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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14-01)


신앙과 용기로 무장한 요나단

사무엘상 14장 1-23절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은 큰 무리를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작을지라도 믿음의 사람을 사용합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많은 숫자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통해서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믿음의 사람은 위기를 당할 때 그 진면목(眞面目)이 드러납니다. 그때는 먼저 자신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우리 힘이나 능력으로 해설할 수 없을 것 같은 위기를 만날 때, 우리는 믿음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 블레셋과의 대규모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두려움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임하여 정신없이 도망하는데, 크게 혼란스러웠으므로 자기들끼리 죽이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사울의 군대가 블레셋을 쫓아가 쳤고, 블레셋 진영에 속하던 히브리 사람들이 이스라엘 군대와 합류했으며, 에브라임 산지에 숨어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뛰어나와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전쟁 전의 상황(1-5)

 

믿음의 행동이라고 떠들썩하거나 과시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행동으로 실천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부족할 때, 조용하게 그 필요를 채워주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소리보다 조용한 실천을 요구하는 시대입니다. 골방으로 들어가서 나라를 위해, 지역을 위해, 믿음의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는 백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1하루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건너편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로 건너가자 하고 그의 아버지에게는 아뢰지 아니하였더라 2사울이 기브아 변두리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에 머물렀고 함께 한 백성은 육백 명 가량이며 3아히야는 에봇을 입고 거기 있었으니 그는 이가봇의 형제 아히둡의 아들이요 비느하스의 손자요 실로에서 여호와의 제사장이 되었던 엘리의 증손이었더라 백성은 요나단이 간 줄을 알지 못하니라 4요나단이 블레셋 사람들에게로 건너가려 하는 어귀 사이 이쪽에는 험한 바위가 있고 저쪽에도 험한 바위가 있는데 하나의 이름은 보세스요 하나의 이름은 세네라 5한 바위는 북쪽에서 믹마스 앞에 일어섰고 하나는 남쪽에서 게바 앞에 일어섰더라(1-5)

 

본문은 13:16-19과 연결되어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사울이 왕으로 등극한 후, 첫 번째 전쟁은 블레셋과의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서 사울의 믿음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소수의 사울 군대와 대규모 블레셋 군대가 대치하고 있는 위기의 상황에서 다시 요나단이 등장합니다.

 

(1) 요나단의 결심(1-3)

 

요나단은 겁 없이 블레셋을 자극하여 현재 상황을 만든 장본인입니다. 수적 열세가 심하기 때문에 감히 블레셋과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대치만 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자신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건너편에서 진을 치고 있는 블레셋 부대로 가자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았다고 화자가 설명해주면서 이 일이 전적으로 요나단이 단독으로 벌인 일이었음을 강조하며, 사울이 가만히 있는 것과 요나단의 역동적인 모습을 대조합니다.

 

2-3절은 당시 사울의 군대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기브아 부근의 미그론의 석류나무 아래 앉아 있었고, 그와 함께하는 육백 명의 군사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사장인 아히야가 에봇을 가지고 그곳에 같이 있었습니다. 에봇은 원래 대제사장의 옷으로 하나님의 신탁을 받을 때 입는 옷입니다. 당시 전쟁할 때는 하나님의 신탁을 듣기 위해서 항상 제사장들이 같이 전쟁터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울도 전쟁에 대한 하나님의 신탁을 듣기 위해 아히야를 대동한 것입니다.

3절에서 아히야의 족보가 나오는데, 그는 엘리의 증손이고 비느하스의 손자이며 이가봇의 조카입니다. 이것을 보면 엘리 가문이 여전히 제사장직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울은 전쟁에서 하나님의 신탁을 듣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지만, 정작 움직이지는 못하고 상황만 살피고 있었습니다.

 

(2) 지형 소개(4-5)

 

요나단이 블레셋으로 건너가려는 지형에 대한 설명으로 그곳은 아주 가파르고 험한 바위들이 있는 험준한 지형입니다. 아마도 매우 험하기로 유명하기 때문에 바위에 보세스와 세네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요나단이 가려고 한지형이 매우 험준하다는 것을 말하는 이유는 요나단이 이런 험한 길인데도 용기를 잃지 않고 무모한 도전을 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의 표징을 구하는 요나단(6-10)

하나님의 역사는 세상의 위대한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는 보잘것없는 작은 믿음의 사람을 통해 이루어가십니다. 마치 걷잡을 수 없는 큰 산불도 작은 불씨가 시작한 것처럼, 작고 힘이 없어 보지만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6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7무기를 든 자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이다 8요나단이 이르되 보라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로 건너가서 그들에게 보이리니 9그들이 만일 우리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너희에게로 가기를 기다리라 하면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 가만히 서서 그들에게로 올라가지 말 것이요 10그들이 만일 말하기를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하면 우리가 올라갈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넘기셨음이니 이것이 우리에게 표징이 되리라 하고(6-10)

 

이런 상황에서 요나단은 사울처럼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자신들이 움직이면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라고 고백하며 블레셋 부대로 가서 싸우려 합니다.

여기서 ‘건너가자’는 것은 싸우러 가겠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대범한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여호와의 구원이 사람 수의 많고 적음에 제한받지 않는다는 신앙 때문입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전쟁에 나서신다면 자신과 자신의 종 두 사람만으로도 충분히 바다의 모래같이 많은 블레셋 군대를 이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전쟁은 전적으로 여호와의 손에 달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움직인다고 해서 하나님도 움직여주셔야 한다는 기계적 신앙은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혹시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실지 누가 알겠느냐?’라는 말을 통해서 여호와께서 자신의 움직임에 동의해주시고 안 해주시고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에 달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여호와의 손에 달렸다는 요나단의 신앙은 아버지 사울이 품지 못했던 그 신앙입니다. 후에 사무엘상 17:47에서 다윗이 요나단과 동일한 신앙 고백을 하며 골리앗을 죽인 후 하나님의 사랑받는 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원하신 신앙이 이것입니다. 아무리 사울이 왕이어도 여전히 이스라엘의 왕은 여호와이시고 전쟁은 여호와의 손에 달렸기 때문에 여호와만을 바라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이 신앙이 어떤 큰 위력을 발하는지 블레셋 습격 사건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나단은 전쟁을 해도 좋은지 아닌지 여호와의 뜻을 알기 위해 징조를 구합니다. 그는 블레셋 부대 앞에 가서 자신들을 보이고, 거기에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 올라가지 않고 또 올라오라고 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신의 손에 넘기신 징표로 알고 올라가 블레셋과 싸우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행동인데, 블레셋 주둔 부대가 있는 곳에 달랑 둘이 가서 그들에게 정면으로 노출되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목숨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뜻이면 전쟁에 이겨 살겠고, 아니면 죽어도 좋다는 태도입니다.

 

요나단이 블레셋 진영을 침(11-15)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을 대신하여 영적 전쟁을 감당해 주십니다. 믿음으로 담대히 실천하는 자와 함께하사 같이 싸워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같이 싸워 주시면 그 수가 적고 무기가 변변치 않더라도 승리하게 마련입니다.

 

11둘이 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보이매 블레셋 사람이 이르되 보라 히브리 사람이 그들이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 하고 12그 부대 사람들이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너희에게 보여 줄 것이 있느니라 한지라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나를 따라 올라오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느니라 하고 13요나단이 손 발로 기어 올라갔고 그 무기를 든 자도 따랐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 앞에서 엎드러지매 무기를 든 자가 따라가며 죽였으니 14요나단과 그 무기를 든 자가 반나절 갈이 땅 안에서 처음으로 쳐죽인 자가 이십 명 가량이라 15들에 있는 진영과 모든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고 부대와 노략꾼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11-15)

 

요나단의 용기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블레셋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요나단의 전투를 도와 적군 블레셋 사람들에게 혼란과 두려움 속에 빠뜨리십니다.

 

(1) 블레셋 사람의 조롱(11-12)

 

요나단과 그의 좋은 모든 것을 여호와께 맡긴 채 블레셋 부대 쪽으로 건너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을 본 블레셋 사람들은 히브리 사람들이 이제야 굴에서 나온다며 비웃었습니다. 그리고 이리로 올라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요나단이 기다리던 하나님의 징조입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알려줄 것이 있다’고 말한 것이 조롱이든 협박이든 이 상황에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올라오라’는 말을 통해 여호와께서 블레셋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단의 말대로 징조를 주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응답을 들은 요나단은 손과 발로 기어서 블레셋 진영으로 올라갔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손발로 기어서 절벽을 올라오는 요나단과 그의 병기든 자를 보고 다가올 자신들의 운명도 모른 채 비웃으며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2) 요나단의 승리(13-15)

 

그런데 요나단 일행이 다 올라오자 상황은 완전히 반전되어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고, 병기를 든 자는 쓰러진 자를 재빨리 죽이며 블레셋 진영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재빠르게 죽였는지를 표현하기 위해 14절에서 대략 130-180미터 되는 거리 안에서 20명가량을 죽였다고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요나단과 무기를 든 자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이 전쟁에 개입하셨습니다. 15절에서 언급하는 떨림은 여호와께서 블레셋 진영에 일으키신 지진으로 여호와께서 초자연적인 힘으로 블레셋을 치신 것입니다.

 

블레셋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16-23)

오늘날 개인 편의주의에 따라 ‘나 홀로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려 합니다. 반대로 요나단과 같은 믿음의 일꾼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처럼, 믿음의 한 사람으로 전체 믿음의 공동체를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주의 편에 서는 일이 때론 외롭고 힘겹고, 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하찮은 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늘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 편에 서시도록 묵묵히 순종해야 합니다.

 

16베냐민 기브아에 있는 사울의 파수꾼이 바라본즉 허다한 블레셋 사람들이 무너져 이리 저리 흩어지더라 17사울이 자기와 함께 한 백성에게 이르되 우리에게서 누가 나갔는지 점호하여 보라 하여 점호한즉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자가 없어졌더라 18사울이 아히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이리로 가져오라 하니 그 때에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있음이니라 19사울이 제사장에게 말할 때에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 소동이 점점 더한지라 사울이 제사장에게 이르되 네 손을 거두라 하고 20사울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백성이 모여 전장에 가서 본즉 블레셋 사람들이 각각 칼로 자기의 동무들을 치므로 크게 혼란하였더라 21전에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하던 히브리 사람이 사방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진영에 들어왔더니 그들이 돌이켜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합하였고 22에브라임 산지에 숨었던 이스라엘 모든 사람도 블레셋 사람들이 도망함을 듣고 싸우러 나와서 그들을 추격하였더라 23여호와께서 그 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므로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16-23)

 

세상을 살아가면서 악한 세력은 힘으로 성도를 핍박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성도의 신앙이나 선한 양심을 꺾거나 산 소망을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먼저 적들이 성도들의 능력을 알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나가길 바랍니다.

 

(1) 상황 파악(16-17)

 

이런 블레셋 진영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사울 진영의 파수꾼이 보고서, 사울에게 보고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사울은 혹시 이스라엘 군사 중에 누가 가서 혼란을 일으킨 것은 아닌가 확인하기 위해 점호를 명령하였습니다. 그 결과 자기 아들 요나단과 무기 든 자가 없는 것을 알게 됩니다.

 

(2) 신탁을 묻는 사울(18-20)

 

사울은 이를 통해 블레셋의 혼란이 요나단 때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상적인 행동이라면, 아버지로서 전쟁에 나간 아들을 보며, 물불 안 가리고 현장에 나갈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이런 상황을 피해 보려는 마음으로 블레셋을 치러 나갈지를 여호와께 묻는다고, 제사장 아히야에게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라고 명령합니다. 여전히 가만히 앉아서 여호와의 신탁이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탁을 기다리는 동안에 전장에서는 혼란이 더 심해졌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를 더 지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신탁받는 것을 중지합니다.

 

여호와의 뜻을 묻는 요나단과 사울의 방법은 크게 대조됩니다. 요나단은 목숨을 하나님께 맡기고 움직이면서 여호와의 뜻을 구했지만, 사울은 안전한 곳에서 여호와의 뜻이 확실해지면 움직이겠다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블레셋 진중에서 요나단과 그의 무기든 자는 목숨을 걸고 블레셋과 전투하고 있는데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며 안전히 기브아에서 미적 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화자는 우리가 누구를 닮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3) 전쟁 참여한 사울(21-22)

 

이제 전투는 요나단의 전투에서 이스라엘 전체의 전투로 번집니다. 블레셋 진영에 사울의 부대가 도착하자 블레셋을 돕던 히브리 사람들도 이스라엘과 사울과 요나단의 편에서 돕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산지에 숨어있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모두 몰려나와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요나단이 시작한 전투는 모든 이스라엘이 힘을 합하고 여호와께서 도와주셔서 승승장구하였고, 블레셋 사람들을 베냐민 내륙 지역에서 벧아웬까지 몰아내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전쟁은 여호와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여호와의 일을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도우실 뿐만 아니라 돕는 자들을 계속해서 붙여주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역사를 이루어갑니다. 믿음의 사람 요나단을 통해 이스라엘 전체를 구원하셨습니다. 이처럼 공동체 내에서 한 사람의 믿음이 중요합니다. 어떤 두려움과 위기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지켜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담대하게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을 신뢰한 만큼 나타납니다. 한 사람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구성원이 하나님의 기적을 맛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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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13-02)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한 결과

사무엘상 13장 13-23절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곧 생명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본분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종교적 행위에 열심을 내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명령에 언제나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지지 않은 사울을 책망합니다. 그의 나라가 오래가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마음에 맞는 사람을 백성의 지도자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사울과 함께한 백성은 약 600명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철공이 없어서 칼이나 창은 사울과 요나단에게만 있었습니다.

 

사울을 향한 책망(13-15a)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분의 말씀을 바르게 알고 철저히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종교적 열심을 통해 복을 받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13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14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15사무엘이 일어나 길갈에서 떠나 베냐민 기브아로 올라가니라(13-15a)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권위와 명령에 온전히 순종한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전쟁은 거룩한 전쟁, 하나님의 전쟁을 감당해야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군대는 하나님의 군대여야 합니다. 그리고 왕이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먼저 왕이 하나님의 권위에 온전히 순종하고 그리고 전쟁의 승패가 군인의 숫자나 무기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확신시켜야 될 사람이 왕입니다.

 

(1) 사무엘의 책망(13-15a)

 

사울은 왕으로 세워진 후에 공식적으로 수행하는 첫 번째 전쟁이 블레셋과의 전투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범합니다.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사무엘이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기로 약속한 시간에 오지 않았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군사들이 요동하며 흩어지는 상황을 위기로 여겨 직접 번제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겼습니다. 당시 다른 나라들은 왕이 곧 제사장이고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제사까지도 병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왕과 제사장의 직분이 구분되어 있었기에 왕이 제사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이 드린 제사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종교의식을 통해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하고, 긍극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려 있음을 알았기에 사울의 제사를 망령된 것이라고 선언합니다(13).

 

사무엘은 사울은 기다리지 못하고 직접 제사를 집례하고 드립니다. 그 결과 사무엘은 사울을 질책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질책하는 핵심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린 제사라 하더라도 다른 목적과 의도가 숨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망령된 행위일 뿐입니다. 사울은 종교 행위에 열심을 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 그 말씀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순종하지 않았기에 그의 왕위에 타인에게 넘어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새롭게 세워질 것이라고 선언합니다(14).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지도자는 능력이 탁월하지만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 그분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떠나간 후에 사울은 사울의 고향인 베냐민 기브아로 올라갑니다(15a).

 

블레셋과 대치 중인 사울의 군대(15b-18)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 자신이 범한 죄는 자신과 자신에게 속한 자들을 실족시킬 뿐 아니라 죄의 세력에게 더 큰 용기를 줍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자의 삶은 비참하고 쇠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죄는 우리의 삶을 파산시키는 무서운 적입니다(롬 6:23).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현실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깨닫고 실제적인 준비와 활동을 하지만, 종교행위만 붙잡고 있는 사람은 엉뚱한 열심만 내다가 모든 자원을 허비합니다.

 

15…사울이 자기와 함께 한 백성의 수를 세어 보니 육백 명 가량이라 16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그들과 함께 한 백성은 베냐민 게바에 있고 블레셋 사람들은 믹마스에 진 쳤더니 17노략꾼들이 세 대로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나와서 한 대는 오브라 길을 따라서 수알 땅에 이르렀고 18한 대는 벧호론 길로 향하였고 한 대는 광야쪽으로 스보임 골짜기가 내려다 보이는 지역 길로 향하였더라 19그 때에 이스라엘 온 땅에 철공이 없었으니 이는 블레셋 사람들이 말하기를 히브리 사람이 칼이나 창을 만들까 두렵다 하였음이라 20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각기 보습이나 삽이나 도끼나 괭이를 벼리려면 블레셋 사람들에게로 내려갔었는데 21곧 그들이 괭이나 삽이나 쇠스랑이나 도끼나 쇠채찍이 무딜 때에 그리하였으므로 22싸우는 날에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백성의 손에는 칼이나 창이 없고 오직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만 있었더라 23블레셋 사람들의 부대가 나와서 믹마스 어귀에 이르렀더라(15b-23)

 

오늘날 성도의 싸움에서도 역시 문제가 되는 것은 유능한 무기의 유무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느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전쟁에 능하신 분으로 우리를 넉넉히 이기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1) 이스라엘 군대(15b-16)

 

사무엘이 떠난 후 사울은 고양 기브아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자기 곁에 남은 군인의 수를 계수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스스로 번제를 드렸지만, 600명이 남아 있었습니다. 원래 사울은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로 상비군 3,000명을 편성했지만, 현재 5분의 1로 줄어들었습니다(2). 블레셋의 엄청난 군사력에 비하면, 이스라엘은 군대라고 할 수조차 없을 정도입니다(15b).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과 비교했을 때, 너무 미비해서 두려워서 도망간 것입니다.

사울이 백성들이 흩어지는 것을 걱정하는 것은 상황적으로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본문은 하나님의 명령은 지켜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사울과 요나단은 일단 적은 인원수로 베냐민 게바에 진을 쳤습니다.

 

(2) 블레셋 군대(17-18,23)

 

믹마스에 진을 치고 있던 블레셋은 기습조를 셋으로 나누어 베냐민 게바에 600명밖에 없는 사울의 군대를 사방으로 포위하였습니다. 그들은 병거 3만 대와 마병 6천명, 셀 수 없이 많은 보병의 위세와 비교해 보면, 이스라엘은 비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사울의 이스라엘 군대는 이 공격을 막아낼 어떤 능력도 없었습니다. 이처럼 완전히 블레셋의 군대에 둘러싸여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고, 종교 행위에만 매달리는, 껍데기만 남은 신앙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3) 이스라엘의 무기(19-22)

 

이제 사울의 군대의 무기 상태에 대한 설명으로 이스라엘 군대는 무기도 블레셋 군대와 비교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당시에 첨단기구에 속한 철을 다룰 수 있는 철 대장장이가 없었습니다.

블레셋은 당시 철기 문명을 누리고 있었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철을 다스린 기술을 전수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농기구 하나를 고치거나 만들려고 해도 블레셋 사람들의 도움이 없이는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문명사적으로 이스라엘은 아직 청동기 문명에 속해 있었고 블레셋은 농기구나 칼이나 창 같은 무기뿐만 아니라 철로 전차까지도 만드는 발전된 철기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철로 된 무기라고는 칼 두 개밖에 없는 이스라엘과 병거를 3만 대나 가지고 있는 블레셋의 전쟁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절대적으로 열세였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워 이길 승산이 전혀 없었음을 말해 줍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싸워 주셔서 이스라엘은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전쟁은 사람의 능력으로 치를 수 있는 전쟁이 아니며 여호와께서 싸워 주셔야 하는 전쟁이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울은 어떤 환경과 위기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해야 할 분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위기 상황 속에서 두렵고 당황한 나머지 자신의 해야 할 일에 대한 선을 넘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월권(越權)행위로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깨트려 버렸던 것입니다. 위기는 우리가 예측하지 못할 때에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찾아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를 지켜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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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13-01)


두려움 때문에 어리석음을 동반한 사울

사무엘상 13장 1-15절


 

절박한 문제를 만날수록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훈이 실생활에 적용되기란 쉽지 않습니다. 급박한 일이 발생되면, 먼저 자신이 스스로 급한 불부터 끄고, 하나님의 방법은 나중에 찾는 것이 우리의 태도입니다. 이러한 생활이 반복되면 성숙한 믿음으로 성장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조급하고 급한 일이 생겼을 때라도 하나님 앞에 잠잠히 기다려 보고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을 때까지 멈추어 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 본문은 사울이 왕으로서 첫 전쟁을 수행하려고 군대를 이끄는 모습을 기록합니다. 사울이 블레셋의 위협에 대항하여 군데를 모으는데, 그 수가 많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무기도 변변치 않아서 사울과 요나단만 제대로 된 무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선지자 사무엘과의 관계도 처음부터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이미 사울이 아닌 다른 사람을 주권자로 선택하시고 사울의 나라가 길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 준비(1-7)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호하심보다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선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멀지 않아 자신들의 잘못된 선택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보다 사람의 지배를 받고자 선택했던 이스라엘은 그 기대에 못 미치는 연약한 국방력을 소유해야 했습니다.

 

1사울이 왕이 될 때에 사십 세라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이 년에 2이스라엘 사람 삼천 명을 택하여 그 중에서 이천 명은 자기와 함께 믹마스와 벧엘 산에 있게 하고 일천 명은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기브아에 있게 하고 남은 백성은 각기 장막으로 보내니라 3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치매 블레셋 사람이 이를 들은지라 사울이 온 땅에 나팔을 불어 이르되 히브리 사람들은 들으라 하니 4온 이스라엘이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수비대를 친 것과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함을 듣고 그 백성이 길갈로 모여 사울을 따르니라 5○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 명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더라 그들이 올라와 벧아웬 동쪽 믹마스에 진 치매 6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굴과 수풀과 바위 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으며 7어떤 히브리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가되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고 그를 따른 모든 백성은 떨더라 (1-7)

 

본 장은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침공에 대항하여 전쟁한 초기 전쟁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여러 나라들처럼 왕을 원했던 이스라엘은 이제 그들이 왕을 가지게 되자 심히 크고 강한 나라가 될 것이라는 환상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1) 도입부(1)

 

분열 왕국 시대 왕들의 기록을 시작할 때 열왕기는 가장 먼저 즉위 나이와 통치 기간을 소개합니다. 사울의 나이 40세에 등극했다고 소개합니다. 왕으로 등극한 지 2년째 되는 해, 이제 왕으로서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2) 사울 군대의 모습(2-4)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있는 블레셋을 이스라엘에서 몰아내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전쟁을 준비시키십니다.

왕이 된 사울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이스라엘을 지킬 상비군 편성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모두 3,000명을 택하여 자신의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그가 왕으로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군대가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사사시대에는 따로 상비군이 있지 않았습니다. 위기 때마다 또 군대가 필요할 때, 소집 나팔을 불면 자원하는 사람이 몇 명이든 이 자원하는 사람과 함께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했지만, 사울은 이제 3000명 상비군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3000명 군대를 두 개의 부대로 나누어 2,000명은 자신이 지휘하고 1,000명은 아들 요나단이 지휘하게 한 다음 블레셋과의 전쟁을 위해 믹마스와 벧엘과 베냐민 기브아에 배치했습니다(2).

 

군대가 만들어진 후 첫 전투는 요나단에 의해서 시작됩니다(3). 요나단은 베냐민 지파의 도시 게바에 있던 블레셋 수비대를 기습으로 공격합니다. 블레셋 평야에서 볼 때 상당히 내륙 지역인 게바까지 블레셋의 수비대가 있었다는 것은 당시 블레셋이 이스라엘 지역에서 세력을 크게 확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전쟁을 일으킨 요나단의 행동이 옳았느냐 어리석었느냐에 대한 평가는 없습니다.

하지만 13-14장 전체를 보면, 요나단의 행동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행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온 땅에 나팔을 불어 군대를 소집합니다. 상비군 3,000명으로는 블레셋 군대를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울이 블레셋 수비대를 친 일과 이로 인해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불쾌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듣고 사울의 부름에 응하여 길갈로 모였고, 사울과 함께 전쟁을 준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왕과 처음으로 하는 전쟁입니다.

 

(3) 이스라엘의 공포심(5-7)

 

그런데 이스라엘과 전쟁하러 온 블레셋 군대의 숫자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믹마스에 진친 블레셋의 군대는 병거가 30,000명, 마병이 6,000명이었고 나머지 군인들도 바다의 모래같이 많았습니다(5).

너무나 많은 블레셋 군인과 병거 수를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낙심하여, 싸우기도 전에 사기가 땅에 떨어져 공포에 휩싸여 숨을 곳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6). 7절에서는 심지어 요단강을 건너 요단 동편 지역인 갓과 길르앗으로 도망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블레셋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공포가 얼마나 컸는지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시작한 것은 이스라엘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전의를 상실한 쪽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기드온 사사시대에 미디안 군대가 수많은 낙타와 나귀들을 몰고 바다의 모래처럼 쳐들어온 것과 비슷합니다(삿 7장). 이때도 사람들은 동굴에 숨으며 무서워하였습니다. 하지만 기드온 군대도 여호와께서 도와주셨기 때문에 이번에도 분명히 도와주실 것인데, 백성들은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런데 일반 백성들뿐 아니라 전쟁하기 위해 길갈에 모인 군인들도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요나단의 도발이 너무나도 큰 재앙을 불러온 것입니다.

하지만 군사력으로는 싸움이 되지 않는 이 전쟁에서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과 함께 하심을 의뢰하고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때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거룩한 전쟁을 수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은 지금 안정되고 있는 누가 보더라도 왕다운 품위를 갖추고 있었지만, 위기 앞에서 사울 왕의 영적인 참모습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문제점은 블레셋 전쟁에서 군대의 다수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에 있었던 것입니다.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한 사울(8-15a)

 

지도자가 자신의 힘과 능력도 모르고 교만해져서 행해졌던 행동 하면 사람들에게는 부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신뢰를 쌓기보다는, 주변 환경을 두려워하는 백성들로 만들어 버립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삶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과 더욱 깊은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8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9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10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11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12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 13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14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15사무엘이 일어나 길갈에서 떠나 베냐민 기브아로 올라가니라(8-15a)

 

준비되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그 실체가 드러납니다. 항상 영적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주 앞에 서 있습니까! 사울 왕이 왕으로 취임하고 공식적인 왕의 첫 전쟁을 블레셋과의 전쟁을 수행합니다.

 

(1) 사울의 번제(8-9)

 

이렇게 블레셋과 전투의 두려운 상황에서 사울은 선지자인 사무엘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사울은 남들 보기에는 용사요 영웅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능히 이끌만한 지도자처럼 보였지만, 첫 전쟁에서 그의 참모습의 실체와 인격 그리고 신앙이 드러났습니다. 시작은 요나단으로부터 촉발되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에게 하나님께 제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전쟁을 수행하고 길갈에서 기다리라고 7일을 명령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전쟁은 먼저 제사장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승리에 대한 확신 혹은 전쟁 방법에 대한 신탁을 받습니다. 사사기에서도 전쟁 전에 하나님께 묻는 장면들이 여러 번 등장하는데 모두 이런 관습을 전제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약속한 7일 동안 사무엘을 기다렸지만, 사무엘은 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불안해진 백성들은 두려움으로 점점 흩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8). 그렇지 않아도 군대가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백성들이 흩어지는 것을 본 사울은 급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버립니다.

사무엘 선지자의 명령을 어기고 성급한 마음으로 직접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그는 왕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제사장의 자리를 왕이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월권행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급한 마음으로 백성들과 블레셋 군대를 두려워해서 무모한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두려워 도망가는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어쨌든 제사 드리면, 하나님께서 함께하리라는 그의 어리석은 믿음 때문에 그가 스스로 제사를 드립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규제를 무시하는 처사였습니다(9).

 

(2) 사울의 변명(10-12)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사울이 제사를 마치자마자 사무엘 선지자가 등장합니다(10). 조금만 더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렸더라면 사무엘이 와서 하나님께 제사드리고 거룩한 전쟁을 하나님의 축복 속에 수행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의 준비되지 않는 영적인 모습들이 완전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한 모습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사울에게 지금 무슨 일을 한 것이냐며 질문하는데 이것은 아무리 급해도 자신이 올 때까지 기다렸어야 한다는 질책입니다(11).

이에 대해 사울은 11-12절에서 자신의 믿음 없음을 고백하고 회개했어야 합니다.

사울은 회개하고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고 전부 다른 사람 탓합니다. 자신의 실수를 회개하고 책임을 사무엘에게 전가합니다. 그는 현재의 급박한 상황. 즉 백성들은 흩어지고 당신은 안 오고 블레셋 사람들은 믹마스에 모여 있고 블레셋 사람들이 지금 쳐들어올 것 같은 상황들을 설명하며 그래도 여호와의 호의를 얻고 전쟁을 해야겠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울의 말은 상황적 논리적 이성적으로 틀리지 않습니다. 우리도 상황이 급하고 이때를 놓치면 큰일 날 것 같을 때 사울과 같은 행동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이런 사울의 통등을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질책하며 사울이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여호와의 명령은 사무엘상 10:8과 연결된 것으로 10:8에서 사무엘이 한 말은 여호와의 명령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0장과 13장 사이의 시간 간격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왜 길갈에서 일주일을 기다려야 하는지도 알 수도 없습니다. 본문이 명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실패는 자기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 정직함을 잃어버린 믿음의 실패입니다. 그의 실패는 하나님을 경외함과 신뢰함에 대한 실패였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도 사울처럼 실수하고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겸손하게 회개하고 잘못을 시인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면 또다시 긍휼히 여기시고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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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12-02)


퇴임사를 발표하는 사무엘

사무엘상 12장 16-25절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는 분이시지만 사람은 완벽한 존재가 아닙니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습니다. 실수한 다음이 중요합니다. 그 후에 회개하며 기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잘못을 범하지 않기 위해 먼저 기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미래는 지난 과거를 얼마나 기억하고 기도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 12장 전반부에 이어서 사무엘의 고별 설교가 이어집니다. 왕을 구한 죄가 크다는 것을 증명하는 우렛소리가 들리고 비가 내렸습니다. 백성들이 용서를 구하면서 사무엘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사무엘은 백성에게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라고 권면하면서, 여호와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을 촉구했습니다. 사무엘 자신은 기도하며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왕정에 대해 경고하면서 설교를 끝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왕을 구한 죄(16-19)

주의 뜻을 헤아리지 않고 내 필요만 채우는 기도는 도리어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드는 죽을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말씀에 대한 태도가 분명해야 합니다. 자신이 깨어지지 않을 때는 자신의 생각이 먼저 앞섭니다. 다양한 하나님의 메시지들을 받을 때, 인간의 육신적인 생각으로 하게 되어집니다.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께서는 용기를 주시고 책망도 하시고, 설교 속에서 능력을 주시기도 합니다.

 

16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서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 17오늘은 밀 베는 때가 아니냐 내가 여호와께 아뢰리니 여호와께서 우레와 비를 보내사 너희가 왕을 구한 일 곧 여호와의 목전에서 범한 죄악이 큼을 너희에게 밝히 알게 하시리라 18이에 사무엘이 여호와께 아뢰매 여호와께서 그 날에 우레와 비를 보내시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와 사무엘을 크게 두려워하니라 19모든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가 죽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16-19)

 

하나님께서는 왕을 주시면서도 왕을 요구한 의도 자세가 얼마나 불순한지는 그냥 넘기지 않으십니다. 그 의도가 앞으로 모든 불신앙의 출발이 될 것이며,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을 왜곡하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1) 사무엘의 도전(16)

 

본문은 사무엘의 퇴임식이라고 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사무엘은 자신의 사역에 마침표를 찍으면서, 이제부터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새로운 왕과 더불어 새 시대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중요한 시기를 시작하며 이스라엘은 무엇을 결단해야 합니까?

마지막 연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 것을 권면하고 그러지 않을 경우 여호와의 벌이 있을 것을 경고하였습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살라는 고별 설교는 이전에 모세도 했고 여호수아도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며 성공적으로 사명을 감당했던 지도자들입니다. 자신이 살아본 결과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사는 길임을 알기에 이런 권면을 하였습니다.

사무엘은 권면이 끝난 후 백성들에게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눈앞에서 행하시는 큰일을 보라’고 명령합니다. 이 문구는 출애굽기 14:13과 역대하 20:17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을 보라는 것으로 사용되었지만, 여기서는 역설적으로 이스라엘을 징벌하시는 것을 보라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놀라운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수도 있지만, 이스라엘에게 징벌을 내리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2) 여호와의 이적(17)

 

사무엘은 밀 베는 때에 우레와 비를 내려달라고 여호와께 간구하면 여호와께서 우레와 비를 보내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이 왕을 구한 죄가 얼마나 큰지 직접 경험하고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자신이 말한 그대로 여호와께 비와 우레를 보내달라고 부르짖었고 여호와께서는 그런 사무엘의 소리에 응답하셔서 그날에 우레와 비를 내리셨습니다. 밀 베는 시기는 건기로 비가 좀처럼 오지 않는데 갑자기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진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사기 5장에서도 건기에 갑자기 내리는 비를 통해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신 예가 있습니다.

 

(3) 백성의 두려움과 자백(18-19)

 

이 놀라운 이적을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와 사무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출애굽기 14:31에서 여호와의 큰 권능을 보고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모세를 믿게 된 것과 비슷합니다. 여기서 ‘경외하다’와 ‘두려워하다’는 ‘야레’로 같은 뜻입니다.

사무엘의 말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백성들은 사무엘의 말처럼 자신들이 왕을 구한 것이 여호와 앞에 죄를 범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도 이방 나라들처럼 왕이 있는 것이 당연하고 좀 더 합리적이라고만 생각했지, 그것이 여호와를 왕으로 섬기지 않는 심각한 죄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의 지적과 여호와의 징벌을 통해 세상의 관습이나 풍조를 따르는 것이 여호와를 떠나는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하는 죄는 우리도 너무 쉽게 범할 수 있는 죄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종종 세상적인 편의와 관습을 따르면서 그것이 죄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행히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사무엘이라는 영성 깊은 지도자가 있어서 이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천둥과 폭우를 통해 표현된 여호와의 진노를 보며 혹시 여호와께서 자신들에게 진노를 퍼부어서 죽이시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이들은 사무엘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합니다. 중보기도는 선지자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중보 기도자는 모세입니다(출 32:11-13), 후에 예레미야 15:1의 “만약 모세와 사무엘이 나의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에서 모세와 함께 사무엘을 가장 뛰어난 중보기도자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의 마지막 권고(20-25)

마음에 받아들기 좋은 것만 받아드리면 편식(偏食)입니다. 영적인 편식을 하면,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어느 때는 쓴 음식도, 단 음식도 달갑게 먹을 줄 알아야 성장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바른 태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자신에게 주신 영적인 영양분을 취해 먹으므로 건강하게 세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20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따르는 데에서 돌아서지 말고 오직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 21돌아서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따르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 22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23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24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25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20-25)

 

사무엘은 비록 정치 지도자의 자리는 사울 왕에게 물려주었지만,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끝까지 중단없이 기도와 가르침에 사역은 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이제 왕 앞에서 하나님 역할을 대신할 것입니다.

 

(1) 사무엘의 첫째 권면(20-21)

 

고별사 후에, 갑자기 마른 하늘에서 우뢰와 장대비가 쏟아지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무엘 선지자에게 기도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에 사무엘은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번 이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보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지 결코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분명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하였지만, 그러나 이제부터는 여호와를 따르는 데서 돌이키지 말고 전심으로 여호와만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우상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신실하신 여호와(22)

 

여기서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22절에 언급되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은 것도 철저히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로 결정하신 일이며,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결코 이스라엘을 버리지는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신학적 이슈들이 등장하는데 먼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어떤 장점이나 공적이 있어서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하나님의 명예에 대한 문제로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는 ‘여호와의 명예’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을 나의 백성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즉, 그 이후로부터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백성’으로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여호와와는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죽이고 멸망시키시는 것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여호와의 실패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두셨다는 것은 자신의 명예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맡기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자신의 명예를 우리에게 두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순간부터 우리는 예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우리가 세상에서 잘못하면 우리만 욕을 먹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명예도 땅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크리스천 혹은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의 무게입니다. 이렇게 보잘것없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두셨다는 것은 그 자체가 영광이며 은혜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둔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그들이 먼저 하나님을 버리지 않는 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끝까지 그들과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3) 사무엘의 결심(23)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사무엘의 결심으로 백성들이 여호와를 잘 섬기게 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있는 부분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기도이고, 둘째는 가르침입니다.

사무엘은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기도하기를 멈추는 죄를 절대로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이것은 선지자로서 늘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기도하기를 멈추는 것을 죄라고 스스로 규정하는데 이것은 기도를 남은 평생 자신의 사명으로 삼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반영한 것입니다. 둘째는 선하고 올바른 길을 가르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길로 앞으로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전달하겠다는 것입니다.

23절에서 사무엘이 말한 기도와 가르침은 선지자의 주된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무엘은 백성을 다스리던 사사에서 기도와 가르침에 전념하는 선지자로 직분이 바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에 나타나는 사무엘의 사역들은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4) 사무엘의 둘째 권면(24-25)

 

사무엘은 한 번 더 권면합니다. 연설의 결론 부분으로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해 하신 일을 기억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권면과 그러지 않고 계속해서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망할 것이라는 경고가 나옵니다.

이 부분은 14-15절의 반복으로 사무엘은 반복적으로 여호와 경외와 섬김을 강조하면서 그러지 않으면 멸망 당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아무리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한 왕을 세워도 인간 왕은 결코 하나님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 의지해야 할 것은 왕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이신 것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힘과 권력과 돈을 의지하려는 우리에게 사무엘은 그런 것은 모두 소용없고 오직 하나님만을 왕으로 섬기며 순종할 때 우리가 승리하고 살아갈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지금까지 우리를 구원하시며 도우시고 복을 주시는 진정한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같이 연약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시고 잘못할 때는 벌하시더라도 절대로 버리지는 않으십니다. 사무엘은 믿음이 약한 백성을 위해 항상 기도하고 많은 것을 가르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일을 기억하고, 그만 경외하며 마음을 다해 진실하게 섬겨야 했습니다. 이것이 성도들이 해야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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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12-01)


고별 설교한 선지자 사무엘

사무엘상 12장 1-15절


 

능력 있는 사람은 삶에서 능력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인격, 청결한 양심, 청렴결백한 삶이 그대로 나옵니다. 사무엘은 이러한 생활에 모델이었습니다. 오늘날은 사회적으로나 교계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비리가 너무 난무한 시대입니다. 정말 하나님만 사랑하는 깨끗한 사람이 필요할 때입니다.

 

  • 사울은 제비뽑기로 왕이 되었지만, 모든 백성에게 구원자로 인식되고 그들의 지지 받게 된 것은 암몬과의 전쟁 이후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미리 왕으로 선택하셨지만, 백성이 지지하고 믿고 따를 때까지 기다려주셨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지도자인 왕으로 등극하면서, 사무엘은 나이가 많아 공식적인 사역에서 은퇴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퇴 연설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의 고별사(1-5)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리더십의 위기라고 합니다. 정치 지도자나 심지어는 영적 지도자들까지도 믿고 본받고 모든 사람이 존경하고 신뢰할 만한 지도자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지도자의 자리를 통해 섬기는 지도자, 정직한 지도자, 흠 없는 지도자의 모습을 정치 지도자는 물론이고, 영적 지도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합니다. 사무엘은 이러한 면에서 훌륭한 지도자로서 본보기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1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가 내게 한 말을 내가 다 듣고 너희 위에 왕을 세웠더니 2이제 왕이 너희 앞에 출입하느니라 보라 나는 늙어 머리가 희어졌고 내 아들들도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내가 어려서부터 오늘까지 너희 앞에 출입하였거니와 3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언하라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느냐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누구의 손에서 받았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하니 4그들이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압제하지 아니하였고 누구의 손에서든지 아무것도 빼앗은 것이 없나이다 하니라 5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 손에서 아무것도 찾아낸 것이 없음을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언하시며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도 오늘 증언하느니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가 증언하시나이다 하니라(1-5)

 

사무엘은 사울이 초대 왕으로 취임식을 마친 다음, 평생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섬겼던 일을 마칩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원했던 왕이 세워지므로 마지막 사사로 퇴임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별사를 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정착 시점에 여호수아의 고별사가 주어진 것처럼, 왕국 시대의 시점에서도 사무엘의 고별사로부터 시작합니다.

 

(1) 왕을 세운 사무엘(1-2)

 

사울이 정식으로 왕으로 등극하고 통치권을 갖자 사무엘은 사사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별 연설합니다. 사무엘이 비록 사사직에서 물러나지만, 여전히 선지자이며 제사장이기에 영적인 지도력은 가지고 있었고, 이것은 13장과 15장에 잘 나타납니다.

 

사무엘의 연설은 자신의 은퇴 이유와 사역에 대한 평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무엘이 은퇴하는 이유는 왕이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백성들의 요청대로 왕을 세우는 일을 마쳤고, 그래서 이제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사무엘이 지도력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사무엘은 비록 백성들의 왕을 세워달라는 요구를 자신을 더는 지도자로 생각하지 않다는 것으로 여기고 섭섭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백성들의 요청을 들어주었습니다. 자신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한 후에 지도자 자리에서 은퇴한 것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흰머리가 될 때까지 평생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일하였지만, 그것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하실 때 미련 없이 떠나고 있습니다.

 

(2) 의로운 통치(3-4)

 

사무엘의 연설에서 두 번째 부분은 자신의 사역에 대한 평가입니다. 사무엘은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즉 왕을 재판장으로 앉히고 백성들을 증인으로 세우고 있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청렴결백하게 사역하였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재판의 상황을 설정한 것입니다.

 

사무엘은 증인으로 설정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에 대해 불리한 증언을 해보라고 말하면서, 구체적으로 다섯 가지의 질문을 통해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합니다. 소ㆍ나귀는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재산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무엘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백성들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지 않았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그 권력을 이용해서 부를 축적하려 하기 때문에 힘없는 사람들의 재산을 빼앗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부당하게 부를 축적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자신이 백성들에게 폭정을 행했느냐고 묻습니다. 권력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약자들을 억압하고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함부로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권력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무엘은 자신의 눈을 흐리게 만드는 뇌물을 받았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정의의 문제와 관련된 질문으로 사사 사무엘은 재판하거나 백성간 소송을 다룰 때 뇌물을 받음으로 정의를 굽게 만드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무엘의 질문은 모두 당시 권력자들이 행하고 있던 잘못된 행태를 지적하며 자신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3) 증인 소환(5)

 

사무엘의 질문에 백성들은 당신은 우리를 속이지 않았고 압제하지 않았고, 특히 누구의 손에서 아무것도 빼앗지 않았다고 말함으로 사무엘이 완벽하게 결백하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백성들의 증언에 사무엘은 너희의 증언에 대해 여호와와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증인이라고 말하며, 그래도 괜찮은지 물어봅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그들이 증인이 되어도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말이 진심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모든 백성들이 인정하는 청렴결백하고 정의로운 지도자였습니다. 이런 지도자로 평생을 살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함부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6-11)

하나님께서는 이방 나라의 압제에서 신음하여 부르짖을 때마다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요구에 따라 왕을 세워 통치권을 넘겨주는 자리에서 사무엘은 마지막으로 그들의 잘못을 책망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며 그분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경우 당할 무서운 징벌을 경고하였습니다.

 

6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을 세우시며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는 여호와이시니 7그런즉 가만히 서 있으라 여호와께서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행하신 모든 공의로운 일에 대하여 내가 여호와 앞에서 너희와 담론하리라 8야곱이 애굽에 들어간 후 너희 조상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을 보내사 그 두 사람으로 너희 조상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곳에 살게 하셨으나 9그들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은지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하솔 군사령관 시스라의 손과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모압 왕의 손에 넘기셨더니 그들이 저희를 치매 10백성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섬김으로 범죄하였나이다 그러하오나 이제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내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를 섬기겠나이다 하매 11여호와께서 여룹바알과 베단과 입다와 나 사무엘을 보내사 너희를 너희 사방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사 너희에게 안전하게 살게 하셨거늘(6-11)

 

사무엘은 지난 역사를 회고하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언약에 신실하셨는지를 환기시킵니다. 또한 그것을 줄곧 그 하나님께 반역했던 백성들의 역사와 대조합니다.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려 보다는 열방과 같이 왕을 요구하는 것은 분명히 욕심입니다.

 

(1) 이스라엘의 해방(6-8)

 

이 단락에서도 앞 단락의 법정 설정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앞 단락에서는 사무엘에 대한 무죄가 증명되었다면, 이 단락에서는 여호와의 무죄를 천명합니다.

 

사무엘은 6절에서 여호와를 소개하면서 모세와 아론을 세워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분이라고 합니다(6). 오경 밖에서는 모세뿐만 아니라 아론도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한 인물로 함께 등장합니다(수 24:5; 미 6:4: 시 77:21; 105:26).

사무엘은 여호와를 소개한 뒤에 백성들에게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라고 말하고 자신이 여호와 앞에서 여호와를 변론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여호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잘 들으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사무엘은 여호와를 위한 변호사 역할을 하고, 백성들은 배심원이자 증인으로, 그리고 여호와는 재판관이자 피고인으로 설정됩니다. 사무엘은 일단 여호와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공의를 행하신 분이라고 주장합니다.

 

(2) 사사들의 구원(9-11)

 

그리고 9-11절은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분이 되시는 역사적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증거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에서 구원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심한 노역으로 인해 괴로워하며 여호와께 부르짖을 때 응답하시고 구원해주셨고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둘째 증거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면서 여호와를 잊고 가나안 우상을 섬길 때, 이들을 하솔 왕 시스와 블레셋 사람들과 모압 왕의 손에 넘겨서 징벌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자 다시 구원자들을 보내주셔서 구원하신 일입니다. 여기서 ‘구원자’, 즉 ‘사사’로 언급된 인물들은 여룹바알인 기드온과 입다와 사무엘과 베단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무엘도 사사 중의 한 명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려운 것은 ‘베단’입니다. 사사들 중에 베단이라는 인물은 없습니다. 70인경(LXX)에서는 ‘베단’을 ‘바락’으로 번역하고 있고, 이 전통을 따라 히브리서 11:32의 믿음의 인물 명단에서 ‘바락’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 다. 이 ‘베단’이라는 이름은 ‘바락’과 ‘드보라’ 이름의 첫 자음들이 섞여 있는 형태이기 때문에, 정확히 누구를 말하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사사기의 전통에 따르면, 시스라와 전쟁할 당시 사사는 드보라이고 바락은 군대 장관으로 드보라의 명령을 따르던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베단은 드보라를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는 것이 사사기와의 연결 속에서 볼 때 더 타당해 보입니다. 혹자는 드보라가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자가 아니며, 바락을 사사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11절에 등장한 사무엘도 직접 칼을 들고 전쟁에 참여한 인물이 아니기에 그런 이유로 드보라를 사사의 명단에서 제외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고 권고(12-15)

여호와를 경외함은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즉 가장 존엄한 분이시며 우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지 않음은 하나님의 율법을 그대로 실천하는 삶을 말합니다.

 

12너희가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가 너희를 치러 옴을 보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너희의 왕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내게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를 다스릴 왕이 있어야 하겠다 하였도다 13이제 너희가 구한 왕, 너희가 택한 왕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 위에 왕을 세우셨느니라 14너희가 만일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의 목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지 아니하며 또 너희와 너희를 다스리는 왕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면 좋겠지마는 15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조상들을 치신 것 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12-15)

 

이스라엘은 왕과 백성 모두 주변 나라와 같은 왕이나 그런 나라를 동경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 한 분만 왕으로 모시고 언약을 준수하며 사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사무엘은 왕정 제도가 비록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시작된 것은 아닐지라도, 장차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서 축복과 저주의 길이 엇갈리게 될 것을 경고하였습니다.

 

(1) 왕정 수립(12-13)

 

하나님의 무죄 혹은 의로움을 주장한 사무엘은 이번에는 백성들을 고발합니다. 그들이 왕이신 여호와를 버리고 인간 왕을 세워달라고 한 것이 고발 사유입니다.

사무엘은 백성들의 요청을 듣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왕을 세우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사울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상 8:7-8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한탄을 기억하고 있던 사무엘은 그들이 하나님 대신 인간 왕을 세우는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백성들에게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암몬와 나하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려고 하자 왕을 세워달라고 요청한 것은 지금까지 그들의 왕으로 계시며 그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버리는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백성들의 행동을 지금 여호와께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순종의 권면(14-15)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고 사무엘의 연설은 권고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너희가 구하던 왕을 세워주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셨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너희 말을 들어주셨으니 너희도 여호와의 말씀을 잘 들으라고 합니다. 너희와 너희 왕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면 좋겠지만, 만일 그렇지 않으면 여호와의 손이 사사시대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비록 인간 왕이 세워졌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것은 사사시대와 마찬가지로 여호와이시며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왕은 여호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무엘은 끝까지 지도자로서 백성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르게 살 수 있도록 지도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율법 아래 순종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나 왕이나 모두 하나님의 율법 아래 순종해야할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정을 허락하셨지만, 여전히 하나님만이 왕이라는 시내산 언약은 유효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방 나라 같은 왕이 세워졌을지라도 이방 나라 같은 왕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인간 왕이 되어야 하며, 그 왕을 통해 온전히 하나님을 더 왕으로 모셔야 되는 것이 그들의 과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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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11-01)


지도자로서 시험대에 오른 사울

사무엘상 11장 1-15절


 

다윗 왕에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솔로몬은 하나님께 제일 먼저 일천 번제를 드립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 지혜의 응답하십니다. 기도 응답을 받은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받았습니다. 지혜를 받은 다음에는 그 지혜가 있는지 없는지에 시험대에 오릅니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입니다.

 

  • 본문은 사울의 왕권이 온 백성의 지지를 받게 되는 결정적 계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암몬 사람 나하스의 침공으로 국가적인 위기를 맞습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사울은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어 암몬과의 전쟁에 동참하고 위기를 극복하게 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왕으로서 리더십이 확실히 서는 계기가 됩니다.

 

암몬의 야베스 침공(1-4)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사명을 감당할 힘과 용기를 구한다면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자신의 자격을 바라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도록 간절히 기도하며 부르심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소심한 사울을 담대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1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 야베스에 맞서 진 치매 야베스 모든 사람들이 나하스에게 이르되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 하니 2암몬 사람 나하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야 너희와 언약하리라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 3야베스 장로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에게 이레 동안 말미를 주어 우리가 이스라엘 온 지역에 전령들을 보내게 하라 만일 우리를 구원할 자가 없으면 네게 나아가리라 하니라 4이에 전령들이 사울이 사는 기브아에 이르러 이 말을 백성에게 전하매 모든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울더니(1-4)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았고, 또 제비뽑기를 통해서 왕으로 선택받았습니다. 하지만 사울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서, 그들의 지지를 받고 왕으로 세움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따라서 백성들이 보내는 인기와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으로 왕권 유지를 결정할 것입니다. 이제 왕으로 뽑힌 사울은 이제 왕으로서 전투력과 지도력을 입증해야 할 과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1) 암몬의 공격(1-2)

 

사무엘에 의해 제비뽑기를 통해 사울이 왕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입니다. 아직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울을 왕으로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 때, 암몬 사람 나하스가 길르앗 야베스로 올라와 전쟁하려고 진을 쳤습니다(1). 70인경(LXX)에서는 대략 한 달 정도 지났다고 말합니다.

길르앗 야베스는 요단강 동편에 있는 지역으로 사사기에서 보듯이 당시에는 요단강 동편과 서편 사이에는 갈등이 있었고, 하나의 공동체라는 의식이 약했습니다.

길르앗 야베스에 암몬 사람 나하스가 쳐들어오자 야베스 사람들은 나하스와 싸우기보다는 조약을 맺고 봉신으로서 섬기겠다고 제안합니다(1b). 암몬과 전쟁하는 것을 두려워하였기에 차라리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 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의 지배를 받는 일이 흔히 있었습니다(삿 3:8; 6:1-2).

야베스 사람들의 이런 제안에 대해 암몬 나하스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의 오른쪽 눈을 다 빼내야 조약을 맺겠다고 치욕적인 조약을 제하며 조롱합니다(2). 여기서 오른쪽 눈을 뺀다는 것은 전투력을 상실하게 만들어 항복하게 하거나 싸울 수 없는 상대를 모두 죽이겠다는 의미입니다. 더욱이 나하스는 오른쪽 눈을 빼는 것이 이스라엘을 조롱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의 목적은 길르앗 야베스를 속국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조롱하고 모욕을 주다가 모두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더 나가서 나하스는 모든 이스라엘까지 공격할 수도 있음을 암시합니다.

 

(2) 야베스 사람들의 구원 요청(3-4)

 

이런 암몬 나하스의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길르앗 야베스의 장로들은 일주일 말미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들은 나하스에게 이스라엘 전 지역에 전령을 보내어 자신들을 위해서 싸워줄 구원자를 찾지 못하면 나하스가 원하는 데로 항복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자신들을 위해 싸워줄 구원자를 찾을 시간을 달라는 길르앗 야베스 장로들의 부탁은 항복하기 전에 일말의 희망이라도 잡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제안을 암몬 나하스가 쉽게 허락해 줍니다. 이는 나하스의 양보는 이스라엘의 전쟁 능력을 얕보고 군사적 우월감에서 나온 것입니다. 일주일 안에 이스라엘 안에서 구원자를 찾기 어려울 것이고, 군사를 모으더라도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시간을 주었는데도 구원자를 못 구하면 그것으로 이스라엘을 더 조롱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나하스의 판단은 당시 이스라엘의 군사적 상황이 주변 나라에게 조롱을 받을 만큼 열악했음을 보여줍니다.

 

야베스의 전령들이 요단강을 건너 서쪽 지역까지 이스라엘 전역을 돌아다니다 소식을 전했고, 사울이 살고 있는 기브아까지 도착하게 됩니다. 길르앗 야베스에서 기브아까지는 대략 이틀 정도 거리입니다.

기브아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처지를 알리자 기브아의 사람들은 큰 소리로 울면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불행에 같이 슬퍼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베냐민을 상대로 한 지파 전쟁에 야베스 사람들은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야베스 사람들은 거의 진멸을 당하고 처녀 400명만 남게 되었고, 이들은 베냐민 남자들과 결혼하게 됩니다(삿 21:8-14). 이렇게 길르앗 야베스와 베냐민 지파는 관계가 긴밀한 관계이기 때문에 기브아 사람들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상황에 매우 슬퍼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나라처럼 자신들을 대신해 이웃 나라와 싸워줄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위기 속에서도 직접 하나님께 간구하거나 왕으로 뽑은 사울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모습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사울을 구원자,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울의 등장과 승리(5-11)

하나님의 백성들의 일하는 방식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을 받고 그의 도우심을 받는 것입니다. 전력이 약하고 조롱당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도와주시면 어떤 적이라도 무력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은 전쟁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5마침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이르되 백성이 무슨 일로 우느냐 하니 그들이 야베스 사람의 말을 전하니라 6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 7한 겨리의 소를 잡아 각을 뜨고 전령들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역에 두루 보내어 이르되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의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 하였더니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 같이 나온지라 8사울이 베섹에서 그들의 수를 세어 보니 이스라엘 자손이 삼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삼만 명이더라 9무리가 와 있는 전령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내일 해가 더울 때에 너희가 구원을 받으리라 하라 전령들이 돌아가서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하매 그들이 기뻐하니라 10야베스 사람들이 이에 이르되 우리가 내일 너희에게 나아가리니 너희 생각에 좋을 대로 우리에게 다 행하라 하니라 11이튿날 사울이 백성을 삼 대로 나누고 새벽에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날이 더울 때까지 암몬 사람들을 치매 남은 자가 다 흩어져서 둘도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5-11)

 

사울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왕으로 선출되긴 했지만, 아직까지 보편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과거처럼 자기 직업인 농사를 짓는 형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위기에 진정한 리더십은 드러납니다.

 

(1) 군대를 소집하는 사울(5-8)

 

이런 상황에서 사울이 등장합니다. 본문은 ‘히네’라는 단어를 통해 강조하면서 구원자의 등장을 알리고 있습니다.

 

사울은 왕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이스라엘에게 왕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랏일보다 원래 자신이 하던 일, 즉 밭을 갈다가 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읍에서 백성들이 우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이에 백성들은 야베스 사람들의 말을 사울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을 때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강하게 임하였고, 사울은 크게 분노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난과 이방인의 조롱을 참을 수가 없었고, 하나님의 영은 사울에게 이들을 구원할 힘과 용기를 준 것입니다.

 

(2) 군대 소집(7-8)

 

사울은 한 겨리의 소를 각을 떠서 이스라엘 모든 지역에 보내 군사를 소집합니다. 사울이 매우 단호하게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의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짐꾸러미에서 숨어서 떨던 그 겁쟁이 사울이 맞나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소심쟁이 사울 왕이 이렇게 대단한 하나님의 용감한 왕으로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변화될 수 있다는 볼 수 있습니다.

 

사사 시대에는 지파들이 다 흩어져서 함께 힘을 합하여 싸우거나 한마음으로 모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지역마다 세워졌던 사사들이 물러가고, 이제 한 왕이 통치하는 중앙집권 정치가 시작된 것입니다.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게 급히 전령을 통해 연락을 보냈습니다. 온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두려움’이 임해 하나같이 나아왔습니다. 그 모인 사람들이 이스라엘 지파에서 30만 명, 유다 지파에서 3만 명이 모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아갈 때 돕는 손길을 붙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사람의 마음은 하나로 모입니다.

 

(3) 야베스 사람의 기쁨(9-10)

 

전쟁 준비를 마친 사울은 전령들을 통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다음 날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야베스 사람들은 암몬 사람들에게 다음 날 항복하겠다고 하면서 방심하게 만듭니다. 이튿날 새벽, 사울은 드디어 군사작전을 감행합니다. 그는 군사를 셋으로 나누고 유인과 매복을 통한 양동작전을 쓴 것입니다.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 싸웠고, 하나님께서는 큰 승리를 주십니다(11).

 

암몬과의 전쟁은 시작부터 과정, 마지막 승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전쟁입니다. 그 결과는 당연히 큰 승리였습니다.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이끄는 군대에게 큰 승리를 주심으로 그의 왕권을 든든하게 세워주셨습니다.

 

길갈에서의 즉위식(12-15)

사람들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이 중요합니다. 온전한 리더십은 결코 칼끝에서 세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는 사람들의 인정보다 하나님의 인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으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12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들을 끌어내소서 우리가 죽이겠나이다 13사울이 이르되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 14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15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고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12-15)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이제 두려움이 기쁨으로 변합니다. 백성은 사울의 비방했던 자들을 복수하겠다고 나설 만큼 사울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그의 공로를 인정합니다. 하지만 사랑과 관용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1) 백성들의 사울 지지(12-13)

 

사울이 큰 승리를 이끌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제야 사울의 지도력을 인정합니다.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전쟁에 나가서 대신 싸워줄 왕이 필요하다고 외쳤었는데, 바로 사울이 그런 왕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승리에 고무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에 사울을 업신여기며 조롱했던 불량배들에게 본때를 보여줄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들을 색출해 처치하자고 충돌질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12). 그들은 미스바에서 반대하는 불량배들이 사울을 향해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10:27)라고 조롱했었습니다. 결국 ‘사울이 우리를 다스릴 수 있겠느냐?'라는 말입니다. 다스리는 것은 구원하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승리에 도취되어 잘못된 반판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호와께서 구원을 주신 기쁜 날에 형제를 죽이는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언제나처럼 신중하고 겸손하고 사람들을 품는 사랑의 태도를 보입니다. 품이 넓은 리더, 온유한 리더, 지혜로운 리더의 모습으로 변화된 사울입니다. 바람직한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울의 고백처럼 여호와께서는 구원을 이루신 분입니다.

 

(2) 길갈의 즉위식(14-15)

 

사울을 돋보이게 한 것은 그의 곁에 사무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승리의 감격으로 한껏 고무된 백성을 진정시키면서, 길갈로 이끌고 나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와 기쁨의 제사를 올려드립니다.

사무엘은 전쟁의 승리를 백성들만 즐거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온 백성이 기뻐할 수 있는 그 제자로 이어지게 합니다. 그리고 나라를 새롭게 하자고 설득합니다. 이에 백성이 함께 길갈로 가서 공식 즉위식을 열어 사울을 왕으로 추대하고, 하나님 앞에 화목제 제사드리며 기뻐했습니다. 사울 왕의 공식적인 취임을 선포합니다. 길갈은 여리고 북동쪽에 있을 것으로 추측되며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수 4:19).

 

사울의 즉위는 세 단계로 이루어졌습니다. 첫째,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았고(10:1), 둘째, 미스바에서 왕으로 선출 되었고(10:17-24). 셋째, 길갈에서 민족 대통합 즉위식을 거행하였습니다(11:15).

 

여호와께서 이 모든 과정을 계획하시고 주도적으로 이끌어가셨습니다. 마지막 사사이며 선지자였던 사무엘이 사울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사울은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무엘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사울은 공동체가 처한 위기에 용기 있게 대응합니다. 거룩한 분노와 결기, 지혜와 능력, 용서와 포용력으로 왕의 권위를 인정받습니다. 사람들은 힘을 가지면 자기를 증명하고 싶어지지만, 그는 슬기롭게 유혹을 극복하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하나님의 권능과 권위를 갖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두렵고 떨림으로 행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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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10-02)


백성 앞에서 왕으로 추대되는 사울

사무엘상 10장 17-27절


 

사람들은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노력합니다. 인기인이 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합니까? 스포츠인으로, 연예인으로 그리고 자기 분야에 최고가 되기 위해 밤낮으로 쉬지 않고 노력합니다. 성도들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다는 것을 압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먼저 하나님께 인정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고 나면, 결국에는 사람들에게도 인정받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구한 것처럼 왕을 세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정치는 ‘왕정정치(王政政治)’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관하는 ‘신정정치(神政政治)’라는 것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개인적으로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서 그가 왕이 되었음을 인정했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공식적인 과정을 걸쳐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세워 가십니다.

 

왕을 선출하는 미스바 성회(17-21)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망각하면서, 눈에 보이는 힘과 권력을 쫓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발생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 구하기보다는 다른 곳에서 해결책을 찾으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서운함을 느끼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만왕의 왕으로 섬기시길 원합니다.

 

17사무엘이 백성을 미스바로 불러 여호와 앞에 모으고 18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고 너희를 애굽인의 손과 너희를 압제하는 모든 나라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 하셨거늘 19너희는 너희를 모든 재난과 고통 중에서 친히 구원하여 내신 너희의 하나님을 오늘 버리고 이르기를 우리 위에 왕을 세우라 하는도다 그런즉 이제 너희의 지파대로 천 명씩 여호와 앞에 나아오라 하고(17-19)

 

사무엘은 사울에게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성령이 임하며 왕이 될 모든 절차와 준비를 마쳤습니다. 이제 사울이 백성들 앞에서 왕으로 등극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 일을 준비하면서 사무엘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스바로 불러 여호와 앞에 모이게 하였습니다.

 

(1) 선출 장소(17)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을 미스바로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기름 부음을 통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울을 왕으로 세울 정치적 절차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미스바는 베냐민 땅의 북서 경계선에 해당하는데, 7장에서 사무엘이 취임한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 공식적인 모임을 가진 장소입니다. 여기서 민족의 대규모 집회가 자주 개최되었습니다(삿 20:1,3; 삼상 7:5,6). 당시 미스바가 이스라엘의 종교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도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사무엘의 선언(18-19)

 

사무엘은 왕을 선출하기 위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미스바로 불러 모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로 모이자, 사무엘은 선지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는 먼저 앞서서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하나하나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무엘은 “여호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길”라고 말합니다(18). 이 문구는 선지자들이 전하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이 문구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으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을 제비뽑기하기 전에, 먼저 ‘내가 너희를 애굽인의 손과 너희를 압제하는 모든 나라의 손에서 건져내었다’(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표면적으로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사건을 요약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렇게 역사적 사건을 언급하신 진짜 이유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왕에게 바라는 모든 일, 즉 적들의 손에서 구원한 일을 신실하게 하신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라는 것입니다. 즉, ‘내가 너희의 진정한 왕이다.’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사무엘은 조금 더 자세히 “너희는 너희를 모든 재난과 고통 중에서 친히 구원하여 내신 너희의 하나님을 오늘 버리고 이르기를 우리 위에 왕을 세우라 하는도다”(19)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출애굽이나 가나안 정복 사건 말고도, 이스라엘이 어렵고 힘들 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보호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지금 너희의 왕을 뽑는 행동이 하나님께는 어떤 의미 행동인지 분명히 알려 주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구원하셨는데, 이스라엘은 구원자이신 여호와를 거부하고 왕을 세우기를 요청했습니다. 만왕의 왕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처럼 우리도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며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위해 한 왕을 세워 주셨음을 결정하심을 알립니다.

 

여기서 왕정제도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을 보여줍니다. 왕정제도에 대한 하나님의 조건적 관용을 베푸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원하고 당시 고대 근동의 모든 나라에서 왕정제도를 시행하고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허락하시되 주변 나라들과 달리 하나님께서 왕을 선택하시고 왕은 하나님 말씀에 복종하여 하나님을 왕으로 여기며 섬겨야 됩니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문장은 “오늘 하나님을 버리고”라는 말입니다. 이 선언에서 인간 왕을 요구하면서 그들의 왕이신 하나님을 버리는 이스라엘의 믿음 없음을 사무엘은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 왕을 더 의지하고 갈망하는 세상 속한 왕이 있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제비뽑기를 통한 왕 선출 절차를 진행합니다. 사무엘은 이미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그를 왕으로 정해 두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실을 백성들 앞에서 공포만 해도 큰 무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초대 왕은 백성의 공감을 얻어 세워지기 위해서는 보다 공식적인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선택하여 세우셨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확증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백성을 모아 놓고 일련의 선출과정을 거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사무엘은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왕을 선택하기 위한 제비뽑기(20-24)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옴을 기억해야 합니다. 왕을 세우는 것은 백성들의 소원이 이루어진 날이지만, 하나님께는 불순종한 날입니다. 이스라엘처럼 우리가 섬기는 왕의 실체가 무엇인지 밝히 드러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부끄러움의 자리에 있지 않도록 오직 주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고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란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20사무엘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베냐민 지파가 뽑혔고 21베냐민 지파를 그들의 가족별로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마드리의 가족이 뽑혔고 그 중에서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으나 그를 찾아도 찾지 못한지라 22그러므로 그들이 또 여호와께 묻되 그 사람이 여기 왔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그가 짐보따리들 사이에 숨었느니라 하셨더라 23그들이 달려 가서 거기서 그를 데려오매 그가 백성 중에 서니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 컸더라 24사무엘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느니라 하니 모든 백성이 왕의 만세를 외쳐 부르니라(20-24)

 

하나님의 심정을 설명한 후에 사무엘은 드디어 왕을 뽑는 의식을 시작합니다. 제비뽑기 방법은 먼저 열두 지파 중에서 한 지파를 뽑고, 그 다음 부족 단위에서 한 부족을 뽑고, 그 다음 가족별로 뽑고, 그 가족 중에서 한 사람을 제비로 뽑는 방식을 택하셨습니다.

 

(1) 제비뽑기(20-21)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제비뽑기로 왕을 선출합니다. 제비뽑기 방식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가장 흔한 방법으로 여호수아서에서 땅을 나눌 때도 이런 방식을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뽑아줄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기름 부으시고 그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이 모든 과정을 이루고 계시고, 그분이 친히 왕을 선출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는 장면을 봅니다.

 

사무엘은 온 이스라엘 앞에서 제비뽑기를 통해 지파들 중에서 베냐민 지파가 뽑혔고, 그 다음으로 가족 중에는 마드리 가족이 뽑혔습니다. 여기서 가족은 대가족을 의미하는 말이며, 한국 성경에서는 ‘족속’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마드리’라는 이름은 여기서만 나타납니다. 마드리 가족 중에서는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제비뽑기 자리에 없었는데도 뽑혔다는 것에서 적어도 마지막 제비뽑기 절차에서는 당사자가 나오지 않아도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단계에서 지파를 선출하고, 둘째 단계에서 (대)가족(미쉬파하)을 선출하며, 마지막 셋째 단계에서 가문을 선택하는데, 이때는 아마도 각 가문에서 자기들의 왕 후보자를 미리 정해놓은 다음, 그 가문의 대표가 제비뽑기 자리에 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 마드리 가족의 기스가 뽑혔고, 이는 기스 가문에서 왕 후보자로 등록해 두었던 사울이 뽑힌 것으로 간주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을 ‘기스의 아들 사울’이라 불렀을 것입니다.

 

(2) 숨은 사울(22-23)

 

원래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울이 제비뽑기를 통해 공식적으로 선택된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를 미리 알고 있었던 사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었습니다.

사울이 뽑혔지만, 사람들은 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수많은 백성이 보는 앞에서 왕으로서 등극해야 할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는 황당한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는 왕의 자리를 그만큼 부담스러워 짐 보따리 사이에 숨어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사무엘이 이야기하고 기름 부음을 받을 때도 정신없이 긴가민가하면서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제비뽑기를 통해 온 이스라엘 앞에서 현실로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왕에 대한 직책의 중압감이 몰려오고 있었던지 두려움에 숨어 있는 그에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울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출된 왕이 매우 궁금했을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사울이 철저하게 자신을 숨겼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가 짐보따리 사이에 숨어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응답은 혹시 사울이 오지 않아서 다른 사람을 뽑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잠재우고 하나님께서 사울을 뽑으셨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확신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에게도 왕이 되는 것은 숨거나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빨리 사울을 찾기 위해 달려갔고, 짐보따리 사이에 숨어 있던 사울을 찾아 데리고 옵니다. 사울은 겸손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었으므로 자신을 감추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울의 행동이 그 자신을 돋보이게 했습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극적인 등장 순간을 연출할 수 있었습니다. 남들이 사울을 내리고 나올 때, 사울은 당당하게 이스라엘 앞에 설 것입니다. 이것은 꾸며내고자 함이 아니라, 겸손하면서도 자기를 위해 분위기를 만들 수 있는 사울의 본성에 의한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본 사울의 첫 인상은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 큰 기골이 장대한 모습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기골이 장대한 모습은 뛰어난 전사의 모습으로 골리앗은 키가 3m정도 되어 그 모습만으로도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를 완전히 죽였습니다. 그리고 9장 2절에서 사울의 외모는 키가 클 뿐 아니라 매우 준수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으로 세워도 될 만큼 든든하고 호감이 가는 인상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사울을 백성들에게 소개합니다.

 

(3) 즉위식(24)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울에 대해 두 가지를 선포했습니다.

첫째, 사울이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왕이라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모세가 가르친 왕 규례에 왕을 선택하는 조건이 제시되는데, 왕은 형제 가운데서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신 17:15). 사무엘은 사울이 그 조건을 충족하였으므로 왕으로서 합당하다고 선언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왕은 여호와께서 버리지 않는 한 사람들에 의해 버림받을 수 없습니다.

둘째, 모든 백성 중에서 최고의 인물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만나는 순간부터 그를 좋아했습니다. 첫 만남의 때에 사무엘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소개를 통해 사울을 만났습니다(9:17). 그 후 사무엘은 사울을 상석으로 모시고 가장 좋은 부위의 고기로 정성껏 대접하였고, 밤새워 대화하면서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길갈에서 다시 만나는 등 최선을 다해 도울 것을 약속했습니다(10:8). 이런 사무엘의 태도는 사울에 대한 그의 진심 어린 호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사무엘은 사울이 최고라고 소리치면서 그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보여줍니다.

 

사무엘의 선포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기쁨으로 ‘왕의 만세!’하고 외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를 사무엘이 왕으로 추대하였고, 백성들은 환호함으로써 자기들의 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련의 순서는 약식으로 거행된 일종의 즉위식입니다. 이로써 사울은 정식 왕이 되었습니다.

 

사울이 왕으로 뽑힌 것에 대한 반응들(25-27)

세상의 제도는 완전한 제도는 없습니다. 왕정이든, 민주정이든지 인간의 모든 제도에는 부족한 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 인내와 사랑을 담기에 더 나은 그릇이 무엇인지 고민하면 됩니다. 주의 백성들은 시스템보다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평가보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25사무엘이 나라의 제도를 백성에게 말하고 책에 기록하여 여호와 앞에 두고 모든 백성을 각기 집으로 보내매 26사울도 기브아 자기 집으로 갈 때에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된 유력한 자들과 함께 갔느니라 27어떤 불량배는 이르되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고 멸시하며 예물을 바치지 아니하였으나 그는 잠잠하였더라(25-27)

 

사무엘은 나라의 제도를 기록으로 남긴 후 백성을 보냅니다. 사울이 집으로 갈 때 그를 도와서 나라를 세워갈 사람들이 따릅니다. 하지만 악한 자들은 사울의 능력을 의심하며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1) 왕정제도의 법제화(25)

 

사무엘은 왕을 뽑은 후에 왕정제도에 대해 백성들에게 설명합니다. 왕정제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제도였기 때문에 이기에 알맞은 법도와 율법들이 필요했습니다.

그 “나라의 제도”는 아마도 신명기 17장의 왕 규례에 근거하여 보완한 것으로, 왕과 백성이 지켜야 할 실제적인 지침서에 해당할 것입니다.

 

이 부분은 아무리 왕이라도 마음대로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왕도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과 법도를 따라 백성들을 다스려야 하고 자신도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의 최고 권력자는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왕은 하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왕정이 시작되는 시기에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법도를 정하고 이것을 기록하여 한 부는 여호와 앞에 두었습니다. 여호와 앞에 두었다는 것은 성소에 보관하는 것을 의미하며,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보관 방법입니다.

또한 아마도 왕이 된 사울도 필사해서 한 부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신명기 17장 18-19절에 따르면 왕도 한 부를 복사하여 옆에다 두고 항상 읽으며 여호와의 말씀과 규례를 지켜 행하라고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사울을 찬성한 사람들(26)

 

왕이 세워지고 왕정제도가 만들어지는 모든 절차가 끝나자 백성들은 각기 집으로 돌아갔고, 사울도 기브아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직 왕궁이 있거나 수도가 따로 정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기브아는 이제부터 왕도(王都)가 될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된 유력한 자들이 함께 갔습니다. “하나님께 감동된 유력한 자들”은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손을 대신 힘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힘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재력과 권력을 의미합니다. 즉, 혈연 중심의 이스라엘에서 각 지역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들일 것입니다. 이들이 사울을 따라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도울 자들을 준비해 주셨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모세가 성막을 지을 때 부살렐과 오홀리압을 세워 주신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사울을 반대하는 사람들(27)

 

사울이 자신들을 구원할 것이라 믿지 않고, 멸시하며 예물을 드리지 않는 불량배들도 있었습니다.

본문은 ‘벨리알의 자식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소외 계층이나 하류층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이 예물을 드리지 않았다고 지적하는 이유는 그들이 예물을 내야 할 부유층 또는 상류층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사울의 통치에 반대하는 지방 세력가들입니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사울이 자기들을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하며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라고 다른 사람들을 선동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여기에 반응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잠잠히 있는 듯했습니다.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는 겸손한 태도로 그들의 비판을 수용하면서 그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입증할 기회를 가만히 기다립니다. 이것은 훗날 그가 영적인 감각을 잃고서 그에게 반대하지 않는 다윗마저 제거하려고 했던 것과 대조됩니다.

 

왕 선출 과정에서 보여주는 이와 같은 사울의 모습은 어느 정도 사무엘의 조언을 받아들인 결과일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부은 후 길갈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면서, 그때 사울이 행할 것을 가르치겠다고 말했습니다(10:8). 그러므로 길갈의 만남은 미스바 집회를 대비하여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백성들에게 나타내시고 그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선택에는 책임이 뒤따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의 특권을 책임을 가지고 이루어가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때로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사울처럼 묵묵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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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10-01)


기름 부음으로 왕권을 선포하는 사무엘

사무엘상 10장 1-16절


 

사원을 모집할 때, 회사에서 요구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뽑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조직에 화합 능력이 있는 지까지 살핍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모집하실 때, 가장 먼저 보시는 조건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관점에, 조금 부족하고 모자라 보일 수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사람을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선택하신 일꾼에게 감당할 만한 능력과 은혜를 풍성히 주시고 사용하십니다. 자신이 부족해 보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길 바랍니다.

 

  •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선택하셨음을 알려줍니다. 이는 이스라엘 역사의 전환점을 이루는 일이며 전례 없는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이 소명을 확신할 수 있도록 세 가지 표징이 주어집니다. 암나귀에 관한 일을 알려줄 두 사람을 만나는 것,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는 것, 선지자 무리를 만나며 여호와의 영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사울에게 기름을 부은 사무엘(1)

구약에서 기름부음을 받는 사람은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사장, 선지자 그리고 왕입니다. 기름을 붓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또한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시리라는 것을 나타내는 의식입니다.

 

1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1)

 

사울은 아버지의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 나섰던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하게 사무엘을 만나고, 이스라엘 지도자로 세워지며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그는 정말 당황스럽고 두렵고 놀라운 마음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사울에게 하나하나 설명하며 하나님의 섭리를 알리는 사무엘을 봅니다.

 

사울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무엘은 사환을 앞에 보내고, 사울과 단 둘이 남게 됩니다. 사무엘은 준비한 기름병을 가져와서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붓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기름을 부을 때, 가능한 한 은밀하게 의식을 치릅니다.

 

고대 근동의 관습에 따라 왕이 신하의 머리에 기름을 부음으로 주종관계를 표현하였던 것처럼, 이스라엘에서는 대제사장을 세울 때 머리에 기름을 부음으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종이라는 표시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범위가 확대되어 왕에게도 기름을 부음으로 왕도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선택된 종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절대 권력을 가진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업, 즉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왕은 하나님의 기업을 잘 관리하고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을 것에 대한 예언(2-8)

하나님의 일꾼에게는 성령이 임하여 새로운 삶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갑니다. 세움을 받은 사람들은 항상 성령충만하며, 끝까지 겸손하게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본문은 사울의 왕권은 스스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2네가 오늘 나를 떠나가다가 베냐민 경계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리니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네가 찾으러 갔던 암나귀들을 찾은지라 네 아버지가 암나귀들의 염려는 놓았으나 너희로 말미암아 걱정하여 이르되 내 아들을 위하여 어찌하리요 하더라 할 것이요 3네가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거기서 하나님을 뵈오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리니 한 사람은 염소 새끼 셋을 이끌었고 한 사람은 떡 세 덩이를 가졌고 한 사람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진 자라 4그들이 네게 문안하고 떡 두 덩이를 주겠고 너는 그의 손에서 받으리라 5그 후에 네가 하나님의 산에 이르리니 그 곳에는 블레셋 사람들의 영문이 있느니라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 6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7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8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리니 내가 네게 가서 네가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칠 일 동안 기다리라(2-8)

 

사울은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아직까지도 자기가 왕으로 세움을 받은 것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아직까지 얼떨떨한 사울에게 기름을 부은 뒤, 하나님께서 바로 그날에 그에게 왕으로 세움을 받았다는 것을 세 가지 표징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1) 첫 표징 : 잃어버린 나귀에 대해 알려주는 두 사람(2)

 

사울이 하나님께 선택받았음을 증명하는 첫 번째 표징은, 사울이 사무엘을 떠나 베냐민 경계에 있는 셀사에 이르면 라헬의 무덤 근처에서 두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며, 그들은 사울을 만나자마자 사울의 아버지의 암나귀들을 찾았다는 것을 알려줄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의 아버지는 암나귀에 대한 염려는 이제 놓았는데, 아버지가 사울을 걱정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할 것입니다. 여기서 말을 전하는 사람들은 아버지의 말을 직접 화법으로 인용하여 아버지의 걱정을 좀 더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2) 둘째 표징 : 벧엘의 하나님께 올라가는 세 사람(3-4)

 

두 번째 표징은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하나님을 뵈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은 염소 새끼 세 마리를 끌고 있고, 한 사람은 떡 세 덩이를 가지고 있고, 한 사람은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사울을 보자마자 문안하고, 떡 두 덩이를 주면 사울이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3) 셋째 표징 : 하나님의 산에 선지자 무리(5-6)

 

셋째 표징으로, 사울은 하나님의 산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 블레셋 군대의 영문(블레셋의 수비대)이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을 지나 성읍으로 들어갈 때, 거문고를 연주하며 소고를 치고 피리를 불고 수금을 연주하면서 산당에서부터 내려오는 선지자의 무리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춤을 추고 소리를 지르면서 예언하며 내려오고 있을 것입니다. 그때 사울에게도 기브아에 들어가면서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아주 강하게 임할 것입니다. 사울이 새사람이 되고 그들처럼 춤을 추면서 큰소리로 예언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도 사울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변한다는 것은 사울이 이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지도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 표징에 대한 예언은 사울이 자신이 왕이 되는 것에 대해 여전히 불안해하고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확증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준비하시고 사울을 선택하셨지만, 아직 준비가 안 된 사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주저하고 두려워하고 있었기에 표징들을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두려워하고 주저하는 자들을 계속 설득하시고 그와 함께하심을 보여주며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4) 길갈의 제사 약속(7-8)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런 징조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신다는 뜻이니, 그 후부터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자가 되라고 명령합니다. 왕의 직분도 하나님께서 주셨고, 소심한 성격까지 왕으로서의 담대한 카리스마를 갖도록 하셨으며, 그밖에 모든 것을 다 주셨으니 그 후부터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항상 사울과 함께하실 것을 예언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무엘은 사울에게 길갈로 먼저 가서 7일 동안 기다리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이 명령은 후에 13:7-15과 연결되어 사울과 사무엘의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사무엘의 예언이 성취됨(9-13)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 전에, 먼저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사울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영으로 강하게 하셨습니다. 지역을 변화시킬 강력한 지도자로 세움을 받길 원하신다면, 하나님의 변화를 기대하시길 바랍니다. 묵은 생각으로 시대와 지역을 새롭게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성령의 강력한 능력을 통해 새롭게 변화하시길 바랍니다.

 

9그가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고 그 날 그 징조도 다 응하니라 10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11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들이 사울이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함을 보고 서로 이르되 기스의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고 12그 곳의 어떤 사람은 말하여 이르되 그들의 아버지가 누구냐 한지라 그러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되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더라 13사울이 예언하기를 마치고 산당으로 가니라(9-13)

 

사울은 사무엘에 기름부음을 받고 그에게 예언을 들고서 출발합니다. 사울의 시작은 이렇게 성령의 충만함으로 하나님의 기름 부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새 영이 부어지고 새로운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사울에게 사무엘의 예언이 성취되어갑니다.

 

(1) 표징의 실현(9)

 

사무엘을 떠나면서 마음이 완전히 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마음을 주셨습니다. 즉, 확신도 없고 믿음도 없어 불안해하던 마음이 사무엘의 예언을 들으면서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임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사무엘이 예언한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역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2) 선지자 무리와 만나(10-13)

 

사무엘의 예언 중 셋째 예언이 성취되는 것만을 하나의 예로 보여주는 것으로 사무엘의 예언처럼 그들이 기브아에 도착하자 놀랍게도 때마침 선지자 무리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사무엘의 예언처럼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임했습니다. 사울은 그들 가운데서 예언하였습니다. 10절은 6절의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사무엘의 예언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사울이 예언한 것에 대한 성읍 사람들의 증언으로 이것은 사울에게 일어난 일이 사울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목격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울이 선지자 무리와 함께 예언하는 모습을 보고, 사울을 알던 성읍 사람들은 놀라워합니다. 그들은 ‘기스의 아들도 선지자가 된 것이냐?’라고 수군거렸습니다. 또한 이 선지자 무리의 지도자가 누구인지 궁금해했습니다.

 

사명을 전하지 않은 사울(14-16)

교회나 단체 그리고 지역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될 때, 그 지도자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지혜 중에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솔로몬과 같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먼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때, 따르는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될 때까지 겸손하게 기다리는 인내도 필요합니다.

 

14사울의 숙부가 사울과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디로 갔더냐 사울이 이르되 암나귀들을 찾다가 찾지 못하므로 사무엘에게 갔었나이다 하니 15사울의 숙부가 이르되 청하노니 사무엘이 너희에게 이른 말을 내게 말하라 하니라 16사울이 그의 숙부에게 말하되 그가 암나귀들을 찾았다고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더이다 하고 사무엘이 말하던 나라의 일은 말하지 아니하니라(14-16)

 

사울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그의 변화를 알아차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소문이 납니다. 제일 먼저 나귀를 찾으러 떠났던 사울의 변화를 눈치채고 궁금해 하면서 호기심을 가지고 꼬치꼬치 묻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사울의 숙부였습니다.

숙부는 사울에게 ‘사무엘이 너희에게 이른 말을 내게 말하라’(15)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은 말하면서도 사무엘 선지자를 만나 일어난 일에 대해 알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무엘이 “내가 네게 가서 네가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칠 일 동안 기다리라”(8)라고 한 것처럼 기다리고 순종하고 있었습니다. 아직은 그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하지 않고 기다립니다.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기는 했지만, 아직 정식으로 공표된 것도 아니고 아직도 혼란스럽고 두렵기만 한 사울은 한마디도 나라에 대한 사역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제사장 일을 대신하는 그런 죄를 범하는 사울을 뒤에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지금 겸손하고 신중했던 이런 사람의 모습으로 시작되었구나라는 것을 이렇게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지역을 변화시킬 일꾼들을 찾고 있습니다. 그 일꾼들의 조건은 유능한 사람을 모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면 철저하게 순종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순종함으로 소명에 응답하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이 부어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는 훌륭한 사명자가 됩니다. 시간에 사명에 순종하는 일꾼이 되길 위해 기도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이 당신에게 풍성히 임할 수 있도록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나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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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09-02)


사무엘에게 초대받아 간 사울

사무엘상 9장 15-27절


 

얼마 전 장로님 한 분을 만났습니다. 살아오신 과정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내 인생에 그 장로님을 만난 것은 축복입니다. 나도 그 장로님과 같은 훌륭한 장로가 되어야겠다고 항상 생각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인생은 많은 만남을 통해 자신을 만들어갑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집니다. 훌륭한 사람을 많이 만나면 그만큼 좋은 인물로 성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다 나가서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어서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청년 사울은 아버지 암나귀를 잊어버림으로 그 나귀들을 찾아 나서서 사흘 동안 헤매고 다녔습니다. 이 과정에서 뜻하지 않는 만납니다. 이 만남을 통해, 당대 최고 영적 지도자인 사무엘을 만납니다. 더 나가서 사무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왕으로 세워지는 놀라운 말씀을 받습니다.

 

미리 알려준 하나님의 사역(15-17)

사람들 관점에서 보면,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행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이 사실은 모든 역사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왕정시대가 시작되는 첫 순간부터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분명히 가르쳐줍니다. 사울과 사무엘의 만남에는 하나님께서 먼저 역사하셨습니다.

 

15사울이 오기 전날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되 16내일 이맘 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로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되었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았노라 하셨더니 17사무엘이 사울을 볼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다스리리라 하시니라(15-17)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사무엘 선지자를 만나게 하십니다. 사울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오기 하루 전날에 미리 사무엘에게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낼 것임이라 그에게 기름을 부을 것이라’라고 알려주십니다. 그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임을 알려주십니다.

 

(1) 여호와의 예고(15-16)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에게 나타나 계시해주시는 장면으로 사무엘의 귀를 열어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왕을 선출하는 중요한 일이므로 조금의 실수도 허용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내일 이맘 때”라고 구체적인 시간까지 말씀하심으로써 사무엘이 실수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오기 전날 사무엘에게 미리 계시해주십니다. 이 사실은 지금까지 진행된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역사했다는 사실입니다.

 

“내일 이맘 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로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16)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기름을 붓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름을 붓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특별한 사명을 맡기시면서 그가 그 사명을 성취하기까지 그를 보호하며 그의 필요를 채우겠다고 약속하시는 의식이며, 또 기름부음을 통해 그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시는 영적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기름부음 받은 자를 공격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과 같습니다(26:9).

한편 사울을 왕으로 선출하는 것은 미스바에서 이루어집니다(10:24). 사울에게 기름을 붓는 의식과 미스바에서 그를 왕으로 선출하는 과정은 모순된 중복이 아닙니다. 후자는 전자로 인해 반드시 따라와야 하는 정치적 절차에 해당합니다. 사울은 ‘나기드’, 즉 왕이 될 것으로 예정된 사람으로 기름부음을 받을 것이며, 블레셋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비록 사무엘이 블레셋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으나, 이제 사울에게로 책임이 넘어갔습니다(7:13-14).

 

(2) 여호와의 선언(17)

 

사무엘이 사울과 만났을 때,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다스리리라”(17)라고 사울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사울을 선택하는 과정에 이처럼 하나님의 섬세한 개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서 ‘다스리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아차르’이며, 이는 ‘통제하다’, ‘유지하다’를 의미합니다. 사사들은 백성을 통제하지 못했으나, 왕은 백성을 통제하여 어떤 방향으로든 이끄는 권세를 갖고 있습니다. 또 그는 이스라엘의 현 상황을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사무엘의 초대(18-21)

우리가 몰라서 그러지 하나님께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놀라운 계획은 사울은 왕으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겸손히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성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자녀로 주신 특권을 누리고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18사울이 성문 안 사무엘에게 나아가 이르되 선견자의 집이 어디인지 청하건대 내게 가르치소서 하니 19사무엘이 사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선견자이니라 너는 내 앞서 산당으로 올라가라 너희가 오늘 나와 함께 먹을 것이요 아침에는 내가 너를 보내되 네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네게 말하리라 20사흘 전에 잃은 네 암나귀들을 염려하지 말라 찾았느니라 온 이스라엘이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너와 네 아버지의 온 집이 아니냐 하는지라 21사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하니(18-21)

 

사울은 성문 가운데 있는 사무엘을 보았으나 그가 선견자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선견자의 집이 어디에 있으냐고 묻습니다. 사무엘은 자신이 그라고 밝히면서 왕이 될 사울을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말합니다.

 

(1) 사울의 질문(18)

 

사울이 성을 들어설 때, 성문 가운데 있는 사무엘을 만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찾는 선견자인 것을 알지 못하고, 선견자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습니다. 사울이 영적으로 민감하지 못한 것을 암시하는 행동일 것입니다.

 

(2) 사무엘의 초대(18-20)

 

사무엘은 친절하게 사울의 질문에 대답하고서, 자기보다 먼저 산당으로 올라가라 하고 그를 초청했습니다. 이것은 사울을 존중하여 자신보다 앞세우고 자신은 뒤따라가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생각해둔 일정은 먼저 식사하고, 그다음 함께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에 사울을 떠나보내는 것입니다. 그동안 사울은 잃어버린 나귀 문제뿐만 아니라, 선견자에게 묻고 싶어서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것을 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울이 자신이 왕이 될 것인지에 관해 묻고 싶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사무엘이 대화를 유도하면서 사울에게 나랏일에 관하여 질문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주었을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사흘 전에 잃어버린 암나귀들을 이미 찾았으니 염려하지 말고 자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모든 사모함이 너와 네 아비 집에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모한다’는 말은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그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는 아마도 사울의 가문이 이미 경제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유력한 가문이 되었고 앞으로 더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울도 자신의 능력으로 이미 주변 지역에서 명성을 얻었을 것입니다.

 

(3) 사울의 대답(21)

 

사무엘의 말에 사울은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21)라고 겸손하게 대답합니다. 그 말에는 사울의 겸손함을 나타냅니다. 베냐민 지파를 이스라엘 지파 가운데 가장 작은 지파라고 하는 것은 사사 시대 기브아를 중심으로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던 사건 때문일 것입니다(삿 20:46-48). 이 사건은 베냐민의 인구를 매우 감소시켰을 뿐 아니라, 열두 지파 가운데서 베냐민 지파의 지위를 낮추었습니다. 또 사울은 자신의 가족이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다고 말합니다. 가족은 ‘미쉬파하’의 번역입니다. 이렇게 말한 사울의 생각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반응입니다. 왕은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이 많을수록 강력한 왕권을 만들 수 있고, 왕권을 안전적으로 지켜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여러 가족이 모인 대가족을 가리키는데, 흔히 ‘가족’(수 21:4)이나 ‘족속’(삼하 14:7; 대상 4:8)이라 번역됩니다. ‘가족’이 모이면 ‘족속’이라 불리며, ‘족속’이 모이면 ‘지파’가 됩니다. 이는 사울의 족보(9:1)에 등장하는 사람이 기스를 제외하면 모두 역대기의 베나민 지파 계보에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가문이 혈통적으로 비주류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역대기 족보는 사울 가문의 시작이 기브온의 조상 여이엘이라고 말합니다(대상 9:35). 그런데 ‘여이엘(아비엘)’은 베냐민 지파의 공식 족보에서 이름을 찾을 수 없는 비주류에 속한 사람입니다(대상 8:1-28). 사울은 현재 자신의 집이 유력하다는 사실을 내세워 교만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으며, 자신의 처지를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약한 자를 통해서 일하시며 그를 통해 하나님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십니다.

 

산당에서의 식사(22-24)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뜻과 맞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동참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의 위대함이 이곳에서 나타납니다. 원래 사무엘 선지자는 왕정 정치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철저하게 순종합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훌륭한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그러니깐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신 것입니다.

 

22사무엘이 사울과 그의 사환을 인도하여 객실로 들어가서 청한 자 중 상석에 앉게 하였는데 객은 삼십 명 가량이었더라 23사무엘이 요리인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주며 네게 두라고 말한 그 부분을 가져오라 24요리인이 넓적다리와 그것에 붙은 것을 가져다가 사울 앞에 놓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보라 이는 두었던 것이니 네 앞에 놓고 먹으라 내가 백성을 청할 때부터 너를 위하여 이것을 두고 이 때를 기다리게 하였느니라 그 날에 사울이 사무엘과 함께 먹으니라(22-24)

 

갑작스런 사무엘의 말에 사울은 겸손하게 대답합니다. 이처럼 사울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적인 덕성은 신앙에 뿌리를 두지 못한 것이었기에 계속되지 못했습니다.

 

(1) 사울과 사환의 자리(22)

 

사무엘은 사울과 사환을 인도하여 잔치가 벌어진 객실로 인도합니다. 그 두 사람을 초청받은 30명가량 손님 가운데 잔칫상의 상석에 앉게 하였습니다. ‘객실’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리쉬카’는 흔히 성전이나 성소 혹은 왕궁에 부속된 방을 가리킵니다(렘 35:2; 36:12).

 

(2) 보관했던 좋은 고기(23-24)

 

사무엘은 자신이 요리인에게 미리 준비시킨 고기를 사울에게 가져오라고 명합니다. ‘요리인’은 ‘탑바흐’의 번역인데, 이 단어는 고기 요리를 담당하는 요리사를 가리킵니다(8:13). “이 때”는 ‘모에드’의 번역입니다. ‘모에드’는 ‘만남’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만남의 시간’ 혹은 ‘만남의 장소’를 뜻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요리인에게 미리 준비하면서 고기의 넓적다리 부분을 따로 보관하도록 미리 지시했습니다. 화목제 제물 중 넓적다리 부분은 제사장들의 몫으로 좋은 부위로 여겨졌습니다(출 29:26-28). 그러나 여기서 사무엘이 사울을 제사장으로 취급한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은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좋은 부위를 사울에게 줌으로써 암시적으로 사울을 왕으로 대접하고 있습니다.

 

성읍에서의 교제(25-27)

훌륭한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높은 직책(position)에만 있다고 해서 지도자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교육을 시켜서 긍정적인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과정도 지도자의 할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불평할 때 같이 불평한다면 지도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크게 사용하실 때는 자신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할 때입니다. 순종할 때에 기쁘게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 더 높이 쓰실 것입니다.

 

25그들이 산당에서 내려 성읍에 들어가서는 사무엘이 사울과 함께 지붕에서 담화하고 26그들이 일찍이 일어날새 동틀 때쯤이라 사무엘이 지붕에서 사울을 불러 이르되 일어나라 내가 너를 보내리라 하매 사울이 일어나고 그 두 사람 사울과 사무엘이 함께 밖으로 나가서 27성읍 끝에 이르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사환에게 우리를 앞서게 하라 하니라 사환이 앞서가므로 또 이르되 너는 이제 잠깐 서 있으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네게 들려 주리라 하더라(25-27)

 

사울은 왕으로서 마음을 준비되어 있지 않지만, 왕으로 자질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준비된 사울을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우십니다. 준비된 만큼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1) 지붕 위 담화(25)

 

잔치가 끝나고 사울과 함께 산당에서 내려온 사무엘은 지붕에 사울이 잘 곳을 마련해줍니다. 여기서 지붕 위는 집의 2층 혹은 3층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이스라엘의 지붕들은 평평했기 때문에 그곳에 방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리고 그 방들은 통풍이 더 잘되어 가족들이 활동하고 잠을 자기에 더 좋은 곳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이런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사무엘은 사울을 위해 좋은 곳에 잠자리를 마련해주고 잘 잠들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늦게까지 대화하다가 잠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대화는 사무엘의 주도로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왕으로서 준비된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해 “나라의 일”(10:16)에 관해 질문하여 그의 대답을 유도하고, 이스라엘 민족의 나아갈 길에 관한 자기 생각을 사울에게 전해주었을 것입니다.

 

(2) 사무엘의 메시지(26-27)

 

지붕에서 밤을 지낸 사무엘이 동틀 때쯤 일찍 일어나서 사울을 데리고 밖으로 나온 뒤 성읍 끝에서 사환을 앞서 보내고 둘만 남자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전달하라는 말을 하겠다며 사울에게 기름 부을 준비를 합니다. 사울이 왕이 된다는 것은 사울과 사무엘 사이의 비밀이기 때문에 둘만 남아 기름 부을 의식을 준비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왕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보다 한 걸음 앞서 가시며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좋은 영향을 받아서 전달할 준비되었습니까? 될 수 있으면 사무엘과 같은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더욱 축복의 통로로 나갈 수 있습니다. 좋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받아서 더 많이 살리시길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키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당신의 삶이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고 지역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축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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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09-01)


아버지의 잊어버린 나귀를 찾는 사울

사무엘상 9장 1-14절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할 때 그들을 관심 있게 지켜보십니다. 지도자다운 자질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해 훌륭하게 사용됩니다. 현재 하나님은 세상을 책임질 합당한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고 계실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 받을 준비된 그릇이 되어야 하며, 그 부름에 응답할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준비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한 헌신을 다짐합시다.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에 왕으로 세우기 위해 사람들을 살피고 계셨습니다. 이 말씀은 왕으로 세워 가지시는 과정을 기록합니다. 그 중에 합당한 사람 사울을 만납니다. 그 과정으로 사울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잊어버린 암나귀를 찾으러 두루 다니다가, 사환의 권유를 따라 한 마을로 들어가 거기서 사무엘을 만납니다. 그를 통하여 놀라운 일을 듣게 됩니다.

 

사울에 대한 소개(1-2)

세상에서 지도자의 자격은 다양하게 평가됩니다. 왕이 되기 위해서는 품격과 외모가 요구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외모만으로 일꾼을 세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며, 겸손한 사울을 왕으로 선택하셨습니다. 현재도 하나님께서는 지도자의 자질로 겸손함을 가장 먼저 보십니다. 그래서 겸손한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1베냐민 지파에 기스라 이름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요 스롤의 손자요 베고랏의 증손이요 아비아의 현손이며 베냐민 사람이더라 2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1-2)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동안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했고, 하나님께서는 할 수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을 허락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후에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 사울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입니다.

 

(1) 사울의 가문(1)

 

사울은 베냐민 지파의 사람으로, 기스의 집안에서 태어난 준수한 아들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가장 작은 지파입니다. 또한, 사울은 작은 가족에서 태어난 인물입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그는 특별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역대기의 족보(대상 8:29-33; 9:35-39)와 비교하며, 사울의 족보를 재구성하면, 기스의 아버지로 소개된 아비엘을 기브온의 조상 여이엘과 동일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아비엘(여이엘)은 넬(1)을 낳았고, 넬(1)은 기스와 또 다른 넬(2)을 낳았습니다. 결국, 기스는 사울을 낳은 인물이 됩니다. 실제로는 사울이 아비엘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스는 ‘유력한’ 사람으로 묘사되며, 이는 능력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유력하다’는 용사, 부자 또는 권력자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처럼 사울의 가족은 이스라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울은 강력한 가문의 일원으로서 지도자로 부름받게 됩니다.

 

(2) 사울의 외모(2)

 

사울에 대해 더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그의 외모는 한마디로 매우 “준수한 소년”이라 평가합니다. 이는 장성한 성인을 가리키는 ‘청년’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는 다른 백성들보다 키가 어깨 위만큼 켰고, 외모도 매우 건장한 사내였습니다. 외모로도 왕으로 보기에는 충분히 자격을 갖춘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단순히 외모만 잘 생겼다는 것이 아니라 왕이 될 만한 재목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울이 당시 나이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단지 칠십인경(LXX)의 일부 사본이 사울이 30세에 왕이 되었다고(13:1) 말하는 것과 또 사울의 초기 전투에서 이미 군대를 이끌고 있는 요나단의 나이가 최소한 10대 후반인 점을 고려한다면(13:2), 청년 사울의 나이는 35-40세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암나귀들을 찾으러 길을 떠난(3-5)

우리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사려 깊게 헤아릴 때, 우리는 그들을 이해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태도를 통해 우리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포용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지도자가 됩니다. 따라서, 성실함과 이해심을 바탕으로 한 삶이 필요합니다.

 

3사울의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 그의 아들 사울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한 사환을 데리고 가서 암나귀들을 찾으라 하매 4그가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 땅으로 두루 다녀 보았으나 찾지 못하고 사알림 땅으로 두루 다녀 보았으나 그 곳에는 없었고 베냐민 사람의 땅으로 두루 다녀 보았으나 찾지 못하니라 5그들이 숩 땅에 이른 때에 사울이 함께 가던 사환에게 이르되 돌아가자 내 아버지께서 암나귀 생각은 고사하고 우리를 위하여 걱정하실까 두려워하노라 하니 6그가 대답하되 보소서 이 성읍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그리로 가사이다 그가 혹 우리가 갈 길을 가르쳐 줄까 하나이다 하는지라 7사울이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우리가 가면 그 사람에게 무엇을 드리겠느냐 우리 주머니에 먹을 것이 다하였으니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릴 예물이 없도다 무엇이 있느냐 하니 8사환이 사울에게 다시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내 손에 은 한 세겔의 사분의 일이 있으니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려 우리 길을 가르쳐 달라 하겠나이다 하더라 9(옛적 이스라엘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물으려 하면 말하기를 선견자에게로 가자 하였으니 지금 선지자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라 일컬었더라) 10사울이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네 말이 옳다 가자 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 성읍으로 가니라(3-10)

 

사울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사람’의 목소리를 청종할 준비가 되었으며, 사환의 말이라도 올바른 조언이면 기꺼이 받아들일 만큼 겸허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는 선지자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1) 나귀를 찾는 것을 실패함(3-4)

 

3절부터 사울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문제의 발단은 아버지 기스의 암나귀가 사라진 것입니다. 이 사건은 후에 사울과 사무엘이 만나는 계기가 되는 것으로 암나귀가 사라진 것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역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암나귀가 사라지자 사울의 아버지 기스는 아들에게 나귀를 찾아오라고 명령합니다. 기스는 매우 급하게 일어나 가서 찾아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을 받은 사울은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 땅과 사일림 땅과 베냐민 땅을 이리저리 두루 다니며 열심히 찾고 또 찾아다녔습니다. 그가 찾으러 다닌 범위는 에브라임 산지의 북서쪽 끝에서 남서쪽 끝으로 한 3일 정도 걸렸을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명령을 매우 열심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는 순종적이고 성실한 인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찾아도 사울은 암나귀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 또한 정상적인 상황은 아닙니다.

 

(2) 사울과 사환의 대화(5-10)

 

사울이 단락은 사울과 사환의 대화 부분으로 암나귀를 찾는 부분은 한 절로 간단하게 요약한 반면 사무엘을 만나러 가자고 제안하는 부분은 대화를 통해 자세히 설명함으로 사울과 사무엘이 만나는 이야기에서 이 부분이 중요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암나귀를 찾아다니던 사울은 숩의 땅 즉, 사무엘이 살고 있는 라마와 멀지 않은 곳까지 우연히 가게 되었습니다. 구약에서 우연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으로 온 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 오래 집을 떠나 있던 사울은 자신들에 대해 아버지가 걱정할 것을 염려하며 사환에게 집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이에 대해 사환은 지금 있는 곳이 라마라는 것을 기억하고 사울에게 좋은 해결책을 내놓습니다. 자신들이 온 성읍, 즉 라마에 마침 존경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으니, 그에게 말해서 길을 물어보자고 제안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선지자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사환이 설명한 사무엘의 특징은 그가 말하는 것은 모두 이루어진다는 것으로 이것은 신명기 13장 1-3절에서 설명하는 참 선지자의 특징을 잘 드러냅니다.

 

이런 사환의 말에 사울은 문제점을 지적하는데, 선지자에게 드릴 예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3일 동안 다녔기 때문에 양식은 모두 떨어졌고 선지자에게 줄 선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선물을 드리는 관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걱정에 사환은 또다시 해결책을 내놓습니다. 자신에게 은 4분의 1세겔이 있으니, 이것을 선물로 드리고, 나귀의 길을 물어보자고 한 것입니다. 사울과 사환의 대화를 보면 사환은 매우 유능하고 지혜로운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예비하심으로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9절은 당시 하나님의 사람, 즉 선지자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울 당시에는 하나님의 사람을 ‘선견자’로 불렸는데, 사무엘서가 기록된 당시에는 ‘선지자’로 불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환의 해결책을 들은 사울은 그 말에 동의하며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 성읍으로 갔습니다.

 

사무엘을 만난 사울(11-14)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바라볼 때,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계획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간순간마다 정확하게 사람과 환경을 준비하시고 타이밍을 맞추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받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11그들이 성읍을 향한 비탈길로 올라가다가 물 길으러 나오는 소녀들을 만나 그들에게 묻되 선견자가 여기 있느냐 하니 12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있나이다 보소서 그가 당신보다 앞서 갔으니 빨리 가소서 백성이 오늘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므로 그가 오늘 성읍에 들어오셨나이다 13당신들이 성읍으로 들어가면 그가 먹으러 산당에 올라가기 전에 곧 만나리이다 그가 오기 전에는 백성이 먹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제물을 축사한 후에야 청함을 받은 자가 먹음이니이다 그러므로 지금 올라가소서 곧 그를 만나리이다 하는지라 14그들이 성읍으로 올라가서 그리로 들어갈 때에 사무엘이 마침 산당으로 올라가려고 마주 나오더라(11-14)

 

사람들은 마음으로 자기 앞길을 계획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끄십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기 위해 성읍으로 이끌리어 들어갔습니다. 그곳에는 하나님께서 이미 준비하신 사람들과 사무엘이 있었습니다.

 

(1) 소녀들의 안내(11-13)

 

사무엘을 만나려는 사울에게 또 다른 도움의 손길이 나타나는데, 성에서 물을 길으러 나오는 소녀들입니다. 사울과 사환은 성읍을 향한 비탈길로 가다가 물을 길러 나오는 소녀들을 만났습니다. 물 긷는 것은 소녀들이 주로 하는 일이었습니다(창 24:15). 당시 이스라엘의 성읍은 주로 높은 곳에 있었고, 우물은 낮은 계곡에 많이 있었습니다.

 

사울이 그 소녀들에게 선견자가 여기 있는지 물으니, 얼마 전에 성으로 들어갔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사무엘이 성읍에 들어온 것은 산당에서 제사하는 일정이 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산당’은 지방 성소로서 지역 주민들이 제사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산당은 자연적으로 혹은 인공적으로 약간 높게 돋우어져 있는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며, 제사하기에 적합한 장소이므로 흔히 이런 장소에 제단을 세웠는데, 때로는 부속된 건물을 짓기도 했습니다.

여호수아의 경우, 인도를 받아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보니, 가나안 사람들의 우상숭배 제단이 있는 산당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제단이 있던 산당을 여호와께 예배하는 장소로 빈번하게 사용했습니다. 점차 이것이 문제가 되면서 분열 왕국 시대에는 산당 철폐가 가장 높은 수준의 종교개혁 운동으로 인정받았습니다(예. 왕상 15:3-4).

소녀들은 사울과 사환이 서둘러 간다면 선견자가 산당에 들어가기 전에 만날 것이라 말했습니다. 아마도 이 제사는 화목제로서 제사의 제물을 여러 사람이 함께 나눠 먹게 될 것입니다. 초청받은 사람들은 선견자가 먼저 제물에 축사한 뒤에 음식을 먹을 것입니다.

 

(2) 사무엘과 만남(14)

 

사울과 사환이 그 성읍으로 올라가서 성읍 가운데로 들어갈 때, 마침 사무엘이 산당에 올라가기 위해 성읍에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사무엘을 만나는데 됩니다.

 

사무엘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사울이 언제쯤 자신을 찾아올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성읍에서 나오면서 우연히 그들을 만난 것이 아니며, 도리어 그들을 만나려는 목적으로 성읍에서 나온 것입니다.

“마침”은 히브리어 ‘힌네’의 번역입니다. 사울의 관점에서는 사무엘과 만난 것이 우연을 뜻하는 ‘마침’이지만, 사무엘의 관점에서는 사울과 만난 것이 ‘마침’ 있게 된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사무엘에게 이 만남은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네’는 ‘놀랍게도’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사무엘이 그들을 만나서 함께 산당에 올라가기 위해 나오고 있었다.’라고 바르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섭리로 우리를 인도하시며,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하는 경솔한 요청에도 신중하게 이를 처리하십니다. 모든 사건과 상황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를 준비시키는 과정에 사용됩니다. 권력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권력은 하나님의 허락을 통해 생명력을 얻습니다. 사울이 아버지의 암나귀를 찾지 못해 집으로 돌아가려 하자, 사환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길을 묻자고 제안합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동기를 통해 하나님은 사울과 사무엘의 역사적 만남을 성사시키시며, 사울의 여정도 무의미하게 사용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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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08-01)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사무엘상 8장 1-22절


 

사람은 자신을 가르칠 어른이 있을 때 방자해지지 않고 바른 길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나라도 진정한 왕을 바르게 모실 때 백성들이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신정(神政) 국가였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바르게 모시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방 다른 나라처럼 인간 왕을 세워서 왕정국가 체제를 요구하게 됩니다.

 

  • 사무엘이 점점 나이가 들어갑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이 사사로 일했지만, 사무엘의 아들들까지 돈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합니다. 이것을 빌미로 이스라엘 장로들은 사무엘에게 정치적, 군사적인 이유를 내세워 왕을 요구합니다. 그들이 왕을 요구한 진짜 속마음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사무엘의 불량한 아들들(1-3)

신앙이 언제나 한결 같을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 항상 신실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육체가 시간이 지나면서 노쇠해져 가듯이, 영적인 상태도 언제나 항상 젊고 순결하고 거룩한 형태만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의 믿음이 흔들려 변화하지 않으려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1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 2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3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1-3)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인도할 때, 하나님은 블레셋의 침략을 막아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이 늙어 사사로서의 역할을 더 이상 수행하지 못하게 되자, 그는 두 아들을 사사로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들은 사무엘과는 달리 아버지의 영성을 본받지 않았습니다. 이는 마치 엘리의 아들들과 같은 모습이었으며,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를 방해받게 되었습니다.

 

(1) 사사가 된 사무엘의 아들들(1-2)

 

시간이 흘러서 사무엘은 나이가 많은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들은 요엘(‘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과 아비야(‘여호와는 나의 아버지시다’)였습니다. 사무엘은 그들을 브엘세바의 사사로 세웠습니다. 브엘세바는 블레셋과 경계선을 대한 이스라엘의 남단 지역에 있습니다. 블레셋에서 회복된 후, 이스라엘 땅이 되면서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한 곳입니다. 브엘세바의 사사직은 큰 권력을 가진 자리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사사’는 제사장을 제외하고 세습이 안 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에서 지도자가 세습된 것은 이때가 처음입니다. ‘사사’는 문자적으로 ‘재판하는 자’를 의미하며, 재판뿐만 아니라 전쟁을 수행하면서 백성의 다양한 문제를 상담하고 해결해주는 일을 담당합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은 아버지처럼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다스리는 사사가 아니라, 브엘세바 지역에서만 담당하는 사사 임무를 수행하였을 것입니다.

 

(2) 사무엘 아들들의 부패상(3)

 

사무엘의 아들들이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려면 백성들에게서 지도력을 인정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버지 사무엘의 바른 길을 따르지 않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불의한 판결을 했습니다. ‘판결을 굽게 함’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불의한 판결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왕정 수립 요구(4-9)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나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삶은 유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 형성됩니다. 믿음의 가정에서는 훌륭한 신앙적 분위기와 부모의 모범이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자녀의 믿음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부모의 문제가 아니라 자녀가 주님 앞에 바로 서는 일입니다.

 

4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5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6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7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8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9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가르치라(4-9)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 선지자의 아들들의 악행 때문에 왕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만이 절대적인 왕이십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 계신 것처럼 요구한 것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1) 왕정 수립 요구(4-5)

 

사무엘의 아들들이 행한 악한 일들을 지켜본 이스라엘 백성은 그 두 아들이 사사로서 지도력을 행사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장로들이 라마에 사는 사무엘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사무엘에게 다른 나라들처럼 왕이 통치하는 나라를 세워주길 요구합니다.

이 새로운 사사를 요구하지 않고 왕을 요구하는 이유는 사사 시대 삼백여 년 동안 사사들의 통치를 경험하면서 실망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입니다(삿 21:25). 이뿐 아니라 왕정을 요구하게 만드는 시대적인 이유가 존재했습니다.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밝힙니다. 첫째, 사무엘이 늙었기 때문이고, 둘째 사무엘의 아들들이 잘못된 재판을 하는 등 사사로서 적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이유는 새로운 지도자를 요청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장로들은 사사를 세워달라는 것이 아니라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합니다. 이렇게 왕을 달라는 것은, 첫째, 통합이 필요성입니다. 비교적 평온했던 사사 시대는 지파별 혹은 지역별로 흩어져 생활하는 것이 가능했고, 지역별 민간 지도자인 사사들이 자기 주변지역 주민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 민족들, 특히 블레셋과의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그들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하나로 통합되어야 했습니다. 둘째, 지도자의 부재입니다. 군대가 없으면서도 전체 이스라엘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무엘과 같은 지도자가 계속해서 나올 가능성이 없습니다. 이것은 사무엘의 아들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 강제력을 소유한 최고 지도자의 필요성입니다. 상설 군대를 조직하고, 재빠른 의사 결정을 통해 백성 전체를 영솔하여 급변하는 국제 정세와 전쟁의 위협에 대비할 한 명의 최고 지도자 왕이 있어야 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장로들이 모여 권력을 한사람 왕에게 모아주기로 협의하고, 사무엘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이 사무엘에게 왕정 수립을 요구하면서 제안하는 왕의 기본 역할은 사사들이 하던 직무였습니다.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여기서 ‘다스리다’는 ‘샤파트’로 표현되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사사들이 하던 일을 왕이 하기를 원했습니다. ‘열방과 같이’. 다른 모든 민족처럼 이스라엘도 왕이 백성을 재판하는, 즉 왕이 전체 백성의 유일한 사사가 되는, 왕정을 요구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여기서 왕정의 구체적인 특성에 관하여 열방과 같기를 원하지 않았고, 단순히 사사 제도가 왕정으로 발전한 정치 제도가 시행되는 것을 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원한다는 뜻이며, 하나님께서 그 속박에서 해방시킨 애굽의 체제로 돌아가겠다는 요구나 다름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무효화하고 자신들 스스로 노예가 되겠다고 자청한 것이었습니다.

 

(2) 사무엘의 반응과 여호와의 허락(6-9)

 

사무엘은 백성들의 왕정 요구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에게 사사 직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7).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에게 백성들이 요구하는 바를 모두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는 백성들의 이러한 요구 뒤에 사무엘에 대한 불신보다 여호와께 대한 불신이 있다고 지적하십니다. 백성들은 여호와를 버려서 여호와께서 왕이 되지 못하게 하려고 인간 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인간 왕권과 하나님의 왕권은 서로 배치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인간 왕이 없는 사사 시대에는 하나님의 왕권이 실현되지 않았습니다(삿 17:6; 21:25). 그러므로 인간 왕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왕권을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 왕을 요구해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 왕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인간 왕을 세우심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을 엄히 경고한 뒤, 왕의 제도를 백성들에게 가르치라고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는 인간 왕권을 반대하는 사상과 찬성하는 사상이 공존하면서 서로 갈등하고 때로는 서로 타협하고 있었습니다.

 

사무엘도 왕정에 반대하였으나 점차 왕정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인간의 왕권을 찬성하셨고 모세를 통해 이미 왕 규례를 선포해두셨습니다(신 17:14-20). 그리고 그들의 잘못된 동기(하나님을 버리는 것)에 대해 책망하시지만 왕정 자체에 대해서는 찬성하십니다. 사무엘이 지금 가르칠 왕의 제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스라엘에게 엄히 경고하기 위해 주어진 왕 규정입니다. 왕의 일반적인 의무와 책임에 관한 규정은 신명기 17:14-20에 제시되었으며, 나중에 미스바에서 이에 관하여 선포될 것입니다(10:25).

 

왕정 제도(10-18)

한 국가가 고도로 조직화 될 때, 국가를 다스리는 절대 권력이 국민을 괴롭힌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체제가 형성되면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국가를 위하여 존재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백성과 지도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현상으로 오늘날에도 이러한 일이 사상을 초월하여 전개되고 있습니다.

 

10사무엘이 왕을 요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말하여 11이르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12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13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14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15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16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17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 18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니(10-18)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을 세울 경우 나타나게 될 모든 부정적인 결과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이 전한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뜻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무엘의 경고를 듣고 난 장로들은 그것에 반발하여 왕에 대한 자신들의 요구를 더욱 강하게 요구합니다.

 

(1) 군대와 왕궁을 위한 인력 동원과 세금(10-17)

 

사무엘은 왕을 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 즉 왕정제도(王政)에 대한 위험을 전합니다.

첫째, 아들들이 왕의 군사로 징집당하고 전쟁에 나가며 그들은 왕을 위한 말과 병거를 몰아야 하고, 왕의 병거 앞에서 뛰는 사람, 즉 왕의 호위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왕을 위한 직책을 맡게 되며 왕을 위해 농사도 지어야 하고, 왕의 근대를 위해 무기들을 만들어 공급해야 합니다. 둘째, 딸들은 왕의 시녀가 되어 왕의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셋째, 왕은 백성들의 밭을 취하여 자신의 신하들에게 줄 것입니다. 여기 밭을 취한다는 말은 여러 이유로 백성들의 밭을 빼앗아 갈 것이라는 말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땅을 함부로 사고팔거나 경계표를 옮겨서는 안 되는데 왕에게는 이런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할 만한 강력한 권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땅을 받는 신하들은 왕을 섬기고 왕정에서 일하는 자들로 귀족들을 가리킵니다. 왕정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계급 제도가 생기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왕은 이 귀족들에게 여러 권력과 부(富)를 주면서 충성하게 만들 것입니다. 넷째, 왕은 백성들에게 십일조의 세금을 거둘 것입니다. 세금으로 귀족들에게 부를 제공하고 왕도 부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에는 세금이 없었고, 오직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바치던 십일조를 왕에게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 결론적으로 백성들은 왕의 종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자 종으로서 모두 평등한 형제였는데, 이제 계급이 생기면 백성들은 왕의 종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왕이 압제한다고 백성이 부르짖어도 구원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을 버리고 왕을 선택한 대가를 치르게 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인간 왕은 하나님 왕과는 다르게 백성을 종으로 부리고 재물을 빼앗고 압제할 것이라고 하시면서 이제 백성들에게 현명한 선택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최후의 경고인 셈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왕정을 보는 관점이 대단히 부정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왕정 체제와 인간 왕의 한계를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 백성들의 고통(18)

 

왕이 세워져 왕이 다스리게 되면, 좋은 왕만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은 스스로 선택한 왕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이스라엘은 부르짖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응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날”을 두 번 사용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날은 왕정이 도입되는 날이 아니라, 왕정이 부패하여 백성을 학대하는 ‘그 날’을 가리킵니다.

 

계속되는 왕정제도 요구(19-22)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중심에 하나님 대신 자신들의 자아가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믿는 자들에게 부딪쳐오는 문제가 어떤 것이든 간에 진정으로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께로 돌이켜 먼저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무시했던 것입니다.

 

19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20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21사무엘이 백성의 말을 다 듣고 여호와께 아뢰매 22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하시니 사무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성읍으로 돌아가라 하니라(19-22)

 

하나님께 왕을 달라는 요구는 강한 나라가 되는 대신에 왕의 노예가 되겠다는 의미입니다. 배부른 대신에 자유를 반납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애굽의 종살이하던 시절로 돌아가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연민으로 놀라운 지혜와 능력으로 이 백성을 출애굽시켜 세상 어디에도 없는 자유의 나라로 세워주셨건만, 지금 이스라엘은 역출애굽을 요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무색케 하는 것입니다.

 

(1) 백성들의 요구(19-20)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 선지자의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들을 다스리는 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장로들의 본심인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백성은 ‘열방과 같이’ 왕이 있어서 그 왕이 자기들을 다스리고 앞장서서 전쟁을 수행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열방과 같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백성이 원하는 왕정은 가나안 여러 민족들의 왕정과 유사성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 어느 정도까지의 유사성을 의미하는지 불확실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에게 다스리는 것과 전쟁하는 것을 기대하는데, 전자가 내정과 관계된다면 후자는 외교나 국방에 해당할 것입니다.

 

(2) 여호와의 허락(21-22)

 

사무엘은 완강한 백성들의 모든 말을 듣고 하나님께서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요구를 허용하셨습니다. 여호와의 귀에 그 말들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말을 들어서 그들에게 왕을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왕이십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거부하고 인간 왕을 요구함으로써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들의 은밀한 의도는 하나님께 드러나며, 인간 왕을 세우면 왕이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악함을 보였습니다. 결국 그들이 세운 왕은 그들을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왕으로 모시고 자신을 낮출 때, 그 왕은 선한 왕이 되어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낼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의 왕이 되심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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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07-01)

 


하나님께 미스바에서 회개하는 이스라엘

사무엘상 7장 3-17절


 

기도하는 지도자는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습니다. 더욱이 성실하기까지 하면 성령의 강력한 능력을 받게 됩니다. 종종 하나님께 물질로 쓰임받기 위해 물질을 위해 기도합니다. 세상의 권세와 권위로 쓰임받기 위해 기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는 기도와 신실함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강력하게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촉구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행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지만 진실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이스라엘에게 바르게 제시했습니다. 완악한 사람들이라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스바에 모여서 기도회를 하도록 요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권고합니다. 미스바 기도회를 통해 어떤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제1차 회개 운동(3-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을 주시길 원합니다. 그러나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하나님께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버리고 취하는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뼈를 깎는 고통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싫어하신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 기뻐하신 것은 취하는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순종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높이 들어서 사용하실 것입니다.

 

3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4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3-4)

 

이스라엘은 언약궤가 벧세메스로 들어올 때, 그들이 오기심으로 언약궤를 열어보다가 칠십 명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실을 보면서 애통합니다. 이 사건을 개기로 사무엘이 공식적으로 등장합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권고합니다.

 

(1) 사무엘의 권면(3)

 

30대 초반인 사무엘이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서 처음 공개적인 활동을 시작하는 장면입니다. 법궤가 돌아온 사건을 통해 백성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알았고 하나님께 돌아오려는 마음의 준비를 하였습니다.

이때 사무엘이 일어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전심으로 돌아오려면 다른 신들을 버리고 여호와만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사 시대를 지나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다른 신을 겸하여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런 신앙의 모습은 당시 고대 근동의 풍습으로는 당연하겠지만, 이스라엘은 여호와만을 섬겨야 하는 여호와의 종교에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2)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와 헌신(4)

 

우상은 두 종류로 구분되었습니다. 첫째는 이방 신들인, 이는 지역마다 존재하는 여러 바알 신을 가리킵니다(4). 둘째는 아스다롯입니다. 아스다롯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이쉬타르 여신에 해당하는데, 가나안에서 바알의 누이이면서 배우자로 숭배되었습니다. 아스다롯은 전쟁과 사랑 그리고 다산을 상징하는 여신입니다. 가나안 경내에 가장 사랑받는 우상이었으며 많은 사람이 미혹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 얻을 유일한 방법은 회개를 통해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을 제시했습니다. 6장에서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손을 두려워하는 데 반해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손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3절에서 이방 신으로 표현되었던 것을 바알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는 것은 일신론을 넘어서 유일신 신앙을 가리킵니다. 여호와의 권능을 본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발적으로 여호와께 돌아왔습니다.

 

제2차 회개 운동(5-6)

우리가 여호와만 의지하기 전에는 여호와는 나를 다스리시는 왕이 아니라, 언제든 취하고 버릴 수 있는 우상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려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구원과 평화는 회개로부터 시작합니다.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하고 찾는 데서 새로움은 시작됩니다.

 

5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6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5-6)

 

블레셋에서 하나님의 법궤는 돌아왔지만, 아직 변방에 방치되어 있습니다. 아직까지 그들을 지배하는 것은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모든 우상을 제하고 마음을 하나님께만 향하도록 촉구합니다.

 

(1) 미스바에 소집(5)

 

민간에서 일어났던 1차 회개 운동이 끝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사무엘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미스바로 소집하여 민족의 회개 의식을 거행합니다.

미스바는 사사 시대부터 민족의 집회가 개최되었던 장소입니다(20:1). 본문의 미스바(‘망대’)는 모압이나 길르앗 지역의 미스바와 구별되는 곳이며, 베냐민 지파에 속하는 성읍입니다.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아마도 예루살렘 북서쪽 7km 지점의 네비 삼월(선지자 사무엘)이거나 예루살렘 북쪽 14km 지점의 텔 엔 나스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2) 백성의 회개 기도(6)

 

사무엘은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말합니다. 중재자로서 사무엘의 역할은 그가 모세의 사역을 일부 물려받았음을 뜻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모세와 사무엘을 중보자로 언급하셨습니다(렘 15:1).

모세의 후계자로서 사무엘은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이며, 왕에 관한 법을 제정하며, 이스라엘에 왕정을 도입하여 새로운 사회 질서를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미스바에서 그들은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부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 전부를 여호와께 드리며, 다시는 여호와로부터 돌이켜 떠나지 않겠다는 서약 의식입니다. 또 그들은 그날에 금식하고, 죄를 자백했습니다. 금식은 슬픔과 회개의 표시로 행해집니다. 죄 고백은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기 위해 행해야 하는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미스바에서 사무엘의 사사 활동에 대한 기록이 나타납니다.

 

블레셋과의 전쟁(7-14)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에게 그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풍성한 은혜를 채워주십니다. 신앙적인 기도와 경건은 한 나라를 안전하게 지키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가 당신을 기쁘시게 하면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며 해를 끼치지 않게 하십니다.

 

7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그들의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8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 9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10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11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더라 12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13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14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7-14)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여 회개하며 영적으로 새롭게 헌신을 다짐하고 있을 때 블레셋은 이를 오히려 이스라엘을 칠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에 때 맞추어 이스라엘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한 섭리였습니다.

 

(1) 블레셋 군대의 진격(7)

 

이스라엘의 대규모 집회는 블레셋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으므로, 블레셋의 방백들이 이스라엘과 대적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지배를 받았거나 연이어 패배했던 경험으로 인해 블레셋이 온다는 말을 듣자 큰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오직 하나님의 구원을 바랄 뿐이었습니다.

 

(2) 사무엘의 기도(8-9)

 

사무엘은 젖 먹는 어린 양을 여호와 하나님께 온전히 번제로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해 부르짖어 기도했는데, 여호와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3) 이스라엘의 승리(10-12)

 

여호와 하나님의 적극적인 간섭은 이스라엘의 승리를 가져왔습니다. 사무엘의 기도에 응답하신 여호와께서는 평범한 천둥이 아니라 큰소리의 천등으로 블레셋을 공격하셨습니다. 블레셋은 혼란에 빠졌고, 싸우기도 전에 이미 이스라엘 앞에서 패배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미스바에서 나가 도망하는 블레셋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쳤습니다. 벧갈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미스바 서편에 있었을 것입니다. 블레셋을 성공적으로 쫓아낸 후, 사무엘이 한 돌을 가져다가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우고 그 돌의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부르면서 여호와의 도우심을 찬양했습니다. 엘리 시대 에벤에셀은 패배의 상징이었으나, 사무엘에 의해 승리의 상징으로 바뀌었습니다.

 

(4) 전쟁의 결과(13-14)

 

이 전쟁의 결과가 세 가지로 제시됩니다. 첫째, 블레셋이 굴복했습니다. ‘굴복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카나’는 ‘자신을 낮추다’ 혹은 ‘대적을 굴복시키다’를 의미합니다. 한번 굴복한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영토 안으로 침공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무엘이 살아 있는 동안 여호와의 손이 블레셋을 막으셨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에 대한 이스라엘의 결정적인 패배가 사무엘의 죽음 이후에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도 사무엘의 생존 시기 동안은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막으셨을 것입니다. 둘째, 성읍들이 회복되고 그 사방 지역을 도로 찾았습니다. 회복된 성읍들은 에그론과 가드를 포함하여 그 사이에 있는 여러 성읍입니다. ‘회복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슈브’의 번역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전심으로 돌아왔을(슈브) 때, 잃었던 성읍들이 돌아왔습니다(슈브), ‘도로 찾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나찰인데, 이 단어는 ‘건져내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회복된 성읍들의 주변 지역을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건져냈습니다. 셋째, 아모리 사람들과 평화(샬롬)가 있었습니다. 아모리는 흔히 가나안 주민들 전체를 가리키거나, 그중 일부를 가리킵니다(창 15:16; 수 9:1). 블레셋과의 전쟁은 이스라엘의 힘을 크게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주변 가나안 민족들이 이스라엘과 싸우기보다는 화평하기를 원했습니다.

 

사무엘의 통치(15-17)

하나님의 관계가 회복될 때 깨어진 모든 관계와 질서가 회복됩니다. 질서가 회복된다는 것은 불편한 관계가 회복되어 평화가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삶 속에 두려움과 어려움이 가득합니까?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15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되 16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17라마로 돌아왔으니 이는 거기에 자기 집이 있음이니라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15-17)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이스라엘에게 영원히 기념할 만큼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승리로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을 뿐만아니라 잃었던 옛 영토 회복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 사사 사무엘(15)

 

이 단락은 사무엘의 사역을 요약한 것으로 그는 에브라임 지역의 벧엘과 길갈과 베냐민 지역인 미스바를 순회하며 그곳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다스리고 재판을 하였습니다.

이후 사무엘은 평생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사사는 주로 재판과 상담을 통해 백성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그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세우고 이스라엘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 사사 자신이 사령관 역할을 하거나 혹은 군사 자문관 역할을 하면서 전쟁을 이끌게 됩니다.

 

(2) 순회 장소(16-17)

 

사무엘이 매년 순회하면서 다스린 장소들, 벧엘과 길갈 그리고 미스바는 모두 가나안 땅 중부에 속하는 성읍들입니다. 사무엘의 직접적인 통치 영역이 그다지 넓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사무엘의 시대 모든 이스라엘이 사무엘을 그들의 지도자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온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촉구하였고, 그 후에는 미스바로 그들을 소집할 수 있었습니다(3,5). 그의 고향인 라마에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제단을 쌓았습니다. 여기서 제단을 쌓는다는 것은 그가 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을 라마에서도 했다는 것이고, 아직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지기 전이기 때문에 지방에도 제사를 드리는 장소들이 있었는데, 흔히 산당이라고 부르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전심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바로 서는 시작이자 모든 문제의 마침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외치는 사람도 또 이를 위해 신앙의 밭을 갈아엎는 사람도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임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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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06-01)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

사무엘상 6장 1절-7장 2절


 

“거룩”은 “타자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분을 통제하거나 조종하여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거나 길들이지 않는 것을 거룩 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거룩하신 하나님은 자유로운 하나님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블레셋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자유와 거룩은 어떻게 표현되었습니까?

 

  •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지역에 머물 때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내리신 재앙을 더 견딜 수 없어서 돌려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새 수레에 속건 제물을 신고, 젖먹이는 암소 두 마리를 그 수레에 메어 벧세메스로 끌고 가게 하였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 안을 보았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만) 칠십 명의 사람을 죽이셨습니다. 그들은 다시 그 궤를 기랏여아림으로 가져가 아비나답의 집에 두었습니다.

 

이스라엘로 돌아간 여호와의 궤(1-9)

하나님께서는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능력을 목격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실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1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있은 지 일곱 달이라 2블레셋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 3그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의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이유도 알리라 하니 4그들이 이르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까 하니 이르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통치자에게 내린 재앙이 같음이니라 5그러므로 너희는 너희의 독한 종기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광을 돌리라 그가 혹 그의 손을 너희와 너희의 신들과 너희 땅에서 가볍게 하실까 하노라 6애굽인과 바로가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 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재앙을 내린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7그러므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8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로 드릴 금으로 만든 물건들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 하고 9보고 있다가 만일 궤가 그 본 지역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의 손이 아니요 우연히 당한 것인 줄 알리라 하니라(1-9)

 

블레셋에 닥친 재앙의 원인을 알아냈습니다. 여호와의 법궤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로 합니다. 승리자로서 애굽에서 나올 때 많은 전리품을 취하셨듯이, 이번에도 전리품을 취해 돌아오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을 심판하시는 데 이스라엘의 칼과 병거를 의지하지 않으셨습니다.

 

(1) 제사장과 점술가의 조언을 구함(1-2)

 

법궤가 블레셋 땅에 머문 지 7개월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기간은 5장에서 언급된 여러 사건들이 일어난 기간입니다. 재앙 때문에 블레셋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던 법궤를 원래 있던 곳인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자는 의견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점쟁이들을 불러서 어떻게 여호와의 궤를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낼지 방법을 묻습니다(2). 제사장들은 다곤 신이나 기타 블레셋 신들의 제사장들이고, 점쟁이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이름으로 다양하게 점을 치고 예언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법궤를 보낼 때 반드시 속건제를 같이 드려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속건제는 여호와의 성물에 손실을 입힐 경우 그 손실을 입힌 것에 5분의 1을 더하여 배상하는 제사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말하는 속건제도 레위기에서 말하는 규정과는 조금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배상제입니다. 이들은 법궤를 가져온 것을 여호와의 거룩성을 훼손한 것으로 여겼고, 이로 인해 여호와께서 진노하시고 여호와께서 재앙을 내리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2) 소건 제물의 필요성(3)

 

그래서 속건제를 드려 여호와의 진노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병도 치료를 받고 왜 여호와의 손이 자신들을 비껴가지 않는지 이유를 알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만일 속건제를 드려서 재앙이 멈추고 병이 낫게 되면, 법궤로 인해 여호와께서 자신들에게 진노를 내렸다는 생각이 옳았음을 증명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3) 소건 재물의 내용(4-6)

 

이에 백성들이 속건제로 무엇을 드릴지를 다시 묻습니다. 이에 제사장들과 점쟁이들은 블레셋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을 보내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블레셋 다섯 방백은 블레셋 다섯 도시의 지도자들로 이들은 블레셋 사람 전체를 대표합니다. 그러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은 블레셋 전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입니다. 제물이 금 독종과 금 쥐의 모양을 한 이유는 독종을 쥐가 퍼뜨리는 질병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방법을 이야기한 후에 이렇게 하면 혹시 하나님께서 가볍게 해주시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손을 가볍게 하다’라는 표현은 5:6의 ‘여호와의 손이…엄중히 더 하사’와 대조되는 표현으로 ‘재앙을 약하게 내린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혹시’라는 희망을 표현하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이들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경외심을 갖고 자신의 식견대로 하지만, 이 제물을 받고 재앙을 거두실지 여부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기서 블레셋의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은 자신들에게 임한 재앙을 애굽에 내려진 재앙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첫째로, 블레셋에 내려진 재앙을 애굽에 내린 재앙과 동일한 단어인 ‘마게파’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5절에서 ‘땅을 해롭게 하는 쥐’라는 표현에서 ‘해롭게 하는 것’이란 표현은 출애굽기 12:23에서 유월절에 애굽의 장남을 치기 위해 들어가는 ‘멸하는 자’와 동일한 단어인 ‘마쉬히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쥐를 블레셋 땅을 파괴하는 재앙을 가져오는 존재로 본 것입니다. 셋째로, 백성들을 설득하는 수단으로 애굽 사람들과 바로가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재앙을 받은 예를 들면서 그들도 이런 일을 당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이 수사학적인 질문은 우리는 애굽 사람의 교훈을 보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말자고 설득하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내린 재앙을 보면서 과거 애굽에 내려진 재앙을 기억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큰 권능을 가지신 두려운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4) 새 수레와 젖먹이는 암소(7-9)

 

7-9절은 법궤를 보내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 이들은 여호와께서 보내신 재앙을 보고도 끝까지 이 재앙이 여호와께서 보내신 것인지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 제의에서처럼 법궤를 수레로 옮기려고 새 수레를 만들고 젖먹이 송아지가 있는 암소 두 마리로 수레를 끌게 하였습니다. 젖먹이 송아지가 있는 암소를 택한 이유는 암소들이 본능적으로 새끼가 있는 곳으로 향하기 때문에, 소들이 송아지들에게 가는지 혹은 본능을 거스르고 이스라엘 지역인 벧세메스로 가는지를 본 후 이 재앙이 여호와께서 내리신 것인지 우연히 온 것인지를 확인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블레셋 사람들이 끝까지 자신들의 신인 다곤이 이스라엘의 신인 여호와께 졌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벧세메스에 도착한 여호와의 궤(10-18)

인간은 너무나도 간사하고 악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게 되며 풍요로 인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은혜를 망각하고 감사를 잃어버린, 지극히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세가 주는 교훈을 기억하고 신앙적 태도를 견지해야 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때도 외부의 적인 악의 세력에 대한 경계 못지않게 내적인 교만과 방심을 경계해야 합니다.

 

10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11여호와의 궤와 및 금 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12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13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 본 것을 기뻐하더니 14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15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니라 16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 17블레셋 사람이 여호와께 속건제물로 드린 금 독종은 이러하니 아스돗을 위하여 하나요 가사를 위하여 하나요 아스글론을 위하여 하나요 가드를 위하여 하나요 에그론을 위하여 하나이며 18드린 바 금 쥐들은 견고한 성읍에서부터 시골의 마을에까지 그리고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큰 돌에 이르기까지 다섯 방백들에게 속한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성읍들의 수대로였더라 그 돌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오늘까지 있더라(10-18)

 

여호와의 궤를 돌려보내자고 결정하고 나서도 마지막까지 재앙의 원인이 정말로 이 법궤 때문인지 확인하려 했습니다. 자신들의 신이 여호와보다 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이 재앙이 우연이고, 여호와도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신이길 바란 것입니다.

 

(1) 법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옴(10-16)

 

사람들이 제사장들의 말을 그대로 따라서 암소 둘을 끌어오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여호와의 궤와 금 쥐와 금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었습니다. 그리고 암소를 벧세메스로 가게 하자, 암소는 울면서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벧세메스를 향해 곧장 갔습니다. 송아지가 엄마를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하나님의 강권적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울면서 계속 걸어가는 암소의 모습을 보면서 재앙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었다는 것을 한 번 분명하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법궤가 벧세메스에 도착한 때는 밀 추수기로 대략 5-6월 정도입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추수를 하다가 돌아오는 궤를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본 것을 기뻐하였다’라는 표현은 이것이 전혀 상상도 못한 상황이며,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법궤를 다시 본 후 찾아온 큰 기쁨을 의미합니다.

수레는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있던 큰 돌 근처에 오자 멈춰 섰습니다. 이들의 걸음은 목적지에 도착한 후에야 비로소 멈춘 것입니다. 이 큰 돌위에 법궤와 금 보물이 담긴 상자를 두었는데, 이 큰 돌은 제단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수레의 나무를 패고 암소들을 잡아 여호와께 모두 태워서 드리는 번제를 드렸고, 다른 짐승들을 잡아 짐승제사를 드렸는데, 이 제사의 기름과 피는 여호와께 바치고 고기는 제사를 지낸 사람들이 나누어 먹으며 잔치하는 형태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법궤가 돌아온 것을 보고 축하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법궤가 선물까지 가지고 돌아왔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블레셋의 신인 다곤을 이기고 전리품까지 챙겨 귀환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벧세메스 사람들은 여호와의 승진을 축하하고 기뻐하며 여호와께 제시를 드리고 마을 사람들과 잔치를 벌이며 축하하였습니다. 대조적으로 블레셋의 다섯 방백들은 암소들이 벧세메스에 도착한 것을 보고 재앙이 여호와의 권능이었다는 사실과 자신들의 신 다곤이 이스라엘 신에게 패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에글론으로 돌아갔습니다.

 

(2) 블레셋이 드린 예물 목록(17-18)

 

블레셋 사람들이 속건 제물로 여호와께 드린 목록을 기록한 것입니다. 독종 형상은 블레셋의 다섯 도시를 위해 드렸고, 다섯 쥐들은 다섯 방백에게 속한 도시와 그 주변의 마을과 블레셋 들 등 모든 블레셋 지역을 위해 드렸다고 설명합니다. 일반적으로 고대 사회는 성읍과 그 주변의 마을과 들로 구성됩니다. 그러므로 블레셋은 다섯 방백들이 다섯 개의 성읍을 중심으로 다섯 구역으로 나누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기랏여아림으로 간 여호와의 법궤(19-7:2)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무능력한 인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경외하지 않고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신실하실 것이며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19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20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21전령들을 기럇여아림 주민에게 보내어 이르되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 가라 7:1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2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19-7:2)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감당할 만큼 그들은 영적으로 깨어 있거나 겸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하는 자는 이스라엘이든 블레셋이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벧세메스에 도착한 법궤를 함부로 들여다보다 한 날 70명이나 목숨을 잃었습니다.

 

(1) 벧세메스에 임한 재앙(19)

 

벧세메스에서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보았고, 이로 인해 여호와께서 백성들을 쳐서 (오만) 칠십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백성들이 여호와의 궤를 열고 그 안을 들여다본 사건입니다. 그러나 오만 칠십 명은 한 마을 사람들의 숫자로 보기에는 너무 많은 숫자이기 때문에 어떤 사본의 경우에는 칠십 명만 기록하고 있고, 대부분의 주석가들도 70명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함부로 행하는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벌을 내리신 것입니다.

 

(2) 벧세메스 사람들의 요청(20-21)

 

“누가 능히 서리요.” 여호와 앞에 선다는 말은 여호와를 섬긴다는 뜻입니다. “옮겨 가라”(직역하면 ‘가지고 올라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기랏여아림은 높은 곳(해발 약 700m)에 있는데, 그 이름의 뜻은 ‘숲의 성읍’이며, 기브온과 연맹을 맺은 성읍일 것입니다(수 9:17). 이 성읍은 벧세메스 동북쪽으로 14킬로미터,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1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3) 기랏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에 모셔진 여호와의 궤(7:1-2)

 

법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렀던 20년은 사무엘의 회개 운동 때까지를 말합니다(7:3). ‘사모하다’(7:2)로 번역된 히브리어 ‘나하’는 ‘애곡하다’의 뜻이므로 울며 사모한 것을 나타냅니다.

 

이 일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여호와의 권능과 거룩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고 여호와를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다른 곳으로 옮긴 것처럼, 이들도 법궤를 기랏여아림으로 옮기고, 그곳에서 법궤를 지키기 위해 엘리에젤을 선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은 그분의 거룩하심과 자유하심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기쁘신 뜻을 따라 자유롭게 결정하고, 그 자유의 길로 우리를 초대하시고, 우리가 진리 안에 거하며 응답할 때, 우리도 그 하나님의 자유를 누리며, 생명을 만들어내고 샬롬 공동체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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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05-01)

 


법궤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

사무엘상 5장 1-12절


 

오늘날은 다원주의 사상으로 많은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의 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다양한 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우상들은 하나님과 분명히 구별되십니다. 하나님과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은 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20궁핍한 자는 거제를 드릴 때에 썩지 아니하는 나무를 택하고 지혜로운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세우느니라”(이사야 40:19-20)고 말했습니다. 우상은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 이스라엘과 전투에서 승리한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아스돗으로 가져다가 다곤 신전에 둡니다. 이후 다곤은 몸뚱이만 남은 채 엎어져 있고, 아스돗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망합니다. 하나님의 궤가 옮겨 가는 가드, 에그론에도 재앙이 계속되자, 사람들은 궤를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자고 합니다.

 

아스돗의 재앙(1-7)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느끼고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그 느낌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없다고 무시하거나 부인하다고 하나님께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뿐입니다. 시편에서는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시편 14:1)라고 말합니다. 어리석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할 뿐입니다.

 

1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2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서 다곤 곁에 두었더니 3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4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 5그러므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는 자는 오늘까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하더라 6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한 종기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역을 쳐서 망하게 하니 7아스돗 사람들이 이를 보고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하게 할지라 그의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하고(1-7)

 

불리하고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광을 스스로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은 결코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하나님 외에 어느 누구도 의지할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고 내가 믿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정말 아무 쓸모없는 우상일 뿐입니다.

 

(1) 다곤 신당에 머문 법궤(1-2)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전쟁에서 획득한 전리품들을 자기 신 다곤에게 예물로 마쳤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에서 획득한 언약궤를 아스돗에 있는 다곤 신전에 둡니다. 고대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민족이 패배한 민족의 신상을 약탈하여 전리품으로 가져갔습니다. 승리한 민족의 신이 패배한 민족의 신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면서, 패배한 민족의 신앙을 무너뜨려서 그들이 쉽게 재기하지 못하도록 방비하는 효과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수호신으로 생각하는 다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보다 더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아스돗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도시로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53km 떨어져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다곤 신당 안의 다곤 신상 곁에 두었는데, 이는 법궤가 다곤의 포로가 되었음을 표시하기 위함입니다. 다곤 신은 풍요와 다산을 관장하는 가나안의 곡식 신이며, 가나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바알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아스돗의 다곤 신전은 마카비 지도자 요나단에 의해 주전 147년에 파괴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가나안 신을 섬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두 가지 암시합니다. 첫째, 그리스 지역 지중해 연안에서 이주해 온 블레셋은 해양 민족으로서이 특성을 유지하는 것보다 가나안의 다른 민족들처럼 농업을 주산업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둘째, 블레셋에 포함된 여러 민족 중, 해양 민족출신이 지배층을 형성했다면 피지배 계층에는 토착 가나안 사람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2) 다곤 신상의 굴복(3-5)

 

다음 날 아침에 아스돗 사람이 신당 신전에서 놀라운 일을 발견했습니다(3). 아침에 다곤 신전에 들어간 본 결과,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을 땅에 처박고 있었습니다. 엎드려져 땅에 얼굴을 처박고 모습은 완전히 복종을 표현하는 자세입니다. 아스돗 사람이 다곤 신상을 제자리에 다시 세워 두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다곤 신이 거짓된 허상이란 것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분명히 알게 합니다.

오히려 다곤 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한 아스돗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다음날에 다곤 신상이 머리와 두 손목이 잘린 채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 엎드러져 있었습니다. 머리와 두 손은 끊어져 문지방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후 아스돗 다곤 신전에 출입하는 제사장이나 다른 모든 사람이 다곤 신전의 문지방을 밟지 않는 풍속이 생겼습니다. 머리와 두 손이 문지방에 놓인 사실과 문지방 아래에는 여러 영과 신들이 머물고 있다는 고대인의 미신을 연결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곤 신상이 자신의 영광스러운 부분인 머리와 힘을 가진 부분인 두 손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다곤은 자신의 권능을 상징할 수 있는 것들을 여호와의 법궤에서 가장 먼 문지방에 두고, 몸통만으로 여호와 앞에 엎드려 복종했습니다.

 

(3) 독한 종기의 재앙(6-7)

 

여호와의 손이 그들 위에 엄중히 더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손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거나 이방 민족들을 심판하시는 여호와의 권능을 가리킵니다(출 9:3; 수 4:24; 삿 2:15).

“엄중히 더하사”라는 ‘무겁다’를 뜻하는데, 엘리의 비대한 몸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습니다(4:18). 또 ‘영광’을 의미하는 이가봇 이름과 관련하여 사용되었습니다(4:21,22). 그러므로 여호와의 손이 엄중하게 됨은 이스라엘의 영광인 법궤가 블레셋 땅에 이르러 스스로 영광을 쟁취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호와의 손이 엄중하므로(무거워지므로), 두 가지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첫째, 아스돗이 망했습니다. “망하게 하니”의 원문은 폐허로 만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호와께서 아스돗 지경의 땅을 황폐하게 하셔서 사람들을 망하게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둘째, 여호와께서 독한 종기로 아스돗과 그 지경의 사람을 치셨습니다. 독한 종기는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치시기 위해 독한 종기를 무기로 사용하셨습니다. 아스돗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임한 재앙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 신의 손이 아스돗 사람들과 그들의 신 다곤을 친다고 생각하여, 그 신의 궤를 다른 곳으로 떠나보내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의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여기서 “친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카샤’로 표현되었습니다. 이 동사는 농경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표현으로, 소에게 무거운 멍에를 씌우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카베드’의 유사어 중 하나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엄중하며, 또 아스돗 사람과 다곤에게 무거운 멍에를 씌웠습니다.

가드의 재앙(8-9)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가장 사랑하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당신이 잠시 어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 믿음을 지키기 위해 당한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흔들림 없이 서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허탄한 것을 의지함으로 넘어지는 백성되지 않길 바랍니다. 끝까지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보호해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최후 승리는 하나님께 주실 것입니다.

 

8이에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방백을 모으고 이르되 우리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하랴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가드로 옮겨 가라 하므로 이스라엘 신의 궤를 옮겨 갔더니 9그것을 옮겨 간 후에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읍에 더하사 성읍 사람들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한 종기가 나게 하신지라(8-9)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 신이 손과 머리가 잘린 것처럼, 여호와의 심판 앞에서 다곤 우상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는 무능력한 것을 절감(切感)했습니다. 그래서 다곤 신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곤 신만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블레셋 사람들에게 가만히 계시지 않았습니다. 아스돗 사람들에게 종기 재앙이 임하도록 하셨습니다.

 

(1) 가드로 옮기신 법궤(8)

 

아스돗 사람이 블레셋의 다섯 방백을 모두 모으고, 그들에게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곤란한 입장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가드로 그 궤를 옮겨가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옮겨 가다’는 ‘돌아가다’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가드로 옮겨 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가드로 옮겨갔습니다. 가드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아스돗에서 동남쪽으로 약 18km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는 견해가 유력합니다. 골리앗의 고향으로 유명하며, 다윗이 한동안 가드 왕 아기스의 보호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여호와의 강한 손으로 언약궤가 있는 아스돗과 그 주변을 심판하십니다. 그 근처 곳곳 사람들에게 독한 종기의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들에게 여호와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들어내십니다.

 

(2) 독한 종기의 재앙(9)

 

그들의 법궤를 가드로 옮긴 후에, 여호와의 손이 그 성읍에 임했는데 곧 심히 큰 환난이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손은 심판을 상징하는데, 심히 큰 환난이 이 손과 동격으로 주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강조를 뜻하는 두 단어“심히”와 “큰”을 사용하여 가드에 임한 환난의 극심함을 표현합니다. “환난”은 이 단어는 ‘혼란’이나 ‘소동’을 의미합니다. 또 여호와께서 그 성읍의 사람들을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모두 쳐서 그들에게 독한 종기가 나게 하셨습니다.

 

에그론의 재앙(10-12)

그들에게는 전쟁에서의 승리의 증거이던 언약궤가 오늘은 재앙의 근원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탄식으로 끝날 우상들을 의지하지 말고, 여호와의 전능한 손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에게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디모데전서 4:7)고 권고합니다.

 

10이에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내니라 하나님의 궤가 에그론에 이른즉 에그론 사람이 부르짖어 이르되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 하고 11이에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그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이 죽임당함을 면하게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읍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12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치심을 당해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10-12)

 

하나님께서 무서운 신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자신들의 우상을 버리고 돌아와야 합니다. 우상의 한계를 발견했다면, 우상 신을 버리고 여호와를 섬겨야 했습니다.

 

(1) 에그론으로 옮겨진 법궤(10)

 

블레셋은 법궤를 다시 가드에서 에그론으로 옮겼지만, 에그론은 가드에서 동북쪽으로 약 20km,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30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법궤가 멈물렀던 세 도시는 아스돗과 에그론을 웟변으로 하고 가드를 꼭짓점으로 하는 역삼각형 모양을 이루고 있습니다.

에드론 사람들의 반응은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10)고 적극적으로 반대하였습니다. 블레셋 안에서는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빨리 항복하고 돌아서야 했습니다. 계속적으로 하나님께서 경고하시는데도 속히 돌아서지 않고 계속 미루고 있습니다.

 

(2) 에그론의 환난과 독한 종기 재앙(11-12)

 

결국은 블레셋의 지방 방백들이 모이게 한 후에 하나님의 언약궤에 대한 대책 회의합니다. 그 결과가 어떤 결과입니까? 본래 장소로 돌려보내서 그 궤가 그들을 죽이지 못하게 하자고 요구했습니다. 그 온 성읍에 사망의 환난이 닥쳤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환난이란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 여호와의 손이 그곳에 매우 엄중하게 임하여, 죽지 않은 사람들이 그곳에 매우 엄중하게 임하여, 죽지 않은 사람들은 독종으로 침을 받아서 그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닿았습니다. 여기서 “부르짖음”은 주로 신의 도움을 구하는 부르짖음을 의미합니다(출 2:23; 삼하 22:7; 렘 8:19). 하늘에 올라갔다는 표현이 하나님께 도달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하늘에서도 들을 수 있음 만큼 부르짖는 소리가 크고 간절했다는 뜻입니다.

세 도시에 임한 재앙이 점점 강도를 높여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스돗에서는 엄중하였고(6), 가드에서는 심히 큰 환난이 있었으며(9), 에그론에서는 사망의 환난이 있고 또 여호와의 손이 매우 엄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분인지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블레셋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서도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의지했던 다곤 신으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다곤을 보호해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우상을 버리지 못하는 블레셋 사람들입니다.


블레셋이 언약궤를 빼앗은 후 겪는 재앙을 통해 하나님이 진정한 주권자임을 보여줍니다. 블레셋은 언약궤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며,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그 이름을 높이신다는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뜻에 순종해야 함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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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04-02)


제사장 엘리에 닥친 죽음들

사무엘상 4장 12-22절


 

‘성전(聖殿)’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을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린도전서 3:16)라고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더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우리 자신들이 거룩하지 않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 전쟁에 나간 두 아들의 소식을 엘리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쟁터에서 도망나온 베냐민 사람은 슬픈 소식을 전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군사들이 3만이나 죽고, 엘리의 두 아들들도 죽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까지 빼앗겼다는 소식입니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슬픈 소식이 전해진 것처럼 비운(悲運)은 없습니다. 엘리는 나쁜 소식을 듣는 순간 넘어져 죽습니다.

 

엘리의 최후(12-18)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목으로 자신만을 섬기는 일입니다. 영안이 어두워지면 방향과 목표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아 하나님을 자신의 성공이나 출세를 위해 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의해야 합니다. 자신의 유익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면 눈이 밝아지고 활동적인 그리스도인 될 것입니다.

 

12당일에 어떤 베냐민 사람이 진영에서 달려나와 자기의 옷을 찢고 자기의 머리에 티끌을 덮어쓰고 실로에 이르니라 13그가 이를 때는 엘리가 길 옆 자기의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떨릴 즈음이라 그 사람이 성읍에 들어오며 알리매 온 성읍이 부르짖는지라 14엘리가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이 떠드는 소리는 어찌 됨이냐 그 사람이 빨리 가서 엘리에게 말하니 15그 때에 엘리의 나이가 구십팔 세라 그의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16그 사람이 엘리에게 말하되 나는 진중에서 나온 자라 내가 오늘 진중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엘리가 이르되 내 아들아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17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18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12-18)

 

이스라엘은 최후의 수단으로 언약궤를 선택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없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생각했습니다(4:3). 전쟁터에 하나님의 언약궤와 제사장들은 앞세워 나갔습니다.

 

(1) 울부짖는 실로 주민들(12-13)

 

전쟁터에서 도망지자 전쟁에서 살아남은 한 베냐민 사람이 전쟁터에서 도망해 달려와 실로에 도착했습니다. 이 사람의 모습은 옷을 찢고 머리에 티끌을 덮어쓴 상태였습니다(12). 이 모습만 보더라도 성읍 사람들은 전쟁에서 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울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베냐민 사람이라는 점은 이제 베냐민 지파 사울의 시대가 열리게 됨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베냐민 지파이므로 실로에 자기 집이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최고 사령부 역할을 하는 실로에 와서, 전쟁 소식을 기다리는 엘리와 다른 지도자들에게 보고하려고 달려온 것입니다. 그의 옷은 찢어져 있었고 그의 머리에는 흙이 묻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이스라엘의 패배와 그로 인한 그의 비통한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에벤에셀에서 출발했다면 실로까지 대략 30킬로미터 이상을 달려온 것입니다.

그 베냐민 사람이 성읍에 들어올 때, 엘리는 길 곁 자기 의자에 앉아 초조하게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의자가 성전 문설주 옆 의자를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그 의자가 문 곁에 있었다는 설명을 고려할 때 아마도 같은 의자일 것입니다(1:9; 4:18). 엘리는 의자에 앉아서 길 쪽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당시 나이 98세로 비록 늙어 거의 움직이지 않는 눈이지만, 그 눈을 움직이려 애쓰면서 전령이 올 수 있는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궤를 걱정하면서 크게 떨렸습니다. 엘리에게 중요한 것은 두 아들보다도 법궤의 안위였습니다. 엘리는 법궤를 가져가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언약궤를 실로에서 가지고 나오면서 대단한 행사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한 언약궤를 가지고 나가니깐,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다 승리할 것처럼 기세등등했습니다. 제사장 엘리는 성전 문 앞에 의자에 앉아서 전쟁의 결과에 대한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13).

전쟁터에서 도망 나온 베냐민 사람이 실로에 도착했습니다(12). 이스라엘에 최고 사령부 역할을 하는 실로에 와서, 전쟁 소식을 기다리는 엘리와 다른 지도자들에게 보고하려고 달려온 것입니다.

 

(2) 엘리의 기다림(14-15)

 

엘리는 성읍 가운데서 부르짖는 소식을 듣고 더욱 불안하였습니다. 그때 전령이 엘리에게 빨리 와서 소식을 전했습니다(14). 엘리는 이때 98세이므로 눈이 어두워 보지 못했습니다(15). 하지만 엘리의 이러한 상태가 그의 영적 침제를 가리킨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단지 신체적 현상일 뿐입니다.

 

(3) 전쟁의 결과를 알게 된 엘리(16-17)

 

베냐민 사람이 엘리에게 자신은 진중에서 나온 사람이라고 자신을 먼저 소개합니다. 그는 치열하게 벌어지는 전쟁처에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보고는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전쟁의 과정과 결과에 관해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어서 그는 한 번 더 자신이 오늘 전장에서 도망쳐 나왔다고 말합니다. 두 번 말하는 것은 늙은 엘리가 귀조차 어두워 못 들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지혜로운 행동입니다. 또 자신의 보고가 정확하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행동입니다.

엘리는 그를 “내 아들아”라고 부릅니다(16). 이는 그가 많은 고생을 하고 죽을 뻔한 위기도 넘기면서 여기까지 왔음을 알기 때문에 엘리가 그를 위로하고 칭찬하는 마음을 담아 부르는 칭호입니다. 엘리는 그에게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라고 마음에 가득한 불안을 감추고 침착한 태도를 가장하면서 전쟁의 결과에 관해 물어보았습니다.

그 전령이 대답했습니다. 그 전령은 세 가지 내용을 전했습니다. 첫째, 전쟁에 져서 이스라엘이 도망하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엘리의 두 아들이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궤를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다는 것입니다.

 

(4) 엘리의 죽음(18)

 

전령이 하나님의 궤에 관해 언급할 때, 엘리는 큰 충격을 받고서 실신하였습니다. 정신을 잃은 그가 의자에서 뒤로 쓰러지면서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의자는 흔히 그 의자에 앉는 사람의 신분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가 의자로부터 떨어진 것은 엘리 가문의 통치가 끝났음을 암시합니다.

엘리는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사사로서 다스렸습니다. 엘리에 관하여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엘리의 눈이 어둡고 몸이 비대한 것을 영적 타락 혹은 침체의 증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무엘서가 말하는 엘리의 잘못은 두 아들의 죄를 바로잡지 못한 것입니다. 부모이며 사사로서 자기 아들의 죄를 징계하지 못함은 분명히 큰 죄입니다. 하지만 자녀 교육에 실패하는 훌륭한 신앙의 인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무엘 역시 자녀 교육에 실패한 사람입니다(8:3). 엘리의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는 40년 동안 사사로서 백성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그는 사무엘을 하나님의 신실한 일꾼으로 교육했습니다. 한나를 위한 그의 축복 기도가 한나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법궤를 위한 열심이 지극하였으므로 법궤에 대한 염려로 불안에 떨었습니다. 연로한 몸의로 길가 의자에 앉아 보이지도 않는 눈에 힘을 주면서 전령을 그토록 기다렸고, 마침내 법궤를 빼앗겼다는 말을 듣고서 그 충격으로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아마도 그는 당대 최고의 학자요 훌륭한 인품과 리더십을 갖춘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비록 그 자신과 가문은 여호와로부터 버림받았으나 엘리는 분명 이스라엘 역사의 한 시대를 책임지는 사사였으며,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사무엘을 남겨서 이스라엘의 미래에 소망이 있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지도 감독해야 할 제사장 엘리의 가정이 백성들보다 더 타락해 심판을 자초(自招)합니다. 그 결과 이렇게 하루아침에 세 부자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비느하스의 아내(19-22)

오늘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도록 하는 것들이 곳곳에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다른 사람들부터 존귀함을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자신의 업적이나 과업 성취를 위해 자기 영광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해야 합니다.

 

19그의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임신하여 해산 때가 가까웠더니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것과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은 소식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20죽어갈 때에 곁에 서 있던 여인들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하지도 아니하며 관념하지도 아니하고 21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 22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19-22)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고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립니다. 아니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이 그 영광으로부터 떠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곳이 이가봇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지켜 행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됩니다.

 

(1) 비느하스의 아내 해산(19)

 

비느하스의 아내는 임신하여 해산 때가 가까웠습니다(19). 그러나 남편의 전사 소식과 시아버지의 죽음 소식을 한꺼번에 듣고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나쁜 소식에 갑작스러운 진통과 함께 해산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겼고, 시부와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2) 비느하스 아내의 죽음(20)

 

비느하스의 아내 또한 충격을 받아 출산 중에 죽습니다. 그녀가 죽어갈 때, 주변에 섰던 여인들이 그녀에게 아들이 태어났음을 알리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했습니다. 왜냐하면 여인들은 그녀가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은 알지 못했지만, 그녀는 영광이 이스라엘로부터 떠난 이후 이스라엘이 겪어야 할 비참한 미래를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충격과 고통에 사로잡힌 그녀는 여인들의 말에 대답하지도 않고 신경 쓰지도 않았습니다.

 

(3) 이가봇(21-22)

 

태어난 아기는 히브리어로 ‘나아르’라 불립니다. 이러한 표현은 독자들에게 이 아이를 아이 사무엘과 비교하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합니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죽어가면서 자기 아기의 이름을 ‘이가봇’이라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겼고 시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전자가 더 중요한 이유이므로, 그녀는 영광이 이스라엘로부터 떠난 이유가 법궤를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한 번 더 설명합니다(22). 하나님의 법궤는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 왜냐하면 법궤가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시며 왕이신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법궤를 빼앗김은 여호와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한편 아들의 이름을 정하는 사람은 아버지거나 어머니입니다. 이 둘 중 누가 정해야 한다는 규칙은 없습니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남편이 죽었으므로 그녀 자신이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정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안에 성령의 충만함을 풍성히 이루어 가야 합니다. 성령이 가장 슬퍼하는 것은 범죄입니다. 죄는 피 흘리기까지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어떤 것도 하나님의 성전에 더러운 것이 자리를 잡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영광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그러면 축복된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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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04-01)


하나님의 임재와 우리의 순종

사무엘상 4장 1-11절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언약궤를 소유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입니다. 순종이 없이는 언약궤의 존재가 의미를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하자, 다음으로 여호와의 언약궤를 진영으로 가져옵니다. 다시 전투해 보지만, 또 패배하고 엘리의 두 아들은 죽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는 빼앗기고 맙니다. 그 이유는 언약궤를 우상화한 이스라엘의 불신앙의 결과였습니다. 그들의 실패 원인은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블레셋과 전투에 패함(1-2)

패배와도 같은 상실 가운데 있다면,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살펴 원인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더 크고 치명적인 패배로 이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상처럼 이용한 이스라엘을 언약의 외인처럼 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만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대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1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 2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전열을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1-2)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과 전투를 합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4천명의 군사들을 잃었습니다. 블레셋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위해 내용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블레셋을 통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전쟁이었던 것을 가르쳐줍니다.

 

(1) 사무엘의 선지자 사역(1a)

 

본문은 여호와의 말씀이 실로에서 사무엘에게 나타났다는 3:21의 기록과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집에 말하였다고 기록하는 7:3의 기록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1b-7:2이 4:la와 7:3 사이에 삽입되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에 전파된 사무엘의 말(1a)이 블레셋과의 1차 전쟁(1b-2)을 초래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 전쟁은 여호와의 도움으로 승리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2) 블레셋과의 1차 전쟁(1b-2)

 

1차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불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이 먼저 자기들 영토의 경계선에 위치한 에벤에셀(도움의 돌)에 진을 치자, 블레셋은 그곳에서 멀지 않은 아벡에 진 쳤습니다. 에벤에셀의 정확한 위치는 불확실합니다. 아벡은 현대의 텔 라스 엘 아인인데, 텔아비브 동쪽에 있으며 야르콘 강의 수원지 근처에 있습니다.

 

“그 둘이 싸우다가.” 원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전쟁이 벌어졌을 때’가 됩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패배하면서 블레셋 군대에 의해 사천 명가량 죽임을 당했습니다. 큰 피해를 보았으나, 이 피해 규모가 전쟁을 포기하게 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원래 진영으로 돌아와 다음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2차 전쟁을 위한 준비(3-5)

우리의 생활 속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 뜻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신앙의 성장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합니다.

 

3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4이에 백성이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에 있었더라 5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3-5)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던 사사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보다는 자신들의 힘을 믿고 전쟁에 나가서 실패했던 것입니다. 이런 패배의 모습은 이스라엘 조상들이 가나안 땅을 정보하려고 들어올 때, 여리고와 아이 성 전투를 기억합니다. 여리고 성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해서 정복되었지만, 아이 성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전투했다가 패배를 한 적이 있습니다.

 

(1) 대책 회의(3)

 

백성이 후퇴하여 진영으로 돌아왔을 때, 장로들이 모여 대책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패하게 하셨는고” 이 문장의 원문은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치셨는가’로 번역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친 주체가 여호와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은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공격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호와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가져다가 이스라엘 잔영 안에 있게 하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러면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지 않고 같은 편이 되어 이스라엘을 도우시고 원수들의 수중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법궤가 언약궤로 불립니다. 이는 이스라엘과 여호와 사이에 체결된 시내산 언약을 상징하는 십계명의 두 돌판이 법궤 가운데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2) 언약궤를 가져온 홉니와 비느하스(4)

 

“그룹 사이에 계신(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 언약궤의 뚜껑에는 그룹이라 불리는 두 천사의 형상이 서로 한쪽 날개를 맞대고 다른 쪽 날개는 반대 방향으로 펼친 모양으로 부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고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여기서 여호와를 만군의 여호와(많은 군대의 여호와)라 부르는 것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생각하면서 전쟁의 승리를 가져오시는 여호와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한편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를 수행하면서 전쟁터에 나아왔습니다. 언약궤를 메는 자는 반드시 제사장이어야 합니다. 이 두 사람이 직접 언약궤를 메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연로한 엘리를 대신하여 그들이 언약궤의 책임자로서 따라왔습니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여호와의 섭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사기충천한 이스라엘(5)

 

여호와의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영에 들어오자 온 이스라엘이 큰소리로 외치니, 땅이 진동할 정도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진영으로 들어오는 언약궤를 보면서 전쟁의 승리를 예감하고 사기충천했습니다. 여리고 이 언약궤를 앞세운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한글 성경에서 “소리”로 번역된 히브리어 ‘테루’는 흔히 전쟁 함성을 가리킵니다(겔 21:22).

 

블레셋의 전쟁 준비(6-9)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두려워할 때, 모든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하지만 세상을 두려워할 때, 세상은 우리를 심판하는 수단이 될 것입니다. 과거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해서 인도하신 전능하신 신이요,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능력의 신이라고 알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군사들은 서로 어리석은 독려(督勵)합니다.

 

6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히브리 진영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찌 됨이냐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영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7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이르되 신이 진영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이르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날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8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9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되지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6-9)

 

만군의 여호와를 언약궤 안에 가두다니 어이없스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경배와 순종의 대상이 아니라 언제든 부리고 사용할 수 있는 우상일 뿐이었습니다.

 

(1) 지켜보는 블레셋(6)

 

이스라열 진영에서 큰 함성이 있었으므로, 아벡에 있던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놀랐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히브리 진영”이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인이라는 칭호는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부를 때 흔히 사용됩니다(출 2:6; 3:18).

 

(2) 블례셋의 두려움(7-8)

 

두려움에 사로잡힌 블레셋 사람들이 “신이 진영에 이르렀도다”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들은 히브리인의 하나님께서 진정에 참여했다고 생각하여 두려워했습니다. “우리에게 화로다.” ‘화’는 ‘오이’를 번역한 것인데, 이것은 흔히 신의 심판과 형벌로 임하는 재앙을 가리킵니다(사 3:11; 렘 4:13). 이 단어를 7절과 8절에 반복하여 사용한 것은 그들의 두려움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이들의 두려움은 여호와께서 출애굽의 과정 중에 바로와 애굽 군대를 재앙으로 치셨다는 기억에서 나옵니다. 블레셋은 그 재앙들이 광야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블레셋 사람들의 생각에 애굽조차 사막과 광야에 둘러싸인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3) 블레셋의 각오(9)

 

“강하게 되며” 여기서 히브리어 동사 ‘하자크’(강하다)가 사용되었는데, 이때 ‘용기를 내다’(스스로를 강하게 하다)를 의미하게 됩니다. “대장부가 되라”는 문자적으로 남자가 되라는 의미입니다.

이 표현이 두 번 사용됨은 전쟁에 패배할 것만 같다는 블레셋 사람들의 절박한 심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블레셋 사람들은 히브리 사람들이 애초에 블레셋을 종처럼 섬기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은 여호와의 법궤를 보는 순간 이제 자기들이 이스라엘의 종이 되어 그들을 섬길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이 블레셋을 좌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장부로 만들어 더욱 힘껏 전쟁에 임하게 하였습니다.

 

2차 전쟁(10-11)

종종 자신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 일까지도 인위적인 방법으로 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 결과는 커다란 승리가 아니라 완전한 패배를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언약궤가 전쟁터 앞에 나갔으니깐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10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11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10-11)

 

이스라엘과 블레셋 간의 전투가 벌어지며, 이스라엘이 패배하고 언약궤가 블레셋에게 빼앗기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큰 슬픔에 빠지게 되며, 언약궤의 상실이 그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전투에서의 패배는 이스라엘의 신앙적 위기를 나타냅니다.

 

(1) 이스라엘의 패배(10)

 

블레셋이 큰 두려움 속에서 결사 각오를 다지며 자신들과 달리 사기충천해 있는 이스라엘을 공격하였는데, 법궤를 모시고 크게 함성을 지르던 이스라엘이 힘을 쓰지도 못하고 패배하였습니다. 이 두 번째 패배는 이스라엘에게 첫 번째 패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피해를 줬으니, 죽은 자만 삼만 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더 전쟁터에 남아 있지 못하고 목숨을 건지기 위해 각자 뿔뿔이 흩어져 자기 집에까지 달려 도망하였습니다. 전쟁에서 이렇게 쉽게 무너진 것은 블레셋 사람들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뿌리 깊은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2) 언약궤와 엘리의 두 아들(11)

 

11절에는 두 번째 전쟁의 참혹한 결과가 담담한 어조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사로잡혔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하면서 하나님의 법궤를 내버렸습니다. 이 법궤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영원한 언약의 상징이며 하나님 임재의 상징입니다. 또 하나의 비참한 결과는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제물을 모욕했던 두 제사장의 죽음은 당연한 결과이면서, 이스라엘 역사의 비극입니다.


하나님은 전쟁에 능하신 분입니다.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기도 하지만, 패배를 주기도 하십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출세나 성공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면 실패하게 하신 것입니다. 내 유익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내 뜻을 내려놓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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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03-02)


사적인 감정을 버리면 살아나는 사명

사무엘상 3장 11-21절


‘설교자(說敎者)’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그대로 전달하는 사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설교자들은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메뉴로 설교를 준비합니다. 이런 것을 비유하면, 어머니가 음식을 준비할 때, 설탕을 많이 집어넣은 음식과 같습니다. 음식은 단맛에 맛있게 먹지만 당뇨병에 걸릴 확률이 많아집니다. 설교자가 사람들의 듣지 못은 설교만 전하면 믿음은 연약하지고 영적인 질병에 걸리기 쉽습니다. 진정한 사명자는 사적인 감정에 메이지 않고,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엘리 제사장의 가정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어린 사무엘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최고 영적 지도자이고 자신의 스승인 엘리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확실히 임할 것을 알립니다. 힘들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해 나갑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은 제사장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오늘날 사명자들이 어떤 감당하는 자세로 나가야 합니까?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내용(10-14)

사람이 눈을 감으면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귀를 막으면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습니다. 마음을 닫아버리면 아무 것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눈과 귀를 막고 마음을 닫아버린 사람들을 보면 안타 깝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향하여서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을 열어서 계시를 들어야 합니다.

 

10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11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12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 13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4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하셨더라(10-14)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것은 완악한 시대를 기쁘게 하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불순종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듣고 그대로 전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엘리의 집에 임할 심판을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어린 사무엘이 처음으로 들어야할 하나님의 음성은 자신을 양육해준 엘리 제사장의 몰락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하나님의 사람으로부터 엘리의 집에 관한 말씀하셨던 모든 것을 다 이루시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저주를 자청하는 행위를 일삼았습니다. 엘리 역시 경고를 듣고서도 자기 아들들의 악행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하셨더라”(14)고 결정하셨습니다. 엘리의 집은 어떤 것으로도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려도, 소제를 드려도 결코 죄사함을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엘리 아들들은 배교 죄와 다름없는 죄였습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와 같습니다. 다시는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돌이킬 수 없고 용서의 길을 넘어서버린 것입니다.

 

삶에 있어 습관적인 악행 있다면 그곳으로부터 과감히 돌아서길 바랍니다. 뼈를 깎는 아픔이 동반해도 죄악의 행위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유기 시키면 멸망의 길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사무엘의 태도(15-18)

하나님의 말씀은 가감 없이 전해야 하며,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은 회개와 순종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자신의 영적인 부모이자 스승에게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15사무엘이 아침까지 누웠다가 여호와의 집의 문을 열었으나 그 이상을 엘리에게 알게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16엘리가 사무엘을 불러 이르되 내 아들 사무엘아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17이르되 네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 네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18사무엘이 그것을 그에게 자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니라(15-18)

 

사무엘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때에 나이가 약 12살 정도 추정됩니다. 약 10년 동안 여호와의 집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자신을 가르쳐준 스승인 엘리에게 하나님의 무서운 뜻을 어떻게 전할 수 있겠습니까! 처음에는 그 심판의 말씀을 엘리에게 전하기가 상당히 어렸습니다. 매우 망설이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머뭇거리자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의 말씀을 숨기지 말고 말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에 사무엘은 선지자적 소명으로 모든 것을 말해 주었습니다.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하게 그대로 전해 주었습니다. 엘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든 거부하지 않고 듣고자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합니다. 엘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의 실수는 하나님께 회개와 금식으로 나아가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히스기야처럼 자신과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였으면 그의 가정은 회복이 되었을 것입니다(열왕기하 20:2-3).

 

성도들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순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질책과 심판 메시지 앞에 겸손히 회개하며 죄의 길에서 떠나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성도들은 자신들이 듣기 좋은 설교만 들으려고 합니다. 목회자로부터 나오는 싫은 소리는 막으려고 합니다.

목회자들은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거북스런 말을 전하지 않습니다. 설교 속에서 ‘성공학’이나 ‘행복학’들을 풍성히 전합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어떻게 성공하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까? 기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형상 회복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잠시 아픔이 따르기도 합니다. 그 아픔을 전하지 않고 성공하라고 말합니다. 점점 하나님의 깊은 뜻이 사라져 갑니다. 말씀은 점점 기갈(飢渴) 되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의 영혼을 죽이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명인은 인간의 이해관계나 육정을 초월해서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도들도 살고 교회에도 살아나는 것입니다. 죄와 심판에 대한 지적을 분명하게 경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설교자가 되려면,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실 방법은 모두 동원에 찾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그리고 성경에 대한 자료들을 검토해야 합니다. 선명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설교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대상에 관계없이 분명하게 전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듣기 좋은 말만 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죽이는 일입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전하는 것은 그 성도들로 하여금 영적 질병에 걸려 죽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를 정확히 알고 그대로 전하는 사명자들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것입니다.

 

이상 중에 들은 것을 말하는 사무엘(19-21)

하나님께서는 변함없는 말씀으로 일하십니다. 하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이 무익하게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반드시 하나님 뜻을 성취하고 열매를 맺습니다. 사무엘이 점점 자라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이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19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20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21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19-21)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이 성장하면서 함께 하시고, 그의 말씀의 능력이 단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임으로 말씀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사무엘이 전한 말씀이 권능 있게 하시고, 온 이스라엘 앞에 그를 권위 있는 지도자로 삼으셨습니다. 사무엘이 전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은 ‘하나님의 동행’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전하는 말씀은 누구도 의심 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렸던 것입니다. 모든 백성이 사무엘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어두웠던 시대에 말씀이 빛이 서서히 비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꽉 막혔던 곳에 숨통이 트인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의 참된 권위는 하나님 말씀의 권위로부터 나옵니다. 성도는 살아 있는 말씀의 능력을 신뢰하며 말씀에 지배받는 삶을 살아야 하고, 말씀 사역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를 참다운 설교자로 믿고 따릅니다. 그 설교자는 사무엘처럼 국민과 지역에게 희망을 줍니다. 그리고 국가를 변화시켜 하나님을 축복을 받는 나라로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를 위한 기도가 강력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결론은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통해 그가 선지자로서의 소명을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실 것이며, 그의 사역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이 사건은 또한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람을 어떻게 사용하시는지를 나타냅니다. 결국,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에 기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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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03-01)


성전에서 성장해 가는 사무엘

사무엘상 3장 1-10절


 

다른 사람에게 열심히 말하는데, 들어야할 사람이 듣지 않고 다른 행동하면 말하는 사람은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다시는 그 사람에게 어떤 말도 싶지 않을 것입니다. 사사기의 특징은 하나님의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사람이 없으니 결국에 계시와 말씀 그리고 환상도 없었습니다. 사사시대를 ‘영적 암흑시대’라고 합니다. 사무엘이 활동하기 전인 엘리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가 없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찾지 못하고 고통하고 괴로운 장면을 봅니다.

 

  • 당시 이스라엘 상황은 영적인 지도자 대제사장 엘리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들을 만큼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엘리는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여 바른 훈육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매우 혹독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을 들어야 했습니다.

 

어두운 시대에 사무엘(1-3)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찾으십니다. 그 사람을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비전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1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2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3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1-3)

 

이제 초점은 이스라엘 전체에서 사무엘 개인에게 맞추어지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어린 시절에 이스라엘의 영적인 시대 배경을 설명합니다. 이 시대는 여호와의 말씀이 드물었고, 환상을 통한 여호와의 계시도 거의 나타나지 않은 영적 암흑기였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제시해 줄 영적 지도자도 없었습니다. 종교적으로 타락하고 정치적으로 부패하고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방황하던 시대였습니다.

 

사무엘서를 기록한 분은 이 어두운 시대를 엘리 제사장의 상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엘리는 눈이 어두워져서 잘 보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성전에서 기도하는 한나를 술취한 여인으로 알아보지 못하거나, 자식이며 제사장인 홉니와 비느하스의 잘못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등 그의 영적인 눈이 어두운 것을 상징으로 설명합니다. 일상적인 표현인 것 같지만, 엘리의 모습을 사역하는 모습을 기술한 것이 아니라 영적 나태를 표현하기 위해 자기의 처소에서 누어 자고 있었다고 표현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여호와의 말씀이 없이,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 것을 부추긴 것과 같았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가 편한 대로 방탕한 삶을 살아갑니다.

 

반면에, 어두움 속에서도 영적인 새싹이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어린 사무엘이었습니다. 그는 엘리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등불이 밝게 켜져 있는 여호와의 전, 즉 성막에서 불침번을 서면서 성전 안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성막에서 밝은 등불 아래 있던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어두운 가정에서 육신의 편안하게 쉬고 있던 엘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부름 받는 사무엘(4-7)

항상 하나님의 부르심에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역사를 맡기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영적인 눈과 귀가 밝아야 하며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도 반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4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5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는지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6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7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4-7)

 

다시 말하지만, 어두워진 엘리의 눈만큼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인 감각은 어둡던 시대입니다. 어린 사무엘은 어두운 제사장이지만 엘리를 하나님의 종으로서 섬기고 있었습니다. 또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성막 안에 자고 있었습니다. 그 만큼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는 마음으로 사모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사무엘을 하나님께서 직접 부르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고 계시가 없던 시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을 직접 찾아와 부르신 것입니다. 항상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부름에 즉각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달려갑니다. 그는 아직까지 한 번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음성을 처음 들었기 때문에 대제사장 엘리가 부른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즉시 그는 엘리에게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무엘을 보고 엘리는 부르지 않았으니 가서 가라고 보냅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내지 않은 시대에 사무엘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계속해 부르십니다. 하지만 사무엘이 알아차리지 못한 것에 대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7)고 소개합니다. 정확히 하나님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부르십니다.

 

이 시대는 사무엘과 같은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셔도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세상의 소리를 듣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이 세상의 소음이나 잡음 정도로 생각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은 세상적인 강연이나 강의를 들을 기회가 많습니다. 그런 연장선(延長線) 상에서 설교도 강의나 강연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신 것을 듣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해야만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길 원한다면 예수님처럼 조용하고 한적한 곳을 찾길 바랍니다. 사역에 바쁜 가운데서도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누가복음 5:16)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한 사람은 늘 말씀에 귀를 기울이므로 말씀을 놓치지 않고 잘 듣게 됩니다. 관심이 없는 사람은 말씀이 들려지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으며 지루하게 생각되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들어야만 하나님께서 이루실 장차 일에 비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스승 엘리의 조언(8-9)

‘듣는다’는 것은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큰일을 행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서 들을 준비가 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8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9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8-9)

 

똑같은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된 후에 엘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엘리는 사무엘에게 자기가 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 주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준비를 하면서 두근거리면서 침대에 누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또 다시 사무엘에게 “사무엘아! 사무엘아!”라고 부르십니다. 어린 사무엘에는 즉시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10)라고 대답합니다.

이사야에게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습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이사야 6:8)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성도들은 이러한 자세를 가져야할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말씀에 들을 준비(stand by)되어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은 시끄럽고 복잡한 곳이 아닙니다. 매우 고독할 정도로 조용한 곳입니다. 현대인들은 복잡하고 시끄러운 곳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를 싫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일군을 만들어가는 과정에는 반드시 이러한 코스를 거치도록 합니다. 모세와 세례 요한의 광야와 같은 조용한 곳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지나고 있다면 감사하고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향해 행하실 비밀을 다 말씀하십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말씀합니다. 말씀을 들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조용하고 한적한 다락방과 같은 곳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놀라운 축복의 비밀을 말씀하시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음성 속에서 비전을 품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놀라운 큰 사역을 이루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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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02-03)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

사무엘상 2장 22-36절


 

요즘 자동차를 아주 잘 만들고 도로도 매우 좋아졌습니다. 하지만 좋은 승용차와 좋은 길에서 제동장치가 없다면 얼마나 위험하겠습니까? 그것은 사고를 목표로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사고 나기 전까지는 즐거움을 느낄지 모르지만, 사고 순간부터는 고통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가 수많은 쾌락이 즐비합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거룩함을 유지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영적 스승을 통한 통제가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하지만 실수가 있는데도 책망해줄 수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엘리의 신실하지 못함과 그로 인해 그 집안의 내려진 저주를 말하고 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의 악행과 이를 방관한 그의 잘못을 보시고, 무명의 선지자를 엘리에게 보내, 두 아들이 죽고 가문은 멸망할 것이라고 엄히 경고하십니다. 죄에 대한 심판은 우주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던 엘리의 집에 대한 심판은 우리 모두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악행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유기(22-25)

자녀를 바르게 키우려면 때로는 당근과 채찍이 필요합니다. 부모들이 도덕적인 바른 교육을 할 때 제대로 교육하지 않으면 자녀들은 제대로 선악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자녀의 실수를 제어할 수 없으면 그 때부터 자녀에게는 방치의 재앙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는 악행을 행하는 사람들을 유기해서 방치해 버립니다.

 

22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의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23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24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 25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22-25)

 

엘리 제사장이 그의 아들들이 성전에서 부도덕한 행동을 하고 있음을 듣고 그들에게 경고하지만, 그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엘리는 아들들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그들을 중재하지 못해 안타까워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할 것이라는 경고를 전달합니다.

 

(1) 아들들의 죄(22)

 

엘리에 대한 소개가 시작됩니다. 그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죽을 때 나이가 93세였으므로, 이 당시는 적게는 잡아도 80세는 넘는 나이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엘리의 나이를 언급한 것은 그가 나이가 많아서 아들들을 험하게 훈육하고 징계하지 못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엘리는 두 아들이 행한 일, 즉 악한 행동에 곤한 소문이 온 이스라엘에 퍼졌습니다. 결국 엘리의 귀에도 소문이 들리게 되었습니다. 그 두 아들은 하나님의 제사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제물을 강탈한 것도 부족하여, 성전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에게까지 간음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여인들과 간통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주의하고 경고했던 이방 종교들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했다는 의미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의 죄가 점점 심각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은 분명히 간음죄에 해당합니다. 간음죄는 사형에 해당하는 심각한 범죄였습니다. 이런 범죄를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엄격한 거룩성이 요구되는 제사장들이 공공연하게 저질렀다는 것은, 이들의 타락 정도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과, 이러한 모습은 당시 사사기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2) 엘리의 책망(23-25)

 

늙은 엘리 제사장은 아들들의 간음 소식을 듣고 엄히 책망하였지만, 아들들은 무시합니다. 이런 완악한 아들들은 아비의 질책을 들릴 리 없습니다. 엘리는 그들이 어렸을 때 제대로 영적인 교육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보다 자녀들을 귀하게 여겨 바른 교육을 제대로 하질 못했습니다(26).

 

엘리의 권고에도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께 대한 권위에 대해 두려움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의 질책이라고 들릴 리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도자의 범죄하고 게으르면 자신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백성들에게 영향을 미쳐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헤이로까지 이어집니다. 지도자가 되려면 더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영적인 모습에 일반 성도들에게 보여 주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더 성숙해야 합니다.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살아갑니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명자가 되길 바랍니다.

 

사람들에게 저주는 자신을 바르게 인도해 줄 사람이 없을 때입니다. 이렇게 망령된 자녀들을 성경에서는

 

18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19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20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21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신명기 21:18-21)

 

망령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께서는 공동체 안에 악인들을 포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권고하신 것입니다. 더 나가서 악인들이 형통하면 어리석은 사람들은 보고 답습합니다. 아주 망령된 행동하는 자녀들에게는 단호하고 따끔한 징계의 교육이 필요합니다.

 

여호와의 은총을 받은 사무엘(26)

세상의 법칙은 수백만 어리석은 사람들보다 깨어있는 한 사람을 통해 역사를 이루어져 갑니다. 그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희망을 줍니다. 정말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서 있는 곳에 사무엘처럼 희망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6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26)

 

이 말씀은 사무엘의 삶을 단편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유능한 지도자로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은총을 받은 결과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면 상처만 받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인정받으면 사람들이 존경받습니다. 축복이 임하기 시작합니다.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물론이고, 제사를 드리러 온 백성들을 분노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어린 사무엘은 하나님과 백성을 기쁘게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성경에서는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잠언 29:2)고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당신은 주변 사람들에게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분노케 하는 사람입니까? 사무엘처럼 희망을 주는 사람입니까?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성장했습니다. 마치 예수님처럼 성장했습니다. 사무엘의 성장은 예수님의 성장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장에 대해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누가복음 2:52)고 소개합니다. 사무엘은 엘리의 아들들과는 달리 하나님과 사람들을 기쁘게 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 때문에 잃었던 이스라엘의 희망을 다시 찾은 것입니다.

 

세상에 죄악들 앞에서 두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범죄하기 때문에 자신도 그럴 수 있다 라는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할지라도 자신만은 거룩해야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의 태도이겠습니까? 세상이 아무리 타락하고 어두워져 갈지라도 거룩함이 사라진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씨를 준비하신 것입니다(이사야 6:13).

 

심판을 선고하는 하나님(27-36)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지 않는가?’라고 스스로 위로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범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지도자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이 범죄한 것이 아니라 피 흘리기까지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27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 조상의 집이 애굽에서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느냐 28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내가 그를 택하여 내 제사장으로 삼아 그가 내 제단에 올라 분향하며 내 앞에서 에봇을 입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자손이 드리는 모든 화제를 내가 네 조상의 집에 주지 아니하였느냐 29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30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31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32이스라엘에게 모든 복을 내리는 중에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요 네 집에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33내 제단에서 내가 끊어 버리지 아니할 네 사람이 네 눈을 쇠잔하게 하고 네 마음을 슬프게 할 것이요 네 집에서 출산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34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이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35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36그리고 네 집에 남은 사람이 각기 와서 은 한 조각과 떡 한 덩이를 위하여 그에게 엎드려 이르되 청하노니 내게 제사장의 직분 하나를 맡겨 내게 떡 조각을 먹게 하소서 하리라 하셨다 하니라(27-36)

 

하나님께서는 엘리는 아들들의 죄악의 소식을 듣고 엄히 책망하였지만 자식들에게 무시당했습니다. 이렇게 죄악으로 물어들어 회개치 않는 엘리의 가정을 하나님께서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도 회개하고 순종치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멸망당할 때까지 방치해 버리십니다. 이 유기는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가정에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엘리의 집안에 대해 그 동안 하나님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의 가족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영원토록 축복된 제사장의 집안이 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그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특권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권력 남용으로 쓰여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징벌이 무엇입니까? 가장 먼저 축복의 변경입니다(30). 가정에 재앙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 증거로 자손들이 젊어 죽게 될 것이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루아침에 죽게 될 것을 예견합니다. 마지막으로 사역자를 변경시킬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니깐 그 사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 것입니다. 사명을 잃은 엘리 제사장 가족은 구걸이나 할 정도로 어렵게 살아가도록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축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맡겨진 사명을 성경에는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충성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더 많이 쓰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더욱 풍성한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을 인간의 감정으로 생각하거나 사역하지 않길 바랍니다. 제사장 엘리의 가정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주는 통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니깐, 빼앗김을 당하고 축복도 사라집니다.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신 사명이라면 피 흘리기까지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늘로부터 내리는 지혜와 능력을 공급해주실 것입니다.


믿음으로 성장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즐거움을 압니다. 그런 기쁨 가운데 사역을 감당함으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충성스럽게 일하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하나님께 사람들의 행동을 달아보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충성스럽게 일하는 사람들을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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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02-02)


엘리의 아들, 한나의 아들

사무엘상 2장 11-21절


 

하나님께서는 만복의 근원이시며 주관자이십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예배를 드리느냐 따라서 축복과 저주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예배에 성공해야 합니다.

 

  • 한 사람에게 행해진 올바른 교육은 평생을 좌우합니다. 본문에는 엘리의 두 아들과 사무엘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제물을 탈취하는 등 불의를 행하지만, 사무엘은 성전에 맡겨진 후 여호와 앞에서 섬기며 자라고 있습니다. 어떻게 자녀들을 교육해야 합니까?

 

여호와 앞에서 자라는 사무엘(11)

지도자는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자녀들을 훌륭한 지도자가 되길 원하신다면 사무엘처럼 믿음으로 양육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으로 성장하도록 일찍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 중에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와 같은 자녀들이 나오지 않도록 다시 기도하고, 바르게 믿음으로 양육하길 바랍니다.

 

11엘가나는 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11)

 

한나는 사무엘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확신합니다. 한나의 부부는 하나님과의 약속대로 사무엘이 젖을 떼자, 사무엘을 성전에서 성장하도록 성전에 위탁한 후에 기쁜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엘리는 사무엘을 맡아 성소에서 믿음으로 잘 양육합니다. 그리고 한나의 가정을 향해 사무엘을 대신할 자녀를 주시기를 축복하기도 합니다. 사무엘은 여호와를 섬기고, 여호와 앞에서 자랐습니다. 부모의 관심과 기대에 부응하여 사무엘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한나의 기도가 끝난 후에 엘가나가 돌아간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1장 24절에서는 엘가나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한나가 사무엘을 실로에 엘리에게로 데려갔을 때, 엘가나도 동행합니다. 한나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기에 그의 이름만 언급되었습니다. 돌아가는 장면에서 엘가나를 같이 언급한 것입니다.

본 절은 집으로 돌아가는 사무엘의 아버지와 엘리에게 남겨진 사을 사무엘의 대조되면서 이제 사무엘은 엘리 아들로 지내게 됨을 암시합니다. 그곳에서 사무엘은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사무엘이 실제로 제사장직을 수행하기에는 너무 어렸습니다. 레위인은 25세, 므라리와 고핫 자손들은 30세가 되어야 공식적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제사장직도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이기에서는 사무엘이 엘리의 아들로 여겨져 제사장이 되기 위한 겸습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자랐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훌륭한 믿음의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엘리 아들들의 악한 행실(12-17)

자녀들의 영적인 실수를 바르게 훈계해야 합니다. 영적인 교육은 철저하게 시켜야 합니다. 일반적인 실수는 성장해 가면서 할 수 있겠지만, 영적인 부분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장난처럼 교육하면 결국은 자녀를 방칩니다. 매를 아끼는 것만이 자녀가 바르게 성장한 것은 아닙니다. 징계할 때 제대로 징계하지 않으니깐 홉니와 비느하스가 나온 것입니다. 나중에 성장해서 아버지 엘리의 말도 듣지도 않습니다(2:25). 올바른 교육만이 자녀를 훌륭한 일꾼으로 세워가는 것입니다.

 

12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13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관습은 이러하니 곧 어떤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 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14그것으로 냄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가지되 실로에서 그 곳에 온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15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16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가지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17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12-17)

 

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알지도 경외하지도 않았고, 여호와의 제사를 쉽게 생각하고 멸시했습니다. 제사장으로서 백성의 아픔에 참여하여 하늘 위로를 전하지 않았고, 자기 배를 채우고 자기 취향을 만족시키고 자기 야망을 이루는 데 만 급급했습니다.

 

(1) 여호와를 알지 못한 엘리 아들들(12)

 

어린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고’(11) 있을 때, 엘리의 두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깐 권리를 남용하여 자기가 좋은 대로 행동해 버립니다. 그 행실에 대해 성경은 나쁜 행동을 한 ‘불량자(不良者)’이라고 소개합니다.

제사장 엘리의 아들을 소개하는데, 정말 이상하게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12)라고 소개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엘리가 제사장으로 제사를 집례하는 모습이나 종교적인 행위를 보고 자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행실이 ‘나쁜 사람들(베네 벨리야알)’이라고 평가합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지적한 사람들은 우상 숭배를 선동하는 사람들(신 13:14), 기브아의 불량자들(삿 19:22), 사울의 왕권을 인전하지 않는 자들(삼상 10:27), 다윗의 요청을 거부한 나발(삼상 25:17), 이세벨의 사주를 받아 나봇을 거짓으로 고소한 자들(왕상 20:10, 혹은 여로보암을 좇으며 르호보암을 대적한 자들(대하 13:7)이 ‘쓸모없는 사람들’이라 불렸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여호와를 가장 잘 알아야 할 제사장들이면서도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들은 여호와와 함께 있으며 자라나는 사무엘과 대조됩니다(21).

 

(2) 성소에서 행하는 죄(13-16)

 

엘리의 두 아들의 불량한 행동을 살펴보면, 사람들이 제사하려고 고기를 삶고 있으면 사환들을 보냈는데, 그 사환 손에는 세 살 갈고리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환은 고기를 삶고 있는 냄비나 솥 속으로 세 살 갈고리를 찍어 넣어서 그 갈고리에 걸려 올라오는 모든 것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갔습니다(13-14). 또 사람들이 기름을 태우기도 전에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장이 생고기를 원한다고 말하며 고기를 가져갔는데, 혹 사람들이 반대하면 강제로 가져가겠다고 위협하기를 일삼았습니다(15-16). 그들은 배교자와 같은 행동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행동을 하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거역하면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행동합니다.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기 살을 찌우는 무정한 사람이 됩니다.

이곳에서 말한 ‘사환’은 원문에 ‘나아르’라고 나타납니다. 이들은 제사장의 아이였습니다(13,15). 한편 이러한 제사장의 악행을 13절 서두에서 ‘관습’이라고 표현합니다. ‘관습’이란 표현은 제사장들의 행위가 일시작인 것이 아니며, 법으로 생각할 만큼 당연시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3) 여호와의 제물을 멸시(17)

 

엘리의 두 아들의 행동을 단편적으로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17)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2:11-21에 세 아이가 등장하는데, 아이 사무엘(11,21)과 아이 사환(13,15) 그리고 아이 제사장(17)입니다.

다양한 아이들 가운데 아이 사무엘의 뛰어남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특히 제사장들을 아이라고 칭한 것은 그들의 미성숙함을 암시하는 한편 또 다른 아이인 사무엘과 그들을 대조하게 만듭니다. 이들의 죄는 여호와의 제물을 멸시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죄를 짓는 것보다 여호와께 죄를 짓는 것이 더 큰 죄입니다(25). 성소에서 섬기는 사람들이 제사장들의 죄에 영향을 받아 제사장의 악행을 가로막지 않고 오히려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한나의 헌신과 여호와의 축복(18-21)

많은 성도들은 성공을 위해 뜁니다. 그러다 실수하는 것은 자녀들의 신앙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면, 자녀들에게 실패를 치닫게 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세상에 대한 것보다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도록 해야합니다. 직분을 이용해서 탐욕을 채우는 자가 아니라 섬기고 경배하는 직분자가 되어야 합니다.

 

18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 19그의 어머니가 매년 드리는 제사를 드리러 그의 남편과 함께 올라갈 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그에게 주었더니 20엘리가 엘가나와 그의 아내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다른 후사를 주사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 바친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니 그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매 21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시사 그로 하여금 임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18-21)

 

제사장 엘리는 사무엘을 맡아 성소에서 믿음으로 잘 양육하고, 한나의 믿음을 보고서 이 가정에 사무엘을 대신할 자녀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1) 여호와를 섬기는 사무엘(18)

 

이어지는 사무엘과 그 부모들에 관한 이야기는 이들이 엘리의 가정과 얼마나 큰 대조를 이루는지 잘 보여줍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를 범하고 살았지만, 사무엘이 믿음으로 성장하고 섬기는 모습을 다음과 같습니다. “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18)라고 말합니다. 제사장 엘리의 말을 따라 어릴 때부터 세마포 에봇을 입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세마포 에봇이나 베 에봇(삼하 6:14)은 성소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의 기본 복장입니다.

3살(한국나이로 4살)이면 부모를 떨어지지 않으려는 시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에는 떨어져 여호와 앞에 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젖먹이 시절부터 사무엘을 신앙교육을 바르게 시켜왔기 때문입니다.

 

(2) 한나의 축복(19)

 

해마다 한나는 자기 남편과 함께 매년제를 드리러 실로에 올라올 때 미리 지어둔 작은 겉옷을 사무엘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대제사장의 겉옷은 에봇 밑에 입는 옷으로서 청색이며 소매 없는 통옷으로 만들어졌습니다(출 39:22). 한나가 매년 어린 사무엘을 위해 만든 작은 겉옷 역시 이와 비슷한 형태일 것입니다.

 

(3) 엘리의 축복(20-21a)

 

매년마다 제사를 지내려 실로로 온 엘가나와 한나는 사무엘의 작은 겉옷을 지어서 그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본 엘리 제사장은 영적으로 어두운 가운데서도 사무엘의 부모에게 축복을 합니다. “엘리가 엘가나와 그의 아내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다른 후사를 주사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 바친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니 그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매 21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시사 그로 하여금 임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20-21)

 

(4) 자라나는 사무엘(21b)

 

사무엘은 부모의 관심사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었듯이, 사무엘 역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영적으로 어두운 제사장이라고 한단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선언합니다. 한나의 믿음이 대단합니다. 부족한 종이 하는 축복이지만 이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큰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신 일꾼은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들어내려는 사람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한나는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부족한 제사장의 축복이지만 의심하거나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받아 드렸을 때, 선포된 축복처럼 그대로 한나의 가정에 임했던 것입니다. 이런 한나의 믿음 가운데 사무엘은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순종의 미덕을 배웠던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신앙 생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한 신앙생활을 하면 당연히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나와 같이 신실한 성도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지역사회를 맡겨 주실 것입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아름답게 지도함으로 훌륭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받은 자녀들을 영적으로 바르게 가르쳐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 의무를 소월하게 되면, 자녀들이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제 2의 홉니와 비느하스가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와 말씀으로 자녀들을 잘 성장시키면, 사무엘과 같이 순종하는 일군이요, 훌륭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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