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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02-01)


한나의 찬양을 받은 하나님

사무엘상 2장 1-10절


 

미국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9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평생 어머니의 기도를 기억하고 살았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된 후, “어머니가 가르쳐준 신앙 때문에 대통령이 되었다”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어머니의 기도에 대해 “어머니의 기도를 나는 기억합니다. 그 기도는 항상 나를 따라다녔습니다. 내 평생 그 기도는 나에게 꼭 매달려 떨어지지 않았습니다.”라고 소개합니다. 그의 삶의 원동력은 어머니의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위대한 인물 뒤에는 반드시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 한나는 불임의 고통에서 하나님께 기도했고, 그 응답 받아서 사무엘을 출산합니다. 아이 사무엘을 젖 떼고 난 후에, 그를 약속대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아들을 드린 후에 슬픔이 아니라 하나님께 찬양합니다. 본문은 하나님께 찬양하는 한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찬양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녀가 발견한 하나님을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찬양받으실 여호와(1-3)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어떤 것보다 비교할 대상이 없는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든든하게 의지할 반석이십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자신을 오판한 오만한 자의 말과 악한 행동을 다 알고 그 무게를 달아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염려하고 불안해하는 이유는 여호와를 대신할 것을 너무 많이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1한나가 기도하여 이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2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3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1-3)

 

하나님께 기도하기 전에는 고통 속에서 울며 기도한 한나입니다. 어렵게 아들 사무엘을 얻었지만, 이제는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삶속에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이 가득답겨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감동적으로 찬양합니다.

 

(1) 찬양(1)

 

한나는 불임으로 암울했던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녀에게 이제 아쉬운 탄식이 아니라 의기양양한 기쁨의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어렵게 얻는 사무엘을 갓 젖을 땐 후 서원대로 하나님께 성전에 드리고, 그녀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내용상 기도라기보다는 찬양 노래의 성격에 가깝습니다.

 

한나는 먼저 여호와로 인해 너무도 즐겁다고 고백합니다. “한나가 기도하여 이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1) 그 이유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자신의 뿔이 높아졌다고 찬양합니다. ‘뿔’은 짐승의 머리에서 나는 것이지만, 상징적으로 위엄과 힘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뿔이 높아졌다는 것은 머리를 높이 쳐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나는 불임으로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주변에 사람들이 아이를 못난 저주받은 여인이라고 수군거렸고 멸시받았습니다. 아무런 대항을 하지 못하고 항상 움츠러들어야 했고 죄인처럼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남편 둘째 부인인 브닌나가 분노하는 말에 아무 대답도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기도조차도 당당하게 하지 못하고 중얼거리듯이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연약한 자신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이제 태의 문을 열어주심으로 당당하게 머리를 들고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비웃던 자들에게 크게 비웃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한나의 인생에 자존심을 찾아주셨습니다.

 

(2) 여호와의 속성(2-3)

 

한나는 결코 개인적인 복수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를 비교할 수 없는 분임을 강조하는데, “여호와 같은 분은 없다”(2)고 반복하면서, 오직 여호와만 거룩하시고 여호와만 살아계신 신이시며 반석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여호와만 신이라고 고백하는 한나의 신앙은, 당시 사사시대에 속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은 가나안에 있는 모든 이방신들을 섬기는 신앙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작고 연약할지라도 하나님을 기대하는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고, 기꺼이 그들을 위해 역사를 만들어내는 분이심을 확인하였기에 더 바랄 것 없는 사람처럼 찬양합니다.

 

한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들이 아니라 여호와를 신뢰하는 모든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고통을 헤아리는 분임을 입증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하나님의 없음’이라고 조롱하던 자들의 입을 막아주신 것입니다. 한나는 자신처럼 미약한 여인의 고통의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 것처럼, 백성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들어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인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4-8)

자신을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고 교만한 사람들은 스스로 대단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러한 오만한 사람의 행동을 얼마나 가볍게 생각하시고 그들을 모두 다 아십니다. 강한 용사처럼 보이는 사람도 꺾어버리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4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5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6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8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3-8)

 

감사의 기쁨의 고백에 이어 한나는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전의 하나님이십니다. 역전의 기준을 사회적인 지위나 물질만이 아니기 때문에 정치적인 혁명과는 다릅니다. 엘리의 가문처럼 제사장이지만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되심을 부인하였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무시하고 학대하는 오만한 자를 향한 역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유하게도 하시며, 사람을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십니다.

 

(1) 반전의 하나님(4-5)

 

한나는 운명의 반전을 가져오시는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모든 것을 꿰뚫어버리던 뭉족하던 자들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일자리를 찾고, 주리던 자들은 배불리 먹습니다.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가 일곱을 낳고, 많은 아들을 두었던 여자는 쇠약해집니다. 여기서 일곱은 완전수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가 일곱 아들, 즉 자신과 가족이 충분하다고 생각할 만큼 많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들이 없던 한나가 사무엘 외에도 3남 2녀를 낳았습니다(2:21). 모든 일을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의 일생에 반전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한 자가 자랑하지 못하며, 약한 자라도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2) 주관자이신 하나님(6-7)

 

사람이 경험하는 모든 흥망성쇠가 다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죽음과 삶, 가난과 부, 비천과 영화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어질 것입니다(신 32:39). “스올(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기서 부활 사상을 찾는 것은 무리입니다. 단지 생명과 사망이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는 의미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죽음 이후의 상태와 세계에 대해 명확한 개념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구약에서 스올은 단지 무덤을 가리키거나 죽은 자들이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3) 구원자이신 하나님(8)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땅의 기둥을 세워 세상을 보존하시고 운영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가난하고 빈궁한 자를 비천한 처지에서부터 구원하여 귀족이 되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에 앉게 하실 수 있습니다. 기둥을 뜻하는 ‘마추크’는 여기와 14:5(믹마스 앞의 바위산)에서만 나타납니다. 기둥은 땅덩이를 받치는 물리적 개념이면서, 세상이 올바르게 운영되도록 받쳐주는 원리와 질서를 가리킵니다.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9-10)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신 세대는 하나님께서 안 계신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침묵이 하나님의 무제를 말하는 것인 양 거만한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힘 있는 자들이 만든 질서에 순응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만 기대하는 작고 연약한 백성을 위해 역사를 만드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흔들림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9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9-10)

 

한나의 하나님께서는 땅의 시둥들 위에 세계를 세우신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한나는 그분이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시고 악인들의 발을 잠잠하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1) 성도와 악인(9)

 

“거룩한 자들”은 ‘하시드’의 복수형으로 문자적으로는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이며, 따라서 마땅히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기에 “거룩한 자들”로 부릅니다. 이들의 반대 개념은 ‘악인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자의 발, 즉 거룩한 자의 삶과 행실을 지키시지만, 악인들을 어두운 곳에 가두고 벌하십니다. 흑암 속에서 침묵한다는 말은 죽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을 기부할 수 없습니다.

 

(2) 대적자와 기름부음 받은 자(10)

 

여기서는 한나의 기도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이스라엘 민족, 더 나아가 인류 역사와 관련을 맺도록 만듭니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에서 ‘대적하는 자’(마리브)는 하나님 사역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비난하고 반대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여호와의 대적자들은 마치 용사의 강한 활이 부서지는 것처럼(4) 산산이 부서질 것입니다. 브닌나가 한나를 괴롭혀서 한나의 마음속에 천둥소리가 나게 하였는데(1:6), 하나님께서 자기를 대적하는 자를 천둥소리로 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땅 끝까지 심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땅 끝까지 미치는 심판은 종말에 대한 예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왕에게는 힘을 주십니다. 당시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나, 한나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왕에 관해 말합니다. 이 왕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아(마시아흐)입니다. 1절에서 한나는 자신의 뿔을 이야기했으나, 이제 마지막 절에서 기름부음 받은 자의 뿔에 관해 예언합니다. 한나의 뿔을 높이신 것은 사무엘의 탄생을 가리키며, 사무엘의 탄생은 그가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울 자, 곧 메시아의 뿔을 높이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뜻에 따라 메시아가 승리할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세상의 환경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과 하나님만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세상의 환경을 적응해 나가려고 할 때는 정말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가면 모든 것을 승리케 해주십니다. 한나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운 환경을 보면서 한탄한 것이 압니다. 그녀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받고 삶을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들도 한나처럼 기도하고 응답받아서 축복된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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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10-02)


상실된 믿음을 회복하는 에스라

에스라 10장 9-44절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조금만 공부하지 않으면 꾸짖곤 합니다. 그러다 고향집에서 30-40년 전 자신의 성적표를 발견하게 되면, 아이들 앞에서 떳떳할 수 있을까요? “보아라! 나는 이렇게 열심히 했다”라고 말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지도자는 본이 되어야 하며, 그로 인해 전체가 변화할 수 있습니다.

 

  • 유다와 베냐민 모든 사람들은 성전 앞 광장에 모여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에스라의 제안을 따를 것을 다짐합니다. 그렇지만 그때가 우리이고 관련된 사람의 숫자가 많음을 감안하여 시간을 두고 시행할 것을 에스라에게 제안합니다. 에스라는 회중의 제안에 따라 책임자를 선임하여 조사에 착수합니다.

 

에스라의 권고와 조치(9-17)

참된 부흥은 죄에 대한 각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현신된 신앙은 공동체 전체로 확산됩니다. 회개의 영께서 새로운 마음을 주셨고 구체적인 죄악으로부터 돌아서기 시작합니다. 죄 고백은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고백된 죄악은 순종의 실제적인 결과로 나타나야 합니다.

 

9유다와 베냐민 모든 사람들이 삼 일 내에 예루살렘에 모이니 때는 아홉째 달 이십일이라 무리가 하나님의 성전 앞 광장에 앉아서 이 일과 큰 비 때문에 떨고 있더니 10제사장 에스라가 일어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11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하니 12모든 회중이 큰 소리로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 13그러나 백성이 많고 또 큰 비가 내리는 때니 능히 밖에 서지 못할 것이요 우리가 이 일로 크게 범죄하였은즉 하루 이틀에 할 일이 아니오니 14이제 온 회중을 위하여 우리의 방백들을 세우고 우리 모든 성읍에 이방 여자에게 장가든 자는 다 기한에 각 고을의 장로들과 재판장과 함께 오게 하여 이 일로 인한 우리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하나 15오직 아사헬의 아들 요나단과 디과의 아들 야스야가 일어나 그 일을 반대하고 므술람과 레위 사람 삽브대가 그들을 돕더라 16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그대로 한지라 제사장 에스라가 그 종족을 따라 각각 지명된 족장들 몇 사람을 선임하고 열째 달 초하루에 앉아 그 일을 조사하여 17첫째 달 초하루에 이르러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의 일 조사하기를 마치니라(9-17)

 

마지막으로 에스라의 업적을 살펴봅시다. 돌아온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인들과 통혼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출애굽 이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에 불순종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이 문제들이 매우 심각한 사건이었습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고 나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다 잘못될 수 있습니다. 성전을 세워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려는 이스라엘에게는 이 범죄 사실을 매우 단호하게 조치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수고하였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때 잠시 회개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통혼을 공동체적인 죄악으로 규정하고 끊어버릴 것을 공적으로 선포했습니다.

 

⑴ 유다와 베냐민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모임(9)

 

모든 백성들이 에스라의 요청에 따라 3일 안에 예루살렘 광장에 모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중요한 모임이 이루어지는 장소였고, 성전 동편에 위치한 광장은 수천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에스라의 지시가 공포된 지 3일 후 주전 457년 11-12월 무렵)에 백성들이 성전 앞 광장에 앉았을 때, 큰 비가 내렸습니다. 우기였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생각할 수 있었지만(13, ‘큰 비가 내리는 때’), 그 자리에 모인 백성들은 하나님의 진노로 생각하여 두려워합니다(참조, 삼상 12:17-18).

 

⑵ 에스라의 권고와 조치(10-17)

 

에스라는 귀환민들이 이방 여인과의 통혼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조상들이 지은 죄에 또 하나의 죄를 더하였다고 말합니다(10). 이전에 조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고 그로 인해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이제 유다 공동체가 또다시 그런 위기를 자초하였다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백성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속히 그 지방 사람들 및 이방 여인들과 단절할 것을 촉구합니다(11). 에스라가 의도한 바는 거룩한 백성으로서 구별된 모습과 율법에 충실한 공동체의 삶이었습니다. 백성들은 큰 소리로 에스라의 제안을 수락합니다(12). ‘큰 소리로 대답했다’는 것은 이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음을 의미합니다.

 

에스라의 결정을 곧바로 이행하기에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①이방인과 결혼한 사람들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고, ②우기로 인한 거친 날씨 때문이었습니다(13). 이로 인해 회중은 에스라에게 새로운 제안을 합니다(14). 그것은 방백들을 중심으로 위원회를 구성하고, 당사자들로 하여금 자진해서 성읍 위원회에 출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방백들이 성읍 장로들 및 재판장과 함께 예루살렘 법정에서 문제를 처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비록 시간이 지체되긴 했지만 각 지역의 장로들과 재판관들이 상황을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 합리적인 제안처럼 보입니다.

그때 ‘이 일’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들이 있었는데(15), 그들의 이름은 요나단, 야스야, 므술람, 삽브대로 소개됩니다(므술람은 19절에 이방 여인과 통혼한 사람으로 나온다). 이들이 반대한 ‘이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방인 아내를 내보내는 일 자체로 보는 것이고, 둘째는 회중이 제안한 13-14절의 수정안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곧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해결하자는 회중의 제안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신속하게 이 일을 처리하자는 주장입니다. 주류 학자들의 견해는 두 번째 해석을 지지합니다. ‘사로잡힌 자들의 자손’은 시간을 두고 하자는 회중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구제적인 시행에 옮기기로 합니다(16a). 에스라는 이 일을 위해 족장들 몇 사람을 선임하여 책임을 맡깁니다(16b).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람들에 대한 조사는 10월 1일에 시작되고 3개월 동안 진행되어 1월 1일에 마치게 됩니다(17). 1년 전 바로 이날은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위해 아하와 강가에 있았던 날입니다(스7:9; 8:15).

 

이방인 아내와 자녀들을 끊으라는 명령에 백성들은 대답합니다. 하지만 신중히 처리하기 위해 이를 맡아 처리할 방백을 세우고 정당한 재판을 거쳐서 결정하게 해달라고 제안합니다. 애매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하면서도 철저하게 이행하려고 제안한 듯합니다.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불과 4명에 불과하지만, 공동체 전체가 회개하고 죄를 끊어도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온 반대였기에, 이것은 소신이 아니라 의와 거룩에 대한 완강한 저항입니다.

 

이방 여인과 결혼한 명단(18-43)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권자임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인으로 믿는 자는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를 드러내고 있는지를 지켜봐야 합니다. 공평과 정의를 구현하려면 리더십의 의지와 공동체의 합의가 필요합니다.

 

18제사장의 무리 중에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는 예수아 자손 중 요사닥의 아들과 그의 형제 마아세야와 엘리에셀과 야립과 그달랴라 19그들이 다 손을 잡아 맹세하여 그들의 아내를 내보내기로 하고 또 그 죄로 말미암아 숫양 한 마리를 속건제로 드렸으며 20또 임멜 자손 중에서는 하나니와 스바댜요 21하림 자손 중에서는 마아세야와 엘리야와 스마야와 여히엘과 웃시야요 22바스훌 자손 중에서는 엘료에내와 마아세야와 이스마엘과 느다넬과 요사밧과 엘라사였더라 23레위 사람 중에서는 요사밧과 시므이와 글라야라 하는 글리다와 브다히야와 유다와 엘리에셀이었더라 24노래하는 자 중에서는 엘리아십이요 문지기 중에서는 살룸과 델렘과 우리였더라 25이스라엘 중에서는 바로스 자손 중에서는 라먀와 잇시야와 말기야와 미야민과 엘르아살과 말기야와 브나야요 26엘람 자손 중에서는 맛다냐와 스가랴와 여히엘과 압디와 여레못과 엘리야요 27삿두 자손 중에서는 엘료에내와 엘리아십과 맛다냐와 여레못과 사밧과 아시사요 28베배 자손 중에서는 여호하난과 하나냐와 삽배와 아들래요 29바니 자손 중에서는 므술람과 말룩과 아다야와 야숩과 스알과 여레못이요 30바핫모압 자손 중에서는 앗나와 글랄과 브나야와 마아세야와 맛다냐와 브살렐과 빈누이와 므낫세요 31하림 자손 중에서는 엘리에셀과 잇시야와 말기야와 스마야와 시므온과 32베냐민과 말룩과 스마랴요 33하숨 자손 중에서는 맛드내와 맛닷다와 사밧과 엘리벨렛과 여레매와 므낫세와 시므이요 34바니 자손 중에서는 마아대와 아므람과 우엘과 35브나야와 베드야와 글루히와 36와냐와 므레못과 에랴십과 37맛다냐와 맛드내와 야아수와 38바니와 빈누이와 시므이와 39셀레먀와 나단과 아다야와 40막나드배와 사새와 사래와 41아사렐과 셀레먀와 스마랴와 42살룸과 아마랴와 요셉이요 43느보 자손 중에서는 여이엘과 맛디디야와 사밧과 스비내와 잇도와 요엘과 브나야더라(18-43)

 

이방 여인과 결혼한 사람들의 명단은 가장 먼저 제사장의 무리(18-22), 다음으로 레위인과 노래하는 사람들(23-24), 이어서 일반 백성들(25-44) 순으로 제시됩니다.

 

⑴제사장의 무리(18-22)

 

제사장 가운데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람으로는 예수아 자손 중 요사닥의 아들과 그의 형제 마아세야, 엘리에셀, 야립, 그달랴입니다(18). 예수아 가문은 스룹바벨과 함께 성전 건축을 주도하기도 했는데(스 3:8), 대제사장 가문으로서 본이 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였습니다(레 21:13-15). 그렇지만 그들은 죄를 뉘우치고, 모두 이방 아내들을 내보내기로 맹세한 후에 숫양 한 마리를 속건제로 드립니다(19). 속건제는‘마알의 범죄’(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한 행동)에 드리는 제사로, 제물은 숫양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레 5:15-6:7).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것을‘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행동’, 즉 언약을 어기는 행동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이들이 드린 속건제는 백성 전체의 잘못을 위해 드릴 것으로 보입니다. 대제사장 예수아 자손 외에 제사장 가운데 임멜 자손, 하림 자손, 바스홀 자손들도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20-22).

 

⑵ 레위인과 노래하는 사람들(23-24)

 

레위인 가운데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람들은 요사밧, 시므이, 글리다, 브다히야, 유다, 엘리에셀입니다(23). 그 외에 노래하는 자 중에는 엘리아십, 문지기 중에는 살룸, 델렘, 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23).

 

⑶ 일반 백성들(25-44)

 

일반 백성들 가운데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람들의 명단은‘이스라엘’이라는 명칭 아래 열 개의 가문으로 나뉘어 소개됩니다(25절의‘이스라엘’은 제사장과 레위인을 제외한 포로 귀환민을 가리킨다). 본문 읽기에 따라서 바니 자손과 느본 자손 사이에 빈누이 자손(38-39)과 자카이 자손(40)을 포함하여 열두 가문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전체 인원은 제사장 17명(혹은 18명), 레위인 6명, 노래하는 자와 문지기 4명, 백성들86명, 도합 113명(혹은 114)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의 이름이 열거되는 것은 이방인과의 통혼 문제가 귀환 공동체에 얼마나 깊숙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들이 이방 여인과 결혼한 것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으로 보이는데, 그 땅에 살고 있던 이방인들이 귀환민들보다 부요한 삶을 누리고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비록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지만, 에스라의 개혁 안에 동의하고 이방인 아내와 이혼에 합의한 사람들입니다. 이미 살고 있는 가족과 결별하도록 하는 것은 지나친 결정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타락한 이방 문화와 우상숭배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던 상황에서 공동체의 정체성과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입니다.

 

맺는말(44)

교회는 재건과 개혁은 항상 같이 갑니다. 교회가 재건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지난번에 겪었던 시행착오를 되풀이하게 됩니다. 재건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재건된 공동체는 상대화 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개혁이라고 부릅니다.

 

44이상은 모두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라 그 중에는 자녀를 낳은 여인도 있었더라(44)

 

이방 여인과 결혼한 사람들의 목록은 맺는말로 종결됩니다. 본문은 그들 가운데 자녀를 낳은 사람들도 있었음을 밝힙니다. 가족들과 헤어진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잘못된 신앙을 바로잡고자 하는 결단의 행동입니다. 그들은 부끄러운 과거와 결별합니다. 에스라가 내보낸 이방 여인들과 아이들은 아마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로써 앞에서(3) 선포되었던 계약은 성공적으로 종결되고, 에스라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 즉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을 마칩니다. 그렇지만 공동체를 바로 세우기 위한 에스라의 개혁은 멈추지 않고 이후에도 지속됩니다(느헤미야서 8-9장).

 

구약 성경에는 이방인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거나 이방 연인과 결혼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본문들도 존재합니다(예컨대, 민 12:1;수 2장; 요나서; 룻기). 특히 룻기는 다윗의 모압 여인을 조상으로 두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룻기는 이방 여인에 대한 에스라서의 입장과 대조됩니다. 룻기와 에스라서는 둘 다 언약 백성의 정체성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여호와께 대한 충성에서 그 해답을 찾습니다. 그렇지만 두 책이 이방인을 수용하는 이슈와 관련하여 표현하는 방식은 상반됩니다. 에스라의 결정은 포로 귀환 후 새롭게 시작된 공동체가 주위 민족들의 영향으로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하던 당시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성경 안에 이방인에 대해 수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본문들과의 적절한 균현 속에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순종은 공적으로 나타납니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심히 가슴 아픈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서는 이방여인과의 결별이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고 신앙을 회복하고 순결한 신앙의 보존을 위해서 아픔을 겪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성도는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신앙적으로 모든 오염시킬 수 있는 원인에의 접근을 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에게 남아 있는 죄가 공동체에 악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도록,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도 깊이 돌아보아 남김없이 제거합시다. 임마누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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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10-01)


이스라엘의 죄의 결과와 회개의 필요성

에스라서 10장 1-8절


 

성도들은 대부분 기도하면서 자신의 잘못된 삶을 돌이키며 회개합니다. 얼마 지나지 못해 제자리로 돌아가 있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말로 중얼거리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기도의 열매는 첫 열매는 바로 회개의 열매입니다.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 생각과 다르거나 대치된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 안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 에스라의 기도에 대해 이제 백성들이 반응합니다. 지금까지 일부 지도자들이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으면는 공동체 전체가 에스라와 마음을 같이하여 회개 운동에 동참합니다. 이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은 스가냐입니다. 그가 에스라에게 나아와 율법에 따라 이 문제를 처리할 것을 제안합니다. 머스크는 금식하며 증한 후에 백성들을 예루살렘에 불러 모읍니다.

 

에스라의 기도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1-8)

본문은 에스라의 기도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을 소개합니다. 9장에서 에스라의 회고록(Memoir)이 1인칭으로 기록된 것과 달리 본문은 3인칭으로 서술됩니다. 9장에서는 일부 지도자들만이 이방인들과의 통혼에 대해 문제의식이 있었던 반면(참조. 스 9:1-2), 이제부터는 백성들이 에스라와 마음을 같이하여 회개 운동에 동참합니다. 특별히 이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은 스가냐였습니다. 에스라서 본문은 스가냐의 역할을 특별히 강조하는데, 이것은 9-10장 전체 단락이 그의 제안을 중심으로 짜여 있는 구성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A. 타민족과의 결혼 문제(9:1-2)

  B. 에스라의 공개적 탄식(9:3-4)

   C. 에스라의 기도(9:5-10:1)

     X. 스가냐의 고백과 결단(10:2-4)

   C'. 에스라의 권면(10:5)

  B'. 에스라의 공개적 탄식 (10:6)

A'. 타민족과의 결혼 문제 해결 (10:7-44)

 

스가냐는 그 어떤 일보다 ‘율법을 지키는 것’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우선순위를 둔 인물로, 백성들의 범죄로 애통하고 있는 에스라에게 율법에 따라 이 문제를 처리할 것을 제안합니다. 스가냐의 제안을 받아들여 에스라는 제사장 여호하난의 방에 들어가 밤새 금식하며 중보기도를 한 후에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불러 모읍니다.

 

에스라의 애통과 스가냐의 제안(1-4)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첫걸음입니다. 개인의 죄가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신앙의 결단은 단순한 감정에 그치지 않고, 실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이 진정한 회복과 성장으로 이어집니다.

 

1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2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3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4이는 당신이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하니라(1-4)

 

본문에서는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그는 이방 아내와 결혼한 백성의 범죄를 슬퍼하고 통곡하며, 백성도 그의 말에 감동하여 회개합니다. 마지막으로, 백성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단하고 모여서 행동하기로 약속합니다.

 

(1) 에스라의 애통과 백성들의 동조(1)

 

에스라는 공개된 장소인 예루살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면서 백성들의 죄를 자복합니다. 하나님의 성전 앞은 예루살렘 성전 바깥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소문을 들은 백성들은 남녀와 어린아이까지 성전 앞 바깥뜰에 모입니다. 이들은 귀환 후 시간이 흐르면서(약 80여년 동안) 느슨해진 자신들의 신앙을 재정비하기를 열망하였습니다. 결국 에스라가 했던 ‘설교-기도’(sermon-prayer)가 효력을 발한 것입니다. 지도자 한 사람의 회개가 불씨가 되어 순식간에 공동체 전체의 회개 운동으로 퍼져 나가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것은 이 회개 운동이 결코 강요된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에스라의 경건과 헌신이 그 어떤 메시지보다 설득력 있는 설교로 백성들에게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에스라는 행동으로 본을 보이는 지도자였습니다.

 

(2) 스가냐의 제안(2-4)

 

백성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불러일으킨 인물은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입니다(2). 스가냐는 엘람 자손으로 소개되는데, 엘람 자손은 1차 귀환에 속했던 가문이었습니다(참조. 스 2:7). 그 후 2차 귀환 때에는 엘람 자손 70명이 에스라와 함께합니다(스 8:7). 엘람 가문 중 6명의 사람들은 이방 여인과 결혼한 사람들로 소개되는데(스 10:26), 그중 한 사람의 이름이 스가냐의 부친 여히엘입니다(두 인물이 동일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만약 동일인이라면, 스가나는 부친의 잘못까지도 지적한 것이 됩니다. 스가나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사적인 관계를 떠나 공동체 전체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스가나는 공동체의 죄와 자신이 속한 가문의 죄를 자기의 죄로 동일시하면서 (2: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하여’), 에스라에게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2절에서 ‘'하나님께 범죄하다’로 번역한 ‘마알’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지 못한 행동을 가리킵니다. 즉, 자신들이 이방 여인과 통혼함으로 언약 백성으로서의 본분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스가냐는 어쩌면 지금 이 상황을 아간 한 사람의 죄(‘마알’)로 백성 전체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던 과거의 사건과 연관시키고 있는지 모릅니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한 제안은 율법에 따라 이방인 아내들을 다 내보내기로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는 것입니다(3: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행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스가냐가 의미하는 ‘내 주의 교훈’과 ‘하나님의 명령’은 아마 가나안 백성과 통혼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출 23:32: 신 7:15)뿐만 아니라, 이혼에 대한 규정(신 24:1-4). 그리고 언약 체결에 관한 규정(신 29:10-13)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스가냐는 이방 민족과 통혼하는 것을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기는 행동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가 에스라에게 ‘언약을 세울 것’을 제안하는 것이나 후에 에스라가 ‘백성들에게 맹세하게 하는 것’(5)은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스가냐와 에스라의 생각은 일치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스가나는 에스라가 공동체의 개혁을 추진할 수 있도록 도운 훌륭한 조력자입니다(4b: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본문은 에스라의 개혁 운동이 스가냐와 같은 훌륭한 조력자들이 함께 함으로 가능하게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백성들의 맹세와 에스라의 공적인 선포(5-8)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며, 실천을 통해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신속하게 결단하고 행동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지도자는 공동체의 문제를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공동체가 하나 되어 각자의 역할을 다하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5○이에 에스라가 일어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대로 행하기를 맹세하게 하매 무리가 맹세하는지라 6이에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서 일어나 엘리아십의 아들 여호하난의 방으로 들어가니라 그가 들어가서 사로잡혔던 자들의 죄를 근심하여 음식도 먹지 아니하며 물도 마시지 아니하더니 7유다와 예루살렘에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들에게 공포하기를 너희는 예루살렘으로 모이라 8누구든지 방백들과 장로들의 훈시를 따라 삼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그의 재산을 적몰하고 사로잡혔던 자의 모임에서 쫓아내리라 하매(5-8)

 

본문에서는 에스라가 백성에게 이방 아내와의 결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이도록 지시합니다. 백성은 이 문제를 신속히 해결하기로 결의하고, 각 지역의 지도자들에게 이 결정을 알립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사람이 모여 이 결단을 실행하기 위한 절차를 정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1) 백성들의 맹세(5)

 

에스라는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생각한 바를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깁니다. 먼저 지도자들의 지원과 백성들의 동의를 얻어 언약을 새롭게 하도록 합니다(5). 5절의 ‘맹세’는 언약의 내용을 확고히 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스가냐와 동일하게 에스라도 이방인과의 통혼을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위협하는 심각한 죄로 간주한 것입니다. 스가냐와 에스라가 공히 백성들의 죄를 하나님께 신실치 못한 행동'을 가리키는 ‘마알’로 표현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2,6,10).

 

(2) 에스라의 금식(6)

 

이어서 에스라는 엘리아십의 아들 여호하난의 방으로 들어가서 홀로 금식하며 중보기도를 드립니다(6). 여호하난을 느헤미야 12:23의 요하난과 동일 인물로 본다면, 그는 대제사장의 아들 혹은 손자입니다(참조, 느 3:1:12:10-11).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는 여러 개의 방들이 있었고, 그중 일부는 제사장들의 공간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죄를 대신해서 금식하며 중보하는 에스라의 모습은 위기에 빠진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기도했던 성경의 인물들을 연상케 합니다(출 32:9-14; 렘 14:7-9: 겔 22:30; 암 7:1-6; 롬 9:3).

 

(3) 에스라의 공적인 선포(7-8)

 

에스라는 모든 귀환자들(‘사로 잡혔던 자들의 자손들’)에게 3일 내에 예루살렘으로 모일 것을 명령하고, 이를 어길 경우 그 사람의 재산을 몰수하고 귀환 공동체에서 축출할 것을 경고합니다(8). 이로써 에스라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총회가 소집됩니다. ‘모임을 소집하고 재산을 몰수하고 공동체로부터 추방할 수 있는 권한’은 에스라가 페르시아 왕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입니다(참조, 스 7:26). 에스라는 왕의 위임을 받은 페르시아 관료로서 자신이 갖고 있던 법적 권위를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습니다(참조. 스 7:26). 8b절에서 ‘적하다’로 번역된 ‘하람’은 신명기에서 자주 등장합니다(신 7장: 20:16). 동사 ‘하람’은 거룩한 전쟁 문맥에서 전리품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을 가리키는데, 명사 ‘헤렘’으로 사용될 때는 ‘지극히 거룩한 것’ 혹은 ‘진멸할 물건’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여호수아서의 아간 이야기에서 ‘훔친 물건’을 가리킵니다(참조, 수 7장) 아간은 ‘진멸할 물건’을 취함으로써 스스로 진멸의 대상이 됩니다. 에스라가 특히 ‘하람’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아간의 경우를 염두에 둔 것 같습니다. 8b절의 ‘사로잡혔던 자의 모임에서 쫓아내리라’는 직역하면 ‘그는 골라의 회중으로부터 분리될 것이다’의 뜻입니다. 즉,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골라’는 회복된 이스라엘을 가리키며 ‘골라’ 공동체로부터의 분리는 언약 백성으로서의 자격 상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에스라가 보여준 회개의 자세와 공동체의 결단에서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회복의 시작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 개인의 잘못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셋째, 신앙의 결단은 감정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행동으로 이어져야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각자의 자리에서 믿음을 실천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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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09-02)


이스라엘을 향한 회개기도

에스라 9장 9-15절


‘유구무언(有口無言)’은 변명할 말이 없을 정도로 염치가 없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잊고 불순종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변명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 본문은 6절부터 계속되는 에스라의 기도입니다. 에스라의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품, 즉 긍휼하심과 의로우심에 의지합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에 근거하여 다시 한 번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기도 가운데 등장하는 출애굽 모티브는 포로지에서의 귀환을 모세 시대에 있었던 출애굽 사건의 재현으로 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회고(9)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신뢰하라는 교훈을 줍니다. 또한, 공동체의 회복과 정체성을 찾는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며 믿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결국, 신앙 공동체의 유대와 회복이 필요함을 일깨워줍니다.

 

9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바사 왕들 앞에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고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9)

 

본문은 에스라 회고록(Ezra's Memoir)의 종결 부분으로 에스라가 드린 기도입니다(에스라의 기도는 6절부터 계속). 에스라의 기도는 네 가지 내용으로 구성됩니다. 첫째, 공동체와의 연합(solidarity)입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공동체와 자신의 죄를 동일시합니다(참조, 출 34장의 모세). 둘째, 죄에 대한 고백(confession)입니다. 에스라는 기도를 통해 과거 이스라엘의 죄뿐만 아니라 현재 귀환 공동체의 죄를 낱낱이 고백합니다. 셋째, 변화를 추구하는 결단(readiness to change)입니다. 에스라는 귀환 공동체에게 죄에 대한 회개와 더불어 미래를 향한 결단을 촉구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확실한 믿음(faith in God'smercy)입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의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다시 한 번 주의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에스라의 기도는 공동체의 지도자가 따라야 할 하나의 모델입니다.

에스라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봅니다(‘우리 하나님이…버려두지 아니하시고…소생하여…성전을 세우게 하시며…수리하게 하시며…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 9b절에서 ‘울타리’로 번역한 ‘가데르’의 의미에 대해 주석가들은 세 가지로 해석합니다. 첫째, 예루살렘 성벽으로 보는 것입니다. 일부 주석가들은 이에 근거하여 에스라서의 활동 연대를 느헤미야보다 늦은 것으로 봅니다. 그렇지만 단순히 예루살렘의 울타리가 아닌 ‘유다와 예루살렘의 울타리’라고 하고 있어 예루살렘 성벽일 가능성은 낮습니다. 둘째, 구약성경의 용레어 근거해서 성벽의 울타리가 아니라 유다와 예루살렘 주위에 있는 포도원 울타리로 보는 것입니다(참조. 사 5:1-7; 시 80:12). 이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셋째, 비유적인 의미로 페르시아 당국의 보호를 의미합니다.

 

문맥상 세 번째 해석이 가장 적절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페르시아 왕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귀환민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들’은 숱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포로에서 안전하게 귀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 왕들(고레스, 다리오. 아닥사스다)의 지원으로 그들은 기적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게 되었고, 대적들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인데, 백성들이 그만 이러한 은혜를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문제는 항상 여기서부터 출발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백성들의 죄(10-14)

우리가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살아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또한,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고민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 중요하며, 하나님은 항상 용서하실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려줍니다. 마지막으로, 개인의 죄가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고 함께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10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11전에 주께서 주의 종 선지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얻으려 하는 땅은 더러운 땅이니 이는 이방 백성들이 더럽고 가증한 일을 행하여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그 더러움으로 채웠음이라 12그런즉 너희 여자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그들의 딸들을 너희 아들들을 위하여 데려오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평화와 행복을 영원히 구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왕성하여 그 땅의 아름다운 것을 먹으며 그 땅을 자손에게 물려 주어 영원한 유산으로 물려 주게 되리라 하셨나이다 13우리의 악한 행실과 큰 죄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당하였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 죄악보다 형벌을 가볍게 하시고 이만큼 백성을 남겨 주셨사오니 14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백성들과 통혼하오리이까 그리하면 주께서 어찌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진노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10-14)

 

에스라는 현재 귀환 공동체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요약한 후에 곧바로 현 세대의 신실하지 못함을 언급합니다. 에스라는 이러한 대조를 통해 백성들의 배은 망덕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에스라는 먼저 이스라엘이 반복적인 범죄로 인해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자격이 없음을 고백합니다(10). 여기서 에스라는 이방 민족들과의 통혼을 울법 규정을 어긴 것으로 간주합니다. 이는 가나안 족속과의 통혼을 금지하는 신명기의 율법규정(7:1-4)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에스라는 이어서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방 족속과의 통혼 문제를 구체적으로 지적합니다(11).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은 모세를 비롯하여 구약의 예언자들을 가리킵니다. 11절의 내용은 오경과 선지서 말씀의 광범위한 인용입니다(참조. 신 7:1; 레 20:21; 겔 7:19-20; 왕하 16:3; 21:2 등).

 

구약성경에 의하면, 이방 민족들이 거주하는 땅은 더러운(부정한) 땅이며, 그들의 행실은 가증한 행실입니다. ‘더러운’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니다’는 주로 제의적 불결과 그로 인한 오염을 가리키는데(레 20:21; 젤 7:19-20). 일반적인 용어 ‘타메’보다 강렬한 의미를 나타냅니다. ‘가증하다’로 번역한 ‘토예바’는 이방 백성의 우상숭배나 타락한 문화(특히 성적인 타락)와 관련하여 자주 사용됩니다(레 18:22-30; 20:23; 신 13:14;22:5). 에스라에 의하면, 가나안의 족속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에스라는 이러한 용어들을 사용하여 이방 민족과의 통혼 때문에 임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합니다. 요컨대, 거룩한 백성으로서 귀환민들은 철저하게 부정한 것과 행실을 멀리해야 합니다(참조, 2절).

 

에스라는 구체적인 죄에 대한 지적에 이어 미래를 위한 귀환민들의 결단을 촉구합니다(12a: ‘그런즉’), 진정한 회개는 행동의 변화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에스라가 촉구하는 결단은 두 가지입니다. 곧 이방 민족들과의 통혼을 금하는 것과 그들을 위해 평화와 좋복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12). ‘그들을 위해 평화의 행복을 구하지 말라’는 표현은 암몬과 모압 사람들을 향한 신명기의 저주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신 23:6). 에스라는 이어서 율법 규정(통혼 금지)을 지킴으로써 주어지게 될 축복을 약속합니다(12b). 12절의 내용도 11절과 같이 구약성경 여기저기에서 광범위하게 인용한 것들입니다(참조. 레 18:24-26;20:22; 신 7:3; 11:8-9; 왕하 16:3; 21:2; 겔 37:25: 말 2:10-16). 에스라의 구약성경 인용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문성을 보여줍니다. 에스라는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받게 될 축복을 강조하면서, 문제 해결에 있어 귀환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려 합니다.

 

에스라의 기도에 나타난 설교적 어조는 13-14절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납니다. 에스라는 먼저 귀환 공동체가 예루살렘에 정착하게 된 과정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합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악한 행실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남겨주셨다고 고백합니다(13). 여기서 ‘남겨주셨다’는 표현은 8절의 ‘남은 자’(골라)를 염두에 둔 말입니다. 에스라는 회복된 이스라엘로서 남은 자들에게 이방 민족들로부터 유다 공동체를 거룩하게 구별할 책임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에스라는 그들이 만약 이 책임을 완수하지 못한다면, 또다시 하나님의 진노가 모두에게 임하게 될 것을 경고합니다(14). 그러면서 에스라는 ‘남은 자’인 귀환 공동체가 그 땅의 이방 민족들과 통혼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율법에 근거해서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들은 가증한 민족(암메 하토에봇)으로 그들과 통혼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명령)을 거역하는 일입니다(참조, 신 7:1-5). 하나님의 은혜는 이스라엘에게 그에 따른 반응(책임)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맡김(15)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는 현대인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공정하고 의로운 심판을 하시는 분임을 인식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또한, 저지른 잘못을 인식하고 회개하는 것이 중요하며, 변화의 가능성을 믿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비록 우리의 죄가 크더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하나님의 정의를 기억하며 올바른 삶을 살도록 격려합니다.

 

15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말미암아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하니라(15)

 

에스라는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공동체의 문제를 맡깁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에스라는 먼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에스라의 찬양에서 정점을 이룹니다. 에스라의 고백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 변론적인 의미입니다. 설령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다시 멸망시킨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개입에 대한 기대를 나타낸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때로 그의 백성을 향한 구원의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누가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라는 지금까지 보여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다시 한번 자비를 내리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15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다시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렇지만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님은 너그러우셔서 우리를 이렇게 살아남게 하셨습니다. 진정,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주께 자백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감히 주님 앞에 나설 수 없습니다’(새번역).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정의, 그리고 회개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신뢰하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또한, 우리는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고민하며,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함을 상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시며, 우리의 죄가 크더라도 그 은혜가 더 크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신뢰와 회개를 통해 올바른 삶을 살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회복시키실 것임을 믿고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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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09-01)


타락한 성도들을 위한 중보기도

에스라 9장 1-8절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에게 받은 은덕을 저버리는 것이며 감사를 모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의미로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받은 것을 잊어버리고, 반대로 은혜를 끼친 사람에게 해를 미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죄악은 배신입니다. 의리를 저버리고,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은 인간의 도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하나님께 은혜 대해 배은망덕할 때가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귀환 후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배은망덕한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 본문은 에스라의 회고록의 종결 부분으로 공동체 내의 범죄(이방인들과의 통혼)를 다룹니다. 에스라가 경험한 잡혼의 문제는 포로 후기 이스라엘 공동체가 경험한 정체성의 위기를 반영합니다. 새롭게 시작한 귀환 공동체는 구별된 백성으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에스더 9-10장 개관

에스라서 9-10장은 다음과 같은 문장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그것을 살피고 본문 강해로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에스라를 통한 공동체의 개혁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개혁의 내용은 정체성 확립과 율법 중심의 삶입니다. 전체 단락은 문제의 시작(9:1-2)으로 시작해서 문제의 해결(10:7-44)로 끝났습니다. 스가냐의 고백과 결단(10:2-4)을 중심으로 교차대칭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A.타 민족과의 결혼 문제(9:1-2)

  B.에스라의 공개적 탄식(9:3-4)

    C.에스라의 기도(9:5-10:1)

      X.스가냐의 고백과 결단(10:2-4)

    C′.에스라의 권면(10:5)

  B′.에스라의 공개적 탄식(10:6)

A′.타민족과의 결혼 문제 해결(10:7-44)

 

잡혼의 문제는 포로 후기 이스라엘 공동체가 경험한 정체성의 위기를 반영합니다. 에스라는 이들의 행동을‘마알(לעמ)’의 범죄로 규정하는데, ‘마알’이라는 용어는 9-10장 전체 단락에서 다섯 번이나 등장합니다(9:2, 4;10:2,6,10). ‘마알’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행동 혹은 언약적인 범죄로, 이것은 에스라가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줍니다.

 

잡혼 문제에 관한 방백들의 보고(1-2)

‘악어의 눈물’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겉으로는 눈물을 흘리면서 속으로는 자기 이익을 챙기는 사람, 즉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됩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도자부터 삶에 있어 본이 될 수 없는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1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가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2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1-2)

 

공동체 내의 문제, 즉 이방인들과의 통혼의 주제를 다루는 9장은 ‘이 일 후에’라고 시작합니다. 이 표현은 에스라서 내에서 새로운 단락을 알리는 표지 기능도 합니다. 이것은 9장의 이야기가 앞 장의 사건과 얼마간 시간적 간격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전후 문맥을 고려해 볼 때(참조. 스 7:9; 10:9), 바벨론에서 예루살렘 귀환 후 약 4개월이 지난 시점으로 보입니다.

에스라는 방백들로부터 이스라엘 백성과‘그 땅의 백성들’사이의 이방 여인들과 통혼에 관한 놀라운 보고를 듣습니다(la). 그리고 에스라를 더욱 안타깝게 한 사실은 정결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도해야할 지도자들이 이 일에 오히려 앞장섰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1절과 2절의 ‘그 땅들의 백성들’은 가나안 땅뿐만 아니라 이방 지역의 백성들까지 포함합니다. 방백들이 보고하는 ‘그 땅의 백성들’은 가나안 사람들, 헷 사람들, 브리스 사람들, 여부스 사람들, 암몬 사람들, 모압 사람들, 애굽 사람들, 아모리 사람들 등입니다(1b).

그런데 문제는 이 족속들 가운데 상당수가 에스라 시대에 더 이상 그 땅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이 가나안 족속들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 사건을 신명기 율법과 연관시키기 위함입니다. 이방 사람과의 혼인을 금하는 것은 특히 신명기 율법에 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신 7:1-5; 23:3-7). 신명기 율법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이방 사람(특히 가나안 족속)과의 통혼을 강하게 금지합니다.

에스라는 지금 귀환 공동체가 직면한 상황이 모세 시대 가나안 땅 정복을 앞둔 상황과 유사하다고 봅니다. 에스라가 공동체 내 이방인들과의 통혼에 이토록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과거 역사의 아픔, 즉 이방인들과의 결혼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와 관계됩니다. 특히 1절에서 애굽 사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솔로몬의 잘못된 결혼 정책을 염두에 둔 것 같습니다(왕상 11:1). 이방인들과의 통혼을 금하는 결정적인 근거는 귀환민들의 정체성(‘거룩한 자손’)과 관련됩니다(2). 이것은 에스라와 방백들이 예루살렘 공동체를 회복된 이스라엘로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출 19:6; 신 14:2,19). 거룩한 백성인 귀환 공동체가 부정한 이방 족속과의 통혼으로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진리의 말씀을 조금씩 양보하고 타협할 때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맛 잃은 소금이 되고 맙니다. 그러기에 깨어 근신하지 않으면 우는 사자처럼 교회를 삼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마귀의 궤계를 이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항상 깨어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에스라의 반응과 기도(3-5)

성도란 바로 다른 사람들의 잘못과 부끄러움을 비난하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 잘못을 자신의 잘못과 아픔으로 여기고 하나님께 중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타인의 잘못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먼저 자신들의 죄를 하나님 앞에 자복합니다.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없음을 인정합니다.

 

3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4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 5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 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3-5)

 

세상이 완악해지고, 이기적이고, 믿음보다 욕심이 가득해지는 세상 가운데 살아갑니다. 에스라의 안타까운 마음처럼 방백과 고관들처럼 자신의 편함과 안위, 탐욕만을 생각하며 나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⑴ 에스라의 반응(3-4)

 

이 보고를 들은 에스라는 옷을 찢고 머리카락을 뜯는 반응을 보입니다(3). ‘옷을 찢는 행동’은 애통함의 표시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뜯는 것’은 극도의 진노를 표현하는 행동입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로 말미암아 한동안 기가 막혀 앉아 있게 된다(3b). 에스라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과거 선조들이 이방 사람(특히 가나안 백성)과 통혼하여 배교의 자리에 나아가게 되었고, 결국 그로 인해 나라가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 가셨던 역사적 사실 때문입니다(7). 어렵게 다시 돌아온 백성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이전과 동일한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앞으로 그들에게 임할 것은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라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떠는 사람들’입니다(4a).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떠는 사람들’은 포로기를 거치면서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참조. 10:3;사66:2, 5).

 

⑵ 에스라의 기도(5)

 

에스라는 저녁 제사드릴 때(오후3시)까지 옷을 찢은 상태로 앉아 있다가 무릎을 꿇고 손을 들어 기도합니다(5). 무릎을 꿇는 것은 겸손과 간절함의 자세이고, ‘손을 드는 것’은 탄원과 중보의 자세입니다.

 

에스라의 기도 내용(6-7)

진리가 왜곡되고 믿음이 흔들리는 이 시대 가운데서도 세상에 더럽혀지지 않는 순결한 신부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더욱 무너져가는 공동체와 나라 그리고 민족을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람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통해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6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7우리 조상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의 죄가 심하매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우리 왕들과 우리 제사장들을 여러 나라 왕들의 손에 넘기사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을 당하며 얼굴을 부끄럽게 하심이 오늘날과 같으니이다(6-7)

 

6절부터는 에스라의 기도 내용입니다.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따라야 할 기도의 전형인 에스라의 기도는 죄의 고백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성경의 다른 기도와 비교할 때, 에스라의 기도는 두 가지 면에서 독특한 면을 지닙니다. 첫째, 그의 기도는 내러티브(Narrative)양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둘째,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백성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즉, 백성들이 듣고 회개하도록 하는 설교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형의 기도를‘설교-기도’(sermon-prayer)라고 부릅니다. 에스라는 이‘설교-기도’를 통해 듣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려 합니다. 에스라는 먼저 백성들의 죄를 고백합니다(6-7).

여기에서 에스라는 반복적으로 ‘우리’ 혹은 ‘우리의 죄’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백성들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우리’라는 표현에서 백성들의 죄에 대한 책임을 느끼는 지도자 에스라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에 온 지 4개월밖에 되지 않았고 실제로 이들의 잘못과 무관합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스스로를 공동체와 결속시키고 공동체의 잘못을 자신의 책임으로 인정합니다. 이 모습은 광야 시대 모세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참조, 출 34장). 에스라는 기도 가운데 백성들의 죄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나열합니다(7:‘왕들의 손에 넘기며’,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을 당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회고함(8)

일상에서 죄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를 조금도 헤아리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베푸신 은혜를 깊이 묵상함으로 반복되는 일상적인 죄를 단호하게 끊어버립시다.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실 때에 그 은혜에 감사하며 과거의 죄악을 반복하지 않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8이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잠시 동안 은혜를 베푸사 얼마를 남겨 두어 피하게 하신 우리를 그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이 우리 눈을 밝히사 우리가 종노릇하는 중에서 조금 소생하게 하셨나이다(8)

 

죄의 고백에 이어 에스라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돌아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이스라엘 가운데 ‘얼마’를 남겨두어 생존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 ‘얼마’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귀환민들에게 성전의 회복을 허락하시고 안정된 공동체를 만들 수 있게 하셨습니다(‘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하시고’). 그리고 그들의 눈을 밝게 하시고, 생기를 회복해 주셨습니다. ‘눈을 밝게 하셨다’는 것은 암흑과 같은 포로 상태로부터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를 남겨두셔서 그들이 80년전 고레스 칙령으로 큰 꿈을 안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1차 귀환자들은 벅찬 감격과 새로운 다짐으로 초막절을 지키고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마음이 점차 무뎌지고 주위 문화와 종교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고, 이에 따라 정체성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제시된 문제는 단순히 결혼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관련된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에스라는 ‘거룩한 백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합니다. 그러나 이방인과의 통혼에 대한 에스라의 격한 반응은 당시 공동체가 처했던 특별한 상황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속한 신앙 공동체를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우리고 있습니까?특히 지도자는 세속적인 문화나 가르침을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서 교회의 수적 성장만 이루려는 해서는 안 됩니다. 에스라의 기도는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합당하게 살고 싶어서 수고하는 모습을 봅니다. 오늘 성도들의 노력과, 특별히 간절한 기도와 은혜를 경험하는 말씀이 성도들을 지켜주는 능력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과 혼합된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구절은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줍니다. 또한, 과거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희망을 잃지 말라는 교훈을 줍니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회개는 개인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데서 시작됨을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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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08-02)


예루살렘까지 안전한 도착과 감사의 제사

에스라 8장 21-36절


 

이 세상은 사건과 사고로 가득 차 있어 5분 후의 일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만이 평탄한 길을 걸을 수 있게 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루나 한 해에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에스라처럼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우연이나 시기의 일치로 돌리지 않고, 짧은 순간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주목합니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셨다는 신앙고백을 통해, 감사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에스라는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평탄한 길을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예루살렘까지의 길은 머나먼 여정일 뿐만 아니라 도적들이 도사리고 있는 위험한 길입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도우심만 의지합니다. 에스라와 일행은 약4개월 동안의 여정을 마친 후,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립니다.

 

출발하기 전에 준비 사역(21-30)

오늘 우리의 기도는 죽은 말의 잔치가 아닌지 성찰해봐야 합니다. 종교적인 형식이 되어버린 기도의 언어를 다시 살아있는 언어로 회복해야 합니다. 참된 기도야말로 생명의 실타래를 엮으려고 죽음과 허무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세상의 실상을 하나님 앞에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21그 때에 내가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22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23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 24그 때에 내가 제사장의 우두머리들 중 열두 명 곧 세레뱌와 하사뱌와 그의 형제 열 명을 따로 세우고 25그들에게 왕과 모사들과 방백들과 또 그 곳에 있는 이스라엘 무리가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드린 은과 금과 그릇들을 달아서 주었으니 26내가 달아서 그들 손에 준 것은 은이 육백오십 달란트요 은 그릇이 백 달란트요 금이 백 달란트며 27또 금잔이 스무 개라 그 무게는 천 다릭이요 또 아름답고 빛나 금 같이 보배로운 놋 그릇이 두 개라 28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요 이 그릇들도 거룩하고 그 은과 금은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즐거이 드린 예물이니 29너희는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 골방에 이르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의 족장들 앞에서 이 그릇을 달기까지 삼가 지키라 30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은과 금과 그릇을 예루살렘 우리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져가려 하여 그 무게대로 받으니라(21-30)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계획에 자신이 참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없다면 두려움과 이기심에 빠지게 됩니다. 에스라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역을 하나님 중심으로 이루어 나가길 원했습니다.

 

⑴ 예루살렘 여행을 위한 영적인 준비(21-23)

 

본문은 귀환자들의 소집을 마친 에스라가 예루살렘 여행을 준비하는 내용입니다. 에스라는 제2차 귀향자들과 함께 아하와 강가에서 모든 출발 준비를 마치고 이제 5-6개월의 기간이 소요되는 긴 여정의 대장정에 돌입하게 됩니다. 이 길고 긴 여정에서 가장 염려스러운 것은 두 가지 인데 하나는 일행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에 바치려고 가져가는 은, 금, 각종 기명과 그릇들의 안전 운반입니다. 그래서 귀환민들의 소집을 완료한 후, 에스라는 여행을 시작하기에 전에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합니다(21a). 에스라와 그 일행은 하나님께 간구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예루살렘 여정을 위한 영적 준비를 합니다. 에스라와 그 일행은 출발에 앞서 금식하면서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인‘평탄한 길’을 간구합니다(21).

 

금식하는 일은 포로기 이후에 유대인 사이에서는 일상적인 풍습으로 자리 잡혀 있었습니다. 스가랴서를 보면, 4,5,7,10월에 정기적인 금식일이 있었습니다. 모세 5경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금식하는 날은 대속절 하루뿐이었습니다. 그 외에는 개인적이나 국가적인 위기적인 상황에서 금식을 했었습니다. 나라의 멸망을 경험하고 난 후에는 금식이 중요한 풍습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유대교에서 금식은 빼내놓을 수 없는 경건의 한 축을 이루었습니다.

 

에스라는 예루살렘 여행을 준비하는데 가장 중요한 준비로 금식을 한비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는 먼 여정일 뿐만 아니라 도적들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안전한 여행을 위해 아닥사스다 왕에게 군대를 요청했다면 도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 의지하기로 결단합니다. 이는 느헤미야가 페르시아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경우와 비교됩니다(참조. 느 2:9).

 

에스라의 이러한 결단은 자신이 전에 아닥사스다 왕에게 했던 신앙고백인 ‘우리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모든 자들에게 선을 베푸실 것’(22a)을 입증하기 위함입니다. 본문은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23b)고 하나님께서는 에스라와 백성들의 금식기도에 응답하셨음을 밝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찾고 의지하는 사람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인생 여정을 잘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⑵ 예루살렘 여행을 위한 실제적인 준비(24-27)

 

여행을 위한 영적 준비에 이어 에스라는 실제적인 조취들을 취합니다. 에스라는 먼저 귀환하는 무리 가운데 24명의 지도자들을 세우고 성전의 기물들을 책임지게 합니다(24-30). 귀환 여정에서 중요한 것은 바벨론에서 가져온 은금과 성전 기물을 운반하는 책임을 맡깁니다. 에스라는 이 일을 위해 제사장의 우두머리들 12명, 그리고 세레뱌와 하사뱌와 그의 형제 10명을 세웁니다(24).

개역개정은 ‘제사장의 우두머리들 중 열두 명 곧 세레뱌와 하사뱌와 그의 형제 열 명’으로 번역하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세레뱌와 하사뱌는 앞에서 레위인들로 소개되었습니다(18-19). 따라서 본문은 제사장 지도자 그룹 12명과 더불어 레위인 12명(세레뱌와 하사뱌와 그의 형제10명)이 함께 세움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에스라는 성전의 기물을 운반하는 일에 제사장들 외에 레위인들이 참여하도록 세심한 주의를 하고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라가 이들에게 내린 조치는 오경의 율법에 근거한 것입니다. 성물 운반 규정에 의하면(민 4장),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함께 동역해야 합니다. 제사장은 성막의 기물을 관리하고, 레위인들은 그것을 운반하는 책임을 맡습니다. 이들이 운반하게 될 귀중품은 페르시아의 왕실과 바벨론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에스라는 그것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넘겨줍니다. 그들이 운반하게 될 양은 은 650달란트(약 25Ton), 은그릇 100달란트(3,500kg), 금 100달란트(3,500kg), 금잔 20개(무게가1,000다릭), 놋그릇 2개입니다(25b-26). 이 모두를 값으로 환산하면 수백만 달러에 해당하는 액수입니다. 이는 이 일에 참여한 사람들의 특별한 헌신을 보여줍니다. 봉헌자들 가운데 이방인들(왕과 페르시아 관리들)도 포함되어 있는 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이방인들의 물품을 취한 것과 유사합니다(출애굽기11:2; 12:35-36),이러한 귀중품과 기명들은 앞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와 운영을 위해 사용될 것입니다.

 

⑶ 지도자들에게 한 에스라의 명령(28-30)

 

에스라는 기물들의 운반 책임자들에게 구체적인 지침을 하달하기 전에 그 일의 중요성을 알립니다(28). 거룩한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운반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성별된 사람들’로 그들이 맡은 은금과 기명들은 ‘조상들의 하나님께’드려진 예물입니다(28). ‘조상들의 하나님께 드린 예물’이라는 표현은 앞으로 드릴 제사와 포로 이전 예루살렘 제사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에스라가 기물들을 ‘하나님께 드려진 성물’이라고 강조한 배경에는 성전 기물에 대한 운반자들의 탐심을 경계하는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에스라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즉시 족장들이 보는 앞에서 기물들의 무게를 달도록 명령합니다(29). 이것은 그들이 맡은 일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로 에스라의 철저한 준비성을 잘 보여줍니다. 에스라의 명령에 지도자들은 순종으로 반응합니다(30).

 

예루살렘으로의 여정과 제사(31-36)

기도를 통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마쳤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능력과 주도권까지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이끄심을 전적으로 맡기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31첫째 달 십이 일에 우리가 아하와 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새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 32이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거기서 삼 일 간 머물고 33제사일에 우리 하나님의 성전에서 은과 금과 그릇을 달아서 제사장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의 손에 넘기니 비느하스의 아들 엘르아살과 레위 사람 예수아의 아들 요사밧과 빈누이의 아들 노아댜가 함께 있어 34모든 것을 다 세고 달아보고 그 무게의 총량을 그 때에 기록하였느니라 35사로잡혔던 자의 자손 곧 이방에서 돌아온 자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는데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수송아지가 열두 마리요 또 숫양이 아흔여섯 마리요 어린 양이 일흔일곱 마리요 또 속죄제의 숫염소가 열두 마리니 모두 여호와께 드린 번제물이라 36무리가 또 왕의 조서를 왕의 총독들과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들에게 넘겨 주매 그들이 백성과 하나님의 성전을 도왔느니라(31-36)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도 응답을 받은 후의 신앙적인 자세도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인들 중에 기도 응답받은 후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잘 관리하지 못해서 오히려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⑴ 안전하게 보호해주신 하나님(31)

 

아하와 강을 출발하여 안전하게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장면은 하나님께서 에스라와 백성들의 금식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렇게 많은 금은과 성전 기물들을 호위병 없이 간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도적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귀환하는 무리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대적들과 도적들의 습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에스라와 그 일행은 첫째 달 12일에 아하와 강을 출발하여 예루살렘까지 40일간의 긴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31). 그들은 첫째 달1일에 바벨론에서 출발하여 5월1일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스 7:9). 아마도 이하와 강에서 금식하고 레위 사람들을 합류시키는 과정에서 12일이 소요된 것으로 보입니다(참조. 스 8:15-20), 예루살렘까지 긴 여행기간 동안 그들은 전혀 군사적인 지원을 받지 않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저자는 예루살렘으로 여행한 과정에 대해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손이 귀환하는 백성들을 도우셨다’고만 밝힙니다(31b). 하나님께서 여행기간 내내 ‘대적들과 길에 매복한 자들’의 위험으로부터 백성들을 지키신 것입니다.

에스라의 귀환민들은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그들은 무사히 안전하게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도적들의 손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안전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⑵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사역(32-34)

 

에스라는 드디어 40일의 여정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처음 3일간은 쉬는 시간을 갖습니다(32). 3일간의 휴식 이후 에스라는 산적한 일들을 처리하기 시작합니다(33-34). 그는 먼저 바벨론에서 가져온 기명들의 무게를 달아 운송을 맡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책임이 완수 되었는지를 확인한 후, 제사장 므레못에게 넘겨줍니다(33a). 제사장 엘르아살과 레위 사람 요사밧과 노아댜가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목록들을 장부에 기록합니다(33b-34). 모든 일을 투명하게 처리하고자 하는 이들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⑶ 감사에 제사를 드린 귀환민들(35-36)

 

에스라와 함께 예루살렘에 돌아온 ‘사로 잡혔던 자의 자손’(에스라와 귀환민들)이 예루살렘에서 첫 번째 행한 일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35a). 그들은 여정에 함께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려했습니다. ‘사로잡혔던 자’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으로, 이들은 회복된 공동체의 중심입니다. 귀한민들이 하나님께 드린 예물은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번제물로 수송아지 12마리, 숫양 96마리, 어린 양 77마리, 그리고 속죄제로 숫염소 12마리를 번제물과 속죄제물로 드렸습니다(35b). 제사 규례기에 의하면, 번제는 감사와 헌신의 의미, 속죄제는 정화와 속죄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들이 번제와 더불어 속죄제를 드린 이는 포로기에 범한 모든 죄와 부정을 깨끗케 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번제물 수송아지와 속죄제물 숫염소의 숫자 12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귀환 공동체는 자신들을 회복된 이스라엘로 이해했습니다. 수송아지와 숫염소 외에 숫양 96(12×8마리, 어린 양 77마리가 제물로 사용되었습니다(35b). 77마리는 상징적으로 많은 수의 제물을 의미합니다(7은 완전수). 귀환 공동체는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드리며 지금까지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표하고 앞으로 있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합니다. 에스라는 끝으로 왕에게서 받은 조서를 총독들에게 넘겨줍니다(36a). 칙령을 받은 페르시아 관리들은 곧바로 유다 백성과 하나님의 성전 일을 돕는다(36b). 지금까지 부정적이었던 페르시아 관리들이 유다 백성에게 우호적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21-36절에는 7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 2의 출애굽 모티브가 나옵니다. 에스라가 여행 전 하나님께 ‘평탄한 길’을 간구한 것은 이사야40:3의 예언을 상기시킵니다. 제2의 출애굽 모티브는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드리는 제물들의 양에도 나타납니다(수소 12마리,숫염소 12마리, 숫양 96[12×8]마리, 어린 양 72[12×6]마리), 반복되는 열둘이라는 숫자는 회복된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에스라서에 의하면, 회복된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사로잡혔던 자의 자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멀고 위험한 길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마치고,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새로운 성전에서 들리는 이 제사는 매우 특별했을 것이고 감사와 기쁨이 넘쳤을 것입니다. 에스라는 왕에게 호위부대를 요청하지 않고 기도로 예루살렘으로 왔지만3차 포로 귀환 때,느헤미야는 페르시야 군대의 호위를 받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처럼 꼭 위험을 자처하는 것만이 믿음은 아닙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지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에스라가 그랬던 것처럼 삶과 모습으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고 증명해야 합니다. 문제가 크고 어려울수록 더욱 힘써 기도함으로서 오히려 문제와 어려움을 통해 더 크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들어내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 의지하며 기도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에스라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며 안전한 여정을 기원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 속에 헌신과 감사의 마음으로 나아갔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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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08-01)


재건에 참여한 2차 귀환자들

에스라 8장 1-20절


 

공동체 회복이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영으로 됩니다.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는 일을 과연 이뤄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은 왜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놀라운 역사입니다. 그걸 통해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역사를 준비하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본문은 아닥사스다 왕 때 있었던 두 번째 귀한 행렬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을 소개합니다. 아하와 강가에서 에스라는 족장들을 보내 레위인과 성전의 일꾼들(레위인 40여 명, 느디님 사람 220명)을 불러 모아 무리에 합류시킵니다. 2차 귀환자들의 총수는 부녀자와 어린아이를 합쳐 약 5,000명 가량 입니다. 본문은 첫 번째와 동일하게 두 번째 귀환자들을 출애굽 행렬로 묘사합니다.

 

예루살렘에 귀환자의 명단(1-14)

하나님의 사역은 위험천만했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불투명한 미래에 온 삶을 던지는 모험을 감행하면 하나님은 인도하십니다. 이방 땅에서의 안락한 삶보다 거룩한 공동체를 세우는 삶을 더 가치 있게 여겼기 살아가야 합니다. 이곳에 바벨론에서 귀환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순종하였습니다.

 

1아닥사스다 왕이 왕위에 있을 때에 나와 함께 바벨론에서 올라온 족장들과 그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2비느하스 자손 중에서는 게르솜이요 이다말 자손 중에서는 다니엘이요 다윗 자손 중에서는 핫두스요 3스가냐 자손 곧 바로스 자손 중에서는 스가랴니 그와 함께 족보에 기록된 남자가 백오십 명이요 4바핫모압 자손 중에서는 스라히야의 아들 엘여호에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이백 명이요 5스가냐 자손 중에서는 야하시엘의 아들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삼백 명이요 6아딘 자손 중에서는 요나단의 아들 에벳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오십 명이요 7엘람 자손 중에서는 아달리야의 아들 여사야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칠십 명이요 8스바댜 자손 중에서는 미가엘의 아들 스바댜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팔십 명이요 9요압 자손 중에서는 여히엘의 아들 오바댜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이백십팔 명이요 10슬로밋 자손 중에서는 요시뱌의 아들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백육십 명이요 11베배 자손 중에서는 베배의 아들 스가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이십팔 명이요 12아스갓 자손 중에서는 학가단의 아들 요하난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백십 명이요 13아도니감 자손 중에 나중된 자의 이름은 엘리벨렛과 여우엘과 스마야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육십 명이요 14비그왜 자손 중에서는 우대와 사붓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칠십 명이었느니라(1-14)

 

본문은 첫 번째와 동일하게 두 번째 귀환자들도 새출애굽을 한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출바벨론 사건은 제2의 출애굽 사건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첫 출애굽을 통해 첫 하나님 나라가 탄생했다면, 이제 두 번째 출애굽을 통해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가 탄생할 것입니다.

 

⑴ 계보의 서론(1)

 

아닥사스다 왕 때 있었던 두 번째 귀환 행렬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을 소개합니다. 두 번째 귀환이 이루어진 시점, 즉 아닥사스다 왕이 왕위에 있을 때는 구체적으로 주전 458년을 의미합니다. 이 때는 첫 번째 귀환이 이루어진 때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흐른 시점입니다. 에스라와 동행한 귀환민들은 바벨론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표현됩니다(1b). ‘올라왔다’는 저자는 모세와 함께 애굽에서 올라온 출애굽 행렬의 모습을 환기하려 합니다(참조, 출 3:17). 돌아온 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의 사람들로(1) 제사장(2a), (2) 왕족(2b) 그리고 (3) 일반 백성들(3-14)입니다.

 

⑵ 제사장과 다윗 왕조의 계보(2)

 

귀환자들의 계보는 제사장과 다윗의 후손(왕족)으로 시작합니다. 2장의 계보와 비교할 때, 왕족이나 일반 백성보다 제사장 계보를 앞세우고 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합니다. 이는 저자가 제사장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이 구절에 근거해 에스라가 직접 작성한 문서로 보기도 합니다. 제사장 가문은 비느하스 자손과 이다말 자손으로 구분되는데, 비느하스는 아론의 셋째 아들 엘르아살의 아들이고, 이다말은 아론의 넷째 아들입니다(출 6:25). 각각의 혈통에 속한 제사장으로는 게르솜과 다니엘이 등장합니다. 다윗 자손으로 소개되는 핫두스는 스룹바벨의 후손입니다(참조 대상 3:19-22).

 

⑶ 일반 백성들의 계보(3-14)

 

족장을 비롯한 일반 백성들의 계보가 제시됩니다. (1)바로스 자손(3), (2)바핫모압 자손(4), (3)스가냐 자손(5), (4) 아딘 자손(6), (5)엘람 자손(7), (6)스바댜 자손(8), (7)요압 자손(9), (8)슬로밋 자손(10), (9)베배 자손(11), (10)아스갓 자손(12), (11)아도니감 자손(13), (12)비그왜 자손 등입니다(14). 본문은 이들을 열두 지파로 이루어진 이상적인 이스라엘의 모습으로 제시합니다. 첫 번째로 소개되는 가문은 스가냐 자손 곧 바로스 자손입니다. 스가냐 자손의 총수는 족장 스가랴 외에 남자가 150명입니다(3). 스가냐 자손에 이어 바핫모압 자손은 엘여호에내 및 200명으로 소개됩니다(4).

5절의 스가냐는 3절의 스가냐와 동명이인입니다(칠십 인역은 자두 후손 스가냐), 스가냐 자손 중 야하시엘의 아들과 함께한 자들이 300명(5), 아딘 자손으로 에벳 및 50명(6), 엘람 자손으로 여사야 및 70명(7), 스바댜 자손으로 스바댜 및 80명(8), 요압 자손으로 오바댜 및 218명(9), 슬로밋 자손으로 요시뱌 및 160명(10), 베배 자손으로 스가랴 및 28명(11), 아스갓 자손으로 요하난 및 110명(12), 아도니감 자손으로 엘리벨렛, 여우엘, 스마야 및 60명(13), 비그왜 자손으로 우대, 사붓 및 70명(14)입니다. 이들은 회복된 이스라엘의 중심을 이룹니다. 이렇게 해서 제사장, 왕족, 일반 백성들 가운데 귀환한 사람들은 18명의 가족들의 우두머리를 포함하여 모두 1,514명이 됩니다.

1차 귀환민들의 명단을 보도하는 2장과 비교할 때, 요압을 제외한 모든 족장들의 이름이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2차 귀환민들의 대다수가 1차 귀환자들과 관계된 인물임을 의미합니다. 에스라에 등장하는 귀환 공동체의 명단들(스 2, 7, 8장)은 현재의 공동체를 과거 이스라엘과 연결하는 기능을 합니다(느헤미야 7장의 명단도 마찬가지). 즉 이러한 명단들은 포로기 이전의 공동체와 앞으로 회복될 공동체를 하나로 연결하면서 구속사의 연속성을 강조합니다.

에스라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사람들은 대략 5천명쯤 되었을 것입니다. 처음 귀환한 약 5만명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수였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돌아온 사람들을 12족장들을 중심으로 기술한 것이나 이들이 대부분 1차 귀환자들 가문과 관련된다는 사실은, 비록 소수지만 아브라함처럼 안정된 갈대아 사람들의 땅을 떠나서 안정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 헌신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의 결단이었습니다.

 

레위인과 성전 수종자들의 합류(15-20)

오늘날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자신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길 원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입니다.

 

15내가 무리를 아하와로 흐르는 강 가에 모으고 거기서 삼 일 동안 장막에 머물며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핀즉 그 중에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는지라 16이에 모든 족장 곧 엘리에셀과 아리엘과 스마야와 엘라단과 야립과 엘라단과 나단과 스가랴와 므술람을 부르고 또 명철한 사람 요야립과 엘라단을 불러 17가시뱌 지방으로 보내어 그 곳 족장 잇도에게 나아가게 하고 잇도와 그의 형제 곧 가시뱌 지방에 사는 느디님 사람들에게 할 말을 일러 주고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 자를 데리고 오라 하였더니 18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고 그들이 이스라엘의 손자 레위의 아들 말리의 자손 중에서 한 명철한 사람을 데려오고 또 세레뱌와 그의 아들들과 형제 십팔 명과 19하사뱌와 므라리 자손 중 여사야와 그의 형제와 그의 아들들 이십 명을 데려오고 20다윗과 방백들이 레위 사람들을 섬기라고 준 느디님 사람 중 성전 일꾼은 이백이십 명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지명 받은 이들이었더라(15-20)

 

하나님께서는 선한 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을 항상 도우십니다. 레위인들을 데려가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에스라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게으른 눈은 불신과 불평을 만들지만, 순종하는 손발은 신뢰하는 마음을 만듭니다. 지금 하려는 일이 옳은 일이라면 먼저 실천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기다리시길 바랍니다.

 

⑴ 이하와 강가에 무리를 모음(15)

 

귀환자들의 명단을 소개한 후15절부터는 이후에 합류한 성전 종사자와 레위인들을 소개합니다. 에스라와 귀환 무리들이 바벨론을 출발하여 아하와로 흐르는 강가에 이르자 그곳에서 3일간 머물게 됩니다. 에스라는 이곳에서 일행을 점검하다가 행렬 가운데 레위인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첫 번째 귀환 행렬에서도 레위인들의 숫자는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전체의1,5%정도;참조.스 2:40). 추측컨대 레위인들은 자신들에게 부과될 과중한 사역을 염려하여 귀환을 꺼렸던 것 같습니다. 오경의 규례에 의하면, 레위인들의 사역은 육체노동을 수반하는 힘든 일이었습니다(민 3:6-8; 4:49). 레위인들은 성막의 기물을 운반하며 성막을 지키는 일뿐 아니라 제사장을 도와 제사를 집례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참조, 민 18장). 게다가 그들은 성소의 일과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통해 공동체의 신앙을 유지하는 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참조, 신 33:10). 귀환 공동체가 조상들의 신앙을 전수하고 지속적인 예배를 드리는 일에 레위인의 역할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에스라는 예루살렘 공동체의 재건에 있어서 레위인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들을 귀환 행렬에 합류시키려 한 것입니다.

 

⑵ 성전 봉사자와 레위인들을 합류시킴(16-20)

 

물론 귀환 자체도 의미가 있지만, 귀환의 목적이 완전한 예배와 율법을 따른 삶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레위인과 성전 일꾼들은 반드시 있어야 했습니다. 에스라는 이 사실을 조기에 발견하고 신속하게 조치함으로서 레위인들과 성전 일꾼들을 2차 귀환 명단에 포함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에스라는 학식이 있는 사람들을 불러 가시바 지방의 족장 잇도에게 보냅니다(17a). 잇도는 가시바 지방에 거주하는 레위인의 지도자였던 것 같습니다. 에스라는 잇도를 통해 예루살렘에서 봉사할 성전 종사자들을 불러 모으려 한 것입니다(17b). 에스라의 부탁을 받고 9명의 족장들을 포함한 11명의 사람들이 아하와 강가에서 가시뱌로 떠납니다. 가시뱌로 떠난 족장들은 엘리에셀, 아리엘, 스마야, 엘라단, 야립, 엘라단, 나단, 스가랴 므술람입니다(16). 특별히 에스라가 열한 명의 지도자를 보낸 것은 레위 지파가 없는 이스라엘의 열 한 지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에스라는 귀환 행렬에 레위 지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가시뱌 지방에 거주하는 레위인들에게도 이것을 알리려 한 것입니다. 가시뱌 지방은 바벨론 근교에 있는 유다인 집단 거주 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지방은 포로민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렸던 곳이고, 레위 사람들도 이곳에 모여 살았던 것 같습니다.

에스라의 명령을 받은 11명의 지도자들은 가시뱌 지방으로 가서 세 가문의 레위인 39명, 즉 말리의 자손 중 ‘명철한 사람’ 1명(18a), 세레뱌 가문에 속한 레위인 18명(18b), 하사뱌 자손 중 여사야의 친지들 20명(19), 그리고 220명의 성전 수종자들(20)을 아하와 강가로 데려옵니다. 이들이 성전 종사자들을 모집한 일은 3일 만에 이루어졌는데(참조. 15;‘3일 동안…머물며’), 저자는 이 일의 배후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음을 밝힙니다(18a;‘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고’), 레위인을 포함한 성전 종사자들의 총수는 258명으로 여기에 앞서 계수된 제사장, 다윗 왕가 및 일반 백성들의 숫자 1,514명을 더하면 귀환자들의 총수는 1,772명입니다. 여자와 아이 들을 합하면 그 숫자는 약 5,000명쯤 될 것입니다. 이 숫자는 1차 귀환 때의 숫자인 49,897명에 비하면 1/10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비록 숫자적으로는 적지만, 이들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새롭게 재건하는 일에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할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안정적인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본문에 소개된 레위인을 포함한 귀환자들의 수는 적지만, 당시 유다와 예루살렘이 처한 어려운 형편을 고려할 때 이들 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본문은 두 번째 귀환 행렬도 첫 번째와 동일하게 출애굽 행렬로 묘사합니다. 열두 지파를 연상케 하는 열두 자손의 이름과 별도로 레위인의 합류를 보도하는 내용도 민수기의 인구조사와 유사합니다(참조.민 3장). 특히 귀환 목적도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고자 한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본문은 에스라를 중심으로 한 남은 자들의 귀환을 1차 귀환과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간주합니다(참조 사41:9;43:14-21;52:11-12).

교회도 성도들이 구경꾼에 머물거나 수동적으로만 참여하기보다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역할 수 있도록 설득해 주어야 합니다. 목회자 중심으로만 교회 활동이 진행되면 결코 건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앞으로 영적 책임을 감당할 다음 세대들이 나올 수 있는 영적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에스라는 유다 백성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백성에게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려는 결단을 합니다. 이 과정에서 에스라의 지도력과 신앙이 강조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의 중요성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에스라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 의지하는 삶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공동체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 놀라운 일들이 이루어진다는 메시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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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07-02)


지상의 왕을 움직이신 하늘의 왕

에스라 7장 11-28절


 

1960년대 이스라엘과 아랍공화국과 6일 전쟁 당시 이스라엘군을 이끌던 모세 다얀 장군의 선언과 6일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랍 연합군에 맞서 승리한 배경에는 군사적 전략뿐만 아니라, 신앙과 정신적인 힘이 크게 작용했음을 보여줍니다. 시편 121편의 내용은 믿음과 희망을 강조하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건은 종교와 군사적 승리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더 궁금한 점이 있으신가요?

 

  • 아닥사스다 왕은 조서를 내려 에스라로 하여금 백성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을 허락합니다. 그는 에스라에게 위임한 사명은 성전 담당자들에게 성전 운영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일과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에스라는 이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의 손길이 작용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11)

세상적인 입장에서 ‘권위’를 느껴지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때로는 삶 속에서의 고통이라고 하는 연단이라고 하는 것을 건너도록 하십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는 하나님의 율례를 배우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 하나님을 찬송함에 이르게 됩니다.

 

11여호와의 계명의 말씀과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 학자요 학자 겸 제사장인 에스라에게 아닥사스다 왕이 내린 조서의 초본은 아래와 같으니라(11)

 

본 절에서는 아닥사스다 왕이 내린 조서(12-26)의 서론입니다. 그 조서의 수신자와 발신자를 소개합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는 왕의 신임장과 같은 것으로 에스라의 신분을 보증하고, 그 안에 그가 해야 할 구체적인 임무를 명시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에스라의 신분에 대해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학자요 학자 겸 제사장으로 소개됩니다. 이 조서는 에스라 한 개인을 향한 것으로 예루살렘 귀환이라는 에스라의 청원이 받아들여졌음을 입증하는 공적 문서입니다. 에스라의 직무는 한편으로 페르시아 관리로서 유다의 질서와 행정을 유지할 책임이 있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 예루살렘 성전 예배를 복원할 임무를 맡은 인물(제사장)입니다. ‘학자 겸 제사장’이라는 에스라의 호칭은 이러한 이중적인 직무를 보여줍니다.

 

조서의 내용(12-26)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잘못된 가치관이나 권력자들을 통해서도 반대로 이용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십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자신이 점령했던 지역 신들로부터 재앙을 받지 않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는 신인 여호와를 위해 선정을 베풀고 있습니다.

 

12모든 왕의 왕 아닥사스다는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자 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13조서를 내리노니 우리 나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뜻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너와 함께 갈지어다 14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기 위하여 왕과 일곱 자문관의 보냄을 받았으니 15왕과 자문관들이 예루살렘에 거하시는 이스라엘 하나님께 성심으로 드리는 은금을 가져가고 16또 네가 바벨론 온 도에서 얻을 모든 은금과 및 백성과 제사장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그들의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기쁘게 드릴 예물을 가져다가 17그들의 돈으로 수송아지와 숫양과 어린 양과 그 소제와 그 전제의 물품을 신속히 사서 예루살렘 네 하나님의 성전 제단 위에 드리고 18그 나머지 은금은 너와 너의 형제가 좋게 여기는 일에 너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쓸지며 19네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기는 일을 위하여 네게 준 그릇은 예루살렘 하나님 앞에 드리고 20그 외에도 네 하나님의 성전에 쓰일 것이 있어서 네가 드리고자 하거든 무엇이든지 궁중창고에서 내다가 드릴지니라 21나 곧 아닥사스다 왕이 유브라데 강 건너편 모든 창고지기에게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 학자 겸 제사장 에스라가 무릇 너희에게 구하는 것을 신속히 시행하되 22은은 백 달란트까지, 밀은 백 고르까지, 포도주는 백 밧까지, 기름도 백 밧까지 하고 소금은 정량 없이 하라 23무릇 하늘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하늘의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은 삼가 행하라 어찌하여 진노가 왕과 왕자의 나라에 임하게 하랴 2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제사장들이나 레위 사람들이나 노래하는 자들이나 문지기들이나 느디님 사람들이나 혹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에게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받는 것이 옳지 않으니라 하였노라 25에스라여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네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를 법관과 재판관을 삼아 강 건너편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그 중 알지 못하는 자는 너희가 가르치라 26무릇 네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속히 그 죄를 정하여 혹 죽이거나 귀양 보내거나 가산을 몰수하거나 옥에 가둘지니라 하였더라(12-26)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는 앞선 왕이 고레스가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 자기 고향으로 안전하게 돌아가도록 지원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12절부터 26절까지는 아람어 본문으로 조서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⑴ 인사말(12)

 

아닥사스다 왕은 조서를 내리면서 자신과 수신자인 에스라의 호칭을 밝힙니다. 그는 자신을 ‘왕의 왕’이라고 소개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절대적인 권위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에스라에 대한 호칭은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자 겸 제사장’입니다.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자 겸 제사장’은 페르시아 정부 내에서 에스라가 갖고 있던 공식 직함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⑵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13)

 

아닥사스다 왕은 선왕인 고레스 왕이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자원하는 사람은 고국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백성들이 성전에 받칠 제물을 사는데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합니다.

 

⑶ 에스라의 임무(14-26)

 

아닥사스다 왕이 에스라에게 위임한 임무를 소개하는 단락(14-26)은 다음과 같은 교차 대칭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 구조에 의하면, 본문은 율법을 가르칠 것(a′와 a)과 성전 예배에 대한 지원(c)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a. 율법을 따라 조사할 것(14)

    b. 바벨론에서 성전에 바치는 예물(15-18)

         c. 성전 유지 비용과 헌납될 기물들(19-20)

    b′. 강 서쪽 지방에서 바치는 예물(21-24)

a′. 율법에 따라 가르칠 것(25-26)

 

에스라와 그 일행의 이스라엘 귀환은 ‘왕’과 ‘일곱 자문관’의 허락을 받아 이루어집니다(14b). ‘일곱 자문관’은 당시 왕의 측근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보좌관 그룹을 가리킵니다. 이들의 허락은 에스라와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에 대한 합법성을 확인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에스라에게 주어진 첫 번째 임무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형편을 살피는 것입니다(14a). 예루살렘과 유다에 정착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상황을 잘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에스라를 보내면서, 여러 가지 면에서 실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습니다(15-24). 이 조서에서 아닥사스다 왕은 에스라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돋보이며, 또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도 있어 보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편의와 특혜를 부여하는 내용들로 인하여 그가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는 천사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① 자발적인 예물(15)

 

먼저 왕과 자문관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성심으로’ 예물을 바칩니다(15). ‘성심으로’이란 ‘자원하는 마음으로’, ‘아낌없이’라는 의미로 이들의 봉헌이 자발적임을 보여줍니다.

 

② 성전 제사에 필요한 예물(16-18)

 

아닥사스다 왕의 두 번째 지원은 에스라로 하여금 바벨론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서 받은 은금과 예물을 가져가도록 하는 것입니다(16). 봉헌자들 중 상당수는 귀환하지 않고 바벨론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었을 것입니다. 이 은금과 예물은 앞으로 예루살렘 성전 제사에 필요한 제물을 사는 용도로 사용될 것입니다(17). 아닥사스다 왕은 이 일에 있어 유다인들의 자율권을 보장합니다(18,‘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쓸지며’). 본문은 예루살렘 성전을 위한 이방인들의 헌신을 언급함으로써 예루살렘 성전이 갖는 우주적인 의미를 강조합니다.

 

③ 성전 유지와 관련된 예물(19-20)

 

아닥사스 왕의 세 번째 지원은 성전 유지와 관련됩니다(19-20). 왕은 에스라에게 하나님의 성전 예배에 사용될 그릇들을 내어줍니다(19). 이 그릇들은 아마 1차 귀환 때 일부 남겨두었던 기물들이거나(에스라 1:7-11) 왕의 개인적인 하사품이었을 것입니다(에스라 8:26-27). 왕은 추가적으로 성전 운영에 사용될 물품들을 ‘궁중 창고’, 즉 국고에서 지원할 것을 약속합니다(20).

 

④ 강 서편에서도 물품 공급(21-24)

 

아닥사스다 왕의 네 번째 지원은 유브라데 강 건너편 관리들로 하여금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도록 명령합니다(21-24). 그들이 공급할 물품들은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은 100달란트(약 34kg), 밀 100고르(13,600ℓ), 포도주 100밧(약 1,800ℓ), 기름 100밧(약 1,800ℓ), 그리고 많은 양의 소금입니다(22). 밀, 기름, 소금은 소제에(레위기 2장; 6:9), 포도주는 전제에 필요한 제물입니다(민수기 15:5-10). 당시 강 서편 지역의 1년 세금이 350달란트인 것을 감안한다면, 이 액수는 엄청난 지원입니다. 이것은 성전 예물과 더불어 성전 유지 비용까지 페르시아 국고에서 지원한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예루살렘의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이 왕실과 제국에 임하기를 바란 것으로 보입니다(23b, ‘어찌하여 진노가 왕과 왕자의 나라에 임하게 하라’). 강 건너편 관리들을 통한 아닥사스다 왕의 지원은 예루살렘 성전의 제2의 종사자들(제사장, 레위인, 노래하는 자들, 문지기들, 느디님 사람들)의 세금을 면제해주는 것을 포함합니다(24). 성직자에게 면세 혜택을 주는 것은 페르시아 왕들이 종종 행한 정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⑤ 종교뿐 아니라 행정적인 지도자로 임명(26)

 

아닥사스다 왕은 에스라가 해야 할 핵심 임무를 언급하는데, 그것은 사법적인 기능과 교육적인 역할입니다(25 ‘재판하게 하고…가르치라’). 에스라에게 주어진 사법권은 법관과 재판관을 임명하는 것이고(25a), 교육적인 역할은 페르시아 관리로서 유다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공의를 가르치는 것입니다(25b). 아닥사스다 왕은 이를 통해 제국에 속해 있는 백성들이 질서 있는 생활을 하며 평안하기를 원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끝으로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 임할 엄한 처벌을 경고합니다(26). 여기서 ‘왕의 명령’은 페르시아 제국의 법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명령은 이스라엘의 율법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의 제사장은 하나님께 속한 일, 하나님의 명령을 처리하는 반면, 왕에게 속한 일(왕의 명령)은 사법권을 갖고 있는 자들의 권한입니다. 에스라는 제사장과 학자(페르시아 관리)로서 이 두 가지 기능을 행사하도록 위임받았습니다. 그는 종교 지도자 일뿐만 아니라 행정적인 지도자의 위치도 같이 감당했습니다.

 

에스라의 찬양(27-28)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함께 있어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주십니다.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더욱 힘 있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27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그가 왕의 마음에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시고 28또 나로 왕과 그의 보좌관들 앞과 왕의 권세 있는 모든 방백의 앞에서 은혜를 얻게 하셨도다 내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으므로 내가 힘을 얻어 이스라엘 중에 우두머리들을 모아 나와 함께 올라오게 하였노라(27-28)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가 끝나고 다시 히브리어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이제부터 에스라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이 부분은 ‘에스라 회고(Ezra Memoir)’라고 불립니다. 에스라의 회고는 9장까지 이어집니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의 호의와 관대함에 대해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응대합니다. 에스라의 찬양은 찬양시의 형태로서 송축하라는 선포 후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설명하면서 찬양합니다.

에스라가 선포하는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셨다는 것입니다(27). 둘째, 하나님께서 에스라로 하여금 왕과 대신들 앞에서 은혜를 받게 하셨습니다(28a), 아하수에로 왕 당시 하나님께서는 왕후 에스더에게 베푸신 은혜를 에스라에게도 베푸신 것입니다(에스더 5:2). 셋째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여건을 마련해주셨습니다(28b). 에스라는 이 모든 과정에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을 고백합니다(‘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으므로’ 에스라서 7:6,9; 8:18,22,31). 일련의 사건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을 증거 합니다. 전체 단락에 사용된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명칭, 곧 ‘하늘의 하나님’(12,21,23), ‘예루살렘 성에 거하시는 하나님’(16,19). ‘에스라의 하나님’(14,17,18,25,26,28), ‘이스라엘의 하나님’(15), ‘조상들의 하나님’(27)은 이 모든 이름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인격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에, 당신의 나라의 역사에 관여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추상적인 이름이 아니라 실제적인 이름입니다. 하나님을 인간 모두 다 해아일 수 없지만, 감히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두 어울리는 이름들입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손이 자기 위에 있으므로 자신이 힘을 얻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모아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게 되었다는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손을 분명히 고백했는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손을 의식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의 손을 비울 때 하나님의 손에 의지하는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베드로전서 5:6)고 하였습니다.


학사 에스라라가 사명을 따라 움직였듯이 모든 성도들도 사명을 따라 살아가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어디 있길 바라시는 것인지,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 사역에 참여할 수 있는지를 물으면서 그 대답을 삶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학사 에스라는 세상이 준 직책과 역할이라고 해서 소홀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배후에 하나님께서 계심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빛이 들어나지 않는 일에도 묵묵히 자신의 일을 감당한 것입니다. 성도들도 어떤 일에 부르심을 받았던지 자신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내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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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07-01)


에스라의 예루살렘 귀환과 사역

에스라 7장 1-10절


 

생명력을 상실한 사람들은 외형적인 것에 집중하며, 교회도 마찬가지로 건물과 성도의 수에 의존하게 됩니다. 큰 예배당이나 많은 성도가 교회의 위대함을 착각하게 하지만, 성령 충만이 없다면 그 공동체는 허망합니다. 예루살렘에 귀환한 이스라엘도 그러한 모습을 보였고,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 에스라서 후반부(7-10장)는 이스라엘 백성의 두 번째 귀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 7년(주전 458년)에 제사장, 레위인, 일반 백성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합니다. 두 번째 귀환 사건도 첫 번째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율법에 익숙한 에스라를 통해 말씀 중심의 공동체를 세우길 원하십니다.

 

에스라에 대한 소개(1-5)

새롭게 시작한 공동체라도 시간이 흐르면 무기력해지기 쉽니다. 공동체가 무기력해지면 두 가지 양상으로 나갑니다. 먼저는 새로운 능력이 제공되지 않고 계속적으로 무기력이 지속되면 그 공동체는 자연히 소멸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지도자가 출현해서 새 공기를 주입시키면, 다시 예전에 능력 있는 공동체로 회복되어집니다.

 

1이 일 후에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왕위에 있을 때에 에스라라 하는 자가 있으니라 그는 스라야의 아들이요 아사랴의 손자요 힐기야의 증손이요 2살룸의 현손이요 사독의 오대 손이요 아히둡의 육대 손이요 3아마랴의 칠대 손이요 아사랴의 팔대 손이요 므라욧의 구대 손이요 4스라히야의 십대 손이요 웃시엘의 십일대 손이요 북기의 십이대 손이요 5아비수아의 십삼대 손이요 비느하스의 십사대 손이요 엘르아살의 십오대 손이요 대제사장 아론의 십육대 손이라(1-5)

 

7-10장은 에스라 회고(Ezra Memoir)로 알려진 단락으로 에스라서의 후반부를 구성합니다. 전반부(1-6장)가 성전 재건의 주제를 다룬다면, 7-10장은 공동체 재건의 주제를 다룹니다. 전반부의 중심인물이 스바벨이라면, 후반부는 학자 에스라입니다. 에스라서 후반부는 이스라엘 백성의 두 번째 귀환 사건으로 시작합니다(스 7:1-10). 성전 재건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상황으로 인해 신앙의 열정은 식어가고 그들은 패배의식과 좌절감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그들의 영적 침체는 신앙적인 측면을 넘어서 공동체의 분열 양상으로까지 나타나게 됩니다. 성전 재건 이후 공동체는 다시 한 번 큰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것이 에스라의 등장 배경입니다.

 

(1) 시대적 배경(1a)

 

7장부터 시작되는 에스라서의 후반부는 에스라라는 한 인물의 계보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에스라의 등장을 알리면서 본문은 ‘이 일 후에’로 시작합니다. ‘이 일 후에’에서 ‘이 일’은 바로 앞의 사건, 즉 성전 재건이 완료되고 유월절을 지켰던 일을 가리킵니다. 스룹 바벨 성전은 다리오 왕 6년(주전 515년)에 완공되었고, 에스라가 등장할 때는 아닥사스다 왕(주전 465-424년) 때입니다(스 7:1,12,21; 8:1). 그렇다면 6장과 7장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 간격(약 60년)이 존재합니다. 이때는 고레스 칙령으로 포로에서 돌아온 1차 귀환민들이 거의 다 죽고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시점입니다. 따라서 1세대 귀환민들의 신앙과 열정이 다음 세대로 전수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새로운 전기가 필요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라가 등장하였습니다. 에스라는 그의 이름처럼 귀환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보내신 도움이었습니다.

 

(2) 에스라에 대한 소개(1b-5)

 

에스라는 스라야의 아들, 아사랴의 손자, 사독의 5대손, 대제사장 아론의 16대손으로 모세의 율법에 정통한 학자(서기관) 겸 제사장으로 소개됩니다. 에스라는 예루살렘 멸망 당시의 대제사장입니다(왕하 25:18-21). 그렇다면 스라야와 에스라 사이에 적어도 120년 정도의 차이(주전 587년과 458년)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3절에는 므라욧이 아사랴의 아들로 소개되지만, 역대기 족보(대상 6:7-10)는 그 사이에 여섯 명의 이름(아마랴, 아히둡, 사독, 아히마아스, 아사랴, 요하난)을 추가로 소개합니다. 이것은 에스라서의 계보가 모든 세대를 다 제시하지 않고 개괄적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에스라의 족보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론(‘아론의 16대손’)에게까지 미칩니다(5). 이를 통해 저자는 에스라가 정통 제사장 가문으로 공동체의 개혁을 주도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춘 인물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한 사람의 족보를 16대 조상까지 거슬러서 이렇게 자세히 보도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에스라라는 한 인물에 대해 저자가 갖고 있는 특별한 관심을 반영합니다. 동시에 당시 귀환 공동체에서 에스라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2차 귀환 행렬(6-7)

종종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가 암울하고 소망이 없어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도 새로운 소망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강력한 어려움 속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그 어두움을 뚫고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는 합당한 일꾼을 찾으시며, 공동체를 인도하기에 합당한 지도자로 세우십니다.

 

6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 7아닥사스다 왕 제칠년에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6-7)

 

본문에서는 에스라가 바사 왕의 명령을 받아 이스라엘에 돌아온 대제사장임을 소개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배우고 가르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의 귀환을 기뻐하며 함께 모입니다.

 

(1) 에스라의 귀환(6)

 

6절은 에스라의 귀환을 보도합니다(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본문은 이어서 에스라를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 소개합니다(7장은 반복적으로 에스라를 학자라고 부름: 스 7:6,11,12,21). 여기에서 ‘모세의 율법’은 하나의 책으로 완성된 오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학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소페르’는 구약성경에서 ‘기록자’, ‘서기관’, ‘비서’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됩니다. 서기관(학자)은 바벨론 포로기에 생긴 새로운 직업으로, ‘율법을 기록하고 연구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페르시아 시대 ‘소페르’는 제국에서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는 관리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에스라는 페르시아 제국에서 ‘유대인 업무를 전담하는 장관’과 같은 위치에 있는 인물입니다. 익숙하다는 용어 ‘마히르’는 ‘정통하다’, ‘뛰어나다’라는 의미로 에스라가 갖고 있는 율법에 대한 전문성을 나타냅니다. 이런 면에서 에스라는 포로기 이후 성전과 율법을 중심으로 형성될 새로운 공동체 건설에 적합한 인물입니다.

 

(2) 에스라와 함께한 백성들(7)

 

본문은 아닥사스다 왕이 에스라에 대해 갖고 있었던 신뢰를 강조합니다(6,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 그리고 그 배경에 하나님의 손길이 작용하고 있음을 밝힙니다(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이전에 고레스와 다리오 왕의 마음을 움직이신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신 것입니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 7년(주전 458년)에 제2세대 귀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먼 거리를 여행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7). 본문은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었다’라고 밝힙니다. 이것은 두 번째 귀환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이루어진 것을 나타냅니다. 에스라와 함께 귀환 행렬에 동참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제사장들, 레위인들, 노래하는 자들, 문지기들, 느디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7b).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어려움에 처한 유다 공동체를 새롭게 재건하는 일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안정된 생활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로서 2세대 귀환 공동체의 주인공들입니다.

 

예루살렘 여정과 에스라의 결심(8-10)

희망과 소망이 사라져 갈 때, 공동체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다른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원음 그대로 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고, 그 말씀이 우리의 심령을 변화시키는 말씀 사건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에스라를 통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8이 에스라가 올라왔으니 왕의 제칠년 다섯째 달이라 9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10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8-10)

 

본문에서는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고 준수하며 가르치는 데 힘쓰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를 주셔서 율법을 잘 배우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을 강조합니다. 에스라는 이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준비합니다.

 

(1) 예루살렘 여정(8)

 

에스라와 그 일행들이 ‘아닥사스다 왕 7년’(주전 458년)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을 출발하여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첫째 달(아빕월)은 옛적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난 달입니다(출 12:2). 첫째달(아빕월)에 바벨론을 떠난 것은 새로운 출애굽을 상징합니다. 일행은 바벨론을 떠난 지 4개월 만에 예루살렘에 도착한 셈입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약 1,500킬로미터나 되는 먼 거리일 뿐만 아니라 매우 덥고 위험했습니다(참조. 스 8:21-22). 그렇지만 에스라 일행은 아무런 해를 받지 않고 무사히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본문은 구체적인 여정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단지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었다’고 밝힙니다(9).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었다’는 표현은 7-8장 단락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며(스 7:6,7, 28: 8:18, 22, 31), 전체를 하나의 통일된 단락으로 만듭니다. 본문은 이를 통해 에스라와 함께하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귀환 행렬 전체에게 임했음을 보여줍니다.

 

(2) 에스라의 결심(10)

 

10절은 에스라가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움을 입은 이유를 밝힙니다. 그것은 에스라가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여, 율례와 규례를 가르치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에스라는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칠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르치는 대로 살고자 했습니다. 삶으로 본을 보이는 지도자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에스라라는 인물을 주목하신 이유입니다. 이제 에스라는 율법을 통해 유다 공동체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올바로 세우고자 마음을 확고히 정했습니다(‘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본문은 이를 통해 앞으로 공동체의 회복(재건)에서 율법이 차지하게 될 중요성을 암시합니다. 당시 예루살렘 공동체가 여러 가지 문제로 위기를 경험하고 있었지만, 그 핵심은 신학적 문제에 있었습니다. 해결책은 공동체와 개인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확고히 세우는 것입니다. 에스라의 사역으로 이스라엘은 종교적으로 큰 전환점을 이루게 됩니다. 예루살렘 공동체는 토라 중심의 공동체로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제사에서 말씀으로 신앙의 중심축이 옮겨가게 됩니다. 이후 이스라엘의 종교가 토라 종교로 정착하는 데 에스라가 결정적 공헌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을 통해 His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스라는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데 헌신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에스라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실천을 통해, 개인과 공동체의 영적 회복을 이루어 나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우리 각자를 부르시어 새로운 역사를 이루길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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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06-02)


성전 건축의 완성과 유월절 의식

에스라 6장 13-22절


 

성전 건축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언약을 상징하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이곳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임재의 공간으로, 예배와 제사의 중심지 역할을 합니다. 성전은 신앙 공동체가 하나로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장소이며, 그들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성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중요한 상징적 공간입니다.

 

  • 귀환 공동체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완료하고 다리오 왕 제6년(주전 526년) 아달월 3일에 역사적인 봉헌식을 거행합니다. 그들은 성대한 성전 봉헌식을 마친 후 모세의 율법을 따라 유월절을 지킵니다. 성전 봉헌식과 유월절 의식의 거행은 이스라엘 역사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조서의 이행과 성전 건축의 완공(13-18)

이스라엘 백성이 순종하는 모습은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들의 순종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믿음과 신뢰의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순종은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역사하실 수 있는 통로가 되며,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기초가 됩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의 순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하며, 공동체의 회복과 성장을 이끄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13○다리오 왕의 조서가 내리매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신속히 준행하니라 14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으므로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따라 성전을 건축하며 일을 끝내되 15다리오 왕 제육년 아달월 삼일에 성전 일을 끝내니라 16○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기타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즐거이 하나님의 성전 봉헌식을 행하니 17하나님의 성전 봉헌식을 행할 때에 수소 백 마리와 숫양 이백 마리와 어린 양 사백 마리를 드리고 또 이스라엘 지파의 수를 따라 숫염소 열두 마리로 이스라엘 전체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리고 18제사장을 그 분반대로, 레위 사람을 그 순차대로 세워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되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하게 하니라(13-18)

 

예루살렘 성전 재건의 주제를 다루는 에스라서 전반부(1-6장)의 종결 부분으로, 성전 건축의 완공과 봉헌식을 소개하는 단락(13-18절)과 유월절을 지키는 단락(19-22절)으로 구성됩니다. 1장에서는 고레스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성전 건축을 지시한 반면, 6장에서는 페르시아 왕 다리오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성전 재건을 완성합니다(스 6:22).

 

(1) 다리오 와의 조서를 이행함(13)

 

다리오 왕의 조서에 대한 강 건너편 총독과 관리들의 반응으로 시작합니다. 다리오 왕의 조서가 내려지자 강서편의 총독과 관리들은 지체하지 않고 ‘신속히’ 왕의 명령을 시행합니다. ‘신속히 시행하다’로 번역된 아람어는 ‘오스파르나 아바두’로 12b절의 ‘신속히 행할지어다’(오스파르나 이트아비두)와 직접 연결됩니다. 이를 통해 저자는 다리오 왕의 명령이 지체 없이 그리고 정확하게 시행되었음을 강조합니다.

 

(2) 성전 건축의 완공(14-15)

 

성전 건축의 일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게 된 데는(14b,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하나님의 사람들(특히 학개와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기 때문입니다(14). 기록에 따르면, 학개는 주전 520년에 예언 활동을 했고(학 1:1; 2:10), 스가라는 주전 520년부터 518년까지 예언 활동을 했습니다(즉 1:1: 7:1). 성전 건축의 재개 연도와 두 예언자들의 활동 연대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이것은 건축의 재개에 두 예언자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성전 건축은 그로부터 약 3-5년 후인 515년(다리오 왕 6년) 12월(아달월) 3일에 완공됩니다(15).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솔로몬 성전이 파괴된 후거의 70년 만에 두 번째 성전이 완공된 것입니다(참조. 렘 25:12-14; 29:10; 1:12-17).

 

본문은 성전 건축의 일이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따른 것‘이라고 밝힙니다(14). 성전 건축은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에 따른 것이고, 다음으로 페르시아의 왕들(고레스, 다리오, 아닥사스다)의 허락과 지원에 의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전 건축의 (신적, 정치적)정당성을 밝히는 의미를 지닙니다. 여기에서 열거한 페르시아의 세 왕 중에서 아닥사스다 왕은 성전 건축과 직접 관련이 있는 인물은 아닙니다. 아닥사스다는 느헤미야를 통해 성벽을 재건하도록 조서를 내리고, 성전제도의 개혁을 도운 사람입니다(느 2:1,8). 이것으로 볼 때 에스라서는 성전 건축과 성벽 재건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의 과업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참조. 4장). 성전 건축은 성벽과 공동체 재건으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특히 성전과 성벽 건축을 도운 페르시아 왕들의 이름 앞에 ‘하나님의 명령’을 언급함으로써 성전 건축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합니다. 성전 건축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주도하시고 성취하신 역사였습니다.

 

(3) 성전 봉헌식(16-17)

 

성전이 완공되자 백성들은 성전 봉헌식을 거행합니다. 성전 봉헌식은 다리오 왕 제6년(주전 526년) 아달월 3일에 치러집니다(15). 봉헌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기타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입니다(16). 귀환 공동체의 구성원이 주로 유다와 베냐민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언급합니다. 이것은 귀환 공동체의 정체성을 역사적 이스라엘로 규명하고자 하는 의도와 관계됩니다. 이런 배경에서 회복된 성전은 포로기 이전과 이후의 이스라엘을 하나로 연결하는 기능을 합니다. 이것은 성전 봉헌식 때 귀환 공동체가 드렸던 예물 목록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속죄제물로 이스라엘 지파의 수를 따라 숫염소 12마리를 드립니다(17). 이스라엘 자손이 성전 봉헌식 때 드린 전체 제물은 속죄제 외에 수소 100마리, 숫양 200마리, 어린양 400마리, 도합 700마리입니다. 이는 솔로몬 성전 봉헌식 때 드린 제물의 양(소 2만 2천 마리, 양 12만 마리)과 비교하면 매우 적은 양으로(참조. 왕상 8:63; 대하 7:5), 포로기 이전에 비해 축소되어 있는 귀환 공동체의 위상을 반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회복된 성전을 구심점으로 귀환 공동체를 통해 이어지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4) 성전 봉사자의 조직(18)

 

귀환민들은 봉헌식에 이어 성전 예배에 필요한 조직을 편성합니다(18; 스 4:8부터 시작된 아람어 본문은 18절에서 끝남). 제의 종사자인 제사장과 레위인의 조직은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규례대로 이루어졌습니다(18b). 이것은 철저하게 율법에 충실하고자 하는 귀환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생활을 통해 토라의 백성으로 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면에서 바벨론 포로는 역사적으로 암울한 시기이지만, 신학적으로는 매우 창조적인 시기입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킴(19-22)

이스라엘의 절기는 공동체의 연합과 기쁨을 경험하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이러한 절기를 통해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절기는 그들 사이의 유대감을 강화하고, 함께 모여 예배하며 기뻐하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또한, 각 절기는 하나님의 역사와 구원의 사건을 기념하며,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19○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첫째 달 십사일에 유월절을 지키되 20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정결하게 하여 다 정결하매 사로잡혔던 자들의 모든 자손과 자기 형제 제사장들과 자기를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으니 21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과 자기 땅에 사는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속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다 먹고 22즐거움으로 이레 동안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손을 힘 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더라(19-22)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 재건 후 첫 번째 유월절을 기념하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제사를 드리고, 기쁨과 연합 속에서 절기를 지킵니다. 이로써 공동체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그들의 신앙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됩니다.

 

(1) 유월절 의식(19-21)

 

성전 봉헌식은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키는 것으로 끝맺습니다. 성전 봉헌식이 12월에 거행되었음을 감안할 때, 그로부터 약 한 달의 시간이 지난 후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다시 모인 것입니다(19).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해방을 기념하는 날로 이 시점에서 귀환공동체가 유월절을 지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과거의 유월절이 애굽에서의 구원을 기념한 것이라면, 지금의 유월절은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이라는 새로운 출애굽을 기념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유월절 양을 잡기 전의 규정에 따라 먼저 정결의식을 행합니다(20). 유월절 양을 잡는 것이 레위인의 직무는 아니었지만(출 1:6; 신 16:2), 후에 레위인들이 이 일을 전문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참조, 대하 30:17: 35:3-6).

 

유월절 의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세 부류로 소개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을 중심으로 한 귀환민들(20). 그 땅에 남아 있던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율법에 충성하는 사람들(21), 이들과 함께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이방인들입니다(21b). 본문은 그 자리에 함께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도 있었음을 밝힙니다(21).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잡혀가지 않고 남아 있던 백성들 가운데서 율법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단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이방 사람들의 문화와 종교에 동화되었던 ‘그 땅의 사람들’(‘암하아레츠’)과는 구별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은 그곳에 살던 사람들 가운데 개종한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참조, 대하 30:18-19; 민 9:14). 구약의 율법은 이방인들도 정결의식을 거친 후 유월절 의식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규정합니다(참조, 민 9:13-14). 귀환민들은 율법에 근거하여 ‘더러운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한’ 이방인도 참여하도록 한 것입니다(21b).

 

(2) 무교절 의식(22)

 

유월절 행사 이후 곧바로 무교절을 지킵니다(22). 무교절은 유월절 이후 일주일 동안 지키는 절기로, 집안의 묵은 누룩을 제거하고 새로운 수확을 준비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무교절을 지키면서 그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새 삶을 시작할 준비를 합니다. 본문은 끝으로 이 행사가 기쁨의 잔치였음을 밝히면서(22b, ‘즐거움으로 이레 동안 무교절을 지켰으니’, ‘여호와께서 즐겁게 하시고’), 축제의 분위기로 에스라서 전반부를 마무리합니다. 귀환 후 이스라엘 백성이 지킨 첫 번째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구속사에 새로운 장이 열렸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굴욕적인 바벨론 포로 시대를 청산하고 성전과 율법을 중심으로 한 거룩한 백성의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과정에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이 있었음을 강조합니다(22).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과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한 우리의 순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일깨워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도 역사하실 것을 믿으며, 우리는 항상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설교를 통해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순종과 감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하고, 공동체의 연합을 강화하는 데 기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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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06-01)


고레스 칙령과 발견과 다리오 왕의 회신

에스라 6장 1-12절


하나님께서는 역전의 명수이십니다. 사람들이 포기하고 절망할 때, 하나님은 신실한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역사하십니다. 그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은 변화와 기적을 이루어 내십니다. 결국, 믿음은 역전의 열쇠가 됩니다.

 

  • 강 서편 총독 닷드내의 요청에 따라 다리오 왕은 왕궁의 서고에서 고레스 왕의 칙령을 찾아보게 합니다. 그리고 칙령은 마침내 악메다 궁에서 발견됩니다. 고레스 왕이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허락하고 왕실의 지원을 약속한 것을 확인한 다리오 왕은 성전 건축이 효과적으로 시행되도록 추가적인 조치들을 명령합니다.

 

고레스 칙령의 발견과 내용(1-5)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시며 그들의 회복을 위해 일하십니다. 다리오 왕의 명령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는 하나님이 상황을 주관하시고, 그의 계획을 이루는 방법을 나타냅니다. 우리의 믿음과 헌신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그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1이에 다리오 왕이 조서를 내려 문서창고 곧 바벨론의 보물을 쌓아둔 보물전각에서 조사하게 하여 2메대도 악메다 궁성에서 한 두루마리를 찾았으니 거기에 기록하였으되 3고레스 왕 원년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대하여 이르노니 이 성전 곧 제사 드리는 처소를 건축하되 지대를 견고히 쌓고 그 성전의 높이는 육십 규빗으로, 너비도 육십 규빗으로 하고 4큰 돌 세 켜에 새 나무 한 켜를 놓으라 그 경비는 다 왕실에서 내리라 5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옮겼던 하나님의 성전 금, 은 그릇들을 돌려보내어 예루살렘 성전에 가져다가 하나님의 성전 안 각기 제자리에 둘지니라 하였더라(1-5)

 

아람어로 기록된 본문(1-12)은 크게 세 단락으로 구성됩니다. (1) 고레스의 칙령을 발견한 사건에 대한 보도(1-2), (2) 고레스 원년에 공포되었던 칙령(3-5), (3) 다리오 왕이 보낸 조서의 내용입니다(6-12). 다리오 왕은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의 요청에 따라 신하들을 시켜 바벨론의 왕궁 문서고에서 고레스 왕의 칙령을 찾아보게 합니다(1). 바벨론의 문서고가 아닌 메대도 악메다 궁에서 발견된 칙령에는 고레스 왕이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허락한 것과 왕실의 지원을 약속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3-5). 이 사실을 확인한 다리오 왕은 예루살렘 성전 건축이 효과적으로 시행되도록 추가적인 사항들을 명령하는데(6-12), 주위 민족들이 성전 건축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6-7), 강 건너편 사람들의 세금 중 일부를 성전 건축에 지원하는 것(8), 성전 제사에 필요한 제물을 조달하는 것(9-10) 등입니다. 다리오 왕의 조서는 명령을 어기는 자에 대한 경고로 끝을 맺습니다(11-12). 고레스와 다리오 왕의 조서는 예루살렘 성전 건축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이중적으로 확인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1) 다리오 왕의 조서(1)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의 요청을 받은 다리오 왕은 조서를 내려 바벨론의 문서 창고를 조사하게 합니다(1).

 

(2) 고레스 칙령의 발견(2)

 

메대도(메대 메디나) 악메다 궁에서 하나의 두루마리가 발견됩니다(2). 악메다 궁은 바벨론에서 북동쪽으로 약 50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곳으로, 고레스 왕이 주전 550년에 정복한 메대의 수도였습니다. 악메다 궁은 바벨론에 비해 훨씬 높은 고도에 위치해 있어 날씨가 건조하고 기후가 좋았습니다. 그래서 페르시아 왕들은 바벨론의 더운 날씨를 피하고자 이곳에 궁전을 지어놓고 여름을 보내곤 했습니다. 고레스의 칙령이 악메다 궁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고레스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칙령을 선포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고레스 칙령(‘한 두루마리’)이 바벨론의 문서 창고가 아닌 악메다 궁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이것을 찾기 위한 많은 수고가 있었음을 암시하며, 다리오 왕이 이 사안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보여줍니다.

 

3-5절은 악메다 궁에서 발견된 고레스 왕의 조서 내용을 보도합니다. 조서는 고레스 왕 원년, 즉 주전 538년에 공포되었으며, 조서의 내용은 예루살렘 성전 건축에 대한 명령(3), 성전의 규모(3b), 예루살렘 성전의 기물들을 원래 자리로 귀환시킬 것(5)에 대한 명령으로 되어 있습니다. 고레스가 세우도록 한 성전의 규모는 높이와 너비가 각각 60규빗입니다(3b). 길이에 대한 수치가 빠진 것은 필사자의 실수인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언급된 수치는 실제 솔로몬 성전의 규모(길이 60규빗: 너비 20규빗, 높이 30규빗)와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참조. 왕상 6:2). 본문을 문자대로 받아들인다면, 새롭게 건축될 성전의 규모는 솔로몬 성전의 규모를 능가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고레스는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새 성전을 원래보다 큰 규모로 제시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실제 예루살렘 성전 건축은 고레스가 의도한 규모보다 훨씬 작았다. 이것은 페르시아 왕실의 재정 상황이 악화된 것과 관계있는 것 같습니다. 고레스 왕의 조서는 성전 건축에 대한 경비를 국고에서 지원할 것을 명시합니다(4b). 국고에서 지원한다는 것은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에서 일부를 지원하거나 비용만큼 세금을 감면해주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고레스 왕의 정책은 피정복민들에게 종교적인 자유를 허용하고, 어느 정도 자치권을 허용함으로써 제국의 안정을 도모하려 한 것입니다.

 

다리오 왕의 조서(6-1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황 속에서도 그의 계획을 이루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권위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지지할 때, 우리는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공동체의 힘과 연합이 중요하며, 함께 일할 때 더 큰 성과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의 헌신이 하나님의 사역에 기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6이제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너희 동관 유브라데 강 건너편 아바삭 사람들은 그 곳을 멀리하여 7하나님의 성전 공사를 막지 말고 유다 총독과 장로들이 하나님의 이 성전을 제자리에 건축하게 하라 8내가 또 조서를 내려서 하나님의 이 성전을 건축함에 대하여 너희가 유다 사람의 장로들에게 행할 것을 알리노니 왕의 재산 곧 유브라데 강 건너편에서 거둔 세금 중에서 그 경비를 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주어 그들로 멈추지 않게 하라 9또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 곧 하늘의 하나님께 드릴 번제의 수송아지와 숫양과 어린 양과 또 밀과 소금과 포도주와 기름을 예루살렘 제사장의 요구대로 어김없이 날마다 주어 10그들이 하늘의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을 드려 왕과 왕자들의 생명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라 11내가 또 명령을 내리노니 누구를 막론하고 이 명령을 변조하면 그의 집에서 들보를 빼내고 그를 그 위에 매어달게 하고 그의 집은 이로 말미암아 거름더미가 되게 하라 12만일 왕들이나 백성이 이 명령을 변조하고 손을 들어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을 헐진대 그 곳에 이름을 두신 하나님이 그들을 멸하시기를 원하노라 나 다리오가 조서를 내렸노니 신속히 행할지어다 하였더라(6-12)

 

본문에서는 다리오 왕이 유다의 성전 건축을 지지하며, 성전 건축에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왕은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자들에게 경고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백성을 향한 보호를 나타냅니다.

 

(1) 성전 건축에 대한 방해 금지 명령(6-7)

 

고레스 왕의 칙령을 확인한 다리오 왕은 너편 총독 닷드내에게 조서를 보냅니다. 그는 조서에서 자신도 고레스 왕의 정책을 그대로 따를 것을 밝히면서, 그것이 실제로 시행될 수 있도록 추가 지시 사항을 전달합니다. 다리오 왕이 고레스 왕의 칙령에 대해 이렇게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이유는 고레스 왕에 대한 존경심 때문으로 추측됩니다. 다리오 왕은 여러 면에서 고레스의 정책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왕으로 평가됩니다. 다리오 왕의 조서는 세 가지의 명령과 경고의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다리오 왕은 강 건너편 총독들과 관리들에게 성전 건축을 방해하지 말 것을 명령합니다(6b-7). 그는 이어서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에게 유다 총독과 장로들을 도와 예루살렘 성전이 ‘제자리’에 세워지게 하라고 명령합니다(7).

 

(2) 경비를 국고에서 지원할 것이 대한 명령(8)

 

‘제자리’는 솔로몬 성전이 세워졌던 바로 그 장소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세워질 성전이 솔로몬 성전의 회복임을 의미합니다. 다리오 왕의 두 번째 명령은 건축에 소요되는 경비를 국고에서 지원하도록 하는 것인데(8), 이것은 강 건너편 총독이 거둔 세금 중 일부(왕의 재산)를 성전 건축의 경비로 사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지금까지 반대했던 사람들이 이제 성전 건축의 후원자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3) 제물 조달에 대한 협조(9-10)

 

다리오 왕의 세번째 명령은 제사에 필요한 제물을 세금에서 조달하게 하는 것입니다(9-10). 이것은 성전 건축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성전의 운영 자금을 지원하라는 의미입니다. 다리오 왕이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제물 목록(9)은 그가 이스라엘 종교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다리오 왕은 이어서 예루살렘의 성전 건축을 지원하는 이유를 밝히는데(10), 예루살렘 제사장들로 하여금 왕실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비교. 렘 29:7). 이것으로 보아 다리오 왕의 일차적인 관심은 제국의 안정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니면 다리오 왕이 고레스 왕의 칙령을 읽으면서 유다인들의 신에 대해 두려움과 위엄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참조. 스 1:2).

 

(4) 명령을 지킬 것에 대한 최종 권고(11-12)

 

다리오 왕의 조서는 내용을 변개하거나 건축을 방해하지 말 것에 대한 경고로 끝납니다(11-12). 조서에 기록된 명령을 어긴 자에게는 ‘그의 집에서 들보를 빼내고 그 위에 메어달고 그의 집은 거름더미가 되는’ 형벌이 주어질 것입니다(11). 범죄자를 ‘나무에 매다는’ 처형법은 주로 앗시리아나 페르시아 제국에서 행해지던 형벌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집이 거름더미가 되는 것’은 재산을 몰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NEB). 이런 형벌은 고대 근동에서 흉악한 범죄자를 처벌하는 방식이었습니다(참조. 에 6:31). 다리오 왕은 ‘예루살렘에 이름을 두신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해달라고 기도함으로써 이 조서를 어긴 사람을 신적 심판대 앞에 둡니다(12a). ‘예루살렘에 이름을 두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전형적인 이스라엘식 표현으로(신 12:11; 14:23: 16:2;삼하 7:13: 왕상 8:29) 다리오 왕이 이스라엘의 종교와 풍습에 대해 기본적인 이해를 갖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주위 유다인의 조언을 받아 이런 표현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 다리오 왕은 관리들에게 조서를 받는 즉시 기록된 내용대로 지체 없이 이행할 것을 촉구합니다(12b, ‘신속히 행할지어다’).

 

다리오 왕의 조서는 예루살렘 성전 건축에 대한 왕실의 전폭적인 지지를 확인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대적들의 방해로 성전 건축이 지체되었지만, 이 조서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다리오 왕의 조서는 성전 건축에 대한 유다인들의 주장을 확고하게 해주고 대적들의 방해를 차단하여 성전 건축에 박차를 가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에스라서의 문맥에서 볼 때, 유다인들이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결과였습니다(스 5:1-2).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귀환민들에게 베푸신 은혜였습니다(스 5:5). 하나님께서 페르시아 왕을 도구로 사용하시면서 뜻을 이루어가신 것입니다. 이 사건은 독자들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며,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낙심치 말고 끝까지 인내하며 기도할 것을 교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세상의 권세를 사용하십니다. 다리오 왕의 명령을 통해 유다 백성이 성전을 재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는 믿음과 헌신이 결실을 맺는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충실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는 함께 일해야 하며, 그의 계획에 참여하는 특권을 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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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05-01)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길

에스라 5장 1-17절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며,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서 겪는 고난을 통해 소중한 교훈을 주시고, 이를 통해 우리의 믿음을 더욱 깊게 하십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기도하며 인내하면,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결국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안에 있으며, 그분의 섭리를 신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대적들의 반대로 성전 건축이 중단되었지만, 선지자들(학개 스가랴)의 독려로 성전 건축이 다시 시작됩니다. 그렇기만 이번에는 또 다른 방해에 부딪치게 됩니다. 강 건너편 총독이 성전 재건 공사를 중단할 목적으로 부하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유다 지도자들의 답변을 듣고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다리오 왕에게 상소하기로 합니다.

 

공사의 재개(1-2)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적 지도자와 말씀의 가르침을 통해 서로 격려하며 공동체의 목표를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과정이 우리를 더욱 성장하게 합니다.

 

1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2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있어 그들을 돕더니(1-2)

 

본문에서는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들은 성전 건축을 재촉하며 백성을 격려합니다. 이로 인해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합니다.

 

(1)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1)

 

4:5에서 중단했던 성전 건축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본문은 특히 성전 건축에 있어 학개와 스가랴의 활약을 보도합니다.

 

(2) 학개와 스가랴의 활약(2)

 

학개와 스가랴의 선포는 즉각적인 효력을 나타냈고,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일어나서 다시 성전재건의 과업을 시작하게 됩니다(2). 이 두 사람은 성전 재건의 구심점이 되었고, 아울러 학개와 스가랴와 같은 예언자들이 백성들을 독려하며 성전 재건에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2b).

 

총독 닷드내의 조사(3-5)

회개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인정하는 과정으로, 진정한 반성과 마음의 변화를 포함합니다. 이는 잘못된 행동에 대한 후회를 바탕으로 하며,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목표로 합니다. 회개를 통해 죄에서 돌아서고 새로운 삶을 향한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은 영적인 성장과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3그 때에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다 나아와 그들에게 이르되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하기로 4우리가 이 건축하는 자의 이름을 아뢰었으나 5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으므로 그들이 능히 공사를 막지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아뢰고 그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더라(3-5)

 

본문에서는 다리오 왕의 통치 아래, 유다 백성이 성전 건축을 재개하려고 할 때, 그들에게 권한을 묻는 사자들이 나타납니다. 유다 사람들은 성전 건축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그들의 조상인 고레스 왕의 명령을 인용합니다. 이로 인해 그들의 건축 작업이 계속될 수 있도록 하늘의 하나님과 고레스의 명령이 증거로 제시됩니다.

 

(1) 성전 재건 허가에 대한 질의(3)

 

성전재건 사역이 다시 시작되는 순간 백성들은 또 다른 장애에 부딪치게 됩니다. 당시 강 건너편 지역의 총독인 닷드내는 유다인들의 성전 재건을 의심의 눈초리로 봅니다. 닷드내와 함께 언급된 스달보스내는 아마 총독 닷드내의 부하로 서기관 정도의 직책이었을 것입니다(참조. 스 4:8). 그리고 그들의 동관들은 아마도 ‘감찰관’(inspector)이었을 것입니다. 닷드내는 자기가 관할하고 있는 영지에서 성전 재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그것을 조사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더욱이 당시 페르시아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정국이었기 때문에 만약 이러한 일들을 방치하면 대대적인 반역으로 확대될 수 있었습니다. 닷드내를 비롯한 대적자들은 스룹바벨과 예수아에게 찾아와 그들이 어떤 권한으로, 혹은 누구의 허락으로 성전을 건축하는지 캐물었습니다(3b). 그리고 주동자가 누구인지 밝히라고 다그칩니다. 정황상 백성들은 이들의 방문과 질문에 상당한 위협을 느꼈을 것입니다.

 

(2) 유다인들의 답변(4)

 

닷드내의 요청에 따라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건축하는 자들의 이름을 알립니다(4). ‘건축하는 자들’은 건축의 책임자들(문맥상 스룹바벨과 예수아) 혹은 지금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3) 공사의 지속(5)

 

성전 재건에 대한 관리들의 추궁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성전 재건 작업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5).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가 자신들의 한계를 느껴 다리오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회신을 기다리기로 했기 때문입니다(5). 당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보낸 편지의 회신을 받기까지는 최소 4-5개월이 소요되었을 것입니다. 본문은 작업이 중단되지 않은 이유를 ‘하나님께서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5). 아람어 원문은 ‘하나님의 눈이 유다 장로들 위에 머물러 있었다’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살피심에 대한 은유입니다(참조. 시 121:3-4). 강 건너편 총독과 관리들은 그 공사를 당장 멈추게 하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할 권한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힘이 그들을 막아선 것입니다. 본문은 이 과정에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셨음을 강조합니다.

 

도입(6)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근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기억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 말씀에 의지해야 합니다. 또한, 공동체의 지혜를 활용하여 서로를 격려하고, 신뢰를 바탕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심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6○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인 유브라데 강 건너편 아바삭 사람이 다리오 왕에게 올린 글의 초본은 이러하니라(6)

 

닷드내는 유다인들의 당당함과 확신에 찬 태도에 위압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유다인들이 주장하는 내용에 대한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왕의 의향을 묻기 위해 편지를 보내기로 합니다. 편지는 강 건너편 총독인 닷드내와 스달보스내 및 동료 관리들이 올린 것으로 소개됩니다(6).

 

편지의 내용(7-17)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대한 확고한 근거와 정당성을 갖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줍니다. 유다 백성은 고레스 왕의 명령을 통해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며, 소통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또한, 공동체가 함께 협력하여 목표를 이루는 힘과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자세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7그 글에 일렀으되 다리오 왕은 평안하옵소서 8왕께 아뢰옵나이다 우리가 유다 도에 가서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가 본즉 성전을 큰 돌로 세우며 벽에 나무를 얹고 부지런히 일하므로 공사가 그 손에서 형통하옵기에 9우리가 그 장로들에게 물어보기를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라고 하였느냐 하고 10우리가 또 그 우두머리들의 이름을 적어 왕에게 아뢰고자 하여 그들의 이름을 물은즉 11그들이 우리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우리는 천지의 하나님의 종이라 예전에 건축되었던 성전을 우리가 다시 건축하노라 이는 본래 이스라엘의 큰 왕이 건축하여 완공한 것이었으나 12우리 조상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노엽게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갈대아 사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이 성전을 헐며 이 백성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겼더니 13바벨론 왕 고레스 원년에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하나님의 이 성전을 다시 건축하게 하고 14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금, 은 그릇을 옮겨다가 바벨론 신당에 두었던 것을 고레스 왕이 그 신당에서 꺼내어 그가 세운 총독 세스바살이라고 부르는 자에게 내주고 15일러 말하되 너는 이 그릇들을 가지고 가서 예루살렘 성전에 두고 하나님의 전을 제자리에 건축하라 하매 16이에 이 세스바살이 이르러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 지대를 놓았고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건축하여 오나 아직도 마치지 못하였다 하였사오니 17이제 왕께서 좋게 여기시거든 바벨론에서 왕의 보물전각에서 조사하사 과연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하나님의 이 성전을 예루살렘에 다시 건축하라 하셨는지 보시고 왕은 이 일에 대하여 왕의 기쁘신 뜻을 우리에게 보이소서 하였더라(7-17)

 

본문에서는 다리오 왕에게 유다 백성이 성전 건축을 하고 있다는 보고가 전달됩니다. 왕은 그들의 건축이 고레스 왕의 명령에 따른 것임을 확인하기 위해 조사를 명령합니다. 이후 고레스의 명령을 찾아 성전 건축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그들의 작업이 계속될 수 있도록 지원하라는 지시가 내려집니다.

 

(1) 인사말(7)

 

편지의 내용은 다리오 왕에게 한 문안 인사로 시작하여 현재 유다인들이 진행 중인 성전 재건에 대한 전반적인 상황을 설명합니다.

 

(2)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보고(8)

 

닷드내와 관리들이 유다에 가서 본즉 유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일로 분주하게 일하는 것을 목격했음을 밝힙니다. 닷드내는 그들이 짓고 있는 성전을 ‘크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표현하는데(8), ‘크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당시 페르시아가 통치하는 백성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의 신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단지 이스라엘의 신 야훼가 그 지역의 주(主)신임을 의미합니다. 닷드내와 관리들이 공사장을 찾았을 때, 유다인들이 감독관의 지시에 따라 돌을 떠다 성전을 짓고 나무를 날라 벽을 쌓고 있었다(8b절). 이들의 모습은 닷드내와 관리들에게 인상적이었던 것 같습니다(‘부지런히 일하므로 공사가 그 손에서 형통하옵기에’). 특히 돌과 함께 나무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성전 공사가 이미 상당 부분 진행되었음을 시사합니다.

 

(3)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의 질문(9-10)

 

공사 진행 과정을 지켜보던 닷드내와 관리들은 유다 장로들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합니다(9-10). 첫째, 누가 성전을 재건하라고 허락했는가? 둘째, 누가 성곽 공사를 마치라고 했는가? 셋째, 누가 그 공사를 책임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4) 유다 장로들의 답변(11-16)

 

닷드내와 관리들의 질문에 유다 장로들이 한 답변이 소개됩니다. 장로들은 먼저 자신들을 ‘천지의 하나님의 종’이라고 밝힙니다(11). ‘하늘의 하나님’이란 칭호는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있어서 천지의 창조주인 아후라마즈다(Ahuramazda) 신을 가리킵니다(이 글을 읽는 다리오 왕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장로들이 말한 ‘하늘의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자가 되시는 여호와를 가리키며, 여호와께서 온 땅의 주권자가 되심을 의미합니다. 이 말을 통해 장로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성전 재건 작업이 왕마저도 거스를 수 없는 신적인 권위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립니다. 유다 장로들은 이어서 자신들이 성전 재건에 착수한 배경을 설명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건축하는 성전이 옛적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솔로몬)에 의해 건축된 성전임을 밝힙니다(11). 그런데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로 인해 진노하시고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통해 그 성전을 파괴하셨다는 것입니다(12), 장로들은 나라의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가 자신들과 조상들의 죄 때문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 가운데는 온 인류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엔 자신들을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성전을 재건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신적인 정당성을 언급한 후 유다의 장로들은 고레스 원년에 있었던 사건을 언급합니다(13). 그것은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예루살렘의 성전을 재건하도록 하고, 유다 총독 세스바살을 통해 바벨론으로 가져온 성전 기물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게 한 사건입니다(참조. 스 1장), 장로들은 ‘고레스 칙령 이후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해 오고 있다’고 함으로써 자신들은 페르시아 왕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성전 재건을 중단하게 된 것은 유다인들의 의지와 상반되게 아닥사스다 왕의 명령에 의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전 재건이 반역적인 시도라는 참소에 대한 효과적인 응답입니다.

 

(5)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의 요청(17)

 

닷드내의 편지는 그가 다리오 왕에게 한 요청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것은 왕께서 직접 바벨론의 서적 곳간에서 고레스 왕의 조서를 찾아보고, 유다 장로들이 하는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보라는 것입니다. 고레스 왕은 이미 10년 전에 죽었고, 공사의 근거가 되는 칙령은 18년 전에 선포된 것입니다. 총독 닷드내와 관리들은 20여 년 전의 일을 자세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다리오 왕에게 상소하여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결함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이 구절은 부정한 상태가 단순한 육체적 문제를 넘어 영적 상태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줍니다. 또한, 회복의 과정이 필요하며, 하나님은 우리의 진정한 회개를 통해 다시 정결하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개인의 부정함이 공동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정결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러한 교훈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있게 하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세워 나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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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04-02)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세력

에스라 4장 11-24절


 

모함(謀陷)은 나쁜 계획으로 남을 어려운 처지에 빠뜨리는 행위입니다. 이는 거짓의 아비인 사탄의 방식 중 하나로, 처음에는 효과를 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진실이 드러나 모든 것이 밝혀지게 됩니다. 따라서 모함은 결국 실패하게 되는 불안정한 전략입니다.

 

  •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는 이스라엘이 자행한 과거 반역의 역사를 예로 들면서 아닥사스다 왕에게 유다인들의 성벽 재건을 중단시키도록 요청합니다. 예루살렘 성이 재건되면 유다인들은 왕에게 조공과 세금을 바치지 않을 것이며 강 건너편 영지를 잃게 될 수도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여기에 반응하여 아닥사스다 왕은 조서를 내려 유다인들의 성벽 재건 공사를 중단시킵니다.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의 편지(11-16)

거짓된 사람들은 거짓 정보를 사용해 진실을 왜곡합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의 신뢰가 흔들리고 혼란이 발생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실을 조작하여 왕의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결국,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왕국의 상황이 복잡해집니다. 르훔과 심새는 아닥사스다 왕에게 모함된 거짓 항소편지를 보냅니다.

 

11○아닥사스다 왕에게 올린 그 글의 초본은 이러하니 강 건너편에 있는 신하들은 12왕에게 아뢰나이다 당신에게서 우리에게로 올라온 유다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이 패역하고 악한 성읍을 건축하는데 이미 그 기초를 수축하고 성곽을 건축하오니 13이제 왕은 아시옵소서 만일 이 성읍을 건축하고 그 성곽을 완공하면 저 무리가 다시는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바치지 아니하리니 결국 왕들에게 손해가 되리이다 14우리가 이제 왕궁의 소금을 먹으므로 왕이 수치 당함을 차마 보지 못하여 사람을 보내어 왕에게 아뢰오니 15왕은 조상들의 사기를 살펴보시면 그 사기에서 이 성읍은 패역한 성읍이라 예로부터 그 중에서 항상 반역하는 일을 행하여 왕들과 각 도에 손해가 된 것을 보시고 아실지라 이 성읍이 무너짐도 이 때문이니이다 16이제 감히 왕에게 아뢰오니 이 성읍이 중건되어 성곽이 준공되면 이로 말미암아 왕의 강 건너편 영지가 없어지리이다 하였더라(11-16)

 

본문은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들이 아닥사스다 왕에게 상소문을 보내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공사를 중단하게 한 사건을 다룹니다. 먼저 11절부터 16절까지는 대적들의 상소문입니다. 둘째 단락인 17-22절은 아닥사스다왕이 그들의 상소문에 답하여 성전 공사 중단을 명령하는 조서의 내용입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에 따라 성벽 재건 공사는 중단됩니다(23). 끝으로 24절은 다리오 왕 2년(주전 520년)까지 성전 건축 공사가 중단되었음을 알림으로 성벽 재건에서 다시 성전 건축 사건(1-5절)으로 돌아옵니다.

 

(1) 인사말(11)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의 상소문은 인사말로 시작합니다(11b-12, ‘강 건너편에 있는 신하들은 왕에게 아뢰나이다’). 여기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강 건너편에 있는 (왕의) 신하들’이라고 밝힙니다. ‘강 건너편’(아바르 나하라)은 페르시아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유프라테스 강 서편 지역, 즉 두로와 시돈, 페니키아,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칭하는 용어입니다.

 

(2) 성읍 재건에 대한 고발(12-16)

 

이어서 대적들은 상소문에서 구체적으로 유다 백성에 대한 고발 내용을 제시합니다(11b-16). 대적자들은 ‘왕에게서 올라온 유다 사람들’이 패역하고 악한 성읍을 건축하고 있다고 모함합니다(12). ‘왕에게서 올라온 유다 사람들’은 고레스 당시의 귀환 행렬 이후 아닥사스다 왕 때 있었던 2차 귀환(주전 458년)의 무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편지에서 ‘유다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이미 그(예루살렘 성읍) 기초를 수축하고 성곽을 건축하고 있는 중’(12b)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대적들이 방해하려는 것이 성전 건축이 아닌 성벽 재건임을 암시합니다. 당시는 아닥사스다 왕(주전 464-424년)의 통치 시기이며, 성전 건축은 주전 515년에 이미 완성된 상태입니다. 저자는 성전 건축과 성벽 건축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의 사역으로 간주하는 듯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성전 건축은 성벽 재건과 공동체 재건으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대적들은 왕에게 성벽 재건을 중지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두 가지의 실제적인 이유를 제시합니다. 첫째, 성벽 재건 후 유다인들이 페르시아 정부에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납부하지 않을 것이고, 이에 따라 왕실에 손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13). 당시의 사고에 의하면, 피지배국의 백성이 주권국의 왕에게 세금을 바치지 않는 것은 반역을 의미한다. 더욱이 당시 아닥사스다 왕은 제국 이곳저곳에서 발생하는 반란을 제압하느라 힘든 상황에 있었습니다. 대적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서 성벽 건축을 저지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왕의 소금을 먹는 사람들’로서 왕이 당할 피해를 우려하여 상소문을 올린다고 말합니다(14). ‘왕의 소금을 먹는 것’은 왕의 은택을 입어 생계를 유지한다는 의미로 다른 말로 하면 ‘나라의 녹을 먹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왕에 대한 자신들의 충성심을 알리며 왕과 친밀한 관계임을 시사합니다.

둘째, 대적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예루살렘의 패역함을 입증하는 역사적인 증거를 제시합니다(15b, ‘예로부터 그중에서 항상 반역하는 일을 행하여’). 그리고 그 근거로 제시한 ‘조상들의 사기’(15a)는 이전 바벨론 시대부터 전해 온 역사 기록을 의미합니다. 당시 페르시아는 바벨론의 합법적인 계승국으로 자처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역사적인 사실을 증거로 들어 예루살렘이 근본부터 반역적인 성읍임을 알리며, 결정적인 반역의 증거로 예루살렘의 파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제시합니다(15b). 이런 상황에서 예루살렘 성읍이 중건되면,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미쳐 결국 ‘강 건너편 영지’가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넌지시 경고합니다(16). 다시 말해 왕이 즉시 성벽 재건 작업을 중단시키지 않으면, 왕의 영토의 상당 부분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는 위협입니다. 대적들의 상소문은 예루살렘 재건 공사가 내포하는 잠재적인 위험성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고발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동기, 즉 정치-경제면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뺏기지 않기 위한 탐욕에 기인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심을 마치 왕에 대한 충성심인양 포장하고 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답장(17-22)

진실이 왜곡될 때 신뢰를 잃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외부의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권력자의 판단이 항상 옳지 않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공동체의 연합과 지혜가 위기를 극복하는 열쇠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17○왕이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사마리아에 거주하는 그들 동관들과 강 건너편 다른 땅 백성에게 조서를 내리니 일렀으되 너희는 평안할지어다 18너희가 올린 글을 내 앞에서 낭독시키고 19명령하여 살펴보니 과연 이 성읍이 예로부터 왕들을 거역하며 그 중에서 항상 패역하고 반역하는 일을 행하였으며 20옛적에는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큰 군왕들이 있어서 강 건너편 모든 땅이 그들에게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다 바쳤도다 21이제 너희는 명령을 전하여 그 사람들에게 공사를 그치게 하여 그 성을 건축하지 못하게 하고 내가 다시 조서 내리기를 기다리라 22너희는 삼가서 이 일에 게으르지 말라 어찌하여 화를 더하여 왕들에게 손해가 되게 하랴 하였더라(17-22)

 

대적들의 고발장은 즉시 효과를 발휘한 것 같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의 상소문에 곧바로 답장합니다. 르훔과 심새의 상소문을 받은 후, 아닥사스다 왕은 즉시 궁중의 문서 보관소에 있는 문서들을 살펴보게 하여 그들의 주장이 사실임을 확인합니다(19). 그때 아닥사스다 왕은 문서를 통해 또 하나의 사실을 확인합니다. 그것은 옛적에 강 건너편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다스린 큰 군왕들에게 조공과 관세를 바쳤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예루살렘을 다스린 큰 군왕들’의 정체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 다윗과 솔로몬 같은 이스라엘 왕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왕들의 존재는 반역의 가능성을 언급한 대적들의 고발에 신뢰성을 더하게 했을 것입니다.

 

아닥사스다 왕 당시 페르시아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아하수에로 왕 때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있던 애굽이 반란을 꾀하다 진압됩니다. 이후 아닥사스다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주전 460년)에 애굽이 다시 페르시아에 반기를 듭니다. 이런 정황으로 인해 아닥사스다 왕은 애굽 근처에 위치한 팔레스타인 정세에 매우 민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결국 예루살렘 재건 작업을 중단할 것을 명령합니다(21b, ‘그 성을 건축하지 못하게 하고 내가 다시 조서 내리기를 기다리라’). 그렇지만 ‘조서 내리기를 기다리라’는 말은 칙령이 바뀔 수 있는 여지를 남깁니다. 이것은 문맥상 앞으로 성벽 공사에 대한 중지 명령이 철회될 것을 암시합니다.

 

공사의 중단(23-24)

진실이 항상 즉각적으로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짓 정보에 휘둘리는 왕의 모습은 나약하고 초라하게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권력자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혼란을 초래합니다. 결국, 진실과 거짓의 대결에서 진실이 지연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23○아닥사스다 왕의 조서 초본이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그의 동료 앞에서 낭독되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급히 가서 유다 사람들을 보고 권력으로 억제하여 그 공사를 그치게 하니 24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성전 공사가 바사 왕 다리오 제이년까지 중단되니라(23-24)

 

본문에서는 아닥사스다 왕의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 성전 건축이 중단되었다고 전합니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두려움과 혼란 속에 처하게 됩니다. 결국, 성전 건축은 몇 년간 중지된 채로 남게 됩니다.

 

(1) 성벽 공사 중단(23)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가 유다 땅에 도착하자, 르훔과 심새는 곧바로 행동에 옮깁니다. 그들은 곧장 예루살렘으로 달려가서 유다 사람들이 하고 있던 성벽 재건 공사를 중지시킵니다(23b, ‘권력으로 억제하여 그 공사를 그치게 하니’). ‘권력(혹은 군사력)으로 억제하다’라는 표현은 대적들의 행동이 단순한 중지의 정도를 넘어 건축 중인 성벽을 파괴하는 데까지 이르렀음을 암시합니다(참조, 느 1:3). 중단되었던 성벽 재건 공사는 후에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에 따라 느헤미야에 의해 재개됩니다(참조. 느 2:1-9).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던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아닥사스다의 마음을 움직이신 것입니다.

 

(2) 성전 공사 중단(24)

 

대적들의 방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닥사스다왕 시대의 사건에서 다시 다리오 왕 시대(주전 520년) 성전 건축의 일로 돌아옵니다(24). 그런 면에서 24절은 5절과 직접 연결됩니다(그 안의 내용인 6-23절은 일종의 삽입). 고레스 통치 기간 동안에 일어난 대적들의 반대로 성전 재건 작업이 다리오 왕 2년(주전 520년)까지 연기되고, 17년이 지나서야 다시 성전 건축을 재개할 수 있게 됩니다.

 

본문은 주전 538년 귀환한 백성들이 왜 주전 520년(다리오 왕 2년)까지 성전 재건 사역을 미루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면서 그 배경에 치밀하고 조직적인 대적들의 반대가 있었음을 밝힙니다. 결국 대적들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고레스 시대부터 다리오 왕 2년까지 17년 동안 성전 건축이 중단되는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 기간은 귀환공동체가 신앙적으로 더 강해지는 시기이며, 더 큰 역사를 위한 준비의 기간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역사에는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고,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인내와 희생이 필요함을 교훈합니다.


우리는 진실과 거짓의 갈등이 여전히 현대 사회에서도 중요한 주제임을 깨닫습니다. 거짓된 정보가 어떻게 사람들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권력자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본문은 우리가 외부의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신념을 지키며, 공동체의 연합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믿음과 지혜로 무장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진실이 결국 승리할 것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러한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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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04-01)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방해와 응전

에스라 4장 1-10절


 

사역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여러 형태로 나타납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을 추구하는 이들은 종교적 사역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며, 특정 이데올로기를 가진 집단은 신앙 기반의 활동을 위협으로 간주합니다. 또한 내부의 갈등이나 분열로 인해 사역의 진정성이 훼손될 수 있으며, 사회적 불평등이나 부정의에 맞서는 목소리를 억압하려는 세력도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역은 하나님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길을 계속해서 모색해야 합니다.

 

  • 귀환민들은 성전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대적들의 대대적인 반대에 부딪치게 됩니다. 대적들은 성전 건축에 자신들도 함께 동참할 것을 제안하지만 거절당합니다. 그 후 그들은 협박과 페르시아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는 방식으로 성전 건축을 제지하려 합니다.

 

대적의 제안을 거절한 스룹바벨(1-3)

주변의 압력이나 제안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외부의 도움이나 제안이 긍정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자신의 목표와 가치에 맞지 않는다면 단호히 거부해야 합니다. 신념과 가치를 지키는 것이 진정한 성취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신중한 판단이 필요합니다.

 

1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 함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듣고 2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하니 3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1-3)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다인 공동체는 전체를 통합할 수 있는 구심점이 필요했습니다. 귀환민들은 성전을 삶의 구심점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본문은 귀환민들이 성전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대대적인 대적들의 반대가 있었음을 밝합니다. 본문은 대적들의 반대에 아하수에로(주전 485-465년)와 아닥사스다 왕(주전 464-424년) 때 있었던 성벽 재건에 대한 방해를 포함시킵니다(6-10). 이 사건들은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활동하던 시대(고레스-다리오 왕 때)와 상당한 시간적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본문이 연대기적 순서가 아닌 신학적인 주제에 따라 성전 재건의 역사를 돌아보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1-10절은 귀환 후 성전 중심의 공동체를 세우는 일의 중요성과 이 일에 따르는 대적들의 집요한 반대를 보여줍니다. 이 본문은 문학적으로 성전과 성벽 재건의 업적을 부각시키고, 9장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되는 이방 민족과의 구별이라는 주제를 준비하는 기능을 합니다.

 

(1) 대적들의 제안(1-2)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브네 하골라)이 성전을 건축한다는 소식은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들‘의 반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포로에서 귀환한 유다 백성은 회복된 성전을 중심으로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반면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들‘은 당시 유대인들과 갈등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들을 포함하여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그 땅에 남아 있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을 ’대적‘이라 부르는 것은 후에 이들이 성전 건축을 반대하고 귀환 공동체를 핍박하는 일에 앞장섰기 때문입니다. 대적들은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자신들도 성전 건축에 동참할 것을 제안합니다(2). 그러면서 그들은 앗수르 왕 에살핫돈 시대(주전 681-669년)부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2b). 실제로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타국인들을 그 땅으로 이주시킨 앗수르 왕은 에살핫돈이 아니라 사르곤 2세(주전 722-705년)였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앗수르의 이주 정책은 얼마간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적들은 자신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명분을 내세워 성전 건축에 참여하고자 합니다. 그렇지만 열왕기서에 의하면(왕하 17:29,32-34,41), 그들의 신앙은 여호와와 다른 민족들의 신을 함께 섬기는 혼합주의 양상을 띠고 있었습니다. 대적들의 제안은 귀환 공동체가 당면한 신앙의 순수성에 대한 문제를 야기합니다.

 

(2)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거절(3)

 

대적들의 제안에 대해 스룹바벨과 예수아, 그리고 족장들은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지도자들이 그들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표면상으로는 고레스 칙령 때문이었습니다(3b). 하지만 그들의 제안을 거절한 실제적인 이유는 북이스라엘의 멸망 후 사마리아 지역에 전개된 역사적인 상황과 관련됩니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의 정책은 피정복민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다른 지역의 사람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민족적인 동질성을 와해시킴으로 정복지에서 일어날 수 있는 반란의 가능성을 차단하려 한 것입니다. 그 결과 북이스라엘과 수도 사마리아는 인종적으로뿐 아니라 종교적으로 혼합된 상태에 처하게 됩니다. 바벨론 포로기를 거치면서 종교적 순수성을 추구하는 귀환 공동체의 입장에서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전 건축에 대한 그들의 참여제안은 이런 이유로 거절되었습니다. 귀환 공동체는 비록 작고 초라해 보이지만, 정체성이 분명한 공동체로 남기를 결단한 것입니다.

 

대적들의 집요한 반대(4-10)

우리가 마주하는 도전은 신념이나 목표를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에 맞서는 지혜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며, 외부의 압력이나 비난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또한, 주변의 지지나 협력이 없을 때 목표를 이루기 어려울 수 있으므로, 공동체의 힘과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합니다. 함께 힘을 모아야 더 큰 성과를 이룰 수 있습니다.

 

4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5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 6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그들이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니라 7○아닥사스다 때에 비슬람과 미드르닷과 다브엘과 그의 동료들이 바사 왕 아닥사스다에게 글을 올렸으니 그 글은 아람 문자와 아람 방언으로 써서 진술하였더라 8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올려 예루살렘 백성을 고발한 그 글에 9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그의 동료 디나 사람과 아바삿 사람과 다블래 사람과 아바새 사람과 아렉 사람과 바벨론 사람과 수산 사람과 데해 사람과 엘람 사람과 10그 밖에 백성 곧 존귀한 오스납발이 사마리아 성과 유브라데 강 건너편 다른 땅에 옮겨 둔 자들과 함께 고발한다 하였더라(4-10)

 

본문에서는 유다 백성이 성전 건축을 재개하려 하자, 주변 민족들이 그들의 일을 방해하려고 음모를 꾸미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들은 유다 백성에게 간섭하며, 그들의 사역을 중단시키기 위해 왕에게 고소합니다. 결국, 이들은 유다 백성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다양한 전략을 사용하게 됩니다.

 

(1) 그 땅 백성들의 반대(4-5)

 

성전 건축의 제안을 거절당한 대적들(‘그 땅 백성’)은 이제 유다 사람들을 위협합니다(4,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은 이제 ‘그 땅 백성’으로 소개됩니다. ‘그 땅 백성’(암 하아레츠)은 바벨론으로 끌려가지 않고 계속해서 그 땅에 남아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이주한 사람들을 함께 일컫는 표현입니다(스 10:2,11: 비교 느 9:24; 10:30-31). 그런 면에서 사마리아인들도 ‘그 땅 백성’에 포함됩니다. ‘유다 백성’은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합니다. 당시 유다 자손이 귀환민들의 다수를 차지하며 주도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적들의 방해 공작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백성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입니다(4,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손을 약하게 하는’ 것(라파)은 불안감을 불어넣어 사기를 떨어뜨리거나 낙담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참조, 삼하 4:1; 사 13:7; 렘 6:24). 둘째, 페르시아 관리들을 뇌물로 매수하려는 시도입니다(5). 결국 그들의 방해 공작으로 성전 건축은 다리오 왕 때까지 중단됩니다(5). 대적들의 방해는 일시적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하나님의 역사는 중단되지 않습니다. 본문은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라는 표현을 통해 이들의 방해가 한시적이었음을 암시합니다.

 

(2) 아하수에로 왕 때의 대적들(6)

 

대적들의 방해 공작은 고레스 통치 이후에도 지속됩니다. 6-10절은 시기적으로 후대에 있었던 별도의 방해 공작을 보도하지만, 대적들의 반대라는 주제로 앞 단락과 연결됩니다. 본문은 성전과 성벽을 재건함에 있어 대적들의 반대가 귀환 공동체의 출발 이후 100여 년 이상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입니다. 첫 번째 사건은 아하수에로(Xerxes 1세, 주전 486-464년) 왕의 즉위 시에 있었던 대적들의 협박입니다. 대적들이 왕에게 상소문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합니다.

 

(3) 아닥사스다 왕 때의 대적들(7-10)

 

대적들의 참소는 아닥사스다 왕 때도 이어집니다(7-8). 아닥사스다의 통치 연대(주전 464-424년)는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서 활동했던 시기와 같습니다(참조. 스 7-10장).

 

비슬람, 미드르닷, 다브엘과 그의 동료들이 왕에게 상소문을 올려 유다인들을 고발하였습니다(7). 그 글은 페르시아 제국의 공용어인 아람어로 기록되었습니다(7b) 8절부터의 내용은 아닥사스다 왕 때 있었던 대적들의 참소를 보도합니다. 이 부분은 아람어로 기록된 편지의 원문으로 보입니다. 대적들의 고소는 16절까지 계속됩니다. 고소의 주동자는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로 소개됩니다(8), 르훔은 사마리아의 고위직 관료였던 것으로 보이고, 심새는 공문서를 작성하는 관리였던 것 같습니다. 이들과 더불어 페르시아의 관료들과 지주민들의 이름이 열거됩니다(디나 사람, 아바삿 사람, 다블래 사람, 아바새 사람, 아렉 사람, 바벨론 사람, 수산 사람, 데해 사람, 엘람 사람). 이들 가운데는 오스납발(앗수르바니팔, 주전 668-627년) 왕이 사마리아 지역에 정착시켰던 외국인들의 후손도 있었습니다(10). 본문은 상소한 자들을 총 열 그룹/민족으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적들의 방해 공작이 위협적이고 대대적이었음을 의미합니다.

 

귀환민들이 함께 참여하고자 하는 대적들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는 정체성을 지키고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회복된 공동체는 외부 사람들과의 경계를 분명히 할 필요성에 근거하여 그들과 인종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혼합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귀환민들의 목표는 여호와 신앙에 기초한 순수한 신앙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외부의 압력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신념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변의 제안이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우리의 목표와 가치에 맞지 않는다면 단호히 거부해야 합니다. 공동체의 힘과 협력이 필요하지만, 그 협력이 진정한 목적과 일치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인내와 지혜를 가지고 어려움을 극복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길을 따라 나아가야 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더욱 단단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짐을 경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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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03-01)


성전 재건의 시작: 믿음의 기초를 세우다

에스라 3장 1-13절


 

우리나라 민족성인 ‘빨리빨리’는 빠른 성장을 가져왔지만, 기초가 허술해 여러 면에서 불안정함을 초래합니다. 건물과 마찬가지로 기초가 든든해야만 안전하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기초가 약하면 작은 바람에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신앙에서도 기초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튼튼한 기초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 고국으로 돌아온 귀환민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다음 다시 예루살렘에 모여 번제단을 세우고 제사를 드립니다. 이어서 그들은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주도 하에 성전의 기초를 놓습니다. 성전의 기초가 놓인 장면을 지켜본 백성들은 통곡과 즐거움의 반응을 보입니다.

 

제단과 제사 회복(1-6)

신앙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제사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제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그분의 은혜를 기억합니다. 또한, 제사는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기회를 제공하여 영적 성장에 기여합니다. 결국,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이루고, 튼튼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1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지라 2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드리려 할새 3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 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4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 5그 후에는 항상 드리는 번제와 초하루와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와 사람이 여호와께 기쁘게 드리는 예물을 드리되 6일곱째 달 초하루부터 비로소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으나 그 때에 여호와의 성전 지대는 미처 놓지 못한지라(1-6)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예루살렘에서 성전 재건을 위한 첫 모임을 가지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들은 7개월째 되는 날에 모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성전 기초를 놓기 위해 기초를 쌓기 시작합니다. 백성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경배로 가득 차 있습니다.

 

(1) 사건의 배경(1)

 

에스라서는 백성들이 어떻게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되었고(1장), 귀환한 무리들이 누구였는지(2장)를 기술합니다. 그리고 이제 귀환의 주목적인 성전 재건의 주제를 다룹니다. 포로에서 귀환 후 각자의 성읍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일곱째 달에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입니다(1). 유대력으로 티스리월(양력 9-10월)로 알려진 일곱째 달은 여러 절기들(나팔절, 대속죄일, 초막절)이 모여 있어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달로 여겨졌습니다. 종교력에 의하면, 티스리월 첫째 날은 나팔절로 새해가 시작되는 날입니다(레 23:24). 그들은 귀환한 이후 각자의 성읍에 머물면서 이때를 기다렸다가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것입니다. 즉, 새해를 예배로 시작하려 한 것입니다. 그들의 모임은 지도자의 소집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이었습니다. 본문은 ‘일제히’(한 사람처럼)라는 표현을 통해 이 일에 일치된 마음으로 연합했음을 강조합니다.

 

(2) 번제단과 제사와 회복(2-3)

 

귀환민들이 예루살렘에 함께 모인 이유는 제단을 쌓기 위함이었습니다(2). 이 일에 앞장선 사람은 대제사장 예수아와 제사장들, 그리고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었습니다(2a). 즉 이 일에 있어서 지도자들이 함께 힘을 모은 것입니다. 대제사장 예수아가 스룹바벨 앞에 소개되는 것은 이 일이 제사와 관련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세스바살 대신 스룹바벨이 언급된 이유는 이때 당시 스룹바벨이 세스바살을 이어 유대 총독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이 만든 제단은 새로운 모양의 제단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에 제시된 모형을 따른 것입니다(2,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 그리고 제단을 세운 장소도 옛 제단이 있던 성전 마당이었습니다(3). 그들은 회복된 제단 위에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제사를 드리려 했습니다(2b). 무엇보다도 그들은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70년 포로 기간 동안에 얻은 소중한 교훈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이제 모든 면에서 삶의 규범이었습니다.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웠다’(3)는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함에도 불구하고 제단을 그 터에 세웠다’로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백성들이 두려워한 ‘모든 나라 백성’(아메하아라초트)은 문자적으로 ‘그 땅의 백성들’로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가나안 땅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 그 땅에 강제적으로 이주한 이방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이곳에서 자신들 나름대로 제사를 드렸던 것으로 보입니다(스 4:2). 그렇지만 귀환한 백성들이 보기에 그들의 제사는 순수하지도 합법적이지도 않았습니다. 귀환민들은 그들과 함께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살까 두려워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3) 절기와 제사(4-6)

 

귀환민들은 율법에 기록된 대로 초막절을 지켰습니다(4). 초막절은 유월절, 칠칠절과 함께 고대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 하나였습니다(레 23:34-43; 민 29:12-40). 초막절 축제는 유대력으로 7월 15일부터 시작해서 1주일 동안 계속되었고, 마지막 날에는 성회로 모였습니다. 귀환민들은 솔로몬 왕 당시 일곱째 달에 성전 건축을 기념하여 축제를 벌인 것처럼(대하 5:3), 일곱째 달에 초막절을 지킴으로써 성전 중심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기록된 대로 절기와 예물들을 ‘기쁘게’ 드렸습니다(5). 귀환민들의 삶은 철저하게 율법에 기초한 삶이었으며, 그들의 헌신은 자발적이었습니다. 비록 아직 성전이 재건되지는 않았지만, 그때로부터 절기를 지키는 것과 제사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5, ‘항상 드리는 번제와 초하루와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 6b절의 ‘그 때에 여호와의 성전 지대는 미처 놓지 못한지라’라는 표현은 새로운 시대는 열렸지만, 아직도 성전 건축의 역사는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음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7절부터 시작되는 성전의 기초 공사를 준비합니다.

 

성전 건축을 준비함(7-9)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 건축을 위해 자재를 준비하는 모습은 목표를 이루기 위한 철저한 준비와 계획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신앙 공동체 내에서 서로 돕고 협력하는 것은 필수적이며, 함께하는 힘이 더 큰 성과를 이룰 수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이러한 협력은 믿음의 여정에서도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결국, 공동체의 연합과 준비가 신앙 생활의 토대가 됩니다.

 

7이에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고 또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기름을 주고 바사 왕 고레스의 명령대로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욥바 해변까지 운송하게 하였더라 8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이른 지 이 년 둘째 달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다른 형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이 공사를 시작하고 이십 세 이상의 레위 사람들을 세워 여호와의 성전 공사를 감독하게 하매 9이에 예수아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형제들과 갓미엘과 그의 아들들과 유다 자손과 헤나닷 자손과 그의 형제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하나님의 성전 일꾼들을 감독하니라(7-9)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 건축을 위해 필요한 자재를 준비하고, 재료를 구입하기 위해 주변 이웃들과 거래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나무와 다른 자재를 가져와 성전 기초를 놓기 위해 힘을 모읍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성전의 기초 작업을 감독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일에 임합니다.

 

(1)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7)

 

귀환민들이 성전 재건을 준비하는 장면은 솔로몬의 성전 건축 과정을 연상케 합니다(대상 22장: 대하 2장). 목재를 실어 올 두로와 시돈 지방(7a)은 고대로부터 목재와 건축 기술로 유명합니다(대상 22:2,4,15). 솔로몬이 레바논에서 목재를 수입하고 두로의 히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처럼(왕상 5:6-10), 귀환민들도 이 지역에서 백향목을 조달합니다(7b). 레바논의 백향목을 예루살렘으로 운반하는 방식도 솔로몬 성전의 경우와 유사합니다(참조, 대하 2:16). 공사를 시작한 시점은 ‘예루살렘 성전에 이른 지 이 년 둘째 달’로 제시됩니다(8). ‘바벨론에서의 귀환’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 이른’ 시점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이 구절은 귀환민들이 성전 건축을 위해 자재들을 조달하기 시작한 시점으로부터 2년이 되는 시점임을 의미합니다(참조. 스 2:68). 이것은 성전 건축에 충분한 준비가 필요했음을 암시합니다. 특별히 둘째 달을 언급하는 이유는 솔로몬의 성전 건축 기사와 연계시키려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참조. 왕상 6:1; 대하 3:2).

 

(2) 기초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8-9)

 

공사를 시작한 인물은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예수아를 중심으로 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었습니다(8a). 본문은 그들 외에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 즉 일반 백성도 참여했음을 강조합니다(8b). 과거 솔로몬의 성전 건축 때보다 일반 백성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입니다. 즉, 성전 재건은 온 백성이 함께 한 것입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이십 세 이상의 레위인들을 세워 성전 공사를 감독하게 합니다(8b-9).

 

신실한 하나님을 찬양(10-13)

성전 재건의 기초를 놓는 과정에서 느끼는 기쁨은 신앙의 회복과 새로운 시작을 상징합니다. 성전 건축 과정에서 공동체가 함께 모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습은, 신앙 공동체의 연합과 협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합니다. 함께할 때 더 큰 힘과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려운 시기를 지나온 후의 회복은 더 큰 기쁨과 감사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10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11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12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13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10-13)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 기초를 놓을 때 찬양과 기쁨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악기를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성전의 기초가 놓이는 것을 축하합니다. 그러나 일부 늙은이들은 이전 성전의 폐허를 기억하며 슬퍼하는 감정이 섞입니다.

 

(1) 성전의 지대를 놓음(10-11)

 

성전 기초를 놓을 때 그들은 먼저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10).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불었고, 아삽 자손 레위인들은 제금을 들었습니다. 이 장면은 솔로몬의 성전 봉헌식을 연상케 합니다(참조, 대하 29:25-26). 10b절의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는 귀환민들이 선조들의 신앙 전통에 충실했음을 의미합니다. 제사장들과 아삽 자손 레위인들은 악기를 연주하면서 찬송합니다(11). 레위인들은 여호와의 ‘선하심’(토브)과 ‘인자하심’(헤세드)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을 확인합니다.

 

(2) 백성들의 반응(12-13)

 

포로지에서의 귀환과 예루살렘에서의 예배는 하나님의 헤세드, 곧 사랑의 결실입니다. 성전의 지대가 놓이는 모습을 보고 백성들은 상반된 반응을 보입니다. 그들 가운데 솔로몬 성전을 본 나이 많은 사람들은 대성통곡합니다(12a). 아마 그들은 옛 성전에 비해 초라한 현재 성전의 모습에 안타까워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외의 사람들은 기쁨의 함성을 지릅니다(12). 비록 인간의 눈에는 초라해 보이지만, 앞으로 이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참조, 학 2:7).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주도하에 시작된 성전의 기초공사가 완성되었습니다. 성전 터의 완공은 앞으로 귀환 공동체가 성전을 중심으로 한 신앙 공동체가 될 것을 내다보게 합니다. 저자는 이를 통해 포로 이전과 이후 역사의 연속성을 강조합니다. 새롭게 재건될 성전도 이전의 성전과 연속성을 보입니다(7-8). 즉, 이전의 성전과 유사한 방식으로 건축되고(7; 참조. 왕상 5:6-10), 이전의 제의들이 반복됩니다(10; 참조. 대하 29:25-26). 귀환 공동체에게 삶의 기준은 전과 동일하게 모세의 율법입니다(2,4). 그들은 조상들의 신앙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이를 통해 에스라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단절되지 않고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 재건을 위해 모여 기초를 놓는 모습을 통해 신앙의 기초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줍니다. 신앙의 기초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되며, 감사와 찬양으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어려운 시기에도 공동체의 힘을 통해 서로 돕고 협력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슬픔과 기쁨이 공존할 수 있음을 기억하며, 우리는 신앙의 여정을 통해 더욱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신앙의 기초를 더욱 견고히 세워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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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02-01)


본토로 돌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

에스라 2장 1-70절


 

우리나라는 가문의 역사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족보라는 것이 있습니다. 족보는 자신의 가문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문서입니다. 족보를 귀중해서 전쟁 때나 환란의 때에 먼저 챙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가문을 위대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과장해서 거짓의 내용을 꾸미거나 가짜 족보를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족보는 가족의 역사를 정확하고 분명하게 알릴 수 있어야 합니다.

 

  • 고레스의 조서를 듣고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성전 건축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귀환자들은 칠십여 년 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자들의 자손들입니다. 이들은 고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본문은 이들이 바로 새로운 역사의 주인공들이요, 회복된 이스라엘의 주역임을 밝힙니다.

 

귀환 공동체의 지도자들(1-2)

우리는 공동체의 협력과 소통이 필수적임을 보여주며,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고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신념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자세가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회복은 어려운 과정임을 인식하고 인내하며 노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돌아와 고향을 재건하는 과정을 통해 정체성 회복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1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갔던 자들의 자손들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 도로 돌아와 각기 각자의 성읍으로 돌아간 자 2곧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스라야와 르엘라야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발과 비그왜와 르훔과 바아나 등과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1-2)

 

사로잡혀간 사람들의 귀환을 알리는 1절은 예루살렘 정착에 관해 보도하는 70절과 함께 2장 전체를 감싸는 구성을 보입니다. 즉 2장 전체는 바벨론에서 유다에 있는 각자의 성읍으로 돌아온 이들이 있었음을 언급한 후에(1) 이들이 누구인지 밝힙니다(2-69). 그리고 다시 이들이 각자의 성읍에 거주했다고(70) 확인하는 도식을 보여줍니다.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명단이 우리들에게는 별로 의미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 글을 읽던 당시에 사람들에는 자부심이고 감동이었을 것입니다.

저자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바벨론에 붙잡혀 갔습니다. 바벨론에서 정착해서 안정된 생활을 했지만, 그러한 삶을 두고 약속의 땅으로 믿음의 귀환을 합니다. 이 사람들을 통해 다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요 하나님 나라를 견인해갈 일꾼들인 것입니다.

 

일반 백성들의 숫자(3-35)

우리의 삶 속에서 공동체의 회복과 정체성을 중시하며, 현대인에게도 뿌리를 찾고 서로의 연결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각 개인의 역할과 기여가 공동체의 재건에 필수적임을 상기시킵니다. 결국, 함께 협력하고 헌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과정에서의 인물과 가족 목록을 담고 있습니다.

 

3바로스 자손이 이천백칠십이 명이요 4스바댜 자손이 삼백칠십이 명이요 5아라 자손이 칠백칠십오 명이요 6바핫모압 자손 곧 예수아와 요압 자손이 이천팔백십이 명이요 7엘람 자손이 천이백오십사 명이요 8삿두 자손이 구백사십오 명이요 9삭개 자손이 칠백육십 명이요 10바니 자손이 육백사십이 명이요 11브배 자손이 육백이십삼 명이요 12아스갓 자손이 천이백이십이 명이요 13아도니감 자손이 육백육십육 명이요 14비그왜 자손이 이천오십육 명이요 15아딘 자손이 사백오십사 명이요 16아델 자손 곧 히스기야 자손이 구십팔 명이요 17베새 자손이 삼백이십삼 명이요 18요라 자손이 백십이 명이요 19하숨 자손이 이백이십삼 명이요 20깁발 자손이 구십오 명이요 21베들레헴 사람이 백이십삼 명이요 22느도바 사람이 오십육 명이요 23아나돗 사람이 백이십팔 명이요 24아스마웻 자손이 사십이 명이요 25기랴다림과 그비라와 브에롯 자손이 칠백사십삼 명이요 26라마와 게바 자손이 육백이십일 명이요 27믹마스 사람이 백이십이 명이요 28벧엘과 아이 사람이 이백이십삼 명이요 29느보 자손이 오십이 명이요 30막비스 자손이 백오십육 명이요 31다른 엘람 자손이 천이백오십사 명이요 32하림 자손이 삼백이십 명이요 33로드와 하딧과 오노 자손이 칠백이십오 명이요 34여리고 자손이 삼백사십오 명이요 35스나아 자손이 삼천육백삼십 명이었더라(3-35)

 

지도자들의 명단에 이어 일반 백성의 목록이 소개되는데, 귀환자들의 명단에서 가장 많은 지면을 차지합니다(총 33절). 전체 내용은 소개하는 방식에 따라 가문별 목록(3-20절)과 성읍별 목록(21-35절)으로 구분됩니다.

 

(1) 가문별 구분(3-20)

 

가문에 따른 소개는 바로스 자손으로 시작합니다(3). 바로스가 먼저 소개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잘 알려진 가문인 것 같습니다. 이후로 가문들의 소개는 깁발 자손(20)까지 이어지는데, 전체 인원은 총 15,604명입니다.

 

(2) 지역별 구분(21-35)

 

성읍들에 거주한 사람들의 목록은 베들레헴 사람(21)을 시작으로 스나아 자손(35)까지 총 8,650명입니다. 이들을 지명에 따라 기록한 이유는 그들의 가계를 정확하게 밝힐 수 없거나 족보가 부정확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본문은 지도자들의 이름과 더불어 일반 백성의 목록을 제시함으로 성전 재건과 공동체 회복에 그들의 참여가 중요했음을 밝힙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36-42)

각 개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또한, 계보와 전통의 중요성을 통해 신앙의 연속성과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함을 일깨웁니다. 결국, 현대인도 자신의 역할을 소중히 여기고 공동체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36○제사장들은 예수아의 집 여다야 자손이 구백칠십삼 명이요 37임멜 자손이 천오십이 명이요 38바스훌 자손이 천이백사십칠 명이요 39하림 자손이 천십칠 명이었더라 40○레위 사람은 호다위야 자손 곧 예수아와 갓미엘 자손이 칠십사 명이요 41노래하는 자들은 아삽 자손이 백이십팔 명이요 42문지기의 자손들은 살룸과 아델과 달문과 악굽과 하디다와 소배 자손이 모두 백삼십구 명이었더라(36-42)

 

본문에서는 제사장과 그 자손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제사장이 성전에서 수행할 역할과 그들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기여합니다. 또한, 제사장 계보의 확인은 공동체의 정체성과 신앙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임을 보여줍니다.

 

(1) 제사장들(36-39)

 

제사장 중에는 가장 먼저 ‘예수아의 집 여다야 자손’의 숫자가 소개됩니다(36). ‘예수아의 집’으로 소개되는 것으로 보아 ‘여다야 자손’은 대제사장 예수아가 속했던 가문인 것 같습니다. 제사장들의 목록은 다윗 시대 24개의 가문과 달리 4개의 가문(여다야 자손, 임멜 자손, 바스홀 자손, 하림 자손)만 언급됩니다. 이것은 제사장들 중 일부만 귀환 길에 올랐음을 의미합니다. 다른 제사장 가문들은 훗날 귀환한 것으로 보입니다(참조. 스 8:2-3). 귀환한 제사장들의 총 숫자는 4,289명으로 전체 인원의 약 10분의 1에 해당합니다.

 

(2) 레위인들(40-42)

 

제사장에 이어 레위 사람들의 목록은 세 부류로 소개됩니다(40-42).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을 레위 사람들과 별도로 소개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분명하게 레위인으로 분류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비교, 느 11:19: 12:25; 9:17-32; 26:1-19). 레위인들의 전체 숫자는 431명으로 제사장의 숫자에 비해 매우 적은 숫자입니다. 이것은 레위 자손들이 예루살렘 귀환에 소극적이었음을 반증합니다(참조, 스8:15).

 

성전의 일꾼들(43-58)

각자의 역할이 공동체의 재건에 필수적임을 강조하며, 현대인에게 자신의 소명과 책임을 인식해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신앙의 전통과 계보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공동체의 연속성과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웁니다. 결국,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헌신하며 함께 성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43○느디님 사람들은 시하 자손과 하수바 자손과 답바옷 자손과 44게로스 자손과 시아하 자손과 바돈 자손과 45르바나 자손과 하가바 자손과 악굽 자손과 46하갑 자손과 사믈래 자손과 하난 자손과 47깃델 자손과 가할 자손과 르아야 자손과 48르신 자손과 느고다 자손과 갓삼 자손과 49웃사 자손과 바세아 자손과 베새 자손과 50아스나 자손과 므우님 자손과 느부심 자손과 51박북 자손과 하그바 자손과 할훌 자손과 52바슬룻 자손과 므히다 자손과 하르사 자손과 53바르고스 자손과 시스라 자손과 데마 자손과 54느시야 자손과 하디바 자손이었더라 55○솔로몬의 신하의 자손은 소대 자손과 하소베렛 자손과 브루다 자손과 56야알라 자손과 다르곤 자손과 깃델 자손과 57스바댜 자손과 하딜 자손과 보게렛하스바임 자손과 아미 자손이니 58모든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이 삼백구십이 명이었더라(43-58)

 

43절부터 58절까지는 성전의 일을 도왔던 사람들을 열거합니다. 성전에서 봉사할 일꾼들, 특히 제사장과 레위인의 자손에 대한 목록이 나열됩니다. 이 구절은 제사장과 레위인이 부족한 상황을 나타내며, 그들의 계보와 자격을 확인하는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결국, 이는 성전 재건과 예배의 회복을 위한 기초 작업으로 해석됩니다.

 

(1) 느디님 사람들(43-54)

 

먼저 느디님 사람들의 목록으로 35명의 이름들이 언급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이름들 가운데 많은 경우는 히브리식이 아닌데(시하[43], 하수바[43], 르신[48], 바르고스[53], 시스라[53]등), 이것은 그들의 이방적인 출신 배경을 암시합니다.

 

(2)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들(55-58)

 

55절의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들’은 솔로몬 당시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던 이방인의 후손들(참조, 왕상 9:20-21)이었으나 훗날 느디님 사람들에 동화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족보가 불분명한 사람들(59-63)

신앙과 사명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자신의 역할에 대한 책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줍니다. 또한, 공동체 내에서 신뢰와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각자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일깨웁니다. 결국, 우리는 자신의 뿌리를 알고,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59○델멜라와 델하르사와 그룹과 앗단과 임멜에서 올라온 자가 있으나 그들의 조상의 가문과 선조가 이스라엘에 속하였는지 밝힐 수 없었더라 60그들은 들라야 자손과 도비야 자손과 느고다 자손이라 모두 육백오십이 명이요 61제사장 중에는 하바야 자손과 학고스 자손과 바르실래 자손이니 바르실래는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의 딸 중의 한 사람을 아내로 삼고 바르실래의 이름을 따른 자라 62이 사람들은 계보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하므로 그들을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 63방백이 그들에게 명령하여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 하였느니라(59-63)

 

귀환민들 가운데는 델멜라, 델하르사, 그룹, 앗단, 임멜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59). 여기에 소개된 지명들은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의 정착지로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들은 조상의 가문과 선조를 밝힐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6). 이들 가운데는 제사장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하바야 자손, 학고스자손, 바르실래 자손들입니다(61). 이들에게는 성전 제의가 더렵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제사장 직무가 정지되었습니다(62). 방백(유다 총독 세스바살?)은 우림과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들이 지성물을 먹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63). 에스라서가 족보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이 시기 공동체 안에 만연되어 있던 이방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것과 관계됩니다. 귀환민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순수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자 했습니다.

 

귀환민들의 총수와 족장들의 예물(64-69)

공동체의 회복과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각 개인의 기여가 공동체의 발전에 필수적임을 강조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서로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함께 협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며, 이는 공동체를 더욱 강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뿌리를 알고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우리는 함께 성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64○온 회중의 합계가 사만 이천삼백육십 명이요 65그 외에 남종과 여종이 칠천삼백삼십칠 명이요 노래하는 남녀가 이백 명이요 66말이 칠백삼십육이요 노새가 이백사십오요 67낙타가 사백삼십오요 나귀가 육천칠백이십이었더라 68○어떤 족장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 터에 이르러 하나님의 전을 그 곳에 다시 건축하려고 예물을 기쁘게 드리되 69힘 자라는 대로 공사하는 금고에 들이니 금이 육만 천 다릭이요 은이 오천 마네요 제사장의 옷이 백 벌이었더라(64-69)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 그들의 가족과 재산을 세부적으로 기록합니다. 이 구절은 전체 인구가 약 4만 명에 달하며, 그들 중 일부는 제사장과 레위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를 통해 공동체의 회복과 재건을 위한 기초가 마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1) 귀환민들의 총수(64-67)

 

귀환민들의 숫자는 온 회중 42,360명, 그 외에 남종과 여종 7,337명, 그리고 노래하는 남녀 200명입니다(총 49.897명). 실제 목록에 기록된 사람들의 숫자(2-42, 58, 60절)는 29,818명으로, 64절의 숫자와 차이가 납니다. 아마도 42,360명에는 어린이, 여성, 유다와 베냐민 이외 지역의 주민들도 포함된 것으로 보입니다. 귀환민들이 함께 가지고 온 말, 노새, 낙타, 나귀와 같은 가축들(66-67)은 그들이 경제적으로 윤택했음을 암시합니다.

 

(2) 족장들의 예물(68-69)

 

이것은 또한 출애굽 사건을 연상케 합니다(출 12:35-36).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 터에 이르자 족장들 가운데 일부는 성전 건축을 위한 기부금을 드립니다(68). 그 액수는 금이 61,000다릭(514kg), 은이 5,000마네(2,850kg), 그리고 제사장의 옷이 100벌로 엄청난 액수였습니다(69). 본문은 이 일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밝힙니다(68, ‘예물을 기쁘게 드렸다’).

 

귀환민들의 예루살렘 정착(70)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에서 성전 건축을 위해 필요한 자원을 헌납하고,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세우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이는 현대인에게 공동체의 재건과 신앙의 회복을 위해 헌신과 자원봉사가 필수적임을 일깨워줍니다. 또한, 공동체의 목표를 위해 개인이 기여할 때,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교훈을 줍니다. 결국, 우리는 서로를 위해 헌신하며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70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백성 몇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고 이스라엘 무리도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라(70)

 

2장의 마지막은 온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정착을 보고합니다(70). 본문은 이를 통해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셨던 땅과 후손의 약속이 단절되지 않았음을 밝히며(참조. 창 12:1-3), 앞으로 이들을 그루터기 삼아 그 약속을 성취시킬 것을 내다봅니다. 귀환자들의 명단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을 건축한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를 보이기 위한 의도로 작성된 것 같습니다. 저자에 의하면 이들이 바로 새로운 역사를 이룬 주인공들이요. 회복된 이스라엘의 주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에서 해방하시고, 그들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헌신과 충성을 통해 역사하시며, 공동체의 회복을 이루어가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기억하고, 함께 힘을 모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끝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항상 함께하시며, 그분의 계획을 이루어가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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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01-01)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

에스라 1장 1-11절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확장해야 합니다. 이 부르심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필요한 것을 예비하시고,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바벨론 70년 포로 생활이 고레스 왕의 조서를 통해 끝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새로운 장이 열렸음을 의미합니다.

 

고레스 칙령(1-4)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정하신 때에 계획대로 놀라운 일을 진행하셨습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때와 상황을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에서는 부조리한 상황으로 무력한 우리를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1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2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3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4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 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하였더라(1-4)

 

에스라서는 고레스가 바사(페르시아) 왕이 된 원년(주전 538년)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시작합니다. 고레스는 왕으로 등극하면서 바벨론에 잡혀 왔던 각 나라 포로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 조서를 내립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1) 예언의 성취(1)

 

고레스 원년은 바벨론에 이어 페르시아 제국이 출발한 해입니다. 에스라서는 이 귀환을 예레미야 선지자가 선포했던 예언의 성취로 간주합니다(1a). 예레미야는 바벨론이 얼마 동안 여러 나라들을 지배한 후 다른 세력에게 멸망당할 것을 예언했습니다(렘 50:9과 51:11은 이를 ‘메데의 왕’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70년이 차면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에서 돌아오게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렘 25:11-12; 29:10).

예레미야가 선포한 70년이라는 햇수에 관하여는 세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Longman III). 첫째, 단순히 충분한 시간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숫자(7×10)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둘째, 다니엘 1:1-2과 역대하 36:57에 근거하여 여호야김 3년 (주전 605년)부터 538년까지 대략 70년으로 보는 것입니다. 셋째, 성전 파괴(주전587년)부터 성전 재건(주전 516년) 때까지 70년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70년의 시간이 차자, 메대-페르시아의 왕 고레스가 칙령을 내려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을 허락합니다.

 

본문은 이 사건을 ‘여호와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신 것’으로 해석합니다(1b).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도구로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고토로 돌아오게 한 것입니다(이사야는 고레스를 ‘여호와의 목자,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부른다[사 44:28; 45:1]). 고레스의 증장과 이스라엘의 귀환은 세계 역사를 주관하시는 여호와의 개입이었습니다.

 

(2) 성전 건축에 대한 명령과 남아 있는 자의 역할(2-4)

 

본문은 조서의 내용을 보도합니다(2a;.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비고, 6:3-5[아람어 버전]). 고레스의 조서는 예루살렘 귀환과 성전 건축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약속의 땅으로의 귀환을 손꼽아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레스의 칙령은 복음(기쁜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고레스는 먼저 자신이 내린 칙령의 배후에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이 자리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하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고레스는 온 우주의 주권자가 되신 여호와가 자신에게 세상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고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명령하셨음을 밝힙니다. 고레스는 여호와가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데(3b), 이것은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라는 고대 근동의 사상을 반영합니다. 하나님의 집이 세워질 예루살렘은 온 우주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고레스는 이어 남아 있는 백성들의 책임을 명시합니다(4). ‘남아 있는 백성’은 원래 다른 곳으로 잡혀가지 않고 그 땅에 생존해 있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왕하 25:11; 렘 24:8). 그러나 이곳에서는 바벨론에 끌려와 살고 있는, 즉 바벨론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북이스라엘 백성은 앗시리아 지역으로 끌려갔고(왕하 18:11), 유다 백성 중 일부는 바벨론으로 끌려왔습니다(대하 36:20). ‘남은 자들’의 역할은 성전 건축에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고, 성전 제의에 사용될 예물을 공급하는 것입니다(4b).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신 여호와가 이번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움직여 성전 건축의 과업을 이루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5-11)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일이 수많은 세월이 지나도, 반드시 실현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할 때, 하나님께서 약속을 잊지 않고 계셨습니다. 이제 바벨론 포로에서도 70년 동안 약속하신 후에 그 약속을 성취하고 계심을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5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6그 사면 사람들이 은 그릇과 금과 물품들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그 외에도 예물을 기쁘게 드렸더라 7고레스 왕이 또 여호와의 성전 그릇을 꺼내니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신당에 두었던 것이라 8바사 왕 고레스가 창고지기 미드르닷에게 명령하여 그 그릇들을 꺼내어 세어서 유다 총독 세스바살에게 넘겨주니 9그 수는 금 접시가 서른 개요 은 접시가 천 개요 칼이 스물아홉 개요 10금 대접이 서른 개요 그보다 못한 은 대접이 사백열 개요 그밖의 그릇이 천 개이니 11금, 은 그릇이 모두 오천사백 개라 사로잡힌 자를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갈 때에 세스바살이 그 그릇들을 다 가지고 갔더라(5-11)

 

에스라는 고레스의 조서를 소개하면서 신실하신 하나님의 주권이 모든 열방에 미치고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는 하나님께 감동을 받은 자들에 의해 성취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동에 ᄄᆞ라 섬기는 자들은 오히려 섬길수록 더 힘이 나고 더 큰 기쁨을 누립니다.

 

(1) 귀환한 무리(5)

 

고레스의 조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의 삶에 순응해 척박한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꺼렸을 것이며, 그곳에 그대로 눌러앉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수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감동시키셨기 때문입니다. 고레스를 감동시키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을 감동시키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국으로 돌아가 성전을 건축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일어나서 귀환 공동체를 구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유다와 베냐민의 족장들, 제사장과 레위인들, 그리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백성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5). 유다와 베냐민 지파 그리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후에 귀환 공동체의 중심을 구성하게 됩니다.

본문은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이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자발적인 운동이었음을 밝힙니다. 자신들이 오랫동안 정착한 삶의 터전을 떠나 폐허가 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려 하였습니다.

 

(2) 주변 이웃들과 고레스의 지원(6-8)

 

바벨론에 거주하는 유다 백성의 이웃들도 물질로 귀환민들을 돕습니다(6). 각종 기물들과 예물로 귀환민들을 지원한 사면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정착촌 주위에 살고 있던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이 장면은 모세 시대 출애굽 사건을 연상케 합니다(출 12:35-36).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사람들의 물품으로 성막을 지음같이, 귀환민들은 바벨론 사람들이 공급한 물품으로 성전을 재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이일에 동참합니다(6, 참조. 출 25:1-2; 35:21-29). 이스라엘 백성을 고국으로 돌려보내면서, 고레스는 옛적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성전 기물들을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냅니다(7). 성전의 기물들은 창고지기(재무장관) 미드르닷을 통해 유다 총독(나시) 세스바살에게 넘겨집니다(8).

 

유다 총독으로 소개된 세스바살의 정체에 대해서는 주석가들 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페르시아의 관리로 보기도 하고, 유다 지도자로 보기도 합니다(스 5:16에 근거하여 스룹바벨과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8절에서 ‘총독’으로 번역된 ‘나시’는 구약성경에서 부족의 지도자를 가리킵니다. 혹자는 세스바살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여호야긴의 넷째 아들 세나살과 동일 인물로 봅니다(참조. 대상 3:17-18). 그렇다면 세스바살에 대한 언급은 끊겼던 다윗 왕조의

회복을 암시한다. 그러나 일마 지나지 않아 유다 총독의 자리는 스룹바벨에게 넘이간다(참조. 학 1:1; 스2:2; 3:2; 느 12:1). 이사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의기구들을 메고 포로에서 돌아올 것을 예언했는데(사52:11-12), 고레스 왕을 통해 싱전의 기물이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오게 된다. 문맥상 성전 기물들의 복귀는 앞으로 있게 될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을 예고한다.

 

(3) 성전 그릇들의 목록(9-11)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빼앗아 간 다양한 기구들이 반환됩니다. 고레스 왕은 미드르닷을 통해 세스바살에게 건넨 성전 기명들은 대접들을 포함하여 모두 5400개를 돌려줍니다(11a). 하나님꼐서는 당신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성전의 기물들도 다시 제자리로 돌려보내셨습니다.

여기에서 성전 기명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전의 성전(솔로몬 성전)과 제2성전(스룹바벨 성전)의 연속성을 강조하려는 의도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성전의 기물은 과거의 성전과 앞으로 세워질 성전을 연결하는 기능을 합니다. 이를 통해 에스라서는 스룹바벨 성전의 합법화와 귀환 공동체의 정통성을 강조합니다. 세스바살은 귀환민들의 대표자로서 ‘사로잡힌 자들’을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갑니다(11b). ‘데리고 가다’로 번역된 ‘헤엘라’는 귀환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암시합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다’라는 서술은 ‘애굽 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나왔다’(출 33:1)와 유사한 구문입니다. 이것은 이 사건이 또 하나의 출애굽 사건임을 의미합니다(비교, 창 50:24; 출 3:8, 17; 33:1), 바벨론으로부터 이스라엘의 귀환은 또 하나의 출애굽 사건입니다. 첫 번째 출애굽의 목적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었듯이(출 9:1), 바벨론으로부터의 귀환 목적도 예루살렘에 성전 중심의 신앙 공동체를 세우는 것입니다(4).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사람들로부터 물품을 가지고 나온 것처럼(출 12:36), 이번에도 역시 은금을 비롯한 성전의 기물들을 가지고 나옵니다(5-11). 무엇보다도 출애굽 사건처럼 바벨론으로부터의 귀환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의 완전한 성취는 미래적인 차원으로 유보됩니다.


고레스 왕을 주권적으로 사용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안팎의 모든 상황을 당신의 뜻대로 다스리십니다. 또 우리의 열악한 상황과 부족함을 풍성한 은혜로 채우셔서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동참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위축되지 말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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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00-01)

 


에스라 개론


 

 

1. 에스더의 표제

 

히브리 성경 원전에서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원래 한 책으로 존재했으며, “에스라”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1448년 불가타역에서 두 책으로 나뉘어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70인역에서는 이를 제2에스드라스와 제3에스드라스로 나누었고, 제1에스드라스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발췌문을 포함한 계시적인 책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제롬이 처음으로 이 두 정경에 “에스라”와 “느헤미야”라는 이름을 붙여 오늘날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는 70인역의 제1에스드라스를 제3에스드라스로 명명하며 이를 계시의 책으로 분류했습니다.

 

2. 에스더의 저자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역대서와 문학적 연속성을 가지며, 같은 저자에 의해 쓰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에스라가 주요 저자로 언급되며, 느헤미야는 저작을 마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자는 스룹바벨 시대와 자신의 시대의 공적 자료를 활용하였고, 느헤미야의 기록도 참고한 것으로 보입니다. 느헤미야 12장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이름은 B.C. 400년 경에 해당하여 이 시기에 쓰였음을 나타냅니다.

 

에스라는 율법 학사로서 그의 백성이 거룩한 글을 익히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사건을 기록하는 데 있어 공적 기록, 조서, 편지 등 다양한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에스라서의 일부가 아람어로 씌어진 것은 과거에 비해 나중에 기록되었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현재는 그 근거가 약해진 상황입니다. 페르시아 제국 내에서 아람어 사용이 보편화되었고, 에스라와 같은 학자는 두 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아람어는 공용어로 널리 사용되었으며, 독자들이 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기 때문에, 에스라의 저자는 아람어 자료를 히브리어로 번역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3. 에스라의 역사적 배경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바벨론 포로 직후의 유대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예루살렘의 중건과 관련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라는 스룹바벨의 지도 아래 유대인들이 돌아오는 과정, 성전 재건의 시작과 희생 봉사의 재확립 등을 다루고 있으며,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과 관련된 활동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두 책은 약 60년의 공백 기간이 있으며, 그 사이의 사건들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의 통치 하에 유다로 돌아와 율법에 따라 행정을 재조직했지만, 그 과정에서도 10년 이상의 공백이 존재합니다. 느헤미야는 이러한 공백을 메우며, 정치적, 사회적 안정성을 구축하고 성벽을 재건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 아래에서 이들은 유대인들의 회복과 성전 재건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고레스 왕은 그들의 귀환을 허락하고 성전 재건을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사마리아인들의 방해와 내부의 적대감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결국, 느헤미야는 두 차례 총독으로 임명되어 유대 공동체를 재건하는 데 기여하며, 향후 유대 사회의 기초를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신앙생활을 재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4. 에스라의 주제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유대인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인데, 그것에 의하여 유대인들은 영원한 목적과 협력할 수 있는 또 한번의 기회를 얻게 되었고, 하나의 나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권리를 증명하게 되었다. 더우기이러한 기록은 선지자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예언들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보여주며, 다니엘서 8, 9장의 예언들이 역사적 사실에 완전하게 부합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근원 자료를 제공해 준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일련의 교훈적 예화들을 통하여, 어떻게 소수의 백성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신실하며, 이기심 없고, 두려움 없이 굳은 지도자들에 의하여 하나님을 위한 위대한 사업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이 책들은 많은 교훈과 실수 없는 하나님의 지도하심을 믿도록 고양시키는 많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5. 에스라의 개요

 

Ⅰ. 고레스의 석방령과 스룹바벨의 지도 아래의 귀환 1:1-4:5, 24

1. 고레스의 칙령 1:1-11

(1) 조서의 내용 1:1-4

(2) 유대인들이 부름에 응함 1:5, 6

(3) 고레스가 성전 기명들을 회복시킴 1:7-11

 

2. 포로로부터 귀향한 자들의 명단 2:1-67

(1) 지도자들 2:1,2

(2) 평민들 2:3-35

(3) 성전 종사자들 2:36-63

(4) 온 회중의 합계 2:64

(5) 노비, 노래하는 남녀, 짐 싣는 짐승들 2:65-67

 

3. 매일 제사의 회복, 성전의 기초를 놓음 2:68-3:13

(1) 새 성전을 위한 예물 2:68, 69

(2) 돌아온 자들의 거처 2:70

(3) 제단의 재건과 매일 제사의 회복 3:1-6

(4) 물자와 인부들을 위한 계약을 맺다 3:7

(5) 새 성전의 기초를 놓음 3:8-13

 

4. 건축이 어려움 가운데서도 중단될 때까지 진행됨 4:1-5, 24

(1) 사마리아인들이 도움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함 4:1-3

(2) 일을 방해하려는 적들의 노력 4:4, 5

 

Ⅱ. 아하수에로 초기에 유대인을 해치려는 시도들 4:6

 

Ⅲ. 아닥사스다가 예루살렘 성벽을 짓는 것을 중단시키다 4:7-23

1. 사마리아의 비슬람이 아닥사스다에게 보내는 편지 4:7-16

2. 사마리아인들로 하여금 일을 중단시키게 하는 아닥사스다의 답변 4:17-22

3. 사마리아인들이 권력으로 역사를 중단시키다 4:23

 

Ⅳ. 다리오 Ⅰ세때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하여 건축을 마침 5:1-6:22

1. 학개와 스가랴가 성전의 역사를 회복시키게 하다 5:1, 2

2. 닷드내의 예루살렘 방문 5:3-17

(1) 닷드내의 방문과 장로들과의 회담 5:3-5

(2) 닷드내가 다리오에게 보내는 편지 5:6-17

 

3. 다리오의 조서 6:1-12

(1) 고레스의 조서가 악메다에서 발견되다 6:1, 2

(2) 고레스의 조서의 내용 6:3-5

(3) 다리오의 닷드내에게 내린 지시 6:6-12

 

4. 성전이 완성되고 봉헌되다 6:13-22

(1) 닷드내가 유대인을 도움 6:13

(2) 새 성전이 완성됨 6:14, 15

(3) 새 성전의 봉헌 6:16-18

(4) 유월절의 잔치 6:19-22

 

Ⅴ. 아닥사스다 1세의 조서와 에스라의 지도 아래의 귀환 7:1-10:44

1. 아닥사스다의 조서 7:1-28

(1) 에스라의 족보 7:1-5

(2) 귀환에 대한 간단한 설명 7:6-10

(3) 조서의 내용 7:11-26

(4) 에스라의 감사의 표현 7:27, 28

 

2. 바벨론으로부터 귀환 8:1-36

(1) 귀환하는 포로의 명단 8:1-14

(2) 아하와에서의 모임과 레위인들의 간청 8:15-20

(3) 아하와에서 여행을 위해 준비 8:21-30

(4) 예루살렘에 도착함과 선물을 드림 8:31-36

 

3. 에스라의 개혁 9:1-10:44

(1) 유다에서 이방인과 결혼하는 것에 대한 에스라의 실망과 그의 기도 9:1-15

(2) 지도자들과 평민들이 이방 부인들과 기꺼이 헤어짐 10:1-17

(3) 반역자들의 명단 10: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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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03-01)


구별하여 제사장으로 세워진 레위인

민수기 3장 1-13절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지만물을 얘기할 때 ‘코스모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주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 의미 안에는 질서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시면서 무질서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질서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또한 우리의 모든 영적인 삶에도 그 질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창조하시고 질서를 주신 하나님을 항상 경배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 민수기 3-4장은 레위인들에 대한 인구조사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레위 지파의 족보와 각 가문들 그리고 그들의 직무를 소개합니다. 또한 그들의 각 가문별 인구가 정확히 조사된 뒤 진영 내에서의 위치를 배정받습니다. 이러한 상세한 레위 지파에 대한 설명은 그들이 성막 봉사자들로서 얼마나 중요한 직무를 부여 받았는지 알 수 있게 합니다. 레위인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들을 대신해서 선택되어 하나님께 봉헌된 사람들입니다.

 

아론의 아들들(1-4)

불경건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을 추종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경건은 자신의 생각과 방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주관적 생각을 좇아 행동한 적은 없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불이 아닌 다른 불을 사용하여 멸망 받은 불경건한 아론의 아들들을 소개합니다.

 

1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와 말씀하실 때에 아론과 모세가 낳은 자는 이러하니라 2아론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장자는 나답이요 다음은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니 3이는 아론의 아들들의 이름이며 그들은 기름 부음을 받고 거룩하게 구별되어 제사장 직분을 위임 받은 제사장들이라 4나답과 아비후는 시내 광야에서 여호와 앞에 다른 불을 드리다가 여호와 앞에서 죽어 자식이 없었으며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그의 아버지 아론 앞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였더라(1-4)

 

창세기의 주요한 구조적 특징을 이루는 “이것은 ~의 족보니라”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천지창조로부터 이스라엘 열두 지파까지를 연결하는 핵심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구원의 초점을 좁혀가는 데 있는데, 열두 지파 중에 아론과 제사장의 직무를 족보 양식에 담아둔 것은 열두 지파들 중에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제사장의 직무를 통해 더 구체화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론과 모세의 족보’라고 표현한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족보를 언급하지만, 실제로는 아론은 물론이고 모세의 족보에 거의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다른 경우에서 모세와 아론에 대한 언급은 일관되게 모세가 중심이고, 언급하는 순서를 바꾸는 경우도 많지 않습니다. 오직 제사장의 족보를 다룰 때만 아론이 먼저 나타나기 때문에 실제로 민수기 3장은 아론으로부터 시작하는 제사장의 가계가 하나님의 큰 계획의 중요한 성취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본문의 관심은 대제사장의 가계를 이어가는 제사장 가문에 있기 때문에 네 아들 이후 아론의 자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대상 23:13-16). 아론의 네 아들들은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그리고 이다말입니다. 아론의 아들들은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도록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제사장의 직무를 위해 위임을 받은 이들인데, 제사장의 손을 채운다는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아론의 아들들의 손에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할 수 있는 권위를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중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장으로 위임받은 이후 다른 불을 드리다가 여호와 앞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다른 불’이 어떤 의미인지 정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성소에서 사용되는 모든 불은 제단에서 취한 불이어야 하기에, 다른 불은 아마도 제단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취한 불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이후, 아론의 가계를 잇는 제사장 가문은 오직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통해 이어집니다.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두 제사장 가문의 경쟁 관계가 이어지다가, 최종적으로는 엘르아살의 후손인 사독 계열에서 대제사장의 직무를 이어갑니다. 하지만 이다말의 후손이었던 엘리 제사장과 그 가족의 몰락으로 말미암아 이다말의 가계는 끊어지게 됩니다.

 

레위 지파와 그들의 직무(5-10)

교회는 성도가 서로 협력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성도 간의 협력은 하나님 백성 됨의 증거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를 구성하는 지체입니다. 따라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 어디서든지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 제사장을 돕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5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6레위 지파는 나아가 제사장 아론 앞에 서서 그에게 시종하게 하라 7그들이 회막 앞에서 아론의 직무와 온 회중의 직무를 위하여 회막에서 시무하되 8곧 회막의 모든 기구를 맡아 지키며 이스라엘 자손의 직무를 위하여 성막에서 시무할지니 9너는 레위인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맡기라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아론에게 온전히 맡겨진 자들이니라 10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세워 제사장 직무를 행하게 하라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5-10)

 

이제 본문은 레위 지파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직무를 소개합니다. 레위 지파의 가장 기본적인 직무는 제사장의 일을 돕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장 먼저 “제사장 아론 앞에 서서” 시종 드는 자들입니다(6). 누군가의 앞에 선다는 말은 그를 섬긴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의 직무를 공식적으로 감당하는 지위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아론 앞에 서서 제사장을 섬기는 직무를 감당할 뿐만 아니라, 또한 회막 앞에서 아론의 직무와 함께 온 회중의 직무를 위하여 시무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회막 앞에서 섬긴다는 말은 그들이 회막 밖에서 서 회막을 지키고, 회막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돕는 일을 했다는 뜻입니다. 제사와 관련한 레위인의 직무는 제사장과 제사자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섬김의 일이었습니다. 제사장이 제물을 드리는 일을 할 때 레위인들은 그 곁에서 여러 가지 필요한 준비를 감당했을 것입니다. 가령, 제사장이 짐승을 잡을 때, 짐승을 미리 준비하고 제사장에게 끌고 오는 등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제사자가 제물을 가지고 올 때, 여러 가지 익숙하지 않은 절차들을 레위인들이 미리 안내했을 것입니다. 물리적으로 제사자가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일 때, 레위인들이 제사자의 직무를 일정 부분 도와서 제사를 드리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도왔을 것입니다. 또한 광야 생활을 하면서 필연적으로 이동할 경우, 레위 사람들은 회막과 여러 기구들을 해체, 이동, 설치하는 등의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계속되면 실질적으로 회막의 기구들을 수리하거나 새롭게 제작해야 하는 경우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기타 회막과 관련한 다양한 직무들을 레위인들이 온전히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런 제반 업무를 생각할 때, 레위인들의 노동 강도는 매우 강했을 것입니다. 레위인들의 직무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을 30세 이상 50세 이하로 규정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레위 사람들이 회막 밖에서 섬기는 일들도 중요합니다. 회막 앞에서 하는 직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영역은 회막 자체를 보호하는 직무입니다. 특별히 레위 사람들은 열두 지파가 성막을 중심으로 진영을 펼칠 때, 각 지파들과 성막 사이에 진영을 마련하고, 외인들이 성막으로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물리적으로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만일 외인이 불법적으로 성막에 가까이하면 죽일 수 있었습니다(10). 대단히 무서운 일을 하는 것 같지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정결하지 못한 사람들이 마주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었기에,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숨을 살리는 역할을 한 셈입니다. 본문에서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레위인들은 후대 성전이 지어진 다음에는 성전에서 찬양대를 구성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도 감당했습니다(대상 15:16).

 

레위인과 첫태생의 구별(11-13)

성도는 모두 하나님의 소유가 된,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입니다(벧전 2:9).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어린양이 되셔서 대속 제물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요 1:29).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소유가 된 존재입니다. 우리를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소유로 불러 주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첫 태생들은 하나님께 구별된 하나님의 소유였습니다.

 

1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 태를 열어 태어난 모든 자를 대신하게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13처음 태어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태어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태어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하게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이니라(11-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라는 표현이 매 단락마다 시작을 알리는 장치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레위 사람들을 따로 구분해서 인구조사를 하고, 직무를 주시는 목적에 대해서 설명하십니다. 우선 레위인의 성별을 출애굽 사건과 연결시킵니다.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장자를 죽이실 때 이스라엘의 장자를 살려주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있는 모든 장자와 초태생이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선언하십니다(출 13:2).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는 하나님의 것으로 드려져야 했기에, 그들을 대신하여 레위인들을 온전히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초태생 짐승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정한 짐승들은 초태생을 하나님께 바쳐 드리면 되지만, 제사로 드릴 수 없는 부정한 짐승의 경우 그 짐승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드릴 대체 희생제물이 요구됩니다(출 34:19-20). 레위인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구별되어 드려진 존재가 되는 이유는 이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은 회막 안에서 제사와 관련된 일을 감당했지만, 레위 사람들은 기타 모든 영역에서 남겨진 일들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모두가 같은 레위인들이지만, 어떤 사람은 제사장이 되어 제사를 드리는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은 일반 레위인으로서 제사장들을 수종 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힘겹게 노동해야 했지만, 인간적으로 보면, 제사장들처럼 드러나는 일을 하지도, 그만큼 존경받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레위인이 하나님의 소유가 된 존재들로 온전히 바쳐진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직무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의 언약 백성 공동체를 위해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은 하나님께 특별하게 구별되어 선택된 자들입니다. 이 선택과 구별은 인간이 지닌 조건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지 우리의 공로나 자랑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언제나 거룩하고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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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02-01)


각 진영의 이스라엘 이동 배치도

민수기 2장 1-34절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삶의 중심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우리가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순종하는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순종이란 자기 기호, 성품, 취향 그리고 생각까지 내려놓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 어려운 부분이 순종에 하나님의 축복의 주춧돌이 됩니다.

 

  • 민수기 1장에서 이스라엘의 인구 조사를 마쳤습니다. 이제 진영을 편성하고 행군 순서를 정합니다. 광야에서 어떻게 진을 치고 회막을 중심으로 살 것이지 하나님께서는 회막을 중심으로 사방에 배치할 진을 그려주십니다. 본문은 열두 지파가 각각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준행합니다.

 

진영 배치 명령(1-2)

매일 주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깃발과 멀어져서 어느 순간에는 보고 싶어도 안 보이고 길을 잃고 헤맬 수 있습니다. 묵상을 너무 과신해서도 안 되고, 너무 오래도록 쉬어서도 안 됩니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이 아니고서는 이 광야학교를 개근하고 졸업하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이스라엘 자손은 각각 자기의 진영의 군기와 자기의 조상의 가문의 기호 곁에 진을 치되 회막을 향하여 사방으로 치라(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는 표현을 통해 새로운 단락이 시작됨을 알립니다. 이미 1장에서 지파들의 목록이 주어져 있지만, 2장에서는 이들이 어떤 형태로 진영을 구성하며, 전쟁을 위해 출정할 때 어떻게 할지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 순서가 약간씩 바뀌어 있습니다. 보통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시는데(민수기에서 30회), 여기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십니다(민수기에서 6회). 아마도 진영을 갖추는 데 있어서 제사장의 역할이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가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각 지파는 자기들만의 군기가 있었으며, 지파뿐만 아니라 지파에 속한 대가족 단위에서도 일정한 형태의 깃발이나 표식이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성경이 깃발에 어떤 문양이나 표식이 있었는지 등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기 때문에 알 수는 없습니다. 열두 지파는 모두 회막을 향하여 사방으로 진을 치게 됩니다. 향한다는 말은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회막의 사방에 각각 세 개의 지파가 위치하며, 세 지파와 회막 사이에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자리하면서 회막과 이스라엘 백성 간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도록 했습니다. 그 실제 거리가 얼마나 되는 지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주는 바는 없지만, 보통 회막과 백성들의 거리는 2천 규빗으로 규정되곤 합니다(수 3:4). 여기에 착안해서, 유대인들은 안식일 규례를 정할 때 안식일에는 2천 규빗 이상을 이동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스라엘 진영의 구조(3-31)

진을 배치하고 행군 순서를 정한 기준은 각 지파의 세력을 따라 정해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배치되었습니다. 회막을 중심으로 세 지파씩 사방으로 배체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세 지파가 묶었는지, 왜 방향은 그렇게 정했는지를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더 강한 세력이 되는 것보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3동방 해 돋는 쪽에 진 칠 자는 그 진영별로 유다의 진영의 군기에 속한 자라 유다 자손의 지휘관은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요 4그의 군대로 계수된 자가 칠만 사천육백 명이며 5그 곁에 진 칠 자는 잇사갈 지파라 잇사갈 자손의 지휘관은 수알의 아들 느다넬이요 6그의 군대로 계수된 자가 오만 사천사백명이라 7그리고 스불론 지파라 스불론 자손의 지휘관은 헬론의 아들 엘리압이요 8그의 군대로 계수된 자가 오만 칠천사백 명이니 9유다 진영에 속한 군대로 계수된 군인의 총계는 십팔만 육천사백 명이라 그들은 제일대로 행진할지니라 10남쪽에는 르우벤 군대 진영의 군기가 있을 것이라 르우벤 자손의 지휘관은 스데울의 아들 엘리술이요 11그의 군대로 계수된 자가 사만 육천오백 명이며 12그 곁에 진 칠 자는 시므온 지파라 시므온 자손의 지휘관은 수리삿대의 아들 슬루미엘이요 13그의 군대로 계수된 자가 오만 구천삼갭 명이며 14또 갓 지파라 갓 자손의 지휘관은 르우엘의 아들 에리아삽이요 15그의 군대로 계수된 자가 사만 오천육백오십 명이니 16르우벤 진영에 속하여 계수된 군인의 총계는 십오만 천사백오십 명이라 그들은 제이대로 행진할지니라 17그 다음에 회막이 레위인의 진영과 함께 모든 진영의 중앙에 있어 행진하되 그들의 진 친 순서대로 각 사람은 자기의 위치에서 자기들의 기를 따라 앞으로 행진할지니라 1​8서쪽에는 에브라임의 군대의 진영의 군기가 있을 것이라 에브라임 자손의 지휘관은 암미훗의 아들 엘리사마요 19그의 군대로 계수된 자가 사만 오백 명이며 20그 곁에는 므낫세 지파가 있을 것이라 므낫세 자손의 지휘관은 브다술의 아들 가말리엘이요 21그의 군대로 계수된 자가 삼만 이천이백 명이며 22또 베냐민 지파라 베냐민 자손의 지휘관은 기드오니의 아들 아비단이요 23그의 군대로 계수된 자가 삼만 오천사백 명이니 24에브라임 진영에 속하여 계수된 군인의 총계는 십만 팔천백 명이라 그들은 제삼대로 행진할지니라 25북쪽에는 단 군대 진영의 군기가 있을 것이라 단 자손의 지휘관은 암미삿대의 아들 아히에셀이요 26그의 군대로 계수된 자가 육만 이천칠백 명이며 27그 곁에 진 칠 자는 아셀 지파라 아셀 자손의 지휘관은 오그란의 아들 바기엘이요 28그의 군대로 계수된 자가 사만 천오백 명이며 29또 납달리 지파라 납달리 자손의 지휘관은 에난의 아들 아히라요 30그의 군대로 계수된 자가 오만 삼천사백 명이니 31단의 진영에 속하여 계수함을 받은 군인의 총계는 십오만 칠천육백 명이라 그들은 기를 따라 후대로 행진할지니라 하시니라(3-31)

 

지파 별로 성막을 중심에 놓고 동서남북 방향으로 각 진영이 배치됩니다. 각 지파는 구분을 위해 모종의 ‘깃발’과 ‘기호’를 사용합니다. 본문은 이것들이 어떤 형태와 색깔, 문양을 지녔는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열두 지파는 세 지파씩 묶여 네 개의 그룹으로 나뉩니다. 본문은 그 그룹들을 ‘제1대’ ‘제2대’로 표현합니다. 우리는 필요한 경우 종종 그것들을 각각 ‘제1그룹’, ‘제2그룹’으로 지칭하기로 합니다. 네 그룹은 다음과 같이 나뉩니다. 각 그룹에서 먼저 등장하는 지파가 우두머리 지파입니다.

제1대(동) 제2대(남) 제3대(북) 제4대(서)
지파 지파장 지파 지파장 지파 지파장 지파 지파장
유다 나손 르우벤 엘리술 에브라임 엘리사마 아히에셀
잇사갈 느다넬 시므온 슬루미엘 므낫세 가말리엘 아셀 바기엘
스블론 엘리압 엘리아삽 베냐민 아비단 납달리 아히라
총 186,400 총 151,450 총 108,100 총 157,600

 

(1) 동쪽 진영의 배치: 유다 진영(3-9)

 

회막의 동쪽 진영 배치는 가장 중요한 곳입니다. 그곳은 회막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기 때문에, 레위인이 아니라 아론과 제사장들이 지키는 곳이기도 합니다. 유다 진영의 군기가 한가운데 자리 잡고,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 지휘합니다. 그리고 그 양 옆에는 잇사갈 지파와 스불론 지파가 위치합니다. 이 세 지파는 모두 레아에게서 태어난 자손들입니다. 세 지파의 수를 합하면 도합 186,400명입니다. 가장 중요한 자리에 유다 지파가 위치함으로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유다 지파의 지도력이 부각됩니다. 실제 진영에 머무를 때도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뿐 아니라, 이동할 때도 유다 지파는 선두에서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끕니다. 동쪽은 해 돋는 쪽으로 동양에서처럼 고대 근동 문화권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특별한 방향으로 여겨졌습니다. 그 방향은 성막의 정문 쪽이며 그 중요성으로 인해 모세와 더불어 아론의 집안, 즉 제사장 가문들이 거기에 진을 쳤습니다. 원래 르우벤이 장자로서 최고 우두머리의 자격이 있었지만, 그는 아버지의 첩이었던 빌하와 동침하는 중대한 범죄를 저질러(창 35:33) 야곱의 유언에서 앞으로 장자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탁월성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는 부끄러운 예언을 받았습니다(창 49:4). 반면에 유다는 왕을 상징하는 규가 떠나지 않을 것이고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며,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할 것이라는 예언을 받습니다(창 49:10). 이것이 유다의 장자권의 승계를 의미하지는 않으나 그가 모든 지파를 능가하는 뛰어난 지파로 왕권을 쥘 것을 예고합니다. 아마 유다가 어린 요셉을 살리는데 주도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형제들의 동의를 이끌어냈던 것이 이런 축복으로 연결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창 37:27).

 

(2) 남쪽 진영의 배치: 르우벤 진영(10-17)

 

동쪽 다음에 남쪽입니다. 민수기에서 사방을 표현할 때는 동-남-서-북의 순서를 지킵니다. 동쪽이 가장 중요한 방향이었다면, 남쪽은 그 다음으로 중요한 방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회막의 남쪽에는 르우벤 진영의 군기가 있고 르우벤 지파를 이끄는 지휘자는 스데울의 아들 엘리술입니다. 그 곁에는 시므온 지파와 갓 지파가 함께합니다. 이들 지파의 숫자를 모두 합치면 도합 151,450명입니다. 레아의 장자 르우벤, 둘째인 시므온, 그리고 레아의 몸종 실바의 자손인 갓 지파가 함께 회막의 남쪽을 지키게 됩니다. 인구조사를 볼 때, 시므온의 인구가 급감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이 열두 아들들에게 전한 예언의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동할 때는 남쪽에 있는 세 지파는 동쪽에 있는 유다 지파 진영의 뒤를 이어서 제2진으로 성막 바로 앞에서 행진하게 됩니다.

 

(3) 서쪽 진영의 배치: 에브라임 진영(18-24)

 

서쪽에는 세 번째 그룹이 위치하는데, 에브라임 지파의 군기가 있고, 암미훗의 아들 엘리사마가 지휘합니다. 그 곁에는 므낫세 지파와 베냐민 지파가 함께합니다. 이들 세 지파의 수를 모두 합하면 도합 108,100명입니다. 이들은 제3대가 되어 이동 간에는 성막 바로 뒤에서 행진합니다. 에브라임, 므낫세는 요셉의 아들들이고, 베냐민과 함께 라헬의 소생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므낫세가 요셉의 장자였지만, 에브라임이 앞서는 것 역시 창세기 48장에 나온 야곱의 미래 예언을 반영한 것입니다.

 

(4) 북쪽 진영의 배치: 단 진영(25-31)

 

북쪽 진영에 진을 치는 네 번째 진영은 단 지파가 이끌었고, 암미삿대의 아들 아히에셀이 지휘합니다. 그 곁에는 아셀 지파와 납달리 지파가 함께합니다. 이들의 수를 모두 합하면 도합 157,600명입니다. 이들은 행진할 때 가장 뒤편에서 따르게 됩니다. 진영에 머무를 때는 북쪽에 머무르는데, 북쪽은 동쪽을 정면으로 보는 회막의 왼쪽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도가 떨어지는 지역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동할 때도 이들은 가장 뒤에 위치하는데, 중요함에 있어서 가장 뒤쳐진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모두 빌하의 소생(단과 납달리)과 실바의 소생(아셀)에서 나왔기 때문에 가장 뒤로 밀린 듯합니다. 진영의 배치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결론적 진술(32-34)

이스라엘은 질서정연하고 강력한 전투 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 급하게 애굽에서 빠져나온 노예 집단이 무질서하고 혼돈 가득한 곳, 불확정성과 불확실성의 공간인 광야를 이겨낼 만한 질서와 조화의 공동체로 거듭나고 있었습니다. 진의 중심에는 회막이 있고 그 회막을 레위 지파가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광야의 전투가 거룩과 정결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자 거룩과 정결을 무기로 한 전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32이상은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조상의 가문을 따라 계수된 자니 모든 진영의 군인 곧 계수된 자의 총계는 육십만 삼천오백오십 명이며 33레위인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계수되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심과 같았느니라 34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준행하여 각기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르며 자기들의 기를 따라 진 치기도 하며 행진하기도 하였더라(32-34)

 

인구조사의 결과를 다시 언급합니다. 20세 이상 군인으로 계수된 자의 전체 수는 603,550명입니다. 레위인은 병역의 의무가 없기 때문에 여기서 계수되지 않고, 민수기 3-4장에서 더 구체적으로 언급될 것입니다. 숙영지에서의 진영 배치와 행진 시 진영의 대열은 아래 그림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진영 배치

아셀 납달리
베냐민
므라리
잇사갈
에브라임 게르손 성막 모세
제사장
유다
므낫세
고핫
스블론

르우벤 시므온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막이 백성들 가운데 머무른다는 뜻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당신의 언약 백성과 함께하시기에, 백성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며,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가 서 있는 모든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성도들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회막을 중심으로 행군하거나 텐트를 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잘 전달될 수 있는 구조로 머물거나 나아간 것입니다. 죽음의 땅 광야를 성공적으로 통과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중심 공동체뿐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의 하나됨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되는 것입니다. 각 지파의 규모와 역할은 모두 달랐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하나님 중심으로 장막을 쳤습니다. 그리고 서로 마주 보면서 장막을 쳤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을 통해서 서로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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