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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37-02)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

이사야 37장 21-38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룻강아지는 호랑이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모르기에 겁도 없이 덤벼듭니다. 결과는 허망한 죽음입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 앞에 하룻강아지와 같이 무지합니다. 무지한 앗수르는 결국 하나님 앞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 산헤립의 편지를 받아 보고 성전으로 올라가 기도한 히스기야에게 여호와께서 다시금 이사야를 통해 구원 신탁을 주십니다. 전체적 내용은 첫 번째 답변(6-7)과 유사하지만, 매우 구체적입니다. 예루살렘의 구원과 앗수르 군대의 궤멸적 철군을 통해 앗수르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서 땅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임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응답(21-35)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결코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이룬 성공을 자신이 있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이보다 무지한 것은 없습니다. 교만한 앗수르를 멸하신 하나님꼐서는 오늘도 교만한 자를 멸하십니다. 우리 안에 교만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라고 하였습니다.

 

21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사람을 보내어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네가 앗수르의 산헤립 왕의 일로 내게 기도하였도다 하시고 22여호와께서 그에 대하여 이같이 이르시되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조소하였고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23네가 훼방하며 능욕한 것은 누구에게냐 네가 소리를 높이며 눈을 높이 들어 향한 것은 누구에게냐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에게니라 24네가 네 종을 통해서 주를 훼방하여 이르기를 내가 나의 허다한 병거를 거느리고 산들의 꼭대기에 올라가며 레바논의 깊은 곳에 이르렀으니 높은 백향목과 아름다운 향나무를 베고 또 그 제일 높은 곳에 들어가 살진 땅의 수풀에 이를 것이며 25내가 우물을 파서 물을 마셨으니 내 발바닥으로 애굽의 모든 하수를 말리리라 하였도다 26네가 어찌하여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들은 내가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로서 이제 내가 미루어 네가 견고한 성읍들을 헐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노라 27그러므로 그 주민들이 힘이 약하여 놀라며 수치를 당하여 들의 풀 같이, 푸른 나물 같이, 지붕의 풀 같이, 자라지 못한 곡초 같이 되었느니라 28네 거처와 네 출입과 네가 나를 거슬러 분노함을 내가 아노라 29네가 나를 거슬러 분노함과 네 오만함이 내 귀에 들렸으므로 내가 갈고리로 네 코를 꿰며 재갈을 네 입에 물려 너를 오던 길로 돌아가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30왕이여 이것이 왕에게 징조가 되리니 올해는 스스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둘째 해에는 또 거기에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셋째 해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을 것이니이다 31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32이는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 산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33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에 대하여 이같이 이르시되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화살 하나도 이리로 쏘지 못하며 방패를 가지고 성에 가까이 오지도 못하며 흉벽을 쌓고 치지도 못할 것이요 34그가 오던 길 곧 그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35대저 내가 나를 위하며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며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21-35)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앗수르에 대해 어리석다고 책망하십니다. 앗수르는 레바논의 모든 땅을 밟은 것과 애굽을 이기고 정복한 일을 두고 이스라엘 앞에서 자랑했지만, 오래전부터 하나님의 계획하신 일이었습니다.

 

(1) 산헤립에 대한 예언(21-29)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사야를 통해 응답하십니다(21). 여호와를 모독하고 예루살렘을 위협했던 산헤립이 시온에게 멸시와 조롱을 당할 것입니다(22; 22:1). 머리를 흔드는 행위는 경멸의 표시입니다(시 22:7; 109:25; 욥 16:4; 애 2:15). 23절의 ‘네가 훼방하며 능욕한 것은 누구에게냐’는 17절의 히스기야 기도를 거의 그대로 받습니다. 산헤립은 히스기야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향하여 소리를 높이고 눈을 높이 치켜들었습니다. 산헤립은 여호와를 모독함으로써 그분의 ‘거룩하심’을 훼손하였습니다. 불의하고 교만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파괴와 멸망을 의미합니다. 24-25절의 인용문은 산헤립의 오만을 노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 앗수르의 침략에서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높은 곳이나 깊숙한 곳에 숨을지라도 목숨을 구할 수 없습니다. ‘높은 백향목과 아름다운 향나무’로 울창한 산림지대도 앗수르의 진군을 막을 수 없습니다. 물이 없는 지역도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필요하면 우물을 파서 마시면 됩니다. 심지어 애굽도 예외가 아닙니다. 침략하여 나일강의 모든 하천을 말려 애굽의 생명줄을 끊어버릴 것입니다. 26-29절은 한계를 넘은 산헤립의 교만에 대한 여호와의 응답입니다. 여호와께서 1인칭으로 직접 산헤립에게 말씀하십니다. 먼저 26-27절은 산헤립을 여호와께서 사용하시는 도구로 소개합니다. 산헤립의 성공적인 침략 전쟁은 여호와께서 오래전에 결정하신 일에 불과합니다. 여호와께서 옛적에 정하고 계획하신 것을 그분의 ‘진노의 막대기’(10:5) 산헤립이 실행한 것일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계획을 집행하셨기에 산헤립은 요새로 된 성읍들을 돌무더기로 만들 수 있었고, 그곳 주민들은 기운이 다하여 놀라고 수치를 당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산헤립을 뜨거운 동풍처럼 사용하셨기에 민족들은 그 앞에서 ‘들의 풀 같이, 푸른 나물 같이, 지붕의 풀 같이, 자라지 못한 곡초 같이’ 됐습니다. 즉, 산헤립의 승리는 ‘천하만국에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계획과 실행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28-29절은 자신의 역할과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산헤립에 대한 고발과 심판선언입니다.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는’(10:15) 것처럼, 산헤립은 그의 거처와 출입을 아시는 여호와를 거슬러 분노했습니다. 승리에 도취한 산헤립은 자신을 절대화해 승리를 허락하신 분께 도전했습니다. 29절의 ‘네 오만함이 내 귀에 들렸으므로’(‘너의 소란이 내 귀에 올라왔으니’)는 24절의 ‘나의 허다한 병거를 거느리고 산들의 꼭대기에 올라가며’에 이어집니다. 산헤립이 절대권력을 과시하며 저지르는 소란이 여호와의 귀에 올라왔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제 당신 권위에 도전하는 땅의 권력에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산헤립의 코에 ‘갈고리’를 꿰고 입술에 ‘재갈’을 물려 강제로 원래 왔던 곳으로 끌고 가십니다. 자기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신의 자리를 탐하는 자의 말로가 사로잡혀 수치를 당하는 포로의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산헤립에게 승리를 주셨던 분께서 이번에는 참패를 안기시고 그를 강제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2) 히스기야에게 주는 징조(30-32)

 

여호와의 간섭으로 앗수르 군대가 철군하지만, 그것으로 유다의 위기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앗수르 군대는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을 쳐서’ 점령하고(36:1) 예루살렘만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앗수르의 침략으로 유다 땅은 완전히 폐허가 됐습니다. 성과 가옥은 파괴되고 경작지는 황폐해졌습니다. 많은 주민이 죽거나 사로잡혔고, 가축과 식량은 약탈당했습니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준 징조는 앗수르의 철군 이후를 내다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징조를 통해 앗수르의 침략으로 황무지가 된 유다 땅이 짧은 시간 안에 회복될 것을 약속해주십니다. 징조는 3년의 기간을 전망합니다. 앗수르가 침략한 올해에는 ‘스스로 난 것’을 먹고, 내년에는 ‘거기에서 난 것’을 먹고, 후년에는 씨를 뿌려서 곡식을 거두고 ‘포도원에 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습니다(30). ‘스스로 난 것’은 씨를 뿌리지 않은 밭에서 저절로 자라난 곡식을 가리킵니다(레 25:5,11-12). ‘거기에서 난 것’으로 옮긴 샤히스(on)는 여기에만 나오는 단어로 그 의미가 불분명합니다. 아마도 전자처럼 야생 식물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첫째 해와 둘째 해는 농사를 짓지 못하고 폐허가 된 농경지나 들판이나 산에서 자연적으로 자란 것을 먹고, 셋째 해에는 씨를 뿌려 수확하고 포도나무를 심어 그 열매를 먹습니다. 폐허가 된 포도원에 포도나무를 심어서 한 해 또는 3년 만에 포도를 수확한다는 것은 물론 사실적 표현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 ‘삼 년’은 자주 새로운 사건을 기다리는 기간으로 사용됩니다(삼하 13:38; 왕상 22:1; 왕하 17:5; 18:10; 사 20:3). 전쟁의 후유증으로 얼마 동안 기근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여호와의 간섭으로 곧 극복됩니다. 산헤립의 손에서 예루살렘을 구원하신 여호와께서 앗수르 침략군이 황무지로 만들어놓은 경작지도 다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회복시켜주십니다. 그분께서 복을 내려 땅이 다시 풍성한 결실을 맺고 주민들은 정상적인 삶을 되찾습니다. 포도나무가 이스라엘을 상징하기도 하기에 31절은 나무와 관련된 비유를 사용해 유다의 회복을 언급합니다. 포도원에 포도나무가 심기고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앗수르의 침략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앗수르를 진노의 막대기로 사용해 유다를 징벌하셨던 여호와께서 다시 유다와 함께하시며 복을 내리십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고, 예루살렘과 시온 산이 다시금 구원의 보루가 됩니다(32; 14:32). 유다는 자력으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극적 개입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의 구원과 회복이 전적으로 그분의 은총에 속함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열심/질투’는 원래 우상숭배를 금하시고 사랑(언약)의 독점적 관계를 요구하는 속성을 담은 표현인데(출 20:5; 34:14; 수 24:19), 여기서는 사랑의 보호자로서 열심을 내십니다.

 

(3) 예루살렘의 보호 약속(33-35)

 

예루살렘 성의 보호를 약속하는 33-35절은 내용상 22-29절의 연속입니다. 산헤립의 교만을 징벌하시기로 한(29) 여호와께서 이를 실행에 옮기십니다. 예루살렘을 구원의 보루로 택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앗수르 침략군이 예루살렘에 접근도 못하도록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이들을 빈손으로 되돌아가게 하십니다(29:1-8). 35절의 ‘나를 위하며 내 종 다윗을 위하여’는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준 약속(삼하 7:16)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산헤립의 원정 결말(36-38)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했을 때 우리가 살길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기도의 문은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사자를 보내 하룻밤에 앗수르 군대 십팔만 오천 명을 죽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룻밤에 애굽의 모든 장자들을 죽게 하신 적도 있습니다(출 12:29-30). 산헤립은 비참한 패배를 맛보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칼에 죽었습니다.

 

36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 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 37이에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38자기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그의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도망하였으므로 그의 아들 에살핫돈이 이어 왕이 되니라(36-38)

 

앗수르 군대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화살 한 번 쏘지 못한 채 몰살당합니다. 그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돌아간 앗수르의 왕 산헤립은 아들들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앗수르 왕이 아들에게 죽임을 당할 줄 몰랐습니다. 교만에 취한 앗수르 왕은 자신의 무능을 너무 몰랐습니다.

 

(1) 산헤립의 패배와 철군(36)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 진영을 쳐서 ‘십팔만 오천인’을 죽입니다(36). 산헤립이 ‘사자들’을 보내(9) 모독하자, 여호와께서 ‘사자’를 보내 앗수르 군대를 치십니다. 여호와를 모독한 산헤립의 패배로 히스기야가 기도했던 것처럼 ‘천하 만국이 주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20) 됩니다. 전통적으로 역병을 생각하지만, 산헤립의 군대가 어떻게 궤멸했는지는 사변의 영역에 속합니다.

 

(2) 니느웨로 돌아간 산헤립(37-38)

 

여호와를 모독하였던 산헤립은 돌아가서 대략 이십 년이 지나 칼에 맞아 죽습니다(37-38). 주전 681년 ‘자기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산헤립은 그의 두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에 의해 암살당합니다.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여호와의 도움을 간구한 히스기야는 구원을 받고, 산헤립은 자신이 섬기는 신 니스록의 전에서 경배하다가 죽임을 당합니다. 살해범들은 앗수르의 적국인 아라랏(우라르투)으로 도망하고, 산헤립의 아들 에살핫돈(주전680-669년)이 왕위에 오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아무리 강해도 약합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 해도 초라하고 보잘것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알아도 무지합니다. 이 사실은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무지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교만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교만하면 망하기 때문입니다. 교만의 무지를 버리고 여호와르 경외하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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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37-01)


히스기야가 선택한 믿음의 길

이사야 37장 1-20절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을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십니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절망적인 순간에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구름이 가득 메운 하늘 위에 여전히 빛나는 태양처럼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응답하실 하나님을 믿고 아가시길 바랍니다.

 

  • 앗수르 왕 산헤립이 파견한 랍사게의 오만하고 위협적인 말을 전해 들은 유다 왕 히스기야는 신하들을 예언자 이사야에게 보내 중보기도를 부탁하고 자신은 여호와의 전으로 올라갑니다. 히스기야는 오직 여호와만이 앗수르의 위협에서 예루살렘을 구해주실 수 있음을 인정하고 당신을 능욕한 랍사게의 말을 들으신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히스기야의 반응(1-4)

절망은 우리의 눈을 가리고 포기하게 합니다. 사방이 가로막혀 도저히 길이 없는 곳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안 계신 것은 아닙니다.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고 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절망적인 인생의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십니다. 도저히 싸워 이길 수 없는 앗수르의 위협 앞에서 히스기야는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1히스기야 왕이 듣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고 2왕궁맡은 자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어른들도 굵은 베옷을 입으니라 왕이 그들을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내매 3그들이 이사야에게 이르되 히스기야의 말씀에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 4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랍사게의 말을 들으셨을 것이라 그가 그의 상전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하였은즉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그 말로 말미암아 견책하실까 하노라 그런즉 바라건대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시더이다 하니라(1-4)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성전으로 가면서 자신의 옷을 찢었습니다.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 이것은 극심한 고통과 슬픔의 표시입니다. 히스기야는 또한 신하들을 선지자 이사야에게 보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함입니다.

 

(1) 성전으로 가는 히스기야(1)

 

협상단의 보고를 받은 히스기야는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여호와의 집으로 갑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구원이 오직 여호와의 개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신하들을 이사야에게 보내 여호와의 신탁을 부탁합니다. 사정을 잘 아는 엘리아김과 셉나뿐만 아니라 ‘제사장 중 어른들’(원로 제사장들)도 함께 보냅니다. 이는 이 사안의 긴박성과 중요성뿐 아니라, 이사야에 대한 왕의 인정과 신뢰를 보여줍니다. 히스기야의 반응은 아버지 아하스와 대조적입니다(7:1-17). 정치에서 여호와를 배제한 아하스와 달리 히스기야는 여호와를 역사와 정치를 결정하시는 주체로 인정합니다(3-4). 그는 이사야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하면서 먼저 참담한 처지를 고백합니다.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모든 것이 허사로 끝나고 아무런 힘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백성의 절망적 상황을 언급한 것은 체념에서 나온 한탄이 아닙니다. 여호와는 어디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찾을 수 없는 자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기에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개입을 호소한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주권을 존중하면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소망을 드러냅니다. 그는 다윗 왕조나 예루살렘과 여호와의 특별한 관계를 교리적으로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독한 랍사게의 위협에서 그분의 개입 가능성을 보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당신 영예가 훼손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민족들의 신들과 달리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 시기에 랍사게의 모독에 침묵하실 수 없습니다. ‘혹시’(암 5:15; 욜 2:14; 욘 3:9; 습 2:3)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관련한 표현이며, 예루살렘의 구원이 전적으로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결정에 속함을 보여줍니다. 끝으로 히스기야는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해 기도해줄 것을 이사야에게 부탁합니다. 이스라엘의 생존이 하나님의 개입에만 달려 있음을 인정합니다.

 

이사야를 통한 응답(5-7)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전쟁은 사람의 생각과 전혀 달랐습니다. 사람에게 하찮아 보이는 곳에서 하나님의 열심은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길은 바람 같습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 모를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영혼은 그 길을 보게 될 것입니다.

 

5그리하여 히스기야 왕의 신하들이 이사야에게 나아가매 6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말하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들은 바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7보라 내가 영을 그의 속에 두리니 그가 소문을 듣고 그의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며 또 내가 그를 그의 고국에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5-7)

 

이사야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전쟁은 사람의 생각과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군대를 물리치겠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영을 그의 속에 두겠다고 합니다.

 

(1) 이사야를 찾아온 왕의 신하들(5)

 

여호와께서 이사야를 통해 히스기야에게 예루살렘의 구원에 관한 신탁을 주십니다.

 

(2) 격려의 말씀(6)

 

6절의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는 히스기야의 간구(4)가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줍니다. ‘나를 능욕한 말’은 구체적으로는 36:18-20에서 랍사게가 한 말을 가리킵니다. 신탁(7)은 내용뿐만 아니라 그 실천 방법까지 포함합니다. ‘보라 내가 영을 그의 속에 두리니’는 앗수르 군대의 철군과 산헤립의 죽음이 여호와의 직접적인 간섭에 의해 이뤄질 것을 시사해줍니다. 여호와께서 특정 목적을 위해 ‘영’(루아흐)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경우는 드물지 않습니다(사 19:14; 29:10). 신탁의 첫 번째 내용은 산헤립이 ‘소문을 듣고 그의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산헤립이 원정을 중단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게 하는 ‘소문’(무아)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36절에 의하면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쳐서 돌아가게 합니다.

 

(3) 구원 신탁(7)

 

신탁의 두 번째 내용은 산헤립 개인에 관한 것으로, 산헤립이 자기 나라에서 칼에 맞아 쓰러지게 하십니다. 산헤립은 주전 681년, 대략 이십 년이 지나 자기 자식들에게 살해당합니다(38).

 

산헤립의 두 번째 위협(8-13)

아무리 돌아봐도 길이 없는 절망의 순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절망의 순간에 우리는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게 절망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소망입니다. 절망이라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소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8앗수르 왕이 라기스를 떠났다 함을 듣고 랍사게가 돌아가다가 그 왕을 만나니 립나를 치고 있더라 9그 때에 앗수르 왕이 구스 왕 디르하가의 일에 대하여 들은즉 사람들이 이르기를 그가 나와서 왕과 싸우려 한다 하는지라 이 말을 듣고 사자들을 히스기야에게 보내며 이르되 10너희는 유다의 히스기야 왕에게 이같이 말하여 이르기를 너는 네가 신뢰하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이 앗수르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 하는 말에 속지 말라 11앗수르 왕들이 모든 나라에 어떤 일을 행하였으며 그것을 어떻게 멸절시켰는지 네가 들었으리니 네가 구원을 받겠느냐 12나의 조상들이 멸하신 열방 고산과 하란과 레셉과 및 들라살에 있는 에덴 자손을 그 나라들의 신들이 건졌더냐 13하맛 왕과 아르밧 왕과 스발와임 성의 왕과 헤나 왕과 이와 왕이 어디 있느냐 하라 하였더라(8-13)

 

앗수르 산헤립은 구스 왕 디르하가가 앗수르와 싸우려고 출정한다는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군대를 청수시킵니다. 구스 왕 디르하가는 애굽을 격파한 나일 강의 강자였습니다. 산헤립이 그에 대해 축각을 곤두세울 만했습니다.

 

(1) 립나의 산헤립에게 돌아간 랍사게(8-9)

 

산헤립이 라기스를 떠나 립나(리브나)를 공격하고 있었기에 랍사게는 립나로 돌아갑니다. 산헤립이 라기스를 떠난 이유는 달리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 그가 라기스를 점령하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하기 위해 립나를 공격하는 것이라면 예루살렘의 위기가 더 심각해졌음을 보여주고, 구스 왕 디르하가와 싸우기 위해 라기스의 포위를 풀고 떠났다면 산헤립이 점차 전쟁의 주도권을 상실해가고 있음을 시사해줍니다. 앗수르의 기록에 의하면 산헤립은 엘드게(Eltheke)에서 애굽 군대와 싸워 이겼습니다.

 

(2) 산헤립의 편지 내용(10-13)

 

디르하가의 출정 소식을 들은 산헤립이 이번에는 사신을 보내 편지로 항복을 재촉합니다(10-13). 산헤립은 히스기야가 의지하는 여호와를 직접 모독합니다. 그는 히스기야에게 여호와께 속지 말라고, 곧 예루살렘의 구원 신탁에 의존하여 쓸데없이 저항하지 말고 항복하라고 경고합니다. 그는 자기 업적뿐만 아니라 선왕들의 행적까지 들먹이며 히스기야의 저항이 파국으로 끝날 것이라고 합니다. 반역한 모든 나라가 앗수르 왕들에게 멸망했는데, 히스기야만 예외가 될 수 있겠습니까? 고산은 유브라데 우편에 있는 비트 바히아니(bit bahiani) 지역의 수도로 주전 8세기에는 이미 앗수르의 지방이 됐던 것 같습니다. 사마리아가 함락당한 후에 북왕국 주민들이 유배를 당한 지역들 가운데 하나입니다(왕하 17:6;18:11). 이와는 앗수르에 멸망 당한 북왕국 사람들의 유배지 가운데 하나로 언급된 아와(왕하 17:24)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히스기야의 반응(14-20)

환난과 고통이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그것이 바로 절망입니다. 절망은 사건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날 때 절망이 아니라 믿음을 만들어 내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문제는 믿음으로 바라볼 때 은혜로 바뀝니다.

 

14히스기야가 그 사자들의 손에서 글을 받아 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글을 여호와 앞에 펴 놓고 15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16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17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눈을 뜨고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람을 보내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한 모든 말을 들으시옵소서 18여호와여 앗수르 왕들이 과연 열국과 그들의 땅을 황폐하게 하였고 19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나 그들은 신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일 뿐이요 나무와 돌이라 그러므로 멸망을 당하였나이다 20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 만국이 주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하니라(14-20)

 

아수르 산헤립은 구스 왕 디르하기가가 앗수르와 싸우려고 출정한다는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군대를 철수시킵니다. 구스 왕 디르하가는 애굽을 격파한 나일 강자였습니다. 산헤립이 그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울 만했습니다.

 

(1) 성전으로 올라가 기도하는 히스기야(14-15)

 

랍사게의 유세를 보고받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던(1) 히스기야가 이번에도 여호와의 전으로 올라갑니다. 기도하기 전에 산헤립의 서신을 여호와 앞에 펼쳐 놓습니다. 이것은 아마 여호와께 서신을 읽어드렸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당신 영예를 위해 개입하시기를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2) 히스기야의 기도(16-20)

 

히스기야는 3중의 칭호로 하나님을 부릅니다(16). ‘만군의 여호와’는 예루살렘 제의에서 사용하는 공식적 호칭이고,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은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지칭합니다. ‘천하만국에 유일하신 하나님’은 온 땅이 여호와의 주권 아래 있음을 주장하는 표현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지만, 그분의 통치 영역은 이스라엘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로 땅의 모든 나라를 통치하십니다. 나라들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세상의 왕을 주장하는 산헤립에 맞서 히스기야는 여호와께서 창조주로서 천하만국을 다스리시는 유일하신 왕임을 고백합니다. 히스기야는 처음부터 예루살렘을 구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는 산헤립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조롱했다고 고발하면서 그를 여호와께 맞대면시킵니다(17). 먼저 앗수르 왕들이 모든 땅을 황폐하게 만들고 민족들의 신들을 불에 던져버렸다는 산헤립의 주장을 인정하고, 이로부터 전혀 다른 결론을 끌어냅니다(18-19). 앗수르가 정복한 민족들의 신들을 불에 던져 없애버린 것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곧 ‘나무와 돌’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산헤립은 자기가 민족들의 신들을 이겼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승리는 민족들이 섬기는 신들의 정체를 폭로해주었을 뿐입니다. 히스기야는 여호와를 민족들의 신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는 산헤립에 맞서 사람이 나무나 돌을 재료로 해서 손으로 만든 우상하고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시길 간구합니다(20). 히스기야의 논리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구원은 여호와께서 참된 하나님이심을 민족들 가운데 과시하시는 사건이 될 것입니다. 다른 신들은 산헤립의 손에서 자기 나라를 구하지 못했기에 우상(헛것)으로 판명 났습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절대권력을 주장하는 산헤립의 손에서 예루살렘을 구원하신다면, ‘천하만국이 주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20).


히스기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예루살렘 백성에게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것을 명령하고, 선지자에게 기도를 요청하는 믿음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믿음에 화답하셔서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구원이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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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36-01)


앗수르에게 포위당한 히스기야

이사야 36장 1-22절


 

건강이 최고라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아무리 많은 부귀영화 가운데 있다 해도 건강하지 않으면 그럼의 떡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건강을 위해 애씁니다. 그러나 몸의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혼의 건강입니다. 그래서 몸을 살피듯 우리의 믿음을 날마다 살펴야 합니다.

 

  • 이사야가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주전 734-732년) 직전에 선포한 ‘흉용하고 청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이 ‘유다에 들어와서 가득하여 목에까지 미치리라’는 심판 예언(8:7-8)이 그대로 현실이 됩니다. 주전 701년 앗수르 왕 산헤립과 그의 군대가 봉신 관계를 파기한 유다 왕 히스기야를 징벌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옵니다.

 

역사적 배경(1-3)

신앙은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만을 믿는다고 의미입니다.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신이니 그분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는 사람입니다.

 

1히스기야 왕 십사 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을 쳐서 취하니라 2앗수르 왕이 라기스에서부터 랍사게를 예루살렘으로 보내되 대군을 거느리고 히스기야 왕에게로 가게 하매 그가 윗못 수도 곁 세탁자의 밭 큰 길에 서매 3힐기야의 아들 왕궁 맡은 자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사관 요아가 그에게 나아가니라(1-3)

 

히스기야 왕 십사 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남 유다를 침공했습니다. 히스기야가 앗수르에게서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붛왕 아하스는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며 의지했습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달랐습니다. 앗수르 의지하기를 그만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1) 산헤립의 예루살렘 공격(1)

 

앗수르 왕 사르곤 2세(주전 722-705년)가 소아시아 지방의 전쟁터에서 갑자기 죽고 그의 아들 산헤립(주전 705-681년)이 왕위에 오르는 과도기에 앗수르의 지배 아래 있던 민족들이 봉기를 꾀했습니다. 아람 족속의 수장이었던 므로닥발라단(39:1)이 엘람(22:6)의 지원을 받아 바벨론을 점령해 왕위에 올랐고, 유다 왕 히스기야도 주변 나라들을 규합해 앗수르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반앗수르 연합의 기세는 1년을 넘지 못했습니다. 산헤립은 므로닥발라단을 다시 쫓아내고 동쪽의 산악 지대까지 평정하고 시리아-팔레스티나로 원정을 떠났습니다. ‘히스기야 왕 십사년’(주전 701년) 산헤립은 유다로 올라와서 모든 견고한 성읍을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고립시켰습니다. 그는 ‘라기스에서부터’ 협상 대표로 랍사게를 예루살렘으로 파견했습니다(왕하 18:17).

 

(2) 산헤립이 파견한 랍사게(2)

 

라기스는 해안 평야로부터 진격해 들어오는 적들을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예루살렘 다음으로 중요한 성읍이었습니다. 랍사게의 임무는 히스기야에게 항복을 종용하는 것이었기에 ‘대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위한 전투병보다는 과시를 위한 파견부대나 호위병을 가리킵니다. 랍사게가 위치한 ‘윗못 수도 곁 세탁자의 밭 큰 길’은 이사야가 아들 스알야숩과 함께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를 만나 여호와의 신탁을 전달한 곳이기도 합니다(7:3). 연결해서 읽자면, 아하스가 ‘윗못 수도 곁 세탁자의 밭 큰 길’에서 이사야를 통해 전달된 여호와의 신탁을 거절하고 앗수르에 의지한 결과로 예루살렘이 앗수르 군대에 포위당하는 위기에 처합니다.

 

(3) 히스기야의 협상단(3)

 

히스기야가 파견한 유다의 협상단은 세 명의 고위 관료로 구성됩니다. 제일 먼저 언급된 엘리아김은 ‘왕궁 맡은 자’로 왕 다음의 최고위직에 속했습니다. 협상단의 두 번째는 ‘서기관 셉나’로, 22:15은 그를 ‘국고를 맡고 왕궁을 맡은 자’로 소개합니다. 그 사이에 셉나의 지위에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해줍나다. 세 번째 ‘사관 요아’는 여기에만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랍사게의 첫 번째 연설과 유다 사절의 반응(4-12)

예배는 하나님 백성의 산앙고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해 우리를 만나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삶이 희미해지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희미해집니다.

 

4랍사게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히스기야에게 말하라 대왕 앗수르 왕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믿는 바 그 믿는 것이 무엇이냐 5내가 말하노니 네가 족히 싸울 계략과 용맹이 있노라 함은 입술에 붙은 말뿐이니라 네가 이제 누구를 믿고 나를 반역하느냐 6보라 네가 애굽을 믿는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에 찔리리니 애굽 왕 바로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7혹시 네가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노라 하리라마는 그는 그의 산당과 제단을 히스기야가 제하여 버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명령하기를 너희는 이 제단 앞에서만 예배하라 하던 그 신이 아니냐 하셨느니라 8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 주 앗수르 왕과 내기하라 내가 네게 말 이천 필을 주어도 너는 그 탈 자를 능히 내지 못하리라 9그런즉 네가 어찌 내 주의 종 가운데 극히 작은 총독 한 사람인들 물리칠 수 있으랴 어찌 애굽을 믿고 병거와 기병을 얻으려 하느냐 10내가 이제 올라와서 이 땅을 멸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 없음이겠느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올라가 그 땅을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11이에 엘리아김과 셉나와 요아가 랍사게에게 이르되 우리가 아람 방언을 아오니 청하건대 그 방언으로 당신의 종들에게 말하고 성 위에 있는 백성이 듣는 데에서 우리에게 유다 방언으로 말하지 마소서 하니 12랍사게가 이르되 내 주께서 이 일을 네 주와 네게만 말하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냐 너희와 함께 자기의 대변을 먹으며 자기의 소변을 마실 성 위에 앉은 사람들에게도 하라고 보내신 것이 아니냐 하더라 (4-12)

 

이제 랍사게는 히스기야의 믿음을 조롱합니다. 그는 히스기야의 개혁이 오히려 하나님께 가증한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수많은 신당을 없애고 오직 예루살렘 성소의 제단에서만 제사 드리게 한 히스기야의 개혁을 폄하합니다. 그리고 유다의 무력함을 조롱합니다.

 

(1) 랍사게의 첫 번째 연설(4-10)

 

랍사게의 연설은 처음부터 중심 주제를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네가 믿는 바 그 믿는 것이 무엇이냐?’(4) 랍사게는 히스기야가 신뢰하는 것이 허상임을 주장합니다. 전쟁은 입으로 하는 말장난이 아닙니다. ‘입술에 붙은 말’로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없습니다(5). 계략과 용맹이 있어야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9:6; 11:2). ‘반역하느냐’는 앗수르와 유다 사이에 어떤 정치적 협약이 있었음을 시사해줍니다(왕하 18:7). 랍사게는 먼저 히스기야가 도움을 기대하는 애굽의 실체를 폭로합니다. 애굽은 몸을 의지하는 자에게 치명적 상처를 입히는 ‘상한(부러진) 갈대 지팡이’에 불과합니다(6; 겔 29:6-7). 랍사게의 주장은 애굽을 믿지 말라고 거듭 고발했던 이사야의 선포(19:117; 20:1-6; 30:1-7; 31:1-3)와 매우 유사합니다. 물론 이사야는 앗수르에 항복할 것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유다의 생존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애굽이나 앗수르는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는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을 선택하신 여호와만 의존하도록 경고했습니다.

다음으로 랍사게는 히스기야의 종교 정책을 비판적으로 언급합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노라’고 말하지만, 히스기야는 지방의 ‘산당과 제단’을 제하여 버리고 제의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제한한 왕입니다(7;왕하 18:4). 랍사게는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의지에 반하는 정책으로 정죄합니다. 아마도 랍사게는 예루살렘 성전 중심적 개혁에 반감을 품고 있던 세력을 히스기야로부터 분리시키려 했던 것 같습니다. 지방의 산당을 폐지해버린 히스기야의 조치는 그곳에서 종사하던 제사장들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을 것이고, 또 개혁에 반대한 자들은 앗수르의 침략에서 히스기야를 징벌하는 여호와의 의지를 보았을 것입니다. 랍사게는 히스기야의 무능력도 조롱합니다. 말을 수 있는 자들을 마련할 수 있다면 말 이천 마리를 주겠다고 내기를 청합니다(8). 한때 유다는 군마로 가득했지만(2:7), 이제는 병력을 거의 다 상실하고 예루살렘은 고립무원의 신세가 됐습니다. 말을 준다 해도 말을 탈 병사를 구할 수 없는 참담한 처지가 됐습니다. 히스기야는 애굽의 병거와 기병의 도움만 바라볼 뿐, 그의 군대로는 앗수르 왕에게 속한 가장 낮은 계급의 지휘관 한 명도 물리칠 수 없습니다(9). ‘주의 종’은 여기서는 군 지휘관을 가리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랍사게는 산헤립의 예루살렘 원정이 여호와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고 침략의 신학적 정당성을 유세(遊說)합니다(10). 겉보기에는 이사야의 선포(사 5:26-30; 7:18-25; 10:5-14)와 다르지 않은, 여호와께서 앗수르의 공격을 허락하셨다는 랍사게의 주장은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허황한 소리로 만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2) 랍사게와 유다 사절의 대화(11-12)

 

도발적인 연설에 사람들이 동요할 것을 두려워한 유다 협상단은 성벽 위에 있는 사람들이 들을 수 없게 유다 말 대신에 아람 말로 말해줄 것을 요청하지만, 랍사게는 이를 극히 모욕적이고 위협적인 언사로 거절합니다(11-12).

 

랍사게의 두 번째 연설과 유다 사절의 반응(13-22)

믿음에는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사탄은 우리 믿음을 흔들려고 달콤하고 헛된 것들에 눈을 돌리게 합니다. 사탄은 다양한 유혹으로 우리의 믿음을 뒤흔듭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물질의 유혹입니다. 세상을 따르면 당장 복을 받게 될 것처럼 유혹합니다. 달콤합니다. 사탄은 주로 그 약점을 공격합니다.

 

13이에 랍사게가 일어서서 유다 방언으로 크게 외쳐 이르되 너희는 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을 들으라 14왕의 말씀에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미혹되지 말라 그가 능히 너희를 건지지 못할 것이니라 15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여호와를 신뢰하게 하려는 것을 따르지 말라 그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시리니 이 성이 앗수르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 할지라도 16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각각 자기의 포도와 자기의 무화과를 먹을 것이며 각각 자기의 우물 물을 마실 것이요 17내가 와서 너희를 너희 본토와 같이 곡식과 포도주와 떡과 포도원이 있는 땅에 옮기기까지 하리라 18혹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할지라도 속지 말라 열국의 신들 중에 자기의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19하맛과 아르밧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스발와임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건졌느냐 20이 열방의 신들 중에 어떤 신이 자기의 나라를 내 손에서 건져냈기에 여호와가 능히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하셨느니라 하니라 21그러나 그들이 잠잠하여 한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왕이 그들에게 명령하여 대답하지 말라 하였음이었더라 22그 때에 힐기야의 아들 왕궁 맡은 자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사관 요아가 자기의 옷을 찢고 히스기야에게 나아가서 랍사게의 말을 그에게 전하니라(13-22)

 

랍사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모독합니다. 열국의 신들 가운데 어떤 신도 앗수르 왕에게서 그 나라를 구하지 못했기에, 하나님도 예루살렘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지지 못할 것이라고 큰소리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열국의 우상들과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1) 랍사게의 두 번째 연설(13-20)

 

랍사게는 유다 말로 예루살렘 주민들을 향해 히스기야에게 미혹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14-16a). 히스기야가 여호와께서 구해주실 것을 기대하지만, 그것은 헛된 기대일 뿐이라고 합니다. 목숨을 구하려면 그의 헛된 말에 속지 말아야 한다고 놀립니다. 15절에서 랍사게가 인용한 히스기야의 말은 전형적인 구원 신탁으로(사 31:5; 렘 15:21; 39:17; 겔 34:12,16), 산헤립과 히스기야의 대결이 점차 산헤립과 여호와의 대결로 바뀌어 갑니다. 히스기야와 그의 백성을 분리시킨 랍사게는 이제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항복을 권유합니다. 저항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에서 나와 앗수르 왕에게 복종하면 풍요롭고도 안전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약속합니다(16b). ‘각각 자기의 포도와 자기의 무화과를 먹을 것이며’는 자유 시민의 이상적 삶을 보여주는 비유적 표현입니다(왕상 4:25;미 4:4).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나안 땅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모르는 산헤립은 이방 땅에서 잘살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도 합니다(17). 산헤립이 여호와의 상대역으로 등장합니다. 산헤립이 축복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대신해서 풍요로운 삶을 보장해주고, 이스라엘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던 여호와처럼 이들을 ‘곡식과 포도주와 떡과 포도원이 있는 땅’으로 데려갑니다.

18-20절은 주제에 있어 15-16a절에 직접 연결됩니다. 산헤립은 여호와를 많은 신 가운데 하나로 취급하며 예루살렘의 마지막 소망을 짓밟습니다. 어떤 신도 ‘앗수르 왕의 손에서’ 제 나라를 구해낼 수 없었습니다(10:10–11). 사마리아는 주전 722년에, 하맛과 아르밧은 주전 720년에 앗수르에 봉기했다가 멸망했습니다(10:9). 스발와임은 여기에만 나오는 도시 이름으로 그 위치도 불분명합니다. 반복 사용된 '내 손에서'는 산헤립의 절대 교만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이 이방신들과 싸워 이겼다고 말하면서 신적 능력을 주장합니다. 그는 직접 여호와를 공격합니다. ‘여호와가 능히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산헤립의 상대가 히스기야에서 여호와로 완전히 전환됩니다.

 

(2) 히스기야 사절의 침묵(21-22)

 

히스기야가 신뢰하는 여호와께서 산헤립의 주장을 인정하고 민족들의 신들 가운데 하나로 남으시든지, 그렇지 않으면 당신께서는 그들과는 다른 존재임을 보여주셔야 하는 갈림길에 놓이십니다. 예루살렘의 운명에 따라 땅의 역사를 결정하고 경영하는 주체가 누구인지가 판가름 납니다. 왕의 명령을 미리 받았던 협상단은 랍사게의 도발적 연사에 응수하지 않습니다. 산헤립이 여호와의 권위에 도전했기에 이제 응답은 여호와에게 나와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마다 믿음을 흔드는 수 많은 유혹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유혹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유혹을 이기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힘이시기 때문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더욱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십시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끝까지 그 하나님만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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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35-01)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

이사야 35장 1-10절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고난과 슬픔과 문제의 바람은 불어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실 그날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스리시는 그 나라가 임할 때 우리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입니다.

 

  • 심판이 유다 역사의 전환점이기는 하지만, 여호와의 최종 목표는 아닙니다. 그분의 심판으로 소망 없이 살아가는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선포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생명을 얻어 아름다운 과수원으로 변합니다. 흩어졌던 자들이 구속함을 받아 광야의 대로를 통해 시온으로 돌아옵니다. 슬픔과 탄식의 시온이 기쁨과 즐거움의 시온으로 바뀝니다.

기쁨의 선포(1-2)

하나님의 은혜가 악을 행한 열국들에게는 심판이 임합니다. 하지만 여호와를 앙망한 의인들에게는 천국이 약속됩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실현되는 곳으로, 평화가 가득한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그 나라를 미리 보여 주심으로 그곳을 사모하면서 현실의 고난을 잘 이겨 내도록 도우십니다.

 

1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2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1-2)

 

광야와 메마른 땅은 악인들의 통치 아래서 억압받고 탈취당하는 경건한 자들의 비참한 모습을 의미합니다. 유다는 앗수르와 바벨론의 침략으로 사막처럼 피폐하고 황폐해졌습니다. 하지만 이제 원수들의 멸망으로 압제와 약탈에서 해방됩니다.

 

(1) 꽃이 피는 광야(1)

 

심판의 시대를 사는 자들에게 구원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기쁜 소식이 선포됩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경이로운 일이 발생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고, 사막은 즐거워하며 백합화를 피웁니다. 생명체가 살 수 없는 땅에서 생명이 자라나고, 슬픔과 탄식 만들리던 땅에서 즐거움과 기쁨의 소리가 들립니다. 임신할 수 없는 여자가 아기를 낳고 기뻐하듯 메마른 땅이 아름다운 꽃으로 치장하고 기뻐합니다. 광야처럼 황폐해진 가나안 땅이 기름진 땅으로 변하고,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습니다.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는 레바논처럼, 과실수가 견실하게 열매를 맺는 갈멜처럼, 곡식들이 풍성하게 영그는 사론처럼 비옥한 땅으로 바귑니다. 레바논의 울창한 산림은 건축 자재의 보고(寶庫)로 특히 백향목이 유명했습니다. ‘과수원’을 의미하는 갈멜은 하이파 남쪽 지중해를 바라보며 낮게 자리한 기름진 산지였고, 사론은 북쪽의 갈멜과 남쪽의 압바 사이의 지중해 해안을 따라 펼쳐진 평야 지대였습니다.

 

(2) 여호와의 영광을 맺는 광야(2)

 

자연의 경이로운 변혁 가운데 여호와의 영광과 아름다움도 함께 계시됩니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봅니다. ‘그것들’은 문법적으로는 1절의 사막과 메마른 땅과 광야를, 실질적으로는 3절 이하에 나오는 심판의 시대를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두려움과 절망 가운데 사는 자들이 광야를 옥토로 변모시키시는 여호와의 놀라운 능력을 목도하게 됩니다. 영광(카보드)과 아름다움(하다르)은 그분의 왕적 위엄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시 96:6; 104:1). 40:5에서는 모든 육체가 광야의 대로를 통해 시온으로 돌아오시는 여호와의 영광을 봅니다.

 

구원하러 오시는 하나님(3-6a)

낙담과 절망의 근원은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에 빠지는 순간, 희망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따라서 먼저 두려움을 몰아내야 합니다. 구려움이 떠나갈 때 다시 강하게 됩니다. 두려움을 온전히 극복하는 길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잠잠히 하나님의 구원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3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4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3-6a)

 

하나님께서는 연약해진 백성을 위로하기 원하십니다. 약한 손과 떨리는 무릎은 고난과 핍박으로 지치고 낙담한 영혼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현실의 고통으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상실합니다. 믿음마저 흔들입니다.

 

(1) 위로와 권면(3-4)

 

본격적으로 구원을 선포하기에 앞서 예언자는 먼저 청자 ‘너희’에게 용기를 내도록 권면합니다(3). 심판의 시대를 사는 자들에게 구원 시대의 도래는 기쁜 소식이었겠지만,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눈앞의 현실은 ‘광야와 메마른 땅과 사막’이었습니다. 약속으로 주어진 구원 시대에 참여하려면 불안과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약한 손’(축 늘어진 두 손)과 ‘떨리는 무릎’은 대적 앞에서 용기를 잃고 무서워하는 자의 모습으로, ‘너희’가 전쟁에서 패한 자들과 같은 처지에 놓였음을 시사합니다. 절망과 두려움이 구원의 기쁜 소식에 반응하지 못하게 만들기에 용기를 내서 떨쳐버려야 합니다. ‘강하게 하고 굳게 하라’는 여호수아에게 거듭 주어진 명령이기도 합니다(신 3:28; 31:6-7,23; 수 1:6-7,9,18;10:25). ‘너희’에게 용기를 내도록 권면한 예언자가 4절에서 또 다른 ‘너희’에게 격려하는 사명을 맡깁니다. 아마도 예언자의 선포에 일부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자들이 있어, 그들에게 ‘겁내는 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라고 명령하는 것 같습니다.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내용상 예언자의 권면과 동일합니다. 새로운 것은 그 다음에 나옵니다. ‘보라, 너희 하나님이시다. 복수가 온다, 하나님의 보복이 온다. 그분께서 친히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오심과 그분의 보복은 먼 미래에나 성취될 약속이 아닙니다. 현재 이뤄지고 있는 그분의 사건입니다. ‘보복이 온다’와 ‘너희를 구원하신다’는 짝으로 하나님께서 오시는 목적을 보여줍니다. 보복의 대상은 달리 언급되지 않지만, 34장의 문맥적 관계에 따라 에돔과 민족들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34:8에서도 ‘에돔에 대한 여호와의 보복’과 ‘시온의 송사를 위한 신원’이 하나의 사건으로 선포됩니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대적에 보복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에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복은 악한 자들에게 그분의 정의를 보여주시는 사법적 행위에 속합니다.

 

(2) 불구의 회복(5-6a)

 

보복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도래가 가져올 구원 시대의 열매가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모든 불구가 고침을 받고 회복됩니다. 맹인의 눈과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리고, 다리를 저는 이가 사슴처럼 뛰고 벙어리의 혀는 환호합니다(5-6). 열거된 불구자들의 치료는 비유적-영적 차원을 넘어 문자적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적 개입이 메마른 땅을 비옥한 땅으로 변화시키듯(1-2), 저주의 표지 아래 살던 불구자들이 질병에서 벗어나 구원을 경험합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으로 가능해집니다. 맹인과 다리 저는 이는 쫓겨난 자들의 귀향과 관련하여, 못 듣는 이와 말 못하는 이는 귀환의 기쁨과 관련하여 언급된 것 같습니다. 먼 길을 떠나는 것이 신체적으로 불가능한 맹인과 저는 자가 고침을 받고 안전하게 여행하고, 감정을 표출할 수 없는 못 듣는 이와 말 못하는 이가 고침을 받고 환호함으로 귀향의 기쁨을 마음껏 표현합니다. 비유적 차원에서 읽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그분의 역사를 볼 수 없었던 자들이 (6:9-10) 그분의 말씀을 듣고 영광을 보고 찬양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시온으로 올라가는 길(6b-1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이유는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망각한 채 우상을 섬겼습니다. 또한 하나님보다 세상을 의지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 나라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성도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가 예배의 삶을 일어가고 있습니다.

 

6b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8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9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10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6b-10)

 

본 단락은 그리스도의 메시아 사역과 관련이 있습니다. 맹인의 눈이 밝아지고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약한 자들을 온전하게 치유하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온전하게 보고 들으며 말할 수 있습니다.

 

(1) 물이 흐르는 광야(6b-7)

 

하나님의 정의가 회복되면 자연도 극적으로 변할 것입니다. 6b-7절은 주제와 표상에 있어 1-2절에 연결됩니다. 광야와 사막에 물이 터져 나와 강물이 흐르고(41:18; 43:19-20), 생명을 태워 죽이는 뜨거운 모래밭이 못이 되고 메마른 땅이 샘터가 되고, 승냥이가 살던 곳에는 풀 대신 갈대와 부들이 자랍니다. 가나안에서 물은 생존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였습니다. 물이 없어 생명이 살 수 없었던 광야와 사막이 물이 넘쳐흐르는 생명의 땅이 됩니다. ‘솟겠고’는 ‘쪼개다’를 의미하는 동사 ‘바카’의 번역으로, 출애굽 때 광야에서 바위를 쪼개 물이 솟아나게 한 사건을 암시한다. 승냥이는 황무지에 사는 대표적인 동물로 성읍의 파괴나 경작지의 황폐를 언급할 때 자주 등장한다. 승냥이가 사는, 풀이나 겨우 자라는 황무지가 나일 삼각주처럼 비옥한 곡식 창고가 됩니다.

 

(2) 광야의 대로(8-9a)

 

8-10절은 하나님께서 광야와 사막에 물이 솟아 강물이 흐르게 하시는 목적을 보여줍니다. 강물이 흐르는 광야에 ‘거룩한 길’이라 부르는 ‘대로’가 생깁니다. 대로는 바스러진 암석 조각이나 돌을 깔아 만든 포장도로로, 주로 통상로나 정치-군사적 용도로 이용됩니다. 광야의 대로는 거룩한 길이기에 아무나 다닐 수 없습니다. ‘깨끗하지 못한 자’와 ‘우매한 행인’은 지날 수 없고, ‘구속함을 받은 자’만 지날 수 있습니다. 깨끗하지 못한 자는 제의적으로 부정한 자로 1차적으로는 이방인을, 우매한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고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자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도 제의적-윤리적으로 정결한 자만 거룩한 길을 다닐 수 있습니다. 광야의 대로는 여호와께서 만드시는 길이기에 사자나 사나운 짐승이 다니지 않는 안전한 길입니다.

 

(3) 구속함을 받은 자의 귀환(9b-10)

 

여호와께서 마련해주신 안전한 광야 길을 통해 ‘구속함을 받은 자’, 곧 ‘여호와에 의해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시온으로 돌아옵니다. 연례적인 절기를 맞아 지방의 순례자들이 노래하며 시온으로 올라왔듯이, 출애굽 세대가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들어왔듯이, 남은 자들이 환호하며 거룩한 길을 따라 시온으로 돌아옵니다. 불안과 두려움에 머리를 떨구고 살던 자들이 속량함을 받고 머리를 들고 영원한 즐거움을 본다.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고 '기쁨과 즐거움'이 시온에 가득 넘친다. '구속하다'(가알 xa)는 구속하는 자와 구속을 받는 자가 피를 나눈 친족 관계에 있음을 전제하는 단어이며, 이는 여호와께서 고엘(기업 무를 자) 자격으로 구원하셨음을 시사하고, ‘속량하다’(파다)는 원래 상법에 뿌리를 둔 개념으로 신학적 맥락에서는 적들의 억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출하시는 하나님의 해방 사역을 가리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그 나라를 소망하며 오늘을 살아갑니다. 비록 지금은 환난과 고통이 심할지라도 믿음으로 견디며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다스리시는 그 나라가 임하면 우리는 회복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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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34-01)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이사야 34장 1-17절


 

교만한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맹세합니다. 그 심판은 철저합니다. 악의 권세가 강할지라도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는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을 억압하는 교만한 열방을 심판하십니다. 심판을 경고하는 본문은 온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교훈합니다.

 

  • 에돔이 여호와의 심판에 떨어진 민족들의 대표로 등장합니다. 창세기의 족장 이야기에 의하면 에돔(에서)과 야곱(이스라엘)은 한 뿌리에서 나왔지만, 이후의 역사는 서로에게 자주 적대적이었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위하여 복수하시는 날에 에돔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완전한 멸망에 떨어질 것입니다. 민족들은 에돔의 파국적 운명을 보고 대적에게 보복하시는 여호와의 능력을 깨닫고 살길을 찾아야 합니다.

 

민족들의 심판(1-4)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이 사실을 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생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도, 생명을 다스리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1열국이여 너희는 나아와 들을지어다 민족들이여 귀를 기울일지어다 땅과 땅에 충만한 것, 세계와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이여 들을지어다 2대저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진노하시며 그들의 만군을 향하여 분내사 그들을 진멸하시며 살륙당하게 하셨은즉 3그 살륙당한 자는 내던진 바 되며 그 사체의 악취가 솟아오르고 그 피에 산들이 녹을 것이며 4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 같이 말리되 그 만상의 쇠잔함이 포도나무 잎이 마름 같고 무화과나무 잎이 마름 같으리라(1-4)

 

하나님께서는 열방을 향하여 진노하시며 그들의 만군을 향하여 분을 내시십니다. 열방에 대한 진노는 죄악 때문입니다. 죄악은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열방의 죄가 찰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1) 민족들의 소환(1)

 

하늘과 땅을 대상으로 하는 심판이 선포됩니다. 심판의 범위가 창조 세계를 포함하기에 청자의 범위도 세계적으로 확장됩니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과 모든 사람은 가까이 와서 귀를 기울여 예언자의 선포를 들어야 합니다(1).

 

(2) 민족들에 진노하신 여호와(2-4)

 

청자로 부름 받은 민족들이 갑자기 심판의 대상으로 바뀝니다. 여호와께서 열방과 그들의 모든 군대에 진노하시고 그들을 진멸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2). 그 이유를 여기서는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진노와 분노는 죄에 대한 그분의 부정적 반응입니다. 동사 ‘진멸하다’는 거룩한 전쟁에 속하는 개념이며 예외 없이 모두 멸망에 넘겨질 것을 보여줍니다. ‘살육 당하게 하셨은 즉’은 민족들의 심판이 누군가의 손을 통해 이뤄질 것을 시사합니다. 여호와의 전쟁에서 살해당한 자들의 시체가 들판에 그대로 버려져 악취가 진동하고, 폭우로 산사태가 일어나듯이 산이 죽은 자들의 피로 녹아내립니다(3). 온 땅이 시체 썩는 냄새와 넘쳐흐르는 피로 가득 찹니다. 고대 세계에서 장례는 가장 중요한 의식에 속했습니다. 정상적인 장례 절차에 따라 조상 묘지에 안장되지 못한 죽음은 영원한 안식이 허락되지 않은 저주받은 죽음에 속했습니다(신 28:26; 삼하 21:10-14; 렘 7:33; 겔 32:5). 민족들을 진멸하는 전쟁이 땅을 넘어 하늘에까지 파국적인 영향을 미칩니다(13:10,13; 66:22).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려 사라지고, 포도나무 잎과 무화과나무 열매가 시들어 떨어지듯이 ‘하늘의 만상’이 모두 시들어 떨어집니다(4). 하늘이 펼쳐진 휘장이나 천막에 비유되는 경우는 있어도(시 104:2; 사 40:22; 슥 12:1) 글씨가 쓰인 두루마리 책에 비유되는 경우는 여기가 유일합니다(참조. 계 6:14). 멸망의 철저성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하늘의 만상’은 문자적으로는 ‘하늘의 모든 군대’로, 하늘의 별들을 의미합니다. 민족들의 심판은 4절에서 끝나고 5절부터는 에돔이 여호와의 진노의 대상으로 등장합니다. 민족들의 심판과 에돔의 심판은 하나의 사건으로 서로 연결됩니다. 후자가 전자의 예표가 됩니다. 민족들은 심판의 대상이자(2-4) 에돔에 대한 심판의 증인(5-14) 역할을 담당합니다. 동일한 심판이지만 민족들에게는 피할 수 있는 길이 주어집니다. 먼저 심판받는 에돔의 멸망을 보고 여호와의 보복을 깨닫는다면 멸망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에돔의 운명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에돔의 심판(5-15)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처럼 피에 취하는 끔찍한 날이 될 것입니다. 악과 불경건은 반드시 대가를 치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처럼 피에 취하는 끔찍한 날이 될 것입니다. 심판의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요, 보응하는 하나님이십니다.

 

5여호와의 칼이 하늘에서 족하게 마셨은즉 보라 이것이 에돔 위에 내리며 진멸하시기로 한 백성 위에 내려 그를 심판할 것이라 6여호와의 칼이 피 곧 어린 양과 염소의 피에 만족하고 기름 곧 숫양의 콩팥 기름으로 윤택하니 이는 여호와를 위한 희생이 보스라에 있고 큰 살륙이 에돔 땅에 있음이라 7들소와 송아지와 수소가 함께 도살장에 내려가니 그들의 땅이 피에 취하며 흙이 기름으로 윤택하리라 8이것은 여호와께서 보복하시는 날이요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해라 9에돔의 시내들은 변하여 역청이 되고 그 티끌은 유황이 되고 그 땅은 불 붙는 역청이 되며 10낮에나 밤에나 꺼지지 아니하고 그 연기가 끊임없이 떠오를 것이며 세세에 황무하여 그리로 지날 자가 영영히 없겠고 11당아새와 고슴도치가 그 땅을 차지하며 부엉이와 까마귀가 거기에 살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 위에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드리우실 것인즉 12그들이 국가를 이으려 하여 귀인들을 부르되 아무도 없겠고 그 모든 방백도 없게 될 것이요 13그 궁궐에는 가시나무가 나며 그 견고한 성에는 엉겅퀴와 새품이 자라서 승냥이의 굴과 타조의 처소가 될 것이니 14들짐승이 이리와 만나며 숫염소가 그 동류를 부르며 올빼미가 거기에 살면서 쉬는 처소로 삼으며 15부엉이가 거기에 깃들이고 알을 낳아 까서 그의 그늘에 모으며 솔개들도 각각 제 짝과 함께 거기에 모이리라(5-15)

 

여호와의 심판은 이스라엘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칼은 에돔 위에도 내릴 것입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의 형제 나라였음에도 이스라엘을 가장 많이 괴롭혔습니다. 특히 유다가 멸망당할 때 이방인과 함께 제비를 뽑고 예루살렘을 약탈했습니다.

 

(1) ‘여호와의 칼’(5-8)

 

심판의 대상이 민족들에서 에돔으로 바뀝니다. 하늘에서 취하도록 잔뜩 마신 ‘여호와의 칼’이 에돔 위로, 여호와께서 심판에 붙여 진멸하시기로 작정한 백성 위로 내려옵니다(5). 칼은 가장 기본적인 전쟁 무기로, 여호와의 칼은 여호와께서 사용하시는 칼을 가리킵니다(겔 21:3-5). 그분께서 직접 손에 칼을 들고 에돔을 치십니다. ‘칼이 ~ 위로 내려오다’는 여기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심판의 철저성을 보여줍니다. 31:4에서는 예루살렘을 보호하시려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그 언덕 위로 내려오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여호와의 칼이 어린 양과 염소의 피로 흥건하고 수양의 콩팥 기름으로 덮입니다(6). 에돔에 임할 ‘큰 살육’이 여호와께 제사 드리기 위해 희생제물을 잡는 제의적 의식으로 표현됩니다. 에돔 사람들이 제사를 위해 잡는 희생 동물처럼 살육을 당합니다. 어린 양과 염소와 숫양은 하나님께 적합한 희생 동물에 속합니다(민 7:17; 렘 51:40). 살육(희생제사)의 장소로 언급된 보스라는 에돔의 수도로 해발 천 미터 이상 되는 고지대에 있었습니다. 난공불락을 자랑하는 천혜의 요새지만, 여호와께서 직접 칼로 치시기에 살육을 피하지 못합니다. 희생 동물로 작은 짐승뿐만 아니라 큰 짐승도 언급됩니다. 들소와 송아지(젊은 소)와 수소의 피로 땅이 흠뻑 취하고 이들의 기름으로 흙이 뒤덮입니다(7). 송아지와 수소는 희생제물로 드려지지만, 들소는 제사에 사용되지 않습니다. 들소는 힘과 능력의 상징입니다(민 23:22; 신 33:17). 들소조차 여호와의 칼 앞에서는 전혀 저항하지 못합니다. 여호와의 칼이 에돔 위로 내려오기에 들소와 송아지와 수소가 도살장에 내려갑니다. 여호와께서 에돔에 보복하시는 날은 ‘시온의 송사를 위해 신원하시는 해’이기도 합니다(8). 그분께서 시온의 법적 권리를 되찾아주기 위해 에돔에 보복하십니다. ‘하나님의 보복’은 하나님 정의의 부정적 표현입니다. 불법은 징계를 통해 상쇄되고 해소되어야 합니다. ‘신원’도 파괴된 사법 질서를 회복하는 보응적 행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징벌을 통해 그분의 정의가 회복됩니다.

 

(2) 들짐승의 소굴이 된 에돔(9-15)

 

에돔의 멸망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사해로 함몰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상입니다. 강들은 역청으로, 티끌(흙)은 유황으로, 땅은 불타는 역청으로 변합니다(9). 소돔과 고모라의 유황불은 성읍의 멸망과 함께 꺼졌지만, 에돔을 태우는 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고 끊임없이 타오릅니다(10). 완전히 황폐해져 그리로 지나는 사람이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초지로도 사용하지 못하고 영원히 들짐승의 차지가 됩니다. 여호와께서 에돔 땅 위에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드리우시기에 당아새(올빼미?)와 고슴도치와 부엉이와 까마귀가 에돔 땅의 소유주가 됩니다(11). 줄로 재어 민족들에게 땅을 나누어주셨던 여호와께서(신 32:8) 황폐해진 에돔 땅을 혼란의 줄로 재서 들짐승에게 나누어주십니다. 땅 분배와 관련해서 추는 소유를 표시하는 경계석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혼란(토후 in)과 공허(보후 na)가 창세기 1:2을 염두에 두고 선택된 표현이라면, 에돔은 창조 이전의 혼돈과 무질서 상태에 빠집니다. 멸망에서 일부 귀인이 살아남을지라도 왕국을 선포하지 못하고 방백들도 모두 없어집니다(12). 심판으로 폐허가 된 에돔은 재건되지 못하고 영원히 폐허로 남습니다. 허물어진 궁궐과 견고한 성에는 가시나무와 엉겅퀴와 새품이 자라고, 승냥이와 타조와 들짐승(사막 짐승)과 이리와 숫염소(염소 귀신)와 올빼미(릴리트)가 터를 잡습니다(13-14). 권력과 사치를 즐기던 자들로 번잡하던 궁궐과 요새는 황무지가 돼 들짐승의 거주지가 됩니다.

 

심판의 확실성(16-17)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믿지 못합니다. 겸손한 자들은 열국의 심판과 자연의 변화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관심 없는 나라는 없으며, 살피지 않으시는 사람 역시 없습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는 열국을 통치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십니다. 그 어떤 것도 우연히 일어나지 않습니다.

 

16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 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17여호와께서 그것들을 위하여 제비를 뽑으시며 그의 손으로 줄을 띠어 그 땅을 그것들에게 나눠 주셨으니 그들이 영원히 차지하며 대대로 거기에 살리라(16-17)

 

이 예언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기에, 이 말씀들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에돔 땅을 들짐승들에게 배분해 주십니다. 이것이 악한 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대적들은 철저하게 파멸됩니다.

 

(1) 여호와의 책에 기록된 에돔의 멸망(16)

 

본 16절은 구약성경의 가장 난해한 절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청자 ‘너희’는 1절의 청자 ‘열국과 민족들’과 구별되는 여호와를 아는 사람, 곧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에돔의 심판 예언이 기록된 ‘여호와의 책’이 이사야의 일부 또는 11-15절의 짐승들이 나오는 오경 또는 다른 예언서를 의미하는지 불분명합니다. 또 ‘이것들’이 받는 대상도 모호합니다. ‘이것들 가운데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는 5-15절에서 예언된 사건들을,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는 11-15절에 나오는 짐승들의 쌍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11-15절에서 열거된 짐승 가운데 14절의 올빼미(릴리트)와 15절의 부엉이는 구약성경에서 여기에만 등장합니다. 11절의 고슴도치와 14절의 들짐승(사막 짐승)과 이리는 오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에돔의 심판에 관한 신탁은 다른 예언서들에도 나오지만(렘 49:7-21; 겔 35:1-15; 오바다), 아모스의 경우(1:11-12)를 제외하고는 시기적으로 모두 나중에 속합니다. 하나하나는 매우 이해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에돔의 심판과 멸망이 예언된 대로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2) 들짐승의 몫이 될 에돔(17)

 

본 절은 11-15절의 요약입니다. 거룩한 전쟁을 통해 에돔을 황무지로 만드신 여호와께서 에돔 땅을 들짐승에게 나누어주십니다(17).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 나눠주신 것처럼, 그분께서는 제비를 뽑고 줄로 경계를 정해 황무지에 사는 짐승들에게 배분해주십니다. 에돔 땅이 영원히 폐허가 되어 들짐승의 소유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다고 해서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권세로 모든 일을 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호와께서 보복하시는 날, 철저히 멸망 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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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33-01)


하나님께서 찾으신 경건한 사람

이사야 33장 1-24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9:2). 거룩함은 하나님 백성 됨의 표시입니다. 이런 거룩함은 경건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경건한 삶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하나님을 떠나면 망하는 것입니다. 경건의 삶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 여호와께서 폭력적인 세력(앗수르)을 진멸하시고 예루살렘 왕궁의 어리석은 정치가들이 씌워놓은 속박의 굴레를 벗겨주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시온에서 왕으로 통치하시고 예루살렘에 영원한 안전을 가져다주실 것입니다. 심판의 시대를 사는 자들은 두려워하지 말고, 여호와를 바라보고 그분께 도움을 구하며 현재의 환난을 극복해야 합니다.

 

시온의 구원을 간구하는 기도(1-6)

인생길에는 시도 때도 없이 환난의 비바람이 붑니다. 언제 어떤 환난의 바람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환난을 피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중요한 것은 환난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환난의 바름을 뛰어넘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환난의 바람이 불 때 여호와를 더욱 경외하시길 바랍니다. 그 환난의 우리를 더 강하게 하는 복이 될 수 있습니다.

 

1너 학대를 당하지 아니하고도 학대하며 속이고도 속임을 당하지 아니하는 자여 화 있을진저 네가 학대하기를 그치면 네가 학대를 당할 것이며 네가 속이기를 그치면 사람이 너를 속이리라 2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 3요란한 소리로 말미암아 민족들이 도망하며 주께서 일어나심으로 말미암아 나라들이 흩어졌나이다 4황충의 떼 같이 사람이 너희의 노략물을 모을 것이며 메뚜기가 뛰어오름 같이 그들이 그 위로 뛰어오르리라 5여호와께서는 지극히 존귀하시니 그는 높은 곳에 거하심이요 정의와 공의를 시온에 충만하게 하심이라 6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1-6)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멸망을 선포하셨습니다. 환난의 바람도 하나님께서 다스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 중에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을 지키십니다. 환난 중에도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믿음을 절대로 잃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1) 화의 선언(1)

 

구원의 빛을 만나기 전에 어둠의 골짜기를 지나야 하는 자들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학대하며 속이는 자’(파괴하며 배반하는 자)에게 화를 선포합니다(1). 교만한 권력도 허락된 기간이 지나면 파괴와 배반에 넘겨질 것입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약속과 정의를 신뢰하고 그분께서 개입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2) 구원의 간구(2-4)

 

‘우리’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개입해주시길 고대합니다(2). 그분만이 구원하실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지속적인 도움을 가리키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라는 이들이 끊임없이 고난에 시달리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분이 개입하시면 적들은 도망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일어나셨다는 소리에 놀라 민족들이 큰 소동을 벌이며 흩어집니다(3). 여호와께 대적하던 자들이 멸망합니다. 메뚜기 떼가 푸른 것을 모두 벗겨 먹듯이 살해당한 자들의 소유물이 남김없이 약탈당합니다.

 

(3) 찬양(5-6)

 

여호와께서 시온의 보호자로 찬양을 받으실 것입니다(5). ‘높은 곳에 거하시는 여호와’는 땅의 영향을 받지 않고 땅을 지배하시는 분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높은 곳에서 홀로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하시고 땅의 역사를 경영하십니다. 불의와 불법을 자행하다 심판에 떨어진 예루살렘을 그분께서 정의와 공의로 충만하게 하시고, 그분께서 채워주시는 정의와 공의가 예루살렘의 평안함과 구원을 보장해줍니다(6). 예루살렘을 멸망으로 이끌었던 거짓 지혜와 지식이 사라지고 여호와를 아는 지혜와 지식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애굽이나 앗수르를 두려워하지 말고 참된 반석이신 여호와만 경외하고 그분의 지혜에 의존해서 살아야 합니다.

 

높은 곳에 거하시는 분(7-1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백성 됨의 증거로 거룩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니 하나님의 백성은 당연히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이런 유다를 향해 하나님은 앗수르를 보내사 그들로 수치를 당하게 하십니다.

 

7보라 그들의 용사가 밖에서 부르짖으며 평화의 사신들이 슬피 곡하며 8대로가 황폐하여 행인이 끊어지며 대적이 조약을 파하고 성읍들을 멸시하며 사람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9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레바논은 부끄러워하고 마르며 사론은 사막과 같고 바산과 갈멜은 나뭇잎을 떨어뜨리는도다 10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제 일어나며 내가 이제 나를 높이며 내가 이제 지극히 높아지리니 11너희가 겨를 잉태하고 짚을 해산할 것이며 너희의 호흡은 불이 되어 너희를 삼킬 것이며 12민족들은 불에 굽는 횟돌 같겠고 잘라서 불에 사르는 가시나무 같으리로다 13너희 먼 데 있는 자들아 내가 행한 것을 들으라 너희 가까이에 있는 자들아 나의 권능을 알라 14시온의 죄인들이 두려워하며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이 떨며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하도다 15오직 공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16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의 요새가 되며 그의 양식은 공급되고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7-16)

 

앗수르의 악행은 남 유다를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유다 왕은 앗수르와 평화적 해결을 도모하기 위해 사실들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사신들을 슬피 곡하며 돌아와야 했습니다. 유다의 용사들 역시 울부짖습니다.

 

(1) 탄식: 절망적 현실(7-9)

 

하나님의 심판이 현실화하여 유다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합니다. 예루살렘 주민이 모두 거리로 나와 힘을 합쳐 부르짖습니다. 전쟁터에서 적과 싸워야 할 용사들도 거리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부르짖고, ‘평화의 사신’도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없어 비통하게 웁니다(7). 유다와 예루살렘을 연결해주는 대로가 적의 수중에 떨어져 상인과 여행자가 끊겼고, 대적은 조약을 파기하고 성읍들을 짓밟습니다(8). 전쟁의 참화로 가나안의 기름진 땅이 모두 메말라 생명력을 상실합니다(9). 예루살렘 멸망은 시간문제입니다. 마지막 순간 ‘높은 곳에 거하시는 분’께서 개입하셔서 ‘우리의 팔’과 ‘우리의 구원’이심을(2) 보여주십니다.

 

(2) 응답: 파괴자들의 심판(10-13)

 

오랫동안 바라보시던 여호와께서 행동에 나서십니다. 세 번 반복 사용된 ‘이제’와 세 개의 동사 ‘일어나며’, ‘높이며’, ‘지극히 높아지리라’는 새로운 신적 사건의 시작과 그 확실성을 최고로 강조합니다(10). 그분의 의지에 거슬러 행동하는 자들은 생명력 없는 겨(마른 풀)를 잉태하여 불쏘시개로 쓰이는 지푸라기를 낳고, 이들의 거친 숨은 멸망의 불을 더 지필 뿐입니다(11). 이들은 등에 마른 지푸라기를 지고 불구덩이로 달려드는 자들과 같습니다. 계획 자체가 실패를 잉태하고 있기에 반드시 멸망합니다. 이들은 불에 타고 남은 횟돌(재)처럼, 불에 던져진 가시나무처럼 될 것입니다(12). 멸망에서 다시 회복하지 못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흔적도 없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먼 데 있는 자들’(민족들)과 ‘가까이 있는 자들’(시온의 죄인들)은 너무 늦기 전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13).

 

(3) 시온에 거주할 수 있는 자(14-16)

 

하나님께서는 전에도 여러 번 적들을 진멸하기 위해 일어나셨습니다. 그분의 간섭과 능력은 이미 역사 안에 계시되었기에 알려고 하는 자들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민족들과 시온의 죄인들은 너무 늦지 않게 역사 안에 드러난 그분의 권능을 깨닫고 파국적 심판을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새로운 예루살렘은 내적으로도 정화되어야 합니다. 거룩하신 분의 현존은 불의한 자들에게는 치명적입니다(14). 예루살렘 성전에 거하시는 여호와께서 죄인들에게는 ‘삼키는 불’로 나타나십니다. 오직 악을 멀리하고 의를 행하는 자만 여호와께서 불로 현존하시는 시온에 살 수 있고, 그분의 보호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영영히 타는 것’은 제물을 살라 바치는 번제단의 석쇠를 가리킵니다(레 6:9). ‘죄인들’과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무시하고 공동체의 질서를 파괴하는 자들입니다. 구원받은 시온에 살 수 있는 자의 자격 조건으로 여섯 항목이 제시됩니다(15). ‘공의에 따라 걷는 것’은 하나님 백성의 연대감 속에 이웃과 더불어 사는 자세를, ‘정직하게 말하는 것’은 언어 행위의 의로움을, 토색한 재물은 속임수나 폭력으로 부당하게 취득한 이익을 말합니다. 뇌물은 율법에 의해 엄격하게 금지됐지만(출 23:8) 재판과 상거래에서 빈번하였습니다. ‘피 흘리는 일’은 무죄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만드는 모든 폭력적 행위를, ‘악한 일을 보지 않는 것’은 이웃을 해하려는 음모나 모의에 가담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악에서 떠난 의인은 외부의 위협에서 벗어나 풍족하게 살게 됩니다(16). 여호와의 현존이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며 사는 자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양식과 물이 떨어지지 않게 해줍니다. ‘높은 곳’과 견고한 바위로 된 요새는 적이 침략할 수 없는 안전한 곳을 가리킵니다.

 

시온의 왕 여호와(17-2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하신 이유는 우리를 힘들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라 해도 경건하지 않으면 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유다 백성도 경건을 잃어버렸을 때 하나님께 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십니다.

 

17네 눈은 왕을 그의 아름다운 가운데에서 보며 광활한 땅을 눈으로 보겠고 18네 마음은 두려워하던 것을 생각해 내리라 계산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공세를 계량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망대를 계수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19네가 강포한 백성을 보지 아니하리라 그 백성은 방언이 어려워 네가 알아듣지 못하며 말이 이상하여 네가 깨닫지 못하는 자니라 20우리 절기의 시온 성을 보라 네 눈이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21여호와는 거기에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그 곳에는 여러 강과 큰 호수가 있으나 노젓는 배나 큰 배가 통행하지 못하리라 22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 23네 돛대의 줄이 풀렸으니 돛대 밑을 튼튼히 하지 못하였고 돛을 달지 못하였느니라 때가 되면 많은 재물을 탈취하여 나누리니 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할 것이며 24그 거주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거기에 사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17-24)

 

이전에 유다는 앗수르의 포위로 수치의 슬픔의 베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고, 한 왕이 영광과 존귀를 입습니다. 이 왕은 여호와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광활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1) 아름다운 모습의 왕(17)

 

왕의 출현과 함께 구원 시대가 시작됩니다(17). 시온이 보게 될 ‘아름다운 모습의 왕’이 메시아를 또는 하나님을 가리킬 것입니다. 구원 시대의 통치자는 화려하고도 위엄 있게 외관을 꾸미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십니다. 그분의 통치에 이스라엘 영토는 끝이 보이지 않게 확장됩니다(창 13:14-15).

 

(2) 사라지는 이방 압제자들(18-19)

 

민족들에 의한 경제적 수탈과 군사적 통제가 과거사가 됩니다(18-19).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떠들며 거만하게 거리를 활보하던 민족(앗수르)을 더는 보지 않게 됩니다(19). ‘(화폐를) 계산하던 자’와 ‘(귀금속을) 계량하던 자’는 조공을 위해 돈을 거둬들이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망대를 계수하던 자’는 점령군에 의해 방어 시설로 이용될 수 있는 망대(탑)의 수가 제한됐음을 시사해줍니다.

 

(3) 시온의 샬롬(20-24)

 

해방된 시온에 다시 축제의 기쁨이 돌아옵니다. 예루살렘은 ‘안정된 처소’,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 됩니다(20). 유목민은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말뚝을 뽑고 줄을 정리하며 장막을 거두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다시는 옮겨지지 않습니다. 풀이 넉넉하고 안전하여 다른 초지로 옮기지 않아도 되듯이, 하나님 백성은 예루살렘에서 안전과 풍요를 즐기며 영원히 살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거하시며 그 주변에 넓은 강들을 흐르게 해서 적들이 침입할 수 없게 해주십니다(21). 예루살렘에 현존하시는 그분의 영광과 권능이 강물처럼 성 주변을 흐르니 대적의 접근 자체가 용납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의 절대 안전은 여호와의 왕권에 근거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재판장’으로,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로, ‘우리의 왕’으로 직접 통치하시기에(22), 다시는 불의한 재판장이나 무책임한 지도자나 무능력한 왕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지 않습니다. 왕이신 여호와께서 홀로 싸우시기에 전쟁을 준비하거나 싸움에 나서지 않아도 됩니다(23). 시온은 승리의 기쁨을 즐기기만 하면 됩니다. 누구도 무기를 들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기에 다리를 저는 자까지도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9:3)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은 죄에서 용서함을 받았기에 그곳에는 병든 자나 연약한 자가 없습니다(24). 여호와께서 왕으로 통치하시니 생명을 위협하는 어떤 악한 세력도 예루살렘에 발붙일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외부의 위협에서 지켜주실 뿐만 아니라, 질병이나 사고나 재앙과 같은 모든 부정적 세력으로부터도 안전하게 보호해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경건의 삶을 삽니다. 경건의 삶을 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경건한 삶을 사는 성도를 찾고 계십니다. 오래 신앙 생활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한 삶을 사는 거룩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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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32-01)


공의와 정의로 통치할 의로운 왕

이사야 32장 1-20절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표현하는 말 가운데 그리스도의 편지,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편지라는 의미는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그런 편지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향기라고 했습니다.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어느 곳에 있든지 아름다운 예수님의 향기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로 그리스도의 향기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나눈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 여호와의 계획은 앗수르의 위협에서 예루살렘을 구해주는 것 이상입니다. 구원 시대가 계속될 수 있도록 의로운 통치자들도 예비해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왕과 방백들을 세워 정의와 공의로 통치하게 하실 것입니다. 광야와 아름다운 밭에 정의와 공의가 자리를 잡고, 평화와 평안과 안전을 노리며 살게 됩니다.

 

의로운 왕(1-8)

 

참된 왕은 백성을 사랑합니다. 진리와 공의로 가르치길 원합니다. 공의가 법적으로 형평성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정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세워지는 올바름입니다. 공의가 원리 혹은 방향이라면, 정의는 인간사의 사소한 삶의 맥락과 같은 것입니다. ‘공의와 정의’는 모든 면에 있어서 공평하고 바르다는 것입니다.

 

1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며 2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3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할 것이요 듣는 자가 귀를 기울일 것이며 4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 5어리석은 자를 다시 존귀하다 부르지 아니하겠고 우둔한 자를 다시 존귀한 자라 말하지 아니하리니 6이는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며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르며 주린 자의 속을 비게 하며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을 없어지게 함이며 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8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1-8)

 

하나님께서 세우신 의로운 왕은 사람들의 피난처가 됩니다. 그가 하나님의 공의로 통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들을 향해 가난한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정의를 굽게 하지 말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의 통치를 기뻐할 것입니다.

 

(1) 정의와 공의의 통치(1-5)

 

여호와께서 예비하신 심판 이후의 구원 시대에는 왕이 공의로 통치하고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립니다(1). 방백은 왕의 고위 관료로, 왕과 그의 신하들이 정의와 공의에 따라 백성을 인도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의 후손들에게 기대하셨던 의로운 통치가 이뤄집니다. 왕과 방백들이 모두 광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져 홍수가 났을 때 사람들의 목숨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피신처가, 메마른 땅에서도 생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시냇물이, 작열하는 태양을 피할 수 없는 사막에서도 편히 쉴 수 있게 해주는 시원한 큰 바위 그늘이 됩니다(2). 백성을 피곤하게 만들고 위험한 곳으로 이끌던 이전의 무능력한 지도자들과 달리, 의로운 통치자들은 신실한 목자로 양 떼를 안전하게 보살핍니다. 공의와 정의에 따라 통치하기에 어떤 악한 세력도 백성의 안전과 평안을 위협하지 못합니다.

구원 시대에는 심판을 초래한 한계와 불순종이 극복됩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던 자들이 보게 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던 자들이 듣게 됩니다(3; 6:10; 29:9-10,18). 하나님께서 들러붙은 눈을 떼어주시고 막힌 귀를 뚫어주셔서 그분의 역사를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해주십니다. 왕과 방백들은 정의와 공의로 통치하고, 백성은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여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됩니다. 그때는 ‘조급한 자의 마음’이 깨달음을 얻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고 분명하게 말합니다(4). 조급한 자들은 생각 없이 처신하는 자들이며, 그 마음은 통찰력을 얻을 수 없고, 깨달음이 없기에 저들의 결정은 어리석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눌한 자(더듬거리는 자)는 말에 솔직함과 명료함과 진실함이 결여된 자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조급한 자의 마음이 깨닫는 ‘지식’에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뿐만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 필요한 지식도 포함됩니다. 구원시대에는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3:4-5) 다시는 반복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고귀한 이로, 우둔한 자가 존귀한 이로 불리는 경우가 없을 것입니다(5).

 

(2) 어리석은 자와 존귀한 자(6-8)

 

어리석은 자와 존귀한 자를 대조시키는 6-8절은 현재의 문맥에서 5절의 구체적인 설명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윤리, 종교적으로도 타락한 자를 가리킵니다.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고, 마음으로 죄악을 지어내고 불경한 짓을 저지르고 여호와를 거슬러 패역한 말을 하고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지 않습니다.

권력과 힘을 남용해 제 욕심만 채우고, 공동체의 어려움에는 눈을 감음으로써 여호와께 반역을 일삼는 자입니다.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르며’는 공동체를 여호와에게서 벗어나게 한다는 뜻입니다. 굶주린 이와 목마른 이를 돕지 않고 내치는 자는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곧 사회와 개인의 안녕과 번영을 방해하는 자에 속합니다(58:1-12; 잠 25:21; 마 25:31-46). ‘악한 자’는 그 무기(‘그릇’)가 악하여 악한 일만 계획하고, 또 힘이 있기에 이를 실천에 옮겨 사회적 약자를 착취합니다(7). 가난한 자가 바른말을 해도 거짓말로 이들을 파멸시킵니다. 법정에서 술책과 거짓으로 힘없는 자의 권리를 짓밟습니다. 어리석은 자처럼 악한 자도 공동체의 삶에는 아무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욕심 채우기에만 열심입니다.

‘가련한 자’와 ‘가난한 자’는 사회적으로 힘이 없고 경제적으로 가진 것이 없는 빈곤한 자를 가리킵니다.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고 존귀한 일을 위해 일어섭니다(8). 그는 어리석은 자와 악한 자의 폭력에 노출된 빈곤한 자를 돕고 공동체의 번영과 안녕을 위해, 정의와 공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헌신합니다. 그는 존경받는 사회적 신분에 속한 자로 자신의 사회 윤리적 책임을 다합니다.

 

한 성읍의 멸망(9-14)

안일한 일상은 하나님을 망각하게 합니다. 그들은 작년처럼 올해도 많은 열매를 수확했기에 내년에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 믿습니다. 평범한 일상의 연속은 일상의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축소시킵니다. 계속된 성공 역시 자신의 악을 보지 못하게 하고,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9너희 안일한 여인들아 일어나 내 목소리를 들을지어다 너희 염려 없는 딸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0너희 염려 없는 여자들아 일 년 남짓 지나면 너희가 당황하리니 포도 수확이 없으며 열매 거두는 일이 이르지 않을 것임이라 11너희 안일한 여자들아 떨지어다 너희 염려 없는 자들아 당황할지어다 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베로 허리를 동일지어다 12그들은 좋은 밭으로 인하여 열매 많은 포도나무로 인하여 가슴을 치게 될 것이니라 13내 백성의 땅에 가시와 찔레가 나며 희락의 성읍, 기뻐하는 모든 집에 나리니 14대저 궁전이 폐한 바 되며 인구 많던 성읍이 적막하며 오벨과 망대가 영원히 굴혈이 되며 들나귀가 즐기는 곳과 양 떼의 초장이 되려니와(9-14)

 

날마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시는 날에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일상의 은혜와 계속된 성공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거룩하기를 열망해야 합니다.

 

(1) ‘들을지어다’(9)

 

예언자의 시선이 미래에서 다시 현재로 돌아옵니다. 그는 안일하고 염려 없이 사는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애곡하라고 명합니다. 애곡은 죽을 자를 위하여 부르는 노래로, 예루살렘의 멸망이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확정됐음을 시사해줍니다. 이제 남은 일은 죽음을 위해 애도하는 것뿐입니다. 주로 여자들이 애가를 불렀기에(렘 9:16-19) 예루살렘 주민 전체를 대표하여 ‘여인들’이 청자로 등장한 것 같습니다.

 

(2) 재앙의 선포(10)

 

태평스럽게 사는 자들은 파국적 재앙이 바로 문 앞에 다가왔는데도 이를 깨닫지 못합니다. ‘일 년 남짓 지나면’ 이들은 현실화한 재앙 앞에서 당황할 것입니다. 포도와 곡식을 수확할 때가 돌아와도 포도원과 밭에는 거둬들일 포도와 곡식이 없습니다. 흉작이 한 해에 그치지 않고 계속되기에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3) 애곡(11-14)

 

‘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가 제의적 행위를 반영하는 표현인지는 불분명합니다. ‘베로 허리를 동일지어다’는 베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평상시에 입던 옷을 벗으라는 말로 보입니다. 가슴을 치며 울부짖는 행위도 죽은 자를 위한 애도 의식에 속합니다. 가장 비옥한 곳에 땀 흘려 만든 포도원의 파괴는 농부에게 다른 무엇보다도 가슴 아픈 일입니다. 경작지에는 가시와 찔레가 자라고, 흥겨운 성읍에서는 흥겨움이 사라지고, 기쁨이 넘치는 집에서는 기쁨이 사라집니다. 생존의 토대가 모두 파괴됩니다. 궁궐도 버려지고 성읍에는 인적이 끊깁니다. 예루살렘이 영원한 황무지가 되어 들나귀와 가축의 차지가 됩니다. 여호와께 반역한 예루살렘이 그분께서 보낸 전쟁의 참화로 황무지가 됩니다. 오벨은 예루살렘 성전의 남쪽과 다윗 성 사이에 있는 언덕을 가리킵니다.

 

구원 약속(15-20)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죄를 간과하지 않으십니다. 계명에 순종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를 엄밀하게 살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하나님 백성의 땅이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가시와 찔레가 납니다. 불순종한 나라의 궁전은 폐허가 되고, 많은 인구가 거하던 성읍도 적막해질 것입니다.

 

15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16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17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18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 19그 숲은 우박에 상하고 성읍은 파괴되리라 20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15-20)

 

하나님의 영이 임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광야로 전략한 유다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날 ‘아름다운 밭’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1) 위에서부터 주어지는 영(15)

 

경작지와 집과 성읍이 파괴되지만 영원히 폐허로 남지는 않습니다. 심판하신 여호와께서 당신 백성의 처참한 운명에 다시 개입하실 것입니다. ‘위에서부터 부어 주시는 영’에 의해 광야가 아름다운 밤이 되고, 아름다운 밭이 숲으로 여겨집니다(15). 기름진 과수원에서나 볼 수 있는 과실수들이 광야에서 자라고, 과수원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울창한 숲이 됩니다. 사람의 능력과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여호와께서 영을 부어 주셔서 심판의 폐허를 말끔히 극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2) 정의와 공의의 회복(16)

 

그분의 영은 황폐해진 땅을 비옥한 땅으로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정의와 공의가 지배하는 의로운 사회로 만듭니다(16). 통치자들에 의해 유린당했던 정의와 공의가 광야와 과수원에 항구적으로 자리 잡습니다.

 

(3) 정의와 공의의 열매(17-18)

 

정의와 공의가 확립되었기에 사회는 평화와 평안과 안정을 즐기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외부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나 안전한 곳에서 평화롭게 살게 됩니다. 참된 평화와 안전은 예루살렘의 정치가들이 생각하듯이 군사력이나 동맹정치가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능력이 가능하게 해준 자연의 풍요와 사회정의가 그 열매로 맺는 것이 평화와 안전입니다. 찔레와 가시로 뒤덮인 땅이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이 됩니다(18). 하나님 백성이 광야심판)의 긴 여정을 마치고 마침내 ‘쉬는 곳’(머누하)에 들어가 참된 안식을 찾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세력에게는 심판이 됩니다.

 

(4) 성읍의 파괴(1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숲에 우박을 내려 쓰러뜨리시고 성읍을 파괴하십니다(19).

 

(5)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20)

 

하나님 백성이 다시는 외부의 적들로부터 위협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구원 약속이 축복의 말로 끝을 맺습니다.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놓아 기르는 너희에게 복이 있으리라’(20). 정의와 공의가 충만한 자연과 사회의 복이 넘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위에 실현되는 것입니다. 죄인들에게는 심판이, 의인들에게는 회복과 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쉼과 열매를 가져다준 숲이 우박에 상하고 죄인들의 성읍은 파괴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자들은 결국 물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을 따라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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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31-01)

 


공의로 통치할 위대하신 왕

이사야 31장 1-8절


 

살다보면 위기의 순간이 있습니다. 믿음은 위기의 순간에 드러납니다. 위기의 순간 내가 의지하는 것이 실제 내가 믿는 것입니다. 위기의 순간 우리는 각자 믿는 대로 행동합니다. 평소 믿음은 위기의 순간을 위한 연습이며 훈련입니다. 나는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 누가 예루살렘의 보호자입니까? 누가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하고 역사를 주관합니까? 애굽이나 앗수르 같은 강대국이 땅의 역사를 결정합니까? 강대국의 절대 권력은 겉모습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물론 민족들의 운명도 여호와께서 결정하시는데, 이스라엘은 어리석게도 도와줄 능력과 의지가 있으신 여호와를 버리고 사람에 불과한 애굽을 의지합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1-3)

참된 왕은 백성을 사랑합니다. 진리와 공의로 가르치길 원합니다. 공의가 법적으로 형평성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정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세워지는 올바름입니다. 고의가 원리 혹은 방향이라면, 정의는 인간사의 사소한 삶의 맥락과 같은 것입니다. ‘공의와 정의’는 모든 면에 있어서 공평하고 바르다는 것입니다.

 

1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2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의 말씀들을 변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들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들을 치시리니 3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1-3)

 

선지자는 장차 한 왕이 나타나 공의와 정의로 통치할 것을 예언합니다. 이 왕은 종교 개혁을 이룬 히스기야를 가리킵니다. 히스기야 이전에 유다는 종교적으로 타락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1) 화의 선언(1a)

 

앗수르의 침략으로 예루살렘이 멸망의 위기에 직면하자 유다의 정치가들은 애굽으로 사절을 파견해 도움을 구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바라보거나 찾지 않고 애굽에서 구원자를 찾습니다. 이들은 애굽의 수많은 군마와 병거와 마병에서 실질적인 힘과 도움을 보았습니다. 지혜를 자랑하는 자들이 내린 결정에 맞서 유다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여호와께서 재앙을 내리십니다. 하나님 백성의 생존을 애굽에 의존하려는 자들의 지혜가 파국적 재앙을 초래하는 어리석음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지혜를 자랑하는 예루살렘 정치가들의 불신앙을 정죄하시려는 그분의 의지는 확고하기에 어떤 경우에도 취소되지 않습니다.

 

(2) 여호와의 반응(2)

 

앗수르의 왕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께서 이들에 맞서 일어나셔서 ‘악행하는 자들의 집’뿐만 아니라 형악을 돕는 자들도 치십니다. 유다를 도우려는 애굽마저 여호와의 심판에 넘겨집니다. 여호와께서 등을 돌린 예루살렘 왕궁을 징계하기로 하셨기에, 유다를 도우러 원정에 나서는 애굽도 재앙을 피하지 못합니다. 악행 하는 자들은 예루살렘의 정치가 여호와에게서 얼마나 멀리 떠났는지를 단정적으로 보여줍니다. 정의와 공의를 짓밟고 공동체를 무질서 상태에 빠뜨리는 자들이 예루살렘의 통치자들이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이 왕궁에서 정치하기에 멸망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어집니다.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 즉’은 예루살렘 정치가들의 지혜로움을 전제합니다. 정치가들이 참된 지혜자라면, 지혜의 근원 되시는 여호와의 의지를 알 수 있어야 했습니다. 지혜의 근원 되시는 여호와께서 이들의 지혜에서 나온 결정을 무력화해 이들의 지혜가 거짓 지혜임을 폭로하십니다. 예루살렘의 정치가들이 참된 지혜자였다면, 도움을 청하러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애굽인들은 신의 결정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야 하는 사람(아담)이지 운명을 결정짓는 ‘신’(엘)이 아닙니다. 그들의 군마도 덧없는 ‘육체’(바사르)이지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영’(루아흐)이 아닙니다.

 

(3) 애굽의 실체(3a)

 

사람과 육체에 불과한 애굽인과 그들의 군마에 의지하는 예루살렘 정치가들의 어리석음에 사람을 창조하시고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응답하십니다. 홍해에서 오른손을 펴서 추격하던 애굽의 군대를 진멸하셨던 분께서(출 15:12), 이스라엘의 거듭된 불순종에 펴신 손을 거두지 않으셨던 분께서(9:12,17,21; 10:4) 이제 권능의 손을 펴서 돕는 자(애굽)와 도움을 받는 자(유다)를 치시기에 둘 다 쓰러져 멸망을 당합니다. ‘넘어지며’의 ‘카샬’과 ‘엎드러져서’의 ‘나팔’은 자주 전쟁의 패배와 관련하여 비유적으로 사용됩니다. ‘육체’는 ‘연약함과 덧없음’을 특징으로 하는 창조된 인간을 가리킵니다.

 

(4) 여호와의 반응(3b)

 

영은 창조주께서 피조물인 사람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생명의 원리로 사람이 활동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하나님께서 영을 주실 때 군마는 무서운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28:6).

 

시온의 구원(4-5)

믿음은 선택입니다. 그 믿음으로 순간순간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위기의 순간 우리 앞에는 항상 두 가지 선택지가 보입니다. 돈과 권력을 의지할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만을 의지할 것입니까? 믿음으로 하나님만을 선택할 때 구원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진리를 따라 행하는 의로운 왕의 통치는 모든 사람을 살게 합니다.

 

4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 5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뛰어넘어 구원하리라 하셨느니라(4-5)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온전히 지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감기지 않고, 귀는 우리의 작은 소리에도 아주 민감합니다. 세상의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지켜도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다스리시면 우리는 안전합니다.

 

(1) 먹이를 지키는 사자의 비유(4)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대한 당신의 의지를 일상적 경험 세계에 속한 비유에 담아 보여주십니다. 사자의 비유에서 사자에 움켜잡힌 먹이는 이중적 역할을 합니다. 한편으로는 여호와에 의한 예루살렘의 징계/심판의 의미를 갖습니다. 사자의 으르렁 거림은 먹잇감을 살려주려는 애씀이 아니라, 자기 먹잇감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위협적인 울부짖음입니다. 사자의 먹잇감이 된 양처럼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심판에 떨어집니다. 다른 한편으로 여호와의 보호 아래 있는 예루살렘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먹잇감이 사자의 소유이듯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소유입니다. 목자들이 사자에 사로잡힌 양을 구해낼 수 없듯이 아무도 여호와에게서 예루살렘을 빼앗지 못합니다. 목자들이 몰려와 소란을 피워도 사자가 자기 먹잇감을 포기하지 않듯이,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침략자들의 위협에서 지켜주십니다. 목자는 고대 근동에서 통치자의 상징으로 사용됐습니다. 사자에게서 먹잇감을 빼앗으려는 목자들은 유다에 대한 여호와의 권위에 도전하는 앗수르의 통치자들을 가리킵니다. 사자 비유는 예루살렘이 독점적으로 여호와께 속했음을 전제합니다.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독점적 권리를 무시하면 심판의 대상이 되지만, 하나님의 소유이기에 그걸 뺏으려는 외부 세력으로부터는 보호를 받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려오셔서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목자들에 맞서 싸우십니다. ‘강림하여’는 1절의 ‘내려가는’과 같은 동사 ‘야라드’의 번역입니다. 예루살렘의 정치가들은 여호와를 찾지 않고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고, 여호와께서는 앗수르의 침략에서 예루살렘을 구해주시려 시온 산에 내려오십니다.

 

(2) 먹이를 지키는 새의 비유(5)

 

여호와께서는 앗수르에 의한 징계를 통해 당신을 앙모하지 않는 자들에게 예루살렘이 당신께 속한 도성임을, 예루살렘의 보호자가 애굽이 아니라 당신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5)는 대개 새끼를 보호하는 어미 새의 모습(신 32:11; 시 36:7; 91:4)을 보여주지만, 원문은 단순히 ‘맴도는 새들’입니다. 사자의 비유와 관련이 있다면, 본문의 새는 사자가 먹다 남긴 잔해를 자기 것으로 지키기 위해 그 위를 맴도는 맹금을 가리킵니다. 제 먹이를 지키는 맹금처럼 여호와께서 (사자의 먹이처럼 심판에 떨어져 거의 죽게 된) 예루살렘을 보호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앗수르를 불러 당신을 배반한 예루살렘을 치게 하시지만, 이들의 손에 완전히 넘기지 않으시고 마지막 순간에 구해주십니다(14:24-27; 22:1-14; 29:1-8; 30:27-33). 후반절은 전반절의 동사 ‘보호하다’를 다시 사용하면서 거기에 유사한 의미의 세 동사를 더해 여호와의 구원 의지를 최상급으로 강조합니다. ‘그분께서 보호하시고 건지시며 아끼시고 구원하시리라’(사역). 정치가들의 지혜나 이들이 의존하는 애굽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당신 도성으로 선택하신 여호와께서 보호해주십니다.

 

앗수르의 심판(6-9)

죄는 악을 선이라고 하고, 선을 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운 질서를 변질시키고 왜곡시킵니다. 의로운 왕은 그것을 바로 세웁니다. 때로 부와 권력은 사람들의 생각과 사고를 조종합니다. 우둔한 자가 존귀한 자로 둔갑합니다. 그러나 의로운 왕의 통치를 그릇된 생각을 바로 잡아 줍니다.

 

6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심히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오라 7너희가 자기 손으로 만들어 범죄한 은우상, 금우상을 그 날에는 각 사람이 던져 버릴 것이며 8앗수르는 칼에 엎드러질 것이나 사람의 칼로 말미암음이 아니겠고 칼에 삼켜질 것이나 사람의 칼로 말미암음이 아닐 것이며 그는 칼 앞에서 도망할 것이요 그의 장정들은 복역하는 자가 될 것이라 9그의 반석은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물러가겠고 그의 고관들은 기치로 말미암아 놀라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여호와의 불은 시온에 있고 여호와의 풀무는 예루살렘에 있느니라(6-9)

 

악한 자들이 통치하는 세상에서는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자들이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악하고 부패하여 탐욕이 강한 자들이 높임을 받습니다. 경건함이 없는 곳에서 악인들은 계속해서 악한 일을 계확하고 실행합니다.

 

(1) 권면(6)

 

예언자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의 보호자이시기에 이스라엘은 ‘심히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와야 합니다(6). 앗수르의 위기는 이스라엘의 배반을 징벌하는 심판이기에, 이들이 시온 산에 거하시는 여호와께로 돌아와 그분을 앙모하고 구하면 해결됩니다.

 

(2) 버려지는 우상(7)

 

회개는 구체적으로 우상숭배에서 떠나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7). 자기 손으로 은 우상과 금 우상을 만들었다는 것은 이 우상숭배가 노골적이고 의지적이었음을 시사합니다. 회개와 우상 제거가 구원의 전제 조건은 아니지만 이를 통해 구원의 지평이 확장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앗수르의 심판과 예루살렘의 구원은 여호와의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14:26)에 따른 것입니다.

 

(3) 앗수르의 멸망(8-9)

 

앗수르는 사람의 칼이 아닌 (다른) 칼에 맞아 죽을 것입니다(8). ‘돕는 자’와 ‘도움을 받는 자’를 쳐서 쓰러뜨리시는(3) 여호와께서 이들을 공격하는 자들을 칼에 넘겨 쓰러지게 하십니다.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 되어야 할 앗수르 왕과 고관들이 놀라 도망합니다(9). 앗수르의 반석 (앗수르 왕)이 이스라엘의 반석(여호와 하나님)에 질겁하여 물러갑니다. 시온에 불을, 예루살렘에 풀무를 가지신 여호와의 말씀이기에 예언자의 선포는 반드시 성취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갖고 계신 불과 풀무는 성전과 제단 위의 불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의 정치가들이 등을 돌린, 시온 산에 계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앗수르를 멸망시키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십니다.


공의와 정의의 왕은 절망에 빠진 백성에게 희망과 소망이 됩니다. 히스기야는 타락한 남 유다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세울 것입니다. 하지만 완전한 공의와 정의의 세상은 메시아의 통치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참된 소망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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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30-02)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이사야 30장 18-26절


 

완전히 망한 듯 보여도 회복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다림과 사람의 기다림, 그 두 가지의 기다림이 회복의 희망입니다. 어떤 절망스런 상황을 만나더라도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다시 회복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떤 기다림입니까? 그리고 어떻게 회복이 됩니까?

 

  • 하나님께서 당신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심판에 넘기십니다. 출애굽에서 시작한 그분과 그분 백성의 관계가 파탄에 직면합니다. 심판 이후에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새로운 시작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완악함을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면 가능합니까? 이사야는 새로운 출발이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시기에 구원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구원 약속(18-26)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멸망이 아니라 회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방황하던 백성을 그분의 뜻대로 지도할 선생들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바른길로 가도록 백성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다시 친밀한 교제를 회복하고 그분의 인도를 받으려면, 모든 우상을 버리고 진리의 말씀 앞에 나아와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실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18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19시온에 거주하며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가 네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그가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20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21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22또 너희가 너희 조각한 우상에 입힌 은과 부어 만든 우상에 올린 금을 더럽게 하여 불결한 물건을 던짐같이 던지며 이르기를 나가라 하리라 23네가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땅이 먹을 것을 내며 곡식이 풍성하고 기름지게 하실 것이며 그 날에 네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요 24밭 가는 소와 어린 나귀도 키와 쇠스랑으로 까부르고 맛있게 한 먹이를 먹을 것이며 25크게 살륙하는 날 망대가 무너질 때에 고산마다 준령마다 그 뒤에 개울과 시냇물이 흐를 것이며 26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18-26)

 

하나님께서는 심판 중에도 유다 백성이 돌아오도록 기다리시는 이유는 그들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은 그들과 하나님의 관계가 회복됨을 의미합니다.

 

(1) 구원의 때(18-19)

 

심판이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답변은 아니었습니다. 기다림의 기간이 끝나면 그분께서 개입하실 것입니다(18). 그분께서 파국적 재앙에 떨어져 신음하는 당신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고 가엾이 여기셔서 멸망에서 구해주실 것입니다. 이사야가 내다보는 미래의 구원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는 고백적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을 징계한 그분의 정의가 절망에 처한 이스라엘의 구원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이사야는 심판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에게 정의의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다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의로움을 드러내 보여주실 것을 믿고 기다리는 자는 그분의 의로움에 참여하게 됩니다. 불순종의 심판으로 단절됐던 관계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절망적으로 탄식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도움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죄로 상달될 수 없었던 예루살렘 주민들의 부르짖음이 다시 그분의 귀에 들리고 이들의 통곡에 응답하십니다(19). 이에 예루살렘은 다시는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됩니다.

 

(2) 스승이 되신 하나님(20-22)

 

구원 시대의 물질적 전망과 영적 전망이 대조적으로 기술됩니다(20).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은 죄수들에게 주는 최소한의 음식입니다(왕상 22:27). 구원 시대에도 양식 부족은 여전하겠지만 굶주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생존에 필요한 만큼은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십니다. 물질적 어려움과 달리 하나님과의 관계는 온전히 회복됩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스승으로 현존하시기에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렘 31:33-34; 욜 2:28-32).

예루살렘 주민은 두 눈으로 여호와를 보고 그분의 의지를 직접 알게 됩니다. 목자가 뒤에서 양 떼를 따르며 다른 길로 가지 않도록 보살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다시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지켜주십니다(21).

그분의 지시에 따라 좌우로 지나치지 않고 ‘바른 길’을 가게 됩니다. 예루살렘 주민은 하나님과의 직접적 교제 가운데 동행하며 그분이 원하시는 길을 가기에 다시는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우상을 ‘불결한 물건’(생리대)을 버리듯이 단호하게(‘나가라’) 내던져버립니다(22).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질 구원 시대를 살아갈 사람들은 그분의 진노 아래 살았던 이전 시대와 완전히 결별해야 합니다. 구원 시대의 ‘시온에 거주하며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19)과 심판 시대의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9)의 대비를 읽을 수 있습니다.

 

(3) 땅의 축복(23-24)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면서 물질적 부족함도 해결됩니다. 그분의 저주로 황폐해졌던 땅이 그분의 축복 아래 기름진 땅으로 바뀌어 풍족한 열매를 맺습니다. 그분이 비를 내려주셔서 비옥해진 땅에 곡식이 풍성해지고, 광활한 푸른 목장에서는 가축이 풀을 배불리 뜯어 먹습니다(23). 가축도 구원 시대의 풍요로움을 누립니다. 밭일하는 소와 나귀도 키와 쇠스랑으로 까불러 맛있게 만들어진 사료를 먹습니다(24).

 

(4) 살육의 날(25)

 

하나님 백성이 구속받는 날은 이들을 억압하였던 적이 살육을 당하는 날이요, 인간의 교만(망대)이 무너지는 날이요, 함께 신음하던 자연까지도 해방을 받는 날입니다(25). 이스라엘의 해방과 자연의 회복이 ‘하나의’ 구속 사건이 됩니다. 땅이 다시 생명력을 회복하고 높은 산과 언덕마다 물이 흐르는 도랑이 생깁니다. 물이 부족했던 산악 지대에도 개울과 냇물이 흘러 푸른 나무와 풀이 자라게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산악지역마저 농사에 적합한 기름진 환경으로 변화시켜줍니다.

 

(5) 치유의 날(26)

 

그날은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의 상처를 어루만져 치유해주시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치셨기에 누구도 돌봐줄 수 없었던 상처를 그분께서 직접 싸매주십니다(26). 그분께서 이전의 일곱 배나 더한 은총의 빛으로 상처를 치료해주십니다. 구원 시대에는 그분 치유 능력이 온 세상에 충만해서 모든 사람이 그 혜택을 충만하게 누리게 됩니다.

 

 

앗수르의 심판(27-33)

심판주 하나님의 열정적이고 강력한 모습에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당하는 고통과 그들을 괴롭히는 자들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자기 백성의 고통과 억울함을 다 보고 또 알고 계시지만, 때가 되기까지 기다리고 계실 뿐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킨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은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27보라 여호와의 이름이 원방에서부터 오되 그의 진노가 불붙듯 하며 빽빽한 연기가 일어나듯 하며 그의 입술에는 분노가 찼으며 그의 혀는 맹렬한 불 같으며 28그의 호흡은 마치 창일하여 목에까지 미치는 하수 같은즉 그가 멸하는 키로 열방을 까부르며 여러 민족의 입에 미혹하는 재갈을 물리시리니 29너희가 거룩한 절기를 지키는 밤에 하듯이 노래할 것이며 피리를 불며 여호와의 산으로 가서 이스라엘의 반석에게로 나아가는 자 같이 마음에 즐거워할 것이라 30여호와께서 그의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며 혁혁한 진노로 그의 팔의 치심을 보이시되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리니 31여호와의 목소리에 앗수르가 낙담할 것이며 주께서는 막대기로 치실 것이라 32여호와께서 예정하신 몽둥이를 앗수르 위에 더하실 때마다 소고를 치며 수금을 탈 것이며 그는 전쟁 때에 팔을 들어 그들을 치시리라 33대저 도벳은 이미 세워졌고 또 왕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라 깊고 넓게 하였고 거기에 불과 많은 나무가 있은즉 여호와의 호흡이 유황 개천 같아서 이를 사르시리라(27-33)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대적이 당하게 될 심판을 생동감 있게 묘사함으로써 대적의 위협 앞에 떨고 있는 백성을 위로합니다. 그 날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해서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철저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자기 백성에 대해서 상처를 싸매주시고 치료해 주시는 하나님의 온화한 모습과 자기 백성의 대적에 대해서는 맹렬한 물로 태우실 것입니다.

 

(1) 멀리서 오시는 여호와(27-28)

 

당신 백성을 심판에 내맡기고 멀리 떠나셨던 여호와께서 이제 구해주려고 돌아오십니다. 이스라엘에 진도하셨던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민족들에 진노하십니다. 그분의 진노와 분노가 연기 자욱하게 불처럼 타오릅니다(27). ‘분노로 가득한 입술’과 ‘맹렬한 불과 같은 혀’는 재앙을 일으키는 저주를 시사해줍니다. 그분의 말은 그분의 의지가 담긴, 사건을 만들어가는 신적 능력입니다. 그분이 거친 숨을 내쉬며 적들과 싸우는 용사처럼 민족들을 진멸하십니다(28).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앗수르)를 불러 반역한 유다의 ‘목에까지 미치게’하신(8:7-8) 여호와께서 ‘창일하여 목에까지 미치는 하수’와 같은 당신 호흡으로 민족들(앗수르)을 심판하십니다(28). 여호와의 도구로 유다를 침략했던 앗수르가 여호와에 의해 동일하게 징벌을 받습니다. 그분께서 ‘멸망하는 키’민족들을 까부르시고 그들의 입에 ‘미혹하는 재갈’을 물리십니다.

원래 알곡과 잔돌을 구분해내는 키가 멸망의 키로 사용되면서 알곡이나 돌이나 같은 운명에 떨어집니다. 모든 민족이 예외 없이 멸망에 넘겨집니다. 미혹의 재갈이 입(턱)에 물렸기에 민족들은 자진하여 멸망의 길을 택합니다. 승리에 도취한 교만한 민족들은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을 채우기 위해 약탈 전쟁에 나섰다가 멸망을 당합니다.

 

(2) 노래하며 기뻐하는 자들(29)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크게 살육하는 날’은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날입니다. 민족들에게 억압당하던 이스라엘에 축제의 기쁨과 즐거움이 다시 돌아옵니다(29). 저녁에 시작하는 축제의 절기에 사람들은 노래하고 피리를 불며 이스라엘의 반석이신 여호와께서 계신 시온 산으로 순례 행진에 나섰는데, 다시 넘치는 기쁨으로 축제를 즐길 수 있게 됩니다.

 

(3) 앗수르를 치시는 여호와(30-32)

 

예언자의 시선이 다시 심판의 대상인 앗수르를 향합니다. 여호와께서 직접 앗수르를 치십니다. 그분께서 진노하사 팔을 휘두르시고 천둥(목소리)과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대적을 치십니다(30).

앗수르가 제 손의 힘과 지혜로 민족들의 경계선을 치워버리고 버려진 알을 거둬들이듯이 온 세상을 거둬들인(10:13-14) 초강대국일지라도 진노하신 여호와 앞에서는 없는 것과 같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목소리’를 수식하는 ‘장엄한’(호드)은 자주 왕적 위엄을 나타낼 때 쓰이며(합 3:3; 시 8:1; 145:5; 148:13), 여호와께서 만왕의 왕으로서 전쟁에 참여하실 것을 시사합니다. 천둥을 의미하는 목소리와 함께 사용된 ‘치시는 팔’은 번개를 가리킵니다. 잔혹함과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많은 나라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앗수르가 공포에 사로잡혀 정신을 잃습니다(31). 여호와께서 직접 막대기로 앗수르를 치십니다. 여호와의 손에 들린 ‘진노의 막대기’였던 앗수르(10:5)가 여호와께서 휘두르는 막대기로 매를 맞습니다. 만왕의 왕께서 누가 막대기(왕홀)의 진짜 주인인지를 보여주십니다.

앗수르의 멸망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한계를 벗어난 교만한 권력의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그분께서 앗수르와 싸우시는 날은 예루살렘이 기쁨의 축제를 즐기는 날입니다(32).

 

(4) 마련된 소각장(33)

 

‘이스라엘의 반석’께서 홀로 앗수르를 진멸하시기에, 이스라엘은 소고를 치고 수금을 타면서 그분의 승리를 즐거워하기만 하면 됩니다. 앗수르를 멸망시킬 모든 준비가 마쳐졌습니다. 앗수르와 그 왕을 태워버릴 도벳(소각장)이 이미 오래전부터 마련됐습니다(33). 불구덩이는 넓고 깊게 만들어졌고 불과 나무도 충분히 갖춰졌습니다.

‘여호와의 호흡’이 소각장의 불을 사르기에 그 불은 꺼지지 않습니다. 심판의 장소 도벳은 앗수르를 조롱하기 위해 선택된 장소 같습니다. 우상을 섬겼던 앗수르가 더럽고 가증스러운 희생제물처럼 멸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절한 파괴가 아니라, 아름다운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악한 나라들은 망하고 주의 백성은 반석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 놀라운 회복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기다리는 갈망을 가지고, 올바른 가르침을 찾고, 그 가르침에 순종하려는 마음을 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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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30-01)


애굽과 동맹을 경고하고 하나님의 심판

이사야 30장 1-17절


 

기회가 있을 때 그 기회를 붙들어야 합니다. 돌이킬 기회가 있을 때 돌이켜야 합니다. 기회가 다 지나갈 때까지 끝까지 거부한다면 결국 망할 뿐입니다. 내 앞에 놓인 기회는 무엇입니까? 기회를 주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회복의 기회를 거부하고 헛된 것을 의지하진 않습니까?

 

  • 하나님께서 당신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심판에 넘기십니다. 출애굽에서 시작한 그분과 그분 백성의 관계가 파탄에 직면합니다. 심판 이후에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새로운 시작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완악함을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면 가능합니까? 이사야는 새로운 출발이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시기에 구원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바로를 찾는 자들(1-7)

환난의 시기에는 그 사람이 무엇을 의지하고 무엇으로 피난처를 삼는지가 드러납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에서 ‘애굽’은 이 세상 세력과 피난처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언제나 강하고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애굽’을 자신의 도움으로 삼으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을 가진 그분의 백성들은 어떤 경우에도 이 세상의 재물과 권세와 지식과 연광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자신의 힘과 피난처로 삼으라고 권고합니다.

 

1여호와께서 이르시되 패역한 자식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영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죄에 죄를 더하도다 2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도다 3그러므로 바로의 세력이 너희의 수치가 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함이 너희의 수욕이 될 것이라 4그 고관들이 소안에 있고 그 사신들이 하네스에 이르렀으나 5그들이 다 자기를 유익하게 하지 못하는 민족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리니 그 민족이 돕지도 못하며 유익하게도 못하고 수치가 되게 하며 수욕이 되게 할 뿐임이니라 6네겝 짐승들에 관한 경고라 사신들이 그들의 재물을 어린 나귀 등에 싣고 그들의 보물을 낙타 안장에 얹고 암사자와 수사자와 독사와 및 날아다니는 불뱀이 나오는 위험하고 곤고한 땅을 지나 자기에게 무익한 민족에게로 갔으나 7애굽의 도움은 헛되고 무익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을 가만히 앉은 라합이라 일컬었느니라(1-7)

 

국가적 어려움에 처했음을 때 정치가들은 대체로 주변 강대국의 동맹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보려 합니다. 이사야 당시에 유다의 지도자들도 앗수르의 위협에 직면하여 이 같은 방식을 취했습니다. 그들은 애굽과의 군사 동맹으로써 곤경을 극복하려 했습니다.

 

(1) 화의 선포(1-3)

 

여호와를 버리고 바로를 찾는 자들 주전 701년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위협할 때 주신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 시대의 애굽 의존적 동맹정치를 고발합니다. ‘패역한 자식들’은 유다의 대외 정치를 주관하는 자들로(1), 28:14의 ‘오만한 자’와 내용상 일치합니다. 왕궁의 정치가들은 가장 강력하고도 확실한 동맹자이신 여호와를 무시하고 다른 정치 세력과 동맹을 맺어 생존을 도모했습니다. 여호와의 의지는 이들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왕궁에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한 자리는 없었습니다. 이들의 계교(계획)와 맹약(동맹)은 여호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기에 죄악이 됩니다. 패역한 자식들의 계교와 맹약이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이들은 이사야의 선포를 거절하고 애굽의 바로에게서 도피처를 찾았습니다(2).

‘보호(세력), 도피처, 그늘, 피난처’는 시편에서 시온에 계신 여호와께 도움을 구할 때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입니다. 이사야는 의도적으로 예배자들의 언어를 사용해 애굽과 바로에게 도움을 구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고발합니다. 왕궁의 정치가들이 애굽에서 구하고자 하는 것은 애굽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눈앞에 있는 도피처와 피신처를 보지 못하고 헛된 곳에서 찾았습니다. 영적 맹인입니다(29:9).

여호와의 보호와 그늘을 무시했다는 점에서 바로의 그늘에서 보호를 찾는 자들은 우상숭배자와 다르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구원을 찾아 바로에게 내려가는 자들에게 직접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바로의 보호가 수치가 되고, 애굽의 그늘에서 찾은 피신처는 수욕이 될 것입니다(3). 구원을 기대하며 바로의 보호와 애굽의 그늘 아래로 피하지만 치욕적 결말로 끝날 것입니다.

 

(2) 구체화한 심판의 위협(4-5)

 

앗수르에게 사로집혀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끌려갈 것입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유다의 시신들은 나일 삼각주 북동쪽에 위치한 소안과 하네스에서 바로의 고관들과 사신들과 협상을 벌입니다(4).

본문이 애굽 군대가 엘드게(Eltheke)에서 앗수르 군대와 싸우기 전에 선포된 말씀이라면, ‘패역한 자들’의 계교가 전혀 성과 없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애굽은 거짓 피난처에 불과합니다(28:15). 애굽이 군대를 출정시켰지만, 엘드게에서 대파당한 후 애굽은 유다를 돕기 위해 다시는 국경을 넘지 못했습니다. 출애굽의 출발지로 간주되는 소안(시 78:12,43)의 언급은 주목할 만합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은 소안에서 바로를 굴복시킨 여호와의 능력을 경험했는데, 그 후손은 여호와를 버리고 도와줄 능력이 없는 바로에게로 내려가 도움을 찾습니다. 출애굽의 여호와를 잊은 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수치뿐입니다. 5절은 내용상 3절의 반복으로, 패역한 자식들에게 선포된 수치와 수욕의 심판이 이스라엘 전체로 확대됩니다. ‘유익하게 하지 못하는 민족’에게 도움을 찾으려 하기에 이들의 계교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3)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6-7)

 

사신들이 나귀와 낙타에 짐을 싣고 위험하고 곤고한 땅, 암사자와 수사자와 독사와 날아다니는 불뱀의 땅 네겁을 지나 ‘자기에게 무익한 민족’에게로 갑니다(6). 가나안과 애굽을 이어주는 주요 통상로는 원래 해안 길로 해서 나일 삼각주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사신들이 네겝을 지나는 험한 길을 선택했음은 해안길이 이미 앗수르에 의해 봉쇄되었음을 전제합니다. 대상들처럼 나귀와 낙타에 짐을 싣고 가지만, 실린 짐이 특별합니다. 유다의 특산품이 아니라 재물과 보물을 싣고 갑니다.

예루살렘은 바로의 호의를 긴급하게 얻기 위해 값비싼 선물을 보냅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한 예루살렘 왕궁은 가까이 계신 여호와를 바라보지 않고 도움이 되지 않는 애굽에 매달리지만, 애굽의 도움은 헛되고 무익할 뿐입니다. 덧없이 사라지는 입김과 같아서 도와줄지라도 아무 결과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7). 예루살렘 정치가들의 눈에는 대단하게 보이겠지만, 애굽은 ‘가만히 앉은 라합’에 불과하다. 여호와께서 애굽의 실체를 알려주십니다. 겉보기에 무서운 괴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능력을 박탈당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괴물이다. 예루살렘은 ‘가만히 앉은’(샤바트) 라합에 의존하다가 ‘수치’(보셰트)를 당한다. ‘라합’은 여호와께서 태초에 칼로 베고 깨뜨린 원시 괴물의 이름입니다(사 51:9; 시89:10; 욥 26:12). 정치가들의 어리석음과 교만이 유다를 라합처럼 칼로 베임을 당하게 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가르침을 거절하는 백성(8-17)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애굽을 의뢰하는 유다 백성의 죄악이 정죄되고 심판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로써 택하신 백성을 구원하고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산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시면서 회개와 신앙을 촉구하셨습니다. 그것은 심판자가 죄인을 다루시는 방법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을 징계하는 방법이었습니다.

 

8이제 가서 백성 앞에서 서판에 기록하며 책에 써서 후세에 영원히 있게 하라 9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들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이라 10그들이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11너희는 바른 길을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하는도다 12이러므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이 말을 업신여기고 압박과 허망을 믿어 그것을 의지하니 13이 죄악이 너희에게 마치 무너지려고 터진 담이 불쑥 나와 순식간에 무너짐 같게 되리라 하셨은즉 14그가 이 나라를 무너뜨리시되 토기장이가 그릇을 깨뜨림 같이 아낌이 없이 부수시리니 그 조각 중에서, 아궁이에서 불을 붙이거나 물 웅덩이에서 물을 뜰 것도 얻지 못하리라 15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 16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하였으므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하였으므로 너희를 쫓는 자들이 빠르리니 17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 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산 마루 위의 기치 같으리라 하셨느니라(8-17)

 

하나님을 배척하고, 자신들의 계획대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패역한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심판의 메시지가 선포됩니다. 특히 8-14절 부분은, 먼저 재판장이 피고에게 돌려진 죄를 진술하고(9-11) 그 다움에 죄에 대해 판결을 내림으로써(12-14) 전통적인 재판의 형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1) 패역한 백성(8-11)

 

하나님께서는 훗날의 증거를 위해 서판에 말씀을 기록하라고 하십니다(8). 그의 선포가 청자들에 의해 거절됐음을 전제합니다. 기록 목적은 이중적입니다. 우선은 거절당한 예언의 신적 정당성을 후에 입증하기 위해서이고, 다음은 후세대를 위해서입니다. 이사야의 선포는 그 시대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도 ‘영원히’ 유효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책에서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은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들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이었습니다(9). 이사야의 선포가 긍정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기에는 그들이 너무 악했습니다. 이들의 거절은 귀를 닫는 것을 넘어 강제적이기까지 합니다. 선견자들에게 듣고 싶은 말을 선포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이사야는 이들의 주장을 풍자적으로 인용하면서 자신의 예언자적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이들은 참된 계시 선포보다 거짓말을 더 즐겨 듣는 자들입니다. 듣기에 거북한 ‘바른 것’(‘여호와의 법’)보다는 귀에 거슬리지 않는 ‘부드러운 말을 좋아합니다(10).

선견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들의 눈에는 오히려 이사야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11). 전통적인 구원신앙에 사로잡힌 자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대적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2) 철저한 멸망(12-14)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제 악한 생각에 의지하는 자들에게 예기치 않은 순간 갑작스럽게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12). 현재 문맥에서 ‘압박과 허망’은 여호와 대신 애굽에 의지하는 이들의 반역을 가리킵니다. 이들의 교만과 불순종은 마치 속에서 균열이 생긴 성벽과도 같습니다. 갈라진 성벽이 어느 날 갑자기 한꺼번에 무너지듯이 하나님을 버린 예루살렘 정치도 몰락할 것입니다(13). 운명처럼 피할 수 없는 파괴적 힘으로 죄가 멸망으로 이끕니다. 아무도 이 파멸적 재앙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심판 이후의 이스라엘은 산산조각이 난 옹기그릇과 같게 됩니다(14).

 

(3) 구원을 원치 않는 자들(15-17)

 

크게 부서진 조각은 불을 담거나 물을 퍼내는 데에라도 쓸모가 있는데, 유다는 바스러진 옹기그릇처럼 철저하게 멸망합니다. 패역한 자들은 적의 침략에 직면하여 여호와께로 돌아와 구원을 찾지 않고, 날랜 말에 의지하여 생명을 구하려 합니다(15). 구원의 조건은 ‘돌아옴과 평안함’(‘돌이켜 조용히 있어야’)입니다. 돌아옴은 여호와를 찾음을 의미하고(9:13), 평안함은 돌아옴의 결과입니다. 그분께로 돌아온 자는 그분 안에서 평안함(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 그분께로 돌아옴이 ‘침착함과 신뢰함’(‘잠잠하고 신뢰하여야’)도 가능하게 해줍니다. 그분께로 돌아온 자에게는 그분께서 힘을 주시기에 흔들리지 않고 그분만을 신뢰하게 됩니다. 그러나 완악한 하나님 백성은 그분께로 돌아와 구원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불신앙과 결과는 앗수르의 위기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들은 이해할 수 없는 죄에 사로잡혀 고집스럽게 저항하다가 파멸을 자초합니다. 정치가들이 백성을 안심시키며 자랑하던 군사력(말)이 무용지물이 됩니다. 말은 도망하는 데나 사용되지만, 추격하는 적의 달이 더 날래서 목숨을 구하지 못합니다(16).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을 심판에 넘겨주시기에 극심한 공황에 사로잡힙니다. 한 사람의 적이 소리치면 두려움에 사로잡혀 천 명이 도망합니다(17). 침략군에 죽임을 당하거나 도망하고 유다에는 극히 소수만 살아남습니다.


강한 나라를 의지하고 압박과 허망을 의지하면서 하나님 말씀은 무시하는 건 하나님께서는 주시는 회복의 기회를 놓치는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회복을 얻을 기회입니다. 그 기회가 있는 동안에 거부하지 말고 그 말씀을 달게 들어야 합니다. 기회가 있을 때 돌이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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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9-02)


회복되는 이스라엘

이사야 29장 15-24절


 

말씀을 잃어버린 채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기이한 일은 소망이며 탈출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기이한 일을 펼쳐 가십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이 펼쳐질 때 어떤 변화들이 나타날지 선포합니다.

 

  • 정치지도자들은 유다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에 이들의 교만은 민족의 생존에 치명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지혜와 결정에 의거해서 역사를 결정할 수 있다고 과신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정치 무대에서 은퇴시키고 주인공으로 처신했습니다. 이들의 교만과 어리석음이 하나님 백성을 불순종과 멸망의 길로 내몹니다.

 

여호와를 무시하는 정치(15-16)

인간의 가장 큰 착각은 은밀한 계획을 하나님께서 모르실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자신이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망각할 때, 인간은 교만한 일, 오만한 일을 도모하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고 정직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15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16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15-16)

 

토기장이 진흙의 비유만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잘 설명한 비유도 없습니다. 이 비유가 가장 적실하게 들리는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자주 불평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임을 잊고 사는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깊이 살펴야 합니다.

 

(1) 자기 계획을 숨기는 자(15)

 

예언자는 여호와 모르게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꾸미는 자들에게 화를 선포합니다.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주변 나라 은밀하게 정치적 거래를 도모하는 정치가들을 가리킵니다(28:14-15). 이들은 왕의 자문관으로 활동하면서 실질적으로 유다의 정치를 결정하고 집행했습니다. 지혜자들로 인정받는 왕궁정치가들이 앗수르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같은 처지에 있던 나라들과 연합을 추진했습니다. 이들은 앗수르의 감시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은밀하게 일을 꾸몄습니다. 이사야가 문제로 삼은 것은 이들의 비밀스러운 태도나 동맹정치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여호와 몰래 추진한 불신앙이었습니다. 시온산에 계시는, 다윗 왕조의 영원한 통치를 약속하신 여호와를 안중에 두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일에 여호와는 철저히 국외자였습니다.

 

(2) 스스로 결정권자가 되려는 자(16)

 

‘어두운 데’(어둠)의 ‘마흐샤크’는 구약성경에서 죽음의 자리로(시 74:20; 88:6,18; 143:3; 애 3:6), 자기 지혜와 판단에 의존한 이들의 계획이 멸망으로 끝날 것을 시사합니다.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는 시편에서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시 64:5-6; 94:7), 예루살렘 정치가라는 자들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악자에 불과했습니다. 이들은 ‘전도시키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보다 사람의 지혜를 우선시하고 창조주의 능력보다 피조물의 능력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뛰어난 지혜와 능력을 갖추고 있기에 하나님께 묻거나 의지해야 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이사야는 이들의 오만을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로 고발합니다. 토기장이가 진흙과 같을 수 있습니까? 만들어진 물건이 자기를 만든 사람에게 ‘그가 나를 만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빚어진 것이 자기를 빚은 자를 두고 ‘그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정치가들의 행태는 피조물이 창조주의 능력을 부정하고, 대신 자신을 창조주의 자리에 놓는 것과 같았습니다. 어리석음을 지혜로 자랑하고 교만을 능력으로 주장하는 자들의 머리에서 나온 계획은 ‘어둠’ 속에서 ‘어둠’을 잉태한 계획이기에 파국적 결말은 필연입니다.

 

여호와의 응답(17-21)

모든 변화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의 능력은 표면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깊은 중심부터 변화를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한 변화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17오래지 아니하여 레바논이 기름진 밭으로 변하지 않겠으며 기름진 밭이 숲으로 여겨지지 아니하겠느냐 18그 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19겸손한 자에게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가난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20이는 강포한 자가 소멸되었으며 오만한 자가 그쳤으며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가 다 끊어졌음이라 21그들은 송사로 사람에게 죄를 씌우며 성문에서 판단하는 자를 올무로 잡듯 하며 헛된 일로 의인을 억울하게 하느니라(17-21)

 

인간의 은밀한 계략과 비밀스런 계획은 모두 실패하고 교만이 드러납니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패역과 불순종을 회개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 가운데 변화가 일어나도록 만드십니다. 이 변화는 레바논이 기름진 밭으로 바뀌고 다시 기름진 밭이 숲으로 바뀌는 것처럼 엄청나고 놀랍습니다.

 

(1) 구원 시대의 변혁(17-18)

 

예루살렘 정치가들의 어리석은 지혜가 전도시켜놓은 것을 여호와께서 바로잡으십니다. 유다의 안전과 번영은 오만한 정치가들의 손에 달려있지 않았습니다. 역사의 대전환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분께서 창조주의 능력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레바논이 기름진 밭으로 변하고 기름진 밭은 숲으로 여겨질 것입니다(17; 32:15).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울창한 숲처럼 산림 지대가 과수원으로 뒤덮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땅이 생존에 필요한 것을 풍족하게 공급합니다. 자연의 변혁은 그분께서 열어주실 구원 시대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 영적 무지에서도 벗어나게 됩니다. 못 듣는 사람이 듣고 맹인이 보게 된다(18). 막혔던 귀가 뚫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고, 들러붙은 눈이 열려 그분의 놀라운 일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죽음과 저주의 영역에서 생명과 축복의 영역으로 옮겨집니다. ‘책의 말’은 이사야의 선포가 문서로 기록되었음을 전제합니다. 예언자의 선포가 청자들에 의해 거절되었지만, 일부 지지자들에 의해 문서로 기록되어 그 성취를 기다립니다. 앞으로는 사람들이 이사야의 예언이 기록된 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현재 문맥에서 ‘책의 말’은 11-12절에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봉한 책의 말’처럼 되어버려 읽을 수 없었던 심판 시대가 끝나고 봉인이 풀려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구원 시대가 열립니다.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는 장애의 극복 이상을 의미합니다. 눈이 열릴 뿐만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 배후를 꿰뚫어 볼 수 있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정치가들이 어두운 데에서 꾸미는 계획도 다 볼 수 있어 다시는 어둠 속에서도 실족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에 의한 자연의 변혁과 영적 갱신이 삶의 공간에서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정치적-사회적 영역에서도 창조질서가 회복됩니다.

 

(2) 겸손하고 가난한 자의 기쁨(19)

 

사회적으로 억눌린 ‘겸손한 자’와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안에서 기쁨을 누리며 즐거워합니다(19). ‘겸손한 자’와 ‘가난한 자’는 1차적으로는 사회적 범주에 속한 개념이지만, 특히 예언자들의 선포에서는 종교적 의미도 갖습니다. 이들은 여호와 앞에서 겸손하고 가난한 자들, 곧 여호와 외에는 다른 곳에서 도움을 찾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강자에게 억눌리고 빈곤하게 살지만, 여호와 신앙에 신실한 자들입니다. 구원 시대에 이들의 성실함이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시온 산에서 하나님 현존의 놀라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3) 강포한 자의 종말(20-21)

 

반면에 여호와께 경건한 약자를 억압하던 ‘강포한 자’와 ‘오만한 자’(비웃는 자)는 심판을 받아 제거될 것입니다(20). 이들은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 곧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죄짓기를 주저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파렴치한 행태는 송사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가진 힘과 능력으로 법을 조작해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게 합니다(21). 소송에서 임의로 판결하고 죄 없는 사람의 권리를 짓밟는 것도 부족해서 약자의 권리를 위해 성문에서 재판하는 사람에게 올무를 놓아 침묵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여호와의 법과 정의를 무시하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임박한 구원 시대에 참여하지 못하고 모두 멸망 당합니다.

 

요약하자면, 구원 시대에는 여호와께서 이루실 변혁에 의해 종교와 사회와 자연의 선순환 구조가 마련됩니다. 영적 무지에서 벗어나기에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여호와의 말씀을 알기에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며 살고, 정의와 공의가 충만하기에 자연이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야곱의 구원(22-24)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그릇은 깨어질 것이고, 겸손한 그릇은 귀하고 요긴하게 쓰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은 것이 사람의 지혜로움보다 더 지혜로운 법입니다(고전 1:25). 감히 하나님의 지혜를 폄하하지 말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겸손이 피조물의 지혜 중 최고입니다.

 

22그러므로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여호와께서 야곱 족속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야곱이 이제는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겠고 그의 얼굴이 이제는 창백해지지 아니할 것이며 23그의 자손은 내 손이 그 가운데에서 행한 것을 볼 때에 내 이름을 거룩하다 하며 야곱의 거룩한 이를 거룩하다 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며 24마음이 혼미하던 자들도 총명하게 되며 원망하던 자들도 교훈을 받으리라 하셨느니라(22-24)

 

하나님의 능력이라면 레바논을 기름진 밭으로, 기름진 밭은 숲으로 바꾸시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듣게 되는 것, 어둡고 캄캄한 곳에서 맹인의 눈이 보게 되는 것, 가난한 자가 즐거워하고, 오만한 자가 소멸되는 것은 하나님께 손바닥을 뒤집듯이 쉬운 일입니다.

 

(1) 동터오는 구원 시대(22)

 

‘그러므로’로 이어지지만, 앞 단락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구원이 주제로 등장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이 야곱 족속의 구원과 회복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야곱 족속’은 하나님 백성의 모든 구성원이 한 조상 야곱에게서 나왔다는 혈연적 동질감과 일치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앞으로 있을 회복에 유다뿐만 아니라 북왕국 이스라엘도 포함될 것을 시사해줍니다.

 

(2)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23)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여호와’도 주목할 만한 표현입니다. 이사야 전반부에서 아브라함에 관한 언급은 여기에만 등장합니다(41:8; 51:2; 63:16; 렘 33:26; 겔 33:24; 미 7:20). 또 ‘아브라함의 구속’은 구약성경에서 여기가 유일합니다. 아마도 창세기 12:10-20과 20장과 관련해서 사용된 것 같습니다. 이 경우 애굽 왕 바로와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서 구속받은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질 구속의 예표가 됩니다. 두 번 반복되는 ‘이제’란 표현은 구원 시대가 임박했음을 보여줍니다. 야곱 자손은 여호와의 손이 행하실 제2의 출애굽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것입니다.

 

(3) 불순종의 극복(24)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다’는 이스라엘을 구속하신 여호와께 대한 순종을 의미합니다(민 20:12; 27:14). 이스라엘은 그분의 구속 행위를 보고 그분을 경외함으로 순종합니다. 출애굽 세대가 마음이 혼미해져 여호와께 불평하다가 광야의 심판을 받았던 것처럼 그의 후손들도 불순종 때문에 심판을 받지만, 구원 시대에는 ‘마음이 혼미하던 자들’이 총명을 알게 되고 ‘원망하던 자들’이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듣고 맹인이 어둠과 흑암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이 총명을 되찾고 교훈을 받아들이기에, 다시는 미혹에 빠져 불평하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은 항상 다른 사람의 밥그릇이 커 보이는 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는 실수하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런 생각이 커지면 불평이 생기고, 원망이 생기고, 마침내는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고 방자하게 행동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실수하는 법은 없습니다. 지금 나의 모습과 상황이 사실은 나에게 가장 좋은 것입니다. 지혜, 외모, 형편 등 모든 것에 감사하며 겸손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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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9-01)

 


예루살렘을 향한 슬픔의 노래

이사야 29장 1-14절


간혹 음주 단속에 걸린 사람들이 길을 걷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길 위에 그어진 선 위를 걷는데, 흔들흔들하고 삐뚤삐뜰 걷습니다. 그 사람은 술을 많이 마시고 운전대를 잡은 사람들입니다. 술을 많이 마신 사람들은 똑바로 걷지 못합니다. 술이 그 사람의 몸과 마음을 지배해서 비틀거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신앙에도 이런 비틀거림이 있습니다.

 

 

  • 사망과 맺은 언약이 예루살렘을 사망에 이르게 하고, 스올과 맺은 협약이 예루살렘을 스올로 내려가게 합니다. 사망과 스올에 사로잡혔기에, 이미 스올의 문을 디뎠기에 예루살렘이 빠져나올 길은 없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다윗과 예루살렘을 선택하신 여호와께서 개입하셔서 스올로 내려가는 예루살렘을 건져내십니다.

예루살렘의 곤궁과 구원(1-8)

자만하며 교만했던 이들이 하나님의 징계 앞에서 당황하며 슬픔을 이기지 못해 애곡할 것입니다. 선민사상에 경도되어 방종한 삶을 살았던 예루살렘 거민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인생들에게 예상을 빗나가는 징계를 내리십니다.

 

1슬프다 아리엘이여 아리엘이여 다윗이 진친 성읍이여 해마다 절기가 돌아오려니와 2내가 아리엘을 괴롭게 하리니 그가 슬퍼하고 애곡하며 내게 아리엘과 같이 되리라 3내가 너를 사면으로 둘러 진을 치며 너를 에워 대를 쌓아 너를 치리니 4네가 낮아져서 땅에서 말하며 네 말소리가 나직히 티끌에서 날 것이라 네 목소리가 신접한 자의 목소리 같이 땅에서 나며 네 말소리가 티끌에서 지껄이리라 5그럴지라도 네 대적의 무리는 세미한 티끌 같겠고 강포한 자의 무리는 날려 가는 겨 같으리니 그 일이 순식간에 갑자기 일어날 것이라 6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레와 지진과 큰 소리와 회오리바람과 폭풍과 맹렬한 불꽃으로 그들을 징벌하실 것인즉 7아리엘을 치는 열방의 무리 곧 아리엘과 그 요새를 쳐서 그를 곤고하게 하는 모든 자는 꿈 같이, 밤의 환상 같이 되리니 8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지라도 깨면 그 속은 여전히 비고 목마른 자가 꿈에 마셨을지라도 깨면 곤비하며 그 속에 갈증이 있는 것 같이 시온 산을 치는 열방의 무리가 그와 같으리라(1-8)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인생들에게 예상을 빗나가는 징계를 내리십니다. 주전 701년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할 때 주신 말씀입니다(22:1-11). 선지자는 아리엘에 대한 슬픔을 표출하며 시작합니다.

 

(1) 예루살렘의 심판(1-4)

 

이사야는 예루살렘을 ‘아리엘’과 ‘다윗이 진을 친(쳤던) 성읍’으로 부르며 화를 선포합니다(1). 구약성경은 여기서만 예루살렘을 아리엘로 부릅니다. 아리엘이 여호와의 성전과 관련된 이름이라면, 여호와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성전 주인 여호와에 의해 공격을 당한 것입니다. 성전의 존재가 예루살렘의 구원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의 남다른 지위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이름입니다. 다윗이 진을 쳤던 성이 여호와의 공격을 받아 함락 위기에 처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주신 영원한 통치권의 약속(삼하 7장)이 예루살렘을 무조건 지켜주지 않습니다. 유다가 자랑하는 구원사의 두 중심축인 성전과 다윗 왕조의 의미가 상대화됩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에 화를 선포하면서 걱정하지 말고 계속 축제나 즐기라고 신랄하게 풍자합니다. 눈앞에 위기가 닥쳤음에도 예루살렘 주민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제의적 축제에만 열심을 냅니다. 이들의 어리석음으로 생명의 축제가 죽음을 예비하는 축제가 됩니다.

즐거움과 기쁨이 넘치는 축제의 때는 끝났습니다. 여호와께서 슬픔과 애곡으로 가득 찰 때까지 아리엘(예루살렘)을 괴롭게 하시기에 아리엘(예루살렘)이 그분께 아리엘(제단) 같이 됩니다(2). 여호와의 성전과 다윗 왕조가 있는 예루살렘을 여호와께서 직접 압박하시고 곤경에 처하게 하십니다. 예루살렘이 번제물을 사르는 성전의 제단처럼 됩니다. 번제단의 화덕에 올리는 희생제물에 관해서는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2) 예루살렘의 구원(5-8)

 

1-4절에 따르면 여호와의 공격 대상인 예루살렘이, 5-8절에 따르면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민족들이 번제단의 희생제물이 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두어 기초로 삼은 돌’(28:16)을 신뢰하지 않은 예루살렘과 공격하는 민족들이 모두 여호와께 희생제물로 드려집니다. 여호와께서 먼저 예루살렘을 당신의 번제단에 올리십니다. 여호와께서 성 둘레에 진을 치시고 성벽을 뚫기 위해 누벽과 공성 보루를 쌓으십니다(3). 고대 세계에서 성을 공략할 때의 전형적 모습입니다(겔 4:2). 여호와의 공격 앞에 예루살렘은 절망적 상태에 빠집니다. 축제의 즐거움에 빠져 있던 자들이 죽은 자처럼 땅바닥에 쓰러져 신음합니다(4). ‘땅에서’와 ‘티끌에서’는 사망과 스올을 연상시키는 표현입니다. 스올의 손에 넘겨지지는 않았지만, 거의 죽은 자와 같은 신세가 됩니다. 축제의 즐거움과 기쁨으로 소란스럽던 예루살렘에 스올에 사는 자들이 웅얼거림 같은 희미한 신음만 들립니다. ‘신접한 자’는 ‘죽은 자의 영’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적 사고에 따르면 죽은 자는 최소한의 생명력만 남겨진 자이기에 말할 때 분명하게 발음하지 못하고 웅얼거립니다.

전혀 예기치 않은 순간 아리엘의 운명이 극적으로 반전됩니다. 예루살렘을 공격하던 대적의 무리가 바람에 날려가는 티끌이나 겨처럼 한순간에 홀연히 사라져버립니다(5). 이미 스올의 문턱을 넘은 예루살렘이 구원을 받고, 성의 함락을 눈앞에 두고 있던 적은 무엇엔가 홀린 듯 갑자기 포위를 풀고 도주합니다. ‘순식간에 갑자기’는 이러한 반전이 예루살렘의 능력이나(22:2-3) 대적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초자연적 힘에 의해 일어날 것을 시사해줍니다. 침략군 편에서 예루살렘을 치시던 여호와께서 갑자기 진영을 바꿔 예루살렘 편에서 침략군을 치십니다(6). 예루살렘을 심판하시던 분께서 예루살렘의 구원자로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 나타나셔서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자들과 싸우십니다. 그분의 개입에 의한 반전이 너무도 갑작스럽고 극적이기에 사람들은 미처 현실로 깨닫지 못합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눈앞에 보이던 그 많은 적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을 보고 꿈을 꾸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7). 예루살렘을 공격하던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추호도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기에 눈앞의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지 못합니다. 마치 꿈속에서 푸짐한 잔칫상에 앉아 배불리 먹고 마시지만 깨어나면 허기지고 목마른 것처럼, 예루살렘의 침략이 허망하게 끝납니다(8). 37:36-37에 따르면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 군대를 쳐서 산헤립이 포위를 풀고 제 나라로 돌아가게 합니다.

 

분별력 없는 백성(9-14)

많은 성도들에게 성경은 이미 봉해진 책과 같습니다. 교회에 와서 짧은 설교를 들을 때 외에는 성경을 항상 덮어 둡니다. 설교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점점 희귀해집니다. 또한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고 사람의 말로 듣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러면 말씀대로 똑바로 걸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말씀을 귀하게 여길 때 말씀을 따라똑바로 걸을 수 있습니다.

 

9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맹인이 되고 맹인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10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11그러므로 모든 계시가 너희에게는 봉한 책의 말처럼 되었으니 그것을 글 아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그것이 봉해졌으니 나는 못 읽겠노라 할 것이요 12또 그 책을 글 모르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글을 모른다 할 것이니라 13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14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9-14)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에 형식적으로 반응하고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신 것입니다. 가장 우선적인 심판은 유기입니다. 어두운 마음이 계속 어두워지도록 하십니다.

 

(1) 스스로 장님이 되는 자들(9-10)

 

첫째 단락(9-10)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조건 거절하고 오직 멸망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이해할 수 없는 완악함을 다룹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말씀을 전할수록 이스라엘은 더 등을 돌리고 완고하게 제 길을 갑니다. 이들은 맹인이 아닌데도 눈먼 자처럼 더듬고,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술 취한 자처럼 비틀거립니다. 눈앞에 전개되는 사건에 놀라 당황해할 뿐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지 못합니다.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에서 하나님의 심판 의지를 읽어냅니다. 하나님께서 의식이 완전히 차단되는 깊은 잠에 빠뜨리셨기에, 이스라엘이 영적 무지에서 깨어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하나님 구원 능력의 한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학적으로 심판의 확정성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스스로 택한 불순종의 완악함에 넘겨주시고, 이러한 불순종의 굴레가 이들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압니다(6:9-10). ‘깊은 잠’은 의식이 완전히 차단되는 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여 그에게서 갈빗대 하나를 취하시고(창 2:21), 아브라함을 깊이 잠들게 해 언약을 세우십니다(창 15:12; 삼상 26:12).

 

(2) 거절된 예언자의 선포(11-12)

 

완악함의 사슬에 매인 자들에게 예언자의 선포는 ‘봉한 책의 말’이었습니다(11-12). 글을 아는 자는 뜯어볼 수 없도록 봉인되었기에 읽을 수 없고, 글을 모르는 자는 봉인과 상관없이 해독 능력이 없기에 읽지를 못합니다. 읽을 수 없다는 점에서 유식한 자나 무식한 자나 한가지입니다(렘 5:1-5). 누구도 하나님의 의지를 알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부으신 ‘깊이 잠들게 하는 영’(깊은 잠의 영)으로 모든 사람의 귀가 막혀서 예언자의 선포가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교통이 완전히 차단됩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9-12절은 기적적인 구원 경험(1-8)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극적 간섭에 의한 예루살렘의 구원이 역설적으로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심화시켜 완전한 멸망으로 내몹니다(22:12-14).

 

(3) 피상적 신앙에 대한 경고(13-14)

 

이스라엘이 내세우는 경건은 입술로만 하나님을 찾는 위선적-형식적 경건이었습니다(13-14). 하나님께 나아와 제사를 드리고 찬양과 감사 또는 탄식의 노래를 부르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있습니다. 제의적 경건 때문에 성전을 찾지만, 삶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 경외는 제의적 가르침(교리)을 통해 습득한 지식에 과했습니다. ‘사람의 계명’은 제의와 관련한 규정입니다. 제의 규정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제의적 경건이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버렸습니다. 제의 준수의 열정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핵심 요소가 됐습니다. 제의 규정 준수에만 열정적인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기이한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기이한 일’은 원래 하나님께서 당신 능력을 과시하는,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는 출애굽과 같은 신적 사건을 가리킵니다. 여기서는 징벌을 가리키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됩니다. 지혜자들의 지혜가 사라지고 슬기로운 자들의 슬기가 감추어질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은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 사이의 연관성을 전제하는데, 이 양자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그분의 기이한 일을 깨달아야 하는데,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의 지혜는 참된 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일이 지혜자들의 지혜의 어리석음을 폭로합니다(고전 1:18-31).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징계를 내리실지라도 그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한없는 사랑과 용서, 그리고 징계와 심판의 양면이 있습니다. 양상은 다르지만 모두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된 백성을 때로 징계하시고 심판하시지만 결국은 마지막 순간에라도 극적으로 구원하시며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잊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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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8-02)

 

 


예루살렘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이사야 28장 14-29절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보이는 형상, 즉 우상으로 만들지 못하게 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으나 계시고, 만질 수 없으나 일하고 계십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손이며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이 움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하는 백성에게 자세히 말씀하십니다.

 

 

  • 무능력과 타락은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왕궁의 정치가들도 제 역할을 못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은 여호와를 버리고 애굽에서 피난처를 찾았습니다. 애굽과 조약을 맺었기에 안전하다고 떠벌이며 백성에게 거짓 믿음을 신뢰하게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시온의 모퉁잇돌(14-22)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서 열매를 바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부르시고 사용하실 때, 심심풀이로 하시는 법은 결코 없습니다. 열매를 맺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어떤 환경에서든 최고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드리려 최선을 다시기 바랍니다.

 

14이러므로 예루살렘에서 이 백성을 다스리는 너희 오만한 자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15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스올과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았고 허위 아래에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도다 16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17나는 정의를 측량줄로 삼고 공의를 저울추로 삼으니 우박이 거짓의 피난처를 소탕하며 물이 그 숨는 곳에 넘칠 것인즉 18너희가 사망과 더불어 세운 언약이 폐하며 스올과 더불어 맺은 맹약이 서지 못하여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 때에 너희가 그것에게 밟힘을 당할 것이라 19그것이 지나갈 때마다 너희를 잡을 것이니 아침마다 지나가며 주야로 지나가리니 소식을 깨닫는 것이 오직 두려움이라 20침상이 짧아서 능히 몸을 펴지 못하며 이불이 좁아서 능히 몸을 싸지 못함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21대저 여호와께서 브라심 산에서와 같이 일어나시며 기브온 골짜기에서와 같이 진노하사 자기의 일을 행하시리니 그의 일이 비상할 것이며 자기의 사역을 이루시리니 그의 사역이 기이할 것임이라 22그러므로 너희는 오만한 자가 되지 말라 너희 결박이 단단해질까 하노라 대저 온 땅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것을 내가 만군의 주 여호와께로부터 들었느니라(14-22)

 

술독에 빠진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한편으로 동맹정치를 믿고 헛된 자기안전감에 사로잡혀 있고, 다른 한편으로 선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멸망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이중적인 형태를 보였습니다.

 

(1) 예언자의 고발(14-15)

 

이사야의 고발이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에서 정치지도자들로 향합니다. 말만 앞세우고 허풍 떠는 자들이 예루살렘의 정치를 책임진 자들이었습니다(14). 종교지도자들은 술독에 빠져 비틀거리는 주정뱅이였고, 정치지도자들은 자기기만에 사로잡힌 허풍쟁이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허황한 자만에 사로잡혀 현실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동맹정치에 의존해 예루살렘의 안전을 자신했습니다(15). 이사야는 이들이 자랑하는 애굽과의 동맹을 ‘사망과 맺은 언약, 스올과 체결한 협약’이라고 풍자적으로 고발합니다. 위정자들은 유다의 정치적 후견인이 된 애굽이 앗수르의 위협을 막아주리라 자신하였지만, 이는 헛된 기대일 뿐입니다. 애굽과 체결한 조약은 문자 그대로 사망/스올과 맺은 조약입니다. 애굽과 조약을 체결한 유다는 죽어 스올로 내려가야 합니다. 애굽과의 동맹은 사망과 스올에 자신을 맡기는 자기파멸적 결정이기에 사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애굽이 홍수처럼 밀려오는 재앙에서 예루살렘을 안전하게 숨겨주는 피난처라고 주장하지만, 애굽은 거짓 피난처로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2) 여호와의 심판선언(16-19)

 

동맹정치에 의존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고발의 말씀 다음에 ‘그러므로’로 연결된 16절은 심판뿐만 아니라 구원의 말씀으로 읽는 것도 가능합니다. 시온의 기초석은 동사 ‘삼다’의시제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과거로 옮기면(삼았노라) 여호와께서 시온에 초석으로 두신 돌은 성전이나 시온이나 다윗 왕조를 가리키고, 현재 또는 미래로 옮기면(‘삼으리니’) 메시아, 하나님 나라, 남은 자, 믿음의 공동체 또는 믿음 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 백성의 구원자는 시온산에 계시는 여호와이시지 정치가들이 떠드는 애굽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보루로 주신/주실 것을 믿는 자는 눈에 보이는 현실에 걸려 실족하지 않습니다. 현재 문맥에서 이사야 자신이 ‘믿는 이’의 본보기가 됩니다. 이사야의 선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면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지라도’ 다급하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정의의 측량줄과 공의의 저울추를 갖고 사망과 언약을 맺었다고 자만하는 자들을 샅샅이 검사하셔서 멸망에 넘기실 것입니다(17). 측량줄과 추를 사용해서 건물을 짓거나 수선하듯 정치가들의 허풍과 자만심을 낱낱이 검사해 감춰진 거짓과 속임수를 드러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의의 측량줄과 공의의 저울추로 조사해본 결과 예루살렘의 심판은 필연입니다. 거짓의 피난처와 은신처에 몸을 숨긴 자들을 우박과 물로 진멸하실 것입니다.

사망과 맺은 언약과 스올과 체결한 협약은 여호와의 징벌 앞에 쓸모없는 것이 됩니다(18). 여호와께서 ‘흉흉하고 창일한 큰 하수’(8:7) 앗수르를 불러 유다를 징계하실 때, 애굽의 실체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유다와 함께 멸망 당합니다(30:1-7; 31:1-3). 매일(‘아침마다’) 시도 때도 없이(주야로) 재앙이 닥칠 것입니다(19). 사납게 넘실대는 홍수처럼 심판이 닥친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그분께서 결정하신 재앙에서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3) 예언자의 심판선언(20-22)

 

‘오만한 자들’이 예루살렘의 안전을 위해 준비해놓았다고 자랑하는 대책은 ‘짧은 침상, 좁은 이불’에 불과합니다(20). 침상이 작아서 누울 수 없고 이불이 좁아서 덮을 수 없듯이, 애굽과의 조약은 예루살렘을 멸망의 홍수에서 보호해주지 못합니다. 예루살렘 위정자들의 자만에는 나름 신학적 근거가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오직 구속사의 전통 안에서만 이해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구원과 축복을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정치적 신학적 편견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이스라엘의 자랑스러운 구속사를 역으로 이용하여 심판을 선언합니다. 블레셋의 위협에서 다윗과 예루살렘을 구해주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삼하 5:17-25), 이제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의 심판자가 되십니다(21).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고 그들의 기대를 만족시켜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당신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낯선 존재가 되십니다. 당신 백성의 배반과 불의에 질투하시고 진노하십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분의 일은 비상하고 그분의 사역은 기이합니다. ‘비상’과 ‘기이’로 번역한 ‘자르’와 ‘노크리’는 원래 ‘이방인’을 의미합니다. 다윗의 하나님께서 당신께 의존하기를 거절하는 후손들에게 이방인이 되십니다. 심판을 선언한 이사야는 다시 허풍 떠는 자들에게 회개를 요청합니다(22). 온 땅을 멸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아남기를 원한다면, 이스라엘은 큰소리치지 말고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계속 허풍을 떤다면 결박이 더욱 무거워질 것입니다. 결박은 15절의 사망과 맺은 언약과 관련됩니다. 이스라엘이 의존하는 정치적 동맹은 죽음의 결박으로 더욱 세게 조여들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이 이미 결정되기는 했지만, 그 재앙에서 벗어날 길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자기 계획과 결정에 의존하지 않고 겸손히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면, 죽음의 결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선포의 신적 권위를 주장하며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내가 만군의 주 여호와께로부터 들었느니라.’ 이스라엘의 심판은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주신 말씀으로, 회개하지 않는다면 임박한 멸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농부의 비유(23-29)

어떤 사람은 조금만 이야기해도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런 방법이 통하지 않습니다. 세게 맞아야 정신을 차립니다. 이렇듯 징계의 방법은 달라도,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은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껍질 없는 악곡을 원하십니다. 쓸모없는 껍질이 벗겨지고 알곡만 남도록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을 다루십니다.

 

23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 24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어찌 쉬지 않고 갈기만 하겠느냐 자기 땅을 개간하며 고르게만 하겠느냐 25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소회향을 뿌리며 대회향을 뿌리며 소맥을 줄줄이 심으며 대맥을 정한 곳에 심으며 귀리를 그 가에 심지 아니하겠느냐 26이는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적당한 방법을 보이사 가르치셨음이며 27소회향은 도리깨로 떨지 아니하며 대회향에는 수레 바퀴를 굴리지 아니하고 소회향은 작대기로 떨고 대회향은 막대기로 떨며 28곡식은 부수는가, 아니라 늘 떨기만 하지 아니하고 그것에 수레 바퀴를 굴리고 그것을 말굽으로 밟게 할지라도 부수지는 아니하나니 29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23-29)

 

예루살렘이 살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계획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만이 아니라 심판에 있어서도 용의주도하실 것입니다.

 

(1) ‘내 말을 들으라’(23)

 

보내신 분과 보냄을 받은 자 사이에 내적 일치가 존재하기에 예언자는 자신의 말(‘내 목소리’, ‘내 말’)로 선포합니다(23).

 

(2)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24-26)

 

밭을 가는 자가 씨를 뿌리기 위해 온종일 밭만 갑니까? 땅을 파 뒤집고 온종일 써레질만 합니까? 밭을 갈고 땅을 고르게 하는 일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씨를 뿌리기 위한 준비 작업에 속합니다(24). 농부는 씨를 뿌려 결실을 맺으려는 분명한 목적이 있기에 밭을 갈고 땅을 고릅니다. 땅을 파 뒤집어 흙을 부드럽게 하고 밭을 잘 고른 후에 씨를 뿌릴 때도 아무렇게나 뿌리지 않습니다(25). 소맥(밀)과 대맥(보리)과 귀리는 정성껏 심고, 향신료로 사용되는 식물인 소회향(검정품)과 대회향(회향)은 씨를 흩뿌립니다. 소맥과 대맥에 비교해서 귀리의 알곡은 잘 떨어지지 않기에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밭 가장자리에다 심는다. 농부는 곡물의 종류에 따라 적합한 방법을 선택해서 그 곡물에 가장 적합한 자리에 씨를 뿌리거나 심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농사법에 따라 농사를 지을 때만 풍부한 수확이 보장됩니다(26).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농사법에 따라 농사를 짓는다는 의미에서 농부는 말씀의 씨를 뿌리는 예언자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3) 추수하는 농부의 비유(27-29)

 

다음에는 추수 과정을 활용해 가르침을 줍니다. 곡식을 풍족하게 거둬들여도 타작하는 방법이 잘못되면 큰 손실이 발생합니다. 소회향과 대회향의 알곡을 거둬들일 때는 타작기(도리깨)나 수레바퀴가 아니라 막대기와 작대기를 사용합니다(27). 단단한 알곡을 탈곡할 때와 약한 알곡을 탈곡할 때 같은 도구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알곡에 따라 탈곡하는 방법이 달라져야 합니다. 타작마당에서 밀과 보리와 귀를 타작할 때도 지혜가 필요합니다(28). 알곡을 펼쳐놓은 타작마당 위로 수레바퀴를 너무 오랫동안 굴리거나 수레바퀴를 끄는 말의 발굽에 너무 심하게 짓밟히면 곡식들이 바숴져서 손실이 커집니다. 밀알을 떨 때도 적합한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도 무작정 심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형편에 상응하는 방법을 찾아 강도를 조절하며 하십니다. 농부가 알곡을 거두기 위해 타작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새로운 출발을 위해 이스라엘을 심판에 넘기십니다. 그분의 경영(의지)과 지혜는 사람의 이해를 훨씬 뛰어넘습니다(29; 55:8-9).


허영심과 탐욕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외면하게 만듭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백성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고 말씀대로 살 수 없습니다.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말씀을 자세히 듣기 바라십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는 데 쓰인 유일한 도구였던 하나님의 말씀은 지혜의 원천입니다. 헛된 욕망을 비워 내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구합시다. 하나님이 지혜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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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8-01)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대한 재앙

이사야 28장 1-13절


 

사람들이 망하는 길로 갈 때, 어느 쯤엔가 자신이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을 알까 궁금해집니다. 사람이 망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망하는 길을 피할 방법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이 가는 망하는 길을 피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은 자가 될 비결은 무엇입니까?

 

  • 민족들의 신탁이 끝나고 다시 예루살렘과 유다가 선포의 대상으로 등장합니다. 28-39장에 수집된 말씀들은 대부분 히스기야 때 선포된 예언입니다. 아하스 시대처럼 그의 아들 히스기야 시대도 앗수르가 중심 주제가 됩니다. 차이가 있다면, 아하스는 앗수르에 의존하는 길을 선택했고, 히스기야는 애굽의 도움을 기대하고 앗수르에 적대적 길을 갖다는 점입니다.

 

사마리아의 몰락에 대한 경고(1-6)

믿는 자들에게 진정한 ‘면류관’과 ‘화관’과 ‘판결하는 신’과 ‘힘’은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사마리아’ 곧 이 세상에 속한 영광을 자신의 면류관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심판의 날에 ‘헛 것’으로 판명되고 땅에 떨어져 짓밟히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면류관은 하나님뿐입니다.

 

1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 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 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 2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 같이, 파괴하는 광풍 같이, 큰 물이 넘침 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3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 4그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그의 영화가 쇠잔해 가는 꽃이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와 같으리니 보는 자가 그것을 보고 얼른 따서 먹으리로다 5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남은 자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 6재판석에 앉은 자에게는 판결하는 영이 되시며 성문에서 싸움을 물리치는 자에게는 힘이 되시리로다(1-6)

 

이 예언의 메시지는 사마리아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기 직전의 시기에 선포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앗수르는 디글랏 벨레셀 3세(주전 745-727)가 죽고, 살만에셀 5세(주전 727-722)가 즉위하면서 더욱 야심만만하게 제국의 영토를 확장해 나가면서 특별히 지중해 쪽으로 뻗어나가는 서진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북왕국 사마리아는 언제 침략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심각한 위기 상황에 있었습니다.

 

(1) 술 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1-4)

 

북왕국 사마리아는 주전 722년 앗수르에 멸망합니다. 따라서 본문은 아하스 통치 말기 또는 히스기야 통치 초반에 선포한 예언이 됩니다.

이사야 1-12장에는 주로 아하스 시대의 예언이, 28-39장에는 히스기야 시대의 예언이 수집돼 있습니다(참조. 14:28). 사마리아의 몰락을 선포한 예언이 히스기야가 통치할 때 선포한 예루살렘과 유다의 심판 예언 첫머리에 놓입니다. 이는 우연이 아닙니다. 아람과 에브라임이 동맹을 맺고 예루살렘을 위협할 때(주전 734-732년), 유다 왕 아하스는 이사야를 통해 전달된 구원 예언(7-8장)을 거절하고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에 의존하여 생존을 도모했고, 히스기야는 아버지가 씌워놓은 앗수르의 굴레를 벗어버리기 위해 애굽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사야는 동일한 신학적 입장에서 히스기야의 반앗수르 정책도 비판했습니다. 다윗 왕조의 신학적 초석인 여호와를 버리고 강대국(애급)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히스기야는 강대국(앗수르)에 의존한 아버지 아하스와 차이가 없었습니다.

현재 문맥에서 1-4절은 사마리아의 몰락에서 배우기를 거절하고 유사한 길을 가는 예루살렘을 향한 엄중한 경고입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강대국에 의존한다면 유다의 운명은 에브라임의 운명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의 멸망 예언이 그대로 이뤄졌다면, 예루살렘의 멸망 예언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너무 늦기 전에 예루살렘과 다윗 왕조의 보호자이신 여호와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예언자는 기름진 골짜기의 높은 산지에 위치한 사마리아를 면류관에 비유해 그 교단과 술취함에 화를 선포합니다(1). 사마리아는 ‘기름진 골짜기’의 풍요로운 생산물을 독점하면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습니다. 에브라임을 다스리는 자들은 ‘술에 빠진 자들’로, 권력과 부가 가져다주는 오만과 사치를 즐기기에만 열중하였고, 법과 질서와 백성의 안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골짜기에 둘러싸인 사마리아가 외부의 침략에서 자신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줄 것이라고 자랑했습니다. 주정뱅이의 눈에는 ‘영화로운 관’처럼 보이지만, 사마리아는 ‘쇠잔해가는 꽃’이었습니다. 화려함은 겉모습에 불과할 뿐 시들어 죽어가는 꽃이었습니다. 멸망은 시간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강하고 힘 있는 자’를 불러 에브라임이 자랑하는 면류관을 땅바닥에 던져버리게 하실 것입니다(2).

앗수르가 사납게 퍼부어대는 우박처럼, 휘몰아치는 광풍처럼, 넘쳐흐르는 거대한 물처럼 북왕국을 덮치고 사마리아를 함락시킵니다. 외적 화려함을 자랑하던 면류관(사마리아)이 침략자들의 발에 철저하게 유린당합니다(3). 정치가들의 자만과 무능력이 사마리아를 멸망에 떨어뜨립니다. 영화가 다해가는 사마리아를 비유하는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4)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먼저 시선을 끌 만한 사마리아의 매력을 시사합니다.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입안에 군침이 돌게 하는 수확 전에 익은 무화과처럼 사마리아는 누구나 욕심을 낼만큼 탐스러웠습니다. 이는 사마리아의 약함도 보여줍니다. 처음 익은 무화과가 흔들기만 해도 떨어지듯 사마리아의 멸망도 그러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보내신 침략군이기에 골짜기가 사마리아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2) 남은 자에게 주는 약속(5-6)

 

하나님의 백성과 관련된 이사야의 메시는 재앙 중에서도 한편으로 축복이 선포되었고, 신판의 사이사이에 구워느이 약속이 있었으며, 징계당할 것이지만 회복될 것이며, 멸망 중에서도 반드시 남은 자들이 있을 것을 말했습니다.

본문에 ‘영화로운 면류관’이 앞 단락과 연결해줍니다. 하나님 백성이 의지해야 할 영화로운 면류관은 사마리아나 예루살렘이 아니라 여호와임을 가르쳐줍니다. 골짜기 꼭대기에 자리 잡아 난공불락처럼 보였지만, 사마리아나 예루살렘은 땅에 떨어진 면류관 신세가 되었습니다. 서두의 ‘그 날에’는 사마리아의 멸망과 남은 자의 구원의 동시성보다 두 사건의 대조적 성격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앗수르를 사용해 사마리아를 멸망시키시는 여호와께서 미래에 당신 백성의 남은 지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이들의 영화로운 면류관과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더는 권력과 풍요에 빠져 교만해지지 않고 오직 여호와만 의지합니다.

여호와께서 재판하는 자에게는 ‘판결하는 영’을, 성문에서 침략자와 맞서 싸우는 전사에게는 ‘힘’을 주십니다. 그분의 영이 불의한 재판과 전쟁의 위협에서 백성을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자기 백성의 남은 자’는 가까운 문맥에서는 에브라임의 남은 자를 가리키고, 넓은 문맥에서는 같은 운명에 떨어지는 유다의 남은 자도 포함합니다. ‘여호와의 영’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미치는 그분의 적극적 영향력을 가리킵니다.

 

이사야를 조롱하는 자들(7-13)

가르치는 지도자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을 귀를 갖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진리에는 관심이 없는 자들은 오직 특권만을 향유하려는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는 겸손과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유다의 영적 지도자들은 방탕과 교만에 빠져 이사야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을 조롱하고 무시했습니다.

 

7그리하여도 이들은 포도주로 말미암아 옆걸음 치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말미암아 옆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환상을 잘못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 8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 9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누구에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10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11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12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13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붙잡히게 하시리라(7-13)

 

선지자는 더욱 안타까워한 것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타락이 길을 걷고 있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문제점과 죄악 중에서도 특히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타협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향해 경고합니다.

 

(1) 제사장과 선지자에 대한 고발(7-8)

 

이사야가 시선을 돌려 예루살렘의 제사장과 예언자를 주정뱅이로 조롱하며 이들의 무능력과 태만을 고발합니다(7-8). 이들은 직분에는 관심이 없고 포도주와 독주를 즐기며 술독에 빠져 삽니다. 상마다 토한 것과 더러운 것으로 가득하여 깨끗한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지를 대변하는 자들이 술에 취해 환상을 보고 판결을 내립니다.

예언자는 잘못된 선포로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고, 제사장은 잘못된 판결로 무죄한 자의 생명을 빼앗습니다. 원래 예언자는 신탁과 환상을 매개로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고, 제사장은 제의를 주관하고 율법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특별한 경우 사법적 결정을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2) 이사야의 선포를 조롱하는 자들(9-10)

 

이사야에 의해 주정뱅이로 고발당한 예루살렘 제사장과 예언자가 반격합니다(9-10). ‘(하나님에게서 나온) 지식’을 가르치는 일은 제사장의, ‘도’(들은 것.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은 예언자의 고유한 임무에 속했습니다.

그래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제사장과 선지자가 된 예루살렘의 종교 집단은 자신들을 가르치려는 이사야에게 분노합니다. 아마도 종교 문제의 전문가로 자처할 뿐만 아니라, 인정을 받았던 이들은 이사야의 선포와 태도에서 직업적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이사야의 지식과 도를 패러디해 조롱합니다. “정말로 저자는 ‘차브 라차브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 카브 라카브 저에르 샴 저에르 샴’하고 떠들어대는구나.”

자칭 전문가들의 귀에 이사야의 선포는 어린아이에게 알파벳이나 가르치기에 적당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예언은 언제나 비슷비슷한 소리로, 때로는 이렇게 말하기도 때로는 저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사야가 고발과 심판의 말씀을 거듭 선포했고, 때로는 구원의 말씀도 선포했기에 저들의 조롱이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반복적 선포는 듣는 자들의 완악함, 곧 하나님 심판의 정당성을 반증해주기도 합니다. 거절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포기하지 않고 거듭 하나님의 의지를 외쳤기에,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 결정을 몰랐다고 핑계 댈 수 없습니다.

 

(3) 여호와의 심판 선포(11-13)

 

이사야는 자신의 말을 의미 없는 반복으로 조롱하는 자들에게 이방 민족에 의한 멸망을 선언합니다(11-13). 예언자의 선포를 웅얼거리는 소리로 듣는 유다 백성은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방의 언어처럼 듣는 자들에게 진짜 이방의 언어를 듣는 심판이 선포됩니다.

심판이 제사장과 예언자 대신 ‘이 백성’에게 선포됩니다. 영적 지도자들의 부패와 무능력이 백성을 오염시켰습니다. 백성도 이사야의 선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참된 안식과 상쾌함을 누리기를 바라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영원한 안식을 찾으신 그분께서는(왕상 8:13) 제사장과 예언자에게 특히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라고 명령하셨지만, 누구보다도 그분 명령에 충실해야 할 자들이 명령을 무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낸 예언자를 젖을 뗀 아이에게나 가서 가르치라고 조롱하는 자들은 이제 그들이 말했던 것을 그대로 경험합니다. 이사야의 선포를 이방인의 언어처럼 듣는 자들은 정말로 이방인의 말을 듣게 됩니다. 모두 사로잡혀 수치와 두려움 가운데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떠드는 정복자들의 소리를 듣습니다.


자랑해서 도움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성공한 삶, 남보다 똑똑한 것, 자녀가 잘된 것 등을 자랑하는 마음에서 교만이 싹틉니다. 삶이 좋아져도 마음은 낮아져야 하고, 삶이 어렵다면 더 겸손히 주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교만하면 망합니다. 말씀을 가까이해서 교만을 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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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7-01)

 


아름다운 포도원의 노래

이사야 27장 2-13절


 

삶은 아픔을 수반합니다. 성공과 승리를 얻기 위하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그때 기억해야 할 것은 주의 백성에게는 최종적으로 승리가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최종적 승리는 무엇이며 승리의 과정과 목적은 무엇입니까?

 

 

  • 여호와께서 땅의 죄악과 혼돈의 세력을 벌하시는 종말론적 심판(26:21-27:1)이 하나님 백성에게는 구원을 가져다줍니다. 야곱을 지섰던 분께서 그를 용서하시고 흩어진 자들을 다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으실 것입니다. 당신 포도원을 훼파하셨던 분께서 구원자로서 포도원을 밤낮으로 안전하게 보살펴주실 것입니다.

 

포도원의 새 노래(2-6)

하나님께서 교회와 믿는 자들의 포도원지기가 되어 주신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럽고 든든한 일이겠습니까? 사단의 세력이 믿는 자들을 실족시키지 못하고 교회를 이길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포도원지기가 되셔서 정성껏 돌보시고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최종적으로 번성하고 은혜를 누릴 것입니다. 현재의 부족함과 결핍을 보고 안달할 필요가 없습니다.

 

2그 날에 너희는 아름다운 포도원을 두고 노래를 부를지어다. 3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이를 해치지 못하게 하리로다 4나는 포도원에 대하여 노함이 없나니 찔레와 가시가 나를 대적하여 싸운다 하자 내가 그것을 밟고 모아 불사르리라 5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와 화친할 것이니라 6후일에는 야곱의 뿌리가 박히며 이스라엘의 움이 돋고 꽃이 필 것이라 그들이 그 결실로 지면을 채우리로다(2-6)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포도원에 비유한 ‘포도원 노래’는 5:1-7 부분에서 이미 언급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포도원 노리와 본문의 노래가 다루고 있는 주제는 현격하게 다릅니다. 먼저 5장은 거대한 열매를 맺지 못한 포도원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을 말하고 있는 반면, 본문에서는 포도원의 결실에 관해 다루고 있습니다.

 

(1) 아름다운 포도원(2)

 

포도원의 비유로 유다와 예루살렘의 불의와 불법을 고발하고 심판을 선포했던(5:1-7) 이사야가 같은 비유로 구원 시대를 선포합니다. 현재 문맥에서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땅의 거민의 죄악’과 혼돈의 세력을 벌하시는 때(26:21-27:1)를 가리킵니다. 땅을 심판하시는 목적이 하나님 백성의 구원에 있음을 시사해줍니다. 예언자의 심판선언이 공동체의 찬양으로 전환됩니다. 포도원을 한정하는 ‘아름다운’(참조, 32:12; 암5:11)은 내용상 5:1의 포도원이 마련된 ‘산’을 한정하는 ‘기름진’에 상응합니다. 아름다움은 포도원에 내재한 속성이나 특징을 보여주는 표현이 아닙니다. 여호와께 속했다는 점에서 아름다운 포도원입니다.

 

(2) 포도원지기 여호와(3-5)

 

여호와께서 직접 포도원지기가 되어 포도나무에 물을 주시고 아무도 해하지 못하게 밤낮으로 지켜주십니다(3). 포도원에 원두막 대신 망대를 세우셨던(5:2) 여호와께서 밤낮으로 함께하시며 포도원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시고 해가 되는 것부터 포도원을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밤낮으로 간수 하여’는 내용상 4:5의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과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덮개를 두시에 상합니다. 구름에 명하여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셨던 여호와께서 포도나무가 시들지 않게 그대그대 물을 주십니다. 기름진 산에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고 좋은 포도가 맺히기를 기다리다가 실망하셨던 여호와께서 포도나무가 잘 자라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있도록 하나하나 직접 돌보십니다. 좋은 포도(정의와 공의)를 맺은 포도원에 진노하셨던 여호와께서 다시 성내지 않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4). 진노의 시대가 끝나고 구원과 축복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찔레와 가시’가 발견되면 여호와께서 맞서 싸워 그것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리실 것입니다. 찔레와 가시가 5:6에서는 심판으로 황폐해진 포도원의 모습을 보여주는데(참조.7:23-24), 여기서는 여호와의 포도원을 해하려는 적의 표상으로 사용됩니다(참조. 9:18; 10:17).

당신 포도원을 적에게 넘겨 먹힘을 당하게 하셨던 여호와께서 적의 침략에서 아름다운 포도원을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포도원을 침략하려는 적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침략을 포기하고 여호와의 보호(‘힘’)에 매달려 그분과 화친하는 것뿐입니다(5).

‘내 힘을 의지하고’는 ‘내 보호에 매달리고’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여호와의 제단 뿔에 매달려 생명을 구하는 것처럼(왕상 2:28) 그분의 보호에 매달려 살길을 찾아야 합니다. 불꽃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는 찔레와 가시이지만, 여호와의 보호를 찾아 그분께 매달린다면 평화가 주어질 수 있습니다.

 

(3) 야곱의 소생(6)

 

‘그 날에’로 시작하는 포도원의 표상이 후일에는 으로 시작하는 6절에서는 나무의 표상으로 바뀝니다. 포도원의 비유가 여호와의 보호에 초점을 맞췄다면, 나무의 비유는 번성의 축복에 집중합니다.

야곱은 뿌리를 내리고, 이스라엘은 싹이 트고 꽃이 피어 세상을 열매로 가득 채울 것입니다. 밑동이 잘려 죽은 것처럼 보였던 나무가 다시 싹이 트이고 자라는 것처럼 멸망한 이스라엘에 소망이 주어집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흔들리지 않게 회복되고 크게 번성합니다. 야곱은 종말론적 회복에 북왕국의 이스라엘도 포함될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그 결실로 지면을 채우리로다’는 이스라엘에 임한 복이 온 땅에 함께할 것을 시사해줍니다. 종말에 있을 이스라엘의 구원과 축복은 세상에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세상도 이스라엘의 구원과 축복에 참여합니다. 여호와께서 족장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창 12:3)이 성취됩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견책(7-11)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되고 구원을 얻는 것과 관련해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죄악이 가볍기 때문이거나 혹은 합당한 회개를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은 인간의 내세울 만한 어떤 행위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죄악이 큼에도 불구하고 ‘적당하게’ 치셨고 쉽게 회개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 주셨습니다.

 

7주께서 그의 백성을 치셨던들 그의 백성을 친 자들을 치심과 같았겠으며 백성이 죽임을 당하였던들 백성을 죽인 자가 죽임을 당함과 같았겠느냐 8주께서 백성을 적당하게 견책하사 쫓아내실 때에 동풍 부는 날에 폭풍으로 그들을 옮기셨느니라 9야곱의 불의가 속함을 얻으며 그의 죄 없이함을 받을 결과는 이로 말미암나니 곧 그가 제단의 모든 돌을 부숴진 횟돌 같게 하며 아세라와 태양상이 다시 서지 못하게 함에 있는 것이라 10대저 견고한 성읍은 적막하고 거처가 황무하며 버림 받아 광야와 같은즉 송아지가 거기에서 먹고 거기에 누우며 그 나무 가지를 먹어 없이하리라 11가지가 마르면 꺾이나니 여인들이 와서 그것을 불사를 것이라 백성이 지각이 없으므로 그들을 지으신 이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며 그들을 조성하신 이가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리라(7-11)

 

하나님의 심판은 자기 백성의 원수들에게만이 아니라 자기 백성에게도 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심하게 견책하십니다. 그러나 그 징계는 자기 백성을 그들이 쓸모없이 되지 않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견책은 ‘적당한’ 것과 다시 말해 자비로운 것입니다.

 

(1) 야곱의 용서(7-9)

 

선지자 이사야의 시선이 종말의 구원 시대에서 현재의 심판로 시대로 돌아옵니다. 교육적 성격을 갖는 수사적 질문으로 시작합니다(7). ‘그를 친 자들을 치신 것처럼 그분께서 그를 치시겠느냐? 그를 죽인 자들이 죽임을 당한 것처럼 그분께서 그를 죽이시겠느냐?’ 전에 여호와께서 지상의 어떤 세력을 도구로 사용하여 야곱을 거의 죽을 정도로 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심판은 혹독하기는 했지만, 무제한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을 친 자들에게 임한 심판과 비교해보면 분명해집니다. 그분께서는 이들을 다 죽이셨지만, 이스라엘은 죽음에 넘기지 않으시고 내쫓기만 하셨습니다(8).

야곱을 친 적의 신분에 관해서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종말론적 문맥에서는 독자의 시점에 따라 다양하게(앗수르, 바벨론, 바사, 헬라 등) 읽을 수 있습니다. ‘적당하게 견책하사’는 정당한 절차에 따라 백성이 쫓겨났음을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야곱의 심판과 추방은 여호와의 일방적-임의적 결정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야곱의 불의에 따른 필연적 결과였습니다.

‘폭풍으로’는 문자적으로는 그의 강한 바람입니다. 여호와께서 바람, 곧 민족들을 보내 야곱을 쳐서 멀리 내쫓으셨습니다. 동풍은 요단 동편에서 불어오는 뜨겁고 메마른 바람으로 식물은 물론 사람에게도 해가 됐습니다. 여호와께 거의 죽도록 맞고 내쫓긴 야곱이 죄사함을 받습니다. 불의의 용서는 조건적입니다. 용서받기 위해 야곱이 충족시켜야 할 조건은 우상들을 제거하는 것입니다(9).

야곱은 먼저 멸망으로 이끌었던 우상들을 완전히 제거해야만 합니다. 부끄러운 과거와 단절함이 없이는 새로운 출발도 없습니다. 제단과 아세라와 분향제단은 산당에 속한 제의 도구들이었습니다.

 

(2) 견고한 성읍의 멸망(10-11)

 

용서함을 받는 야곱과 달리 견고한 성읍은 파괴되고 영원히 황량하게 버려져 사람은 살지 못하고 가축의 차지가 됩니다(10). 풀도 제대로 자랄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해서 송아지가 나무줄기까지 벗겨 먹습니다. 현재 문맥에서 황량하게 버려진 성읍은 7절에서 이스라엘을 친 자들의 성읍으로 여호와께 적대적인 세력을 대표합니다(참조. 24:10; 25:2-3; 26:5).

11절은 다시금 성이 얼마나 철저하게 멸망할지를 보여줍니다. 줄기가 벗겨진 나무의 가지가 말라 꺾어지면 여자들이 와서 그것들을 모아 장작으로 사용합니다. 나무마저 사라진 황량한 곳이 됩니다. 폐허가 된 성읍에는 미래를 위한 최소한의 소망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성읍의 주민들이 지각없는 백성이기에 멸망당한 성읍에 여호와의 긍휼과 은혜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성의 파괴에서 여호와의 (보편적) 의지를 읽고 그분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멸망에서 어떤 깨달음도 얻지 못합니다. 이들의 지각없음이 그분 은총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그 날에’(12-13)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들이 궁극적으로 목적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서 구원받은 자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세상의 다른 주인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만을 자신의 참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12너희 이스라엘 자손들아 그 날에 여호와께서 창일하는 하수에서부터 애굽 시내에까지 과실을 떠는 것 같이 너희를 하나하나 모으시리라 13그 날에 큰 나팔을 불리니 앗수르 땅에서 멸망하는 자들과 애굽 땅으로 쫓겨난 자들이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산에서 여호와께 예배하리라(12-13)

 

24-27장의 최종 결론이라고 볼 수 있는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의 치종적인 회복과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불의에 대하여 분노하시고 그들의 죄악에 대하여 견책하실 것이지만, 최종적으로는 그들을 회복시켜 구원의 자리로 인도할 것입니다. 심판으로 파멸당하는 자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백성드에게는 위대한 미래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1) 하나하나 모으시는 여호와(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하수에서부터 애굽 시내에까지’ 이삭을 터십니다. 밭에 떨어진 이삭을 하나하나 줍듯이 여호와께서 이방인들과 뒤섞여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별하여 불러내십니다. ‘하수에서부터 애굽시내에까지’는 원래 다윗 왕국의 영토를, 후에는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국경선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다윗의 옛 영토에 사는 자들을 골라내어 모으실 뿐만 아니라, 앗수르 땅과 애굽 땅에 흩어진 자들도 고토로 불러 모으십니다.

 

(2) 흩어진 자들의 귀향(13)

 

이방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 큰 나팔소리를 듣고 돌아와서 여호와께서 현존하시는 예루살렘 성산에서 그분께 경배를 드립니다. 멸망하는 자들은 유배당한 자들이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동화될 위험에 처했음을 시사해줍니다.


주를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으로 멸망한 것입니다. 반면 주의 백성들은 제법 아픈 일을 겪겠지만 멸망하진 않을 것입니다. 주께서 고난과 아픔을 주시겠지만, 그건 멸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쳐서 회복시키기 위한 견책입니다. 성도가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목표는 예배의 회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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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6-01)


영원한 반석이신 여호와 하나님

이사야 26장 1절-27장 1절


 

세상은 날마다 불안함의 연속입니다. 눈만 뜨면 터져 나오는 사고들과 끔찍한사건들, 기아와 테러의 지구촌 소식들, 불경기와 가뭄과 같은 팍팍한 현실들, 그야말로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할지 모르는 나날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평안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사야가 말하는 심지가 견고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 예언자가 대표하는 ‘우리’ 공동체는 종말에 있을 여호와의 구원을 노래합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성벽과 외벽을 쌓아 예루살렘을 보호해주십니다. 성읍을 에워싼 골짜기에 의지하다가 패망한 예루살렘이 앞으로는 여호와께서 지켜주시는 ‘견고한 성읍’이 됩니다. 회복된 공동체는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께서 주시는 평강을 누리며 삽니다.

 

승리의 노래(1-6)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신의를 지킨 의로운 사람들이 성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고귀한 신분이나 권세를 가진 자가 문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실하게 신의를 지킴으로 하나님께서 의롭다 선언하신 사람들이 영광스러운 성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1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 2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할지어다 3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4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5높은 데 거주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 6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리로다(1-6)

 

여호와의 구원이 ‘성벽과 외벽’이 돼 예루살렘을 ‘견고한 성읍’으로 만들어줍니다(1). 전에는 골짜기와 성벽의 보호를 받던 예루살렘을 종말에는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며 직접 지켜주십니다. ‘외벽’은 성벽 앞에 둘러쳐진 작은 방어벽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성문을 지키는 자들을 ‘너희’로 부르며 이들에게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라고 외칩니다(2). ‘의로운 나라’는 여호와의 공동체에 속한 자들을, ‘문들’은 예루살렘 성문을 가리킵니다. ‘의로운’은 나라(백성)의 속성보다 윤리적 요청에 해당합니다. 여호와께서 현존하시는 거룩한 성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신의를 지키는’도 마찬가지로 ‘흔들림이 없이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함’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성벽과 보루가 되셔서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예루살렘 성에서 그분께 의존하고 그분 말씀에 따라 의로운 삶을 사는 자들에게는 ‘평강’이 주어집니다(3). 평강의 샬롬은 삶의 이상적 환경을 만들어내는 자연과 사회의 조화로운 일치를 가리킵니다. 여호와를 신뢰하고 그분의 윤리적 가르침을 실천하며 사는 자들의 나라에는 정치적 불의와 사회적 억압이, 전쟁과 자연재해와 질병이 다시는 발붙이지 못합니다. 여호와의 구원과 구원받은 자들의 신뢰가 선순환합니다. 여호와께서 ‘영원한 반석’이시기에 구원받은 자들은 ‘영원히’ 그분을 신뢰할 수 있고 또 신뢰해야 합니다(4). 여호와가 환난 중에 있는 이스라엘이 도움과 피난처를 찾을 수 있는 반석이십니다. 다음 두 절은 여호와를 지속적으로 신뢰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높은 곳에 높은 성을 건설하고 자신의 안전을 자랑하며 사는 자들을 여호와께서 징계하실 것입니다(5). 그분께서 허물어버리실 ‘솟은 성’은 그분 백성을 억압하는 세력을 가리킵니다. 종말에 여호와께서 보호하시는 ‘견고한 성읍’에 살게 될 ‘의로운 나라’가 ‘빈궁한 자’와 ‘곤핍한 자’로 표현됩니다(6). 현재 ‘우리’ 공동체가 ‘솟은 성’에 사는 자들에 의해 억압당하고 있음을 시사해줍니다. 압제당하는 자들이 그날에는 여호와께서 허물어버리신 성의 폐허를 발로 짓밟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의를 신뢰하는 의인(7-10)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을 편안한 길, 사건과 사고가 없는 삶은 아닙니다. 평강은 우리가 처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지 않는 데 있습니다. 편안한 자리에 안주하는 것이 아닌, 높낮이가 고른 길을 걷는 것이 평탄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바른 길을 걸을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평강과 평탄을 누릴 수 있습니다.

 

7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 8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9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10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자의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7-10)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릅니다. 그 말씀은 바르고 옳은 길입니다. 이사야는 ‘의인의 길은 정직하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1) 의인의 길(7)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7)는 하반절에 일치시켜 ‘의인을 위한 길은 올바르나이다’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가르침을 준수하며 사는 자를 위해 길을 닦아주시고, 의인은 그분께서 올바르게 만들어주신 길을 갑니다. 경험적 현실에서는 의인의 길이 평탄치 않게 보일 때도 있지만, 이는 겉모습에 불과할 뿐입니다.

 

(2) 여호와의 심판을 기다리는 의인(8-9)

 

의로우신 분께서 의인을 위해 마련해주신 길은 곧 바르다는 신앙적 진술로부터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는 길의 올바름을 끌어냅니다(8). 심판의 정당성을 알기에 그 혹독함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떠나지 않고 그분께 소망을 두고 살아갑니다. 여호와의 ‘이름’과 ‘기억’은 여호와 자신을 의미합니다. 예배자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멀리 계신 그분과 친교(교제)를 나눕니다. ‘영혼의 바람’(‘영혼이 사모하나이다’)은 고뇌에 찬 열심과 열정을 갖고 여호와께 매달림을 의미합니다.

화자가 ‘우리’에서 ‘나’로 바뀌면서, 예언자가 개인적으로 여호와께 대한 자신의 신뢰를 고백합니다(9). ‘나’는 ‘밤에’ 여호와를 간절히 찾습니다. 밤은 두려움과 고통이 더 크게 느껴지는 시간으로, 여호와를 전심으로 찾고 그분을 만날 때이기도 합니다(시 6:6; 77:6). ‘나’가 심판의 시대를 살면서도 소망을 잃지 않는 이유는 그분의 심판을 통해 ‘세상의 거민’이 의를 배우기 때문입니다. 세상 주민들도 의를 알 수 있음을 전제합니다.

 

(3) 의를 배우지 않는 악인(10)

 

9b-10절의 ‘의’는 민족들도 인식할 수 있기에 ‘사회와 삶에 내재한 창조의 기본 질서’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창조주 여호와께서 땅에서 민족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질서를 세우시고 감독하시기에 의를 배우지 않고 곧은 것을 비뚤어지게 하는 악인은 결국 ‘여호와의 위엄’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를 위하여’ 이루시는 분(11-19)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돌아보며 믿음과 인내를 북돋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이 은혜를 되새기며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면, 악인이 득세하는 부조리한 현실에서도 하나님께 초점을 맞출 수 있을 것입니다.

 

11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오나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부끄러워할 것이라 불이 주의 대적들을 사르리이다 12여호와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오리니 주께서 우리의 모든 일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이다 13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4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그들을 멸하사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없이하셨음이니이다 15여호와여 주께서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고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나이다 스스로 영광을 얻으시고 이 땅의 모든 경계를 확장하셨나이다 16여호와여 그들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오며 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나이다 17여호와여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산고를 겪으며 부르짖음 같이 우리가 주 앞에서 그와 같으니이다 18우리가 잉태하고 산고를 당하였을지라도 바람을 낳은 것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출산하지 못하였나이다 19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어 놓으리로다(11-19)

 

하나님 나라는 의의 나라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요, 그 외에 의로움으로 화답하는 백성이 있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백성이요, 주를 사랑하고 갈망하며 주께 순종하기를 기뻐하는 백성의 나라입니다.

 

(1) 대적을 사르는 여호와의 불(11)

 

여호와의 심판이 원래 목적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분께서 손을 높이 들었지만, 세상의 거민은 이를 깨닫지 못합니다(11). 이들의 무지와 거절이 더 심한 심판을 초래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백성을 위해 역사에 개입하셔서 진노의 불로 이들을 삼켜버리실 것입니다. 예언자는 여호와께서 과거에 베풀어주신 구원행위들로부터 미래적 구원에 대한 확신을 끌어냅니다.

 

(2) 평간의 간구와 그 근거(12-15)

 

하나님께서 적을 멸망시키시고 이스라엘에 평강을 베푸실 것입니다(12). 원래 이스라엘이 해야 했을 일을 그분께서 대신 이루어 주셨습니다. 13-14절은 아마도 사사 시대를 회고하는 것 같습니다. 사사기의 신학적 틀에 따르면 여호와를 배신한 결과로 이방 통치자들의 지배 아래 떨어진 이스라엘이 고난 중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부르짖자, 여호와께서는 이들의 간구를 듣고 사사를 보내 ‘다른 주들’을 모두 벌하여 멸망시키셨습니다. 15절은 아마도 다윗 시대를 회고하는 것 같습니다. 다윗 시대는 이스라엘이 가장 번성하였던,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한 시대였습니다. 후손의 번성과 전쟁의 승리는 신적 축복에 속하기에 여호와께서 당신 영광을 온 세상에 드러내 보이신 시대가 됩니다.

 

(3) 탄식과 간구(16-18)

 

16절은 소망을 담고 있는 회고적 고백입니다. 이스라엘은 거듭 고난에 떨어졌지만, 그때마다 새로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환난을 해산하는 여인의 곤경에 비유하는 17-18절에서 예언자의 시선은 현재로 돌아옵니다. 해산의 고통은 산모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지극히 위험스러운 상황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생산적 고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는 열매가 없었습니다. 몸부림치며 해산했는데 태어난 것은 ‘바람’이었습니다. 과거와 달리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세계의 거민’은 아마도 민족들 가운데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4) 권면(19)

 

세상에 너무 적은 수의 이스라엘 사람이 남겨진 현실에 크게 실망하고 깊이 탄식하는 예언자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죽은 자들이 살아날 것을, 다시 회복될 것을 약속하십니다(19).

 

백성의 구원과 땅의 심판(20-27:1)

의로운 공동체의 기도에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깊은 신뢰와 소망이 있습니다. 심판 중에서도 이들이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모랗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구원이시며, 심판을 통해 그의 의와 영광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환난 중에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20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 21보라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당한 자를 다시는 덮지 아니하리라 27:1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20-27:1)

 

하나님의 초대를 악인들은 끝내 거절할 것입니다. 그분의 은총의 기회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향한 심판과 자기 백성을 향한 열정을 확인할 날이 올 것입니다.

 

(1) ‘잠깐 숨을지어다’(20)

 

여호와께서 땅의 백성을 심판하시는 날은 이스라엘에 기쁜 날임과 동시에 위험스러운 날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분노에 휩쓸려들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악인들이 종말론적 심판에 넘겨질 때 이스라엘은 각자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잠깐’ 숨어 있어야 합니다(20).

 

(2) 죄악의 징벌(21)

 

심판하려고 여호와께서 그분 거처에서 나오시면 땅은 그 피를 드러내고 살해당한 자들을 더 이상 덮지 않습니다(21). 부당하게 살해당한 자들의 피가 그분께 복수를 간구합니다. 그분의 인내로 지체됐던 그분의 의가 이제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3) 혼돈 세력의 정복(27:1)

 

1절은 신화적 표상을 사용하여 종말에 있을 마지막 전쟁을 기술합니다. 태초에 원시 괴물(chaos)을 정복하고 질서(cosmos)를 세우셨던 것처럼 여호와께서 앗수르나 바벨론 같은 혼돈의 세력을 벌하시고 다시 창조 질서를 바로 세우십니다. ‘날랜 뱀 리워야단,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 바다에 있는 용’은 세 종류의 원시 괴물보다는 강조를 위한 반복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 하려면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한 곳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수시로 변하는 세상과 환경, 우리의 형편 위에 마음을 올려놓고, 날마다 전전긍긍하는 것은 애초에 시작이 잘못된 것입니다. 진정한 평안을 누리려면 마음을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신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바다 물결같이 요동치는 곳에 마음을 두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의지하는 것은 무엇인지 점검해 보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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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5-01)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서 펼쳐진 잔치

이사야 25장 1-12절


 

하나님께서는 모든 대적을 꺾으시고 세상을 심판하시며 왕좌에 앉으셨습니다.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이 살아가는 시기는 환난과 심판의 시대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기쁨으로 찬양하게 하십니다.

 

  • 24장 21-23절은 여호와의 종말론적 잔치를 선포하는 25장 6-8절에 사건적으로 이어집니다. 하늘의 군대와 땅의 왕들을 멸하시고 시온 산에서 왕이 되신 여호와께서 친히 잔치를 배설하시고 민족들을 손님으로 초대하십니다. 민족들이 여호와의 왕권에 온전히 참여합니다. 문맥에 따르면, 땅의 심판이 역설적으로 민족들에게 여호와께로 나아가는 문을 열어줍니다.

 

감사의 기도(1-5)

우리의 삶에는 가장 좋은 것이 선물로 주어져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산인 교회에서 그 잔치를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많은 성도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름진 것과 가장 좋은 포도주를 먹지 않고, 여전히 세상의 것만 찾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1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의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 2주께서 성읍을 돌 무더기로 만드시며 견고한 성읍을 황폐하게 하시며 외인의 궁성을 성읍이 되지 못하게 하사 영원히 건설되지 못하게 하셨으므로 3강한 민족이 주를 영화롭게 하며 포학한 나라들의 성읍이 주를 경외하리이다 4주는 포학자의 기세가 성벽을 치는 폭풍과 같을 때에 빈궁한 자의 요새이시며 환난당한 가난한 자의 요새이시며 폭풍 중의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사오니 5마른 땅에 폭양을 제함 같이 주께서 이방인의 소란을 그치게 하시며 폭양을 구름으로 가림 같이 포학한 자의 노래를 낮추시리이다(1-5)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상한 얼굴을 보이시고, 어떤 이들에게는 분노의 얼굴을 보이십니다. 이사야는 모든 열방을 심판하시고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1) 찬양으로 부름(1)

 

시인(예언자)은 ‘여호와’를 부르며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그가 사적으로 알고 있는 ‘나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2) 견고한 성읍의 멸망(2-3)

 

물론 2-5절의 내용이 보여주듯이 시인은 공동체를 대신하여 기도합니다. ‘기사’는 원래 전쟁이나 억압에서 해방과 같은 이스라엘 민족이 경험한 여호와의 구원행위 또는 시인이 경험하는 구원사건을 가리킵니다. 현재의 종말론적인 문맥에서는 마지막 때의 환난에서 해방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참조. 14:24; 22:11; 37:26)는 여호와께서 당신 계획에 따라 땅의 역사를 이루어가심을 보여줍니다. 그분은 임의로 역사에 개입하시는 분이 아니라, 미리 세우신 계획대로 신실한 자들에게 기사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성실함과 진실함’은 그분 구원행위의 확실성을 보여줍니다. 감사의 근거가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시인은 어떤 성의 멸망에 관해 여호와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호와께서 폐허로 만든 성이다시는 재건되지 못할 것입니다(2). 돌무더기가 된 성이 어떤 성을 가리키는지는 불분명합니다. 24:10에 언급된 ‘혼돈의 성’과 일치시키기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멸망 당해 돌무더기가 된 성읍이 동시대 사람들에게 알려진 성읍이라서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불의한 성읍의 멸망은 시인에게 여호와의 계획 속에 확정된 포학한 민족들의 심판을 예고해주는 서막이었습니다. 성읍의 멸망은 그가 드리는 감사의 일부에 속했습니다. 그는 현재의 경험으로부터 미래에 있을 ‘여호와의 기사’의 확실성을 깨닫습니다. 그는 그분의 개입에 의한 가난한 자들의 구원과 포학한 자들의 멸망을 미리 내다보며 그분께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3) 피난처 여호와(4-5)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는 ‘강한 민족’은 이스라엘보다는 2절과 관련해 성읍이 파괴된 이방 백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좀 더 일치합니다.

4절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포학한 자들에 시달리는 ‘빈궁한 자’와 ‘환난 당한 가난한 자’로, 강한 민족이 아닙니다. ‘경외하리니’는 ‘두려워하리니’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정복당한 ‘강한 민족’은 자신을 정복한 여호와를 인정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고, 주변의 다른 ‘포학한 나라들’은 그분을 두려워하기만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정의에 변함없는 신뢰를 내보이며 그분께 도움을 기대합니다(4-5). 그는 여호와께서 곤경에 빠진 자들의 요새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분만이 압도적인 폭력에서 힘없고 가난한 자들의 생명을 보호해주실 수있습니다. 그분만이 폭우에는 피난처가, 폭염에는 그늘이 되어주십니다. 팔레스티나에서 갑작스럽게 쏟아져 내리는 폭우와 뜨겁게 달궈진 폭염은 생명에 적대적이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시는 여호와는 포학한 자들을 억누르는 분이기도 합니다. ‘이방인의 소란’은 출정하는 병사들의 함성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분은 가난한 자(이스라엘)를 짓밟으려는 포학한 자들에게 승리를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여호와의 종말론적 잔치(6-8)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기적으로 만드신 포도주가 그렇듯이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것으로 내어놓으십니다. 최고의 음식은 정성의 결과요 상대방을 향한 애정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이 끝난 후 백성을 위로하시고 힘을 주십니다.

 

6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7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시며 8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6-8)

 

하나님의 잔치에는 사망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모든 사람에게 왕노릇하던 사망은 더 이상 사람들을 위협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을 멸망으로 이끌던 사망이 오히려 영원히 멸망 당합니다. 만왕의 왕이신 여호와께서 잔치를 베푸십니다. 내놓은 음식은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했던 포도주입니다.

 

(1) 민족들을 위한 잔치(6)

 

왕의 대관식에 뒤이어 축하 잔치가 열리듯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연회를 준비하시고 ‘만민’을 초대하십니다(6). 연회를 베푸시는 분은 ‘만군의 여호와’로, 이 이름은 24-27장에서 오직 이곳과 24:23에서만 등장합니다. 연회가 벌어지는 장소는 ‘이 산’으로, 여호와께서 왕이 되신 시온 산을 가리킵니다. 연회에 초대받은 손님은 ‘만민’으로, 여호와의 종말론적 통치에 땅의 모든 민족이 참여합니다. 종말론적 전쟁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적대 세력을 물리치시고 시온 산에서 보좌에 오르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넘어 모든 민족의 왕이 되십니다. 여호와께서 연회에 초대받은 민족들을 위해 최상의 음식과 포도주를 준비하십니다.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은 고기보다는 기름에 요리한 음식을 가리키고,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는 오래 저장하여 잘 숙성시킨 최고의 포도주로 잔치 자리의 기쁨을 더해줍니다. 시온 산에서 베풀어지는 연회는 단순한 축하연이 아닙니다. 연회에 참여한 모든 민족에게 여호와께서 놀라운 선물을 주십니다.

 

(2) 슬픔의 제거(7)

 

그분께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십니다(7). 민족들에게 씌워진 가리개와 덮개는 영적 무지(참조. 고후 3:13-18) 보다는 슬픔의 표지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애도의 표시로 얼굴을 천으로 가리는 풍습이 있었습니다(참조, 삼하 15:30; 19:5; 렘 14:3-4). 민족들은 죽은 자들, 특히 전쟁에서 쓰러진 자들을 애도하기 위해 다시는 너울로 얼굴을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3) 죽음의 폐지(8)

 

여호와의 종말론적 통치가 새로운 차원의 삶을 약속해줍니다. 그분께서 ‘사망을 영원히 멸하시고’ 모든 민족의 얼굴에서 눈물을 씻겨주실 것입니다(8). 죽음이 사라지기에 애도를 위해 얼굴을 가리거나 눈물을 흘리는 일도 없어집니다. 항구적인 기쁨과 구원이 주어집니다. 구약 성경적 이해에 따르면, ‘죽음의 영원히 멸망’은 종말에는 모든 민족이 여호와의 통치와 보호 아래 안전하게 살아가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께서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재앙에서 해방시켜 영원히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분의 통치 아래 사는 자들에게는 전쟁도, 질병도, 기근도, 자연재해도, 사회적 불의나 불법도 없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땅에서 제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나 남은 자들의 구원 공동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들을 위해 여호와께서 시온 산에서 종말론적 연회를 준비하신다는 점에서 이 단락은 매우 독자적입니다. 시온을 찾는 민족들의 순례는 여러 곳에 등장하지만(2:2-4; 시 96:7-8; 슥 14:16 등), 이곳에서만 민족들은 여호와의 초대를 받아 시온 산으로 올라옵니다.

 

감사와 모압의 멸망(9-12)

성도들은 이 땅에서 겪는 고통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이 땅에서 겪는 고통 때문에 주님을 더 사랑하고, 천국잔치를 더욱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고통은 감사한 것입니다. 고통이 없으면 영광도 없습니다. 눈물이 있기에 하나님의 위로가 더욱 감사한 것입니다.

 

9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 10여호와의 손이 이 산에 나타나시리니 모압이 거름물 속의 초개가 밟힘 같이 자기 처소에서 밟힐 것인즉 11그가 헤엄치는 자가 헤엄치려고 손을 폄 같이 그 속에서 그의 손을 펼 것이나 여호와께서 그의 교만으로 인하여 그 손이 능숙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누르실 것이라 12네 성벽의 높은 요새를 헐어 땅에 내리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시리라(9-12)

 

세상에서는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고난과 더불어 일생을 살게 됩니다. 그럼에도 지금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의 고난은 영생을 누리면서 얻을 영광과 비교할수 없고, 이 땅에서 겪었던 고통의 크기도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면서 누리는 기쁨의 크기와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고통 때문에 낙망하지 말아야합니다.

 

(1) 이스라엘의 응답(9-10a)

 

여호와께서 시온 산에서 왕으로 통치하실 때(‘그 날에’) 이스라엘은 구원을 경험하고 이들의 적인 모압은 멸망을 당합니다. 아직은 수치 가운데 있지만, ‘우리’ 공동체는 임박한 구원을 기대하며 기뻐합니다. 곧 재앙의 시대가 지나고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시작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소망을 두고 있는 ‘우리의 하나님’이 구원자이심을 확신하고 미리 그분의 구원을 환호하며 즐거워합니다. 10a절의 ‘여호와의 손이 이 산에 나타나시리니’는 여기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여호와의 지속적이고도 완벽한 보호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2) 모압의 명망(10b-12)

 

시온 산에서 왕으로 통치하시는 여호와의 보호를 받는 이스라엘과 대조적으로 모압은 ‘자기 처소에서’, 곧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짓밟힐 것입니다. 모압의 절망적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 타작마당을 거름 구덩이로 옮겨 놓습니다. 지푸라기가 거름 구덩이에서 짓밟히듯이 그렇게 모압이 짓밟힐 것입니다(10b). 11절에서도 비유를 사용해 모압의 헛된 노력을 조롱합니다. 헤엄치는 자가 손을 뻗어 헤엄치듯이 모압도 구덩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헤엄을 치지만, 모압이 빠진 구덩이는 거름 구덩이이기에 그의 능숙한 손놀림에도 불구하고 깊이 빠져들어 갈 뿐입니다. 그의 교만(자부심)이 목숨을 구해주지 못합니다. 모압은 교만과 함께 거름 구덩이에 빠져 죽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압의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리고 낮추어 진토에 미치게 하실 것입니다(12). 자신의 높음(교만)을 자랑하던 모압이 완전히 허물어져 땅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낮아집니다. 모압은 회복이 불가능하게 완전히 멸망합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보면,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에 수치를 가하는 모압과 같은 나라는 여호와의 종말론적 연회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두 가지 이유로 하나님의 잔치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한 풍성함이 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이 땅에서의 모든 고통과 눈물을 하나님께서 제거하시고 위로하시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언제나 동행하며 그 잔치를 사모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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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4-02)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이사야 24장 14-23절


 

하나님의 심판은 죄를 미워하는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의 날은 절대로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심판을 맞이하는 자세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자세로 심판의 날을 맞이하고 싶습니까? 그래서 어떤 운명을 맞이하고 싶습니까?

 

  • 현재 문맥에서 보자면, 땅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승리가 아니라 여호와의 최종적이며 완전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우주적 재앙은 그분 왕권의 수립에서 정점에 도달합니다. 마지막 전쟁에서 패한 하늘의 군대와 땅의 왕들은 옥에 갇혔다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심판을 받고, 여호와께서 시온 산에서 왕으로서 (민족들을) 통치하십니다.

 

찬양 받으시는 하나님(14-16a)

우리는 끝이 안 보이는 드넓은 바다나 높이 치솟은 산과 같은 거대한 자연 앞에 숙연해지고 겸손해집니다. 그래서 인류에게는 역사적으로 자연숭배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자연 만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노년에 접어든 자신을 압도하고 두려워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14무리가 소리를 높여 부를 것이며 여호와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바다에서부터 크게 외치리니 15그러므로 너희가 동방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며 바다 모든 섬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 16땅 끝에서부터 노래하는 소리가 우리에게 들리기를 의로우신 이에게 영광을 돌리세 하도다 그러나 나는 이르기를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14-16a)

 

이사야는 남은 자들이 서쪽 바다와 땅끝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큰 소리를 듣습니다. 그는 동방과 모든 섬에서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배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현실로 돌아와 이 땅의 죄와 심판 때문에 애통해합니다.

 

(1) 바다에서(14)

 

신분이 모호한 ‘그들’이, 아마도 눈앞에 전개되는 역사적 격변에서 여호와의 구원사적 개입을 보면서, 그분의 위엄에 환호하고 기쁨의 환성을 터뜨립니다(14). 개역개정이 ‘무리’로 옮긴 ‘그들(헴마)’은 땅의 심판에서 살아남은 세상 주민도 가능하지만, 현재 문맥에서는 세상에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기쁨의 감격이 세 개의 동사 ‘(소리를) 높이다(나사), 부르다/환호하다(라난), 크게 외치다(차할)’를 통해 격정적으로 표출됩니다. 뒤의 두 동사는 12:6에서는 시온의 주민에게 적용됐습니다. 기쁨의 동기이자 내용은 ‘여호와의 위엄’입니다. ‘위엄’의 ‘가온’은 ‘높다’를 의미하는 동사 ‘가아’에서 파생한 명사로, 여호와만이 높으시고 또 높임을 받으실 분임을 보여줍니다(2:10,19,21). 그분의 위엄은 그분 능력 가운데 나타납니다(출 15:1,7; 미 5:4). 바다에서부터 울려나가는 환호가 사방으로 퍼져나갑니다.

 

(2) 동방에서(15)

 

바다에서부터 환성을 지르는 자들이 ‘동방’과 ‘바다 모든 섬’에 사는 자들에게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라고 명합니다(15). 제의에서 여호와의 이름은 여호와를 대신하는 표현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행위와 업적, 명성과 명예를 내포하는 역동적 단위로, 여호와 이름의 위엄은 그분의 능력과 영광이 계시된 (역사적) 사건들 가운데 나타납니다.

 

(3) 땅끝에서(16a)

 

온 땅에서 환호하는 소리가 예루살렘에까지 들립니다. 예언자를 포함하는 ‘우리’ 공동체는 ‘땅 끝에서부터’ 들려오는 ‘의로우신 이에게 영광을 돌리세’라는 찬양의 노랫소리를 듣습니다(16). 땅 끝에 사는 자들이 세상을 심판하신 분, 곧 적을 물리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분을 찬양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립니다. 여호와를 지칭하는 ‘의로우신 이’(차디크)는 구원자 또는 승리자의 의미를 포함합니다.

 

이 단락에서는 방위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바다’는 일반적으로 지중해를 의미하고 방위로는 서쪽을 가리킵니다. ‘동방의 우림’은 그 어원이 불분명하지만, 보통 ‘빛’과 관련지어 ‘빛이 밝아오는 지역’, 곧 동쪽으로 이해합니다. ‘바다 모든 섬’(‘바다의 섬들’)은 시리아 해변이나 소아시아 해변 또는 키프로스 해변을 의미하기에 방위로는 북쪽을 가리킵니다. ‘땅끝’의 ‘커나프 하아레츠’은 문자적으로는 ‘땅의 날개’로, 원래는 특정 방위를 가리키지 않지만, 현재의 문맥에서는 남쪽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여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복수의 ‘땅의 날개들’로 나오고, 땅의 사방을 가리킵니다. 서쪽에서 시작한 환호성이 동쪽과 북쪽을 거쳐 남쪽으로 해서 ‘우리’가 있는 예루살렘까지 도달합니다. 이사야를 제외하고 온 땅에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사람이 모두 여호와의 위엄과 영광과 승리를 찬양합니다.

 

예언자의 소리(16b-20)

하나님께서는 최후 심판을 통해 인간들의 죄악으로 오염된 이 땅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변화 받은 성도들을 위해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새 술이 새 부대에 담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에게 최후의 심판은 두려움으로 피할 것이 아니라 소망 가운데 바라고 기다릴 것입니다. 세상의 죄악이 모두 사라진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16… 내게 화가 있도다 배신자들은 배신 하고 배신자들이 크게 배신하였도다 17땅의 주민아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네게 이르렀나니 18두려운 소리로 말미암아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빠지겠고 함정 속에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 19땅이 깨지고 깨지며 땅이 갈라지고 갈라지며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20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원두막 같이 흔들리며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16b-20)

 

죄인들은 심판을 피해 도망가지만, 아무도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도망가는 그곳에 또 다른 함정이 기다리고 있고, 함정에서 빠져 나와도 또 다른 올무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처럼 하늘 문이 열려 폭우가 쏟아지고 홍수가 날 것이며, 강도 높은 지진으로 모든 것이 파괴될 것입니다.

 

(1) 예언자의 절망적 반응(16b)

 

온 땅에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열정적 반응이 이사야를 심각한 불안에 빠뜨립니다. 땅의 심판이 이스라엘의 즉각적 구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본 환상에 전율하고 자신에게 화를 선언합니다(16b).

 

(2) 피할 수 없는 심판(17-18)

 

구원 시대가 동텄다고 환호하는 자들과 달리 그에게 이스라엘의 구원은 아직 감춰진 하나님의 사건이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점점 더 짙게 땅을 뒤덮는 무시무시한 재앙만 보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성급하고도 일방적인 환호에 제동을 겁니다. 땅의 심판은 곧 임할 우주적 파국적 사건으로, 땅에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위험한 시간입니다.

‘배신자들은 배신하고 배신자들이 크게 배신하였도다’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불분명합니다. 민족들 간의 배신(21:2), 이스라엘이 의존하는 이방세력의 배신, 또는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일부의 배신을 생각해볼 수 있지만, 현재 문맥에서는 마지막 때의 혼란과 무질서를 특징짓는 표현으로 사용된 것 같습니다. 이사야가 환상 중에 본 것은 구원 시대가 아니라 악이 횡행하는 파렴치한 시대였습니다.

 

땅에 사는 사람들 위로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덮쳐옵니다(17).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길을 찾아 도망해보지만, 함정에 떨어져 사로잡힐 뿐입니다. 애써 함정에서 빠져나와도 기다리는 것은 올무뿐입니다.(18a; 암 5:19). 누구도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재앙의 범위가 우주로 확대됩니다.

18b절의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는 하늘의 창문을 열고 비를 내려 범죄한 인류를 진멸한 노아의 대홍수를 생각나게 해주고(창 7:11; 8:2),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와 19절은 지진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3) 흔들리는 땅(20)

 

태초에 하나님께서 흔들리지 않게 견고히 놓은 땅의 기초가 그분 심판 앞에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술에 취한 자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듯이, 임시로 만든 원두막이 비바람에 흔들리듯이 땅이 흔들립니다(20a).

땅이 그처럼 무서운 심판에 넘겨질 때는 물론 이유가 있었습니다. 죄악이 땅을 멸망으로 이끕니다. 땅의 죄악이 땅을 무겁게 짓눌러 땅이 쓰러지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합니다(20b). 술꾼과 원두막에 비유된 땅이 무거운 짐에 눌려 엎어진 짐꾼에 비유됩니다. ‘떨어져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가 아모스 5:2의 인용이라면,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에 관한 예언이 이미 성취된 것처럼 땅의 멸망에 관한 예언도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승리와 통치(21-23)

공중의 악한 세력들과 죄인들은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완전히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 있어 그 날은 구원이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승리의 날입니다. 따라서 믿는 자는 그 날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확신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은 최후 심판의 최종적인 결론을 보여줍니다.

 

21그 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데에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니 22그들이 죄수가 깊은 옥에 모임 같이 모이게 되고 옥에 갇혔다가 여러 날 후에 형벌을 받을 것이니라 23그 때에 달이 수치를 당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라(21-23)

 

하나님을 반역한 타락한 천사들과 이 땅의 왕권을 쥔 자들도 심판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먼저 옥에 갇히고, 여러 날 후에 최후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온 땅을 다스릴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해와 달을 대신하여 온 세상을 비추게 될 것입니다.

 

(1) 군대와 왕들을 벌하시는 여호와(21)

 

‘그 날에’ 악한 세력과 결정적인 마지막 싸움이 하늘과 땅에서 벌어집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는 하늘의군대를 땅에서는 땅의 왕들을 벌하십니다(21). 종말론적 전쟁은 하늘과 땅의 모든 세력이 참여하는 우주적 싸움입니다.

18절의 ‘위에 있는’과 ‘높은 데’의 ‘마롬’은 ‘하늘’을 의미하고, ‘높은 군대’는 민족들의 수호천사들이나 신적 통치자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다니엘에서 이스라엘의 수호천사인 미가엘은 페르시아 왕국의 수호천사와 그리고 헬라의 수호천사와 싸웁니다(단 10:13, 20-21). 여기서는 다니엘과 달리 여호와께서 직접 적대적인 하늘의 군대는 물론 지상의 왕들도 모두 벌하십니다.

 

(2) 감옥에 갇혔다가 벌 받는 자들(22)

 

마지막 전쟁에서 패한 하늘의 군대와 땅의 왕들은 ‘깊은 옥’에 한데 갇혀 그곳에서 지내다가 ‘여러 날 후에’ 형벌을 받습니다(22;계 20:1-3). ‘깊은 옥’의 ‘보르’는 때로는 지하세계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감옥으로 이용되는 구덩이를(참조. 창 37:20, 22; 40:15; 41:14; 렘 38:6), ‘벌하다’의 ‘파카드’는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묻다’를 의미합니다.

 

(3) 시온산에서 왕이 되시는 여호와(23)

 

종말론적 싸움의 최종 목표는 지상에 여호와의 왕권을 세우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십니다(23). ‘여호와의 왕 되심’은 물론 ‘새로이 보좌에 올라가심’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영원까지 변함없는 왕이시고, 그분 왕권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통치권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았던 그분의 왕권이 마지막 때에는 누구나 볼 수 있게 완전하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장로들 앞에서’는 출애굽기 24:9-11을 배경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언약을 세울 때 모세와 아론과 그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 그리고 칠십인 장로가 하나님의 산에 올라가서 여호와를 뵙고 먹고 마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지 않고, 먹고 살아가는 것에만 몰두하는 것은 어리석은 삶입니다. 하나님 없이 높아지고 커지고 유명해지고 부유해지는 삶은 심판의 날에 두려움에 떨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에만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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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4-01)


온 땅을 황폐케 할 하나님의 심판

이사야 24장 1-13절


 

이스라엘이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며 쾌락을 추구하면서 율법을 범하고 율례를 어기고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의와 공평과 정의를 버려도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공의가 주의 백성에게는 어떻게 적용됩니까?

 

  • 온 땅이 여호와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그분께서 세상을 황폐시키시고 주민들을 흩으십니다. 그분의 심판으로 땅의 모든 기존 질서가 파괴되고, 혼돈과 무질서가 땅을 지배하게 됩니다. 본문은 여호와에 의한 땅의 심판에 집중하고, 그분께서 어떤 방식으로 심판하시는지에 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땅의 심판(1-3)

하나님의 심판에서 아무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날에 종교도, 사회 경제적 신분에도 상관없이 모두 심판에 떨어질 것입니다. 죄로 물든 이 세상은 마치 태초의 ‘혼돈과 공허’의 상태로, 무질서의 상태로, 광야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 같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이 새 창조의 모판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몇몇 민족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심판하십니다.

 

1보라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 황폐하게 하시며 지면을 뒤집어 엎으시고 그 주민을 흩으시리니 2백성과 제사장이 같을 것이며 종과 상전이 같을 것이며 여종과 여주인이 같을 것이며 사는 자와 파는 자가 같을 것이며 빌려주는 자와 빌리는 자가 같을 것이며 이자를 받는 자와 이자를 내는 자가 같을 것이라 3땅이 온전히 공허하게 되고 온전히 황무하게 되리라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하셨느니라(1-3)

 

마지막 때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은 온 땅은 완전히 황폐케 될 것입니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심판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날에 땅의 일부분이 아니라 ‘온 땅’이 심판으로 황폐케 되는 이유는 온 땅의 거민이 ‘율법’을 어기고 ‘더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 땅을 파괴하시는 여호와(1)

 

온 땅이 여호와의 심판 대상으로 등장합니다. 1절의 현재분사가 뒤따르는 ‘보라 여호와께서’는 심판의 문맥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으로(3:1; 8:7; 10:33; 19:1; 22:17; 24:1; 26:21), 그 확실성과 임박함을 강조합니다. 아직 현재에 속하지는 않지만, 여호와께서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땅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 황폐하게 하시며 지면을 뒤집어 엎으시고 그 주민을 흩으십니다. 땅을 파괴하여 황무지로 만드실 뿐만 아니라, 키로 까불러 겨나 지푸라기를 바람에 날려버리듯이(41:16) 땅에 사는 자들을 사방으로 흩어버리십니다. 상반절은 파괴의 심판을, 하반절은 흩어짐의 심판을 선언합니다. 원래 이스라엘의 심판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표현들이 우주적 심판에 전용됩니다. 땅의 심판에서 예외는 없습니다.

 

(2) 예외 없는 그분의 심판(2)

 

신분과 지위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다 여호와의 심판에 떨어집니다(2). 첫 번째 대조는 종교적 신분과, 나머지 다섯 개의 대조는 사회적 신분과 관련됩니다. 물론 기존권위의 붕괴(3:1-5)에 관해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심판하실 때는 종교적 특권이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능력이 무용지물이 됩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자나 낮은 지위에 있는 자나, 가진 것이 많은 자나 가진 것이 없는 자나 모두 그분의 심판에 떨어집니다. 특이하게도 백성이 왕과 같은 통치자가 아니라 제사장에 비교돼 첫머리에 등장하고, 나머지는 모두사회 경제적 영역에 속한 계급에 관해 언급합니다.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것인지 또는 어떤 의도에서 나온 것인지는 불분명합니다.

 

(3) 온통 파괴되는 땅(3)

 

3절 전반은 주제와 표현에서 1절 전반의 대체적 반복입니다. 단지 문장이 수동태로 기술되면서 파괴의 주체(행위자)보다 파괴되는 대상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온전히’로 옮긴 절대부정사가 첨가돼 파괴와 약탈이 전면적이고 철저하게 이뤄질 것을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하셨느니라’는 1-3절을 마감하는 언급으로, 땅을 황폐하게 하고 지면을 뒤집어엎는 심판 예언의 신적 기원을 다시금 강조합니다. 지금 예언자가 선포하는 온 세상의 심판은 여호와의 결정으로 때가 되면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저주받은 땅(4-13)

하나님께서는 죄로 물든 이 세상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뿐입니다. 이미 믿고 있는 성도라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음을 깨닫고 정신을 차리고 회개하며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심판의 땅에는 흉작이 찾아오고, 이에 사람을 사이에는 축제의 즐거움이 사라질 것입니다.

 

4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세계가 쇠약하고 쇠잔하며 세상 백성 중에 높은 자가 쇠약하며 5땅이 또한 그 주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으니 이는 그들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6그러므로 저주가 땅을 삼켰고 그 중에 사는 자들이 정죄함을 당하였고 땅의 주민이 불타서 남은 자가 적도다 7새 포도즙이 슬퍼하고 포도나무가 쇠잔하며 마음이 즐겁던 자가 다 탄식하며 8소고 치는 기쁨이 그치고 즐거워하는 자의 소리가 끊어지고 수금 타는 기쁨이 그쳤으며 9노래하면서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고 독주는 그 마시는 자에게 쓰게 될 것이라 10약탈을 당한 성읍이 허물어 지고 집마다 닫혀서 들어가는 자가 없으며 11포도주가 없으므로 거리에서 부르짖으며 모든 즐거움이 사라졌으며 땅의 기쁨이 소멸되었도다 12성읍이 황무하고 성문이 파괴되었느니라 13세계 민족 중에 이러한 일이 있으리니 곧 감람나무를 흔듦 같고 포도를 거둔 후에 그 남은 것을 주움 같을 것이니라(4-13)

 

이 땅의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는 것은, 교만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영원한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죄 때문에 사는 땅도 더러워졌고 쇠약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땅에 임하여 초목이 불타 버리고, 더는 소출이 없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던 술과 음악과 잔치가 사라질 것입니다.

 

(1) 심판의 원인(4-6)

 

땅이 여호와의 심판에 떨어진 이유를 보여주기에 앞서 다시 한 번 땅의 멸망을 기술합니다. 땅은 말라 시들고 세계는 쇠하여 시들고, 땅의 백성 가운데 가장 높은 자(땅과 함께 하늘?)도 쇠합니다(4). ‘세계’은 ‘사람이 사는’, ‘개간된 땅’을 가리킵니다.

‘세상 백성 중에 높은 자’는 땅의 심판이 특히 땅의 멸망에 1차적 책임이 있는 통치자들에게 집중될 것을 보여 줍니다. 24장의 문맥에서는 여호와에 의해 징벌을 당하는 ‘땅의 왕들’(21)에 연결됩니다. ‘마르다(슬퍼하다)’, ‘시들다’, ‘쇠하다’는 가나안의 농부들에게 익숙한 가뭄을 표현하는 단어들입니다. 여호와께서 땅을 심판하시는 이유가 포괄적으로 언급됩니다. 그 주민들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깨뜨려 땅이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5).

이스라엘을 고발할 때 사용하던 신학적 개념과 논리가 땅의 모든 주민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의 언약을 통해) 율법과 율례를 아는 것처럼 민족들도 율법과 율례를 알고 있음을 전제합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 앞에서 자신의 행위에 책임적인 것처럼 민족들도 그분 앞에서 자기네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시내산의 계시는 이스라엘에 독점적으로 주어지지만, 땅의 주민들에게도 기본 질서에 대한 인식은 주어졌습니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영원한 언약’으로는 노아의 언약(창 9:16)과 다윗 언약(삼하 23:5; 사 55:3)을 들 수 있습니다. 노아의 언약은 아브라함의 언약처럼(창 17:7,13,19; 시 105:10) 여호와의 은총에 의한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언약이기에 언약의 상대인 사람들에 의해 깨질 수가 없습니다. ‘영원한 언약을 깨뜨렸다’는 고발은 형식상 모순이 됩니다. ‘영원한 언약’이 법규의 준수를 포함하는 언약임을 전제합니다. 노아의 영원한 언약에 시내산의 조건적 언약이 결합된 모습입니다.

요약하자면, 이스라엘을 고발할 때 사용하던 ‘시내산 언약의 파기’가 민족들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민족들의 심판이 겉보기와는 달리 임의적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시내산 언약을 파기해서 징벌을 받듯이 민족들도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분명한 근거에 따라 심판을 받습니다. 6절도 다르지 않습니다. 시내산 언약의 파기가 땅을 더럽혀서 이스라엘에 저주를 가져온 것처럼(민 35:33; 시 106:38; 렘 11:3,8; 23:10; 슥 5:3; 단 9:11), 마찬가지로 민족들에 의한 영원한 언약의 파기로 땅이 저주에 넘겨집니다. 여호와께 순종을 거절한 이스라엘을 칼이 삼키는 것처럼(사 1:20) 저주가 땅을 집어삼킵니다. 삶의 공간인 땅이 저주를 받기에 생존이 불가능해집니다. 사람들은 자기네 악행으로 더럽혀진 땅에서 죗값을 받아야 합니다. 죄를 범한 땅의 주민들은 죄의 파멸적 세력에 사로잡혀 멸망에 떨어지고 극히 일부만 살아남습니다.

 

(2) 사라진 축제와 기쁨(7-9)

 

여호와의 심판이 초래하는 재앙을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표현을 사용하여 구체적으로 기술합니다(6-9). 4절에 나온 동사 ‘슬퍼하다’(마르다)와 ‘쇠하다’를 다시 받아 포도농사의 흉작을 언급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지고 포도나무는 생명력을 잃고 다시는 포도를 맺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즐거움을 상실하고 모두 한숨만 짓습니다. 결실이 없기에 사람들이 손북과 수금을 치며 기뻐 흥겹게 떠들어대는 일이 없어집니다. 포도주가 끊기고 음악이 멎고 축제의 기쁨도 사라집니다. 삶의 즐거움을 상실한 자들에게 술은 쓰기만 합니다. 축제의 흥을 더해주던 술을 이제는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기 위해 마십니다.

 

(3) 혼돈이 성읍(10-12)

 

심판과 관련해 새로운 모티브가 등장합니다. ‘혼돈의 성읍’(‘약탈당한 성읍’)은 파괴되고 집들은 모두 달혀 들어가는 자가 없습니다(10). 여호와의 심판으로 허물어지는 ‘혼돈의 성읍’이 어떤 성읍을 가리키는지는 달리 언급이 없기에 모호하게 남습니다. 25:2-3; 26:5; 27:10에도 여호와의 심판으로 파괴되는 성읍이 나오는데, 같은 성읍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여호와께 적대적인 땅의 세력이라는 점이고, 이런 배경에서 혼돈의 성읍으로 앗수르나 바벨론 같은 대제국의 수도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토후’는 여호와의 창조 사역을 통해 정복된 원시의 혼돈으로(창 1:2;렘 4:23), ‘혼돈의 성읍’은 마치 태초의 혼돈이 밀려들어 온 그러한 성읍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의 심판으로 창조 세계(cosmos)가 다시 혼돈이 지배하는 무질서의 세계(chaos)로 되돌아갑니다. ‘집마다 닫혀서 들어가는 자가 없으며’는 성읍이 완전히 폐허가 되어 접근할 수 있는 길이 막혔음을 의미합니다.

11절은 주제와 표현에서 7-9절의 반복입니다. 포도주의 상실이 더 극적으로 표현됩니다. 거리에는 슬퍼하며 포도주를 찾아 외치는 소리만 들릴 뿐입니다. 포도주의 떨어짐은 ‘모든 즐거움’과 ‘땅의 기쁨’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파괴된 성읍에는 비탄에 떨어진 자들의 울부짖음뿐, 즐거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허물어진 ‘혼돈의 성읍’에 남은 것은 허뿐입니다(12). ‘성문의 파괴’는 성문 주변에서 치열하게 공방전이 전개되기에 특별히 언급된 것 같습니다. 침략군의 공격으로 성문은 부서지고 허물어져 황량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에 자주 사용되는 추수의 표상(참조, 17:6)이 다시금 민족들에게 적용됩니다. 감람나무를 떨고 났을 대처걸, 포도 수확이 끝나고 일부 남은 것을 거두는 것처럼 극히 일부만 심판에서 살아남습니다(13; 6). 민족들 가운데 있을 여호와의 심판이 얼마나 철저하게 이뤄질지를 보여줍니다(참조, 13:12).


공의를 거부하고 정의를 거부하며 하나님의 법을 팽개치고 살아가는 삶의 결과는 심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공평을 버리면 하향평준화의 공평이 강제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이고 선물이니 주의 긍휼을 구하며 겸손히 공평의 삶을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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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3-01)


두로와 시돈의 몰락과 회복

이사야 23장 1-18절


 

‘돈’처럼 매력적인 것도 없고, 허망한 것도 없습니다. ‘돈’만큼 위력적인 것도, 위험한 것도 없습니다. 한평생 쌓는 것이지만 한순간에 잃는 것도 돈입니다. 힘의 상징이던 바벨론 멸망에 이어 부의 상징인 두로의 멸망은 우리의 가치관을 바꾸고, 하고 싶고 갖고 싶은 우리의 욕망을 재조정하도록 도전합니다.

 

  • 민족들의 신탁(13-23장)의 마지막 장인 23장은 페니키아의 유명한 도시국가 두로와 시돈을 대상으로 주어진 말입니다. 이사야는 애가의 양식을 활용해 두로와 시돈의 멸망을 선포합니다. 지중해 해상무역을 독점하고 엄청난 영화 누리던 두로와 시돈이 갑자기 적에 의해 멸망을 당합니다. 이들이 자랑하던 원양선단도 멸망에서 구해내지 못합니다.

 

두로의 패망에 관한 예언(1-14)

의존도가 높을수록 희망도 높겠지만, 반대로 절망도 짙을 것입니다. 그것이 국가적이든 개인적이든 간에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고, 믿고 그 누구도 자신을 책임져줄 수 없음을 인지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상황은 여호와께서 만든 상황이 아니라도 그분이 허락하신 상황이요 통제하시는 상황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두로에 관한 경고라 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두로가 황무하여 집이 없고 들어갈 곳도 없음이요 이 소식이 깃딤 땅에서부터 그들에게 전파되었음이라 2바다에 왕래하는 시돈 상인들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된 너희 해변 주민들아 잠잠하라 3시홀의 곡식 곧 나일의 추수를 큰 물로 수송하여 들였으니 열국의 시장이 되었도다 4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대저 바다 곧 바다의 요새가 말하기를 나는 산고를 겪지 못하였으며 출산하지 못하였으며 청년들을 양육하지도 못하였으며 처녀들을 생육하지도 못하였다 하였음이라 5그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그들이 두로의 소식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으리로다 6너희는 다시스로 건너갈지어다 해변 주민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7이것이 옛날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 8면류관을 씌우던 자요 그 상인들은 고관들이요 그 무역상들은 세상에 존귀한 자들이었던 두로에 대하여 누가 이 일을 정하였느냐 9만군의 여호와께서 그것을 정하신 것이라 모든 누리던 영화를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교만하던 자가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0딸 다시스여 나일 같이 너희 땅에 넘칠지어다 너를 속박함이 다시는 없으리라 11여호와께서 바다 위에 그의 손을 펴사 열방을 흔드시며 여호와께서 가나안에 대하여 명령을 내려 그의 견고한 성들을 무너뜨리게 하시고 12이르시되 너 학대받은 처녀 딸 시돈아 네게 다시는 희락이 없으리니 일어나 깃딤으로 건너가라 거기에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13갈대아 사람의 땅을 보라 그 백성이 없어졌나니 곧 앗수르 사람이 그 곳을 들짐승이 사는 곳이 되게 하였으되 그들이 망대를 세우고 궁전을 헐어 황무하게 하였느니라 14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으라 너희의 견고한 성이 파괴되었느니라(1-14)

 

13-23장에 언급된 열방들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 중에서 두로에 관한 경고의 메시지가 끝부분에 나오고 있음에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아마도 이는 세계적인 활동 범위 때문에 당시에 두로가 국제 정세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나 역할이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1) 다시스의 배들(1)

 

이사야는 다시스의 배들에게 슬피 부르짖으라고 외칩니다(1). 두로가 황폐해져 집도 없고 들어갈 곳도 없게 됐습니다. 많은 물건을 싣고 깃딤 땅에서 돌아오는 길에 두로가 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목적지인 두로가 파괴됐기에 다시스의 배들은 돌아갈 곳이 없어졌습니다.

‘다시스 배들’은 지중해를 항해하면서 무역을 하는 원양선단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두로에 엄청난 부를 가져다준 자랑거리였습니다. 다시스는 스페인 남서해안의 항구로 지중해 해상무역에서 서쪽 끝을 의미합니다. ‘깃딤 땅’은 지중해 중심에 있는 키프로스를 가리킵니다.

 

(2) 해변 주민들(2-3)

 

이사야의 시선이 바다의 배들에서 해변으로 옮겨집니다. 그는 이번에는 해변 주민들에게 잠잠하라고 외칩니다(2). 바닷가 주민들은 바다를 왕래하는 시돈 상인들 때문에 부요하게 살 수 있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혜택을 누릴 수 없게 됐습니다.

‘해변 주민들’은 페니키아 사람들을 ‘시돈 상인들’은 시돈을 포함해서 페니키아 지방의 중개무역 상인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잠잠하다’는 1절의 ‘슬피 부르짖다’와 내용상 동일합니다. 페니키아 지방은 원양선단을 이끌고 지중해를 항해하며 중개무역을 하는 두로와 시돈 상인들 덕분에 많은 부를 축적했습니다.

3절은 중개무역의 한 예를 보여줍니다. 이들은 ‘시홀의 곡식 곧 나일의 추수’를 지중해를 통해 가져와 민족들에게 되팔아 많은 이익을 남겼습니다. 나일강의 범람으로 토지가 비옥했던 애굽은 근동의 곡식 창고였습니다. 시돈과 두로는 중개무역의 중심지로 민족들의 특산품이 그리로 모였다가 사방으로 수출됐습니다.

 

(3) 바다(4-5)

 

이사야는 전적으로 바다 덕분에 살아가는 시돈과 두로에게 바다의 입을 통해 파국적 재앙을 선포하게 합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가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는 것처럼 이들의 해상무역이 아무런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입니다(4).

‘바다의 요새’는 해안에서 600-700미터 떨어진 두로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들과 오래전부터 거래를 해왔던 애굽은 두로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에 빠집니다(5). 애굽은 많은 부를 가져다준 중개무역의 파트너를 잃어버립니다.

 

(4) 해변 주민들(6-9)

 

이사야는 해변 주민들에게 통곡하며 다시스로 건너가라고 권면합니다(6). 그의 권고는 풍자적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다시스는 페니키아 사람들이 멸망을 피해 이주해가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다음과 같이 풀어볼 있습니다. ‘원양선단을 자랑하는 자들아, 세상 끝에 있는 다시스는 안전할지 모르니 능력이 있으면 거기로 가서 피난처를 찾아보아라.’

이사야는 과거와 현재를 대비시켜 믿기지 않는 두로의 멸망을 언급합니다(7). 그처럼 기쁨이 넘치던 두로가 몰락하여 통곡의 소리만 들릴 뿐입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지중해 연안에 많은 식민지를 개척하였던 두로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페니키아 사람들은 일찍부터 스페인의 다시스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등지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자신들의 교역권과 해상권을 보호하였습니다.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고 중개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두로의 영화는 영원할 것 같았지만, 여호와의 결정으로 갑작스럽게 종말을 맞습니다(8-9). 만군의 여호와께서 두로의 운명을 멸망으로 정하셨기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영화를 누리던 자들을 욕되게 하시고 교만하던 자들을 멸시받게 하실 것입니다. 민족들의 운명은 경제력이나 군사력 또는 강대국의 욕심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땅에서 민족들이 서로 경쟁하고 싸우지만, 마지막 결정은 언제나 여호와의 몫입니다. 면류관을 씌우던 자는 식민지의 제후들이나 왕들이 두로에 정치적 경계적으로 의존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지중해 주변의 많은 도시와 나라들은 두로의 중개무역 덕분에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기에 두로의 영향력을 인정해주었습니다.

 

(5) 딸 다시스(10-13)

 

‘그 상인들은 고관들이요’는 나라의 고위직이 상인들에게 주어졌다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두로의 상인들이 교역지에서 정치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 무역상들은 세상에 존귀한 자들이었던’도 이들이 정치적으로 비중 있는 인물로 명성을 누렸음을 시사해줍니다. 개역개정의 번역에 따르면, 나일의 범람으로 애굽에 수확물이 풍부하듯이 두로의 멸망으로 그 굴레에서 벗어난 다시스에는 부가 넘치게 됩니다.

11절의 ‘여호와께서 바다 위에 그의 손을 펴사’는 바다를 무대로 부와 명성을 획득한 두로와 시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열방을 흔드시어’는 두로의 멸망에 직면한 민족들의 반응입니다. ‘가나안의 견고한 성읍들’을 파괴하시는 그분의 심판이 페니키아를 넘어 이들과 거래한 왕국들에도 영향을 미쳐 두려움에 떨게 만듭니다. ‘가나안’은 여기서는 페니키아 지방을 가리킵니다. 가나안 사람들과 페니키아 사람들은 특히 언어와 종교에서 매우 가까웠습니다.

여호와의 심판에 떨어진 시돈에게는 앞으로 기뻐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11). 깃딤으로 피신한들 소용이 없습니다. 거기에서도 편안을 얻지 못합니다. 한때 지중해를 지배하였던 시돈이 어디에서도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 시돈의 멸망은 바벨론의 멸망과 유사하게 이뤄질 것입니다. 앗수르가 바벨론을 점령하고 초토화시켜 들짐승들의 서식처로 만들어 버렸던 것처럼 시돈도 완전히 허물어져 폐허가 될 것입니다(13). 바벨론의 므로닥발라단은 주전 722-710년과 704-703년에 두 번 앗수르로부터 독립을 시도하다가 다 실패하고 쫓겨났습니다.

 

(6) 다시스의 배들(14)

 

14절은 다시 1절로 돌아갑니다. ‘다시스의 배들은 파괴된 견고한 성’ (두로)을 위해 슬피 부르짖어야 합니다.

 

두로의 장래에 관한 예언(15-18)

어려운 중에서 노력함으로 예전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영화의 회복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람들에게 양식과 의복을 위하여 주께서 자유자재로 쓰실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서는 모습입니다. 오늘 자신의 삶의 터전에 소유권 이전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 그곳이 하나님 나라가 될 것입니다.

 

15그 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될 것이라 16잊어버린 바 되었던 너 음녀여 수금을 가지고 성읍에 두루 다니며 기묘한 곡조로 많은 노래를 불러서 너를 다시 기억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17칠십 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돌보시리니 그가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열방과 음란을 행할 것이며 18그 무역한 것과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리고 간직하거나 쌓아 두지 아니하리니 그 무역한 것이 여호와 앞에 사는 자가 배불리 먹을 양식, 잘 입을 옷감이 되리라(15-18)

 

이사야가 선포한 메시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먼저 엄중한 심판의 예언을 선포하고 마지막에 가서 회복에 대한 소망의 메시지를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로에 관해서도 그러한데, 선지자는 두로가 패망한 지 70년이 지나면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1) 칠십 년의 징계(15-16)

 

두로가 멸망의 심판에 떨어지지만, 멸망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심판에 넘겨진 두로는 ‘한 왕의 연한같이 칠십 년 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힙니다(15). 왕의 재위 기간으로 ‘칠십 년’은 사실적 수보다는 완전수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의한 유다와 민족들의 칠십 년 지배를 선포했습니다(렘 25:11; 29:10; 단 9:2; 슥 1:12; 대하 36:21). 아마도 하나님의 심판이 온전하게 이뤄지는, 심판을 당한 세대가 회복에 참여하지 못하는 기간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부와 지혜에서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두로는 늙은 창녀가 잊히듯이 일정 기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집니다. 창녀의 노래는 한편으로는 두로의 참담한 몰락을 조롱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다시 기억되기 위해서 두로가 얼마나 처절하게 노력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16). 사람들이 더는 찾지 않는 늙은 창녀가 사람을 찾아 노래를 부르며, 항구를 돌아다니듯이 두로가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퇴장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아직 남아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해 버텨내야 합니다. 정한 기간이 다한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돌보실 것입니다. 두로를 창기에 비교해 회복을 기술합니다.

 

(2) 여호와의 돌봄을 받는 두로(17)

 

‘그가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열방과 음란을 행할 것이며’는 두로가 다시 번영하여 민족들과 상거래를 재개할 것을 보여줍니다(17). 두로의 권리가 회복되어 이전의 무대로 복귀하게 됩니다. 두로의 상업 활동이 창녀 짓에 비교됩니다. 상거래 행위를 죄로 정죄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윤추구를 유일한 목표로 삼는, 돈벌이가 된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는 상인들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3) 여호와께 봉헌되는 두로의 수익(18)

 

마지막 18절은 두로에 대한 신탁뿐만 아니라 13장부터 시작된 민족들에 대한 신탁의 맺는말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종말론적 시선으로 심판 이후를 내다봅니다.

두로와 시돈의 상인들이 땅 위에 있는 모든 왕국에게 몸을 팔아 얻은 소득이 ‘여호와 앞에 사는 자’, 곧 제사장들의 양식과 의복을 마련하는 데 사용됩니다. 두로와 민족들의 부가 궁극적으로는 여호와와 그분 백성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세상에서 잃어버린 것을 세상 살 동안 기어코 되찾겠다고 생각하며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다고 해서 내가 변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부와 영화는 한때뿐입니다. 한 번뿐인 인생을 바치고 목표로 삼을 만큼 가치 있지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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