쉽게 짓밟혔습니다. 강자에 의한 약자의 수탈은 예언자들의 핵심 고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은 위로보다는 가난의 굴레에서 해방시키는 사건과 관련 있습니다. 둘째는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는 것입니다. ‘마음이 상한 자’(마음이 부서진 자)는 삶에 지치고 마음에 상처받은 자입니다. 가난한 자는 경제적 어려움뿐만 아니라 힘이 없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도 불이익을 당합니다. 내용상 이들은 66:2의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와 동일시됩니다. 셋째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안식년의 종의 해방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입니다(레 25:10; 렘 34:8,15,17; 겔 46:17). 빚 때문에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사람의 자유를 되찾아주는 안식년 또는 희년을 선포하는 것이 종의 사명입니다. “포로된 자”와 “갇힌 자”는 1차적으로는 경제적 어려움, 특히 빚을 갚지 못해 경작지를 빼앗기고 종이나 소작농 또는 일용직 노동자로 살아가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넷째는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내용상 세 번째 사명에 직접 이어집니다. 율법에 따르면 7년마다(안식년; 출21:2; 신 15:12) 또는 50년마다(희년; 레 25:10-12) 종들의 해방이 이뤄지는 ‘은혜의 해’가 선포됩니다. ‘하나님의 보복의 날’은 하나님의 정의가 불의를 심판하는 날입니다. 그분의 정의는 가난하고 마음이 상한 자에게는 은혜와 구원으로, 부당하게 약자를 착취하는 강자에게는 보복과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해’와 ‘날’은 특정 시점의 표시보다는 ‘때의 전환’을 가리키기 위해 함께 언급된 것 같습니다. 다섯 번째는 “모든 슬픈 자”, 곧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는 것입니다(40:1;57:18; 마 5:4). 종은 탄식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이들에게 축제와 기쁨의 시대가 왔음을 선포합니다. 재를 뿌리던 머리에는 “화관이 씌고, 슬픔으로 얼룩진얼굴에는 “기쁨의 기름이 빛나고, 베옷이 사라지고” “찬양의 옷”을 입습니다. ‘기쁨의 기름’(시 45:7)은 축제를, ‘찬양의 옷’은 축제 때 입는 옷을 가리킵니다.

 

(3) 시온의 재건과 영화(3b-7)

 

3b절부터는 종의 해방과 위로의 말씀을 받은 자들에게 주는 말입니다. 종의 선포를 받아들인 자들에게 새로운 이름이 주어집니다. 이들은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참조. 60:21)라고 불릴 것입니다. 파괴된 땅의 재건과 그 땅에 사는 자들의 의로움(구원)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새로운 구원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은 거대한 의의 나무로 성장해 심으신 분의 영광을 찬양할 것입니다. 종의 사역이 긍정적 결실을 봅니다. 위로받고 놓임을 받은 자들(‘의의 나무’)이 오랫동안 폐허로 남겨진 성읍들을 재건할 것입니다(4). “중수할 것이며”는 원래 ‘새롭게 하다’를 의미합니다. 이사야서 후반부의 용례들은 시온의 재건이 회복을 넘어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을 시사합니다(참조. 48:6-7; 62:2; 65:17; 66:22). 5-6절에서는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직접 약속이 주어집니다. 폐허가 된 성읍을 복구하는 시온의 주민들을 위하여 밭과 포도원에서는 외인(타지인들)과 이방인이 노동자로 일합니다. 이스라엘은 앞으로는 이방인을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이방인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신하여 양 떼를 치며, 밭을 경작하고 포도원을 재배하게 됩니다. 시온 공동체는 “여호와의 제사장,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로 불리고, 제사장이 일반 백성이라는 십일조와 예물을 자기 몫으로 받는 것처럼(레 27:30-33; 민 18:21-32), 모든 민족에게서 재물을 받아 향유하게 됩니다(참조, 60:5-7,16). 시온 공동체에게는 제사장의 우월적 지위가, 민족들에게는 시온 공동체를 물질적으로 부양하는 의무가 주어집니다(참조 롬 15:26-27). “의의 나무”에게 “그들의 땅에서 갑절”의 몫과 “영원한 기쁨”이 약속으로 주어집니다. 고난을 이겨낸 욥에게 갑절의 보상적 축복이 주어진 것처럼(욥 42:10), ‘재와 슬픔과 근심’의 삶을 산 시온 공동체가 이전에 소유한 것보다 갑절이나 많은 풍요를 누리게 됩니다.

 

영원한 언약과 축복(8-9)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단순히 죄 사함의 자유를 누릴 뿐 아니라 죄를 이기고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경험하도록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을 주시는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주십니다.

 

8무릇 나 여호와는 정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을 것이라 9그들의 자손을 뭇 나라 가운데에, 그들의 후손을 만민 가운데에 알리리니 무릇 이를 보는 자가 그들은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8-9)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벨론 역시 과도한 강탈로 이스라엘을 압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의를 미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행위에 보상하십니다.

 

(1) 영원한 언약(8)

 

“정의”를 사랑하시고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시는 여호와께서 폭력적 착취에 시달리는 자들을 위해 개입하십니다. 그분의 정의는 백성에게는 구원으로, 백성을 부당하게 억압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8b절은 내용상 7절에 연결됩니다. 그분께서 수치와 능욕의 삶을 사는 자들에게 갚아 주시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십니다. 수치 당한 자들의 의로움이 여호와에 의해 인정을 받고, “영원한 언약”(55:3; 59:21)체결로 “영원한 기쁨”이 보장됩니다. 다시는 언약의 파기로 징벌에 떨어져 치욕거리가 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구원 사역에 세계사적 전망이 주어집니다.

 

(2)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9)

 

민족들이 이스라엘의 구원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40:5; 52:10) 이들을 “여호와께 복받은 자손”으로 인정하게 됩니다(9). 축복은 언약 준수에 따른 여호와의 선물로, ‘영원한 언약’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한 축복을 보장해줍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손의 축복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창세기 12:23의 약속을 읽어내는 것도 가능한데, 경우 민족들은 단순한 목격자가 아니라 복 받은 이스라엘을 통해 주어질 축복의 수혜자들, 곧 이스라엘의 구원사에 참여하는 자들이 됩니다.

 

감사의 노래(10-11)

하나님의 거룩하신 땅에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공의롭고 정의로운 삶을 살며, 불의는 어느 것에도 없을 것입니다. ‘싹’이 메시아를 상징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전개될 하나님 나라의 비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들을 통해 종말에 일어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10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11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 같이 주 여호와께서 공의와 찬송을 모든 나라 앞에 솟아나게 하시리라(10-1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기뻐합니다. ‘구원의 옷’과 ‘공의의 겉옷’은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한 열매들입니다. 하나님게서는 구원받을 백성들의 삶을 구관하셔서 그들을 거룩하게 하실 것이며 공의로 행하게 하실 것입니다.

 

(1) 넘치는 기쁨(10)

 

화자 ‘나’는 자신의 기쁨과 즐거움을 인생에서 가장 행복할 때인 결혼식에 비교해 여호와께서 주신 은혜를 노래합니다. 신랑 신부가 결혼식을 위해 아름답게 치장하듯이 여호와께서 “구원의 옷”과 “공의의 겉옷”으로 입혀주셨고 슬픔의 베옷 대신 “찬송의 옷”(3)을 입혀주셨기에 그는 기뻐합니다. ‘구원과 공의’는 승리 또는 ‘인정받음’을 의미합니다. “사모를 쓰며”는 문자적으로는 ‘제사장처럼 화관을 쓰며’로, 대제사장의 화려한 의복(출 28:1-43; 39:1-31)을 염두에 둔 표현 같습니다. ‘사모’(퍼에르)는 장식용 머리띠(3:20;겔 24:17,23) 또는 제사장이 머리에 쓰는 가는 베로 만든 관을 가리킵니다(출 39:28; 겔 44:18). 현재 문맥에서는 3a절의 재 대신 쓰게 될 ‘화관’에 연결됩니다.

 

(2) 여호와의 공의와 찬송(11)

 

11절은 9절을 받아 시온의 구원과 축복 가운데 나타난 여호와의 공의가 민족들에게도 알려집니다. 땅이 새순을 내고 동산이 씨를 자라나게 하는 것처럼 그분께서 모든 민족 앞에 ‘공의와 찬송’이 솟아나게 하실 것입니다. 비가 내리면 땅에서 갑자기 싹이 돋아나듯이 민족들이 이곳저곳에서 여호와의 공의를 봅니다.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호와의 활동과 능력이 민족들에 의해 매우 신속하고도 전격적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수치스러운 삶을 살던 시온이 찬송의 대상이 됩니다. 민족들은 시온이 ‘여호와께 복 받은 자’임을 인정하고(9) 구원받은 시온의 명성을 노래합니다.


사람이 비참한 상황에 빠지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심판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죄에 빠진 인생들을 그냥 버려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격 없는 이스라엘을 구속해 주셨습니다. 아울러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임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영광을 돌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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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60-01)


이스라엘을 회복시시는 하나님

이사야 60장 1-22절


 

하나님께서는 죄를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동시에 긍휼을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인간의 불순종과 타락은 하나님의 형벌을 자초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들에게도 구속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 이사야 60장은 여호와께서 직접 시온에게 주시는 약속과 위로의 말씀입니다. 시온의 미래가 화려하고도 감동적인 언어로 묘사됩니다. 진노한 여호와에 의해 버림 받은 시온이 그분의 은혜로 그분의 성읍이 됩니다. 어둠에 사로잡혀 살던 시온에 빛이 왔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위에 떠올랐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빛나는 시온을 섬기기 위해 민족들이 온갖 재물을 가지고 시온으로 나아옵니다.

 

시온의 구원(1-9)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드러내실 때 우리는 그 영광의 풍성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다’고 선언하십니다. 죄에 빠진 인간이 하나님을 찾을 수 없게 되자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신 것입니다. 죄에 빠진 인간이 하나님을 찾을 수 없게 되자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신 것입니다.

 

1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4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 5그 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이방 나라들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 6허다한 낙타, 미디안과 에바의 어린 낙타가 네 가운데에 가득할 것이며 스바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7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일 것이요 느바욧의 숫양은 네게 공급되고 내 제단에 올라 기꺼이 받음이 되리니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 8저 구름 같이, 비둘기들이 그 보금자리로 날아가는 것 같이 날아오는 자들이 누구냐 9곧 섬들이 나를 앙망하고 다시스의 배들이 먼저 이르되 먼 곳에서 네 자손과 그들의 은금을 아울러 싣고 와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에 드리려 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드리려 하는 자들이라 이는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음이라(1-9)

 

세상에 어둠이 임하면 만민은 캄캄한 속에서 길을 잃을 것입니다. 어느 곳이 길인지 무잇이 참인지 알지 못하고, 혼란과 혼돈 속에서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며 빛을 발하십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애굽을 덮을 때에도 오직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빛이 있었습니다.

 

(1) 시온에 임한 여호와의 영광(1-3)

 

예언자는 시온에게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고 외치며 구원 시대의 도래를 선포합니다(1). 태양이 떠오르듯이 여호와의 영광이 시온 위로 떠올랐기에 시온은 이제 기운을 내고 일어나야 합니다(참조. 51:17; 52:2). 시온 위에 떠오른 “여호와의 영광”은 시온의 빛이 신현의 광채임을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나타나셔서 빛으로 채우시고, 시온은 그분의 영광을 발산합니다. 시온은 여호와의 영광의 빛을 받는 수용자이며 또한 그 빛을 반사하는 전달자입니다. 시온은 자신이 경험한 그분의 영광을 사방으로 발산해야 합니다. 시온과 민족들의 처지가 뒤바뀝니다. 빛이 비치는 시온과 달리 땅과 민족들은 어둠과 캄캄함으로 덮입니다(2).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9:2), 예루살렘을 억압하였던 민족들이 빛을 잃고 짙은 어둠에 사로잡힙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멀리 있는 빛도 잘 보이는 것처럼 땅의 모든 민족이 시온 위에 떠오른 여호와의 영광의 빛을 보고 그 광명을 찾아 시온을 찾아옵니다(3). 2:2-3에서는 민족들이 여호와의 길을 배우기 위해 오는데, 여기서는 조공과 예물을 바치기 위해 시온을 찾습니다(4-9; 49:23).

 

(2) 돌아오는 시온의 자녀들(4-5a)

 

4a절은 49:18a와 문자적으로 일치하지만, 시온으로 오는 자들의 신분이 다릅니다. 후자에서는 시온의 자녀들이 유배지에서 돌아오고, 전자에서는 3절의 ‘나라들과 왕들’입니다 모여 시온으로 옵니다. 순례를 위해 오는 것은 아닙니다. 49:22b을 거의 반복하는 후반절에 따르면 이들에게 인도자와 봉사자의 역할이 맡겨집니다. 민족들 가운데 흩어져 살던 시온의 자녀들이 이들의 인도와 돌봄을 받으며 여호와의 영광이 빛나는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잃어버렸던 자녀들이 모두 무사히 돌아오는 것을 보고 시온의 얼굴이 기쁜 빛으로 가득 차고, 탄식과 절망으로 어두워졌던 마음이 환희의 감격으로 벅차오릅니다(5, 참조. 49:21).

 

(3) 시온으로 오는 민족들의 재물(5b-9)

 

그들뿐만 아니라 봉신이 예물과 조공을 바치기 위해 주군을 찾아오듯 민족들이 해로와 육로로 수많은 보화와 재물을 가지고 시온을 찾아옵니다(5b-9). “오래 황폐하였던 곳”(61:4;58:12)에 다시 영화가 주어집니다. “바다의 부”는 두로와 시돈 같은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이 해상무역을 통해 획득한 부를 가리키고(8-9), “이방 나라들의 재물”은 아마도 사막을 횡단하며 거래하는 대상 무역(6-7)을 염두에 둔 표현 같습니다. 6절의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는 어둠에 살던 민족들이 시온의 빛을 보고 이를 전하게 될 것을 시사합니다(참조. 42:10; 40:5). 7b절에 따르면 이들이 가져온 양 떼가시온 성전에서 합당한 제물로 드려지고 여호와에 의해 기쁘게 받아들여집니다.

 

시온을 섬기는 민족들(10-16)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이 구원의 최종 모습이라는 가르침을 종종 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닌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임하는 천국을 더 자주 가르치셨습니다. 한마디로 성경의 구원은 죄로 어그러진 이 세상에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은 어떤 회복을 담고 있습니까?

 

10내가 노하여 너를 쳤으나 이제는 나의 은혜로 너를 불쌍히 여겼은즉 이방인들이 네 성벽을 쌓을 것이요 그들의 왕들이 너를 섬길 것이며 11네 성문이 항상 열려 주야로 닫히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들이 네게로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가져오며 그들의 왕들을 포로로 이끌어 옴이라 12너를 섬기지 아니하는 백성과 나라는 파멸하리니 그 백성들은 반드시 진멸되리라 13레바논의 영광 곧 잣나무와 소나무와 황양목이 함께 네게 이르러 내 거룩한 곳을 아름답게 할 것이며 내가 나의 발 둘 곳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 14너를 괴롭히던 자의 자손이 몸을 굽혀 네게 나아오며 너를 멸시하던 모든 자가 네 발 아래에 엎드려 너를 일컬어 여호와의 성읍이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시온이라 하리라 15전에는 네가 버림을 당하며 미움을 당하였으므로 네게로 가는 자가 없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를 영원한 아름다움과 대대의 기쁨이 되게 하리니 16네가 이방 나라들의 젖을 빨며 뭇 왕의 젖을 빨고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10-16)

 

이스라엘의 권위가 얼마나 대단한지 성문이 항상 열려 있고, 이방 나라들이 재물을 가지고 올 것입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을 ‘섬기지 아니하는 백성과 나라는 파멸’(12)을 당할 것입니다. 그 어떤 나라도 대적할 수 없습니다. 어느 나라도 대적할 수 없습니다. 어느 나라도 그 권위에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1) 민족들에 의한 시온의 재건(10-12)

 

자유를 빼앗기고 억압을 당하던 시온의 운명이 극적 전환을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두시고 은혜로 긍휼을 베풀기로 하십니다(10; 54:7). 당신 백성을 가엾이 여기시는 그분의 호의가 시온에 새로운 시대를 가져다줍니다. 시온과 민족들의 운명이 역전됩니다. 시온 성벽을 파괴했던 이방인들이 그 성벽을 쌓고, 시온을 점령했던 왕들이 시온을 섬깁니다. 성문들은 항상 열려있고 낮에도 밤에도 닫히지 않습니다(11). ‘열린 성문’의 의미는 이중적입니다. 먼저 민족들이 끊임없이 예물을 바치러 오기에 밤에도 문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영원한 빛이 되어 지켜주시기에(19-20) 밤에도 문을 열어놓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안전해집니다. “그들의 왕들을 포로로 이끌어 옴이라”는 왕들이 시온의 지배력을 상실하고 낮은 자리로 내려갔음을 시사합니다. 여호와의 은혜와 긍휼로 회복된 시온과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가 민족들을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시온을 섬기지 않는 백성과 나라는 멸망을 당합니다(12; 참조․ 슥 14:16-19).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는 시온을 섬기지 않는 민족은 여호와를 섬기지 않는 민족으로 간주되어 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2) 성전의 재건(13)

 

여호와의 현존을 상징하는 성전이 재건됩니다. 민족들이 성전 재건과 장식에 필요한 나무를 가지고 시온으로 옵니다(13). “레바논의 영광”(35:2)은 주로 왕궁과 성전을 짓는 데 사용된 레바논 백향목을 가리킵니다. “내 거룩한 곳”과 “나의 발 둘 곳”(참조. 겔 43:7)은 성전을 의미합니다. 전통적으로 지성소 안에 있는 두 그룹의 두 날개 아래 놓인 법궤가 발등상으로 간주 됐습니다(시 132:7). 주전 587년에 파괴된 법궤 대신에 성전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발등상이 됩니다. 시온의 수치스러운 과거와 영광스러운 미래가 대조됩니다.

 

(3) 여호와의 성읍 시온(14-16)

 

시온을 괴롭히고 멸시하던 자들이 그 발아래 엎드려 시온을 “여호와의 성읍,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시온”이라 부릅니다(14). 여호와께 징벌당한 성읍으로 조롱당하던 시온이 민족들에 의해 다시 인정을 받습니다. 남편에게 버림당한 여자처럼 수치와 탄식 가운데 살아가던 시온에게 “영원한 아름다움과 대대의 기쁨”이 주어집니다(15). “버림을 당하며 미움을 당하였으므로”는 시온이 남편에게 이혼을 당하고 쫓겨난 여자 신세였음을, “네게로 가는 자가 없었으나”는 완전히 파괴돼 사람들에게 잊힌 성읍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여호와께 받아들여진 시온은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성장하듯 나라들과 왕들의 젖을 먹고 번성합니다(16; 참조. 49:23). 민족들의 부와 재물이 시온의 양식이 되고, 시온은 이 일을 통해 여호와께서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이심을 알게 됩니다(참조. 49:26). 시온의 완전한 회복을 약속하신 여호와께서는 절망적인 처지에 놓인 자들을 도와주시는 구원자이시고, 자녀들의 해방을 권리와 의무로 삼으시는 구속자이시고, 능력으로 시온을 모든 위협에서 지켜주시는 야곱의 전능자이십니다.

 

시온의 영광스러운 미래(17-22)

회복될 이스라엘은 ‘영원한 아름다움과 대대의 기쁨’(15)이 될 것입니다. 소외되고 버림받던 이스라엘을 이제는 이방 나라와 열방들이 나서서 젖을 먹이듯 보호할 것입니다. 그들은 가장의 입장이 아니라 부모와 같은 존재가 되어 이스라엘을 위해 봉사하게 됩니다. 이러한 예언은 고레스와 같은 이방 왕들을 통해 성취되며, 하나님께서 모든 나라의 주인이심을 깨닫게 하십니다.

 

17내가 금을 가지고 놋을 대신하며 은을 가지고 철을 대신하며 놋으로 나무를 대신하며 철로 돌을 대신하며 화평을 세워 관원으로 삼으며 공의를 세워 감독으로 삼으리니 18다시는 강포한 일이 네 땅에 들리지 않을 것이요 황폐와 파멸이 네 국경 안에 다시 없을 것이며 네가 네 성벽을 구원이라, 네 성문을 찬송이라 부를 것이라 19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20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 21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원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22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17-22)

 

더 이상 해의 빛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밤의 달도 비추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회복하실 때는 하나님께서 직접 ‘영원한 빛’이 되며, ‘영광’이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실 이스라엘은 물리적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 나라는 영원하고, 그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 나라는 온전한 곳입니다. 더 이상 그곳에는 슬픔이 없습니다.

 

(1) 물질적 풍요와 공의로운 통치(17-18)

 

시온의 미래는 현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워집니다. 귀한 광물이 넘쳐나서 금과 은과 놋과 철을 누구나 마음대로 사용하게 됩니다(17). 솔로몬의 황금시대를 염두에 둔 표현처럼 보입니다(왕상 10:21,27). 또한 공의로운 통치가 가져다주는 화평도 누리게 됩니다. 억압과 착취의 통치가 화평과 공의의 통치로 대체되기에 이스라엘 영토 안에 “강포한 일”과 “황폐와 파멸"이 없게 됩니다(18). 시온의 성벽은 “구원”이라, 성문은 “찬송”이라 불립니다. 구원은 승리와 번영을, 찬송은 명성을 의미합니다. 모든 민족이 여호와에 의한 시온의 구원과 승리와 영화로움을 보게됩니다.

 

(2) 시온의 영원한 빛(19-20)

 

여호와께서 해와 달이 되셔서 시온을 비추시기에 어둠이 틈타지 못합니다(19-20; 참조․ 슥 14:7). 그분께서 시온의 영광이 되셔서 “영원한 빛”으로 비추시기에 다시는 슬퍼할 일이 없어집니다.

 

(3) 땅과 후손의 약속(21-22)

 

시온 백성이 모두 의인이 되어 영원히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21). 시온 백성이 야곱의 적법한 후계자로 가나안 땅을 영원히 소유하게 됩니다. 이들은 여호와께서 당신 영광을위하여 손수 “심은 가지”요 “직접 손으로 만든 것”입니다. 시온이 여호와의 보호 아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실존이 그분께 의존적임을 보여줍니다. 땅의 소유 약속에 인구 증가의 약속이 더해집니다. 그들 가운데 작은 자가 한 부족(“천 명”)을 이루고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루게 됩니다(22). 주전 587년 바벨론에 멸망당한 이후 가나안에 사는 이방인들이 점차 증가했고 시온은 많은 주민을 잃은 채 초라한 신세가 됐습니다. 땅의 회복과 후손의 번성 없이는 한 민족으로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60장은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는 약속 성취의 확실성과 임박함을 강조하며 마무리합니다. 새벽빛이 짙은 어둠을 물리치고 그 모습을 환히 드러내는 것처럼 정한 때가 되면 구원 약속이 한순간에 다 성취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온 것은 사람들의 죄와 타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여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시지만, 사람들은 스스로 죄를 짓고 하나님께 형벌을 받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격 없는 인간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가 구속의 은혜를 얻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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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59-01)


평강의 길을 모르는 이스라엘의 죄

이사야 59장 1-21절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가 기도 응답을 받기 전, 기다리는 법을 먼저 배우길 원하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 응답이 지체되는 중요한 이유는 해결되지 않은 우리의 죄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기도의 응답을 지체시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지체될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요?

 

  • 기대하였던 대로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자 예루살렘 공동체는 절망감과 좌절감에 빠집니다. 이들은 금식을 해도 아무 유익이 없다고 기도를 드려도 아무 응답이 없다고 불만을 제기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데서 돌이켜 악한 생각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자들에게 악의 선택은 일상이 됩니다. 정의와 공의와 성실과 정직이 사라지고, 폭력과 거짓이 판치는 세상이 됩니다.

 

예언자의 고발(1-8)

악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 평강의 길은 하나님께 가는 거룩한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에 고착된 이스라엘을 슬퍼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된 삶을 알려 주시지만, 악에 길든 이스라엘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악인들의 길은 넓고 평탄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은 사망입니다. 오직 좁고 협착한 진리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1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3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 4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실하게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행을 잉태하여 죄악을 낳으며 5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6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릴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 7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생각은 악한 생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있으며 8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1-8)

 

하나님께서는 죄를 혐오하십니다. 극도로 싫어하시며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으십니다. 죄는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게 하지만, 하나님께서도 죄로부터 멀어지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가 없으시며 죄를 멀리하시기에 죄인들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2) 완전히 단절시킵니다. 다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이유는 그들 자신 안에 있고,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을 막는 것입니다.

 

(1) 죄로 인한 단절(1-2)

 

예언자는 구원이 지체된 원인을 자신들에게서 찾지 않고 여호와께로 돌리는 자들을 신랄하게 고발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고, “귀가 둔하여” 간구를 듣지 못하시는 것도 아닙니다(1). 그분께는 이스라엘을 구해내실 능력도 이스라엘을 위해 기꺼이 개입하실 의지도 있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이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이스라엘의 죄가 그들에게서 얼굴을 가리어 듣지 않으시게 하였습니다(2).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여호와께서 개입하실 수 없었고 간구에 응답하실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의 손”은 그분의 구원 또는 심판의 능력을 의미하고, ‘짧은 손’은 능력의 부재를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일찍이 “강한 손과 편 팔”(신 4:34; 5:15 등)로 이스라엘을 애굽 바로의 압제에서 구해내셨습니다. ‘귀의 둔함’은 6:10(“귀가 막히고”)에서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고발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얼굴을 가리심’은 관계의 단절, 곧 심판 또는 곤경에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뜻입니다.

 

(2) 악에 사로잡힌 자들(3-8)

 

3-4절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아주 강도 높게 고발합니다. 먼저 행위(손과 손가락)와 말(입술과 혀)을 담당하는 신체 부위를 열거하면서 악행을 신랄하게 지적합니다(3). ‘피에 더러워진 손/손바닥’은 폭력과 불법으로 이웃의 정당한 권리를 억압하는 모든 악행을 가리킵니다. 무죄한 자가 흘린 피는 땅에서 직접 하나님께 호소합니다(창 4:10). ‘죄악으로 더러워진 손가락’은 범죄 행위의 의도성이나 철저성을 시사합니다. 폭력으로 이웃의 생명을 위협하는 자들이 말로도 이웃에게 해를 끼칩니다. 이들의 ‘입술’은 거짓을 말하고 이들의 ‘혀’는 악독을 지어냅니다. 서로 속이고 함정에 빠뜨리는 말만 뱉습니다. 속임수와 불의의 언어로 가득 찬, 서로에게 적대적인 탐욕의 사회로 타락합니다. 3절을 1절과 함께 읽으면, 피와 죄악으로 더러워진 손바닥을 펴고(1:15) 거짓과 악독을 쏟아내는 입으로 간구하기에 여호와께서는 이들의 기도를 들어주실 수 없었습니다. 또 4절과 함께 읽으면, 3b절은 거짓 소송과 거짓 증거로 무죄한 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법적 폭력을 고발하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폭력을 휘두르고 거짓을 일삼는 자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사법제도도 기능을 상실합니다. 불의와 불법을 정죄해야 할 법정이 그 온상이 됩니다(4). 재판에 참여하는 자들, 곧 고소인과 재판관과 증인이 모두 부패하여 불법의 공모자가 됩니다. 악행(재앙)을 잉태하여 죄악(불법)을 낳는 자들뿐입니다. 5-6a절은 청자에게 잘 알려진 비유를 활용해 고발합니다. 악인에게서 나오는 것은 독사의 알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누구나 죽습니다. 독사의 알이 으깨지면 살무사가 나오듯이 이들에게서는 더 사악한 것만 나옵니다. 거미줄을 부적당한 옷의 비유로 사용하는 6a절은 아마도 함정에 빠뜨려서 약탈한 재물이 이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할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 행위가 “죄악의 행위” 뿐이고, 그 손에는 폭행만 있는 자들에게는 탐욕의 만족이 삶의 유일한 목적이자 가치관이 됩니다(6b-7). 피를 흘리기에 주저함이 없고 “악한 생각”(재앙)으로 가득 찼기에, 이들의 길에는 “황폐와 파멸”의 흔적만 남습니다. 8절은 57:21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는 말을 받아 확대합니다. 이들은 자기네 길을 굽게 만들어 그 길로 가는 자들이기에 이들의 길에는 평강과 정의가 없습니다.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57:20) 같은 자들이기에 사회가 피와 죄악과 거짓과 악독으로 가득 찹니다.

 

공동체의 고백(9-15)

알코올 의존자들의 회복을 지원하는 단주동맹에서는 알코올 의존에서 회복하기 위해 제일 먼저 스스로 술을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자신의 힘으로 조절할 수도 있고, 끊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는 한 음주 습관은 고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자가조절의 희망을 품고 음주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해 더 이상 애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도 이와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9그러므로 정의가 우리에게서 멀고 공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둠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에 행하므로 10우리가 맹인 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 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 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은지라 11우리가 곰 같이 부르짖으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정의를 바라나 없고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서 멀도다 12이는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언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니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입니다 13우리가 여호와를 배반하고 속였으며 우리 하나님을 따르는 데에서 돌이켜 포학과 패역을 말하며 거짓말을 마음에 잉태하여 낳으니 14정의가 뒤로 물리침이 되고 공의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나타나지 못하는도다 15성실이 없어지므로 악을 떠나는 자가 탈취를 당하는도다(9-15)

 

우리의 의지는 죄로 기울어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깊이 해도, 아무리 의지적 노력을 해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가 죄를 해결하는 데 무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두 손을 들고 나갈 때, 비로소 회복의 기회가 열립니다.

 

(1) 어둠 속에 살아가는 자들(9-11)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 구원 약속이 지체되었다고 실망하거나 회의하는 공동체는 소망의 빛을 놓치고 어둠에 사로잡힙니다. 이들을 감싸고 있는 어둠은 예언자들의 핵심 메시지에 속하는 ‘정의와 공의’의 부재에서 기인합니다(9). 하나님의 결정적 행위(재판)와 관련하여 사용될 때 정의(미슈파트)는 ‘악인의 정죄’와 ‘의인의 인정’을(3:14; 4:4; 28:6; 34:5; 41:1), 공의도 ‘부당한 판결에서 무죄한 자의 해방’을(51:6,8; 56:1; 59:9, 16-17; 61:10-11; 63:1) 함축합니다. 맹인이 담을 더듬듯이 사람들은 한낮에도 제 길을 찾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갑니다. ‘눈’의 모티브는 이스라엘의 영적 무지를 보여주는 비유입니다(42:19; 43:8;56:10). 보기는 보아도 깨달을 수 없었던 왕정시대의 이스라엘처럼(1:3; 6:9-10) 죄에 사로잡힌 포로기의 공동체도 “눈 없는 자”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불순종한 자들에게 주어진 저주의 삶이었습니다(참조. 신28:29; 습 1:17; 애 4:14). 정의와 구원이 사라지고 어둠만 남은 곳에서 이들은 곰이 으르렁대듯이(참조. 시 42:5, 11; 43:5), 비둘기가 슬피 울듯이(참조. 38:14; 겔 7:6; 나 2:8) 절망적으로 탄식합니다(11). 죽음의 위협에 직면해서야 이들은 자신들의 삶이 죄에 빠진 삶이었음을 깨닫고 인정합니다.

 

(2) 죄의 고백 (12-13)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언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니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입니다”(12). 이들의 삶 자체가 이들의 죄악을 고발하기에 죄를 인정하기 위해 다른 증거를 제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3) 정의와 공의가 사라진 사회(14-15a)

 

13-15a절은 죄와 관련한 열네 개 이상의 단어를 사용해 철저하게 죄를 고백합니다. 이들은 여호와를 배반하고 등을 돌린 결과가 윤리적 파탄이었음을 인정합니다.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기에 사회의 근본 토대인 정의와 공의가 그 기능을 상실하고, 성실(진실)과 정직이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진실되고 정직한 삶을 사는 자가 약탈의 대상이 되고, 힘 있는 자만 살아남게 됩니다.

 

긍정적 답변: 시온을 위하여 직접 개입하시는 여호와(15b-21)

하나님을 떠난 그들은 마음이 부패해 소생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정의와 공의가 그들에게서 도망칩니다. 성실과 정직은 죽은 것처럼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패역한 시대이기에 악을 떠나는 자가 오히려 탈취를 당하였습니다. 철저히 무능한 자들이 되었고, 오직 악을 행하는 것에만 능수능란했습니다.

 

15…여호와께서 이를 살피시고 그 정의가 없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16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공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17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며 구원을 자기의 머리에 써서 투구로 삼으시며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고 18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원수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 19서쪽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 돋는 쪽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강물 같이 오실 것임이로다 20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21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5b-21)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악한 행위대로 보응하십니다. 사람은 무엇이든지 자신이 심은 대로 하나님께 받습니다. 이것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심어야 합니다. 그것이 형통으로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참된 구속자가 되십니다. 장차 상의 서쪽과 동쪽 모든 열방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사모할 것입니다

 

(1) 중재자 없음에 실망하신 하나님(15b-16a)

 

공동체의 뼈저린 죄의 고백에 여호와께서 긍정적으로 응답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어둠에 사로잡힌 공동체를 위해 중재하려는 자가 한 사람도 없는 것을 보고 실망하시지만(15b-16a) 포기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분은 역사에 직접 개입하기로 하십니다.

 

(2) 직접 나서시는 하나님(16b-17)

 

하나님께서 용사처럼 무장하시고 적들과 싸워 공의와 구원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16b-17).

 

(3) 행위대로 갚으시는 하나님(18-19)

 

하나님께서 각자의 행위대로 갚으십니다. 적에게 분노하시고 원수에게 보응하시고 섬들에게 보복하십니다(18). 공동체 안에 있는 악한 자들은 물론 외부의 대적도 모두 제거하십니다. 예루살렘 공동체가 내부로부터 정화되고 외부의 위협에서도 벗어납니다. 모든 것을 휩쓸어가는 급류처럼 그분께서 분노와 보복으로 심판하시기에 온 땅이 그 이름과 영광을 두려워합니다(19). 여호와의 이름은 거룩하신 이름으로 더러움과 죄를 용납하지 않고, 그분의 영광은 왕적 권능으로 그분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는 자를 징벌합니다.

 

(4) 회개한 자들의 구원 약속(20)

 

여호와의 역사 개입을 긍정적 관점에서 기술합니다. 그분은 시온에게, 야곱의 자손 가운데 악행에서 돌아선 자들에게 구속자로 오십니다. 구원 약속의 대상이 야곱의 자손에서 회개하고 그분께 돌아간 자들로 한정됩니다. 악을 떠나 여호와께로 돌아온 자만 구원을 받습니다.

 

(5) 영과 말씀의 약속(21)

 

전체 단락을 마무리하는 구절입니다. 여호와의 주도로 언약이 맺어지고, 언약의 내용으로 영과 말씀의 선물이 약속됩니다.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청자 ‘너’는 아마도 20절의 악행에서 돌아선 자들, 곧 참된 야곱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들과 언약을 맺고 이들에게 예언의 영을 주어 당신 말씀을 알게 하십니다(참조, 욜 2:28).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선포보다는 말씀을 알고 말씀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예언자의 역할이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징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타락을 관용하시지 않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단호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그들에게 오직 은혜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구원이 인간의 공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 임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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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58-01)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

이사야 58장 1-14절


 

사람들은 모두 복되고 형통한 신앙생활을 원합니다. 그들에게 원하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형통에 이른 성경적 원리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 여호와께서 ‘내 백성’과 ‘야곱의 집’으로 부르시며 고발하는 공동체는 제의적으로 흠이 없어 보이는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종교적 열심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제의적 경건을 여호와에게서 복을 받아내는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금식하는 날에도 일꾼들을 다그쳐 일을 시키고 이웃과는 다투거나 싸움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금식(1-12)

일반적으로 역경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시야가 좁아져 자신의 문제에만 집중합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려는 이와 같은 경향은 우리 안에 있는 죄성과 결합되어 고난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우리 안에서 더욱 강화됩니다. 심지어 우리가 우리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는 그 순간에도 그런 이기심이 우리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우리가 금식하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자신의 문제로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할 때, 우리는 혹시 이웃들을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것은 없는지를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1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 2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 3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4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5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6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9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10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11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12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1-12)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들이 범한 배교와 타락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이들은 거룩한 언약 백성답게 살아야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형식적이고 곁치례뿐인 경건이었습니다.

 

(1) 고발(1-2)

 

하나님께서 예언자에게 백성의 허물과 죄를 고발하라고 명령하십니다(1; 호 8:1; 암 3:6a). 예언자는 영적으로 무감각해진 자들에게 경보를 발하여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고발당하는 공동체는 겉보기에는 흠은커녕 칭찬받을 만합니다(2). “날마다” 여호와를 찾고 그분의 길 알기를 즐거워합니다. 그분께 “의로운 판단”(판결, 법규)을 묻고 가까이 나아가길 즐거워합니다. 절기 때나 특별한 경우에만 하나님을 찾지 않고 날마다 찾습니다. 철두철미하게 하나님께 의존해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성전 중심의 제의 종교에서는 제사장과 예언자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고, 사람들은 희생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경건은 제의와 성전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진실이 없고 공의가 없[는]”(48:1) 제의적 삶이 언약 공동체의 모범적 삶이 됐습니다.

 

(2) 첫 번째 답변(3-4)

 

금식의 예를 들어 이들의 위선적 경건을 고발합니다(3-4). 금식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자신들의 경건에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기대한 결과(축복)가 없다고 불만을 제기합니다(참조. 말 2:13; 3:14-15).금식이 그 본래 의미를 잃고 복을 얻어내는 수단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이들은 금식하는 날에 제 유익만 찾았습니다. “오락”(헤페츠)는 ‘[경제적] 이익’을 의미하고, “온갖 일을 시키도다”는 ‘너희 모든 일꾼을 다그치는도다’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금식하는 자들이 일꾼들에게는 더 많은 노동을 강요했습니다. 이들은 탐욕과 착취의 마음을 종교적 경건으로 포장했습니다. 노동으로 힘겹게 사는 이웃을 억압하여 부를 축적했으면서도 그것을 금식이 가져다준 하나님의 축복으로 자랑했습니다. 금식의 날에도 이웃과 다툼이나 주먹질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을 한다고 생각하기에 불의와 불법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웃을 착취하고 자기 경건을 과시하는 자들의 금식에 하나님께서 반응하십니다.

 

(3) 두 번째 답변(5-9)

 

어떻게 이런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금식과 간구에 응답할 수 있겠습니까? 금식하는 자들의 불평에 대한 첫 번째 답변이 이들의 위선적 경건과 윤리적 무감각을 고발한다면, 5절부터 나오는 두 번째 답변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참된 금식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논점이 금식의 형식에서 내용으로 옮겨집니다. 금식에서 중요한 것은 관련 제의 규정과 전통을 준수하려는 열심이 아닙니다(5). 금식일은 사람이 자신을 괴롭히는 날이 아닙니다. 갈대처럼 머리를 숙이고 베옷을 입고 티끌에 눕는 것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희생제사의 경우처럼 금식도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절대선(絶對善)이 아닙니다. 여호와께 열납되려면 그분께서 “기뻐하는” 금식을 해야 합니다. 금식의 정의가 전혀 새롭게 내려집니다.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그분께서 택하신 금식입니다(6). “흉악"(레샤)은 4절의 “악한”과 같은 단어로, “흉악의 결박”이 “악한 주먹으로 치는 자들이 지운 결박임을 시사합니다. 목덜미를 짓누르는 “멍에”는 강자가 약자에게 강요하는 정치-육체적 속박이나 종살이를 상징하며(레 26:13; 렘 28:10-14; 겔 30:18; 34:27), “멍에를 꺾는 것”은 억압과 종살이에서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압제 당하는 자”는 힘 있는 자에 의해 부당하게 학대당하는 자를 가리키고, “끌러 주며”의 ‘나타르’는 ‘갇힌 자를 자유롭게 놓아주다’라는 뜻입니다(시 105:20; 146:7). “자유하게 하며”의 ‘샬라흐 호프시’는 안식년 또는 희년의 종의 해방과 관련해 사용하는 표현입니다(출 21:26-27; 신 15:12-13,18; 렘 34:8-16). 한마디로,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이유로 자유를 빼앗기고 종살이하는 자에게 자유를 되돌려주는 것이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금식입니다. 7절은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지금 굶주린 자에게 빵을 나누어주고, 집이 없어 떠도는 가련한 자를 맞아들여서 잠자리를 마련해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어 덮어주고, 가난한 친척을 보고 피하여 숨지 않는 것입니다. 공동체 구성원의 어려움에 눈을 감지 않고 연민의 마음을 갖고 실질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여호와께서 택한 금식입니다.

8-9절은 참된 금식에 따른 구원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금식을 하면, 귀환 공동체가 역경에 처한 이웃을 돕는다면, 어둠을 뚫고 새벽빛이 터져 나오듯, 새 살이 돋아 상처가 치유되듯 이스라엘의 소망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비칠 것이며”는 문자적으로는 ‘터져 나올 것이며’로 약속한 구원이 한순간에 성취될 것을 시사합니다. ‘차마흐’는 ‘싹이 돋다’를 의미합니다. 아마도 40-55장에 나오는 ‘새로운 일들’의 싹틈(42:9; 43:19)과 관련해 사용된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금식을 한다면 제의적 경건 때문에 지체된 치유(구원)가 곧 성취될 것을 시사해줍니다(참조. 51:5; 56:1). 후반절은 안전한 출바벨론을 약속한 52:12b에 거의 문자적으로 일치합니다. 바벨론에서 나올 때 여호와께서 귀환 행렬의 선두에 서서 길을 인도하시고 후미에서 지켜주신 것처럼, 예루살렘 공동체를 모든 위험에서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여호와의 영광”에 병행하여 등장하는 “네 공의”는 공동체의 의로움을 옹호해주시는 분(의 공의)을 가리킵니다. 위선적 경건 때문에 단절된 관계가 온전히 회복됩니다. 예루살렘 공동체가 부르면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도와달라 부르짖으면 ‘내가 여기 있다’하고 즉각적으로 개입하십니다(52:6: 65:1). 여호와께서 택한 금식을 행할 때 공동체는 그분의 인도와 보호 아래 살게 됩니다. 전체적으로, 본문은 구원 약속이 온전히 이뤄지지 않았다고 불만을 제기하는 귀환 공동체에게 주는 답변입니다.

 

(4) 조건적 약속(9b-12)

 

앞에 나온 것을 반복하는 9b-12절은 조건적 약속의 말씀입니다. 9b절은 내용상 3b-4a절과 6절의 요약에 해당합니다. 제하여 버려야 할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이 구체적으로는 불분명하지만, 이웃에게 해를 끼쳐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행태임은 분명합니다. 10a절은 7a절을 받습니다. 공동체의 가진 자는 자기 재산을 굶주린 자의 배고픔을 해소시켜 주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많이 가진 자가 없는 자의 부족함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따뜻한 음식으로 가난한 자들의 빈속을 채워주는 것이 부자의 금식입니다.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고 그들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함께하십니다. 10b절은 8a절에 일치합니다. 공동체의 선을 지향하는 삶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으로 이스라엘의 소망을 성취시켜줍니다. 지금까지의 흑암이 사라지고 앞으로는 밝은 대낮에 길을 가듯이 안전하게 살게 됩니다. 11절은 8b절을 받아 확대합니다. 여호와의 조건을 완수하는 자들에게 그분의 인도하심과 땅의 풍요와 건강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귀환 공동체가 그분께 의지할 때 현재의 궁핍함과 부족함은 극복될 수 있습니다. 메마른 땅(예루살렘 공동체)이 “물 댄 동산”처럼,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처럼 됩니다. 예루살렘이 재건되고, 그 후손들에게 명예로운 이름이 주어집니다(12).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는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을,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는 성안의 복구를 시사해주는 것 같습니다.

 

안식일 준수(13-14)

우리가 음식을 거절하고 기도의 자리에서 무릎을 꿇는 것은 우리를 철저히 낮추고 하나님만을 높이는 것이며, 하나님 홀로 우리 삶을 다스리는 분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우리의 생각과 계획을, 우리의 시도와 노력을 멈추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의 정신입니다. 현대인들은 바쁘게 사는 것을 미덕으로 여깁니다.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며 유능한 사람이란 것을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증명하려고 합니다.

 

13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13-14)

 

바벨론에서 돌아온 구속받은 자들은 황폐한 성과 벽을 재건할 것입니다. 이것은 죄로 말미암아 황폐해진 인류를 구속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상징합니다. 언약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육체적 욕망들을 좆지 않고 마땅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안식일을 지키고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면 번성할 것입니다.

 

(1) 조건(13)

 

안식일 준수가 하나님께 대한 복종과 경건 행위로 간주됩니다. 13절은 장사와 관련한 안식일의 이동과 이윤 추구를 금합니다(참조. 느 13:15-19). 안식일은 여호와의 거룩한 날이기에 다른 날들로부터 구별하여“존귀한 날”로 지켜야 합니다.

 

(2) 약속(14)

 

14절은 안식일 준수에 따른 약속입니다. 지금은 이방 압제 아래 “오래 황폐된 곳들”에서 힘겹게 살고 있지만, 안식일을 준수한다면 여호와 안에서 기쁨을 얻고, 승리자가 되어 “야곱의 기업”인 가나안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종교적 형식에 집착했습니다. 그들의 형식적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은 제쳐 두고 종교적 형식과 외형만을 고집한 것입니다. 참된 경건은 종교적 외형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는 자에게 형통의 복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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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57-02)


이스라엘을 다시 구원하실 하나님

이사야 57장 14-21절


 

인간의 뿌리 깊은 절망스럽습니다. 문명은 발전해도 야만의 시대는 지속되고, 오랜 신앙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회개를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비와 위로와 평강으로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위로부터 내리시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 왕정시대나 심판을 경험한 포로기 이후나 이스라엘의 종교적 형편은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산과 골짜기와 성읍에는 우상이 마치 제 집인 양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어 보였지만, 역설적이기도 이스라엘의 한계와 무능력이 그분의 긍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킵니다.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하시는 분께서 자기 마음의 길에서 떠나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절망적 현실을 인정하고 그 고질병을 고쳐주기로 하십니다.

 

내적 영적 정화(14)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이 범죄했을 때, 그들을 치시는 까닭은 그들을 없애버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그들이 돌이켜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백성들의 욕망에 영합할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오도록 인도하라고 명합니다.

 

14그가 말하기를 돋우고 돋우어 길을 수축하여 내 백성의 길에서 거치는 것을 제하여 버리라 하리라(14)

 

바벨론의 압제로부터 해방과 구원을 얻게 된 이스라엘은 그들의 범죄로 인해 또 다시 심각한 영적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죄악의 삶으로 다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이스라엘을 “내 백성”으로 부르고, 그들 가운데 일부에 속한 너희에게 명령하십니다. ‘너희’라는 대상은 문맥상 ‘내 백성의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이 56:9-12에서 고발당한 지도자들과 같은 집단인지는 불분명하지만, 56:9-57:21의 넓은 문맥에서는 가능합니다.

여호와께서 지도자들에게 “돋우고 돋우어 길을 수축하여 내 백성의 길에서 거치는 것을 제하여 버리라”고 명령하십니다. 돌을 깔고 길을 평탄하게 닦아 걸림돌을 들어내는 사명이 맡겨집니다. 이 길은 유배민이나 흩어진 자들의 귀환을 위한 물리적 길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돌아오시는 길도(40:34) 아닙니다. 여호와의 백성이 그분께로 나아가는 내적-영적 갱신의 길입니다. 시온으로 돌아오시는 이스라엘의 왕 여호와(52:7-9)를 맞이할 수 있도록 지도자들은 백성을 영적으로 준비시켜야 합니다.

13절까지 폭로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비해 하나님의 심판은 그렇게 두드러지 않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우상이 사실은 바람에 날려가는 헛된 것임에 불과한 것임을 보이신다는 말씀이 심판의 전부인 듯합니다. 오히려 14절부터는 범죄한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움과 돌리킴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거치는 것”(걸림돌)은 잘못이나 죄를 가리킵니다.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구원이 지체되지 않도록(56:1) 자기 안에 있는 악한 요소들, 그분을 신뢰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들을 제거해야 합니다(55:6-7). 62:10에서는 예언자가 같은 표현을 사용해, 아마도 그의 제자들에게, 백성이 여호와께서 나아가는 데 방해되는 것을 제거해버리라고 명령합니다.

 

구원 선포(15-19)

하나님의 책망의 목적은 회복과 세움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통회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분노를 그치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며 그리고 세워주십니다. 그러므로 그 용서와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찬양하는 삶으로 살아갑니다.

 

15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16내가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끊임없이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지은 그의 영과 혼이 내 앞에서 피곤할까 함이라 17그의 탐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고 노하였으나 그가 아직도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걸어가도다 18내가 그의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를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19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14-19)

 

하나님의 징계 목적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거룩한 행실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백성들에게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기에 앞서 말씀하시는 분을 삼중으로 소개합니다.

 

(1) 영과 마음의 소생(15)

 

15절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장엄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지극히 존귀하며”라고 소개합니다. 6:1의 ‘높이 들린’과 동일한 표현으로(참조. 53:12) 하나님의 공간적 초월성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높고 높으신 분으로(33:5,16) 땅의 사건에 개입하시지만,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지는 않으십니다.

 

(2) 영원히 다투지 않으시는 여호와(16)

 

“영원히 거하시며”는 그분의 시간적 초월성을 보여줍니다. 흥망성쇠를 경험하는 민족들의 신들과 달리 그분은 변함없이 활동하시며 언제나 왕으로 통치하십니다. “시온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8:18)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십니다(41:4; 44:6; 48:12). 또한,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하다 이름 하는 이”입니다(15).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는 것은 전적으로 구별되시는 분으로 비교를 거부하시는 그분의 배타성과 절대성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홀로 역사에 개입하십니다. 그분의 거룩함은 역동적 힘으로 때로는 이스라엘을 심판하기도 하고(5:24; 10:20; 31:1), 때로는 민족들을 심판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도 합니다(41:14; 43:3,14; 49:7). 여호와의 높으심과 영원하심과 거룩하심이 그분 백성에게 구원과 화평의 문을 열어줍니다.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시는 여호와께서는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하시는 분입니다(15). 여호와는 초월적이고 배타적이시지만, 당신을 찾는 자를 즐겨 만나십니다(55:6). ‘통회’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부서졌음을 발견하는 이들입니다. 그분에게서 피난처를 찾는 자는 거룩한 산에서 그분의 현존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57:13).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는 회개한 자보다는 현재의 재앙과 환난을 받아들이고 유일한 피난처와 도움이신 여호와를 향해 겸비한 자세를 내보이는 자를 가리킵니다(시 34:18; 잠 29:23). 여호와께서 사회적-종교적으로 짓밟히고 당신 앞에 낮아진 자들의 영과 마음을 되살려주십니다. 현재의 역경에서 구출하여 새로운 소망을 주십니다. “통회하고” 의 ‘다카’는 ‘짓밟다’에서 파생된 단어로, 단순히 뉘우치거나 회개한 자보다는 현재의 어렵거나 악한 형편으로 인해 짓밟힌 자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참조. 3:15; 53:5,10). “겸손한”의 ‘샤팔’은 원래 ‘낮다’, ‘낮아지다’, ‘가라앉다’를 의미하는 단어로, 사회적으로는 귀함과 대조되는 천함을, 신학적으로는 ‘자신을 높이는’ 교만에 대응하는 ‘자신을 낮추는’ 복종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공의 앞에 구원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의 파수꾼과 목자는 부패하고 무능하고(56:9-12), 사람들은 의인이 폭력에 희생당해도 아무 관심을 보이지 않고(57:1-2), 여호와를 잊고 높은 산에서 계곡에 이르기까지 도처에서 우상이나 섬기는데(57:3-13) 무슨 미래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께서 다시 진노하시는데 어떻게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의 의로운 심판을 견딜 수 있는 피조물은 없지만, 당신 백성의 피곤함(연약함)을 아시는 여호와께서 영원히 다투지는 아니하시고 끝까지 노하지는 아니하시기에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16; 참조. 60:10; 출 34:6; 렘 3:5). 유배를 포함한 현재의 절망적 형편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고발하시고 진노하신 결과였기에(47:6; 54:8; 64:4), 구원 약속도 이중적으로 주어집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이 당신의 고발과 진노를 버텨내지 못하고 쇠약해져서 결국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아시기에 계속 고발하거나 진노하지 않기로 결심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지으신 분께서 이스라엘의 한계(나약함)를 인정하십니다. ‘다투다’의 ‘립’은 원래 법정 다툼을 가리킵니다. 용서와 위로를 선포하시기 전에 여호와께서 지난 심판을 되돌아보십니다. 탐심의 죄악 때문에 화가 나서 그를 치셨고 얼굴을 가리고 노하였습니다(17). 유다의 멸망과 유배로 나타난 여호와의 진노와 징계는 이스라엘이 저지른 악 때문이었습니다. 탐심(베차 23.3)은 1차적으로는 물질적 이득으로(33:15; 56:11), 이를 위해 사람들은 폭력을 사용하거나 살인을 범하기도 합니다(렘 22:17). 탐심에 사로잡힌 자는 필연적으로 여호와의 계명을 무시하게 됩니다. ‘얼굴을 가림’은 관계의 단절로 심판을 의미합니다.

 

(3) 목적을 이루지 못한 여호와의 징계(17)

 

여호와의 심판은 의도한 목적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로 돌아오길 거절하고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갔습니다(참조. 53:6). 다시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도와 심판에 떨어질 위기에 처합니다. 이에 노하지 않기로 하신 여호와께서 “그의 길”을 보시고 이전과는 달리 반응하십니다. 죄악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무능력을 인정하고 이들의 절망적 형편에 개입하십니다.

 

(4) 고쳐주시는 여호와(18)

 

여호와께서 불치의 병을 고쳐 생명의 길로 이끌어주시고, 위로로 갚아주시고, 그 가운데 슬퍼하는 자들에게 입술의 열매를 맺어주십니다(18). “슬퍼하는 자들”은 여호와의 진노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를 모르는 자들이고, “입술의 열매”는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의미합니다. 병(진노)에서 신음하는 자들이 고침(구원)을 받고 감사의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받기만 하는 우상들과 달리 여호와께서는 감사할 수 있도록 조건도 마련해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백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배신을 일삼는 악한 마음을 고쳐주시기에 이스라엘이 찬양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5) 평강의 회복(19)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치료와 평강의 약속이 주어집니다(19). 불치의 병에 걸려 멸망의 길로만 내딛던 이스라엘이 여호와에 의해 값없이 치유함을 받고 평강을 누립니다. “가까운 데 있는 자”와 “먼 데 있는 자”는 각각 예루살렘과 민족들 가운데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평강(샬롬)은 모든 종류의 안녕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의사이신 여호와(출 15:26)에 의해 보장됩니다.

 

악인의 심판(20-21)

구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고,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모든 사람이 구원 얻기를 원하시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기회를 주고 기다리고 용서하여도 거치는 것을 제거하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요동치는 바다처럼, 자신과 공동체에서 평강을 앗아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20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21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20-21)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을 낮추십니다. 탐욕스러운 백성들을 심판하시고, 그들의 죄를 징계하십니다. 그러나 영원히 진노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을 낮추신 다음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운 심판과 죄인들을 향한 긍휼로 언제나 고통당하십니다.

 

(1) 요동치는 바다와 같은 악인(20)

 

치유와 평강이 모든 사람에게 약속되지만(19), 다 치유함을 받고 평강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악인은 그 물결이 오물과 진흙을 밀어 올리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요동치는 바다 같아서 그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악인은 자신도 평온함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악한 영향으로 공동체도 평강이 없게 타락시킵니다. 여기 악인은 “거치는 것”(14), 곧 우상들을 제거해버리지 않는 자들입니다(3-13a).

 

(2) 평강이 없는 악인(21)

 

여호와에게서 피난처를 찾는 자(13b),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15)는 여호와께 그 길의 고침을 받아 평안을 누리고, 여호와를 잊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는 끊임없는 두려움과 놀라움으로(11)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구원의 여망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상한 심령에 자비의 씨앗을, 절망의 진흙탕에 위로의 씨앗을, 혼돈과 불안으로 두려워하는 영혼에 평강의 씨앗을 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희망이고, 위로고, 생명이십니다. 다른 대상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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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57-01)


우상숭배의 어리석은 실상

이사야 56장 9절-57장 13절


 

관심을 어디에 두느냐가 우리의 사고와 행동 패턴을 결정합니다. 관심이란 어떤 것에 마음이 끌려 신경을 쓰거나 주의를 기울이는 상태를 일컫는데, 한 가지에 관심을 갖게 되면 다른 것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하게 됩니다. 그 결과 형성된 삶의 내용이 미래를 결정합니다.

 

  •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맹인이고 벙어리 개들입니다. 들짐승들(외적)이 양 떼를 노리고 우리를 넘어 들어오지만,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위기가 코앞에 닥쳐왔음에도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양 떼에게 위험을 알려주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삶을 즐기기에만 열심인 자들입니다. 지도자들의 무능력과 탐욕이 공동체를 다시 멸망의 위기로 네몹니다.

 

이스라엘의 부패한 지도자들(9-12)

신앙은 방향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떤 곳을 지향하느냐가 우리의 믿음을 좌우합니다. 좋은 신앙은 하나님을 지향합니다. 떠라서 세속적 욕망을 지향하는 사람은 좋은 신앙인이 되기 어렵습니다. 분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좋은 신앙인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9들의 모든 짐승들아 숲 가운데의 모든 짐승들아 와서 먹으라 10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11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12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마시자 내일도 오늘 같이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9-12)

 

하나님께 연합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생각과 삶의 길을 곧게 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들은 탐욕의 길을 걸으며 주님을 욕되게 합니다.

 

(1) 들짐승 초대(9)

 

여호와께서 들짐승에게 와서 먹도록 허락하십니다(9). 심판 선포보다는 위기 상황에 대한 묘사이며, 현재 형편이 파국적 재앙을 초래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함을 시사합니다.

 

(2) 눈먼 파수꾼들(10)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개들이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입니다(10). 적의 침입을 감시할 수 없고 보아도 짖지를 못합니다. 지도자들이 모두 무능력하고 무지해 위기를 인지하지 못합니다. “벙어리 개들”은 파수꾼-예언자를 조롱하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의 양 떼를 지키는 파수꾼-예언자는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도 않을뿐더러 맡겨진 일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따사로운 햇살에 코를 벌렁거리며 낮잠을 즐기는 개들과 같습니다.

 

(3) 몰지각한 목자들(11-12)

 

제 입에 들어가는 것만 따라다니는, 게걸스러워 만족할 줄 모르는 개들입니다(11; 참조. 미 3:5, 11). 이들은 “몰지각한 목자들”로 모두 제 길을 가며(53:6a) 제 이익만 추구합니다. 공동체의 안위를 책임진 자들이 제 몫을 챙기기에만 열심입니다. 술자리의 즐거움이 이들의 유일한 관심사입니다(12; 참조. 5:22; 22:13). 여전히 마실 술이 있기에 내일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내일은 더 즐겁고 기름진 주연을 즐길 수 있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경고 음성을 듣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파수꾼-목자들 때문에 재앙의 그림자가 공동체 위에 짙게 드리웁니다. 포로기 이후에도 지도자들의 탐욕과 무능력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의인의 죽음에 대한 탄식(57:1-2)

 

우상숭배는 단순히 사람이 만든 형상에 절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우상숭배는 외적 형태보다 내적인 동기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탐심이야말로 우상숭배라고 말합니다. 우상숭배의 현상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습니까?

 

1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진실한 이들이 거두어 감을 당할지라도 깨닫는 자가 없도다 의인들은 악한 자들 앞에서 불리어가도다 2그들은 평안에 들어갔나니 바른 길로 가는 자들은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리라(1-2)

 

탐심은 곧 우상숭배입니다. 탐욕에 이끌리는 사람은 현실을 보지 못합니다. 자기가 만든 세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의인들의 죽음을 보면서도 마음에 두지 않고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탐심에 눈이 어두워져 현실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1) 의인의 죽음에 무관심한 사회(1)

 

지도자들의 타락과 무능력이 공동체 전체를 오염시켜 일반 사람도 악에 무감각해집니다. 의인과 진실한 이들이 부당하게 죽어가지만 아무도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의인’은 여호와의 임박한 구원과 공의의 성취를 간절히 기다리면서 정의와 의를 실천하며 사는 사람을 가리키고(56:1), “진실한 이들”(안셰 헤세드)은 이웃에게 호의적 태도를 보이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정의와 의를 행하고 이웃에게 선을 베풀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죽어가지만 관심을 기울이는 자들이 없습니다. 위부터 아래까지 모두 제 유익만 추구하기에 사회 내에 불법과 불의가 일상화됩니다. 의인의 죽음은 억울한 희생 이상입니다. 실로 재앙/악에서 의인이 거둬 감을 당합니다.

 

(2) 평안에 들어간 의인(2)

 

의인은 한편으로는 부당한 폭력에 희생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을 통해 임박한 재앙에서 벗어나 조상들에게로 옮겨집니다. 여호와와 이웃에게 성실한 사람이 종교적-사회적 불의에 희생당한다는 점에서 의인의 죽음은 불행에 속하지만, 불의한 공동체가 필연적으로 맞게 될 재앙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의인의 죽음에는 구원의 성격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의인이 ‘악’(하라아) 때문에 죽지만, 그는 악의 필연적 결과인 ‘재앙’(하라아)에서 벗어나 ‘평안’에 들어갑니다. 의인은 죽음을 통해 땅에서의 고난과 억압에서 해방을 받습니다. 의인에게 약속된 평안은 ‘평화로운 죽음’이 아니라 평안을 누리는 장소와 관련한 것으로, 악인의 운명(21)과 대조하기 위해 선택된 표현입니다. 의인 조상들과 함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갑니다. “바른 길가는 자”(똑바로 걷는 자)는 의인의 삶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악한 자는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들고(사 59:8), 의인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잠 4:27) 곧장 나아갑니다.

 

이스라엘의 만연한 우상숭배(57:3-13)

습관적으로 거짓을 말하고 탐심이 내면에 범람하며, 어리석음이 우리 눈을 가릴 때, 우리는 영혼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자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만족과 기쁨은 하나님으로만 충족됩니다.

 

3무당의 자식, 간음자와 음녀의 자식들아 너희는 가까이 오라 4너희가 누구를 희롱하느냐 누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혀를 내미느냐 너희는 패역의 자식, 거짓의 후손이 아니냐 5너희가 상수리나무 사이,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음욕을 피우며 골짜기 가운데 바위 틈에서 자녀를 도살하는도다 6골짜기 가운데 매끄러운 돌들 중에 네 몫이 있으니 그것들이 곧 네가 제비 뽑아 얻은 것이라 또한 네가 전제와 예물을 그것들에게 드리니 내가 어찌 위로를 받겠느냐 7네가 높고 높은 산 위에 네 침상을 베풀었고 네가 또 거기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렸으며 8네가 또 네 기념표를 문과 문설주 뒤에 두었으며 네가 나를 떠나 벗고 올라가서 네 침상을 넓히고 그들과 언약하며 또 네가 그들의 침상을 사랑하여 그 벌거벗은 것을 보았으며 9네가 기름을 가지고 몰렉에게 나아가되 향품을 더하였으며 네가 또 사신을 먼 곳에 보내고 스올에까지 내려가게 하였으며 10네가 길이 멀어서 피곤할지라도 헛되다 말하지 아니함은 네 힘이 살아났으므로 쇠약하여지지 아니함이라 11네가 누구를 두려워하며 누구로 말미암아 놀랐기에 거짓을 말하며 나를 생각하지 아니하며 이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나를 경외하지 아니함은 내가 오랫동안 잠잠했기 때문이 아니냐 12네 공의를 내가 보이리라 네가 행한 일이 네게 무익하니라 13네가 부르짖을 때에 네가 모은 우상들에게 너를 구원하게 하라 그것들은 다 바람에 날려 가겠고 기운에 불려갈 것이로되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3-13)

 

우상 숭배자들은 부끄러움을 알지 못합니다. 나무 사이에, 골짜기 가운데, 높고 높은 산 위에서 음란한 우상 숭배를 행합니다. 글까지기에서 급류에 깎여 만들어진 매끄러운 돌은 어찌나 인가가 많은지 제비뽑기를 통해 얻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1) 여호와의 고발과 탄식(3-6)

 

우상숭배자들이 여호와 앞에 소환당합니다(3). “무당의 자식, 간음자와 음녀의 자식들”은 이들이 점과 관련한 이교적 풍습과 풍요제의에 빠진 자들임을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우상숭배로 감히 당신을 조롱하는 자들을 엄중하게 책망하십니다(4). “너희가 누구를 희롱하느냐 누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혀를 내미느냐.” 이들은 죄악과 거짓에 사로잡혀 사는 자들입니다. 우상숭배 가운데 먼저 풍요제의가 고발됩니다(5). “상수리나무”는 일종의 신목(神木)으로 주위가 울타리로 둘러싸인 정원 가운데 있었고, “모든 푸른 나무는 바알의 풍요제의를 고발할 때 등장하는 전형적인 표현으로 자주 높은 산과 언덕과 함께 언급됩니다. 사람들이 특별히 커다란 나무뿐만 아니라 산과 언덕에 있는 잎이 무성한 온갖 나무 아래서 풍요제의를 드립니다. “골짜기 가운데 바위 틈에서 자녀를 도살하는도다”(5b)는 어린아이 희생제사에 관한 고발입니다. 왕정시대 말엽에는 예루살렘 남서쪽을 두른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을 세우고 어린아이를 희생제물로 바쳤는데(렘 7:31; 19:2-13; 32:35), 여기서는 강바닥과 갈라진 바위틈에서 제사를 드립니다. 공개적 장소에서는 풍요제의가, 어둡고 은밀한 곳에서는 어린아이 희생제사가 벌어집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몫이었던 이스라엘이 죽은 우상의 몫이 됩니다(6).

 

(2) 우상숭배의 고발(7-10)

 

당신께 드려야 할 전제와 예물을 우상에게 바치는 패역함을 보고 하나님께서 탄식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위로하시려는 그분의 의지가 이들의 우상숭배로 난파 위기에 처합니다. 골짜기에서 높은 산과 성읍으로 옮겨가면서 우상숭배를 고발합니다. 이스라엘은 높은 산으로 올라가 음란의 잠자리를 펴고(7), 창기의 집처럼 치장한 집에서는 옷을 벗고 우상들과 몸을 섞고 욕정을 배설합니다(8). 골짜기와 산과 성읍을 가리지 않고 온 땅에서 우상들과 음란을 즐깁니다. 산당의 풍요제의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계속된 음란이었습니다. 성읍에서도 음란은 노골적이어서 집에서 내놓고 우상을 섬깁니다. 여호와의 구원사가 적혀 있어야 할 문과 문설주에는 창녀의 집임을 알려주는 표지가 자리를 차지합니다. “네 침상”과 “그들의 침상”은 이들의 성적 관계를 잘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우상들과 놀기 위해 잠자리를 넓게 마련하고, 이를 우상들의 잠자리로 내줍니다. “벌거벗은 것”으로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습니다. 옮거진 ‘손’은 ‘성기'의 완곡어법에 해당합니다. 9-10절은 죽은 자들의 신 몰렉 숭배에 대한 고발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드려야 할 기름과 향품을 몰렉에게 예물로 바치려고 사신을 스올에까지 내려보냅니다. 몰렉을 만나러 스올로 내려가는 길은 멀고도 위험한 여정이라 지쳤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기력을 회복해가며 끝까지 제 길을 갑니다.

 

(3) 여호와의 탄식과 심판선언(11-13)

 

여호와께서 우상숭배의 늪에 빠진 이스라엘이 거짓을 행한다고 책망하십니다(11). 이스라엘은 혼합주의에 빠져 많은 신, 특히 죽음이 두려워 몰렉을 섬기면서도 여호와께 순종한다고 거짓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땅의 역사를 경영하시는 여호와를 “생각하지” 않고 그분의 의지를 “마음에 두지”도 않습니다. 여호와를 떠나 우상을 섬긴 결과가 어떤 파국적 재앙을 초래할지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잠잠하신 여호와의 의도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해석했습니다. 그분의 침묵은 이스라엘에게 돌아올 기회를 주시려는 그분의 배려였는데, 이스라엘은 이를 그분의 무능력과 무관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들은 여호와를 경외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우상들을 찾아가 섬겼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반역에 언제나 침묵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분께서 고발인과 재판관의 자격으로 이스라엘의 잘잘못을 밝히 드러내 보이실 것입니다(12). 이스라엘이 내세우는 공의와 행실의 이면을 폭로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공의와 행실이 유익함을 가져다주리라 자신하겠지만, 이는 착각에 불과할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심판하실 때 이스라엘은 도움을 구해 부르짖겠지만,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13). 이스라엘이 “모은 우상들”이 참된 신이라면, 구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람은커녕 그 기운도 견디지 못하고 날려가 버리는 우상이 무슨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상에 의존하는 자들은 우상과 함께 멸망에 떨어지고, 여호와께 피신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고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습니다.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물으십니다. 무엇에 심취하여 사는지 궁금해하시고 때로 우려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관심하시는 것에 관심을 갖고, 무관심하시는 것에 무관심해집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심사가 일치할 때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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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56-01)


운명을 바꾸시는 하나님

이사야 56장 1-8절


 

드라마 속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살던 사람이 극적으로 운명이 뒤바뀌는 모습을 보면 흥미진진합니다. 주인공에게 자신을 투영하여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연출하시는 우주적 드라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야기로 들어가보시길 바랍니다.

 

  • 예언자는 여호와의 구원이 가까이 왔으니 정의와 의를 행하도록 권면합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거의 목전에 와 있습니다. 문 앞에 머문 그분의 구원과 공의가 온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려면 이스라엘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구원 약속이 성취될 수 있도록 이스라엘은 그분 약속에 소망을 두고 계명을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구원을 기다리는 자들의 삶(1-2)

신앙은 방향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지향하느냐가 우리의 믿음을 좌우합니다. 좋은 신앙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지향합니다. 따라서 세속적 욕망을 지향하는 사람은 좋은 신앙인이 되기 어렵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방향을 설정합니다.

 

1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도다 2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의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하지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와 같이 하는 사람, 이와 같이 굳게 잡는 사람은 복이 있느니라(1-2)

 

하나님께서는 ‘연합한 사람들’에게 대해 말씀하십니다. ‘연합’은 하나님과 동등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며 의존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연합한 사람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사람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며, 악을 행하지 여호와를 굳게 잡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십니다.

 

(1) 정의와 의를 실천하는 삶(1a)

 

바벨론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의 재건은 별 진전이 없었고 여호와의 통치도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약속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회의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이 구절은 지체된 구원에 대한 예언자의 답변입니다. 구원의 지체는 하나님의 능력 부재 때문이 아닙니다.

 

(2) 가까이 온 구원(1b)

 

이스라엘이 그분의 계명을 무시한 결과일 뿐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가까이 왔고, 그분의 공의는 곧 나타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정의를 지키고 의를 실천하면서 여호와의 가까이 온 구원과 공의가 그 모습을 다 드러내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정의와 의를 실천하며 사는 자에게 축복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여호와께 매달리는 자, 곧 언약을 준수하는 자는 생명을 얻기에 복 받은 자가 됩니다. 실천해야 할 정의와 의의 대표로 안식일이 언급됩니다. 아마도 안식일의 준수 여부가 눈으로 확인이 가능해서 선택된 것 같습니다.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안식일의 준수는 한편으로는 형식화를, 다른 한편으로는 세속화를 초래하기에 안식일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 중요해집니다.

 

(3) 실천하지 자의 행복(2)

 

안식일을 언약 공동체의 표징으로 여기고 지키는 자는 자기 손을 지켜 어떤 악도 행하지 않습니다. 개역개정이 둘 다 ‘사람’으로 옮긴 단어(2)는 여호와께서 창조하신 인간을 가리키는 ‘에노슈’와 ‘벤아담’입니다. 이스라엘은 물론 땅의 모든 사람이 정의와 의를 행한다면 축복의 대상에 포함될 수 있음을 시사해줍니다. 정의(미쉬파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질서에, 의(체다카)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좀 더 관심을 둡니다. 정의와 의는 언약에 대한 신실성과 하나님 백성의 연대성 가운데 구체적으로 실천됩니다. “나의 구원”과 나란히 나오는 “나의 공의”는 그분의 ‘구속’(해방)을 가리킵니다. 구원 약속에 신실하신 여호와께서는 은총의 구속 행위를 통해 당신 백성과의 언약관계를 회복하십니다.

 

이방인과 고자에게 주는 약속(3-7)

하나님께서는 적극적인 믿음을 가진 자, 최선을 다하는 신앙인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적극적인 믿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믿음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께 복을 받는 신앙인이 되십니다.

 

3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4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5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6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7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3-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언약 백성으로 삼으신 이유는, 이스라엘을 넘어 이방인까지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을 배척하고 차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이방인도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습니다.

 

(1) 이방인과 조자의 불만(3)

 

언약 백성의 범위가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확장됩니다.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과 “고자”의 불만이 극복됩니다(3).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외국인으로 여호와 신앙을 받아들인 자(개종자)입니다. 이들은 앞으로는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라고 말하지 않게 됩니다. 이전에는 여호와를 따를지라도 이스라엘 사람들과 구별되어 그 권리가 제한적이었지만, 이제는 모든 차이가 철폐됩니다.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여호와 공동체에서 불이익을 당하거나 축출되는 일이 없어집니다. ‘고자’의 불만도 다 사라집니다. 여호와를 따르는 고자는 더는 생명이 없는 “마른 나무”가 아닙니다. 그에게 영적 후손과 끊이지 않는 영원한 이름이 주어집니다. 마른 장작과도 같은 고자에게 생명의 축복이 약속되고 언약 백성의 권리가 주어집니다. 신명기 23:1에 따르면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합니다(참조. 레 21:18-21). 본문의 고자는 태생적이거나 사고로 고자가 된 이스라엘 사람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2) 고자에게 주는 말씀(4-5)

 

고자가 시민권과 종교적 권리를 보장받으려면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여호와의 안식일을 준수하고,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택하고, 그분의 언약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4). 첫 번째와 세 번째 조건은 서로 연결됩니다. 안식일 준수는 언약 공동체에 속했음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일종의 고백적 행위에 속합니다. 두 번째 조건에서 여호와께서 좋아하시는 일은 정의와 의의 실천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참조. 55:11). ‘여호와께서 좋아하시지 않는 것’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자들을 고발하는 문맥에 등장합니다(65:12; 66:4). 여호와께서는 당신께 속한 고자에게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5). “기념물(기념비)과 이름”은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를 의미합니다. 고자는 후손이 없기에 그 이름이 끊어질 수밖에 없지만, 여호와께서 이름을 기념비에 새겨 영원히 잊히지 않게 해주십니다. “내 집”은 성전을, “내 성(성벽)”은 예루살렘 성벽을 가리킵니다. 고자에게 예루살렘 공동체의 제의적 권리뿐만 아니라 시민권도 주어집니다. 여호와께서는 고자에게 종교적으로뿐만 아니라 세속적(사회적)으로도 예루살렘 공동체의 완전한 일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을 허락하십니다.

 

(3) 이방인에게 주는 말씀(6-7)

 

6-7절은 이방인들에게 주는 약속과 여섯 가지 조건의 말씀입니다. 마지막 두 조건은 고자의 경우처럼 안식일과 언약의 준수에 관한 것이고, 처음 네 조건은 지켜야 할 규정보다는 ‘공동체 구성원의 프로필’에 해당합니다. “여호와와 연합하여”는 ‘여호와께 속해 그분을 경외함’을, “그를 섬기며”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분께 제사 드림’을,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는 ‘다른 신들을 버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을, “그의 종이 되며”는 ‘종이 주인을 따르듯이 그분을 따름’을 의미합니다. 언약 백성의 일원이 된 이방인에게 제의와 관련한 약속이 주어집니다. 이방인이 인도함을 받는 거룩한 산은 예루살렘 성전이 자리한 시온 산을 가리킵니다. 한때 우상들의 제단에서 제사를 드렸던 이방인이 시온산에 있는 여호와의 제단에서 제사를 드립니다. 이들은 성전에서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고 구원의 기쁨을 맛봅니다. 여호와께서 이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넓은 문맥에서 이방인이 드리는 제사에 대한 호의적 평가는 이스라엘이 드리는 번제(61:8)와 희생(1:11; 57:7)에 대한 혹독한 비판과는 대조됩니다. 정의와 의의 실천이 없는 형식적인 제사(1)는 받지 않으십니다. 더 나아가 예루살렘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됩니다(참조, 왕상 8:41-43; 마 21:13). 여호와께서 예루실렘 성전을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으로 만드십니다. 성전이 기도의 집이 되면서 그 역할과 기능이 크게 변할 것입니다. 성전은 원래 제사 드리는 곳으로 기도는 부차적이었습니다. 제사 드리는 곳이기에 제사장 역할이 중요했고 제의에 참여하는 자의 역할은 미미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신앙 공동체가 이방인에게 개방되면서부터 예루살렘 성전도 이방인에게 문호를 개방합니다. 여호와께 속한 자는 누구나 성전을 찾아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정리하자면, 3-7절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혈통적-종교적 특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방인에게도 이스라엘 사람과 동일한 자격과 권리가 주어집니다. 이스라엘 사람처럼 이방인이 언약 관계 안에서 정의와 의를 행하면 언약 백성의 일원이 됩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의 전통적 경계가 무너지고 ‘여호와의 계명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이 하나님 백성에 속했는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쫓겨난 자들을 모으시는 여호와(8)

교회의 지도자들이 영적으로 각성할 때, 교회에 기도가 살아나고 기도가 풍성해집니다. 교회 안에 기도가 풍성해질 때 교회는 하나님의 의를 열매로 거둘 수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견고하게 세워질 것입니다.

 

8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시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8)

 

약속의 말씀에 앞서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들을 모으시는 주”로 소개됩니다(참조. 11:12). 여호와께서는 강대국의 폭력에 사방으로 흩어진 당신 백성을 잊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쫓겨난 자들을 예루살렘으로 모아들이는 것을 의무로 삼으십니다. “주”(아도나이)는 여호와께서 명령자이심을 보여줍니다. 명령자께서 쫓겨난 자들을 모으기로 하셨기에 그 약속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그분은 이미 예루살렘으로 모아들인 자들 외에 다시 더 모아들일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미 모은 백성”은 귀향한 유배민을 가리킵니다. 더 모아들일 자들은 이방에 흩어져 사는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이방인들 모두를 가리킬 수 있는데,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시는 주 여호와”는 전자의 입장을, 고자와 이방인을 하나님 백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현재 문맥은 후자의 입장을 지지합니다. 8절은 원래 독자적 말씀이었다가 나중에 현재의 자리에 놓인 것 같기에 이중적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 역사의 대하드라마를 연출하시는 분입니다. 허구가 아닌 실제이며, 우리의 운명이 걸린 중차대한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위대한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엮어가는 주인공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주께서 연출하시는 드라마에 좋은 배우로 출연해보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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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55-01)


이스라엘을 초대하신 하나님

이사야 55장 1-13절


 

많은 어려움을 겪을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을 의지할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찾으려 않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자포자기와 냉소가 만연합니다. 오늘날 교회에 염증을 느끼고 떠나는 가나안 성도들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좌절하지 않고 외칩니다.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애절한 부르심을 전합니다. 어떻게 응답해야 합니까?

 

  • 이사야 40-55장의 결론입니다. 예언자는 ‘목마른 자’에게 물가로 나아오라고, ‘돈 없는 자’도 와서 사 먹으라고 외칩니다. ‘양식이 아닌 것’에 돈을 쓰고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에 수고하는 자들에게 그는 ‘좋은 것’과 ‘기름진 것’을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먹으라고 초대합니다. 그는 피곤하게 사는 자들에게 목마름과 배고픔에서 단번에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도록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은총에 의한 언약(1-5)

하나님께서는 실망한 그의 백성에 항상 그의 나라로 부르심입니다. 그 초대는 척박한 현실만 보면 상상할 수 없는 약속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피조물이 자기를 만드는 하나님을 자기 논리 안에서만 하나님을 판단하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풍성한 은혜를 주십니다.

 

1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4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나니 5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1-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들을 회복할 것이니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나라가 얼마나 풍요롭고 영광스러운 나라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우상들은 아무것도 주지 못합니다. 다른 데서 우리를 만족하게 할 만한 것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1) 참된 양식(1-2)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소리쳐 물건을 파는 장사꾼처럼 와서 물과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외칩니다(1). 그러나 “돈 없이, 값 없이” 물건을 팝니다. 물건을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저 주기 위해서 외칩니다. 장사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풍성한 상을 차려놓고 손님을 초대하는 주인입니다. 사람들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애써 번 돈으로 양식을 사지만, 그 양식이 굶주림을 해소해주지는 못합니다(2). “양식이 아닌 것,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은 우상숭배를 가리킬 것입니다. 일부 바벨론 유배민은 이방 신들에게서 살길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 기름진 것”은 예언자가 선포한 구원의 말씀(약속)을 가리킵니다. 우상들이 주는 일시적 포만감에 빠져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말고, 예언자가 선포한 구원과 해방의 약속으로 갈증과 배고픔을 근원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할 때만 이스라엘은 현재의 절망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2)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헤(3-4)

 

유배민이 들어야 할 하나님 말씀의 구체적 내용, 곧 값없이 주어질 선물의 실체입니다. 3절과 함께 보면, “돈 없이, 값 없이”는 언약의 새로운 성격을 보여줍니다. 시내산 언약은 이스라엘에게 의무가 부과된 쌍무적 언약입니다(신 4:40; 5:33; 11:9; 25:15; 32:47). 시내산 언약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회개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시려는 언약은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돈 없이, 값 없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의무를 홀로 담당하시고, 언약 당사자인 이스라엘에게는 아무 의무도 부과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기에 결코 파기될 수 없는 “영원한 언약”이 되고, 일방적 보호 약속이기에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와 같습니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 범죄했을 때(삼하 11장; 24장) 그분께서 당신 은혜를 거두지 않으셨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부족이나 불순종이 새로운 언약의 유지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4절은 하나님의 은혜가 다윗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분은 다윗을 민족들에게 증인으로, 그들의 통치자와 명령자로 삼으셨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께 택함받은 왕으로서 통일왕국을 건설하고 주변 나라들을 굴복시키고 통치권을 확장했고, 민족들에게 여호와의 능력을 보여준 산증인이 됐습니다.

 

(3) 이스라엘을 영화롭게 하시는 여호와(5)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하셨던 것처럼, 이제 이스라엘을 들어 당신 영광을 온 땅에 과시하십니다(5). 그분께서 이스라엘의 수치와 유배에 종지부를 찍고 그를 영화롭게 하실 때 이스라엘과 민족들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역전됩니다. 이스라엘이 부르면 민족들이 달려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과 영화를 통해 온 세상에 여호와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하나님 말씀의 확실성(6-11)

종종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다고 교만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뭐가 부족해서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으려 하시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신 것은 모두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초청입니다.

 

6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8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10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11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6-11)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아는 것, 경험한 것 안에서만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인간은 앞날을 예측할 수도 없으며 존재 자체가 불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사유 방식과 범위를 뛰어넘어, 인간은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1)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6-7)

 

구원 시대가 돌아온 것을 아는 예언자는 청중에게 여호와를 찾으라고, 회개하고 그분께로 돌아오라고 권면합니다(6-7). 여호와를 찾는 일은 결단과 헌신뿐만 아니라 회개까지 포함합니다. 그분은 아무 때나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만남을 허락하셨을 때만 찾을 수 있습니다(참조. 호 5:6; 암 8:12). 여호와를 찾는 행위는 그분을 부르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능력과 선하심을 신뢰하는 자만이 그분께 도움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부르지 않아서 심판에 떨어졌습니다(43:22). ‘그분의 가까이 계심’은 기도의 동기이자 부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 약속입니다. 악하고 불의한 자는 자신의 길과 생각버려야 합니다. “악인”과 “불의한 자”는 여호와의 구원 계획을 거절하고 그분을 신뢰하지 않는, 자기각에 따라 자기 길을 가는 자를 가리킵니다. ‘돌아옴’은 근본적인 전환이며, 기존의 가치관과 인생관에서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악인이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음은 그분께서 긍휼과 용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긍휼은 자식의 과오를 뛰어넘고, 그분의 큰 용서는 자식의 수치 씻어줍니다. 그분의 긍휼에 근거한 용서로 그분과 이스라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심각한 균열이 극복됩니다.

 

(2)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나라(8-9)

 

8-9절은 “생각”과 “길”의 모티브를 받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절대 간격을 비유적으로 기술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사람의 생각과 길과 차원을 달리하는 것으로, 이 양자 사이의 간격은 하늘과 땅 사이의 무한한 간격과도 같습니다. 높이에 있어 하늘을 땅에 비교할 수 없는 것처럼 역사 경륜에 있어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상호보완적이지 않고 양자택일적입니다. 생각이 근본적으로 다르기에 계획을 실천하는 방법(길)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의 출발점은 이스라엘이 자기 생각과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과 길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읽자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수용하지 못하는 유배민을 향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구원을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이해하는 자들에게 고레스의 선택과 그를 통한 유배민의 해방과 민족들의 구원은 차라리 걸림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신학적 전통과 다르다고 하나님께 따지지 말고 그분의 생각과 길의 절대적 우월성을 인정하고 내맡겨야 한다. 그분 결정의 ‘의로움과 선하심’은 그분께서 주신 약속의 흔들리지 않는 토대이지 검토대상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 말씀의 확실성에 대한 믿음뿐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길은 공허해서 결실이 없지만,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그분 말씀의 능력에 힘입어 열매를 맺습니다.

 

(3) 반드시 결실하는 여호와의 말씀(10-11)

 

하늘에서 내린 비와 눈이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땅을 적셔 싹을 내고 자라게 해서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고 먹는 자에게 양식을 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입에서 나가는 그분의 말씀도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그분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고 사명을 완수합니다(10-11). 예언자가 선포한 그분의 말씀은 주로 미래의 예견, 즉 유배민의 귀환과 예루살렘의 회복에 관한 약속으로 그 성취가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그분 말씀에는 창조적-실천적 능력이 내재돼 있기에 반드시 그 보내진 목적을 이룹니다(40:8). 유배민의 거절이나 저항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당신 계획을 그대로 이루어 가십니다. 유배민은 자기 생각과 길을 포기하고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를 약속하시는 그분의 영원한 언약, 은총의 약속이 가져다주는 그분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합니다.

 

찬양(12-13)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신 것은 사람들이 자기 자랑을 늘어놓은 교만한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신 사람을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찾아서 영광을 돌리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나중으로 미루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당장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책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송은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12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13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기념이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12-13)

 

하나님께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만 모든 복이 있고, 형통과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보시길 바랍니다. 그곳에 기쁨과 평안, 그리고 노래와 손뼉 침이 있습니다. 주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곳에 참된 삶이 있습니다.

 

(1) 유배민의 안전한 귀향(12)

 

유배민이 바벨론을 떠나 귀환하는 것을 보고 자연도 함께 환호하며 손뼉을 칩니다. 유배민의 떠남(출발)은 구원 시대의 시작을 의미하기에 기쁨의 순간이고, 여호와께서 앞뒤를 지켜주며 인도하시기에(52:12) 그 여정은 평안한 길이 됩니다. 유배민은 시온에서 왕으로 통치하시는 여호와께로(40:9-11; 52:9-10) 인도함을 받습니다. 황폐한 산들과 언덕들이 유배민의 귀환에서 구원 시대의 도래를 보며 기뻐합니다. 산들과 언덕들, 모든 나무들이 기쁨으로 귀향민을 맞이합니다. 폐허가 된 땅이 이제 유배민의 귀향과 더불어 다시 생명과 축복의 땅이 됩니다. 가시나무와 찔레나무가 자라던 황무지가 변하여 잣나무와 화석류(도금양나무)가 자라는 기름진 산림이 됩니다.

 

(2) 가나안 땅의 축복(13)

 

13절의 “이것”은 앞에 나온 유배민의 귀향과 자연환경의 우호적 변화를 가리킵니다. 바벨론 유배민이 돌아와 복된 땅에 살게 되는 것이 여호와께 “기념”(영예)과 “영영한 표징”이 됩니다. 원래 ‘이름’을 의미하는 ‘셈’은 ‘영예’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59:19). 예루살렘의 함락과 유배로 더러워졌던 여호와의 이름에 다시 영예가 돌려집니다. 유배민의 해방과 가나안의 축복이 그분의 성실하심과 능력을 입증해주는, 곧 예언자가 선포한 구원 약속의 성취를 보여주는 표징이 됩니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백성이 사는 길은 하나님을 찾아 부르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위세에 주눅 들거나 체념하지 않고 희망의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아첨하고 순응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약속을 따라 광야로 나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에만 안전과 평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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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54-01)


구속받은 자들의 특권

이사야 54장 1-17절


 

장기화 되는 포로 생활에 백성들은 지쳐갔습니다. 회복의 여망은 사라져가고 암울한 두려움에 희망의 빛이 꺼져갑니다. 광풍에 요동하며 안위를 받지 못하던 자들에게 말씀하시는 희망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어려운 시대를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 아이를 낳지 못한 불임의 여인이, 산고도 겪어보지 못한 버림받은 여인이 자식을 갖는 것이 가능합니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여인의 운명에 개입하신다면 사정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분은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사라의 태를 열어 당신 약속을 이행하신 분이 아닙니까? 예루살렘의 재건과 번성에 관한 약속도 이와같이 성취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변함없는 예루살렘 사랑(1-8)

때로는 한 사람의 인생이나 한 교회를 보면서도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소망이 없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하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할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1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2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3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을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라 4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젊었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5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 6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받아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어릴 때에 아내가 되었다가 버림을 받은 자에게 함과 같이 하실 것임이라 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느니라 7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8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1-8)

 

바벨론에 초토화된 예루살렘은 임산할 수 없는 여인과 같았습니다. 그곳에서 생명이 태어날 것을 기대할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신다면 이루실 것입니다.

 

(1) 예루살렘의 번성(1-3)

 

1절에서 ‘너’는 시온/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시온을 수식하는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산고를 겪지 못한”은 시온을 임신할 수 없었던 족장의 부인들에 연결해줍니다. 자식이 없었던 사라(창11:30)와 리브가(25:21)와 라헬(29:31)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아이를 가질 수 있었던 것처럼 시온도 그분의 간섭으로 자녀들을 갖게 될 것입니다(1; 51:1-2). 시온은 현재의 비참한 처지에 절망하지 말고 약속에 신실하셨던 족장들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 안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홀로 된 여인”은 임신 능력이 없고 남편도 없는 여자를 가리킵니다. 현실적으로는 전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가능해집니다. 약속의 말씀이 명령형으로 주어집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약속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시온은 많은 자식이 새로운 가정을 꾸밀 수 있도록 공간을 충분히 마련해두어야 합니다(2).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이 성취돼 불임의 사라가 많은 후손을 본 것처럼 시온도 자녀의 축복을 얻을 것입니다. 자손이 많아져 사방으로 퍼져나가 황폐한 성읍에 정착하고 나라를 차지하게 됩니다(3). “좌우”는 여기서는 사방을, “퍼지며”는 영토의 확장보다는 인구의 증가를, “황페한 성읍들”은 예루살렘을 포함한 유다의 성읍들을(40:9; 44:26) 가리킵니다. “열방을 얻으며”는 무력에 의한 점령보다는 여호와의 구원과 공의가 이스라엘을 넘어 민족들에게로 확대될 것을 시사합니다(42:1, 6; 49:6; 참조. 창 12:3; 28:14).

 

(2) 수치에서 벗어나는 예루살렘(4)

 

고대세계에서 불임은 여인의 수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시온을 수치와 부끄러움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시온은 이제 생명력을 상실한 여자로 조롱을 당하지 않습니다. 이전의 수치와 치욕이 말끔히 잊힐 것입니다(4). 여기 ‘잊음과 기억함이 없음’은 죄사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이 시온에게 마련됩니다. “젊었을 때”는 가나안에 살던 왕정 시대를, “과부 때”는 모든 것을 상실한 유배기를 가리킵니다.

 

(3) 예루살렘의 남편 여호와(5-6)

 

완전한 용서는 예루살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그녀의 남편이 시기 때문입니다(5). 예루살렘은 여호와에 의해 그분의 아내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대한 독점적 권리와 책임을 갖고 계시며, 예루살렘의 실존은 철저하게 그분께 의존적입니다. 예루살렘의 구속자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해방과 번영을 통해 여호와의 능력이 온 땅에 알려지고 민족들이 그분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이제 별거기간은 끝났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소박맞은 젊은 시절의 아내인 양 다시 부르십니다(6). 여호와께서 시온을 신혼의 아내처럼 따뜻한 사랑으로 바라보십니다. 훼손된 결혼 관계가 회복됩니다.

 

(4) 일시적 별거(7-8)

 

시온은 이혼증서를 주고 내보낸 것이 아니라 “잠시” 버려졌을 뿐입니다(7). 여호와께서는 “큰 긍휼”로 시온을 받아들이실 것이다. 넘치는 진노 때문에 “잠시” 얼굴을 가리셨지만, “영원한 자비”로 긍휼히 여기실 것입니다(8). 그분의 진노는 훼손된 공의와 정의를 바로 세우시려는 그분의 부정적 응답에 속합니다. 그분의 진노가 일시적인 데 비하여 그분의 자비(헤세드)는 영원합니다. 시온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그 기간이 매우 제한적이지만, 시온의 구원은 값없이 주어지는 그분의 영원한 자비와 긍휼에 근거하기에 영원합니다.

 

화평의 언약(9-10)

이스라엘이 징계를 받은 것은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배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지 않고, 당신의 거룩한 언약 백성답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성실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는 분임을 기억합시다.

 

9이는 내게 노아의 홍수와 같도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하지 못하게 하리라 맹세한 것 같이 내가 네게 노하지 아니하며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 10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9-10)

 

하나님의 진노는 노아의 홍수처럼 무섭지만 오래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가 끝나고 나서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창수 같은 비가 내려도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1) 무조건적 약속(9)

 

바벨론 유배가 노아의 홍수에 비교됩니다. 심판보다는 심판 이후가 비교 대상입니다. 심판에서 구원받은 인류의 조상 노아에게 항구적인 보존 약속이 은총으로 주어졌던 것처럼(창 8:21; 9:11), 그분의 무조건적 약속이 버림받은 예루살렘에게 주어집니다(9). 여호와께서 심판에 떨어진 예루살렘에게 다시는 노하거나 책망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그분의 약속에 따라 노아 이후의 인류가 홍수의 위협에서 벗어난 것처럼 예루살렘도 멸망의 위협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2) 화평의 언약(10)

 

견고함과 영원함을 자랑하는 산과 언덕마저 물에 잠겨 사라지는 대홍수에서도 당신의 은혜를 입은 노아(창 6:8)를 지켜주셨던 것처럼, 심판에서 벗어난 예루살렘을 변함없이 지켜주실 것입니다(10). 중도에 거둬지지 않는 “영원한 자비”(8)로 긍휼히 여기시기에 그분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시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분의 자비와 긍휼이 토대가 되기에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않습니다(참조. 렘 31:31 이하; 겔 34:25; 37:26). 화평의 언약은 체결의 결과로 화평이 주어지는 언약을 가리킵니다.

 

새 예루살렘(11-17)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셔서 믿음을 갖게 하시지만, 동시에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도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이 걸어가는 인생길에는 고난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터널을 통과한 성도를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11너 곤고하며 광풍에 요동하여 안위를 받지 못한 자여 보라 내가 화려한 채색으로 네 돌 사이에 더하며 청옥으로 네 기초를 쌓으며 12홍보석으로 네 성벽을 지으며 석류석으로 네 성문을 만들고 네 지경을 다 보석으로 꾸밀 것이며 13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에게는 큰 평안이 있을 것이며 14너는 공의로 설 것이며 학대가 네게서 멀어질 것인즉 네가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며 공포도 네게 가까이하지 못할 것이라 15보라 그들이 분쟁을 일으킬지라도 나로 말미암지 아니한 것이니 누구든지 너와 분쟁을 일으키는 자는 너로 말미암아 패망하리라 16보라 숯불을 불어서 자기가 쓸 만한 연장을 제조하는 장인도 내가 창조하였고 파괴하며 진멸하는 자도 내가 창조하였은즉 17너를 치려고 제조된 모든 연장이 쓸모가 없을 것이라 일어나 너를 대적하여 송사하는 모든 혀는 네게 정죄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요 이는 그들이 내게서 얻은 공의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1-17)

 

예루살렘은 죄악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자격도 공로도 없는 예루살렘을 화려하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풍성한 분이며 구속의 공로는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새 예루살렘의 외적 모습(11-12)

 

예루살렘의 참담한 형편이 3중으로 기술됩니다(11a). ‘곤고한 자’는 여호와 외의 다른 곳에서 도움을 찾을 수 없는 자를, ‘광풍에 요동하는 자’는 광풍으로 원래 자리에서 쫓겨난 자, 곧 흩어지거나 유배당한 자를, “안위를 받지 못한 자”는 위로의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아직 온전히 회복을 경험하지 못한 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마침내 시온이 안위를 받습니다. 황폐해진 예루살렘이 화려하고 막강한 성으로 재건됩니다(11b-12). 벽돌 대신 청옥으로 성벽의 기초가 쌓이고, 성가퀴들은 홍보석으로, 성문들은 석류석으로, 성벽은 모두 보석으로 만들어집니다.

 

(2) 새 예루살렘의 내적 모습(13)

 

새 예루살렘의 자녀는 모두 여호와의 제자가 됩니다(13). ‘교훈을 받다’는 배움의 지적 활동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준수도 포함합니다. 구원받은 예루살렘 주민들은 여호와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분 말씀에 따라 살아갑니다. 생명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들에게 “큰 평안”이 주어집니다. 생명과 구원의 지속적 상태를 의미하는 평안(샬롬)에는 영적 번영과 물질적 번영이 모두 주어집니다.

 

(3) 공의가 회복된 새 예루살렘(14)

 

예루살렘이 공의로 굳건하게 세워지기에 다시는 주변 나라들에게 억압과 위협을 당하지 않습니다(14). 이 평안과 공의가 학대와 두려움을 멀리 쫓아냅니다. 공의는 구원을 의미하지만, 13절에 따르면 윤리적 차원도 포함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고 예루살렘의 자녀들이 그분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며 도덕적 윤리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게 됩니다. 예루살렘을 외적-내적으로 아름답게 회복시켜주신 여호와께서 지속적인 보호도 약속하십니다.

 

(4) 안전하게 보호받는 새 예루살렘(15-17)

 

백성을 바벨론의 손에 넘기셨던 여호와께서 다시는 예루살렘을 공격하도록 민족들을 부추기지 않으실 것입니다(15). 앞으로 적이 예루살렘을 공격할지라도 그것은 그분 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너로 말미암아 패망하리라”는 변화된 예루살렘의 지위를 보여줍니다. 진노의 대상에서 보호의 대상으로 바뀌었기에 예루살렘을 침략하는 자들은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들이 되며, 그들은 멸망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무기를 만드는 장인과 무기를 사용하는 전사가 모두 여호와의 피조물로 그분의 통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16). 강력한 무기와 용맹한 전사가 전쟁의 향방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겉모습에 불과합니다. 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호와께서 지배하십니다. “파괴하며 진멸하는 자”는 특정 대상보다는 전사의 기능을 묘사하는 일반적인 언급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보호 앞에 침략자들의 모든 무기는 무용지물이 됩니다(17). 대적이 때로는 혀를 사용해서 공격하겠지만, 공의로 굳건하게 세워진 예루살렘에 의해 정죄를 당할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 나온 구원 약속을, “여호와의 종들”은 13절에 나오는 예루살렘의 자녀들을, “기업”은 상속재산으로 받을 몫을 가리키고, “내게서 얻은 공의”는 여호와께서 주시는 구원 또는 승리를 의미합니다.


백성의 희망을 무력화하기 위해 어둠의 권세가 깃든 연장은 쓸모없어질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평화를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시대가 불안하고 두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희망을 버린다면 더 두려울 것입니다. 약속을 붙들고 살면 서광이 비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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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53-01)


지극히 존귀하나 멸시받은 종

이사야 52장 13절-53장 12절


세상은 죄를 용서받는 길을 알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죄인이 용서 받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다양한 선행과 고행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힘으로는 죄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성경의 대답은 ‘고난 받으신 메시아를 믿는 것’입니다.

 

  • 네 번째 여호와의 종의 노래입니다. 낮아졌던 종이 여호와에 의해 높임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종의 외모에 걸려 종에게서 여호와의 능력을 볼 수 없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종은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은 자로 간주되었습니다. 구원과 생명의 말씀을 전하기에 외적으로 가장 부적격한 자가 여호와께서 보낸 그분의 종이었습니다.

 

높임 받는 여호와의 종(13-15)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강한 권능으로 열국을 결박하고 심판하며, 이스라엘을 단번에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는 너무도 약한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고, 사람들 앞에서 고난을 당했습니다. 이사야는 메시아의 몰골의 사람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상상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13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14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15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13-15)

 

여호와의 종은 ‘형통하는’ 즉 성공하는 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는 높이 들리고 지극히 존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많이 상한 모습입니다. 여호와의 종은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고난을 받아 상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하는 사역을 감당합니다.

 

(1) 하나님에 의한 종의 인정(13)

 

여호와께서 종을 “내 종”이라 부르시며 그의 미래에 관해 이중적으로 말씀하십니다(13). 종의 사역이 인정받을 것입니다. 헛수고한 것처럼 보이지만(49:4) 그가 뿌린 씨앗은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또한 종은 마침내 높임을 받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멸시당한 당신의 종을 최고의 위치로 높이셔서 영화롭게 하십니다(참조. 빌 2:9). 종은 사람들의 눈에는 실패한 인생이지만, 여호와의 눈에는 성공적으로 사명을 완수한 인물입니다. 시점이 미래에서 과거로 옮겨집니다.

 

(2) 종의 망가진 외모(14)

 

사람들이 종의 외모를 보고 놀라고 얼굴을 돌렸습니다(14). 종은 사람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망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처럼 보였습니다. 신의 진노 아래 있는 자였기에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화를 자초할 수 있었습니다. 시점이 다시 미래로 바뀝니다. 종의 미래적 영광이 과거의 수욕과 대조됩니다.

 

(3) 민족들의 놀람(15)

 

‘많은 사람’에 의해 하나님의 저주받은 자로 여겨졌던 종이 ‘많은 민족들’에 의해 인정을 받습니다(15). 놀랍게도 이스라엘의 거절이 종의 사역을 세계사적으로 넓혀줍니다(49:6). 민족들과 왕들이 종이 행한 일을 깨닫고 다 놀라고 침묵할 것입니다. 종의 고난과 죽음에서 하나님의 구원 의지와 영광을 볼 것입니다. 멸시와 고난을 당했던 종이 왕들의 왕으로 높임을 받을 것입니다.

 

종에 관한 공동체의 고백(53:1-11a)

예수님께서 못과 창에 찔리실 때 우리의 죄와 허물은 용서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우리도 함께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죄의 대가는 영과 욱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대신해 십자가를 지셨기에 죄가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죽으심이었고, 모든 인류가 함께 죽는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1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10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11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1-11a)

 

보통 이방 나라에서는 외모가 탁월하고 풍채가 좋은 자가 왕으로 인정받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여호와의 종은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아름다운 것이라고는 없는 사람입니다. 멸시를 받고 사람들로부터 귀히 여김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1) 잘못을 고백하는 공동체(1)

 

1절부터 화자가 여호와에서 ‘우리-공동체’(의 대표인 예언자?)로 바뀝니다. 화자 “우리”는 15절의 민족들이 아니라 (후에 종을 인정하게 된 일부) 이스라엘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들었지만(참조․ 42:1-4; 49:16; 50:4-9) 깨닫지 못한 무지를 인정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팔(능력)이 전혀 볼품없는 인물에게 나타났음을 늦게야 깨닫습니다.

 

(2)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종(2-3)

 

2-3절은 사람들이 종을 멸시한 원인이 그의 외적 모습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좋은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새순처럼 태어날 때부터 볼품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모양, 풍채, 외모(아름다운 것)’는 생명의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초라한 몰골을 하여 흠모할 만한 구석이 없었습니다. “풍채”의 ‘하다르’는 왕의 영광을 기술할 때 사용됩니다(2:10,19,21; 35:2; 63:1). 종은 외모만 초라하지 않고 고통과 질병에도 시달렸습니다. 그에게는 시선을 끌 만한 구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의 표지를 몸에 지니고 사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인 듯 보이는 자가 그분의 구원을 선포했기에 그를 향한 무시와 멸시는 당연했습니다.

 

(3) 종의 대속적 고난(4-5)

 

그러나 4-5절에서 ‘우리’는 종에 관한 자신들의 무지와 과오를 시인합니다. 종의 질병과 고통이 하나님의 구원 의지에서 기인했음을 깨닫습니다. 전에는 종의 병과 고통을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로 보고 그를 멀리하고 멸시했는데 뒤늦게 그가 받은 징벌이 도리어 자신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종은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 때문에’ 찔리고 상함을 입었습니다. 종의 고난은 폭력에 의한 약자의 희생이 아닌, 평화와 치료를 주기 위한 대속적 희생이었습니다. 종이 질고와 슬픔을 대신 짊어지고 고난을 받음으로써 ‘우리’가 죄에서 놓임을 받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종의 고난과 거절당함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실천하는 길이었습니다. 종의 상처가 치명적이었음을 시사해주는 “찔림”과 “상함”은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백성에 의한 멸시와 영적 고통도 포함합니다.

 

(4)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6-7)

 

6-7절은 양의 비유를 사용해 종의 죽음이 자발적-대속적이었음을 알려줍니다. ‘우리 모두’는 길 잃은 양처럼 각자 자기 길을 갔습니다. 참된 목자이신 여호와의 인도를 거절하고 자기 생각과 판단에 따라 멸망의 길을 갔습니다. 여호와께서 종의 고난과 죽음의 궁극적 원인이셨습니다. 죄로 파괴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습니다. 종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이 여호와의 구원 의지에 속함을 알기에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난과 죽음의 부당함에 항거하거나 피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멸시와 폭력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겼습니다. 종의 고난은 죽음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5) 종의 부당한 죽음(8-9)

 

종은 사법적 폭력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종의 죽음이 부당했지만, 아무도 그의 죽음에 관해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8). 그의 죽음을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의 마지막으로 당연시하였기에 그의 고난이 자신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볼 이유가 없었습니다. 해방과 구원을 선포한 종이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생명의 땅에서 잘려 죽음에 넘겨졌습니다. 폭력과 거짓을 행한 적이 없었지만, 종은 죽어서 “악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9). 살아서는 하나님의 저주받은 자로 고난을 당했던 종이 불의한 재판 끝에 중죄인의 판결을 받고 처형당해 죄인들이 묻히는 곳에 묻혔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무덤에 묻힐 때까지 종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모두 버림받았습니다. 다소 돌출적인 표현인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는 무슨 뜻입니까? “부자”는 여기서 “악인들”과 동격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들이 예언자들이 고발한 고리대금업자들이나 사회적-정치적 지위를 남용해 부를 축적하는 자들인지 혹은 단순한 부자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죽은 종의 무덤이 죄인들 가운데 마련됐다는 점입니다.

 

(6) 종의 대속적 죽음(10-11)

 

지금까지 종의 삶을 되돌아보며 경험을 전하던 화자가 10-11a절에서는 앞을 내다보며 말합니다. 이제 그는 깨달아 알게 된 종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선포합니다. 종의 고통과 질병과 부당한 죽음은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좋은 여호와께 드려지는 속건제물이었습니다. "속건제물”의 ‘아샵’은 원래 ‘보상’, ‘배상’을 의미하는데, 소유권을 가진 사람의 권리가 훼손당했을 때 드려지는 희생 제사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범한 잘못(죄)을 해결하기 위해서 보상이 필요했고, 종은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자신을 속건제물로 드렸습니다. 죽은 종이 오래 살면서 많은 후손을 본다는 말은 종의 제사가 여호와께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주는 비유적 언급입니다. 종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구원과 생명이 주어집니다. 종을 통해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구원 계획이 성취되고, 결실을 보지 못했던 종도 자신의 사역이 구원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호와에 의해 인정받는 종(53:11b-12)

하나님의 메시아 사역은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기적,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가 전제되지는 않고 서는 이해할 수 없는 예언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의 시대에 이미 초상식, 초윤리, 초자연적인 구원의 역사를 준비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구원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예전부터 준비하시고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11b…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12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11b-12)

 

여호와의 종이 이처럼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신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선하신 하나님께서 이런 익울한 일을 자기 종에게 요구하실 수 있는가 싶어질 정도입니다.

 

(1) 종의 성공적 사역(11b)

 

11절의 두 번째 문장부터 화자가 여호와로 바뀝니다. 내용상 5-6절의 요약에 해당합니다. 저주받은 자로 살다가 죄인으로 죽은 종이 여호와에 의해 “나의 의로운 종”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종이 저들의 죄악을 짊어짐으로써 많은 사람이 의로움을 받습니다. 종은 사람들을 죄악에서 구하려고 자발적으로 희생의 길을 간 자였습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주인에게 철저하게 순종한 종에게 상급이 주어집니다.

 

(2) 인정받는 종(12)

 

여기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는 이해가 어렵습니다. 종국에는 종이 왕들의 왕으로 높임을 받는데(52:13) 그가 자신의 대속적 고난과 죽음에 힘입어 구원받는 자들과 몫을 나눈다는 것은 서로 충돌됩니다. 아마 전쟁에서 승리하고 전리품을 나누는 전통을 비유적으로 활용한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명을 완수한(승리한) 종에게 많은 몫을 주실 것입니다. “몫”, “탈취한 것”은 아마도 이스라엘을 포함한 민족들(52:15)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여호와의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 여호와의 구원이 ‘땅 끝까지’ 미치도록 ‘이방의 빛’으로 세움을 받은 (49:6) 종에게 주는 최상의 보상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은혜는 인간의 상식이나 윤리, 그리고 자연법칙을 모두 뛰어넘는 기적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사실만 생각해도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귀하며 놀라운 일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죽기까지 순종하겠노라 고백할 수 있는 이유는 이처럼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그 기적을 묵상하며 감사의 기도와 찬양을 올려드리는 하루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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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52-01)


내 백성아! 너희 영광을 알라

이사야 51장 17절-52장 12절


 

하나님의 구원은 불의와 부정한 삶으로부터 벗어나 정결한 삶을 살아가라는 초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까? 여전히 과거의 삶에 발목 잡힌 채 종의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가 부족한 것은 무엇입니까?

 

  • 여호와께서 손에 쥐어주신 분노의 잔을 마시고 취해 땅바닥에 쓰러진 예루살렘에게 기쁜 소식이 주어집니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의 손에서 분노의 잔을 거두기로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9) 하고 간구하는 시온에게 예언자는 ‘여호와의 손에서 그의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17)하고 용기를 내도록 격려합니다.

 

분노의 잔(17-2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 것이 각각 다릅니다. 하찮은 벌레에 기겁하는 사람이 있고, 궁핍함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으며,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를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면 두려움의 대상을 재정립해야 합니다. 과연 믿음의 사람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17여호와의 손에서 그의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네가 이미 비틀걸음 치게 하는 큰 잔을 마셔 다 비웠도다 18네가 낳은 모든 아들 중에 너를 인도할 자가 없고 네가 양육한 모든 아들 중에 그 손으로 너를 이끌 자도 없도다 19이 두 가지 일이 네게 닥쳤으니 누가 너를 위하여 슬퍼하랴 곧 황폐와 멸망이요 기근과 칼이라 누가 너를 위로하랴 20네 아들들이 곤비하여 그물에 걸린 영양 같이 온 거리 모퉁이에 누웠으니 그들에게 여호와의 분노와 네 하나님의 견책이 가득하도다 21그러므로 너 곤고하며 포도주가 아니라도 취한 자여 이 말을 들으라 22네 주 여호와, 그의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네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비틀걸음 치게 하는 잔 곧 나의 분노의 큰 잔을 네 손에서 거두어서 네가 다시는 마시지 못하게 하고 23그 잔을 너를 괴롭게 하던 자들의 손에 두리라 그들은 일찍이 네게 이르기를 엎드리라 우리가 넘어가리라 하던 자들이라 너를 넘어가려는 그들에게 네가 네 허리를 땅과 같게, 길거리와 같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17-23)

 

예루살렘의 거민들은 하나님께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9)라고 기도했는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도리어 예루살렘에게 “깰지어다 깰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잠드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루살렘과 그 안에 살던 자들이 다 비울 정도로 마셔 취해서 잠든 것입니다.

 

(1)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17-20)

 

예언자는 여호와의 손에서 받아 마신 분노의 잔 때문에 정신을 잃고 멍청해진 예루살렘에게 깨어 일어나도록 권면합니다(17). 예루살렘은 스스로 힘을 내서 절망과 무기력의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용기를 내서 예기치 못했던 구원의 소식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일어나다’는 예루살렘이 땅바닥에 쓰러져 있음을 전제합니다. 여호와의 손은 세상의 창조(45:12; 48:13)와 역사(41:20; 49:22) 가운데 계시된 그분의 압도적인 능력을 가리킵니다. 분노의 잔은 심판의 표상으로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잔은 운명의 피할 수 없는 결정을 상징합니다(참조. 렘 49:12; 합 2:16; 시 75:8). 여호와께서는 범죄한 예루살렘에게 분노가 가득 찬 잔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분노의 잔을 흠뻑 마신 예루살렘도 망연자실하여 땅바닥에 쓰러졌습니다. 땅바닥에 쓰러진 예루살렘은 손을 붙잡아 이끌어줄 자 하나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됐습니다(18). “너를 인도할 자”는 왕이나 통치자보다는 예루살렘의 자녀, 곧 주민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에 닥친 “두 가지 일”은 “황폐와 멸망”과 “기근과 칼”을 가리킵니다(19). 예루살렘은 파괴돼 황폐해졌고, 주민은 칼과 기근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동정과 위로의 말도 찾지 못할 정도로 재앙은 참혹하고 칠제했습니다. 사냥꾼이 쳐놓은 그물에 걸린 영양처럼 여호와의 분노의 그물에 사로잡힌 예루살렘 주민들은 실신하여 길모퉁이에 쓰러져 죽음을 기다렸습니다(20). 하나님의 분노와 견책이 예루살렘의 아들들에게 가득하였기에, 이들이 파국적 재앙을 피할 길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2) 격려의 말씀(21-23)

 

여호와의 분노에 취해 절망적 형편에 놓인 예루살렘에 구원의 말씀이 선포됩니다(21). 예루살렘에게 당신 분노의 잔을 마시도록 명령하셨던 여호와께서 이제 그 잔을 예루살렘의 손에서 거두어 다시는 마시지 못하게 하십니다(22). 심판에서 구원받은 예루살렘이 또다시 심판에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억울함을 풀어주다’는 원래 ‘변호해주다’를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당신 백성을 위해 소송해 주시는 분입니다. 예루살렘이 받아 마셨던 분노의 잔이 예루살렘을 괴롭히는 자들의 손에 주어집니다(23). 천하 낮은 자리로 떨어졌던 예루살렘의 구원과 그 대적들의 멸망이 대조됩니다. 위로자요 변호자이신 여호와께서 종의 지위로 전락한 당신 백성의 운명에 개입하셔서 이들을 구해주기로 하십니다.

 

예루살렘의 해방(52:1-6)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는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은 놀라운 권세입니다. 그런데 이런 능력과 권세를 가진 자들이 정작 자기들의 손에 얼마나 강력한 힘이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에 주신 힘이 얼마나 강하며 우리의 지위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알려줍니다.

 

1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낼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아니한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라 2너는 티끌을 털어 버릴지어다 예루살렘이여 일어나 앉을지어다 사로잡힌 딸 시온이여 네 목의 줄을 스스로 풀지어다 3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 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 4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전에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에 거류하였고 앗수르인은 공연히 그들을 압박하였도다 5그러므로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까닭 없이 잡혀갔으니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하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을 관할하는 자들이 떠들며 내 이름을 항상 종일토록 더럽히도다 6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을 알리라 내가 여기 있느니라(1-6)

 

하나님의 존재는 언제나 신비입니다. 모든 면에서 완뱍하고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시며 안타까워 하십니다. 이것은 철학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신이 아닙니다. 성경 속의 하나님께서는 아픈 자녀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1) 권면(1-2)

 

예루살렘은 용기를 내야 합니다(1-2). 구원을 약속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에 의존해 힘을 내야 합니다. 이방 압제자의 발바닥에 짓밟힌 시온은 이제 흙먼지를 털고 땅바닥에서 일어나 보좌에 앉아야 합니다. 포로 된 시온은 자기 목의 굴레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아름다운 옷”은 예루살렘의 지위와 조건을 보여줍니다. 땅바닥에 떨어졌던 영화가 다시 주어집니다. 구체적으로는, 예루살렘을 떠나셨던 여호와께서 다시 돌아오십니다(7-8). 여호와께서 돌아오신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 이기에 “할례 받지 아니한 자와 부정한 자”, 곧 이방인은 시온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2) 구원 약속(3)

 

이스라엘은 “값없이” 팔렸기에 “돈 없이” 구원을 받습니다(3). 이스라엘의 속량은 이들의 죄악과 배역함 때문에 바벨론에 넘겨주었던(50:1) 당신 소유를 되찾아 오는 여호와의 권리 행사에 속합니다. 소유권의 완전 이양이 아니라 일시적 사용권만 넘긴 것이기에 되찾을 때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3) 역사적 회고(4-6)

 

여호와께서는 땅의 세력에 맞서 이스라엘에 대한 당신의 소유권을 확정적으로 주장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처음에는 애굽으로 내려가 나그네살이를 했고, 후에는 앗수르의 억압에 시달리다가 지금은 사로잡혀 바벨론에서 종살이를 하지만, 이스라엘은 변함없이 여호와께 속한 그분 백성입니다. 그분 백성이 까닭 없이 붙잡혀 와서 바벨론 통치자들에게 조롱을 당하고, 그분 이름이 날마다 멸시를 당하는 상황에서 여호와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더럽혀진 당신 이름을 위해 침묵을 끝내시고 역사에 개입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영예를 지키시기에(그러므로) 그분 백성은 해방을 경험합니다. 구원을 받는 날 이스라엘은 역사를 경영하시는 분이 여호와이심을 알게 됩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시는 왕 여호와(52:7-10)

누군가가 좋은 소식이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가슴이 설렐 것입니다. 그 좋은 소식이 승진, 합격,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온 편지, 응원하는 선수의 금메달 소식 등등 그 무엇이든 비교할 수도 없는 좋은 소식이 하나님으로부터 전해져 옵니다.

 

7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8네 파수꾼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보리로다 9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내어 함께 노래할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 10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의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땅 끝까지도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7-10)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면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기에 요셉은 고난 속에서도 형통했고,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알 때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1)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령(7)

 

예언자는 달려오는 전령을 보고 기쁨을 노래합니다(7; 나 1:15). 그는 산등성이에 나타난 전령의 가볍고도 재빠른 발걸음에서 그가 가져오는 소식의 내용을 알아챕니다. 간절히 기다리던 기쁜 소식이 마침내 도착했음을 직감합니다. 전령이 가져오는 “좋은 소식”은 ‘평화와 복된 좋은 소식과 구원’에 관한 소식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여호와의 통치’입니다. 예루살렘에게 진노의 술잔을 마시게 하셨던 여호와께서(51:17,20) 승리자로 돌아오셔서 왕으로 통치하십니다(참조. 40:3-5, 9-11).

 

(2) 시온 파수꾼들의 환호(8)

 

망루에서 파수를 보던 자들이 왕의 도착을 알리기 위해 경쾌하게 산을 넘는 전령을 보고 환호합니다(8). 이들은 꿈에 그리던 왕의 귀환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온 것을 보며 기뻐 다 함께 목소리를 높여 외칩니다. 파수꾼들은 이스라엘의 왕이신(41:21; 43:15; 14:6)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시는 놀라운 사건을 직접 목도합니다.

 

(3) 예루살렘의 기쁨(9)

 

그는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 곧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에게 소리 높이 기쁨의 환성을 외치라고 권면합니다(9). 기쁨의 근거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기]” 때문이다. 40:1에서는 천상적 존재에게 ‘나의 백성’을 위로하라고 명령하신 여호와께서 여기서는 직접 당신 백성을 위로하십니다. 예루살렘의 구원이 위로의 구체적 내용이 됩니다. 예루살렘의 구원에 세계사적 지평이 주어집니다.

 

(4) 하나님의 구원을 목도 하는 민족들(10)

 

여호와께서 “그의 거룩한 팔”로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민족들로 이를 목격하게 하십니다(10; 51:5). 온 땅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봅니다. 구원의 문이 모든 민족에게 개방되는 45:22과 49:6의 말씀과 달리, 여기서는 민족들이 예루살렘의 구원 가운데 계시된 그분의 능력을 보는 목격자가 됩니다.

 

출바벨론(52:11-12)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건, 우리의 영적 수준이 어떤 하건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통치하시며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십니다. 이 사실을 믿는 다면 우리의 입에서도 찬송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11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에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이여 스스로 정결하게 할지어다 12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서 호위하시리니 너희가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도망하듯 다니지 아니하리라(11-12)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 황폐한 예루살렘에 기쁜 소리가 나며 모두 함께 노래할 것입니다. 고통 속에 있을 때 더욱 여호와를 찾아야 합니다. 고난 받는 백성보다 때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더욱 아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 떠날지어다(11)

 

바벨론을 떠나는 유배민은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고 몸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11). “거룩한 성”(1)으로 돌아가는 길이기에 바벨론에서 경험하고 습득한 모든 더러운 것을 내려놓고 떠나야 합니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을 반드시 제사장들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결과 관련해서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는 거룩한 집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참조. 출 19:6). 출바벨론과 출애굽 간에는 일부 다른 점이 있습니다.

 

(2) 앞뒤에서 지켜주시는 여호와(12)

 

애굽을 탈출할 때는 두려움에 떨며 급히 떠나야 했지만(출 12:11; 신 16:3), 바벨론을 떠날 때는 도망을 치듯 떠나지 않아도 됩니다(12).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멸망시켜 유배민의 귀향을 막지 못하게 합니다. 실제 바벨론을 멸망시킨 바사 왕 고레스가 유배민의 귀환을 공식적으로 허락합니다. 출애굽 때는 하나님의 사자(출 14:19-20; 23:20; 33:2) 또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출 13:21-22; 신 1:30, 33)이 앞과 뒤를 옮겨가며 이스라엘을 지켜주었고, 출바벨론 때는 여호와께서 행렬의 앞과 뒤에서 인도하고 보호하십니다. 바벨론을 떠나 돌아오는 길이 더 안전하게 보호를 받습니다.


구원은 상호관계에서 완성됩니다. 구원의 손을 내미실 때 잡아야 하며, 부르실 때 응답해야 합니다. 거룩한 옷으로 갈아입고, 하나님 나라의 합당한 시민으로 살아갈 채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따라서 자유는 방종과 거리가 멉니다. 방종은 억압과 속박, 부정한 땅으로의 희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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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51-01)


학자의 혀를 주신 하나님

이사야 50장 4절 – 51장 8절


 

교회가 사회로부터 신뢰를 잃고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원인은 무엇입니까? 가르침은 넘쳤으나 아픔과 하소연에는 귀를 막았고, 원론적인 답만을 제시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여호와의 종이 고난 중에도 신실하게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습니까?

 

  • 자신을 여호와의 제자로 소개하는 ‘나’는 말씀을 선포하는 중에 참기 어려운 모욕과 수치를 당하지만, 좌절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주어진 사명을 수행합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의로움을 인정해주실 것을 확신하기에 그는 사람들의 핍박에 맞서 싸우거나 불평하거나 피하지 않고 그분께서 아침마다 주시는 말씀을 선포합니다.

 

여호와의 종의 셋째 노래(4-9)

신앙인들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죄인이건 의인이건 누구든지 사용하실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시기에 기뻐하실 만한 사람이냐 아니냐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쓰실 때 기뻐하실 만한 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4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7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8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9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4-9)

 

이사야 50장 3절까지는 이스라엘 배역하여 팔린 상태에 있다는 사실이 전개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이제 종의 노래가 등장합니다. 이 종의 노래는 흑암 중에는 있는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존재이며 백성들의 배역함과 맞물려 종의 사역에는 고난이 수반된다는 알 수 있습니다.

 

(1) 스승과 제자의 관계(4)

 

본문에서 ‘나’는 자신과 주 여호와의 관계를 '스승-제자’로 언급합니다(4). 여호와께서 종에게 준 “학자들의 혀”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전하는 제자들의 혀’를 의미합니다. 제자처럼 말할 수 있게 스승이신 여호와로부터 가르침을 받습니다. 종은 여러 면에서 예언자를 뛰어넘습니다. 필요할 때 계시를 받는 예언자와 달리 종은 매일 ‘아침마다’ 여호와께 가르침을 받습니다. 제자가 스승에게서 계속 교육을 받는 것처럼 종은 여호와에게서 매일 가르침을 받습니다.

 

(2) 자발적 순종(5-6)

 

여호와에 의해 귀가 열린 종은 자발적으로 순종합니다(5). 여호와의 음성에 귀를 막고 뒤로 물러났던 이스라엘과 달리 종은 주저하지 않고 사명을 받아들입니다. 그는 부르신 분의 명령에 자신을 내맡깁니다. 종의 사역은 가시밭길이었습니다. 반대자들은 그의 선포를 거절하고 그에게 신체적-정신적 폭력까지 가했습니다(6). 매를 맞으며 수염이 뽑혔지만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모욕하고 침을 뱉었지만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습니다. 짐승처럼 달려드는 자들에게서 몸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몸을 맡겼습니다. 종은 자신의 고난이 사역의 일부에 속하는 것처럼, 자신을 보내신 분의 의도에 속하는 것처럼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종은 자신의 도움이 여호와에게서 나옴을 알았고 여호와께서 자기편이심을 확신했기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7).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수치의 흔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얼굴을 부싯돌처럼 강하게 하고 부당한 폭력을 이겨냈습니다. 반대자들은 종을 실족하게 하려고 했지만, 그는 실족하지 않았습니다.

 

(3) 여호와의 인정(8-9)

 

종은 법적 용어를 사용해 자신의 정당성(의로움)을 주장입니다(8-9a). 종은 ‘나를 의롭다 하시는이가 가까이 계심’을 확신합니다. ‘가까이 있다’(카롭)는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모두 이해될 수 있습니다. 전자에 따르면 여호와께서 종의 곁에서 지켜주실 것이고, 후자에 따르면 여호와께서 곧 개입하셔서 종의 손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판결을 확신하는 종은 자신을 죄인으로 멸시하는 반대자들에게 함께 여호와의 법정에 가서 재판을 받아보자고 도전합니다. 여호와의 도움을 자신하는 종은 여호와의 최종판결에 대해서도 자신합니다. 종이 아니라 그의 반대자들이 유죄 선고를 받을 것입니다. 좀이 옷을 해어지게 하는 것처럼 여호와의 말씀을 거절하고 의로운 종을 부당하게 학대한 자들의 불의가 이들을 멸망시킬 것입니다(9b).

 

권면과 경고(10-11)

우리의 귀는 정보를 습득하고 지식을 쌓기 위해 열려 있습니다. 우리가 들은 것은 입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됩니다. 우리의 입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드러내는 도구가 됩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다분히 자기중심적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귀와 혀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달랐습니다.

 

10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11보라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들어가며 너희가 피운 횃불 가운데로 걸어갈지어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고통이 있는 곳에 누우리라(10-11)

 

이제 여호와의 종은 예루살렘 거민들을 향해 도전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에 떠는 예루살렘 거민들 중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여호와의 종의 말을 따라 어둠 가운데로 뛰어들 수 있는 자들이 없는냐고 외치는 것입니다.

 

(1)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10)

 

종의 선포를 신뢰하는 자들에게 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면 아침마다 그분에게서 계시를 받아 전하는 종(4)의 선포에 귀를 기울여 듣고, 그 가르침에 순종해야 합니다. 거절당한 종(6)이 여호와의 의지를 대변하는 자로 선포됩니다. 종의 선포에 대한 반응이 순종과 불순종의 기준이 됩니다.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는 유배민의 암울한 정치적 상황을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종을 통하여 구원과 해방의 약속이 주어졌지만, 그 성취는 아직 미래에 속합니다. 경건한 자들은 여호와를 신뢰하고 그분께 의존해서 빛이 없는 흑암의 현재를 지나가야 합니다. 유배민을 에워싼 어둠은 종이 선포한 구원의 빛으로 벗겨낼 수 있습니다.

 

(2) 불과 횃불로 무장한 자(11)

 

11절은 자기 자신의 힘과 능력에 의지하는 자들에게 주는 위협의 말씀입니다. 어둠을 안전하게 걷기 위해 준비한 불과 횃불이 이들을 구해주지 못합니다. 어둠을 밝히려고 마련한 그 불에 자신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들이 준비한 불과 횃불은 아마도 전통적인 구원 신학을 가르칠 것입니다. 이들이 선택한 구원의 길이 이들을 멸망으로 이끈다. 이들은 고통 속에 죽을 뿐입니다.

위로의 말씀들(51:1-8)

 

우리는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삶입니다. 수시로 세상의 비방에 노출되어, 신앙적 정체성을 흔들려는 수많은 공격을 막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힘은 강력해 보이지만 서서히 스러져 가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영원한 것은 주님과 그 말씀밖에 없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1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내게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2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 3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4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5내 공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 6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7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내게 듣고 그들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 8옷 같이 좀이 그들을 먹을 것이며 양털 같이 좀벌레가 그들을 먹을 것이나 나의 공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1-8)

 

하나님께서는 채석장의 이미지를 사용해 유다의 정체성이 변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석회암 지대에서 떠낸 돌은 석회암일 수밖에 없고, 화강암 지대에서 떠날 돌은 화강암일 수밖에 없습니다. 유다 백성은 마치 채석강에서 채취된 돌과 같이 그 땅을 떠나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정체성이 바꿜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1) 아브라함의 축복(1-3)

 

첫째 단락(1-3)은 예언자가 선포한 시온의 회복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답변입니다.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자’는 종의 선포(50:4-9)를 따르는 자들이고, ‘의’는 여호와께서 주실 구원을 의미하지만, 2차적으로는 종교적 윤리적 자질도 포함합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써 시작됩니다. 그분께서 약속하신 구원을 신뢰하는 자들은 그분 말씀에 복종합니다.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분께서 시온을 위로해주시고 구원해주실 것을 압니다. 의와 구원을 원하는 자는 여호와께 들어야 합니다. “반석”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우묵한 구덩이”는 사라를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소유하고 큰 민족을 이루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신앙의 조상입니다. 이스라엘은 불가능해 보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성취를 기다렸던 아브라함이 자신들의 조상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아브라함을(창 15:6) 신앙의 조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임의 사라를 통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해 나가셨습니다(창 17:16,19). 생산 능력의 상실이란 점에서 사라는 “나는 홀로 남았거늘 이들은 어디서 생겼는고”(49:21)하며 놀라는 시온을 상징합니다. 시온은 사라가 어떻게 아이를 얻게 되었는지를 본받아야 합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약속을 아브라함이 믿었을 때 하나님께서 가능하게 해주셨다는 사실에서 교훈을 끌어내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땅과 후손의 복을 주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모든 것을 상실하고 절망에 빠진 그의 후손들의 운명에 개입하시고 위로하십니다. 멸망 이후 폐허로 남아 있던 시온과 그 주변 지역이 에덴처럼, 여호와의 동산처럼 될 것입니다. 슬픔과 절망과 탄식이 지배하던 황폐한 곳들이 동산으로 변하여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와 찬송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땅바닥에 쓰러져 수치를 당하던 예루살렘에 축제의 환호와 노랫소리가 다시 들립니다.

 

(2) 임박한 하나님의 공의(4-6)

 

둘째 단락(4-6)은 여호와의 영광에 초점을 맞춥니다. 율법(가르침)이 여호와에게서 나가고, 그분의 공의가 민족들의 빛으로 세워집니다(4). “내 공의”는 여호와의 통치와 관련이 있으며, 그분의 왕적 통치는 만민의 빛이 됩니다. 어둠 가운데 살던 민족들이 여호와의 통치가 가져다주는 공의와 구원을 보고 기뻐하게 됩니다. 시온의 구원 가운데 드러난 그분의 능력과 구원 의지를 민족들과 섬들도 고대합니다(5). 그분에게서 나간 율법을 통해 민족들도 그분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라’는 문맥에 따라 ‘내 팔이 민족들을 다스리리라’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손으로 민족들에게 공의를 베푸십니다. 여호와의 무한한 구원 능력과 피조 세계의 한계가 대조됩니다(6). 사람들이 영원하리라 믿는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여호와의 구원과 공의는 흔들림없이 지속됩니다.

 

(3) 두려워하지 말라(7-8)

 

셋째 단락(7-8)은 그분의 구원 약속이 반드시 성취되고 그분의 공의는 폐지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의를 아는 자들,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이 악한 자들에게 비방을 당합니다(7). 여호와의 종이 사명을 수행하다 핍박과 모욕을 당했던 것처럼(50:6) 이들도 여호와의 의를 알고 그 가르침에 따라 살려다가 고난을 당합니다. 여호와의 공의와 구원을 신뢰하는 자들은 대적의 비방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의를 아는 자들”은 여호와의 구원에 의지하여 그 말씀대로 사는 자들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그분의 가르침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합니다. 옷이 좀에, 양털이 좀벌레에 먹히는 것같이 비방하는 자들은 결국에는 멸망할 것입니다(8). 겉으로는 그 과정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비방하는 자들이 반드시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반면에 그분의 공의와 구원을 신뢰하는 자들은 여호와에 의해 대대로 보살핌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곤고한 자의 절규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학자는 그들의 아픔을 자세히 듣고 배우는 자이며, 세상에 그들의 억울함을 가르치는 자입니다. 이것은 고난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지만, 그 길이 세상을 구원하는 길이요, 에덴을 회복하는 길이기에 묵묵히 걸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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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50-01)


전화위복을 이루시는 하나님

이사야 49장 14절- 50장 3절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한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바꾸어 복을 만드시는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실로 전화위복(轉禍爲福)의 하나님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서 떠나 죄를 짓는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시지만, 사실 그 재앙마저도 이후에는 그들을 위한 복이 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이 결국 멸망하겠지만 그것마저도 복이 되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 시온은 유배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고 잊힌 존재가 됐다고 불안을 토로하며 탄식합니다.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이해하는 전통 신학 안에서 바벨론 유배는 설명하기 어려운 신학적 단절이었습니다. 시온의 제기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은 한순간도 시온에 대한 하나님의 애정과 관심을 시온이 멸망한 이후에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시온의 회복(14-21)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잊으실 수 없습니다.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은 절대 사그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의 이름은 절대 잊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의 속을 상하게 만들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식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도 그러지 않을까 지레짐작하지만, 걱정할 필요없습니다.

 

14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15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16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17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 너를 헐며 너를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 18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그들이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를 장식처럼 몸에 차며 그것을 띠기를 신부처럼 할 것이라 19이는 네 황폐하고 적막한 곳들과 네 파멸을 당하였던 땅이 이제는 주민이 많아 좁게 될 것이며 너를 삼켰던 자들이 멀리 떠날 것이니라 20자식을 잃었을 때에 낳은 자녀가 후일에 네 귀에 말하기를 이곳이 네게 좁으니 넓혀서 내가 거주하게 하라 하리니 21그 때에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나를 위하여 이들을 낳았는고 나는 자녀를 잃고 외로워졌으며 사로잡혀 유리하였거늘 이들을 누가 양육하였는고 나는 홀로 남았거늘 이들은 어디서 생겼는고 하리라(14-21)

 

이사야는 시온, 곧 예루살렘 성을 의인화해서 노래합니다. 시온은 유배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버림받고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고 탄식했습니다.

 

(1) 시온의 탄식(14)

 

시온은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라고 탄식합니다. 그들은 남편에게서 버림을 받고 잊힌 여자처럼 됐고 여호와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졌다면서 그분의 무관심을 탄식합니다(14; 참조. 40:27; 54:8; 애 5:20). 동사 ‘버리다’와 ‘잊다’는 관계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2) 여호와의 답변(15)

 

탄식하는 시온에게 여호와께서 비유를 사용해 그 부당함을 지적하십니다(15). 어머니가 제 몸에서 난 젖먹이를 잊고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 자식을 버리는 여인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극단적인 환경에서 자포자기적 행태를 보일 때가 없지는 않지만(참조. 왕하 6:26; 애 4:10),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당신 자녀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3) 성의 재건(16-17)

 

하나님께서는 지워지지 않게 손바닥에 시온을 새겨놓고 늘 기억하십니다(16). 그분은 한순간도 시온을 잊으신 적이 없습니다.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는 그분께서 손바닥에 새긴 것이 시온을 상징하는 예루살렘 성벽이었음을 시사해줍니다. 절망에 빠진 시온의 눈에는 잊힌 것처럼 보이지만, 여호와께서는 시온의 재건을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시온의 자녀들의 귀환과 시온을 파괴하던 자들의 떠남이 대조적으로 기술됩니다(17). 민족들 가운데 흩어졌던 시온의 자녀들이 여호와께서 평탄하게 만들어준 대로를 통해(11-12) 시온을 향해 가벼운 걸음으로 달려오고, 시온을 허물고 부수던 자들은 급히 시온을 떠난다. 성벽이 파괴된 시온을 괴롭히고 약탈하던 자들이 갑자기 도망하고 새로운 구원 시대가 도래합니다.

 

(4) 주민들로 넘치는 성(18-21)

 

여호와께서 황폐해진 땅을 내려다보며 절망 가운데 사는 시온에게 눈을 들어 사방을 바라보라고 권면하십니다(18). 시온은 눈앞의 암담한 현실에서 눈을 돌려 저편에서 오는 소망의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약속을 의지할 때 시온은 사방에서 서둘러 달려오는 자녀들을 보며 그분께 버림받거나 잊히지 않았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시온은 그분께서 맹세하신 구원 약속을 믿고 그 성취를 기다려야 합니다. 시온은 흩어진 자녀들이 돌아오는 것을 볼뿐 아니라 이들을 다시 자녀들로 맞아 잃어버렸던 영광도 되찾게 됩니다. 자식들을 잃고 티끌에 내려앉았던 시온에게 어머니의 지위와 기쁨이 주어집니다. 시온의 영광을 최상급으로 표현한 신부의 비유는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의 회복된 결혼 관계를 암시해주기도 합니다.

시온의 처량한 현재 모습과 다가오는 구원 시대의 충만한 모습이 대비됩니다(19). 주전 587년의 재앙으로 시온은 폐허가 됐고, 일부 남은 자들이 힘겹게 삶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시온이 재건되고 생존의 활기를 되찾게 됩니다. 외부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거주 공간이 부족해질 정도로 주민들이 많아집니다. 시온은 자식을 다 잃어버렸다고 절망했지만, 자녀들이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자녀들이 유배지에서 크게 자라 다시 돌아옵니다.

장소가 협소해서 다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자녀가 사방에서 시온으로 돌아옵니다(20). 시온은 믿기지 않는 현실을 보고 놀라움에 사로잡힙니다(21). 시온의 탄식(14)이 감탄과 놀람으로 바뀐다. 시온은 자신이 여호와께 버림받지 않았음을 두 눈으로 보게 됩니다. 시온이 절망에 빠져 탄식하는 동안 여호와께서는 먼 곳에서 그의 자녀들을 보호하고 키워주셨다. 시온을 잊은 것이 아니라 시온을 기억하시고 그의 미래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돌아오는 시온의 자녀들(22-23)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인간들은 고통이 임했을 때, 마치 모든 희망을 잃은 것처럼 행동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나보다 훨씬 더 멀리 보시고, 내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어려움을 주신 하나님을 오히려 찬양하고 이 고통 뒤에 무엇이 있을지 기대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22주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뭇 나라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민족들을 향하여 나의 기치를 세울 것이라 그들이 네 아들들을 품에 안고 네 딸들을 어깨에 메고 올 것이며 23왕들은 네 양부가 되며 왕비들은 네 유모가 될 것이며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네게 절하고 네 발의 티끌을 핥을 것이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22-23)

 

예루살렘의 회복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회복을 직접 경험한 자들조차 의아학 여길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회복은 이스라엘 자손이 기대하거나 요구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1) 안내자가 되는 민족들(22)

 

여호와께서 민족들에게 신호를 보내기 위해 손을 드십니다. 그분의 권능을 보여주는 새로운 사건이 시작되고 있음을 시사해줍니다.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해 깃발을 올려 먼 곳에서 민족들을 불러오셨던 여호와께서(5:26) 이번에는 당신 백성을 귀향시키기 위해 깃발을 올려 민족들을 부르십니다. 민족들에게 유배민을 안전하게 시온으로 데려가는 임무가 주어집니다. 민족들이 시온의 아들들을 품에 안고 시온의 딸들을 어깨에 메고 데려옵니다.

 

(2) 시온에 굴복하는 민족들(23)

 

민족들에 의해 쫓겨났던 시온의 자녀들이 민족들의 안내를 받으며 다시 시온으로 돌아옵니다. 민족들을 대표하는 왕들과 왕비들이 시온의 자녀들을 돌보는 양부와 유모로 임명되고, 시온에 절하고 그 발의 먼지를 핥습니다. 시온을 지배하던 민족들이 시온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경의를 표합니다. 물론, 시온의 영화가 궁극적인 목표는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 일을 통해 시온이 당신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시온은 여호와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주십니다. 우상숭배자들은 우상을 섬기다가 수치를 당하지만, 여호와를 섬기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시온의 자녀들은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유배민의 구출(24-26)

두려워하지 말고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매일 변하는 세상의 평가에 마음을 너무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무엇보다 귀한 사람입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손바닥에 이름이 새겨진 사람들입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세상이 몰라보아도 하나님께서는 아시는 귀한 당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축복합니다.

 

24용사가 빼앗은 것을 어떻게 도로 빼앗으며 승리자에게 사로잡힌 자를 어떻게 건져낼 수 있으랴 25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용사의 포로도 빼앗을 것이요 두려운 자의 빼앗은 것도 건져낼 것이니 이는 내가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고 네 자녀를 내가 구원할 것임이라 26내가 너를 억압하는 자들에게 자기의 살을 먹게 하며 새 술에 취함 같이 자기의 피에 취하게 하리니 모든 육체가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요 네 구속자요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24-26)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면 우리는 머누 쉽게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기도 하고 그분의 사랑을 의심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돌아보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신 자녀를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1) 시온의 탄식(24)

 

바벨론에 멸망당한 경험이 있는 시온은 여호와의 구원 능력에 의심을 품습니다(24). 여호와께서 유배민의 귀향을 약속하시지만 무슨 능력으로 세계를 정복한 바벨론의 손에서 유배민을 구해내실 수 있겠습니까?

 

(2) 여호와의 응답(25-26)

 

어떤 나라와 신도 바벨론 제국의 폭력에서 제 민족을 구해낼 수 없지만, 바벨론을 대적하시는 분이 여호와라면 사정은 전혀 달라집니다(25). 바벨론을 대적하시는 여호와께서 시온을 억압하던 자들이 서로 죽이고 피를 흘리게 하실 것입니다(26). 서로 제 살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듯이 제 피를 취하도록 마시게 하실 것입니다. 바벨론이 내부 분열과 다름으로 멸할 것을 시사해줍니다. 바벨론의 폭력에서 시온의 자녀들을 구하시는 여호와의 놀라운 능력을 보고 모든 육체가 그분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육체”는 시온을 억압하는 자들과 구별되는, 여호와의 권능과 영광을 목도하는 자들입니다(참조, 40:5). 이들은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유배민을 구하는 여호와의 능력을 보고 여호와께서 시온의 구원자요 구속자요 야곱의 전능자이심을 알게 됩니다. 구속자(고엘)는 씨족사회의 유산에 속하는 표현입니다. 억압자들의 손에 떨어진 시온의 자녀들을 구출하는 것이 여호와의 권리이자 의무에 속함을 보여줍니다. 야곱의 전능자는 야곱이 대표하는 모든 지파를 위해 개입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함축하는 이름입니다.

 

이스라엘의 책망(50:1-3)

신앙인들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는 잘 모른 경우가 많습니다. 물롬 하나님께서는 죄인이건 의인이건 누구든지 사용하실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시기에 기뻐하실 만한 사람이냐 아니냐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1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너희의 어미를 내보낸 이혼 증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보라 너희는 너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팔렸고 너희 어미는 너희의 배역함으로 말미암아 내보냄을 받았느니라 2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며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여 죽으리라 3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1-3)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시고 이방의 손에 파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도, 이방의 손에 너기신 것도 아님을 밝히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죄악과 배역함 때문에 징계를 받은 것입니다.

 

(1) 유배에 관한 논쟁(1)

 

예루살렘의 멸망과 유배는 구원사적 전통 안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파국이었습니다. 유배민 가운데 일부는 그 책임을 여호와께로 돌렸습니다. 이들은 여호와께서 어느날 갑자기 이혼 증서를 손에 들려주고 내쫓아버리셨다고, 빚에 쪼들려 채주에게 팔아넘기셨다고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이에 맞서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임의적 결정이나 능력 부족 때문이 아니라 이들의 죄악과 배역 때문이었음을 주장하십니다(1). 여호와께서 무관심하거나 능력이 없어서 유배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2) 여호와의 무한 능력(2-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찾아오셔서 불렀지만, 이스라엘은 응답하지 않았다(2). 그분의 ‘손’이 짧아서, 힘이 없어서 이스라엘이 구속함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구해주시려고 구속의 손을 내밀었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도무지 잡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도와줄 마음도 있고 도와줄 능력도 있었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무시하고 도움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억울하다고 불평을 늘어놓거나 그분의 구원 능력에 회의하지 말고 먼저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고 그분의 무한 능력에 의지해야 합니다. 유배민은 한마디 호령으로 바다와 강을 말리시고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신 출애굽의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안 계신 것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면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뜻을 거스르고 등을 돌렸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분은 잠시도 우리를 잊지 않으셨으며, 보이지 않게 회복과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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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49-01)


온 세상을 구원할 여호와의 종

이사야 49장 1-13절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특별한 때에만 임하고, 구원의 날이 어떤 특정한 날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특별한 날, 특별한 시기에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때에 대해 묵상해 봅시다.

 

  • 이사야 42:1-4의 첫 번째 종의 노래에서는 여호와께서 종을 민족들에게 정의를 베풀 자로 소개하시고, 오늘 본문부터 시작하는 두 번째 종의 노래에서는 종이 민족들을 불러 여호와의 영광을 드러낼 그분의 종으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좋은 여호와께서 당신의 구원이 땅 끝까지 미치도록 민족들의 빛으로 세우신 자입니다. 종의 사역이 이스라엘을 넘어 온 땅으로 확장됩니다.

 

여호와의 종의 두 번째 노래(1-6)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은 바로 우리의 사명이 되었고, 우리가 바로 이방의 빛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몇몇 선교사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이 이방의 빛입니다. 우리가 이방의 빛으로 헌신할 때, 그 빛을 보고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나아올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이방의 빛이 되어, 이방 민족들을 구원하고, 하나님께로 인도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이방의 빛의 사명은 우리에게로 고스란히 이어졌습니다.

 

1섬들아 내게 들으라 먼곳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 2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의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를 갈고 닦은 화살로 만드사 그의 화살통에 감추시고 3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4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5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나니 그는 태에서부터 나를 그의 종으로 지으신 이시요 야곱을 그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시니 이스라엘이 그에게로 모이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 6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1-6)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없어지지 않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은 하나님의 구원을 온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부르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항상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힘써야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떠나 우상들을 섬기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고 졸지에 이스라엘은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1) 종의 자기소개(1-3)

 

‘여호와의 종’은 ‘섬들과 먼 곳 백성들’을 초대하여 자신을 소개합니다. 종의 사명에 처음부터 세계사적 전망이 주어집니다. 종은 자신이 여호와의 종으로 태어났다고 주장합니다. 여호와께서 모태에서부터 종을 부르시고 이름을 기억하셨습니다(1; 참조. 렘 1:5; 갈 1:15). 종의 실존이 여호와께서 부르신 목적에 온전히 종속됐습니다. 종은 여호와께서 특별한 의도에 따라 세상에 태어나게 한 자로, 그분의 의지에 순종하는 삶이 종의 실존 이유이자 목표가 됩니다. 여호와께서는 종의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종을 예리한 화살로 만드셨습니다(2). 종은 대적과 싸우려 무장하신 여호와의 칼과 화살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신적 권위가, 어떤 방어벽도 꿰뚫을 수 있는 관통력이 주어집니다. ‘손 그늘에 숨기다’와 ‘화살통에 감추다’는 원래 여호와의 보호를 보여주는 표상인데(참조. 시 17:8; 27:5; 91:1; 렘 48:45), 여기서는 ‘준비 완료’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용사가 전쟁에 나가기 전에 칼과 화살을 예리하게 준비하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언제나 사용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끝내셨습니다. 사용할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대표적인 전쟁 무기인 칼과 화살의 비유는 종의 선포가 저항에 직면하겠지만 결국 승리할 것을 시사합니다. 여호와의 칼과 활로 준비된 종에게 사명과 역할이 맡겨집니다(3).

 

(2) 종의 탄식(4)

 

종이 주인의 명령과 의지 아래 있다는 점에서 그에게는 사적 의지와 활동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3) 여호와의 긍정적 응답(5-6)

 

문자적으로는 이스라엘은 종이 되는데, 그러면 이스라엘이 사역의 주체가 되기에 이스라엘이 종 사역 대상으로 등장하는 5-6절과 충돌합니다. 종을 개인으로 간주하면 ‘이스라엘’은 종의 본질을 보여주는 명예로운 호칭이 됩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종만이 유일하게 ‘거룩한 남은 자’이기에 그에게 임시로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지위와 사명이 주어집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신실한 종은 원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기대하셨던 모습입니다. 홀로 참된 이스라엘을 구현한 종이 사람들을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여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여호와께서 사용하시는 칼과 활임에도 종의 사역에는 열매가 없었습니다(4). 그 결과 때문에 좋은 탄식하지만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종은 사역의 실망스러운 현실을 받아들이고, 판단을 여호와께 맡기며 사람들과 다투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예언자적 사명과 선포를 거절했지만, 좋은 여호와는 자기 활동을 인정해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좋은 자신의 신적 사명을 눈에 보이는 열매, 곧 ‘사람들의 인정’으로 입증하려 하지 않습니다. 활동의 결과가 아니라 소명의 확신에서 신적 사명의 정당성을 찾습니다. ‘보응’(보상)은 ‘예언자적 사명의 인정’을 의미합니다. 지금은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여호와 안에서 많은 결실을 얻게 될 것입니다. 종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특별한 목적을 갖고 모태에서부터 자신을 직접 빚어 만드셨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5). 이스라엘을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임을 확신합니다. 이스라엘의 회복 과정은 종에게도 감춰져 있으며, 종은 단지 이를 위해 말씀을 선포하면 됩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실패한 자처럼 보이지만 여호와의 눈에는 존귀한 자입니다. 자신을 지으신 분께 소망을 두는 종에게는 여호와께서 힘이 되어 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거절당한 종을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앞으로 종에게 맡기실 일에 비하면 이방 가운데 흩어진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일은 차라리 쉬운 일에 속합니다. 그분의 구원 계획이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땅끝을 내다봅니다(6; 42:1-4). 여호와께서 종을 ‘이방의 빛’으로 세워 온 땅에 구원을 전하게 하십니다. 역설적이게도 이스라엘의 거절이 종의 역할을 세계사적 차원으로 옮겨놓습니다.

 

흩어진 자들의 귀향(7-13)

유다 백성이 하나님을 찾고, 겸손하여져서 하나님을 바라는 날이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은혜의 때와 구원의 날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날이 바로 오늘이요. 지금이라고 말했습니다(고후 6:2).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사람은 지금 당장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두려워 말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십시오. 은혜의 문, 구원의 문은당신을 향해 활짝 열릴 것입니다.

 

7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에게 이같이 이르시되 왕들이 보고 일어서며 고관들이 경배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신실하신 여호와 그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8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에게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 9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 그들이 길에서 먹겠고 모든 헐벗은 산에도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인즉 10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 11내가 나의 모든 산을 길로 삼고 나의 대로를 돋우리니 12어떤 사람은 먼 곳에서, 어떤 사람은 북쪽과 서쪽에서, 어떤 사람은 시님 땅에서 오리라 13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7-13)

 

유다 백성은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나라를 잃고 타국에서 종이 되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인 유다 백성이 이방인 바벨론의 압제 아래 있는 것은 커다란 고난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이 겪는 어려움의 원인은 외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백성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다른 신을 따른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었습니다.

 

(1) 낮아진 종의 높임받음(7)

 

1-6절에 나타나는 ‘종’은 7절에 등장하는 ‘종’과 구별됩니다. 전자는 여호와께서 모태에서부터 부르신 그 곧 세분의 종이고, 후자는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 상 권력에 의해 종의 신분으로 전락한 자입니다.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는 바벨론 유배민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신 여호와”께서 당신 백성의 운명에 개입하십니다. 그분께서 땅바닥에 떨어진 이스라엘의 운명을 다시 높여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운명과 민족들의 운명이 뒤바뀝니다. 이스라엘을 멸시하고 경멸하며 종살이시키는 민족들이 이스라엘에게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왕들이 일어나 땅에 엎드려 과거 종이었던 이스라엘에게 신하의 예를 표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높임은 물론 여호와의 신실하심에 근거합니다. 이스라엘을 바벨론에 넘겨주셨지만, 이스라엘은 여전히 그분께서 택하신 백성입니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파기했지만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는 변함없이 언약 관계에 신실하십니다.

 

(2) 열매 맺는 종의 사역(8)

 

현재 문맥에서 8-12절은 열매 없는 사역에 실망한 종(4)에게 여호와께서 주시는 응답입니다. 여호와께서 종에게 은혜의 때에 응답해주실 것과 구원의 날에 도와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8). 여호와께서 종을 도우셔서 그의 사역이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해주시고, 종을 보호하여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십니다(참조, 42:6). 종을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고 황폐한 땅이 다시 상속재산으로 주어집니다. 모세(언약 체결)와 여호수아(땅 분배)의 역할이 종에게 맡겨집니다.

 

(3) 해방과 귀향 (9-12)

 

9a절도 종의 사역에 관한 언급입니다. 바벨론 유배민에게 해방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이 종에게 맡겨집니다. ‘잡혀 있음과 흑암’은 유배생활을 가리키지만, 유배민의 귀환이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기에 불신앙과 같은 영적 무지도 포함합니다. 9b-10a절은 귀향길을 내다봅니다.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길은 위험한 여정이지만, 목자의 인도를 받는 양 떼처럼 안전하고 풍족하게 지날 것입니다. 9b절은 그 이유를 알려준다. 이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이들을 샘물 근원으로 인도하시고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샘물 근원”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시원한 그늘을 보장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이”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모성적 사랑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출애굽 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당신 백성을 이끌어주셨던 것처럼, 긍휼히 여기시는 분께서 유배민의 그늘과 샘물이 되셔서 이들의 여정을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길을 함께하시며 보호해주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무한한 권능도 보여주십니다. 귀향민의 진행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해 어려움 없이 지나갈 수 있게 해주십니다(10-11). 바벨론 유배민만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흩어진 자들이 모두 돌아옵니다(12). 목적지는 달리 언급하지 않고 해방과 귀향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4) 찬양(13)

 

하늘과 땅뿐 아니라 산도 구원의 기쁨에 동참하도록 초대받습니다(13). 모든 피조 세계가 창조주가 마련한 놀라운 일을 기뻐하며 환호하게 됩니다. 이렇듯 이스라엘의 구원에 세계사적 전망이 주어집니다. 찬송의 동기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시고, “그의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난 당한 자”는 하나님 외에 다른 곳에서 도움을 찾을 수 없는 가련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여호와의 위로와 긍휼이 그분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를 온전하게 회복시켜줍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의 때는 오늘입니다. 특히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하고 기꺼이 이방의 빛으로 살아가기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은혜의 때, 구원의 날이 풍성하게 열려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십니다. 이방의 빛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날마다 체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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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48-02)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하나님의 섭리

이사야 48장 12-22절


 

포로된 바벨론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니 어느덧 꿈을 잃고 있습니다. 구원하시겠다는 말씀도 들리지 않고, 살던 곳을 떠난다는 것이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집니다. 세상에 동화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끌려올 때보다 더 큰 위기의 순간입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의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분께서 말씀하셨기에 그분의 구원 계획은 반드시 이뤄집니다. 그분께서는 능력의 말씀으로 역사를 결정하시는 ‘처음’이시고, 선포된 당신 의지를 관철시키시는 ‘마지막’이십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말씀이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여호와에게서 나왔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새 일을 실행하시는 여호와(12-16)

사람들은 이전에 전혀 일어나지 않았던 새로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여길 수 있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이신 하나님의 섭리를 잘 살펴보면 그 원리는 하나로 모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신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기에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이전에 없었던 일을 행하시더라도 그 원리는 동일하게 유지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습니다.

 

12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 13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을 폈나니 내가 그들을 부르면 그것들이 일제히 서느니라 14너희는 다 모여 들으라 나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는 나의 기뻐하는 뜻을 바벨론에 행하리니 그의 팔이 갈대아인에게 임할 것이라 그들 중에 누가 이 일들을 알게하였느냐 15나 곧 내가 말하였고 또 내가 그를 부르며 그를 인도하였나니 그 길이 형통하리라 16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것을 들으라 내가 처음부터 비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나니 그것이 있을 때부터 내가 거기에 있었노라 하셨느니라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의 영을 보내셨느니라(12-16)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부르셨던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라고 부르시며 당신이 창조주이심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나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를 세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바벨론이 행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1)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분(12-13)

 

여호와께서 독립인칭대명사 ‘나’를 세 번 사용하시면서 야곱 이스라엘에게 당신이 누구신지를 알려주십니다(12). “나는 그니”는 공존을 거절하시는 여호와의 유일성과 절대 능력을 보여줍니다. 민족들의 신들이 아니라 처음이요 마지막이십니다(41:4; 44:6). 홀로 창조하신 그분께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홀로 통치하십니다. 한순간도 피조 세계의 통치권을 넘겨주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자’로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분의 구원 사역을 신뢰하고 전해야 합니다. ‘부름 받음’은 이스라엘의 특권이자 의무입니다. 선민 이스라엘은 택하신 분의 의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징계를 받고 유배에 처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그분과 관계있는 백성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시기에(13; 42:5; 45:12) 그것을 보존하시고 통치하십니다. 그분께서 땅의 기초를 정하셨기에 땅은 흔들리거나 혼돈 상태에 빠지지 않으며, 하늘을 보호막처럼 펼치셨기에 피조물이 안전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하늘과 땅의 질서를 정하셨기에 이를 흔들어 파괴하려는 세력은 보복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그분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창조와 관련하여 그분의 오른손이 사용된 경우는 여기가 유일합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그분의 손은 역사 안에서 거듭 구원과 심판을 집행하는 능력의 손으로 등장합니다. 13절의 “그들”과 “그것들”은 하늘의 별들보다는 바로 앞에 나온 하늘과 땅을 가리킵니다. ‘부르다’와 ‘서다’(아마드)는 각각 ‘불러 생기게 한다’와 ‘출현한다’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있으라고 명령하시자 하늘과 땅이 출현하였습니다(창 1:6-10).

 

(2) 고레스를 부르신 분(14-1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체(‘너희는 다’)에게 모여 들어보라고 요청하십니다(14).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는 바사 왕 고레스를 가리킵니다(45:1). 여호와를 알지 못하지만(45:4-5), 그분의 구원 사역을 집행한다는 의미에서 고레스는 여호와께서 사랑하는 자가 됩니다. “나의 기뻐하는 뜻”은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을 그 굴레에서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고레스를 통해 당신께서 기뻐하는 뜻을 이루시고(46:10), 고레스는 그분의 목자로 그분의 모든 기쁨을 성취합니다(44:28). “그의 팔”은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와 동격입니다. 고레스는 여호와의 능력의 팔로 그분의 뜻을 실행합니다. 어느 우상도 고레스의 승리나 그에 의한 바벨론 제국의 멸망을 선포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여호와만 고레스를 역사 무대로 불러 나오게 하셨고, 그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15). 민족들을 놀라게 한 고레스의 형통은 여호와께서 주신 것입니다.

 

(3) 비밀히 말하지 않으시는 분(16)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당신께로 가까이 오도록 부르십니다(16). “이것”은 14-15절에 언급한 말씀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로 나아와 그분께서 선포하신 구원의 소식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야 합니다. 현재 문맥에서 “처음부터”는 ‘고레스가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부터’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결정을 처음부터 공개적으로 선포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언자들의 선포만 살펴봐도 이스라엘은 역사의 결정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있을 때부터”는 예언의 성취와 관련된 말로 ‘이 일이 생길 때부터’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내가 거기에 있었노라’는 여호와께서 성취의 주체이심을 보여줍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여호와에 의한 것이며, 고레스는 그분의 도구일 뿐입니다.

 

(4) ‘나와 그의 영’(16)

 

여호와의 인칭이 16b절에서 갑자기 다른 누구의 1인칭으로 바뀝니다. 여호와로부터 보냄을 받은 ‘나’는 아마도 여호와의 종을 가리키는 것 같고, “이제는”은 새로운 구원 시대의 시작을 시사합니다(43:1; 44:1; 49:5). 여호와께서 당신 영으로 무장시킨 종을 보내 “처음 일들”과는 구별되는 “새 일”을 시작하십니다.

 

탄식하시는 여호와(17-19)

지금도 말씀의 생수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읽을 수 있습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 전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 안에는 쉽게 밑줄이 그어지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복을 약속하는 말씀만이 아니라 경고도 있습니다.

 

17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18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공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19네 자손이 모래 같았겠고 네 몸의 소생이 모래 알 같아서 그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겠고 없어지지 아니하였으리라 하셨느니라(17-19)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더 분명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우리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약이나 규제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완악하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우리에게 유익한지 잘 모릅니다.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1) 유익하도록 가르치시는 분(17)

 

말씀 전달에 앞서 여호와가 다시금 이스라엘의 구속자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으로 소개됩니다. “구속자”(고엘)는 집안의 일원이 어려움에 처하거나 부당한 죽음을 당했을 때, 도와주거나 ‘피의 복수’를 해주는 가까운 친척을 가리킵니다. “거룩하신 이”도 이사야서 후반부에서는 거의 구원의 문맥에서만 등장합니다.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는 언약관계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언약관계에 따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이끄시고 이스라엘은 그분께 순종하며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이를 위해 그분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는 가르침을 주시고 생명의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마땅히 행할 길”은 문자적으로 가나안으로 가는 귀향길을, 비유적으로는 그분께로 돌아가는 영적 갱신의 길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뿐 아니라 영적-내적으로도 여호와께서 가르쳐주신 길을 가야 합니다.

 

(2) 순종하지 않은 결과(18-19)

 

그러나 역사를 되돌아보면 이스라엘은 유익함을 가져다주는 그분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 당신의 의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주의한다’는 ‘의지적으로 귀를 기울여 듣다’ 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기대하신 것은 실천적 완전보다는 당신의 명령에 대한 진지한 응답이었습니다. “평강”(샬롬)은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이 구현된 상태를 가리키는 포괄적 개념이고, “공의”도 구원과 승리와 정의를 내포하는 다의적 개념입니다. “강”과 “바다 물결”은 생명의 풍요로움과 넘침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여 언약관계를 유지하였다면 이스라엘은 샬롬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모래처럼 많은 자손’(19)은 유배민의 처량한 모습을 족장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창 22:17; 32:12)과 대비시켜 줍니다. ‘이름의 끊어짐’은 자식의 없음이나 후손의 멸절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위대한 약속을 받았으면서도 참담한 존재로 전락한 이유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불순종으로 멸망 당한 이스라엘에게 다시 미래가 없습니까?

 

유배민을 구원하시는 여호와(20-22)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소홀히 여길 거슨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한 이 시대는 말씀의 홍수의 시대입니다. 말씀이 많이, 그리고 자주 들리는 시대이기에 자칫 잘못하면 귀만 커지고, 손과 발은 움직이지 않는 기형적인 신앙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한다면 우리는 유다 백성보다 더욱 복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20너희는 바벨론에서 나와서 갈대아인을 피하고 즐거운 소리로 이를 알게 하여 들려주며 땅 끝까지 반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의 종 야곱을 구속하셨다 하라 21여호와께서 그들을 사막으로 통과하게 하시던 때에 그들이 목마르지 아니하게 하시되 그들을 위하여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게 하시며 바위를 쪼개사 물이 솟아나게 하셨느니라 22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하셨느니라(20-22)

 

하나님께서는 미래의 구원과 과거의 구원을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구원을 땅 끝까지 선포하라고 명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바위를 쪼개 물이 솟아나게도 하셨습니다.

 

(1) 바벨론 탈출(20)

 

여호와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의 구속자이시기에 구원이 가능합니다.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이 제2의 출애굽입니다. 이스라엘 조상들이 급히 애굽을 떠난 것처럼(출 12:11; 신 16:3) 후손들도 도망치듯 바벨론을 떠나야 합니다(20). “피하고”의 ‘바라흐’는 원래 ‘도망합니다’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구속자 여호와께 의존하여 바벨론을 떠나야 하고, 출바벨론의 구원 경험을 땅 끝까지 선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환호하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께서 그의 종 야곱을 구속하셨다”고 땅 끝까지 알려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바벨론에서 해방시킨 여호와의 능력을 온 세상에게 전하는 증인 역할이 맡겨집니다.

 

(2) 광야 길을 함께하시는 여호와(21)

 

첫 번째 출애굽과 두 번째 출애굽(출바벨론)이 하나로 연결되어 선포됩니다(21; 43:19). 처음처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사막으로 인도하시지만 목마르지 않게 해주십니다. 그때처럼 바위를 쪼개서 물이 쏟아져 나오게 하십니다(참조, 출 17:1-7; 민 20:2-11; 시 78:15,16; 105:41; 114:8). 출애굽의 광야 기적이 출바벨론에서 다시 일어납니다. 출애굽 때 불모의 광야 길을 함께하셨던 여호와께서 바벨론 유배민이 돌아오는 험난한 길에도 함께하시며 이들의 귀향을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3)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22)

 

문맥에 돌출적으로 보이는 22절은 17-19절을 배경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악인’은 여전히 여호와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들, 곧 예언자와 종을 통해 선포된 “새 일”을 거절하고 자기 길을 가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유익하도록 가르치시고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시는 여호와를 떠난 자들에게는 평강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고 아끼십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새로운 삶은 약속하신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자신을 맡길 때 시작됩니다. 세상이 주는 달콤함에 취해 떠나길 주저한다면 결코 하나님의 평강과 공의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출 바벨론의 여정에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고민하지 말고 결단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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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48-01)


완고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이사야 48장 1-11절


 

평생 하나님께 신실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길이라고 할지라도 완고하게 거역하는 길을 갑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위한다지만 그분의 명예를 훼손할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해 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십니까?

 

 

  •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무조건 믿어야 합니까? 이스라엘이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기만 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외음부터 말씀하시고 이를 이루시면서 역사를 이끌어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전 약속이 모두 성취됐다면 미래 약속도 분명히 성취될 것입니다.

 

진실과 공의가 없는 이스라엘(1-2)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우상을 만들어 철저히 욕망을 추구합니다. 그들의 삶을 살펴보면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능력은 상실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과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진실과 공의에 있습니다. 삶에 거짓과 악의로 가득하면 하나님의 길을 갈 수 없고, 회복될 수 없습니다.

 

1야곱의 집이여 이를 들을지어다 너희는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유다의 허리에서 나왔으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기념하면서도 진실이 없고 공의가 없도다 2그들은 거룩한 성 출신이라고 스스로 부르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며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라고 하나(1-2)

 

유다 사람들의 말과 행실은 괴리되어 있었습니다. 자신들을 이스라엘이라, 유다의 자손이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심기며 의하고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1) 전통에 따른 경건(1)

 

이스라엘이 들어야 할 말씀은 3-11절에 나오지만, 이들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청자들이 이를 알고 있었음에도 순종하지 않았음을 시사해줍니다. “야곱의 집”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 조상에서 나왔음을 보여주고 또 각 구성원의 일치와 연대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는 이들의 신학적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참된 이스라엘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허리”는 바벨론유배민이 예루살렘과 유다에서 사로잡혀 온 자들임을 시사하고, 창세기 49:8-12에 나오는 유다에 대한 야곱의 축복을 암시합니다. 이들은 자랑스러운 전통의 계승자이며 여호와를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이교적 환경에 살면서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자신들이 여호와께 속했음을 공개적으로 표명한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기념하는’ 자들, 즉 조상들의 신앙 전통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를 고백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2) 거룩한 성 출신을 자랑하는 자들(2)

 

더 나아가 “거룩한 성 출신”임을 자랑합니다. 유배민은 예루살렘의 이름을 따라 자신들을 예루살렘 공동체로 간주하였기에 “거룩한 성 출신”이란 표현에는 종교적 의미도 포함됩니다. 민족적-종교적 전통에 뿌리내린 유배민의 경건은 사람들의 눈에는 완벽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보시기에는 진실과 공의가 없는 속 빈 껍질에 불과했습니다.

 

'처음 일들'의 선포(3-6)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특별한 은총을 입은 민족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아브라함, 이삭, 이스라엘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섬기는 선민으로 자처했습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백성임을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거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진실과 공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됨’은 신앙의 가문이나 연조, 자의식 같은 것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됩니다.

 

3내가 예로부터 처음 일들을 알게 하였고 내 입에서 그것들이 나갔으며 또 내가 그것들을 듣게 하였고 내가 홀연히 행하여 그 일들이 이루어졌느니라 4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고하며 네 목은 쇠의 힘줄이요 네 이마는 놋이라 5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예로부터 네게 알게 하였고 이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것을 네게 듣게 하였느니라 그것을 네가 듣게 하여 내가 이것을 내 신이 행한 바요 내가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이 명령한 바라 말하지 못하게 하였느니라 6네가 들었으니 이 모든 것을 보라 너희가 선전하지 아니하겠느냐 이제부터 내가 새 일 곧 네가 알지 못하던 은비한 일을 네게 듣게 하노니(3-6)

 

이스라엘 자신들을 이렇게 칭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들의 조상들에게 큰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그 사실을 후대의 이스라엘에게 기록된 말씀을 통해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은 진실도, 공의도 실천하지 않으며, 완고하게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었습니다.

 

(1) 알려주시고 이루신 여호와(3)

 

여호와의 역사 경영을 되돌아봅니다. 그분께서는 처음부터 하실 일들을 미리 알려주시고 이를 이뤄오셨습니다(3). “예로부터"는 세상이 창조된 이후, 특히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를 가리키고, ”처음 일들”은 6절의 “새 일”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예언자를 기준으로 그 이전에 선포되고 성취된 모든 사건을 포함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간 예언이 성취된 과정으로 우연히 발생한 사건들의 연속이 아니었습니다. 재앙이나 심판의 문맥에 등장하는 “홀연히”는 심판의 돌발적 성격을 보여줍니다. 그분께서는 알리신 일들이 때가 되면 단호하고도 신속하게 이루어졌습니다.

 

(2) 이뤄지기 전에 알려주신 이유(4-5)

 

4-5a절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들을 미리 알려주신 이유를 가르쳐주는데, 이스라엘의 완악함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의지적이고 완강하고 단호하게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거절했습니다(참조. 신 31:27; 렘 5:3; 겔 3: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배역한 성품을 아셨기에 핑계할 수 없도록 처음부터 먼저 들려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5b절은 유배민이 우상숭배의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시사해줍니다. 일부 유배민은 주전 587년 예루살렘의 함락과 유다의 멸망에서 이방 신들의 승리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예언자들의 선포와 그 결말을 살펴본다면 우상들이 역사를 결정한다는 쓸데없는 소리를 더는 떠들지 못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홀로 역사를 경영해 오셨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증명되었습니다.

 

(3) 증인의 역할(6a)

 

이야기의 흐름과 내용에서 6절의 “네가 들었으니 이 모든것을 보라”는 5절의 “그것을 네게 듣게 하였느니라”에 직접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미 들은 것들을 살펴서 그 진위를 확인해보라고 명령하십니다.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알리신 것을 그대로 이루셨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개별적 사건들의 합(合)이 아니라 연속적인 역사 전체를 가리킵니다. 한두 사건은 우상들도 우연히 예견하고 이룰 수 있지만, 역사를 연관된 흐름으로 선포하고 이끄시는 분은 여호와 외에는 없습니다. 첫 번째 논증은 수사적 의문문으로 끝을 맺습니다. “너희가 선전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역사적으로 확인된 보고 들은 것을 알리도록 권면하십니다. 이스라엘에게 과거 역사에 대한 공적 증인의 역할을 맡기신 것입니다.

 

‘새 일’의 선포(6b-8)

하나님께서 미리 알려 주시고 그대로 행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역사를 분명하게 드러내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그 말씀을 듣지도 않았습니다. 그분의 역사를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배신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신실하게 살아갈 능력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지금도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실망시켜 드립니다.

 

7이 일들은 지금 창조된 것이요 옛 것이 아니라 오늘 이전에는 네가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네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알았노라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8네가 과연 듣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으며 네 귀가 옛적부터 열리지 못하였나니 이는 네가 정녕 배신하여 모태에서부터 네가 배역한 자라 불린 줄을 내가 알았음이라(7-8)

 

하나님께서는 이제 새 일, 곧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는 은비한 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이제까지 들어본 적도 없고 짐작할 수도 없는, 전혀 새로운 일을 행하심으로 하나님의 역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은 인간의 완악함과 패역함을 뛰어넘습니다.

 

(1) ‘새 일’을 알려주시는 여호와(6b)

 

하나님께서 이제 “새 일”을 선포하십니다(6b). 3절의 “예로부터”에 대응하는 “이제부터”는 새로운 일들이 시작되는 역사의 전환점을 가리킵니다. 땅을 황폐하게 만들고 많은 사람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간 심판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됩니다. “처음 일들”(이전 일들)이 주전 587년 유다의 멸망과 유배에 이르기까지의 일들이라면, ‘새 일들’은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내다보는 사건들을 가리킵니다. 이제 심판 시대에 종지부를 찍는 새로운 일들, 곧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 은비한 일(감추어진 일들)”을 들려주십니다. 예로부터 알려지고 들려진 처음 일들(3)과 달리 새 일들은 이제까지 이스라엘에게 알려지거나 들려지지 않았던, 이제 막 시작되는 사건들입니다.

 

(2) 지금 창조된 ‘새 일’(7)

 

이 새 일들은 “지금 창조된 것”, 곧이제 막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것들이며, “오늘 이전에는” 이스라엘이 들어본 적이 없던 것들입니다(7).새 일들은 창조되자마자 즉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그렇다고 먼 훗날에야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창조주가 선포하셨기에 신속하게 진행되고, 또 이런 의미에서 지금 선포됨으로써 창조됩니다. 창조의 능력을 품은 하나님 말씀은 선포되는 순간부터 작용합니다. 새 일의 미지적(未知的) 성격은 3절에 나오는 성취의 돌발적 성격(‘홀연히’)에 상응합니다. 7b절은 56절과 유사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새 일들은 다른 신들을 통해 알려진 적이 없는, 하나님께서 지금 창조하신 일들이기에 누구도 이를 알고 있었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새 일들에 대한 신들의 무지는 이들의 무능력과 이들이 헛것임을 보여줍니다. 새 일들의 선포를 듣고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의 역사도 지배하시는 참 하나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용상 7a절에 직접 연결되는 8a절은 이스라엘을 책망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 창조된 새 일의 ‘새로움’을 강조하는 언급입니다. 새 일에 관해서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들어본 적도 없고, 그렇기에 당연히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3) 들어본 적이 없는 ‘새 일’(8)

 

“네 귀가 옛적부터 열리지 못하였나니”도 들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일이 선포될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새 일을 이제야 알려주시는 이유는 이들이 배반만 하고 ‘모태에서부터 배역한 자’라 불릴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8b).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돌봄과 관심의 대상’이던 이스라엘(참조. 44:1,24; 49:1, 5)이 여기서는 ‘모태에서부터 반역자’로 언급입니다. 이스라엘의 배반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본성에 속하는 악행이었습니다. 요약하면, 예로부터 알게 한 “처음 일들”을 들으려 하지 않은 이스라엘이 “새 일”도 듣지 않을 것이기에 이들에게 미리 알려지지 않고 ‘지금’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새 일’의 선포 근거(9-11)

이스라엘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신실하게 살아갈 능력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지금도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실망 시켜 드립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높이지 못한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새 일을 행하심으로 친히 드러내실 것입니다.

 

9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10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11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9-1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에도 불구하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그들을 멸절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징계의 과정을 통해 연단하기는 하시지만, 새 일을 행하셔서 그들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1) ‘내 이름을 위하여’ 참으시는 분(9)

 

그 목이 쇠의 힘줄이고 그 이마가 놋인(4), 모태에서부터 배역한 자인(8) 이스라엘의 구원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습니까? “처음 일들”의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멸망에 떨어진 이스라엘이 “새 일”의 선포에 긍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 쪽에서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구원이 하나님의 자기결정에 의해 그 문이 열립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이름과 당신 영광(명예)을 위해 노여움을 참고 분노를 억눌러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지 않으십니다(9).

 

(2) 이스라엘의 연단(10)

 

하나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연단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행동을 일러 모태에서부터 배역하였다고 평가하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잘못과 죄악에 대해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나를 위하여’ 이루시는 분(11)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11)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통해 당신 능력을 과시하시고 당신 이름의 영예를 회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은혜로 선택하셔서 구원하심으로 당신의 백성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는 완악함 때문에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높이지도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성품과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드러내는 것도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고 인도하셔야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된 것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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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47-01)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이사야 47장 1-15절


 

근동의 패권을 장악한 바벨론은 오만해져 그들의 번영이 자신의 힘과 지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고통 위에서 사치와 부를 누리면서 자신의 나라가 영원할 것처럼 자고합니다. 하지만 그 영광이란 한낮의 꿈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에 빠진 바벨론을 어떻게 심판하십니까?

 

  • 민족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던 바벨론의 운명이 만군의 여호와에 의해 멸망으로 결정 납니다. 예루살렘과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하고 많은 사람이 포로로 잡혀갔던 것처럼 바벨론도 멸망당하고 주민들이 사로 잡혀간다. ‘여러왕국의 여주인’이 보좌에서 내려와 땅바닥에 앉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당신 백성을 위하여 바벨론에 보복하십니다.

 

내려와서 티끌에 앉으라(1-4)

작은 나라에 사는 한 사람이 강대국의 멸망을 예언한다면 다들 코웃음을 칠 것입니다. 이처럼 아사야의 예언은 당시에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었지만, 그는 당당하게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합니다. 국가나 도시의 이름은 여성명사로 취급되기 때문에 이사야는 바벨론을 여성에 비유하는데, 흥미롭게도 그 여성의 연령대를 조금씩 높이며 그 예언을 진행합니다.

 

1처녀 딸 바벨론이여 내려와서 티끌에 앉으라 딸 갈대아여 보좌가 없어졌으니 땅에 앉으라 네가 다시는 곱고 아리땁다 일컬음을 받지 못할 것임이라 2맷돌을 가지고 가루를 갈고 너울을 벗으며 치마를 걷어 다리를 드러내고 강을 건너라 3네 속살이 드러나고 네 부끄러운 것이 보일 것이라 내가 보복하되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리라 4우리의 구원자는 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니라(1-4)

 

바벨론은 무너졌습니다. 바벨론은 처녀 딸같이 곱고 아리따운 존재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흠모하고 존경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수욕과 치욕을 당할 것입니다. 보좌가 아닌 티끌과 땅에 앉게 될 것입니다.

 

(1) 땅바닥에 앉는 바벨론(1)

 

민족들을 짓밟으며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처녀 딸 바벨론”에 멸망과 사로잡힘의 심판이 선포됩니다. 화려함을 자랑하던 여왕 바벨론은 보좌에서 내려와 티끌에 앉아야 합니다(1). ‘티끌에 앉다’는 자주 탄식과 관련돼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낮아짐을 상징합니다. ‘세계를 황무하게 하며 성읍을 파괴하던’(14:17) 바벨론이 그 위엄과 영화를 빼앗기고 땅바닥으로 떨어집니다. 곱고 아리따운 바벨론의 현재 모습이 곧 닥칠 비참한 모습과 대조됩니다.

 

(2) 수치를 당하는 바벨론(2-3a)

 

화려함과 사치를 즐기던 여왕 바벨론이 비천한 여종의 신세로 전락합니다(2). 부유한 집안에서 곡식 가루를 내기 위해 맷돌을 돌리는 일은 여종의 일에 속했습니다. “너울을 벗으며”도 바벨론의 쇠락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너울은 귀족 집안의 여자들이 얼굴을 가리는 데 쓰는 천입니다. 여종이 된 바벨론에게 너울은 맷돌질을 하는 데 방해만 되기에 벗어버립니다. ‘치마’는 바닥에 끌리는 긴 옷자락을 가리킵니다. 왕궁에서 사치와 품위를 자랑하며 입던 자락이 길게 끌리는 옷은 강을 건너는 데 짐만 될 뿐입니다. 사로잡히거나 도주하는 여왕 바벨론은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고 다리를 드러낸 채 강을 건넙니다. 속살(알몸)이 드러나고 치부까지 보이게 됩니다(3a).

 

(3) 여호와의 보복(3b)

 

바벨론의 멸망이 정치적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보복하시는 사건입니다(3b). 하나님의 보복은 원래 사법적 영역에 속한, 특히 ‘피의 복수’ 제도(참조. 창 4:15,24; 출 21:20)에서 나온 개념으로 훼손된 법질서의 회복을 목표로 합니다.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리라”는 단호한 보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의지에 맞서는 자는 누구라도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4) 우리의 구원자 만군의 여호와(4)

 

4절은 신뢰의 고백이 담긴 찬양입니다. 만군의 여호와는 ‘우리의 구원자’의 이름입니다. 구원자(고엘)는 씨족 구성원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권리를 찾아주는 가까운 친척을 가리킵니다. 그는 ‘피를 보복하는 자’로 살인자를 만나면 죽여야 합니다(민 35:19,21,24-27).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권리를 되찾아 주는 고엘 자격으로 바벨론에 보복하십니다.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는 ‘우리의 구속자’에 대한 찬양의 언어입니다.

 

내가 영영한 여주인이 되리라(5-7)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짓밟고 혹사시켜 취한 번영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부가 가혹하고 비인간적인 처우 위에서 누리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까닭은 무자비함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지 않았고 노인들에게조차 무거운 멍에를 지웠습니다.

 

5딸 갈대아여 잠잠히 앉으라 흑암으로 들어가라 네가 다시는 여러 왕국의 여주인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리라 6전에 내가 내 백성에게 노하여 내 기업을 욕되게 하여 그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거늘 네가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늙은이에게 네 멍에를 심히 무겁게 메우며 7말하기를 내가 영영히 여주인이 되리라 하고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지도 아니하며 그들의 종말도 생각하지 아니하였도다(5-7)

 

바벨론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잠깐 쓰임 받은 종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만했고, 지나치게 포악하게 이스라엘을 대했습니다. 마치 자신이 이스라엘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했습니다. 또한 모든 열국의 여주인처럼 행세하며 포악함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 흑암으로 돌아가야 하는 바벨론(5)

 

앗수르처럼 바벨론도 교만에 사로잡혀 멸망의 길을 갑니다. 갈대아는 보좌에서 내려와 티끌에 잠잠히 앉아 있다가 흑암으로 들어가야 합니다(5). 흑암은 멸망과 심판을 상징합니다. “여러 왕국의 여주인”은 바벨론의 정치적 위상을 보여줍니다. 바벨론을 지칭하는 ‘여주인’은 2절에 묘사된 여종과 대조됩니다. ‘왕국들의 여주인’이라 불리는 바벨론이 맷돌을 돌리는 여종이 됩니다.

 

(2) 여호와의 백성을 학대한 바벨론(6)

 

바벨론의 운명이 이스라엘의 심판에 연계됩니다(6). 여호와께서는 당신 백성의 배반에 분노하셔서 바벨론의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동정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억압했습니다. 존경과 배려의 대상인 노인에게도 멍에를 무겁게 짊어지웠습니다. 유배민에 대한 바벨론의 잔혹하고도 비인간적인 처우를 고발하십니다.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점령과 유배는 하나님의 결정이기에 책망의 대상이 아닙니다. 바벨론의 역할은 전체적으로 10:5-19에 나오는 앗수르의 역할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구 앗수르가 교만으로 심판에 떨어진 것처럼 바벨론도 같은 운명에 넘겨집니다.

 

(3) 장래 일을 생각하지 않은 바벨론(7)

 

영원한 통치권 주장이 교만의 구체적 내용으로 제시됩니다(7). “내가 영영히 여주인이 되리라.” 현재 문맥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영원한 지배권을 주장했다는 뜻입니다.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자기 기업으로 만들려 했습니다. “이 일[들]”은 6절에 언급된 바벨론의 무자비한 통치 아래 억압당하는 이스라엘의 고통을 가리킵니다. “그들의 종말”은 ‘여호와의 백성을 학대한 결과로 초래될 일’을 가리킵니다.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8-11)

멸망받을 바벨론이 악은 교만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만이 가득합니다. 과부가 되지도 않으며, 자녀를 잃지도 않으리라고 큰소리칩니다. 불행과 아무 상관없이 살 수 없다고 믿습니다. 어떤 누구도 자신에게 고통을 줄 수 없다고 믿습니다.

 

8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 9한 날에 갑자기 자녀를 잃으며 과부가 되는 이 두 가지 일이 네게 임할 것이라 네가 무수한 주술과 많은 주문을 빌릴지라도 이 일이 온전히 네게 임하리라 10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11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8-11)

 

멸망 받을 바벨론의 악은 교만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만이 가득합니다. 과부가 되지도 않으며, 자녀를 잃지도 않으리라고 큰소리칩니다. 불행과 아무 상관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누구도 자신에게 고통을 줄 수 없다고 믿습니다. 숨겨져 있어서 어떤 존재도 자신의 악을 보지 못하며 심판하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1) 자녀를 잃고 과부가 되는 바벨론(8-9)

 

풍족하고 안락한 삶이 바벨론을 교만하게 합니다(8). 사치와 평안은 그 자체로는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업적에 쉽게 도취돼 자기 능력을 절대화합니다.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는 교만의 정체와 본질을 잘 보여줍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성 주장과 문자적으로 거의 동일합니다(43:11; 44:6; 45:5,6,14; 46:9 등). 바벨론이 신적 지위를 주장한 것입니다(참조. 14:13-14).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은 주민의 상실을 의미하고 ‘과부가 됨’은 ‘버려짐’, ‘수치’, ‘보호를 박탈당한 절망적 삶’을 상징합니다. 과부로 나앉지도 않고 자녀들을 잃는 일도 없으리라는 바벨론의 주장은 자녀를 잃고 과부처럼 절망하는 예루살렘의 운명(49:14-21)과 대조됩니다. 그러나 자신은 겪지 않으리라고 확신한 두 가지 일이 “한 날에 갑자기” 바벨론에 들이닥칠 것입니다(9).

 

(2) 모든 지혜에 걸려 넘어지는 바벨론(10-11)

 

정한 때가 되면 바벨론은 자녀를 잃고 과부가 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일”은 바벨론의 운명을 예루살렘의 운명(51:19)과 연결해줍니다. 주술과 주문은 특히 재앙이나 불행을 막는 데 쓰는 제의적 기술이며, 바벨론의 주술과 주문은 고대 근동에서 널리 인정받았습니다. 재앙을 선포하시는 분이 여호와이시기에 바벨론의 수많은 주술과 주문이 쓸모없게 됩니다. 하지만 교만에 취한 바벨론은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을 가졌다고 자기 미래를 자신합니다(10). 바벨론이 의지하는 ‘악’은 앞 절에 나오는 주술과 주문을 가리킵니다. 악의 열매가 재앙이기에 악에 의존하는 자에게 재앙은 운명이 됩니다. “나를 보는 자가 없다”는 은밀한 공간에서 행하는 해로운 마술이나 주술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바벨론은 제의적-주술적 기술을 통해 신의 영역을 넘나들었습니다. 바벨론이 대담하게 말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나름대로 근거가 없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기 지혜와 지식을 확신했습니다. 지혜와 지식은 주술과 주문에 관한 제의적 지식과 기술을 가리킵니다(44:25). 바벨론은 이 지혜와 지식으로 재앙을 예측하고 막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바벨론이 의지하는 주술과 주문은 ‘악’(라아)이기에 ‘재앙’(라아)이 들이닥칩니다(11). 여호와가 내리는 재앙이기에 바벨론의 요술로는 피하지 못하고, 바벨론은 순식간에 멸망에 떨어질 것입니다.

 

주문과 많은 주술을 가지고 맞서 보라(12-15)

바벨론에게 하신 경고는 결국 우리에게 보내시는 하나님의 엘로카드입니다. 우리는 형통할 때 그 번영에 취해 하나님의 사인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장입니다. 그런 면에서 바벨론은 우리의 반면교사입니다. 섰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주의해야 될 때임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12이제 너는 젊어서부터 힘쓰던 주문과 많은 주술을 가지고 맞서보라 혹시 유익을 얻을 수 있을는지, 혹시 놀라게 할 수 있을는지, 13네가 많은 계략으로 말미암아 피곤하게 되었도다 하늘을 살피는 자와 별을 보는 자와 초하룻날에 예고하는 자들에게 일어나 네게 임할 그 일에서 너를 구원하게 하여 보라 14보라 그들은 초개 같아서 불에 타리니 그 불꽃의 세력에서 스스로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 이 불은 덥게 할 숯불이 아니요 그 앞에 앉을 만한 불도 아니니라 15네가 같이 힘쓰던 자들이 네게 이같이 되리니 어려서부터 너와 함께 장사하던 자들이 각기 제 길로 흩어지고 너를 구원할 자가 없으리라(12-15)

 

바벨론은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자 바벨론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립니다. 바벨론이 자랑하하던 주문과 많은 주술은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 앞에 주술은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어둠의 세력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1) 바벨론 학문의 무능력(12-13)

 

바벨론이 자랑하는 제의적 수단의 무능력을 조롱합니다(12). 젊어서부터 애써 익혀온 주문과 주술로 어쩌면 재앙을 위협하여 쫓아낼 수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주술사들과 마법사들이 바벨론을 재앙에서 구할 수 있는 다양한 방책을 제시하지만 도움은커녕 피곤하게만 할 뿐입니다. 이들의 많은 조언이 바벨론을 절망에 빠뜨리기에 이번에는 점성술의 전문가들에게 도움을 구해보라고 제안합니다(13). 하지만 점성술도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2) 지푸라기처럼 불에 살라지는 자들(14)

 

점성술사들은 불에 타버리는 지푸라기와 같이 멸망할 것입니다(14). 이들을 태우는 불은 그 앞에 앉아 열기를 쬐거나 몸을 덥힐 숯불이 아닙니다(44:14-15). 점성술사들(천체숭배자들)과 우상을 만드는 자들(우상숭배자들)이 동일한 운명에 떨어질 것을 시사합니다.

 

(3) 구해줄 자 하나도 없는 바벨론(15)

 

바벨론을 돕겠다고 나섰던 자들이 제 목숨도 구하지 못합니다(15). 바벨론이 자랑하는 종교뿐 아니라 바벨론에 쌓인 엄청난 부도 재앙을 막아주지 못합니다. 바벨론에 경제적 부를 가져다주었던 대상들이 살길을 찾아 제각기 흩어져 도망할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 없이 번영을 추구합니다. 타인의 아픔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치와 부를 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은 자의 영혼을 그 밤에 도로 찾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웃 없이 이룩한 번영은 독이 되어 치명적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경외심이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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