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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17-01)


불신앙과 신앙의 르비딤

출애굽기 17장 1-16절


 

기도의 실천에서는 개인이 구체적인 기도 제목으로 하나님께 꾸준히 나아가고, 공동체 기도에서는 서로의 필요를 기억하며 함께 기도하고 지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동체의 역할 실천으로는 교회 내에서 서로를 돕고 격려하며 기도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신앙의 여정을 함께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그분의 뜻에 따라 결과를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평안하게 기다리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기적의 공급하심으로 식량난을 해결한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신 광야를 떠난 다음 정박지는 르비딤입니다. 이곳에서 다시 식수난을 겪고 광야에서의 첫 번째 전쟁을 치릅니다. 두 번째 식수난은 반석에서 물이 솟구쳐 나오는 하나님의 기적으로 해결되고 아말렉과의 전쟁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를 거둡니다. 둘 다 하나님의 능력의 매개물인 모세의 지팡이가 사용되었습니다.

 

르비딤에서의 식수난과 백성의 불평(1-3)

삶의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께 솔직하게 기도하며 도움을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신 사례를 기억하고 그분의 약속을 붙잡아야 합니다.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로써 불평 대신 신뢰와 인내를 통해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을 따를 수 있습니다.

 

1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2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1-3)

 

이스라엘 백성은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에 정박했으나 거기서 다시 식수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앞서 마라에서 쓴물(아마 짠물)과 더불어 식수난을 겪은 뒤(15:23 이하) 두 번째 식수난입니다. 백성은 이번에도 불평을 터트리며 모세에게 이 문제를 따졌습니다. 이것은 말다툼의 양상으로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모세도 물러서지 않고 그들의 항의에 맞서 여호와를 시험하는 일을 중단하라고 호통칩니다(2). 백성은 모세를 향해 거침없이 불만을 쏟아냅니다. 이 식수난은 자신들을 애굽 땅에서 끌고 나온 모세의 책임입니다. 그들은 지도자 모세로 인해 자신과 가족들과 가축들까지 모두 목말라 몰살당할 상황이라고 강력히 따졌습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대로, 백성의 원망은 출애굽 직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앞으로 광야 40년 생활 동안 그들의 불평과 원망은 반복될 것입니다. ‘원망하다’라는 뜻의 동사 ‘룬’은 출애굽기의 광야 여정과(15:24;16:2,7,8; 17:3)민수기의 광야 여정에서 두드러집니다(민 14:2,27,29; 16:11; 17:6,20).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는 이 단어가 여호수아에서 한 번을 제외하고(수 9:18) 사용되지 않습니다. 약속의 땅에서는 물과 식량 부족으로 불평하기보다는 계명과 율법에 불순종하여 우상을 섬기고 가나안의 풍속을 쫓는 데 열중했기 때문입니다. 광야의 환경적 요인과 달리 약속의 땅에서 겪은 가뭄과 기근은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발생했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옴(4-7)

우리의 삶 속에서 물리적, 정서적, 영적 필요가 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을 따르며 신뢰하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실 것을 믿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공급을 경험하고 그분의 신실하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4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7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4-7)

 

백성의 잦은 불평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모세는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백성에 대한 통제의 어려움은 결국 나중에 백성의 각종 불만과 문제점을 해결해 주기 위한 효과적인 행정조직의 개편으로 이어집니다(18장). 모세는 백성의 험악한 말에서 심지어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고 하소연합니다. ‘여차하면 그들이 내게 돌을 던질 것입니다.’ 여기서는 백성이 모세에게 돌을 던질 분위기지만, 민수기 14장의 정탐꾼 보고 대회에서는 부정적인 보고를 듣고 낙심한 그들이 실제로 모세에게 돌을 던지려 시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향해 백성의 무리에게서 벗어나 장로들을 데리고 ‘호렙산’의 어떤 바위로 갈 것을 명하십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지팡이를 들고 가야 합니다(5).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라는 묘사는 매우 의도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애굽 백성에게 생명의 물줄기였던 나일 강을 모세의 지팡이를 통해 마실 수 없는 핏물로 만들어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명에 필수적인 식수를 통제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바로 그 지팡이를 사용하여 아무런 물줄기도 보이지 않는 광야 한가운데서 백성이 먹을 물이 나오게 하도록 명령하십니다. 인간의 생명수를 하나님이 통제하십니다. 이것은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물의 통제를 암시합니다.

여기서 ‘호렙산’은 곧이어 도착할 시내산과 다른 산입니까? 아직 시내산에 도착하기 전이므로 이 호렙산은 시내산과 별개의 산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구약 전반에서 항상 호렙 산과 시내산은 동일한 산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어떤 비평학자들은 시내산 호렙 산 이야기를 별개의 산들이었던 시내산 전승과 호렙 산 전승이 섞인 결과로 봅니다. 즉 원래 두 산은 별개의 산이었지만, 전승이 통합되는 과정에서 하나의 산으로 간주되어 이러한 모순과 충돌이 생긴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호렙 산 르비딤에서 식수난과 기적적인 물 공급을 경험한 후 다음 정박지로 나타나는 곳이 시내산(19장)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즉 호렙산과 시내산은 곧바로 이어지는 정박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두 산을 동일한 산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앞서 3:1에서 설명한 대로, 아마 호렙산은 시내산 봉우리를 포함한 넓은 산악 지대였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호렙 산은 여러 산봉우리를 포함한 총괄적인 이름이고, 시내산은 그중 하나의 봉우리로 간주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답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로 “그 반석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반석에서 물이 쏟아져 나와 백성은 목마름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모세는 장로들 앞에서 명령대로 행했는데 물이 반석에서 나왔다는 보고는 생략되어 있습니다(6). 그러나 온 백성과 가축이 넉넉히 마실 만큼 물이 솟구쳤을 것입니다. 앞서 모세는 쓴물이 단물로 변한 지명을 ‘쓰라림’을 뜻하는 ‘마라’라 불렀는데 이 지역에도 현재의 사건과 관련된 의미를 지닌 지명을 붙였습니다. 두 개의 지명이 부여되었는데 맛사와 므리바입니다. ‘시험’을 뜻하는 ‘맛사’는 두 번째 식수난에 불만을 터트리면서 사실상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는가?’하고 하나님을 시험한 데서 유래했습니다. ‘다툼’을 뜻하는 ‘므리바’는 그들이 모세와 (실질적으로 하나님과) 물 문제로 다투었기 때문에 부여된 이름입니다.

 

아말렉과의 전쟁(8-16)

기도의 실천은 개인과 공동체가 구체적인 기도 제목으로 하나님께 꾸준히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서로를 돕고 기도하며 지원하는 자세를 통해 함께 성장하고 격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세는 우리의 노력과 기도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음을 인정하고 그분의 계획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8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9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10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11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12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13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1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15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6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8-16)

 

이스라엘 백성이 르비딤에서 아말렉 족속의 공격을 받자,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군사를 이끌게 하고, 자신은 지팡이를 들고 산꼭대기로 올라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승리하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우세했습니다. 결국 모세의 손을 받쳐 올린 아론과 훌 덕분에 이스라엘이 승리했고, 모세는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깃발로서의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1)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받쳐 들다(8-13)

 

식수난이 해결된 직후 아직 르비딤에 머물러 있을 때 아말렉 족속이 공격해왔습니다. 아말렉은 성경 밖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미스터리한 족속입니다. 조상 아말렉은 에서의 손자였는데 훗날 강력한 족속으로 성장했습니다(창 36:12,16). 그들은 이스라엘 남부의 네게브, 시내 반도에 거주하던 유목민으로서 이스라엘의 강력한 대적이었습니다(민 13:29; 14:25). 사울과 다윗 시대에도 이스라엘을 주기적으로 괴롭혔으며 에스더서에 등장하는 유대인의 대적 아각 족속이 아말렉 족속의 분파였던 것으로 추론됩니다(에 3:1,10; 8:3,10).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지휘권을 맡기고 군사를 모아 전쟁을 이끌라고 명합니다. 모세가 할 일은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을 더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아론과 훌을 데리고 산꼭대기로 올랐습니다(10). 산 정상을 가리키는 단어는 낮은 언덕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됩니다. 따라서 아마도 르비딤 근처의 산들은 호렙 산 일대의 변두리로서 높은 시내산과 달리 낮은 봉우리들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능력의 매개물인 지팡이를 쥔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모세의 팔이 무거워져 더 이상 들기 어렵게 되자 아론과 훌은 바윗돌을 가져다가 모세를 거기에 앉혔습니다. 모세가 양손을 모두 들어야 승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양쪽에서 모세의 양손을 받쳐 올렸습니다. 그리하여 모세의 손은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아 이스라엘은 아말렉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2) 아말렉을 향한 영원한 파산 선고(14-16)

 

이 승리는 기념비적 사건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 전쟁을 실록(책)에 기록하여 대대로 기념이 될 수 있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낭송하여 들려주라고 명령하십니다. 모세에 이은 제2세대 지도자 여호수아를 대표로 하여 모든 다음 세대는 이 승리를 대를 이어 기억해야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완전히 없애 하늘 아래 기억될 수 없게 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모세는 추가로 기념 제단을 쌓아 그 제단에 ‘여호와 닛시’(여호와는 나의 깃발)라는 이름을 부여했습니다. 아말렉이 여호와의 대대의 대적으로 선언되었기 때문입니다(16). 이는 아말렉이 끊임없이 이스라엘의 대적이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 선언대로 아말렉은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과 끊임없이 충돌합니다.


우리가 신앙의 광야를 지나는 동안 겪는 어려움과 시험,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공급과 응답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정확히 아시고, 그분의 방법으로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신뢰와 순종으로 그분을 의지할 때, 하나님은 그분의 계획을 이루시고,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십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역사와 공급을 경험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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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16-02)


양식과 안식을 주신 하나님

출애굽기 16장 22-36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그의 신실하심으로 항상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우리가 과거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현재와 미래를 신뢰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변치 않는 약속으로 우리를 지키시며, 그의 공급은 항상 부족함 없이 이어집니다.

 

  • 이스라엘 백성은 여섯 날 동안 만나를 채취하고 일곱째 날 안식일에는 쉬어야 합니다. 십계명을 비롯한 여러 율법들과 마찬가지로 아직 공식적인 안식일 규례는 선포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구전 율법을 통해 조상 대대로 전수되어 온 안식일 규정을 지켜온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섯째 날에 안식일 몫까지 두 배의 만나를 채취할 수 있게 하십니다.

 

여섯째 날에 갑절의 만나를 거둠(22-24)

우리의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고 준비하는 것은 신앙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뜻을 신뢰하고 약속을 믿으며 실천으로 응답할 것을 원하십니다. 주일을 맞이할 때, 우리는 그날을 준비하며 하나님의 법을 준수해야 합니다. 주일을 준비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표현하는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준비와 신뢰에 따라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삶을 풍성하게 하십니다.

 

22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지도자가 와서 모세에게 알리매 23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24그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22-24)

 

이스라엘 백성은 아침마다 광야에 나가 만나를 거두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지시대로 안식일 전날, 즉 여섯째 날에는 두 배의 만나를 채취했습니다. 한 사람당 두 오멜의 양은 분명 진영에 남은 가족들을 위한 두 배의 양식을 뜻합니다. 두 오멜(4.4리터)의 만나는 평균적 규모의 가족이 이틀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입니다.

회중의 지도자들은 모세를 찾아가 백성들이 하나님의 지시대로 안식일 전날에 두 배의 만나를 수확했음을 알렸습니다(22). 모세는 여호와께 지시를 받아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다음 날은 안식일로 모든 노동을 멈추고 쉬는 날임을 알립니다. 여기서 쉬는 날을 의미하는 비슷한 두 단어가 나타나는데 ‘휴일’로 번역된 ‘샤바톤’과 ‘안식일’로 번역된 ‘샤바트’입니다.

‘샤바톤’이 추상명사 ‘안식’을 의미하고 또한 안식일이 아닌 절기 중에 쉬는 날을 종종 ‘샤바톤’이라 부른다면(레 23:32, 나팔절; 레 23:39, 장막절) 이것은 단순히 ‘휴일’을 뜻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여기서 단순히 안식일(샤바트)을 휴일(샤바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는 음식을 조리하기 위해 불을 피울 수 없고(출 35:3) 일종의 노동인 요리 자체가 금지되기 때문에 안식일 전날 미리 이틀분의 음식을 준비해야 합니다(23). 여기서 만나는 굽거나 삶을 수 있는, 즉 나름 다양하게 요리를 해서 먹을 수 있는 특수한 음식이었음이 드러납니다.

백성은 안식일 전날에 남은 안식일의 분량을 버리지 말고 보관해야 합니다. 다른 날에는 남은 것은 모두 폐기해야 했고 만일 남겨둔 경우 썩고 벌레가 생겨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분량은 신비롭게도 하루를 넘겨 안식일이 되었어도 상하지 않고 벌레도 생기지 않았습니다(24). 그리하여 안식일에도 그들은 만나의 끼니를 거르지 않고 먹을 수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끊긴 만나(25-30)

안식일은 단순히 노동을 멈추는 날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여호와의 창조를 기억하고,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킬 때, 그날의 쉼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들에 나가 만나를 채취하러 갔던 것처럼, 현대의 우리도 바쁜 일상 속에서 쉼을 잊고 지나치기 쉬운 경향이 있습니다.

 

25모세가 이르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들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 26엿새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27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2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29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30그러므로 백성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니라(25-30)

 

안식일이 되자 모세는 전날 남겨놓은 만나를 먹으라 말합니다. 모세는 안식일을 ‘여호와의 날’(하욤 라도나이)이라 표현합니다. 이것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도 여호와의 법으로 제도화된 안식일을 준수하고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구약에서 안식일은 예배의 날로 규정되지 않으며 단지 노동을 멈추고 휴식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그날은 또한 기억의 날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함으로써 여호와의 창조를 기억하고(출 20:8-12) 또한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을 기억합니다(신 5:12-15). 안식일이 되자 모세는 백성들이 들에 나가 만나를 채취하는 노동을 하지 않도록 당부합니다. 들에 나가더라도 만나를 얻지 못해 허탕을 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25). 비록 만나가 타마리스크 나무에 기생하는 벌레의 분비물이 초자연적 방법으로 대량으로 만들어진 음식이었다 하더라도 이것 또한 자연 현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만나의 기적입니다.

백성의 일부는 모세의 말, 즉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않고 만나를 채취하러 들에 나갔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말한 대로 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아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27).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백성을 책망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 말씀하십니다(28). 앞서 16:4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려서 백성이 매일 거두게 하실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백성이 내 율법을 지키는지 시험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 시험 예고는 안식일 법을 염두에 둔 말씀이라는 사실이 여기서 확인됩니다. 앞서 살핀 대로 현재의 상황처럼 시내산 언약을 맺기 전에는 백성의 불순종, 더구나 안식일을 위반한 엄중한 죄에 대해서도 별다른 징벌을 내리지 않고 책망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그들에게 안식일을 지켜 여섯째 날에 이틀분의 만나를 미리 채취하고 안식일에는 각자 처소에 머물러 아무도 들판에 나가 일하지 말도록 경고하십니다(29).

안식일에 나가 빈손으로 돌아온 백성은 안식일의 쉼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비로소 안식일을 준수하였습니다(30). 참고로 여섯째 날에 두 배의 식량을 공급하심은 후대에 안식년마다 6년째 해어 다음 해에 쓸 식량까지 두 배의 수확을 주겠다는 약속을 얘기합니다(레 25:20-22).

 

만나를 항아리에 기념물로 보관(31-36)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때로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우리를 채우십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현재와 미래를 신뢰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강화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치 않으며, 그분의 신실하심은 우리의 신뢰를 더욱 굳건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공급이 항상 부족함 없이 이어졌듯이, 우리의 삶 속에서도 그분의 은혜가 언제나 충만하게 임할 것입니다.

 

31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32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너희의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 하고 33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34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35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36오멜은 십분의 일 에바이더라(31-36)

 

여기서 ‘만나’라는 이름의 유래가 설명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늘에서 내려온 그 음식을 만나라 칭했습니다. 앞서 13-16절에서 설명한 대로, 만나의 히브리어는 ‘만’인데 타마리스크 나무에 기생하는 벌레의 배설물로 추정되며 오늘날도 아랍인들은 그것을 ‘만(mann)’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만나의 외적인 특징과 맛도 여기서 구체적으로 묘사됩니다.

만나는 ‘깟(가드)’이라는 식물의 씨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그것은 ‘고수’의 종류로 간주됩니다. 즉 만나는 고수풀 씨와 비슷하며 오늘날도 베두인족과 아랍인들이 음식으로 먹는 관습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또한 만나의 맛은 꿀을 섞은 과자(짜피히트)와 같았습니다(31). 이것이 정확히 무슨 맛인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민수기 11:8은 그것을 “기름 섞은 과자 맛”으로 달리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 ‘과자 맛’(라샤드) 또한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데, 아마 달콤한 과즙 맛으로 추정됩니다.

앞서 만나를 굽거나 삶을 수 있다 했는데(23) 민수기는 요리법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를 제공합니다. 깟씨 모양을 지닌 만나는 진주와 같기도 한데, 그것은 맷돌로 갈거나 절구로 찧을 수 있었으며 삶아 먹거나 과자를 만들어 먹을 수 있었습니다(민 11:78).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만나를 영원한 기념물로 보관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32). 채취한 만나 한 오멜, 즉 1/10에바(2.2리터)를 용기에 담아 보관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인도하심 그리고 공급하심에 대한 징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애굽에서 구출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의 삶도 책임져주십니다. 만나의 공급이 그 증거입니다. 모세는 아론에게 항아리를 가져와서 한 오멜의 만나를 담은 뒤 그것을 ‘여호와 앞에’ 둘 것을 명합니다(33). 아론은 그 만나 항아리를 “증거판 앞에” 두어 보관하였습니다. 이 증거판은 십계명 돌판을 뜻하는데, 이것은 나중에 시내산에 도착한 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전달해주셨습니다.

“여호와 앞”과 “증거판 앞”은 동일한 표현인데 오경에서 ‘여호와 앞’은 항상 ‘법궤 앞’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직전의 33절과 30:36에 비추어 볼 때, 증거판 앞은 ‘법궤 앞’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30:36에서 특별히 제조한 향을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는데, 이것 역시 ‘증거판 앞’과 동일한 어법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만나 항아리는 법궤 안에 보관한 것이 아니라 법궤 앞에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33절에서 ‘여호와 앞에’(법궤 앞에) 만나 항아리를 두라 하셨는데, 아직 십계명 돌판도 법궤도, 또한 성막도 제작되기 이전입니다. 따라서 만나를 법궤 앞에 보관하라는 명령은 성막이 완성된 후에 실행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40년 동안 이 만나를 지속적으로 공급받았으며 요단강을 건너 그 땅에 들어간 후에는 만나가 그쳤습니다(수 5:12).

참고로 법궤 앞에는 만나와 더불어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보관합니다(민 17:10-11). 히브리서 9장에서는 이것들도 법궤 안에 함께 들어가 있다고 보고합니다. 더불어 히브리서 9장은 향단이 지성소에 놓여 있다고 말하므로 여러모로 출애굽기와 민수기가 보고하는 성막의 원래 상태와 어긋나 있습니다. 이것은 난제인데, 필자의 견해로는 히브리서 9장의 이런 변경된 성막의 상태는 완전한 하늘 성전과 대비되는, 배교가 절정에 이른 시대 지상의 흐트러진 성막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참조. 대하 33장; 특히 대하 35:3은 왕조 시대에 일시적으로 법궤가 멋대로 성전 밖으로 돌아다녔음을 암시한다). 변치 않는 하늘 성전과는 달리 인간의 불순종과 불성실로 인해 멋대로 변경된 지상 성전은 그 자체의 한계와 유한성을 지녀 하늘 성전을 기대하게 만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공급과 안식일의 중요성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우리가 그분의 명령을 실천할 때, 그의 신실한 공급으로 우리를 채우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뜻을 따를 때, 그분의 은혜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도 이 교훈을 삶에 적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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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16-01)


일용할 양식, 만나를 주실 하나님

출애굽기 16장 1-21절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은 우리의 기억을 초월하는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기적이 일어난 순간의 세부 사항을 잊어버리지만, 그 축복의 영향력은 여전히 우리의 삶에 깊은 흔적을 남깁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능력을 가지고, 잊혀지지 않는 영적인 선물을 안겨줍니다. 이러한 기적들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고, 우리가 기억하지 못할 순간에도 여전히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끊임없이 감사하며 새로운 힘을 얻습니다.

 

  • 엘림을 떠난 다음 행선지는 신 광야였습니다. 거기서 백성은 다시 불평을 터트립니다. 이번에는 식량난 때문입니다. 시내산에 도착할 때까지 불평은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식량난을 겪는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리기를 비처럼 내려주십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시험하고 계십니다.

 

식량난과 만나의 약속(1-5)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불평하기보다는 인내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교훈을 배우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필요가 즉시 채워지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실지를 믿고 기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신뢰는 우리의 신앙을 성장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진정한 테스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그 계획에 따라 최선의 방법으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1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2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4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5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1-5)

 

엘림에서의 꿈같은 휴식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습니다. 다음 행선지는 엘림과 시내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입니다. 신 광야에 도착한 때는 출애굽을 기준으로 제1년 2월 15일입니다. 그들은 1월 15일에 출발했으므로(민 33:3), 신 광야에 도착할 때까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신 광야에서 재차 백성들의 원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온 회중이 척박한 광야 한복판에서 식량 부족으로 모세와 아론을 향해 불만을 터트립니다. 그들은 엘림의 달콤한 휴식이 끝나자마자 다시 투덜거립니다. 충격적이게도 그들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먹을 때 여호와의 손에 죽는 것이 나을 뻔했다고 말합니다. 해밀턴(Hamilton)의 표현대로, 지옥과 같았던 애굽이 불과 한 달 만에 에덴동산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것은 사악한 거짓말입니다. 중노동에 시달리면서 매일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구원을 간절히 호소했던 그들이 어떻게 고기를 배 터지게 먹었단 말입니까? 더 중요하게도 과연 그들에게 식량이 없었습니까? 앞서 웅장한 출발 장면에서 그들은 ‘수많은 잡족(여러 민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함께 떠났음이 확인됩니다(12:38). 카수토(Cassuto)는 식량 부족으로 백성이 투덜거린 것은 식량으로 쓸 가축을 소유하지 못한 일부 사람의 난동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온 회중’을 단순히 과장법으로 치부합니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 그들은 머지않아 가나안 땅에 입성할 것을 기대하면서 귀중한 재산인 가축을 광야에서 축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 추론이 옳다면, 매우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불평을 터트리고 있는 셈입니다.

한편, 동일한 사건이 민수기 1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백성을 위해 하늘에서 양식을 비처럼 쏟아지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4). 그들은 매일 필요한 양식을 거둘 것입니다. 그들에게 풍성한 만나를 주시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실천하는지 시험하기 위함입니다. 직전 마라의 쓴물 사건에서도(15장) 단물의 기적 뒤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방식으로 ‘시험’을 언급하신 바 있습니다.

율법 준수 여부에 따른 그들이 받을 시험은 무엇입니까? 상당히 설득력 있게 카수토는 아마 이 시험은 이어지는 안식일 법의 준수 여부와 연결되는 것으로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일 만나를 제공하시되, 과연 그들이 제7일의 안식일을 명령대로 지키는지 그들을 시험하실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섯째 날에 갑절을 거두어 안식일에는 만나를 거두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5).

안식일은 창세기 1-2장의 창조 사역을 마친 후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날로 언급됩니다(창 2:2-3). 그러나 아담 이후 창세기의 족장 이야기를 거쳐 모세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켰다는 언급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안식일 법은 나중에 시내산 아래에서 십계명이 반포될 때 비로소 공식적으로 선포됩니다(출 20:8-11).

그러나 노아 홍수의 시간표는 안식일이 준수되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시내산 율법과 레위기의 법전이 선포되기 전에, 원시적 형태의 다양한 율법들과 제의적 관행들이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이미 실행되고 있었을 것입니다(창 4장; 8:20; 15:9-11; 31:34-35,54). 따라서 안식일 제도의 율법적 공식화 이전에 이미 이스라엘 백성은 원시적 안식일 법을 알고 지켰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나와 고기 공급을 예고하심(6-1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을 시험하시며,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지를 확인하십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며, 그분의 뜻에 따르는 것이 우리의 신앙을 더 깊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방법입니다. 신앙의 시험을 맞이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6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7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대하여 원망하느냐 8모세가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9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10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1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6-12)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그대로 전했습니다(6). 만나가 이슬처럼 내리고 엄청난 메추라기 떼가 날아온 것입니다. 저녁에는 메추라기 떼가 내려와 대지를 덮을 것이고, 아침이면 만나가 하얗게 지면에 내려온 것을 볼 것입니다(6-8).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 한 번 여호와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셨을을 알게 될 것이며 (6), 저녁에 고기를 먹고 아침에 ‘만나’라는 떡을 배불리 먹을 것입니다(8). 모세와 아론은 이 약속의 말씀을 전하면서 자신들에게 불평하며 대항하는 백성을 꾸짖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들이므로 그들을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됩니다(8). 다시 한 번 모세의 대언자 아론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모세는 아론을 통해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원망을 들으셨다는 사실과 그분의 살아계심의 증거를 나타내실 것임을 알립니다(9).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았을 때,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났습니다(10). 이것은 초자연적이고 압도적인 광채의 출현이었을 것입니다.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림(13-16)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을 시험하시며, 우리의 순종을 통해 그분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의 공급을 경험하며 그분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13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14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15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16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1)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13-16)

 

하나님의 약속대로 식량이 하늘에서 쏟아졌습니다. 저녁에 메추라기 떼가 진영을 뒤덮었고 아침에 이슬이 진영 주변에 내렸는데, 이슬이 마른 뒤에 놀랍게도 광야 전역에 서리처럼 하얀 물질이 비늘처럼 얇게 쌓였습니다. 메추라기 떼는, 다수의 학자들의 설명대로, 지중해로부터 이집트 남부와 수단을 오가는 철새이며, 그것들이 이 시기에 대량으로 출현한 것으로 추론됩니다. 그러나 더햄(J. Durham)은 이러한 견해를 거부하면서 출애굽기 저자의 의도는 초자연적인 기적에 의한 공급의 역사를 묘사하고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흥미롭게도 만나와 메추라기 떼가 출현한 시기인 음력 2월(양력 4월경) 어간은 실제로 철새인 메추라기 떼의 이동 시기와 일치합니다. 이때 지친 메추라기 떼는 시내 반도에 쉬기 위해 내려앉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새 떼가 평소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밀도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이것은 분명 초자연적 현상이었습니다. 만나 또한 자연주의적 설명이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만나는 타마리스크 나무에서 기생하는 벌레의 하얀 배설물로 간주되는데 실제로 달콤한 맛이 난다고 합니다. 아랍인들은 그것을 ‘만(mann)’이라 부릅니다. 오늘날도 만나의 채취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매우 소량이며 특정 시기에만 채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공급된 만나는 매일 이스라엘 백성을 다 먹일 만큼, 또한 특정 시기가 아닌 연중 내내 40년 광야 생활 동안 계속 공급되었다는 점에서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로 만나를 채취하러 간 사람이 거둘 만나의 양을 장막에 남은 가족 수당한 오멜(약 2.2리터)로 한정하셨습니다. 2.2리터의 만나는 한 사람이 먹기에는 지나치게 많기에, 그것은 특정한 숫자의 가족을 위한 분량으로 보아야 합니다. 유월절 예식 때 양 한 마리에 맞는 가족 규모가 적시되지 않은 것처럼 이 평균적 가족의 숫자 또한 적시되지 않고 있습니다. 유월절 양을 위해 모인 가족 규모가 작을 때는 두 가정이 합치라고 한 것을 고려할 때, 한 가족의 평균 숫자는 최소 5명 정도였지 않을까 추정해봅니다. 어쨌든 그들은 평균적 가족 수에 맞게 만나를 거두어야 했습니다(16).

 

평균케 된 만나 공동체(17-21)

현대 신앙 공동체에서도 하나님의 자원과 은혜는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우리는 각자의 필요에 따라 신앙과 자원을 나누고,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물질적, 영적 자원을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통해 공동체 전체가 함께 성장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17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19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20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21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17-21)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 나가 만나를 채취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노동력에 차이가 있으므로 모두가 동일한 수확량을 거둘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많이, 어떤 사람은 적게 거두었습니다(17). 그러나 오멜의 됫박으로 재보니 놀랍게도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이 먹을 만큼’의 양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먹고 남은 만나는 그날 저녁 취침 전에 폐기해야 했습니다. 만일 아침까지 남겨두면 썩어서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기 때문입니다(20). 일부 사람들은 아까운 마음에 만나를 남겨두었지만, 결국 부패해 먹을 수 없었습니다. 모세는 불순종한 그들에게 분노하며 경각심을 심어주었습니다. 백성은 아침마다 만나를 적당량 채취했으며, 햇볕이 뜨거워지면서 만나는 점점 녹아 사라졌습니다(2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필요를 어떻게 채우셨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매일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그들의 기본적인 요구를 충족시키며, 신뢰와 순종을 시험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적시에 공급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급 방식을 신뢰하고 그분의 지혜를 받아들이며,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맡기고, 그분의 신실함에 감사하며 신앙을 더욱 깊이 해 나가길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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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15-02)


마라의 쓴 물 앞에 불평

출애굽기 15장 22-27절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광야와 같은 시험의 시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도 광야에서 큰 시험을 겪었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한 후, 그들은 이제 물이 없는 메마른 땅에서 목마름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의 시기를 통해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시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게 합니다.

 

  • 본문은 광야 생활의 시작입니다. 1차적으로 홍해를 건 후에부터 시내산까지 여정(19:2)을 기록합니다. 여정의 시작은 감사와 찬송으로 가득한 것이 아니라 불평과 원망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으로 진행할 때 사흘 동안 물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기도하기보다는 다시 모세에게 불평합니다. 하나님은 쓴 물을 단물로 바꾸시지만,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마라의 쓴물과 백성의 불평(22-23)

마라의 쓴물은 우리 삶에서 만나는 고난과 시련을 상징합니다. 우리도 인생에서 어려움을 만날 때, 쉽게 불평과 원망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보여준 것처럼, 우리의 시련 속에서 중요한 것은 환경이나 사람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22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22-23)

 

이스라엘 백성은 불평을 터트리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시험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쓴물을 단물로 변하게 하시어 갈증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이어서 도착한 엘림은 광야의 오아시스로 많은 물이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에 장막을 치고 잠시 머뭅니다. 하나님의 인도로 갈증이 완전히 해소되었을 것입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불-구름 기둥의 인도하심을 따라 수르 광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뜨거운 광야에서 사흘 길을 가는 동안 물을 구하지 못해 식수난을 겪자 다시 불평을 터트립니다. 기적의 은혜를 체험한 직후 곧장 불평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출애굽 후 최초로 모세를 향한 불평이며 실제로는 하나님을 향한 불평과 항의인데,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시기가 출애굽과 더불어 ‘바다의 노래’가 울려 퍼진 찬양의 축제가 끝난 직후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향후 광야 생활 40년 동안 지속될 끝없는 불평과 불순종을 암시합니다. 백성이 처음 맞이한 환경은 수르 광야였습니다. 수르는 ‘벽’이란 뜻입니다. 수르가 ‘벽’이란 뜻을 지닌 이유로 어떤 학자들은 아마 이 지역은 애굽 동쪽 국경으로서 국경 수비를 위해 어떤 방어벽을 구축해놓았을 것이라고 추론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거기서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많은 경우 ‘삼일’은 문자적인 기간이 아니라 어림수입니다(참조, 민 10:33). 그들은 ‘마라’라는 곳에 도착합니다. 그곳에 물이 있었지만, ‘쓴 곳’이라는 지명 그대로 쓴물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물이 귀한 광야나 사막에서는 소금기가 많은 물이나 오염수들이 더러 있어서 식수로 사용할 물이 귀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쓴물이 짠물일 가능성이 큽니다. 카수토는 이 지역이 비터 호수에서 남쪽 해안을 따라 약 삼일 여행 거리의 짠물 웅덩이가 있는 ‘아인 하봐라(Ain Hawwarah)’일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지하는 전통적 경로에 비추어서 그럴듯하지만 명확한 증거는 없습니다.

 

마라의 단물과 말씀의 시험(24-26)

우리도 종종 마라의 쓴 물과 같은 어려운 상황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때 사람들을 원망하는 것은 불신앙의 표현입니다. 대신, 이러한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통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원망 대신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24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26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24-26)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최초로 원망과 불평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 ‘룬’이 등장합니다. 이 단어가 이후 광야 40년 세월 동안 출애굽기와 민수기에서 광야 생활에 불만을 품는 패역한 백성의 반역을 다루는 문맥에서 계속 등장합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한 나무를 가리키셨고, 모세가 그 나무를 물에 던지자 물이 달게 변합니다. ‘가리키다’의 히브리어 ‘야라’의 히필형은 보통 ‘가르치다’, ‘가리키다’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문맥상 잘 맞지 않는 이유로 고대의 일부 역본은 이것을 ‘보여주다’로 수정했으며, 현대의 많은 번역들이 이것을 따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의도적인 단어 사용으로 보입니다. ‘야라’는 율법을 가르칠 때도 사용됩니다. 흥미롭게도 바로 이어서 ‘법도와 율례를 정하셨다’는 진술이 뒤따릅니다. 따라서 나무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이 동사는 이어지는 법도와 율례에 대한 언급을 미리 암시합니다. 모세가 말씀의 ‘지시’를 받고 순종했을 때 그들은 생명수를 얻었습니다. ‘여호와로부터 나온 지시(instruction)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백성은 영적으로 토라와 교훈의 멍에를 수용할 준비를 갖춘다.’

이들의 식수난은 애굽의 첫 번째 재앙인 나일강이 피로 변한 일을 상기시킵니다. 당시 사람들은 마실 물이 없어서 온 사방에 우물을 파야 했습니다(7장). 나뭇가지를 넣으니 쓴물(아마 짠물)이 단물로 변했습니다. 카수토는 여행객들의 증언을 따라, 실제로 어떤 찔레나무 종류에 이런 효능이 있다는 사실을 소개합니다. 나무의 사용이 실제 있는 어떤 나무의 화학 작용을 이용하신 것인지, 단지 모세의 지팡이 같은 신비한 기적의 시연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나무를 사용했다는 것은 그것의 특유한 효능을 이용하셨음을 암시할 수 있으며, 다만 이것이 통상적인 수준의 효능을 훨씬 뛰어넘었기에 기적이었을 것입니다.

단물의 기적이 일어난 직후, 하나님께서는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시험하셨습니다(25). 이것은 이어지는 26절에서는 계명과 규례로 표현됩니다. 2절의 ‘법도’와 26절의 ‘규례’는 동일한 히브리어 ‘호크’입니다. 법도(규례), 계명, 규례는 히브리어가 각각 다른데, 이것이 각각 어떤 의미론적 범주를 지니는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가장 무난하게 이것들은 단순히 문학적 효과와 강조를 위한 동의어의 반복으로 간주됩니다. 더욱 곤혹스러운 것은 그 법도와 율례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분명한 것은 시내산에서 십계명과 율법이 공식적으로 반포되기 전에 그들은 애굽 땅에 살 때부터 나중에 최종적인 실체가 드러날 어떤 원시적 형태의 율법들을 조상 때부터 이미 전수 받았을 것입니다. 예컨대, 모세가 여호와께 제사를 바치는 종교 행사를 위해 자신들을 보내달라고 파라오에게 요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은 이미 법도와 규례로서 제사법과 어떤 ‘절기’를 지키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라에서 받은 율법의 실체가 무엇이었든, 그 법도와 규례는 시내산 율법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법도를 정하신 후, 그것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다양한 시련과 어려움을 주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셨습니다(출 15:25; 16:4; 20:20; 신 8:2,16). 시험의 목적은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신뢰하는지를 검증하고 그들을 낮추기 위해서이며, 시험을 통과한 백성에게 약속대로 복을 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말씀을 잘 지키면 애굽 사람들에게 내린 질병의 재앙이 하나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질병’을 뜻하는 ‘마할라’는 질병뿐 아니라 육체적 타격으로 발생한 상처나 전쟁 중에 입은 부상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잠 22:35; 왕하 8:29). 따라서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준 열 재앙을 가리킬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불순종하면 동일한 재앙이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순종하면 질병을 내리지 않을 것이며, 자신이 그들에게 ’치료하는 여호와‘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널리 유통되는 ’여호와 라파‘라는 용어가 유대했는데, 엄밀히 이것은 현재의 본문을 비롯하여 성경에 나오지 않는 호칭입니다. 굳이 따지면 ’여호와 로페‘(여호와는 치료자이시다)가 더 정확한 호칭이지만, 이호칭이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용된 경우는 없습니다.

 

엘림의 많은 물과 백성의 휴식(27)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지칠 때마다 회복의 은혜를 주십니다. 엘림의 풍성함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급을 상징합니다. 쉼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영적인 회복을 얻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칠 때마다 엘림 같은 쉼터를 준비해 주십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27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27)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후에 두 번째 휴식을 취한 장소로서 큰 종려나무가 70주 서 있는 오아시스입니다. ‘마라’에서 일시적인 단물의 기적을 만끽하고 ‘엘림’에 도착합니다. 그곳은 샘이 많고 종려나무가 무성한 오아시스였습니다. 그들은 그 오아시스에 장막을 치고 머무릅니다. 이제 더 이상 물 걱정은 없습니다. 쓴물이 단물로 변했고 이제 많은 물이 제공됩니다. 여기서 열두개의 샘과 70그루의 종려나무를 가리키는 숫자 ‘12’와 ‘78’은 완전수의 조합으로서 실제적인 숫자가 아닌 상징적인 문학적 숫자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광야와 같은 시기를 경험합니다. 그곳에서는 시험과 고난이 우리를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가 준비하신 쉼의 장소를 소망해야 합니다. 광야를 지나가는 동안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신뢰합시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시며, 시험 속에서도 우리를 돌보시고 인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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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15-01)


이스라엘 자손의 노래

출애굽기 15장 1-21절


 

찬양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합당한 반응이자 그분의 주되심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입니다.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찬송을 얼마나 잘 하는가?’를 목소리나 음정 그리고 박자 등을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찬송의 대상과 이유를 명확히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면 알수록 우리의 찬송도 더 깊어지고 은혜로워집니다.

 

  •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며 하나님께 구원의 감사 찬양을 드리는 내용입니다. 모세와 미리암이 앞장서서 노래하며 하나님께서 애굽 군대를 물리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위대하심을 찬양합니다. 이 찬양은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기리고, 그분이 영원히 통치하실 것을 선포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찬양(1-18)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지금도 일하십니다. 그 사역을 깨닫는 순간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가장 극진한 높임과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마른 땅과 같이 건널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역사함을 깨닫고 그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1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2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3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4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의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최고의 지휘관들이 홍해에 잠겼고 5깊은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 속에 가라앉았도다 6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7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르는 자를 엎으시니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지푸라기 같이 사르니이다 8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 9원수가 말하기를 내가 뒤쫓아 따라잡아 탈취물을 나누리라,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내 욕망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니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하였으나 10주께서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거센 물에 납 같이 잠겼나이다 11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12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13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14여러 나라가 듣고 떨며 블레셋 주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15에돔 두령들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주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16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임하매 주의 팔이 크므로 그들이 돌 같이 침묵하였사오니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께서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17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18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 하였더라(1-18)

 

본문에서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애굽 군대를 홍해에 빠뜨리고 구원하신 것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이 찬양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능력, 그리고 앞으로의 승리와 영원한 통치를 선포합니다.

 

(1) 애굽 군대를 치신 여호와를 찬양하라(1-10)

 

본문은 통상적으로 ‘바다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불립니다. 이 노래는 홍해의 기적을 통해 극적으로 구출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노래입니다. 이 시에서 다양한 고어체와 고대 단어들의 잔재들이 발견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시의 원류를 모세 시대 출애굽을 경험한 백성의 것으로 돌리고 그것이 그 후 구약 정경이 완성될 때 정교한 발전 과정을 통해 다듬어졌다고 말합니다 해서 그것을 오류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이 시의 기원이 무엇이든 중요한 것은 이 시가 담고 있는 교훈과 신학적 의의입니다.

이 노래와 비슷하게 구약에서 종종 위대한 승리나 구원 사건 직후에 찬양의 시가 이어집니다. 가나안 왕 야빈을 격파한 직후 드보라의 노래(삿 5장), 그리고 불임의 절망 속에서 극적으로 아들을 낳은 한나의 노래(삼상 2:1-10)가 그것입니다. 신약에서도 구원과 승리를 가져올 메시아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의 노래(눅 1:46-55)와 요한 탄생 직후 스가랴의 찬양(눅 1:67-79)이 이 바다의 노래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이 시들은 공통적으로 위대한 구원을 주신 여호와를 향한 찬가입니다. 상상컨대 이스라엘 백성은 미리암과 여성 합창단이 이끄는 찬양 집회를 한바탕 가졌을 것입니다. 그들이 부른 여러 찬미의 노래들이 현재의 ‘바다의 노래’로 요약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홍해를 가르고 애굽 모든 말과 마병을 바다에 수장시킨 여호와의 위대한 능력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힘이요 노래요 구원이십니다(2). 2절의 ‘노래’를 뜻하는 단어 ‘지므라’는 1절의 ‘노래’(쉬르)와 다릅니다. 노래나 시에 대한 일반적인 단어는 ‘쉬르’인데, 여기서는 드물게 ‘지므라’가 사용됩니다(출 15:2; 사 12:2; 암 5:23; 시 81:2; 98:5). 2절에서 일반적인 단어 ‘쉬르’가 아닌 ‘지므라’를 사용한 것은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특별한 노래되심을 뜻할 것입니다. 용사되신 여호와는 파라오의 군대를 ‘깊은 물’로 불리는 바다에 던지셨습니다(참조 창 1:2). 바다를 ‘테홈’으로 부른 것은 애굽 군대가 사람이 빠져나올 수 없는 바다 깊숙이 수장되었음을 뜻합니다. 이어지는 5절에서 그들이 “돌처럼” 가라앉았다는 표현은 탈출 불가능성을 강화하며(5), 나중에 10절에서는 돌보다 훨씬 무거운 “납같이” 잠겼다는 표현으로 그 의미를 극대화합니다. 이로써 여호와는 놀라운 권능으로 원수를 쳐부수시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6).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거역하는 자들을, 특히 열 차례나 그분의 명령에 불복했던 바로와 애굽을 뒤엎으셨고 그들을 지푸라기처럼 불사르셨습니다(7). 그분이 불러온 강한 동풍이 8절에서 그분의 “콧김”으로 표현되는데, 10절에서는 다시 “바람”으로 표현됩니다. 여호와의 콧김은 구약에서 보통 여호와의 분노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분노의 바람이 바다를 가를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애굽에 대한 심판의 도구가 됨을 암시합니다. 추정컨대 성령의 능력에 의해 강한 바람이 동쪽에서 불어와 바닷물을 밀어내 파도가 일면서 물이 언덕처럼 양쪽에 쌓였을 것입니다(8).

애굽 군대는 승리를 기정사실로 여겨 전리품을 나눌 욕망에 사로 잡힌채 맹렬히 추격해왔습니다(9). 그들은 이스라엘을 칼로 쳐 단숨에 멸망시키려 했으나 오히려 하나님의 강한 동풍으로 전멸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그들은 깊은 바다에 ‘돌처럼’, 나아가 더욱 무거운 ‘납처럼’ 가라앉아 아무도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10).

 

(2) 열국을 놀라게 하신 여호와를 찬양하라(11-18)

 

백성들의 노래는 놀라운 권능으로 열국을 놀라게 하신 여호와를 향한 찬미로 이어집니다. 이 찬미는 모든 신들과 여호와를 비교하며, 주님과 같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분은 없고 그분만이 바다를 가르신 기이한 일을 행하신 분임을 선포합니다(11). 여호와께서 오른손을 드시자 땅이 그들을 삼켰습니다(12). 여기서 여호와의 들어 올린 오른손은 분명 모세가 바다를 향해 들어 올린 지팡이를 쥔 손을 연상시킵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는 땅이 애굽 군대를 삼켰다고 하십니까? 여기서 땅(에레쯔)은 육지가 아닌 죽은 자들이 내려가는 ‘스’, 즉 지하세계의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구약 여러 곳에서 동일한 사례들이 확인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수장된 애굽 군대가 스올의 세계로 떨어졌음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신 뒤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로 인도하실 것입니다(13). 이 처소가 시내산인지, 아니면 시온 산(즉 가나안 땅)인지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17절에 비추어 볼 때, 후자의 가능성이 힘을 얻는 듯 보입니다. 왜냐하면 언뜻 볼 때 17절에서 "주의 기업의 산과 주의 처소인 “성소”와 같은, 시온 산과 예루살렘 성전을 암시하는 여러 표현들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여호와를 예배하기 위한 창소로의 여행을 요구한 사실을 고려하면, 17절과 별도로 이 처소는 모세가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신현을 체험했던 ‘하나님의 산’, 곧 시내산일 수 있습니다. 앞으로 그들은 1년 동안 그 산 아래에 체류하면서 여호와를 예배하며 율법을 전달받고 말씀 훈련을 받을 것입니다.

홍해의 기적에 대한 소문이 온 땅에 퍼져 열국을 두려움에 떨게 만듭니다. 장차 이스라엘의 대적이 될 나라들이 차례로 나열됩니다. 블레셋, 에돔, 모압 그리고 가나안 족속입니다(14-15). 그들은 놀람과 두려움으로 낙담할 것입니다. 장차 대적들은 두려움으로 돌처럼 굳은 채 이스라엘 백성이 지나가도록 길을 열어줄 것입니다. 실제로 훗날 모압과 에돔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국경을 통과하도록 허락하며 이때 이스라엘은 식량과 물 값을 비롯한 정당한 통행료를 지불합니다(신 2:1-8, 28-29). 앞서 말한 대로, 17절은 훗날 거룩한 약속의 땅, 예루살렘과 시온 산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인도하시어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실 것이며 거기서 영원히 다스리실 것입니다(18). 우선 “기업”은 유산으로 넘겨받는 땅을 가리키므로 시내산과는 거리가 멉니다. 또한 “주의 처소”는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를 의미하고 있는데 분명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이것은 어쩌면 훗날 모세오경을 최종적으로 정경화한 어떤 정경 편찬자가 당대 독자의 신앙심을 고취하기 위해 추가했을 수 있습니다. 혹은 창세기 마지막의 야곱의 예언과 신명기 마지막에서 모세의 유언이 시적으로 선포되듯이, 이 시의 진술 또한 장차 거룩한 성전이 들어설 약속의 땅을 점유할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예언일 수 있습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의 찬양(19-21)

하나님의 구원은 한 개인의 찬양으로 제한될 수 없습니다. 공동체가 함께 노래할 때, 감동은 배가 되고 관계는 굳건해집니다. 이스라엘은 공동체로 홍해를 건너게 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 찬양에 화답하여 미리암이 찬양을 드립니다. 찬양은 한 여인으로 끝나지 않고 모든 이스라엘 여인들도 동참합니다.

 

19바로의 말과 병거와 마병이 함께 바다에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바닷물을 그들 위에 되돌려 흐르게 하셨으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지나간지라 20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21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19-21)

 

‘바다의 노래’는 18절로 마무리되고 여기서 모세와 아론의 누이 미리암이 주도한 여인들의 축하 공연 장면이 추가됩니다. 모세가 80세이면, 미리암은 아마 90여세가 되었을 것입니다. 미리암과 여인들이 소고치며 춤을 추며 찬양했습니다. 애굽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노래한 모세에 답하여 기쁜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 단락은 앞선 바다의 노래가 합창된 이유를 재차 간략히 요약하고(19), 찬양의 축제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었는지 구체적 정황(20-21)을 묘사합니다.

애굽의 모든 군대가 수장되었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바다 가운데의 마른 땅을 통과해서 바다를 건넜습니다. 이것이 ‘바다의 노래’가 합창된 축제의 이유입니다. 여기서 흥미롭게 선지자로 불리는 미리암이 작은 북을 두드리며 춤을 추며 그녀를 따랐습니다. 미리암이 짧고 힘찬 노래로 이에 화답하는데, 추정컨대 그녀는 위의 ‘바다의 노래’ 전체를 불렀을 것입니다. 또한 이어서 여인들 모두, 나아가 백성 모두가 그 노래를 우렁차게 합창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다의 노래’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베푸신 구원과 그분의 능력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감사하며 찬양하게 됩니다. 이 찬양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감사만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포함한 우리의 신앙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 그 놀라운 길을 기억하고, 그분의 영광과 능력을 찬양하며, 미래에 대한 소망을 품고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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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14-02)


홍해를 건너게 하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14장 15-31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 곁에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직면하는 위험과 장애물 속에서도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며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에 대한 신뢰는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길을 여시고, 안전하게 인도하십니다. 이러한 믿음 속에서 우리는 평안과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드디어 이스라엘 역사의 분수령이 될 결정적 행동을 개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코앞까지 쫓아온 애굽 군대가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도록 불구름 기둥으로 틀어막으시어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십니다. 뒤이어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일으켜 그들을 구원하시고 갈라진 바다로 뒤쫓아 들어온 대제국의 군대를 전멸시키십니다. 바다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수몰된 애굽 군인들의 시체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을 믿었습니다.

 

애굽 군대를 막으시는 하나님(15-20)

우리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할 때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며, 끝까지 보호하십니다. 때로는 상황이 절망적이고 앞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보호하시는 방패가 되시고, 우리가 그분을 신뢰할 때 그분의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1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16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17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리니 18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19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 가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20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15-20)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 이상 부르짖지 말고 행동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모세가 부르짖는 장면은 앞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르짖는 것을 중단하라 말씀하시는 것은 이상해 보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앞서 침착하게 백성들을 안심시키며 ‘두려워 말고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고 외쳤지만(13-14), 그 역시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며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를 올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기도를 멈추고 행동할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함께 ‘나아가야 한다’(15). 그들은 바다를 향해 나아가야 하고, 이후에도 계속 바다를 통과해 나아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바다를 향해 지팡이를 내밀어 바다를 가르라고 명령하십니다. 갈라진 바다의 바닥이 드러나 마른 땅이 될 것입니다(16). ‘마른 땅’으로 번역된 ‘야바샤’는 창조 기사에서 ‘물’으로 번역되었습니다(창 1:10). 이로 미루어볼 때, 이 기적은 창세기에서 물의 세력을 밀어내 육지와 바다를 구분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연상시킵니다.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바다의 물을 제압하시고 통제하시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와 그의 모든 전차 부대를 바다에 수몰시킴으로써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애굽 사람들은 그분이 여호와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17). 여기서의 애굽인들은 수몰된 군인들이 아닌 애굽 본토에서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임은 물론입니다.

 

백성들을 인도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이스라엘 진영의 뒤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때 여호와의 사자와 불구름 기둥은 함께 움직입니다. 다시 말해 여호와의 사자와 더불어 구름 기둥이 이스라엘 백성의 진영 뒤쪽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앞서 살핀 대로, 흥미롭게도 자주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 자신으로 나타납니다(창 18:2,22; 출 3:2-5; 삿 6:11-22; 13:3-22). 여기서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자가 구분되지 않습니다(24절을 보라). 20절의 히브리어 원문은 약간 혼동을 일으키며 역본들마다 번역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개정개정은 새번역과, 또한 NIV를 비롯한 일부 영역본의 번역과 일치합니다. 즉, 애굽 진영은 어둡고 이스라엘 진영은 환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여러 영역본은 다음과 같습니다: “구름기둥이 애굽 진영과 이스라엘 진영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구름기둥이 밤을 밝혀 밤새 한쪽이 다른 쪽으로 오지 못했다”(ESV; NAS; JPS). 이 번역이 원문에 가장 가까워 보입니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름기둥이 이스라엘 진영 뒤쪽으로 옮겨왔습니다; 거기에 구름과 어둠이 있었습니다; 그것(구름)은 밤을 밝혔습니다. 그리하여 밤새 이쪽이 저쪽으로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낮일 때 불구름 기둥을 두 진영 사이로 옮기셨고 그것은 구름기둥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이후 어두워지자 불기둥으로 보이는 그 기둥에서 강한 불빛이 발산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애굽 군대는 두려워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다(21-25)

하나님의 구원은 종종 믿음과 순종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때로 불가능해 보이는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수 있지만, 그 길을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구원의 손길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구원의 기적을 여는 열쇠입니다.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의 기적을 불러일으키며, 그분의 능력은 믿음 속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으로 나아가길 원하시며, 순종할 때 놀라운 역사를 이루십니다. 믿음과 순종이 기적의 시작입니다.

 

21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22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23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들이 다 그들의 뒤를 추격하여 바다 가운데로 들어오는지라 24새벽에 여호와께서 불과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애굽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25그들의 병거 바퀴를 벗겨서 달리기가 어렵게 하시니 애굽 사람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앞에서 우리가 도망하자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도다(21-25)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지팡이를 잡은 손을 바다를 향해 내밀자 홍해가 갈라졌습니다(21). 하나님께서는 밤새도록 ‘큰 동풍’을 일으키시어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심으로 바다를 가르셨습니다. 바닥을 드러낸 바다가 마른 땅이 되었습니다(21). 이스라엘 백성은 물이 좌우에 벽을 형성하고 있는 가운데 바다 한가운데를 걸었습니다(22). 그 장면을 지켜보던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을 뒤쫓아 갈라진 바다로 달려들었습니다. 아직 동이 트기 전, 하나님께서는 불-구름 기둥 사이에서 애굽 군대를 살펴보시고 그들을 혼란에 빠트리셨습니다. 아마 25절이 말하는 대로, 그들이 자중지란에 빠진 것은 아마 그들이 들어오자 바닥에 물기가 흥건해져 병거 바퀴가 꿈쩍도 하지 못하게 된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고 계심을 깨닫고 도망가려 하지만 이미 바닷물이 원상 복귀되기 시작해 빠져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애굽 온 군대가 수장되다(26-31)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 속에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시며, 구원과 보호를 베푸십니다. 우리는 두려움에 머무르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순종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의 기적과 구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의지하며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26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들의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 하시니 27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28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29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행하였고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더라 30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더라 31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26-31)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도하를 완료하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다시 손을 바다로 내밀어 바닷물을 원상 복귀시키라고 명령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손을 내밀자, 새벽 무렵 바다의 양쪽 벽이 내려앉으면서 처음 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애굽 군사들은 밀려오는 파도를 피해 도망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바다 한가운데 수몰시키셨고, 모든 병거와 기병들과 군대가 한꺼번에 희생되어 단 한 명도 살아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같은 큰 구원과 애굽 군인들을 전멸시킨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과 그분의 종 모세를 믿었습니다.

여기서 덧붙일 토론거리가 있습니다. 홍해가 갈라진 기적에 대해 앞서 말한 대로, 카수토는 비터 호수에서 흔히 발생하던 자연 현상이 특별하게 발생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 호수는 과거 홍해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밀물 때 자주 바닷물에 잠겼고 썰물 때는 물이 빠지면서 여러 크고 작은 호수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카수토는 조수 간만의 차로 인해 호수의 바닷물이 대거 빠질 때 육로가 생겼고, 이후 히브리인들이 건넌 후 애굽 군대가 뒤쫓을 때 엄청난 밀물이 쇄도하며 흘러 들어와 그들이 수장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 갈라진 바다는 위에서 살핀 대로 지명들의 증거와 대략 삼 일간의 여행 거리, 그리고 남동쪽으로의 여행 방향을 고려해볼 때, 비터 호수가 유력합니다. 그러나 그의 자연주의적 해석은 흥미로운 견해지만, 본문은 초자연적 강도의 강력한 동풍이 밤새불어 물이 갈라졌다고 보고하며 바닥이 마른 땅이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일상적인 조수 간만의 특별한 발생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초자연적 기적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한편, 최근에 널리 퍼진 시내산 위치에 대한 근거 없는 주장은 거부되어야 합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라오즈 산이 진짜 시내산이며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수에즈 만이 아닌 아카바 만을 건넜다는 주장은 대부분의 고고학자와 구약학자들에 의해 거부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이라는 갈라디아서의 언급이 유력한 증거로 제시되나(갈 4:25), 시내 반도는 신약 시대에 아라비아 지역으로 분류되었으며 심지어 1700년대 지도에서도 그곳은 여전히 아라비아였습니다. 또한 라오즈 산 꼭대기의 검은 바위는 바위가 불에 타서 검게 된 것이 아니라 원래 검은색의 화강암이며 그 산 정상만이 아닌 그 주변의 넓은 지대가 모두 까맣습니다. 하나님의 불이 이 산 저 산으로 옮겨 다녔다는 말입니까? 참고로 바위는 결코 불에 그을려 검게 타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 백성이 누웨이바 해변에서 아카바 만을 건넜다고 주장하나 라암셋에서 누웨이바 해변까지는 직경 350킬로미터가 넘으며 실제 구불구불한 여행거리는 500킬로미터가 넘을 수 있습니다. 이 거리를 삼 일 만에 주파했다고 주장하는데, 라오즈 산 옹호자들은 그것을 성령의 능력 때문으로 돌립니다. 그렇다면 불과 하루 이틀 만에 즉시 뒤쫓아 온 파라오의 군대는 악령의 능력이 역사했던 것입니까? 또한 필자가 확인한 사실로, 누웨이바 해변의 앞바다만이 신기하게 수심 50-70미터의 얕은 바다이고 그 좌우는 700미터가 넘는 깊은 바다라는 것도 전적으로 조작된 주장입니다. 그 앞바다도 마찬가지로 600-700미터의 깊은 바다입니다. 그 외 그 주장의 근거 없는 거짓과 과장에 대해 수많은 반박이 가능하나 지면상 생략합니다. 시내산 위치는 현재 누구도 단정 지을 수 없으니 겸손해야만 합니다. 다만 전통적으로 시내산으로 알려진 예벨 무사가 그럼에도 가장 유력한 후보지입니다.


본문에서는 믿음과 순종이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키는 원동력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르짖음 이후에 행동하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셨고, 그들의 원수를 심판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의 걸음을 내딛을 때, 구원과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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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14-01)


홍해 앞에서 시험하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14장 1-14절


 

과거의 유혹이나 실패가 우리를 다시 붙잡으려 할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전진해야 합니다. 현실이 아무리 두려워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고, 그분의 구원을 기다리며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는 기회입니다. 문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며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뒤돌아서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진 치게 하였고, 바로가 강퍅하여 병거 600승을 타고 추격해 오지만, 애굽 군대를 인해 영광을 얻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는 추격해 와서 이스라엘 진 친 곳에 미쳤습니다. 백성들이 두려워하며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모세는 백성에게 하나님이 구원하고 싸우실 것이기에 가만히 보고 있으라고 말합니다.

 

홍해 해변에 숙영한 이스라엘(1-4)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합니다. 그분은 때때로 예기치 않은 상황에 우리를 놓으십니다. 우리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의 계획은 완벽하고 선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지혜와 목적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분의 계획은 언제나 우리를 위한 최선의 길을 제시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3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하리라 4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1-4)

 

에담을 떠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돌이켜” 홍해의 어느 해변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이 방향을 ‘돌이켰다’는 뜻은 남동쪽의 내륙으로 곧장 직진해서 애굽을 벗어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서쪽의 애굽 영토 쪽으로 다시 들어왔음을 뜻합니다. 정확한 위치를 적시하는 몇 군데 지명들이 등장합니다. 우선 2절의 “바다와 믹돌 사이”에서 “바다”는 앞서 언급된 홍해가 명백합니다. 홍해의 히브리어 ‘얌 수프’는 문자적으로 ‘갈대 바다’인데, 이로 인해 많은 비평학자들이 홍해를 바다가 아닌 갈대가 자라는 호수 주변의 내륙을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즉, ‘얌 수프’는 홍해(red sea)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갈대 바다(reed sea)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바다가 갈라져 그곳을 건넌 게 아니라 갈대가 무성한 내륙의 호수 근처를 통과했을 뿐입니다. 반면에 기적을 자연주의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를 건넌 것은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다만 앞서 나온 재앙들이 원래 애굽에서 있었던 자연 현상의 특별한 발생인 것처럼 홍해의 기적도 자연 현상의 특별한 발생이었다는 것입니다.

자연주의적 설명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도착한 홍해는 갈대가 무성히 자란 비터 호수(bitter lake)였으며 바다의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현상이 특별하게 발생한 덕분에 그들이 그 호수를 건널 수 있었습니다(Rashi; Cassuto). 오늘날 비터 호는 수에즈 운하가 관통하는 거대한 호수로 바뀌었으며 운하와 연결되어 있기에 바닷물로 채워져 있습니다. 카토는 그러나 고대에는 비터 호가 다소 규모가 작은 여러 호수들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중 가장 큰 호수를 건넜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는 당시 비터 호가 바다의 만조 시에 홍해와 연결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밀물 때는 바닷물이 들어와 채우고 썰물 때는 바닥이 드러나면서 물이 갇힌 여러 호수들이 생겼을 것이라는 추론입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고대인들은 비터 호를 바다로 간주했으며 그곳을 ‘얌 수프’라 불렀습니다(Cassuto). 다만 그 호수는 특수하게 민물 습지와 겹쳐 있는 이유로 해변에 거대한 갈대밭이 조성되어 ‘갈대 바다’를 뜻하는 그런 명칭이 붙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주변의 여러 지명들은 위치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의 뜻을 고려해볼 때 이스라엘 백성이 도착한 바닷가의 위치는 비터 호수 서쪽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카수토는 어떤 프랑스 학자의 심도 있는 현지 탐사 결과를 인용하면서 “에담”은 비터 호의 북쪽으로 추론되며, “믹돌”은 남쪽으로 더 내려와 호수의 서쪽에 위치한다고 말합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2절에서 그들의 행진이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해변가로, 말하자면 남서쪽을 향해 다시 애굽 내륙으로 약간 들어오는 방향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믹돌과 비하히롯은 비터 호수에 아주 잘 어울리는 지명으로 추정됩니다. 다만 바알스본(바알츠폰)은 가나안 방식의 이름인데 ‘북쪽의 바알’을 뜻합니다. 카수토가 인용한 애굽 문헌에 의하면, 바알스본 역시 망대가 있던 지역의 하나로 추정됩니다. 결과적으로 이 지명들은 바다를 끼고 있는 애굽의 서쪽 국경과 잘 어울리며 과거에는 바다와 주기적으로 연결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비터 호수 주변이 유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가 착각 속에서 마음을 바꾸어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한 번 성경 저자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 말합니다(4). 바로가 보고받은 첩보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돌이켜” 엉뚱한 길로 들어가 방랑하는 중입니다. 게다가 그들의 경로는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추격해 온 애굽의 온 군대로 인하여 오히려 자신이 영광을 얻을 것이고 애굽 백성은 그분이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쨌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행하였습니다. 그들은 방향을 "돌이켜" 홍해의 어느 해변으로 이동했습니다(4).

 

마음이 변한 바로의 추격(5-9)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때로는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눈에 보이는 문제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선한 결말로 이끄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시련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발판이 될 수 있습니다.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고 인내하면 됩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5그 백성이 도망한 사실이 애굽 왕에게 알려지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그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이르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가 하고 6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새 7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8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9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들이 장막 친 데에 미치니라(5-9)

 

이스라엘 백성이 도주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바로와 신하들은 마음이 바뀌어 그들을 풀어준 것을 후회합니다(5). 여기서 이상한 점이 발견됩니다. 바로는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가라고 했으면서 그와 신하들은 왜 그들이 도망갔다는 사실을 이제 들었다고 하는 것입니까? 여러 학자들이 바로는 3일 길의 여행과 그들의 짧은 종교 축제만을 허용했기에 ‘그들이 도망갔다’는 소식을 듣고 추격전을 벌였다고 해석합니다(Cassuto; Enns). 그러나 이미 독자들이 다 알고 있듯이 바로와 모세는 사실 노예 해방이 걸린 벼랑끝 협상으로 담판을 지었습니다. 따라서 위의 표현은 그들의 탈출극이 실제로 현실화하자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너무 성급히 그들을 풀어줬다고 생각하며 후회했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무난합니다. 그리하여 바로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최종적 허락을 했으면서 그것을 스스로 번복합니다. 5절의 “우리를 섬김에서”라는 바로의 말은 흥미롭습니다. 출애굽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가 ‘바로를 섬김에서 하나님을 섬김으로’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섬김’ (아바드)의 대상은 바로와 그의 제국이었습니다. 이제 그 ‘섬김’은 하나님과 그분의 제국을 향합니다.

 

바로는 전차 부대를 소집합니다(6). 그는 친히 자신의 병거에 올라 군대(‘백성’)를 이끌고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기 시작합니다. 600대의 특수 병거를 소집했으며, 모든 일반 병거를 출동시켰습니다. 지휘관들도 총동원되어 모든 병거를 진두지휘했습니다. 바로는 히브리인들이 광야에서 헤매며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졌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추격했습니다. 바로의 전차 부대는 급히 달려가 이스라엘의 숙영지 근처에 이르렀습니다. “병거들”, “마병”, “군대”라는 표현에 비추어 볼 때, 그 군대에는 아마 강력한 보병 부대도 합류한 것으로 보입니다.

 

두려워하며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10-14)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도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설 때가 있습니다. 그때 두려움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순간에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으라’는 모세의 말처럼, 우리가 당면한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을 선택해야 합니다.

 

10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1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13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10-14)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 온 것을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은 공황 상태에 빠져 극심한 두려움 가운데 여호와께 울부짖었습니다(10).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며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왜 쓸데없이 자신들을 애굽에서 광야로 끌고 나와 다 죽게 만들었느냐는 것입니다(11). 이것은 앞서 모세와 아론이 바로와의 최초 협상에 실패한 뒤 그것이 오히려 가혹한 중노동이라는 결과로 돌아오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비난했던 말입니다(5:21). 그들은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이렇게 비참하게 죽는 것보다 더 나았을 것이라고 따집니다(12).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과 불순종, 믿음이 없는 습관적 불평은 이미 출애굽 직후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앞으로 그들의 광야 40년 여정 동안 무수히 반복될 불순종과 반항, 그리고 불평을 예고합니다.

 

모세는 침착하게 백성들을 진정시킵니다. 그는 놀라운 믿음의 사람입니다. 모세는 백성을 향해 두려워하지 말고 여호와가 어떤 구원을 베풀어주실지 지켜보라고 소리칩니다(13).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 진술이 모세의 입을 통해 선언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 싸우실 것이다.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이것은 광야 40년 생활과 특히 여호수아서의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기억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전투 수칙입니다. 여리고성 정복은 이 신학적 전투 수칙이 가장 이상적으로 실현된 전투였습니다. 군사들은 그저 하나님의 명령대로 성 주위를 돌기만 하고 마지막에 나팔을 불고 소리를 질렀을 뿐인데 성이 정복되었습니다. 지금 여호와께서는 바로 그렇게 그저 백성이 지켜보는 중에 친히 이집트 군대를 격멸하실 것입니다.


본문에는 우리 신앙 여정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가지 도전과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줍니다. 과거의 유혹에 흔들리지 말고, 눈앞의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우실 것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고난은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기회이며, 하나님의 계획은 항상 완전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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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13-01)


무교절과 초태생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

출애굽기 13장 1-22절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고 전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았으며, 그 구원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구원의 이야기를 우리의 자녀와 후손에게, 이 세상에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 고백입니다.

 

  • 유월절과 무교절 규례의 보완을 위한 추가적 지침들이 주어집니다. 앞서 타국인 중에서 유월절 양을 먹으며 그 예식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위한 기준들이 마련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초태생의 봉헌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더불어 누룩이 허용되지 않는 무교절 규정이 보완됩니다. 유월절-무교절 규례가 완성되어 매듭지어진 직후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여행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집니다.

 

무교절의 금지되는 누룩(1-10)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 우리의 시간, 재능, 물질 중에서 가장 귀한 것,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기본 자세입니다. 이는 단순한 의식이나 습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주인이시며, 우리가 그분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이르시되 2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3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애굽 곧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온 그 날을 기념하여 유교병을 먹지 말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너희를 그 곳에서 인도해 내셨음이니라 4아빕월 이 날에 너희가 나왔으니 5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땅 곧 네게 주시려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시거든 너는 이 달에 이 예식을 지켜 6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고 일곱째 날에는 여호와께 절기를 지키라 7 이레 동안에는 무교병을 먹고 유교병을 네게 보이지 아니하게 하며 네 땅에서 누룩을 네게 보이지 아니하게 하라 8너는 그 날에 네 아들에게 보여 이르기를 이 예식은 내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로 말미암음이라 하고 9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이 네 입에 있게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강하신 손으로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 10해마다 절기가 되면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1-10)

 

여기서 유월절과 관련된 첫 태생 규정이 새롭게 반포되면서 무교절의 누룩 금지가 다시 강하게 강조되니다. 우선 2절에서 첫 태생 봉헌에 대한 원론적인 지침만 선포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첫 번째 태어난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므로 “거룩히 구별하여”(키데쉬) 하나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11절 이하에서 이것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추가됩니다.

이어서 일주일의 무교절 기간에 누룩이 들어간 유교병의 금지가 반복되면서 이것의 역사적 의미가 여기에 덧붙여집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종살이하던 애굽을 탈출한 역사적인 그날을 기념하여 유교병을 먹어선 안 됩니다(3). 여기서 유교병과 거기에 들어간 누룩의 금지는 긴급한 탈출을 위해 누룩으로 발효시킨 떡을 만들어 먹을 시간이 없었기에 급히 무교병을 만들어 먹어야만 했던 상황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들은 아빕월, 즉 제1월에 탈출했습니다. 고대근동 지역에서는 이때가 보리 추수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1월에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려고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이 표현에서 꿀은 야생 벌꿀보다는 과일로 만든 시럽 종류, 즉 과일 꿀로 간주됩니다. 말하자면, 가나안 땅은 목축이 잘되고 농사가 잘되는 땅이라는 뜻입니다. 그 땅을 대표하는 몇몇 종족의 이름이 나열됩니다. 이제 그 모든 종족들이 내쫓기고 그 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 땅을 점유한 후, 그들은 이 유월절무교절 예식을 대대로 지켜야 합니다. 실제로 그들이 광야 40년 동안에는 유월절-무교절을 정상적으로 지키기가 어려웠는데, 이는 그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광야에서는 그 절기가 제한적으로 준수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교절의 7일 동안 무교병을 먹어야 하며 일곱째 날은 ‘여호와의 절기’, 즉 성회로 지켜야 합니다. 그날은 절기 안식일로 지키면서 모든 노동이 금지됩니다. 그러나 일상적 노동 외에 요리와 여행은 가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무교절 첫날도 성회로 지키는데, 여기서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 기간에 집 안 모든 누룩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아마 누룩이 들어간 빵과 음식들의 철저한 제거를 의미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무교절 예식의 기원과 역사적 의의를 자녀들에게 설명해주어야 합니다(8). 나아가 그들은 “이것으로” 그들의 손과 미간의 표를 삼아야 합니다(9). 카수토가 말한 대로, “이것”은 9절 하반절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탈출시킨 사건으로 이해됩니다. 그 역사적 사건은 마치 손과 미간에 부착된 어떤 표식처럼 중요한 ‘기념물’(기억하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즉, 그날은 이스라엘 온 가족과 민족에게 중대한 사건으로 기념되어야 합니다(참고. 신 6:8-9에서는 말씀을 그러한 손과 미간의 표로 삼는다).

 

첫 태생 규례의 제정(11-16)

우리는 우리의 시간, 재능, 물질, 그리고 삶의 가장 소중한 부분을 하나님께 먼저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의 주인임을 인정하고, 그분께 감사와 헌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의 삶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첫 것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11여호와께서 너와 네 조상에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가나안 사람의 땅에 인도하시고 그 땅을 네게 주시거든 12너는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과 네게 있는 가축의 태에서 처음 난 것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13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처음 난 모든 자는 대속할지니라 14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이것이 어찌 됨이냐 하거든 너는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곧 종이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실새 15그 때에 바로가 완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모든 것은 사람의 장자로부터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다 죽이셨으므로 태에서 처음 난 모든 수컷들은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려서 내 아들 중에 모든 처음 난 자를 다 대속하리니 16이것이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가 되리라 이는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 할지니라(11-16)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반드시 준수해야 할 추가적인 규례를 지시받았습니다. 그것은 모든 첫 태생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이 법은 역시 유월절 사건에서 유래되었으며, 초태생 규례는 오경에서 여러 차례 반복됩니다(출 13:11-16; 22:29-30; 34:19-20; 레 27:26-27; 민 18:14-18; 신 15:19-23). 이제 그 땅은 조상에게, 특히, 아브라함에게 맹세했던 대로 그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11). 거기서 그들은 사람과 가축의 모든 첫 태생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봉헌해야 합니다. 여기서 ‘구별하다’의 히브리어는 위 2절의 ‘키데쉬’가 아닌 ‘아바르’의 히필형으로 ‘지나가게 하다’입니다. 이것은 어떤 것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12절의 마지막 “수컷은”은 물론 첫 태생의 수컷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첫 태생의 암컷은 봉헌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단에 올라갈 수 있는 가축은 정결한 짐승인 소, 양과 염소입니다. 따라서 가축이라도 나귀나 노새, 낙타 등은 부정하므로 제외된다. 그럼에도 여기서 특이하게 나귀만 명시되는데 아마 나귀가 대표성을 띠기 때문일 것입니다(참조. 민 18:15). 부정한 짐승으로 취급된 나귀의 첫 태생은 양으로 대속하거나 목을 꺾어서 죽여야 했습니다. 사람의 첫 태생(장자)도 대속해야 했는데, 이 경우 어떤 방식으로 대속해야 하는지는 침묵합니다. 여기서 누락된 장자 대속의 방법은 나중에 민수기 8:5-26 18:15-17에서 보완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의 경우 레위인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들을 대신해서 성전에 봉헌됩니다(민 8장). 레위인의 숫자보다 태어난 장자의 인원이 초과될 경우에는 장자를 위한 속전으로 5세겔이 요구됩니다(민 3:46-50). 그러나 민수기 18:15-17은 레위인을 임명한 이후로부터는 모든 새로 태어난 장자들에 대하여 (한 달 이상)은 5세겔을 바칠 것을 법제화합니다. 이것은 레위기 27:6에서 생후 1개월에서 5세까지의 남자아이(장자가 아님)를 성전에 바치기 위한 서원 값과 동일합니다(인간 서원은 연령에 따라 그 값이 차이가 났다). 웬함(Wenham)에 따르면, 이 시대의 은 1세겔은 대략 노동자의 한 달 임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후대에게 유월절-무교절의 기원과 역사적 의의를 잘 가르칠 것을 명령합니다(14-15). 이때 애굽의 모든 장자 심판이 지닌 의의는 장자의 헌정으로 연결되면서 재해석됩니다. 역설적으로 애굽 장자들의 죽음과 더불어 이스라엘은 생명을 얻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그것을 기념하여 대대로 자신들의 모든 첫 태생을 하나님께 헌정해야 합니다.

한편, 유월절 규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신명기에서 몇 가지가 약간 변경됩니다(신 16장). 가나안 땅의 상황에 맞춘 수정입니다. 첫째, 각 처소에서 양이나 염소를 잡을 수 없고 모두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 곧 성전으로 올라와 잡아야 합니다. 둘째, 따라서 짐승의 피 또한 각자의 처소 문설주가 아닌 성전에서 처리됩니다. 셋째, 성전에서 잡은 양을 각자 유월절을 지킬 장소로 가져가 가족을 포함하여 적정한 식탁 구성원을 짜서 다른 유월절 음식들과 더불어 먹어야 합니다. 넷째, 양/염소뿐 아니라 소도 허용됩니다.

 

광야 길로 떠나는 백성(17-19)

때로는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나 우회로를 만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장 안전하고 최선의 길로 인도하고 계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고, 그분의 인도하심은 항상 선하십니다. 어떤 길을 걷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심을 믿으며 나아가야 합니다.

 

17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18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19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17-19)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애굽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블레셋 사람의 땅을 경유하는 경로로 이끌지 않으시고, 홍해의 광야 길로 이끄셨습니다(17-18). 블레셋 사람의 땅을 지나면 가나안에 일주일이면 도착할 수 있었던 해변 길입니다. 그 길로 갈 경우 남쪽 애굽 군대가, 해안 북쪽에 정착한 막강한 블레셋 세력과의 충돌은 불가피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을 두려워할 것을 미리 아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남동쪽의 해안 길로 우회시키셨습니다. 그들은 “홍해의 광야 길”로 여행했습니다. 여기에서 ‘홍해’를 가리키는 얌 ‘수프’는 문자적으로 ‘갈대 바다’입니다.

또한 모세는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것은 요셉이 그들에게 신신당부한 유언의 성취입니다(창 50:25-26). 요셉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후손들을 찾아올 것이며 그때 자신의 뼈를 고향으로 운반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요셉이 죽은 후 무려 약 350년의 세월이 흘러 이 일이 성취되었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출현(20-22)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고,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마음에 새기고, 우리의 자녀와 후손에게 그 신앙의 유산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세대에서 세대로 전달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불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길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20그들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21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22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20-22)

 

이스라엘 백성은 숙곳을 떠나 광야 끝의 에담에 도착했습니다(20). 에담은 두 번째 정박지입니다. 그들이 숙곳에서 며칠을 마물렀는지, 에담까지 얼마나 기간이 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급히 빠져나와야 하는 상황에서 하룻밤 이상을 머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에담은 아마 이튿날 밤에 도착한 장소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출 13:21). 이 기둥들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둥이었으며, 구름이 불을 감싸서 낮에는 구름만, 밤에는 구름을 덮고 불기둥이 보이는 형태였습니다(출 40:38). 이 불-구름 기둥은 이스라엘 백성의 출발 직후부터 나타나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를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우리는 출애굽기 13장을 통해 하나님께 첫 열매를 드리는 헌신의 삶,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믿음, 그리고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고 전하는 사명을 배웠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무엇보다 하나님을 우선하고, 그분의 길을 신뢰하며, 그분의 구원 역사를 전하는 신실한 믿음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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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12-03)


구속의 밤: 유월절 후 출애굽의 의미

출애굽기 12장 37-51절


 

오랜 고통과 압박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구속하신 순간,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함과 구원의 은혜를 온전히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은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뢰와 경외심을 심어주었으며, 새로운 시작을 위한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이루어지는 순간, 우리는 그분의 신실하심을 믿고, 감사하며, 새로운 신앙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 이스라엘 백성은 430년의 애굽 생활을 청산하고 드디어 라암셋을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합니다. 인구 규모는 장정만 60만 명으로 계수되어 유아와 여성을 포함하면 최소 200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이 숫자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이 다양하나 이후에도 모세의 기록은 일관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재앙이 임한 날은 유월절로 기념되는데 여기서 추가적인 유월절 규례가 덧붙여집니다. 그것은 외국인의 경우 유월절 규례를 어떻게 준수할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애굽에서 430년만에 해방(37-42)

하나님의 약속이 먼 미래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다림 속에서도 신실하게 일하시며, 그분의 계획은 결코 지체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때가 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며, 그분의 계획은 완벽하게 이루어집니다.

 

37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38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39그들이 애굽으로부터 가지고 나온 발교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웠으니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쫓겨나므로 지체할 수 없었음이며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였음이었더라 40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41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42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37-42)

 

이스라엘 백성은 드디어 속박의 땅 애굽을 떠납니다. 애굽의 모든 첫 태생이 하룻밤 사이에 모두 죽음을 당하던 날 바로와 애굽 백성은 그들을 급히 내쫓았습니다(12:31-33). 바로는 그날 밤 즉시 모세와 아론을 불러 당장 나가달라 했지만, 그들이 14일 당일 밤에 출발한 것은 아닙니다. 민수기 33:3은 그들이 1월 15일, 곧 유월절 다음 날 출발했다고 보고합니다. 이것이 타당한 이유는 아침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이웃들에게 찾아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물품을 구하여 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라암셋을 출발한 뒤 첫 번째 야영지인 숙곳에 도착했습니다. 후대에 붙은 히브리식 지명인 숙곳(수코트)은 아마 애굽의 ‘테쿠’인데, 숙곳은 ‘초막들’, ‘움막들’이란 뜻을 지닙니다. 야곱이 지명을 붙인 동일한 이름의 장소가 얍복강 근처에 소재합니다(창 33:17). 그들의 첫 번째 정박지 이름을 후대에 ‘초막골’로 부른 이유는 그들이 그곳에 도착해서 최초로 형편없는 피난민 임시천막을 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후 이 생활은 40년간 계속됩니다. 숙곳은 나일강 델타 지역의 동쪽인데 라암셋에서 남동쪽에 위치합니다. 그곳은 오늘날 팀사 호수와 비터 호수 사이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Sarma; Hamilton). 오늘날 팀사는 규모가 작고 비터는 대단히 큰데 과거 이러한 호수들은 홍해와 연결된 바다였을 것입니다.

 

출발한 인원은 유아를(아마 여성도) 제외하고 장정만(문자적으로 ‘보병’) 60만 명이었습니다. 이러한 인구 규모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합리적이지 않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상세한 논의는 생략하나 결론적으로 이 엄청나게 불어난 인구는 아브라함에게 맹세했던 약속의 성취를 구체적인 수치로 보여줍니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따질 문제가 아닌 신학적으로 수용해야 할 숫자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수많은 잡족”과 더불어, 또한 심히 많은 가축을 몰며 애굽을 떠났습니다(38). 잡족, 즉 ‘혼합된 무리’의 정체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방인 무리가 분명합니다. 또한 “심히 많은 가축”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이 목축업에 종사한 관계로 엄청난 가축을 함께 끌고 나왔음을 말해줍니다. 그들은 애굽을 급히 떠날 때 여행길에서 먹을 반죽을 미리 준비해 그릇에 담아두었습니다. 그것은 “발교되지 못한 반죽”으로, 앞서 말한대로 누룩을 넣어두었는데, 아직 발효가 되지 않았다기보다는(Cassuto에 반대하여) 누룩을 처음부터 넣지 않은 반죽이라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그들에게는 어떠한 누룩도 허용되지 않아 무교병만을 먹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긴급한 탈출로 인해 먹을 만한 별다른 양식을 준비할 시간도 없었기에 여행 중에 즉시 먹을 수 있도록 미리 반죽을 준비해 출발했습니다(39).

‘잡족’의 합류는 추가로 생각해볼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내포합니다. 출애굽의 대장정에 이방인 무리가 대거 합류했다는 것은 이후에도 증거됩니다. 레위기 24:10-14에서는 어머니가 이스라엘 여인이고 아버지가 애굽 사람인 어떤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고 저주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민수기 11:4에서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며’ 고기를 먹게 해달라고 불평을 쏟아냅니다. 이렇듯 개종과 더불어 이스라엘 공동체에 합류한 잡족들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으나 그나스(에돔 족의 하나) 출신인 갈렙과 같은 어떤 사람들은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큰 활약을 했다는 사실도 확인됩니다. 잡족의 합류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처음부터 ‘열린 공동체’로 출발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궁극에는 열방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미래 계획에 대한 암시입니다.

 

40절은 이스라엘의 애굽 거주 기간을 430년으로 보고합니다. 그러나 430년이 창세기에서는 400년으로 언급되고(창 12:40), 신약의 사도행전에서는 450년입니다(행 13:19). 가장 무난하게 아마 430년인데 나머지는 어림수로 추정됩니다. 창세기는 내려서 400년, 사도행전에서는 올려서 450년으로 계산한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은 430년의 이방 땅에서의 생활을 끝내는 이 특별한 밤을 대대로 기념일로 지켜야 합니다(42). 하나님께서는 그날 밤 밤새 이스라엘 백성 곁에서 그들을 지켜주셨습니다. 개역개정의 번역에는 아쉽게도 이것이 반영되어 있지 않으나, 마찬가지로 그들은 그 일을 기억하면서 밤을 지새우며 그날을 기념해야 할 것입니다.

 

유월절 규례의 추가: 외국인의 경우(43-51)

우리 신앙 생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은혜는 단순히 형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구속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그 은혜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구속의 은혜를 받았음을 감사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구속의 상징인 유월절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기억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43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유월절 규례는 이러하니라 이방 사람은 먹지 못할 것이나 44각 사람이 돈으로 산 종은 할례를 받은 후에 먹을 것이며 45거류인과 타국 품꾼은 먹지 못하리라 46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 47이스라엘 회중이 다 이것을 지킬지니라 48너희와 함께 거류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 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49본토인에게나 너희 중에 거류하는 이방인에게 이 법이 동일하니라 하셨으므로 50온 이스라엘 자손이 이와 같이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으며 51바로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무리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더라(43-51)

 

본문은 유월절 규례에 대한 지침을 다룹니다. 이 규례는 이방인이나 낯선 자가 유월절에 참여할 수 없으며, 오직 할례 받은 자만이 함께할 수 있다고 명시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날, 유월절 규례를 철저히 지키며 대대로 전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1) 외국인 종에게 적용되는 규칙(43-47)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이 유월절 규례의 추가 사항을 덧붙이시는데, 특히 타국인들과 관련하여 준수되어야 할 유월절 지침들입니다. 앞서 ‘잡족’의 합류는 타국인의 유월절 준수 문제를 필연적으로 발생시켰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 즉 타국인(벤 네카르)은 원칙적으로 유월절에 참여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3). 그러나 타국인의 경우라도 유월절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타국인 종과 거류민입니다. 44절의 ‘돈을 주고 산 종’은 외국 인종을 가리킵니다. 그 종이 동포 이스라엘인이라면, 이런 조건은 전혀 불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외국인 좋은 사실상 가족의 일원으로 합류했으며 하루 품삯의 일꾼과는 다릅니다. 이들은 할례를 받은 후 유월절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타국인 장기 체류자처럼 그 종의 선택 사항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48). 그러나 종이 아닌 임시 방문객(토샤브, “거류인”)이나 임시로 고용되어 삯을 받는 품꾼(사키르)은 단지 잠시 머물다 가는 타국인이므로 유월절 준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45).

만일 그 종들이 유월절 음식을 먹는다면 한 가족과 다름없으므로 “한 집에서” 함께 먹어야 하며 고기는 집 밖으로 반출해선 안 됩니다. 나아가 유월절 양/염소의 뼈를 꺾어서도 안 됩니다. 왜 뼈를 부러트리지 말아야 하는지 어떤 곳에서도 이유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어쩌면 고기를 통으로 잘라 밖으로 반출하거나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지 말라는 취지인지 모릅니다. 어쨌든 온 이스라엘 회중은 이 원칙을 엄중히 지켜야 합니다. 덧붙여 뼈를 꺾지 말라는 명령은 중요하게도 시편 34:20과 더불어 뼈가 꺾이지 않고 죽으신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으심으로 연결됩니다(요 19:36).

 

(2) 거류민에게 적용되는 규칙(48-51)

 

마지막으로 외국인 중에 종이 아닌 장기 체류자, 즉 ‘거류민’의 유월절 준수 문제를 규정합니다. 거류민(게르)은 외국인으로서 전쟁과 기근, 또는 개인 사정으로 국경을 넘어 이스라엘 땅으로 건너와 그 땅에서 자리를 잡고 함께 거주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와 달리 ‘에즈라흐’는 “본토인”(49)을 뜻합니다. 오늘날의 신분과 비교하자면, 이스라엘 본토인이 시민권자라면 거류민은 영주권자와 비슷한 신분입니다. ‘거류민’, ‘나그네’는 할례를 받으면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져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는 반면, 단순 방문객인 외국인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따라서 유월절 규례는 본토인에게나 거류민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었습니다(49). 온 이스라엘 백성이 이 유월절 지침을 명령하신 그대로 준수했습니다(50). 그날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그 ‘부대별로’(쯔바오트) 애굽으로부터 출애굽의 대장정을 떠난 날입니다(51).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순간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속하시고, 그들을 새로운 여정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과 그분의 구속의 의미를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신뢰하며 기다리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규례를 기억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며, 구속의 은혜를 기념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도 약속하신 대로 역사하실 것을 믿으며, 그분의 신실하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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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12-03)


구속의 밤: 유월절 후 출애굽의 의미

출애굽기 12장 37-51절


 

오랜 고통과 압박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구속하신 순간,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함과 구원의 은혜를 온전히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은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뢰와 경외심을 심어주었으며, 새로운 시작을 위한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이루어지는 순간, 우리는 그분의 신실하심을 믿고, 감사하며, 새로운 신앙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 이스라엘 백성은 430년의 애굽 생활을 청산하고 드디어 라암셋을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합니다. 인구 규모는 장정만 60만 명으로 계수되어 유아와 여성을 포함하면 최소 200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이 숫자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이 다양하나 이후에도 모세의 기록은 일관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재앙이 임한 날은 유월절로 기념되는데 여기서 추가적인 유월절 규례가 덧붙여집니다. 그것은 외국인의 경우 유월절 규례를 어떻게 준수할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애굽에서 430년만에 해방(37-42)

하나님의 약속이 먼 미래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다림 속에서도 신실하게 일하시며, 그분의 계획은 결코 지체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때가 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며, 그분의 계획은 완벽하게 이루어집니다.

 

37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38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39그들이 애굽으로부터 가지고 나온 발교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웠으니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쫓겨나므로 지체할 수 없었음이며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였음이었더라 40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41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42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37-42)

 

이스라엘 백성은 드디어 속박의 땅 애굽을 떠납니다. 애굽의 모든 첫 태생이 하룻밤 사이에 모두 죽음을 당하던 날 바로와 애굽 백성은 그들을 급히 내쫓았습니다(12:31-33). 바로는 그날 밤 즉시 모세와 아론을 불러 당장 나가달라 했지만, 그들이 14일 당일 밤에 출발한 것은 아닙니다. 민수기 33:3은 그들이 1월 15일, 곧 유월절 다음 날 출발했다고 보고합니다. 이것이 타당한 이유는 아침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이웃들에게 찾아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물품을 구하여 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라암셋을 출발한 뒤 첫 번째 야영지인 숙곳에 도착했습니다. 후대에 붙은 히브리식 지명인 숙곳(수코트)은 아마 애굽의 ‘테쿠’인데, 숙곳은 ‘초막들’, ‘움막들’이란 뜻을 지닙니다. 야곱이 지명을 붙인 동일한 이름의 장소가 얍복강 근처에 소재합니다(창 33:17). 그들의 첫 번째 정박지 이름을 후대에 ‘초막골’로 부른 이유는 그들이 그곳에 도착해서 최초로 형편없는 피난민 임시천막을 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후 이 생활은 40년간 계속됩니다. 숙곳은 나일강 델타 지역의 동쪽인데 라암셋에서 남동쪽에 위치합니다. 그곳은 오늘날 팀사 호수와 비터 호수 사이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Sarma; Hamilton). 오늘날 팀사는 규모가 작고 비터는 대단히 큰데 과거 이러한 호수들은 홍해와 연결된 바다였을 것입니다.

 

출발한 인원은 유아를(아마 여성도) 제외하고 장정만(문자적으로 ‘보병’) 60만 명이었습니다. 이러한 인구 규모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합리적이지 않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상세한 논의는 생략하나 결론적으로 이 엄청나게 불어난 인구는 아브라함에게 맹세했던 약속의 성취를 구체적인 수치로 보여줍니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따질 문제가 아닌 신학적으로 수용해야 할 숫자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수많은 잡족”과 더불어, 또한 심히 많은 가축을 몰며 애굽을 떠났습니다(38). 잡족, 즉 ‘혼합된 무리’의 정체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방인 무리가 분명합니다. 또한 “심히 많은 가축”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이 목축업에 종사한 관계로 엄청난 가축을 함께 끌고 나왔음을 말해줍니다. 그들은 애굽을 급히 떠날 때 여행길에서 먹을 반죽을 미리 준비해 그릇에 담아두었습니다. 그것은 “발교되지 못한 반죽”으로, 앞서 말한대로 누룩을 넣어두었는데, 아직 발효가 되지 않았다기보다는(Cassuto에 반대하여) 누룩을 처음부터 넣지 않은 반죽이라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그들에게는 어떠한 누룩도 허용되지 않아 무교병만을 먹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긴급한 탈출로 인해 먹을 만한 별다른 양식을 준비할 시간도 없었기에 여행 중에 즉시 먹을 수 있도록 미리 반죽을 준비해 출발했습니다(39).

‘잡족’의 합류는 추가로 생각해볼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내포합니다. 출애굽의 대장정에 이방인 무리가 대거 합류했다는 것은 이후에도 증거됩니다. 레위기 24:10-14에서는 어머니가 이스라엘 여인이고 아버지가 애굽 사람인 어떤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고 저주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민수기 11:4에서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며’ 고기를 먹게 해달라고 불평을 쏟아냅니다. 이렇듯 개종과 더불어 이스라엘 공동체에 합류한 잡족들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으나 그나스(에돔 족의 하나) 출신인 갈렙과 같은 어떤 사람들은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큰 활약을 했다는 사실도 확인됩니다. 잡족의 합류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처음부터 ‘열린 공동체’로 출발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궁극에는 열방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미래 계획에 대한 암시입니다.

 

40절은 이스라엘의 애굽 거주 기간을 430년으로 보고합니다. 그러나 430년이 창세기에서는 400년으로 언급되고(창 12:40), 신약의 사도행전에서는 450년입니다(행 13:19). 가장 무난하게 아마 430년인데 나머지는 어림수로 추정됩니다. 창세기는 내려서 400년, 사도행전에서는 올려서 450년으로 계산한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은 430년의 이방 땅에서의 생활을 끝내는 이 특별한 밤을 대대로 기념일로 지켜야 합니다(42). 하나님께서는 그날 밤 밤새 이스라엘 백성 곁에서 그들을 지켜주셨습니다. 개역개정의 번역에는 아쉽게도 이것이 반영되어 있지 않으나, 마찬가지로 그들은 그 일을 기억하면서 밤을 지새우며 그날을 기념해야 할 것입니다.

 

유월절 규례의 추가: 외국인의 경우(43-51)

우리 신앙 생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은혜는 단순히 형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구속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그 은혜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구속의 은혜를 받았음을 감사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구속의 상징인 유월절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기억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43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유월절 규례는 이러하니라 이방 사람은 먹지 못할 것이나 44각 사람이 돈으로 산 종은 할례를 받은 후에 먹을 것이며 45거류인과 타국 품꾼은 먹지 못하리라 46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 47이스라엘 회중이 다 이것을 지킬지니라 48너희와 함께 거류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 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49본토인에게나 너희 중에 거류하는 이방인에게 이 법이 동일하니라 하셨으므로 50온 이스라엘 자손이 이와 같이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으며 51바로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무리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더라(43-51)

 

본문은 유월절 규례에 대한 지침을 다룹니다. 이 규례는 이방인이나 낯선 자가 유월절에 참여할 수 없으며, 오직 할례 받은 자만이 함께할 수 있다고 명시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날, 유월절 규례를 철저히 지키며 대대로 전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1) 외국인 종에게 적용되는 규칙(43-47)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이 유월절 규례의 추가 사항을 덧붙이시는데, 특히 타국인들과 관련하여 준수되어야 할 유월절 지침들입니다. 앞서 ‘잡족’의 합류는 타국인의 유월절 준수 문제를 필연적으로 발생시켰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 즉 타국인(벤 네카르)은 원칙적으로 유월절에 참여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3). 그러나 타국인의 경우라도 유월절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타국인 종과 거류민입니다. 44절의 ‘돈을 주고 산 종’은 외국 인종을 가리킵니다. 그 종이 동포 이스라엘인이라면, 이런 조건은 전혀 불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외국인 좋은 사실상 가족의 일원으로 합류했으며 하루 품삯의 일꾼과는 다릅니다. 이들은 할례를 받은 후 유월절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타국인 장기 체류자처럼 그 종의 선택 사항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48). 그러나 종이 아닌 임시 방문객(토샤브, “거류인”)이나 임시로 고용되어 삯을 받는 품꾼(사키르)은 단지 잠시 머물다 가는 타국인이므로 유월절 준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45).

만일 그 종들이 유월절 음식을 먹는다면 한 가족과 다름없으므로 “한 집에서” 함께 먹어야 하며 고기는 집 밖으로 반출해선 안 됩니다. 나아가 유월절 양/염소의 뼈를 꺾어서도 안 됩니다. 왜 뼈를 부러트리지 말아야 하는지 어떤 곳에서도 이유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어쩌면 고기를 통으로 잘라 밖으로 반출하거나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지 말라는 취지인지 모릅니다. 어쨌든 온 이스라엘 회중은 이 원칙을 엄중히 지켜야 합니다. 덧붙여 뼈를 꺾지 말라는 명령은 중요하게도 시편 34:20과 더불어 뼈가 꺾이지 않고 죽으신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으심으로 연결됩니다(요 19:36).

 

(2) 거류민에게 적용되는 규칙(48-51)

 

마지막으로 외국인 중에 종이 아닌 장기 체류자, 즉 ‘거류민’의 유월절 준수 문제를 규정합니다. 거류민(게르)은 외국인으로서 전쟁과 기근, 또는 개인 사정으로 국경을 넘어 이스라엘 땅으로 건너와 그 땅에서 자리를 잡고 함께 거주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와 달리 ‘에즈라흐’는 “본토인”(49)을 뜻합니다. 오늘날의 신분과 비교하자면, 이스라엘 본토인이 시민권자라면 거류민은 영주권자와 비슷한 신분입니다. ‘거류민’, ‘나그네’는 할례를 받으면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져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는 반면, 단순 방문객인 외국인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따라서 유월절 규례는 본토인에게나 거류민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었습니다(49). 온 이스라엘 백성이 이 유월절 지침을 명령하신 그대로 준수했습니다(50). 그날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그 ‘부대별로’(쯔바오트) 애굽으로부터 출애굽의 대장정을 떠난 날입니다(51).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순간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속하시고, 그들을 새로운 여정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과 그분의 구속의 의미를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신뢰하며 기다리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규례를 기억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며, 구속의 은혜를 기념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도 약속하신 대로 역사하실 것을 믿으며, 그분의 신실하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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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12-02)


유월절의 순종과 구원

출애굽기 12장 21-36절


 

영화나 드라마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클라이막스(climax)라고 합니다. 본문을 짧은 내용 같지만, 출애굽기의 최고의 클라이막스입니다. 출애굽하는 과정에 최고로 클라미막스가 본문입니다.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피를 바름으로써 재앙에서 구원받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 생명과 직결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 구원의 은혜, 그리고 믿음의 실천을 보여줍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순종의 중요성, 구원의 확신,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 모세는 즉시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을 소집하여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유월절 예식을 준비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구체적이고 장황한 유월절 예식이 단순하고 간결하게 전달되는데 이미 독자들은 다 알고 있기에 문학적 의도로 대거 생략되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경고대로 애굽의 모든 장자와 첫 태생이 죽었고 모세의 지시를 실천하여 피를 문 주변에 발랐던 이스라엘 백성은 재앙을 피했습니다. 결국 바로는 항복을 선언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보냅니다.

 

유월절 재앙을 대비하는 백성(21-28)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체하거나 변명하지 않고,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 생활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순종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체적인 지침을 주실 때, 그에 대한 순종을 통해 보호와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모세가 장로들에게 유월절 양을 준비하라고 지시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즉각적으로 순종했습니다.

 

21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22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23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24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25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26이 후에 너희의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27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28이스라엘 자손이 물러가서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21-28)

 

모세는 이스라엘의 장로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마지막 재앙에 대비하고 애굽을 떠날 채비를 갖추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전달받은 내용을 그대로 장로들에게 알려 백성들이 실천에 옮기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가족별로 어린 양/염소를 골라서 잡아야 합니다. 이때 앞선 지침대로 만일 양 한 마리를 먹기에 가족의 숫자가 적으면 비슷한 규모의 가정과 한 조를 이룰 수 있습니다. 도살한 양의 피를 그릇에 담은 뒤, 우슬초 다발을 엮어서 묻힌 피를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릅니다. 성경에 나오는 우슬초는 고대근동 지역에서 서식했던 박하과의 식물입니다. 이것은 향기가 강하고 살균력을 지녔으며 약용으로도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의 줄기를 엮어 물이나 피에 담갔다가 특정 물건에 뿌리는 방식으로 썼습니다. 피는 그릇에 담아 우슬초로 문 사방에 묻힌 것으로 보이며 다만 피를 바른 뒤 남은 피는 나중에 모두 땅에 묻었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그날 밤 가족들은 모두 집안에 머문 채 아침까지밖에 나가서는 안 됩니다. 역시 생략되어 있지만, 그들은 급히 떠날 채비를 갖춘 뒤 그날 밤 유월절 고기와 무교병, 쓴 나물을 먹어야 합니다. 만일 누군가 밖에 나가면 그는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문지방에 피가 표시된 가정의 밖으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마치 방주를 타지 않은 사람과 같으며, 여리고 성에서 창문에 붉은 줄이 표시된 라합의 집 밖에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온 땅을 마지막 재앙으로 때리며 지나가실 것입니다. 이때 죽음의 심판자인 ‘파괴자’가 각 사람의 집에 들어가 장자를 타격할 것인데, 피가 묻어 있는 문을 넘어오진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멸하는 자’, 즉 ‘파괴자’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여호와의 사자가 파괴자로 활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도 여호와와 그 파괴자(여호와의 사자)의 역할은 구분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여호와와 여호와의 사자의 이위일체적 특징, 즉 일체성과 구별성의 동시적 발생은 구약 여기저기에서 발견되는 특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유월절 규례로 삼아 자손 대대로 영원히 지켜야 합니다. 특히 그들은 이제 애굽에서 해방되어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인데, 그 땅에서 이 유월절 예식의 준수는 계속되어야 합니다(25). 만일 그들의 자녀가 이 유월절 예식에 대해 묻는다면, 그들은 이 예식의 기원과 취지, 역사적 의미를 설명해주어야 합니다(27). 요지는 이스라엘 조상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유월절, 바로 그 날에 하나님께서 애굽 온 땅에 가장 무서운 재앙을 내리셨는데, 이스라엘 자손의 집들은 모두 ‘넘어가 시어’ 그들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말을 전해들은 백성은 이제 구원과 해방의 시간이 임박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이미 아홉 번에 걸친 생생한 하나님의 심판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깊은 감사의 표시로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모세가 내린 지침대로 행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습니다(28).

 

애굽의 모든 첫 태생이 죽다(29-30)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지만, 결국 죄에 대해 공의로운 심판을 내리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때, 영적 보호와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에서 순종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일깨워줍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29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30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29-30)

 

밤이 되자 예고된 마지막 재앙이 실제로 임했습니다. 현실화한 엄청난 재앙에 대한 묘사는 간략하지만, 그것이 경고대로 엄중히 실행되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애굽의 모든 처음 난 것이 다 죽었습니다. 최고 권력자 바로의 장자로부터 가장 비천한 옥중 죄인의 장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가정에 비극적인 재앙이 임했습니다. 여기서는 총칭어법(merism)의 표현이 앞서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의 여종까지”와 약간 다르게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입니다. 둘 다 장자 심판의 철저성과 포괄성에 대한 표현입니다. 물론 그들 가축의 첫 태생도 모두 돌연히 쓰러지 죽었습니다. 갑자기 한밤중에 온 나라가 초상집이 되었습니다. 바로와 온 애굽 백성은 취집 중에 일어났을 것입니다. 근엄한 제국의 왕이 궁중 관례를 벗어나 한밤중에 침대에서 일어나야만 했습니다.

 

바로가 굴복하다(31-36)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인간적인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순종할 때, 그분의 계획이 우리의 삶에서 현실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그분의 약속을 기다리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약속을 성취하시며, 우리의 순종을 통해 그 계획이 이루어집니다. 신뢰와 순종이 하나님의 역사를 실현하는 열쇠입니다.

 

31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에서 떠나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32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 양과 너희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며 33애굽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도다 하고 그 백성을 재촉하여 그 땅에서 속히 내보내려 하므로 34그 백성이 발교되지 못한 반죽 담은 그릇을 옷에 싸서 어깨에 메니라 35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36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31-36)

 

바로는 한밤중에 모세와 아론을 불렀습니다. 이것은 그의 마음이 얼마나 다급했는지 보여줍니다. 바로는 급히 모세와 아론에게 신하를 보냈으며 신하들은 그들을 찾아가 엎드려 바로를 잘 설득해서 애굽을 떠나달라고 읍소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11:8에서 모세가 했던 말은 결코 허튼 소리가 아니었음이 증명됩니다. 그는 앞서 ‘다시는 너를 볼 일이 없을 것이다. 나를 본다면 그날 너는 죽을 것이다’라고 최후통첩을 보낸 바 있습니다(10:28). 이제 대제국의 왕이 자존심을 굽혀 자신이 했던 말을 번복합니다. 살해 협박을 하며 내쫓았던 모세와 아론을 어쩔 수 없이 재소환하여 결국 항복을 선언합니다. 그는 모세와 아론을 향해 ‘일어나 떠나라. 가서 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재촉합니다(31). 더 이상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습니다. 바로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가지고 나가라고 말합니다(32). 이것은 더 이상 허용이 아닌 부탁입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떠나는 그들에게 자신을 위해 축복 기도를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가 구한 축복은 애굽의 비극을 끝내달라는 요청일 것입니다. 앞서 바로는 다급한 마음으로 몇 차례 자신을 위한 기도를 부탁한 바 있었습니다(8:8,28; 9:28; 10:17). 그때마다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재앙이 멈추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축복을 빌어달라는 요구에 모세는 응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관찰됩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족장 야곱이 애굽의 왕을 처음 만났을 때 그를 축복했습니다(창 47:7,10). 이제 430년의 세월이 지나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애굽 왕을 떠날 때, 그는 축복 기도를 요청합니다. 바로를 위한 축복기도로 시작해서 바로에 의한 축복 기도의 요청으로 애굽에서의 역사가 마무리됩니다. 다만 마지막으로 바로가 요구한 축복 기도에 모세는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의미하는 신학적 의미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그를 통해 받을 열국의 복이 여기에 암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Cassuto).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읍소하며 애굽을 속히 떠나달라고 부탁합니다. ‘재촉하다’라는 동사 ‘하자크’의 히필형인데 이것은 물리적 압박을 가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애굽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을 강제로 떠밀어 내보냅니다. 흥미롭게도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면서 ‘억지로 잡아두었을’ 때 이 동사의 히필 어간이 사용됩니다(출 9;2). 이제 애굽 백성이 ‘억지로’, ‘강제로’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발효되지 않은 반죽이 담긴 그릇을 옷에 싼 뒤 어깨에 멨습니다. 이것은 효모(yeast)를 넣은 반죽이 발효가 시작되기 전에 반죽 그릇을 옷에 쌌다기보다는, NIV 번역처럼 효모를 집어넣지 않은 반죽의 상태를 뜻할 것입니다. 그들은 유월절 무교절 기간에 일체의 효모(누룩)를 제거하고 무교병만 먹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긴급한 여행 중에 먹어야 하기에 그들은 이것을 미리 준비해야 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지시대로 애굽 사람을 찾아가 온금 패물과 의복들을 구하여 취했습니다(3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인의 은혜를 입게 하셨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것은 애굽 백성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백성에게 가서 금은 패물과 옷을 요구하자 엄청난 재앙을 겪은 후 이미 기세가 꺾인 그들은 그것을 순순히 내놓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상냥한 친절함은 아닙니다. 전쟁에서 승전국이 전리품을 약탈할 때 사용되는 동사 나짤(일)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이스라엘은 승전국의 자격으로 물품을 취했고, 다른 한편으로 중노동에 시달리며 오랫동안 받지 못한 밀린 품삯을 정당하게 받아 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순종, 구원의 확신,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는 그분의 보호와 축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를 구원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게 하는 은혜의 상징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 구원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세상에 전하는 사명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하며, 그분의 보호하심을 경험하고, 구원의 은혜를 세상에 전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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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12-01)

 


유월절과 무교절에 대한 규례

출애굽기 12장 1-20절


 

하나님께서는 존재하지 않으니 엘리는 방법 중 하나는 지금까지만은 항상 헤아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믿는 것을 교회로 삼는 일, 유일하게 날, 특별한 분을 위해 날, 나를 위해, 응답하지 않을 것을 기록해 둡니다. 매일 하나님을 보며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수 있지만, 이 방법을 통해 하나님의 큰 사랑을 잊을 수 있습니다.

 

  • 본문에는 유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명절인 유월절이 제정됩니다. 이 명절은 그들의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날입니다.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이 애굽에 국가적 장례를 발생시킨 그날, 이스라엘 백성은 해방되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의 라암셋을 떠난 날은 유월절 다음날인 1월 15일, 즉 무교절 첫날입니다(민 33:3). 유월절(1월 14일)과 그 후 일주일간의 무교절(1월 15-21일)까지 총 8일간 이 명절을 지킵니다.

 

유월절 규례(1-11)

구원의 조건을 도덕적이나 윤리적이 삶이나 어떤 종교적인 노력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값이 주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소개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주신 것입니다.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7)라고 하신 것처럼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믿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1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2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3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취할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4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사람 수를 따라서 하나를 취하며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에 따라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 5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이 달 열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8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불사르라 11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1-11)

 

국가 이스라엘의 기원이 될 역사적 해방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명절인 유월절을 제정하십니다. 우선 출애굽을 하게 될 그 달을 첫 달, 즉 1월로 삼아야 합니다. 이후 오경에서는 이 해를 원년으로 삼아 햇수를 셉니다(역사서에서는 왕하 6:1에 한 차례). 또한 모든 날짜는 유대력 음력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1월 10일에 각자 식구별로 어린 양이나 염소를 잡아야 합니다(3절). ‘양’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세’는 양과 염소를 포괄하는 단어입니다. 5절은 유월절 양과 염소를 1년생 수컷으로 규정합니다. 만일 식구들 숫자가 적어 양/염소 한 마리의 분량이 너무 많다면, 다른 가족과 함께 먹을 수 있습니다(4). 신약 시대 유월절 관행의 기록에 따르면, 보통 열 명 정도의 사람들이 유월절 만찬을 먹기 위해 미리 숫자를 맞췄다고 합니다(J. Jeremias). 준비된 양/염소는 1년생의 어린 것으로서 흠이 없어야 합니다. 무흠한 짐승의 조건은 레위기 제사법에서 모든 희생제물에 요구되는 자격이기도 합니다.

 

1월 10일에 흠 없는 것으로 미리 골라 준비해놓은 양/염소를 14일까지 간직했다가 그날 ‘해질 때’, 즉 저녁이 되면 그것을 잡습니다(6). 아마 제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목을 땄을 것입니다. 그 피를 집 좌우 문설주와 윗 문지방(인방)에 바릅니다(7). 그날 밤 각 가족들은 자신의 집 안에서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먹습니다. 이때 무교병과 쓴 나물을 함께 먹어야 합니다. 아마 고기를 구워 먹고 무교병을 먹는 이유는 시간이 급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효모를 넣어 밀가루 반죽을 발효한 뒤 유교병을 만드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고 고기를 삶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쓴 나물을 먹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서 당한 고난을 생각하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되곤 합니다. 덧붙여 무교병 또한 급히 만들어야 하고 그것은 딱딱하고 맛이 없기 때문에 유월절 무교병에는 ‘고난의 떡’(신 16:3)의 의미가 부여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평상시에 무교병은 유교병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 음식의 하나로서 흔하게 많이 만들어 먹었습니다.

고기를 날 것으로 먹거나 삶아서 먹어선 안 되고 구워 먹어야 하며 똥, 불순물, 가죽을 제외하고는 살코기는 물론 머리, 다리, 내장까지 모든 부위를 다 먹어야 합니다(9). 만일 다 먹지 못하고 고기가 남았다면, 아침에 그 남은 것을 불살라 없애야 합니다(10). 그들은 이 유월절 음식을 먹을 때 미리 여행을 떠날 복장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11). 허리에 띠를 두르고 신발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그것을 먹어야 합니다. 지팡이(마켈)는 도보로 먼 곳을 다닐 때 사용하는데(창 32:10; 민 22:27), 같은 용도의 막대기를 ‘마테’로도 칭했던 것으로 보입니다(창 38:18; 삼상 14:27). 이렇듯 여행 복장을 갖추고 진행된 그 밤의 예식은 마지막 재앙이 임한 그날의 긴박성을 잘 말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날을 재앙이 ‘지나갔다’는 뜻을 담은 ‘유월절’(페사흐)로 칭하셨습니다.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 출애굽기의 유월절 규례는 신명기 유월절 규례에 가서(신 16장) 약간 변경됩니다. 거기서는 고기를 삶아도 되고 양/염소뿐 아니라 소도 잡을 수 있으며, 도살은 집이 아닌 성소에 올라와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피를 문설주에 바를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변경의 이유 또한 뒤에서 논의할 것입니다.

 

유월절에 임할 재앙(12-14)

유월절 사건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위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직 우리는 살아남은 구원을 받은 성도들처럼. 이 사실이 항상 기억되며,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고 그 은혜를 전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12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13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14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12-14)

 

하나님께서는 그날 밤 무슨 일이 닥칠지 미리 말씀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대비케 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이 직접 애굽 땅에 내려오시어 그 땅을 두루 다니실 것입니다. 동시에 23절에서는 ‘멸하는 자’, 즉 파괴자를 애굽 사람 각각의 집으로 보내신다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이 파괴자는 여호와의 사자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 전역을 두루 다니며 애굽의 모든 첫 태생들을 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서 말한 대로, 여기에는 사람뿐 아니라 가축도 포함됩니다. 여기서 애굽 신들을 심판한다는 표현이 처음 등장합니다(또한 민 33:4).

어떤 학자들은 열 번째 심판에서만 애굽 신들의 심판이 언급되므로 다른 재앙들을 신들의 심판과 연관 짓는 것에 부정적이거나 신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열 번째 재앙에서 비로소 하나님께서 앞선 아홉 가지 재앙의 성격을 알려주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의 장자는 바로와 더불어 신격화되어 있었기에 그의 죽음은 또 하나의 애굽 거물급 신의 패배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애굽 땅을 여호와께서 휩쓸며 심판하실 때, 유월절 양의 피를 바른 집은 그 피가 ‘표적’, 즉 ‘표시’(오트)가 되어 재앙을 모면할 것입니다(12). 여기서는 피가 단순히 어떤 표시로서 기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서 각자 집의 문지방과 문설주에 피를 바르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피를 보시고 그 집은 넘어가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가족에게는 아무런 재앙도 임하지 않을 것입니다(13). ‘넘어가다’라는 동사에서 유월절의 이름이 유래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유월절을 기념일로 삼아 여호와의 절기(명절)로 지켜야 합니다(14). 물론 애굽의 심판과 언약 백성의 해방을 기념하기 위한 날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전수되어야 합니다.

 

무교절의 제정(15-20)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께서 매우 역사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구원의 역사를 새기며 감사하는 것을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역사를 잊지 않고 존재하며 감사하는 것은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 삶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감사 뜻을 더 잘 이해하고, 그와 그 관계를 더욱 더 할 수 있습니다.

 

15너희는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 16너희에게 첫날에도 성회요 일곱째 날에도 성회가 되리니 너희는 이 두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각자의 먹을 것만 갖출 것이니라 17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영원한 규례로 삼아 대대로 이 날을 지킬지니라 18첫째 달 그 달 열나흗날 저녁부터 이십일일 저녁까지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19이레 동안은 누룩이 너희 집에서 발견되지 아니하도록 하라 무릇 유교물을 먹는 자는 타국인이든지 본국에서 난 자든지를 막론하고 이스라엘 회중에서 끊어지리니 20너희는 아무 유교물이든지 먹지 말고 너희 모든 유하는 곳에서 무교병을 먹을지니라(15-20)

 

유월절 다음날부터 일주일, 즉 1월 15일부터 21일은 무교절 기간입니다. 이 7일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무교병을 먹어야 합니다. 물론 유월절인 1월 14일 밤에도 그들은 무교병을 먹었습니다. 결국 유월절-무교절의 총 8일 동안 유교병을 먹을 수 없고 모든 누룩을 집에서 제거해야 합니다. 누룩은 미생물이므로 혹시라도 무교병 반죽에 묻어 들어갈 수 있으므로 철저한 제거를 명하셨을 것입니다.

무교절은 첫날과 일곱째 날, 즉 1월 15일과 21일은 성회로 특별하게 지킵니다. 그날은 정규 안식일 외의 절기 안식일로 모든 노동을 멈추어야 합니다. 다만 정규 안식일과 달리 이러한 절기 안식일(성회)에는 그날 먹을 음식 준비는 가능했습니다(16). 하나님께서는 이 절기를 지켜야 하는 이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그날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에서 이끌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쯔바오트’는 ‘군대’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총사령관이신 하나님의 주도로 애굽과 전쟁을 치른 뒤 승전국이 되어 그 땅을 떠납니다. 따라서 이 절기를 영원한 규례로 삼아 자손 대대로 지켜야 합니다. 앞서 유월절 규례의 마지막 언급과 동일한데 이 명령에서는 유월절-무교절이 묶어서 지시되고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1월 14일부터 21일까지 무교병을 먹어야 하며(18), 누룩이 전적으로 집에서 제거되어야 하고, 임시 외국인 체류자(타국인)와 본국인 모두 이 법을 엄중히 지켜야 합니다. 만일 그들이 이 규정을 어기면 무서운 끊어짐의 형벌을 당할 것입니다. ‘끊어짐’(카라트)의 형벌이 무엇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나 무난하게 죽음의 형벌과 동급의 형벌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즉시 사형을 당하는 것이 아닌 조기 사망이나 대가 끊기는 형벌일 수 있습니다.


무교절은 특별한 노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결함을 유지하며 새로운 시작을 특별히 허락하신 특별한 시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죄를 범하지 않고 제거하고, 하나님의 정부의 역사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돕습니다. 또한, 무교절의 마음을 나누며 정결함을 실천하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매일 하나님을 인정하고 감사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 신앙의 핵심을 실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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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11-01)


열 번째 장차 재앙 예고

출애굽기 11장 1-10절


 

우리의 인생에는 때로는 짙은 안개와 같은 어려움 속에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 항로를 정확히 알고 계시고, 그분의 계획은 언제나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 열 번째 재앙이 임합니다. 이 재앙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 무교절이 제정됩니다. 열 번째 재앙 이야기는 이러한 특수성으로 인해 특별하게 설명됩니다. 먼저 현재의 단락에서 열 번째 재앙이 임할 것이라는 긴 경고가 주어집니다(11:1-10). 그 후 유월절-무교절 규례가 제정되고(12:1-20), 이이서 예고된 심판이 실제로 집행됩니다(12:21-36).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마지막 재앙(1-3)

우리는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공의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즉각적으로 심판을 내리시지 않고, 반복적으로 경고하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기회를 할 때, 결국 하나님께서 판단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돌아오라고 여러 차례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의 뜻을 듣고, 그분의 뜻을 돕기 위해 결단해야 합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내보내리라 그가 너희를 내보낼 때에는 여기서 반드시 다 쫓아내리니 2백성에게 말하여 사람들에게 각기 이웃들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 하시더니 3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1-3)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을 내리십니다. 이것은 이제 남아 있는 ‘한 가지 재앙’입니다. 이 재앙을 겪은 후에야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내보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사의 강조 표현(가레쉬 예가레쉬, 반드시 내쫓다)과 포괄성을 가리키는 부사 ‘칼라’(모두)를 사용하심으로써 바로가 이번에는 ‘반드시’ 그리고 ‘전면적으로’ 굴복할 것임을 확증하십니다. ‘신부를 보내다’라는 해석은 이어지는 ‘반드시 쫓아내다’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신부가 시집갈 때 집안에서 내쫓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단어는 ‘모든’을 뜻하는 ‘콜’과 관련된 단어로서 부사 ‘모두’가 적절해 보입니다. 이 경우 이 부사는 앞의 ‘보내다’가 아닌 뒤의 ‘내다’와 연결되면서 ‘모두 내다’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떠날 준비를 갖출 때, 애굽인 이웃을 찾아가 은금 패물을 구하라고 명하십니다(2). 아마 이 패물(켈리)은 값비싼 은금 장신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부분은 3:19-22의 반복입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애굽을 여러 가지 기적으로 여러 번 친 후에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보낼 것이라고 미리 말씀해주셨습니다(3:20). 또한 그 백성으로 하여금 애굽 사람의 호의를 입게 하여 빈손으로 나가지 않게 할 것이며(21), 그들이 애굽 이웃들에게서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그들의 물품을 ‘취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귀중품들과 물건들은 나중에 성막 건설의 가장 중요한 재료가 됩니다. ‘취하다’의 동사 ‘나짤’은 보통 강제력이 동원된 탈취에 사용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무력적 행동으로도 읽힐 수 있는 이 표현에 대해 앞서 3:22에서 잠깐 설명했지만, 12:36의 주해에서 다시 살피기로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열 번째 재앙에 앞서 이미 애굽 백성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호의(헨 은혜)를 품게 하셨습니다. 또한 바로의 신하와 백성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의 땅에 무서운 재앙을 연거푸 일으킨 모세를 위대한 인물로 추앙했습니다(3). 이것은 존경심보다는 두려움에서 나온 존대로 이해됩니다. 그로 인해 애굽 백성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하면서 그들을 친절히 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 대해 승전국의 지위를 갖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바로의 고집 때문에 선량한 애굽 국민이 피해를 보아야 합니까? 결국 왜 그들의 장남들이 모조리 함께 심판 아래 놓여 죽어야 합니까? 이것은 지도자의 오판과 잘못된 행동이 구성원 전체에게 어떤 피해와 어려움을 가져다주는지 잘 알 수 있게 합니다.

 

바로에게 통보된 마지막 재앙(4-8)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세상으로부터 보호하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통해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인정으로 인정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우리는 당신의 은혜로 영생의 길로 인도를 받았습니다.

 

4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5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은 왕위에 앉아 있는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몸종의 장자와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죽으리니 6애굽 온 땅에 전무후무한 큰 부르짖음이 있으리라 7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를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 8왕의 이 모든 신하가 내게 내려와 내게 절하며 이르기를 너와 너를 따르는 온 백성은 나가라 한 후에야 내가 나가리라 하고 심히 노하여 바로에게서 나오니라(4-8)

 

이 장면은 앞선 10:29 무대의 연장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1-3절은 현재의 최종적 파국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달된 사전 준비 지시로 이해됩니다. 앞서 ‘우리가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최후 통첩을 했던 모세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마지막 재앙의 경고를 전달합니다(4). 이제 하나님께서 밤중에 직접 애굽 한복판으로 들어오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애굽의 모든 처음 난 것들이 다 죽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과 가축의 첫 태생을 모두 포괄합니다. 사람의 경우 모든 장남이 다 죽을 것인데, 이것은 특징적인 총칭어법(merism)으로 “왕위에 앉아있는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몸종의 장자.”라고 표현됩니다. 이것은 “맷돌 뒤에 있는 몸종”은 흥미로운 표현입니다. 당시의 맷돌은 회전식 연자 맷돌이 아닌 위아래 두 짝으로 구성된 손맷돌인데, 곡물을 아랫돌에 놓은 다음 윗돌로 아랫돌을 문지르는 방식으로 사용했습니다. 성경의 증거는 전통적으로 맷돌질은 여성들이 하는 일임을 시사합니다(사 7:2; 욥 31:10; 마 24:41). 삼손은 거대한 연자 맷돌(회전맷돌)을 돌린 것이 아니라 이런 여성 전용의 손맷돌 작업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것은 삼손을 모욕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최고 존엄인 바로의 장자로부터 가장 미천한 여종의 장자까지 모두 심판의 대상에 포괄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모든 가축의 첫 태생이 포함됩니다(5). 아마 사람이 키운 가축 외에 야생 짐승은 해당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마지막 재앙은 애굽에 심대한 타격과 슬픔을 안기고, 애굽 온 땅이 초상집이 되며, 그들의 통곡은 전무후무한 부르짖음이 될 것입니다(6). 무엇보다 가정에서 가장 중요하고 부모의 총애를 받는 장자들이 모두 죽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가문의 혈통과 전통을 잇는 첫아들이 지닌 중대한 의미와 위상을 고려할 때, 그들의 죽음은 애굽인들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것은 왕위 계승이 절대적으로 중요했던 바로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아무런 피해를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든 가축이든 어떤 첫 태생도 무사할 것입니다(7). 7절은 더 선명히 이해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개가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의 가축에게 ‘혀를 움직이지(놀리지) 않을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움직이다’라는 동사의 의미는 개가 으르렁거리거나 짖는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이스라엘 백성을 위협할 수 없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한국 격언에 비교하자면,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립니다. 애굽의 비극과 이스라엘의 보존이 비교됩니다. 이로써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둘 사이를 분명하게 구별하셨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될 것입니다(7). 모세는 바로에게 바로의 자존심을 최대로 상하게 하는 최후의 예고를 전달한 뒤 그를 떠납니다(8). ‘당신의 모든 신하들이 나를 찾아와 내게 절을 하며 우리에게 떠나달라고 부탁할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가 나갈 것이다.’ 이곳에서 ‘절을 한다’는 뜻의 동사 ‘히쉬타하봐’는 언제나 권위자와 높은 연령의 어르신에게 예를 갖추기 위해 납작 엎드리는 동작입니다. 따라서 바로의 신하들과 백성이 모세에게 엎드린다는 것은 그 순간만큼은 바로의 권위의 자리를 실질적으로 모세가 대체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러한 모습은 마치 승전국 군주에게 예를 갖추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모세는 나아가 대제국의 제왕인 바로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며 떠납니다. 여기서 모세의 분노는 하나님의 분노입니다.

 

열 가지 재앙이 임한 이유(9-10)

세상의 군왕들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결국 하나님의 앞에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바로 자신이 뜻을 이루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께서는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완고함은 그와 그의 백성들에게 큰 의미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제외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의지하심에도 성도들의 구원을 완전히 이루실 것입니다.

 

9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 땅에서 나의 기적을 더하리라 하셨고 10모세와 아론이 이 모든 기적을 바로 앞에서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나라에서 보내지 아니하였더라(9-10)

 

두 민족의 운명을 가를 열 번째 재앙을 내리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현재까지의 상황을 총정리하여 모세에게 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선 과정을 상기시키십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바로가 모세의 말을 듣지 않을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9). 그 목적은 애굽 땅에서 ‘나의 기적들’(복수)을 계속 더하여 일으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로써 여호와의 능력과 그분의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심은 갈수록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인간의 사고로 이해하기 어려운 이러한 하나님의 방식에 대해 앞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 이것은 죄로 물든 인간의 고집스런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묵인이며, 그런 죄악마저 이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사역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아홉 번의 재앙을 내리시면서 바로와 애굽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이제 마지막 재앙은 피할 수 없습니다.

장자 심판의 이야기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과 그것과 관련된 법의 제정을 통해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정립합니다. 이것은 그들의 기원과 신분에 대한 역사적 정립이며 신학적 정립입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장엄한 계획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함께 구원의 이중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기회를 주지만,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마지막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과 심판이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가 되는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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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10-02)

 


아홉째 흑암의 재앙

출애굽기 10장 21-29절


 

인생의 어둠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종종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지만, 현대의 하나님의 계획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며, 어려움 속에서도 계획을 세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뜻을 믿고 머무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평안과 기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결국,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를 믿는 것이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아홉 번째 재앙을 보내기로 하십니다. 흑암의 재앙입니다. 3일간 지속되면서 대낮에도 빛이 사라진 칠흑 같은 어둠은 극도의 공포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두려움에 떨던 바로는 다시 모세와 아론을 불러들여 마지막 협상을 진행합니다. 그는 히브리인들의 가축을 볼모로 잡아놓을 심산이었는데, 모세의 즉각적인 거절로 협상은 최종적으로 결렬됩니다.

 

아홉 번째 재앙 : 온 땅이 흑암으로 덮이다(21-29)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을 자신이 계획하는 방식으로 결정합니다. 당신의 계획은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어려움과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실시간 우리의 상황을 기록하시며, 그분의 뜻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신앙은 믿음을 바탕으로 성장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어두운 순간에도 하나님을 믿으며 그분의 계획을 따로 따로 따로 두어야 합니다.

 

2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내밀어 애굽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곧 더듬을 만한 흑암이리라 22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내밀매 캄캄한 흑암이 삼 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23그 동안은 사람들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더라 24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25모세가 이르되 왕이라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제사와 번제물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겠고 26우리의 가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그 중에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임이며 또 우리가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길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나 27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 보내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28바로가 모세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떠나가고 스스로 삼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네가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 29모세가 이르되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내가 다시는 당신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리이다(21-29)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부분을 위해 함께하시는 신들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겠다고 답하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그리고 그래서 바로 그 사람을 다시 구성하고 선언합니다. 이 운동은 하나님의 권능과 이스라엘의 온전한 은혜를 받을 계획을 보여줍니다.

 

(1) 삼일 동안 임한 흑암의 재앙(21-23)

 

바로와 애굽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완고한 바로에게 아홉 번째 재앙을 일으키십니다. 이 재앙도 아래 도표에서 보듯이 가로 방향의 두 가지 다른 재앙, 세 번째와 여섯 번째 재앙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사전 경고 없이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향해 손을 내밀어 흑암을 일으키라고 명령하십니다. 앞서 확인했듯이 모세나 아론이 손을 들 때는 지팡이가 손에 들려 있습니다. 이 흑암은 ‘더듬을 만한 흑암이 될 것이다’라고 하시는데(21), 이것은 ‘사람이 어둠을 느낄 수 있는 흑암’이라는 뜻입니다. 그 흑암은 사람이 느낄 수 있는 흑암은 엄청난 ‘모래 폭풍’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사람들이 집에서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일강 유역을 벗어나면 광활한 사막뿐인 애굽에서 이런 모래 폭풍은 일상적인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한 초자연 급의 모래 폭풍이 불게 하신 것으로 추론됩니다. 더구나 그 전국적인 모래 폭풍이 유독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에만 임하지 않고 그곳은 평소와 다름없이 빛이 있었다는 것은 이 모래 폭풍이 초자연적 현상의 재앙임을 말해줍니다. 이때 고센 지역의 ‘빛’을 신적인 빛,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3일 동안 그곳은 모래 폭풍이 불지 않아 태양이 가려지지 않은 일상적인 상황을 유지했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대로 지팡이를 쥔 두 손을 하늘 높이 들자 캄캄한 흑암이 엄습하여 3일 동안 애굽을 암흑의 땅으로 만들었습니다(22). 3일 동안 지속된 모래 폭풍의 흑암으로 인해 애굽 사람들은 밖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빛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몇 가지 중요한 관찰 사항들이 있습니다.

첫째, 이 두려운 흑암의 재앙은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을 예고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컴컴했던 유월절 ‘밤중에’ 애굽의 모든 첫 태생, 백성의 장남과 가축의 맏 배가 죽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11:4).

둘째, 혼돈과 붕괴로 돌아가는 역창조의 주제가 엿보입니다. 사실 앞선 재앙들도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일시적으로 무너지는 현상이기에 역창조의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역창조로 인해 애굽은 창조의 질서로부터 붕괴되는 국가로 전락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빛이 있게 하셨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재창조에 대한 분명한 암시로 이해됩니다. 이렇듯 ‘빛과 어둠을 나누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중심한 재창조의 작업을 시작하십니다.

셋째, 앞서 모든 재앙을 애굽 신에 대한 심판으로 해석할 수 있었는데, 여기서 흑암의 재앙은 애굽의 주신인 태양신에 대한 심판일 수 있습니다. 태양신은 라(Ra) 혹은 레(Re)로, 나중에는 바람과 공기의 신인 아문(Amun)과 합쳐져 아문-레(Amun-Re)라 불립니다. 재앙들이 어떻게 애굽 신들에 대한 심판과 연결되는지 아래 도표를 통해 종합적으로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각각의 재앙들을 공통적 요소를 가진 가로와 세로의 재앙들로 묶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가로축의 묶음은 ‘아침에’ 바로를 만나는데 장소는 강가입니다. 다만 일곱 번째 우박재앙에서 ‘강가에서’가 언급되지 않지만, ‘아침에’로 암시되어 있습니다. 바로는 아침마다 강변 산책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세로축에서는 지팡이를 사용하는 행동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지팡이 사용에서 가끔 ‘손을 든다’는 것만 언급될 때도 있으나 이 경우 지팡이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특정 재앙들이 어떤 신들에 대한 심판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차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박 재앙에 대해 어떤 사람은 그것을 ‘누트’(Nut)라는 하늘 여신과 관련시키나, 다른 사람은 곡식 신 세트(Seth)와 관련시킵니다.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은 민(Min)이라는 출산의 신과 관련지을 수 있습니다. 혹은 바로의 장자가 그 자체로 신으로 숭상되었기에 그 신이 죽음을 당함으로써 하나님께 제압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래 연관 짓기는 무난한 한 가지 예입니다.

 

1. 핏빛 나일강
하피=나일 신
4. 파리 떼
케프리(?)
7. 우박
누트=하늘 신
아침에
강가에서
바로에게
2. 개구리 떼
헤켓=개구리 신

5. 가축 전염병
아피스=황소신
8. 메뚜기
세트=농사신
왕궁에서
바로에게
3.이(모기)
케프리(?)
6. 독종
세크메트
9. 흑암
아몬-레=태양신
장소 불분명
(왕궁암시)
경고 없음
지팡이 사용
애굽와이스라엘
애굽 마술사 등장
(1,2번만 모방)
지팡이 사용없음
애굽에만 임함
지팡이 사용
애굽에만 임함
10. 장자의 죽음
민=출산신
바로의 장자

 

(2) 바로의 최후 저항(24-29)

 

두려움에 사로잡힌 바로는 급히 모세를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그는 다시 협상에 들어갑니다. 이번에도 그들의 예배 여행을 허락해주겠다고 양보하는 척하면서, 또다시 단서를 붙입니다. 자녀들을 포함해서 모두가 떠나도 좋지만, 가축은 남겨두고 떠나라는 제안입니다. 이제 마지막이 될 세 번째 협상안입니다. 그러나 유목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삶의 근간이자 생명줄인 가축을 놓고 떠나라는 것은 받아들이기 불가능한 조건입니다. 바로의 치졸한 이 세 번째 협상안을 모세는 단호히 거부하면서 가축도 데려가겠다고 통보합니다. 물론 지혜로운 협상술로 볼 수 있는 분명한 명분을 내놓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제사 관행을 들먹입니다. 이스라엘의 제사는 제단에 짐승을 태우는 방식인데(앞서 설명한 대로 이것은 애굽의 제물 드리기와 차이가 난다), 가축을 필수적으로 몰고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자신들에게 가축이 없다면, 바로가 희생 제물용으로 대신 채워줘야 할 정도로 가축은 중요합니다. 더구나 그것을 모두 끌고 가야 하는 이유는 그 가축들 중에 어느 것을 골라서 바쳐야 하는지 현장에 도착해서 결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26). 모세의 주장은 훗날 레위기에서 제도화할 희생 짐승의 흠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희생 짐승으로 바칠 가축은 흠이 없어야 합니다(레 1:3; 3:1; 4:3 등), 열두 가지 대표적 홈들을 담은 흠 목록이 레위기 22:17-25에 자세히 나열됩니다. 아마 레위기 법이 있기 전부터 조상 대대로 이스라엘은 흠 없는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관행을 준수해왔을 것입니다. 모세의 주장이 타당한 이유는 짐승의 마지막 신체검사가 성소에 끌고 온 뒤 거기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최종 합격 판정을 받아야 그 가축이 제단에 태워질 수 있습니다. 집에서는 멀쩡했던 짐승이 성소에 올라가는 도중에 알지 못하는 가운데 어딘가 찢어지거나 문제가 생길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든 짐승을 광야로 데려간 뒤, 현장에서 짐승의 흠을 확인해야만 했습니다. 교묘하면서도 명백히 정당한 모세의 주장 앞에 바로는 더 이상 반론을 펼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로는 결코 그들을 보낼 수 없었기에 다시 마음을 걸어 잠급니다. 출애굽기 저자는 여기서도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드셨다고 표현합니다(27). 바로는 최종적 협상 결렬을 선언합니다(28).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는 것은 ‘더 이상 나를 만나러 오지 말라’는 통보입니다. 몸조심하고 만일 왕궁을 다시 찾아온다면 그때는 죽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모세도 맞받아쳐서 최후통첩을 전달합니다. ‘당신 말대로 다시 당신을 볼 일은 없을 것이다(29). 말하자면, 더 이상 바로에게 찾아오지 않겠고 이제 파국만 남았다는 통보입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계획을 드러내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어려움과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을 실천하는 인도인을 따라야 함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입체 우리를 완전한 자유와 구원으로 인도하시며, 우리의 신앙과 기도자가 당신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도록 도와드립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신앙으로 응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고, 그분의 계획에 따라 신뢰하며 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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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10-01)


여덟째 메뚜기 재앙

출애굽기 10장 1-20절


 

우리는 교만한 마음 대신 겸손한 마음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겸손히 하나님께 나아갈 때, 그분의 자비와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 본문에 모세는 다시 바로를 만나러 가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바로를 만나 메뚜기 재앙을 엄중히 경고합니다. 이때 바로는 재앙을 모면하려고 다시 협상안을 제시합니다. 장정들만 가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거부하자 협상은 타결되지 않습니다. 이윽고 무서운 메뚜기 떼가 엄습하자 바로는 급히 모세와 아론을 불러들여 잘못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재앙이 그치자 다시 마음을 바꿉니다.

 

메뚜기 재앙을 예고한 모세(1-6)

어리석은 사람들은 상황이 악화되기 전까지 문제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고집을 부립니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더 큰 손실을 초래합니다. 문제를 미리 인식하고 해결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항상 겸손함과 열린 마음이 중요합니다. 바로의 완악한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2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1-2)

열 가지 재앙(7:14-12:30)

재앙의 유형 재앙의 기간 특이사항 성경본문
아침 일찍 바로 앞에 선 모세 (7:15) 피(나일강) 7일 애굽 마술사도 행함 7:14-25
개구리 하루 애굽 마술사도 행함 8:1-15
- 애굽 마술사가 행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함 8:16-19
아침 일찍 바로 앞에 선 모세 (8:20) 파리 하루 이스라엘의 주거지 고센 땅에는 파리가 없음 바로의 번복 8:20-32
가축의 죽음 - 이스라엘의 가축은 죽지 않음 9:1-7
곪는 종기 - 애굽사람과 짐승에게만 생김 9:8-12
아침 일찍 바로 앞에 선 모세 (9:13) 우박 즉시 그침 요청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워한 애굽 사람의 가축은 살아남음,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음 9:13-35
메뚜기 즉시 그침 요청 아침에 동풍이 메뚜기를 불어옴 남자만 출애굽 허락 10:1-20
짙은 어둠 3일 가축을 제외한 출애굽 허락 10:21-29
최악의 재앙 맏아들 사망 밤중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로 구원받음 11:1-12:30

여호와께서는 다시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십니다. 이때 바로가 왜 완고한 마음을 바꾸지 않았는지를 알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바로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습니다. 물론 바로의 완고함은 본인의 자유의지에 따는 자발적 결정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에 의해 생긴 심리 적용임을 밝힙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비로의 마음을 통제하시는 것인데, 여기서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드신 목적이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와 그의 신하들 앞에서 기적들(표징)을 연달아 일으키시기 위함입니다(2). 이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병 주고 약주는 괴팍한 분이 아닙니까? 카수토는 하나님의 이런 비논리성은 후대의 사상, 특히 그리스 철학에 기반하여 고대 히브리어 본문을 읽으려는 시도에서 오는 괴리감이라고 설명합니다. 당대의 독자들에게, 그리고 히브리 사상으로는 이상할 것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구약은 역사에 개입하시면서 궁극적으로 인간의 생각과 계획을 통제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자유하심을 교훈합니다. 가룟 유다는 이미 작정된 길로 갔으며 바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과 섭리를 다 이해할 수 없기에 신정론 온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로 물든 본성에 따른 행동을 자주 묵인하고 허용하신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통제 가능하지만 내버려 두십니다.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롬 1:24-26). 이것은 죄가 죄로 밝히 드러나게 하심이며, 역설적으로 그들이 그 죄에 대한 심판을 받게 하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롬 2:5). 성경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수동적 묵인을 그분의 능동적인 작업인 것처럼 표현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바로와 애굽은 거듭된 심판을 받고 여호와의 능력과 그분의 하나님 되심은 더욱 밝히 드러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과 그의 후손들의 귀에 애굽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과 이적들을 이야기해주어야 합니다. 모세의 말을 전해 들은 애굽 백성은 하나님께서 전능한 여호와이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3).

 

여덟 번째 재앙 : 메뚜기 떼가 엄습(3-15)

성도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자신이 원하는 때만 순종하는 것은 진정한 순종이 아닙니다. 진짜 순종은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타협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범죄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종하라고 요구하시며, 그 안에는 놀라운 복이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의지로 완전히 순종하기 어려운 상황이 있으니,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조건 없이 끝까지 순종해야 합니다.

 

3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되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 겸비하지 아니하겠느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라 4네가 만일 내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면 내일 내가 메뚜기를 네 경내에 들어가게 하리니 5메뚜기가 지면을 덮어서 사람이 땅을 볼 수 없을 것이라 메뚜기가 네게 남은 그것 곧 우박을 면하고 남은 것을 먹으며 너희를 위하여 들에서 자라나는 모든 나무를 먹을 것이며 6또 네 집들과 네 모든 신하의 집들과 모든 애굽 사람의 집들에 가득하리니 이는 네 아버지와 네 조상이 이 땅에 있었던 그 날로부터 오늘까지 보지 못하였던 것이리라 하셨다 하고 돌이켜 바로에게서 나오니 7바로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되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 하고 8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로 다시 데려오니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갈 자는 누구 누구냐 9모세가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우리가 남녀 노소와 양과 소를 데리고 가겠나이다 10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와 너희의 어린 아이들을 보내면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함과 같으니라 보라 그것이 너희에게는 나쁜 것이니라 11그렇게 하지 말고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가 구하는 바니라 이에 그들이 바로 앞에서 쫓겨나니라 12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 땅 위에 네 손을 내밀어 메뚜기를 애굽 땅에 올라오게 하여 우박에 상하지 아니한 밭의 모든 채소를 먹게 하라 13모세가 애굽 땅 위에 그 지팡이를 들매 여호와께서 동풍을 일으켜 온 낮과 온 밤에 불게 하시니 아침이 되매 동풍이 메뚜기를 불어 들인지라 14메뚜기가 애굽 온 땅에 이르러 그 사방에 내리매 그 피해가 심하니 이런 메뚜기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것이라 15메뚜기가 온 땅을 덮어 땅이 어둡게 되었으며 메뚜기가 우박에 상하지 아니한 밭의 채소와 나무 열매를 다 먹었으므로 애굽 온 땅에서 나무나 밭의 채소나 푸른 것은 남지 아니하였더라(3-15)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애굽의 바로에게 메뚜기 재앙을 경고하십니다. 바로는 하나님께 회개를 요청하지만, 그의 마음은 완고하여 결국 순종하지 않습니다. 메뚜기는 애굽의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들며,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1) 메뚜기 재앙에 대한 경고(3-11)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바로를 만나 하나님의 경고를 그대로 전했습니다. 만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 백성을 보내지 않으면 이제 메뚜기 재앙이 애굽 영토에(“경내에”) 임할 것입니다. 메뚜기떼가 온 지면을 덮어 사방을 볼 수 없을 만큼 몰려올 것이며 모든 것을 먹어 치울 것입니다. 현재 우박으로 산천초목이 초토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남은 풀과 나무가 모두 뜯길 것입니다. 특히 5절의 “들에서 자라는 모든 나무”의 원문 뜻은 ‘싹이 나온 모든 나무’입니다. 우박을 맞아 만신창이가 된 나무들에 겨우 다시 싹이 났지만, 메뚜기가 그것마저 모두 뜯어 먹습니다.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우박 재앙을 면한 밀과 쌀보리도 이제 싹이 나면서 모두 뜯겼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지만, 이것들은 삼과 보리보다 두 달 정도 늦게 파종과 수확을 하므로 아직 싹이 트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애굽 국민을 위해 최소한의 것은 남겨두는 자비를 베푸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박에 상하지 아니한 밭의 모든 채소”에는(12) 밀과 쌀보리의 싹이 포함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메뚜기 떼의 창궐은 너무 극심하여 심지어 바로의 궁전과 신하들의 집, 그리고 애굽 온 백성의 집까지 들이닥칠 것이다. 이것은 전무후무한 메뚜기 재앙이 될 것입니다(6). 모세는 이 경고를 통보하고 바로를 떠났습니다. 바로 곁에 서 있던 신하들은 모세의 경고를 듣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은 바로를 설득하면서 애굽이 망하는 것을(과거나 과거완료의 의미인 “망한 줄을”보다는) 아직도 모르냐고 호소합니다. 그들은 모세로 인해 이집트가 ‘덫’(함정)에 걸렸다면서 그의 요구를 들어주어 덫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호소합니다(7). 바로는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모세와 아론을 다시 불러들입니다. 다시 협상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바로는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을 보낼 마음이 없습니다. 그는 광야로 예배드리러 떠날 사람들의 명단을 요구한다. 두 번째 타협안입니다. 바로는 앞서 네 번째의 파리 재앙이 닥치자 8:28에서 첫 번째 타협안을 내놓은 바 있습니다: ‘가되, 멀리 가지는 마라.’ 지금 그는 예고된 메뚜기 재앙을 두려워하면서도 일부만 보내겠다는 새로운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모세는 일언지하에 거절하면서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남녀노소와 모든 자녀가 함께 떠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모세의 모습은 제국의 왕 앞에서 위엄 있고 그의 요구는 당당합니다. 바로가 모세의 요구에 결국 응하지 않음으로써 협상은 결렬됩니다. 그는 자신이 모세의 요구대로 장정과 아이들을 보낼 수 없으니 ‘가되, 장정만 가고 그 외 모든 것을 두고 가라’고 말합니다(11). 그는 모세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절하면서 지금 히브리인들이 바라는 것이 예배를 드리는 것이니(11) 장정만 가도 충분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협상이 결렬되자 파라오는 모세와 아론을 쫓아냈습니다.

 

(2) 메뚜기 떼가 모든 식물(植物)을 삼키다(12-15)

 

내쫓긴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손을 내밀어 메뚜기를 불러들여 우박 재앙에서 남겨진 애굽의 모든 초목을 뜯어 먹게 하라고 명하십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어 올리자 여호와께서 동풍이 온종일 불게 하시어 다음 날 아침 메뚜기 떼가 온 이집트 땅으로 날아오게 하셨다. 여기서 동풍과 서풍은 이집트 기준이 아닌 가나안 기준으로 이해된다. 이집트에 메뚜기를 물고 오는 바람은 남쪽 수단(Sudan)의 사하라 사막에서 부는 뜨거운 계절풍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남풍임에도 불구하고 ‘동풍’으로 표현되는 것은 히브리인들에게는 동풍이 아마 맹렬한 바람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이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동풍은 동쪽의 뜨겁고 메마른 사막 지역에서 불어오는 심판의 바람이었으며(시 48:7; 겔 27:26;호 13:15) 가뭄을 일으키는 바람이었습니다(겔 17:10; 19:12;욘 4:8). 대지를 컴컴하게 덮은 메뚜기 때의 규모는 전무후무할 정도로 엄청났습니다(14). 그것은 애굽에 남아 있는 모든 푸른 초목을 뜯어 먹었습니다. 현재의 메뚜기 재앙 또한 애굽 신에 대한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신이시스(Isis), 곡물 신 세트(Seth)와 민(Min), 혹은 메뚜기 떼로부터 보호하는 신 세라피아(Serapia)를 굴욕적으로 만든 재앙일 수 있습니다.

 

바로의 거듭되는 거짓말(16-20)

우리는 바로의 거짓말을 통해 진정한 회개와 순종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진실한 회개로 나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속과 결단을 기억하시며, 그에 따라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순종이 따르지 않는 회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진실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더욱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16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급히 불러 이르되 내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와 너희에게 죄를 지었으니 17바라건대 이번만 나의 죄를 용서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 죽음만은 내게서 떠나게 하라 18그가 바로에게서 나가서 여호와께 구하매 19여호와께서 돌이켜 강렬한 서풍을 불게 하사 메뚜기를 홍해에 몰아넣으시니 애굽 온 땅에 메뚜기가 하나도 남지 아니하니라 20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16-20)

 

모세가 경고한 대로 무서운 메뚜기 떼의 공격을 받은 바로는 다시 모세를 급히 불러 재차 자신이 잘못을 범했다고 고백하여 용서를 구합니다. 이것은 우박 재앙 이후에 있었던 고백(9:27)에 이은 파라오의 두 번째 죄 고백입니다. 그는 메뚜기로 인한 애굽의 ‘죽음’, 즉 재앙을 없애달라고 부탁합니다. 모세는 바로를 떠나 여호와께 메뚜기를 거두어달라고 기도했습니다(18).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강한 바람을 반대편, 즉 서쪽에서 일으켜 불게 하셨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것은 가나안 땅을 기준으로 서쪽이며 동풍과 달리 그곳에서 서풍은 지중해로부터 오는 선선한 바람입니다. 강한 서풍이 메뚜기를 다시 홍해로 몰아넣자 애굽 땅에서 모든 메뚜기가 제거되었습니다. 사실은 애굽을 기준으로 지중해에서 불어온 북풍이 메뚜기 떼를 멀리 남쪽의 홍해 연안으로 내몰았을 것입니다. 메뚜기 떼가 사라지자 바로의 마음이 다시 바뀌었습니다. 여기서도 저자는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었다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진정한 순종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교만한 마음 대신 겸손한 마음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진정한 순종은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겸손히 하나님께 나아갈 때, 그분의 자비와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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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09-02)


일곱째 우박 재앙

출애굽기 9장 13-35절


 

좋은 운동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코치가 필수적입니다. 프로 선수와 동네 선수의 차이는 코치의 존재 여부에 있습니다. 코치는 선수가 잘못한 점을 지속적으로 지적하고, 슬럼프에 빠졌을 때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유명한 선수들은 개인 전담코치를 두고 자신의 잘못을 지적받아 더 나은 성적을 유지합니다. 잘못을 지적받을 때 열린 자세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며, 닫힌 마음은 문제를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 여섯 번째의 피부병인 독종의 재앙에 이어서 일곱 번째의 우박 재앙이 임합니다. 재앙의 강도와 범위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돌덩어리 같은 큼지막한 우박이 쏟아지는 전국적 재앙이 될 것이며,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초토화할 것입니다. 이번에도 하나님 백성의 거주지인 고센 땅만 재앙을 면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경고를 두려워한 애굽 백성들도 미리 피신하고 대비하여 피해를 입지 않습니다.

 

일곱 번째 우박 재앙에 대한 경고(13-21)

재앙이 임할 것이라는 경고는 바로가 스스로 선택한 결과라는 점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선택이 가져오는 결과를 책임져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 진정으로 의지하는 자는 그분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교훈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있게 다지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13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서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14내가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에게 내려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네가 알게 하리라 15내가 손을 펴서 돌림병으로 너와 네 백성을 쳤더라면 네가 세상에서 끊어졌을 것이나 16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17네가 여전히 내 백성 앞에 교만하여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느냐 18내일 이맘때면 내가 무거운 우박을 내리리니 애굽 나라가 세워진 그 날로부터 지금까지 그와 같은 일이 없었더라 19이제 사람을 보내어 네 가축과 네 들에 있는 것을 다 모으라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릇 들에 있어서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들에게는 우박이 그 위에 내리리니 그것들이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20바로의 신하 중에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그 종들과 가축을 집으로 피하여 들였으나 21여호와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 사람은 그의 종들과 가축을 들에 그대로 두었더라(13-21)

 

바로는 여섯 번째의 독종 재앙 앞에서 별다른 마음의 동요가 없었으며 완고한 고집은 여전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일곱 번째의 우박 재앙을 준비하십니다. 이것은 앞선 재앙들과 비교할 수 없이 강하고 치명적인 재앙이 될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아침 일찍’ 바로에게 가서 재차 동일한 요구를 전달해야 합니다. 여기서도 ‘아침 일찍’은 아마도 며칠간 계속되었을 독종의 재앙이 그친 뒤의 어느 날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앞으로 ‘모든 재앙들’을 쏟아내면, 바로와 그의 신하와 애굽 백성은 하나님 같은 분이 ‘온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14). 이 재앙에서 ‘모든’, ‘온’, ‘전부’를 뜻하는 ‘콜’이 반복적으로 사용됩니다: 모든 재앙, 온 천하, 모든 사람, 모든 채소, 밭에 있는 모든 것, 들의 모든 나무. 이러한 표현은 이 재앙들의 위력과 그것이 끼칠 광범한 포괄성을 말해줍니다. 이 재앙은 전면적인 파국을 초래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재앙들을 ‘바로의 심장’(원문의 의미)과 그의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내리실 것입니다. 여기서 바로의 심장에 재앙이 타격을 가한다는 표현은 그가 치명상을 입는다는 뜻일 수 있으며, 또는 그가 받을 심리적 충격의 측면을 부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앞선 전염병 재앙으로 바로와 애굽을 멸망시키지 않았는지 알려주십니다(15). 만일 다섯 번째 재앙인 전염병으로 가축뿐 아니라 사람까지 쳤다면, 바로도 그때 세상에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여섯 번째인 독종의 재앙은 사람과 가축 모두에게 발생했지만, 그것이 목숨을 빼앗아가는 질병은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바로는 여섯 번째 재앙 앞에서는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염병을 돌려 바로를 쓰러트리지 않으신 이유는 아직 바로를 살려두어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고, 온 땅에 그분의 이름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16). 어쨌든 그는 전염병으로 가축이 몰살되고 독종으로 가축과 사람이 신음하는 모습을 보면서 여호와가 어떤 분인지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의 교만은 여전하였으며,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주지 않았습니다(17).

이에 하나님께서는 우박 재앙으로 바로를 징계하십니다. ‘내일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는 ‘무거운’ 우박을 내리실 것입니다. ‘무거운’이라는 단어 ‘카베드’는 줄곧 바로의 ‘완고한’ 마음에 사용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고집에 걸맞게 돌처럼 단단한 커다란 우박이 애굽 온 땅에 쏟아질 것입니다. 학자들은 애굽 일부 지역에서 우박은 계절에 따른 정상적인 기상 현상이었다고 말합니다. 통상적으로 우박은 잠깐 쏟아지다 그칩니다. 그러나 애굽의 건조한 기후 조건을 고려할 때, 이 엄청난 우박 비는 특별한 일이었으며, 잠깐이 아닌 장시간 쏟아졌습니다. 게다가 그 우박이 고센 땅을 제외하고 전국적으로 쏟아졌다는 점에서 초자연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이런 우박 재앙은 애굽 역사상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18).

하나님께서는 미리 모든 사람에게 우박 재앙에 대한 경고를 하셨습니다. 바로는 애굽 전국에 즉시 사람을 보내 미리 피신하라고 경고해야 합니다. 들판의 모든 사람과 가축은 집 안으로, 또한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야 합니다(19). 바로는 아마 이 경고를 전국에 알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그의 신하들은 궁중에 소문이 퍼졌을 것이기에 우박 재앙이 곧 닥친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신하들 중에서 그 경고를 믿은 사람들은 모두 대책을 마련하여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그것을 무시한 사람들은 재앙의 희생물이 되었습니다(19).

참고로 앞의 재앙과 이어지는 여덟 번째의 메뚜기 재앙과 더불어 6,7,8번째 재앙은 모두 공중에서 발생합니다. 또한 현재의 우박 재앙도 애굽 신에 대한 심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우박이 쏟아지는 현상은 하늘의 통제권을 하늘 여신 누트(Nut)가 아닌 하나님께서 쥐고 계신다는 사실을, 또한 우박으로 산과 들의 초목과 곡식이 초토화했다는 사실은 곡식의 신인 세트(Seth)의 무능함을 드러냅니다. 또한 1, 2, 3번째 재앙이 첫 번째 묶음, 4, 5, 6번째 재앙이 두번째 묶음으로 묶이는데, 7, 8, 9번째 재앙은 세 번째 묶음으로 묶입니다. 세 번째 묶음의 공통점은 모세의 지팡이가 다시 사용되고, 두 번째 묶음에 이어서 애굽에만 발생하며, 마지막에 바로의 고백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일곱번째 재앙 : 우박이 쏟아지다(22-26)

하나님께서는 경고를 듣고 준비한 사람들과 준비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시며, 믿음과 순종의 중요성을 일깨웁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우박 재앙으로부터 보호받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안전과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경고에 귀 기울이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22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어 애굽 전국에 우박이 애굽 땅의 사람과 짐승과 밭의 모든 채소에 내리게 하라 23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지팡이를 들매 여호와께서 우렛소리와 우박을 보내시고 불을 내려 땅에 달리게 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우박을 애굽 땅에 내리시매 24우박이 내림과 불덩이가 우박에 섞여 내림이 심히 맹렬하니 나라가 생긴 그 때로부터 애굽 온 땅에는 그와 같은 일이 없었더라 25우박이 애굽 온 땅에서 사람과 짐승을 막론하고 밭에 있는 모든 것을 쳤으며 우박이 또 밭의 모든 채소를 치고 들의 모든 나무를 꺾었으되 26이스라엘 자손들이 있는 그 곳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더라(22-26)

 

사전 경고를 내리신 직후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심판을 실행할 것을 명령하십니다(22). 모세는 하늘을 향해 지팡이를 쥔 손을 들어 애굽 전역에 우박이 쏟아지게 해야 합니다. 모세가 명령대로 행하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우렛소리를 동반한 우박 비를 쏟으셨습니다. 이때 하늘에서 ‘불’(에쉬)이 함께 내려왔습니다. 번개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보통 ‘바라크’이므로 이것은 번개가 아닌 불일 수 있습니다. 혹은 우박을 몰고 온 검은 구름이 태양과 어우러져 붉은 색을 띈 특이한 기상 현상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갑자기 큰 우박이 쏟아지는 갑작스런 기상 변화에는 벼락과 우렛소리가 동반되곤 하므로 벼락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우박은 사람과 짐승에게, 들판의 모든 풀들 위에 쏟아져 온 대지를 초토화했습니다. 22절에는 나무(에쯔)가 누락되어 있으나 25절에서 모든 풀들과 더불어 나무까지 파괴되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박과 낙뢰, 우렛소리는 ‘심히 맹렬했다’(카베드 메오드). 여기서 바로의 완고함에 대해 사용된 ‘무겁다’라는 뜻의 동사 ‘카베드’가 우박의 맹렬함에도 사용됩니다. 이 우박은 18절에서 말한 대로 전무후무한 대재앙이었습니다(24). 커다란 돌덩이 같은 우박은 들판에 있던 사람과 짐승을 쳐서 죽게 했으며(19,25), 들판의 모든 초목을 두들겨 초토화해놓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고센 땅에만 우박이 전혀 내리지 않아 멀쩡했습니다.

 

두려워하나 고집을 꺾지 않는 바로(27-35)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시며 그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함께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안전과 은혜를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그분의 은혜를 경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다질 수 있습니다.

 

27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모세와 아론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 28여호와께 구하여 이 우렛소리와 우박을 그만 그치게 하라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다시는 머물지 아니하리라 29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성에서 나가서 곧 내 손을 여호와를 향하여 펴리니 그리하면 우렛소리가 그치고 우박이 다시 있지 아니할지라 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줄을 왕이 알리이다 30그러나 왕과 왕의 신하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아직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줄을 내가 아나이다 31그 때에 보리는 이삭이 나왔고 삼은 꽃이 피었으므로 삼과 보리가 상하였으나 32그러나 밀과 쌀보리는 자라지 아니한 고로 상하지 아니하였더라 33모세가 바로를 떠나 성에서 나가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펴매 우렛소리와 우박이 그치고 비가 땅에 내리지 아니하니라 34바로가 비와 우박과 우렛소리가 그친 것을 보고 다시 범죄하여 마음을 완악하게 하니 그와 그의 신하가 꼭 같더라 35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27-35)

 

바로는 급히 모세와 아론을 불러 다시 한 번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지난번과 같이 그는 ‘내가 잘못했다’고 시인하면서 여호와가 의로우시고 자신과 자신의 백성은 악하다고 말합니다. 두려워 떨며 그는 모세에게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박과 ‘우렛소리’(문자적으로 ‘하나님의 소리’)를 그치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재앙이 그친다면, 그때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합니다(28). 그들은 더 이상 애굽 땅에 머물지 않고 즉시 떠나게 될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부탁대로 하나님께 기도하여 우박을 그치게 하여 다시 한번 여호와가 살아계심을 보여 주겠지만, 바로와 그의 신하들의 마음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 말해줍니다(29-30).

그 시기에 이미 줄기가 다 자란 삼대와 보리는 회생불능의 피해를 입었으나, 아직 싹이 트지 않은 밀과 쌀보리(밀의 일종)는 우박의 타격을 받지 않아 보존되었습니다. 따라서 당장 우박이 그친다면 최악의 흉작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31). 만일 진심으로 바로가 회개하여 모세의 말을 듣는다면 애굽이 망하지는 않겠지만,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남은 작물인 밀과 쌀보리까지도 사라질 것입니다. 바로로부터 즉시 퇴장한 모세는 성 밖으로 나가 여호와께 손을 들고 기도하여 재앙을 중단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즉시 우렛소리와 우박이 멈췄습니다(33). 그러나 재앙이 끝나자 다시 바로의 마음이 돌변하여 그와 그의 신하들은 여호와와 모세를 향한 완강한 태도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임하는지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바로와 애굽에 엄중한 경고를 주시며 그들의 교만한 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거스르는 자에게 심판을 내리시지만, 동시에 회개와 돌아옴을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고와 지적을 귀담아 듣고,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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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09-01)


다섯째 이 재앙과 여섯째 파리 재앙

출애굽기 9장 1-12절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회개는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의 변화로 이어져야 하며,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합니다. 또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중심에 두는 것이 필수적이며, 세상의 것들에 의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아울러, 개인의 행동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고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교훈들은 우리가 올바른 삶의 방향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네 번째부터 여섯 번째의 재앙은 재앙의 두 번째 묶음으로 분류됩니다. 네 번째의 파리 재앙에 이어 다섯 번째 재앙은 가축의 전염병, 여섯 번째는 사람과 짐승의 몸에 발생하는 악성 종기의 고통입니다. 두 번째 묶음의 세 가지 재앙에서는 지팡이가 사용되지 않으며 애굽 민족에게만 피해를 입힙니다. 다섯 번째 재앙에서 생명 살상이 시작되고 바로의 마음도 더욱 완고해집니다.

 

다섯 번째 재앙 :가축의 전염병(1-7)

우리는 일상에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삶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 하나님께서 경고하시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고를 무시하지 말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회개의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행동은 개인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서로를 배려하고 책임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2네가 만일 보내기를 거절하고 억지로 잡아두면 3여호와의 손이 들에 있는 네 가축 곧 말과 나귀와 낙타와 소와 양에게 더하리니 심한 돌림병이 있을 것이며 4여호와가 이스라엘의 가축과 애굽의 가축을 구별하리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것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 5여호와께서 기한을 정하여 이르시되 여호와가 내일 이 땅에서 이 일을 행하리라 하시더니 6이튿날에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시니 애굽의 모든 가축은 죽었으나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한지라 7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본즉 이스라엘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니라(1-7)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을 보내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통해 바로의 완악한 마음을 드러내고 그에게 경고하십니다. 결국, 바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1) 다섯 번째 재앙의 경고(1-5)

 

네 번째 재앙인 파리 떼의 급습으로 애굽 온 땅이 피폐해졌음에도 바로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다섯 번째 재앙을 일으키도록 지시하십니다. 그는 바로를 다시 찾아가 예배를 위한 광야 여행을 허락해줄 것을 촉구해야 합니다(1). 몇 번째입니까? 다시 하나님의 경고가 전달됩니다.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강제로 억류하면 더욱 무서운 재앙이 임할 것입니다. 그것은 가축의 전염병으로 인한 몰살입니다. 다섯 번째 재앙도 애굽 민족에게만 발생하여 그들의 가축이 대량으로 피해를 입고 이스라엘의 고센 땅은 평온할 것입니다(3-4). 애굽에서 사육하는 가축에는 말, 나귀, 낙타, 소, 양/염소(쫀)가 포함됩니다. 애굽과 가나안, 메소포타미아 일대에서 기르던 짐승들입니다. 말, 나귀, 낙타는 일꾼 짐승으로, 소, 양, 염소는 식용 짐승으로 키웠습니다. 나귀는 가장 고대부터 근동 지역의 대표적인 수송용 가축이었으며, 말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유입되었습니다. 애굽은 최대 말 사육 국가로서 주변 여러 나라에 수출하였습니다. 낙타는 논란이 되는 가축입니다. 일각의 학자들은 낙타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주전 12세기 전에는 사육하거나 사용한 흔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애굽에서는 그보다 후대인 주전 6세기에 낙타에 대한 기록이 나타날 뿐입니다. 따라서 이곳을 포함한 오경의 낙타 언급은 시대착오적이며 후대의 기록이거나 편집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카수토는 이미 모세 시대에 낙타가 애굽에서 사육되었다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른 증거 자료에서는 여전히 낙타가 모세 시대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암시가 나타나며, 최근에 발견된 낙타 떼를 그린 어떤 암각화는 모세 이전 시대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가축 전염병은 이스라엘을 제외한 전국적 재앙이 될 것입니다. 구약에서 전염병은 대표적인 하나님의 심판 수단 중 하나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다시 재앙이 발생할 시점을 지정하십니다. 바로 ‘내일’ 즉시 재앙이 임할 것입니다. 가축의 떼죽음 또한 애굽 신들의 심판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아피스(Apis)는 황소로 상징되는 신이었는데, 전염병으로 애굽 모든 소가 무력하게 거꾸러집니다.

 

(2) 애굽의 가축이 몰살(6-7)

 

하나님께서는 경고하신 대로, 이튿날 즉시 가축 전염병 재앙을 일으키셨습니다. 이전까지는 죽음을 일으키지 않고 물, 개구리, 흙, 곤충과 같은 피조물을 이용해 고통을 주었는데, 이제 죽음을 일으킵니다. 애굽의 모든 가축이 죽었습니다. ‘모든 가축’은 확실히 많은 가축의 죽음에 대한 과장법입니다. 아직 많은 가축들이 여전히 살아남아 나중에 일곱 번째의 우박 재앙과 열 번째의 첫 태생 죽음의 심판으로 또다시 대량 몰살하기 때문입니다. 4절에서 ‘하나도 죽지 않았다’는 히브리어는 특이하게 ‘아무것도’로 해석될 수 있는 다바르가 사용됩니다. 다바르는 ‘말’이라는 뜻이면서 동시에 ‘일’이나 ‘사건’을 가리킬 수 있지만 ‘사물’(어떤 것)을 가리키는 경우는 드물입니다. 더구나 여기서는 가축을 이 단어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분명 전염병을 뜻하는 ‘데베르’와의 의도적인 말놀이일 것입니다. 6절과 7절에서는 ‘하나도 죽지 않았다’는 동일한 표현을 위해 통상적인 방식대로 ‘하나’를 뜻하는 ‘에하드’가 사용됩니다. 가축 전염병이 전국적으로 돌며 수많은 가축이 쓰러지자 바로는 사람을 보내 피해 상황을 조사하게 했을 것입니다. 충격적이게도 애굽의 가축만 몰살당했고 이스라엘의 가축은 아무런 피해가 없었습니다. ‘하나도 죽지 않았다’라는 히브리어는 6절보다 한층 강화된 표현인 ‘아드 에하드’입니다. 6절에서는 단순히 ‘에하드’만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는 전치사 ‘아드’가 붙으면서 ‘하나조차’, ‘단 하나도’라는 뜻으로 크게 강조되어 있습니다. 애굽의 피해 상황과 이스라엘의 피해 상황이 뒤로 갈수록 더욱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이스라엘 가축의 보존은 ‘아무것도’, ‘하나도’, ‘단 하나도’로 점차 강조됩니다. 그러나 바로는 놀랍게도 이렇듯 분명한 선택적 재앙을 직접 똑똑히 확인했으면서도 고집을 꺾지 않습니다(7).

 

여섯 번째 재앙 : 악성 종기(8-1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애굽에 빠지는 신의 특별한 능력은 없어야 하고, 사람과 모두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신이 애굽과 그 왕이 바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사용하여 그분을 버리고, 바로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8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화덕의 재 두 움큼을 가지고 모세가 바로의 목전에서 하늘을 향하여 날리라 9그 재가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되어 애굽 온 땅의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서 악성 종기가 생기리라 10그들이 화덕의 재를 가지고 바로 앞에 서서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날리니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 악성 종기가 생기고 11요술사들도 악성 종기로 말미암아 모세 앞에 서지 못하니 악성 종기가 요술사들로부터 애굽 모든 사람에게 생겼음이라 12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8-12)

 

하나님도 지체하지 않고 즉시 여섯 번째 재앙을 보내십니다. 앞서 다섯 번째 재앙은 가축에게만 임하게 하셨지만, 이번에는 가축과 사람 모두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깁니다. 피부에 생기는 독종의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화덕’에서 두 움큼의 재를 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화덕은 아마도 벽돌을 굽는 가마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재’는 검댕으로 추론됩니다. 많은 장작으로 불을 때 가마를 굽기 때문에 가마 내부 표면에는 그을음이 잔뜩 끼어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 둘 다에게 두 손 가득 검댕을 취하라고 명령하시는데, 뿌리기는 모세 혼자 뿌렸다고 언급됩니다(8). 카토가 잘 간파했듯이, 아마 모세와 아론 둘 다 벽돌 가마에 가서 두 손으로 검댕을 긁은 뒤 그릇에 담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궁중으로 갔으며, 바로 앞에서 바로 모세가 그 그릇에 담긴 검댕을 하늘에 내던져 뿌렸을 것입니다. 검댕은 공중에서 뿌연 먼지가 되어 사방 온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흩날린 검댕이 사람과 짐승에게 달라붙자 몸에서 악성 종기가 발생했습니다. ‘종기’(쉐힌)는 구약에서 자주 하나님의 심판으로 발생하는 질병의 하나입니다. 특히 이것은 레위기의 나병(악성 피부병) 규례에서(레 13-14장) 나병으로 악화될 수 있는 심각한 종기입니다(레 3:18-20). 재앙의 강도가 갈수록 강해진다는 증거는 마법사들을 통해 확인됩니다. 애굽 마법사들은 처음과 두 번째 재앙을 모방하는 재주를 부렸는데, 세 번째부터는 한계를 보이며 사실상 결국 패배를 인정합니다. 급기야 현재의 여섯 번째 재앙에서 이제 마법사들도 재앙의 표적이 되어 애굽 온 백성과 함께 고통받습니다. 그들과 그들 신들의 무력함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하나님의 능력이 확인됩니다. 독종의 재앙 또한 많은 학자들이 질병을 다스리는 신 세크메트(Sekhmet)에 대한 심판으로 이해합니다. 이 독종은 ‘요술사들로부터 애굽 모든 사람에게’, 즉 애굽 전 국민에게 임했던 것으로 보이며, 아마 바로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여전합니다. 그의 완고한 마음은 꺾이지 않았고 모세와 아론의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여기서 재앙이 발생한 후 처음으로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표현이 나타납니다. 결국 바로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까지 통제하시어 심지어 사람을 불순종하게 만드는 것으로 이해되는 신정론의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드시는 목적은 10:1-2에서 구체적으로 진술됩니다. 신정론의 문제는 거기서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합니다.


우리가 살펴본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자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바로처럼 완악한 마음을 가진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종을 원하시며, 그분의 뜻에 따라 살 때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어떤 재앙이 임하더라도,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가는 길을 선택합시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며, 그분의 사랑과 은혜로 우리를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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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애굽기(08-02)


셋째 이 재앙과 넷째 파리 재앙

출애굽기 8장 16-32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더 큰 축복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순종치 않은 것은 강퍅해졌다는 말입니다. 순종치 않음을 여러 가지 환경이나 여건의 탓이나 핑계하는 늘어놓은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에게 어려움만 가중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순간, 순종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성도입니다.

 

  • 애굽 전역에 세 번째 재앙이 내립니다. 모세를 대신한 아론이 땅의 흙을 지팡이로 치자 이가 되어 사람과 가축에게 기어올라 괴롭힙니다. 이 재앙은 애굽과 이스라엘 모두에게 일어납니다. 그러나 세 번째 재앙에도 바로가 변하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네 번째 재앙을 보내십니다. 파리 떼가 들끓는 재앙이었는데, 이스라엘이 거하는 고센 땅에서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네 번째 재앙부터는 이집트 민족에게만 일어납니다.

 

세 번째 재앙 : 온 땅에 이가 들 끓다(16-19)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은 이해되지 않더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혹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마음을 닫고 있지 않은지 성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경고하시고 인도하시므로, 우리의 마음이 부드럽고 열려 있어야 그 뜻을 따를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노력과 한계를 인식하고, 하나님을 대체하려는 시도를 멈추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16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에게 명령하기를 네 지팡이를 들어 땅의 티끌을 치라 하라 그것이 애굽 온 땅에서 이가 되리라 17그들이 그대로 행할새 아론이 지팡이를 잡고 손을 들어 땅의 티끌을 치매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다 이가 되어 사람과 가축에게 오르니 18요술사들도 자기 요술로 그같이 행하여 이를 생기게 하려 하였으나 못 하였고 이가 사람과 가축에게 생긴지라 19요술사가 바로에게 말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하였으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게 되어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16-19)

 

두 번째의 개구리 재앙을 겪고서 바로는 백성을 보내겠다고 약속했지만, 재앙이 그치자 약속을 번복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세 번째 재앙을 보내십니다. 이제 전국에 이가 들끓게 하는 재앙입니다. 이 재앙은 앞서 두 번의 재앙과 달리 사전 경고 없이 벌어집니다. 예고하는 것은 바로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지만, 예고가 없는 재앙은 심판의 성격이 강합니다. 즉,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한 것에 대한 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론더러 모세의 지팡이를 들어 땅의 티끌을 치라고 명하십니다. ‘티끌’이란 땅의 ‘먼지’(아파르), 즉 ‘흙’을 의미합니다. ‘온 땅의 티끌’이 다 이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 표현은 전형적인 과장법입니다. 70인역을 비롯한 고대로부터 이것은 ‘이 재앙’으로 이해되었는데, 정작 ‘이’로 번역한 ‘킨님’, 단수 ‘켄’의 정체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 곤충들이 순식간에 몸에 달라붙은 것을 볼 때 이동이 매우 느린 ‘이’보다는 날아다니는 곤충이거나, 사람이나 짐승의 피부에 달라붙어 피를 빠는 흡혈 파리나 모기를 총칭하는 ‘각다귀’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사방으로 튀는 ‘벼룩’일 수도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성경의 표현대로 ‘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해충들은 사람과 가축의 몸에 기어올라 붙었습니다. 애굽의 마법사들도 술수를 써서 이가 생기도록 시도했지만, 이번에는 실패합니다. 그들은 곤충 떼의 출몰은 자신들의 능력 밖의 초자연적 현상으로 ‘하나님의 손가락(권능)’으로 발생한 일이라고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아닌 ‘하나님의 손가락’이라고 표현하였지만, 이것 역시 하나님의 권능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애굽 마법사들이 이것을 모방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 배후에 있는 악령의 능력의 한계 때문일 수 있지만, 그들의 눈속임 마법의 기술적 한계 때문으로 추론됩니다.

바로의 완고한 마음은 여전히 변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재앙(개구리 재앙)을 겪었을 때 바로의 기세가 처음으로 꺾였는데, 그것도 잠시뿐 여전히 완강합니다. 네 번째의 파리 재앙을 겪은 후에야 바로의 태도가 변합니다. 세 번째 재앙까지는 애굽과 이스라엘 모두에게 재앙이 임했지만, 네 번째 재앙부터 양상이 바뀌어 애굽 백성에게만 재앙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네 번째 재앙 : 온 땅에 파리(20-32)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우리를 세상과 구별하여 살아가도록 보호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기억하며, 신앙 생활 속에서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실 때, 우리는 그분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20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 그가 물 있는 곳으로 나오리니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21네가 만일 내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면 내가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과 네 집들에 파리 떼를 보내리니 애굽 사람의 집집에 파리 떼가 가득할 것이며 그들이 사는 땅에도 그러하리라 22그 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23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를 구별하리니 내일 이 표징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 24여호와께서 그와 같이 하시니 무수한 파리가 바로의 궁과 그의 신하의 집과 애굽 온 땅에 이르니 파리로 말미암아 그 땅이 황폐하였더라 25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 26모세가 이르되 그리함은 부당하니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애굽 사람이 싫어하는 바인즉 우리가 만일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제사를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27우리가 사흘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되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28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29모세가 이르되 내가 왕을 떠나가서 여호와께 간구하리니 내일이면 파리 떼가 바로와 바로의 신하와 바로의 백성을 떠나려니와 바로는 이 백성을 보내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일에 다시 거짓을 행하지 마소서 하고 30모세가 바로를 떠나 나와서 여호와께 간구하니 31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시니 그 파리 떼가 바로와 그의 신하와 그의 백성에게서 떠나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32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그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20-32)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애굽에 이가 재앙을 내리시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이 재앙은 애굽의 신들과 우상을 무너뜨리며, 이스라엘 백성은 고센 땅에서 보호받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여전히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통해 자신의 권능을 드러내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는 계획을 이어가십니다.

 

(1) 파리 재앙으로 황폐화된 땅(20-24)

 

혹독한 세 번째 재앙을 겪었지만, 바로는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즉시 네 번째 재앙이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를 찾아가도록 지시하십니다. 이 ‘아침’이 꼭 세 번째 재앙이 발생한 다음 날일 필요는 없습니다. 세 번째 재앙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며칠은 지속되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아침에 다시 바로를 강변에서 만납니다. 바로는 매일 아침 강변 산책을 하는 습관이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접견 장소는 빈번히 왕궁이었습니다. 모세는 다시 바로를 만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하도록 광야 여행을 허락해줄 것을 촉구해야 했습니다. 이번에도 바로가 거부한다면, 더욱 가혹한 네 번째 재앙이 애굽을 칠 것입니다. 그것은 파리 떼 재앙입니다. 애굽 왕 바로와 그의 백성, 바로의 집과 애굽 모든 백성의 집 안까지, 그리고 나아가 온 땅에 파리 떼가 출몰하겠지만, 오직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만은 이 재앙에서 예외가 될 것입니다(21-22).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이집트 백성 사이를 구별하기 시작하시니다(23). 이것은 구체적으로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를 통해 바로와 애굽 백성은 여호와가 어떤 분인지 더욱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22).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바로를 찾아가 경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것을 생략한 채 하나님께서 경고대로 즉시 재앙의 심판을 실행하신 것만을 보고합니다(24), 아마 바로가 그 요청을 재차 거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앞서 ‘이’로 번역된 ‘킨님’의 정체가 불분명했듯이, 여기 ‘파리 떼’로 번역된 ‘아로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어떤 생물의 떼인데, 혹자는 기생충이나 떼 짓는 들짐승으로 보기도 하지만, 전통적으로는 ‘파리 떼’로 번역해왔습니다. 70인역은 이것을 물어뜯고 피를 빠는 흡혈 파리(dog fly)로 번역하는데 개연성이 있습니다. 24절에서 보듯이 이 파리 떼로 인해 땅이 황폐해지고 비참한 결과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재앙으로 인해 땅이 파괴되었습니다(‘황폐하게 되었다’)는 평가가 내려집니다. 이것은 흡혈 파리 떼로 추정되는 곤충들이 초목까지 피폐하게 만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람의 주거 공간뿐 아니라 ‘온 땅’에 가득히 날아다니며 인간과 동물을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는 뜻입니다. 네 번째 재앙부터 이집트 마법사들이 아예 나타나지 않는데, 이런 특징은 마지막 재앙까지 이어집니다. 학자들 중에는 앞의 첫 번째 두 번째는 물과 관련짓고, 세 번째는 땅, 네 번째의 파리 재앙은 공기와 관련짓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물, 땅, 공기를 변질시킴으로써 애굽의 자연 전체에 재앙을 일으키시고 자신이 자연의 주인임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재앙은 이후에도 자연계 여러 영역에서 계속 발생하기 때문에, 이런 구분은 다소 인위적입니다.

 

(2) 백성의 여행을 허락하는 바로(25-32)

 

네 번째의 혹독한 재앙으로 온 땅이 피폐해지자 그제야 바로는 모세와 아론에게 굴복하는 태도를 취합니다. 그는 두 사람에게 예배를 허락하지만, 광야가 아닌 애굽 땅에서 하라고 제안합니다(25). 하지만 모세는 그 타협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그는 히브리인들의 제사가 애굽인들에게 역겨운 반감을 일으켜 큰 충돌이 일으킬 수 있고, 그러면 자신들이 돌에 맞을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거절합니다.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제사를 드리다’는 문자적으로 ‘애굽 사람의 눈앞에서 혐오스러운 것(토에바)을 희생으로 바치다’라는 의미입니다. 왜 히브리인의 제사가 애굽인에게 혐오스러운 것입니까? 애굽에서 신성시하는 동물인 소와 염소가 제물로 바쳐지기 때문일 수 있지만, 그보다는 두 문화권의 제사 전통의 차이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예로 애굽인들은 히브리인들과 겸상하는 것을 ‘혐오스러운 일’(토에바)로 간주했습니다. 애굽인들은 전통적으로 유목을 혐오했으며(토바), 유목민들을 부정하게 여겼습니다(창 46:34; 출 8:26). 심지어 히브리인들과 같은 방에서 잠을 자지도 않았습니다. 모세는 재차 자신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멀리 3일 길의 여행을 떠나 외딴 광야에서 예배 행사를 갖겠다는 입장을 고집합니다(27). 바로는 마지못해 그 여행을 허락하지만, 이번에는 거리 제한을 둡니다. 그가 집요하게 이스라엘 백성을 묶어두려는 이유는 경제적 이유 때문인 것이 분명합니다. 실제로 한꺼번에 성인 수십만 명의 노동력을 잃는다면 국가 경제가 마비될 수 있었습니다. 바로는 그들의 종교 행사를 위한 여행을 허락하는 순간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해방 시켜주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줄다리기를 한 것입니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합니다(28). 하루빨리 파리 떼가 애굽 땅에서 물러가게 하여 자신들의 고통을 끝내달라는 부탁일 것입니다. 모세는 다음 날 하나님께 간구하여 파리 떼가 물러가도록 하겠다고 약속하면서, 바로에게 다시는 자기들을 속이지 말라고 강하게 압박합니다. 바로를 떠나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즉시 응답되어 모든 파리 떼가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파라오는 또다시 마음을 바꾸고 약속을 번복합니다. 자신의 기존 입장을 완강히 고수하며 그 백성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부드럽고 열린 상태를 유지해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 속에서 구별하여 보호하시며,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아갈 때 그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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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08-01)


두 번째 재앙 : 개구리로 온 땅을 치다

출애굽기 8장 1-15절


 

우리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와 결단을 요구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회개 없는 기도는 진정한 변화로 이어지지 않으며, 우리의 신앙생활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솔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마음을 열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그분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 애굽에 여호와의 두 번째 재앙이 임합니다. 개구리 떼가 전국에 창궐하여 애굽 온 국민의 생활이 마비됩니다. 바로의 왕실과 침대까지 개구리 떼가 침입하여 전국에 공포가 임합니다. 바로의 마법사들 또한 개구리 재앙을 일으키며 여전히 물러서지 않으나, 핏빛 강물의 재앙과 마찬가지로 상황만 악화될 뿐입니다. 여호와의 두 번째 재앙을 겪은 바로는 마침내 기세가 꺾이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두 번째 재앙 : 개구리로 온 땅을 치다(1-15)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인식해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을 대체하려고 하거나,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궁극적으로 실패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문제의 진정한 해결자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의뢰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2네가 만일 보내기를 거절하면 내가 개구리로 너의 온 땅을 치리라 3개구리가 나일 강에서 무수히 생기고 올라와서 네 궁과 네 침실과 네 침상 위와 네 신하의 집과 네 백성과 네 화덕과 네 떡 반죽 그릇에 들어갈 것이며 4개구리가 너와 네 백성과 네 모든 신하에게 기어오르리라 하셨다 하라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에게 명령하기를 네 지팡이를 잡고 네 팔을 강들과 운하들과 못 위에 펴서 개구리들이 애굽 땅에 올라오게 하라 할지니라 6아론이 애굽 물들 위에 그의 손을 내밀매 개구리가 올라와서 애굽 땅에 덮이니 7요술사들도 자기 요술대로 그와 같이 행하여 개구리가 애굽 땅에 올라오게 하였더라 8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여호와께 구하여 나와 내 백성에게서 개구리를 떠나게 하라 내가 이 백성을 보내리니 그들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릴 것이니라 9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내가 왕과 왕의 신하와 왕의 백성을 위하여 이 개구리를 왕과 왕궁에서 끊어 나일 강에만 있도록 언제 간구하는 것이 좋을는지 내게 분부하소서 10그가 이르되 내일이니라 모세가 이르되 왕의 말씀대로 하여 왕에게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같은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니 11개구리가 왕과 왕궁과 왕의 신하와 왕의 백성을 떠나서 나일 강에만 있으리이다 하고 12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떠나 나가서 바로에게 내리신 개구리에 대하여 모세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13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시니 개구리가 집과 마당과 밭에서부터 나와서 죽은지라 14사람들이 모아 무더기로 쌓으니 땅에서 악취가 나더라 15그러나 바로가 숨을 쉴 수 있게 됨을 보았을 때에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더라(1-15)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애굽에 개구리 재앙을 내리겠다고 경고하십니다. 개구리가 애굽 전역에 넘쳐나자, 바로는 모세에게 기도를 요청하지만 재앙이 사라진 후에도 회개하지 않고 마음을 강퍅하게 합니다. 이 과정은 하나님의 권능과 인간의 불신, 그리고 진정한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1) 개구리 재앙을 하달하시는 하나님(1-5)

 

전국의 모든 강과 호수에 임한 핏물 재앙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꺾지 않은 바로에게 두 번째 재앙이 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다시 바로를 찾아가 광야에서 백성이 예배를 드리도록 내보내 줄 것을 요구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아마 두 번째 만남은 바로의 궁전에서였을 것입니다. 만일 바로가 요청을 거부하면, 이번에는 개구리 재앙이 애굽 온 땅에 임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개구리 떼의 번성과 이스라엘 민족의 번성에 동일한 단어 ‘샤라츠’가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번성은 축복이지만, 개구리 떼의 번성은 재앙입니다. 나일강에서 무수히 생겨난 개구리 떼는 전국을 뒤덮을 것입니다(3-4).

밖으로는 ‘애굽 온 땅에’, 정확히는 ‘애굽 모든 경계선/영역에’ 창궐했으며, 안으로는 모든 집의 구석구석까지 침입합니다. 상하 지위를 막론하고 애굽의 모든 주거지에 개구리 떼가 엄습할 것이며, 바로의 궁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마치 목을 조르듯이 개구리의 침입이 바로를 향해 점점 좁혀집니다(3). 처음에 나일강에서 올라온 개구리 떼는 바로의 궁전으로 몰려듭니다. 궁전 안 바로의 침실로 침입한 뒤 급기야 침대로 뛰어오릅니다. 나아가 개구리 떼는 바로의 모든 백성에게 침입할 것이며, 심지어 백성의 음식을 위한 화덕과 떡 반죽 그릇에까지 침범합니다(4).

이것은 바로 자신뿐 아니라 애굽의 온 백성이 개구리 떼의 창궐로 인해 의식주의 기본 생활조차 영위하기 힘든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앞서 지팡이를 내던져 뱀이 되게 하고 지팡이를 강물에 내리쳐 핏빛으로 만든 것과 달리, 이번에는 아론이 지팡이를 쥔 손을 단순히 들어 올리라는 지시를 받습니다(5).

 

(2) 개구리가 애굽 온 땅을 덮다(6-7)

 

모세와 아론은 바로를 찾아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실천합니다. 그들은 다시 바로에게 백성을 보내줄 것을 요구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합니다. 그리하여 아론이 애굽의 나일강과 모든 지류들을 향해 지팡이를 든 손을 들어 뻗습니다. 갑자기 개구리 떼가 강으로부터 뛰어 올라와 애굽 온 땅을 뒤덮었습니다(6).

첫 번째의 피의 재앙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애굽 마법사들이 아론의 기적을 흉내 냈습니다(7). 여기서는 바로가 마법사들을 불러들였다는 언급이 없고, 그들의 유사 기적에 대한 바로의 긍정적인 평가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로의 재가 없이 마법사들이 함부로 활동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다시 마법사들을 불러들였는데, 아마 이어지는 그의 반응과 태도를 볼 때, 이번에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 개구리 떼의 제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마법사들은 또다시 아론의 기적을 흉내 내는 재주를 부렸습니다. 마법사들이 경쟁에서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재주는 상황을 악화시켰습니다. 그들은 이번에도 비법(라트)을 사용했는데, 초자연적 능력을 발휘했는지 속임수를 썼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후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이 기적의 능력으로 개구리 떼를 발생시켰다면, 마찬가지로 없애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를 접견하러 들어가기 전에 개구리 재앙이 발생한 것을 보고 교묘한 마법처럼 보이는 속임수를 준비했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들이 실제 영적 능력을 발휘했는지 속임수를 썼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결과적으로 개구리 떼가 더욱 번성하였고, 바로는 모세에게 즉시 항복합니다.

강물이 피로 변한 것이 적조 현상일 수 있는 것처럼, 개구리 떼의 출몰 또한 자연 현상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매년 나일강이 홍수로 범람한 뒤 물이 빠지면 엄청난 개구리 떼가 번식했는데, 이때는 그 현상이 정확한 시점에 예외적인 규모로 발생했다고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적조의 발생으로 물고기가 떼죽음함으로 강물이 썩어 개구리 떼가 육상으로 올라왔다고 생각합니다.

설사 그렇다 해도, 여기에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직접 일으키신 초자연적인 기적의 요소가 개입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써 특정한 날 일순간에 개구리 떼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자연 현상을 기적으로 포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의 지팡이로 개구리 떼를 통제할 수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3) 처음으로 흔들리나 고집을 꺾지 않는 바로(8-15)

 

개구리 역시 애굽에서는 신처럼 숭배되었는데 개구리 떼의 엄청난 번식이 신의 능력과 번식의 상징으로 간주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신 헤케트(Hekhet) 역시 다산과 창조의 신이었던 크눔(Khnum)의 배우자로서 두상이 개구리 모양을 한 여성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며, 인간을 진흙으로 창조한 여신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번성을 상징하는 개구리 떼를 애굽을 심판하는 데 사용하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번성을 두려워하여 잔혹한 유아 살해의 살상극을 벌인 바로와 애굽을 향한 역설적인 ‘번성의 심판’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개구리 떼의 발생은 하나님에 의해 발생한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셨습니다. 이로써 그들이 숭배하는 개구리와 여신 헤케트는 무능한 신이라는 사실이 증명됩니다. 첫 번째의 재앙은 애굽이 신으로 숭배하는 나일강에 대한 심판으로 볼 수 있으며, 두 번째 재앙 또한 그들이 번성의 신으로 섬기는 개구리 신에 대한 심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열 가지 재앙 모두 그런 관점에서 해석할 여지가 있는데,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는 않습니다. 애굽 전역이 마비되는 상황이 발생하자 바로는 당황하며 두려워했습니다(8). 이 개구리가 얼마 동안 창궐했는지 본문에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유대 랍비 문헌인 학가다(Haggadah)는 첫 번째 재앙과 마찬가지로 일주일 동안 지속되었다고 말합니다. 바로가 여기서 처음으로 흔들리며 여호와께 굴복하는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모세와 아론을 불러들여 개구리 재앙을 멈춰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는 자신의 마법사들을 총동원해 재앙을 그치게 하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으킨 신앙을 사람이 돌이킬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바로는 모세와 아론에게 읍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그가 ‘여호와께 구하여’ 개구리를 떠나게 해달라고 발언한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는 비로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그분이 어떤 분인지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는 모세와 아론이 기도하여 개구리 재앙을 멈춘다면,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보내 예배를 드리도록 허락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여기서 모세는 지혜롭게 협상을 이끕니다. 그는 ‘언제’ 개구리 떼를 없앨지 바로가 날짜를 선택하라고 제안합니다. 그날 즉시 개구리 떼는 온 땅에서 제거되고 다시 나일강에서만 들풀게 될 것입니다. 구체적인 날짜의 제안은 분명히 바로에게 여호와가 어떤 분인지 더욱 분명하게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10). 바로는 ‘내일’ 당장 없애달라고 부탁합니다. 그의 다급한 재촉은 그가 이 재앙으로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잘 보여줍니다.

모세와 아론은 바로의 요청대로 이튿날 아침 하나님께 ‘부르짖어’ 개구리 재앙을 그치게 해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12). 기도가 즉각 응답되어 여호와께서 재앙을 거두어가셨습니다. 개구리 떼는 모두 육지에서 떼죽음하는 방식으로 제거되었습니다. 애굽 백성이 개구리 사체를 거두어 여러 무더기로 쌓았습니다. 히브리어에서는 ‘무더기, 무더기’로 동일 단어가 반복되는데, 이것은 많은 무더기를 가리키는 강조 용법입니다.

무더기로 쌓인 개구리 사체가 썩자 다시 악취가 애굽 온 땅이진동해 숨쉬기조차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악취가 사라져 숨을 쉴 만하자 바로는 다시 생각을 바꿉니다. 그의 마음이 다시 완고해져 모세와 아론의 제안을 다시 거부합니다(15).


하나님의 권능과 인간의 반응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명령하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강퍅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하고, 진정한 회개와 순종의 삶을 다짐합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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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07-02)


첫 번째 재앙 : 나일강이 빗빛으로 변함

출애굽기 7장 8-25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에 대한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모세와 아론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 놀라운 기적을 이루실 수 있으며, 우리의 작은 순종이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힘쓰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이 심기일전하여 다시 바로를 접견하게 하십니다. 그들은 가서 이제 하나님의 지팡이로 바로와 그의 신하들 앞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앞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만들며 온 애굽 땅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7:1-4).

 

지팡이가 뱀으로 변함(8-10)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명령과 사명을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우리가 그분의 뜻을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어려움과 두려움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의 작은 순종이 하나님께서 이루실 큰 일을 준비하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귀 기울이며 그분의 뜻을 따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8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9바로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이적을 보이라 하거든 너는 아론에게 말하기를 너의 지팡이를 들어서 바로 앞에 던지라 하라 그것이 뱀이 되리라 10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아론이 바로와 그의 신하 앞에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된지라(8-10)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을 다시 바로에게 보내십니다. 그들에게 요구한 것은 믿음과 순종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지팡이를 던지라고 명하십니다. 순종하면 지팡이는 뱀으로 변할 것입니다. 두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했고 실제로 지팡이가 뱀으로 변했습니다(10). 여기서 모세는 아론이 든 자신의 지팡이를 ‘너의 지팡이’로 칭합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이이며, 모세가 들 때는 모세의 지팡이, 아론이 들 때는 아론의 지팡이로 기능합니다. 여기서 ‘뱀’의 히브리어가 ‘나하쉬’가 아닌 ‘탄닌’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애굽 술객들의 술수로 변한 뱀도 ‘탄닌’입니다(12). ‘탄닌’이 어떤 동물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는 ‘나하쉬’가 아닌 ‘탄닌’이 사용된 이유를 독자들에게 뱀의 이미지를 더욱 섬뜩하게 만드는 문학적 효과를 내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주석가들은 에스겔 29:3에서 바로의 별명이 ‘바다 가운데의 탄닌(큰 악어)’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이 단어를 해석합니다. 바로가 ‘탄닌’으로 상징화되고 있기에 의도적으로 이 단어가 사용된다는 뜻입니다. 이 지팡이가 ‘탄닌’으로 변한 것은 하나님께서 ‘탄닌’마저 자신의 손으로 부리는 존재이심을 보여주며, 따라서 바로도 하나님의 통제 하에 있다는 사실을 바로와 신하들 앞에서 시연하기 위함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고대 애굽인들은 나일강의 악어를 악어 신 ‘세베크(Sebek, 혹은 소베크[Sobek])’로 숭배하였고, 이 악어 신은 바로의 힘과 권세를 상징했습니다. 이 첫 번째 기적은 재앙의 징벌로 이어지지 않았기에 열 가지 재앙 목록에 포함되지는 않습니다. 이 기적의 목적은 단순히 하나님의 능력을 바로에게 보여줌으로써 그에게 경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모세의 지팡이가 승리하다(11-1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과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를 의지해야 합니다. 세상의 권력과 악이 우리를 압박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시며 그분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가 가진 지팡이, 즉 우리의 믿음과 기도는 하나님이 주신 권능의 상징입니다. 우리는 그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11바로도 현인들과 마술사들을 부르매 그 애굽 요술사들도 그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되 12각 사람이 지팡이를 던지매 뱀이 되었으나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키니라 13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11-13)

 

바로는 아무런 당황한 기색 없이 수하의 현인들과 마법사들을 부릅니다. 현인은 왕의 국정 파트너로서 자문단이었을 것이며, 마법사들 역시 아마 마술과 점술에 능하여 신통력을 부리는 제사장들로 왕에게 신의 계시나 점괘를 전해주는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요술’은 어떤 속임수를 쓴 신비한 기술일 수 있습니다. 이 애굽 술객들의 실명이 신약에 등장하는데, ‘얀네와 얌브레’입니다(딤후 3:8).

아마 이들 이름은 전승을 통해 유대 문헌에 전해온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바로의 호출을 받은 애굽 마법사들은 아론의 지팡이가 뱀으로 변했다는 소식을 듣고 미리 뱀에 최면을 걸어 뻣뻣해진 뱀을 들고 와 현장에서 최면을 푸는 기교를 부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중에 물을 핏빛으로 변하게 하고 개구리 재앙을 흉내 낸 것으로 볼 때, 그들의 마법을 속임수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이 속임수였든 실제적인 마법이었든지 간에 모세의 대리인 아론과 바로의 대리인 마법사들이 대결하는 형국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대신하므로 사실 아론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나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표한 아론의 지팡이가 애굽을 대표한 술객들의 지팡이를 삼킨 이 사건은 상징하는 바가 큽니다.

애굽, 특히 고대 상(上) 애굽의 수도인 ‘룩소르(Luxor)’ 지역의 유적지에는 신전과 바로의 동물 무덤 벽화에 무수히 많은 뱀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뱀, 특히 코브라는 바로의 왕관에 장식될 정도로 중요한 신이었습니다. 코브라는 바로와 애굽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여겨졌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가 바로의 지팡이를 삼킨 것은 하나님의 권능이 바로의 권능을 완전히 집어삼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여전히 완고하여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바로는 고집을 부립니다(13).

 

첫 번째 재앙 : 나일강이 핏빛으로 변하다(14-25)

세상의 힘과 권세가 아무리 강해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초월하십니다. 우리가 직면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실 것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의 계획은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용기를 가져야 하며, 우리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드러내실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1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는도다 15아침에 너는 바로에게로 가라 보라 그가 물 있는 곳으로 나오리니 너는 나일 강 가에 서서 그를 맞으며 그 뱀 되었던 지팡이를 손에 잡고 16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왕에게 보내어 이르시되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 하였으나 이제까지 네가 듣지 아니하도다 17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니 네가 이로 말미암아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볼지어다 내가 내 손의 지팡이로 나일 강을 치면 그것이 피로 변하고 18나일 강의 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는 악취가 나리니 애굽 사람들이 그 강 물 마시기를 싫어하리라 하라 19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에게 명령하기를 네 지팡이를 잡고 네 팔을 애굽의 물들과 강들과 운하와 못과 모든 호수 위에 내밀라 하라 그것들이 피가 되리니 애굽 온 땅과 나무 그릇과 돌 그릇 안에 모두 피가 있으리라 20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바로와 그의 신하의 목전에서 지팡이를 들어 나일 강을 치니 그 물이 다 피로 변하고 21나일 강의 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는 악취가 나니 애굽 사람들이 나일 강 물을 마시지 못하며 애굽 온 땅에는 피가 있으나 22애굽 요술사들도 자기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23바로가 돌이켜 궁으로 들어가고 그 일에 관심을 가지지도 아니하였고 24애굽 사람들은 나일 강 물을 마실 수 없으므로 나일 강 가를 두루 파서 마실 물을 구하였더라 25여호와께서 나일 강을 치신 후 이레가 지나니라(14-25)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바로에게 가서 나일강의 물이 핏빛으로 변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 말씀대로 지팡이로 나일강을 치자 물이 핏빛으로 변하고, 애굽의 마법사들이 이를 흉내내지만 오히려 재앙을 악화시킵니다. 그러나 바로는 이 기적을 보고도 마음을 완고하게 유지하며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1) 피 재앙을 하달하시는 하나님(14-19)

 

바로의 마음은 여전히 완강합니다. 바로의 고집을 표현하는 동사들이 세 가지로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다음 날 아침 나일 강변에 가서 다시 바로를 만나라고 지시하십니다(15). 바로가 아침부터 무슨 목적으로 나일 강변으로 나갔는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자주 아침에 강변 산책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앞서 요청했던 동일한 요구 사항을 전달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도록 내보내달라는 요구입니다(16). 이것을 허락하지 않은 대가로 이제 애굽의 모든 물이 피로 변할 것입니다. 그때에 바로는 그분이 여호와이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물이 변한다는 것은 강물이 핏빛으로 변한다는 뜻입니다. 강물이 피로 변한 결과 강이 썩어 악취를 풍깁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인에 의해 신으로 숭배된 나일강을 악취가 나게 만드신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애굽 온 땅에서 악취가 나게 하십니다(8:10). 나일강뿐 아니라 애굽의 모든 물이 핏빛이 될 것입니다(19). 이것은 강(나일강), 운하(나일강 지류들), 못, 호수를 포함합니다. 19b절의 “나무 그릇과 돌 그릇 안에는” 문자적으로 ‘나무들과 돌들 안에’입니다. 나무와 돌은 우상의 재료이므로, 이것은 애굽의 모든 우상들도 이재앙을 피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카수토(Cassuto)는 애굽에서 매일 아침 우상들을 물을 부어 씻었는데, 그물들마저 핏물로 변해 우상들에게 부어졌다고 해석합니다. 카토는 이 경우 전치사 ‘베’는 ‘~안에’ 보다는 ‘위에’(on)로 해석된다고 말합니다. 애굽의 모든 물, 특히 나일강이 핏빛으로 변하는 재앙은 사실 애굽의 생명수를 없애는 무서운 재앙입니다. 나일강은 애굽의 축복이었다. 그 물은 식수였을 뿐 아니라(21), 농사와 과수를 위한 농업용수였으며, 나아가 물고기를 비롯한 다양한 수산물의 공급원이었습니다(21). 따라서 애굽의 젖줄인 나일강이 썩는 것은 커다란 재앙이 되었습니다.

 

(2) 나일강이 핏빛으로 변하다(20-25)

 

모세와 아론이 명령에 순종하여 지팡이를 들어 나일 강물을 치자, 물이 갑자기 핏빛으로 변했습니다. 나일강의 고기들이 떼죽음하여 물에서 악취가 풍기자 애굽인들은 더 이상 그 물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강물 외에도 하나님 말씀대로 애굽 온 땅의 물이 피로 변했습니다(21).

바로는 이번에도 자신의 마법사들을 동원해 모세의 기적을 따라 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강물을 피로 변화시켰습니다. 이것이 실제 마법사들을 통제하는 악령에 의한 기적인지, 아니면 그들이 몰래 빨간 염료를 강에 푸는 방식으로 또 다른 고도의 속임수를 썼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아직 핏빛으로 변하지 않은 강물이 남아 있을까요? 카수토는 아론이 지팡이를 뻗지 않은 방향의 물이 멀쩡했다고 이해하며, 애굽의 술객들이 그 남은 물을 핏빛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 술사들은 어리석게도 재앙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더욱 어리석게도 바로는 그것을 기뻐합니다. 참고로 핏빛 강물은 적조 현상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나일강 상류에서 홍수가 발생할 때, 상류의 황토가 쓸려 내려와 강물이 붉게 보이게 되고, 이때 하천의 부영양화로 인해 적조 현상이 발생하여 수많은 물고기가 떼죽음하며 악취가 발생합니다.

고대 근동의 여러 문헌에서도 이러한 적조 현상으로 보이는 강물의 변화에 대한 언급들이 종종 나타납니다. 나일강이 피로 변한 후 7일 동안 이 상태가 계속되었습니다. 숫자 ‘7’은 익히 아는 대로 완전수이며, 따라서 7일은 이 재앙의 완전한 성취를 뜻할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능을 드러내시고 인간의 완고함을 경고하신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의 마음이 완고해져 그 경고를 무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며, 어떤 상황에서도 함께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고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드러내실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그분의 뜻을 따르며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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