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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06-01)


다시 소명을 받는 모세

출애굽기 6장 1-13절


사업에서 크게 실패한 사람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어렵습니다. 같은 일을 두 번 실패한 경우, 다시 시작하는 데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용기는 쉽게 얻어지지 않으며, 실패의 경험은 두려움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고 다시 도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세의 이야기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서는 용기를 보여줍니다. 그의 사례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희망을 제공합니다.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이 여호와임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언약을 기억하시며,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가혹한 노역으로 인해 백성들이 모세의 말을 듣지 않자, 모세도 하나님께 불평합니다. 그런 모세에게 사명을 성취하실 것을 강조하시면서 다시 바로에게 찾아가도록 명령하십니다.

 

다시 알려주신 이름 여호와(1-5)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어떤 존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신의 존재를 증명해 줄 ‘더 위대한 존재’가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굳이 자신을 드러내실 필요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호칭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어떤 생각이었습니까?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2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3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4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류하는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5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1-5)

 

이스라엘 백성이 겪고 있는 고난과 모세의 고뇌는 성경 속에서 중요한 주제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해방의 약속을 믿었지만, 현실의 어려움에 직면하면서 불안과 의구심이 생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불만을 이해하시며, 그의 마음을 헤아리셨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시금 자신의 계획과 약속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주셨고, 모세에게 그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이는 신앙의 여정에서 인간의 약함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모두 보여주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고, 그들의 고난을 통해 더 큰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가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신뢰와 인내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원망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강한 손’을 사용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1).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키는 ‘강한 손’은 6절의 ‘편 팔’과 비슷한 뜻입니다. 하나님의 강한 손과 편 팔은 애굽에 엄청난 재앙을 불러들일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낼 것이며’, ‘쫓아낼 것이다.’ 동사 ‘가라쉬’는 보통 전쟁에서 승자가 적들을 영토 밖으로 쫓아낼 때 사용됩니다. 예컨대, 가나안 전쟁에서 승자인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족속들을 그 땅에서 ‘쫓아낸다.’ 여기서는 역설적으로 패자인 바로와 에굽가 승자인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을 추방할 것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너희 조상들에게 전능의 하나님(엘 샤다이)으로는 나타났으나 여호와로는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창세기는 사람들이 최초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것은 셋의 아들 에노스가 탄생할 때부터였다고 말합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 여기서 ‘불렀다’는 것은 분명히 예배 행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후에도 족장 시대에 믿음의 사람들은 꾸준히 여호와와 만남을 지속하며, 그분이 보내신 여호와의 사자가 빈번히 활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이미 여호와를 알고 있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왜 출애굽기 6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직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까?

이에 대한 비평학자들의 설명은 단순하고 간단합니다. 무엇보다 이것은 서로 다른 자료가 섞여 들어간 결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견해는, 여호와는 후대의 이름인데 창세기 편집자가 그 후대의 이름을 태초의 사건에서부터 시대착오적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런 모순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 저작설을 떠나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일관된 편집적 통일성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이것이 자료의 충돌이나 시대착오적인 신명의 사용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뛰어난 히브리어 문법 학자인 드라이버(G. Driver)는 이것을 감탄의 부정문으로 본다. 그는 3b절은 ‘내가 여호와로 알리지 않았다’가 아니라 ‘내가 이미 여호와로 알리지 않았는가!’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이것을 부정이 아닌 긍정의 의미로 해석한 것입니다. 한국 학자 중에 기동연(고신대학원)이 이와 비슷한 견해를 제안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호와라는 이름을 조상에게 알린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 견해가 상당히 매력적임에도 불구하고 학계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구문론적인 측면에서도 지지받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정경의 통일성을 수용하는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무난한 해석을 제안합니다. 이미 에노스가 탄생할 즈음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계시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간직하는 내재적 속성과 능력,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여호와의 인격적인 실체에 대해서는 계시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출애굽 사건을 통해 그들은 여호와가 어떤 분인지를 비로소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여호와’이심을 알려주고자 하십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뒤이어 언약을 상기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조상들에게 그들이 거주하던 가나안 땅을 주기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4).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6-9)

오늘날도 우리의 필요를 따라 그 필요를 채워주는 분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만약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 샤파’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꼭 필요하신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렇게 역사해 나가실 것입니다.

 

6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7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8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하셨다 하라 9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6-9)

 

하나님께서는 ‘나는 여호와다’라고 거듭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반드시 애굽의 학정으로부터 건지시고 애굽에 큰 심판을 내려 그들을 속량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손은 가장 강하시며, 그분이 팔을 펴시면 대적할 세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하는 ‘속량자’가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한 뒤 조상들에게 맹세한 그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고 그들의 영원한 유산(기업)으로 주실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여호와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직 믿음이 없었습니다. 이미 모세가 전한 여호와의 계획을 전해 들었고, 그가 그것을 확증하는 기적을 시연하는 장면을 다 지켜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강한 압박을 가해오는 바로를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였습니다.

 

다시 바로에게 가라(10-13)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대해 의구심을 가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이나 상황이 아닌, 그분의 사역에 대한 우리의 순종을 원하십니다. 또한,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실에 집중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모세가 다시 바로에게 가는 것은 쉽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인생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신뢰해야 합니다.

 

10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1들어가서 애굽 왕 바로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게 하라 12모세가 여호와 앞에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 13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사 그들로 이스라엘 자손과 애굽 왕 바로에게 명령을 전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시니라(10-13)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바로를 다시 찾아갈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는 바로와 2차 협상을 벌여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자신감을 상실한 상태입니다. 그는 앞서 제시한 변명을 다시 늘어놓습니다. 자신의 언변이 부족하다는 핑계입니다. 아론이 모세의 입이 되어 협상을 진행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고, 백성들을 설득하기에는 너무 신뢰를 잃은 상태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도 자기 말을 듣지 않는데 바로가 자신의 말을 들을 리 만무하다고 하면서, 다시 한 번 자신의 무능한 혀와 입을 탓합니다. 특이하게 앞에서는 혀와 입이 ‘무겁다’는 표현을 쓴 반면, 여기서는 자신의 부족한 언변을 ‘할례받지 않은 입술’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특이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할례받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 백성으로 부적격한 것처럼 비유적으로 할례받지 않은 입술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뭔가가 덮고 있는 듯이 입술이 답답해서 협상이 원활하지 않다는 표현입니까? 필자는 후자의 비유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말주변이 없다는 모세의 변명이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변명은 정당하지 못한데, 이미 하나님께서는 유능한 대변인 아론을 그의 입으로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한 번 협상에 실패했다고 하여 낙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장면은 모세의 연약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연약한 한 인간에 불과할 뿐 이스라엘의 참 구원자는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과 달리 모세의 변명에 아무 반응을 하지 않으신 채 그저 다시 파라오에게 가라고만 하십니다. 모세와 아론은 다시 바로와 협상하여 그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들을 통해 바로를 굴복시켜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내실 것입니다.


환자가 치료되는 과정에서 ‘호전 반응’이 나타나듯, 이스라엘 백성들도 겉으로는 더 힘들어 보일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만 믿는 것은 불신앙을 초래합니다. 믿음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를 신뢰하며 나아갑니다. 하나님께 봉사하고 헌신해도 삶이 더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평이나 원망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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