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64-01)
풍성한 은총을 주시는 하나님
이사야 63장 15절- 64장 12절
이스라엘에게 임한 어두움은 하나님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죄가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택하신 백성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은혜로 그들을 기억하사 구언해 주셨습니다.
- 7-14절에서 이스라엘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의 구속사를 돌아본 공동체는 하나님을 자신들의 아버지와 구속자로 고백하며 도움을 간구합니다. ‘우리의 아버지’와 ‘우리의 구속자’는 가족의 안녕을 지켜주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언약관계뿐만 아니라 사적-혈연적 관계로 맺어진 사이이기에 자격 없음에도 구해 달라고 매달릴 수 있습니다.
간곡한 자비와 사랑이 내게 그쳤나이다(15-19)
신앙은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어미 새가 배고픈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 주듯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구하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십니다. 믿고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신앙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15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께서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사랑이 내게 그쳤나이다 16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17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하건대 주의 종들 곧 주의 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 18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 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우리의 원수가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 19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되었나이다(15-19)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죄를 여호와께 돌립니다.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냐고 묻습니다. 바로처럼 완고한 마음을 주셔서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주님 때문에 성소에 우상이 가득하고, 주님 때문에 제사장들이 타락했고, 주님 때문에 백성이 하나님을 멀리합니다.
(1) 탄식과 신뢰의 고백(15-16)
여호와께서 사랑과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큰 은총을 돌아본 예언자는 이제 시선을 하늘로 돌립니다. 공동체를 대표해서 하늘의 하나님께서 굽어살피시고 개입해주시길 간청합니다(15; 시 80:14).
과거의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과 “간곡한 자비와 사랑”이 다시 나타나길 호소합니다. 하늘은 여호와의 처소로 이중적 의미를 갖습니다. 한편으로는 거리감 곧 그분의 물러나심을, 다른 한편으로는 그분의 전능하심과 전지하심을 함축합니다. 전자의 입장에 따라 예언자는 64:1-3에서 여호와의 강림을 간구하고, 후자의 입장에 따라 이스라엘의 절망적 현실(17-19)을 호소합니다.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는 64:11의 불에 타버린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과 대비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여호와의 왕권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하늘에서 모든 것을 굽어보시는 분은 “우리의 아버지”시고, 그분의 이름은 옛날부터 “우리의 구속자”이십니다(16).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는 구약성경에 드물게 사용되며(신 32:6),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내밀한 관계를 담은 표현입니다. 신학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양자로 삼으셨기에(참조. 출 4:22; 1:2;64:8; 렘 3:19; 호 11:1) 이스라엘은 그분을 ‘우리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의 의미는 불분명합니다.
아마도 공동체의 절망적 현실을 강조하기 위해, 곧 여호와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간절히 호소하기 위해 족장들을 언급한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족장 야곱을 가리킵니다. ‘아버지’처럼 ‘구속자’도 친족 관계에 뿌리를 둔 개념으로 하나님(아버지)께 범죄한 이스라엘(자녀들)이 그분께 매달릴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줍니다.
(2) 관계 회복의 호소(17)
이어서 예언자의 시선이 하늘의 하나님에게서 공동체로 이동합니다(17).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는 말이 아닙니다. 히브리적 사고에 따르면 땅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결정에 속합니다. 죄와 악도 그분의 능력과 통제 안에 있으며 그분의 의지에 따라 허락되거나 저지됩니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에 내재하는 긴장 관계를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6:9-10). 하나님께서 죄를 허락하셨기에 용서의 은총 또한 그분께 구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는 죄의 허락에 당혹감을 느끼면서도 그분께 대한 신뢰심을 잃지 않고 “주의 종들”을 생각하시어 돌아와 달라고 호소합니다. 하나님께서 돌아오실 때만 공동체의 죄와 죄 짐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주의 기업인 지파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에 속함을 보여줍니다.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을 움직이기 위해 예언자는 공동체가 처한 참담한 상황을 그분께 알립니다.
(3) 원수들에 짓밟힌 성소(18-19)
여호와의 성소는 주전 587년 바벨론 점령군에 의해 유린당한 이후 폐허로 남겨지고(18), 그분의 백성은 민족들의 지배를 받습니다(19). 예언자는 여호와의 종들이 민족들의 종들이 됐는데도 관심을 보이지 않으신다고 탄식합니다.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64:1-5a)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한 것은 죄를 짓는 일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공로는 한낱 누더기처럼 더러울 뿐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구속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누립니다.
1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2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3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 4그들이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밤을 지내며 돼지 고기를 먹으며 가증한 것들의 국을 그릇에 담으면서 5사람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자리에 서 있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 (1-5a)
이사야는 계속하여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이스라엘을 내버려 두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회개하도록 이끌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밖에 해결할 이가 없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민족들을 떨게 할 주의 강림(64:1-2)
하나님만이 공동체의 운명을 극적으로 전환할 수 있기에 “우리”는 격정적으로 그분의 개입을 호소합니다. 가려놓은 칸막이를 부수고 감추어졌던 모습을 드러내듯, 하나님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와주시길 간구합니다(la). ‘산들의 진동’과 ‘불’은 하나님께서 강림하실 때 나타나는 자연의 격변 현상입니다(1b-2a). 예언자는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고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하시길 간구합니다(2b).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민족들 가운데 더러워졌기에 이스라엘의 구원은 그분의 능력을 과시하고 인정받는 사건이 됩니다. 하나님의 현현은 그분의 성소를 유린한 민족들에게는 파멸적 재앙이기에 무서워 떨게 됩니다.
(2) 놀라운 일을 행하신 분(3-4)
‘우리’는 다시 과거를 회상합니다. 이스라엘은 예상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강림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3).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에는 공동체의 기대감과 신뢰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전에는 예기치 못한 때에 개입하셔서 구원해주셨는데, 지금도 생각하지 못한 때에 당신 백성의 역사에 개입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강림이기에 “두려운 일” 보다는 ‘놀라운 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우리’는 과거 경험으로부터 신학적-고백적 결론을 이끌어냅니다(4-5a). 여호와처럼 당신 백성을 위해 산들을 뒤흔들며 역사에 개입했던 신은 없습니다. 여호와만이 당신을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당신의 구원을 고대하는 자들에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3) 선대하시는 분(5a)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에 근거해서 바르게 행동하는 자를,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길로 성실하게 걸어가며 그분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자를 가리킵니다.
'아직도 가만히 계시려 하나이까'(64:5b-12)
인간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위기에 빠져 있어도 주의 이름을 부르지도, 주를 붙잡지도 못합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감히 하나님께 요청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정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로 인해 돌이키셨고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셨습니다.
5…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라 하나니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종일 타는 불이로다 6보라 이것이 내 앞에 기록되었으니 내가 잠잠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보응하되 그들의 품에 보응하리라 7너희의 죄악과 너희 조상들의 죄악은 한 가지니 그들이 산 위에서 분향하며 작은 산 위에서 나를 능욕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먼저 그들의 행위를 헤아리고 그들의 품에 보응하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8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포도송이에는 즙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것을 상하지 말라 거기 복이 있느니라 하나니 나도 내 종들을 위하여 그와 같이 행하여 다 멸하지 아니하고 9내가 야곱에게서 씨를 내며 유다에게서 나의 산들을 기업으로 얻을 자를 내리니 내가 택한 자가 이를 기업으로 얻을 것이요 나의 종들이 거기에 살 것이라 10사론은 양 떼의 우리가 되겠고 아골 골짜기는 소 떼가 눕는 곳이 되어 나를 찾은 내 백성의 소유가 되려니와 11오직 나 여호와를 버리며 나의 성산을 잊고 갓에게 상을 베풀며 므니에게 섞은 술을 가득히 붓는 너희여 12내가 너희를 칼에 붙일 것인즉 다 구푸리고 죽임을 당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하며 내가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나의 눈에 악을 행하였으며 내가 즐겨하지 아니하는 일을 택하였음이니라(5b-12)
하나님의 강림을 간구하고 그분께 대한 신뢰를 고백한 후에 공동체는 죄를 고백합니다. 현재의 비참한 형편이 자신들의 범죄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결과임을 인정합니다.
(1) 죄의 고백과 탄식(5b-7)
5b절은 죄에 사로잡힌 공동체가 자신들의 무능력을 탄식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6-7절은 공동체의 절망적인 영적 상태를 기술합니다. “더러운 옷”은 월경 중에 있는 여자의 더러운 웃이며 완전한 멸망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는 죄에 사로잡힌 자들의 필연적 결말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진노로 침묵하시기에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경배하는 자도 없고, 그분을 붙잡으려고 애쓰는 자도 없습니다. 죄에 대한 징계로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시고 외면하셨기에 더욱 죄악의 늪에 빠집니다. 구원의 지체 또는 부재가 자신들의 죄 때문임을 깨달은 공동체는 이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께 나아갑니다.
(2) 용서와 간구(8-9)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기에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8). 그분은 당신 손으로 지은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는 이스라엘의 출생과 존재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적임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손의 작품이기에 자신을 만드신 분께 관심을 가져주길 간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이기에 죄에 대한 의로운 분노를 풀고 용서해달라고 애원할 수 있습니다(9).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는 심판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 가엾이 여겨 용서해주시길 간청하는 말입니다. 공동체는 자신들의 절망적 형편을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3) 황폐해진 성읍과 성전(10-11)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유다의 모든 성읍이 황폐하여 광야가 됐습니다(10). “광야가 되었으며”의 반복적 사용은 폐허의 철저성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살던 성읍들이 폐허가 돼 짐승들의 차지가 됐습니다. 조상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를 드리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은 불에 타서 잔해만 흉물스럽게 남았습니다(11). “우리가 즐거워하던 곳”은 집과 밭과 포도원을 가리킨다. 공동체의 생존 공간인 예루살렘과 유다의 성읍들, 종교적 구심점인 여호와의 성전, 개인의 생존 기반에 속하는 집과 경작지가 모두 파괴돼 황무지가 됐습니다.
(4) 개입의 호소(12)
63:7에서 시작된 긴 탄식이 간절한 마음으로 개입을 촉구하는 질문으로 끝을 맺습니다(12). 성전을 비롯하여 모든 것이 폐허가 됐는데도 끝내 가만히 계시렵니까? 저희를 이토록 심히 괴롭게 하시렵니까?
이사야는 소망 없는 땅에서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찢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무너지고 파괴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오시지 않으면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민족의 미래를 고독하게 바라보는 선지자 이사야의 눈물을 읽는 자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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