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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11-02)


부정한 동물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교훈

레위기 11장 24-47절


 

사람들에게 개인 위생과 도덕적 청결은 건강 유지와 사회적 책임은 중요합니다. 개인의 위생 관리는 질병 예방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는 공동체의 건강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도덕적 청결은 신뢰 구축과 사회적 조화를 촉진하여 건강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기여합니다. 또한, 내적 평화를 가져오고 신앙 생활의 기초가 됩니다. 이러한 가치들은 다음 세대에 올바른 습관을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 정부정 음식과 사체 접촉에 대한 규정이 이어집니다. 앞서 우리는 레위기 4장은 자연계를 네 범주로 나누었다고 설명했는데, 그중 세 개의 영역인 지상, 공중, 수중에서 사는 동물들이 취급되었습니다. 이제 넷째 범주인 지표면에 사는 짐승들의 부정결 문제가 다루어집니다. 그리고 동시에 짐승들의 사체 접촉 문제를 거론합니다. 모든 짐승의 사체는 부정을 유발합니다. 가축이라 할지라도 합법적인 도살이 아닌 자연사한 짐승은 역시 부정합니다.

 

네 발 짐승 사체들의 부정함(24-28)

부정한 것은 접촉하는 모든 것을 오염시키며, 이는 죄의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인간의 삶에 침투하는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훼손하고, 우리의 영적 상태를 해칩니다. 죄는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이로 인해 죄의 강력함과 그 결과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24이런 것은 너희를 부정하게 하나니 누구든지 이것들의 주검을 만지면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25그 주검을 옮기는 모든 자는 그 옷을 빨지니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26굽이 갈라진 모든 짐승 중에 쪽발이 아닌 것이나 새김질 아니하는 것의 주검은 다 네게 부정하니 만지는 자는 부정할 것이요 27네 발로 다니는 모든 짐승 중 발바닥으로 다니는 것은 다 네게 부정하니 그 주검을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28그 주검을 옮기는 자는 그 옷을 빨지니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그것들이 네게 부정하니라(24-28)

 

레위기 11장은 먹는 것이 금지된 부정한 짐승만 다루지 않고 사체 접촉에 대한 지침도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너희를 부정하게 하나니’에서 ‘이런 것’은 바로 직전의 기는 것들인지 아니면 이어지는 짐승의 사체 목록을 말하는 것인지 의견이 양분됩니다. 아마도 24절부터 사체 접촉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따라서 문맥의 흐름상 뒤따르는 여러 범주의 사체들의 접촉을 규정하는 총괄적 진술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큰 원칙은 이것입니다: 짐승의 사체를 단순히 접촉하면 저녁까지 부정하며, 더 심하게 접촉이 발생하는 사체 운반의 경우 저녁까지 기다린 뒤 옷을 빨아야 합니다.

이 원칙이 세부적으로 적용됩니다. 우선 굽이 갈라졌으나 쪽발로 완전히 갈라진 굽을 지니지 않은 짐승(예, 말이나 나귀, 노새), 또는 새김질을 하지 않는 짐승의 사체는 모두 부정하며 접촉할 경우 부정을 탑니다. 이것이 단순 접촉일 경우 저녁까지 기다리면 되지만, 사체 운반과 같은 심한 접촉일 경우 저녁까지 기다렸다가 옷을 빨아야 정결을 회복합니다. 여기서 ‘저녁까지 부정하다’는 말에 그 부정을 탄 사람이 목욕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심한 접촉의 경우 목욕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옷까지 빨아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그 원칙은 네 발 짐승 중 발바닥으로 다니는 짐승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개, 고양이 등). 이때 목욕하고 또한 옷을 빨고 나서 저녁까지 기다린 것이 아니라 저녁까지 부정한 상태가 유지되다가 비로소 목욕을 하고 옷을 빤 뒤 정결한 상태로 복귀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여덟 가지 기는 동물 사체의 부정함(29-38)

우리가 일상에서 선택하는 것들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다. 이는 건강과 위생, 그리고 도덕적 기준을 지키는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규칙을 따르며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올바른 선택을 통해 영적 성장에 힘써야 함을 깨닫게 합니다.

 

29땅에 기는 길짐승 중에 네게 부정한 것은 이러하니 곧 두더지와 쥐와 큰 도마뱀 종류와 30도마뱀붙이와 육지 악어와 도마뱀과 사막 도마뱀과 카멜레온이라 31모든 기는 것 중 이것들은 네게 부정하니 그 주검을 만지는 모든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32이런 것 중 어떤 것의 주검이 나무 그릇에든지 의복에든지 가죽에든지 자루에든지 무엇에 쓰는 그릇에든지 떨어지면 부정하여지리니 물에 담그라 저녁까지 부정하다가 정할 것이며 33그것 중 어떤 것이 어느 질그릇에 떨어지면 그 속에 있는 것이 다 부정하여지나니 너는 그 그릇을 깨뜨리라 34먹을 만한 축축한 식물이 거기 담겼으면 부정하여질 것이요 그같은 그릇에 담긴 마실 것도 부정할 것이며 35이런 것의 주검이 물건 위에 떨어지면 그것이 모두 부정하여지리니 화덕이든지 화로이든지 깨뜨려버리라 이것이 부정하여져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 되리라 36샘물이나 물이 고인 웅덩이는 부정하여지지 아니하되 그 주검에 닿는 것은 모두 부정하여질 것이요 37이것들의 주검이 심을 종자에 떨어지면 그것이 정하거니와 38만일 종자에 물이 묻었을 때에 그것이 그 위에 떨어지면 너희에게 부정하리라(29-38)

 

아마도 당시 이스라엘의 자연 환경 속에서 가장 쉽게 접했던 여덟 가지의 기는 습성을 가진 짐승과 여섯 가지의 도마뱀 종류가 나열됩니다. 이것들의 사체도 부정을 유발하며 접촉할 경우 저녁까지 부정해집니다.

 

만일 어떤 물건에 그 사체가 떨어지면, 이 경우 그것을 즉각 물에 담가 저녁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저녁이 지나면 비로소 정결해집니다. 이런 물건들은 흡수력이 없는 나무 그릇이나 의복, 가죽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진흙으로 만든 물건들, 예컨대, 질그릇이나 화덕 혹은 화로와 같은 물건들은 재료가 흡수력이 있기 때문에 부정한 것들이 접촉하면 물에 담그는 것이 아니라 즉각 깨트려야 했습니다. 그런 용기에 어떤 음식이 담기든 부정을 타고 거기 담긴 물이나 술과 같은 액체들도 마찬가지로 더럽혀집니다. 물이 계속 솟는 샘물이나 아마도 물이 순환되고 있는 웅덩이는 짐승의 사체가 담겨도 더러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사체를 접촉하는 것은 무엇이든 부정을 탑니다(36). 짐승의 사체가 어떤 종자에 떨어질 때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종자에 물이 묻어 있는 상태로 사체가 접촉되면 더럽혀집니다. 틀림없이 물을 매개로 그것이 오염된다는 관념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자연사한 짐승과 기는 짐승의 섭취 금지(39-4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결함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도 일상에서 청결과 건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이는 신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적, 영적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또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구별된 삶을 살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올바른 선택을 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해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39너희가 먹을 만한 짐승이 죽은 때에 그 주검을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40그것을 먹는 자는 그 옷을 빨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그 주검을 옮기는 자도 그의 옷을 빨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41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은 가증한즉 먹지 못할지니 42곧 땅에 기어다니는 모든 기는 것 중에 배로 밀어 다니는 것이나 네 발로 걷는 것이나 여러 발을 가진 것이라 너희가 먹지 말지니 이것들은 가증함이니라 43너희는 기는 바 기어다니는 것 때문에 자기를 가증하게 되게 하지 말며 또한 그것 때문에 스스로 더럽혀 부정하게 되게 하지 말라 44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39-44)

 

먹을 수 있는 가축이라 해도 그것이 여러 가지 이유로 자연사를 하면, 그 사체를 만져선 안 됩니다. 만일 그것과 접촉하면 마찬가지로 저녁까지 부정을 타고 아마도 목욕을 한 뒤 정결을 회복할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그것을 먹거나 사체를 운반했을 경우에는 목욕에 더하여 옷을 빨아야 했습니다. 여기서 자연사한 가축의 사체를 먹는 것과 운반하는 접촉이 동일한 활동이라는 것이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비상 상황에서는 그런 가축을 먹고 단순히 저녁까지 부정한 상태로 있는 것을 각오했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하지만 개나 돼지와 같은 부정한 짐승을 먹는 경우 어떤 처벌이 내려지는지 레위기 11장뿐 아니라 율법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매우 중대한 범죄 행위였고 따라서 ‘사형’이나 ‘제명’(끊어짐) 같은 중벌에 처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땅에 기는 모든 짐승, 곧 배로 밀고 다니는 뱀이나 네 발 달린 도마뱀 종류들, 또는 땅 속을 드나드는 두더지나 쥐와 같이 배가 지면에 접촉되는 것들, 그리고 발을 여럿 가진 짐승들, 곧 지네와 같은 다족류 곤충들을 절대 먹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의 공통점은 배가 지표면을 쓸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결언(45-47)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청결을 강조하며, 일상에서의 선택과 행동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신앙의 중요성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공동체 내 연대감을 강화하는 데 있습니다. 개인적인 건강과 위생을 지키는 자기 관리 또한 필수적입니다. 마지막으로,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의 개념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돌아보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45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46○이는 짐승과 새와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과 땅에 기는 모든 길짐승에 대한 규례니 47부정하고 정한 것과 먹을 생물과 먹지 못할 생물을 분별한 것이니라(45-47)

 

레위기 11장의 결언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로 함축됩니다. 이것은 11장만이 아닌 레위기 11-15장의 정결법 전체를 관통하는 목표이자, 주제이며 슬로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땅에서 구출된 백성입니다. 그들은 시내산에서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선택된 언약 백성의 신분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분명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어떻게 거룩할 것입니까? 모든 이방 민족들로부터 구별된 삶을 통해서입니다. 어떻게 구별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정하신 먹을 수 있는 정결한 짐승만 먹고 금지된 짐승은 먹지 않는 매일의 식생활을 통해서입니다. 나아가 이 거룩의 목표는 나머지 12-15장에서 요청되는 확장된 정결한 삶을 통해서 구현됩니다.

 

앞서 우리는 음식법의 기원에 대한 몇 가지 가설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메리 더글러스의 견해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거룩이 ‘완전성’의 개념을 내포하는데, 흠의 문제를 여기에 끌어오며, 그것이 음식법에 반영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자연은 세 영역, 즉 공중, 지상, 수중으로 구분되는데, 각 영역의 동물마다 고유한 두 가지 특징이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각자의 영역에 맞는 적합한 신체 구조와 이동방식입니다. 지상은 굽이 갈라짐과 새김질이 표준이고, 수중은 비늘과 지느러미입니다. 이 기준들 중 하나라도 없는 것은 ‘흠’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중은 표준이 주어지지 않았으나, 그 특징이 수중으로 다이빙을 하고 수영을 하며, 땅 위를 짐승처럼 걷는 등, 공중과 지상의 두 영역을 넘나드는 이동방식으로 영역의 경계를 깨트리는 것들입니다. 또한 이 기준에 따라 기는 것은 모두 통틀어서 배제됩니다. 그것들은 공중에도, 지상에도, 수중에도 속하지 않는 변칙적 짐승들입니다. 더글러스는 이런 표준에서 이탈한 것들은 ‘무질서’한 것들이며, 거룩이란 완전성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사물 고유의 ‘질서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것을 이탈한 것은 흠이 있는 것으로 무질서한 것이며, 따라서 거룩에서 먼 부정한 것들입니다. 더글러스의 견해는 무수한 반론에 부딪혔습니다. 당장에 왜 지상의 표준이 갈라진 굽과 새김질이어야 하고, 물고기는 왜 표준이 지느러미와 비늘이어야 하는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새김질은 신체적 특징이나 이동방식과 무관한 음식 섭취 방식입니다. 그리고 부정한 새의 기준은 너무 자의적입니다. 모든 새가 다이빙을 하고 수영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공중을 나는 모든 새는 동시에 땅을 걸어 다니므로 두 영역을 넘나드는 변칙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결국 더글러스의 기준은 일관성이 없지만, 더글러스가 찾아낸 거룩의 완전성의 개념은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이것은 레위기 전반의 거룩 신학의 토대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11-15장 정결법 전체를 총괄적으로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것은 생명과 죽음이라는 두 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명에 속하거나 가까운 것은 정결하고 죽음에 속하거나 가까운 것은 부정합니다. 11장의 경우 육상 동물들은 대부분 육식 동물(사자, 호랑이)이거나 청소 동물(예, 하이에나)이 우선적으로 배제되고, 먹을 수 있는 초식 동물, 즉 가축으로부터 신체적 표준이 만들어져 자연계로 확대 적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공중 동물도 모두 시체를 뜯거나 피를 내는 먹이 활동을 하는 조류들입니다. 지표면을 배로기는 것들은 짐승의 사체나 뼈가 지표면에 널브러져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수중 동물도 바닥에 기는 들은 같은 이유가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생명-죽음의 두 축은 나머지 12-15장에도 가장 잘 적용된다는 큰 장점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부정한 동물과 정결함에 대한 규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청결한 삶을 요구하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구별된 삶을 살며 도덕적 기준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칙을 따르는 것은 신앙의 표현이며, 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의 개념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돌아보는 성찰이 필요합니다. 정결함을 유지하는 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건강에도 영향을 미치므로 서로를 도우며 함께 성장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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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11-01)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의 구별

레위기 11장 1-23절


 

정결한 식품과 부정한 식품에 대한 규정을 통해, 우리의 삶 속에서 선택의 중요성을 상기시킵니다. 이러한 규정은 건강한 삶의 기준을 세우는 데 도움을 줍니다. 신앙에 기반한 올바른 선택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제공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는 선택이 내면의 성장과 신앙생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결국, 우리의 선택이 삶의 방향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임을 일깨워 줍니다.

 

  • 레위기 11-15장은 소위 ‘정결법’이라 칭합니다. 이 부분은 무엇이 정결하고 무엇이 부정한지 기준을 제시하고, 부정한 상태로부터 정결 상태로 복귀하기 위한 정결 절차의 규례를 상세히 가르칩니다. 11장은 소위 ‘음식법’이라 불리는 정부정동물에 대한 규정입니다. 더불어 동물의 사체가 유발하는 부정결 문제를 다룹니다. 11장은 이어지는 12~15장 연구에 매우 중요합니다. 정부정 문제에 있어서 레위기 11장의 해석이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금지된 육상 동믈들(1-8)

정결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에 대한 규정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순종과 구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규정은 현대인에게도 도덕적 기준과 가치관을 세우는 데 있어 신중함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줍니다. 결국, 우리의 선택이 우리의 신앙과 삶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육지의 모든 짐승 중 너희가 먹을 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3모든 짐승 중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4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낙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5사반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6토끼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7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8너희는 이러한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1-8)

 

레위기 11장의 자연계는 지상의 육상과 지표면으로 세분되어 사중 구분되어 있습니다: 공중, 지상, 지표면, 그리고 수중. 이러한 사중 배치는 레위기 11장의 문학적 기법과도 일치해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계의 4중적 구분 외에도 11장에서는 의도적으로 4배수의 숫자가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네 종류의 경계선 동물(4-7); 스무 종류의 금지된 조류(13-19); 네 종류의 허용된 곤충(20-22); 여덟 종류의 기는 것(29-30). 각 영역별로 정-부정을 판결하는 신체의 특징적 표준이 주어지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금지되거나 허용된 짐승의 목록이 나열됩니다. 육상 동물은 갈라진 굽과 새김질이 표준이고, 수중 동물은 지느러미와 비늘이 표준입니다. 공중 동물은 표준이 주어지지 않고 스무 가지 새의 종류가 나열됩니다. 마지막으로 지표면과 관련하여 육상이든 수중이든 표면에서 기는 모든 것이 금지됩니다.

 

육상동물들의 두 표준인 갈라진 굽과 새김질 중 하나만 지닌 네 가지 동물이 나열됩니다. 낙타, 토끼, 돼지는 올바른 히브리어 번역이지만 사반은 오소리나 너구리로 추정할 뿐 어떤 동물인지 정확하진 않습니다. 현대의 동물학적 관점에서 토끼는 되새김질을 하는 반추 동물로 구분되지 않으나, 고대인들의 눈에는 토끼가 먹이 활동을 하는 입놀림이 새김질을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적, 문화적, 지리적 한계와 지식의 한계 내에서 율법이 주어졌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동물은 이스라엘의 자연 환경에서 표준의 경계선상에 놓인 동물들로 특히 유의해야 했을 것입니다. 메리 더글러스(M. Douglas)는 경계선상에 있는 동물들이 특별히 부정한 것으로 금지된 것처럼, 이스라엘에게는 이방과의 혼합을 일으키는 결혼이 금지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더글러스에 의하면 이방인보다 더 위험한 사람들은 혼합된 혈통을 지닌 사마리아인들입니다. 마지막에 거론된 돼지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대표적인 부정한 동물로 신약에서도 그것은 개와 더불어 가장 더럽게 여겨졌습니다(마 8장; 막 5장; 눅 8장; 벧후 2:22).

 

금지된 수중 동물들(9-12)

해양 생물에 대한 정결한 규정을 통해, 우리가 섭취하는 것에 대한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는 현대인에게 건강한 식습관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신중한 선택의 필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또한, 물질적인 것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자연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9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너희가 먹을 만한 것은 이것이니 강과 바다와 다른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은 너희가 먹되 10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과 물에서 사는 모든 것 곧 강과 바다에 있는 것으로서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모든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라 11이들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니 너희는 그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을 가증히 여기라 12수중 생물에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가 혐오할 것이니라(9-12)

 

수중 동물들 중에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만이 허용됩니다. 이것들이 없는 모든 수중 동물이 금지됩니다. 물고기 종류에서는 둘 중 하나만 없어도 금지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늘에만 적용된다고 봐야 합니다. 비늘이 없는 물고기는 있지만(장어, 상어, 복어 등), 지느러미가 없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외 수중 생물들은 지느러미와 비늘이 전혀 없는 해삼, 멍게, 낙지, 조개와 같은 종류들로서 모두 바닥에서 기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금지된 수중 동물들은 먹어선 안 되며, 그 사체도 접촉을 피해야 합니다.

 

금지된 공중 동물들(13-19)

음식의 정결함에 대한 규정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순결함을 강조합니다. 이는 현대인에게도 올바른 선택과 가치관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며, 우리의 삶에서 신앙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줍니다. 결국, 외적인 규범을 넘어 내적인 순수함과 도덕적 기준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13새 중에 너희가 가증히 여길 것은 이것이라 이것들이 가증한즉 먹지 말지니 곧 독수리와 솔개와 물수리와 14말똥가리와 말똥가리 종류와 15까마귀 종류와 16타조와 타흐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17 올빼미와 가마우지와 부엉이와 18흰 올빼미와 사다새와 너새와 19황새와 백로 종류와 오디새와 박쥐니라(13-19)

 

새의 경우는 어떠한 신체적-생태적 특징에 의한 표준이 주어지지 않고, 다만 스무 종류의 새가 금지 목록에 포함됩니다. 이 금지된 새들 중 약 삼분의 이는 정체가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번역 성경마다 상이한 조류들이 나열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조류들이 육식 조류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그것들이 금지된 이유는 사체를 뜯어먹고 피를 흘려 다른 짐승을 잡아먹는 특징 때문이라고 확증할 수 있습니다.

 

허용된 곤충들(20-23)

생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함부로 아무것이나 먹지 못하게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세상과 철저하게 구분시키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그들을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날마다 거룩한 삶을 훈련하라는 의미입니다. 땅의 짐승이나 물고기, 새뿐 아니라, 곤충에도 부정한 것이 있습니다.

 

20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은 너희가 혐오할 것이로되 21다만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모든 곤충 중에 그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너희가 먹을지니 22곧 그중에 메뚜기 종류와 베짱이 종류와 귀뚜라미 종류와 팥중이 종류는 너희가 먹으려니와 23오직 날개가 있고 기어 다니는 곤충은 다 너희가 혐오할 것이니라(20-23)

 

곤충들은 ‘날개가 있고’라는 표현에 의해 나는 것의 범주로 포함되고 있으나, 그 생태적 특징으로 인해 특별하게 취급됩니다. 모든 곤충은 날개가 있지만 기어 다니기 때문에 부정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기는 곤충들 중에 뛰는 다리가 있는 네 가지의 메뚜기 종류는 먹도록 허용됩니다: 메뚜기, 베짱이, 귀뚜라미, 팥중이. 역시 이 메뚜기들이 어떤 종류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메뚜기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고대로부터 단백질 공급원 역할을 하는 음식이었습니다(예, 세례 요한이 먹은 메뚜기). 그것들의 식용이 허용된 이유는 아마도 뛰는 다리를 가진 특징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정-부정의 동물을 구분한 기준이 설정되고 또한 부정한 동물의 목록이 만들어진 공통분모는 무엇입니까? 세 가지만 거론하기로 합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보건 위생학적 설명입니다. 먹도록 허용된 것은 몸에 좋고 금지된 것은 나쁘다는 것입니다. 보건 위생학적 측면에서 허용된 짐승은 인간의 건강을 증진시키나, 금지된 것은 건강을 해치고 서식지도 불결해 각종 세균과 바이러스로 병을 유발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 견해는 일부 랍비들의 오랜 견해이며, 오늘날 제칠일안식일 교회는 이 견해를 고수합니다. 분명히 보건 위생학적 주장은 현대의학의 발견에 따라 부분적으로 옳은 측면이 있습니다. 음식법 이외의 다른 정결의식에 대한 율법들을 고려해 볼 때, 출산한 산모를 장기 격리하고, 곰팡이와 피부병의 취급과 같이 엄격한 생활환경의 청결을 요구하고, 또한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사체를 멀리하게 하는 등, 보건위생학적인 동기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금지된 짐승들에는 영양학적으로 매우 우수하고 위생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반대로 허용된 짐승들 중에도 보건학적으로 좋지 않은 것들이 다수 존재합니다. 멧돼지는 선모충균이 거의 없으나, 역시 금지됩니다. 한편, 어떤 먹을 수 있는 초식성 반추동물은 위험한 기생충의 숙주역할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즉, 소, 양, 그리고 염소는 브루셀라증과 탄저병과 같은 질병을 전염시킵니다. 덧붙여 돼지의 선모충병은 고대 근동에서보다는 현대의 유럽과 미국에서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돼지를 비롯한 금지 동물만이 불결한 생활습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허용된 것들인 닭이나 염소 같은 것들도 역시 인분 같은 것을 먹습니다. 그리고 만약 위생적인 동기에서 분류가 됐다면 ‘독초’는 왜 부정한 음식으로 구별되지 않았는지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의 건강을 고려해서 그 법을 주셨기에 이 법은 계속 유효하다는 일부 주장은 신학적 문제를 내포합니다. 신약은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구분을 완전히 없앴습니다. 안식교는 여전히 레위기 음식법의 항구적 유효성을 주장하지만, 이런 폐지는 예수(막 7:14-20)와 사도들(행 10:9-16)의 가르침을 볼 때 명백합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증진하기 위해 주신 법을 자신이 나중에 제거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두 번째로 유행하는 해석은 상징적 해석입니다. 이것 역시 오랜 역사를 지녔는데, 예컨대, 정결한 짐승은 깨끗한 의인을 상징하고 부정한 짐승은 죄인을 상징합니다. 갈라진 굽을 가진 동물은 윤리적 구별을 상징하고, 새김질은 의로운 삶의 회상을 상징합니다. 쥐는 갉아서 파괴하는 습성으로 인해 금지되고 족제비는 간사한 소문내기를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지느러미와 비늘을 가진 물고기는 물살에 저항하는 인내와 절제를 상징하는데, 금지된 것들은 쉽게 물살에 쏠려 가는 유약한 것들입니다. 돼지는 불결하고 토끼는 겁이 많아 하나님의 백성에게 부적합한 짐승들입니다. 그러나 풍유적 해석들은 대부분 경건주의자들의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람들마다 각기 다른 주석들이 나오게 되며, 어떤 일관성이나 포괄성을 갖추지 못합니다. 이러한 근거 없는 성경해석은 완전한 주관성에 빠지고 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흔하게 한국 교회에서 사용되는 갈라진 굽과 새김질에 대한 풍유적 해석에 의하면, 갈라진 굽은 신약과 구약의 말씀을 상징하고 새김질은 말씀의 묵상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다른 풍유적 해석에 의하면, 갈라진 굽은 선과 악을 상징하고 새김질은 선악의 분별을 상징한다. 둘중 어느 것이 옳은 것입니까? 결국 이러한 풍유적 해석들은 주관성을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이단들이 소위 신령한 비유풀이로 대표되는 최고의 풍유-상징적 해석자들임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그 외의 해석들은 지면상 다음 본문에서 다루기로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신 이유를 통해, 우리의 삶에서 신앙의 기준을 세우는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들이 영적 상태와 관계가 깊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순결함과 정직함을 요구하시며, 이는 단순한 규칙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입니다. 또한, 우리의 식습관과 생활 방식이 내면의 신앙을 반영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정결한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우리의 예배가 더욱 진실해지도록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최고의 것이어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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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10-02)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무와 헌신

레위기 10장 12-20절


우리는 직업적 책임과 신앙적 의무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을 때의 심각한 결과는 신앙의 경외심과 올바른 태도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매일 소중히 여기고, 그 뜻을 따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결국, 신앙 생활에서는 의무와 책임이 항상 동반되며,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필요성이 강조됩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개인의 신앙과 책임을 깊이 고민하게 만듭니다.

 

  •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이후 그들의 송장을 처리한 뒤, 모세는 제단 가동식의 모든 절차가 잘 마무리되었는지 점검합니다. 그것은 레위기 1-7장에서 규정된 대로 제단 위에 태우고 남은 제물들을 처분하는 마무리 순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사의 마무리 단계가 제사 자체의 효과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별개의 활동들이라는 여러 학자들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확인합니다. 마무리 단계가 규정대로 지켜지지 않으면 제사는 무효가 될 수 있었습니다.

 

소제물의 섭취에 대한 지침(12-13)

자신의 직무와 책임을 성실히 이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를 지키는 것은 신앙의 기본이며, 우리의 행동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그 뜻을 따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결국, 본문에서는 신앙 생활에서는 개인의 의무와 책임이 항상 동반된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12○모세가 아론과 그 남은 아들 엘르아살에게와 이다말에게 이르되 여호와께 드린 화제물 중 소제의 남은 것은 지극히 거룩하니 너희는 그것을 취하여 누룩을 넣지 말고 제단 곁에서 먹되 13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 네 소득과 네 아들들의 소득인즉 너희는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으라 내가 명령을 받았느니라(12-13)

 

아론의 두 아들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모세는 그날 제단 가동식의 마무리 절차를 진행합니다. 그것은 제단에 태우고 남은 제물들을 처분하는 것입니다. 이 마무리 절차가 상세히 점검되는 이유는 그것이 제사 전체의 효과에 영향을 주기 때문임이 분명합니다. 12절에서 모세는 남은 아론의 두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소제물의 남은 것을 ‘제단 곁에서’ 먹을 것을 명령합니다. 지금까지 제물을 먹는 장소는 ‘거룩한 곳’, ‘여호와 앞에서’ 등으로 표현되었으나 여기서는 ‘제단 곁’으로 지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음 구절에서는 ‘거룩한 곳’으로 명시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단 곁은 앞서 말한대로 물두멍과 본당인 회막 입구 사이 제사장의 활동 공간이었을 것입니다.

 

화목 제물의 섭취에 대한 지침(14-15)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명확히 이해하고 이를 존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칙을 따르는 것은 신앙의 성숙과 공동체의 화합을 위한 필수 조건임을 일깨워 줍니다. 또한, 우리의 선택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고민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결국, 신앙 생활은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이루어져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14흔든 가슴과 들어올린 뒷다리는 너와 네 자녀가 너와 함께 정결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의 화목제물 중에서 네 소득과 네 아들들의 소득으로 주신 것임이니라 15그 들어올린 뒷다리와 흔든 가슴을 화제물의 기름과 함께 가져다가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대로 너와 네 자손의 영원한 소득이니라(14-15)

 

이어서 모세는 화목 제물 고기 중 제사장 몫을 확인해줍니다. 그것은 레위기 7:30-34에서 규정된 바와 같이 짐승의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입니다. 제사장들은 그것을 ‘정결한 곳’에서 먹어야 합니다. ‘거룩한 곳’이 아니므로 그곳은 성막 안이 아니라 제사장의 처소인 것이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의 진영은 정결한 곳이고 진영 밖은 부정한 곳입니다. 다만 진영 밖에는 별도로 재를 버리는 장소인 정결한 구역이 지정되어 있습니다. 15절의 ‘화제물의 기름’에서 ‘화제’ 아마도 ‘음식 봉헌물’이 더 나은 번역일 것입니다. 어쨌든 화제는 화목제를 말하는데, 따라서 화목제의 기름 덩어리(아마 두 콩팥과 간엽을 함께)를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와 더불어 제단 앞에서 요제로 들어 올린 뒤, 기름은 제단에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들 몫으로 돌렸습니다.

 

속죄제 고기로 인한 논쟁(16-20)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명확히 이해하고 이를 존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칙을 따르는 것은 신앙의 성숙과 공동체의 화합을 위한 필수 조건임을 일깨워 줍니다. 또한, 우리의 선택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고민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결국, 신앙 생활은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이루어져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16모세가 속죄제 드린 염소를 찾은즉 이미 불살랐는지라 그가 아론의 남은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노하여 이르되 17이 속죄제물은 지극히 거룩하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거룩한 곳에서 먹지 아니하였느냐 이는 너희로 회중의 죄를 담당하여 그들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죄하게 하려고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18그 피는 성소에 들여오지 아니하는 것이었으니 그 제물은 너희가 내가 명령한 대로 거룩한 곳에서 먹었어야 했을 것이니라 19아론이 모세에게 이르되 오늘 그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오늘 내가 속죄제물을 먹었더라면 여호와께서 어찌 좋게 여기셨으리요 20모세가 그 말을 듣고 좋게 여겼더라(16-20)

 

남은 제물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 제사장들에게 상세한 지침을 내리던 모세는 마지막으로 속죄제 염소에 대한 지침을 주려고 염소를 찾았습니다. 원문은 ‘찾는다’는 동사를 연이어 사용함으로써 모세가 속죄제 염소를 샅샅이 뒤지며 찾았다는 뉘앙스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이미 그 염소의 남은 잔존물들을 불태워(사라프) 없앴습니다. ‘태우다’라는 동사가 제의적 태우기가 아닌 일반적 소각을 의미하는 ‘사라’인 것으로 보아 염소 고기를 분명 진영 바깥으로 반출하여 태웠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모세는 격노했습니다. “이 속죄제물은 지극히 거룩하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거룩한 곳에서 먹지 아니하였느냐 이는 너희로 회중의 죄를 담당하여 그들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죄하게 하려고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17).

 

모세는 말하길, 속죄제의 고기는 지극히 거룩하므로 성막 뜰에서 먹어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위한 속죄제 짐승이었던 소는 제단에 태우고 남은 잔존물들을 모두 진영 밖으로 보내 태웠다는 것을 상기해야 합니다. 따라서 앞서 우리가 토론한 대로 속죄제는 먹는 속죄제와 태우는 속죄제로 나뉘었습니다. 그 기준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1) 제사장 자신을 위한 속죄제는 태웁니다; (2) 피가 내성소와 지성소에서 뿌려진 속죄제도 태웁니다. 앞서 바쳐진 소의 속죄제는 아론의 집안을 위한 것, 즉 제사장들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밖에서 태웠습니다. 반면에 회중을 위해서는 숫염소가 드려지고 그 피는 마당의 제단에서 뿌려졌습니다. 따라서 이 염소의 남은 살코기는 제사장들이 먹어서 처리하는 것이 원칙적인 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론과 두 아들들은 그것을 먹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서 왜 모세가 아론이 아닌 두 아들에게 규정을 위반했는지 따진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아마 아론의 권위와 위신을 배려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어지는 17b절의 진술이 논란의 핵심입니다. 이 논쟁은 속죄제 기능의 이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그분이 그것을 너희에게 주었습니다: 회중의 죄를 담당하도록 그들을 속죄하도록. 요컨대 제사장이 속죄제 고기를 섭취함으로써 백성들이 속죄를 얻는다는 진술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몇몇 학자들이 이러한 해석에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특히 기우치(Kiuchi)는 ‘그분이 그것을 너희에게 주었다’에서 ‘그것’을 속죄제 고기가 아닌 속죄제물 자체를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고기를 먹어서가 아니라 속죄제를 실행하여 제단에 피를 뿌린 것이 제사장이 죄를 담당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동시에 그는 ‘회중의 죄를 담당하도록’에서 나사 ‘아본’을 ‘죄를 담당하다’가 아닌 ‘죄책을 담당하다’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에게 죄와 그것의 결과인 죄책은 다른데, 여기서는 죄의 책임만을 제사장이 지고 간다는 것입니다. 기우치는 제사장들이 이 죄책을 속죄일까지 짊어지고 간다고 주장합니다. 속죄일에 비로소 대제사장이 대표가 되어 모든 제사장들의 죄책을 그것은 곧 제사장들에게 일 년 내내 옮겨온 회중의 죄책입니다-광야로 보내는 아사셀 염소 위에 전가하여 제사장들의 죄책은 면책되고 아사셀이 그것을 떠넘겨 받아 광야로 옮겨갑니다. 그러나 기우치의 주장이 성립될 수 없는 많은 이유 중 한 가지를 지목한다면, 레위기 16:21에 나타난 중대한 해석상의 문제 때문입니다. 아사셀 염소가 이스라엘의 모든 불의(아본)와 악행(페샤)과 죄(하타)를 다 짊어지고 광야로 가는데(레 16:21; 기우치는 ‘죄책과 악행과 죄’로 해석한다), 기우치에 따르면, 이 셋 중에 아본만은 죄책이고 다른 둘은 죄 자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셋 다죄 자체이며, 서로 다른 종류의 죄들을 지시합니다. 따라서 기우치의 주장은 논리적 모순을 내포합니다.

 

17b절의 문장은 명백히 속죄제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한 내용이므로 ‘그것’을 속죄제의 고기로 간주해야 마땅합니다. 따라서 속죄제 고기를 먹으면 제사장이 회중의 죄를 담당하게 됨으로써 결국 속죄를 만든다고 해석하는 것이 구문론적으로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필자는 현재의 17b절의 제사장들에 의한 ‘나사 아본’은 죄의 제거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을 대신하는 제사장들이 백성의 ‘죄를 담당한다’는 말은 죄의 제거를 의미합니다. 그 죄는 죄의 고백이 수반된 안수를 통해 그 짐승에게로 전가되어 속죄제 고기는 더럽혀진 상태입니다. 만일 그 죄가 심각하면 고기의 오염이 심해 밖에 태워서 그 죄를 말살하고, 가벼운 죄라면, 먹을 만해서 제사장 몫으로 돌리고 제사장이 섭취하여 죄를 없앱니다. 평일의 속죄제에서 이렇게 해서 백성들의 죄가 완전히 해결된다고 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모세와 아론의 쟁론에서 우리는 속죄제 고기의 처분이 매우 중요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회중의 죄를 말살하는 기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세의 분노는 이해할 만합니다. 이 속죄제가 마지막 과정에서 규정 위반으로 무효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격노한 더 큰 이유는 그날 이미 두 제사장이 규정 위반으로 사망하는 무서운 일을 겪었는데, 또다시 규정 위반이 발견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율법의 유연성이 발견됩니다. 구약의 율법은 일반적으로 문자적인 준수를 요구하지만, 가끔은 허용 가능한 범위 내에서 법적 적용의 융통성이 있었다는 사례가 발견됩니다. 예컨대, 안식일에 교체하는 진설병상의 떡은 독점적으로 제사장들이 먹어야 하지만(레24:9) 다윗과 굶주린 그의 일행들이 매우 특수한 상황 속에서 제사장들에게서 얻어먹은 적이 있었습니다(삼상 21:6). 현재의 경우도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규정을 어긴 것이었습니다. 속죄제 짐승의 섭취는 죄를 제거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제사장들의 수고비로 먹도록 주어진 것이었기에 그들에겐 특별 보너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론은 그날 두 아들이 죽은 비극을 경험한 뒤에 어떻게 그 고기를 기쁘게 먹을 수 있겠느냐고 항변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좋게 여길 리’ 만무하다는 것입니다. 이 해명을 들은 모세는 그것을 ‘좋게 여겼다.’ 여기서 추가로 알 수 있는 것은 그 고기를 먹지 않고 태웠다 해도 고기에 묻은 죄가 말살되는 결과는 변함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고기의 변형된 처리방식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론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결과에 대해 깊은 반성을 보여줍니다. 이는 현대인들에게 신앙의 경외심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줍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때, 그 결과가 심각할 수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신앙 공동체 내에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결국, 신앙 생활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항상 염두에 두고 행동해야 한다는 교훈을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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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10-01)


제사장이 금해야 할 일들

레위기 10장 1-11절


하나님을 섬기는 데 두 가지 중요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행해야 할 일이 있고, 반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에 하나님이시지만, 반대로 공의에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심판하십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통해 아론과 그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 금해야 할 일들을 조목조목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론은 두 아들을 잃은 대가로 큰 교훈을 얻게 되었습니다.

 

  • 레위기 8-10장은 제사장이 중심이 되는 하나의 단락으로 읽어야 합니다. 8장에서 제사장이 위임되고, 9장에서 제사장들에 의해 최초의 제사들이 드려지면서 제단이 가동됩니다. 그 제사는 하나님의 불이 위에서 내려와 제물을 태울 때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성공적인 최초의 제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10장에서 곧바로 실패한 제사가 보고됩니다. 아론의 두 아들 중 나답과 아비후가 자신의 방식대로 제사를 드리다가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두 제사장의 잘못된 제사와 죽음(1-3)

우리는 예배와 삶의 방식에서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우리의 생각과 감정으로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함을 잃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1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2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3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1-3)

 

나답과 아비후, 즉 아론의 첫째와 둘째 아들이 제의적 잘못을 저지릅니다. 현재 제단 가동식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 분명합니다. 모세와 아론 사이에서 그날 드려진 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쟁점으로 갑론을박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레 10:12 이하). 이들은 불법적인 방식으로 제사를 드리려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먼저 나답과 아비후는 자신의 향로를 각기 향로를 취했습니다. 향로로 번역되는 ‘마흐타’는 제단으로부터 ‘불 옮기는 그릇’입니다(출 27:3). 제단의 마흐타는 향로라 칭할 수 있는데, 제사장은 거기에 제단의 불씨를 담아 내성소로 들여와 향단에 향을 피웁니다. 이 향로가 아닌 다른 기구를 사용하는 것은 규정 위반입니다. 여기서 나답과 아비후가 일단 ‘각기 향로를’(마흐타토) 즉 자신의 향로를 가지고 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주석가들은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지만, 이 ‘자신의 향로’는 자신들이 마련한 향로라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동일한 표현이 민수기 16:17,18에서도 나타나는데, 거기서도 고라 일당은 각기 ‘자신의 향로’(마흐타토)를 들고 옵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들은 처음부터 불법적 제의를 실행하려 한 셈입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그들은 거기에 ‘다른 불’을 담아 옮겨 내성소의 향단에 향을 피웠습니다. 그들이 왜 이런 불법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어지는 포도주와 독주에 대한 이야기는 이런 잘못을 저지른 배경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쩌면 술에 취해 신중하지 못했으며, 규칙을 준수하지 않고 자의적인 방법으로 제의를 수행하려 했는지 모릅니다. 직전에 제사장들과 백성들은 최고의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의 응답은 그야말로 극적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전율을 느끼며 그분을 경외함으로 엎드려 기쁨의 탄성을 발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은 은혜의 절정을 맛본 후에도 즉각 타락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본문은 바로 그것을 잘 말해줍니다. 극과 극의 사건이 연이어집니다. 최고조의 영적인 체험 직후, 제사장들은 즉시 최악의 불법을 행하여 비극적인 죽음을 당합니다. 잘못된 불로 분향을 한 나답과 아비후에게 하나님의 불이 떨어져 그들을 태웠습니다. 우리는 동일한 불이 직전에 제단 위에 내려 모든 제물을 순식간에 태웠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한 번은 은혜의 불이었고, 다른 한 번은 심판의 불이었습니다.

 

두 아들의 죽음 직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이것은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다가가 성막의 직무를 다하는 제사장들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제사장들은 그들의 신분 자체와 옷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냈습니다. 그들이 온전히 성막의 직무를 수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성막에 계속 임재하시어 백성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이 말씀에는 만일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있는 적합한 상태를 유지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징벌이 임하게 되며, 하나님께서는 역시 자신의 신성을 침해한 자들을 징벌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거룩을 드러내신다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의 사체 처리와 장례(4-7)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삶의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아론은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하나님의 규례를 지켜야 했고, 이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또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책임이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시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이 우리의 사명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4모세가 아론의 삼촌 웃시엘의 아들 미사엘과 엘사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나아와 너희 형제들을 성소 앞에서 진영 밖으로 메고 나가라 하매 5그들이 나와 모세가 말한 대로 그들을 옷 입은 채 진영 밖으로 메어 내니 6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르되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가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하게 하라 오직 너희 형제 이스라엘 온 족속은 여호와께서 치신 불로 말미암아 슬퍼할 것이니라 7여호와의 관유가 너희에게 있은즉 너희는 회막 문에 나가지 말라 그리하면 죽음을 면하리라 그들이 모세의 말대로 하니라(4-7)

 

나답과 아비후는 분향을 하다 즉사한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송장은 내성소에 눕혀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아론의 조카들인 미사엘과 엘사반을 불러 나답과 아비후의 송장을 메고 나가도록 시킵니다. 아버지 웃시엘이 고핫의 아들이었으므로 그들은 레위 족속이었습니다(출 6:18,22). 여기서 제사장의 장례에 대한 몇가지 단서가 나타납니다. 원래 제사장은 송장을 만져선 안 되지만 직계가족이 죽었을 때는 그 송장을 만지며 장례를 주도할 수 있었고 형제도 여기에 포함되었습니다(레 21:1-3). 그러므로 원칙상 나답과 아비후의 시체를 동생들인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회막 밖으로 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내성소에서 다른 불로 분향하다 죽었을 때, 레위인이었던 아론의 사촌 미사엘과 엘사반이 아론의 명령을 받고 들어와 그들의 송장을 치웠습니다. 제사장은 자신의 직계 가족 외에 다른 사람의 송장을, 대제사장의 경우는 심지어 부모의 송장도 만지면 안 됩니다(레 21:1,11). 따라서 사실 이론적으로는 나답과 아비후의 송장을 살아있는 두 형제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치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왜 이때 아론은 미사엘과 엘사반을 불렀습니까? 어떤 사람은 이날의 특수한 상황으로 인한 것이라 설명하는데, 그것보다는 아마도 거룩한 성막/성전 내에서는 제사장들이 직계인 형제 제사장의 송장도 만져선 안 되었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집에서만 직계 가족의 송장을 만지고 장례를 치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내성소에 제사장만 들어가고,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 들어가야 하는 엄연한 규정 때문에, 사람들은 레위인 미사엘과 엘사반이 회막 내부로 들어가면 죽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맞는 지적입니다. 실제로 평상시에는 레위인이라도 회막 내부를 들여다보기만 해도 죽게 된다는 경고가 주어져 있습니다(민 4:20). 그래서 어떤 랍비들은 나답과 아비후가 내성소에서 은 것이 아니라, 밖에서 죽은 것이라 해석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적으로 그 시체들이 밖으로 굴러 나왔다고 주장했습니다. 어떤 제사장이 내성소에서 사망하면, 언제나 그런 기적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비상 상황에서는 레위인의 내성소 진입이 허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즉, 대제사장이나 제사장이 내성소에서, 심지어 지성소에서 죽는 비상 상황이 발생한다면, 특별하게 레위인의 성소 내 입장이 합법적으로 허용되었을 것입니다. 거룩한 성막/성전 내에서 제사장은 결코 송장을 만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아가 민수기 4:5-20의 견지에서 제사장 송장 치우기의 합법적 방법이 추론 가능합니다. 추정컨대 제사장들이 회막 내부의 기물들을 모두 보자기로 덮은 뒤에 레위인들이 들어와 송장을 치워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참고로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입장할 때 사망할 것을 대비해 끈을 달고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중세 시대에 만들어진 전설로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속죄일에 지성소에 입장할 때 대제사장은 아무런 장식이 없는 하얀 세마포 옷을 입고 들어가기 때문입니다(레 16:4).

아론과 남은 두 아들은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으로 인해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 헤치며 애곡할 수도 없습니다. 원래 그런 금지는 대제사장에게만 적용되는데(레 21:10), 이날은 아들 제사장들에게도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사망 사고가 성막이라는 거룩한 공간에서 발생했기 때문으로 추론됩니다. 그들의 죽음은 그들의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벌이었기 때문에 슬퍼할 일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애곡을 한다면,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재차 엄습하여 온 회중도 징벌을 받을 것입니다. 반면에 백성들은 이 죽음에 대해 슬퍼하는 것이 용인되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성막 밖으로 나가 장례에 참석하는 것도 금지됩니다. ‘여호와의 관유가 너희에게 있다’는 말은 ‘여호와의 관유가 너희 위에 뿌려졌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즉, 그들은 기름부음 받은 자들입니다. 따라서 회막을 섬기는 막중한 일을 하다 중단하고 장례에 참석하는 일이 금지됩니다. 더구나 그날은 제단 가동식을 위해 중대한 첫 번째 제사들이 드려지는 중이었으며, 아직 행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성막을 떠나선 안 되었습니다.

 

제사장의 주의사항과 사명(8-11)

하나님과의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켜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실천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또한, 각자가 맡은 역할에서 책임감 있게 행동하고, 경건한 삶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8여호와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9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 10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11또 나 여호와가 모세를 통하여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리라(8-11)

 

그들이 다른 불로 잘못된 제사를 드린 배경이 암시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술을 마시고 직무에 임해 판단력을 잃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금주는 막중한 책임을 지닌 성막 직무의 중대성을 경고하기 위한 원론적 지침이며, 나답과 아비후의 실수와 그로 인한 사망의 직접적 원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제사장들에게는 직무에 있어서 죽음의 경고와 더불어 대단히 주의 깊은 신중성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바른 정신과 판단력을 가지고 무엇이 거룩하고 속된 것인지, 무엇이 부정하고 정한 것인지를 정확히 분별해야만 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말씀대로 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사소한 것이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합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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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09-01)


하나님께 드린 아론의 첫 번째 제사

레위기 9장 1-24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 여전히 임재하시며, 우리가 그분께 나아갈 때 그 영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찾고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죄와 갈등 속에서 살아가지만, 하나님과의 화해는 언제나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구원의 기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교훈들은 신앙생활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있게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 주석학자들은 레위기 9장을 제단의 취임식(inauguration ceremony)이라고 부릅니다. 8장에서는 제단을 거룩하게 만든 ‘제단 봉헌식’(dedication ceremony)과 더불어 제사장 위임식이 진행되었습니다. 이제 봉헌된 제단에서 최초의 제사들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제단에 대해 ‘취임식’은 어울리지 않으므로 우리는 제단을 최초로 사용하기 시작하는 행사라는 의미로 ‘제단 가동식’이라는 말을 사용하겠습니다.

 

제물의 준비와 백성의 소집(1-6)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신앙의 여정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공동체와 함께 걸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서로를 격려하며 함께 예배하는 가운데 더욱 깊은 신앙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제사를 받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분의 은혜와 영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드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1여덟째 날에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이스라엘 장로들을 불러다가 2아론에게 이르되 속죄제를 위하여 흠 없는 송아지를 가져오고 번제를 위하여 흠 없는 숫양을 여호와 앞에 가져다 드리고 3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속죄제를 위하여 숫염소를 가져오고 또 번제를 위하여 일 년 되고 흠 없는 송아지와 어린 양을 가져오고 4또 화목제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드릴 수소와 숫양을 가져오고 또 기름 섞은 소제물을 가져오라 하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나타나실 것임이니라 하매 5그들이 모세가 명령한 모든 것을 회막 앞으로 가져오고 온 회중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선지라 6모세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니 여호와의 영광이 너희에게 나타나리라(1-6)

 

제물 아론과 그의 집안 회중
속죄제 수송아지 숫염소
번제 숫양 수송아지와 어린(숫)양
화목제
수소의 숫양
소제
기름 섞은 소제

레위기 1-7장에서 상세히 규정된 제사들이 이제 최초로 드려집니다. 이른 바 제단 가동식입니다. 이 제단 가동식을 위해 준비해야 할 희생 제물들이 속죄제, 번제, 화목제, 그리고 소제의 순서로 명령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드려진 순서는 화목제에 앞서 소제가 먼저 제단에 불태워졌습니다(17). 이것은 매일의 아침저녁마다 번제에 이어 소제가 드려지는 법칙의 기준이 된 셈입니다. 각 제물의 준비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제단 가동식에서 모두 제의적 가치가 더 높은 수컷의 짐승들이 바쳐졌습니다. 또한 화목제와 소제는 회중들 편에서만 준비되었습니다. 이것은 추후에도 화목제와 소제가 거의 대부분 회중들의 감사의 제사로 고착될 것을 말해줍니다. 제사장 위임식과 마찬가지로 온 회중이 성막에 모였습니다. 1-4절은 장로들이 대표로 회막 안으로 소집되어 이 행사가 진행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이 집회는 7일간의 제사장 위임식에 이어 제8일째의 제단 가동식까지 이어집니다. 아마 진영 내의 백성들은 각자의 처소 밖으로 나와 성막을 향해 서서 집회에 동참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운집한 회중(장로들)에게 이제 이 최초의 제사들과 더불어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날 것이라고 소리칩니다.

 

최초의 제사들(7-21)

제사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깊이 있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신앙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공동체와 함께 모여 예배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신앙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7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제단에 나아가 네 속죄제와 네 번제를 드려서 너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또 백성의 예물을 드려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되 여호와의 명령대로 하라 8이에 아론이 제단에 나아가 자기를 위한 속죄제 송아지를 잡으매 9아론의 아들들이 그 피를 아론에게 가져오니 아론이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는 제단 밑에 쏟고 10그 속죄제물의 기름과 콩팥과 간 꺼풀을 제단 위에서 불사르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심과 같았고 11그 고기와 가죽은 진영 밖에서 불사르니라 12○아론이 또 번제물을 잡으매 아론의 아들들이 그 피를 그에게로 가져오니 그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13그들이 또 번제의 제물 곧 그의 각과 머리를 그에게로 가져오매 그가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14또 내장과 정강이는 씻어서 단 위에 있는 번제물 위에서 불사르니라 15그가 또 백성의 예물을 드리되 곧 백성을 위한 속죄제의 염소를 가져다가 잡아 전과 같이 죄를 위하여 드리고 16또 번제물을 드리되 규례대로 드리고 17또 소제를 드리되 그 중에서 그의 손에 한 움큼을 채워서 아침 번제물에 더하여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18또 백성을 위하는 화목제물의 수소와 숫양을 잡으매 아론의 아들들이 그 피를 그에게로 가져오니 그가 제단 사방에 뿌리고 19그들이 또 수소와 숫양의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것과 콩팥과 간 꺼풀을 아론에게로 가져다가 20그 기름을 가슴들 위에 놓으매 아론이 그 기름을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21가슴들과 오른쪽 뒷다리를 그가 여호와 앞에 요제로 흔드니 모세가 명령한 것과 같았더라(7-21)

 

엄밀히 말하자면, 제팔일의 제단 가동식에서 드린 제사들이 공식적인 회막의 제단에서 최초로 드린 제사들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직전의 칠 일간의 제단 봉헌식과 제사장 위임식에서 제사장들을 위한 속죄제(수송아지)와 번제(숫양)와 위임식의 화목제(숫양) 및 소제가 드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제사들이 제단을 거룩하게 하여 봉헌하기 위한 절차였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 제단은 비로소 향후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제사를 바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비로소 제팔일에 최초의 공적인 제사들이 집행되면서 제단이 사용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론은 자신과 아들들을 위해 속죄제와 번제를 드립니다. 그 제사는 그들을 속죄하는 효과를 가져오는데, 주목할 것은 동시에 그것이 백성을 위하여 속죄를 만든다는 것입니다(7). 여기서 레위기 4:3절의 진술, 곧 제사장들의 죄가 곧 백성에게 죄얼을 입힌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백성의 예물은 그와 별도로 다시 그들을 속죄하는 효과를 낳습니다.

 

먼저 속죄제가 드려지는데, 모든 절차는 레위기 4장의 규례 그대로입니다. 아론은 수송아지를 도살합니다. 여기서 안수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당연한 절차로 생략된 것으로 보입니다. 즉, 도살 전에 아론과 아들들이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아들들이 그 송아지의 피를 사발에 받아 아론에게 가져왔습니다. 아론은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마당 놋제단의 네 뿔에 바르고 남은 피를 제단 밑에 ‘쏟았다.’ 이어서 고기를 태우고 처분하는 과정은 레위기 4장의 규례와 동일합니다. 속죄제에 이어 아론과 그의 집안을 위한 번제가 레위기 1장의 절차대로 드려졌습니다(16). 이어서 아론은 백성들을 위한 속죄제와 번제도 절차를 준수하여 바치기를 완료했습니다.

 

여기서 속죄제의 경우 레위기 4장과 중대한 한 가지 차이점이 목격됩니다. 바로 (대)제사장을 위한 수송아지의 피가 마당 놋제단의 뿔에 발라질 뿐 내성소에 반입하여 향단 뿔에 바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4장의 법에 따르면, (대)제사장을 위한 수소의 속죄제는 그 피를 내성소에 가지고 들어가 휘장 앞 향단 부근에 손가락으로 일곱 번 뿌리고 향단의 네 뿔에 바릅니다. 이런 차이는 상호 모순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회중을 위한 속죄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회중의 속죄제는 수송아지가 아니라 숫양이라는 점도 레위기 4장과 다릅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이곳에서 토론을 진행하기 위해 일단 지나쳐왔지만, 앞서 레위기 8장의 제단 봉헌식과 제사장 위임식에서도 마찬가지로 거론될 수 있었습니다(레 8:14-17). 거기서도 제사장들을 위한 속죄제의 경우 마당의 제단에서 짐승의 피가 처리되었습니다. 그러나 레위기 4장은 무심코 여호와의 금지 명령을 어긴 특정한 죄를 위해 바쳐진 속죄제이고, 레위기 8장과 9장의 경우 구체적인 죄가 명시되지 않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선 레위기 8장은 제단을 거룩하게 하는 봉헌식으로서 혹시라도 제단에 묻어있을지 모르는 잠재적 부정결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피를 제단 네 뿔에 바른 것으로 추론됩니다. 속죄제를 이후 6일 동안 매일 반복해서 드린 배경도 동일한 이유일 수 있습니다. 백성 중 누군가가 부정결하거나 어떤 죄를 지었다면, 제단이 더럽혀지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출산한 여자나 유출 환자가 백성 중에 존재한다면, 제단이 더럽혀집니다.

 

레위기 9장의 제단 가동식의 경우, 마찬가지로 특정한 죄를 지어서 속죄제를 바친 것이 아니라 제단 사용을 시작하는 행사로서 다른 제사들과 더불어 속죄제를 바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즉, 현재의 속죄제는 특정한 죄나 부정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을 지닌 것 같진 않습니다. 따라서 레위기 4장의 속죄제와 그 목적과 취지가 달랐으며, 그런 이유로 레위기 4장의 표준을 따를 필요는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속죄제의 피가 제단을 씻는 효과는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백성들의 구체적인 죄로 인해 드려진 속죄제는 아니지만 그들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효과를 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단 가동식과 더불어 향후 백성들은 죄 문제가 해결된 백지 상태에서 제단 사용을 시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원리가 한 가지 도출됩니다. 레위기 4-5장의 속죄제는 모든 속죄제의 절대적 표준이 아니라, 비고의적인 죄를 해결하는 표준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속죄제는 다양한 때에 상이한 목적으로 바쳐질 수 있었습니다. 비고의적인 죄, 특정한 죄의 해결과 무관한 절기의 속죄제와 같은 많은 경우에서 제사장을 위한 속죄제 소의 피가 마당의 제단에서 처리되며, 또한 회중의 짐승은 소가 아닌 숫양이 대부분입니다.

 

속죄제에 이어 번제를 드릴 때 소제가 곧바로 이어집니다. 매일 아침과 저녁에 제사장이 번제의 숫양을 각각 바칠 때 소제가 곁들어지는 것이 규칙이었습니다. 그 규최대로 제단 가동식이 진행됩니다. 마지막 제사는 화목제입니다. 백성이 준비한 수소와 숫양을 잡는다. 모든 절차는 레위기 3장의 화목제 규례 그대로입니다. 요제로 흔든 가슴들과 오른쪽 뒷다리는 제단에 태우지 않고 제사장들의 몫으로 돌립니다.

 

하나님의 응답(22-24)

하나님께서 그들의 제사를 받으시고 영광을 나타내신 것은 순종과 헌신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함께 제사에 참여한 것은 공동체의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신앙 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격려하고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22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마치고 내려오니라 23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24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22-24)

 

아론은 모든 제사를 마친 뒤 백성을 향해 축복을 하고 제단에서 내려옵니다. 제단에서 내려온 아론은 모세와 함께 회막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때가 임명받은 제사장이 최초로 회막에 들어간 순간입니다. 그 전에는 모세 홀로 회막에 출입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회막에서 나온 뒤 다시 백성을 축복합니다. 아마 이러한 백성을 향한 축복은 민수기 6:24-27이 하나의 모본일 수 있습니다. 이때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 불이 그분에게서 내려와 제단 위에서 타고 있던 모든 제물들을 순식간에 살랐습니다. 백성들은 이 장면에 압도되어 놀라 소리를 지르며 엎드렸습니다. 이 비명은 히브리어 ‘라난’에 비추어 볼 때, 기봄의 외침으로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중요하게도 최초의 제단 불은 모세가 지폈고(레 8:16), 9장에서 그 불위에 아론이 최초의 제사들을 드렸지만, 위에서 하나님의 불이 엄습해서 그 제물들을 태웠다는 사실입니다. 이로써 제단 붉은 이제 신적 불로 승격되어 꺼져선 안 되었습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순종, 공동체의 중요성, 하나님의 임재 체험, 그리고 경배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교훈들은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공동체와 함께 신앙을 나누는 것이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결국, 이러한 원칙을 통해 우리의 신앙생활이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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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08-02)


제사장 위임제 숫양 제사와 기간

레위기 8장 22-36절


 

성도들은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인식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제사장 직분을 통해 중재자의 역할을 이해하게 합니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지지하는 삶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신앙생활의 본질을 더욱 깊게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 속죄제에 이어 위임식 숫양의 제사와 소제물 제사가 이어집니다. 위임식 숫양의 제사는 상당히 복잡한 절차를 밟습니다. 핵심은 독특한 피 의례입니다. 피가 제사장들의 신체 말단 부위에 발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의 의미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으나, 다만 추론적 해석은 가능합니다. 여기서 바쳐지는 떡들과 과자는 명백히 소제물입니다. 무교병 광주리에 담아 온 이 소제물들은 세 가지 종류였는데, 제단 위에 바치므로 모두 누룩이 없었습니다.

 

위임식 숫양의 피 의례(22-2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우리의 죄를 사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헌신과 순종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기 위해 우리는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행동은 공동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신앙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22또 다른 숫양 곧 위임식의 숫양을 드릴새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숫양의 머리에 안수하매 23모세가 잡고 그 피를 가져다가 아론의 오른쪽 귓부리와 그의 오른쪽 엄지 손가락과 그의 오른쪽 엄지 발가락에 바르고 24아론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모세가 그 오른쪽 귓부리와 그들의 손의 오른쪽 엄지 손가락과 그들의 발의 오른쪽 엄지 발가락에 그 피를 바르고 또 모세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22-24)

 

수소의 속죄제와 숫양의 번제에 이어 가장 중요한 위임식 숫양의 제사가 이어집니다. 준비된 숫양 두 마리 중에 한 마리는 이미 번제로 바쳐졌으니 남은 한 마리를 위임식을 위해 가져옵니다. 다른 희생 짐승들과 마찬가지로 숫양의 머리에 안수를 해야 합니다. 위임식 숫양의 제사는 위임식의 핵심입니다. 이 숫양의 제사에서 독특한 점은 피를 아론과 아들들의 신체 말단에 바르는 의입니다. 이 위임식 숫양은 그 성격상 명백히 화목제로 바쳐집니다. 왜냐하면 숫양의 기름 부위를 바친 뒤, 레위기 7:34의 화목제 고기를 처분하는 규정대로 고기를 사람이 나눠서 먹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신분의 독특성과 위임식의 특수성으로 인해 화목제 고기 처분은 이날 약간 다르게 진행됩니다. 그것은 이어지는 소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숫양의 위임식 제사는 여러모로 매우 독특합니다. 이 위임식 제사는 오직 제사장을 위임할 때에만 시행됩니다. 앞으로도 아론의 후손들이 성인이 되어 제사장으로 직무를 시작할 때, 반드시 이 위임식을 진행해야 합니다. 먼저 숫양을 도살한 뒤, 그 피를 아론과 아들들의 신체 오른쪽 말단 부위에 바릅니다. 이것이 가장 독특한 점입니다. 신체의 말단 부위들은 각각 오른쪽 귓부리, 오른손 엄지, 오른발 엄지입니다. 머리부터 발끝에 이르는 신체 말단 부위에 피를 바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분평한 것은 이 행위가 그들의 몸을 상징적으로 씻어내는 것을 의미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뾰족한 신체 말단 부위였습니까? 아마도 사물의 뿔이나 끝이 갖은 접촉에 의해 쉽게 더럽혀진다는 관념이 그 배후에 있었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대표성을 지닌 그 신체 부위에 피를 발라 벗어내면, 상징적으로 몸 전체가 씻기는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피를 제단 뿔에 바른 이유도 마찬가지 있을 것입니다. 모세는 숫양의 피를 신체 말단 부위에 손가락으로 바른 뒤 남은 피를 사방에 끼얹습니다(뿌린다).

 

위임식 숫양 태우기 및 제사장 옷의 성화(25-30)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 간의 중재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는 백성의 죄를 대신해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합니다. 제사장의 존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줍니다. 그의 순종과 헌신은 공동체에 거룩함을 전달합니다. 또한, 제사장은 하나님의 뜻을 백성에게 전달하는 역할도 합니다. 이를 통해 제사장은 신앙 생활의 중요한 중추로 기능합니다.

 

25그가 또 그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간 꺼풀과 두 콩팥과 그 기름과 오른쪽 뒷다리를 떼어내고 26여호와 앞 무교병 광주리에서 무교병 한 개와 기름 섞은 떡 한 개와 전병 한 개를 가져다가 그 기름 위에와 오른쪽 뒷다리 위에 놓아 27그 전부를 아론의 손과 그의 아들들의 손에 두어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게 하고 28모세가 그것을 그들의 손에서 가져다가 제단 위에 있는 번제물 위에 불사르니 이는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 드리는 위임식 제사로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라 29이에 모세가 그 가슴을 가져다가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았으니 이는 위임식에서 잡은 숫양 중 모세의 몫이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심과 같았더라 30○모세가 관유와 제단 위의 피를 가져다가 아론과 그의 옷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아들들의 옷에 뿌려서 아론과 그의 옷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아들들의 옷을 거룩하게 하고(25-30)

 

다음 절차로 모세가 위임식 숫양의 주요 기름 부위를 분리해서 가져옵니다. 이것은 앞으로 레위기 3장에서 제정되는 화목제의 규정 그대롭니다. 내장의 두터운 기름 덩어리와 간꺼풀(간엽), 그리고 두 콩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 몫인 오른쪽 뒷다리를 별도로 떼어놓습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위임식의 숫양은 화목제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위임식에서는 화목제 숫양의 기름 부위와 더불어 오른쪽 뒷다리(넓적다리)가 함께 태워집니다(26-28). 원래 화목제 짐승의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는 제사장의 몫입니다. 따라서 뒷다리도 여기서 현재 제사장 역할을 하고 있는 모세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29절에서 보듯이 가슴만 그에게 주어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슴은 모세, 뒷다리는 하나님께 바쳐진 이유가 그날의 제사가 특수하게 하나님과 모세의 신-인 협동에 의한 위임식 제사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아마도 이것은 그날의 특수성과 더불어 모세의 임시적인 제사장 신분으로 인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순서는 소제물 바치기입니다. 소제의 규정은 레위기 2장에서 상술됩니다. 이것들은 누룩이 섞이지 않은 떡과 과자, 전병인데, 최상품 밀가루로 빚어서 만들어야 했습니다. 소제물에서 중요한 것은 누룩과 꿀(과일시럽)이 절대 섞여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발효된 음식으로서 ‘부패’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무교병 광주리에서 꺼낸 소제물들과 숫양의 오른쪽 뒷다리를 제단 앞에서 ‘요제’로 흔들어 올린 뒤 번제물 위에 태웁니다. 이어서 숫양의 가슴을 가져다 다시 요제로 흔들어 올린 뒤 자신의 몫으로 취합니다. 여러 학자들은 이러한 요제가 실제로 제사 과정에서 제물을 흔드는 동작이었는지에 대해 의심을 품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의 위임식에서 제사장 후보자들의 손에 들린 많은 양의 제물을 고려해 볼 때, 들어서 흔들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추론합니다. ‘거제’도 앞서 살핀 대로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바와 같이 들어 올리는 제사가 아니라 성전에 바쳐진 봉헌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구에서 그것은 중요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전통적 해석 그대로 ‘요제’와 ‘거제’를 사용합니다. 이어서 모세는 또 하나의 매우 독특한 의례를 진행합니다. 그는 제단으로부터 관유와 피를 가져옵니다. 제단에는 이미 관유와 피가 뿌려져 있습니다. 모세는 그 관유와 피를 취해 손가락으로 아론을 포함한 모든 제사장들의 옷에 뿌립니다(히자). 관유와 피가 따로 뿌려진 것이 아니라 혼합되어 뿌려진 것이 분명합니다(밀그롬). 이렇게 해서 그 옷들이 비로소 거룩해집니다. 여기서도 대상을 거룩하게 만드는 핵심 요소는 기름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피 뿌리기는 정화력을 갖지만, 기름 뿌리기는 그보다 높은 성화력을 갖는 것으로 보입니다.

 

남은 고기와 떡의 처분과 위임제 기간의 명시(31-36)

제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헌신과 예배의 중요성을 되새겨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속에서도 거룩함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31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르되 내게 이미 명령하시기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먹으라 하셨은즉 너희는 회막 문에서 그 고기를 삶아 위임식 광주리 안의 떡과 아울러 그 곳에서 먹고 32고기와 떡의 나머지는 불사를지며 33위임식은 이레 동안 행하나니 위임식이 끝나는 날까지 이레 동안은 회막 문에 나가지 말라 34오늘 행한 것은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게 하시려고 명령하신 것이니 35너희는 칠 주야를 회막 문에 머물면서 여호와께서 지키라고 하신 것을 지키라 그리하면 사망을 면하리라 내가 이같이 명령을 받았느니라 36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신 모든 일을 준행하니라(31-36)

 

앞서 말한 대로 위임식 숫양의 제사는 화목제이기 때문에 제사장의 몫이 가슴과 오른쪽 넓적다리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제사자가 가져가 가족과 이웃들과 더불어 나누어 먹습니다. 그러나 이날은 제사장인 모세가 가슴만을 취합니다. 그리고 오른쪽 넓적다리는 제단에 태워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 고기 부위는 아론과 자손들의 몫으로 돌립니다. 무교병 광주리에 남은 떡과 과자도 제사장들 몫으로 돌아갑니다. 레위기 2장의 규정대로라면, 소제물은 일부만을 기념물로 취해서 태운 뒤, 나머지는 제사장 몫으로 돌아갑니다. 따라서 원칙대로라면, 그 태우고 남은 소제물들도 모두 모세의 몫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31절에서 보듯이 이날 남은 소제물을 아론과 아들들이 먹었습니다. 고기는 회막 내에서 삶아 먹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막 내에 특별히 지정된 ‘거룩한 장소’가 별도로 설치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밀그롬(Milgrom)은 랍비들의 견해를 따라 그 거룩한 곳이란 성막 마당의 어느 곳이든 해당된다고 봅니다. 다만, 밀그롬은 실천적 이유로 이스라엘 평민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공간이었던 내성소 입구와 번제단 사이에서 그런 활동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봅니다. 거기서 고기를 삶고 또한 제사장들이 거룩한 고기와 소제물을 먹었을 것입니다(레 6:16,26: 7:6:24:9). 31절은 그 제물의 음식들을 당일에 먹어야 하며, 그것을 저녁을 넘겨 아침이 되었다면 먹지 말고 불살라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제물을 먹는 것과 관련하여 화목제 고기를 먹는 시한은 정확히 주어지지만(레 7:15-18), 오경 어디를 보아도 다른 제물들의 경우 침묵합니다. 즉, 제사장에 의한 소제물(레 6:15-16)과 먹는 속죄제/속건제의 고기 섭취(레 6:24-30; 7:6-7)의 시한이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화목제는 단순히 거룩한 제물이지만, 소제와 속죄제/건제는 모두 지극히 거룩한 제물이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레 2:36:25: 7:1). 필로나 요세푸스는 그런 지극히 거룩한 제물의 고기들은 당일에 먹어야 했다고 합니다. 그 증거가 레위기 10장에서 암시됩니다. 제사장들은 그날 남은 제사 음식들을 모두 먹어야 했습니다. 반면에 위임식의 고기는 지극히 거룩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화목제이기 때문에 단순히 거룩한 고기입니다(레 19:8). 레위기 7:15-18에 따르면, 그런 화목제 고기는 당일에다 먹어야 하거나(감사의 화목제), 이튿날까지가 먹을 수 있는 시한이었습니다(서원과 자원의 화목제). 위임식 숫양은 당일에 먹어야 했으므로 감사의 화목제의 범주에 속했던 셈입니다.

 

마지막으로 위임식 행사는 7일간 연속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출애굽기 29장에 의하면, 매일 수송아지 한 마리가 속죄제로 바쳐져 그 피로 제단을 씻어냈습니다(출 29:35-37). 더불어 위임된 제사장들의 향후 가장 중요한 직무가 명시됩니다. 그것은 매일 그들이 아침과 저녁에 일년생 양을 한 마리씩 상번제로 바쳐야 하는 일입니다(출 29:38-40), 저녁의 번제물은 아침까지 두었으며 아침에 새롭게 장작을 추가하여 번제의 양을 또 올렸습니다. 이로 인해 제단 불은 언제나 꺼지지 않았습니다(레 6:9). 그 번제에 소정의 소제물과 전제의 포도주가 곁들여집니다. 매일의 번제가 드려질 때, 바로 거기서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예배를 받으시고 그들과 만나겠다고 약속하십니다(출 29:42).


우리는 제사장 직분의 중요성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행한 위임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권위를 받아들이는 중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헌신과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가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행동이 공동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날마다 말씀에 귀 기울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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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08-01)

 


완전해야 할 하나님의 사람 제사장

레위기 8장 1-21절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성막을 지으라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시내산에 임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중심에 임하시길 원하십니다. 성막의 임재를 나타내십니다. 그 후에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며 제사하여야 하는지 또 백성들이 어떻게 서로 화합하며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레위기입니다. 레위기 7장까지는 5가지 제사법을 말합니다. 8장부터는 그 제사를 인도할 제사장들을 위임하는 장면이 시작됩니다.

 

  • 1-7장에서 제사법이 주어지고, 이제 제단을 중심한 성막 봉헌식과 더불어 그 제사를 집행할 제사장을 임명하는 제사장 위임식이 진행됩니다. 성막 봉헌식과 제사장 위임식의 절차와 방법은 이미 성막 건축과 더불어 출애굽기 29장에서 규정되었습니다. 성막이 완성되고 모세를 통해 레위기와 더불어 상세한 제사법이 회막에서 전달된 뒤 제사장을 임명하는 위임식이 비로소 레위기 8장에서 실행됩니다.

 

위임식을 위한 준비물과 백성의 소집(1-5)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특별한 소명을 주신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또한, 제사장으로의 준비와 헌신이 중요함을 강조하며, 목표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교훈합니다. 더불어, 개인의 성장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연대와 지지의 중요성도 부각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하고, 서로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함께 그 의복과 관유와 속죄제의 수송아지와 숫양 두 마리와 무교병 한 광주리를 가지고 3온 회중을 회막 문에 모으라 4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매 회중이 회막 문에 모인지라 5모세가 회중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행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이러하니라 하고(1-5)

 

제사장 위임식 절차와 방법은 매우 복잡합니다. 제사장 관복과 더불어 특수한 관유를 준비해야 하며 또한 속죄제를 위한 수송아지와 번제용 숫양, 그리고 위임식 화목제를 위한 숫양을 무교병 한 광주리와 함께 가져와야 합니다. 이 광주리에는 세 종류의 떡이 들어 있습니다(26). 이 위임식을 위해 모든 백성들이 회막에 운집했습니다. ‘온 회중을 회막문(입구)에 모으라’는 뜻은 분명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들인 장로들이 회막 뜰에 모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레위기 9:1-4은 그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진영 내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막사에서 나와 성막을 향해 서서 행사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회중에게 이 위임식이 여호와께서 행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라고 알립니다.

 

제사장의 착복 의례와 기름부음 의례(6-13)

우리가 맡은 역할에 충실하고, 이를 위해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줍니다. 또한,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개인의 성장과 연결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마지막으로, 신앙과 의식의 중요성을 통해 일상에서도 경건한 삶을 살아가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본문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으로 임명되는 의식이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6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물로 그들을 씻기고 7아론에게 속옷을 입히며 띠를 띠우고 겉옷을 입히며 에봇을 걸쳐 입히고 에봇의 장식 띠를 띠워서 에봇을 몸에 매고 8흉패를 붙이고 흉패에 우림과 둠밈을 넣고 9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관 위 전면에 금 패를 붙이니 곧 거룩한 관이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과 같았더라 10모세가 관유를 가져다가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발라 거룩하게 하고 11또 제단에 일곱 번 뿌리고 또 그 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거룩하게 하고 12또 관유를 아론의 머리에 붓고 그에게 발라 거룩하게 하고 13모세가 또 아론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속옷을 입히고 띠를 띠우며 관을 씌웠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과 같았더라(6-13)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우기 위해 그들에게 씻고 제사장 옷을 입히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세는 아론에게 관을 씌우고 성막의 기름을 부어 그를 거룩하게 합니다. 이로써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맡게 됩니다.

 

(1) 착복 의례(6-9)

 

먼저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위임식에 임하기 전에 목욕을 시킵니다. 이어서 아론에게는 대제사장 관복을, 아들들에게는 일반 제사장 예복을 입힙니다. 그들의 거룩한 직분의 구별은 가장 먼저 거룩한 옷을 통해 드러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 제사장의 복장은 거룩의 현시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의 드러냄입니다. 그분의 거룩은 성막을 통해 이미 현시된 바 있습니다. 회막을 장식했던 순금으로 된 여러 비품들과 순금을 칠한 널판들, 그리고 가장 귀한 실들로 정교하게 수놓는 기교를 부려 만들어진 화려한 휘장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제사장 복장, 특히 대제사장의 복장도 그러합니다. 이 옷은 제사장 자신의 영화롭고 아름다운 특별한 신분을 잘 나타내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나게 합니다. 신약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상징적으로 입는 ‘그리스도의 옷’과 ‘성령의 옷’은 바로 대제사장의 거룩한 옷을 암시적으로 가리킵니다.

 

일반 제사장의 옷은 한두 줄로 간략히 묘사되나 대제사장 복장은 매우 복잡했고 많은 장식이 치장되었습니다. 13절에서 보듯이 일반 제사장은 간단하게 속옷을 입고 허리에 띠를 띠고 머리에 관을 씁니다. 먼저 대제사장 복장, 즉 아론이 입는 복장이 나열됩니다. 입는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속바지), 속옷, 겉옷, 에봇, 흉패, 관. 제단에 오를 때 입어야 하는 속바지는 28:42-43에서 추가되어 있습니다. 속옷은 정확히 ‘반포 속옷’을 말합니다(출 28:4). ‘반포 속옷’의 한문 풀이는 ‘얼룩무늬 속옷’인데, ‘반포(타쉬베츠)’는 아마도 옷감에 나타난 미세한 체크(바둑판) 무늬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엄밀히 이 옷은 일반 제사장들의 기본 복장이므로 속옷이라는 번역은 맞지 않습니다. ‘예복’이 더 나은 번역으로 보입니다. 띠는 그 예복 허리에 두릅니다. ‘겉옷’부터는 대제사장의 특수 복장입니다. 겉옷은 소매 없이 통으로 된 청색의 긴 옷으로 예복 위에 입습니다. 아마 속옷(예복)보다 한 뼘 정도 짧았을 것이며, 아래쪽에는 금방울과 수를 놓은 석류 장식이 교대로 달려 있었습니다. 에봇(에포드)은 히브리어 단어 그대로 사용되는데, 겉옷 위에 다시 조끼처럼 껴입는 특수한 옷입니다. 금실을 비롯 청색, 자색, 홍색실로 화려한 색채를 가진 고품격의 옷감이 사용되었습니다. 에봇에도 장식 띠가 따로 있습니다. 이 띠는 에봇을 허리에 둘러 에봇 양쪽을 묶기 위한 것입니다. 에봇 제일 위쪽에 접합된 긴 허리띠인데, 도복 띠처럼 에봇 끝의 양쪽에서 두 개의 끈 줄기가 길게 나와도록 되어 있습니다.

 

에봇 위에 정사각형의 흉패를 부착했습니다. 흉패도 에봇과 마찬가지 재료로 직조되었는데, 표면에 이스라엘의 각 지파를 상징하여 각 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열두 개의 보석이 박혀 있었습니다. 흉패는 두 겹으로 제작되어 안쪽에 우림과 둠밈이라는 특별한 신탁용 비품을 넣어 두었습니다. 우림과 둠밈에 대한 무수한 논의가 있었지만, 우리는 이것들이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 또한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2) 기름부음 의례(10-13)

 

매우 비싼 재료와 특수한 제조법으로 만든 관유가 성막 봉헌식과 제사장 위임식에 사용되었습니다. 관유 제조법은 출애굽기 30:22-33절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먼저 모세는 관유를 성막에 뿌렸고, 더불어 그 안 모든 비품들에 발라 거룩하게 만들었습니다. 분명 지성소의 법궤와 내성소의 향단, 떡상, 등대와 그 외 그것들을 관리하는 데 필요한 부속품들에 기름이 발라졌을 것입니다. 또한 모세는 마당으로 나온 뒤 그곳에 놓인 비품들에도 기름을 발라 거룩하게 만들었습니다. 바로 놋제단과 물두멍, 그리고 여타의 도구들입니다. 이어서 모세는 관유를 아론의 머리에 부어 발라 그를 거룩하게 만들었습니다. 차례로 아론의 아들들도 동일한 절차를 따라 제사장 예복을 입힌 뒤 허리띠를 채우고 관을 씌웠습니다. 아론의 아들들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는 설명이 출애굽기 29장과 여기에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28:41은 아들들도 기름을 부어 위임된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사물과 인간을 거룩하게 만드는 핵심적 요소는 ‘거룩한 기름’ 즉, ‘관유’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관유를 매개로 그것들을 거룩하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제사장 위임을 위한 제사들(14-21)

성도들이라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과정이 필수적임을 일깨워 줍니다. 이러한 의식은 단순한 절차가 아니라, 진정한 변화와 성장을 위한 시작임을 보여줍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강화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자기 반성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14○모세가 또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끌어오니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속죄제의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매 15모세가 잡고 그 피를 가져다가 손가락으로 그 피를 제단의 네 귀퉁이 뿔에 발라 제단을 깨끗하게 하고 그 피는 제단 밑에 쏟아 제단을 속하여 거룩하게 하고 16또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간 꺼풀과 두 콩팥과 그 기름을 가져다가 모세가 제단 위에 불사르고 17그 수송아지 곧 그 가죽과 고기와 똥은 진영 밖에서 불살랐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심과 같았더라 18○또 번제의 숫양을 드릴새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숫양의 머리에 안수하매 19모세가 잡아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20그 숫양의 각을 뜨고 모세가 그 머리와 각 뜬 것과 기름을 불사르고 21물로 내장과 정강이들을 씻고 모세가 그 숫양의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사르니 이는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 드리는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심과 같았더라(14-21)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으로 임명되는 의식이 묘사됩니다. 모세는 속죄 제물을 드리고, 그 제물의 피를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뿌려 그들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아론과 그의 자손들이 하나님께 봉사할 준비가 완료됨을 나타냅니다.

 

(1) 제사장 위임을 위한 속죄제(14-17)

 

제사장 위임식에는 몇 가지 제사가 바쳐졌는데, 그중 속죄제가 가장 먼저 드려졌습니다. 제사의 순서를 살펴보자면, 대체로 번제가 매일 드려지는 제사로 항상 드려진 채로 제단 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그 위에 개인적 공적인 다른 제사들이 바쳐졌습니다. 여러 제사가 바쳐질 때는 대체로 속죄제-번제-화목제의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속죄제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죄와 부정결로 인해 단절된 관계를 복원하고, 번제는 복원된 관계 속의 감사의 제사로 바쳐지고, 화목제는 그 감사를 인간과 함께 풍성히 나누기 위한 잔치의 제사로 바쳐졌습니다.

 

속죄제의 제사 절차는 레위기 4장에 나온 그대로입니다. 모세가 준비해 놓은 수송아지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함께 그 짐승의 머리에 안수를 합니다. 이어서 모세가 그 소를 잡습니다. 이어지는 번제와 위임식 숫양의 제사(화목제)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안수를 제외하고 모세가 제사의 주체로 나타나는 이유는 그날이 위임식이라는 특수한 공적 제사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세는 소를 도살한 뒤, 4장에 나온 규정대로 제사를 진행합니다. 그것은 제단이 속죄(키페르)되고 거룩하게 되는 효과로 이어졌습니다. 물론 제단은 앞서 기름부음과 더불어 이미 거룩해진 상태지만, 최종적인 거룩의 선언을 위해 속죄제뿐 아니라 남은 제사들을 필요로 했을 것입니다. 내장에 엉겨 붙어있는 기름 덩어리와 두 콩팥, 그리고 간엽이 제단 위에 불살라졌습니다. 남은 잔존물, 즉 가죽과 고기, 똥은 진영 밖으로 보내 ‘정결한 곳’, 즉 재 버리는 곳에서 태웠습니다. 15절에서 특히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확인됩니다. 그것은 속죄제 짐승의 피를 성막의 비품에 바르거나 뿌리면, 그것이 깨끗케 된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생각하자면, 비품이 피뿌림으로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더럽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연스럽게 그것이 오염된 이유는 인간의 죄와 부정결 때문이라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2) 제사장 위임을 위한 번제(18-21)

 

이어서 모세는 두 마리 숫양을 가져와 제물로 바칩니다. 먼저 드려지는 것은 숫양의 번제입니다. 역시 아론과 아들들이 숫양의 머리에 안수를 한 뒤, 모세가 양을 잡아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립니다. 이때 피 뿌림은 동사 ‘자라크’로서 ‘끼어 뿌리는’ 동작입니다. 이것이 제단을 청소하는 기능은 없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나머지 번제의 절차도 레위기 1장에 지시된 대로 실시됩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으로 세워지는 장면을 통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성결의 중요성을 일깨우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정결하게 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또한, 제사장으로의 임명은 헌신을 의미하며, 우리도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헌신해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제사와 희생의 중요성도 강조되며,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공동체의 역할을 통해 서로를 지지하고 격려하는 신앙 생활의 필요성을 일깨워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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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07-03)


화목제물 중에서 제사장의 몫

레위기 7장 28-38절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의식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경건함과 존중을 나타내며,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제사를 통해 감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감사의 태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게 합니다. 매일의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신앙의 기본이며,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이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결국, 경건한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있게 하고, 주변과의 관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 화목제 규정 중에서 이제 고기의 구체적인 할당에 대한 지침이 마련됩니다. 화목제 짐승 중에 일부는 제사장 몫이고 남은 대부분의 부위는 화목제를 바친 제사자에게 돌아갑니다.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가 집례하는 제사장의 수고비로 주어집니다. 제단 앞에서 제사장 몫인 가슴이 요제로 뒷다리가 거제로 우선 바쳐지는데, 요제와 거제는 흔히 알려져 온 바대로 흔들고 들어 올리는 방식의 동작이 아닙니다.

 

화목제 짐승의 고기 할당(28-33)

성도는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감사와 축복으로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 헌신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자신의 손으로 준비한 제물을 가져와야 합니다. 제물의 기름 부분은 제단 위에서 태워서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러나 제물 중에서 가장 좋은 부분인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는 공동체의 지도자와 그 가족을 위해 남겨둬야 합니다. 이처럼 헌신의 삶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쁨과 함께, 공동체와 나누는 사랑의 행위로 여겨야 합니다.

 

2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9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화목제물을 여호와께 드리려는 자는 그 화목제물 중에서 그의 예물을 여호와께 가져오되 30여호와의 화목제물은 그 사람이 자기 손으로 가져올지니 곧 그 제물의 기름과 가슴을 가져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가슴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고 31그 기름은 제단 위에서 불사를 것이며 가슴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릴 것이며 32또 너희는 그 화목제물의 오른쪽 뒷다리를 제사장에게 주어 거제를 삼을지니 33아론의 자손 중에서 화목제물의 피와 기름을 드리는 자는 그 오른쪽 뒷다리를 자기의 소득으로 삼을 것이니라(28-33)

 

화목제에 대한 추가적 지침이 연속되고 있습니다. 화목제의 짐승 중에 예물로 여호와께 바칠 부분은 제사자가 직접 손에 들고 가져가야 합니다. 그것은 짐승의 기름과 가슴, 그리고 오른쪽 뒷다리의 허벅지입니다. 모두 여호와께 바쳐지는 부위인데 그중에 제단에서 태우는 것은 기름입니다. 단지 희생 짐승의 기름만 언급되나 여기서 기름은 내장의 기름과 두 콩팥, 그리고 간엽에 대한 대표적 표현입니다. 아마 가슴은 아론과 모든 제사장이 함께 분배하지만(31), 오른쪽 뒷다리는 화목제를 집례한 제사장 몫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입니다(33).

 

이 법안은 제사장 몫인 화목제 짐승의 가슴은 ‘요제’로 뒷다리는 ‘거제’로 바칠 것을 명령합니다. 요제와 거제, 관제(전제)는 번제나 화목제와 같은 제사의 종류가 아닌 제물을 바치는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관제는 보통 포도주를 제물 위에 붓는 행위를 말하며, 흔히 요제는 흔드는 제사, 거제는 들어 올리는 제사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요제와 거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두 제사 방법에 대해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a) 거제 : 히브리어로 ‘테루마’입니다. 이것은 흔히 들어 올리는 제사의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여호와를 위해 성전에 바쳐진 제물(contribution)을 의미합니다: “자원하여 가져온 것”(출 25:2). 이러한 이유로 밀그롬을 비롯한 최근 다수의 학자들과 많은 영어 성경들이 현재 본문의 거제를 단순히 ‘contribution’(현물)으로 번역합니다(ESV; NIV; NASB). 이것은 말라기 3:8의 ‘십일조와 봉헌물(테루마)’이라는 표현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b) 요제 : 히브리어 ‘테누파’에 해당합니다. 흔히 이것은 흔들어 바치는 제사의 방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흔들기보다는 단순히 제단에 올리는 동작이 수반된 제물을 말합니다. 요제를 흔드는 제사로 보기 어려운 이유는 예컨대, 제사장 위임식을 보면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출 29장: 레 8장). 제사장들이 제단 앞에서 그들의 두 손 가득 많은 제물들을 올려놓는데, 이때 제물의 양을 고려해볼 때 흔들었다고 보기 어려우며 단순히 제단 앞에서 들어 올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학자들이 이것을 오히려 ‘거제’(heave offering)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전통적 번역 그대로 ‘요제’를 따를 것입니다.

 

화목제 고기 할당의 추가적 지침(34-36)

우리 성도에게 헌신과 봉사는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하는 것이 중요하며, 의무와 권리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교훈들은 우리의 신앙 생활과 공동체 생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또한, 공정한 분배의 원칙을 통해 서로를 존중하며 공동체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34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화목제물 중에서 그 흔든 가슴과 든 뒷다리를 가져다가 제사장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주었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을 영원한 소득이니라 35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서 아론에게 돌릴 것과 그의 아들들에게 돌릴 것이니 그들을 세워 여호와의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한 날 36곧 그들에게 기름 부은 날에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그들에게 돌리게 하신 것이라 대대로 영원히 받을 소득이니라(34-36)

 

화목제물의 ‘오른쪽 뒷다리’와 관련하여, 그것이 뒷다리인지는 논란이 됩니다. 히브리어 ‘쇼크’는 흔히 족발이라 불리는 정강이가 아닌 다리의 위 부위, 즉 허벅지(thigh)를 말합니다. ‘쇼크’라 불리는 이 부위는 짐승의 뒷다리 허벅지가 두툼하기 때문에 아마도 뒷다리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70인경(LXX)는 그것을 오른쪽 어깨(브라키온, shoulder)로 번역했으며 킹제임스 성경이 이를 따릅니다. 문제는 이 규정이 신명기 18:3과 충돌되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백성에게서 받을 몫은 이러하니 곧 그 드리는 제물의 소나 양이나 그 앞다리와 두 볼과 위라 이것을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우선 신명기의 법에서 ‘앞다리’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제로아’입니다. 쇼크가 다리 ‘윗부분’을 지시하는 반면, 이 단어는 ‘어깨’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70인경은 '제로아' 역시 ‘브라키온’, 즉 어깨로 옮깁니다. 70인경은 ‘쇼크’와 ‘제로아’를 같은 부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것이 오른쪽 다리로 지시될 뿐 뒷다리인지 앞다리인지는 명시하지 않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신명기의 이 부위를 앞다리 윗부분으로 해석하며 한글개역(개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레위기와 신명기는 서로 어긋난 규정을 법제화합니다. 이런 문제로 인하여 필로(Philo)는 레위기 법의 ‘쇼크’가 신명기를 따라 뒷다리가 아닌 앞다리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웬함(Wenham)도 조심스럽게 그것이 앞다리일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라기스에 있는 가나안 신전에 여러 짐승들의 오른쪽 앞다리가 제단에 세워져 있다는 것이 그 근거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대다수의 현대 학자들은 레위기는 오른쪽 뒷다리, 신명기는 오른쪽 앞다리를 제사장 몫으로 할당한다고 말합니다.

 

신명기 법에서 또 다른 차이는 제사장에게 가슴 부위가 아닌 두 볼과 위를 주라고 한 규정입니다. 오른쪽 대퇴부가 뒷다리인지 앞다리인지 여부와 상관없이 신명기 법의 두 볼(러하야임)과 위(케바)는 분명 레위기 법의 가슴과는 차이가 납니다. 아마 가장 무리가 없는 해석은 레위기는 가슴과 뒷다리 허벅지, 신명기는 두 볼과 위, 그리고 앞다리 허벅지를 제사장 몫으로 할당한다는 견해입니다. 이러한 서로 다른 법에 대해 비평주의 학자들은 제사장과 신명기의 상이한 전통으로 인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복음주의 학자들은 광야의 성막법에서 가나안 땅의 중앙 성전 법으로의 변화로 보려합니다. 아마 성막과 관련되어 주어진 몇 가지 시내산의 법들이 중앙성전과 관련된 넓은 가나안 땅의 배경과 사회적 정황에 맞춰 변경된 점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이 가장 합당한 해석인 것으로 보입니다. 제사장에게 가슴이 아닌 두 볼과 위, 뒷다리 허벅지가 아닌 앞다리 허벅지가 할당된 것은 전체적으로 제사장 몫이 축소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어쩌면 장차 화목제물을 나눌 가족과 친지의 규모가 커지고 인구가 늘어날 가나안 땅의 사회적 정황에 맞춰 평민에게 더 많은 몫을 돌리기 위한 변경인지 모릅니다. 이러한 제사장 몫은 제사장들이 위임되던 날(레 8장) 이후 그들에게 주어지기 시작했습니다(35). 신명기 법에서 사회적 상황의 변화로 인해 약간 변경되지만, 모든 화목제 짐승의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는 제사장들의 몫으로 할당됩니다.

 

화목제가 주는 교훈은 이웃과의 나눔과 평화로운 사권에 있습니다. 제사자는 자신의 기쁨과 감격을 나누기 위해 화목제를 바친 뒤 고기를 이웃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감사제의 경우 고기를 당일에 다 먹어야 하는 이유의 배후에는 감격스런 감사의 마음이 뜨거울 때 가진 것을 즉각 나누라는 권면이 암시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이때 반목 관계에 있던 이웃도 한 자리의 식탁에서 초청됨으로써 화목제가 사람 간의 관계를 복원하는 기능을 했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화목제가 속죄의 효과가 있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전통적으로 많은 학자들, 특히 보수적 학자들은 모든 짐승의 제사는 피를 내기에 속죄의 효과가 있다고 주장해왔습니다. 따라서 화목제도 마찬가지로 죄를 사하는 기능을 갖습니다. 그런 주장의 유일한 근거는 에스젤 45:15,17입니다. 여기에서 속죄제, 번제, 소제, 화목제를 이스라엘 백성의 속죄를 위해 바칠 것을 요구합니다. 아마도 이어지는 18-25절에 비추어 볼 때, 에스겔의 유월절 의식에 따라 속죄를 위한 목적으로 속죄제가 주 제사로 드려지는 가운데 나머지 제사들이 보조적으로 함께 드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밀그롬이 정확히 지적한 대로 그 제사들 목록에서 화목제가 가장 나중에 나타나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족속을 속죄하기 위하여 이 속죄제와 소제와 번제와 감사 제물(즉, 화목제)을 갖출지니라”(겔 45:17). 화목제는 모든 제사에서 항상 잔치의 제사로 나중에 드려졌기 때문에 마지막에 끼어 있습니다. 이 에스겔 본문은 그 모든 제사를 편의상 한 묶음으로 처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에스겔 45:15-17 화목제의 대속 기능의 증거로 삼을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무엇보다 화목제는 죄를 위해 드리는 제사가 아님을 상기해야 합니다. 즉, 인간은 죄를 지을 때 화목제를 바치지 않습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를 기뻐하기 위해 드리는 감사의 제사라 할 수 있습니다.

 

오대 제사의 결언(37-38)

우리는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있게 발전시켜야 합니다. 결국, 우리 삶의 방향성과 목적을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본문에 제사와 관련된 규례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현대인들에게 이 구절은 신앙의 기초가 되는 의식과 규율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필요함을 일깨워줍니다.

 

37이는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와 위임식과 화목제의 규례라 38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라 명령하신 날에 시내 산에서 이같이 모세에게 명령하셨더라(37-38)

 

법안 이전에 이미 번제와 화목제, 그리고 소제는 족장 시대 이전부터 존재했습니다. 레위기에서 비로소 이 제사들이 공식적으로 법제화하고 있을 뿐입니다. 반면에 속죄제와 속건제는 레위기에서 신설되는 제사입니다. 참고로, 번제의 고대성은 성경 신학적으로는 아담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며 하나님께서 최초로 마련하신 제사법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헌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에 대해 감사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삶에서 소중한 것들을 나누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진정한 신앙의 표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의 헌신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맺는 통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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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07-02)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한 화목제

레위기 7장 11-27절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에서 부정한 것들을 제거하고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배와 기도는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맺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이러한 감사의 표현은 우리 신앙의 기초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들어가야 합니다. 감사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기억하게 합니다.

 

  • 화목제의 추가적 규정들이 주어지고 더불어 몇 가지 주의사항들이 무서운 ‘끊어짐’의 형벌에 대한 경고와 더불어 첨부됩니다. 화목제는 감사(찬양)의 화목제, 서원의 화목제, 그리고 자원의 화목제로 세 종류가 존재합니다. 각기 상이한 목적에 따른 화목제의 종류로서 공통점은 역시 감사라 할 수 있습니다. 화목제 고기를 먹는 규정이 자세히 주어지고, 또한 먹지 말아야 할 품목으로 기름과 피에 대한 강한 경고가 덧붙여집니다.

 

감사의 화목제와 고기의 취급(11-15)

우리의 삶에서 부정한 것들을 제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거룩함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싶다면, 우리의 마음과 행동에서 부정한 것들을 배제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더욱 깨끗한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거룩한 삶을 지향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11여호와께 드릴 화목제물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12만일 그것을 감사함으로 드리려면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어 구운 과자를 그 감사제물과 함께 드리고 13또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제물과 함께 그 예물로 드리되 14그 전체의 예물 중에서 하나씩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그것을 화목제의 피를 뿌린 제사장들에게로 돌릴지니라 15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11-15)

 

레위기 3장에서 제사 절차가 설명된 화목제는 세 종류로 구분됩니다: 감사(찬양)의 화목제(15): 서원의 화목제와 자원의 화목제(16). 이러한 화목제를 드릴 때 3장에서는 화목제의 짐승만 제물로 명시되었으나 짐승 외에도 기름이 첨가된 소제물들, 즉 무교병과 무교전병, 구운 과자, 그리고 유교병과 같은 몇 가지 음식 제물을 곁들여 바칩니다. 특히 소제의 경우와 달리 누룩이 들어간 유교병이 허용되는데(13), 다만 이것은 제단 위에는 올리지 않고 제사장 몫으로 돌아갔습니다. 화목제가 대부분의 고기를 사람들이 나누는 잔치의 제사이기 때문에 유연성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각각의 떡과 과자가 몇 개 만들어지는지 명시되어 있지 않은데, 제사장은 그것들 중에 하나씩을 골라 하나님께 거제(테루마: 7:28-38을 보라)로 바쳐 아마도 소제 규정에서 보듯이 제단에 기념물로 일부를 태운 뒤 자신의 몫으로 가져갑니다. 또한 아래에서 보듯이 제사장은 화목제 짐승 중 자신의 몫으로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를 가져갑니다. 남은 여러 개의 떡과 과자. 그리고 화목제 짐승 중 남은 몸통 대부분은 모두 제사자가 가져가 가족과 친족, 그리고 이웃과 더불어 나누어 먹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떡과 과자를 몇 개 준비해오는지는 제사자의 결정에 달려 있었습니다.

 

화목제의 주목적은 감사를 가족 및 이웃과 함께 풍성히 나누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기름과 일부 내장을 제외한 모든 고기를 사람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작은 짐승 (양/염소)은 가족이나 친족과 더불어 나누었을 것이나 큰 짐승은 이웃과 마을 사람들을 불러 큰 잔치를 벌였올 것입니다. 감사의 화목제 짐승의 고기는 당일에 먹어야 했으며 이튿날까지 남겨두었다가 먹는 것은 금지되었습니다. 고기가 아닌 다른 음식 제물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한이 지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서원과 자원의 화목제와 고기의 취급(16-21)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의 마음과 삶을 정결하게 하여 그분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우리는 그 거룩함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시간, 재능, 물질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 헌신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헌신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16그러나 그의 예물의 제물이 서원이나 자원하는 것이면 그 제물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17그 제물의 고기가 셋째 날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지니 18만일 그 화목제물의 고기를 셋째 날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 드린 자에게도 예물답게 되지 못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그 죄를 짊어지리라 19그 고기가 부정한 물건에 접촉되었으면 먹지 말고 불사를 것이라 그 고기는 깨끗한 자만 먹을 것이니 20만일 몸이 부정한 자가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요 21만일 누구든지 부정한 것 곧 사람의 부정이나 부정한 짐승이나 부정하고 가증한 무슨 물건을 만지고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도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16-21)

 

감사의 화목제 외에 서원의 화목제와 자원의 화목제가 드려질 수 있었습니다. 우선 자원의 화목제는 ‘낙헌제’라고도 불립니다(민 15:3; 29:39; 신 12:6; 암 4:5). 이것은 특별한 감사의 조건이 없이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자원해서 드리는 화목제였습니다. 서원의 화목제는 하나님께 서원한 바가 성취되어 감사함으로 서원을 이행할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 한나는 대표적인 서원제의 사례입니다(삼상 1장). 한나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자식을 주면 성전에 바치겠다고 서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에 응답하여 그녀에게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젖 뗀 후 3년생 수소 한 마리와 밀가루 한 에바, 그리고 포도주 한 부대를 서원의 화목제로 가져갑니다(한글개역개정은 수소 세 마리라 하는데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이 바르게 옮겼듯이 3년생 수소 한 마리다).

 

감사제와 달리 서원제와 자원제(낙헌제)는 화목제의 고기를 이튿날까지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셋째 날에 만일 고기가 남았으면 불살라 없애야 했습니다. 태우는 장소가 지정되어 있지 않으나 통상적으로 이런 제의적 폐기물은 진영 밖의 ‘정결한 곳’인 재버리는 곳에서 태웠습니다. 18절은 그런 유통기한이 지난 화목제의 고기를 ‘가증한 것’이라고 칭합니다. 히브리어 ‘피굴’은 그 뜻이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았으나 분명히 부패하고 더럽혀진 물건을 칭합니다. 하틀리는 이것이 보건위생적 의미의 상한 고기를 지시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감사제의 경우 하루만 지나도 ‘피굴’로 전락한 것으로 보아 위생적인 부패가 아닌 제의적 의미의 ‘더러운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 사실은 19절에서 부정한 물건과 접촉만 되어도 화목제 고기가 더럽혀진다는 진술에서도 확인됩니다.

 

만일 유통기한이 지난 화목제 고기를 조금이라도 먹으면 심각한 결과가 초래되었습니다. 우선 그 화목제 자체가 무효가 되었습니다(18). 이것은 제사가 드려진 후라도 마무리 절차를 제대로 완수하지 않으면 제사가 아무런 효과를 낼 수 없음을 말해주는 강력한 근거입니다. 따라서 속죄제/속건제의 경우도 모든 제사 절차가 완료되어 ‘죄사함’과 ‘정결’이 최종적으로 선언되었다 하더라도 속죄제 짐승의 잔존물을 밖에서 태우거나 제사장이 먹어서 제대로 마무리하지 않는다면, 속죄제가 무효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0:17의 모세의 진술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내포합니다: “이 속죄제물은 지극히 거룩하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거룩한 곳에서 먹지 아니하였느냐 이는 너희로 회중의 죄를 담당하여 그들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죄하게 하려고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이 구절은 제사장의 속죄제 고기의 섭취와 더불어 최종적으로 속죄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현재의 화목제 규정에서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로 고기를 소각하는 이유는 고기가 더럽혀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 짐승이 속죄제의 절차를 통해 죄와 부정결로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상태라면, 진영 밖에 반출하여 태울 필요 없이 소제물처럼 제단 위에 불살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러워진 화목제 짐승의 고기를 아마도 진영 밖으로 반출하여 소각해서 없앴듯이 진영 밖으로 반출되어 소각된 속죄제 짐승의 남은 부위도 분명 더럽혀진 이유로 그렇게 처리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속죄제의 남은 고기를 진영 밖으로 반출하여 태우는 이유도 그 고기가 인간(제사자)의 죄와 성소의 부정결로 더럽혀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더럽혀진(가증한) 화목제 고기를 먹으면 화목제가 무효가 될 뿐 아니라 먹은 자는 그 죄를 짊어지게 됩니다(18). 또한 만일 그 고기가 부정한 물건에 접촉되었으면 마찬가지로 먹을 수 없습니다. 나아가 먹는 사람의 자격도 엄격합니다. 그 고기는 몸이 부정한 사람이나 부정한 것과 접촉해서 부정을 탄 사람은 결코 먹을 수 없으며 정결한 사람만이 먹을 자격을 갖습니다. 만일 이러한 규정을 어기면 백성에게서 ‘끊어짐’의 형벌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끊어짐’보다는 우리말에 가장 적절한 표현이 ‘제명’인 듯합니다. 따라서 필자는 이 주해에서 ‘제명’이란 용어를 사용할 것입니다. ‘제명’의 형벌에 대해 몇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즉각적인 죽음: 이른 죽음: 후손의 죽음: 공동체로부터의 추방, 즉 파문, 적어도 현재의 문맥에서 “죽일지”와 “끊어지리라”는 두 문구는 죽음에 대한 동의적 표현으로 보입니다.

 

기름과 피 섭취의 금지(22-27)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며, 그분과의 관계는 우리의 삶에서도 거룩함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거룩함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드려질 때, 우리는 진정한 예배자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22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3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소나 양이나 염소의 기름을 먹지 말 것이요 24스스로 죽은 것의 기름이나 짐승에게 찢긴 것의 기름은 다른 데는 쓰려니와 결단코 먹지는 말지니라 25사람이 여호와께 화제로 드리는 제물의 기름을 먹으면 그 먹는 자는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26너희가 사는 모든 곳에서 새나 짐승의 피나 무슨 피든지 먹지 말라 27무슨 피든지 먹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다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22-27)

 

마지막으로 화목제와 더불어 두 가지 금지된 것을 명령합니다. 곧 기름과 피입니다. 이것은 매우 강한 어조의 법안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가축의 기름을 먹거나 사용해서는 안 되며 모두 제단에 태워야 합니다. 앞서 3:16에서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라고 선언된 바 있습니다. 25절은 기름 금지를 제단 도살이 된 가축으로 제한하는데, 따라서 필자는 어떤 랍비들과 더불어(예. 이반에스라[Ibn Ezra]) 제사가 아닌 식용을 위해 일반 도살로 죽인 가축의 경우와 사냥한 짐승의 기름은 식용이 가능했다는 입장입니다. 이 경우 기름 자체를 먹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름이 포함된 고기 부위를 먹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장의 기름 덩어리 자체는 식용으로 부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사 한 짐승이나 물려 죽은 짐숭의 기름도 먹을 수 없으며, 다만 생활 용도로는 사용 가능합니다(24). 여기서는 ‘기름 섭취 금지’라는 주제에 맞춰 그런 짐승의 기름을 먹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데, 레위기 17:15에서는 이런 짐승의 고기 자체가 식용으로 금지되고 있습니다(출 22:30과 신 14:21). 그 이유는 자명합니다. 피를 쏟아내지 않은 이런 짐승들의 몸에는 피가 남아 있기 때문에, 그런 고기의 섭취는 결국 피째 고기를 먹는 셈이 됩니다. 만일 금지된 기름을 먹으면 그는 백성으로부터 ‘제명’되는 징벌을 받습니다(25). 마지막으로 피의 섭취가 금지됩니다. 피 금지는 제의 도살용 가축과 일반 가축, 그리고 사냥한 짐승을 포함한 모든 짐승의 피에 적용됩니다. 레위기 17:11은 피의 섭취가 금지된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는 피가 곧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생명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피 섭취의 결과 역시 무서운 ‘제명’의 형벌입니다(27).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거룩함과 순종의 중요성을 상기시킵니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를 지키며,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갈 때 진정한 예배자로 서게 됩니다. 또한, 부정한 것들을 멀리하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종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분의 은혜 안에서 거룩하게 살아가기를 다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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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07-01)


잘못을 배상하는 제사인 속죄제

레위기 6장 24절-7장 10절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며, 각자에게 부족함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부족함은 서로에게 겸손하게 나가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도 겸손함을 배우게 합니다. 우리는 그 부족함 덕분에 더 많이 기도하게 됩니다. 삶의 연약함을 원망하기보다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가시로 받아들이길 바랍니다. 엎드려 하나님의 도움과 자비를 간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 앞서 4-5장의 속죄제 규정에서 설명되지 않은 내용들이 여기서 메워집니다. 4장에서 도살 장소가 ‘여호와 앞’이었으나 구체적으로 번제를 잡는 곳과 같은 장소로 지정됩니다. 속죄제에서 사용된 몇 가지 물품들이 세탁되고 속죄제 짐승의 남은 고기는 진영 밖에서 태우거나 제사장이 섭취함으로써 처분됩니다. 이어서 속건제 규정 또한 몇 가지가 추가됩니다. 5-6장에서 빠진 속건제제사법이 덧붙여지는데, 그것은 제물이 숫양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 속죄제와 같은 방식입니다.

 

추가된 속죄제 규정(24-30)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제사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제물은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헌신과 진실한 마음을 나타내며, 규정에 대한 순종이 필수적입니다. 또한, 제사는 개인의 행위뿐 아니라 공동체의 예배와 책임도 중요시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그에 대한 경배를 표현해야 합니다. 이 교훈은 새겨져야 할 원칙들입니다.

 

2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5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속죄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속죄제 제물은 지극히 거룩하니 여호와 앞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그 속죄제 제물을 잡을 것이요 26죄를 위하여 제사 드리는 제사장이 그것을 먹되 곧 회막 뜰 거룩한 곳에서 먹을 것이며 27그 고기에 접촉하는 모든 자는 거룩할 것이며 그 피가 어떤 옷에든지 묻었으면 묻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빨 것이요 28그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뜨릴 것이요 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닦고 물에 씻을 것이며 29제사장인 남자는 모두 그것을 먹을지니 그것은 지극히 거룩하니라 30그러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 성소에서 속죄하게 한 속죄제 제물의 고기는 먹지 못할지니 불사를지니라(24-30)

 

본문에서는 제사에 관한 규정이 설명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에게 속죄제와 소제의 제사 방법을 지시하며, 제물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또한, 제사장이 제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세부 사항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1) 도살 장소와 고기 먹는 장소의 지정(24-27a)

 

앞서 4장과 5장의 속죄제 규정에서 빠진 내용은 짐승의 남은 부위 처분 방법과 절차였습니다. 도살 장소는 4장에서 ‘여호와 앞’이라고 지정되었으나 ‘번제를 잡는 곳’으로 구체화됩니다. 1장에서 양/염소의 도살 장소는 제단의 북쪽이었고 소는 통제의 어려움 때문에 특정 장소가 지정되지 않았습니다. 속죄제는 내장 부근의 기름 덩어리와 두 콩팥, 그리고 간엽을 떼어 제단 위에 불살랐습니다. 따라서 몸통의 대부분이 남게 됩니다. 이것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 현재의 규정에서 보충되어 앞선 4-5장의 공백이 메워집니다. 속죄제는 고기 처분 방식에 따라 크게 두 종류로 나뉩니다. 하나는 ‘먹는 속죄제’이고 다른 하나는 ‘태우는 속죄제’입니다. 26절은 먼저 먹는 속죄제를 설명합니다. 제사장은 남은 몸통의 고기들을 소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회막 뜰에서 먹습니다. 그러나 30절에서 먹지 못하고 태워야 하는 속죄제에 대한 설명이 추가됩니다. 만일 속죄제 짐승의 피가 마당의 제단이 아닌 내성소로 가지고 들어가 향단에 뿌려졌다면 그 고기는 반드시 진영 밖으로 반출하여 태워야 합니다.

 

(2) 사용된 물건들의 청소와 처분 및 고기의 처분(27b-30)

 

속죄제 고기는 가장 거룩했습니다. 아마 단순히 ‘거룩한 고기’였던 화목제를 제외하고(레 19:8) 모든 제단 위에 바쳐진 제물들, 즉 번제와 소제, 그리고 속죄제/속건제는 모두 지극히 거룩했습니다.

27절은 다시 해석상의 문제를 야기합니다. 그 고기에 접촉하는 모든 것(사람)은 거룩해지는 것입니까, 아니면 거룩해야 합니까? 우선 27절은 27a절에서 끊어 읽어야 합니다. 27절의 의미는 앞서 주장한 바와 같이 그 속죄제 고기에 접촉하는 모든 것은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룩하게 된다’로 해석하여 이 구절을 거룩의 전염성의 근거로 주장해선 안 됩니다.

즉, 누군가가 혹은 어떤 사물이 지극히 거룩한 소제물이든 또는 현재의 지극히 거룩한 속죄제 고기든 만지거나 접촉이 되었다 해서 그것이 거룩하게 변한다는 개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격이 없는 사람/사물이 그것과 접촉할 때 그 성물이 더럽혀지며, 그런 접촉으로 성물을 속되게 한 사람/사물은 즉각 응징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이 자기 방어를 하며 스스로 정화하는 과정의 결과입니다. 예컨대, 하나님의 신적 불이 내려와 다른 불로 멋대로 향단에서 향을 피우려던 나답과 아비후를 태웠습니다(레 10장).

27b절은 피가 옷에 묻을 때 그것을 세탁하라고 명령합니다. 속죄제 짐승을 드리는 과정에서 옷에 묻은 피를 빠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어서 28절은 속죄제 고기를 그릇에 삶았는데, 왜 그 그릇을 파괴하고 유기(놋그릇)에 삶은 것은 또한 물에 씻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룩의 전염성을 주장하면서 피가 거룩하기 때문에 피 묻은 옷에 결국 거룩이 묻어 그 거룩을 닦아내는 것이며, 속죄제 고기 또한 지극히 거룩하므로 토기에는 거룩이 스며들었으므로 깨트려야 하고 유기(놋그릇)는 스며들진 않으므로 씻어낸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 옷이나 그릇들은 이미 성막 내의 거룩한 물건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미 거룩한 물건에 거룩이 전염된다는 개념은 매우 괴이합니다. 더불어 거룩한 성막 내에서 어떤 거룩한 물건에 거룩이 더 묻었다 해서 닦아낼 필요가 있는지 의문입니다.

거룩한 제단에 지극히 거룩한 제물이 바쳐질 때 제단에 거룩이 전달된다는 것입니까? 그들은 제물이 제단에 접촉해서 거룩해진다고 주장하는데, 제단에 올라가기 전에 그것은 안수의 순간 온전한 성물(고르반)의 지위로 변한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제단에 접촉하는 것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제단에 접촉하는 것은 ‘거룩해야 한다’(출 29:37; 30:26-29). 거룩하지 않은 것이 제단과 불법적으로 접촉하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설사 제단에 바쳐져서 접촉을 통해 거룩해진다 해도 왜 화목제는 평이하게 거룩하게 되고 나머지 제물들은 지극히 거룩해집니까? 대단히 해괴한 논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피를 빨아서 제거하고 닦아내는 이유는 거룩의 전염 때문이 아닌 부정결의 전염 때문으로 보아야 합니다. 속죄제 짐승은 안수를 통해 제사자의 죄가 옮겨가 더럽혀진 상태이며, 피가 향단과 제단에 뿌려질 때 그 비품들의 부정결이 피에 흡수되어 세척된 뒤 짐승의 고기로 옮겨옵니다. 따라서 속죄제 짐승의 고기는 인간의 죄와 성소의 부정결이 묻어 오염된 상태입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그 피가 옷에 묻으면 옷을 빨아야 하고, 그 고기를 그릇에 삶으면 깨트리고 씻어내야 합니다.

 

결국 속죄제로 바쳐진 짐승의 고기는 지극히 거룩하면서도 동시에 더러움으로 오염된 이중적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이와 같은 거룩한 것이 부정결로 더럽혀지는 일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거룩과 부정결의 공존의 불안정성은 속히 해결되어야 합니다. 레위기 10:17은 속죄제 고기에 사람의 죄가 묻어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 짐승의 피를 내성소에 가지고 들어가 향단과 그 주위에 뿌렸다면, 그 고기는 결코 먹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태우는 속죄제의 한 가지 기준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그 피를 내성소(또한 레 16장에 의하면 지성소도 해당됨)로 가지고 들어가 뿌린 것은 먹지 않고 태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레위기 10:18에서도 확인됩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기준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속죄제가 제사장 자신을 위해 드려진 경우입니다(레 4:3-12). 이유는 제사장은 그 속죄제로부터 고기를 먹는 혜택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사장이 포함된 회중 전체의 속죄제인 경우에도 제사장은 그것을 먹을 수 없습니다(레 4:13-21). 보통은 제사장과 회중의 비고의적인 죄를 위한 속죄제는 내성소에 그 피를 뿌리지만, 간혹 제사장을 위한 속죄제의 피가 마당의 번제단에 뿌려지는 다른 몇몇 사례도 있습니다(레 8-9장). 이때 이 고기를 태워야 하는데, 피가 뿌려진 장소가 내성소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속죄제가 제사장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태우는 속죄제의 두 가지 기준이 도출됩니다: (1) 내성소(또한 지성소)에 피를 뿌린 것: (2) 제사장 자신을 위한 속죄제. 둘 다 특징은 그 고기의 오염도가 매우 높다는 것입니다.

 

추가된 속건제 규정(1-10)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이나 예물은 세상과 구별되어 지극히 거룩합니다. 속건제는 개인의 행동에 대한 책임감을 일깨워 줍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정직하게 인정하고, 잘못된 행동을 수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단순히 도덕적 책임을 넘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1속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이는 지극히 거룩하니 2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속건제의 번제물을 잡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3그 기름을 모두 드리되 곧 그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기름과 4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내고 5제사장은 그것을 다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께 화제로 드릴 것이니 이는 속건제니라 6제사장인 남자는 모두 그것을 먹되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라 그것은 지극히 거룩하니라 7속죄제와 속건제는 규례가 같으니 그 제물은 속죄하는 제사장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8사람을 위하여 번제를 드리는 제사장 곧 그 제사장은 그 드린 번제물의 가죽을 자기가 가질 것이며 9화덕에 구운 소제물과 냄비에나 철판에서 만든 소제물은 모두 그 드린 제사장에게로 돌아갈 것이니 10소제물은 기름 섞은 것이나 마른 것이나 모두 아론의 모든 자손이 균등하게 분배할 것이니라(1-10)

 

이어서 속건제와 번제 및 소제에 대한 몇몇 규정이 추가됩니다. 우선 속건제 드리는 방법이 여기서 최초로 설명되는데, 그것은 속죄제의 그것과 동일합니다. 즉, 숫양의 내장 기름과 기름진 꼬리, 두 콩팥, 그리고 간엽을 바칩니다. 태우고 남은 몸통의 고기는 역시 속죄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사장이 먹습니다. 만일 제사장 자신을 위한 속건제였다면 먹지 못하고 진영 밖에서 태울 것입니다.

그러나 5장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속죄제와 큰 차이가 하나 있는데, 피를 뿌리는 동작이 다릅니다. 즉, 속건제 짐승의 피는 번제와 화목제와 마찬가지로 피를 제단 사면 벽에 끼얹어 뿌립니다(자라크). 속건제와 속죄제의 이런 피 처리 동작의 차이는 중대한 사실을 알려주는데, 이것은 속건제의 피는 제단을 씻어내는 효과가 없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실제로 어디에도 속건제의 피가 제단을 씻는다는 언급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속건제가 처리하는 죄는 제단과 성막을 오염시키지는 않았다는 결론입니다. 그 이유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그 범죄는 도덕적 금지 명령 위반이 아닌 상대방에게 재산상의 피해를 입힌 죄이며, 죄의 해결 방법이 물질적 배상이었기 때문으로 추론됩니다.

한편, 번제의 가죽이 집례하는 제사장의 수고비로 돌아간다는 지침이 추가됨으로써 앞서 번제 조항에서 누락되어 있던 공백이 적절히 메워집니다. 또한 9절에 의하면, 소제물의 남은 부분은 집례하는 제사장이 그 몫을 차지할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10절은 동시에 그것을 모두 아론 집안의 제사장들이 나누어 가질 것을 명령합니다. 따라서 집례하는 제사장은 그 남은 소제물의 분배 책임을 지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우리는 제사장의 역할을 통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해야 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며, 이를 통해 참된 예배와 경배를 실천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한 마음을 원하시며, 그분과의 관계를 깊이 있게 나누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임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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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06-02)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한 제사

레위기 6장 8-23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최상의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 재능, 자원 모두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로서의 의미를 가져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영적인 성장을 이루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은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매일의 선택에서 하나님을 우선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욱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 레위기 6:8-7:38은 앞서 상술된 다섯 가지 제사 규정의 추가적인 지침들입니다. 앞서 5대 제사의 순서는 번제,소제,화목제,속죄제,속건제였으나, 이 단락에서는 순서가 약간 바뀌어 번제소제 속죄제 속건제-화목제의 순서로 화목제가 맨 뒤에 위치합니다. 앞부분은 감사의 자원자들과 의무제를 나누어 설명하기 위한 교육적 순서이고 뒷부분은 실제로 집행되는 제사의 실천적 순서라 볼 수 있습니다.

 

추가된 번제 규정(8-13)

매일 아침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활활 타오르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일회성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불타올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번제를 통해 우리의 마음과 삶을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제사장은 아침에 불을 지피고 그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해야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속적이고 끊임없이 이어져야 함을 상징합니다.

 

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9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라 번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번제물은 아침까지 제단 위에 있는 석쇠 위에 두고 제단의 불이 그 위에서 꺼지지 않게 할 것이요 10제사장은 세마포 긴 옷을 입고 세마포 속바지로 하체를 가리고 제단 위에서 불태운 번제의 재를 가져다가 제단 곁에 두고 11그 옷을 벗고 다른 옷을 입고 그 재를 진영 바깥 정결한 곳으로 가져갈 것이요 12제단 위의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서 태우고 번제물을 그 위에 벌여 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서 불사를지며 13불은 끊임이 없이 제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8-13)

 

본문에서는 제사장이 번제의 규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사는 아침에 불을 지피고, 그 불이 꺼지지 않도록 계속 유지해야 합니다. 또한, 제사장은 기름과 고기를 정해진 대로 처리해야 하며, 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께서 명령한 대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합니다.

 

(1) 번제물의 관리와 제단의 청소(8-11)

 

제단의 불은 밤중 내내 타올라 아침까지 꺼지지 않아야 합니다. 현재의 레위기에서는 12절에서 아침 번제만이 언급되나 민수기에서 볼 수 있듯이 번제는 제사장에 의해 매일 아침저녁으로 드려졌습니다(민 28:3; 29:6). 저녁의 번제는 아침까지 타도록 충분한 장작을 쌓아 태웠으며, 아침에 제사장들은 제단에 타고 남은 기름섞인 재를 청소했습니다. 제사장은 타고 남은 재를 청소하러 제단 위에 올라갈 때 세마포 긴 옷과 속바지를 입어야 합니다. 세마포 긴 옷은 반포 속옷이라 불리는 체크무늬의 관복, 즉 일반 제사장의 정규 복장이며(출 28:39), 제사장은 제단 위에 올라갈 때 거기에 속바지를 추가로 착용해야 합니다(출 28:42). 제사장이 경사로를 통해 제단에 오르내릴 때 속바지를 입는 이유는 제단에 인간의 불미스러운 하체가 드러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제단은 계단이 허용되지 않으므로 경사로가 설치되어 있었을 것입니다(출 20:26; 뒤의 레 9장을 보라).

제사장은 재를 제단 곁에 일단 모아두는데, 그곳은 제단의 동편, 즉 성막 입구쪽이었습니다(레 1:16). 이어서 제사장은 제사장 복장을 벗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이 옷이 어떤 옷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재를 진영 밖에 내다버리기 위해 입는 일상적인 작업복일 뿐 거룩한 복장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진영 밖에는 재를 버리는 장소가 지정되어 있었고, 그곳은 ‘정결한 곳’으로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결한 곳’이라 해서 깨끗한 것을 버리는 장소라는 의미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곳은 똥이나 내장의 더러운 것들뿐 아니라 죄로 더럽혀진 속죄제의 고기, 그리고 아마도 날짜가 지나 더럽혀진 화목제 고기를 태우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다만 ‘정결한 장소’는 제의적으로 구별된 장소라는 의미였습니다.

 

(2) 제단 불의 관리(12-13)

 

제사장은 아침 동틀 때마다 불이 타고 있는 제단 위에 나무를 충분히 올려놓고 아침 번제를 드림으로써 하루를 시작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민수기에 의하면 아침뿐 아니라 저녁에도 번제를 바쳤습니다. 매일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번제를 ‘타미드’의 번제, 즉 ‘항상 드리는’ 상번제라 칭합니다(민 28:3; 29:6 등). 그리하여 불은 ‘끊임이 없이’(타미드) 제단 위에서 탔습니다. 여기서 히브리어 타미드는 규칙적인 반복성(상번제)과 더불어 끊어짐이 없는 연속성(제단 불)을 의미하는 단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제단 불은 레위기 9장에서 보듯이 신적인 불, 즉 하나님의 불로서 범상한 불이 아닙니다. 원래 레위기 9장에서 최초의 제단 불은 아론이 지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불이 갑자기 임해 제단 위의 제물들을 순식간에 태웠습니다. 그 후 그 불은 신적인 불로 바뀌었으며 결코 꺼뜨려서는 안 되었습니다.

 

추가된 일반 소제 규정(14-18)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순종은 신앙의 기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때, 그분의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순종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의 삶이 변화됩니다. 결국, 순종은 우리 신앙의 성숙을 이끄는 열쇠입니다.

 

14○소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제단 앞 여호와 앞에 드리되 15그 소제의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소제물 위의 유향을 다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16그 나머지는 아론과 그의 자손이 먹되 누룩을 넣지 말고 거룩한 곳 회막 뜰에서 먹을지니라 17그것에 누룩을 넣어 굽지 말라 이는 나의 화제물 중에서 내가 그들에게 주어 그들의 소득이 되게 하는 것이라 속죄제와 속건제 같이 지극히 거룩한즉 18아론 자손의 남자는 모두 이를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서 대대로 그들의 영원한 소득이 됨이라 이를 만지는 자마다 거룩하리라(14-18)

 

본문은 소제에 관한 규례를 설명합니다. 아론과 그의 자손들이 여호와 앞에서 소제를 드리며, 남은 부분은 누룩 없이 먹어야 합니다. 이 소제는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하며, 제사장의 모든 남자들이 먹을 수 있습니다. 소제는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 중에서 가장 거룩한 것입니다. 또한, 이 규례는 대대로 지켜야 합니다.

 

(1) 소제 드리는 방법(14-15)

 

현재의 추가적인 소제의 규정 중에서 14-16절의 소제물을 드리는 방법과 남은 소제물의 처분은 2장에서 주어진 바 있습니다. 다만 16절에서 소제의 밀가루를 먹는 장소를 구체적으로 ‘거룩한 곳 회막 뜰’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소제의 밀가루 10분의 1에바(약 2.2리터의 양)를 바칠 때 위에 기름을 붓고 유향을 놓습니다. 그러나 기름과 유향의 양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밀가루 위에 기름과 유향을 적당량 붓고 놓았을 것입니다. 제사장은 그 부분의 밀가루를 손으로 움켜쥐어 제단 불에 놓아 태웁니다. 이때 기름 때문에 밀가루가 약간의 불이 일며 탔을 것이며, 유향은 향기로운 냄새를 피웠을 것입니다. 소제의 밀가루가 타면서 ‘향기로운 냄새’가 되어 올라갔습니다.

 

(2) 누룩의 금지와 제사장의 몫(16-18)

 

한 주먹 분량을 뺀 대부분의 남은 밀가루는 아론과 그의 자손들, 곧 제사장들의 몫으로 돌아갔으며 그들은 그것을 회막 뜰에서 먹어야 합니다. 물론 그것을 생밀가루로 먹은 것이 아니라 요리해서 먹었을 것입니다. 아론의 자손들은 아론의 자손들 중 남자로 제한된다고 18절에서 명확히 추가 설명되고 있습니다. 원칙상 아론의 자손들 중 남자, 즉 제사장들이 이 남은 소제물을 거룩한 곳인 회막 뜰에서 나누어 먹어야 했습니다(18). 그러나 소제의 밀가루가 한꺼번에 여러 사람에 의해 바쳐진다면 그것을 다 먹기는 매우 곤란했을 것입니다.

먹는 장소가 회막 뜰로 명확히 적시되긴 했지만, 뜰의 어느 곳인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회막 뜰어느 곳에서 먹든지 합법적이었을 것으로 추론되는데, 그럼에도 가장 적절한 장소로 물두멍과 성막의 본당, 즉 회막의 입구인 내소막 사이의 공간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곳은 제단과 물두멍, 경사로 등으로 외부의 시선이 차단되어 실제로 제사장들의 활동 공간, 즉 손발을 씻고 복장을 점검하고 옷을 갈아입고 때로는 목욕을 해야 하는 곳으로 가장 적합한 유일한 곳이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앞서 2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소제의 규정은 소제의 밀가루에 결코 누룩, 즉 효모를 넣지 말도록 금지합니다. 더불어 꿀, 즉 과일로 만든 꿀인 시럽을 첨가하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아마 누룩과 꿀의 금지는 누룩이 부패의 상징이며, 과일 꿀(시럽) 또한 쉽게 부패하는 특징을 가졌기 때문으로 추론됩니다.

18절 마지막 부분인 ‘만지는 자마다 거룩하리라’는 레위기의 거룩 신학의 이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히브리어 ‘이크다쉬’가 단순미래, 즉 ‘거룩하게 될 것이다’(will become holy) 뿐만 아니라 간접명령(jussive), 즉 ‘거룩해야 한다’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거룩한 비품에 접촉한 것은 ‘거룩해지는가’, 아니면 ‘거룩해야’ 하는가?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과 학자들의 압도적인 의견은 ‘거룩해진다’인데, 그들은 이 해석과 더불어 구약에서 거룩의 감염력을 주장합니다. 비슷한 다른 사례들의 ‘이크다쉬’도 동일하게 해석합니다. 제단을 비롯하여 성막의 거룩한 비품들과 접촉하는 것마다 모두 거룩해집니다(출 29:37;30:26-29: 레 6:27). 즉, 구약에서 부정결만 감염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거룩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필자는 소수의 학자들(Levine)과 더불어 그 동사를 간접명령(jussive), 즉 ‘거룩해야 한다’(must be holy)로 해석합니다. 즉, 소제물에 접근하고 접촉하고, 또한 먹을 자격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사람이나 물건만이 그것에 합당합니다. 구약의 제의 체계에서 어떤 사물이나 사람이 제단을 비롯한 성막의 비품들에 단순히 접촉한다 해서 거룩해진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에 접촉하려면, 거룩한 사람과 거룩한 사물이어야 합니다. 제단 위에 올리는 것은 거룩한 것이어야 하고 성물과 접촉되는 사람/사물은 ‘거룩해야 한다.’ 학개 2:12-13은 거룩은 전염되지 않는다는 원칙을 확증합니다.

 

제사장 위임식의 소제(19-23)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져야 합니다. 삶에서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삼고, 그분께 진실한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에배는 우리의 헌신과 경외심을 표현하는 방법이며, 이러한 태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존중하고, 그분께 진정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신앙이 더욱 굳건해질 것입니다.

 

19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0아론과 그의 자손이 기름 부음을 받는 날에 여호와께 드릴 예물은 이러하니라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항상 드리는 소제물로 삼아 그 절반은 아침에, 절반은 저녁에 드리되 21그것을 기름으로 반죽하여 철판에 굽고 기름에 적셔 썰어서 소제로 여호와께 드려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라 22이 소제는 아론의 자손 중 기름 부음을 받고 그를 이어 제사장 된 자가 드릴 것이요 영원한 규례로 여호와께 온전히 불사를 것이니 23제사장의 모든 소제물은 온전히 불사르고 먹지 말지니라(19-23)

 

제사장 위임식에서(출 29장: 레 8장) 소제물이 드려져야 한다고 지시합니다. 위임식은 7일간 계속되었는데, 매일 아침저녁의 상번제인 숫양 두 마리와 밀가루 10분의 1에바로 소제물을 바쳤습니다(출 29:37-42). 그것은 21절에서 보듯이 기름으로 반죽하고 철판에 구운 다음 기름을 충분히 적신 뒤 썰어서 여호와께 남은 부분이 없이 전부를 바쳤습니다. 위임식 이후 이 매일의 소제는 상번제 및 전제와 더불어 매일 바치는 제사로 고정되었습니다(민 28:3-8).

2장에서 개인의 소제물에 붓는 기름의 양은 명시되지 않으나 제사장에 의한 매일의 공적인 소제에는 기름 4분의 1힌(약 800ml)이 밀가루에 사용되었습니다(출 29:40). 상당히 많은 양입니다. 제사장은 밀가루에 그 기름을 섞어 반죽을 한 뒤 철판에 구웠으며 다시 기름에 적신 후 썰어서 제단에 태웠습니다. 제사장은 그 소제의 음식을 먹을 수 없었으며, 모두 제단에 불살랐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우리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제사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헌신의 표현이며, 영적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서로를 돕고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를 통해 신앙이 성숙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질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지속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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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06-01)


레위기 5 14-6 8

레위기 5장 14절-6장 8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정직한 회개와 진정한 속죄의 의미를 깊이 묵상해보고, 우리의 삶 속에서 이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를 함께 생각해보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통해 그분의 뜻을 이루어가기를 원하십니다. 본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하고, 우리의 신앙 생활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 속건제의 히브리어는 ‘아샴’인데, 기본 의미는 ‘죄’와 그에 따른 ‘죄책’ 나아가 그것에 대한 구체적 책임이 강조된 ‘배상’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가 제의 법안에서는 제사 용어로 특화되어 ‘속건제’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대다수 영어 성경은 여전히 전통적 번역인 ‘속건제’(guilt offering)를 유지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의미를 반영하여 ‘배상제’(reparation offering)를 선호합니다. 한글개역(개정)의 ‘속건제’에서 ‘건(愆)’은 허물 건(愆)입니다.

 

여호와의 성물에 대한 범죄와 속건제 규정(14-16)

하나님께 봉헌된 물건은 성물입니다. 성도가 부지중에 성물이나 계명을 어겼다면 회개하고 물어내야 합니다. 부지중이라도 성물이나 계명을 어기는 것은 죄입니다. 성도는 교회의 재정과 물건을 귀히 여기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해 죄를 범한 경우 속건제를 드렸습니다.

 

1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5누구든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부지중에 범죄하였으면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네가 지정한 가치를 따라 성소의 세겔로 몇 세겔 은에 상당한 흠 없는 숫양을 양 떼 중에서 끌어다가 속건제로 드려서 16성물에 대한 잘못을 보상하되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건제의 숫양으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14-19)

 

여호와의 성물에 대한 부지중의(비쉐가가) 범죄는 히브리어로 ‘마일’로 불립니다. 이것은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한 죄’(레 6:2), 곧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위반’을 의미합니다. 예외적으로 민수기 5:27은 아내가 부정을 저질러 남편의 신뢰를 깨트리는 사례지만, 이것 역시 하나님 앞에서의 결혼 서약 파기라는 점에서 넓게 보면 ‘믿음의 위반’의 범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5:14-6:7의 속건제 규정에 나오는 이 ‘마일’ 죄의 목록들은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뉩니다: (1) 성물을 훼손하는 죄; (2)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서약의 위반. 이 마알의 죄는 속건제가 요구됩니다.

우선 성물을 침해한 죄는 속건제를 바쳐야 합니다(5:14-16). 그러나 이 성물은 어떤 것을 말합니까? 성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성소의 시설물과 비품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소에 바쳐진 봉헌물들(고르반)입니다. 우선 성소에 안치된 물건들은 모두 매우 중대한 성물들입니다. 만일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만지면 무서운 징벌이 내려집니다. 예를 들어, 웃시야가 멋대로 제사장 구역인 내성소에 들어가 향을 피운 마알의 범죄에 대해 즉각 나병의 징벌이 내려졌습니다(대하 26:16-18). 따라서 이 성물의 침해는 다른 종류의 것인데 랍비들은 그것을 사소한 성물(minor sancta)이라 불렀습니다. 그것은 성소에 바쳐진 봉헌물들입니다: 십일조나 첫 수확물, 그리고 각종 서원의 제물 등.

예를 들어, 만일 누군가가 부지중에, 즉 실수로(그릇) 십일조의 봉헌을 하지 않았다가 그것을 깨닫게 되면 그는 벌금과 더불어 속건제를 바쳐야 합니다. 벌금은 원금에 5분의 1, 즉 20%를 더하여 내야 합니다. 이어서 그는 하나님께 ‘참으로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레 5:19) 속건제의 숫양을 바쳐야 합니다. 이 숫양은 성소의 세겔로 정해진 값에 맞는 것이어야 합니다. 1세겔은 약 11-12그램 정도인데, 고대에 이 값이 어느 정도 가치인지 가늠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제사장이 정했을 것으로 추론되는 이 표준적 숫양의 값이 정확히 몇 세겔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마 짐승의 값은 언제나 유동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암시되는 것은 만일 어떤 사람이 ‘고의로’ 십일조를 비롯한 성물을 빼돌린다면, 속건제로 해결될 수 없는 중범죄로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징벌이 가해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수를 한다면 아마 원금에 20%를 더한 벌금과 속건제의 숫양을 바침으로써 용서를 받았을 것입니다. 속건제에서는 계급이나 신분에 따른 제물의 차등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벌금은 모든 이에게 동일하게 원금의 20%였으며 희생 짐승은 숫양이었습니다. 성물의 피해를 배상하고 속건제 숫양을 바침으로써 그를 위해 속죄가 이루어지고 그는 죄사함을 받습니다.

 

여호와의 계명을 어긴 범죄와 속건제 규정(17-19)

하나님께 대한 책임은 신앙 생활의 핵심입니다. 신앙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그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웃에게 정직하게 대하는 것은 공동체의 신뢰를 쌓는 데 필수적입니다. 우리가 저지른 죄를 인정하는 것은 회개의 첫걸음이 됩니다. 진정한 회개는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와 행동의 개선을 동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를 항상 용서해 주십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17만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여도 허물이라 벌을 당할 것이니 18그는 네가 지정한 가치대로 양 떼 중 흠 없는 숫양을 속건 제물로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가 부지중에 범죄한 허물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19이는 속건제니 그가 여호와 앞에 참으로 잘못을 저질렀음이니라(17-19)

 

이 조건절 문장은 4장의 속죄제에서 나타나는 금지 명령 위반에 대한 문장과 동일합니다. 따라서 왜 여기서는 속건제가 요구되는지 혼동을 일으킵니다. 학자들은 현재의 문맥에서 ‘여호와의 계명을 어긴 범죄’는 단순한 도덕적 금지 명령이 아닌 성물의 침해와 관련된 죄를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원금의 20%를 더하여 배상하라는 요구가 없습니다. 이 상황은 다음과 같이 이해됩니다. 그 사람은 무의식중에 성소의 어떤 비품을 손상시키거나 오염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성물을 침해했는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따라서 배상금 요구는 뒤따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속건제의 숫양을 드림으로써 성소를 침해했을지도 모를 자신의 죄로부터 홀가분해집니다. 19절은 이러한 배상이 요구되는 잘못들은 명백히 여호와께 대한 범죄라고 분명하게 진술합니다.

 

이웃의 재산에 대한 범죄와 속건제 규정(6:1-6)

성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신실한 성도는 이웃과 그 소유물에 대해 정직하고 성실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웃에게 죄를 범했을 때 속건제를 드렸습니다. 남의 물건을 착취하거나 변명하는 것은 죄입니다. 훔친 물건이나 주운 물건은 본래의 물건에 오분의 일을 더해 주인에게 돌려보내야 합니다.

 

6: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죄하되 곧 이웃이 맡긴 물건이나 전당물을 속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착취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3남의 잃은 물건을 줍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등 사람이 이 모든 일 중의 하나라도 행하여 범죄하면 4이는 죄를 범하였고 죄가 있는 자니 그 훔친 것이나 착취한 것이나 맡은 것이나 잃은 물건을 주운 것이나 5그 거짓 맹세한 모든 물건을 돌려보내되 곧 그 본래 물건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돌려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 6그는 또 그 속건 제물을 여호와께 가져갈지니 곧 네가 지정한 가치대로 양 떼 중 흠 없는 숫양을 속건 제물을 위하여 제사장에게로 끌고 갈 것이요 7제사장은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는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받으리라(1-7)

 

여호와 앞에서의 서약이나 맹세를 파기하면서 일으킨 타인의 재산 침해도 ‘마알’로 규정됩니다. 범죄자는 ‘여호와께 신실치 못하여 범죄하는데’(6:2). 이를테면 맡긴 물건이나 전당물을 속여서 탈취한 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사실을 부인합니다. 예컨대, 물건을 잃어버렸다거나(속임수), 자신이 물건을 맡은 적이 없다고 발뺌하고(도둑질), 나아가 이웃에게 모종의 압력을 가하여 강탈합니다(착취). 또한 물건을 주운 뒤 거짓으로 하나님께 맹세하여 시치미를 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거짓과 사기, 불의한 분실물 습득은 맹세가 수반되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칼을 든 강도 짓이 아니지만, 교묘한 합법적 수단으로 이웃으로부터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행위입니다. 예를 들어, 임금 착취나 임금 체불과 같은 범죄라 할 수 있습니다(예, 레 19:13). 범죄자는 그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주되 원금에 20%를 더하여 배상금을 물어줘야 합니다. 아마 죄가 드러나는 날, 즉 사건의 진상이 파악된 뒤 그런 배상절차가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이어서 범죄자는 성소에서 정한 값에 맞는 숫양을 성소에 가져가 속건제로 바쳐야 합니다.

이 재산상의 피해는 벌금이 불과 원금의 20%에 지나지 않으며, 추가로 숫양 한 마리를 성소에 바칠 뿐입니다. 여기서 우선 여호와의 재산에 피해를 입힌 잘못은 ‘부지중에 저지른 범죄’로 규정됩니다(레 5:15). 그러나 레위기 6:1-7에서 이웃의 재산에 피해를 입히는 행위는 명백히 고의적입니다. 즉, 그것은 ‘속임수’, ‘도둑질’, ‘거짓말’ 등을 통해 남의 재산을 집어삼키는 악랄한 범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금은 미미한 수준인 원금의 20%입니다. 대조적으로 출애굽기에서는 양이나 소를 도둑질한 것에 대한 벌금은 네 배 혹은 다섯 배입니다(출 22:1). 즉, 양을 한 마리 훔치면, 네 마리를 갚아야 하고, 소를 훔치면 다섯 마리를 갚아야 합니다.

출애굽기와 레위기의 법이 충돌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레위기 6:1-7의 사례들은 남의 재산을 속임수로 취득하거나 강탈한 뒤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수를 한 상황이 틀림없습니다. 속건제는 ‘참회’와 ‘죄책감’을 동반하는 제사이기 때문에, 분명히 그 범죄자는 나중에 심경에 변화가 생겨 잘못을 인정하고 물건을 원주인에게 돌려줬을 것입니다. 이때 주인에게 원금의 20%의 벌금을 내고 여호와께도 범죄했기 때문에 속건제 숫양을 바칩니다. 한편, 속건제의 경미한 벌금에 대해 어떤 사람은 회개를 권장하여 힘없는 사회적 약자였을 피해자의 재산을 되찾아주려는 의도와 취지가법에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즉, 속건제 규정은 자수를 유도하기 위한 징벌 감면책이기도 합니다.

한편, 속건제는 피를 뿌리는 방식을 볼 때 속죄제가 처리하는 죄와 달리 성소를 더럽히지는 않은 죄로 추론됩니다. 속건제의 피는 번제와 화목제의 피와 동일한 방식으로 제단에 끼얹습니다(자라크). 그러나 속죄제는 뒤에 자세히 살피겠지만, 제단과 성소 내부를 씻어내는 특유의 동작으로 피를 제단에 처리합니다. 따라서 속건제의 경우 피로 제단을 닦아내는 일이 없이 단지 오분의 일을 더한 배상과 숫양을 바침으로써 해결되는 죄로 추론됩니다. 마지막으로 속건제의 남은 고기는 먹는 속죄제의 고기와 같이 집례하는 제사장이 먹어야 합니다.

구약에는 다양한 속건제의 사례들이 나타납니다. 속건제의 숫양은 현재와 같이 어떤 성물이나 재산상의 피해를 입혔을 때에만 드리는 제물이 아니었습니다. 악성 피부병(나병)이 완치된 사람이 진영에 복귀할 때 속건제의 숫양을 드렸고(레 14장), 나실인이 서약 기간에 사체와 접촉해서 더럽혀지면 재서약을 위해 두 마리의 새를 번제와 속죄제로 바치고 이어서 속건제의 숫양을 바쳤습니다(민 6:7-21).

한편, 속건제는 숫양의 형식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숫양이 아니어도 피해에 대한 어떤 물적인 배상을 ‘아샴’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예, 삼상 6장). 매우 흥미롭게도 이사야 53:10에서 의로운 종의 죽음이 속건 제물로 간주됩니다. 이 종의 죽음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대신 지불하는 배상(아샴)의 희생입니다. 따라서 이 죽음의 성격은 명백히 배상으로 드려지는 속죄제 희생의 죽음입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예수님의 죽음을 속건제 자체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있게 유지하고 이웃과의 정직한 관계를 통해 우리는 신앙생활의 본질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와 용서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공동체 내에서 신뢰와 사랑을 증진시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대한 책임을 다하며 성숙해가는 과정은 우리에게 지속적인 성장과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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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05-01)


부정한 것에 대한 속건제

레위기 5장 1-13절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했으나 지키지 못한 경우, 속죄를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속죄제를 드리는 이유는 택함 받은 백성의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알지 못하는 중에 죄를 범했더라도, 그 잘못을 깨닫는다면 자복하고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정직한 양심과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더 나아가 공동체 내에서의 신뢰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 속죄제는 기본적으로 금지명령을 무심코 어긴 비고의적인 범죄를 용서하기 위한 제사입니다. 금지명령을 고의로 어기는 죄는 일종의 심각한 반역 행위로 원칙상 속죄제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법규의 고의성이 있는 위반은 고의적인 금지 명령의 위반만큼 심각하지는 않으며, 회개와 자복의 절차로 속죄제를 바쳐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다.

 

속죄제가 요구되는 추가 사례들(1-6)

죄를 알면서도 침묵하거나 숨기면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이 용서받는 첫걸음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죄를 인정하고 바른 행동을 취할 때 비로소 회복과 용서를 받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신앙 생활에서 정직과 책임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웁니다.

 

1만일 누구든지 저주하는 소리를 듣고서도 증인이 되어 그가 본 것이나 알고 있는 것을 알리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의 죄를 져야 할 것이요 그 허물이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며 2만일 누구든지 부정한 것들 곧 부정한 들짐승의 사체나 부정한 가축의 사체나 부정한 곤충의 사체를 만졌으면 부지중이라고 할지라도 그 몸이 더러워져서 허물이 있을 것이요 3만일 부지중에 어떤 사람의 부정에 닿았는데 그 사람의 부정이 어떠한 부정이든지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허물이 있을 것이요 4만일 누구든지 입술로 맹세하여 악한 일이든지 선한 일이든지 하리라고 함부로 말하면 그 사람이 함부로 말하여 맹세한 것이 무엇이든지 그가 깨닫지 못하다가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는 그중 하나에 그에게 허물이 있을 것이니 5이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때에는 아무 일에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 6그 잘못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속죄제를 드리되 양 떼의 암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의 허물을 위하여 속죄할지니라(1-6)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거룩한 삶이어야 합니다. 속죄제를 드리는 경우는 다음과 같습니다. 증인의 자리에서 자신이 보고 들은 것에 대해 진실을 말하지 않았을 때입니다. 부정한 짐승이나 가축의 시체를 만진 경우 또 부정한 사람과 닿은 경우에도 속죄해야 합니다. 설사 부지중이라 해도 부정한 것들로 인해 몸이 더럽혀졌기 때문입니다.

 

(1) 네 가지 사례들(1-4)

 

속죄제가 요구되는 네 가지 구체적인 범죄 사례들이 제시됩니다. 이것들은 어느 정도 고의성이 있는 죄들입니다. 첫 번째는 ‘저주하는 소리를 들은 증인이지만 그것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는 경우입니다. ’저주하는 소리’, 즉 ‘콜 알라’는 기본 의미가 ‘맹세/서약의 소리’인데, 맹세나 서약의 위반 시 자동적으로 저주가 동반되기 때문에 ‘저주의 소리’로 번역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맹세의 소리’ 혹은 ‘저주의 소리’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선 이것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저주하는 행위와 관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그런 저주나 맹세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4절에서 보듯이 그런 저주나 맹세가 홧김에 혹은 경솔하게 만들어질 때는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양합니다. 한 가지 견해에 의하면, 이것은 물적인 피해를 입은 당사자가 범인을 앞에 두고 맹세와 저주를 선언했는데, 그것을 목격한 증인이 누가 범인인지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가 어떤 사람의 저주하는 소리를 들은 증인이지만 침묵하고 있다면 그것은 범죄 행위입니다.

다른 견해에 따르면, 이것은 ‘맹세의 부름’, 즉 법정에 출두해 ‘맹세하라는 소환 명령’으로 해석됩니다. 이때 ‘콜’은 누군가를 불러내는 명령입니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은 법정에 나와 맹세를 하라는 명령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그는 그런 소환 명령을 듣고서도 증인으로서 어떠한 증언도 거부하고 입을 다뭅니다. 그가 심약하거나 겁이 많아 법정 출두를 거부한 상황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범죄 행위로서 그는 허물(죄책)을 입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그 ‘맹세/서약’의 거부로 인한 저주가 그에게 수반됩니다. 만일 나중에 그가 잘못을 깨달아 자복한다면 속죄제를 드리고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2-3절은 부정한 것과의 접촉입니다. 한글개역(개정)이나 어떤 영어 성경(NTV)은 단순히 무심코 부정한 것을 만지는 상황으로 읽힙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간단치가 않습니다. 우선 히브리어 ‘네을람’ ‘부지중’보다는 ‘감추어졌다’(be hidden)가 더 나은 번역입니다. 여기서 ‘감추어졌다’가 일이 발생된 후 망각한 것을 지시하는지, 아니면 일이 발생될 때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지시하는지 애매합니다. 만일 후자라면, ‘비쉐가가’와 비슷한 의미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네을람’은 한글개역(개정)처럼 알지 못한 상태에서 부정한 것과 접촉한 상황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무심코 죽은 가축의 사체를 만지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 상황은 본인이 의식하고 있는 가운데 부정한 것과 접촉한 후 그 일이 ‘잊힌’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RSV: ESV: Hartley와 Milgrom). 2절은 그 사례를 설명합니다. 송장이나 짐승 사체를 치우는 일은 피할 수 없는 부정 결과의 접촉 상황입니다. 따라서 3절의 부정한 사람과의 접촉도 동일한 상황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월경한 여자가 앉은 자리에 피치 못하게 접촉하는 경우입니다(레 15:25-27). 이것은 당일에 정결 절차를 통해 깨끗케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그 규정을 무시함으로써 날짜가 지나 결국 그 사실을 망각합니다(Dillmann). 따라서 이 망각은 고의성이 배제되지 않으며, 그는 그것에 대한 허물(죄책)을 지닙니다(2-3). 나중에 그는 그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때 그 죄를 뉘우치고 자복한 뒤 속죄제를 바쳐야 합니다.

4절은 성급하고 경솔한 맹세로 인한 잘못을 가리킵니다. 역시 고의성이 있다. 맹세는 악의가 없었다 해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즉흥적으로 자신이 지키지 못할 맹세를 한다면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서약을 준행하지 못한다면 그는 여호와에 대한 약속을 위반하게 되며 또한 이웃과의 관계를 어긋나게 할 것입니다(참조. 신 23:22-23). 자신의 충동적인 맹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면 즉각 하나님과 공동체 앞에 그 죄를 자복해야 합니다.

1-4절의 사례들에서는 레위기 4장과 달리 모두 ‘자복’의 요구가 명확히 진술되고 있는데(5), 4장에서는 그런 요구가 없었습니다. 밀그롬은 4장의 무의식중에 금지 명령을 어긴 죄와 달리 이것이 다분히 고의성이 있는 죄이기 때문에 자복이 요구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1-4절의 고의성은 어쩌면 심약하거나 성격의 문제로 인한 것일 수 있으며, 악의적이라 볼 수가 없습니다. 또한 이 죄들은 금지 명령의 위반보다는 훨씬 경미합니다. 필자의 견해로는 4장의 더 심각한 금지 명령 위반의 경우 속죄제를 위해 회개가 자동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에 5:1-5의 사례들에서 ‘자복’이 명시적으로 요구된 이유는 그 죄가 심각한 금지 명령 위반이 아니어서 회개와 자복의 과정을 소홀히 할 수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즉, 어떠한 죄도 회개와 자백은 필수적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1-4절은 어떤 경미한 고의적 범죄들에 대한 기준과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모본들로 볼 수 있습니다.

 

(2) 속죄제의 요구(5-6)

 

이러한 죄를 위해 바치는 표준적 속죄 제물은 암양과 암염소입니다. 물론 제물로 바친 양은 암수 상관없이 보통 1년생이었습니다. 이것은 앞서 4장에서 평민을 위한 속죄제였습니다. 따라서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족장과 제사장은 4장에 해당하는 짐승, 곧 족장은 숫양을 그리고 제사장은 수소를 바쳤을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가장 대중적인 평민의 속죄제만을 명시한 이유는 분명 이어지는 평민을 위한 완화된 양보안을 규정하기 위함입니다. 족장과 제사장에게는 그러한 약식 속죄제가 적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완화된 속죄제(7-13)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재물의 크기에 좌우되지 않음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아시며, 진심 어린 회개와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에게 언제나 용서의 길을 열어 두셨습니다. 이는 물질적 조건을 넘어서는 마음과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음을 상기시켜줍니다.

 

7만일 그의 힘이 어린 양을 바치는 데에 미치지 못하면 그가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여호와께로 가져가되 하나는 속죄 제물을 삼고 하나는 번제물을 삼아 8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죄 제물을 먼저 드리되 그 머리를 목에서 비틀어 끊고 몸은 아주 쪼개지 말며 9그 속죄 제물의 피를 제단 곁에 뿌리고 그 남은 피는 제단 밑에 흘릴지니 이는 속죄제요 10그 다음 것은 규례대로 번제를 드릴지니 제사장이 그의 잘못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11만일 그의 손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에도 미치지 못하면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예물로 가져다가 속죄 제물로 드리되 이는 속죄제인즉 그 위에 기름을 붓지 말며 유향을 놓지 말고 12그것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기념물로 한 움큼을 가져다가 제단 위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속죄제라 13제사장이 그가 이 중에서 하나를 범하여 얻은 허물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그 나머지는 소제물같이 제사장에게 돌릴지니라(7-13)

 

죄를 지은 자가 속죄제를 드릴 때, 양을 바칠 형편이 안 되면 비둘기 두 마리를 대신 드릴 수 있다는 규례를 다룹니다. 한 마리는 속죄제로, 다른 한 마리는 번제로 드려지며, 이를 통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이가 속죄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심을 보여줍니다.

 

(1) 비둘기 속죄제(7-10)

 

양보안으로는 가난의 정도에 따라 비둘기(7-10) 또는 밀가루의 소제(11-12)가 제시됩니다. 가난한 사람은 비둘기 두 마리를 바칠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속죄 제물로 바치고 다른 하나는 번제물로 바치는데, 번제가 요구되는 이유는 속죄제 중 제단에서 태우는 내장과 기름 부위를 그것으로 대신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비둘기는 그것들이 너무 작아 태우지 않고 버리기 때문입니다. 먼저 속죄제의 비둘기를 잡아 피를 제단곁에 ‘뿌린다’(히자). 이어서 번제의 비둘기를 잡아 피를 제단 아래 ‘흘린다’(마짜). 네 발 짐승의 경우에는 사발에 남은 피를 제단 밑에 ‘쏟았는데’(샤파크) 새는 몸통에서 피가 약간 나오기 때문에 흘려서 처분합니다. 속죄 제물의 비둘기 피를 처리하는 동작이 ‘뿌리’인 것은 앞서 말한 대로 그것이 분명히 제단의 오염을 청소하기 위함인 것이 분명합니다. 비둘기를 잡는 방법은 1장의 번제를 참고하면 됩니다. 두 새의 몸통을 처리하는 방법은 언급되어 있지 않은데, 유대 전승은 번제물은 제단 위에서 태우고 속죄 제물은 제사장 몫으로 돌리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2) 밀가루 속죄제(11-13)

 

비둘기도 감당하기 어려운 극빈층은 밀가루 십분의 일 에바의 소제물을 속죄 제물로 대체할 수 있었습니다. 밀가루 속죄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드리기보다 자신의 죄를 위해 드리는 소제물이기 때문에, 기름과 향은 추가하지 않았습니다. 피가 없는 제물임에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재량으로 곡식에 피의 효과를 부여하시면서 극빈자들에게 속죄를 위한 마지막 방편을 허용하셨습니다. 이로써 모든 사람이 반드시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를 정직하게 고백하고 속죄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마음속 깊이 자리한 죄를 인정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완전한 속죄의 은혜를 받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죄를 정직하게 바라보며 회개와 속죄의 자세로 나아갑시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기다리시며, 회개를 통해 놀라운 은혜를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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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04-02)


족장과 평민을 위한 속죄제

레위기 4장 22-35절


 

우리는 부지중에 지은 죄를 인식하고 회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회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첫걸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 사랑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진정한 변화는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이를 위해 끊임없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더욱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 (대)제사장과 회중을 위한 수소의 속죄제에 뒤이어 족장과 평민을 위한 속죄제 규정이 계속된다. 몇 가지 차이점이 두드러진다. 먼저 족장과 평민의 낮은 지위를 반영하여 속죄제로 염소와 양이 요구된다. 더불어 피의 처리 장소는 향단이 아닌 마당의 번제단이다. 또한 7장에서 추가로 규정되는 내용이지만, 이 짐승들의 기름과 일부 내장을 제단에 태운 뒤, 남은 잔존물 중 살코기를 제사장이 먹는다는 점에서 소의 경우와 차이가 난다.

 

족장을 위한 속죄제(22-26)

공동체의 지도자들도 하나님 앞에 부지중에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만일 죄를 깨달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겸손한 자세로 회개해야 합니다. 어떤 지도자도 하나님 앞에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죄악을 깨달았을 때 회개하는 겸손한 믿음의 자세입니다.

 

22만일 족장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는데 23그가 범한 죄를 누가 그에게 깨우쳐 주면 그는 흠 없는 숫염소를 예물로 가져다가 24그 숫염소의 머리에 안수하고 여호와 앞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을지니 이는 속죄제라 25제사장은 그 속죄 제물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 번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는 번제단 밑에 쏟고 26그 모든 기름은 화목제 제물의 기름같이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22-26)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죄를 지었을 때의 속죄 제사에 대해 설명합니다. 지도자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흠 없는 수송아지를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제사를 통해 그 죄가 용서받고, 이스라엘 공동체와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1) 족장의 죄와 제물(22-23)

 

속죄제의 세 번째 등급은 족장을 위한 속죄제입니다. 족장의 히브리어 ‘나시’는 그 정체가 무엇이든 평민들의 지도자를 말합니다. 그들은 지도자 위치에 있기 때문에 평민보다 더 우월한 짐승인 숫염소를 속죄제로 바쳐야 했습니다. 여기서 속죄제를 등급별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레 4장: 5:7-13).

 

a. (대)제사장과 회중: 수소

b. 족장: 숫염소

c. 평민: 암염소 혹은 암양

d. 빈민: 두 마리 비둘기

e. 극빈: 밀가루

 

앞서 말한 대로,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을 굳이 대제사장으로 제한해서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일반 제사장의 사례가 첫 번째 범주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목록에는 레위인이 빠져있습니다. 아마도 레위인은 이스라엘의 장자를 대신하는 지위와 성전 봉사를 위해 특별히 구별되어 임명된 특징으로 보아, 제사장들과 백성들 사이에 놓인 신분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족장급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레위인을 위한 속죄제 또한 족장과 마찬가지로 숫염소였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2) 안수와 도살, 피 의례, 기름 사르기(24-26)

 

평민들은 염소와 양인데, 모두 암컷만이 가능합니다. 숫염소는 족장의 속죄 제물로 지정되어 있다면, 숫양이 빠져 있는 셈입니다. 숫양이 속죄제의 목록에 들지 못한 이유는 분명히 숫양이 속건제의 유일한 제물이었기 때문으로 추론됩니다. 따라서 속죄제와 속건제로 구성된 속죄를 위한 제사에서 모든 네 발 짐승들이 지위와 신분에 따라 암수별로 정확히 배치되어 있는 셈입니다. 여기서 번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수컷이 상위 가치를 지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족장과 평민의 속죄제물에서 그 차이가 두드러집니다. 그리고 염소가 양보다 더 우위였다는 것도 확인됩니다. 염소가 더 힘이 세고 양 떼 사이에 목동들이 풀어놓는 염소 몇 마리가 양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비둘기의 속죄제와 그보다 더 빈곤층인 극빈자들을 위한 밀가루의 속죄제에 대해서 5장에서 살펴볼 것입니다.

염소와 양의 속죄제 또한 드리는 방법은 동일합니다. 안수하고 도살한 뒤 피를 처리합니다.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이 짐승들을 도살합니다(24). 따라서 도살장소는 제단 북쪽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피를 처리하는 장소가 소의 속죄제 때와 달라지고, 그 방법도 약간 차이가 난다는 점입니다. 염소와 양의 피는 내성소에 가지고 들어가지 않고 마당의 놋제단에서 처리합니다. 피를 손가락에 묻혀 놋제단, 즉 번제단의 네 뿔에 바릅니다. 내성소에서와 달리 피를 손가락으로 일곱 차례 뿌리는 의례는 명령 되지 않고 있습니다. 남아 있는 피는 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단 밑에 쏟아서 처리합니다.

 

평민의 죄 사함(27-35)

제사장이나 지도자의 죄만 큰 것이 아닙니다. 일반 사람들의 죄도 간과되지 않으며, 하나님은 개인의 죄사함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가 죄를 범했을 때에는 즉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회개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세상을 살아가며 부지중에 많은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은 모르고 지은 죄도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7만일 평민의 한 사람이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는데 28그가 범한 죄를 누가 그에게 깨우쳐 주면 그는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와서 그 범한 죄로 말미암아 그것을 예물로 삼아 29그 속죄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 제물을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을 것이요 30제사장은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번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제단 밑에 쏟고 31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물의 기름을 떼어낸 것 같이 떼어내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롭게 할지니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32그가 만일 어린 양을 속죄제물로 가져오려거든 흠 없는 암컷을 끌어다가 33그 속죄제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속죄제물로 잡을 것이요 34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는 전부 제단 밑에 쏟고 35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 어린 양의 기름을 떼낸 것 같이 떼내어 제단 위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가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27-35)

 

본문에서는 일반 백성이 죄를 지었을 때의 속죄 제사 절차를 다룹니다. 그들은 흠 없는 암양을 제물로 드리고, 제사장이 그 제물을 하나님께 바쳐 죄를 속죄받습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죄가 용서받고, 공동체와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1) 평민의 죄를 위한 짐승(27-29)

 

평민을 위한 속죄제는 암염소와 암양입니다. 안수와 도살의 절차, 또한 제단 위에 태우는 부위는 족장을 위한 숫염소의 속죄제와 동일합니다. 더불어 방금 말한 바와 같이 평민을 위한 염소와 양의 속죄제의 피를 처리하는 장소 또한 마당의 번제단입니다. 피를 번제단의 네 뿔에 바른 뒤, 남은 피는 제단 아래 쏟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한 가지 인식해야 합니다. 왜 속죄제 짐승의 피를 내성소의 향단 주변에 뿌리거나 향단 뿔에 바르고, 또한 마당의 번제단 뿔에 바릅니까? 그것은 바로 그 기물들과 나아가 그것들이 놓인 공간을 청소하기 위함이 분명합니다. 속죄제 짐승의 피를 성막의 기물에 뿌리고 바르면, 그것이 정결케 된다는 것은 두 차례 확인됩니다: 레위기 8:15, 16:19.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제단이 더럽혀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제단이 오염되었습니까? 다름 아닌 인간의 죄와 부정결 때문입니다.

 

(2) 피 의례와 기름 사르기(30-31)

 

부정결의 경우는 차치하고서라도 죄로 인한 성소의 오염은 구약에서 증거됩니다. 레위기 20:2-3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또 이르라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든지 이스라엘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주면 반드시 죽이되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칠 것이요, 나도 그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그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이는 그가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주어서 내 성소를 더럽히고 내 성호를 욕되게 하였음이라.” 덧붙여 민수기 19:20 또한 성소 오염론의 근거가 됩니다: “사람이 부정하고도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회중 가운데에서 끊어질 것이니라 그는 정결하게 하는 물로 뿌림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부정하니라.” 사람이 송장을 만졌을 때, 즉각 붉은 암소를 태워 만든 재를 물에 섞은 ‘잿물’, 곧 ‘정결케 하는 물’을 뿌려 부정결을 씻어내야 합니다(민 19:1-9, 12; 31:13). 만일 그것을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고의적으로 절차를 무시하는 죄를 범한 셈입니다. 그 결과는 성소의 오염이며, 그 대가는 ‘제명’이라고 경고합니다.

어떤 학자는 몰렉 신에 대한 자녀 희생만을 죄로 인한 직접적인 원거리 성전 오염의 유일한 사례로 간주하면서 인간의 죄/부정결로 인한 성전의 원거리 오염을 거부합니다(Gane). 다른 사람들은 이 범죄에 준한 모든 가증한 죄악, 즉 반역죄(페사)를 같은 범주에 넣어 그것들만이 성전의 오염을 일으킬 뿐 비고의적인 죄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밀그롬은 여타의 죄, 즉 비고의적인 죄까지 오염원의 범주에 포함 시킵니다. 몇 가지 근거 위에서 성소 오염의 일반화가 타당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제단 오염 이론은 오래전부터 랍비들과 여러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어 왔는데, 이것을 체계화한 사람이 밀그롬입니다.

밀그롬에 의하면, 인간의 죄는 죄인의 신분과 그 죄의 정도에 따라 성소를 오염시키는 장소가 달라집니다. 다름 아닌 죄의 오염력의 차이인 것입니다. 우선 족장과 평민과 같은 일반 이스라엘 백성의 비고의적인 죄는 파괴력이 작고 성소에 침투하는 죄의 독기(miasma)가 약한 편입니다. 따라서 그런 죄는 번제단을 더럽힙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한 평민 개인을 위한 속죄제의 염소와 양의 피는 제사장이 손가락에 묻혀 번제단 뿔에 바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제단의 오염이 속죄제 짐승의 피로 청소됩니다.

 

(3) 평민의 죄를 위한 짐승(32-35)

 

(대)제사장과 회중의 비고의적인 죄는 힘이 훨씬 강력해서 그 독기가 내성소까지 파고들어 향단을 더럽힙니다. 이 경우 (대)제사장이 속죄제 짐승인 소의 피를 내성소에 가지고 들어가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그는 향단과 그 주변을 정결케 하기 위해 지성소 휘장 앞에서 그 피를 손가락으로 일곱 차례 뿌리고, 향단의 네 뿔에 바릅니다. 가장 심각한 오염을 일으키는 죄는 반역죄입니다. 이 죄는 개인이 범하든 집단이 범하든 지성소를 더럽힙니다. 이 죄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레위기 14:21-32을 설명하면서 다루기로 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부지중에 범한 죄를 인식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마음의 변화를 동반하며,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또한, 우리는 공동체의 죄를 함께 고민하고 기도하며 서로를 지지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매일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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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04-01)


속죄제, 제사장과 일반 회중

레위기 4장 1-21절


 

예배와 죄는 서로 멋 듯하면서도 참 가까운 사이입니다. 죄와는 상관없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한 예이지만, 또한 죄인들이 드리는 예배입니다. 죄인들이 예수 십자가의 공로로 나오는 자리가 예배입니다. 죄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 4장은 속죄제의 규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금지 명령을 부주의하게 어겼을 때, ‘죄’는 사람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므로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제사법 가운데 속죄제를 통하여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범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제사장의 속죄(1-12)

죄는 그냥 덮어둘 대상이 아니라 반드시 씻고 속죄해야 할 오물입니다. 반드시 처리해야 합니다. 세월이 흐르면 잊혀지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저절로 사라지거나 그냥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반드시 속죄가 필요합니다. 성도는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3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 그가 범한 죄로 말미암아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 4그 수송아지를 회막 문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그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5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 6그 제사장이 손가락에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곧 성소의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7제사장은 또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들에 바르고 그 송아지의 피 전부를 회막 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8또 그 속죄제물이 된 수송아지의 모든 기름을 떼어낼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9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내되 10화목제 제물의 소에게서 떼어냄 같이 할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번제단 위에서 불사를 것이며 11그 수송아지의 가죽과 그 모든 고기와 그것의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과 12똥 곧 그 송아지의 전체를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인 정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불로 나무 위에서 사르되 곧 재 버리는 곳에서 불사를지니라(1-12)

 

하나님의 명령은 ‘수행 명령’(performative commandments)인 ‘~하라’와 ‘금지 명령’(prohibitive commandments)인 ‘~하지 말라’로 두 가지로 나눕니다. 금지 명령을 어겼을 때는 수행 명령을 어겼을 때보다 심각하게 다루었습니다. 고의로 금지 명령을 어기면 그 행위를 반역죄로 다루었습니다. 레위기 4:1-5:13까지 속죄제를 다룹니다. 우선 속죄제를 드리는 주체가 누구인지에 따라 그 제물을 달리하여 구분합니다. 제사장(수송아지, 3-12), 회중(수송아지, 13-21), 족장(숫염소, 22-26), 평민(암염소, 27-31; 어린 암양, 32-35).

 

(1) 제사장의 죄와 제물(1-3)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상황이 1-2절에 진술됩니다. 그럼 누가 속죄제를 드립니까?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한 사람’입니다(2). 그릇 범했다는 것은 ‘실수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새번역)입니다. 금지된 여호와의 계명을 비고의적으로 무심코 어기는 경우입니다. 단 하나라도 범죄해도 속죄제를 바쳐야 합니다. ‘그릇’(비쉐가가)이라는 단어가 속죄제를 이해할 때 핵심이 됩니다. 여호와의 계명을 알지만, 고의성 없이 계명을 어긴 경우를 의미합니다. 의도적으로 저지른 잘못은 속죄제 대상이 아닙니다. 이 경우에 이스라엘이든 외국인이든 백성 중에서 무조건 끊어집니다(민 15:30).

 

(2) 소의 안수와 도살 및 피 의례(4-7)

 

누구를 위한 속죄제인지에 따라 피를 처리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대제사장과 회중 전체를 위한 속죄제에서는 성소로 가져가 성소 휘장에 뿌리고 향단에 바릅니다. 반면에 성소 뜰에 있는 번제단 뿔에 피를 바르는 속죄제는 족장과 백성을 위한 속죄제입니다. 또한 남은 고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도 제사의 주체에 따라 달라집니다. 대제사장과 회중 전체를 위한 속죄제에서는 제물의 기름 부위를 떼어 번제단에서 태운 후에 남은 고기는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에서 모두 불사릅니다. 그러나 족장과 백성을 위한 속죄제에서는 제물의 기름은 번제단에서 태우고, 남은 고기는 제사장의 몫으로 돌아갔습니다.

 

대제사장의 범죄는 백성들에게 직접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심각하게 처리합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범죄가 “백성의 허물(아샴)”이 된다고 합니다. 대제사장의 범죄로 백성들이 의도하지 않게 범죄하게 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대제사장은 어떤 경로를 통해 그 죄를 깨닫게 되었다면(13),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려야 합니다(3). 대제사장이 비록 실수로 죄를 지었더라도 그 영향력이 공동체 전체에 미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제사장의 책임과 의무가 막중하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피의 처리에 대해 더 자세히 보면, 대제사장들의 속죄제를 홀로 집행하는 대제사장은 수소를 잡은 뒤 그 피를 사발에 받아 회막 안으로 들고 들어갑니다. 그 피는 손가락에 묻혀 휘장 앞에 일곱 차례 뿌리고(히자개) 향단의 네 뿔에 바릅니다. 두 가지 피의 의례는 향단과 그 주변을 청소하기 위함입니다. 피로 청소하는 대상은 향단이고, 목표로 하는 공간은 내성소입니다. 손가락으로 제단 뿔에 피를 바르고 손가락으로 제단 주위에 일곱 차례 흩뿌리는 것을 통해 제단과 그 주변을 정화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남은 피는 제단 밑에 쏟습니다(7, 18).

정리하면, 속죄제에서 피는 세 가지 방식으로 처리합니다. 제단 부근에 손가락으로 흩뿌리고 제단의 네 뿔에 손가락으로 바르고 남은 피를 제단 밑에 쏟습니다. 내장을 덮거나 내장에 붙어 있는 기름을 콩팥과 함께 떼어내는 작업과 번제단에서 불사르는 과정은 화목제와 동일하지만, 수송아지 가죽과 고기와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과 똥을 포함한 전체를 재 버리는 곳에서 불사르는 규정은 속죄제에서 추가되고 있습니다. 아론이 처음 대제사장으로 위임될 때 자신과 회중 전체를 위한 속죄제에서 피를 성소로 갖고 들어가지 않는데(9:8-11), 이는 전에 성소에 들어간 적이 없어서 오염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온 회중의 속죄제(13-21)

우리는 종종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할 때 귀 기울여 주십니다. 우리가 무지로 죄를 범하였을 때, 그것이 어떤 것인지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무지로 인해 죄를 범했을 때의 상황을 다룹니다.

 

13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14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그것을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 15회중의 장로들이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16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 17그 제사장이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18또 그 피로 회막 안 여호와 앞에 있는 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 전부는 회막 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19그것의 기름은 다 떼어 제단 위에서 불사르되 20그 송아지를 속죄제의 수송아지에게 한 것같이 할지며 제사장이 그것으로 회중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받으리라 21그는 그 수송아지를 진영 밖으로 가져다가 첫 번 수송아지를 사름같이 불사를지니 이는 회중의 속죄제니라(13-21)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무지로 죄를 범했을 때, 회중이 제물을 드려 하나님께 속죄하는 방법을 설명합니다. 죄를 인식한 후, 제사장이 수송아지를 가져와 그 피를 성소에 뿌리고, 제물의 몸은 진영 밖에서 태워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도모하게 됩니다.

 

(1) 회중의 죄와 제물(13-14)

 

여기서는 이스라엘 온 회중의 속죄제를 다룹니다. 회중을 위한 속죄제 제물로는 대제사장처럼 흠 없는 수송아지를 요구하십니다(14). 회중(에다)이 금지 명령을 어겨 죄를 지을 때도 대제사장의 사례와 동일한 기준이 적용됩니다. 다만 대제사장의 사례에서 언급되지 않은 한 가지가 나오는데, 그것은 회중이 죄를 지은 뒤 알지 못하다가 나중에 어떤 계기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경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13-14).

 

(2) 소의 안수와 도살 및 피 의례(16-18)

 

제사자는 제물의 짐승을 회막으로 끌고 와서 머리에 안수하고 잡습니다. 대제사장이 그 피를 받아서 성소로 들어가 성소 휘장 앞에서 일곱 번 그 피를 뿌리고, 성소 안 향단 뿔들에 피를 바르며, 남은 것은 성서 뜰에 있는 번제단에 쏟습니다. 이는 대제사장의 경우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하지만 뒤에 나오는 족장과 평민이 부지중에 범한 죄를 속죄할 때는 다릅니다. 제사장은 그 피를 손가락에 찍어 성소 뜰의 번제단 뿔에 바르고, 남은 것은 번제단 아래 쏟습니다. 피를 바르는 위치가 다른 것은 오염의 범위와 위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절차를 진행하는 사람은 그 공동체에서 법적인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고, 권위를 인정받는 장로들입니다(16).

 

(3) 소의 기름과 일부 내장 사르기 및 잔존물 소각(19-21)

 

회중의 경우 제사장의 경우와 달리 “제사장이 그것으로 회중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받으리라”라는 문장이 덧붙여져 있습니다(20). ‘속죄’의 주제와 관련된 히브리어 동사는 ‘카파르’와 ‘살라흐’입니다. ‘덮다’라는 본래 의미를 갖는 ‘카파르’는 ‘제거하다’ 혹은 ‘용서하다’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덮어주시거나 멀리 옮겨버리거나 제거하시는 일이 곧 속죄와 용서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문장의 ‘살라흐’는 ‘용서하다’와 ‘속죄하다’의 뜻을 가지며, 죄의 문제에 대한 해결은 사람 스스로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임을 전제로 하는 중요한 의미의 용어입니다. 20절의 속죄에 관한 규정과 설명은 기름부음 받은 제사장이 속죄제의 절차를 여호와의 율법의 규례대로 행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 절차를 통하여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이루어 짐으로 사람의 죄 문제가 해결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한글개역(개정)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으나 “(회중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의 히브리어 원문은 ‘회중의 눈에서 그 일이 숨겨질 때’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회중으로 번역된 두 히브리어 ‘에다’와 ‘카할’이 등장합니다. ‘에다’와 ‘카할’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4절은 이스라엘 온 회중이 함께 공동체 차원의 잘못을 죄로 인식하는 과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건전하고 바른 관계 회복을 위한 공동체 전체의 인식과 합의, 공동체 의식과 함께 율법에 내한 공통의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은 율법에 대한 인식과 그 율법에서 규정하는 죄의 문제를 함께 이해하고 깨달아갈 때 형성됩니다. 이스라엘 회중의 대표인 장로들이 제사장과 함께 공동체를 위한 속죄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용서를 공동체가 함께 경험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정체성이 강화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죄 사함이 일어납니까? 죄를 깨닫고 인정했을 때입니까, 제물을 드릴 때입니까? 여러 학자들은 제사장이 속죄제 고기를 먹는 행동을 통해 죄가 없어진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제사는 거룩하기에 반드시 여호와 앞에서 제물을 잡아야 한다는 규정을 볼 때, 죄로 인해 부정한 사람이 제사를 드려 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부지중에 지은 죄를 깨닫고 속죄제를 드리려고 할 때,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자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여기 ‘사함을 받으리라’(21)라는 표현은 하나님께 이미 받은 용서를 속죄제를 통해 공식화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즉, 속죄제는 이미 이루어진 회복에 대한 공식 절차이며 또한 확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제사가 사함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속죄의 중요성과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중보의 역할, 그리고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깊이 다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아시며, 그것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또한 속죄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속죄 제사를 통해 죄 사함을 주셨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는 완전한 구원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 앞에서 그 은혜를 기억하며 회개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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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03-01)


화목제, 하나님과의 평화

레위기 3장 1-17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한 제물을 요구하십니다.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하며, 이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삶이 온전해야 함을 나타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질 때, 그분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제사는 우리의 신앙을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할 수 있습니다.

 

화목제의 히브리어는 ‘쉘라밈’입니다. 화목제는 희생의 화목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흠 없는 소와 양의 수컷이나 암컷, 또는 염소를 끌어다가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예식에 맞게 불살라 화제로 드립니다. 하나님은 모든 기름은 그분의 것이며,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소의 화목제(1-5)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평화로운 관계를 상징합니다. 소의 화목제를 드릴 때, 제사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화목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확신을 얻게 됩니다.

 

1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제물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면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2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문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3그는 또 그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4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 낼 것이요 5론의 자손은 그것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의 번제물 위에서 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1-5)

 

소의 화목제를 드리는 방법을 설명합니다. 제물은 흠이 없고, 제사를 드릴 때 제사장은 그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며 나머지는 제사장과 가족이 나누어 먹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를 이루고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1) 소의 안수와 도살 및 피 의례(1-2)

 

화목제로 소, 양, 그리고 염소를 바치되 번제와 달리 암수 구분 없이 바칠 수 있었습니다. 번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사자는 화목제 짐승의 머리 위에 안수를 해야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안수의 기능을 최근 ‘소유권의 확인’으로 주장하는 견해가 수용되는 추세입니다. 여러 제사자들 틈에서 자칫 뒤섞일 수 있는 짐승을 제사장 앞에서 자신의 것으로 확인해주는 작업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 강력한 근거는 비둘기의 경우 두 손에 감싸들고 오기 때문에 소유권 확인 절차가 불필요해 안수가 생략된다는 것입니다. 이 견해는 여러 가지 반론이 가능한데 결정적인 허점을 짚는다면, 소유권 확인이 불필요한 백성 전체를 위한 짐승의 제사도 안수를 한다는 것과(레 4:14-15), 안수에 앞서 제사장이 분명 짐승을 먼저 검사했을 것이므로 소유권은 안수 전에 확정되었을 개연성이 높다는 사실입니다. 안수의 ‘대체’ 기능은 레위기와 민수기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8:5-22에서 레위인들이 임직될 때 그들은 백성의 장남들을 대신해서 성소에 ‘요제’로 바쳐집니다. 이때 레위인들의 머리 위에 장로들이 백성들을 대표해서 안수하는데, 그 순간 레위인들은 백성의 장남들을 ‘대신하여’ 성소에 봉헌됩니다(민 8:16). 또한 레위기 1:4의 논리적 순서에 의하면, 짐승에 안수를 한 후 그 제물이 제사자를 위해 기쁘게 받아들여지는 제물이 된다는 점에서 안수는 제사자와 짐승을 ‘동일시’하거나 제사자를 ‘대체’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모든 제사에서 안수의 기능은 ‘대체’가 공통분모입니다. 다만 나중에 우리는 죄를 위한 제사인 속죄제/속건제에서 안수는 추가적으로 ‘죄의 전가’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2) 소의 기름과 일부 내장 사르기(3-5)

 

소를 잡는 장소는 ‘회막 문’, 즉 ‘회막 입구’로 지정되는데, 동서남북 어느 쪽인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번제에서는 ‘회막문에서’(레 1:3), 혹은 ‘여호와 앞에서’(레 1:4)로 지시하는데, 둘은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번제에서도 소의 경우는 회막 입구에서 소를 잡으라는 명령 외에 정확한 지점이 지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번제의 양과 염소의 경우는 도살장소가 ‘북쪽’으로 구체적으로 지정됩니다. 아마도 소는 덩치가 커서 통제가 쉽지 않아 도살 장소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래 살피는 바와 같이 번제와 달리 화목제에서는 양과 염소를 잡는 곳이 북쪽으로 구체화되어 있지 않습니다(8).

 

번제에서도 양이 염소보다 먼저 등장하듯이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염소가 속죄제에서 사람의 신분을 대표할 때는 양보다 우위였으나, 제물 자체의 가치로는 양이 우위라는 것이 재차 확인됩니다. 암수의 구분이 불필요한 이유도 이것이 사람의 권위와 신분을 반영하는 제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짐승의 크기는 번제와 마찬가지로 그 사람의 신분과 재력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암수 구분이 없는 추가적 이유는 화목제가 고기를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제의적 잔치를 위한 제사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내장의 기름 부위와 간 꺼풀(간엽), 콩팥, 그리고 양의 경우 기름진 꼬리도 바쳤습니다.

콩팥이 드려지는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인간의 감정을 반영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필자의 소견으로는 단순히 짐승의 내장 기름을 제거하는 방식에 기인합니다. 콩팥은 기름 덩이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내장에 엉긴 기름 덩어리와 같이 도려내집니다. 한편 간 꺼풀로 번역된 ‘요테레트 카베드’는 오래도록 간의 어떤 부위인지 논란이 되어 왔으나, 우리는 이것을 ‘간’으로 해석하기로 합니다. 간엽이 제단에 태워진 이유에 대해 어떤 사람은 간을 꺼내 점을 쳤던 이방의 관행을 금지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고대인들이 빨간 장기인 간에서 피가 만들어진다고 믿었다는 점을 감안해볼 때, 바로 그것 때문에 제단에 바쳐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기름과 특정 내장을 제외한 나머지 고기(아마도 남은 내장들을 포함)는 일부 제사장 몫을 뗀 후 제사자가 가져가 이웃과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제사장의 몫은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이고(레 7:34), 나머지는 모두 제사자의 몫입니다(레 7:34).

 

양의 화목제(6-11)

양의 화목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한 헌신을 상징합니다. 이 제사는 흠 없는 양을 선택해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배와 삶이 온전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이 그분의 영광을 위해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6만일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는 화목제의 제물이 양이면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드릴지며 7만일 그의 예물로 드리는 것이 어린 양이면 그것을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8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앞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9그는 그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그 기름 곧 미골에서 벤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10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 낼 것이요 11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음식이니라(6-11)

 

양의 화목제를 드리는 규례를 설명합니다. 흠 없는 양을 선택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제사장은 그 피와 기름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1) 양의 안수와 도살 및 피 의례(6-8)

 

양과 염소의 화목제 또한 암수 구분 없이 드려집니다. 8절에서 화목제의 양과 염소의 도살 장소는 ‘회막 앞’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화목제뿐만 아니라 속죄제와 속건제의 경우에도 양과 염소의 중간 크기의 짐승은 번제에 준한 표준을 따라 북쪽에서 잡았을 것입니다. ‘북쪽’이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단순히 공간 활용의 이유로 북쪽이 지정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단 동쪽은 제단의 재를 긁어 모아두는 곳이고(16) 남쪽은 제단에 오르는 경사로가 있으며, 서쪽에는 물두멍이 놓여 있어 북쪽만이 공간이 남기 때문입니다.

 

(2) 양의 기름과 일부 내장 사르기(9-11)

 

양의 경우도 소와 동일하게 기름과 내장부위를 제단에 바칩니다. 특별히 양의 경우, 꼬리를 잘라 바치라는 명령이 추가됩니다. 그것을 ‘미골에서 벤 기름진 꼬리’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꼬리 역시 기름으로 간주된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양은 우기에 잘 먹어 양분을 꼬리에 축적해 놓고 건기를 견뎌내는 습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특징적으로 두툼하고 묵직한 기름진 꼬리를 지녔습니다. 현대의 팔레스타인 지역의 양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나, 요세푸스에 의하면, 어떤 양은 꼬리가 지나치게 거대하여 작은 수레를 달았습니다. 숫양의 꼬리가 거대했으며, 암양은 이에 반 정도 크기입니다. 어떤 숫양의 꼬리는 30센티미터에 이르는 폭에 12킬로그램이 넘는 무게인데도 뼈는 고작 70그램에 불과할 만큼 순기름 덩어리라 합니다. 이러한 양의 꼬리는 거대한 기름 부위로서 미골을 절단하여 제단에 바쳤습니다(3:9). 그러나 염소의 작은 꼬리나 소의 큰 꼬리는 기름이 아닌 고기 덩어리이므로 제단에 바치지 않았습니다(레 3:3-4, 14-15).

 

염소의 화목제(12-17)

염소의 화목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염소는 제물로서 흠이 없어야 하며,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삶이 온전해야 함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진심을 보시며, 우리의 예배가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이 그분의 뜻에 합당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12만일 그의 예물이 염소면 그것을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13그것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앞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14그는 그중에서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15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 낼 것이요 16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17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12-17)

 

염소의 화목제를 드리는 규례를 설명합니다. 흠 없는 염소를 선택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제사장은 그 피와 기름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공동체와의 나눔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1) 염소의 안수와 고살 및 피 의례(12-13)

 

마지막으로 화목제로 바치는 짐승은 염소입니다. 염소 또한 소나 양과 마찬가지로 기름과 내장의 일부를 제단에 태워 바칩니다. 염소에 대해 더 특별히 설명할 것은 없습니다. 마지막 단락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17절의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라고 요약적으로 반복된 경고입니다. 이러한 준수사항 강조는 그것이 화목제에서 가장 중요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피를 먹지 말라는 이유는 몇 차례 설명되었다. ‘피’는 곧 생명입니다. 피가 곧 생명이기 때문에 먹지 말라는 경고는 레위기 17:11에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2) 염소의 기름과 일부 내장 사르기(14-17)

 

기름을 먹지 말라고 한 이유는 어디에도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름이 가장 맛있는 부위였기 때문이라 설명하고 또 어떤 사람은 콜레스테롤 덩어리인 기름이 보건영양학적 관점에서 인체에 매우 해롭기 때문이라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단순히 기름이 잘 타 제물 소각을 원활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실용적 이유를 내세웁니다.

그러나 지방질이 적당히 섞인 고기가 맛있기는 하지만, 바쳐야 하는 지방 덩어리는 먹을 수 없는 부위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요리에 부적합했고, 또한 지방의 인체 유해성은 현대 의학적 관점의 판단에 의한 것이며, 게다가 약간 잘못된 정보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또한 건강에 해롭다는 것을 이유로 내거는 보건영양학적 설명은 ‘기름은 내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과 어울리지 않으며, 실용적 해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기름에 대한 소유권 주장은 기름이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필자는 일차적 이유로 제단에서 아주 잘 탈 뿐 아니라, 타면서 제물의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풍미적 특징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더불어 현대와 마찬가지로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기름이 부와 풍요의 상징이었으며, 또한 힘의 근원으로 간주 되었을 것입니다.


화목제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상징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림으로써 그분과의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또한, 화목제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받은 은혜를 서로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예배와 삶이 흠 없는 제물로 드려질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회복하고 온전한 삶을 살도록 결단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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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02-01)


소제, 하나님 앞에 사는 삶

레위기 2장 1-16절


 

삶 가운데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어떻게 하십니까? 어려움 때문에 좌절하고 그 일을 포기하기도 하십니까? 어려운 일을 만나면 그만두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 잘 해야 합니다. 레위기 제사법은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지만, 어렵기 때문에 포기한 것이 아니라 더 상고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야 합니다.

 

2장에는 소제가 나옵니다. 소제는 고운 가루를 예물로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살라 화제로 드려야 합니다. 소제물의 남은 것은 지극히 거룩합니다. 모든 곡식 제물에는 누룩이나 꿀을 넣지 말아야 하고, 소금을 꼭 넣어야 합니다.

 

고운 가루의 소제(1-3)

하나님께서는 예배의 장을 열어놓으시고 누구든지 언제든지 나와서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고운 가루처럼 완전히 부서져야 합니다. 이러한 신앙의 인격을 가져야 합니다. 고운 가루는 하나님 앞에서 가루가 되듯이 수고하며 순종하는 생활을 비유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1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2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그 모든 유향을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3그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1-3)

 

소제를 하나님께 드릴 대상은 ‘누구든지’라고 소개합니다. 즉,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나 하나님께 소제물을 드릴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소유한 물질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소제의 기본 재료는 곱게 빻은 밀가루이며, 여기에 기름과 유향 등이 가미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곱게 빻은 밀가루에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하나님께 우리도 철저히 빻아서 곱게 드려야 한다고 은혜롭게 적용합니다. 그러나 솔레트는 당시 일상의 보편적 음식 재료인 밀가루였습니다. 기름은 밀가루에 섞는 것이 아니라 위에 붓는데, 그 기름은 올리브 기름입니다. 기름은 제물의 품격을 높일 뿐 아니라 밀가루가 잘 타도록 도왔을 것입니다. 유향은 고대에 매우 비싼 품목이었는데, 향기로운 냄새를 내기 위해 밀가루 위에 놓았습니다. 밀가루는 아무래도 농사꾼들이 자주 드리는 감사의 제물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랍비들의 말대로 가난한 사람들이 짐승을 바치기 어려울 때 번제 대용으로 드리는 제물이었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새라 할지라도 비둘기가 소제물 요구량인 10분의 1에바의 밀가루보다는 비쌌습니다. 물론 밀가루를 얼마큼 가져와야 하는지는 여기에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소제의 사례들은 그것이 10분의 1에바(약 2.2리터)였음을 암시합니다(레 5:11;6:13;5:15).

 

제사자는 밀가루에 기름을 붓습니다. 즉, 밀가루와 기름을 섞는 것이 아닙니다. 이어서 그 위에 유향을 놓습니다. 기름과 유향의 양도 적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어서 제사장이 그 기름과 유향이 놓인 부분의 밀가루를 한움큼 쥐어 제단 위에 태웁니다. 결국 많은 양이 남게 되는데, 제사장들이 성소 내의 ‘거룩한 장소’에서 그것을 먹습니다. 이 장소는 특정되어 있지 않으나 아마 물두멍과 내성소 입구 사이를 지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곳은 제사장들이 씻고 복장을 점검하고 거룩한 음식을 먹는 활동 공간이었을 것입니다. 제단 위에서 태워지는 소제물은 기념물이라 일컫습니다. 이것을 전체 소제물을 상징하는 상징물로 보자는 의견이 있으나(G. R. Driver: B, Lerine), 이것은 분명히 과거의 보살핌과 매일의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는 기능을 했을 것입니다.

밀가루의 소제는 독자적인 제사로 드려질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평상시에 개인의 일반적인 소제(레 6:14-18)나 제사장 위임식과 같은 특별한 목적의 소제가 드려질 수 있었고(레 6:19-23), 추수물의 소제(레 2:12.14: 23:10,16)와 의심의 소제(민 5:11-31)도 독자적인 소제였습니다. 그러나 소제는 보통 다른 동물 제사에 수반되었습니다. 당장 매일의 번제에서 소제가 함께 바쳐졌고, 또한 안식일의 추가적인 정례적 번제(양 두 다리)에서 항상 소제가 더불어 드려졌습니다(민 28:3-10). 그밖에 다른 동물 제사에 수반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예. 7:12.13; 14:20; 민 15:2-5; 28:19-20, 27–29). 가장 특징적인 것은 가난한 계층을 위한 속죄제의 제물로 밀가루의 소제가 허용되었다는 것입니다(레 5:11-12).

 

요리된 소제물(4-10)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은 무교병과 같은 인격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는 죄를 과감히 끊어 버리고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점점 거룩하여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점점 거룩하여기지 때문입니다.

 

4네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나 기름을 바른 무교전병을 드릴 것이요 5철판에 부친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지 말고 기름을 섞어 6조각으로 나누고 그 위에 기름을 부을지니 이는 소제니라 7네가 냄비의 것으로 소제를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와 기름을 섞어 만들지니라 8너는 이것들로 만든 소제물을 여호와께로 가져다가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으로 가져가서 9그 소제물 중에서 기념할 것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10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돌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4-10)

 

제사자는 밀가루로 몇 가지 요리를 해서 소제로 바칠 수도 있었습니다. 기름은 사용되지만, 비싼 유향이 첨가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분명 가난한 자들을 위한 소제물이었을 것입니다.

 

(1) 네 종류의 요리법(4-7)

 

실제로 생밀가루 약간만으로도 큰 빵을 만들 수 있습니다. 세 가지 요리 기구를 사용하여 소제의 음식을 만듭니다. a. 화덕에 구운 것: 기름을 섞은 무교병과 기름을 바른 무교전병; b. 철판에 부친 것; c. 냄비에 요리한 것. 화덕으로 두 종류의 음식을 만들 수 있으므로, 음식 종류는 네 가지입니다. 화덕은 아마도 아궁이에 놓은 큰 도기로 일종의 솥단지나 오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마 화덕 안쪽에 밀가루 반죽을 발라 떡을 구웠을 것으로 보입니다. 무교병의 ‘병’(떡)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할라의 어원 할랄이 ‘구멍을 뚫다’, ‘파내다’인 것을 고려해볼 때, 이것은 구명(들)이 뚫려 있는 형태의 두툼한 빵이었던 것으로 추론됩니다(TWOT). 반면 무교전병의 ‘전병’은 러키크인데 반죽을 얇게 빚어 구운 것으로 보입니다. 철판(마하바트)은 철로 만든 납작한 판을 말하는데, 그 위에 밀가루 반죽을 펼쳐 납작한 떡을 구울 수 있었습니다. 이 역시 누룩을 넣지 않고 굽는데, 특징은 여러 조각으로 나눈 뒤 기름을 부어 굽는다는 점입니다. 냄비(마르헤쉐트)는 평평한 전골냄비와 같은 요리기구인 것으로 보입니다. 하틀리는 냄비의 소제 요리란 밀가루를 기름에 튀긴 음식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2) 드리는 법과 남은 것의 처분(8-10)

 

밀가루 반죽에 누룩을 넣으면 크게 부풀고 부드러운 빵이 됩니다. 반면 무교병은 서너 시간 안에 굳고 딱딱해지므로 빨리 먹어야 합니다. 역시 제사장은 기념이 되도록 일부분만을 취하여 제단에 불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 몫으로 돌아갑니다.

 

소제의 주의사항과 추가 규정들(11-16)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소금과 같은 신앙 인격을 소유해야 합니다. 소금은 변치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언약의 소금이란 말이 뜻하느ᅟᅡᆫ 것이, 언제나 변함없이 한결같은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한결같이 신앙을 지키되, 마지막까지 변함이 없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11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12처음 익은 것으로는 그것을 여호와께 드릴지나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는 제단에 올리지 말지며 13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14너는 첫 이삭의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거든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네 소제를 삼되 15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위에 유향을 더할지니 이는 소제니라 16제사장은 찧은 곡식과 기름을 모든 유향과 함께 기념물로 불사를지니 이는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니라(11-16)

 

본문에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곡물 제사에 대한 규례를 설명합니다. 이 제사에는 누룩이나 꿀을 사용하지 말아야 하며, 소금으로 언약의 맛을 내야 합니다. 또한, 제사장이 제물을 가져와 하나님께 드리며, 그 일부는 하나님께,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게 됩니다.

 

(1) 누룩과 꿀의 금지와 밀의 첫 소제(11-12)

 

소제물에서 첨가가 금지된 재료들이 있습니다. 누룩과 꿀입니다. 누룩은 앞서 말한 대로 소제의 음식이 무교병이어야 하기 때문에 금지되며, 꿀은 논란이 되어 왔습니다. 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데바쉬인데, 이것은 ‘꿀과 과일 시럽’ 둘 다 가능합니다. 분명 몇 군데서 데바쉬는 벌꿀입니다(신 32:13: 삿 14:8-9,18). 그러나 그것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례들에서 데바쉬는 벌꿀이기보다는 과일 꿀, 즉 과일 시럽일 수 있습니다. 벌꿀은 자연에서 채취하는 것으로 농산물이 아니며, 따라서 제단에서 자동적으로 배제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소제의 재료로서 첨가를 금지한 것은 벌꿀이 아닌 과일 꿀, 즉 과일 시럽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설탕이 없던 고대에서 이것은 음식의 중요한 당분 재료였습니다. 누룩이 금지되는 이유는 부패를 의미하는 부정적인 상징성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마 16:6; 눅 12:1; 고전 5:6; 갈 5:9), 화목제를 바칠 때 유교병을 함께 드리기도 하나(레 7:13), 그 외에 누룩이 든 유교병은 제단에서 절대 금지되고 있습니다(출 23:18; 34:25), 아마 꿀도 금지되는 이유가 그것이 과일 시럽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벌꿀과 달리 쉬이 상하기 때문입니다.

12절의 ‘처음 익은 것’과 14절의 ‘첫 이삭의 소제’는 구별해야 합니다. ‘처음 이은 것’의 문자적 의미는 ‘첫 번째 전의 예물’입니다. 즉, 그전은 ‘첫 수화물의 예물’을 가리키는데, 분명히 밀의 첫 추수물입니다. 반면에 14절의 ‘첫 이삭의 소제’는 보리의 첫 이삭의 소제물인데, 이 사실은 레위기 23:10-11에 비추어 알 수 있습니다. 보리의 첫 이삭은 아직 덜 익었기 때문에 제사장이 북은 뒤 기름과 유향을 첨가하여 제단 위에 올립니다. 그러나 12절의 밀의 첫 추수물은 제단 위에 올리지는 않고 단지 성소에 봉헌된 성물이 되어 제사장들의 음식으로 사용됩니다. 참고로, 팔레스타인 지역은 보리 추수가 먼저 시작되고, 약 두 달 후에 밀 수확기가 옵니다. 그 지역에서는 밀이 주식이며 따라서 밀을 기다리기 위해 잠정적으로 보리를 먹을 뿐입니다.

 

(2) 소금의 첨가와 보리의 첫 소제(13-16)

 

누룩과 과일 꿀은 금지되나, 소금은 빠지면 안 됩니다. 특별히 그것이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으로 묘사됩니다. 13절 하반절은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라고 명시합니다. 랍비들은 이에 근거하여 다른 짐승의 제물들에게 소금을 쳤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단에 올린 모든 제물들에는 소금을 쳐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상기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일종의 소금 언약이며, 소제물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소금은 언약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는 언약의 소금입니다. 참고로 소금은 강력한 방부제인데 고대 근동에서 소금은 동맹, 친목, 약속, 충성의 맹세에 사용되었습니다. 바벨론에서는 계약의 동맹을 위해 양자가 소금을 먹었으며, 페르시아의 왕실에서 신하들이 왕 앞에서 충성을 맹세하며 소금을 먹었습니다. 유목민인 베두인의 전통 중에는 유랑하는 가족 단위 간의 상호 동맹과 보호의 표시로 서로 소금을 먹는 관행이 있었는데, ‘우리 사이에 소금이 있다’는 격언은 그들의 단단한 우정의 결속을 잘 말해줍니다.


제사를 드리는 자는 수확한 곡물 중 최고의 것을 드려서 하나님께서 모든 삶의 근원이시며 땅의 풍요를 가져다주는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성도의 삶도 소제의 고운 가루처럼 옛 모습은 온전히 깨어지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향기를 머금어야 합니다. 소제 위에 붓는 기름은 성령의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삶 속에서 기도의 유향을 날마다 태워야 합니다. 이러한 성도의 헌신하는 삶은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어 하늘 보좌에 상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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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01-01)


번제, 하나님을 향한 헌신과 충성

레위기 1장 1-17절


 

온전한 제사나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그 시작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이 먼저 하나님께 나가서 조건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서 어떻게 할 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만나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 본 장은 출애굽 2년 1월에 모세가 회막을 세운 후에서 지시받은 제사법 가운데 첫 번째의 제사법인 번제에 관한 규례입니다. 번제는 드리는 자의 헌신을 나타내는 제사로써 누구나 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물의 가치에 따라 열납되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자의 정성과 믿음이 제물에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언(1-2)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성소나 지성소가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회막’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만나주십니다. 레위기의 주체는 제사장이 아니라 일반 백성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모든 것이 후회없이 후퇴없이 드려야 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에 순종하는 일보다 더 우선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1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1-2)

 

레위기는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면서 시작합니다(1). 이 ‘회막’은 ‘성막’이라고도 불리며, 이스라엘 진영 한가운데 있었고, 그 주위에 레위인들이 사방으로 진을 치고 머물렀습니다(민 2:17; 3:21-39).

‘회막의 성막’(출 39:29) 같은 표현을 볼 때, 회막은 전체를 가리키고, 성막은 그 가운데 성소 부분을 가리키는 듯합니다(참조, 출 40:34-35). 회막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이며, 백성이 하나님께 제사하는 곳인데, 레위기는 하나님의 임재를 표현하는 성막보다는 하나님과 백성의 만남을 상징하는 회막이라는 표현을 더 즐겨 씁니다(43회). 이는 대개 오해하듯 레위기는 제사장이 주도하는 제사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온 백성을 위한 규례를 말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절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대상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언급됩니다. 레위기는 제사장의 교본이나 업무 매뉴얼이 아니라 온 백성을 위한 책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죽 중에서 소난 양으로 예물을 드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 중 누구든지, 그가 이방인일지라도, 또한 여자도 예물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참조. 5:6 “남자나 여자나”). 사람의 경제적 형편이나 사회적 지위의 차이는 있지만 차별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이는 또한 제사에서 중요한 것은 자발적으로 드리는 ‘제물’임을 보여주며, 그것은 자의적으로 제사자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규례를 따라 드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는 제물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거룩성 때문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제물 자체가 필요해서 요구하셨을 리 없습니다.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제사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확립하시려는 의도였습니다. 즉 제사의 핵심은 제물 자체가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마음과 하나님께 대한 순종임을 보여줍니다.

 

여기 1:2의 ‘예물’(코르반)이라는 단어가 번제(1:3), 소제(2:1), 화목제(3:1)에 모두 등장하는 것을 볼 때, 이는 3장까지 이어지는 단락의 도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예물의 예로 소와 양을 제시하지만, 나중에는 염소와 비둘기와 곡식도 드리게 하십니다. 가축은 사치스런 예물이 아니고 흔히 구할 수 있는 제물이었습니다. 일상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것들로 마음을 담을 수 있고, 또 자신이 기른 것을 바침으로써 제사하는 자와의 일치성을 추구할 수 있기에 가축을 예물로 정하셨을 것입니다.

 

소의 번제(3-9)

성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죄를 사함받고 의로운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성결케 된 백성의 예배와 삶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제사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제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중요한 의식입니다. 성도는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찾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3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4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5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6그는 또 그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7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제단 위에 불을 붙이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8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9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3-9)

 

3절부터는 번제를 소개하는데, 소로 드리는 번제(3-9), 암이나 염소로 드리는 번제(10-13), 비둘기로 드리는 번제(14-17)를 차례로 소개합니다. ‘번제’를 가리키는 단어는 ‘올라가다’라는 뜻인데, 번제는 제물을 태워서 그 냄새가 올라가게 하는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경에서는 ‘태우는 제사’로서 ‘번제’로 번역하였습니다.

 

(1) 제물 준비(3)

 

먼저 소의 번제 절차가 규정됩니다. 제사용 짐승은 우선 ‘흠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완전한’ 짐승을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신 분이므로 그에 합당한 제물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또한 수컷이 선호됩니다. 수컷이 우선되는 이유는 시장 가치에서는 암컷이 월등히 비쌌지만, 제의적 가치에서는 수컷이 우월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가부장적 관습이 지배하는 시대적, 문화적 한계 속에서 남자가 대표성을 갖고 사회적 지위가 높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율법을 해석할 때 틀과 형식에 집착하면 곤란합니다. 그 틀이 담은 가치와 의미에 주목해야 합니다.

 

(2) 안수와 도살 및 피 뿌리기(4-5)

 

제의 절차에서 가장 먼저 시행되는 행위는 ‘안수’입니다. 개인의 제사에서 안수와 도살, 그리고 각 뜨기와 내장 세척은 모두 제사장이 아닌 제사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반면 제사장은 제단에 피 뿌리기, 제단에 나무 쌓기, 그리고 제물 태우기를 담당합니다. 그러나 매일의 번제(상번제)나 절기 등의 공적 제사에서는 모든 절차를 제사장이 수행합니다. 안수의 의미와 기능에 대해 학자들은 다양한 의견을 내놓는데, 그것은 안수자와의 ‘동일시’나 그를 대신하는 대체임이 분명합니다. 안수 논쟁은 레위기 3장의 화목제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제사하는 사람은 안수에 이어 직접 도살합니다. 도살의 주체는 제사하는 사람이며 안수 받은 짐승의 도살은 자신의 죽음을 상징하므로 제사하는 사람이 자신의 짐승을 도살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합니다. 제사장은 도살된 짐승의 목에서 피를 사발에 받아 제단 사면, 즉 제단의 바깥 면들에 끼얹어 뿌립니다(자라크). 번제의 목적과 효과가 3-4절에 명시됩니다. 그 목적은 분명 하나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지는 제물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3). 이때 ‘그/그것의 받아들여짐’(라쪼노)이 제물이 받아들여지는 것인지 제사하는 사람이 받아들여지는 것인지 모호합니다. ‘라쪼노’에 접미된 대명사 ‘오’(15)의 선행사는 제물과 제사자 둘 다 가능합니다. 영어 성경들이 대체로 그런 것처럼 제사자를 주어로 취하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기쁘게 열납되는 것은 제물을 통해 드려지는 제사자의 헌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번제는 화목제와 더불어 자발적인 제사로서 ‘전적 드림’과 ‘헌신’을 위한 제사입니다. 그것은 이차적으로 ‘속죄’(키페르)의 효과를 가져옵니다(4). 우리는 동사 ‘키페르’에 대해 여기서는 단순히 ‘속죄하다’로 이해해도 충분합니다. 한 가지 떠오르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레위기 4-5장의 속죄제/속건제가 인간의 죄를 속죄하는 효과를 가져온다면, 번제의 ‘속죄’는 이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아마 속죄제/속건제는 특정한 죄를 속죄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번제를 드릴 때 제사자는 자신의 연약함과 죄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번제는 죄 용서를 위한 제사가 아니지만, 그로 인해 그의 죄성에 대한 속죄가 부차적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인간의 원죄까지 단번에 속죄되지 않았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3) 제물의 손질과 태우기(6-9)

 

제사자가 하는 일은 안수, 도살, 그리고 짐승 손질입니다. 반면에 제사장이 하는 일은 피 뿌리기, 불 준비, 태우기입니다. 가죽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태웁니다. 내장과 정강이마저 물로 씻어 더러운 것을 제거한 뒤 각을 뜬 몸통 위에 올려놓습니다. 가죽은 단순히 아마도 잘 타지 않고 고약한 냄새가 나기 때문에 제외되었을 것입니다. 자국은 그 제사를 바치느라 수고한 제사장의 몫으로 돌아갑니다(레 7:8). 그리하여 번제물은 여호와를 위한 ‘음식 봉헌물’(화제)이 되어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로 올라갑니다. ‘향기로운 냄새’라는 표현은 번제뿐 아니라 화목제(레 3:5,16)와 제한적이지만 속죄제(레 4:31)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사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사장이 제단 위에 불을 붙이고 나무를 벌여 놓는다는 것은 불은 새로 지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레위기 6:12-13에서 제단 위의 불은 결코 꺼져선 안 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단 불은 원래 레위기 9장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신적 기원을 갖습니다.

 

양과 염소의 번제(10-13)

성도의 모든 예배와 삶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유일하신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헌신을 통해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예배와 삶의 일치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합니다. 결국,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한 예배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10만일 그 예물이 가축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11그가 제단 북쪽 여호와 앞에서 그것을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것의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12그는 그것의 각을 뜨고 그것의 머리와 그것의 기름을 베어 낼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다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에 벌여 놓을 것이며 13그 내장과 그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10-13)

 

본문에서는 제사로 바쳐질 가축의 종류와 그 준비 방법에 대해 설명합니다. 특히, 제사는 흠 없는 수컷으로 정해져야 하며, 제사자가 그것을 하나님께 드릴 때, 특정한 절차를 따라야 합니다. 이러한 규례는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태도와 순종을 나타내는 중요한 의식임을 강조합니다.

 

(1) 도살과 피 뿌리기(10-11)

 

양이나 염수의 수컷으로 번제물을 가져온 제사자는 제단 북쪽 여호와 앞에서 가축을 도살해야 합니다.

 

(2) 짐승의 손질과 태우기(12-13)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각을 뜨고, 머리와 기름을 베어 내고, 제단 불 위의 나무 위에 놓아야 합니다. 그 내장과 정강이 역시 물로 씻어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드려야 합니다. 가죽을 제외한 모든 것을 불살라 드리는 번제는 매일 아침과 저녁에 드려야 하는 일상의 제사이며 항상 드려야 하는 제사입니다(출 29:38-42).

제사의 방법과 시간과 절차와 제물에 대한 자세한 규정은 예배가 사람의 임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명하신 대로 준행되어야 하는 일이었음을 가르쳐줍니다.

 

새의 번제(14-17)

하나님께 자원하여 예물을 드리는 일에 있어서는 누구나 자신의 형편에 맞게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물이 없어서 하나님께 즐거이 나아가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섭리하신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율법 시대에도 하나님의 제도를 통하여 가난한 자들도 그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었습니다.

 

14만일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이 새의 번제이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로 예물을 드릴 것이요 15제사장은 그것을 제단으로 가져다가 그것의 머리를 비틀어 끊고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피는 제단 곁에 흘릴 것이며 16그것의 모이주머니와 그 더러운 것은 제거하여 제단 동쪽 재 버리는 곳에 던지고 17또 그 날개 자리에서 그 몸을 찢되 아주 찢지 말고 제사장이 그것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14-17)

 

본문에서는 제사로 바쳐질 흠 없는 수컷 가축의 준비와 절차를 설명하며, 제사자가 하나님께 드릴 때 특정한 규칙을 따라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태도와 순종의 중요성을 나타냅니다.

 

(1) 도살과 피 뿌리기(14-15)

 

새의 번제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의 새끼로 드려야 하며, 다른 번제물의 경우와 달리 제사장이 새를 잡고,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피를 제단 곁에 흘리는 절차를 진행하였습니다.

모이 주머니와 깃털 혹은 더러운 부분은 제단 동쪽의 재 버리는 곳에 던지고, 날개 부분은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형태로 제단 불 위의 나무 위에서 불살라 드려야 합니다.

 

(2) 새의 손질과 태우기(16-17)

 

이처럼 레위기 제사법의 세밀하고 상세한 내용과 절차는 하나님의 성품과 완전하심의 모습을 반영해주는 듯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방법대로, 자신의 눈에 좋게 보이는 순서를 만들어서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가 될 수 없으며,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이 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에 따라 드리는 제사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자신의 계산과 시간과 방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계획과 순서와 방법에 순종하는 훈련과 교육의 장이 될 수 있습니다. 제사는 시공간 안에 제한된 존재인 사람이 영원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며, 유한하고 허물 많은 인간이 절대자이며 신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은혜의 통로였습니다.


번제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자발적인 헌신과 봉사를 의미하며 이것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충성을 상징합니다. 율법은 오직 장차 올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었습니다(히 10:1). 번제가 나타내 주는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믿는 자들의 구속입니다(롬 3:24; 엡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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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서론


레위기 서론


 

1. 이름

‘레위기’라는 모세 5경의 3번째 책으로, 출애굽기 끝에서 연속되고(1:1), 민수기로 이어집니다. 구약 성경은 대체로 첫 단어나 구절을 그 명칭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와이크라’, 즉 ‘그리고 그가 부르시고’로 불었습니다. 개역성경의 “레위기”란 이름은 70인역(LXX)의 ‘레비티쿠스’에서 유래하며, 이 의미는 ‘레위인에게 속한’이란 뜻이 있습니다. 레위인이 주장하는 제사법에 관합니다.

 

2. 저자

창세기의 저자 모세가 또한 레위기의 저자라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모세를 모세 오경의 저자라고 완전히 믿지 않는 이론들은 너무나 복잡하고 왜곡되어, 여기서 논란할 수가 없습니다. 최초기로부터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레위기를 모세의 저작으로 믿어왔으며, 이 책의 저자에 관한 의심이 제기된 것은 단지 현대에 이르러서입니다.

 

(1) 내적 증거 : 레위기 총 27장 가운데 7장(2,3,5,7,9,10,26장)을 제외한 20장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2) 외적 증거 : 레위기는 예수께서 “모세의 율법”(눅 24:44)이라고 일컬으신 책의 중요하고도 뺄 수 없는 부분이다. 문둥병자들을 치료하신 이야기에서 그는 분명하게 이 책을 위대한 입법자 모세와 연관을 시키고 있다(마 8:4; 눅 5:14; 레 14:3, 4, 10). 불신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하신 다음과 같은 그의 말씀은 의미심장한 말씀이다.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요 5:46, 47). 여기서 우리는 모세가 “기록”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가 기록한 것이 “그의 글”이라고 일컬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그의 글”로 번역된 단어의 원문은 복수로서 더욱 구체적으로 직역을 하자면, “그의 글들”이다. “글들”이라고 복수를 사용하신 것은 모세가 두 권 이상의 글을 기록했음을 뜻한다. 여기서 말하는 그 글들(책들)이란 보편적으로 모세의 책들이라고 불리우는 오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책들을 어디에서 찾아낼지 알 수가 없다.

 

3. 역사적 배경

(1) 레위기가 차지하는 기간은 꼭 30일입니다. 출애굽기는 회막의 건축과 그것을 봉헌하기 위한 준비에 관한 서술로써 끝났습니다. 성막 건축은 “제이년 정월 곧 그 달 초일일”에 완공되었습니다(출 40:17). 한편으로 레위기에 잇따른 다음 책인 민수기는 “제 이년 이월 일일”에 있은 일로써 시작됩니다(민 1:1). 그러므로, 그 사이의 기간은 정확하게 한 달입니다. 바로 이 한 달 동안에 레위기에 포함된 교훈과 지시가 모세에게 전달되었으며, 그 같은 일 개월 동안에 이 책에 기록된 사건들이 발생하였습니다.

(2) 광야에서의 회막건축은 시내 산에서 율법 반포 직후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때 산봉우리를 뒤덮은 빽빽한 구름 속으로부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몹시 두려워하였습니다.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히 12:21), 레위기에서 이스라엘은 또 다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산에서가 아니라 성소, 곧 율법과 속죄소(시은좌)가 간직되어 있는 지성소에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현현(顯現)을 알려주시던 곳은 구속의 장소인 그룹 천사들 사이 즉 속죄소였습니다. 시내 산이 자비가 없는 율법을 나타내었다면, 성소는 율법과 함께 있는 자비를 나타내었다. 지성소에서 율법과 자비가 만났으며, 거기서 구속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레위기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4. 주제

(1) 성결 : “거룩한”이란 단어는 “분리되어 있음”을 의미하며 레위기에 있는 여러 가지이지만 관련 있는 것에 적용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신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있다”. 레위기에 있는 율법은 특정한 시간, 날짜, 공간 및 사물을 “거룩한” 것으로 지정하거나 어떤 이유로 든 다른 것에서 “분리”되도록 규정합니다. 거룩함은 또한 하나님께 일관되게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니 거룩함이 없어서 하나님과 무언가 나 누군가가 분리됩니다.

 

(2) 의식적인 순결과 부정 : 순수한 것은 절대적으로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정한 것은 하나를 하나님과 분리시키십니다. 의식의 순결을 잃는 것은 여러 가지 다른 이유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잘못된 것을 쓰고, 잘못된 것을 먹는 것, 성관계, 월경 등. 어디서, 언제, 어떻게 그리고 어떻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모든 법률을 엄격히 지킴으로써 순결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누구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순결을 잃어버린다면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며 깨끗하지 못하고 불결한 곳에서 살 수 없으므로 떠나실 것입니다.

 

(3) 속죄 : 불결함을 제거하고 의식의 순결을 되찾는 유일한 방법은 속죄의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속죄를 하는 것은 어떤 죄를 용서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를 구하는 것만으로 속죄를 달성할 수는 없습니다. 속죄는 오직 하나님이 정한 바른 의식을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4) 피의 희생 : 속죄에 필요한 거의 모든 의식은 어떤 종류의 피를 포함합니다. - 보통 부정한 이스라엘 사람이 다시는 의례적으로 순수해지도록 생명을 잃는 동물의 희생을 통해. 피는 불결함과 죄를 흡수하거나 씻는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피가 쏟아지거나 뿌려집니다.

 

5. 레위기 개요

Ⅰ. 죄에 대한 하나님의 규정/1-10장

   1. 희생 제사/ 1-7장

        (1) 번제/1장, 6장 8-13절

        (2) 소제/2장, 6장 14-23절

        (3) 화목제/3장, 7장 11-34절

        (4) 속죄제/4장, 6장 24-30절

        (5) 속건제/5장 1절-6장 7절, 7장 1-7절

    2. 제사장 직분/8-10장

 

Ⅱ. 성별에 대한 하나님의 지침/11-24장

    1. 거룩한 백성 /11-20장

        (1) 정한 것과 부정한 것-순결법/11-15장

        (2) 속죄일/ 16-17장

        (3) 성별에 관한 여러 조항/ 18-20장

    2. 거룩한 제사장 직분/21-22장

    3. 거룩한 날-여호와의 절기 / 23-24장

 

Ⅲ. 성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25-27장

    1. 땅의 안식년/ 25장

    2. 순종의 중요성/ 26장

    3. 맹세의 가치/ 2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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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40-02)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순종의 삶

출애굽기 40장 17-38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우리의 신앙을 깊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화하며,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중요한 실천입니다. 순종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고, 내적 평안과 변화를 얻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순종하는 삶은 단순히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유지하며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 모세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실행한 것을 보고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순서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모세의 철저한 성막 건설의 이행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형식문을 통해 확증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32). 성막이 모두 지어지자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케 되었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성막 위에 내려왔습니다.

 

성막 조립의 실행(17-19)

신앙 생활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방향을 정확히 지키며 나아가는 것이 신앙의 기본입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지침을 따라 살며,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7둘째 해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성막을 세우니라 18모세가 성막을 세우되 그 받침들을 놓고 그 널판들을 세우고 그 띠를 띠우고 그 기둥들을 세우고 19또 성막 위에 막을 펴고 그 위에 덮개를 덮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17-19)

 

하나님께서 성막 조립을 명령하신 대로 모세는 순종합니다. 출애굽 한 해를 원년으로 삼아 둘째 해 1월 1일의 일입니다. 먼저 벽을 세우기 위해 널판들을 견고히 세울 받침대들을 널판들 아래에 끼웁니다. 널판들을 마치 레고처럼 조립하여 세운 뒤, 입구인 동쪽을 제외한 삼면의 널빤지 벽에 각각 다섯 개의 봉을 지지대로 끼워 견고한 벽이 되게 했습니다(18). 그리고 내성소 입구와 지성소 입구에는 기둥들이 세워졌습니다(18).

고급 실들로 짠 첫 번째 앙장막 위에 두 번째 염소 털 앙장막이 덮였고, 세 번째 막으로 붉게 물들인 숫양의 가죽이 그 위를 덮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마 장식 덮개였을 것으로 추론되는 해달 가죽이 얹혀졌습니다. 성막은 우리에게 많은 상징적 교훈을 전해줍니다.

현재의 본문과 관련해서 한 가지 예로, 세 겹 내지 네겹으로 회막 전체를 가리는데, 그중에서 바깥을 제일 싼 가죽 덮개로 덮었다는 것은 분명 신학적 시사점이 있는 듯합니다. 여러 겹의 막들은 하나님의 현현을 겹겹이 둘러싼 구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신현의 구름 가장 바깥 부분에서는 가장 희미하게 그분의 영광이 드러날 뿐입니다.

지성소와 맞닿은 가장 안쪽의 최고급 양창막에 비해 가장 바깥쪽의 가죽 덮개들은 가치가 크게 떨어졌는데 거룩의 등급이 현저히 낮았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연결할 점이 있는 듯합니다. 고운 풍채도 아름다운 것도 없는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실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사 53:2; 요 1:10,26,31). 또한 그분은 자신의 영광을 스스로 비우고 내려오신 그리스도십니다(빌 2:7).

외적으로 볼품없으셨던 그분은 하나님의 성전 자체로 오셨으며 내면의 영광의 광채를 발하며 세상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예배당 건물의 화려함을 추구하기보다 그 내부를 가장 고결하고 영광스러운 신자들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장식들로 채우고 꾸며야 할 것입니다.

 

각 구역별 다양한 비품들의 배치(20-33)

우리 삶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히 임하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배와 기도의 자리를 성실히 지키며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임재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의 삶을 정결하고 성결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신앙 생활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고, 그분의 영광을 우선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0그는 또 증거판을 궤 속에 넣고 채를 궤에 꿰고 속죄소를 궤 위에 두고 21또 그 궤를 성막에 들여놓고 가리개 휘장을 늘어뜨려 그 증거궤를 가리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22그는 또 회막 안 곧 성막 북쪽으로 휘장 밖에 상을 놓고 23또 여호와 앞 그 상 위에 떡을 진설하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24그는 또 회막 안 곧 성막 남쪽에 등잔대를 놓아 상과 마주하게 하고 25또 여호와 앞에 등잔대에 불을 켜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26그가 또 금 향단을 회막 안 휘장 앞에 두고 27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28그는 또 성막 문에 휘장을 달고 29또 회막의 성막 문 앞에 번제단을 두고 번제와 소제를 그 위에 드리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30그는 또 물두멍을 회막과 제단 사이에 두고 거기 씻을 물을 담으니라 31모세와 아론과 그 아들들이 거기서 수족을 씻되 32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와 제단에 가까이 갈 때에 씻었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33그는 또 성막과 제단 주위 뜰에 포장을 치고 뜰 문에 휘장을 다니라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치니(20-33)

 

여러 차례 지시되고 모세에게 재차 명령된 그대로 성막의 여러 시설물들과 비품들이 제자리에 정확히 배치되었습니다. 비품들은 ‘명령대로’ 정확하게 사용되었습니다(20-30). 또한 모세와 제사장들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할 때 ‘명령대로’ 반드시 손발을 씻었습니다(31-32).

반복적인 형식문인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32)가 다시 강조됩니다. 이러한 명령-순종 형식문(formula)은 사실 성막 건설 기사에서 여러 차례 반복됩니다(출 32:28; 39:1,7; 39:32; 39:42).

이런 반복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모세가 하나도 빠트림 없이 정확히 하나님의 명령을 준수했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불순종은 금송아지를 낳았으나 철저한 순종은 성막의 완벽한 건축으로 이어집니다.

 

성막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과 불-구름(33b-38)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그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택이나 결정을 내릴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그분의 뜻을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맞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신앙 생활에서 하나님의 방향을 따르는 것이 우리의 길을 밝히고 안정감을 줍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순종하는 삶이 열매를 맺게 됩니다.

 

34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35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36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37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38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34-38)

 

기둥 성막 건설이 완료되자 이스라엘 백성은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구름이 회막을 덮고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을 가득 채웠습니다(34b). 이 현상은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하나님께로의 접근이 최대한 허용된 모세마저 일시적으로 회막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35).

이 영광의 발현은 장엄한 구름기둥의 출현과 불가분리의 동시적 현상입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에 동반하는 가장 대표적인 현상으로 구름 자체가 마치 하나님의 선두 마차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곧 구름의 이동은 하나님의 이동이었고, 구름의 멈춤은 하나님의 멈추심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구름을 따라 움직였습니다(36-37).

한편, 밤에는 불기둥이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그러나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두 가지 다른 종류의 기둥들이 아니라 합체된 하나의 기둥이라는 것을 38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참조, 출 14:24; 민 9:16). 즉, 강력한 광채가 나는 화염을 두터운 구름이 바깥에서 감싼 형태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것이 낮에는 밝은 태양으로 인해 짙은 구름으로 보이고, 밤에는 구름은 보이지 않고 구름을 뚫고 나온 화염이 불기둥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상적인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과 불-구름 기둥에 대한 언급은 출애굽기를 마무리하는 매우 적절한 진술입니다. 구름이 떠오를 때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을 분해해서 포장한 뒤 이동했다는 진술은 시내산을 떠나기 직전인 민수기 9:15-22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기와 민수기가 독자적인 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연속된 책으로 읽어야 한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우리는 이 구름의 이동과 그것을 따르는 백성들의 행진을 통해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백성들의 삶입니다. 불-구름 기둥은 광야를 행진하는 백성에게 마치 하나님의 내비게이션과 같았습니다. 백성들은 구름이 인도하는 대로 가야 했습니다. 구름의 방향이 오른쪽으로 꺾이면 발걸음도 그쪽으로 옮기고, 구름이 멈추면 거기서 멈춰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백성의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출애굽기의 가장 중요한 단어들이라 할 수 있는 ‘거룩’과 ‘영광’의 개념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해야 합니다. ‘거룩(holiness)’은 히브리어 ‘카도쉬’ 혹은 ‘코데쉬’인데 이것은 두 가지 개념을 내포합니다. 첫째는 분리성, 둘째는 완전성입니다. 둘을 합해서 한 가지 개념으로 묶자면, 저 너머로 분리되어 떨어져 지극히 고결한 상태, 즉 절대적 정결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거룩은 신적인 영역에 속한 것으로서 인간과 근원적 유격을 두고 저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 속성의 본질입니다. 불완전하고 흠과 결함이 있는 세속의 영역 너머에 존재하는 완전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거룩은 ‘분리성’(separation), ‘완전함’(completeness), ‘온전함’(wholeness), ‘무흠’(without blemish)의 개념을 포함합니다.

이 거룩의 속성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만 속합니다. 하나님만이 홀로 거룩하십니다(삼상 2:2; 계 15:4). 다른 어떤 피조물도 스스로 또는 내재적으로 거룩의 속성을 지니지 못합니다. 피조물은 자신의 능력으로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종교는 그것을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수행과 명상의 실천을 독려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만이 홀로 거룩하시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께로부터 거룩을 부여받을 뿐이다. 인간은 그분이 거룩하게 해주셨을 때 거룩한 존재가 됩니다. 성막은 그분이 거룩케 해야 거룩한 집이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분이 성민으로 삼아주셔야 거룩한 백성이 되었으며, 제사장들 또한 거룩한 기름을 부어주셨을 때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구원’의 다른 개념입니다. 구원도 거룩처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엇입니까? 영광은 히브리어로 ‘카보드’인데 기본 의미는 ‘무거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거룩의 외적인 현시입니다. 즉, 거룩은 내재적 본질에 속하고 영광은 그 본질의 외적 발현인 것입니다. 이것은 다양한 방법으로 현시됩니다. 영광은 구름, 불과 광채, 바람, 우레와 번개, 진동, 나팔 소리와 같은 초자연적인 물리적 현상으로 표현되기도 하고(출 16:10; 19:16;24:16-17;40:34; 신 5:4; 왕상 8:11), 또는 법궤 자체가 그분의 영광에 대한 표현이었습니다(삼상 4:21-22). 더불어 압도적 사건, 곧 그분의 위대한 업적과 기적도 그 영광의 현시였습니다. 출애굽기 16:7에서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라’라고 말하는데, 매일 아침 만나를 주시는 기적이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을 드러냄의 절정에 이른 것이 바로 성막입니다. 성막은 삼중으로 구분된 영역으로 나타나는 거룩의 등급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을 충만히 드러냈고, 또한 광채 나는 금은보석과 최고급 재료를 사용한 비품들과 시설물들을 통해 그분의 영광이 충만히 발현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장엄한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임재로 성막은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 찬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들이 성령으로 충만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는 참된 성전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성막의 건축과 하나님의 임재, 인도하심을 통해 신앙의 중요한 원칙을 가르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삶에 충만하게 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금 되새기며, 우리의 신앙 생활을 점검하고, 하나님의 뜻을 더욱 깊이 이해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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