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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4-03)


선지자로 인정받은 엘리사⑶

열왕기하 4장 38-44절


하나님께서는 예배당 안에만 계신 분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과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창조하신 전 우주에 어느 곳에나 계시는 분입니다. 더욱 자신이 창조한 만물에 생명을 공급해 주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모든 곳에 계시며,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만나고 함께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 엘리사가 선지자로 인증된 사건들을 계속 소개합니다. 그가 길갈에서 도착했을 때, 이스라엘 전역은 흉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엘리사 앞에 모였습니다. 그들에게 양식을 공급하기 위해 죽을 끌렸는데, 독 있는 식물이 들어가 죽어가고 있을 때, 그들을 살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보리떡 스무 개와 약간의 채소로 기근 중에 백 명의 제자들이 먹고도 만을 만큼 넉넉하게 해줍니다.

 

독을 없애는 엘리사(38-41)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주관하신 분이십니다. 주관하셨던 내용을 기록한 것들 중에 하나가 열왕기입니다. 열왕기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엘리사에 대한 내용을 길게 하례합니다. 이것은 엘리사가 엘리야 다음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내용입니다.

 

38엘리사가 다시 길갈에 이르니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의 앞에 앉은지라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큰 솥을 걸고 선지자의 제자들을 위하여 국을 끓이라 하매 39한 사람이 채소를 캐러 들에 나가 들포도덩굴을 만나 그것에서 들호박을 따서 옷자락에 채워가지고 돌아와 썰어 국 끓이는 솥에 넣되 그들은 무엇인지 알지 못한지라 40이에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였더니 무리가 국을 먹다가 그들이 외쳐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솥에 죽음의 독이 있나이다 하고 능히 먹지 못하는지라 41엘리사가 이르되 그러면 가루를 가져오라 하여 솥에 던지고 이르되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하매 이에 솥 가운데 독이 없어지니라(38-41)

 

본문에는 엘리사와 관련된 에 가지 사건 중에 두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들은 예수님을 닮은 엘리사의 따뜻한 심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죽음의 시대에서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 생명의 역사를 진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는 바알 신이 살고 죽는 것을 결정하고 번영과 자산을 보장해준다고 믿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가지 못한 수넴 여인에게 잉태하게 하신 것도, 죽은 그 아들을 살리신 것도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엘리야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 자신을 살아계심을 엘리야를 통해 증명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엘리사를 통해 그 역사를 이어감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쉬지 않고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일을 계속하신다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선지자로서 인정받는 세 번째 사건으로 그 배경적 장소는 가나안 땅에 있는 길갈이었습니다. 이곳에도 흉년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흉년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축복하실 때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통해 풍년을 주십니다. 당시는 바알이 풍년을 주는 신이라고 믿던 시대였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믿음인지를 알려주시려고 하나님께서는 흉년을 주신 것입니다. 흉년은 바알의 무능을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방법이었습니다.

 

흉년이 들면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매우 힘든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길갈에 있는 생도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엘리야에 관한 네 가지 사건 중에 첫 번째 사건에서는 선지자의 제자와 그 가정은 빚 때문에 시달렸습니다. 또한 선지자는 누군가의 부양을 받아야만 하는 처지였습니다. 경제적으로 선지자와 그 공동체가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또 흉년이 들었습니다. 흉년은 언약에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일 것입니다.

 

엘리사는 북이스라엘 지역을 돌아다니며 사역하고 있었고, 돌아다니다가 길갈에 종종 들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엘리사가 다시 길갈로 도착한 것은 길갈도 그의 순회 도시 중 하나였음을 의미합니다. 길갈은 2:1에서 언급한 것처럼 벧엘 북쪽 중앙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으로 엘리야가 승천할 때 엘리야와 엘리사가 같이 출발한 지역입니다. 엘리사가 이 지역에 다시 방문했을 때 이 땅엔 심각한 기근이 들어 있었습니다.

 

선지자의 제자들은 엘리사 앞에 앉았습니다. 여기서 선지자의 제자들이 같이 모여 있는 것은 흔치 않은 일입니다. 선생님 앞에 제자들이 앉아 있다는 것은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선지자의 제자들이 모인 것입니다. 그러나 극심한 기근 때문에 그들에게는 당연히 먹을 것이 부족했습니다. 제자들의 몰골을 보니 말이 아니었습니다. 제대로 밥도 먹지 못한 선지자의 제자들을 본 엘리사는 말씀을 가르치는 것보다 먼저 이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것이 더 급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엘리사는 굶주린 제자들에 대한 연민을 느꼈습니다.

 

엘리사는 사환에게 국을 끓일 큰 솥을 걸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런 명령에 따라서 먹을 만한 야채를 채집하기 위해서 들로 나갑니다. 이러한 모습은 기근이 심해 밭에서 나는 채소나 곡식이 없고, 들이나 산에서 식물과 열매를 채집하여 연명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상황이 우리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해서 굶어 죽을 수도 있는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들로 나간 한 선지자는 야생 포도나무를 찾아내었고, 그것에서 들호박을 따 왔습니다. 우리말에서 들호박으로 번역된 것은 노란 조롱박으로 독성이 강해 위험한 식물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자신의 옷에 가득 따 와서 그것을 썰어 국솥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국 속에 노란 조롱박이 들어갔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국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 국을 받아 먹던 사람들이 갑자기 국 안에 죽음이 있다고 소리칩니다. 이것은 국 안에 죽음에 이를 만한 치명적인 독이 있다는 뜻입니다. 배고픈 제자들에게 변변치 않지만 따뜻한 죽 한 그릇이라도 먹이려고 준비한 음식 때문에 제자들이 죽음의 위험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엘리사는 호의를 베풀려고 하다가 뜻하지 않은 어려움에 빠지게 되는데, 이것은 수넴 여인에게 아들을 낳을 수 있도록 호의를 베풀었다가 아이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곤란하게 된 것과 유사한 상황입니다. 엘리사는 그 말을 듣자마자 급히 제자들에게 밀가루를 가져오라고 명령하고, 그것을 바로 솥에 넣은 후 국을 퍼서 먹으라고 합니다. 밀가루를 넣음으로 국의 독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나쁜 물에 소금을 넣은 것(열왕기하 2:21)과 유사한 사건으로, 죽음의 국이었던 것을 배고픔을 면할 수 있는 생명의 국으로 변했습니다. 다시 엘리사가 원했던 선한 일로 마무리된 것입니다. 수넴 여인의 아들 사건과 이 사건은 호의를 베풀었지만 뜻하지 않게 사람들을 절망에 빠지게 하거나 위험에 빠지게 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역경이나 실패가 없이 순탄한 것만은 아닙니다. 삐걱거리는 과정을 보면서 의심도 하고 주저도 하는 과정이 있지만,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의 기대와 스케줄에 따라서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필요 없을 만큼 안전한 삶은 신앙의 공식이 아닙니다. 믿음은 항상 예측과 기대를 뛰어 넘어서 역사합니다.

 

결국 엘리사는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처음에 가졌던 선한 목표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런 엘리사의 모습은 항상 하나님의 일을 정학하게 행하던 다른 선지자들과는 다릅니다. 이런 모습을 통해 우리는 엘리사 선지자의 연민, 좌절, 극복 등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도 관심 갖고 돌보십니다. 엘리사를 통한 하나님의 능력은 국을 끓이고 배고픔을 해결하는 일상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주일 교회에서뿐 아니라 평일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과 함께하십니다.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도움을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백 명이 먹고도 남은 보리빵(42-44)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극한 상황에서도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심으로써 지켜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분이십니다. 자기 백성들이 궁핍했을 때 일용한 양식으로 채워주십니다.

 

42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만든 떡 곧 보리떡 이십 개와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그가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43그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44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42-44)

 

이 이야기는 바알 살리사에서 온 한 사람의 등장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실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엘리사에게 헌물로 가져 왔습니다. 그는 이제 막 보리 추수를 끝내고 첫 열매로 보리 떡 20개를 만들고, 밭에서 재배한 채소를 자루에 담아 엘리사에게 가지고 왔습니다. 얼마 되지 않지만 흉년이 상황에서 그 정도의 헌물은 바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작은 것이지만 믿음으로 드린 것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합니다.

 

여기서 엘리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는 것은 이 사람이 엘리사가 선지자라는 것을 알고는 첫 열매를 여호와께 바친다는 의미로 이것을 가져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엘리사라는 개인에게 준 것이라기보다는 여호와께 바친 제물의 일종인 것입니다. 보리는 밀 추수보다 빠른 4월에 추수가 시작되며, 보리 추수 직전이 이스라엘에서 가장 배가 고픈 시기입니다. 이 사람이 가져온 양을 보면 이 사람도 경제적으로 그다지 넉넉한 처지는 아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저 적은 양이라도 하나님 앞에 가지고 와서 추수한 것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당시 엘리사 주위에는 100여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여기에 있던 사람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특정되진 않지만, 바로 앞에 나온 사건과 연결해 볼 때 엘리사와 함께 생활하며 말씀을 배우고 전파하던 선지자 무리일 것입니다. 4장의 이야기를 보면, 엘리사 당시 선지자의 제자들이나 선지자의 형편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선지자의 자녀들과 과부는 빚 때문에 고생하고, 선지자는 누군가의 부양을 받아야 하며, 선지자 무리는 먹을 것이 없어서 산이나 들에서 먹을 것을 채집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엘리사는 사환에게 그 사람이 드린 헌물을 사람들에게 먹게 나누어 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보리떡 20개와 채소 한 자루밖에 안 되는 것을 엘리사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먹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사환은 어떻게 이것으로 100명을 먹이겠느냐고 하면서 난색을 표합니다. 사환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자신들도 먹기 힘든데 얼마 되지 않는 양을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먹느냐고 항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백성들에게 대접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런 상황이기에 엘리사는 길갈에 가서도 배고픈 제자들을 먹이는 일을 제일 먼저 했고, 여기서도 제자들을 위해 자신에게 들어온 적은 양의 양식을 나누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환의 말처럼 보리 떡 20개와 채소 한 자루는 100명이나 되는 사람을 먹이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입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사환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고 다시 말하며,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먹고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이 말을 듣고 사환이 그들에게 떡과 채소를 나누어 주었는데, 정말 여호와의 말씀대로 먹고 음식이 남았습니다. 이것은 광야에서처럼 여호와는 자신의 백성을 먹이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준 기적의 사건입니다.

엘리사는 제자들이 실제적인 어려움에 처했을 때 기도해 주겠다, 가서 배부르라, 평안히 가라, 하며 말로만 위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제적으로 먹을 것을 제공하여 제자들의 배를 채워주었고, 돈이 될 만한 것을 제공해 빚을 탕감하게 하였습니다. 엘리사는 어려운 제자들의 형편을 살피고, 이들을 실제적으로 돕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는 먼저 자기가 할 수 있는 부분을 하고 나머지는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먼저 솥단지를 걸고 들에서 식물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들어온 얼마 안 되는 식량을 제자들을 위해 먼저 내놓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엘리사가 보리떡 20개와 채소 한 자루로 100명을 먹인 사건은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사건을 기억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소년이 바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배고픈 백성들을 위해 넘치도록 풍성한 식탁을 차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엘리사의 능력보다 몇 백 배 크지만,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그들의 실제적인 필요를 채워주고 싶은 마음은 엘리사와 예수님이 동일합니다.

 

이 기적은 벳새다 광야에서 예수님께서도 오병이어로 오천 병을 먹이고도 남은 사건과 비슷합니다(요한복음 16장). 이 일들을 통하여 깨달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청중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5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태복음 6:25-26,31)

 

세상의 것들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며 모든 권능을 소유하고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돌보시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입니다. 두 번째 깨달은 사실은 하나님이 남을 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 필요를 채우셨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사용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정성을 다해 주어야 합니다. 도울 때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드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베풀 수 있도록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베풀 때는 사랑과 믿음을 가지고 베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수효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얼마나 헌신적이고 자신을 희생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한 사람의 헌신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일을 이루십니다. 믿음은 문제를 통해 발휘되고 단련됩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문제들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믿음이 더욱 견고해졌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 갔습니다. 문제를 만날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인간적인 생각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시길 바랍니다.


경건한 사람에게도 시련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삶의 힘든 순간에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마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작지만 헌신을 통해 하나님의 큰 사역을 이루어가십니다. 당신이 필요할 때 일용할 양식으로 이루어갑니다. 하나님과 날마다 동행하는 삶은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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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4-02)


선지자로 인정받은 엘리사⑵

열왕기하 4장 18-37절


절망적인 순간을 만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낙담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렇기만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포기하면 상황은 결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믿음이란 절망적인 순간이라도 희망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의 결과를 축복으로 되어 갈 것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희망을 포기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끝까지 소망을 놓지 않으면 어려운 상황이 희망으로 바뀔 것입니다.

 

  • 스승 엘리야에게 두 배나 영적인 능력을 요구했던 엘리사는 네 가지 기적을 모아서 소개합니다. 이 이적들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혹은 ‘하나님께서 행하셨다.’는 말이 빠져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엘리사가 하나님께서 주신 권능을 행하는 참 선지자라는 사실입니다. 이 단락에서는 수넴 여인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집니다. 엘리사의 예언대로 아들을 얻었지만, 수넴 여인에게 아들의 죽음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생깁니다.

 

수넴 여인의 아이 죽음(18-20)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리는 중에도, 때로는 뜻하지 않는 어려움이 닥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믿음의 진가는 평온할 때보다 고난을 당할 때 더 빛이 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18그 아이가 자라매 하루는 추수꾼들에게 나가서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렀더니 19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머리야 내 머리야 하는지라 그의 아버지가 사환에게 말하여 그의 어머니에게로 데려가라 하매 20곧 어머니에게로 데려갔더니 낮까지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있다가 죽은지라(18-20)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해 수넴 여인에게 기적적으로 아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던 시대에 이 수넵 여인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대접함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우상인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만이 살아계신 참 신이라고 믿었던 의미입니다.

그러나 수넴 여인마저도 가망 없는 자신에게 생명을 주실 것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아이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전했을 때, 처음에는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 시대가 어둡고 불신이 가득하면 아무리 개인이 노력해도 신앙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교회와 상관없이 혼자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습니다.

 

엘리사의 예언대로 하나님께서 수넴 여인에게 아이는 하나님의 선물로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렇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을 또 데려가십니다. 기적처럼 생긴 아들이 자라던 어느 날 갑자기 죽었습니다. 하루는 아이가 자기 아버지가 추수하려 나간 사이,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며 비명을 지릅니다. 아버지는 일꾼들을 시켜 그의 어머니에게로 보냅니다. 아이에게 손도 써보지 못하고 정오쯤에 어머니의 무릎에서 아이는 죽고 맙니다.

 

‘정오’란 시간 표현은 아이가 발병한 지 한나절도 못되어서 급작스럽게 죽었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침 잘 먹고 아버지와 추수하러 갔던 아이가 갑자기 업혀 오더니 손써 볼 틈도 없이 정오 무렵에 품에서 죽은 것입니다.

수넵 여인은 두 가지의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하나는 아직 어린 아들의 죽음 자체에 대한 고통이며,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왜 아들을 얻는 기쁨을 주시고는 이렇게 무참하게 빼앗아 가시는지, 그 뜻을 알 수 없어서 겪는 고통입니다. 수넵 여인은 아들의 죽음을 순순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엘리사을 찾아가는 수넴 여인(21-28)

문제가 발생하면 지체 없이 하나님 앞으로 달려 나가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희망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 희망을 멈추지 않고 나가면 어려운 현실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또한 그 어려운 과정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됩니다.

 

21그의 어머니가 올라가서 아들을 하나님의 사람의 침상 위에 두고 문을 닫고 나와 22그 남편을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사환 한 명과 나귀 한 마리를 내게로 보내소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달려갔다가 돌아오리이다 하니 23그 남편이 이르되 초하루도 아니요 안식일도 아니거늘 그대가 오늘 어찌하여 그에게 나아가고자 하느냐 하는지라 여인이 이르되 평안을 비나이다 하니라 24이에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몰고 가라 내가 말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위하여 달려가기를 멈추지 말라 하고 25드디어 갈멜 산으로 가서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멀리서 그를 보고 자기 사환 게하시에게 이르되 저기 수넴 여인이 있도다 26너는 달려가서 그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27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안은지라 게하시가 가까이 와서 그를 물리치고자 하매 하나님의 사람이 이르되 가만 두라 그의 영혼이 괴로워하지마는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 하니라 28여인이 이르되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 하니(21-28)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것들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가져가시는 것이 당연한데도 우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든 경우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절대 행복도 절대 불행도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방인인 수넴 여인의 태도를 보면서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⑴ 엘리사를 찾는 수넴 여인(21-24)

 

수넴 여인은 죽은 아들을 엘리사의 방으로 데리고 올라가 엘리사의 침상에 눕히고 문을 닫고 나와 다른 사람들이 아이에게 접근할 수 없게 합니다. 그러고는 남편을 불러 자신에게 종 한 사람과 나귀 한 마리를 주어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달려갔다 올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갈멜산에 머물고 있는 엘리사를 만나기 위해 다녀오겠다고 말합니다. 남편은 초하루도 아니고 안식일도 아닌데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는 것에 대해 걱정합니다.

이런 아내의 요구에 남편은 초하루나 안식일처럼 특별히 선지자를 찾아가 신탁을 받는 날도 아닌데, 왜 엘리사에게 가려느냐고 반문하며 만류합니다. 원래는 예배와 교훈을 얻기 위해서는 선지자의 집에 나아가는 날은 정해져 있었습니다(참고, 아모스 8:5; 민수기 28:9-15). 하지만 그 여인은 남편의 염려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형식적인 종교 규례에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나귀를 타고 갈멜산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녀에게는 오로지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에게 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수넴 여인과 남편의 관계를 보면, 남편에게 말하는 22절은 전체적으로 청유형(請誘形) 문장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수넴 여인이 엘리사에게 다녀올 수 있도록 매우 공손하게 남편에게 요청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남편에게 예의 바른 아내였던 것입니다. 반면에 23절을 보면 이 수넴 여인은 남편이 가지 말라고 말리는 말을 듣고는 아무 설명 없이 다녀오겠다는 인사만 하고 바로 출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수넴 여인은 예의 바른 아내인 동시에 매우 독립적이고 의지가 강한 인물로 보입니다.

여기서 수넴 여인은 ‘달려가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급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집을 출발하면서 그녀는 사환에게 자신을 배려해서 나귀 모는 속도를 늦추지 말라고 합니다. 도리어 최대한 빨리 가자고 재촉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며 간절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갈멜산으로 재촉한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볼 수 없었던 믿음입니다. 이방여인이었던 수넴 여인에게서 찾아 볼 수 있었습니다.

 

⑵ 수넴 여인의 원망(25-28)

 

수넴 여인이 갈멜 산에 도착했을 때, 엘리사가 먼저 알아봅니다. 선지자는 게하시를 보내 수넴 여인에게 남편과 아이의 안부를 물어보라고 합니다.

여기서 ‘평안하냐?’는 안부를 묻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게하시의 안부 인사를 들은 여인은 그냥 간단한 인사만 하고는 가던 길을 멈추지 않고 지나칩니다.

수넴 여인의 목적은 엘리사를 만나는 것이 기에 곧장 산으로 달려가 엘리사를 만나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를 만나자마자 그의 발을 끌어안습니다. 여기서 발을 안는 것은 자신을 낮추고 애원하는 행동입니다. 이런 행동은 구약에서는 여기에만 나오지만, 아카드 문헌에는 온갖 도망자나 간구자들이 복종이나 굴복을 나타내고 탄원하기 위해 왕의 발을 안는 예들이 매우 많이 나옵니다.

 

이런 갑작스런 행동을 본 게하시는 수넴 여인을 제지하려고 하였지만, 엘리사는 그대로 두라고 합니다. 그녀가 마음이 아프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만 무슨 내용인지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시지 않아 자신도 모른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엘리사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수넴 여인의 행동을 보며 매우 큰 비극이 닥쳤다는 것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에게 매우 날카로운 어조로 자신이 아들을 구한 적이 있느냐, 나를 속이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느냐며 원망의 말을 쏟아냅니다. 이 말은 자신이 구하지도 않은 아들을 주어서 삶에 희망과 기쁨을 품게 하고는, 이제 이처럼 무책임하게 아들을 죽게 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아들 잃은 비통함과 하나님에 대한 배신감에서 오는 아픔을 토로한 것입니다.

또한 이 말은 엘리사가 아들을 얻게 했으니 아들의 죽음도 책임지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말 속에는 엘리사라면 다시 이 아들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이 들어 있기도 할 것입니다. 그녀는 아픔을 쏟아놓기 위해 엘리사를 찾은 것이 아니라, 아들을 살릴 희망이 있기 때문에 먼 길을 급하게 달려온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수넴 여인은 아이가 죽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람라면 그 아이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믿음은 희망을 갖게 하고 그 믿음은 기적을 가져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문제만 커질 뿐입니다. 무릎 꿇고 하나님께 달려가야 합니다.

 

엘리사의 동행을 요청하는 수넴 여인(29-31)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방법을 찾습니다. 때로는 일시방책적인 해결책으로 더 큰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 방법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이방인 수넴 여인은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얍복 강가에서 기도한 야곱처럼 정말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29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이르되 네 허리를 묶고 내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라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인사할지라도 대답하지 말고 내 지팡이를 그 아이 얼굴에 놓으라 하는지라 30아이의 어머니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 엘리사가 이에 일어나 여인을 따라가니라 31게하시가 그들보다 앞서 가서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았으나 소리도 없고 듣지도 아니하는지라 돌아와서 엘리사를 맞아 그에게 말하여 아이가 깨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29-31)

 

수넴 여인의 말을 듣고 아이의 죽음을 알게 된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자신의 지팡이를 들고 급히 아이에게 가서 지팡이를 아이의 얼굴에 놓으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허리를 묶는다’는 것은 달려가는데 방해가 되지 않게 하라는 것으로 급하게 뛰어가라는 뜻입니다.

아무에게 인사하지도 받지도 말라는 것 역시 위급한 상황임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최대한 빨리 가서 아이 얼굴에 자신의 지팡이를 놓으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선지자의 지팡이는 선지자의 능력의 상징이며 지팡이를 통해 엘리사의 능력이 아이에게 임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수넴 여인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엘리사를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엘리사가 가야만 아이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는, 그가 반드시 가야 한다고 매달린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수넴 여인은 자기주장과 의지가 매우 확고한 여성입니다. 이렇듯 단호하게 매달리는 수넴 여인의 모습을 보고 엘리사도 결국 그 여인을 따라 나섭니다. 여기서 본문은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뒤를 따라갔다고 표현함으로써 이 일에서 수넴 여인이 주도권을 갖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엘리사보다 먼저 도착한 게하시는 시킨 대로 주인의 지팡이를 아이 얼굴 위에 놓았지만, 아이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습니다. 숨소리도 없고 생명의 징후를 나타내는 어떤 움직임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게하시는 엘리사에게 돌아와 아이가 깨어나지 않는다고 보고합니다. 엘리사의 지팡이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팡이는 단지 지팡이를 쓰는 사람의 신앙을 표시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게하시가 하나님께서 아이를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으면 그 지팡이는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지팡이가 아무런 효과도 없었던 것은 게하시의 믿음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수넴 여인은 문제 해결을 위해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자신의 아이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다른 어떤 수단이나 사람을 의지할 수 없었습니다. 형식적인 믿음은 있지만 열매가 없을 것입니다. 그의 삶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비아냥거립니다. 그것은 세상은 썩을지라도 성도들만이라도 썩지 않길 원하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종교는 결코 거룩함도 능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을 향해 어두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 달라고 아우성치는 것입니다.

 

죽은 아이를 살린 엘리사(32-37)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살다가 힘든 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너무 쉽게 낙심하거나 낙담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에게만 진정한 위로와 소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능히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어려운 사정을 아뢰고 해결 받아야 합니다.

 

32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33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34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의 입에,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대고 그의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35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 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36엘리사가 게하시를 불러 저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하니 곧 부르매 여인이 들어가니 엘리사가 이르되 네 아들을 데리고 가라 하니라 37여인이 들어가서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아들을 안고 나가니라(32-37)

 

엘리사는 자신의 침상에 누워 있는 아이를 보고 여호와께 기도하고 아이의 몸에 자신의 몸을 올려놓는데, 입과 입, 눈과 눈, 손과 손을 대고 아이 위에 누웠습니다. 엘리사는 지팡이 대신 자신을 아이에게 올려놓은 것입니다. 이런 행동은 열왕기상 17:21에서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이를 살리는 모습과 유사합니다. 엘리야는 아이의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기도했고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엘리사가 이렇게 하자 아이의 몸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잠시 내려와 집 안을 돌아다닌 뒤 다시 올라가 아이 위에 엎드리니 아이가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여기서 재채기를 한 것이나 눈을 뜬 것은 게하시가 지팡이를 올려놓았을 때 아무 반응이 없었던 것과 대조됩니다. 이렇게 살아난 아이는 다시 엄마 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수넴 여인은 죽은 아이가 살아난 것을 보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엘리사도 엘리야처럼 사람을 살리는 놀라운 권능을 행함으로 엘리야의 확실한 후계자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려 준 사건(열왕기상 17:17-24),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신 사건(마가복음 5:35-43) 그리고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살려 주신 사건(요한복음 11장) 등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통해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임을 다시 깨닫게 해줍니다. 이미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시는 능력은 우리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크신 능력으로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입니다. 엘리사의 기도는 들으시고 수넴 여인의 죽은 아이를 살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태에 놓여 있더라도 회복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당신을 하나님께서 치료와 회복이 필요한 부분이 어디입니까?


엘리사는 이 일로 확실한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시대적인으로 믿음을 찾아보기 힘든 상황에서 이방인 출신인 수넴 여인은 믿음을 보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누가복음 18:8)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는 믿음은 미지근한 믿음이 아니라 이 여인처럼 끝까지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상황을 볼 때, 해결자이신 하나님께서 항상 가까이 계십니다. 수넴 여인처럼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이 당신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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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4-01)


선지자로 인정받은 엘리사⑴

열왕기하 4장 1-17절


사람들이 누리는 모든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복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길 원하시지만, 더욱 자녀들에게 복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비가 내려와도 그릇이 엎어 놓으면 빗물을 한 방울도 담을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아무리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실지라도 마음 문을 열지 않으면 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 엘리야가 떠난 자리에 엘리사가 남았습니다. 4장부터는 엘리야의 제자란 말은 나오지 않고 엘리사라고만 나옵니다. 스승 엘리야에게 두 배나 다 많은 영적인 능력을 요구했던 엘리사는 네 가지 기적을 행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엘리사가 하나님의 능력을 실현하는 종임을 입증합니다. 그 첫 번째 기적이 죽은 제자의 아내를 돕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운 제자의 가정을 돌봄(1-7)

오늘날 부정적 관행의 온상임을 모르는 이는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부조리하고 이해하시 어려운 처지에서 성도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 대한 마땅한 반응은 세상을 향한 간절한 기도요 강청입니다. 엘리사는 한 제자의 부인의 강청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영적 위치를 증명해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선지자의 제자들의 아내 중의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빚 준 사람이 와서 나의 두 아이를 데려가 그의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하니 2엘리사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말하라 그가 이르되 계집종의 집에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하니 3이르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 4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 하니라 5여인이 물러가서 그의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그들은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오고 그는 부었더니 6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아들이 이르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 7그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말하니 그가 이르되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 하였더라(1-7)

 

엘리사는 북이스라엘과 두 나라가 모압과의 전쟁을 통해서 선지자로서의 권위를 확고하게 확보하였습니다. 이곳에서부터는 엘리사가 ‘엘리야의 제자’란 표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4장에 있는 네 가지 기적인 ‘가난한 제자의 고부의 궁핍한 문제’(1-7),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림’(8-37), ‘독이 든 음식을 고치는 일’(38-41), ‘한 솥을 끓여 200명을 먹이는 일’(42-44) 등이 등장합니다. 엘리사가 사역한 네 가지 일들은 생명을 살리고 궁핍을 벗어나게 하는 이야기를 모아놓은 모음집이기 때문에 화자는 시간적 배경에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첫 이야기는 선지자 중에 엘리사의 한 제자의 아내가 엘리사를 찾아와 부르짖으면서 시작됩니다. 이 여인은 엘리사의 제자의 아내였습니다. 여기 본문에서 ‘부르짖다’는 어려운 상황에 빠진 사람이 간저하게 도움을 청할 때 사용하는 말로서, 제자의 아내는 매우 다급하게 엘리사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이 엘리사의 제자의 아내는 남편이 죽고 그의 아내는 두 아들과 살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했습니다. 먹고살 것도 난감한데 빚까지 있어 경제적인 생활고를 호소했습니다. 제자의 아내는 자신의 남편이 죽은 사실과 그가 하나님을 경외한 선지자로 엘리사의 종이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것은 남편의 죽음이 죄로 인한 것이 아니며, 신실하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다가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아마 남편이 병들어 죽어가는 과정에서 많은 간호비와 생활비가 들어갔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빚을 졌는데, 갚지 못했던 것입니다. 빚을 준 사람이 종으로 삼기 위해 두 아이를 데려가려 상황이 벌려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모른 척한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여인은 엘리사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선 빚을 갚지 못하면 노예가 될 수 있었기에 율법에도 히브리 노예에 대한 규례가 언급 됩니다(출애굽기 21장). 신실한 하나님의 종으로 살았지만, 그 가족에게 만은 것은 비극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살아있을 때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서 권력자들의 비위나 맞추고 호의호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그 여인에게 집에 무엇이 있냐고 묻습니다. 엘리사는 그것을 기반으로 도움을 주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자신의 집에는 기름 한 그릇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제자의 아내의 궁핍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이웃에게서 그릇을 빌리되 될 수만 있으면 많이 빌려오라고 권고합니다. 혹시라도 적게 빌려와 그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염려한 것입니다.

 

엘리사는 여인에게 문을 닫고 빌려온 그릇들에 기름을 부어 채우라고 지시하였고, 여인은 지시대로 기름을 부어 그릇을 채우기 시작하는데, 빌려온 그릇을 다 채울 동안 기름이 계속해서 나왔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손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보면서, 또 아이들은 눈앞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보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자비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릇이 다 차자 기름은 멈추었고, 엘리사는 이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돈으로 두 아이와 함께 살 생활비로 쓰라고 합니다.

여기서 엘리사가 직접 행하지 않고도 놀라운 이적이 일어나는 것을 통해 엘리사의 능력과 하나님의 권능이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사역자의 가족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여기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인 예수님의 기적처럼, 하나님께서는 한 그릿 기름으로 여인의 모든 빚을 탕감하고 두 아들과 생활할 수 있을 만큼 넘치게 해주셨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이 자졌는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얼마나 곧이곧대로 순종했는지가 중요합니다.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도움(8-10)

하나님께서 먹여주신다는 믿음이 없으면, 더 이상 사역자가 될 수 없습니다. 사역자가 돈에 밝은 사람이 되면, 돈을 버는 것이 사역에 목적이 되면 더 이상 마음을 지킬 수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사명에 집중하고 따라 살아가는 삶만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8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에 이르렀더니 거기에 한 귀한 여인이 그를 간권하여 음식을 먹게 하였으므로 엘리사가 그 곳을 지날 때마다 음식을 먹으러 그리로 들어갔더라 9여인이 그의 남편에게 이르되 항상 우리를 지나가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 10청하건대 우리가 그를 위하여 작은 방을 담 위에 만들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두사이다 그가 우리에게 이르면 거기에 머물리이다 하였더라(8-10)

 

선지자의 제자 아내 이야기 다음으로 수넴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집니다. 수넴 지역은 이스르엘 마을 북쪽에 위치하며, 모레 산기슭에 있는 마을로 잇사갈 지파 땅입니다.

 

엘리사가 갈릴리 남쪽 지역을 여행할 때 수넴 지역을 지나는데, 어느 날 그곳에 이르렀을 때에 그곳에서 부유하고 신분이 높은 한 여성이 엘리사에게 자신의 집에서 식사하라고 강하게 권유하였습니다. 덕분에 엘리사는 수넴을 지날 때마다 이 여성의 집에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엘리사에게 음식을 제공한 이유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9)라고 설명합니다. 엘리사가 하나님의 사람, 즉 참 선지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란 말에는 엘리사를 하나님의 참 선지자로 생각한다는 것과 이런 선지자를 보내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녀는 음식 대접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남편에게 엘리사를 위한 방을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요청합니다.

 

본문에서 방에 침상, 책상, 의자, 촛대를 둔다는 것은 언제든지 와서 불편하지 않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배려가 넘치는 행동입니다. 이 집은 가끔 오는 손님을 위해 방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을 가진 부유한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 나온 선지자의 아내와 대조적입니다.

 

여기서 남편의 대답이 나오지 않고 바로 방에 누운 엘리사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이 이야기의 중심은 수넴 여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로도 남편은 어떤 역할도 하지 않습니다.

 

수넴 여인에게 원하는 것을 묻는 엘리사(11-13)

진정한 하나님의 일꾼이라면 자기 입장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입장만 생각하면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지만,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사람은 타인을 위한 배례와 중보기도가 끊기지 않습니다. 두 번째 나온 수넴 여인은 영적인 안목과 자신의 넉넉함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섬길 만큼 열정적인 헌신이 있었습니다.

 

11하루는 엘리사가 거기에 이르러 그 방에 들어가 누웠더니 12자기 사환 게하시에게 이르되 이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하니 곧 여인을 부르매 여인이 그 앞에 선지라 13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너는 그에게 이르라 네가 이같이 우리를 위하여 세심한 배려를 하는도다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하랴 왕에게나 사령관에게 무슨 구할 것이 있느냐 하니 여인이 이르되 나는 내 백성 중에 거주하나이다 하니라(11-13)

 

수넴 여인의 넘치는 호의로 수넴에 올 때마다 편한 생활을 하던 엘리사는 그녀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사환 게하시에게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수넴 여인과 엘리사가 직접 말하는 것이 아니고 게하시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신분이 높은 여성의 경우 남편이 아닌 남성을 대면하여 말하는 것이 당시 예절에 어긋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엘리사는 수넴 여인에게 자신을 위해 매우 신경 써서 세심하게 준비해준 것에 대해 감사의 표시를 한 후 자신이 이에 대해 어떤 보답을 해주면 좋을지를 묻습니다.

 

그러면서 엘리사는 혹시 왕에게 넣을 청이 있다거나 그 지역의 군사령관에게 넣을 청이 있는지 묻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아무리 어려운 요청이라도 들어주겠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당시 엘리사가 왕이나 군대 장관들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수넴 여인은 자신이 자신의 백성 중에 거한다고 말하면서 엘리사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나는 내 백성 중에 거주하나이다.’라는 것은 자신이 어려움에 처하면 가까이에 사는 친척들에게서 얼마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왕이나 군사령관처럼 권력 있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이 여성은 자신의 삶에 자신감이 있으며 만족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 여성의 삶에 결핍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에게는 아들이 없는 심각한 결핍이 있었고 그것은 당시 여성에겐 수치스런 일이었음에도 그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현재의 삶에 감사하고 욕심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걸 보면 수넴 여인은 엘리사의 덕을 보기 위해서 도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순수하게 도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순수하게 하나님을 위해 일할 때 가장 기뻐하십니다.

 

수넴 여인이 아들을 낳을 것을 알려줌(14-17)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면 벌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돈으로 자신의 만족을 채우지는 못합니다. 만족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행복감을 느낄 수도 없는 것입니다. 행복은 물질 자체에 있거나 물질을 모으는 행위에 있지 않음을 기억합시다. 진정으로 삶을 충만하게 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14엘리사가 이르되 그러면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할까 하니 게하시가 대답하되 참으로 이 여인은 아들이 없고 그 남편은 늙었나이다 하니 15이르되 다시 부르라 하여 부르매 여인이 문에 서니라 16엘리사가 이르되 한 해가 지나 이 때쯤에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하니 여인이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 하니라(14-17)

 

이런 수넴 여인의 마음을 알게 된 엘리사는 그녀에게 무엇이 필요하지 알고 꼭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엘리사는 그녀에게 어떻게 해주면 좋을지 자신의 시종인 게하시에게 묻습니다.

 

게하시는 그녀에게 아들이 없고 남편은 늙어서 아들을 가질 수 없는 상태임을 알려줍니다. 고대 가부장 사회에서 아들이 없다는 것은 그들의 이름을 이어갈 상속자가 없는 매우 불행한 상황입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수넴 여인을 다시 불러 내년 이맘때 품에 아들을 안을 것이라는 예언을 합니다. 여기서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17절에서 실제로 아들을 낳은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해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장에서의 엘리사의 이적 사역에는 여호와가 직접 말씀하시거나 행하신다는 언급 없이 오직 엘리사가 행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이 것은 엘리사가 큰 권능을 행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 뿐 여호와의 도움 없이 엘리사가 자신의 권능만으로 행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어떤 힘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엘리사의 예언을 수넴 여인은 믿지 않았고 속이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아마도 수넴 여인은 자신이 먼저 엘리사에게 아들을 요청했을지도 모릅니다. 수넴 여인은 하나님을 경외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은 잘 몰랐던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사의 말처럼 이 여인은 1년 뒤 아들을 품에 안음으로써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대로 주신 것이 아니라 믿음 그 이상으로 주심으로서 그 은혜에 어울리는 믿음으로 만들어 가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믿음에 어울릴 믿음으로 반응하시길 바랍니다. 어디에 있든지, 누구와 함께 하든지, 무슨 하든지 엘리사의 하나님과 동행하시고 하나님께서 예비한 축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주의 일에 충성합니다. 마땅한 충성이고 섬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우리가 당신에게 행한 것보다 훨씬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이 넉넉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결코 거래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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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3-02)


이스라엘 연합군과 모압과의 전쟁

 

열왕기하 3장 13-27절


모 스포츠 회사 광고 문구 중에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Impossible is Nothing)이라는 문구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복싱 선수인 알리가 했던 말입니다. 세상에 많은 일들 앞에서 연약한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자신의 사역을 위해서 합당한 일꾼을 찾으시고 계십니다.

 

  • 북이스라엘의 왕이 된 여호람은 반란을 일으킨 모압과 전쟁을 하기 위해 군사를 모으고, 유다의 여호사밧 왕과 동맹을 맺습니다. 하지만 예정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면서 광야에서 물 부족을 겪게 되고 연합군이 위기를 겪게 되는 가운데 드디어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의 선지자를 찾습니다. 이때 소개된 선지자가 바로 엘리사이고, 엘리사는 여호람 왕과 여호사밧 왕을 처음 만나게 됩니다.

 

여호람을 반기지 않는 엘리사(13-14)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이루어 가실 때, 사람들을 부러서 사용하십니다. 사역자의 기준은 얼마나 많은 중요한 일을 감당했었느냐, 그 사람이 어떤 중요한 인물이냐를 중요하게 보지 않습니다. 다만 사역을 감당할 사람이 얼마나 깨끗한 그릇인지를 살펴보실 뿐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기 원하신다면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13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의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로 가소서 하니 이스라엘 왕이 그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나이다 하니라 14엘리사가 이르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만일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얼굴을 봄이 아니면 그 앞에서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이다(13-14)

 

원래 모압은 북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받치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 아합이 죽자, 모압이 반역을 해서 더 이상 조공을 받치지 않았습니다. 위협을 느낀 북이스라엘 왕이 여호람은 남 유다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남유다는 북이스라엘을 도와서 전쟁에 참여하고, 에돔 역시 이스라엘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세 연합군들은 전쟁에서 큰 어려움을 만나서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옵니다.

 

북 이스라엘의 왕 여호람을 본 엘리사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습니다. 그는 여호람에게 굉장히 쌀쌀맞게 대합니다.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있냐’며, 그러면서 ‘당신의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로 가소서’고 빈정거립니다. 여기서 여호람의 부친인 아합의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들을 말합니다.

열왕기상 22장에 따르면 아합이 아람과 전쟁하기 위해 400명의 선지자를 불렀지만, 이들은 모두 아합이 이길 것이라는 거짓 예언을 합니다. 자신에게 좋은 말만 해주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만 듣었습니다. 여호람의 모친인 이세벨의 선지자는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입니다. 이세벨은 결혼하면서 바알 선지자와 제사장들을 데리고 이스라엘에 왔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바알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애를 쓴 인물입니다.

이렇게 아합과 이세벨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하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지자이자 엘리사의 스승인 엘리야를 죽이려고 찾아다닌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아들이 와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에 대해 엘리사는 여호람이 정말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은 건지 빈정거리며 의구심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런 엘리사의 말에 여호람은 그럴 수 없다며,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나이다’라고 자신들이 위기에 처해서 찾아왔다고 고백합니다. 여호람은 자신들의 위기를 여호와께서 모압과의 전쟁에서 지게하려는 뜻으로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여호람은 전쟁을 준비하면서 여호와의 뜻을 묻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에 처하자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모압의 손에 넘기기 위해 부르셨다면서 하나님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이런 여호람에게 엘리사는 자신의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라고 부르며, 유다 왕 여호사밧 때문에 여호람을 보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여호람 쪽으로 얼굴도 돌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냉정하게 말합니다. 엘리사는 여호람을 전혀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는 모든 전쟁의 주관자이자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이 라는 것을 나타내는 호칭입니다.

 

이 장면만 보면, 엘리사는 무례한 사람이고 여호람 왕은 매우 착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더욱이 열왕기하 3:2에서 여호람이 자신의 아버지 아함이 만들었던 바알의 주상을 없앴다고 나옵니다. 이런 모습으로 여호람은 괜찮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여호람에게 쌀쌀맞은 것은, 그 이유가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의 부모와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으니’라고 여호람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아함이나 이세벨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사의 태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악인을 대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물을 주심(15-20)

뜻하지 않는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을 중심으로 살라고 권고합니다. 어려울 때는 무엇인가 도움을 찾고 누구에게 인가 도움을 구할 때가 있습니다. 상황에 집착하면 힘들고 어렵지만, 눈앞의 상황에 함몰되기보다 말씀 앞에 서서 돌파구를 찾아야 합니다. 자신의 신뢰의 깊이와 너비는 얼마나 됩니까?

 

15이제 내게로 거문고 탈 자를 불러오소서 하니라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의 손이 엘리사 위에 있더니 16그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하셨나이다 17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너희가 바람도 보지 못하고 비도 보지 못하되 이 골짜기에 물이 가득하여 너희와 너희 가축과 짐승이 마시리라 하셨나이다 18이것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작은 일이라 여호와께서 모압 사람도 당신의 손에 넘기시리니 19당신들이 모든 견고한 성읍과 모든 아름다운 성읍을 치고 모든 좋은 나무를 베고 모든 샘을 메우고 돌로 모든 좋은 밭을 헐리이다 하더니 20아침이 되어 소제 드릴 때에 물이 에돔 쪽에서부터 흘러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15-20)

 

엘리사는 거문고 탈 자를 불러오라고 요청합니다. 여기서 ‘거문고 탈 자’는 ‘현악기를 타는 자’라는 뜻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사용되던 현악기는 일반적으로 수금으로 번역됩니다. 아마도 다윗이 사울을 위해 연주한 것과 같은 종류의 악기 일 것입니다. 엘리사가 수금 타는 자를 불러 달라고 한 이유는 하나님의 신탁을 받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선지자들이 정확히 어떤 의식을 통해 하나님의 신탁을 받았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사무엘상 10:5에 따르면 선지자 무리가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수금을 연주하는 사람들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올 것이라는 신탁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면 선지자들이 예언을 받을 때 음악으로 분위기를 만드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이 음악을 매개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고, 꿈이나 환상 혹은 음성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신탁을 받습니다(예레미야 1:11,15). 음악이 연주될 때 여호와의 손이 엘리사에게 임합니다. 손은 구약에서 권능의 상징으로 여호와의 손이 엘리사 위에 임했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엘리사에게 신탁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엘리사는 이 골짜기에 개천을 파라고 명령하며, 하나님께서 너희가 바람도 보지 못하고 비도 보지 못하지만 이 골짜기에 물이 가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바람도 비도 보지 못하고’란 말은 골짜기에 물이 가득 차는 것이 자연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라는 의미입니다. 물의 양이 넉넉하여 군인들뿐 아니라 그들이 데리고 온 모든 가축들까지 먹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하십니다. 이 정도의 일은 여호와께 매우 사소한 일이며, 이제 세 나라 연합군의 손에 모압을 넘겨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구체적으로 연합군이 모압의 모든 성읍을 헐고 완전히 폐허로 만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즉, 물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모압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주실 것에 대한 징표인 것입니다. 엘리사가 말한 대로 아침 소제 드릴 때 물이 에돔으로부터 흘러와 그 땅을 가득 채웠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연합군이 모압을 이김(21-25)

멸망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우상의 힘을 의지할 뿐입니다. 때로는 우상의 경배하는 방식은 자녀를 불살라 바치는 끔찍한 인신제사까지도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이들의 최후는 이토록 비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승리를 주십니다.

 

21모압의 모든 사람은 왕들이 올라와서 자기를 치려 한다 함을 듣고 갑옷 입을 만한 자로부터 그 이상이 다 모여 그 경계에 서 있더라 22아침에 모압 사람이 일찍이 일어나서 해가 물에 비치므로 맞은편 물이 붉어 피와 같음을 보고 23이르되 이는 피라 틀림없이 저 왕들이 싸워 서로 죽인 것이로다 모압 사람들아 이제 노략하러 가자 하고 24이스라엘 진에 이르니 이스라엘 사람이 일어나 모압 사람을 쳐서 그들 앞에서 도망하게 하고 그 지경에 들어가며 모압 사람을 치고 25그 성읍들을 쳐서 헐고 각기 돌을 던져 모든 좋은 밭에 가득하게 하고 모든 샘을 메우고 모든 좋은 나무를 베고 길하레셋의 돌들은 남기고 물매꾼이 두루 다니며 치니라(21-25)

 

21-23절은 모압의 관점으로 모압 사람들은 세 나라 연합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전쟁을 할 만한 남자들을 모두 소집하여 전쟁을 준비합니다. ‘갑옷 입을 만한 자’는 무장한 사람이란 뜻으로 주로 가볍게 무장한 사람들을 나타내는데, 이것은 소집된 사람들이 훈련된 정규군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란 의미입니다.

22절은 20절과 같은 시간으로 20절은 연합군의 시점에서 본 것이고, 22절은 모압의 시점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경계를 서던 모압 사람들은 골짜기에 흐르는 물에 태양이 떠오르며 붉게 비치는 모습을 보고 피라고 착각합니다. 전날 밤까지 골짜기에 물이었기 때문에 붉게 흐르는 물을 그냥 물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여호와의 역사가 갑작스럽게 일어났다는 의미입니다. 붉은 물을 피 라고 착각한 모압 사람들은 세 연합군의 왕들이 서로 싸워 살육하였고, 그 결과 피가 이렇듯 강처럼 흐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판단을 한 모압 군대는 이런 추론을 확신합니다. 그래서 서로 죽여 초토화된 진영에 들어가서 노략하자면서 이스라엘 진으로 쳐들어갑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진으로 쳐들어갑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진은 모압 사람들이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르게 잘 준비되어 있었고, 모압 사람들을 쳐서 죽이고 도망가는 사람들을 쫓아 모압 지역 까지 밀고 들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모압 지역을 초토화합니다. 연합군은 밭에 돌을 가득 던져 넣고 샘을 메워 유실수들을 베어버림으로 모압 지역을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마지막에 남은 백성들은 칼이나 활이 아닌 물매꾼들이 던진 물매에 맞아 죽습니다. 이것은 모압이 매우 처참하게 패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압 왕이 아들을 번제로 드림(26-27)

권력과 신앙이 잘못된 만남의 결과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성도들을 핍박하고 탄압합니다. 잘못된 사상은 하나님을 내려놓고 피조물을 우상화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이 막히기 때문에 점점 악한 방법으로 그들의 우상을 섬기게 되어 집니다. 대표적인 모습을 모압 왕에게서 봅니다.

 

26모압 왕이 전세가 극렬하여 당하기 어려움을 보고 칼찬 군사 칠백 명을 거느리고 돌파하여 지나서 에돔 왕에게로 가고자 하되 가지 못하고 27이에 자기 왕위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데려와 성 위에서 번제를 드린지라 이스라엘에게 크게 격노함이 임하매 그들이 떠나 각기 고국으로 돌아갔더라(26-27)

 

상황이 심각하여 연합군에게 전멸당할 위기에 처하자, 모압 왕은 칼 찬 군사, 즉 잘 훈련된 정예 병사 700명을 이끌고 연합군의 진을 돌파하여 에돔 왕에게 가려고 시도하였지만 실패합니다. 현재 에돔 왕도 연합군에 속해 있기 때문에, 모압이 에돔 왕에게 피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렇게 죽을 위기로 몰리자 모압 왕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데, 자신의 뒤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성 위에서 번제로 드렸습니다.

자식을 신에게 번제로 바치는 풍습은 구약에서 몰렉에게 자식을 드리지 말라는 율법의 금지 조항에 등장합니다. 이 제사는 이스라엘에선 금지되었지만, 고대 근동에선 종종 행해지던 것으로 위급한 상황에서 신에게 최대의 충성을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이런 행동을 본 모압 사람들은 맹렬한 분노를 품고 죽기 살기로 연합군에게 대항하였고, 결국 연합군은 이들에게 밀려 각자의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결국 모압을 완전히 멸망시키거나 진멸하지 못하고 전쟁에 승리하는 수준에서 전쟁을 마치고 돌아갑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압을 진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자신의 언약에 대해 신실한 한 사람, 전심으로 기도하는 한 사람, 모든 인간적인 계산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열어 가실 시간을 기대하고 상상하는 한 사람, 그 한 사람을 보시고 용서하시고, 그 한 사람을 인하여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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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55-01)


들으시며 심판하실 신실하신 하나님

시편 55편 1-23절


 

운전자가 눈을 갈리고 운전할 수 없습니다. 순종은 이런 눈가리개를 벗겨내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부르심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빌 3:14; 롬 8:29).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부르심의 길로 들어서지도 못한 채 곁길로 빠지고 맙니다.

 

  • 거짓과 죄악과 폭력을 행하는 악인들로 인해 분쟁과 재난과 억압이 떠나지 않는 성에서 시인은 악인의 압제와 핍박으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두려워하며 도망가서 피하기를 원합니다. 특히 친구가 배반하여 시인을 대적하므로 괴로움과 분노 속에서 하루 종일 탄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도움을 위한 기도(1-3)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제대로 보면, 우리의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충만해집니다(히 4:12-13; 요일 1:5). 우리 안에 어두움이 조금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 “눈이 건강하다”라고 표현합니다. 반면 눈이 악한 것에 고정되어 있으면, 온 몸이 어두워집니다.

 

1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2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하지 못하여 탄식하오니 3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 때문이라 그들이 죄악을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1-3)

 

시인은 하나님을 부르며 시를 시작합니다.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라고 간청합니다(1). 자신의 어려운 형편을 외면하지 마시고 굽어 살펴보시고 응답하시며 도와주시기를 구합니다. 시인은 근심과 한탄 속에서 마음이 편치 못하여 방황하며 혼란스럽다고 합니다(2). 3절에서는 고통 속에서 기도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합니다.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 때문입니다. 다음 문장에서 이를 자세히 설명하는데, 원수들이 재앙을 내게 쏟아부으며 분노하고 강한 적개심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악인들이 시인을 향하여 분노와 적개심으로 소리를 지르며 압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고통과 두려움으로 인한 탄식(4-8)

우리 안에 있는 등불은 무엇으로 인해 점점 어두워지거나 밝아지게 됩니까? 우리 마음에 샛별이 떠오르면 우리는 어두움에 거하지 않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기 때문에, 어두움이 그를 사로잡을 수 없습니다.

 

4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 5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 6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7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 8내가 나의 피난처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4-8)

 

시인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묘사한 후, 이 속에서 자신의 심정이 어떠한지를 그립니다(4-8). 마음이 심히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느껴 두려움과 떨림으로 견딜 수 없는 상황입니다(4-5). 죽음의 공포와 전율 속에서 시인은 비둘기처럼 날개가 있다면 어디론가 날아가서 편히 쉬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멀리 날아가 아무도 없는 광야에라도 머물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합니다(6-7). 광야는 사실 사람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입니다. 그런데 그 광야로 가면 편히 쉴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이 얼마나 험악한 상황인가를 암시해줍니다. 시인은 피난할 수 있는 곳으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기를 바합니다(8). 폭풍과 광풍은 분노와 적개심으로 가득 찬 원수의 소리와 압제(3)를 상징하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성내 악인의 멸망을 위한 간구(9-11)

사람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성을 쌓고, 고시를 형성하고, 친구를 사귀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고통과 위협을 당하여 차라리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도망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사람이 만든 것은 궁극적인 안전장치가 될 수 없습니다. 시인이 겪고 있는 고통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9내가 성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주여 그들을 멸하소서 그들의 혀를 잘라 버리소서 10그들이 주야로 성벽 위에 두루 다니니 성 중에는 죄악과 재난이 있으며 11악독이 그 중에 있고 압박과 속임수가 그 거리를 떠나지 아니하도다(9-11)

 

사람이 살 수 없는 광야를 오히려 피난처라고 생각할 만큼 시인이 사는 곳이 험악한 상황임을 앞에서 암시했는데, 이 단락에서는 시인이 사는 성 안의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개역개정과 달리 히브리 본문에서는 9절이 원수의 심판을 구하는 간구, ‘멸하소서, 주여(아도나이), 혀를 나누소서(잘라 버리소서)’로 시작됩니다. 평행을 이루는 ‘멸하소서’와 ‘혀를 나누소서’는 혼돈과 나눔(분열)이 일어나게 하여 대적들을 심판해달라는 간구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언어의 혼잡과 나눔으로 심판하셨던 창세기 11장 바벨탑 사건을 생각나게 합니다.

명령형으로 심판을 간구한 후, 히브리 본문에서는 9절 하반절이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하며 심판을 간구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시인이 성내에서 악인으로 인한 강포와 분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내에서 싸움과 분쟁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폭력적인 싸움입니다. 10-11절은 성안의 상황을 더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10절의 “그들”은 강포와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성벽 위는 성을 지키는 자들이 성 안팎의 문제들을 빨리 발견하고 해결하기 위해 보초를 서는 곳인데, 폭력과 싸움을 일으키는 악인들이 밤낮으로 성벽 위에 두루 다닌다고 합니다. 악인들이 성안을 휩쓸고 다녀서 성안이 폭력적인 싸움으로 가득 차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 외에도 성안에는 죄악과 재난이 있고 파괴 행위들이 난무하며, 거리에는 압제와 거짓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생명의 풍성함과 안식을 보장해 주어야 할 성에 온갖 범죄가 자행되어 성안이 거짓과 불의와 억압으로 가득 차 있는 상황입니다.

 

친구의 배반과 심판 간구(12-15)

눈을 가린 베일이 주님의 형상을 왜곡시키는 것처럼 들보도 동일한 작용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들보를 먼저 제거해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다른 형제자매의 눈에 있는 티도 제거할 수 있게 된다는 하십니다. 일단 내 눈의 들보가 맑고 순수한 동기로 남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12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13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14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15사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임하여 산 채로 스올에 내려갈지어다 이는 악독이 그들의 거처에 있고 그들 가운데에 있음이로다(12-15)

 

앞에서 성안에 악이 가득 찬 것을 말하다가 12절 이하에서 갑자기 자신의 원수가 친구라는 내용이 나와 이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9절 상반절에서 원수를 멸해달라고 간청한 후, 하반절에서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심판을 구하는 이유가 나왔는데, 12절도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하므로 심판을 구하는 이유가 연장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2-13절 내용을 보면, ‘원수가 나를 대적하여 과격하게 말한다면 참았을 것이고,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를 대항하여 자기를 높인다면 그를 피하여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원수가 나를 대적하면 원수니까 대적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참을 수 있다. 그런데 나를 대적하여 거칠게 말하고 자신을 높이는 자가 원수가 아니라 바로 너다. 나의 동료요,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다.’ 더구나 시인은 그 친구와 함께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고 무리 속에서 함께 성전 예배에 참석하곤 했습니다(14). 이들은 단순히 세상적인 우정만 있는 친구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사귄 믿음의 친구였습니다. 원수의 대적보다 더 괴로운 것은 친구의 배신입니다. 아마도 2b-5절, 9-11절에서 보여주는 시인의 고통과 혼란스러움의 가장 큰 원인이 친구의 배신일 것입니다. 이에 시인은 원수들에게 어떤 시도도 해볼 수 없을 만큼 갑자기 죽음이 임하기를 구합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거하는 곳마다 죄악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15).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16-19b)

순종하는 사람은 처음에는 희미한 빛으로 시작하지만, 점차 더 밝아져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고, 급기야는 한낮의 태야과 같이 활활 타오를 것입니다. “의인이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마 13:43) 이 세상에서 온전케 되던 의인들은 심판의 날에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16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17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18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그가 내 생명을 구원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19옛부터 계시는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들을 낮추시리이다(셀라)(16-19b)

 

배신의 상처로 인해 격렬하게 원수의 심판을 구한 후, 시인이 마음을 진정하고 다시 여호와를 바라보며 주께서 구원하실 것을 신뢰합니다. 하루 종일 근심하고 탄식하며 기도를 멈추지 않을 때 여호와께서 그 소리를 들으실 것을 확신합니다. 대적하는 자가 많고 그들이 공격하기 위해 자신에게 다가오지만,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시고 평안하게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생명을 구원하다’는 완료형이지만 기원을 표현합니다.

19절에서는 하나님을 ‘태초부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영원부터 영원까지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악인들을 낮추실 것이라고 다시 한 번 확신합니다.

 

배신한 친구의 모습(19c-21)

지금 여러분에게 고난이 닥쳤다면 다윗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고난을 이기려 하지 말고 먼저 기도에 매달려야 합니다. 다윗은 하루 세 번의 기도 시간을 정했고, 항상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생명을 구원하시고, 평안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기도에 응답하실 때, 구원과 평안이 주어질 것입니다.

 

19c… 그들은 변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이다 20그는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 그의 언약을 배반하였도다 21그의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그의 마음은 전쟁이요 그의 말은 기름보다 유하나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19c-21)

 

시인은 친구의 교활한 모습을 다시 생각합니다. 그들은 악을 행함에 있어서 전혀 변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습니다. 친한 친구를 배반하고 언약을 저버립니다. 그들의 말은 버터와 기름처럼 부드럽지만, 마음은 전쟁터처럼 살벌하고 언제든지 찌를 수 있도록 칼집에서 뽑아놓은 칼과 같습니다. 언제든 손쉽게 악을 행할 준비가 되어있는 자들입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 고백(22-23)

우리가 짐을 지고 가면, 안정감을 누리지 못하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합니다. 우리의 삶에 있는 무거운 짐들을 맡겨 놓을 곳이 있다면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기꺼이 우리의 짐을 지기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그동안 붙잡고 있던 우리의 짐을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는 그 짐을 지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붙들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22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23하나님이여 주께서 그들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그들의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22-23)

 

22절 말씀은 시인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또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는 권면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자신을 포함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는 권면으로 보입니다. ‘네 짐 곧 너의 염려를 다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지키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이 넘어지거나 쓰러지는 것을 영원히 허락하지 않으신다.’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이 말씀만큼 든든한 위로의 말씀이 없을 것입니다. 시인은 완전히 마음의 평정을 회복하고 확신에 차서 이런 권면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부르며 시를 시작했던 시인은 하나님을 부르며 시를 마무리합니다. 악인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확신하며 하나님께서 피를 흘리며 속이는 사자들을 파멸시키실 것을 간구합니다. 자신은 변함없이 주를 의지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리 가운데 보재진 양과 같이 세상을 살아갑니다(눅 10:3). 양이 이리 떼를 이길 수 없듯이 우리의 힘으로 세상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승리하시고 반드시 악인들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다윗이 오직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써 구원의 은혜를 누렸듯이, 우리도 흔들리지 않고 거룩한 백성의 의무를 감당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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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3-01)


모압과 전쟁하려는 세 나라

열왕기하 3장 1-12절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 중요한 선택의 순간부터 시작해서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뜻과 인도를 따라 선택해야 합니다.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설익은 밥과 같은 반쪽짜리 신앙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되 온전히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섬기되 온전히 섬기지 못하고, 죄악을 버리되 온전히 떠나지 못하는 반쪽짜리 신앙으로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 엘리야의 후계자가 된 엘리사는 엘리야와 같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길에 여리고에서 백성들의 요청을 받고 열매를 못 맺게 하는 원인이 되는 물을 고쳐줍니다. 그러나 벧엘에서는 아이들이 엘리사를 대머리라고 놀리며 따라오자 여호와의 저주를 내려 42명의 아이들이 곰에게 죽게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심판을 내리시는 분임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 여호람의 행적(1-3)

죄가 위험한 것은 그것이 ‘선’을 품은 ‘악’이기에 언제든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심하지 않은 죄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악의 언저리를 서성거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악은 어떤 모양이라고 버리라고 권고합니다(데살로니가전서 5:22).

 

1유다의 여호사밧 왕 열여덟째 해에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을 열두 해 동안 다스리니라 2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의 부모와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그의 아버지가 만든 바알의 주상을 없이하였음이라 3그러나 그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를 따라 행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1-3)

 

아하시야 왕이 죽은 뒤에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여호람(요람)의 이야기로 연결됩니다. 아하시야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동생 여호람이 왕으로 등극했습니다. 그가 왕으로 등극한 때와 재위 기간, 수도 이름, 여호람에 대한 여호와의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의 부모는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우상 숭배자였던 아버지 아합과 어머니 이세벨이었습니다. 정도는 아니었지만, 여로보암의 죄를 그대로 따라서 악을 행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긴 했지만 전적으로 따르지 않은 미지근한 사람이었습니다.

 

여호람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같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것은 바알을 섬기던 부모의 길을 버리고 바알 주상을 없앤 것입니다. 즉, 여호람은 바알 신앙을 바리고 여호와께 돌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완전하게 돌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여로보암이 세워 놓은 단과 벧엘의 송아지 우상을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우상은 북 왕조가 세워질 때부터 가지고 있는 태생적 한계를 드러냅니다. 북왕조 초기부터 단과 벧엘의 송아지를 여호와라고 부르며 섬겼기 때문에 없애기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북왕조는 이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여호람은 완전하진 않지만 여호와를 바라보기 시작한 왕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죄가 위험한 것은 그것이 ‘선’을 품은 ‘악’이기에 언제든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부터 완전히 떠나길 원하십니다. 여호람 왕은 아함이 세운 우상들은 없앴지만, 여로보함의 죄는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온전히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은 실패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며 죄를 멀리하려고 하지만, 온전히 죄를 없이할 때는 실패할 때가 많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거나,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안하며 합리화하여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을 실패합니다. 아직까지 버리지 못한 죄가 있으면, 혹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어느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는 모습은 아주 작은 죄라도 없이 거룩한 자녀의 모습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모압의 전쟁(4-7)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은 바람 빠져가는 풍선마냥 점점 약해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악한 왕들에게 군사력과 동맹군 그리고 전략까지 있으면 다 갖추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전쟁에 대해 물을 필요도 없이 전쟁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다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전쟁과 함께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4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 5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 왕이 이스라엘 왕을 배반한지라 6그 때에 여호람 왕이 사마리아에서 나가 온 이스라엘을 둘러보고 7또 가서 유다의 왕 여호사밧에게 사신을 보내 이르되 모압 왕이 나를 배반하였으니 당신은 나와 함께 가서 모압을 치시겠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올라가리이다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고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으니이다 하는지라(4-7)

 

이런 여호람 왕은 이스라엘을 배반한 모압을 공격하기 위해, 유다의 여호사밧 왕과 에돔 왕과 함께 에돔의 광야 길로 나갑니다.

 

모압 왕 메사는 이스라엘이 점점 약해지자 이스라엘로부터 독립하려는 반란을 시작합니다. 모압은 다윗이 완전히 굴복시킨 후(사무엘하 8:2)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있으면서 조공을 바쳤습니다. 4절에 따르면 목축업을 하던 모압 왕 메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매년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바쳤습니다. 모압은 매년 상당한 양의 조공을 바치며 충성하다가 아합 왕이 죽은 후 이스라엘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아합 왕이 죽은 뒤 아하시야가 이스라엘 왕이 되었지만, 이스라엘의 국력은 약해 졌고 급기야 아하시야가 병까지 들면서 모압의 반란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모압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여호람이 왕이 되기 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왕이 된 여호람은 반란한 모압을 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모읍니다. 모든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정규군은 물론이고 백성들로 구성된 일반 군대까지 모두 모았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으고 상황을 살핀 뒤 그는 유다의 왕 여호사밧에게 사자를 보내어 배반한 모압 왕을 치기 위한 전쟁을 같이 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군대를 소집하고 유다에게 연합을 의뢰하는 것을 보면, 여호람은 모압을 반드시 되찾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람의 요청에 여호사밧 왕도 매우 흔쾌히 참여할 것을 약속합니다.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고 내 말은 당신의 말과 같다'는 말에서 ‘백성’은 군사를 의미하므로, 이 문장은 내 군대가 당신의 군대와 같다는 의미이며, 한마음으로 같이 싸우겠다는 의도를 전하고 있다. 이렇게 남북 왕조가 힘을 합쳐 모압을 치려는 것은 모압의 독립은 남북 왕조 모두에게 위협과 손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악한 왕에게는 전쟁을 위해 완전히 구비되어 승리를 위해 꼭 필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물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다 갖추었다고 해도 한 가지 핵심적인 것이 빠진 것은 전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빠진 전쟁이었습니다.

 

물이 없어 고생하는 연합군(8-10)

이 세상에 ‘완벽함’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가졌다고 자만하지 말고, 무엇을 잃었다고 절망하지 않을 일입니다. 오늘 내 걸음을 멈추게 하는 일이나 사람이 무엇이든, 그것 때문에 나 자신의 실상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8여호람이 이르되 우리가 어느 길로 올라가리이까 하니 그가 대답하되 에돔 광야 길로니이다 하니라 9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과 에돔 왕이 가더니 길을 둘러 간 지 칠 일에 군사와 따라가는 가축을 먹일 물이 없는지라 10이스라엘 왕이 이르되 슬프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는도다 하니(8-10)

 

남북이 같이 싸우기로 결정한 후, 두 왕은 어떤 길로 가서 어떤 전술을 사용하여 싸울지 의논합니다. 그래서 여호람이 여호사밧에게 어느 길로 가는 것이 좋은지 묻습니다. 여기서 여호사밧이 더 연장자이고 전쟁 경험도 많기에 여호람은 여호사밧을 의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에돔 광야 길로 가자고 제안합니다. 북 이스라엘에서 모압으로 가려면 북에서 모압으로 바로 가는 길도 있지만, 예루살렘, 헤브론, 아랏을 통과하여 에돔 광야를 거쳐 모압의 남쪽을 치는 길도 있습니다. 여호사밧은 두 번째 길을 제안한 것입니다. 좀 더 많은 군사가 움직일 수 있고 에돔의 힘도 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군사들을 데리고 에돔 길을 지나가려면 에돔의 동의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에돔도 자동적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됩니다. 모압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에돔의 입장에서도 모압이 강성해지는 것이 반갑지 않을 것이므로 도움을 받기가 쉬웠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 왕은 모압을 치기로 동맹을 맺고, 연합군은 빠른 산길이 아닌 남쪽으로 내려가 사해를 둘러 에돔 광야로 진군하였습니다.

그러나 광야를 진군하던 중에 뜻밖의 장애물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물 부족 문제였습니다. 남쪽 지방은 광야 지역으로 많은 군사를 이끌고 지나면서 물이 없는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연합군은 많은 군사들이 우회로로 움직였기 때문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고, 생각지 않게 물 부족을 겪게 된 것입니다. 9절에서 언급된 따라가는 가축은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되는데, 하나는 군사들을 위한 양식이고 또 하나는 제사를 위한 제물입니다. 고대에는 전쟁을 하기 전에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물어 신탁을 받고 전쟁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전쟁을 하러 다닐 때 가축들도 많이 이끌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일정이 지체되어 물이 있는 곳에 도달하지 못하였고, 물 부족 때문에 고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적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심각한 재난을 만나게 되면서 큰 절망에 빠집니다.

결국 세 나라가 연합하여 수적 우세를 통해 모압을 정벌하려던 삼국의 계획은 뜻하지 않은 재난으로 전쟁을 해보기도 전에 길에서 자멸할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이런 어려움에 빠지자 여호람은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모압 왕의 손에 넘기기 위해 불러 모으셨다며 여호와를 원망하고 탄식합니다. 사실 이 모든 일을 할 때 여호람과 여호사밧은 모압과 전쟁할지 여부를 하나님께 전혀 묻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수직 우위만 믿고 전쟁을 감행하려다가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히자 ‘슬프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는도다’라고 여호와를 원망한 것입니다. 위기 앞에서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종종 성도들 중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결연한 의지와 믿음의 결단은 없는 것을 봅니다. 이런 성도들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무늬만 신앙인인 반쪽짜리 신앙일 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을 온전히 누리지 못합니다. 온전히 여호와만은 섬기는 사람에게는 복이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기업을 영원토록 지키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시편 37:18).

 

엘리사를 찾아가는 왕들(11-12)

살아가면서 뜻하지 않게 힘든 일을 만나서, 전혀 예기치 않은 상황을 만납니다. 이 문제를 사람들이 스스로 예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여호와를 찾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문제 해결의 길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11여호사밧이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하는지라 이스라엘 왕의 신하들 중의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2여호사밧이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있도다 하는지라 이에 이스라엘 왕과 여호사밧과 에돔 왕이 그에게로 내려가니라(11-12)

 

여호와를 원망하고 있는 여호람 왕과 달리 유다 왕 여호사밧은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을 만나자 여호와를 찾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예전에 여호람의 아버지 아합과 함께 아람과 전쟁할 때도 아합에게 여호와의 뜻을 먼저 묻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선지자들이 긍정적인 대답을 하자 혹시 다른 선지자는 없는지 물으면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는 최소한 아합이나 여호람보다는 여호와를 더 의지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모압과의 전쟁에서는 압도적인 군사력 때문에 하나님께 묻는 것을 잊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위기 앞에서 자신이 잊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려움 속에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없는지 물으면서 그에게 여호와의 뜻을 알아보자고 제안합니다. 그러자 북이스라엘의 신하들 중 한 사람이 엘리사를 소개합니다. 여기서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이란 표현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 사용된 용례가 없기 때문에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이 문맥에서 볼 때 엘리야의 제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라는 사실로 참 선지자라는 신분을 확인받고 있는 것입니다. 당대에 엘리야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엘리사의 신분은 충분히 증명되었고,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전쟁하러 올라가던 길을 돌이켜 엘리사에게 내려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신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왕과 주권자가 되셔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길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직면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사인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 가능한 것입니다. 어려울수록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자신의 힘을 의지한 요람 왕은 어려움에 처하자 낙심했지만,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선지자를 찾았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날 때 당신의 반응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할 때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녀들의 삶을 항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적당히 반절만 순종하는 신앙은 싫어하십니다. 반쪽짜리 신앙을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볼 때 하나님의 인도와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온전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에 온전한 사랑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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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54-01)


생명을 붙드시는 하나님

시편 54편 1-7절


 

‘사람을 의지하면 안 된다.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라는 말을 수없이 듣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던 믿음이 금세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게로 향하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많은 어려움과 위기를 겪었던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에게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비결을 배워보겠습니다.

 

  • 악한 자들이 생명을 위협하는 어려움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만이 자신을 돕는 분이며 자신의 생명을 붙들어주시는 분임을 고백하고 자신을 구원해주시고 원수에게는 악으로 갚아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ㄴ지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고 모든 환난에서 건지실 것을 확신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낙헌제로 제사를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도움을 구하는 기도(1-2)

 

다윗의 탄식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은 다윗의 환난과 위기 앞에서 얼마나 건절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호소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유일한 구원이 소망이시기에 있는 힘을 다해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게속 부르짖어야 합니다.

 

1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2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1-2)

 

시인은 “하나님이여”라고 부르며 하나님께 나아옵니다. 그리고 네 개의 명령형 동사를 사용해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해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먼저 ‘주의 이름으로 구원해달라’고 합니다. 사실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해달라는 것은 심상치 않은 기도입니다. 시인은 주님과 어떤 관계에 있기에 자신을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해달라고 합니까? 주의 이름으로 구원해달라는 것은 주님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구원해주시는 것도 포함하고, 또한 주님의 이름은 주님 자신을 가리키므로 주님께서 가지신 근본적인 성품(성실하심[5]과 선하심[6])과 권세와 능력으로 구원해주시기를 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해달라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 특별한 관계는 4절에서 설명해줍니다.

평행을 이루면서 나오는 간구,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는 앞의 간구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주님의 힘으로 나를 변호해달라는 것은 시인이 강한 자에게서 어려움을 겪는 것을 암시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대항할 수 없음을 알고 주님의 능력으로 자신을 보호해달라는 것입니다. ‘변호하다’는 옳고 그름을 가려서 공의로운 판단을 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강한 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에게 잘못이나 불의한 일이 없는데도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최고의 재판장이시며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한 일을 공롭게 판결해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2절에서 시인은 다시 하나님을 부르며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기도에 응답하셔서 구원해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의 횡포(3)

이기적인 행동의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않음’입니다. 하나님을 잊을 때 인간은 자기만 남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Coram Deo)’에 살아가야 합니다. 다윗에게 잘못이 없기 때문에 포악한 자들이 그를 죽이려 하는 명분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3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셀라)(3)

 

3절에서는 시인이 하나님께 간청하는 기도를 드리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히브리 본문에서는 3절 앞에 ‘왜냐하면’이 나와서 간청하는 이유, 즉 시인이 어떤 어려운 상황에 있는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시인은 “낯선 자”들의 공격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낯선 자”(자림)의 의미에 대해 이방 민족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방 민족이 이 문맥에서 어색하게 여겨져서 탈굼과 몇몇 히브리 사본에서는 ‘오만한 자’로 고쳐 읽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방 민족이나 오만한 자로 보기보다는 3절 하반절의 ‘그들이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않았다’와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낯선 자를 일반적으로 모르는 사람, 또는 시인의 편이 아닌, 시인과 전혀 다른 뜻과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고 보았을 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시인에게 있어서(4) 낯선 자의 의미는 하나님을 떠나고 언약공동체에 합당하지 않은 자를 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낯선 자들”과 “포악한 자들”, 두 표현이 평행을 이루어 낯선 자들이 포악한 자들임을 말해줍니다. 포악한 자들이 시인을 죽이려고 그의 생명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포악한 자들은 잔인한 폭력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자들입니다. “낯선 자들”과 “포악한 자들”은 구약에서 다섯 번 평행을 이루며 나타납니다(시 86:14; 사 25:5;29:5; 겔 28:7; 31:12). 아마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서 잔인함과 폭력으로 사람들에게 공포를 일으키는 자들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공동체에 합당하지 않은 자들에 대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이들의 삶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시편 53편의 하나님께서 없다고 하는 어리석은 자들과 같다.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예 눈을 감아버리는 자들입니다.

 

심판을 구하는 기도(4-5)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성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돌보시고 악인을 멸하시는 섭리를 베푸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성실하게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약 1:6) 태도입니다.

 

4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5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4-5)

 

다윗은 포악한 자들이 그의 생명을 없애려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로 고백합니다. ‘나의 생명을 수색하는 포악한 자들’ 앞에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을 내세운 것입니다.

 

(1)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고백(4)

 

시인의 대적에 대해 말하는 3절과 하나님께 대한 시인의 고백을 표현하는 4절은 상반되는 표현을 통해 시인과 대적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히브리 원문에서 4절은 ‘보라’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보라’라는 말은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며 시인과 대적의 대조를 강조하는 효과를 갖습니다.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며 시인은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주님(아도나이)으로 불러 자신의 주가 되심을 환기시키며 강조합니다. 참으로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킬 만한 고백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자요.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님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이런 신앙고백은 1절에서 시인이 주의 이름으로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던 근거, 즉 하나님과 시인의 관계를 잘 드러내줍니다.

3절과 4절을 통해 볼 수 있는 시인과 대적의 대조되는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적들은 시인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시인의 생명을 붙들어주시는 분입니다. 대적들은 하나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자들이지만, 시인은 하나님을 주라고 부르고 자신을 돕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인생에서 정반대의 길을 걷는 자들입니다.

 

(2) 심판을 구하는 기도(5)

 

시인과 하나님과 대적의 관계를 분명하게 밝힌 후, 5절에서는 악인에 대한 심판을 간구합니다. 포악한 자로부터 억울하게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구원해주시기를 간구했던 시인의 기도는 자연스럽게 악인의 멸망을 위한 간구로 이어집니다. ‘주께서 그의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실 것이다’는 원수가 시인에게 행하려고 했던 악을 원수에게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악이 나온 곳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악의 부메랑을 믿었습니다. 악한 자가 자기가 파놓은 함정에 자기가 빠지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정의를 행하실 것을 믿었다. 악은 반드시 징계를 받을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 가운데 시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악인들에게 반드시 보응하셔서 그들을 멸망시켜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서원과 확신(6-7)

어려움이 닥쳐오면 주저하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생명을 붙드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도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선택한 결과가 옳은 일이었다는 것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6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7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6-7)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구원을 확신하며 서원을 다짐합니다. 아직은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포악한 자들이 여전히 그의 생명을 찾아다니는 상황이지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시고 원수에게 보응하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1) 서원(6)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구원을 간구하던 시인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이 자신의 피난처가되시고 악인들에게 합당한 징계를 내리실 것을 확신한 후 이제는 구원을 받고 성전에 나아가 하나님께 제사 드릴 것을 바라보고 있다(6절). 자원하여 기쁨으로 드리는 낙헌제로 하나님께 제사하며 하나님의 이름에 감사하겠다고 합니다. 악인을 멸하시고 시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즐거워함으로 낙헌제를 드리겠다는 서원입니다.

 

(2) 확신(7)

 

히브리 본문에서는 7절 앞에 '왜냐하면(키 2)이 나와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주께서 모든 환난에서 건지시고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똑똑히 보게 하셨다'의 동사들이 완료형으로 되어 있어서 시인이 이미 구원받은 것처럼 보인다. 구원받을 것에 대한 현재의 확신에 대한 근거로 과거에 구원받은 것을 암시하거나, 또는 시인이 구원받을 것에 대해 너무 확신한 나머지 마치 이미 일어난 것처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과 문제 한가운데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시인은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지만 이미 구원을 확신하고 감사의 노래를 부른다. 믿음은 어려움의 한가운데에서 감사의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시인은 억울하게 당하는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 주실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그에게는 환난이 더 남아 있었지만, 우리는 그가 이후에 어떤 영광을 얻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환난을 겪지만, 그것은 또한 하나님이 나의 편이시고 나의 도움이심을 경험하는 좋은 계기가 됩니다. 이 사실을 확신하고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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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2-02)


엘리야의 다음 지도자인 엘리사

열왕기하 2장 15-25절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모든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하지만 항상 인간 사역자를 통해서, 그들과 함께 일하고 계셨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사역자들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들을 대하는 우리 태도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 하나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엘리야와 50명의 선지자의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사라집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외투로 요단강을 기름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를 엘리야의 후계자로 인정하셨음을 알게 해줍니다. 하지만 엘리야의 승천에 대한 예고를 들었던 선지자의 제자들은 엘리야의 승천을 믿지 못하고 엘리야의 시신을 찾겠다고 나섭니다.

 

후계자로 인정받은 엘리사(15-18)

하나님의 사역자이지만 사람 자체를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사명자의 수명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때까지입니다. 하지만 사명을 주실 때는 분명히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시는 분입니다. 아무리 현실이 암담하고 절망적일지도, 사명자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붙들고 일어서야 합니다.

 

15맞은편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그를 보며 말하기를 엘리야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엘리사 위에 머물렀다 하고 가서 그에게로 나아가 땅에 엎드려 그에게 경배하고 16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에게 용감한 사람 오십 명이 있으니 청하건대 그들이 가서 당신의 주인을 찾게 하소서 염려하건대 여호와의 성령이 그를 들고 가다가 어느 산에나 어느 골짜기에 던지셨을까 하나이다 하니라 엘리사가 이르되 보내지 말라 하나 17무리가 그로 부끄러워하도록 강청하매 보내라 한지라 그들이 오십 명을 보냈더니 사흘 동안을 찾되 발견하지 못하고 18엘리사가 여리고에 머무는 중에 무리가 그에게 돌아오니 엘리사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가지 말라고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였느냐 하였더라(15-18)

 

엘리야가 승천할 때 요단 건너편에 있던 제자들은 엘리사가 엘리야와 동일하게 외투로 요단강을 치자 강물이 갈라졌습니다. 이렇게 요단강을 가르고 돌아오는 엘리사의 모습을 선지자의 제자들이 보았습니다. 이 일을 통해 그 제자들은 엘리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이 엘리사에게 동일하게 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엘리사 앞에서 엎드리고 경배하며 최고의 경의를 표합니다. 이전에 엘리야에게 가졌던 외경심을 엘리사에게 보인 것입니다. 강가에 있던 50명의 제자들은 엘리사가 엘리야의 확실한 후계자라는 것을 증언해줄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16절에서 보면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엘리야의 시체를 찾을 수 있게 해달라는 강청을 합니다. 이들도 강 건너편에서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지만, 엘리야가 하늘로 갔다는 것은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를 데리고 가신 방법이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영이 하늘로 올렸다가 엘리야를 중간에 던져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한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살아서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나라에 들어간 사람이 없기에 의심할 만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선지자의 제자들로 선지자들이며,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보여주신 마지막 기적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살아 있는 상태로 하늘에 올리신 이유는 바로 이런 믿음 없는 세대에 하나님의 권능이 얼마나 큰지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모습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살았던 시대가 믿음을 잃어버린 시대였음을 잘 보여줍니다. 이들의 믿음을 잃어버린 시대였음을 잘 보여줍니다.

 

이들의 믿음 없는 요청에 엘리사는 사람들을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선지자의 제자들은 엘리사의 말을 듣지 않고 엘리사가 당황스러운 정도로 강청하였습니다. 엘리사는 할 수 없이 허락합니다. 이들은 엘리야가 회리바람에 삼키는 것을 보았지만, 불말과 불병거는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이들이 보낸 50명이 3일 동안 찾았지만, 엘리야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용사 50명이 3일 동안 찾았다는 것은 그 근처를 철두철미하게 수색했다는 것이고, 역설적으로 이는 엘리야가 정말로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을 증명해주었습니다. 허탕치고 여리고로 돌아온 그들에게 엘리사는 자신의 말을 믿지 않고 듣지 않은 것에 대해 책망합니다. 이를 통해 무리는 엘리사가 진정한 엘리야의 후계자로서 진실한 말을 하는 선지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선지자의 제자들의 모습은 마치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빈 무덤을 보고도 근심하던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은 참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의 증인마니 믿음의 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부활의 증인입니까? 누가 당신의 삶을 보더라도 이 부활을 믿는다고 생각할만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혹시 시신을 찾느라고 수고하는 선지자의 제자들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하지만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것이 믿음 없는 인간에 연약한 모습입니다. 그럴 때면 얼마나 고집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고집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할 수 있는 겸손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물을 깨끗하게 한 엘리사(19-22)

하나님의 일꾼들에게 대해 사람을 의지해서는 안 되지만, 그를 통해 일하실 하나님에 대해서는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군들 위에 성령이 임하시고 그를 통해서도 놀라운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사역자로 부르실 때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할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협력해야 합니다.

 

19그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우리 주인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20엘리사가 이르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21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22그 물이 엘리사가 한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에 이르렀더라(19-22)

 

엘리사가 엘리야보다 ‘갑정의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를 여리고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언급되는 성읍은 여리고입니다. 엘리사가 여리고에 머물고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여리고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와서 성읍의 위치는 좋지만, 물이 나빠서 땅이 소산을 내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하소연합니다. 땅이 소산을 내지 못한다는 것은 곡식이나 과일 등을 키울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물이 죽은 것입니다. 죽은 물을 살리는 것은 오직생명의 하나님, 창조의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여리고가 이렇게 곡식이 자랄 수 없는 저주의 땅이 된 것은 이전에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복할 때 내렸던 저주를 기억하게 합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를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저주했습니다. 이 저주에도 불구하고 엘리사 당시에는 여리고 성읍이 건축되어 있었고, 사람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지만, 물이 안 좋아 예전과 같은 영화를 누리진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엘리사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는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서 가져오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새 그릇은 부정한 것을 접하지 않은 정결한 것이며, 소금은 부패와 발효를 막는 기능이 있기에, 죄를 막거나 저주를 제거하는 기능이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즉, 이 두 물건은 어떤 과학적이거나 약리적 작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리고에 내려져 있던 저주를 제의적으로 제거하는 데 사용되는 상징적 물건들이다. 엘리사는 이 물건들을 들고 물의 근원으로 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그는 여기서 여호와의 영이 임한 이후 처음으로 여호와의 신탁을 전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물을 고쳐주셨고,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여호수아 때 여리고에 내리셨던 죽음의 저주에서 해방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의 능력을 믿고 그에게 나아가 여호와의 도우심을 구하는 이들에게 여호와께서는 자비를 베푸시고, 그곳에 내렸던 저주를 풀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겸손히 나오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오직 말씀으로 성읍 하나를 살리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셨다. 이 이적은 모세가 나뭇가지를 던져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꾼 것과 유사합니다. 이 이적은 그 순간에만 효력을 발휘한 것이 아니라 영구적으로 그 물을 고쳤습니다. 화자는 엘리사의 말처럼 고쳐졌고 오늘까지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엘리사의 말처럼 고쳐졌다는 것은 엘리사가 참 선지자라는 것을 화자가 인정한 것입니다.

 

엘리사는 죽은 아들을 살렸던 엘리야의 능력을 그대로 엘리사가 이어받은 것입니다. 그는 이제 죽음 땅, 어둠에 땅에서 생명의 하나님을 전하고 증명할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면 그는 참 선지자로 인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엘리사가 사람들에게 참 선지자로 인정받은 사건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엘리야와 엘리사의 능력을 이어 받은 선지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목회자만이 선지자가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입증할 선지자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주에 대한 무서운 결과(23-25)

사람은 누구와 함께 사느냐에 따라서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엘리사 주변에도 함께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의 삶을 빛나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엘리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신 하나님이시지만 반대로 심판하신 하나님이심을 볼 수 있습니다.

 

23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24엘리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의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 25엘리사가 거기서부터 갈멜 산으로 가고 거기서 사마리아로 돌아왔더라(23-25)

 

엘리사에게 엘리야의 사역을 계승하셨음을 또 실증해 보이는 마지막의 사건이 나옵니다. 언뜻 보면 차라리 없었으면 더 나았을 것처럼 보이는 당황스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벧엘에 도착했을 때, 엘리사는 모욕적인 일을 경험합니다.

 

벧엘에서 일어난 사건은 앞 여리고의 사건과 대조됩니다. 엘리사는 여리고를 떠나 벧엘로 가는데, 그는 엘리야와 함께 왔던 길을 거슬러 가고 있습니다. 벧엘은 산지에 있기 때문에 여리고에서 벧엘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벧엘에 거의 다 왔을 때, 젊은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엘리사를 향해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하면서 조롱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말하는 ‘작은 아이들’은 철없는 어린 아이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엘리사는 털이 많았던 엘리야와는 대조적으로 털이 없는 대머리였던 것 같습니다. 신명기에서 머리 미는 것을 금하고 있으므로 엘리사는 원래 대머리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엘리사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가부장 문화가 엄격한 이스라엘 사회에서 어린아이들이 외모 때문에 어른을 조롱하고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도덕과 윤리가 얼마나 해이해진 상태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젊은이들은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한 것은 외모를 가지고 놀리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들은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엘리사에게도 하늘로 올라가라고 비아냥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엘리사를 엘리야의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 엘리사에게 반말하고 모욕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고, 하나님의 종을 조롱하는 것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매우 가혹하게 대하십니다. 이러한 죄가 얼마나 무섭고 심각한 죄인지를 잘 보여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사는 그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였고, 곧바로 수풀에서 암곰 두 마리가 나와 아이들 중 42명을 찢어 죽이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아이들을 매우 귀중하게 생각하는 요즘의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일은 철저한 가부장 사회에서, 즉 아이들이 부모와 어른들을 존중하며 철저하게 복종해야 하는 것을 당연시하던 시대에 일어난 일입니다. 신명기에 따르면 부모에게 패역한 자식은 장로들 앞에서 재판을 받게 하고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어른이 선지자를 놀린 사건은 심각한 도덕적, 영적 해이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에 대한 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생명을 누리게 되지만, 하나님을 미시하는 자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

이 사건은 열왕기하 1장에서 엘리야를 강압적으로 데리러 온 오십부장과 50명의 군사들이 죽은 것과 유사합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경고하기 위해 무서운 처벌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많은 아이들이 죽었기에 현재 우리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이지만 본문은 엘리사의 이런 행동에 대해 부정적인 뉘앙스가 없습니다.

 

이 사건은 여리고 사건과 대조되는데, 엘리사는 여리고에서는 여호와께서 내린 죽음의 저주를 없애는 일을 했지만 벧엘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를 내려 죽음이 오게 하였습니다. 이런 대조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오는 자들은 생명을 얻지만, 하나님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자들에겐 죽음이 온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도 엘리사의 시대와 같이 하나님을 무시하는 분위기가 가득합니다. 엘리사가 당했던 조롱과 핍박이 기다입니다. 그렇다고 이처럼 즉각적인 심판이 임하는 시대도 아닙니다. 다만 치이고 당하고 인내한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일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생명의 근원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성도들은 함부로 다른 사람을 놀려서는 안 됩니다. 벧엘의 어린 아이들은 엘리사와 그를 세우신 하나님을 조롱하다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놀리는 것은 곧 그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놀리는 것과 같습니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을 조롱하고 있다면, 그것을 멈추시길 바랍니다. 그에게 사과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안에 따라서, 때를 따라서 일꾼을 구별하여 세우십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사람 자체를 과도하게 의지하지 않아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끝까지 의지하고 기대할 지도자는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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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2-01)

 


엘리야의 뒤를 잇는 엘리사

열왕기하 2장 1-14절


 

인생에서 좋은 스승과 제자를 만나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그만큼 스승으로부터 바른 정보와 노하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스승을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배움으로써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스승에게 제자들은 많은 것을 배우려는 열정과 성장하려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좋은 스승으로 모시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까? 엘리사에게 엘리야는 좋은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려고 했습니다.

 

  • 이스라엘은 뒤를 이을 후계자도 없이 아하시야 왕은 죽지만, 영적 지도자 엘리야는 후계자인 엘리사를 세워둡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던 엘리야를 사명을 마감한 후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서 하늘로 승천합니다. 이후에는 엘리사를 세워 예언자직의 계승을 엘리야를 대신하게 하십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감의 두 배를 받고 큰 능력을 행합니다.

 

승천을 앞둔 엘리야(1-6)

날마다 말씀이 이끄는 대로 사는 것, 그것이 가장 죽음을 잘 준비하는 일입니다. 고단한 현실 앞에서도 참다운 주권자와 실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의 조상들은 한결 같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영원히 사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엘리야에게 맡겨졌던 소명의 때가 다했습니다. 그의 시간표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1여호와께서 회오리 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와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 2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는지라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 3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로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 하니 이르되 나도 또한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하니라 4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엘리사야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라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매 5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6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는지라 이에 두 사람이 가니라(1-6)

 

엘리야를 통한 주신 말씀을 무시하고 죽은 우상 바알을 섬기던 아하시야 왕은 죽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산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영원한 집으로 들어갑니다. 아하시야가 죽은 후 이야기의 초점은 다시 선지자인 엘리야와 엘리사에게 향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무시했던 아하시야는 죽음으로 끝이 나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순종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시길 원하십니다.

 

엘리야는 아하시야에게 죽음을 선언하는 것으로 지상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합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이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사명을 정리하기 위해 곳곳을 방문합니다. 이런 엘리야의 마지막 시간들을 그의 제자 엘리사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영원한 집으로 데려가려고 하십니다. 본문에서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으로 하늘로 올리실 때’라고 표현합니다. 지상에서 살다가 죽지 않고 하나님께서 데려가신 인물은 성경 전체에서 에녹(창세기 5:24)과 본문의 나온 엘리야뿐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께서 데리고 가셨다’고 표현하고 있는 반면, 엘리야는 ‘하늘로 올리셨다.’고 표현합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지상을 떠나야 할 때가 온 것을 알고 그동안 지내던 길갈에서 출발합니다. 이 때 엘리사가 자신과 동행하려고 하자, 그에게 여기 머물라고 간곡히 부탁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벧엘로 보내시니 자신만 가겠다고 합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떠나는 모습을 제자인 엘리사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엘리야와는 달리 자신은 절대 엘리야를 떠나지 않겠다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제자로서 스승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같이 벧엘로 갑니다.

 

벧엘에 있던 선지자의 제자들 50명도 엘리야의 마지막을 알고 있었습니다. 엘리사에게 나와 ‘엘리야를 여호와께서 데려가실 것을 하느냐?’고 질문합니다. 엘리사는 자신도 안다고 말하면서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주닙니다. 이런 제자들의 말은 엘리야의 승천이 확실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의 영이 엘리야뿐 아니라 엘리사와 선지자의 제자들에게까지 엘리야의 승천 소식을 알려준 것입니다. 엘리사는 자신도 알고 있으니 이 일로 수선 떨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잠잠히 바라보라는 의미에서 조용히 라라고 당부합니다.

 

4-5절은 2-3절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다만 장소가 여리고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5-6절도 또다시 반복적인 사건을 보여줍니다. 이번에는 엘리야가 요단으로 갑니다. 엘리야와 엘시의 움직이는 경로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길갈은 벧엘 북쪽에 있는 도시이며, 여기서 시작하여 남쪽의 벧엘로 가고 여기서 여리고로 내려갔다가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이런 반복적인 예언 확인과 이동은 무엇을 보여주었습니까? 첫째 엘리사가 엘리야와 헤어질 준비를 하는 시간을 버는 역할을 합니다. 둘째는 엘리야가 죽은 것이 아니라 승천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엘리야 시대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또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고 살겠다고 결단한 것입니다. 영적 열망과 함께 살아가야할 현실은 너무나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엘리야 시대 못지않게 어두운 시대입니다. 엘리야와 같은 결단적인 신앙이 필요합니다.

 

능력을 두 배 요청하는 엘리사(7-10)

하나님 앞에 헌신을 다하는 사람은 상황과 여건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의 길을 묵묵히 순종하며 나갈 뿐입니다. 그냥 나가는 것이 아니라 열정과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달려가는 삶을 살아갑니다.

 

7선지자의 제자 오십 명이 가서 멀리 서서 바라보매 그 두 사람이 요단 가에 서 있더니 8엘리야가 겉옷을 가지고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마른 땅 위로 건너더라 9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 10이르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고(7-10)

 

엘리야의 승천으로 하나님의 사역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엘리야의 사역은 그의 제자 엘리사에게 온전히 승계됩니다. 엘리야는 그의 제자 엘리사를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엘리사는 끝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엘리야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스승에 대한 사랑으로 아쉬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후에 엘리야에게 임한 성령의 능력을 구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던 스승에게서 떨어지는 것은 마치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끝까지 엘리야를 따라갔던 것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드디어 마지막 여행자인 요단 강가에 도착했습니다. 선지자의 제자들 50명이 요단 강가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엘리사와 함께 엘리야의 승천을 증언할 증인들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엘리사는 엘리야의 사역을 승계 받기 위한 시험을 받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엘리야가 겉옷을 벗어 요단 강물을 쳤습니다. 그러자 강물이 양쪽으로 갈라졌고 마른 땅이 들어났습니다. 그 사이로 두 사람은 걸어서 강을 건넜습니다. 물을 처서 강을 가르는 모습은 모세가 지팡이를 들어 홍해를 가르는 모습이나 제사장들이 법궤를 들고 요단강에 발을 담갔을 때 요단강에 마른 땅이 드러나던 모습과 같습니다. ‘마른 땅’은 물 밑에 있던 땅이 들어날 때만 드물게 사용하는 단어이며, 출애굽기 14:21과 여호수아 4:17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강하게 임하고 있다는 상징이며, 여기서는 모세의 막대기 대신 엘리야의 옷이 능력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엘리야가 향하였던 기적을 보았고, 마지막 순간에 요단강을 가르는 놀라운 기적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함께 요단강을 건넜던 사람이 엘리사였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 열정이 잘 다듬어지고 검증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귀한 일꾼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넌 후, 엘리야는 자신의 승천이 가까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의 뒤를 따르는 엘리사를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9)고 질문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한결같은 소원을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9)라고 구합니다. 엘리야를 수행하던 엘리사는 그가 떠난 후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역을 앞두고 앞에 캄캄했을 것입니다. 그는 엘리야와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자신의 부족함을 느꼈고, 그에 비해 하나님의 사역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끝까지 쫓아다니며 갑절의 영감을 간청합니다. 여기서 ‘갑절’은 장자가 다른 이들에 비해 두 배의 유산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적 지도력을 계승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원하는 것은 사역의 기술이나 비법이 아니라 영성을 요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셨던 능력의 원천, 하나님을 따를 수 있었던 삶의 철학 그리고 하나님을 따르면서 배웠던 사상들을 온전히 배우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는 영적인 통찰력을 구하면서 엘리야에게 나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구하면서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나가고 있습니다(10). 영감의 갑절은 사람들이 줄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한 시대를 이끌고 갈 수 있는 영적 지도력은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오는 것입니다.

 

하늘로 승천한 엘리야(11)

하나님께서는 하늘위에 초월적인 하나님이십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 하늘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사람들이 알아듣는 말로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하늘에서만 전투를 벌이신 것이 아니라 땅에서 인간의 역사에 관여하신 하나님으로 자신을 들어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하늘로 부르시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11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11)

 

엘리야의 승천은 매우 급작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는데, 갑자기 불수레와 불말이 나타나 둘 사이를 갈라놓고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에 휩싸여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이것은 엘리사의 관점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여기서 불수레와 불말은 전승에서 여호와께서 타고 다니신다고 여겨지는 것들이며,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데리고 가셨음을 보여주기 위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많은 선지자들에게 예고하신 것처럼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선지자로서 지상에서 사역할 때, 그 많은 하나님의 권능을 행하고도 아합과 이세벨 같은 악한 지도자들로부터 너무 많은 고난과 멸시를 당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가장 영광스러운 방법으로 데려가신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엘리사(12-14)

궁극적인 기도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있습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인간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인간 지도자는 통로일 뿐이지 실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점점 세상은 어둡고 음란한 우상의 땅에서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최고의 지도자는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지도자입니다.

 

12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고 13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지고 돌아와 요단 언덕에 서서 14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의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이르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그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12-14)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자, 엘리사는 놀라서 부르짖습니다. 그는 엘리야를 향해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하며 부릅니다. 여기서 ‘내 아버지’란 표현은 스승을 부르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아버지’란 단어와 병거와 마병이란 단어가 같이 결합되면서, 아버지는 보호자의 의미를 갖게 됩니다. 지금 엘리사는 이스라엘을 지키던 보호자로 엘리야를 부른 것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데리러 온 불말과 불수레를 보고 엘리야에 대해 이런 보호자의 이미지를 갖게 됩니다.

하지만 그가 부르는 사이에 엘리야는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엘리사가 다시는 그를 보지 못했다는 것은 엘리야가 단지 강한 바람에 휩싸여 다른 곳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간 것을 확인한 엘리사는 혼자 남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옷을 찢습니다. 여기서 옷을 찢은 것은 스승인 엘리야를 잃은 슬픔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다만 엘리야가 죽은 것이 아니기에 애곡하거나 재를 뒤집어쓰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엘리야의 겉옷을 집어 와서 그의 옷으로 엘리야와 동일하게 물을 치며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를 부르는데, 이것은 자신이 엘리야에게 부탁한 소원을 하나님께서 들어달라고 외친 것입니다. 물을 치니 엘리야가 한 것처럼 물이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엘리사의 소원을 들어주셨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는 엘리사가 엘리야의 계승자로 인정받는 순간입니다. 엘리야에게 주어진 시험을 통해서 엘리야에게 주셨던 능력이 엘리사에게도 임하였습니다. 그가 엘리야의 사역을 계승 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승천하고 엘리사가 사역을 계승한 장면에 등장한 ‘불’, ‘바람’의 성령의 이미지는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 강림 사건을 생각나게 함입니다.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시자 불의 혀와 같은 것이 각 사람에게 임하고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했습니다. 엘리야의 사역이 엘리사에게 계승된 것처럼, 예수님의 사역이 그의 제자들에게 계승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된 우리에게까지 계승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갑절의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과 함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참으로 훌륭한 지도자가 그리운 시절입니다. 훌륭한 하나님의 일꾼 엘리야에 이어서 엘리사가 나왔습니다. 그 다음으로 지도자다운 지도자의 이름이 섣불리 떠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지속적으로 좋은 지도자를 세워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사명을 감당했던 엘리야처럼, 하나님을 무시하고 교만함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우리와 함께 하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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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1-02)


엘리야를 잡으려는 아하시야 왕

열왕기하 1장 13-18절


 

오늘날 시대를 권위가 사라진 시대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는 과거에 권위가 가득하였던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권위주의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권위주의가 있는 곳에는 그것을 배격하고자 하는 행동들이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이 시대에 권위가 살아 있어야 함을 느끼게 되어 집니다. 권위는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권위는 어디로부터 나와야 하겠습니까?

 

  • 하나님의 신탁을 전달받은 아하시야 왕은 엘리야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이나 사람들을 보내서 잡으려고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돌이키지 않고 세 번째 군대를 보냅니다. 세 번째 나갔던 오십부장은 엘리야에게 자비를 구하여 자신과 부하들의 생명을 보존하지만, 아하시야 왕은 끝까지 대적함으로 죽임 당하고 맙니다.

 

왕보다 높은 영성을 가진 신하(13-14)

하나님을 떠나 세속적인 안목을 가진 아하시야에게 그의 문제점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심판을 선언한 엘리야는 비판적 종교 지식인에 불과했습니다. 아하시야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를 존경하지도, 그 말을 경청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하들 중에는 지혜로운 자들도 있어 화를 면하기도 합니다.

 

13왕이 세 번째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보낸지라 셋째 오십부장이 올라가서 엘리야 앞에 이르러 그의 무릎을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하건대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 명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14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전번의 오십부장 둘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살랐거니와 나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하매(13-14)

 

엘리야를 잡으러 갔던 두 부류의 군대가 모두 실패하고 하늘에서 떨어진 불로 타 죽었습니다. 아하시야 왕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엘리야를 연행해 와서 그를 심문해 제거하거나 혹은 그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하시야의 명령을 수행하려던 사람들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완고한 독재자는 그의 주변 사람들도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두 번이나 오십부장과 그의 부하들이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아하시야 왕은 포기하지 않고 또 다시 오십부장과 50명의 부하들을 세 번째 엘리야를 체포하려고 보냅니다. 그러나 세 번째 파송된 오십부장은 이전의 오십부장들과는 다른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전에는 왕의 명령을 전하면서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엘리야를 만났을 때, ‘하나님의 사람이여!’라고 부르면서 엎드려 무릎을 꿇었습니다(13). 자신과 자신의 신하들의 목숨을 살려줄 것을 두 번이나 강청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태도입니다.

그는 앞에 행한 두 무리에게 임한 재앙을 자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새롭게 하나님 앞에 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대적하고 불순종했을 때 자신들에게 찾아올 결과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하들의 죽음은 아랑곳하지 않는 아하시야 왕과는 달리, 부하의 생명을 살려달고 호소한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권위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한 것입니다.

 

살아가다보면 자존심이 다른 사람들 앞에 무릎을 꿇지 못하도록 만든 경우들이 있습니다. 분명히 자신이 권위에 순종하고 명령에 따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많은 이유들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의 질서 속에 살아갈 때 그 권위가 인격적인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신 지도력의 질서 때문에 순종해야 한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순종함으로 한 팀워크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겸손한 자들을 돌아보신 하나님(15-16)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겸손함 뿐입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나오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십니다. 아하사야 왕은 하나님의 보호를 거절했지만 그 신하 오십부장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합니다. 그에 대한 응답이 본문에 나타납니다.

 

15여호와의 사자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내려가라 하신지라 엘리야가 곧 일어나 그와 함께 내려와 왕에게 이르러 16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사자를 보내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 하니 이스라엘에 그의 말을 물을 만한 하나님이 안 계심이냐 그러므로 네가 그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니라(15-16)

 

엘리야에게 이 오십부장은 자기 부하들의 생명을 아끼는 마음으로 간청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의 간청을 듣고 무시하지 않습니다. 두 번이나 동일한 일로 간절하게 행하는 모범적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한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자를 보내어 그들의 생명을 살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들과 함께 내려가고 있습니다(15). 엘리야는 선입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천사의 지시에 따라 그와 함께 아하시야 왕에게 갔습니다. 엘리야는 아하시야 왕 앞에 서서 담대하게 하나님을 무시한 왕의 잘못을 지적하고 왕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엘리야를 통해 아하시야에게 담대하게 전하는 하나님의 네 번째 메시지가 임하였습니다(16).

하나님의 네 가지 메시지는, 첫째, 모압이 독립을 선포하고 나갔고, 다음으로 자신이 난간에서 떨어져서 큰 병이 들었고, 세 번째는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자신들의 부하들을 통해 들려졌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종인 엘리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집니다. 이것은 아하시야에게 마지막 회개의 기회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하시야는 엘리야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하시야의 행위는 하나님을 인정할 수 없어서 우상 바알세붑에게 물으려고 했습니다. 그는 결국 마지막 하나님의 경고도 무시하고 맙니다. 그 결과는 파멸이었습니다.

 

앞선 일들을 통해 세 번째 오십부장은 앞선 두 오십 부장의 죽음을 통해 교훈을 얻은 것입니다. 그는 엘리야에게 겸손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세를 보임으로써 자신과 부하들의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하시야 왕은 마지막 기회까지 저버림으로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자신과 가족의 파멸(17-18)

우상을 숭배하면 결국은 죽습니다. 우상을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을 섬겨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회개의 기회를 주었지만 거절한 아하시야를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17왕이 엘리야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죽고 그가 아들이 없으므로 여호람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니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둘째 해였더라 18아하시야가 행한 그 남은 사적은 모두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17-18)

 

결국 엘리야의 경고,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하야시 왕은 죽게 되었습니다(참고 열왕기상 21:21). 그의 죽음은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자신의 대를 이을 수 있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엘리야의 예언대로 그의 가문인 오므리 왕조가 끊어졌습니다. 다음으로 여호람이 뒤를 아하시야 왕에 이어서 왕이 되었습니다.

아하시야는 엘리야로부터 직설적인 심판 선언을 들으면서도 엘리야를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심판 선언대로 죽었고, 그의 직계 가족의 왕위 계승도 단절되었습니다. 그와 그의 직계 가족은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에서 끊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경고든지 축복이든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아하시야 왕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하신 말씀대로 죽었습니다. 왕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결코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들도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하시야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살아계심을 보이셨습니다. 성도들의 태도는 믿음의 태도인지 불신의 태도인지를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잘못된 자존심은 자신을 파괴합니다. 하나님께 겸손히 간청해 용서하시고 당신을 세우실 것입니다.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합니다. 세상의 권세나 명예도 추락하는 운명들을 봅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주신 증거들 앞에 길을 멈추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잇다면 방향을 바꾸어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지금이 하나님만 의지하고 순종해야할 때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으며 겸손히 그리고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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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1-01)


추락한 왕권을 가진 아하시야 왕

열왕기하 1장 1-12절


 

우리 몸은 몸의 컨디션에 따라 신호를 보냅니다. 크게 아프기 전에 전조 증상으로 몸에서 이상 신호들을 보냅니다. 전조 징후들을 무시하다가 발병하게 됩니다. 발병한 후에, 관리를 잘할 걸하고 나중에 후회하는 것을 봅니다. 영적으로도 하나님께서는 작은 신호들을 통해 영적 상태에 대해 신호를 보냅니다. 작은 신호 속에서 하나님의 경고를 들을 수 있을 때, 좀 더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열왕기상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악한 왕인 아합이 죽은 것으로 마쳤습니다. 그리고 열왕기하는 아합에게 내리신 심판들이 실현되면서 시작합니다. 그이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면서 문제는 시작됩니다. 첫째는 속국이던 모압이 반역했고, 두 번째는 왕은 난간에서 떨어져 중병에 걸렸습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서기보다 우상을 찾아갔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그에게 죽음이 선포합니다.

 

모압의 반역(1-2a)

인생을 살아가다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련과 어려움이 닥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생각지 않는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시련의 순간과 어려움의 순간에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디서부터 온 신호인지를 분별해 내고 그것에 맞게 대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리석은 아하사야를 통해 우리들은 긍정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1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 2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1-2a)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배반한 왕조를 싫어하신다는 사실이 여기서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엘리야가 선고한 대로(왕상 21:29) 오므리 왕조는 ‘추락하기’ 시작합니다. 아합 왕이 죽고,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는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합과 어머니 이세벨과 똑같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들을 행합니다(참고 열왕기상 22:51-53).

 

성경에서는 아합이 자주 거론됩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훌륭한 지도자인 것처럼 보입니다. 정치적으로 안정되었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각에서 그는 성실하지 못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상을 섬기도록 이끌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것은 정치적인 어려움으로 도래합니다. 결과로 이스라엘은 점점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추락하기 시작합니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에게 두 가지 어려움을 통해 추락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이 점점 약해짐으로 그 틈을 타서 다윗 시대 이후로 수년 동안 속국이던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합니다(1). 종교적인 배반이 결국 정치적인 불안정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다음으로 설상가상으로 모압의 조공 중단으로 경제적 타격을 받고 있던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마저 자신의 부주의로 다락방 난간에서 추락해서 크게 다쳤습니다(2). 이것은 단순히 몸이 떨어졌다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부분에서 추락했음을 의미합니다. 다친 후 하나님이 아닌 우상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에서 보여 집니다.

이와 같이 국가적으로 그동안 통치해 오던 속국인 모압 떠나가게 되고, 또한 왕이 병들게 되는 이중고의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아무것도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계속적으로 주변에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임할 때,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신호입니다. 그 때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구할 때,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긍휼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추락을 막는 인위적 노력(2b-4)

하나님의 경고의 신호를 느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찾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처음에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것처럼 보이지만, 점점 힘겨우면 절대자를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점점 우상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아하시야 왕입니다.

 

2…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3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4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2b-4)

 

하나님의 경고 신호를 느꼈을 때, 아하사야 왕은 하나님 앞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점점 여러 가지 힘든 상황 속에서도 아하시야의 선택은 하나님께서 주신 왕위와 언약적 의미를 부정했습니다. 신하들을 보내어 이방신 바알세붑에게 자신의 병이 나을지 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부인하는 것은 사소한 죄가 아닙니다. 주를 부인하는 것은 바로 죽음이란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우상을 선택한다는 것은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어리석인 아하시야는 하나님께서 주신 신호에도 무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는지 단편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 또한 인정하지 않고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아하시야 왕은 자신이 병들었을 때, 하나님께 뜻을 물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리신 경고의 표징에 둔감해 어리석게도 회복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살아지고, 하나님의 선지자를 찾을 필요성이 없을 때, 그들은 이방 신상에 의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격노케 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고 살아가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문제가 생길 때 자신이 ‘가장 먼저 누구를 찾는가?’, ‘어떤 방법을 강구하는가?’가 하나님에 대한 태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판가름할 수 있는 것은, 문제가 생겼을 때, ‘주변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아가는가?’ 그러지 않으면, ‘인간적으로 유익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가?’가 중요한 기준점인 것입니다. 주위에 있는 인간적인 사람들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와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혹시 한 번 정도,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인간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걸음을 돌이켜야 된 때가 되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신호들에 귀를 기우려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죄를 행하고 있는 일들은 없는지, 삶에서 고쳐져야 할 부분은 없는지, 더 깊은 순종으로 나가야할 부분은 없는지 등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파악하시길 바랍니다. 헛된 것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붙드시던 손을 놓으면 누구든지 하나님 대신 붙들던 것과 함께 추락하고 말 것입니다.

 

사형 선고를 들은 사람(5-8)

하나님을 찾아야할 사람들이 잘못된 우상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있지 않고 반응하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에 반응하십니다. 아하사야의 불신앙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5사자들이 왕에게 돌아오니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돌아왔느냐 하니 6그들이 말하되 한 사람이 올라와서 우리를 만나 이르되 너희는 너희를 보낸 왕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고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네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고 보내느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더이다 7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올라와서 너희를 만나 이 말을 너희에게 한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더냐 8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5-8)

 

아하시야 왕은 그의 아버지 아합 왕과 어머니 이세벨을 닮아서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합니다. 외부적으로 힘들고 자신이 육체적으로 병든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 우상을 찾았습니다. 그는 에그론 신 바알세붑에게 자기 신하들을 보냈습니다. 단순히 다른 의견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대신에 섬기는 행위입니다. 우상 신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 앞에 가장 큰 범죄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죄의 대가는 무섭고 엄격하게 처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도움을 구해야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곳에 도움을 청하려 가는 곳에 하나님의 사자들을 보내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자인 선지자 엘리야를 올려 보내십니다.

그 아하사야의 사자들을 중간에서 만나서 두 사자들이 충돌합니다. 엘리야는 하늘같이 높아 보이는 왕의 정치권력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왕의 사자들에게 아하시야 왕이 죽음을 선언합니다. 담대하게 살아계신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고 죽은 신 바알세붑을 좇는 아하시야 왕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의 신하들을 꾸짖고,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왕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아하시야의 신하들이 우상 바알세붑에게 묻기 위해 가던 도중에 엘리야를 만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신하들은 결국 바알세붑에 가서 묻지도 못하고 엘리야를 만나고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아하사야 왕은 자신에게 돌아온 신하들에게 질문합니다.

 

5사자들이 왕에게 돌아오니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돌아왔느냐 하니 6그들이 말하되 한 사람이 올라와서 우리를 만나 이르되 너희는 너희를 보낸 왕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고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네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고 보내느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더이다(5-6)

 

아하사야 왕은 마땅히 기대했던 바알세붑의 응답이 아닌 다른 응답을 받고 온 신하들에 대한 그의 질문이었습니다. 신하들은 엘리야가 자신들에게 전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왕에게 전합니다.

그 내용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6). 첫째는 마땅히 기도해야할 대상에게 기도해야할 것이고, 두 번째는 아하시야가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범죄하게 되면 자신의 삶을 지탱해 주던 생명의 줄이 끊어지게 됩니다. 나무가 햇볕을 공급받지 못하면 점점 죽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질 때 일어나는 일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사람들은 마땅히 찾아야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찾지 않고, 세상에 다른 것들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동일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향한 경고는 절망이고 사망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나라에는 번영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회에서는 회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하시야 왕은 신하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반응을 듣게 됩니다. 그 사실을 듣고 크게 놀라고 두려워합니다. 에그론에 있는 바알세붑을 찾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범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집니다.

 

7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올라와서 너희를 만나 이 말을 너희에게 한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더냐 8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7-8)

 

아하시야 왕은 신하들이 길거리에서 만났던 사람의 말을 전하고 있을 때, 그 말을 할 만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하들은 몰랐지만, 왕은 분명하게 그가 바로 엘리야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엘리야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인지를 기억합니다. 자신의 아버지 아합과 어머니 이세벨과의 적대적인 관계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점점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하사야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7). 어리석은 아하시야는 엘리야를 알면서도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함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성도들은 오늘날 거짓이 무성한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담대히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 것을 쫓아가는 삶이, 마치 우상을 찾아가는 모습이 없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아마 그런 길로 가고 잇는 사람들에게 도중에서 가로 막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하나님이 없어서 그걸 의지하느냐?’고 호통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와서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권위를 무시하는 어리석은 왕(9-12)

하나님을 떠나 세속적 안목을 가진 아하사야에게 그의 문제점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심판을 선언한 엘리야는 비판적 종교 지식인에 불과했습니다. 아하시야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를 존경하지도 그 말을 경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생각을 거슬리므로 제거의 대상일 뿐입니다.

 

9이에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매 그가 엘리야에게로 올라가 본즉 산 꼭대기에 앉아 있는지라 그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10엘리야가 오십부장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너의 오십 명을 사를지로다 하매 불이 곧 하늘에서 내려와 그와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살랐더라 11왕이 다시 다른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니 그가 엘리야에게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속히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하니 12엘리야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너의 오십 명을 사를지로다 하매 하나님의 불이 곧 하늘에서 내려와 그와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살랐더라(9-12)

 

아하시야 왕은 자신의 신하들에게 심판을 경고할 사람은 엘리야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외모의 특징만으로도 충분히 엘리야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언을 듣고 큰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죽음의 공포로 인해 아하시야가 특별한 행동을 취합니다.

 

아하시야 왕은 엘리야를 연행해 와서 그를 심문해서 제거하거나 혹은 입에 재갈을 물려서 아무 말을 못하도록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두 차례나 오십부장과 오십 명의 군사를 보내 엘리야를 강제로 생포해 오도록 했던 것입니다.

 

왕의 명령을 받은 첫 번째 오십부장과 군사들이 갈멜산에 있던 엘리야에게 가서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라고 외칩니다. 이곳에 두 가지 모순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엘리야를 향하여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들은 진정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해서 그렇게 부른 것은 아닐 것입니다. 두 번째는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고 한 것입니다.

갈멜산은 아버지 아합과 영적인 전투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준 산이었습니다. 그들은 아하사야 왕의 명령이기 때문에 엘리야는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높으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낮은 지상의 왕의 명령으로 복종시키려 한 것입니다. 왕의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을 굴복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겟세마넷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잡으려 왔던 로마 병사들과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의 반응은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불을 떨어뜨려서 너를 불살라 버릴 것이다.’(10)라고 경고합니다. 이미 갈멜산에서 전투와 같이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더 나가서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자인 것을 증명해 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엘리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권위가 높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엘리야의 성품이나 능력 때문에 순종한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아하시야 왕은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라 명령을 듣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엘리야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아하사야 왕의 명령을 집행하러 온 오십부장에게 말했던 것처럼 오십부장과 모든 군사들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그들을 태워 죽었습니다.

 

그러나 아하사야 왕은 쉽사리 포기하지 않고, 다른 오십부장과 군사 50명을 갈멜산의 엘리야에게 보냈습니다. 그들은 엘리야에게 가서 동일한 말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전과 같이 하늘에서 불을 내려 불태울 것을 말하고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또 하늘에게 불을 내려서 그들을 태워 죽였습니다. 엘리야는 왕의 마음대로 할 대상이 아닙니다. 엘리야를 체포하기보다는 엘리야가 전한 말씀을 붙들어야 할 하나님의 사람임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아하시야 왕은 계속적으로 어려움을 맛보다면서도 교만한 마음을 꺾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대변인인 엘리야를 무력으로 제압하려는 하나님을 향한 적대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좌우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순종의 대상임을 거부한 채,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재촉하였습니다. 완악한 독재자는 주변 사람들도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대항하는 사람들은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을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보호해줄 다른 신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받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도 아하시야 왕처럼 다른 길로 가고 있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제 그만 멈추고 포기하고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절대적인 명령은 순종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왕의 명령에만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 일로 인하여 불어 타서 죽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에게 누구의 음성에 순종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특히 성도들은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올바른 영적인 질서를 맺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작은 신호 메시지들을 감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을 때에 돌아섰어야 했습니다. 마치 히스기야가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갔던 것처럼 아하시야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으로 가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만 믿고 담대히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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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8-02)


로마에서 마지막까지 복음을 전하는 바울

사도행전 28장 16-31절


 

“우리 교회에서 사도행전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사도행전에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기적들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성도들은 아마 사도행전의 결론부를 보고 실망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이 성도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그 마지막 부분을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 바울은 로마에 도착한 후, 가택연금 형태로 갇히게 되었지만, 비교적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먼저 로마에 있는 유대 지도자들을 만나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였습니다. 바울은 두 번째 만난 회동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강론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서두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가르치셨던 것처럼, 마지막도 바울이 사람들에게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를 ‘거침없이’ 전하는 모습으로 마무리됩니다.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만남(16-28)

전도는 사역자 혼자 짊어지는 짐이 아니라 하나님과 펼치는 협동 작전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들로 하여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할 기회를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끊임없는 영적 전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디고 어리석은 마음을 다스리셔서 은혜를 주셔서 복음을 듣도록 하십니다.

 

16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17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18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19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20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21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22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하더라 23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24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25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28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16-28)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23:11)라는 사명을 따라 우여곡절 끝에 그는 로마에 도착하였습니다.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재판을 받기 위해 2년 동안 가택연금 상태로 지냈습니다. 비록 갇혀 있기는 했지만, 그는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찾아오는 사람들 향해 비교적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1) 로마에서 감금된 상태로 복음 전파(16-22)

 

드디어 바울은 긴 여정 끝에 목적지인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한 군인과 함께 개인 주택에 머무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16). 이것은 감금의 한 형태지만, 군부대 안이 아니었으므로 훨씬 가벼워진 감금이었습니다. 21-27장까지 바울의 재판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했던 저자는 바울이 로마에 와서 받은 재판 과정이나 결과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로마의 숙소에 정착하자마자, 하루를 쉬고 삼일 째 되는 날 바울은 가장 먼저 로마에 있는 유대 지도자들과 면담하는 것이었습니다(17). 표면적으로 그들에게 지금 상황과 과정을 설명한 것처럼 보이지만, 바울이 항상 잊지 않았던 것은 어디서나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롬 1:16).

바울은 그들을 만나 자기는 유대인의 관습을 어긴 적이 없는데, 유대인들에 의해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넘겨졌다고 설명합니다(17). 누가는 여기서 복음서에서 예수님에게 사용한 표현(눅 18:32)과 비슷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어쩌면 누가는 사도행전을 읽는 독자가 예수님의 운명과 바울의 운명이 서로 중첩되는 것을 느끼기를 의도했을 수도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여기서 누가가 앞에서 기록한 것과 상충하는 말을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즉, 앞에서는 바울이 로마인을 통해 유대인의 손에서 구원받았다고 기록했는데, 여기서는 유대인에 의해 로마인의 손에 넘겨졌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는 여기서 이 사건을 세부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그 내용의 골자만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유대인들이 총독 벨릭스와 베스도 앞에서 바울을 고발한 것을 보면 이 말이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로마인들은 자기를 석방하려 했지만 그것을 유대인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라며, 바울은 자기가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한 이유를 밝힙니다(17-18). 바울의 이 말에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믿을 수 있도록 하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20절의 ‘이스라엘의 소망’은 메시아의 오심과 부활에 관한 소망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자신이 신실한 유대인 신자이기 때문에 지금 로마인의 죄수가 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유대 지도자들에게도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교는 로마가 합법적으로 인정한 종교였기 때문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바울의 설명에 대해 대답합니다. 그들은 먼저 유대로부터 바울에 대해 편지를 받은 일도 없고, 로마에 도착한 형제들 중에 누구도 바울에 대한 부정적인 보고나 말을 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21). 아마 바울이 로마 당국자들의 손에 넘어간 이후에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이 기소 건을 이길 승산이 거의 없기 때문에 포기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들은 이어서 도처에서 반대를 받고 있는 ‘이 파’(복음)에 대해 바울의 견해를 듣고 싶어 했습니다(22). 그들은 바울이 대변하는 이 파, 곧 나사렛 사람 예수의 복음에 대해 판단을 내리기 전에 그의 견해를 경청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보았습니다. 이로써 유대인 지도자들과 바울 사이의 첫 번째 만남은 긍정적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다시 만날 약속을 잡고 헤어졌습니다.

 

(2) 유대인들과 2차 회동(23-28)

 

로마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의 말을 직접 듣기 위해 바울과 만날 약속된 날에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바울이 구금된 숙소로 찾아왔습니다(23).

따라서 바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집중적으로 강론했습니다. 바울은 먼저 하나님 나라에 관해 전파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임하게 하신 참 메시아라고 전파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강론한 것은 그 동안 디아스포라로 흩어진 유대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쳤던 메시지와 동일했습니다.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로 예수님에 관해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구약의 말씀(율법과 선지자)이 말하는 오실 메시아는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통치(하나님 나라)가 메시아를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다고 말합니다. 즉, 메시아에 대한 구약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은 모두 믿는 것만은 아닙니다.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24). 세계를 상징하던 도시, 즉 로마에서 복음을 배척하였는데, 그것도 바울에 의하여 세계에 선포되는 복음을 배척하였다는 사실은 사건의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세계에서 유대인들에게 배척당하고 이방인들에게로 옮겨지는 모습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말씀의 권위로 그 사실을 선언하였습니다. 그 사실은 유대인에게는 비극적인 소식이요, 이방인들에게는 영광스러운 소식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사야가 복음이 유대인에 의하여 배척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고 선언합니다, 26-27절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9-10)라고 바울이 인용한 말씀은 사실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제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계속 거부하면,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능력조차 상실하게 된다는 강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바울의 말은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복음을 거부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바울은 서신에서 때가 되면 유대인들의 마음이 바뀔 것임을 기대하고 있습니다(참조, 롬 11:25-32). 뿐만 아니라 누가는 바울과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초대교회의 사명은 이방인에게로 향합니다. 바울은 더 이상 ‘유대인에게 먼저’라는 책임감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었습니다. 누가는 아마도 이러한 바울의 모습을 사도행전의 독자와 초대교회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로마에 거침없이 전파(30-31)

사도행전은 소수의 믿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영광스러운 복음증거의 위임령을 받는 것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이 소수의 믿는 사람들이 그 이후로 복음을 들고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서 전하였습니다. 이제 사도행전이 마감되는 시점에서, 복음이 세계의 중심부요 수도인 로마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전 세계에서 무수한 사람들에 의해 전파되고 있습니다.

 

30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30-31)

 

바울은 2년 동안 동일한 셋집에 머뭅니다.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지만, 사람들이 바울의 숙소로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자기에게 오는 사람이라면 계속해서 복음 전파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30, 물론 바울이 자유롭게 외부 출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디모데후서 2:9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선파하고 설교하고 가르치면서 새롭게 믿는 자들을 믿음의 뿌리 내리게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과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양육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은 이 2년간의 세월이 흐른 후의 이야기를 밝히지 않습니다. 2년이 지난 후 바울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도행전의 독자들은 이 점을 매우 궁금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30절은 어떤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에 관해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누가가 바로 이 시점에 사도행전을 기록했기 때문에 누가는 그 이후의 일에 대해 전혀 몰랐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추정은 사도행전의 기록 연대를 상당히 이른 시기로 잡아야 한다는 어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은 전체적으로 더 후대의 관점에서 기록되었다는 인상을 줍니다. 누가가 사도행전을 통해 초대교회의 역사를 기록할 때 어느 정도의 시간을 두고 회고할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바울을 고발하려는 유대인들이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입니다(참조. 행 28:21). 이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이 자동적으로 석방되었을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다만 사도행전 23:11과27:24을 읽어보면, 누가의 글을 통해 바울이 결국 가이사 앞에 서게 되었을 것이라는 암시를 강하게 받게 될 뿐입니다.

셋째, 바울이 가이사 앞에서 재판을 받았고, 그 결과 무죄 판결을 받았거나 아니면 로마 당국이 바울의 기소 건을 취하했을 가능성입니다. 후자의 가능성, 곧 로마 당국이 바울과 관련한 사건을 증거불충분으로 취하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둡니다. 둘째와 셋째 추정은 바울이 한 동안 자유의 몸이 되었다가 다시 체포된 후 사형을 당했을 가능성과도 연결됩니다. 이것이 바울의 목회서신을 통해 추측할 만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바울이 이 시점에서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했지만 누가는 바울의 순교를 사도행전에 기록하고 싶지 않았다는 추정입니다. 누가는 이미 앞에서 바울의 순교를 암시하는 힌트를 충분히 제공했습니다(참조. 20:23-25,38; 21:13; 23:11; 27:24). 다시 말해, 바울이 로마에서 이방인들에게 자유롭게 복음을 선포하는 모습으로 마무리하기를 누가가 원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가 만약 바울의 순교나 로마에서 일어난 네로의 그리스도인 대학살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몇몇 관점들은 쉽게 수긍이 가지 않습니다. 즉, 누가가 어떻게 로마 정부의 이미지를 이렇게 긍정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으며, 바울에 대한 로마의 태도(참조. 행 23:29)를 긍정적으로 그릴 수 있었겠습니까! 따라서 결론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결론은 쉽지 않습니다.

 

바울의 마지막이 어떻게 마무리 되었든지 간에, 어쨌든 바울의 최후 운명은 개인적으로는 중요하겠지만, 그가 전한 복음과 비교하면 부차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이 남긴 바울의 마지막 모습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지금까지 사도행전에서 지속적으로 선포해 왔던 그 동일한 메시지를 ‘담대하고 거침없이’ 선포하는 모습입니다(31). 이 마지막 표현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바울에 대한 고발이 모두 거짓이고 불의한 것이었으며, 마침내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이제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는 것을 막을 수 없으며, 이 복음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강한 메시지로 끝을 맺습니다.


복음과 하나님의 행전은 세상 끝 날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구라고 인정하는 사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의 사명임을 인정하는 사람들을 통해, 어떠한 악조건 가운데서도 복음은 세상을 뒤덮으며 전진합니다. 바울은 갇혀 있었지만, 복음은 땅끝까지 넓게 퍼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대에도 바울과 같은 전도자를 찾으시고 계십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지금도 계속 굳건하게 행진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겠고 굳건하게 행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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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8-01)


마침내 로마에 도착한 바울

사도행전 28장 1-15절


 

구원은 죽어 있는 자를 살리는 역사입니다. 외부의 힘에 의해서 구원을 받아 살아나는 일입니다. 그 기적 같은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사랑을 배우고 자유를 배웁니다. 나와 타인을 나누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생명을 살게 하는 능력임을 알게 됩니다. 바울에게 살림의 역사는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 파선 배에서 구조된 바울 일행은 시칠리아 반도의 멜리데 섬에 도착하게 되고 거기서 겨울을 보내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원주민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바울이 독사에게 물리는 거건이 발생자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을 보호해주십니다. 또한 바울은 추장 아버지의 병을 고쳐주고 그들부터 환대를 받습니다. 것 달 후 멜리데를 떠난 바울은 무사히 로마에 도착합니다.

 

시칠리아 멜리데에서 월동(1-10)

위기는 또 다른 기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면, 새로운 방법을 찾게 되고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냅니다. 어떤 상태에도 포기하지 않고 열정과 헌신을 통해 새롭고 아름다운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멜리데에 도착한 바울은 새로운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1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2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3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4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 5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6그들은 그가 붓든지 혹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기다렸다가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이켜 생각하여 말하되 그를 신이라 하더라 7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머물게 하더니 8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9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10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실었더라(1-10)

 

본 단락에는 로마로 가는 여정에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도착한 시칠리아 반도의 한 멜리데 섬에서 일어난 일들과 로마로 향하는 바울의 마지막 여정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바울과 함께하셨던 주님은 오늘날 사도행전을 읽는 성도들의 삶에도 함께하십니다.

 

(1) 멜리데 섬에 도착한 바울(1-2)

 

바울 일행이 탄 배는 유라굴로라는 큰 풍랑을 만나서 십사일 동안 표류하다가 한 섬에 도착했습니다. 누가는 모든 사람이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나서 보니 이 섬의 이름이 ‘멜리데’ 섬이었다고 기록합니다(1). 멜리데 섬은 다행이도 시칠리아 반도 남부에 위치한 섬인데, 오늘날 몰타에 해당합니다. 폭풍이 로마 가까운 곳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배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 아무도 이곳으로 인도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로마로 가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들이 죽을 줄로만 알았습니다. 바울의 지도 하에 모든 사람들이 구조된 것입니다. ‘멜리데’는 셈족어로 ‘안식처’ 혹은 ‘피난처’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그 의미를 누가가 당시에 알고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멜리데 사람들은 본래 페니키아인들로서 셈족어 계통의 포에니 사투리를 사용했습니다. 특히 변방에 사는 사람들은 헬라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토착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은 그들을 ‘원주민’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원주민들은 대체적으로 낯선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표명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원주민들은 특별한 동정을 베풀어서 파선으로 인해 난민 신세가 된 276명(27:37)을 오히려 정성껏 환대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 배를 노려서 강탈하려는 원주민이었다면, 겨우 구조된 후에 비참하게 죽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환대함으로 그 날 비가 내리고 날씨가 매우 추웠기 때문에 불을 피워서 바울과 선원 일행을 친절하게 맞이합니다(2).

 

(2) 독사에 물린 바울(3-6)

 

하지만 바울에게는 또 다른 위기가 닥쳐옵니다. 배 안에서도 매우 헌신적이며 현실적인 도움을 주었던 바울은 육지에 오른 후에도 계속해서 동료들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3). 바울은 추은 날씨에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 마른 나뭇가지를 한 아름 안아다가 불 속에 넣었더니 뜨거운 열기 때문에 독사가 한 마리 튀어나와서 바울의 손을 물고 있었습니다(3). 여기서 사용한 헬라어 ‘에키드나’(ἔχιδνα)는 독사를 가리킵니다.

그 순간 섬에 사는 원주민들은 다음과 같이 수군거렸습니다. ‘이 사람은 분명히 살인자다. 바다에서는 살아 나왔지만 정의의 여신이 그를 그대로 살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4) 독사가 물어 죽게 되는 것을 보니, 바다의 신이 살려주었을지 모르지만, 정의의 신이 바울을 심판하여 살인자가 분명하다고 확신합니다.

바울은 태연하게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그 독사를 불속에 떨어뜨렸습니다(5). 바울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머리털 하나 상치 않고 로마에’ 도착할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27:22-26).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원주민들은 바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주시하며, 그의 살이 부어오르거나 당장 쓰러져 죽으려니 생각하면서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기다려도 아무런 이상이 생기지 않자 그들은 바울을 신이라고 말했습니다. 누가는 문학적인 위트를 소유한 누가는 이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원주민들의 미신적인 생각을 살짝 유머러스하게 믿음의 비꼬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 자신을 인도하신 하나님, 인간의 생사화복을 진정한 신이라고 보여 주었습니다.

 

(3) 열병을 치유하는 바울(7-10)

 

누가는 7절부터 ‘멜리데’ 섬에서 일어났던 두 번째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 이야기는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과 다른 사람들의 질병을 고친 이야기와 흡사합니다. 멜리데 섬의 추장은 농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초대를 받아 사흘 동안 극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초대를 받은 자 중에는 바울과 내레이터(누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마침 추장 보블리오의 아버지가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었는데, 바울이 그를 보고 들어가서 그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병을 낫게 해주었습니다. 바울의 치유 기적을 듣고 그 섬에 사는 다른 병자들이 바울을 찾아왔고, 바울은 그들의 병도 모두 고쳐주었습니다. 원주민들은 바울이 자신들의 병을 고쳐준 일에 대한 감사의 멜리데, 표현으로 극진히 접대하였고, 그 섬을 떠날 때 필요한 물건들을 배에 실어주었습니다.

누가는 이 단락에서 ‘우리’라는 1인칭 복수를 사용하는데 이는 누가도 바울과 함께 의료 기술을 발휘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는 단순히 바울이 행한 일에만 집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도착(11-15)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반드시 이루신 분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세상 가운데 주님께서 맡기신 일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도 감당하야 할 일들을 예수님의 제자답게, 거룩한 방법으로 감당하는 우리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19:21)고 약속하셨던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11석 달 후에 우리가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나니 그 배의 머리 장식은 디오스구로라 12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 13거기서 둘러가서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낸 후 남풍이 일어나므로 이튿날 보디올에 이르러 14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머무니라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 15그 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11-15)

 

바울과 그 일행이 멜리데에서 석 달을 보낸 기간은 긴 겨울철이었습니다. 그곳에 있던 다른 배들도 겨울철이었기 때문에 항해를 멈추고 봄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멜리데 섬에 다른 알렉산드리아 배가 정박해 있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닙니다. 이 배 역시 곡식을 로마로 실어 나르는 배였을 것입니다. 누가는 그 배의 세부적인 정보까지 독자들의 흥미를 위해 제공해줍니다. 그는 이 배의 선수상(船首像)은 두 신(디오스구로)으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이들이 탄 배는 먼저 시칠리아 섬의 수도인 수라구사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 사흘 동안 머물렀습니다. 이런 정보는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이야기 속에서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지 않기 때문에 누가의 단순한 창작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역사적 기록을 반영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들은 수라구사를 떠나 레기온(오늘날로 하면 레기움)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레기온에서부터 북쪽으로 남풍을 타고 속도를 내어 이튿날 보디올(오늘날로 하면 포추올리)에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보디올은 당시에 밀무역의 주요 항구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누가는 바울과 그 일행이 그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만났고 그들의 초대를 받아 이레를 그들과 함께 지냈다고 기록합니다. 보디올은 당시 유대인 공동체를 비롯해 국제적인 도시였으므로 그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만났다는 사실이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주석가들은 바울이 그곳에서 자유롭게 신자들과 한 주간동안이나 교제하며 지낼 수 있었던 점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습니다. 이 기간을 바울이 로마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로마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맞이하기 위해 올 수 있는 누가의 문학적 장치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한편 백부장이 이 기간 동안 로마에 가서 추가 지시를 받아왔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라는 누가의 설명도 난해합니다. 아마도 이 구절은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침내 로마에 도착하게 되었다’의 의미일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보디올에서 로마로 들어가기까지 육로를 통해 여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기 전에 소식을 들은 성도들이 그를 맞이하러 나왔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은 아마도 보디올에 있던 성도들에 의해 로마에 전달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두 지역의 성도들이 각각 바울을 맞이하러 로마로부터 약 69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압비오 광장과 로마로부터 약 53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한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마중나오게 됩니다. 누가는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용기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로마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며 예배하는 신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바울에게는 적지 않은 격려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서 살아났습니다. 죽을 위기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낯선 사람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자기 안에 역사하시는 부활의 주님과 능력의 성령과 동행했습니다. 그 주님을 의지하여 설려내는 역사에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살아난 자를 통해 살려내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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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7-03)

 


광풍 속에서도 인도하시는 하나님

사도행전 27장 27-44절


 

모든 게 정상일 때는 굳이 하나님을 믿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차지한 위치와 갖고 있는 것들이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은 나의 한계 앞에 설 때 비로소 생깁니다. 하나님을 알 때 생깁니다. 바울이 탄 배 안에서 믿음의 진가는 어떻게 드러납니까?

 

  • 광풍으로 인해 아드리아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던 배는 미항을 떠난 지 14일 만에 기적적으로 육지에 근접하게 됩니다. 이에 선원들이 배를 버리고 거룻배로 도망가려고 시도하지만, 바울의 조언에 따라 군인들이 거룻배의 줄을 끊어버림으로써 수포로 돌아갑니다. 바울은 또다시 동료 승객들에게 음식을 권하며 위로합니다. 마침내 배에 탔던 276명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육지로 구조됩니다.

 

육지에 접근한 배(27-29)

현실의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에 현실과 동떨어진 천국만 말한다면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불신자들도 어려움에 처하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신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려움과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위로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도록 도와줌으로 복음 전도의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27열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서 이리 저리 쫓겨가다가 자정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28물을 재어 보니 스무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29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니라(27-29)

 

바울은 앞 단락에서 배만 손상될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말로 사람들을 위로했습니다. 이제 그 위로의 말이 현실에서 이루어집니다. 27절부터 ‘우리’ 단락이 다시 시작됩니다. ‘열나흘째 되는 날’은 아마도 그들이 미항을 떠난 지 14일째 되었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가 위에서 묘사한 대로 이 기간은 바울이 탄 배가 광풍에 의해 약 885km를 표류해 밀려왔다면 실제로 걸릴 만한 시간으로 추정됩니다. 당연히 이 측정에는 도중에 바람의 방향이 여러 차례 바뀐 것도 포함시켜야 할 것입니다. ‘아드리아 바다’는 오늘날로 하면 이탈리아와 발칸 반도 사이에 있는 바다(걸프 만)를 가리키지만, 당시의 용례로는 시칠리아 반도와 그레데 섬 사이의 해역까지도 아드리아 바다에 포함되었습니다.

 

멜리데 섬은 시칠리아 반도 남단에 위치한 아주 작은 섬입니다. 이렇게 오랜 기간을 표류하며 오다가 선원들은 배가 육지에 가까이 왔음을 짐작하게 됩니다. 그들은 육지에 가까이 왔음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이 일이 낮에 일어났다면 육안으로 알아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이 일이 자정쯤에 일어났다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그들은 해안을 향해 부딪치는 큰 파도 소리를 들었을 것이고, 이 소리를 통해 배가 육지에 근접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육지에 가까이 온 것을 느낀 선원들은 이제 배 밑의 수심이 얼마나 되는지 수심을 측정하기 시작합니다. 아마 그들은 끈에다 추를 달아 내려 봤을 것입니다. 누가는 처음에 재니 스무 길이었고 조금 더 가서 재니 열다섯 길이라고 기록합니다. 점점 더 육지에 가까워졌다는 의미입니다. 일부 학자는 누가가 수심을 재는 선원 옆에 서서 그 내용을 확인한 것이 아니라면 누가가 기록한 수심은 누가의 문학적 창작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수심이 점점 낮아지고 점점 가까이 들려오는 백파의 소리에 대비해 선원들은 안전 대책을 실행에 옮깁니다. 그들은 혹시 배가 암초에 걸리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고물에서 닻 네 개를 내리고 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립니다.

 

선원들이 도망을 시도(30-32)

 

우리는 공동체에서 각자 맡은 역할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감당하는 데 끝까지 충성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공들이 도망하려는 계획을 알아차린 바울은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알려서 그들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군인들은 바울의 말대로 거룻줄을 끊어 버립니다.

 

30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 놓거늘 31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32이에 군인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30-32)

 

누가는 30절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놓거늘. 누가의 이 기록에 따르면 선원들은(어쩌면 그들 중 일부) 배에서 도망하기 위해 뱃머리에서 닻을 내리려는 척하면서 거룻배(16)를 바다에 내려놓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성경주석가들은 이러한 악천후에 배에서 도주하려는 시도는 거의 자살행위에 해당한다고 주장합니다. 학자들은 선원들이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동이트기 전까지 배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었음을 지적하며 누가의 이 기사에 의구심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은 언제나 합리적인 판단만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냉철하게 생각하기보다는 논리적으로 볼 때 매우 어리석인 방법을 선택할 때가 많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원들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든지 간에 바울은 선원들이 배에서 도주한다면 승객들에게 닥칠 위험성에 대해 백부장에게 전달합니다.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누가는 왜 선원들이 배에 남아 있어야 모든 승객들이 안전한지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배를 안전하게 운행할 전문가들의 손이 없다면 엄청난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이제 백부장이 바울의 조언을 무시하지 못할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군인들은 바울의 조언에 따라 거룻배를 묶고 있던 줄을 모두 끊어버렸습니다. 백부장은 이 방법이 선원들을 배 안에 남게 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랜만에 음식을 먹음(33-38)

우리는 누군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것을 기억함으로 삶의 어떤 위기 속에서도 바울처럼 평안을 잃지 않고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세상에 참소망을 제시하는 참된 통치자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33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34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35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36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37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 38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33-38)

 

이제 바울이 다시 한 번 이 이야기에 개입합니다. 배가 닻으로 고정되고 날이 밝아오자 바울은 무려 14일 동안이나 금식을 강요당한 동료 승객들에게 음식 먹을 것을 권합니다. 이제 상황이 많이 안정되어 음식을 조리할 수 있을 정도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이 육지에 무사히 오르기 위해서는 많은 체력이 필요했기에 음식을 먹고 에너지를 재충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모든 사람이 생명에 지장 없이 안전하게 구출될 것이라며 그들을 안심시킵니다.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참조. 삼상 14:45; 마 10:36; 눅 12:7;21:18).

 

바울은 안심하라는 위로의 말을 전한 후 손수 떡을 떼어 먹으며 동료들을 격려했습니다. ‘하나님께 축사하고’는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들이 식사 전에 일상적으로 행했던 감사 기도를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능동적으로 음식을 먹는 바울을 본 동료 승객들도 용기를 얻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 모습을 그리는 누가의 묘사는 예수가 오천 명을 기적적으로 먹이던 모습(눅 9:16),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던 모습(눅 22:19),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와 식탁교제를 나누던 모습과 흡사합니다. 따라서 많은 성경주석가들은 이 장면에서 초대교회에서 행했던 성찬식을 연상하기도 합니다. 초대교회는 성찬식을 따로 행한 것이 아니라 일반 식사 도중에 행했습니다(고전 11:17-34). 바울이 이 자리에서 누가를 포함한 다른 동료들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찬식’을 거행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누가는 그 배에 탔던 사람의 수가 모두 276명이었다고 덧붙입니다. 꽤 많은 숫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일부 사본에는 76명이라고 되어 있지만, 필사자의 실수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요세푸스도 아드리아 바다에서 600명이 탄 배가 침몰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기도 합니다. 누가가 이 숫자를 여기서 언급한 이유는 나중에 이토록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모두 구원받게 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리라.

 

무사히 육지에 상륙(39-44)

사람들의 현실적 필요를 채워 주는 섬김과 봉사는 그들이 복음에 마음을 열게 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합니다. 사람들의 삶의 문제에 민감하게 대처해 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도와 교회는 지역 사회 속에서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섬김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또한 선교지에서 섬김과 봉사가 이어지도록 끊임없는 기도와 함께 물질적 후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39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거늘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한 후 40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키를 풀어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에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41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만나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쳐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가니 42군인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그들을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43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44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39-44)

 

모두 배불리 먹고 난 뒤에 사람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곡식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들은 또한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고 키를 묶었던 밧줄을 늦추었습니다. 그리고 전면의 돛을 올려 바람을 타고 해안 쪽으로 배를 몰았습니다. 그런데 두 물살이 합쳐지는 곳에 와서 배가 모래톱에 걸려버렸습니다. 이 물은 박혀서 움직이지 않게 되었고 고물은 심한 물결에 깨지고 말았습니다. 이때 군인들은 죄수들이 혹시 헤엄쳐 도망갈까 하여 그들을 모두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군인들의 계획을 미리 알아채고 헤엄칠 수 있는 사람들은 먼저 뛰어내려서 육지로 올라가라고 명령했습니다. 누가는 이렇게 해서 모두 무사히 육지로 올라오게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순풍일 때는 몰랐습니다. 배를 의지했고 선장을 의지했습니다. 하지만 광풍 앞에서 가진 것은 쓸모없었습니다. 배는 사람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절망만 주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 광풍보다 크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희망은 거기서 나왔고, 구원은 거기서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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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7-02)

 


미항에서 출발한 후 만난 유라글로

사도행전 27장 12-26절


 

세상의 문제는 눈에 보이지만,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큰 위기를 만나면 아무리 믿음이 강한 자라도 순간적으로 절망의 깊은 수렁에 빠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해결하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문제 가운데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찾아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 배가 미항에서 출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광풍이 일어 위기에 처합니다. 선원들이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살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때 바울이 배는 파선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살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사람들을 안심시킵니다.

 

유라굴로 광풍을 만남(12-20)

 

세상에는 힘 있는 자들만이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하나님 나라도 그렇다고 생각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도 힘과 능력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잘못된 태도입니다. 그런 사람들만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다 그렇게 창조하셨을 것입니다. 세상에 힘 있는 자들만 자기 백성으로 삼아서 일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해가십니다.

 

12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13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14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15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16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7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18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9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20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12-20)

 

백부장과 모든 사람들은 항해가 위험하니 내년 봄까지 기다리자는 바울의 제안을 거부하고 전문가인 선주와 선장의 말을 믿고 따랐습니다. 바울의 제안은 바울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 바울은 단지 죄인 중에 한 명에 불과 했습니다.

 

바울이 탄 배는 미항이라는 작은 항에 정착해 있습니다. 이곳은 겨울나기에 불편하며, 또한 겨울철이면 북동풍으로부터 배를 보호하지 못한 곳이었습니다(12). 그래서 넓고 편리한 뵈닉스 항으로 가야 할 것인지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 선장과 선주를 비롯해 배에 탄 대다수의 사람들은 항해하기 좋지 않은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남풍이 불면 출발하자고 결론을 냅니다.

 

배에 승선한 사람들은 바람의 방향이 항해하기에 유리한 상황이 오면, 곧장 겨울을 보내기에 훨씬 더 좋은 뵈닉스로 출항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뵈닉스는 미항에서 해안을 타고 약 80km 떨어진 곳으로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다수가 뵈닉스로 가는 것에 동의한 것입니다. 미항에서 뵈닉스까지는 잔잔한 남풍에 힘입어 해안을 타고 항해하면 하루 이내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선장과 선주는 순한 남풍이 불자 곧 출항했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줄 알았습니다(13). 그런데 그들의 결정은 실수였습니다. 항해는 오래가지 못했고 목적지에도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바람의 방향이 갑자기 바뀔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항해 전문가라도 모든 날씨를 예측하고 주장할 순 없습니다. 그들은 섬에 있는 산으로부터 광풍이 강하게 불어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그들이 타고 가던 배는 광풍에 휩싸이게 됩니다. 고대에는 항해술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강풍을 적절하게 다룰 만한 기술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배가 해안으로부터 멀어지더라도 부는 바람을 따라 배가 움직이게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선장도 선원도 필요 없었습니다. 오직 바람이 인도할 뿐입니다. 바람을 따라 가다 보니 배는 그레데 섬에서 약 37km 거리에 있는 ‘가우다’라는 작은 섬에 도달합니다(16).

 

선원들은 거룻배(구명정)를 갑판 위로 끌어올리고 배가 부서지지 않게 밧줄을 이용하여 선체를 동여맸습니다. 거룻배는 일반적으로 배의 뒷부분에 달고 다니는데, 광풍이 심할 경우에는 이 거룻배가 다른 큰 배와 충돌할 위험이 있어서 갑판 위로 끌어올렸을 것입니다.

 

선원들은 또한 배가 리비아 해안의 모래톱(스르디스)으로 처박힐까 두려워서 바다에 닻을 내리고, 그냥 계속 표류할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원들의 이 모든 수고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배가 계속해서 풍랑에 밀렸습니다. 큰 풍랑에 의해 배 안에 물이 들어와서인지 배에는 많은 곡물이 실려 있었기 때문에 점점 더 무거워졌습니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배에 실은 화물을 바다에 내버려 배를 가볍게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 많은 돈을 벌려고 무리한 항해를 했지만, 있던 것 마저 버려야할 저지가 되었습니다.

누가는 어떤 화물을 바다에 내던졌는지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지만, 지금 타고 있는 배가 곡식을 나르는 배였기에 곡식의 일부도 어쩔 수 없이 내버릴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구약에서 요나가 탔던 배의 상황과 비슷한 형편에 놓인 것입니다(참조, 욘 1:5).

 

사흘째 되는 날에도 배를 가볍게 하는 작업은 계속되었습니다. 이제는 배의 장비까지도 바다에 내던지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스미스(Smith) 학자는 여기서 말하는 장비는 돛대의 하활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하활은 배의 길이만큼 긴 것으로서, 아마도 선원들과 승객들이 온 힘을 합해야 가능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과 그 일행이 만난 광풍 이야기의 절정은 선원들이 지금 배가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를 전혀 짐작하지 못한 상황까지 이르렀다는 점에서 알 수 있습니다. 큰 풍랑과 나쁜 기후 때문에 그들은 여러 날 동안 해와 별도 보지 못하고 살아 돌아갈 희망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시에는 태양이나 별을 봐야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그럴 능력도 없었고 완전히 희망의 줄을 놓을 수밖에 없는 처참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누가는 그들이 처한 상황을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고 묘사합니다(20). 소망을 잃어버린 그들의 처지를 문학적으로 잘 묘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으로 읽는 독자들에게는 이 문장이 단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을 먼 길을 배타고 가는 항해의 길에 비유한다면, 우리들은 모두 바울과 그 일행이 타고 가던 배처럼 눈앞이 캄캄해지는 암흑과 같은 상황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누가가 말한 것처럼 ‘구원의 여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독자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바울이 나중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구원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새로운 힘을 얻기도 합니다. 이것이 성경은 바울을 통해 독자들에게 주는 힘입니다.

 

바울이 위로의 말을 전함(21-26)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대로 이끌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광풍과 같은 어려운 일을 만나면 인생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없음을 알게 해줍니다. 우리가 붙잡고 쌓아둔 것이 위기 때는 자신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자신을 해롭게 하기에 다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21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22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3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6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21-26)

 

이 단락에서는 바울이 이 이야기 속에 두 번째로 개입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들은 어느 누구도 무엇을 먹을 기운도 없었고 먹을 기분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이 일어나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합니다(21). 지금까지 침묵했던 바울은 이제 모든 상황을 주고하고 이끌어갑니다. 배에 탄 사람들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는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 바울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달려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내 조언을 듣고 그레데에서 출항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이런 재난과 손실은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자신의 조언대로 미항에 남지 않았던 것을 매우 아쉬워합니다. 바울도 그런 면에서 우리와 똑같은 인생입니다. 그는 ‘내가 분명히 말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희망의 줄을 놓고 있는 자들에게 필요한 위로와 소망의 말을 전합니다. 그는 단순히 자신의 희망 사항을 그들에게 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확신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아직 미항에 있을 때 바울은 미항을 떠나 출항하면, 그 배는 “화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27:10)라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배를 타본 경험이 많은 사람으로서 합리적인 판단력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그가 바다에서 만나는 광풍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경험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과거에 탔던 배의 기억을 되살렸을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1:25에서 파선을 당한 적이 세 번 있었고 꼬박 하루를 바다에서 표류한 적도 있었다고 회상합니다. 아마 당시 에도 적지 않은 생명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고 바울은 그 경험을 거울삼으려 했을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배의 손상은 막을 수 없겠지만, 생명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22). 이것은 과거의 경험에서나 어떠한 계산에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러한 확신의 출처를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초자연적 계시라고 밝힙니다. 그는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해주었다”고 말합니다(23). 2년 전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목숨이 위험에 처했을 때도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로마에서 주님을 증언할 것이라는 확신을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행 23:11).

여기서 이 하나님의 사자가 전해준 메시지는 바울이 그때 받은 확신을 다시 확인해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24). 바울은 하나님의 보호 약속을 들었습니다. 배안에 있는 모든 이들은 안전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바울을 통해서 하신 하나님의 일 때문입니다. 그는 가이사 앞에 서서 증언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뜻이라는 것입니다(24). 바울과 한 배를 탄 다른 사람들의 목숨까지도 모두 지켜주실 것을 확인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는 말에는 바울이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는 의미이며, 누가는 그 응답의 확실성을 현재완료 시제(케카리스타이)를 사용함으로써 분명하게 나타냅니다.

 

바울은 배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5)라고 하나님께서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러한 고백은 위태로운 고백입니다. 그렇게 되지 안했을 때, 오히려 하나님의 명예가 크게 손상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확신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에게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신다는 믿음을 동료들과 함께 나눕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타고 가던 배가한 섬에 걸리게 되는데, 그 섬은 나중에 멜리데로 밝혀집니다.


우리의 일상은 평안한 바다나 험한 풍랑 속을 향해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풍랑으로 인해 심한 절망에 빠져 있습니까? 큰 풍랑이 두려워 소망을 잃어버렸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게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그분의 뜻 가운데 우리 인생을 인도하십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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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7-01)


가이사야에서 로마로 출발하는 바울

사도행전 27장 1-12절


 

‘역설(逆說)’은 수면 위에서는 모순이지만 수면 아래서는 손을 맞잡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삶에 고난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 없음이 하나님의 인도의 표지도 아닙니다. 고난 가득한 삶이 있을지라도 그 배후에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그리고 그 너머의 목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 이제 바울은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의 손에 넘겨져 로마로 향하는 배에 오르게 됩니다. 가이사랴를 출항한 배는 이튿날 시돈에 도착합니다. 바울은 백부장의 특별한 호의를 받아 그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방문하고 식탁교제를 나눕니다. 사돈을 떠난 배는 맞바람을 맞는 어려운 기후 조건에서 항해하다가 무라에 도착하였고 여러 날 만에 미항에 도착하였습니다. 바울은 좋지 않은 기후에도 항해를 강행하려는 선장과 선주에게 출항하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

 

가이사랴에서 출항(1-5)

 

자신의 진로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상황이나 삶에 의해 좌우될 때,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우리는 자신의 인생의 배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항구에 이르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모든 과정 하나하나마다 통제하려고 하거나 자신이 바라는 여건을 조성하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만 일하시고 설명하실 수 있는 더 많은 여백과 신비를 남겨둘 때, 결과로 인하여 교만하지 않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찬송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상황이나 사람에 의해 좌우될 때라도 이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손을 의지해야 합니다.

 

1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2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항해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3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기를 허락하더니 4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맞바람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항해하여 5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시에 이르러(1-5)

 

바울은 유대인의 고소로 인해 재판을 받으면서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가서 재판을 받겠다고 상소했습니다(25:11-12). 이제 드디어 바울이 로마로 향해 출발합니다. 그 길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1:8)에 따라서 복음의 사역이 땅끝을 향해 진행되어져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예수님께서 주신대로 ‘로마에서 증거하리라’(23:11)는 사명을 따라 로마에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로마 행은 많은 사람들이 환영 받은 성공한 사역자의 모습이 아니라 사슬로 묶인 죄수의 신분으로 가고 있습니다.

 

여러 장에 걸친 바울에 대한 고발과 재판 그리고 바울의 변호에 관한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이제 27장부터는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어가는 긴 여정이 상당히 자세하게 소개됩니다.

1절부터 다시 ‘우리’ 단락이 시작됩니다(참조. 행 16:10-17; 20:5-8, 13-15; 21:1-18). ‘우리’ 단락은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여기서 묘사되는 사건에 동참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사도행전에서 마지막으로 ‘우리’ 단락이 끝난 구절은 21:18(예루살렘교회 방문)이었는데, 그렇다면 그때부터 지금까지 누가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누가가 이 기간 동안 팔레스타인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어쩌면 이 기간 동안 누가는 유대 팔레스타인에서 자신이 기록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초반부 이야기를 기록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와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같은 추측은 입증할 방법이 없지만, 상당히 개연성이 있는 추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를 통치하고 있던 로마 관리들은 바울과 죄수 몇 명을 백부장 율리오에게 로마까지 호송할 수 있도록 맡겼습니다. 이것을 누가는 “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라고 기록합니다(1). 그러나 누가의 이 표현은 바울만 죄수의 몸으로 가게 된 것이고, 누가를 포함한 바울의 일행인 ‘우리’는 단지 같은 배를 타고 가게 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여기에 기록된 바울의 로마행 항해 이야기는 당시 일반인들이 지중해를 어떻게 항해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매우 흥미로운 역사적 자료에 해당합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배들은 지중해의 해변을 따라 항해했으며, 가능한 한 겨울철에 항해하는 것을 피했습니다. 바울과 그 일행이 타고 간 이 배는 원래 소아시아 서쪽 해변에 위치한 항구 도시 아드라뭇데노(드로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출발해 여러 항구 도시를 거쳐 항해하고 다시 그곳으로 되돌아가는 배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가이사랴에서 로마로 직접 가는 배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에 일반적인 방법을 취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백부장 율리오는 향해하는 도중 어느 중간 지점에서 이탈리아 행 배를 만나 환승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는 이 여정에 마게도냐 지방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동행했다고 밝힙니다(2). 아리스다고는 사도행전 19장에서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동 때 등장했고, 20장에서 바울과 함께 이방인 교회의 대표자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일행 중 한 사람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데살로니가에서 얻은 재종자로 신약성경의 다른 본문, 즉 빌레몬서 1:24과 골로새서 4:10에서 바울의 동역자이자 함께 옥에 갇힌 자로서 끝까지 함께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만약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빌레몬서와 골로새서가 기록된 것이 사실이라면, 아리스다고가 이때 바울과 함께 로마로 갔을 가능성이 분명해 보입니다.

 

바울 일행이 탄 배는 가이샤라에서 출발한 다음 날 북쪽 해안으로 약 110km 정도 떨어진 시돈 항에 도착했습니다(3). 이곳은 조류가 북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어려움 없이 하루 만에 도착한 것입니다. 이곳에서 가이샤라에서 보낸 화물을 내리고, 다시 소아시아 지역으로 갈 화물들을 선적하기 위해 잠시 정박했습니다.

그 사이에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에게 특별한 호의를 베풀어줍니다. 어떤 특별한 대접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동료 그리스도인들(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식사를 대접받거나, 앞으로 여행하는 동안 필요한 물건들을 공급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바울이 자유의 몸이 된 것이 아니고 아마도 바울을 지키는 군인이 그와 동행했을 것입니다.

 

배는 다시 출발하여 다음 기착지 루기아의 무라 성 항구로 향했습니다(4). 시돈에서 무라까지의 일반적인 항로는 구브로 섬 서쪽 해안을 따라 힘겹게 목적지를 향해 갔습니다. 바울도 3차 선교여행 도중 바다라에서 두로로 여행할 때 이 항로를 이용했을 것입니다(행 21:1-3). 그러나 이 항로는 서풍 혹은 북서풍이었기 맞바람으로 아주 어려운 항해를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람이 없는 구브로 섬의 동쪽 해안을 끼고 항해하는 것이 훨씬 수월했을 것입니다.

배는 구브로 섬을 돌아서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항해해 무사히 루기아의 항구 도시인 무라에 도착했습니다. 대체적으로 이 항해는 15일 걸린 것으로 파악됩니다.

 

무라에서 로마행 배에 승선(6-8)

편한 것, 안전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성도에게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상황과 상관없이 주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평안과 안전은 상황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대의명분이 분명한 의로운 사역에도 역풍은 있습니다. 순풍이 늘 하나님의 인도의 표지는 아닙니다. 로마로 가는 길은 순풍은 아니지만 아무도 그 길을 가로막지는 못했습니다.

 

6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7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항해하여 8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시에서 가깝더라(6-8)

 

바울이 탄 배가 무라에 도착함으로써 첫 번째 항해가 마무리 됩니다(5). 당시 로마의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곡식을 이집트와 이탈리아를 오가며 실어 나르는 배가 많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로마에게는 이집트가 곡식 창고와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맞바람을 맞으면서도 항해할 수 있는 항해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북쪽으로 먼저 항해를 해서 무라에 도착하고, 거기서 소아시아의 해변을 따라 항해하는 항로를 이용하곤 했습니다.

바울을 태운 배가 무라에 도착했을 때 알렉산드리아 배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알렉산드리아 배는 분명히 로마로 곡식을 수송하는 배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 사실은 나중에 배를 가볍게 하려고 싣고 가던 밀을 바다에 내던져야 했던 일에서 확증됩니다(38).

 

바울 일행이 환승해 로마가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는 올라탔습니다(7). 그 배는 강한 북서풍 맞바람으로 인해 항해에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들은 수일 만에 이집트로부터 오가는 배가 많이 들어오는 니도라는 항구에 도착합니다. 이곳에서 니도까지는 동쪽에서 부른 바람은 배를 밀어주는 순풍이기 때문에 그 바람을 만나면 하루에 항해할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짧은 거리를 상당한 날 동안 항해한 것은 역풍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보여 줍니다.

여기 무라에서 그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권이 주어집니다. 순풍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거나 아니면 역풍을 맞으며 항해를 강행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항해를 강행했습니다. 배는 심한 바름 때문에 정상적인 경로로 항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배는 북서풍을 피해 그레데 섬의 남쪽 해안을 따라 거슬러 가는 방법을 취했던 것입니다. 그레데 섬의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는 것도 힘겨운 일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라새아 성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미항이라 불리는 항구에 도착합니다(8).

선장은 이곳에서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이 항구는 작아서 큰 배가 겨우내 머물러 있을 여건이 갖추지 못했습니다(12).

이 짧은 단락에서 바울이 탄 배의 항해가 순탄치 않음을 계속 지적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두 배의 경우 바람과 풍랑으로 인해 항해하는 것이 어려웠다는 사실은 바울을 비롯한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점차 풍랑이 심하게 일어나 항해가 어려운 상황에 항해를 계속하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었습니다. 바울은 더 이상 항해를 계속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권고한 이유도 이러한 사실에 있었습니다.

 

바울의 조언이 거부됨(9-12)

생명의 길은 다수가 선택하는 길이 아닙니다. 오직 소수만이 그 좁고 불편한 길을 걸어갑니다. 다수가 그 길을 걷는다고 그 길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찾는 이가 적어도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밝혀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정도를 걸어야 합니다. 이제 이 배의 운명은 선장이 아니라 바울의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9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10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11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2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9-12)

 

1-8절에서 저자는 바울 일행이 승선한 배가 항해하는 데 계속해서 이려움이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바울은 험난한 항해를 예고하는 풍랑을 수동적으로 지켜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단락부터 바울은 항해를 적극적으로 반대합니다(9). 이 단락의 초점은 바울이 항해를 만류하면서 경고했던 대로(9-10) 점차 실현되는 것(14-20)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바울의 경고는 항해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이해하는 열쇠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관점을 갖고 구체적인 내용을 검도해 보아야 합니다.

 

그 동안 계속해서 날씨가 좋지 못해서 항해가 많이 지연되었고, 그들은 미항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항해할 수 있는 기한이 지나버렸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누가는 금식하는 절기로 표현합니다(9). 이 표현은 유대인들의 대속죄일을 가리킵니다. 유대교 달력은 음력 기준이므로 달의 위치에 따라 매년 날짜가 바뀝니다. 주로 9월에서 10월에 해당하는데, 브루스(Bruce)는 주후 59년에는 대속죄일이 평년보다 조금 늦어져 10월 5일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견해는 로마 군인 작가인 베게티우스의 진술과도 일치합니다. 그는 9월 15일 이후부터는 항해가 위험하다고 기록하고 있고 11월 11일부터 이듬해 3월 10일까지는 항해가 완전히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이 기간 중에 항해가 위험한 이유는 극심한 겨울 폭풍 때문만이 아니라, 짙은 구름과 안개로 인해 안전한 가시거리의 확보가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가는 이 시점에서 바울이 개입하는 모습을 기록합니다. 바울은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10)고 말합니다. 그는 여기서 단순히 시기적으로나 기후적으로 항해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상식선에서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일종의 선견지명을 가지고 예언자적인 발언을 하는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이 혹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계시를 받고 이 발언을 했는지 누가는 어쨌든 그 사실을 여기서 확실히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단순히 어떤 막연한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재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또한 이어지는 바울의 21-26절의 발언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11절은 백부장이 항해에 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보다는 선주와 선장이 그의 의견을 물었을 때, 백부장이 바울의 말보다 항해 전문가인 선주와 선장의 의견을 따랐음을 뜻합니다. 좋지 않은 항해 조건에도 왜 항해를 감행하게 되었는지를 잘 설명해주는 구절입니다.

 

바울은 세 가지 손해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백부장은 반대로 세 가지 요소에 근거해 항해를 강행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곧 해를 지휘하는 선장의 주장, 배의 소유자 선주의 주장, 그리고 겨울을 보내기에 미항이 불편하다는 점이었습니다(11-12).

사람들은 대부분 뵈닉스 항구로 가서 겨울을 지내자는 의견에 찬성했습니다. 뵈닉스 항구는 크레타 섬의 항구로, 겨울에 부는 북동풍으로부터 배를 보호하는 데 효과적인 지형 조건을 가진 곳이었습니다. 배는 미항에서 멀지 않은 뵈닉스 항구까지만 갈 것이므로 항해 전문가들의 입장에서 볼 때 크게 무리가 될 것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객선은 아니었지만 바울이 탄 배는 로마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향해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믿는 자만 보일 수 있는 통찰, 하나님의 돌보심의 증거들을 갖고 있는 다들입니다. 그 증거들로 고난의 항해를 마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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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6-03)


미쳤다고 호통친 아그립바 왕을 대한 바울

사도행전 26장 24-32절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이해되는 것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성을 절대화하고 거기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 참된 자유인은 이성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참된 자유인은 성경에 근거한 믿음으로 사고하고 행동합니다.

 

  • 바울의 간증을 듣고 있던 총독 베스도이 자신더러 ‘미쳤다’하는 말을 듭니다. 그리고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한다고 밝힙니다. 아그립바 왕이 바울이 적은 말로 자신을 그리스도 인되게 권한다고 하자, 바울은 결박된 것 외에는 모두가 자신처럼 되길 바란다 말합니다. 왕은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않았다면 석방될 뻔했다고 말합니다.

 

베스도의 반응(24-25)

 

우리는 하나님께서 누구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 할지라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굳은 마음을 녹이셔서 복음에 마음을 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들 모두가 호의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전도자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24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5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24-25)

 

바울이 자신의 회심과 소명에 대해 변론하자 총독 베스도는 갑자기 크게 외치며 변론을 중단시켰습니다. 그리고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글들이 너를 뒤집어서 광기로 이끈다”(24)라고 외쳤습니다. 베스도의 외침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긍정적인 면은 베스도가 바울의 학문을 대단한 것으로 평가한다는 점입니다. 그가 말하는 학문은 아마도 구약성경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긍정적인 면보다 훨씬 강하게 드러나는 부정적인 면은 바울이 미쳤다고 평가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구 차례에 걸쳐 바울에게 ‘미쳤다’는 표현을 썼습니다(24).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로마인과 헬라인은 합리적인 사고에 근거해 분명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렸을 것입니다.

 

따라서 베스도의 외침은 경이와 이해의 결핍이 결합된 결과입니다. 총독 베스도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할 때 끼어들었습니다. 이는 바울이 아덴의 아레오바고에서 연설할 때, 철학자들이 보인 반응과 유사합니다(참조, 17:32), 그리스 철학자와 로마 총독은 많은 글들과 지식이 죽은 자의 부활과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서 나타나 말했다는 것은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비합리적인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그의 말을 점찮게 받아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어구에는 두 가지 표현법이 동원되었습니다. 하나는 중언법(헨디아뒤이온)입니다. 진리와 맑은 정신은 동의어가 아닌데, 여기서는 모두 ‘광기’의 반대말로 쓰였습니다. 바울은 단어들의 개념을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맑은 정신으로 말하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다른 하나는 히브리적 소유격입니다. 소유격 명사들이 뒤의 명사 ‘말들’을 형용사처럼 꾸며 줍니다. 따라서 ‘맑은 정신으로 말하는 사실의 말들’은 사물의 본질에 대한 오해, 오류, 과장 없이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진술하는 말을 가리킵니다.

그는 자신이 ‘참되고 온전한 말’, 즉 진리를 말하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바울은 비스도가 자신의 연설 내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변론이 한치의 오차도 없는 진리의 말씀임을 강조하고 신중한 생각으로 받아줄 것을 촉구했습니다.

 

아그립바의 반응(26-29)

첨가된 정보 하나로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마저 ‘사람은 안 변한다’는 말을 예사로 합니다. 목회자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때는 절망감마저 듭니다. 정말 그런 것입니까? 복음 앞에서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단호하게 축구해야 합니다.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선언해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논리로만 전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에게 복음은 그의 삶을 변화시킨 진리였습니다.

 

26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27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28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9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26-29)

 

바울은 다시 심문을 관장하고 있는 아그립바 왕에게 자신의 말이 사실에 입각한 진실이라는 증거를 제시합니다(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바울 시대의] 현대사입니다. “어떤 것도 [세상의] 한쪽 귀퉁이[끝 지점]에서 일어난 것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뿐 아니라 탄생부터 지상 생애까지 모든 사실이 유대인들이나 로마 정부에 잘 알려진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에 사는 타키투스가 이를 알았다면, 아그립바도 알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아그립바(AD 27/28~100년)는 로마에서 클라우디우스와 친구로 지내며 교육을 받았으며, 젊은 시절 대제사장 의복 문제를 중재하기도 했습니다(Josephus, Ant, XX 10). 그는 성전 통치권, 헌금관리권, 대제사장 임명권 등을 가지고 있었고, 유대 전쟁이 발발하기 전유대인들에게 긴 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Josephus, Bell.II 344~407), 그는 로마와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정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아그립바가 이 일들 중 어떤 것도 모르는 것이 없다고 거침없이 말할 수 있었습니다(26).

 

다른 하나는 과거의 소리입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들을 믿으시나이까?”(27). 이 질문에 아그립바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믿는다’고 대답하면 바울의 변증에 동의하는 셈이 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신은 모세와 선지자들이 말한 것 외에는 전한 것이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선지자들을 믿는다고 하다면, 모세와 선지자들이 전한 메시지의 요체, 곧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참조, 눅 24:46~47)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그립바가 만일 ‘믿지 않는다’고 대답하면 위증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가 ‘이 일에 관하여 잘 알기’ 때문입니다(26; 참조, 3; 25:22,26). 그러므로 “선지자들을 믿으시나이까?”라는 질문은 아그립바에게 굉장한 압력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러자 아그립바와 바울 사이에 신경전이 이어집니다. 아그립바 왕은 “네가 작은 것으로 나를 설득하여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려고 하느냐?”라고 대답했습니다. 바울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나는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말을 듣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작은 것으로’가 말에 대한 것인지, 시간에 대한 것인지 논란이 있습니다. 전자가 더 타당해 보입니다. 만일 시간을 뜻한다면 바울의 대답 가운데 ‘큰 것으로’를 ‘많은 시간을 들여’라고 이해해야 하는데, 그렇게 읽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ποιησαι’포이에사이(만들려 하다)도 이를 지지합니다. 이 부정과거 부정사는 ‘몇 마디 말’로 인한 설득과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을 일련의 사건으로 표현합니다.

 

아그립바 왕은 “네가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려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되게 하는 것, 법정에서 바울을 지지하고 보호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있고, 아그립바가 진지함과 비꼼의 중간 정도의 뜻을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바울의 대답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바울은 천부장들, 가이사랴의 고위 관료들, 버니게뿐 아니라 총독과 왕까지 모두 복음아래 있기를 바란 것입니다.

 

배심원의 판단(30-32)

우리는 세상에 미치든지, 세상에 미치든지 선택해야 합니다. 바울처럼 오직 복음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복음의 역사는 삶의 변화시킵니다. 이런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복음의 반대자들 앞에서 낙심하지 않고 계속해서 복음의 증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은 환영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목적지는 로마였습니다, 그곳에 구원받지 못한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30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31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32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30-32)

 

본문은 바울의 변론이 공식적으로 끝난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과 버니게가 고위 관료들과 함께 사석에서 이야기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아그립바 왕은 재판에 대해 아무런 말 없이 일어납니다. 왕이 일어나자 모든 배심원들이 함께 일어났습니다(30). 재판이 끝난 것입니다. 공개적 선고는 없었으나 배심원들의 의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강당을 떠난 다음 자기들끼리 바울에 관한 사적인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31). 그리고 그들은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32).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아그립바가 ‘바울을 석방할 수 있을 뻔했다’라고 말하지 않고, “이 사람이 석방될 수 있을 뻔했다”라고 말한 점입니다. 만일 바울이 황제 법정에 상소하지 않았다면, 베스도는 바울에게 무죄를 선언하고 풀어 줄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바울의 무혐의에 대한 4중주가 완성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는 바울을 로마로 보내 그곳에서 주님을 증거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섭리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바울을 심문하는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오직 한 사람, 바울만 결박당한 채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만 홀로 돋보입니다. 그 이유는 그에게 참 자유를 주는 복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은 어떤 처지나 형편에서도 참된 자유를 누리며 당당하게 외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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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6-02)


아그립바 왕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바울

사도행전 26장 13-23절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만난 간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전할 메시지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앞에 당신이 만나 예수님을, 당신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라고 사랑과 격려와 간증을 나누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나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지금까지 신실하게 지켜왔다고 말합니다. 그가 전한 복음은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에 합당한 삶의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말을 다 들은 베스도는 바울이 미쳤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참말을 한다고 말하며 아그립바 왕에게 호소합니다. 모인 자들이 바울의 무죄를 인정하지만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했으므로 그는 로마로 보내지게 됩니다.

 

다메섹에서 만난 주님(13-18)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십니다.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만나는 사람들마다 어두움에 권세에서 빛의 자녀로 삶이 변합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변화의 삶을 가지고 있습니다. 빛의 자녀다운 모습으로 변화되길 원해 그리스도 앞으로 나가시길 바랍니다.

 

13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14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15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13-15)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통해서 그는 다시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간증을 합니다. 누구보다 더 기독교의 반대자였고, 핍박자였던 자신이 어떻게 가장 적극적인 복음의 옹호자가 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된 사실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변론 진행은 간략한 확증(confirmatio)과 반박(refutatio)에 이어 결론(perortio)을 제시합니다. 그가 전한 메시지의 핵심 내용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또 다시 간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반복적인 변론에 신경질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기쁘게 변론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가 기쁘게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에게 주신 사명에 대한 충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나니아를 통해 주셨던 바울의 사명은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9:15)이였습니다. 지금은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임금들 앞에 복음을 전할 기회라는 것을 깨닫고 전한 것입니다. 이런 기회가 없으면, 총독이나 왕들에게 복음 전할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다메섹 사건을 언급한 내용은 이미 9장과 22장에서 언급되었습니다. 9장은 3인칭 시점에서 기록된 내용이고, 22장은 바울이 직접 증언한 내용입니다. 이제 26장 역시 바울이 증언한 내용인데, 앞의 두 기록과 몇 가지 차이를 드러냅니다. 먼저 바울이 경험한 빛을 여기서 가장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13). 9장에서는 ‘빛’(2), 22장에서는 ‘큰 빛’(6)인데, 여기서는 ‘해보다 더 밝은 빛’(13)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초자연적인 현상임을 말해줍니다. 여기서 바울이 빛의 밝기를 강조한 것은, 자신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 빛을 전하는 사명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습니다(18).

 

다시 그 사건으로 들어가면,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서 정오의 햇볕보다 더 밝은 빛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난 간증을 합니다. 그 빛 앞에서 바울과 함께 있던 모든 사람들이 땅에 엎드러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에게 분명하게 그 빛 속에서 히브리 음성으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음성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뒤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14)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주님’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그 소리’가 말했다고 밝힙니다. 이는 그 빛이 ‘가까이 가지 못할 빛’이었음을 증명합니다(딤전 6:16). 그 음성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었습니다.

 

그 음성에서 “가시채를 뒤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시채를 뒤발질한다’는 것은 수레를 끌거나 짐을 지고 가는 짐승이 반항하는 모습입니다. 주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짐승이 가려고 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바울이 주인의 뜻에 따르는 것을 싫어하고 반항하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바울은 그때까지 하나님을 섬긴다고 확신하며 살아왔습니다. 그 앞에 나타난 이 빛과 음성은 무엇입니까? 바울의 행보를 막아선 존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 존재는 바울에게 다른 길로 가도록 촉구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쉽게 발걸음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이제껏 걸어온 인생길에 마음과 목숨과 힘을 모두 쏟아 부었는데, 어떻게 몸만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돌이키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버티고 뒷발질하면 짐승의 주인은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매질을 합니다. ‘가시’나 ‘쇠로 된 침’으로 고통스럽게 해서 바른 길을 가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뒷발질을 하면 할수록 그렇게 행동한 짐승은 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찾아오신 음성에 대해 “주여 뉘시니이까?”(15)라고 묻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15)라고 응답하십니다. 바울은 매우 놀랐습니다. 분명히 예수는 갈보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무덤에 장사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죽었던 예수를 살아나셨다고 주장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그런 엉뚱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잡아서 옥에 넣었던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진짜 살아나셨고, 그 분이 자신의 행동을 보고 계셨습니다. 이때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전한 예수님에 대한 소식이 사실이란 것에 자신의 모든 존재가 파산을 맞고 온몸에 힘이 빠지고 죽은 시체처럼 땅에 엎드려져 죽음을 경험합니다(14). 이 순간에 부활하시고 살아계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통해 기독교를 자신의 종교로 새롭게 받아 들렸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회심자는 바울입니다. 핍박자였고 박해자였던 바울이 가장 적극적인 복음 전도자로 변화된 것은, 그는 부인할 수 없는 부인할 수 없는 체험과 간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다메섹에서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보여주신 진리를 통해 변화된 것입니다.

 

사명을 주신 하나님(16-18)

빅토로 위고는 ‘하나님이 모든 인간의 이마에 써 놓으신 말은 ‘희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잘못된 방법으로 가는 자녀를 본 부모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길로 가는 자녀를 보면서 가슴을 치는 부모의 심정으로 바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바울의 영적은 무지에 대해 동정과 긍휼의 마음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잘못된 길로 가느라 더 이상 힘겹게 살지 말고 구원의 길로 오라고 부르셨습니다.

 

16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7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16-18)

 

바울은 이어서 자신이 이 사명에 따라 충실하게 살아 왔음을 증거 합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온몸에 힘이 빠지고 죽은 시체처럼 땅에 엎드려졌습니다(14). 쓸러져 있는 바울에게 주님께서는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고 명령하셨습니다(15). 그리고 그에게 할 일을 무엇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이 표현은 에스겔에게 하신 말씀과 유사합니다.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서 여호와의 보좌 환상을 보았을 때, 에스겔을 찾아오신 여호와께서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겔 2:1)고 하시고, 그를 패역한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과 같이 ‘종과 증인’을 임명하십니다. 바울은 예레미야처럼 ‘그들에게서 구원을 받을 것이고’(렘 1:8,19), 여호와의 종의 일, 곧 ‘눈을 뜨게 하며 광명한 대로 이끄는 일’(사 42:7,16)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독특한 표현이 추가되었습니다. ‘죄 사함’과 ‘기업’을 얻게 하는 일을 증거 하는 임무입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열두 사도에게 주신 임무였습니다(눅 24:44-48).

그러므로 바울을 찾아오신 주님께서 바로 그 자리에서 그에게 사도 임명 선언이요, 그 이후의 말씀은 바울의 사도적 임무를 부여하십니다. 이후에 바울은 주님께서 자신에게 ‘나타나심’과 자신의 사도직 임무를 연결하십니다. 그의 사명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가서 들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하며,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고, 주님을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지상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거룩하고 중요한 사명이었습니다. 주님을 핍박하던 바울에게 영광스러운 사명을 부여해 주신 것입니다. 그릇에 담긴 물건에 따라 그릇의 용도와 가치가 결정되듯 질그릇 같은 바울에게 고귀한 복음이 담겨져 귀한 일에 쓰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애틋하고 강렬한 주님의 사랑을 맛보았기에 핍박이 아무리 거세도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 사명은 주님의 ‘사환과 증인’이 되어 사람들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게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큰 사랑을 깊이 체험한 사람은 주님이 주신 사명의 길에서 결코 떠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19-23)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긴급하게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전에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일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감당하는 일꾼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지금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간절히 드려야 합니다.

 

19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20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21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22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23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19-23)

 

바울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사용해 논제를 확증하는 단계로 넘어갑니다. 앞에서 말한 이유 때문에 그는 하늘 비전에 순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하늘에서 보이신 것’이라고 표현하면서, 자신의 삶이 다메섹 도상에서 자신에게 임한 하늘의 거룩한 뜻을 따르는 삶이었다고 지적합니다(19). 사실상 이 말에는 예수님께서 신적인 존재하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과 지금까지 삶의 일치성을 강조합니다. 그가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고 선포했음을 고백합니다(20). 그들에게 선포한 메시지의 핵심은 ‘회개하라는 것’과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18절의 ‘나를 믿어’, 곧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구체화됩니다.

 

사도행전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반드시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을 포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떠난 채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표현된 회개가 참된 것임을 보여 주는 열매를 말합니다. 이 표현은 이미 세례 요한의 메시지에도 등장한 바 있습니다(마 3:8; 눅 3:8).

 

바울은 자신이 받은 소명을 자신의 고소 상황과 연결합니다. 이러한 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자신을 성전에서 잡아 죽이려고 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21). 표준새번역에서는 원문의 의미를 잘 살려 ‘이런 일들 때문에’라는 문구로 21절을 시작합니다. 바울이 성전에서 체포된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자행된 유대인들의 폭력에 대한 비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이제 결론으로 다다르고 있습니다. 22-23절에서 ‘그러므로 도움을 받아’라는 표현으로 시작해서 자신의 변론에 대해 결론을 맺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회개를 선포할 때 주장한 내용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바울이 선포하는 복음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예언한 내용과 완전히 일치합니다(22). 다시 말해 그가 선포하는 복음은 선지자들과 모세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의 사역 속에 성경의 모든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눅 4:21; 7:21-22;10:23-24; 16:16; 24:25-27, 44-48). 그의 사도들 역시 동일한 사실을 증거 했습니다(행 2:22-28,38-39; 3:17-25; 8:34-35). 바울 역시 이 사실을 분명히 선포해 왔습니다(행 13:26-41; 17:3). 둘째, 성경에서 반드시 되리라고 예언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입니다(23). 셋째, 구약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23).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신실한 증인들을 통해 이와 같은 사역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사도들과 바울은 예수님의 신실한 증인으로서 구원의 복음을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해 왔습니다.

 

결국 바울은 구약성경의 핵심이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이며, 구약의 예언은 예수님의 구원 사건으로 성취되었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이러한 성취에 근거한 구원의 소식이 바로 복음입니다. 바울의 사역은 성경의 모든 예언과 약속이 결정적으로 성취되었음을 알리는 사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메시지는 유대교의 신앙에서 이탈하거나 빗나가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바울의 이러한 연설을 들은 사람은 누구든지 그가 유대인을 대적해 살아 왔다고 단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유대교의 핵심적인 신앙에 충실한 사람이라고 인정할 것입니다.


‘영적 열심’은 진리를 아는 데서 시작합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과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은 생명력이 있기에 진정한 복음을 소유한 사람은 생에 대한 정열을 갖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 선교를 위해 쓰임을 받았듯이 당신도 가정과 직장, 그리고 학교에서 복음을 위해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힘과 지혜로 담대히 복음을 전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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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53-01)


하나님 없이 사는 어리석은 사람

시편 53편 1-6절


 

당신은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며 그분의 권위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분의 말씀과 임재 안에서 떤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에 불순종하거나 적당히 타협하는 것이 내게 더 유익할 때도 하나님께서 기꺼이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선을 행하지 않고 가증한 악을 행합니다. 그들이 어리석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와 선을 행하는 자를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어서 죄악을 행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삼키는 자들은 하나님이 흩어버리시지만, 이스라엘은 구원하셔서 그 포로된 자들이 돌아와 즐거워하며 기뻐하게 하실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의 생각과 행동(1)

세상에서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계신 줄 알면서도 그를 의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부르지도 않는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하면서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합니다. 더러운 자요 선을 행하지 않는 자입니다. 그가 믿는 것은 자기 힘이요, 재물뿐입니다. 말이 아니라 삶으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실재적 무신론자입니다.

 

1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1)

 

시인은 어이없고 기가 막힌 심정으로 시의 첫 구절을 시작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찾지 않으며 그의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단정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은 철학적인 면에서 무신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존재한다 해도 인간 사건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으며 사람들의 행동에 전혀 책임을 묻지 않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시편 10:4에서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든 없든 무슨 상관인가? 하나님이 있다고 뭐가 달라지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실제 삶의 태도에서 하나님께서 없는 듯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론적 무신론자가 아니라 실제적 무신론자입니다. 어쩌면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싶어서 하나님께서 안 계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기정사실화 해 버리고 하나님에 대해 눈을 감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눈을 감은 다음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합니다. 즉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없다는 태도로 살아가는 자들은 부패하고 가증한 악을 행하며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부패하다’는 비뚤어지고 망가진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과 행동이 비뚤어지고 망가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없다는 잘못된 전제로 인해 이들의 모든 생각과 판단과 행동이 왜곡된 것입니다. 생각과 행동이 비뚤어진 이들은 선을 행하지 않고 가증한 악을 행할 뿐입니다. 가증한 악이란 혐오스럽고 몹시 불쾌한 악이나 불의함을 말합니다. 이런 면에서 어리석은 자라는 평가는 지적인 능력의 면이 아니라 도덕적인 면에서의 평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없다는 생각에서 악을 행하는 행동이 나옵니다. 신앙과 윤리적인 삶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찾으심과 찾지 못하심(2-3)

지혜로운 사람이란 하나님을 찾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 선을 행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여전히 선을 행하는 지혜로운 자들을 찾으십니다. 혹시 당신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진 않습니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없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습니까?

 

2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2-3)

 

하나님께서는 몸소 몸을 굽혀 세상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을 찾으십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하나님을 찾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 선을 행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1) 하나님을 찾는 자를 찾으심(2)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속으로 하나님께서 없다고 단정하고 하나님에 대해 눈을 감아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사람들을 굽어살피시면서 누군가를 찾고 계십니다(2). 지각이 있어서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지 살펴보고 계십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역, 땅은 인간의 영역으로 구분합니다.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인간의 구별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지각이 있는 자는 슬기로운 자로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지혜로운 자를 말합니다.

 

(2) 선을 행하는 자가 없음(3)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지혜로운 자를 찾아보신 후 내린 결론은 모든 자가 바른 길에서 떠나 잘못된 길로 가고 있습니다. 즉 죄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더러운 자가 되고 도덕적으로 부패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며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세상은 선을 행하는 자는 없고 어리석은 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1절과 3절에 ‘없다’라는 단어가 두 번씩 모두 네 번 나옵니다. 네 번 중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를 표현하는 것으로 1절에서 한 번, 3절에서 두 번 사용하여 모두 세 번 사용함으로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모든 사람이 다 죄 아래에 있다’는 것을 논증할 때 인용했습니다(롬 3:10-12).

 

행악자의 무지와 멸망(4-5)

성도라면 끝까지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악인들은 세상을 다스리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힘없는 자들을 압제하며 호의호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셔서 그들로 수치를 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악한 이들의 횡포로 처한 현실이 암담할 때, 자기 백성들의 피난처가 되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4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5그들이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항하여 진 친 그들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으므로 네가 그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하였도다(4-5)

 

지각이 있어서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지 살피고 찾아보신 결과,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도 하나님께서 없다고 결론 내렸고, 하나님께서도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결론 내리셨습니다. 각각의 결론이 옳았는지, 어떤 결과를 이루는지를 이 단락에서 말해줍니다.

 

(1) 행악자의 무지(4)

 

4절에서는 어리석은 자를 “죄악을 행하는 자”로 부릅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알지 못하는가?’ 이 질문은 ‘어떻게 그렇게 무지한가?’, ‘그렇게도 이해하지 못하는가?’와 같은 어조입니다. 시인이 1절에서 어이없고 기가 막힌 심정으로 말했다면, 여기서는 답답함으로 탄식하는 듯 묻습니다. 무엇을 알지 못한다는 것인지, 그리고 왜 어떤 상황에서 이런 질문을 하는지를 다음 문장에서 말해줍니다. 이들이 행하는 죄악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없다고 여기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밥을 먹는 것처럼 아주 쉽게 억압하고 착취하고 짓밟고 있는 것입니다. 4절을 다르게 표현하면, ‘행악하는 자들이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지 못해서 내 백성을 떡 먹듯이 집어 삼키는 것이 아니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4절은 1절을 반복하는 질문입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정말 어리석은 자가 아니냐?’

 

(2) 행악자의 두려움과 멸망(5)

 

5절은 죄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을 다룹니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이방 군대가 이스라엘에 쳐들어와서 진을 쳤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시므로 그들이 패배하여 물러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행악자들이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했다’고 하는데, 히브리 원문에서는 5절 맨 앞에 ‘그곳’(거기)이라는 단어가 나와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곳은 행악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떡 먹듯이 먹던 장소로, 주저함이나 두려움 없이 마음대로 악을 행하던 곳이며,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고통과 죽음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무서운 공포가 임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와 싸울 때 하나님께서 적들에게 임하게 하셨던 두려움이 이들에게 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방 군대가 이스라엘을 대항하여 진을 쳤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공포에 떨게 하시고 물리치시므로 적들이 패하여 그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흩어졌습니다. 이스라엘에 쳐들어와 이스라엘에게 수치를 주려고 했던 대적들이 이스라엘에게 큰 수치를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없다는 어리석은 자들은 그들의 악행에 대한 심판을 받아 두려움과 실패와 수치를 당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보호를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소망과 기쁨(6)

순종하는 자는 약한 자가 아니라 진정 강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계시된 진리에 순종해야만 합니다. 편안하고 안전하고 친숙한 곳을 떠나 하나님의 영이 인도하는 대로 무조건 따라가는 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용기는 순종에서 나옵니다.

 

6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6)

 

‘누가 시온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어줄 것인가?’를 묻는 이 질문은 시온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나오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시온은 생명과 축복의 원천이신 하나님께서 계신 곳입니다. 시온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나오기를 소망하는 것은 시온에 계신 여호와로부터 구원이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을 구원하실 때에 그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을 확신하며 시인이 이를 기원합니다.


어리석은 자,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부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전혀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진정한 자신도 볼 수 없고 다른 사람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눈에 다른 사람들은 착취의 대상으로 보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며 자신을 채우는 삶은 다른 사람뿐 아니라 자신의 삶도 파멸로 몰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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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6-01)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론한 바울

사도행전 26장 1-12절


 

성경 주석가인 보너 박사(Dr. Boner)가 꿈에 천사가 나타나 ‘당신의 열심을 저울에 달아보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열심을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천사가 그에게 ‘당신의 열심을 달아보니 100근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무척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곧이어 열심의 내용을 분석해 주었습니다. ‘당신의 열심은 100근인데 그 중에 50근은 이기적인 열심이고, 25근은 당파를 짓는데 사용한 열심이고, 22근은 자기의 명예를 위해 노력한 열심이었고, 3근만이 진정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열심에도 나쁜 열심이 있습니다.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열심은 좋은 열매를 맺지만, 잘못된 방향인데도 열정적인 것은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킵니다.

 

 

  • 사도행전 26장은 21-25장 전체를 요약합니다. 이제 바울은 많은 고관들 앞에서 담대하게 특히 아그립바 왕에게 자신을 변호합니다. 자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어릴 적부터 엄격한 유대 교육을 받은 성장한 유대인임을 강조합니다. 그 때문에 과거에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한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고, 그 열심 때문에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려고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소개합니다.

 

아그립바 왕 앞에 선 바울(1-3)

 

신앙 생활하다가 새로운 진리를 깨달으면, 지나온 시간을 허비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불필요한 시간은 단 일 초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 수 있는 기회며 성장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모든 시간들이 유익으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1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2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3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1-3)

 

사도행전 25장 마지막에서 총독 베스도는 자기 부인 베니게와 아그립바 왕 그리고 고위 관료들과 함께 바울을 재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고소했지만, 총독 베스도는 그 동안 바울을 심문해본 결과 죄목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미 바울이 로마 가이사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상소했기 때문에 죄목을 찾아 같이 송달해야 했습니다.

 

이에 총독 베스도는 아그립바 왕에게 바울을 심문할 기회를 줍니다. 사실 바울의 변론은 법정에서 변론이 아니라 일종의 청문회 자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바울을 고소했던 유대인 지도자들이 배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얻었고, 자신이 살아온 지난 삶을 회고하면서 고난의 길을 가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 자리를 자기 변호하는 자리가 아니라 복음을 증거 하는 자리로 만들었습니다.

 

(1) 변호할 기회를 준 아그립바 왕(1)

 

바울의 연설은 25장의 마지막 부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행 25:23-27). 총독 베스도에 이어 아그립바 왕은 바울에게 변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총독 역시 바울을 로마로 보내기 전에 그에 관한 고소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해야 했기에 이런 자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아그립바 왕은 유대인의 문제에 대한 최고 권위자였으므로 총독이 그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먼저 총독은 왕과 최고 관리들에게 바울에 대한 간단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그가 한 보고의 핵심은 바울이 유대인들에게서 아주 심각한 고소를 당했으나 자신이 조사한 결과 그에게 중형을 내릴 만한 범죄 사실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아그립바 왕은 바울에게 변론한 기회를 주었습니다(1).

 

(2) 변호 기회에 감사한 바울 (2-3)

 

바울은 감사함으로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론을 시작합니다. 그는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2)라고 시작합니다. 바울은 계속적으로 재판을 받으면서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론한 것을 ‘다행히’라고 표현하겠습니까? 아그립바 왕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유대의 종교, 문화 그리고 풍습을 잘 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왕 앞에 섰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뜻은 예수님께서 처음 만나는 순간에 사도행전 9:15에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계속적으로 재판 받고 있는 것이 귀찮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명 가운데 있음을 생각하고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난 2년 동안 이런 기회를 얻기를 많이 기대해 왔습니다.

 

기소에 대한 바울의 변론(4-12)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성장합니다. 육신만이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자랍니다. 그것을 변화라고 해도 좋습니다. 더 다양한 세계관과 더 많은 기회들, 더 새로운 것들을 접하면서 우리는 계속 변합니다. 문제는 영적인 변화의 방향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인가 그렇지 않는 방향인가입니다.

 

4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5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6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7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8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9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10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11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12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4-12)

 

바울 자신의 회심에 대한 거론은 세 번째입니다. 이번에는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부름 받았다는 소명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소명을 받들기 위해 복음을 전했고, 이 복음을 전한 것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1) 유대교에서 성장한 자신을 변호(4-7)

 

바울은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는 아그립바 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손을 들어 올리면서 연설을 시작했습니다(1). 이는 재판관(베스도)와 배심원들(아그립바, 베니게, 천부장들 그리고 고위관들) 앞에서 변증 주제를 실제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한 전재들을 진술합니다. 이 진술은 전체 연설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크게 세 부분으로 첫째는 청년 시절(4-8), 둘째는 박해자로 활동(9-11), 마지막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 회심, 소명(12-18) 등으로 나뉩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도 기독교를 열심히 핍박하는 자였다는 것을 밝힙니다. 자신은 기독교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이렇게 급작스러운 태도의 변화가 생긴 것은 그만큼 기독교에 대해 확실한 신념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유대인으로서 얼마나 철저한 삶을 살아 왔는지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4). 자신이 바리새인으로 살았던 것을 인정할 것이라고 말합니다(5). 이 사실은 앞에서도 여러 차례 이 사실을 밝힌 바 있습니다(행 22:3; 23:1,6; 24:14-15). 변론 때마다 자신이 경건하고 신실한 유대임을 강조해 왔습니다. 이 변론에서도 그는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5b)고 증거합니다. 바울은 유대교 안에 여러 분파가 있는데, 자신이 속해 있던 바리새파가 가장 엄한 분파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유대교를 가리켜 “우리 종교”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그가 여전히 유대교의 종파 안에 소속되어 있음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속감은 “내 민족”(4), “우리 조상”(6), “우리 열두 지파”(7)란 표현에도 잘 나타납니다.

 

바울은 이어서 자신이 심문을 받는 것은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7)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하나님께서 조상에게 주신 약속에 대한 소망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여기서 ‘약속’이란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한 약속입니다(8). 바울은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은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소망, 곧 죽은 자들의 부활과 관련해 재판을 받는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행 23:6; 24:15), 유대인 열두 지파는 하나님을 밤낮으로 섬기는 가운데 이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렸습니다(7). 비록 사두개인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전혀 믿지 않았지만(눅 20:27; 행 23:8) 이스라엘 백성 대다수는 죽은 자의 부활을 확실히 믿고 있었습니다(행 23:8). 그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의 소망이 성취되기를 아직도 기다렸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부활에 대한 소망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성취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선교지에서 계속 가르친 내용이었습니다(행 13:32-33).

 

(2) 믿음을 촉구하는 바울(8)

 

바울은 앞서 베스도가 아그립바에게 말한 것을 입증하듯이 죽은 자의 부활을 중심으로 설교합니다. 바울은 더 담대하게 아그립바를 향해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8)라고 대답 대신 반문합니다. 이 질문은 지연된 소망의 내용을 밝힙니다. 곧 죽은 자들의 부활입니다. 여기서 부활은 일반적인 부활을 말하고 있지만, 바울의 의도는 예수님의 부활을 염두해 두고 있습니다.

바울은 진술을 다음 단계로 이끕니다. 즉, 바울의 논리는 하나님께서 죽인 자들을 살리실 수 있다면, 첫 사람으로 살리신 예수님을 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그가 메시아이심을 입증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3) 복음의 핍박자였던 바울(9-12)

 

계속해서 과거에 바울은 자신이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을 대적하며 박해했던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이 성도들에게 가한 모든 박해가 곧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을 대적하는 행동이라고 여겼습니다(9). “나사렛 사람 예수”란 호칭은 십자가에 처형되었으나 부활하신 예수님과 관련해 사용되어 왔습니다(행 2:38; 3:6,16; 4:10,12,17-18,30; 5:28, 40-41; 8:12,16), 청중의 불신앙이 당연하다고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과거에 그랬기 때문입니다(9). 유대인들의 눈에 이 분파는 지상에서 지워 버려야 할 ‘이단’으로 보였습니다(참조, 22:22).

그러므로 개종 전 바울은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는 행위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신성한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9). 예수의 이름을 대적해 많은 일을 행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명을 감당하는 데 일종의 의분을 갖고 행했습니다. 바울도 누구보다 더 분명하게 그렇게 믿었던 사람입니다. 나사렛 예수님의 ‘대적’이요 ‘박해자’로서 그는 기독교인들의 사형 선고에 찬성하고 그들을 감금하고 고문하고 모독했습니다.

 

바울은 거룩하고 의로운 분노를 품은 채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었습니다(10). 그리고 이들이 사형에 처해질 때 찬성표를 던졌습니다(10). 바울은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을 뿐 아니라(행 8:1) 그 외 많은 신자들을 죽이는 일에도 가담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유대인의 모든 회당에서 성도들을 징벌할 뿐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하기도 했습니다(11). 이러한 그의 박해 활동은 예루살렘에만 국한되지 않고 외국 도시에까지 확대되었습니다(11).

 

바울은 자신이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했다’고 말합니다(11). 이 단어는 ‘누군가에게 몹시 큰 증오심을 품다’라는 뜻으로, 광기로 가득찬 증오를 가리킵니다. 헤롯이 죽기 직전 이러한 광기와 증오를 보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철저한 광기와 증오를 품었던 바울은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갔던 과거 일을 이야기합니다(12).


 

만남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만남’이 있을 때 인격적인 진동과 경련이 일어나고 시각이 변하고 사고의 지평이 넓어집니다. 바울에게는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의 전 인격과 삶과 생각을 변화시킨 격변적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당신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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