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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10-01)


여덟째 메뚜기 재앙

출애굽기 10장 1-20절


 

우리는 교만한 마음 대신 겸손한 마음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겸손히 하나님께 나아갈 때, 그분의 자비와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 본문에 모세는 다시 바로를 만나러 가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바로를 만나 메뚜기 재앙을 엄중히 경고합니다. 이때 바로는 재앙을 모면하려고 다시 협상안을 제시합니다. 장정들만 가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거부하자 협상은 타결되지 않습니다. 이윽고 무서운 메뚜기 떼가 엄습하자 바로는 급히 모세와 아론을 불러들여 잘못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재앙이 그치자 다시 마음을 바꿉니다.

 

메뚜기 재앙을 예고한 모세(1-6)

어리석은 사람들은 상황이 악화되기 전까지 문제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고집을 부립니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더 큰 손실을 초래합니다. 문제를 미리 인식하고 해결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항상 겸손함과 열린 마음이 중요합니다. 바로의 완악한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2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1-2)

열 가지 재앙(7:14-12:30)

재앙의 유형 재앙의 기간 특이사항 성경본문
아침 일찍 바로 앞에 선 모세 (7:15) 피(나일강) 7일 애굽 마술사도 행함 7:14-25
개구리 하루 애굽 마술사도 행함 8:1-15
- 애굽 마술사가 행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함 8:16-19
아침 일찍 바로 앞에 선 모세 (8:20) 파리 하루 이스라엘의 주거지 고센 땅에는 파리가 없음 바로의 번복 8:20-32
가축의 죽음 - 이스라엘의 가축은 죽지 않음 9:1-7
곪는 종기 - 애굽사람과 짐승에게만 생김 9:8-12
아침 일찍 바로 앞에 선 모세 (9:13) 우박 즉시 그침 요청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워한 애굽 사람의 가축은 살아남음,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음 9:13-35
메뚜기 즉시 그침 요청 아침에 동풍이 메뚜기를 불어옴 남자만 출애굽 허락 10:1-20
짙은 어둠 3일 가축을 제외한 출애굽 허락 10:21-29
최악의 재앙 맏아들 사망 밤중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로 구원받음 11:1-12:30

여호와께서는 다시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십니다. 이때 바로가 왜 완고한 마음을 바꾸지 않았는지를 알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바로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습니다. 물론 바로의 완고함은 본인의 자유의지에 따는 자발적 결정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에 의해 생긴 심리 적용임을 밝힙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비로의 마음을 통제하시는 것인데, 여기서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드신 목적이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와 그의 신하들 앞에서 기적들(표징)을 연달아 일으키시기 위함입니다(2). 이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병 주고 약주는 괴팍한 분이 아닙니까? 카수토는 하나님의 이런 비논리성은 후대의 사상, 특히 그리스 철학에 기반하여 고대 히브리어 본문을 읽으려는 시도에서 오는 괴리감이라고 설명합니다. 당대의 독자들에게, 그리고 히브리 사상으로는 이상할 것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구약은 역사에 개입하시면서 궁극적으로 인간의 생각과 계획을 통제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자유하심을 교훈합니다. 가룟 유다는 이미 작정된 길로 갔으며 바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과 섭리를 다 이해할 수 없기에 신정론 온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로 물든 본성에 따른 행동을 자주 묵인하고 허용하신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통제 가능하지만 내버려 두십니다.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롬 1:24-26). 이것은 죄가 죄로 밝히 드러나게 하심이며, 역설적으로 그들이 그 죄에 대한 심판을 받게 하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롬 2:5). 성경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수동적 묵인을 그분의 능동적인 작업인 것처럼 표현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바로와 애굽은 거듭된 심판을 받고 여호와의 능력과 그분의 하나님 되심은 더욱 밝히 드러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과 그의 후손들의 귀에 애굽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과 이적들을 이야기해주어야 합니다. 모세의 말을 전해 들은 애굽 백성은 하나님께서 전능한 여호와이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3).

 

여덟 번째 재앙 : 메뚜기 떼가 엄습(3-15)

성도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자신이 원하는 때만 순종하는 것은 진정한 순종이 아닙니다. 진짜 순종은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타협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범죄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종하라고 요구하시며, 그 안에는 놀라운 복이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의지로 완전히 순종하기 어려운 상황이 있으니,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조건 없이 끝까지 순종해야 합니다.

 

3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되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 겸비하지 아니하겠느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라 4네가 만일 내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면 내일 내가 메뚜기를 네 경내에 들어가게 하리니 5메뚜기가 지면을 덮어서 사람이 땅을 볼 수 없을 것이라 메뚜기가 네게 남은 그것 곧 우박을 면하고 남은 것을 먹으며 너희를 위하여 들에서 자라나는 모든 나무를 먹을 것이며 6또 네 집들과 네 모든 신하의 집들과 모든 애굽 사람의 집들에 가득하리니 이는 네 아버지와 네 조상이 이 땅에 있었던 그 날로부터 오늘까지 보지 못하였던 것이리라 하셨다 하고 돌이켜 바로에게서 나오니 7바로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되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 하고 8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로 다시 데려오니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갈 자는 누구 누구냐 9모세가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우리가 남녀 노소와 양과 소를 데리고 가겠나이다 10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와 너희의 어린 아이들을 보내면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함과 같으니라 보라 그것이 너희에게는 나쁜 것이니라 11그렇게 하지 말고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가 구하는 바니라 이에 그들이 바로 앞에서 쫓겨나니라 12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 땅 위에 네 손을 내밀어 메뚜기를 애굽 땅에 올라오게 하여 우박에 상하지 아니한 밭의 모든 채소를 먹게 하라 13모세가 애굽 땅 위에 그 지팡이를 들매 여호와께서 동풍을 일으켜 온 낮과 온 밤에 불게 하시니 아침이 되매 동풍이 메뚜기를 불어 들인지라 14메뚜기가 애굽 온 땅에 이르러 그 사방에 내리매 그 피해가 심하니 이런 메뚜기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것이라 15메뚜기가 온 땅을 덮어 땅이 어둡게 되었으며 메뚜기가 우박에 상하지 아니한 밭의 채소와 나무 열매를 다 먹었으므로 애굽 온 땅에서 나무나 밭의 채소나 푸른 것은 남지 아니하였더라(3-15)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애굽의 바로에게 메뚜기 재앙을 경고하십니다. 바로는 하나님께 회개를 요청하지만, 그의 마음은 완고하여 결국 순종하지 않습니다. 메뚜기는 애굽의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들며,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1) 메뚜기 재앙에 대한 경고(3-11)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바로를 만나 하나님의 경고를 그대로 전했습니다. 만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 백성을 보내지 않으면 이제 메뚜기 재앙이 애굽 영토에(“경내에”) 임할 것입니다. 메뚜기떼가 온 지면을 덮어 사방을 볼 수 없을 만큼 몰려올 것이며 모든 것을 먹어 치울 것입니다. 현재 우박으로 산천초목이 초토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남은 풀과 나무가 모두 뜯길 것입니다. 특히 5절의 “들에서 자라는 모든 나무”의 원문 뜻은 ‘싹이 나온 모든 나무’입니다. 우박을 맞아 만신창이가 된 나무들에 겨우 다시 싹이 났지만, 메뚜기가 그것마저 모두 뜯어 먹습니다.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우박 재앙을 면한 밀과 쌀보리도 이제 싹이 나면서 모두 뜯겼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지만, 이것들은 삼과 보리보다 두 달 정도 늦게 파종과 수확을 하므로 아직 싹이 트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애굽 국민을 위해 최소한의 것은 남겨두는 자비를 베푸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박에 상하지 아니한 밭의 모든 채소”에는(12) 밀과 쌀보리의 싹이 포함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메뚜기 떼의 창궐은 너무 극심하여 심지어 바로의 궁전과 신하들의 집, 그리고 애굽 온 백성의 집까지 들이닥칠 것이다. 이것은 전무후무한 메뚜기 재앙이 될 것입니다(6). 모세는 이 경고를 통보하고 바로를 떠났습니다. 바로 곁에 서 있던 신하들은 모세의 경고를 듣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은 바로를 설득하면서 애굽이 망하는 것을(과거나 과거완료의 의미인 “망한 줄을”보다는) 아직도 모르냐고 호소합니다. 그들은 모세로 인해 이집트가 ‘덫’(함정)에 걸렸다면서 그의 요구를 들어주어 덫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호소합니다(7). 바로는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모세와 아론을 다시 불러들입니다. 다시 협상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바로는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을 보낼 마음이 없습니다. 그는 광야로 예배드리러 떠날 사람들의 명단을 요구한다. 두 번째 타협안입니다. 바로는 앞서 네 번째의 파리 재앙이 닥치자 8:28에서 첫 번째 타협안을 내놓은 바 있습니다: ‘가되, 멀리 가지는 마라.’ 지금 그는 예고된 메뚜기 재앙을 두려워하면서도 일부만 보내겠다는 새로운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모세는 일언지하에 거절하면서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남녀노소와 모든 자녀가 함께 떠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모세의 모습은 제국의 왕 앞에서 위엄 있고 그의 요구는 당당합니다. 바로가 모세의 요구에 결국 응하지 않음으로써 협상은 결렬됩니다. 그는 자신이 모세의 요구대로 장정과 아이들을 보낼 수 없으니 ‘가되, 장정만 가고 그 외 모든 것을 두고 가라’고 말합니다(11). 그는 모세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절하면서 지금 히브리인들이 바라는 것이 예배를 드리는 것이니(11) 장정만 가도 충분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협상이 결렬되자 파라오는 모세와 아론을 쫓아냈습니다.

 

(2) 메뚜기 떼가 모든 식물(植物)을 삼키다(12-15)

 

내쫓긴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손을 내밀어 메뚜기를 불러들여 우박 재앙에서 남겨진 애굽의 모든 초목을 뜯어 먹게 하라고 명하십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어 올리자 여호와께서 동풍이 온종일 불게 하시어 다음 날 아침 메뚜기 떼가 온 이집트 땅으로 날아오게 하셨다. 여기서 동풍과 서풍은 이집트 기준이 아닌 가나안 기준으로 이해된다. 이집트에 메뚜기를 물고 오는 바람은 남쪽 수단(Sudan)의 사하라 사막에서 부는 뜨거운 계절풍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남풍임에도 불구하고 ‘동풍’으로 표현되는 것은 히브리인들에게는 동풍이 아마 맹렬한 바람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이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동풍은 동쪽의 뜨겁고 메마른 사막 지역에서 불어오는 심판의 바람이었으며(시 48:7; 겔 27:26;호 13:15) 가뭄을 일으키는 바람이었습니다(겔 17:10; 19:12;욘 4:8). 대지를 컴컴하게 덮은 메뚜기 때의 규모는 전무후무할 정도로 엄청났습니다(14). 그것은 애굽에 남아 있는 모든 푸른 초목을 뜯어 먹었습니다. 현재의 메뚜기 재앙 또한 애굽 신에 대한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신이시스(Isis), 곡물 신 세트(Seth)와 민(Min), 혹은 메뚜기 떼로부터 보호하는 신 세라피아(Serapia)를 굴욕적으로 만든 재앙일 수 있습니다.

 

바로의 거듭되는 거짓말(16-20)

우리는 바로의 거짓말을 통해 진정한 회개와 순종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진실한 회개로 나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속과 결단을 기억하시며, 그에 따라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순종이 따르지 않는 회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진실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더욱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16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급히 불러 이르되 내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와 너희에게 죄를 지었으니 17바라건대 이번만 나의 죄를 용서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 죽음만은 내게서 떠나게 하라 18그가 바로에게서 나가서 여호와께 구하매 19여호와께서 돌이켜 강렬한 서풍을 불게 하사 메뚜기를 홍해에 몰아넣으시니 애굽 온 땅에 메뚜기가 하나도 남지 아니하니라 20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16-20)

 

모세가 경고한 대로 무서운 메뚜기 떼의 공격을 받은 바로는 다시 모세를 급히 불러 재차 자신이 잘못을 범했다고 고백하여 용서를 구합니다. 이것은 우박 재앙 이후에 있었던 고백(9:27)에 이은 파라오의 두 번째 죄 고백입니다. 그는 메뚜기로 인한 애굽의 ‘죽음’, 즉 재앙을 없애달라고 부탁합니다. 모세는 바로를 떠나 여호와께 메뚜기를 거두어달라고 기도했습니다(18).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강한 바람을 반대편, 즉 서쪽에서 일으켜 불게 하셨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것은 가나안 땅을 기준으로 서쪽이며 동풍과 달리 그곳에서 서풍은 지중해로부터 오는 선선한 바람입니다. 강한 서풍이 메뚜기를 다시 홍해로 몰아넣자 애굽 땅에서 모든 메뚜기가 제거되었습니다. 사실은 애굽을 기준으로 지중해에서 불어온 북풍이 메뚜기 떼를 멀리 남쪽의 홍해 연안으로 내몰았을 것입니다. 메뚜기 떼가 사라지자 바로의 마음이 다시 바뀌었습니다. 여기서도 저자는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었다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진정한 순종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교만한 마음 대신 겸손한 마음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진정한 순종은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겸손히 하나님께 나아갈 때, 그분의 자비와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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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09-02)


일곱째 우박 재앙

출애굽기 9장 13-35절


 

좋은 운동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코치가 필수적입니다. 프로 선수와 동네 선수의 차이는 코치의 존재 여부에 있습니다. 코치는 선수가 잘못한 점을 지속적으로 지적하고, 슬럼프에 빠졌을 때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유명한 선수들은 개인 전담코치를 두고 자신의 잘못을 지적받아 더 나은 성적을 유지합니다. 잘못을 지적받을 때 열린 자세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며, 닫힌 마음은 문제를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 여섯 번째의 피부병인 독종의 재앙에 이어서 일곱 번째의 우박 재앙이 임합니다. 재앙의 강도와 범위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돌덩어리 같은 큼지막한 우박이 쏟아지는 전국적 재앙이 될 것이며,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초토화할 것입니다. 이번에도 하나님 백성의 거주지인 고센 땅만 재앙을 면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경고를 두려워한 애굽 백성들도 미리 피신하고 대비하여 피해를 입지 않습니다.

 

일곱 번째 우박 재앙에 대한 경고(13-21)

재앙이 임할 것이라는 경고는 바로가 스스로 선택한 결과라는 점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선택이 가져오는 결과를 책임져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 진정으로 의지하는 자는 그분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교훈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있게 다지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13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서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14내가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에게 내려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네가 알게 하리라 15내가 손을 펴서 돌림병으로 너와 네 백성을 쳤더라면 네가 세상에서 끊어졌을 것이나 16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17네가 여전히 내 백성 앞에 교만하여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느냐 18내일 이맘때면 내가 무거운 우박을 내리리니 애굽 나라가 세워진 그 날로부터 지금까지 그와 같은 일이 없었더라 19이제 사람을 보내어 네 가축과 네 들에 있는 것을 다 모으라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릇 들에 있어서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들에게는 우박이 그 위에 내리리니 그것들이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20바로의 신하 중에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그 종들과 가축을 집으로 피하여 들였으나 21여호와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 사람은 그의 종들과 가축을 들에 그대로 두었더라(13-21)

 

바로는 여섯 번째의 독종 재앙 앞에서 별다른 마음의 동요가 없었으며 완고한 고집은 여전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일곱 번째의 우박 재앙을 준비하십니다. 이것은 앞선 재앙들과 비교할 수 없이 강하고 치명적인 재앙이 될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아침 일찍’ 바로에게 가서 재차 동일한 요구를 전달해야 합니다. 여기서도 ‘아침 일찍’은 아마도 며칠간 계속되었을 독종의 재앙이 그친 뒤의 어느 날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앞으로 ‘모든 재앙들’을 쏟아내면, 바로와 그의 신하와 애굽 백성은 하나님 같은 분이 ‘온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14). 이 재앙에서 ‘모든’, ‘온’, ‘전부’를 뜻하는 ‘콜’이 반복적으로 사용됩니다: 모든 재앙, 온 천하, 모든 사람, 모든 채소, 밭에 있는 모든 것, 들의 모든 나무. 이러한 표현은 이 재앙들의 위력과 그것이 끼칠 광범한 포괄성을 말해줍니다. 이 재앙은 전면적인 파국을 초래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재앙들을 ‘바로의 심장’(원문의 의미)과 그의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내리실 것입니다. 여기서 바로의 심장에 재앙이 타격을 가한다는 표현은 그가 치명상을 입는다는 뜻일 수 있으며, 또는 그가 받을 심리적 충격의 측면을 부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앞선 전염병 재앙으로 바로와 애굽을 멸망시키지 않았는지 알려주십니다(15). 만일 다섯 번째 재앙인 전염병으로 가축뿐 아니라 사람까지 쳤다면, 바로도 그때 세상에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여섯 번째인 독종의 재앙은 사람과 가축 모두에게 발생했지만, 그것이 목숨을 빼앗아가는 질병은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바로는 여섯 번째 재앙 앞에서는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염병을 돌려 바로를 쓰러트리지 않으신 이유는 아직 바로를 살려두어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고, 온 땅에 그분의 이름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16). 어쨌든 그는 전염병으로 가축이 몰살되고 독종으로 가축과 사람이 신음하는 모습을 보면서 여호와가 어떤 분인지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의 교만은 여전하였으며,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주지 않았습니다(17).

이에 하나님께서는 우박 재앙으로 바로를 징계하십니다. ‘내일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는 ‘무거운’ 우박을 내리실 것입니다. ‘무거운’이라는 단어 ‘카베드’는 줄곧 바로의 ‘완고한’ 마음에 사용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고집에 걸맞게 돌처럼 단단한 커다란 우박이 애굽 온 땅에 쏟아질 것입니다. 학자들은 애굽 일부 지역에서 우박은 계절에 따른 정상적인 기상 현상이었다고 말합니다. 통상적으로 우박은 잠깐 쏟아지다 그칩니다. 그러나 애굽의 건조한 기후 조건을 고려할 때, 이 엄청난 우박 비는 특별한 일이었으며, 잠깐이 아닌 장시간 쏟아졌습니다. 게다가 그 우박이 고센 땅을 제외하고 전국적으로 쏟아졌다는 점에서 초자연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이런 우박 재앙은 애굽 역사상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18).

하나님께서는 미리 모든 사람에게 우박 재앙에 대한 경고를 하셨습니다. 바로는 애굽 전국에 즉시 사람을 보내 미리 피신하라고 경고해야 합니다. 들판의 모든 사람과 가축은 집 안으로, 또한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야 합니다(19). 바로는 아마 이 경고를 전국에 알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그의 신하들은 궁중에 소문이 퍼졌을 것이기에 우박 재앙이 곧 닥친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신하들 중에서 그 경고를 믿은 사람들은 모두 대책을 마련하여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그것을 무시한 사람들은 재앙의 희생물이 되었습니다(19).

참고로 앞의 재앙과 이어지는 여덟 번째의 메뚜기 재앙과 더불어 6,7,8번째 재앙은 모두 공중에서 발생합니다. 또한 현재의 우박 재앙도 애굽 신에 대한 심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우박이 쏟아지는 현상은 하늘의 통제권을 하늘 여신 누트(Nut)가 아닌 하나님께서 쥐고 계신다는 사실을, 또한 우박으로 산과 들의 초목과 곡식이 초토화했다는 사실은 곡식의 신인 세트(Seth)의 무능함을 드러냅니다. 또한 1, 2, 3번째 재앙이 첫 번째 묶음, 4, 5, 6번째 재앙이 두번째 묶음으로 묶이는데, 7, 8, 9번째 재앙은 세 번째 묶음으로 묶입니다. 세 번째 묶음의 공통점은 모세의 지팡이가 다시 사용되고, 두 번째 묶음에 이어서 애굽에만 발생하며, 마지막에 바로의 고백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일곱번째 재앙 : 우박이 쏟아지다(22-26)

하나님께서는 경고를 듣고 준비한 사람들과 준비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시며, 믿음과 순종의 중요성을 일깨웁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우박 재앙으로부터 보호받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안전과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경고에 귀 기울이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22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어 애굽 전국에 우박이 애굽 땅의 사람과 짐승과 밭의 모든 채소에 내리게 하라 23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지팡이를 들매 여호와께서 우렛소리와 우박을 보내시고 불을 내려 땅에 달리게 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우박을 애굽 땅에 내리시매 24우박이 내림과 불덩이가 우박에 섞여 내림이 심히 맹렬하니 나라가 생긴 그 때로부터 애굽 온 땅에는 그와 같은 일이 없었더라 25우박이 애굽 온 땅에서 사람과 짐승을 막론하고 밭에 있는 모든 것을 쳤으며 우박이 또 밭의 모든 채소를 치고 들의 모든 나무를 꺾었으되 26이스라엘 자손들이 있는 그 곳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더라(22-26)

 

사전 경고를 내리신 직후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심판을 실행할 것을 명령하십니다(22). 모세는 하늘을 향해 지팡이를 쥔 손을 들어 애굽 전역에 우박이 쏟아지게 해야 합니다. 모세가 명령대로 행하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우렛소리를 동반한 우박 비를 쏟으셨습니다. 이때 하늘에서 ‘불’(에쉬)이 함께 내려왔습니다. 번개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보통 ‘바라크’이므로 이것은 번개가 아닌 불일 수 있습니다. 혹은 우박을 몰고 온 검은 구름이 태양과 어우러져 붉은 색을 띈 특이한 기상 현상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갑자기 큰 우박이 쏟아지는 갑작스런 기상 변화에는 벼락과 우렛소리가 동반되곤 하므로 벼락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우박은 사람과 짐승에게, 들판의 모든 풀들 위에 쏟아져 온 대지를 초토화했습니다. 22절에는 나무(에쯔)가 누락되어 있으나 25절에서 모든 풀들과 더불어 나무까지 파괴되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박과 낙뢰, 우렛소리는 ‘심히 맹렬했다’(카베드 메오드). 여기서 바로의 완고함에 대해 사용된 ‘무겁다’라는 뜻의 동사 ‘카베드’가 우박의 맹렬함에도 사용됩니다. 이 우박은 18절에서 말한 대로 전무후무한 대재앙이었습니다(24). 커다란 돌덩이 같은 우박은 들판에 있던 사람과 짐승을 쳐서 죽게 했으며(19,25), 들판의 모든 초목을 두들겨 초토화해놓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고센 땅에만 우박이 전혀 내리지 않아 멀쩡했습니다.

 

두려워하나 고집을 꺾지 않는 바로(27-35)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시며 그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함께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안전과 은혜를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그분의 은혜를 경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다질 수 있습니다.

 

27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모세와 아론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 28여호와께 구하여 이 우렛소리와 우박을 그만 그치게 하라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다시는 머물지 아니하리라 29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성에서 나가서 곧 내 손을 여호와를 향하여 펴리니 그리하면 우렛소리가 그치고 우박이 다시 있지 아니할지라 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줄을 왕이 알리이다 30그러나 왕과 왕의 신하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아직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줄을 내가 아나이다 31그 때에 보리는 이삭이 나왔고 삼은 꽃이 피었으므로 삼과 보리가 상하였으나 32그러나 밀과 쌀보리는 자라지 아니한 고로 상하지 아니하였더라 33모세가 바로를 떠나 성에서 나가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펴매 우렛소리와 우박이 그치고 비가 땅에 내리지 아니하니라 34바로가 비와 우박과 우렛소리가 그친 것을 보고 다시 범죄하여 마음을 완악하게 하니 그와 그의 신하가 꼭 같더라 35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27-35)

 

바로는 급히 모세와 아론을 불러 다시 한 번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지난번과 같이 그는 ‘내가 잘못했다’고 시인하면서 여호와가 의로우시고 자신과 자신의 백성은 악하다고 말합니다. 두려워 떨며 그는 모세에게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박과 ‘우렛소리’(문자적으로 ‘하나님의 소리’)를 그치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재앙이 그친다면, 그때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합니다(28). 그들은 더 이상 애굽 땅에 머물지 않고 즉시 떠나게 될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부탁대로 하나님께 기도하여 우박을 그치게 하여 다시 한번 여호와가 살아계심을 보여 주겠지만, 바로와 그의 신하들의 마음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 말해줍니다(29-30).

그 시기에 이미 줄기가 다 자란 삼대와 보리는 회생불능의 피해를 입었으나, 아직 싹이 트지 않은 밀과 쌀보리(밀의 일종)는 우박의 타격을 받지 않아 보존되었습니다. 따라서 당장 우박이 그친다면 최악의 흉작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31). 만일 진심으로 바로가 회개하여 모세의 말을 듣는다면 애굽이 망하지는 않겠지만,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남은 작물인 밀과 쌀보리까지도 사라질 것입니다. 바로로부터 즉시 퇴장한 모세는 성 밖으로 나가 여호와께 손을 들고 기도하여 재앙을 중단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즉시 우렛소리와 우박이 멈췄습니다(33). 그러나 재앙이 끝나자 다시 바로의 마음이 돌변하여 그와 그의 신하들은 여호와와 모세를 향한 완강한 태도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임하는지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바로와 애굽에 엄중한 경고를 주시며 그들의 교만한 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거스르는 자에게 심판을 내리시지만, 동시에 회개와 돌아옴을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고와 지적을 귀담아 듣고,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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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09-01)


다섯째 이 재앙과 여섯째 파리 재앙

출애굽기 9장 1-12절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회개는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의 변화로 이어져야 하며,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합니다. 또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중심에 두는 것이 필수적이며, 세상의 것들에 의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아울러, 개인의 행동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고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교훈들은 우리가 올바른 삶의 방향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네 번째부터 여섯 번째의 재앙은 재앙의 두 번째 묶음으로 분류됩니다. 네 번째의 파리 재앙에 이어 다섯 번째 재앙은 가축의 전염병, 여섯 번째는 사람과 짐승의 몸에 발생하는 악성 종기의 고통입니다. 두 번째 묶음의 세 가지 재앙에서는 지팡이가 사용되지 않으며 애굽 민족에게만 피해를 입힙니다. 다섯 번째 재앙에서 생명 살상이 시작되고 바로의 마음도 더욱 완고해집니다.

 

다섯 번째 재앙 :가축의 전염병(1-7)

우리는 일상에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삶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 하나님께서 경고하시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고를 무시하지 말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회개의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행동은 개인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서로를 배려하고 책임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2네가 만일 보내기를 거절하고 억지로 잡아두면 3여호와의 손이 들에 있는 네 가축 곧 말과 나귀와 낙타와 소와 양에게 더하리니 심한 돌림병이 있을 것이며 4여호와가 이스라엘의 가축과 애굽의 가축을 구별하리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것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 5여호와께서 기한을 정하여 이르시되 여호와가 내일 이 땅에서 이 일을 행하리라 하시더니 6이튿날에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시니 애굽의 모든 가축은 죽었으나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한지라 7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본즉 이스라엘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니라(1-7)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을 보내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통해 바로의 완악한 마음을 드러내고 그에게 경고하십니다. 결국, 바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1) 다섯 번째 재앙의 경고(1-5)

 

네 번째 재앙인 파리 떼의 급습으로 애굽 온 땅이 피폐해졌음에도 바로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다섯 번째 재앙을 일으키도록 지시하십니다. 그는 바로를 다시 찾아가 예배를 위한 광야 여행을 허락해줄 것을 촉구해야 합니다(1). 몇 번째입니까? 다시 하나님의 경고가 전달됩니다.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강제로 억류하면 더욱 무서운 재앙이 임할 것입니다. 그것은 가축의 전염병으로 인한 몰살입니다. 다섯 번째 재앙도 애굽 민족에게만 발생하여 그들의 가축이 대량으로 피해를 입고 이스라엘의 고센 땅은 평온할 것입니다(3-4). 애굽에서 사육하는 가축에는 말, 나귀, 낙타, 소, 양/염소(쫀)가 포함됩니다. 애굽과 가나안, 메소포타미아 일대에서 기르던 짐승들입니다. 말, 나귀, 낙타는 일꾼 짐승으로, 소, 양, 염소는 식용 짐승으로 키웠습니다. 나귀는 가장 고대부터 근동 지역의 대표적인 수송용 가축이었으며, 말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유입되었습니다. 애굽은 최대 말 사육 국가로서 주변 여러 나라에 수출하였습니다. 낙타는 논란이 되는 가축입니다. 일각의 학자들은 낙타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주전 12세기 전에는 사육하거나 사용한 흔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애굽에서는 그보다 후대인 주전 6세기에 낙타에 대한 기록이 나타날 뿐입니다. 따라서 이곳을 포함한 오경의 낙타 언급은 시대착오적이며 후대의 기록이거나 편집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카수토는 이미 모세 시대에 낙타가 애굽에서 사육되었다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른 증거 자료에서는 여전히 낙타가 모세 시대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암시가 나타나며, 최근에 발견된 낙타 떼를 그린 어떤 암각화는 모세 이전 시대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가축 전염병은 이스라엘을 제외한 전국적 재앙이 될 것입니다. 구약에서 전염병은 대표적인 하나님의 심판 수단 중 하나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다시 재앙이 발생할 시점을 지정하십니다. 바로 ‘내일’ 즉시 재앙이 임할 것입니다. 가축의 떼죽음 또한 애굽 신들의 심판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아피스(Apis)는 황소로 상징되는 신이었는데, 전염병으로 애굽 모든 소가 무력하게 거꾸러집니다.

 

(2) 애굽의 가축이 몰살(6-7)

 

하나님께서는 경고하신 대로, 이튿날 즉시 가축 전염병 재앙을 일으키셨습니다. 이전까지는 죽음을 일으키지 않고 물, 개구리, 흙, 곤충과 같은 피조물을 이용해 고통을 주었는데, 이제 죽음을 일으킵니다. 애굽의 모든 가축이 죽었습니다. ‘모든 가축’은 확실히 많은 가축의 죽음에 대한 과장법입니다. 아직 많은 가축들이 여전히 살아남아 나중에 일곱 번째의 우박 재앙과 열 번째의 첫 태생 죽음의 심판으로 또다시 대량 몰살하기 때문입니다. 4절에서 ‘하나도 죽지 않았다’는 히브리어는 특이하게 ‘아무것도’로 해석될 수 있는 다바르가 사용됩니다. 다바르는 ‘말’이라는 뜻이면서 동시에 ‘일’이나 ‘사건’을 가리킬 수 있지만 ‘사물’(어떤 것)을 가리키는 경우는 드물입니다. 더구나 여기서는 가축을 이 단어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분명 전염병을 뜻하는 ‘데베르’와의 의도적인 말놀이일 것입니다. 6절과 7절에서는 ‘하나도 죽지 않았다’는 동일한 표현을 위해 통상적인 방식대로 ‘하나’를 뜻하는 ‘에하드’가 사용됩니다. 가축 전염병이 전국적으로 돌며 수많은 가축이 쓰러지자 바로는 사람을 보내 피해 상황을 조사하게 했을 것입니다. 충격적이게도 애굽의 가축만 몰살당했고 이스라엘의 가축은 아무런 피해가 없었습니다. ‘하나도 죽지 않았다’라는 히브리어는 6절보다 한층 강화된 표현인 ‘아드 에하드’입니다. 6절에서는 단순히 ‘에하드’만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는 전치사 ‘아드’가 붙으면서 ‘하나조차’, ‘단 하나도’라는 뜻으로 크게 강조되어 있습니다. 애굽의 피해 상황과 이스라엘의 피해 상황이 뒤로 갈수록 더욱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이스라엘 가축의 보존은 ‘아무것도’, ‘하나도’, ‘단 하나도’로 점차 강조됩니다. 그러나 바로는 놀랍게도 이렇듯 분명한 선택적 재앙을 직접 똑똑히 확인했으면서도 고집을 꺾지 않습니다(7).

 

여섯 번째 재앙 : 악성 종기(8-1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애굽에 빠지는 신의 특별한 능력은 없어야 하고, 사람과 모두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신이 애굽과 그 왕이 바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사용하여 그분을 버리고, 바로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8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화덕의 재 두 움큼을 가지고 모세가 바로의 목전에서 하늘을 향하여 날리라 9그 재가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되어 애굽 온 땅의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서 악성 종기가 생기리라 10그들이 화덕의 재를 가지고 바로 앞에 서서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날리니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 악성 종기가 생기고 11요술사들도 악성 종기로 말미암아 모세 앞에 서지 못하니 악성 종기가 요술사들로부터 애굽 모든 사람에게 생겼음이라 12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8-12)

 

하나님도 지체하지 않고 즉시 여섯 번째 재앙을 보내십니다. 앞서 다섯 번째 재앙은 가축에게만 임하게 하셨지만, 이번에는 가축과 사람 모두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깁니다. 피부에 생기는 독종의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화덕’에서 두 움큼의 재를 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화덕은 아마도 벽돌을 굽는 가마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재’는 검댕으로 추론됩니다. 많은 장작으로 불을 때 가마를 굽기 때문에 가마 내부 표면에는 그을음이 잔뜩 끼어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 둘 다에게 두 손 가득 검댕을 취하라고 명령하시는데, 뿌리기는 모세 혼자 뿌렸다고 언급됩니다(8). 카토가 잘 간파했듯이, 아마 모세와 아론 둘 다 벽돌 가마에 가서 두 손으로 검댕을 긁은 뒤 그릇에 담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궁중으로 갔으며, 바로 앞에서 바로 모세가 그 그릇에 담긴 검댕을 하늘에 내던져 뿌렸을 것입니다. 검댕은 공중에서 뿌연 먼지가 되어 사방 온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흩날린 검댕이 사람과 짐승에게 달라붙자 몸에서 악성 종기가 발생했습니다. ‘종기’(쉐힌)는 구약에서 자주 하나님의 심판으로 발생하는 질병의 하나입니다. 특히 이것은 레위기의 나병(악성 피부병) 규례에서(레 13-14장) 나병으로 악화될 수 있는 심각한 종기입니다(레 3:18-20). 재앙의 강도가 갈수록 강해진다는 증거는 마법사들을 통해 확인됩니다. 애굽 마법사들은 처음과 두 번째 재앙을 모방하는 재주를 부렸는데, 세 번째부터는 한계를 보이며 사실상 결국 패배를 인정합니다. 급기야 현재의 여섯 번째 재앙에서 이제 마법사들도 재앙의 표적이 되어 애굽 온 백성과 함께 고통받습니다. 그들과 그들 신들의 무력함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하나님의 능력이 확인됩니다. 독종의 재앙 또한 많은 학자들이 질병을 다스리는 신 세크메트(Sekhmet)에 대한 심판으로 이해합니다. 이 독종은 ‘요술사들로부터 애굽 모든 사람에게’, 즉 애굽 전 국민에게 임했던 것으로 보이며, 아마 바로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여전합니다. 그의 완고한 마음은 꺾이지 않았고 모세와 아론의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여기서 재앙이 발생한 후 처음으로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표현이 나타납니다. 결국 바로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까지 통제하시어 심지어 사람을 불순종하게 만드는 것으로 이해되는 신정론의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드시는 목적은 10:1-2에서 구체적으로 진술됩니다. 신정론의 문제는 거기서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합니다.


우리가 살펴본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자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바로처럼 완악한 마음을 가진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종을 원하시며, 그분의 뜻에 따라 살 때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어떤 재앙이 임하더라도,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가는 길을 선택합시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며, 그분의 사랑과 은혜로 우리를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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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애굽기(08-02)


셋째 이 재앙과 넷째 파리 재앙

출애굽기 8장 16-32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더 큰 축복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순종치 않은 것은 강퍅해졌다는 말입니다. 순종치 않음을 여러 가지 환경이나 여건의 탓이나 핑계하는 늘어놓은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에게 어려움만 가중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순간, 순종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성도입니다.

 

  • 애굽 전역에 세 번째 재앙이 내립니다. 모세를 대신한 아론이 땅의 흙을 지팡이로 치자 이가 되어 사람과 가축에게 기어올라 괴롭힙니다. 이 재앙은 애굽과 이스라엘 모두에게 일어납니다. 그러나 세 번째 재앙에도 바로가 변하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네 번째 재앙을 보내십니다. 파리 떼가 들끓는 재앙이었는데, 이스라엘이 거하는 고센 땅에서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네 번째 재앙부터는 이집트 민족에게만 일어납니다.

 

세 번째 재앙 : 온 땅에 이가 들 끓다(16-19)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은 이해되지 않더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혹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마음을 닫고 있지 않은지 성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경고하시고 인도하시므로, 우리의 마음이 부드럽고 열려 있어야 그 뜻을 따를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노력과 한계를 인식하고, 하나님을 대체하려는 시도를 멈추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16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에게 명령하기를 네 지팡이를 들어 땅의 티끌을 치라 하라 그것이 애굽 온 땅에서 이가 되리라 17그들이 그대로 행할새 아론이 지팡이를 잡고 손을 들어 땅의 티끌을 치매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다 이가 되어 사람과 가축에게 오르니 18요술사들도 자기 요술로 그같이 행하여 이를 생기게 하려 하였으나 못 하였고 이가 사람과 가축에게 생긴지라 19요술사가 바로에게 말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하였으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게 되어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16-19)

 

두 번째의 개구리 재앙을 겪고서 바로는 백성을 보내겠다고 약속했지만, 재앙이 그치자 약속을 번복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세 번째 재앙을 보내십니다. 이제 전국에 이가 들끓게 하는 재앙입니다. 이 재앙은 앞서 두 번의 재앙과 달리 사전 경고 없이 벌어집니다. 예고하는 것은 바로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지만, 예고가 없는 재앙은 심판의 성격이 강합니다. 즉,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한 것에 대한 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론더러 모세의 지팡이를 들어 땅의 티끌을 치라고 명하십니다. ‘티끌’이란 땅의 ‘먼지’(아파르), 즉 ‘흙’을 의미합니다. ‘온 땅의 티끌’이 다 이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 표현은 전형적인 과장법입니다. 70인역을 비롯한 고대로부터 이것은 ‘이 재앙’으로 이해되었는데, 정작 ‘이’로 번역한 ‘킨님’, 단수 ‘켄’의 정체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 곤충들이 순식간에 몸에 달라붙은 것을 볼 때 이동이 매우 느린 ‘이’보다는 날아다니는 곤충이거나, 사람이나 짐승의 피부에 달라붙어 피를 빠는 흡혈 파리나 모기를 총칭하는 ‘각다귀’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사방으로 튀는 ‘벼룩’일 수도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성경의 표현대로 ‘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해충들은 사람과 가축의 몸에 기어올라 붙었습니다. 애굽의 마법사들도 술수를 써서 이가 생기도록 시도했지만, 이번에는 실패합니다. 그들은 곤충 떼의 출몰은 자신들의 능력 밖의 초자연적 현상으로 ‘하나님의 손가락(권능)’으로 발생한 일이라고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아닌 ‘하나님의 손가락’이라고 표현하였지만, 이것 역시 하나님의 권능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애굽 마법사들이 이것을 모방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 배후에 있는 악령의 능력의 한계 때문일 수 있지만, 그들의 눈속임 마법의 기술적 한계 때문으로 추론됩니다.

바로의 완고한 마음은 여전히 변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재앙(개구리 재앙)을 겪었을 때 바로의 기세가 처음으로 꺾였는데, 그것도 잠시뿐 여전히 완강합니다. 네 번째의 파리 재앙을 겪은 후에야 바로의 태도가 변합니다. 세 번째 재앙까지는 애굽과 이스라엘 모두에게 재앙이 임했지만, 네 번째 재앙부터 양상이 바뀌어 애굽 백성에게만 재앙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네 번째 재앙 : 온 땅에 파리(20-32)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우리를 세상과 구별하여 살아가도록 보호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기억하며, 신앙 생활 속에서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실 때, 우리는 그분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20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 그가 물 있는 곳으로 나오리니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21네가 만일 내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면 내가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과 네 집들에 파리 떼를 보내리니 애굽 사람의 집집에 파리 떼가 가득할 것이며 그들이 사는 땅에도 그러하리라 22그 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23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를 구별하리니 내일 이 표징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 24여호와께서 그와 같이 하시니 무수한 파리가 바로의 궁과 그의 신하의 집과 애굽 온 땅에 이르니 파리로 말미암아 그 땅이 황폐하였더라 25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 26모세가 이르되 그리함은 부당하니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애굽 사람이 싫어하는 바인즉 우리가 만일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제사를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27우리가 사흘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되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28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29모세가 이르되 내가 왕을 떠나가서 여호와께 간구하리니 내일이면 파리 떼가 바로와 바로의 신하와 바로의 백성을 떠나려니와 바로는 이 백성을 보내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일에 다시 거짓을 행하지 마소서 하고 30모세가 바로를 떠나 나와서 여호와께 간구하니 31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시니 그 파리 떼가 바로와 그의 신하와 그의 백성에게서 떠나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32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그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20-32)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애굽에 이가 재앙을 내리시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이 재앙은 애굽의 신들과 우상을 무너뜨리며, 이스라엘 백성은 고센 땅에서 보호받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여전히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통해 자신의 권능을 드러내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는 계획을 이어가십니다.

 

(1) 파리 재앙으로 황폐화된 땅(20-24)

 

혹독한 세 번째 재앙을 겪었지만, 바로는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즉시 네 번째 재앙이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를 찾아가도록 지시하십니다. 이 ‘아침’이 꼭 세 번째 재앙이 발생한 다음 날일 필요는 없습니다. 세 번째 재앙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며칠은 지속되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아침에 다시 바로를 강변에서 만납니다. 바로는 매일 아침 강변 산책을 하는 습관이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접견 장소는 빈번히 왕궁이었습니다. 모세는 다시 바로를 만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하도록 광야 여행을 허락해줄 것을 촉구해야 했습니다. 이번에도 바로가 거부한다면, 더욱 가혹한 네 번째 재앙이 애굽을 칠 것입니다. 그것은 파리 떼 재앙입니다. 애굽 왕 바로와 그의 백성, 바로의 집과 애굽 모든 백성의 집 안까지, 그리고 나아가 온 땅에 파리 떼가 출몰하겠지만, 오직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만은 이 재앙에서 예외가 될 것입니다(21-22).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이집트 백성 사이를 구별하기 시작하시니다(23). 이것은 구체적으로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를 통해 바로와 애굽 백성은 여호와가 어떤 분인지 더욱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22).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바로를 찾아가 경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것을 생략한 채 하나님께서 경고대로 즉시 재앙의 심판을 실행하신 것만을 보고합니다(24), 아마 바로가 그 요청을 재차 거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앞서 ‘이’로 번역된 ‘킨님’의 정체가 불분명했듯이, 여기 ‘파리 떼’로 번역된 ‘아로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어떤 생물의 떼인데, 혹자는 기생충이나 떼 짓는 들짐승으로 보기도 하지만, 전통적으로는 ‘파리 떼’로 번역해왔습니다. 70인역은 이것을 물어뜯고 피를 빠는 흡혈 파리(dog fly)로 번역하는데 개연성이 있습니다. 24절에서 보듯이 이 파리 떼로 인해 땅이 황폐해지고 비참한 결과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재앙으로 인해 땅이 파괴되었습니다(‘황폐하게 되었다’)는 평가가 내려집니다. 이것은 흡혈 파리 떼로 추정되는 곤충들이 초목까지 피폐하게 만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람의 주거 공간뿐 아니라 ‘온 땅’에 가득히 날아다니며 인간과 동물을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는 뜻입니다. 네 번째 재앙부터 이집트 마법사들이 아예 나타나지 않는데, 이런 특징은 마지막 재앙까지 이어집니다. 학자들 중에는 앞의 첫 번째 두 번째는 물과 관련짓고, 세 번째는 땅, 네 번째의 파리 재앙은 공기와 관련짓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물, 땅, 공기를 변질시킴으로써 애굽의 자연 전체에 재앙을 일으키시고 자신이 자연의 주인임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재앙은 이후에도 자연계 여러 영역에서 계속 발생하기 때문에, 이런 구분은 다소 인위적입니다.

 

(2) 백성의 여행을 허락하는 바로(25-32)

 

네 번째의 혹독한 재앙으로 온 땅이 피폐해지자 그제야 바로는 모세와 아론에게 굴복하는 태도를 취합니다. 그는 두 사람에게 예배를 허락하지만, 광야가 아닌 애굽 땅에서 하라고 제안합니다(25). 하지만 모세는 그 타협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그는 히브리인들의 제사가 애굽인들에게 역겨운 반감을 일으켜 큰 충돌이 일으킬 수 있고, 그러면 자신들이 돌에 맞을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거절합니다.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제사를 드리다’는 문자적으로 ‘애굽 사람의 눈앞에서 혐오스러운 것(토에바)을 희생으로 바치다’라는 의미입니다. 왜 히브리인의 제사가 애굽인에게 혐오스러운 것입니까? 애굽에서 신성시하는 동물인 소와 염소가 제물로 바쳐지기 때문일 수 있지만, 그보다는 두 문화권의 제사 전통의 차이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예로 애굽인들은 히브리인들과 겸상하는 것을 ‘혐오스러운 일’(토에바)로 간주했습니다. 애굽인들은 전통적으로 유목을 혐오했으며(토바), 유목민들을 부정하게 여겼습니다(창 46:34; 출 8:26). 심지어 히브리인들과 같은 방에서 잠을 자지도 않았습니다. 모세는 재차 자신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멀리 3일 길의 여행을 떠나 외딴 광야에서 예배 행사를 갖겠다는 입장을 고집합니다(27). 바로는 마지못해 그 여행을 허락하지만, 이번에는 거리 제한을 둡니다. 그가 집요하게 이스라엘 백성을 묶어두려는 이유는 경제적 이유 때문인 것이 분명합니다. 실제로 한꺼번에 성인 수십만 명의 노동력을 잃는다면 국가 경제가 마비될 수 있었습니다. 바로는 그들의 종교 행사를 위한 여행을 허락하는 순간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해방 시켜주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줄다리기를 한 것입니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합니다(28). 하루빨리 파리 떼가 애굽 땅에서 물러가게 하여 자신들의 고통을 끝내달라는 부탁일 것입니다. 모세는 다음 날 하나님께 간구하여 파리 떼가 물러가도록 하겠다고 약속하면서, 바로에게 다시는 자기들을 속이지 말라고 강하게 압박합니다. 바로를 떠나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즉시 응답되어 모든 파리 떼가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파라오는 또다시 마음을 바꾸고 약속을 번복합니다. 자신의 기존 입장을 완강히 고수하며 그 백성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부드럽고 열린 상태를 유지해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 속에서 구별하여 보호하시며,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아갈 때 그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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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08-01)


두 번째 재앙 : 개구리로 온 땅을 치다

출애굽기 8장 1-15절


 

우리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와 결단을 요구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회개 없는 기도는 진정한 변화로 이어지지 않으며, 우리의 신앙생활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솔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마음을 열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그분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 애굽에 여호와의 두 번째 재앙이 임합니다. 개구리 떼가 전국에 창궐하여 애굽 온 국민의 생활이 마비됩니다. 바로의 왕실과 침대까지 개구리 떼가 침입하여 전국에 공포가 임합니다. 바로의 마법사들 또한 개구리 재앙을 일으키며 여전히 물러서지 않으나, 핏빛 강물의 재앙과 마찬가지로 상황만 악화될 뿐입니다. 여호와의 두 번째 재앙을 겪은 바로는 마침내 기세가 꺾이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두 번째 재앙 : 개구리로 온 땅을 치다(1-15)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인식해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을 대체하려고 하거나,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궁극적으로 실패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문제의 진정한 해결자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의뢰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2네가 만일 보내기를 거절하면 내가 개구리로 너의 온 땅을 치리라 3개구리가 나일 강에서 무수히 생기고 올라와서 네 궁과 네 침실과 네 침상 위와 네 신하의 집과 네 백성과 네 화덕과 네 떡 반죽 그릇에 들어갈 것이며 4개구리가 너와 네 백성과 네 모든 신하에게 기어오르리라 하셨다 하라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에게 명령하기를 네 지팡이를 잡고 네 팔을 강들과 운하들과 못 위에 펴서 개구리들이 애굽 땅에 올라오게 하라 할지니라 6아론이 애굽 물들 위에 그의 손을 내밀매 개구리가 올라와서 애굽 땅에 덮이니 7요술사들도 자기 요술대로 그와 같이 행하여 개구리가 애굽 땅에 올라오게 하였더라 8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여호와께 구하여 나와 내 백성에게서 개구리를 떠나게 하라 내가 이 백성을 보내리니 그들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릴 것이니라 9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내가 왕과 왕의 신하와 왕의 백성을 위하여 이 개구리를 왕과 왕궁에서 끊어 나일 강에만 있도록 언제 간구하는 것이 좋을는지 내게 분부하소서 10그가 이르되 내일이니라 모세가 이르되 왕의 말씀대로 하여 왕에게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같은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니 11개구리가 왕과 왕궁과 왕의 신하와 왕의 백성을 떠나서 나일 강에만 있으리이다 하고 12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떠나 나가서 바로에게 내리신 개구리에 대하여 모세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13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시니 개구리가 집과 마당과 밭에서부터 나와서 죽은지라 14사람들이 모아 무더기로 쌓으니 땅에서 악취가 나더라 15그러나 바로가 숨을 쉴 수 있게 됨을 보았을 때에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더라(1-15)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애굽에 개구리 재앙을 내리겠다고 경고하십니다. 개구리가 애굽 전역에 넘쳐나자, 바로는 모세에게 기도를 요청하지만 재앙이 사라진 후에도 회개하지 않고 마음을 강퍅하게 합니다. 이 과정은 하나님의 권능과 인간의 불신, 그리고 진정한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1) 개구리 재앙을 하달하시는 하나님(1-5)

 

전국의 모든 강과 호수에 임한 핏물 재앙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꺾지 않은 바로에게 두 번째 재앙이 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다시 바로를 찾아가 광야에서 백성이 예배를 드리도록 내보내 줄 것을 요구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아마 두 번째 만남은 바로의 궁전에서였을 것입니다. 만일 바로가 요청을 거부하면, 이번에는 개구리 재앙이 애굽 온 땅에 임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개구리 떼의 번성과 이스라엘 민족의 번성에 동일한 단어 ‘샤라츠’가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번성은 축복이지만, 개구리 떼의 번성은 재앙입니다. 나일강에서 무수히 생겨난 개구리 떼는 전국을 뒤덮을 것입니다(3-4).

밖으로는 ‘애굽 온 땅에’, 정확히는 ‘애굽 모든 경계선/영역에’ 창궐했으며, 안으로는 모든 집의 구석구석까지 침입합니다. 상하 지위를 막론하고 애굽의 모든 주거지에 개구리 떼가 엄습할 것이며, 바로의 궁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마치 목을 조르듯이 개구리의 침입이 바로를 향해 점점 좁혀집니다(3). 처음에 나일강에서 올라온 개구리 떼는 바로의 궁전으로 몰려듭니다. 궁전 안 바로의 침실로 침입한 뒤 급기야 침대로 뛰어오릅니다. 나아가 개구리 떼는 바로의 모든 백성에게 침입할 것이며, 심지어 백성의 음식을 위한 화덕과 떡 반죽 그릇에까지 침범합니다(4).

이것은 바로 자신뿐 아니라 애굽의 온 백성이 개구리 떼의 창궐로 인해 의식주의 기본 생활조차 영위하기 힘든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앞서 지팡이를 내던져 뱀이 되게 하고 지팡이를 강물에 내리쳐 핏빛으로 만든 것과 달리, 이번에는 아론이 지팡이를 쥔 손을 단순히 들어 올리라는 지시를 받습니다(5).

 

(2) 개구리가 애굽 온 땅을 덮다(6-7)

 

모세와 아론은 바로를 찾아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실천합니다. 그들은 다시 바로에게 백성을 보내줄 것을 요구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합니다. 그리하여 아론이 애굽의 나일강과 모든 지류들을 향해 지팡이를 든 손을 들어 뻗습니다. 갑자기 개구리 떼가 강으로부터 뛰어 올라와 애굽 온 땅을 뒤덮었습니다(6).

첫 번째의 피의 재앙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애굽 마법사들이 아론의 기적을 흉내 냈습니다(7). 여기서는 바로가 마법사들을 불러들였다는 언급이 없고, 그들의 유사 기적에 대한 바로의 긍정적인 평가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로의 재가 없이 마법사들이 함부로 활동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다시 마법사들을 불러들였는데, 아마 이어지는 그의 반응과 태도를 볼 때, 이번에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 개구리 떼의 제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마법사들은 또다시 아론의 기적을 흉내 내는 재주를 부렸습니다. 마법사들이 경쟁에서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재주는 상황을 악화시켰습니다. 그들은 이번에도 비법(라트)을 사용했는데, 초자연적 능력을 발휘했는지 속임수를 썼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후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이 기적의 능력으로 개구리 떼를 발생시켰다면, 마찬가지로 없애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를 접견하러 들어가기 전에 개구리 재앙이 발생한 것을 보고 교묘한 마법처럼 보이는 속임수를 준비했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들이 실제 영적 능력을 발휘했는지 속임수를 썼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결과적으로 개구리 떼가 더욱 번성하였고, 바로는 모세에게 즉시 항복합니다.

강물이 피로 변한 것이 적조 현상일 수 있는 것처럼, 개구리 떼의 출몰 또한 자연 현상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매년 나일강이 홍수로 범람한 뒤 물이 빠지면 엄청난 개구리 떼가 번식했는데, 이때는 그 현상이 정확한 시점에 예외적인 규모로 발생했다고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적조의 발생으로 물고기가 떼죽음함으로 강물이 썩어 개구리 떼가 육상으로 올라왔다고 생각합니다.

설사 그렇다 해도, 여기에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직접 일으키신 초자연적인 기적의 요소가 개입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써 특정한 날 일순간에 개구리 떼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자연 현상을 기적으로 포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의 지팡이로 개구리 떼를 통제할 수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3) 처음으로 흔들리나 고집을 꺾지 않는 바로(8-15)

 

개구리 역시 애굽에서는 신처럼 숭배되었는데 개구리 떼의 엄청난 번식이 신의 능력과 번식의 상징으로 간주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신 헤케트(Hekhet) 역시 다산과 창조의 신이었던 크눔(Khnum)의 배우자로서 두상이 개구리 모양을 한 여성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며, 인간을 진흙으로 창조한 여신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번성을 상징하는 개구리 떼를 애굽을 심판하는 데 사용하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번성을 두려워하여 잔혹한 유아 살해의 살상극을 벌인 바로와 애굽을 향한 역설적인 ‘번성의 심판’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개구리 떼의 발생은 하나님에 의해 발생한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셨습니다. 이로써 그들이 숭배하는 개구리와 여신 헤케트는 무능한 신이라는 사실이 증명됩니다. 첫 번째의 재앙은 애굽이 신으로 숭배하는 나일강에 대한 심판으로 볼 수 있으며, 두 번째 재앙 또한 그들이 번성의 신으로 섬기는 개구리 신에 대한 심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열 가지 재앙 모두 그런 관점에서 해석할 여지가 있는데,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는 않습니다. 애굽 전역이 마비되는 상황이 발생하자 바로는 당황하며 두려워했습니다(8). 이 개구리가 얼마 동안 창궐했는지 본문에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유대 랍비 문헌인 학가다(Haggadah)는 첫 번째 재앙과 마찬가지로 일주일 동안 지속되었다고 말합니다. 바로가 여기서 처음으로 흔들리며 여호와께 굴복하는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모세와 아론을 불러들여 개구리 재앙을 멈춰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는 자신의 마법사들을 총동원해 재앙을 그치게 하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으킨 신앙을 사람이 돌이킬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바로는 모세와 아론에게 읍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그가 ‘여호와께 구하여’ 개구리를 떠나게 해달라고 발언한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는 비로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그분이 어떤 분인지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는 모세와 아론이 기도하여 개구리 재앙을 멈춘다면,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보내 예배를 드리도록 허락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여기서 모세는 지혜롭게 협상을 이끕니다. 그는 ‘언제’ 개구리 떼를 없앨지 바로가 날짜를 선택하라고 제안합니다. 그날 즉시 개구리 떼는 온 땅에서 제거되고 다시 나일강에서만 들풀게 될 것입니다. 구체적인 날짜의 제안은 분명히 바로에게 여호와가 어떤 분인지 더욱 분명하게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10). 바로는 ‘내일’ 당장 없애달라고 부탁합니다. 그의 다급한 재촉은 그가 이 재앙으로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잘 보여줍니다.

모세와 아론은 바로의 요청대로 이튿날 아침 하나님께 ‘부르짖어’ 개구리 재앙을 그치게 해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12). 기도가 즉각 응답되어 여호와께서 재앙을 거두어가셨습니다. 개구리 떼는 모두 육지에서 떼죽음하는 방식으로 제거되었습니다. 애굽 백성이 개구리 사체를 거두어 여러 무더기로 쌓았습니다. 히브리어에서는 ‘무더기, 무더기’로 동일 단어가 반복되는데, 이것은 많은 무더기를 가리키는 강조 용법입니다.

무더기로 쌓인 개구리 사체가 썩자 다시 악취가 애굽 온 땅이진동해 숨쉬기조차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악취가 사라져 숨을 쉴 만하자 바로는 다시 생각을 바꿉니다. 그의 마음이 다시 완고해져 모세와 아론의 제안을 다시 거부합니다(15).


하나님의 권능과 인간의 반응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명령하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강퍅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하고, 진정한 회개와 순종의 삶을 다짐합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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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07-02)


첫 번째 재앙 : 나일강이 빗빛으로 변함

출애굽기 7장 8-25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에 대한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모세와 아론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 놀라운 기적을 이루실 수 있으며, 우리의 작은 순종이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힘쓰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이 심기일전하여 다시 바로를 접견하게 하십니다. 그들은 가서 이제 하나님의 지팡이로 바로와 그의 신하들 앞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앞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만들며 온 애굽 땅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7:1-4).

 

지팡이가 뱀으로 변함(8-10)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명령과 사명을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우리가 그분의 뜻을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어려움과 두려움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의 작은 순종이 하나님께서 이루실 큰 일을 준비하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귀 기울이며 그분의 뜻을 따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8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9바로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이적을 보이라 하거든 너는 아론에게 말하기를 너의 지팡이를 들어서 바로 앞에 던지라 하라 그것이 뱀이 되리라 10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아론이 바로와 그의 신하 앞에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된지라(8-10)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을 다시 바로에게 보내십니다. 그들에게 요구한 것은 믿음과 순종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지팡이를 던지라고 명하십니다. 순종하면 지팡이는 뱀으로 변할 것입니다. 두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했고 실제로 지팡이가 뱀으로 변했습니다(10). 여기서 모세는 아론이 든 자신의 지팡이를 ‘너의 지팡이’로 칭합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이이며, 모세가 들 때는 모세의 지팡이, 아론이 들 때는 아론의 지팡이로 기능합니다. 여기서 ‘뱀’의 히브리어가 ‘나하쉬’가 아닌 ‘탄닌’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애굽 술객들의 술수로 변한 뱀도 ‘탄닌’입니다(12). ‘탄닌’이 어떤 동물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는 ‘나하쉬’가 아닌 ‘탄닌’이 사용된 이유를 독자들에게 뱀의 이미지를 더욱 섬뜩하게 만드는 문학적 효과를 내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주석가들은 에스겔 29:3에서 바로의 별명이 ‘바다 가운데의 탄닌(큰 악어)’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이 단어를 해석합니다. 바로가 ‘탄닌’으로 상징화되고 있기에 의도적으로 이 단어가 사용된다는 뜻입니다. 이 지팡이가 ‘탄닌’으로 변한 것은 하나님께서 ‘탄닌’마저 자신의 손으로 부리는 존재이심을 보여주며, 따라서 바로도 하나님의 통제 하에 있다는 사실을 바로와 신하들 앞에서 시연하기 위함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고대 애굽인들은 나일강의 악어를 악어 신 ‘세베크(Sebek, 혹은 소베크[Sobek])’로 숭배하였고, 이 악어 신은 바로의 힘과 권세를 상징했습니다. 이 첫 번째 기적은 재앙의 징벌로 이어지지 않았기에 열 가지 재앙 목록에 포함되지는 않습니다. 이 기적의 목적은 단순히 하나님의 능력을 바로에게 보여줌으로써 그에게 경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모세의 지팡이가 승리하다(11-1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과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를 의지해야 합니다. 세상의 권력과 악이 우리를 압박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시며 그분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가 가진 지팡이, 즉 우리의 믿음과 기도는 하나님이 주신 권능의 상징입니다. 우리는 그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11바로도 현인들과 마술사들을 부르매 그 애굽 요술사들도 그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되 12각 사람이 지팡이를 던지매 뱀이 되었으나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키니라 13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11-13)

 

바로는 아무런 당황한 기색 없이 수하의 현인들과 마법사들을 부릅니다. 현인은 왕의 국정 파트너로서 자문단이었을 것이며, 마법사들 역시 아마 마술과 점술에 능하여 신통력을 부리는 제사장들로 왕에게 신의 계시나 점괘를 전해주는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요술’은 어떤 속임수를 쓴 신비한 기술일 수 있습니다. 이 애굽 술객들의 실명이 신약에 등장하는데, ‘얀네와 얌브레’입니다(딤후 3:8).

아마 이들 이름은 전승을 통해 유대 문헌에 전해온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바로의 호출을 받은 애굽 마법사들은 아론의 지팡이가 뱀으로 변했다는 소식을 듣고 미리 뱀에 최면을 걸어 뻣뻣해진 뱀을 들고 와 현장에서 최면을 푸는 기교를 부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중에 물을 핏빛으로 변하게 하고 개구리 재앙을 흉내 낸 것으로 볼 때, 그들의 마법을 속임수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이 속임수였든 실제적인 마법이었든지 간에 모세의 대리인 아론과 바로의 대리인 마법사들이 대결하는 형국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대신하므로 사실 아론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나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표한 아론의 지팡이가 애굽을 대표한 술객들의 지팡이를 삼킨 이 사건은 상징하는 바가 큽니다.

애굽, 특히 고대 상(上) 애굽의 수도인 ‘룩소르(Luxor)’ 지역의 유적지에는 신전과 바로의 동물 무덤 벽화에 무수히 많은 뱀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뱀, 특히 코브라는 바로의 왕관에 장식될 정도로 중요한 신이었습니다. 코브라는 바로와 애굽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여겨졌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가 바로의 지팡이를 삼킨 것은 하나님의 권능이 바로의 권능을 완전히 집어삼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여전히 완고하여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바로는 고집을 부립니다(13).

 

첫 번째 재앙 : 나일강이 핏빛으로 변하다(14-25)

세상의 힘과 권세가 아무리 강해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초월하십니다. 우리가 직면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실 것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의 계획은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용기를 가져야 하며, 우리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드러내실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1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는도다 15아침에 너는 바로에게로 가라 보라 그가 물 있는 곳으로 나오리니 너는 나일 강 가에 서서 그를 맞으며 그 뱀 되었던 지팡이를 손에 잡고 16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왕에게 보내어 이르시되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 하였으나 이제까지 네가 듣지 아니하도다 17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니 네가 이로 말미암아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볼지어다 내가 내 손의 지팡이로 나일 강을 치면 그것이 피로 변하고 18나일 강의 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는 악취가 나리니 애굽 사람들이 그 강 물 마시기를 싫어하리라 하라 19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에게 명령하기를 네 지팡이를 잡고 네 팔을 애굽의 물들과 강들과 운하와 못과 모든 호수 위에 내밀라 하라 그것들이 피가 되리니 애굽 온 땅과 나무 그릇과 돌 그릇 안에 모두 피가 있으리라 20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바로와 그의 신하의 목전에서 지팡이를 들어 나일 강을 치니 그 물이 다 피로 변하고 21나일 강의 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는 악취가 나니 애굽 사람들이 나일 강 물을 마시지 못하며 애굽 온 땅에는 피가 있으나 22애굽 요술사들도 자기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23바로가 돌이켜 궁으로 들어가고 그 일에 관심을 가지지도 아니하였고 24애굽 사람들은 나일 강 물을 마실 수 없으므로 나일 강 가를 두루 파서 마실 물을 구하였더라 25여호와께서 나일 강을 치신 후 이레가 지나니라(14-25)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바로에게 가서 나일강의 물이 핏빛으로 변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 말씀대로 지팡이로 나일강을 치자 물이 핏빛으로 변하고, 애굽의 마법사들이 이를 흉내내지만 오히려 재앙을 악화시킵니다. 그러나 바로는 이 기적을 보고도 마음을 완고하게 유지하며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1) 피 재앙을 하달하시는 하나님(14-19)

 

바로의 마음은 여전히 완강합니다. 바로의 고집을 표현하는 동사들이 세 가지로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다음 날 아침 나일 강변에 가서 다시 바로를 만나라고 지시하십니다(15). 바로가 아침부터 무슨 목적으로 나일 강변으로 나갔는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자주 아침에 강변 산책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앞서 요청했던 동일한 요구 사항을 전달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도록 내보내달라는 요구입니다(16). 이것을 허락하지 않은 대가로 이제 애굽의 모든 물이 피로 변할 것입니다. 그때에 바로는 그분이 여호와이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물이 변한다는 것은 강물이 핏빛으로 변한다는 뜻입니다. 강물이 피로 변한 결과 강이 썩어 악취를 풍깁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인에 의해 신으로 숭배된 나일강을 악취가 나게 만드신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애굽 온 땅에서 악취가 나게 하십니다(8:10). 나일강뿐 아니라 애굽의 모든 물이 핏빛이 될 것입니다(19). 이것은 강(나일강), 운하(나일강 지류들), 못, 호수를 포함합니다. 19b절의 “나무 그릇과 돌 그릇 안에는” 문자적으로 ‘나무들과 돌들 안에’입니다. 나무와 돌은 우상의 재료이므로, 이것은 애굽의 모든 우상들도 이재앙을 피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카수토(Cassuto)는 애굽에서 매일 아침 우상들을 물을 부어 씻었는데, 그물들마저 핏물로 변해 우상들에게 부어졌다고 해석합니다. 카토는 이 경우 전치사 ‘베’는 ‘~안에’ 보다는 ‘위에’(on)로 해석된다고 말합니다. 애굽의 모든 물, 특히 나일강이 핏빛으로 변하는 재앙은 사실 애굽의 생명수를 없애는 무서운 재앙입니다. 나일강은 애굽의 축복이었다. 그 물은 식수였을 뿐 아니라(21), 농사와 과수를 위한 농업용수였으며, 나아가 물고기를 비롯한 다양한 수산물의 공급원이었습니다(21). 따라서 애굽의 젖줄인 나일강이 썩는 것은 커다란 재앙이 되었습니다.

 

(2) 나일강이 핏빛으로 변하다(20-25)

 

모세와 아론이 명령에 순종하여 지팡이를 들어 나일 강물을 치자, 물이 갑자기 핏빛으로 변했습니다. 나일강의 고기들이 떼죽음하여 물에서 악취가 풍기자 애굽인들은 더 이상 그 물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강물 외에도 하나님 말씀대로 애굽 온 땅의 물이 피로 변했습니다(21).

바로는 이번에도 자신의 마법사들을 동원해 모세의 기적을 따라 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강물을 피로 변화시켰습니다. 이것이 실제 마법사들을 통제하는 악령에 의한 기적인지, 아니면 그들이 몰래 빨간 염료를 강에 푸는 방식으로 또 다른 고도의 속임수를 썼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아직 핏빛으로 변하지 않은 강물이 남아 있을까요? 카수토는 아론이 지팡이를 뻗지 않은 방향의 물이 멀쩡했다고 이해하며, 애굽의 술객들이 그 남은 물을 핏빛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 술사들은 어리석게도 재앙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더욱 어리석게도 바로는 그것을 기뻐합니다. 참고로 핏빛 강물은 적조 현상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나일강 상류에서 홍수가 발생할 때, 상류의 황토가 쓸려 내려와 강물이 붉게 보이게 되고, 이때 하천의 부영양화로 인해 적조 현상이 발생하여 수많은 물고기가 떼죽음하며 악취가 발생합니다.

고대 근동의 여러 문헌에서도 이러한 적조 현상으로 보이는 강물의 변화에 대한 언급들이 종종 나타납니다. 나일강이 피로 변한 후 7일 동안 이 상태가 계속되었습니다. 숫자 ‘7’은 익히 아는 대로 완전수이며, 따라서 7일은 이 재앙의 완전한 성취를 뜻할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능을 드러내시고 인간의 완고함을 경고하신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의 마음이 완고해져 그 경고를 무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며, 어떤 상황에서도 함께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고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드러내실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그분의 뜻을 따르며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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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07-01)


하나님의 부르심과 순종의 능력

출애굽기 6장 14절-7장 7절


 

우리는 종종 자신의 연약함이나 부족함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회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의지하고 순종할 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질 때가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동역자들과 함께 그분의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종과 협력을 통해 그분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넘어서, 하나님의 능력은 공동체를 통해 드러납니다.

 

  • 긴장을 일으킨 모세와 바로의 담판, 바로의 거절에 따른 모세의 좌절, 자신감을 상실한 모세의 하나님과의 실랑이로 이어지는 서사의 흐름이 갑자기 중단됩니다. 대신 이스라엘 자손의 족보가 뜬금없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낙심한 모세와 아론에게 하나님의 명령이 다시 주어지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중간에 끼어든 이스라엘의 족보는 레위 지파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합니다.

 

야곱의 장차남 르우벤과 시므온의 족보(14-15)

우리가 하나님의 사명을 소홀히 하거나 욕망을 따를 때, 축복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해 다시 부르십니다. 감정과 분노가 통제되지 않으면 죄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분노를 다스리고 그분의 뜻을 따르길 원하십니다. 실패와 실수가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14그들의 조상을 따라 집의 어른은 이러하니라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은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니 이들은 르우벤의 족장이요 15시므온의 아들들은 여무엘과 야민과 오핫과 야긴과 소할과 가나안 여인의 아들 사울이니 이들은 시므온의 가족이요(14-15)

 

본문에 대해 두 가지 의문이 제시됩니다. 왜 갑자기 족보가 나옵니까? 왜 르우벤과 시므온, 레위의 족보만 소개됩니까? 우선 야곱이 레아에게서 낳은 아들들 중에 첫째부터 셋째까지만 소개됩니다. 장남 르우벤, 차남 시므온, 셋째 레위입니다. 출애굽기 1장에서는 야곱의 열두 아들과 그들로부터의 후손의 번성을 언급하지만, 여기서는 세 아들 외에 나머지는 생략됩니다.

이 세 아들이 과거의 행적 때문에 야곱의 예언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기에 함께 나열된 것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르우벤은 아버지 야곱의 아내 빌하와 동침하는 죄를 범합니다. 그는 어머니 레아와 경쟁자인 라헬의 사망 후 라헬의 몸종 빌하가 그 자리를 대신하지 못하도록 빌하를 더럽힌 것입니다. 그 대가로 장자권이 박탈됩니다(창 49:4). 시므온과 레위는 여동생 디나가 세겜 사람에게 강간을 당하자 과도한 복수로 세겜 사람들을 모두 학살합니다. 야곱은 과도한 분노와 잔혹한 행위에 대한 대가로 그들이 땅을 얻지 못하고 흩어질 것이라고 예언합니다(창 49:5-7). 이로써 야곱에게서 먼저 태어난 세 아들에게 나란히 부정적인 미래가 예고되며, 이것이 지금 세 아들의 족보가 나열되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세 아들에 대한 어떠한 부정적인 암시도 없습니다. 게다가 현재의 족보는 민족의 위대한 영웅 모세와 아론의 조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태어난 세 아들의 족보만 소개된 것은 분명 셋째 레위에 초점을 맞추려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결국 이 족보의 최종 목적은 위대한 사명을 받은 모세와 아론의 혈통적 배경을 소개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셋째 아들 레위의 족보(16-19)

우리의 사명은 개인적인 욕망이나 성공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헌신하는 삶 속에서 그분의 축복을 경험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재물과 성공을 추구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사명을 소중히 여기며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실수할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회복시켜 주시며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16레위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들의 족보대로 이러하니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요 레위의 나이는 백삼십칠 세였으며 17게르손의 아들들은 그들의 가족대로 립니와 시므이요 18고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요 고핫의 나이는 백삼십삼 세였으며 19므라리의 아들들은 마흘리와 무시니 이들은 그들의 족보대로 레위의 족장이요(16-19)

 

레위는 세 아들을 낳았는데, 게르손, 고핫 그리고 므라리입니다. 레위의 아들들과 후손의 계보는 아래 도표를 보라. 주목할 가문은 고핫입니다. 고핫의 계보를 통해 모세와 아론이 태어납니다. 족보에서 수명이 언급된 인물은 세 명뿐인데, 레위와 고핫, 아므람입니다. 레위의 나이 137세(16), 고핫의 나이 133세(18), 아므람의 나이 137세가 언급됩니다(20).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인데, 모세와 아론의 계보와 뿌리를 선명히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즉, 모세와 아론은 레위 지파의 고핫 가문에 속한 아므람의 아들들입니다.

 

레위 아들 고핫의 족보와 아론과 모세의 계보(20-27)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고유한 사명을 주십니다. 우리의 역할과 사명을 충실히 감당할 때,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특정 사명과 역할을 위해 각 가문과 개인을 선택하십니다. 우리는 그 사명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가정과 공동체에서도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함께 이루어가야 합니다.

 

20아므람은 그들의 아버지의 누이 요게벳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는 아론과 모세를 낳았으며 아므람의 나이는 백삼십칠 세였으며 21이스할의 아들들은 고라와 네벡과 시그리요 22웃시엘의 아들들은 미사엘과 엘사반과 시드리요 23아론은 암미나답의 딸 나손의 누이 엘리세바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는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낳았으며 24고라의 아들들은 앗실과 엘가나와 아비아삽이니 이들은 고라 사람의 족장이요 25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은 부디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였고 그는 비느하스를 낳았으니 이들은 레위 사람의 조상을 따라 가족의 어른들이라 26이스라엘 자손을 그들의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라 하신 여호와의 명령을 받은 자는 이 아론과 모세요 27애굽 왕 바로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내보내라 말한 사람도 이 모세와 아론이었더라(20-27)

 

레위의 세 아들의 계보가 소개된 후, 그중 고핫의 아들 아므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아므람은 모세와 아론의 아버지입니다. 여기서 아므람의 결혼은 주목할만합니다. 아버지 아므람은 “아버지의 누이”, 즉 고모인 요게벳과 결혼합니다. 대다수 학자들은 요게벳이 고모이므로 상당히 연상이었을 것으로 추론합니다. 레위기 18:12은 고모와의 근친상간, 곧 결혼을 금지합니다. 따라서 레위기법을 기준으로 볼 때 아므람과 요게벳의 결혼은 삼촌 사이이므로 불가능하며, 그런 결혼은 사형의 중벌을 받았습니다(레 20:19). 그러나 모세 이전에는 삼촌 간의 결혼이 잠정적으로 묵인되고 있었으며 레위기에 와서야 다른 근친 관계와 더불어 그것이 금지되었습니다.

구약의 족보에서 여성이 언급되는 경우는 매우 드문데, 여기서는 아므람-아론-엘르아살로 이어지는 대제사장 계보의 아내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장차 대제사장 가문이 될 아론 가계의 혈통적 순수성과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특별히 아론은 암미나답의 딸이자 나손의 누이인 엘리세바와 결혼하는데, 그녀는 유다 지파의 딸이었습니다(민 1:7; 2:3). 유다 족속 암미나답과 그의 아들 나손은 훗날 보아스로 연결되면서 예수님의 족보로 이어집니다(룻 4:17; 마 1:4; 눅 3:33).

아론은 엘리세바와 결혼하여 네 아들을 낳습니다.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그리고 이다말입니다(23). 나답과 아비후는 훗날 제단에서 취한 불이 아닌 불법적인 ‘다른’ 불로 분향 제사를 드리다가 하나님의 불을 맞아 사망합니다(레 10장). 아론과 달리 모세의 후손은 소개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레위 지파는 성직으로 구별될 예정이며, 그중에서 아론 가문이 제사장 집안으로 선별되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은 향후 유다 지파로 이양됩니다. 여기서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 손자 비느하스까지 등장합니다(25). 모세와 아론은 1세대,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은 2세대, 그리고 사사 시대에 비느하스는 제3세대의 대제사장직을 수행합니다(삿 20:27-28). 참고로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언급된 사사기 20장은 후반부에 기록되어 있지만, 사사시대 초창기의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 보아야 합니다.

 

고핫의 계보에서 고라의 아들들이 또한 특징적으로 소개됩니다(24). 고라는 훗날 모세와 아론에게 대적하는 반역을 주도하여 추종자들과 함께 땅에 매장되는 심판을 받습니다(민 16장). 그러나 고라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따르지 않는 결단을 내린 뒤 심판의 자리를 피하여 결국 아버지 때문에 무너질 수 있었던 가문을 영광스럽게 재건합니다(민 26:9-11).

고라의 후손에서 사무엘이 탄생하는가 하면, 성전에서 음악을 비롯한 주요 직무를 맡고 시편의 여러 시들을 남겼습니다(대상 9:19; 20:9). 고핫의 계보에서 출생한 아므람의 두 아들 아론과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탈출시켜야 하는 중대한 사명이 주어집니다(26). 여기서 족보에 이어진 그들의 사명과 관련해서는 형 아론이 먼저 언급됩니다. 이제 바로를 찾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한 협상을 벌여야 하는 인물이 바로 이 두 사람 모세와 아론입니다(27). 이와 같이 그들의 역할과 임무와 관련해서는 모세가 먼저 언급됩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모세와 아론(6:28-7:7)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부르시며 그들의 연약함을 알고 계십니다. 모세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했지만,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선택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넘어서서 그분의 일을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인간의 힘이나 능력은 초월하여 그분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28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29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바를 너는 애굽 왕 바로에게 다 말하라 30모세가 여호와 앞에서 아뢰되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바로가 어찌 나의 말을 들으리이까 7: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2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여 그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게 할지니라 3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4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5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 6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더라 7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팔십 세였고 아론은 팔십삼 세였더라(6:28-7:7)

 

이 단락은 앞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모세에게 주어진 사명의 재진술입니다. 모세의 부름과 그의 거절 및 변명이 반복됩니다. 하나님과의 실랑이가 다시 한번 반복된 일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장면은 앞서 있었던 상황에 대한 요약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요소가 발견되는데 하나님께서 아론을 모세의 ‘대언자’로 세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을 통해 “내 군대, 내 백성”을 보내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군대’로 표현되고 있음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현재 바로와의 협상은 애굽과 하나님 백성 간의 전쟁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바로의 마음은 완고하여 백성을 내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에 모세와 아론의 나이가 언급됩니다. 모세는 80세고, 아론은 83세다. 형 아론이 향년 123세의 나이로 출애굽 40년 5월에 호르 산에서 죽고(민 33:39), 모세는 같은 해에 120세의 나이로 느보 산에서 죽습니다(신 34:5). 아마 해가 바뀌기 직전인 제40년 12월로 추론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순종의 중요성을 깊이 있게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결코 잊지 않으시며,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부르시고 사용하십니다. 모세와 아론의 순종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끌어낸 것처럼, 우리의 작은 순종도 하나님께서 이루실 큰 일을 준비하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르며 나아갈 때, 하나님은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각자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에 순종하며 그분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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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06-02)

 


다시 소명을 받는 모세

출애굽기 6장 14-30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소명과 정체성을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의 과거 실패와 실수는 하나님의 계획을 무너지게 하지 않습니다. 사명을 수행할 때 종종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를 느끼게 되지만, 하나님은 그 부족함을 통해 일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사명이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믿음이 있다면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 모세와 아론의 족보입니다. 르우벤과 시므온 자손을 간략히 소개하고, 레위 자손은 집중적으로 소개합니다. 아므람은 레위의 아들 고핫의 아들로, 모세와 아론의 아버지입니다. 장차 제사장 계보를 형성할 아론의 자녀들도 언급합니다. 출애굽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사람은 모세와 아론입니다.

 

이스라엘 가족의 족보(14-25)

한참 시간이 지난 후 과거를 되짚어 보면 그때도 하나님이 역사하셨다고 고백할 때가 있습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과거를 뒤돌아볼 때 얻게 되는 은혜입니다. 출애굽을 이해하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애굽 땅에 들어왔는지에 대한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그들의 뿌리가 어디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14그들의 조상을 따라 집의 어른은 이러하니라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은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니 이들은 르우벤의 족장이요 15시므온의 아들들은 여무엘과 야민과 오핫과 야긴과 소할과 가나안 여인의 아들 사울이니 이들은 시므온의 가족이요 16레위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들의 족보대로 이러하니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요 레위의 나이는 백삼십칠 세였으며 17게르손의 아들들은 그들의 가족대로 립니와 시므이요 18고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요 고핫의 나이는 백삼십삼 세였으며 19므라리의 아들들은 마흘리와 무시니 이들은 그들의 족보대로 레위의 족장이요 20아므람은 그들의 아버지의 누이 요게벳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는 아론과 모세를 낳았으며 아므람의 나이는 백삼십칠 세였으며 21이스할의 아들들은 고라와 네벡과 시그리요 22웃시엘의 아들들은 미사엘과 엘사반과 시드리요 23아론은 암미나답의 딸 나손의 누이 엘리세바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는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낳았으며 24고라의 아들들은 앗실과 엘가나와 아비아삽이니 이들은 고라 사람의 족장이요 25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은 부디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였고 그는 비느하스를 낳았으니 이들은 레위 사람의 조상을 따라 가족의 어른들이라(14-25)

 

본문에는 있는 이스라엘 족보는 우리에게 별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족보 속에도 하나님의 깊은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모세의 족보를 보면서, ‘이스라엘의 어른들은 이러했다’고 시작합니다. 조상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처음 야곱과 함께 70여명 가족들이 애굽에 들어가게 된 과정들을 자세하게 설명하진 않지만, 어떻게 들어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합니다.

야곱의 아들인 르우벤(14)과 시므온(15), 레위의 족보(16)를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족보를 거론 하면서 르우벤과 시므온 지파의 후손들을 먼저 거론합니다. 이것은 모세와 아론의 선조인 레위를 언급하기 위해서 입니다. 성경에서 기록한 순서는 나이나 출생 순서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주권대로 주어지고 있음에 유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이러한 세 지파의 족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아론과 모세가 출애굽을 주장하는데 그들의 뿌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00년 이상 종살이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정체감 다 잊어버려서 누가 지도자인지도 모릅니다. 그들 안에 있는 노동에 필요한 공사감독자들은 있겠지만, 그들에게는 스스로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사람이 출애굽을 주도하면서 큰 민족 공동체에 주인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치 추천서를 모세와 아론의 손에 들린 것과 같습니다. 그 지도자들이 어떤 가문에서 태어났고 어떤 집안사람인지에 대한 밝히 보여준 것입니다.

우선 르우벤에게는 네 아들, 시므온에게는 여섯 아들, 레위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다시 레위의 자손 중 고핫의 가문에 맞춰집니다. 모세와 아론 등 제사장들의 혈통이 된 고핫은 장자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와 아론이 나온 가문만 부각을 시킵니다. 아므람에서 아론으로, 엘르아살로, 비느하스로 이러지는 한 가문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바로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가문입니다. 하나님이 은밀히 제사장 집안을 지키셨고,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를 받으시기 위해 준비하셨음을 보여 줍니다.

사람들을 사용할 때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선택하여 들어 쓰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임무를 부여하기 위해서 세운 사람들을 ‘선택받은 사람’ 또는 ‘소명을 가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소명을 받는 사람들은 사람의 자격과 조건 그리고 배경을 따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카메라 초점을 맞추어 가듯이 한 민족에서 한 지파로, 한 지파에서 한 가문으로, 한 가문에서 한 가정으로, 한 가정에서 선택 받은 한 사람으로 집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시지만, 그 주변 사람들을 통해 역사해 나가십니다. 고핫을 구별해서 찬송을 시키고, 레위 지파 사람들이 제사의 집무를 부여 받았지만, 그들 중에 대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는 아론의 지파를 구별하는 일까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이라는 방법으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의 일방적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기대와 사명 그리고 책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달란트에 따라 맡기시기고 주신 만큼의 열매를 찾으신 것입니다. 당신에게 맡긴 것이 작다고 불평하면, 계속해서 작을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일에 충성하면 큰일을 맡기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긴 일은 정확합니다.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맡겨주셨습니다. 그것을 감사하고 즐거워할 때, 자신이 맡겨진 직분이 점점 더 커지고 중대한 일들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분깃에 감사하며, 끝까지 충성하고 최상의 것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더 아름답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모세(26-27)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역에서 우연은 없습니다. 모세는 거듭된 실패로 크게 좌절했습니다. 좌절한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방법으로 용기를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명하여 세우신 지도자를 높여 주시고, 그 사명을 감당할 만한 힘과 능력도 주십니다.

 

26이스라엘 자손을 그들의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라 하신 여호와의 명령을 받은 자는 이 아론과 모세요 27애굽 왕 바로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내보내라 말한 사람도 이 모세와 아론이었더라(26-27)

 

족보의 마지막 결론 부분으로, 아론과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자임을 강조합니다. 화자는 반복을 통해 모세와 아론의 권위와 지도력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현재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믿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화자는 그들의 지도력을 확실하게 인정해줍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셨음을 상기시키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은 지도자들입니다. 백성들이 그들의 권위를 다시 인식하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도구로서 그들의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모세의 거절(28-30)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부르시고 특별한 사명을 맡기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이나 자신의 부족함은 그분의 계획에 큰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며,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겸손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발견된 사명 안에서 그분의 뜻을 따라 움직일 때,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28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29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바를 너는 애굽 왕 바로에게 다 말하라 30모세가 여호와 앞에서 아뢰되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바로가 어찌 나의 말을 들으리이까(28-30)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셨으면 그냥 방치하지 않습니다. 창조하신 분이 창조의 피조 세계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인도하고 운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지으셨습니다. 이 세상 한 가운데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책임지십니다.

 

모세와 아론에게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책임지시겠다는 의미로, “나는 여호와다.”(28)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증거 하십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편 23:3)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당신을 위해 주님의 명예를 걸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 가문을 지키셨고, 그의 자손들이 대를 이어 가게 하셨음을 족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모세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예비된 자라는 자신감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애굽 왕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실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자신감을 갖고, 자신에게 특별한 사명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때, 믿음으로 사명을 감당하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연약할지라도 주의 권세와 능력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주의 뜻을 이루어나갈 때, 하나님께서 동행하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의 약속을 붙들고 담대하게 일어서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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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06-01)


다시 소명을 받는 모세

출애굽기 6장 1-13절


사업에서 크게 실패한 사람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어렵습니다. 같은 일을 두 번 실패한 경우, 다시 시작하는 데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용기는 쉽게 얻어지지 않으며, 실패의 경험은 두려움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고 다시 도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세의 이야기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서는 용기를 보여줍니다. 그의 사례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희망을 제공합니다.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이 여호와임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언약을 기억하시며,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가혹한 노역으로 인해 백성들이 모세의 말을 듣지 않자, 모세도 하나님께 불평합니다. 그런 모세에게 사명을 성취하실 것을 강조하시면서 다시 바로에게 찾아가도록 명령하십니다.

 

다시 알려주신 이름 여호와(1-5)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어떤 존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신의 존재를 증명해 줄 ‘더 위대한 존재’가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굳이 자신을 드러내실 필요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호칭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어떤 생각이었습니까?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2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3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4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류하는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5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1-5)

 

이스라엘 백성이 겪고 있는 고난과 모세의 고뇌는 성경 속에서 중요한 주제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해방의 약속을 믿었지만, 현실의 어려움에 직면하면서 불안과 의구심이 생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불만을 이해하시며, 그의 마음을 헤아리셨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시금 자신의 계획과 약속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주셨고, 모세에게 그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이는 신앙의 여정에서 인간의 약함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모두 보여주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고, 그들의 고난을 통해 더 큰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가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신뢰와 인내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원망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강한 손’을 사용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1).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키는 ‘강한 손’은 6절의 ‘편 팔’과 비슷한 뜻입니다. 하나님의 강한 손과 편 팔은 애굽에 엄청난 재앙을 불러들일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낼 것이며’, ‘쫓아낼 것이다.’ 동사 ‘가라쉬’는 보통 전쟁에서 승자가 적들을 영토 밖으로 쫓아낼 때 사용됩니다. 예컨대, 가나안 전쟁에서 승자인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족속들을 그 땅에서 ‘쫓아낸다.’ 여기서는 역설적으로 패자인 바로와 에굽가 승자인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을 추방할 것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너희 조상들에게 전능의 하나님(엘 샤다이)으로는 나타났으나 여호와로는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창세기는 사람들이 최초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것은 셋의 아들 에노스가 탄생할 때부터였다고 말합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 여기서 ‘불렀다’는 것은 분명히 예배 행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후에도 족장 시대에 믿음의 사람들은 꾸준히 여호와와 만남을 지속하며, 그분이 보내신 여호와의 사자가 빈번히 활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이미 여호와를 알고 있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왜 출애굽기 6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직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까?

이에 대한 비평학자들의 설명은 단순하고 간단합니다. 무엇보다 이것은 서로 다른 자료가 섞여 들어간 결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견해는, 여호와는 후대의 이름인데 창세기 편집자가 그 후대의 이름을 태초의 사건에서부터 시대착오적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런 모순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 저작설을 떠나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일관된 편집적 통일성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이것이 자료의 충돌이나 시대착오적인 신명의 사용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뛰어난 히브리어 문법 학자인 드라이버(G. Driver)는 이것을 감탄의 부정문으로 본다. 그는 3b절은 ‘내가 여호와로 알리지 않았다’가 아니라 ‘내가 이미 여호와로 알리지 않았는가!’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이것을 부정이 아닌 긍정의 의미로 해석한 것입니다. 한국 학자 중에 기동연(고신대학원)이 이와 비슷한 견해를 제안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호와라는 이름을 조상에게 알린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 견해가 상당히 매력적임에도 불구하고 학계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구문론적인 측면에서도 지지받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정경의 통일성을 수용하는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무난한 해석을 제안합니다. 이미 에노스가 탄생할 즈음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계시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간직하는 내재적 속성과 능력,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여호와의 인격적인 실체에 대해서는 계시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출애굽 사건을 통해 그들은 여호와가 어떤 분인지를 비로소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여호와’이심을 알려주고자 하십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뒤이어 언약을 상기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조상들에게 그들이 거주하던 가나안 땅을 주기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4).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6-9)

오늘날도 우리의 필요를 따라 그 필요를 채워주는 분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만약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 샤파’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꼭 필요하신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렇게 역사해 나가실 것입니다.

 

6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7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8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하셨다 하라 9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6-9)

 

하나님께서는 ‘나는 여호와다’라고 거듭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반드시 애굽의 학정으로부터 건지시고 애굽에 큰 심판을 내려 그들을 속량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손은 가장 강하시며, 그분이 팔을 펴시면 대적할 세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하는 ‘속량자’가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한 뒤 조상들에게 맹세한 그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고 그들의 영원한 유산(기업)으로 주실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여호와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직 믿음이 없었습니다. 이미 모세가 전한 여호와의 계획을 전해 들었고, 그가 그것을 확증하는 기적을 시연하는 장면을 다 지켜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강한 압박을 가해오는 바로를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였습니다.

 

다시 바로에게 가라(10-13)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대해 의구심을 가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이나 상황이 아닌, 그분의 사역에 대한 우리의 순종을 원하십니다. 또한,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실에 집중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모세가 다시 바로에게 가는 것은 쉽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인생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신뢰해야 합니다.

 

10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1들어가서 애굽 왕 바로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게 하라 12모세가 여호와 앞에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 13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사 그들로 이스라엘 자손과 애굽 왕 바로에게 명령을 전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시니라(10-13)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바로를 다시 찾아갈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는 바로와 2차 협상을 벌여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자신감을 상실한 상태입니다. 그는 앞서 제시한 변명을 다시 늘어놓습니다. 자신의 언변이 부족하다는 핑계입니다. 아론이 모세의 입이 되어 협상을 진행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고, 백성들을 설득하기에는 너무 신뢰를 잃은 상태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도 자기 말을 듣지 않는데 바로가 자신의 말을 들을 리 만무하다고 하면서, 다시 한 번 자신의 무능한 혀와 입을 탓합니다. 특이하게 앞에서는 혀와 입이 ‘무겁다’는 표현을 쓴 반면, 여기서는 자신의 부족한 언변을 ‘할례받지 않은 입술’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특이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할례받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 백성으로 부적격한 것처럼 비유적으로 할례받지 않은 입술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뭔가가 덮고 있는 듯이 입술이 답답해서 협상이 원활하지 않다는 표현입니까? 필자는 후자의 비유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말주변이 없다는 모세의 변명이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변명은 정당하지 못한데, 이미 하나님께서는 유능한 대변인 아론을 그의 입으로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한 번 협상에 실패했다고 하여 낙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장면은 모세의 연약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연약한 한 인간에 불과할 뿐 이스라엘의 참 구원자는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과 달리 모세의 변명에 아무 반응을 하지 않으신 채 그저 다시 파라오에게 가라고만 하십니다. 모세와 아론은 다시 바로와 협상하여 그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들을 통해 바로를 굴복시켜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내실 것입니다.


환자가 치료되는 과정에서 ‘호전 반응’이 나타나듯, 이스라엘 백성들도 겉으로는 더 힘들어 보일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만 믿는 것은 불신앙을 초래합니다. 믿음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를 신뢰하며 나아갑니다. 하나님께 봉사하고 헌신해도 삶이 더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평이나 원망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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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05-02)


세상을 본 사람들을 통해 본 모세

출애굽기 5장 15-23절


 

성경에서 형통의 삶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된다면 세상은 대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사람들의 이기심과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조차 왜곡될 수 있습니다. 문제에 갇혀 있으면 해법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늘을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모습을 보고, 그 가운데서 길을 찾아야 합니다. 믿음의 길을 걸으며 해법을 여는 사람으로 설 수 있길 바랍니다.

 

  • 본문은 바로 왕의 불합리한 노역에 이스라엘 기록원들이 호소합니다. 바로는 이스라엘이 게을러 여호와께 제사 드리러 가려 한다고 하면서 더 가혹하게 일을 시킵니다. 기록원들은 모세와 아론을 만나 그들을 원망합니다. 모세의 탄식에 하나님은 강한 손으로 구원하리라는 약속을 하삽니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는 백성(15-21)

흔히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마음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쉽게 조절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사소한 일에 쉽게 상하고, 작은 유혹에 흔들리는 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때로는 작은 난관에도 마음이 약해져 주저앉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는 우리의 내면이 얼마나 쉽게 동요하는지를 보여줍니다.

 

15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이 가서 바로에게 호소하여 이르되 왕은 어찌하여 당신의 종들에게 이같이 하시나이까 16당신의 종들에게 짚을 주지 아니하고 그들이 우리에게 벽돌을 만들라 하나이다 당신의 종들이 매를 맞사오니 이는 당신의 백성의 죄니이다 17바로가 이르되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하는도다 18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지라도 벽돌은 너희가 수량대로 바칠지니라(15-18)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자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관들을 바로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출애굽기 2:23에서도 이스라엘이 무거운 짐으로 인해 부르짖자 하나님께서 그 소리를 들으시고 아바라함과의 언약을 기억하셨고 모세를 세워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준비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고 바로에게 부르짖으며 도움을 요청합니다. 기록원들은 자신을 바로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지금까지 그렇게 믿고 바로에게 충성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충성을 바쳐온 자신들에게 왜 이렇게 하냐고 항의합니다. 아마도 바로에 대한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상황이 매우 불합리하며 부당하다는 사실을 호소하는데 두 가지로 그 부당함을 말합니다. 첫째, 짚을 주지 않고 벽돌을 만들라고 한 바로의 명령이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바로의 명령을 완수하지 못한 것은 바로의 백성 이스라엘의 잘못인데 오히려 바로의 충성스러운 종인 자신들이 매를 맞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록원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백성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백성으로 여기고 계신 하나님의 생각과 큰 차이가 있으며, 이스라엘을 단순히 노예로 여기고 있는 바로의 생각과도 다릅니다. 또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과 자신들과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은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을 동일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으로 인해 자신들이 벌 받는 것이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록원들의 간곡한 부르짖음을 바로는 듣지 않습니다. 바로는 그들에게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너희’는 기록원들을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기록원들은 자신들이 바로의 종이며 애굽의 백성이라고 생각하였지만, 바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바로는 게으르다는 말을 반복하며 기록원들의 말을 묵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러 가자’는 모세의 말 때문에 이런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다시 강조합니다. 즉, 문제의 원인은 모세의 말에 있으니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러 가자는 선동에 휘둘리지 말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또한 원인을 모세에게 돌리며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 사이를 더욱더 이간질했습니다. 이렇게 바로는 기록원의 청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빨리가서 일하라고 재촉하며 짚을 주지 않아도 벽돌을 수량대로 바치라고 다시 한 번 못 박습니다. 앞 단락에서도 보듯이 반복을 통해 이 명령은 절대 취소되거나 바뀔 수 없는 절대 불변의 진리처럼 간주되며 바로의 권위가 절대적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바로 기록원들이 모세에게 항의함(19-21)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붙잡고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의 이야기는 신앙의 갈등을 상기시킵니다. 그들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잊지 않았습니다.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은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가 겪는 시련은 그분이 준비하신 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19기록하는 일을 맡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너희가 매일 만드는 벽돌을 조금도 감하지 못하리라 함을 듣고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 20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 21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15-21)

 

바로가 하루에 할당된 벽돌의 수를 감해주지 않겠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것을 들은 이스라엘의 기록원들은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계속 괴롭힐 것이고, 그 사이에서 자신들이 계속해서 어려움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애굽 편에 붙어서 편하게 지내던 시절이 지나갔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심각한 상황을 깨닫고 화가나서 나오는 기록원들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모세와 아론을 만납니다. 아마도 모세와 아론은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기 위해 기록원들이 왕궁에서 나오기를 기다린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의 마음이 완악해져서 쉽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하나님으로부터 듣기는 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이 안 좋아지는 것에 대해서는 모세도 상당히 부담을 느꼈기에 돌아가는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기록원들은 모세와 아론을 보자마자 강력하게 비난합니다. 모세와 아론 때문에 노예 상태로 근근이 살고 있던 상황이 악화되어 미움을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학대하고 죽일 빌미까지 제공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들을 보고 판단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모세와 아론의 능력과 권위에 의문을 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모세의 사역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고, 처음에는 모세를 믿고 하나님을 경배했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처음부터 잘 되는 것도 있지만 확신을 갖고 시작한 대부분의 일은 처음에는 반대에 부딪히고 비난 받으며 좌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과정이 전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이런 과정을 통해 신앙이 더욱 단단해집니다. 앞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에서 하나님을 점점 더 의지하는 모세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하소연 하는 모세(22-23)

삶이 어려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문제일수록 하나님의 도우심이 더욱 가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구원자이자 인도자로 나타납니다. 모세와 아론의 첫 번째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 결과 백성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이는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졌습니다. 모세는 큰 낙심에 빠져 하나님께 항의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22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23내가 바로에게 들어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후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22-23)

 

모세와 아론의 첫 번째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오히려 백성을 향한 탄압이 가중되기만 하였습니다. 최악의 결과입니다. 모세는 크게 낙심하여 하나님께서 항의합니다. 그의 어투로 매우 강하고 단도직입적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상황이 좋아지기보다는 더 악화되었습니다. 바로는 더 강퍅해지고, 애굽의 군인들은 순종치 않은 사람들을 더 학살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무거운 짐이 주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패장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만 늘어놓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짐을 덜어준 것이 아니라 짐을 가중시킨 것에 괴로워합니다. 모세는 백성들과 패장들의 신랄한 비판과 원망은 크게 들었습니다(20-23). 하지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나가서 말할 때, 바로는 강퍅해질 것이며 이스라엘에게는 원망을 들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의 실수는 사람들의 원망은 들었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기억하지 못한 것입니다. 모세는 원망하는 백성들처럼 하나님께 나가서 원망합니다. 하나님을 불신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무거운 마음에서 하는 말입니다.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이 있다면, 오직 주님의 강한 능력만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이지만,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 능력으로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담대하게 나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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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05-01)


모세와 바로의 첫 대면

출애굽기 5장 1-14절


 

옛날에는 위생이 좋지 않아 작은 부스럼이 심각한 종기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를 속담으로 '긁어 부스럼'이라 표현했습니다. 모세도 좋은 의도로 시작했지만 일이 점점 꼬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일의 과정을 결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최종 선언을 하실 때까지 인내하며 끝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 본문은 드디어 모세가 바로 왕에게 처음으로 마주합니다. 그는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제사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도리어 바로는 이스라엘이 노역을 쉬려한 것으로 생각하고, 더욱 혹독한 노동을 강요합니다.

 

모세와 바로의 첫 대면(1-4)

오만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시하며, 한결같이 "하나님이 누구냐?"고 말합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의 태도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교만을 잘 보여줍니다. 그의 오만함은 결국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만한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대적하는지를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겸손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1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2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3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4애굽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려느냐 가서 너희의 노역이나 하라 5바로가 또 이르되 이제 이 땅의 백성이 많아졌거늘 너희가 그들로 노역을 쉬게 하는도다 하고(1-5)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에게 자신의 완전한 노예일 뿐입니다. 감히 노예가 어떻게 자기 의지가 살아서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노예는 노예이기 때문에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가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신의 요구를 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모세가 말한 그 자체가 바로를 향한 선전포고입니다.

 

(1) 제사를 드리게 해달라고 요구(1-3)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어주지 않으려고 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장정만 60만 명인 엄청난 노동력입니다. 이들 때문에 국고성도 짓고 농사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세금도 거두어 들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왕이 아무런 갈등 없이 종들이 원하는 데로 내어줄 순 없습니다. 바로의 반응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바로도 계속해서 강퍅하지는 것이고 이 일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국고를 부요하게 했던 대단한 업적은 400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나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달라고 하는 것은 정말 어이없는 일일 것입니다.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2)고 대답합니다. 그는 자랑이라도 하듯 여호와를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모세와 아론을 책망하는 바로(4-5)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책망하며, 이스라엘 백성의 노동을 방해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더 많은 일을 시키고, 그들이 노동에 집중해야 한다고 명령하여, 모세와 아론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내 백성을 보내라”는 메시지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모든 인류가 우상과 죄로부터 벗어나서 참된 하나님 앞에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요청하고 계십니다. 옛날이나 지금이 사단은 영혼을 쉽게 보내지 않습니다. 놓아주지 않으려는 끈질긴 세력은 지금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과정도 여러 어려운 과정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나지 않았습니다. 이 과정은 우리를 온전한 사람으로 이끄시는 놀라운 섭리요, 시련의 강도가 강할수록 더 아름답고 더 귀한 정금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출애굽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여행을 계속하게 될 것입니다.

 

모세와 바로의 첫 대면(6-14)

새벽이 가까울수록 어둠은 더 짙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할수록 이를 가로막는 방해도 격렬합니다. 악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을 무산시키려 갈등합니다. 이 갈등은 단순히 의견 대립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과 모르는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영적 전쟁으로 발발합니다.

 

6바로가 그 날에 백성의 감독들과 기록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7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에 쓸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이 가서 스스로 짚을 줍게 하라 8또 그들이 전에 만든 벽돌 수효대로 그들에게 만들게 하고 감하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 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 하나니 9그 사람들의 노동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 10백성의 감독들과 기록원들이 나가서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바로가 이렇게 말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짚을 주지 아니하리니 11너희는 짚을 찾을 곳으로 가서 주우라 그러나 너희 일은 조금도 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2백성이 애굽 온 땅에 흩어져 곡초 그루터기를 거두어다가 짚을 대신하니 13감독들이 그들을 독촉하여 이르되 너희는 짚이 있을 때와 같이 그 날의 일을 그 날에 마치라 하며 14바로의 감독들이 자기들이 세운 바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을 때리며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에 만드는 벽돌의 수효를 전과 같이 채우지 아니하였느냐 하니라(6-14)

 

바로는 모세와 아론의 요구를 일종의 속임수나 노림수로 평가절하 했습니다. 히브리인들로 하여금 노역에서 쉼을 얻도록 하려는 속셈이라고 여겼습니다. 바로는 화가 나서 이스라엘 백성을 더욱 혹독한 강제 노동이 실시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헛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계획을 수포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1) 노동을 더욱 가중되는 이스라엘(6-9)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힘없고 고단해졌습니다. 그들은 이제 더 큰 장애물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바로는 짚을 주지 않으면서도 이전과 같은 수효의 벽돌을 만들라고 강요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자신의 노예로 삼기 위한 완벽한 방법이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또한, 바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말’이라 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그 말씀을 듣지 않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그들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방의 희망이 멀어지는 듯한 절망감에 휘말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에는 여전히 구원의 염원이 존재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고난 속에서도 그들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2) 이스라엘 자손은 더욱 큰 고난(10-14)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왕을 굴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노동 조건을 더욱 가혹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재료조차 주지 않고, 이전과 동일한 양의 벽돌을 만들어내도록 강요했습니다. 시간이 남아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자, 더 많은 노동을 요구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또한 애굽인 감독에게는 매질을 더욱 혹독하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의 꿈을 포기하게 만들 만큼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의 염원은 죽음조차 막을 수 없는 강렬한 비전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하다 보면 견디기 힘든 장애물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당신은 장애물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고 그분의 약속을 믿는다면, 우리는 확신과 담력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를 지탱해 주며,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게 만듭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는 바로를 보면서, 하나님의 권위와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무지한 인간의 오만한 모습을 봅니다. 오늘날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을 어리석게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무서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가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최후 승리는 하나님과 그분을 믿는 자들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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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04-02)


애굽으로 돌아가는 모세

출애굽기 4장 18-31절


 

현대는 지도자의 부재로 인해 ‘위기의 시대’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존경할 만한 지도자가 부족해 개인의 자유가 방종으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미디어의 발달이 없었기에 지도자들의 어두운 면이 감춰졌으나, 오늘날에는 쉽게 드러납니다. 이는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게 만들어, 문명의 발달이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오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큰 위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모세는 곧장 장인 이드로를 찾아갑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 한 남편과 아버지이자 양을 잘 치는 유능한 한 사위로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이스라엘 민족을 ‘내 형제’라 부르고 있습니다. 장인 이드로의 허락을 받고 모세는 애굽을 향해 떠납니다. 도중에 시내산에서 형 아론과 만나 이집트에서 할 일을 준비합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는 모세(18-23)

하나님의 일을 행한다고 가족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지도자들은 가정부터 잘 다스려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믿음이라는 미명 아래 기본 윤리를 왜곡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인간의 윤리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할 수는 없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일을 하라고 하셨지만, 장인 이드로와 먼저 상의한 점에서 가족의 의견을 중요시했습니다.

 

18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 알아보려 하오니 나로 가게 하소서 이드로가 모세에게 평안히 가라 하니라 19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목숨을 노리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20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2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그가 백성을 보내 주지 아니하리니 22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23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 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18-23)

 

이제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즉시 순종합니다.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 들린 후로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부르심을 받은 직후 장인 이드로를 찾아가 자신의 계획을 알립니다.

모세는 이드로에게 애굽으로 돌아가 형제들이 아직 살아있는지 알아보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모두 죽었을까 염려하는 표현이라기보다는 그들이 학대 속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살펴보려 한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참고, 타나크 성경[TNK]). 미디안 제사장이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이드로는 모세를 부르신 여호와의 뜻을 존중합니다. 사위의 위대한 꿈을 후원하면서 그의 이탈로 인한 집안의 상당한 경제적 손실을 각오합니다.

40년이 흘러 세대가 바뀌고 애굽에서 모세의 생명을 찾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습니다(19). 이것은 마태복음의 예수님 탄생 이야기에 대한 기시감을 줍니다. 예수님의 가족도 헤롯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해 있다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다 죽은 후 요셉과 마리아는 유대 땅으로 돌아옵니다. 분명히 두 사건은 하나님의 섭리하에 발생한 일이었을 것이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모세의 도피와 귀환은 인류를 구원하실 그리스도의 예표적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아내 십보라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워 애굽으로 돌아갑니다. 여기서 모세의 ‘아들들’로 표현되는데, 게르솜과 그 이후 태어난 엘리에셀을 가리킵니다. 모세가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들어갔다는 것은 애굽이 그에게 더는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모세는 손에 지팡이를 쥐었습니다. 그것은 모세의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팡이” (마테 하엘로힘)입니다(20).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파라오를 찾아가 하나님의 말씀과 요구를 그대로 전하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라고 지시하십니다.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고하여 이스라엘 백성 ‘보내주기를 거절할 것’임을 미리 알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표현과 그분이 바로가 거절할 것을 미리 아신다는 사실은 해석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십보라와 피 남편(24-26)

믿음은 삶 속에서 순종으로 증명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품으면 머뭇거림이 온전히 순종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받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머뭇거림 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모리아 산으로 출발했습니다. 믿음의 사람 모세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24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25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26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24-26)

 

갑자기 장면이 바뀐 듯 보이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에피소드 한 장면이 끼어듭니다. 이 단락은 구약 전체에서 가장 난해한 본문 중 하나입니다. 일단 모세라는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기에 대명사 ‘그’에 대한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전통적으로는 24절에서 하나님께서 만난 ‘그’를 모세로 간주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기로 하십니다. 그가 아들에게 할례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린 십보라가 재빨리 아들을 할례하여 그 포피를 모세의 발에 갖다 댐으로써 위기를 넘깁니다. 십보라는 모세를 ‘피 남편’이라 부릅니다. 이것이 가장 일반적인 해석인데, 이 경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일 작정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직전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구원자로 임명하여 부르셨는데, 느닷없이 왜 그를 죽이려 하십니까? 하나님의 변덕으로 이해되는 기괴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외에도 이 짧은 에피소드가 갖는 문제는 수수께끼투성입니다. 이 난제를 둘러싼 숱한 의견들이 있지만, 우리는 가장 무난한 답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봅니다. 숙소에서 여호와는 ‘모세’를 만난 것으로 보는 것이 앞의 이야기와 가장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우리는 서사의 흐름을 수용하면서 모세가 애굽으로 떠난 도중에 어떤 숙소에서 이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게르솜의 할례를 시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세를 죽이려 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시도하셨지만(비케쉬) 실제 징벌을 실행하지는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반면에 모세의 생명을 ‘찾는 자들’(비케쉬 UP의 분사)은 실제로 그를 죽이려고 찾아다녔습니다(19). 우리는 바로처럼 실제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작정하셨다는 이해를 거부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서 심지어 모세의 생명을 위협하는 방식으로 결국 그의 아들의 할례를 최종적으로 실행하게 만드셨다고 해석합니다. 이것은 모세의 소명에서 아들의 할례의 중요성을 부각시킵니다. 십보라가 할례를 행한 아들은 게르솜으로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합니다. 모세는 십보라의 반대로 게르솜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 보수적인 학자들의 전통적인 해석입니다. 그러나 자신 때문에 모세가 하나님께 위협받는 상황에 이르자, 자초지종은 생략되었지만 십보라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즉시 자신이 직접 아들의 할례를 실행한 것입니다. 아내가 할례를 행한 이유는 남편의 생명이 위태로운 긴급 상황이기도 했고, 자신이 할례를 반대하여 생긴 문제였기에 책임을 지려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십보라는 뒤늦게 과오를 깨닫고 남편을 구하기 위해 아들의 할례를 실천에 옮긴 것입니다. 십보라는 할례를 행함으로써 아들 게르솜을 언약 백성의 일원으로 합류시킵니다. 이 할례는 언약 백성의 일원이 되는 기준이고 표지이기에 생명이 걸릴 만큼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무엇보다 언약 백성을 이끌어야 하는 모세가 애굽으로 떠나기 전에 자기 가족부터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확고히 해야 했기에, 하나님께서 비상조치를 취하신 것으로 이해됩니다.

십보라가 모세의 ‘발’에 아들의 포피를 갖다 대며 ‘당신은 내게 피 남편이다’라고 말하는데, 이 ‘피 남편’의 의미도 할례가 지닌 이런 언약적 배경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피 남편’이 무슨 뜻인지를 아는 것은 여전히 어렵지만, 아들과 더불어 자신이 할례의 피 흘림을 통해 남편이 속한 언약 백성의 혈통에 합류했다는 선언으로 보입니다.

이제 비로소 진정한 언약 백성이 된 가족과 더불어 모세는 애굽으로 떠날 준비를 완료합니다.

 

모세와 아론의 만남(27-31)

지도자에게는 고난의 길이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 후에는 놀라운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의심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최종적인 승리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경험은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27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시되 광야에 가서 모세를 맞으라 하시매 그가 가서 하나님의 산에서 모세를 만나 그에게 입맞추니 28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분부하여 보내신 모든 말씀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이적을 아론에게 알리니라 29모세와 아론이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모으고 30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그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31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27-31)

 

다시 장면이 바뀌어 애굽의 아론이 등장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광야로 가서 모세를 만날 것을 지시하십니다. 이 광야는 물론 미디안 광야일 것입니다. 아론은 길을 떠나 하나님의 산, 즉 시내산에서 모세를 만나 그와 기쁘게 상봉합니다. 무려 40년만의 가족 상봉입니다. 모세는 형 아론에게 그동안의 모든 일을 상세히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굳이 아론을 시내산까지 부르신 이유는 분명 대업을 앞둔 두 사람을 준비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애굽으로 함께 돌아갔으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모든 장로들을 불러 모았습니다(29). 4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늙은 장로들은 모세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대로 아론이 모세의 ‘입’이 되어 장로들 앞에 서서 모세의 말을 전합니다(30).

이어지는 ‘그가 백성 앞에서 이적들을 행했다’에서 ‘그’는 모세로 이해됩니다. 왜냐하면 바로 앞의 문장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던’이기 때문입니다. 아론은 바로 앞에서도 모세를 대신해서 협상에 나서는데, 40년의 공백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라는 인물에 친숙하지 않기에 아론이 나섰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장로들은 모세를 잘 아는 나이 든 계층이므로 이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아마 40년 동안 외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모세는 모국어와 이집트어 구사에 능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모세와 아론은 계속해서 나란히 등장하며, 아론은 말뿐 아니라 기적을 행할 때도 모세를 대신해서 그의 지팡이를 들고 전면에 나서고 있습니다. 아론이 모세를 대신하여 ‘말’ 이상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장로들과 백성은 모세와 아론의 말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외편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형편과 처지를 줄곧 살피셨다는 말을 듣고 그분께 경배를 드렸습니다(31).


하나님께서는 훌륭한 지도자로 감당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믿음의 그릇이 큰 지도자감을 찾고 계십니다. 지도자를 세우실 때, 먼저 지도자다운 지도자를 만드신 후에 세우십니다. 당신이 준비된 그릇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용하십니다. 지도자로서 근심과 걱정을 다 버리고 큰 그릇이 될 때 큰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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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04-01)


확실한 증거를 통해 모세의 소명

출애굽기 4장 1-17절


 

세상을 살아갈 때 믿음의 방법과 현실의 방법이 다를 수 있습니다. 신중함은 중요하지만, 과도한 신중함은 하나님의 뜻보다 인간의 생각을 우선시하게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신중함과 신앙의 균형을 맞추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 모세는 하나님께서 확고히 함께하시겠다는 약속과 보증을 받았지만, 그것이 모세의 행동이 바뀌어 실천에 옮기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모세의 미온적이고 부정적인 반응은 자신의 자격에 대한 의심(3:11, “내가 누구이기에”)과 하나님에 대한 확신 부족(3:13, “그의 이름을 무엇이냐 하리니”)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점점 자신이 지도자로서는 부적격한 인물임을 강조하면서 마지막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모세가 받은 확실한 증거(1-9)

하나님의 이적은 그분의 공의와 자비를 동시에 드러냅니다. 심판을 통해 불순종을 경고하시고, 구속을 통해 회복과 새로움을 제공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두 가지를 균형 있게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고 순종함으로써 그분의 뜻을 실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는 우리의 삶 속에서 그분의 인도하심을 나타내며, 우리가 그분의 뜻에 따라 나아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1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2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3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것을 땅에 던지라 하시매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으니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5이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6여호와께서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에 나병이 생겨 눈 같이 된지라 7이르시되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이 본래의 살로 되돌아왔더라 8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만일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표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나중 표적의 표징은 믿으리라 9그들이 이 두 이적을 믿지 아니하며 네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너는 나일 강 물을 조금 떠다가 땅에 부으라 네가 떠온 나일 강 물이 땅에서 피가 되리라(1-9)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을 우려하실 때, 모세에게 세 가지 이적을 보여주십니다. 첫째, 지팡이를 뱀으로 변화시키고, 다시 지팡이로 돌려놓으라고 하십니다. 둘째, 손을 병에 걸리게 하고 다시 깨끗하게 회복시키며, 셋째, 나일 강물을 땅에 쏟아 피로 변하게 하여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를 제시하십니다.

 

(1) 백성의 불신을 염려하다(1)

 

모세는 처음에 자신의 자격을 의심했는데, 하나님께서 함께할 것이라는 약속을 보장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 순종하지 못합니다. 그의 망설임과 거부의 두 가지 추가적 이유가 나타납니다. 첫 번째로 그는 백성의 불신을 염려하고, 두 번째로 자신의 언변 부족을 탓합니다. 첫 번째 핑계는 자신의 체험적 증언에도 불구하고 백성은 자신을 믿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나타나신 사실도 믿지 않을 것이라는 푸념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모세의 자신감 결여와 믿음 부족으로 인한 불순종의 태도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품을 의심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3단계에 걸친 확고한 기적의 증표를 보여주십니다.

 

(2)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다(2-5)

 

갑자기 하나님은 모세가 들고 있는 지팡이에 대해 물으십니다. 여기서 출애굽과 이후의 광야 40년 내내 중요한 이적과 기사를 일으킬 모세의 지팡이가 최초로 등장합니다. 모세는 당시 목자들이 들고 다니던 지팡이를 소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지팡이는 양 떼를 몰 때, 그리고 거친 광야 여기저기를 거닐 때 사용되는 필수품이었습니다. 모세의 그 흔한 지팡이가 이제 특별한 지팡이, 즉 ‘하나님의 지팡이’로 바뀝니다(20). 하나님께서 쓰고자 하신 순간 아무리 평범한 물건일지 언정 특별한 물건이 됩니다.

하찮은 나귀 한 마리가 메시아 왕을 태우는 귀한 나귀로 쓰임받을 수도 있습니다(마 21:2-3).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지팡이로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최초의 기적은 지팡이가 뱀으로 변한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 명하시자 모세가 순종했습니다. 이때 지팡이가 뱀으로 바뀌었습니다. 모세는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섰습니다. 모세 앞에서 꿈틀거린 뱀은 코브라와 같은 독사였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 독사의 꼬리를 잡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모세의 믿음에 대한 시험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치명적인 독을 가진 코브라의 꼬리를 잡는 것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용기 내어 손으로 뱀의 꼬리를 잡자 뱀은 다시 지팡이로 변했습니다.

모세는 이 기적을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시연해야 하며, 이를 통해 그들이 모세가 하나님께서 보낸 구원자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적은 애굽의 마술사들도 일으킬 수 있는 일이기에, 백성들은 여전히 의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두 번째 기적을 준비하십니다.

 

(3) 손에 나병이 생기다(6-9)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손을 품에 넣으라 명하셨습니다. 모세가 순종하여 손을 품에 넣자 손에 악성 피부병이 생겼습니다(6). 명사 ‘짜라아트’는 흔히 ‘문둥병’(한글개역) 혹은 ‘나병’(개역개정)으로 번역되나 ‘악성 피부병’(공동번역 새번역)이 가장 타당한 번역입니다. 왜냐하면 짜라아트의 증상은 나병의 특징과는 거리가 멀고 건물의 벽이나 가죽 제품과 같은 사물의 표면에도 짜라아트(악성 곰팡이)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편의상 이것을 ‘나병’으로 칭하기로 합니다. 손에 나병이 발생하자 모세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다시 손을 품에 넣으라 명하시고 모세는 즉각 순종했습니다(7). 이때 모세의 손이 정상이 되었습니다. 나병으로 물러진 피부에 다시 생살이 돋아 온전케 된 것입니다.

 

이것은 백성에게 보여줄 두 번째 표적입니다. 모세는 그들 앞에서 이것을 시연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재확증할 것입니다. 나병의 기적을 통해 병을 일으키고 고치는 것은 마술사의 능력 밖의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또한 병 치료는 의사의 영역일 수 있으나, 의사 역시 나병과 같은 무서운 병을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마술사들이 흉내 낼 수 있는 첫 번째 이적을 믿지 않더라도 두 번째 이적은 믿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믿지 못하며 모세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9). 실은 보고도 믿지 못하는 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세 번째 표징을 준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일강 물을 떠다가 땅에 부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면 나일강에서 떠온 그 물이 땅 위에서 핏빛으로 변할 것입니다. 이것은 나일강 전체가 핏빛으로 변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세 번째 기적은 현재의 미디안 땅에서 미리 시연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가서 백성 앞에서 직접 실행해야 할 기적입니다. 모세는 나중에 애굽으로 가서 모든 장로를 모으고 백성 앞에서 이 모든 기적들을 그대로 시연했습니다. 이때 백성은 여호와를 믿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습니다(4:30-31).

 

모세가 언변 부족을 핑계하다(10-13)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순종하며, 우리의 부족한 부분은 그분의 도움으로 채워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능력과 자원에 따라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의존함으로써 그분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움을 신뢰하며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10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11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12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13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10-13)

 

모세는 이제 자신의 자질 부족, 특히 부실한 언변을 핑계거리로 내세웁니다. 사실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과 덕목은 말의 능력일 수 있습니다. 모세가 말한 혀의 어눌함은 그가 40년 동안 이방인인 미디안 가족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그의 모국어 히브리어와 이집트어의 구사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이집트어의 어눌함은 바로와의 담판 협상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이며, 히브리어의 부자연스러움은 백성을 효과적으로 설득하고 인도할 수 없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경에 나타나는 모세의 모습은 언어장애가 있는 사람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는 자주 백성 앞에서 연설하는 지도자로 나타납니다. 아마 그런 이유로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은 “모세가 말과 하는 일들에 능하더라”라고 설교합니다(행 7:22). 그는 결코 언어장애인이나 말더듬이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가장 무난하게 모세는 언어 구사에 문제는 없었으나 스스로 자신을 말주변이 없는 인물로 격하하며 변명을 하고 핑계를 대고 있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것은 모세의 자신감 결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사람의 입과 눈과 귀를 주관하시고 통제하신다고 말씀하시면서, 모세의 입과 함께하시어 해야 할 말을 알려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11-12).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순종의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보내달라고 부탁합니다.

 

하나님이 아론을 모세의 입으로 세우시다(14-17)

하나님은 모세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해 아론을 세우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인식하고, 필요한 동역자를 보내어 사역을 효과적으로 이루게 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각자의 역할을 적절히 배분하여 사명을 성취하십니다. 우리의 순종과 협력은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신뢰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협력해야 합니다.

 

14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15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16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17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14-17)

 

모세의 거듭된 고사에 하나님께서는 결국 화를 폭발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노하신 이유는 그가 거듭 순종하기를 망설이며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를 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노를 가라앉히시고 대안을 제시하십니다. 끝까지 모세를 독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그가 사명을 감당케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사명자를 부르실 때 결코 폭압적 독재자로서 명령하는 분이 아니라 인격적인 대화와 설득의 과정을 통해 모세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형 아론이 도우미로 나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모국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소통에 문제가 있으며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협상을 위해 아론이 세워졌습니다. 이로써 모세는 하나님을 대변하고 아론은 모세를 대변하며, 아론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이 되는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형 아론의 합류와 지팡이의 기적 약속과 함께, 모세와 하나님의 사명에 대한 줄다리기가 마무리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아론을 동역자로 세워 부족함을 보완하셨습니다. 우리의 능력과 자원이 부족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것을 준비하시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일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을 신뢰하며 순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강하게 하시고 사명을 성취하십니다. 하나님은 각자의 역할을 적절히 배분하시며, 우리의 협력과 순종을 통해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믿고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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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03-02)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부르심

출애굽기 3장 13-22절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을 선언하십니다. 이 약속의 성취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며, 우리 또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때는 하나님께 달려 있으며, 그분은 그분의 계획 안에서 정확한 시간에 이루십니다. 우리는 기다림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해야 합니다.

 

 

  •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위대한 사명자로 부름받은 모세는 처음에 자신이 그 일에 적임자인지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모세와 함께할 것이라는 약속과 보증으로 사명을 확신시키셨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을 부르신 그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모세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그가 이스라엘 백성의 장로들을 설득할 때도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13-15)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라 현재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미래를 약속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신뢰할 때, 그분의 신실하심은 우리 삶의 기반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지키신 것처럼,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실 것입니다.

 

13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14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15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13-15)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을 그들에게 보낸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다면 어떻게 답변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와 속성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계시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있는 자’, 즉 어떠한 신들과도 다르게 자존하는 존재로 계시하십니다. 이로써 역사의 전환점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은 유일한 존재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신(神) 지식을 얻게 될 것이며, 장차 발생할 이적과 기사의 체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더욱 깊이 알게 될 것입니다.

14절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난해한 문구에 대해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숱한 토론과 연구가 이루어져 왔습니다. 원문인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는 우리말로 ‘나는 나다’(공동번역) 혹은 ‘나는 나 스스로가 존재하는 자다’일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은 문법적으로 특이하고 난해할 뿐 아니라, 이것이 신명이라는 사실은 더욱 기이합니다. 하나님의 이름 ‘에흐예’는 분명히 그분의 공식적인 이름 ‘야웨’와 깊은 어원론적 관련이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에흐예’로 밝히신 곳은 이곳뿐입니다.

그 외에는 항상 그분의 이름은 ‘야웨’가 사용됩니다. 물론 ‘신명 네 문자’(Tetragrammaton)로 불리는 철자의 정확한 발음은 현재까지 확정되어 있지 않으며, 흔히 ‘야’가 가장 유력한 발음으로 인정되어 편의상 사용되는 중입니다. 그 이유는 יהוה의 약칭이 인명의 앞이나 뒤에서 흔하게 ‘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예, 엘리야, 예레미야 등).

만일 이 견해대로 이 단어가 ‘야웨’로 읽힌다면, 이것은 히필형으로 ‘그가 존재하게 한다’는 뜻을 갖습니다(ה가 사실상 묵음이므로 야훼보다는 야웨가 더 정확한 발음임). 이것은 야웨가 만물을 존재하게 한 신이라는 뜻에 잘 부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스스로 존재하는 자로 알리신 후 앞서 6절에서 밝히신 자신의 신분을 반복해서 알려주십니다: 너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너를 보냈다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조상들과의 친밀한 개인적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라고 말씀하실 때 가리키는 이름은 간략히 ‘여호와’로 이해됩니다. 말하자면, 나는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입니다. 그분은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너는 가서 내 백성을 이끌어내라(16-18)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 사명은 혼자 감당하기 어려워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분이 주신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 공동체 안에서 협력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혼자 짊어지기보다는 하나님의 지혜와 공동체의 힘을 의지해야 합니다.

 

16너는 가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돌보아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확실히 보았노라 17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면 18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하라(16-18)

 

하나님께서는 오래전부터 이스라엘의 고난을 돌아보고 (파카드) 계셨습니다(16). 동사 ‘파카드’는 ‘방문하다’라는 기본 뜻을 지니는데, 어떤 대상에 주의 깊은 관심을 갖고 직접 찾아가는 행동을 하는 것을 가리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애굽에서 당하고 있는 모든 일을 분명하게 보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구해내실 것입니다.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17)는 원문으로 볼 때 구출의 메시지가 간결하면서도 매우 선명합니다: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으로부터 가나안 족속의 땅으로 올라오게 하리라.’ 동사 ‘알라’의 히필형 ‘올라오게 하다’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애굽으로부터 나옴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감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임을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3:8에서 말한 대로, 현재 그 풍요의 땅은 가나안의 여러 종족들이 점유한 채 살고 있으나, 이제 그 땅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언약 백성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의 말을 받아들이게 될 장로들과 함께 애굽 바로를 찾아가 애굽을 떠날 구실을 만들어 그에게 전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것은 멀리 광야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종교 행사를 위한 집단적 여행입니다.

여호와가 그들에게 ‘임하셨다’는 뜻을 지닌 동사 ‘카라’의 사용은 예상치 못한 갑작스런 신의 계시가 떨어져 자신들의 종교 행사를 위한 여행이 피치 못할 일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모세와 장로들은 그들의 종교 행사를 위한 여행에 백성 대표로 일부만 갈 것이며 아내와 자녀들은 남겨둔다는 의미로 그 요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혹은 사흘길을 종교 행사를 위해 떠나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바로를 속이기 위한 선한 거짓말입니까? 그래서 이것은 전략적인 요구입니까?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의 이러한 요구는 바로를 거짓으로 안심시킨 뒤 집단 탈출을 하기 위한 교묘한 협상 전략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종교 행사를 위해서라는 그들의 집단 여행을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노동 강도를 더욱 가혹한 수준으로 높입니다.

 

너희는 승전국이 되어 나오리라(19-22)

세상의 억압과 고난이 우리를 짓누르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그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그분의 강한 손이 우리를 붙들고 어떤 시련 속에서도 승리로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그분의 구원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 곁에서 일하시며, 그분의 계획은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고난 중에도 승리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의 손이 우리를 보호하고 승리로 인도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19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가 가도록 허락하지 아니하다가 20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 21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나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22여인들은 모두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거류하는 여인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의 자녀를 꾸미라 너희는 애굽 사람들의 물품을 취하리라(19-22)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이 완고해질 것을 미리아십니다. 바로는 결코 그들을 호락호락 내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온갖 이적들로 그들을 친 뒤에야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보낼 것입니다. 그들이 떠날 때,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사람의 호의를 얻게 될 것입니다(21).

애굽인들의 우호적인 태도는 다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말미암아 열 번의 재앙을 겪을 것이기에 이스라엘을 우호적으로 대하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표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애굽인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아마 열 번의 재앙을 당한 뒤에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적대감을 극대화하기보다는 진정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요구하는 물품을 순순히 건넬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결코 빈손으로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여인들은 이웃 사람, 즉 애굽 여인들에게서, 또한 집에서 함께 ‘거류하는 여인들’에게서 금과 은의 패물과 의복(겉옷)을 요구할 것입니다. 이웃 사람은 히브리어로 ‘이웃 여성’을 뜻하는데, 이들은 애굽 여인들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집에서 함께 ‘거류하는 여인들’(가라)은 누구입니까? 노예 신분인 이스라엘의 집에 잠시 체류하는 외국인 여성들이 그들을 위한 일꾼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 여인들은 외국에서 온 여인들로 애굽인을 위한 노역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 잠시 공동 거주한 것으로 추론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귀중품을 취하여 자녀를 치장하는 장신구로 사용할 것이며, 그 외 애굽 사람의 물품을 ‘강제로 취할 것이다’(나짤). 그들이 애굽 사람에게서 귀중품을 얻는 행위가 여기서 동사'나'로 표현된다. 신명기의 율법은 종을 자유인으로 풀어줄 때 빈손으로 보내지 말라고 명령합니다(신 15:12-18). 따라서 21절의 이스라엘이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라는 진술과 더불어 그들이 물건들을 취한 행동은 이 율법의 선제적 적용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오랜 세월 품삯도 받지 못한 채 강제 노역에 시달린 노예들이었습니다. 더욱 흥미롭게도 현재 이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 ‘나짤’은 사실 전쟁터에서 약탈 행위나 전리품을 챙기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행위는 두 가지 측면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은 그동안 오래도록 밀린 품삯을 애굽인들에게서 정당하게 받아냅니다. 둘째, 여호와께서 애굽 바로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셨기에 그들은 승전국의 자격을 지닙니다. 따라서 승전국 국민으로서 패전국 국민의 전리품을 취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 행사입니다.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과 계획은 그가 두려움 속에서도 순종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계시하여 사명에 대한 확신을 주셨고,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으며,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불가능한 일도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완벽한 계획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승리를 확신하며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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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03-01)


모세의 소명 : 불타는 떨기나무

출애굽기 3장 1-12절


 

하나님께서는 예상치 못한 순간과 장소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의 부족함에 얽매이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명은 시간이 걸리고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결국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함으로써 사명을 깨닫고 실현할 수 있습니다.

 

  • 대제국의 왕실에서 왕자의 영화를 누리며 살았던 모세가 이제 척박한 광야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 부르심을 받습니다. 모세는 양을 치다가 불타는 떨기나무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위대한 조상들의 여호와이심을 밝히며 그에게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그것은 학대받는 동포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구원하라는 명령입니다.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1-5)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은 어디든 거룩하므로, 우리는 경외심과 겸손으로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불타지 않는 떨기나무처럼 하나님의 능력은 놀랍고 초자연적이며, 우리는 그분의 일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아시고 개인적으로 부르시며, 그 부르심에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알고 계시며 때에 따라 구원을 베푸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1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4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1-5)

 

한때 부귀영화를 누렸던 모세가 이제 미디안 땅에서 장인의 양을 치며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장인의 이름이 여기서는 르우엘이 아닌 ‘이드로’로 언급됩니다. 결국 모세의 장인으로 간주될 수 있는 인물의 이름이 출애굽기의 근접 문맥에서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곤혹스럽게도 구약 다른 본문의 증거를 볼 때, 이드로와 르우엘은 동일 인물이 될 수 없습니다. 민수기와 사사기에서 모세의 ‘장인’ 혹은 ‘처남’(호텐)은 이드로가 아닌 ‘호밥’으로 나타나며(민 10:29; 삿 1:16;4:11), 특히 민수기는 호밥을 ‘르우엘의 아들’로 소개합니다(민 10:29). 따라서 르우엘과 이드로는 서로 다른 인물입니다. 이 경우, 이드로와 호밥이 동일 인물입니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두 가지 대안이 제안됩니다. 첫 번째 대안은 2:18의 르우엘에 대한 언급을 ‘그녀들의 아버지’가 아닌 ‘그녀들의 조부’로 보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아브’의 용법상 충분히 가능한 해석입니다. 이때 르우엘은 이드로의 아버지로서 르우엘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여 손님 대접이나 결혼 문제에 결정권을 행사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출애굽기 2장의 전반적인 분위기로 볼 때 미디안 제사장의 딸들의 아버지는 르우엘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 대안은 ‘그의 장인’을 ‘그의 처남’으로 번역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호텐’의 용례에 비추어 충분히 가능한 해석입니다. 그러나이 견해의 문제는 이후의 이야기에서 이드로가 제사장이자 가장 역할을 하면서 모세의 장인 지위에 걸 찾은 인물로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굳이 선택한다면, 첫 번째 대안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모세는 ‘광야를 향하여’ 아마 좋은 목초지가 있는 곳으로 양 떼를 몰고 갔습니다. 이것을 굳이 ‘서쪽으로’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도착한 곳은 하나님의 산 호렙산이었습니다. 이 산은 틀림없이 시내산을 가리킬 것입니다. 갑자기 호렙산의 어느 산자락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셨습니다. 이 나무는 광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덤불 나무인데 정확한 수종(樹種)을 알기는 어렵습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 자신과 경계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여기 2절에서는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났는데, 4절에서 그가 동시에 ‘여호와’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비슷한 장면이 여호수아가 가나안에서의 첫 번째 전쟁을 수행하기 직전에 재현됩니다(수 5:13-15). 거기서는 여호와가 ‘군대장관’으로 나타나며, 여기처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 네 신발을 벗으라’고 명령합니다(수 5:15).

떨기나무가 불에 타오르는 현상에 대해 몰덴케(Moldenke)의 성경 식물도감은 이것이 덤불에 만발하게 핀 꽃에 대한 환각이었을 것으로 해석합니다(TWOT). 그러나 카수토(Cassuto)는 이런 견해는 전혀 본문의 의도가 아니라고 적절하게 반박합니다. 어떤 사람은 오늘날에도 건조한 사막에서 덤불들이 바람에 마찰되어 자연 발화하는 경우가 흔한데, 그런 현상이 특별하게 기적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상적인 자연 발화가 아니라 나무는 실제로 전혀 타지 않고 있기에 놀라운 현상입니다. 이것은 ‘큰 광경’, 즉 ‘굉장한 광경’이었습니다. 모세가 크게 놀란 이유가 그 때문이며, 그는 그 기이한 현상이 나타난 나무를 살펴보기 위해 접근했습니다(3).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갑작스런 음성에 대한 모세의 반응과 모세 편에서의 음성의 주체에 대한 신분 확인 과정은 생략된 채 모세의 즉각적인 응답이 이어집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말고 신발을 벗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거룩한 땅이기 때문입니다(5). 신발을 벗는 행위가 지닌 의미에 대해 몇 가지 의견들이 있지만, 가장 무난한 해석은 그것이 고대 근동 지역에서 높은 권위자에 대한 예법이었으며, 종들은 주인 앞에서 통상적으로 신발을 신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제사장들이 성막에서 직무할 때에도 신발을 신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내성소에 입장할 때나 제단의 제물을 바칠 때 반드시 손발을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출 30:19-20).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곳은, 그곳이 나무이든 산이든 여하한 장소이든, 거룩해집니다. 어떤 공간이 특별하고 거룩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거기에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이 거룩한 곳입니다. 비록 광야의 덤불일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거룩한 공간이 됩니다. 한편, 떨기나무에 나타난 하나님의 불은 분명히 앞으로 강력한 신현의 현상으로 나타날 하나님의 불, 즉 불기둥을 예고합니다.

 

구원자의 사명을 받는 모세(6-10)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두려움을 이해하시고 그분의 뜻을 따를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우리의 고통과 어려움을 알고 계시며 기도를 들으시고 해결하실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방식과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계획에 순종하며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방법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을 성취하는 데 충실해야 합니다.

 

6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7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9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6-10)

 

하나님께서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밝히십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다.’ 여기서 위대한 세 명의 조상이 모두 거명된 “네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란 표현이 최초로 사용됩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나타나셨음을 깨닫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얼굴을 가립니다. 언약 백성에게는 하나님을 대면하면 죽는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창 32:30; 참조. 출 19:21; 신 4:33; 삿 13:22).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미 애굽에서 학대받는 백성의 고통을 다 보고 계셨다고 밝히십니다. 그들의 ‘감독자들’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는 부르짖음과 근심을 다 알고 계십니다. 여기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으로 칭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셨고’, ‘들으셨고’, ‘알고 계셨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가실 것입니다. 그들을 학대받는 땅 애굽에서 건져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위대한 구원 역사를 위해 애굽으로 떠날 것을 모세에게 명령하십니다(10). 그는 바로를 찾아가 담판을 지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나와야 합니다. 여기서 ‘인도하여 내다’라는 동사 ‘야짜’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데, 노예를 풀어주는 행위에 대해서도 사용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현재 그렇게 애굽 땅에서 노예로 속박된 상태입니다. 이 어법은 신약에서 죄로부터의 속박과 해방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하지 않습니다(참조. 렘 1장). 그러나 ‘내가 누구이기에’라고 반문하는 모세의 응답은 매우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모세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부름 앞에서 자신이 위대한 소명자 자격이 있는지 물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는 학대받는 자신의 동포를 늘 안타까워한 것은 맞지만, 그들을 해방시켜야겠다는 비전을 품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확신시키시는 하나님(11-1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명을 확신시키시고, 그 사명이 이루어질 것을 보장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 실현되며,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증거’는 사건의 실현을 통해 입증되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사명과 약속을 믿고 기다리며,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을 확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1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11-12)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사명을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는 확고한 약속과 더불어 확정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는 약속은 이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그분의 언약이 성취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증거를 제시하십니다. 모세가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나온 뒤, 만일 이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한다면, 그것이 증거가 될 것입니다. ‘증거’를 뜻하는 ‘오트’는 이외에도 ‘표적’, ‘이적’, ‘징표’의 뜻을 갖습니다. 여기서는 이적이나 기적의 의미의 ‘증거’가 아닌 사건의 실현을 통해 입증되는 증거를 말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하나님의 산’, 즉 시내산에 도착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되는 일을 가리킵니다.

성경에는 시간이 지나서야 사실적 증거로 드러나는 사례들이 종종 나타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약속을 이루실 것임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평범한 모세를 부르시며, 그의 두려움 속에서도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우리도 때때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주저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겸손과 순종으로 응답할 때 그분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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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14-01)


여호와의 구원 약속과 회복

호세아 14장 1-9절


 

삶에서 우리가 잘못된 길을 걸을 때,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받아주시고, 영혼을 치유해 주십니다. 또한 교회는 하나님의 회복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고, 공동체가 함께 하나님께 돌아와 그분의 은혜를 경험하도록 돕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회개와 회복은 개인과 교회 모두에게 필요한 은혜의 과정입니다.

 

  • 이스라엘이 죄악으로 넘어졌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끝장난 것은 아닙니다.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각자의 결단에 따라 여호와와 새로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집니다. 여호와의 긍휼이 고아 신세로 전락한 자들에게 그분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줍니다.

 

여호와께로 돌아오라(1-3)

회개는 죄로 인해 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첫걸음입니다. 이는 단순한 외적인 행동이 아닌, 마음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회개를 통해 우리를 그분께로 돌아오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회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중요한 영적 행위입니다.

 

1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 2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 3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1-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죄로 인해 엎드러졌으니,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권면하십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인간이나 우상에게 의지하지 않고, 입술의 열매로 하나님께 참회와 헌신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구원임을 강조합니다.

 

(1) 회개의 요청(1)

 

예언자는 거듭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외쳤지만, 이스라엘은 그분께로 돌아오지도, 그분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완강한 거절이 결국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초래합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버리고 헛것인 우상을 좇은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 앗수르에 멸망을 당합니다. 호세아는 이미 엎드러진 이스라엘에게 다시금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을 호소합니다. 불순종의 죄로 심판을 받은 이스라엘은 구원이 여호와께 있음을 인정하고 그분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네 하나님’은 심판에도 불구하고 언약관계가 유효함을 시사해줍니다.

 

(2) 회개의 내용(2-3)

 

이스라엘은 전에도 여러 번 여호와께로 돌아왔지만(참조. 6:17:16), 이들의 돌아옴은 제의적 울타리를 넘지 못했습니다.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성소를 찾아가서 그분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참조. 5:6). 제의적 경건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예언자는 짐승 대신에 ‘말’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충고합니다. 병행하는 ‘입술의 열매’가 보여주듯이 ‘말’은 고백적 행위를 가리킵니다. 구체적으로는 그분께 불의(죄)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돌아오면(회개하면) 자동적으로 용서받는 것은 아닙니다. 죄의 용서는 여호와의 은총에 속하는 것으로, 선행하는 용서의 선포가 회개의 문을 열어줍니다. “선한 바”는 뒤따르는 ‘입술의 열매’를 가리킵니다.

여호와께 드려야 할 ‘입술의 열매’로 이스라엘은 자신을 멸망으로 이끈 거짓 믿음과의 단절을 선언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먼저 여호와 대신 앗수르를 정치적 구원자로 섬겼던 ‘불의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내용상 첫 번째의 연속입니다. 이스라엘은 말에 의지했던 정치를 청산해야 합니다. 여호와를 성전에 유폐하고 자신의 군사적 경제적 능력에 의존했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은 우상의 본질을 보여주는 풍자적 표현입니다. 우상이란 존재는 이스라엘이 제 손으로 만든 값비싼 작품에 불과할 뿐입니다. 돌아옴과 고백은 관계 회복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기에”(1) 이스라엘에게는 용서를 청할 자격이나 권리가 없습니다. 곧,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스라엘이 끊어버렸기에 그분의 동의 없이는 돌아올 수 없습니다. 예언자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고아를 긍휼히 여기시는 그분의 성품에서 찾습니다. 멸망한 이스라엘은 부모가 없는 고아와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그분의 공의로운 심판에 넘겨져 고아가 된 이스라엘에게 다시 기회를 제공해줍니다. “긍휼”은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일방적 사랑으로, 이스라엘은 그분의 긍휼에 매달려 용서와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구원 약속(4-8)

회개는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이루는 필수적인 과정으로, 우리가 죄악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갈 때 회복과 축복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받아주시며,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며 돌아가는 삶이 필요합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결단이 중요하며, 회개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구원과 회복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며 그분의 약속을 붙들어야 합니다.

 

4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그에게서 떠났음이니라 5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6그의 가지는 퍼지며 그의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의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7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그들은 곡식 같이 풍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 8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4-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회개할 때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사랑과 축복으로 그들을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스라엘은 다시 번성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유일한 도움과 보호자가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온 자들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됩니다.

 

(1) 반역의 치료(4)

 

멸망이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이스라엘의 마지막 운명은 아닙다. 고아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고아처럼 절망적 처지에 떨어진 이스라엘에게 마찬가지로 긍휼을 베푸십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돌아오길 가만히 기다리지 않으시고, 적극적으로 움직이십니다. 의사가 되셔서 이스라엘의 반역을 고쳐주십니다. 이스라엘이 당신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죄에 사로잡힌 마음을 고쳐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새 마음으로 만들어주십니다(참조, 렘 31:33; 겔 11:19; 36:26-27). 이스라엘의 돌아옴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대한 그분의 사랑이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합니다. 긍휼에 근거한 그분의 일방적 사랑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그분의 사랑이 반역한 이스라엘에게 임하였던 그분의 진노를 떠나게 합니다(참조. 11:8-9). ‘반역’과 ‘떠나다’와 ‘돌아오다’(1,2,7)는 동일한 어근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반역하고 떠났던 이스라엘에게 임하였던 여호와의 진노가 떠남으로써 이스라엘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2) 구원의 비유적 모습: 생명의 회복(5-7)

 

여호와께서 반역의 마음을 고쳐주실 뿐만 아니라 풍요로운 삶도 약속해주십니다. 전에 진노하심으로 이스라엘의 생명을 끊으셨던 여호와께서 다시 생명을 허락하십니다. 다양한 비유를 통해 생명의 회복이 인상적으로 표현됩니다. ‘쉬 없어지는 이슬’ 같은 인애로 여호와를 섬기다가(6:4) 그분의 심판으로 ‘쉬 사라지는 이슬’같이 역사의 무대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이스라엘에게(13:3) 여호와께서 이슬과 같이 되셔서 다시 생명의 싹을 틔우게 하십니다. 여호와의 이슬(긍휼과 사랑)에 힘입어 생명력을 회복한 이스라엘은 꽃을 피웁니다. 독초가 돋아(파라흐) 못 쓰게 된 밭이랑처럼 불법과 무법으로 황폐해진 이스라엘(10:4)에 다시 백합화가 핍니다(파라흐). 이른 봄에 빠르게 성장해 꽃을 피우는 백합화처럼 이스라엘은 빠르게 생명력을 회복하면서 무성하게 자랍니다. 또 그 뿌리가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땅 속 깊이 박힙니다. ‘박히다’로 옮긴 히브리어 동사 ‘나카’는 원래 ‘때리다’, ‘치다’를 의미합니다. ‘매를 맞아 그 뿌리가 말라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 에브라임(9:16)이 여호와의 축복으로 다시 그 뿌리를 땅 속 깊이 박고 크게 번성합니다. 지금은 그 기둥이 잘려 그루터기만 남아 죽은 나무처럼 보이지만, 여호와께서 주시는 이슬을 먹고 생명이 깨어나 다시 그 뿌리가 뻗고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감람나무처럼 아름답게 자랍니다. 구원 시대의 시작과 더불어 여호와께로 돌아온 자들에게 다시 복이 주어집니다. 그 그늘이 좋아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분향하며 음행을 즐겼던(4:13)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그늘로 돌아와서 그분의 보호를 받으며 쉼을 즐깁니다. 전쟁과 질병과 폭력과 기근으로부터 벗어나 샬롬의 삶을 누립니다. 구원의 묘사는 즐거움과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포도주에서 그 정점에 도달합니다. 이스라엘은 유명한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최고급 포도주를 생산하는 포도나무가 됩니다.

 

(3) 푸른 잣나무 여호와(8)

 

개역개정의 번역에 따르면 상반절은 에브라임의 고백에 해당합니다. 너무 늦어서 심판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에브라임은 마침내 깨달음에 도달합니다. 우상숭배가 파국적 결말을 초래했음을 인정하고 우상과의 완전한 결별을 선언합니다. 물론 에브라임의 깨달음과 고백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반역’을 고쳐주신 결과이지, 그 출발점은 아닙니다. 여호와의 구원 약속이 에브라임으로 하여금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며 바르게 반응할 수 있게 합니다. 여호와와 에브라임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됩니다. 이전에는 에브라임의 기도를 거절하셨던 여호와께서 앞으로는 응답하시고 돌아보십니다.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에게 ‘푸른 잣나무’가 되시고, 에브라임은 ‘푸른 잣나무’ 여호와에게서 열매를 얻습니다. 가나안의 신 바알이 아니라, 사철 푸름과 싱싱함을 간직한 잣나무인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풍요를 주관하십니다.

 

호세아서의 결어(9)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길이 옳음을 깨닫고 그 길을 따르며,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삶에 적용하여 축복과 인도하심을 경험합니다. 반면,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의 길을 무시하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멸망의 길로 갑니다. 지혜로운 자는 단순히 이해에 그치지 않고,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합니다. 진정한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행동하는 데 있습니다.

 

9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9)

 

호세아의 청자처럼 그의 선포를 기록한 호세아서를 읽는 독자도 양자택일의 갈림길에 놓입니다. 지혜롭고 총명한 의인이 되어 역사와 개인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여호와께 순종하며 그분의 말씀을 준행하거나, 또는 미련한 죄인이 되어 자신의 생각과 의지에 따라 살아가거나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돌아오고 회개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회복과 축복의 약속을 강력히 전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치유하시고, 다시 사랑과 축복으로 가득한 삶을 제공하십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믿고,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결단을 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하나님의 회복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며, 공동체가 함께 하나님께 돌아와 그분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회개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참된 회복과 번영을 가져올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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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13-01)


구원의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의 비극

호세아 13장 1-16절


 

우상숭배는 단순히 형상에 대한 숭배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우상은 물질적인 것, 인간 관계, 심지어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질적 성공이나 사회적 지위, 자아 실현 등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상이 무엇인지 명확히 이해하고,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 이스라엘 지파 가운데 탁월한 지위를 자랑하던 에브라임이 우상숭배의 죄악에 떨어져 멸망을 자초한다. 사람들은 장인들이 만든 신상에 희생제사를 드리고 입을 맞추며 경배를 표한다. 가나안에 정착한 에브라임은 황당하게도 여호와께서 배불리 먹여주시자 교만해져 출애굽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었다.

 

에브라임의 우상숭배(1-3)

이스라엘의 타락은 공동체의 문제였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신앙을 지지하고 격려하며 함께 성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서로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며, 신앙의 길을 함께 걸어가면서 공동체의 신앙을 강화하고 우상숭배의 유혹을 경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공동체의 지지와 격려는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1에브라임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떨었도다 그가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를 높이더니 바알로 말미암아 범죄하므로 망하였거늘 2이제도 그들은 더욱 범죄하여 그 은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되 자기의 정교함을 따라 우상을 만들었으며 그것은 다 은장색이 만든 것이거늘 그들은 그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제사를 드리는 자는 송아지와 입을 맞출 것이라 하도다 3이러므로 그들은 아침 구름 같으며 쉬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 마당에서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리라(1-3)

 

에브라임 지파가 이전에는 존경을 받았지만, 바알을 숭배하면서 타락하게 되었음을 지적합니다. 그들의 죄로 인해 이스라엘은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고, 하나님은 그들이 안개처럼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 구절은 우상숭배의 결과로 이스라엘이 무가치하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1) 고발:우상숭배(1-2)

 

축복받은 처음 지위에 대비시켜 북 왕국을 대표하는 에브라임 지파의 파멸적 현재를 고발합니다. 한때 에브라임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 정도로 그는 이스라엘에서 뛰어났습니다(참조, 창 49:26; 신 33:16). 그러던 에브라임이 언제부턴가 바알을 섬김으로써 죽음을 자초했습니다. 어리석게도 바알과 음란을 즐김으로써 힘과 생명을 상실하고 죽음에 넘겨졌습니다. 이미 사망에 사로잡혔음에도 에브라임은 죄로부터 떠나지 않고 더욱 깊이 죄에 빠져들어갈 뿐이었습니다. 청동을 녹여 신상을 만들고 개인의 취향과 생각에 따라 우상에 금이나 은을 덧입혀 화려하게 꾸밉니다. 장인의 작품에 불과한 신상과 우상에게 희생제사를 드리고 송아지에 입을 맞춥니다(참조. 왕상 19:18). ‘송아지’는 벧엘의 송아지상보다는 이를 모방하여 작게 만든 송아지상을 가리킵니다. 가나안에서 송아지는 바알을 상징했기에 송아지 신상을 매개로 가나안적인 것이 이스라엘의 종교로 은밀하게 침투했습니다.

 

(2) 멸망의 심판(3)

 

우상숭배의 결과는 자손의 번성과 풍요로운 결실과는 전혀 반대였습니다. 여호와의 심판으로 에브라임은 아침 구름이나 이슬같이,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나 창문으로 새나 가는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합니다.

 

은혜를 배반당한 여호와(4-6)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는 교회 공동체와의 연대가 중요합니다. 서로의 신앙을 격려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공동체 생활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할 수 있습니다. 서로를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며, 신앙의 길에서 함께 걸어가는 것이 은혜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됩니다.

 

4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5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알았거늘 6그들이 먹여 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 7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사자 같고 길 가에서 기다리는 표범 같으니라 8내가 새끼 잃은 곰 같이 그들을 만나 그의 염통 꺼풀을 찢고 거기서 암사자 같이 그들을 삼키리라 들짐승이 그들을 찢으리라(4-8)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신 유일한 하나님임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그들을 돌보셨지만, 이스라엘은 배부르고 번영하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교만해졌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었음을 경고합니다.

 

(1) 출애굽과 광야의 하나님 여호와(4-5)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는 십계명의 서두(출 20:2)에 나오는 여호와의 자기소개와 거의 일치합니다. 출애굽과 십계명의 결합은 십계명의 준수가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분의 명령이자 새로운 출애굽의 약속임을 시사해줍니다. 십계명의 준수를 통해 이스라엘은 거듭 역사 안에서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첫 번째 명령이 십계명의 대표로 사용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 알게 된 하나님 여호와만 섬기면 보장됩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의 구원자 여호와를 생명에 적대적인 광야에서도 경험했습니다. 그분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셨기에, 이스라엘은 그분만 알아야 합니다.

 

(2) 고발:에브라임의 배은망덕(6)

 

역설적이게도 여호와의 축복이 에브라임을 교만하게 만들어 파탄에 이르게 합니다. 세 개의 동사(‘배가 불렀고’-‘교만하여’-‘잊었느니라’)가 점층적으로 연결되면서 에브라임의 배반을 배은망덕으로 고발합니다. 에브라임은 여호와께서 주신 가나안의 초장에서 꼴을 먹고 배가 불렀습니다. 그러나 황당하게도 여호와께서 주신 땅의 축복이 에브라임을 교만하게 만들었습니다. 척박한 광야에서 여호와께 순종하였던 에브라임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농사를 지으며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되자 구원자를 잊어버렸습니다. 에브라임은 여호와께서 주신 축복을 자신의 능력과 힘의 열매로 착각하고 자신을 역사와 삶의 주인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3) 멸망의 심판선언(7-8)

 

은혜를 배반한 에브라임에게 엄한 징벌이 선언됩니다. 굶주린 사자와 표범처럼 에브라임을 덮치실 것입니다. 새끼 잃은 곰의 비유는 심판이 얼마나 무섭고도 철저하게 집행될지를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새끼를 잃고 흥분하여 사납게 날뛰는 암곰처럼 에브라임을 덮쳐 염통 꺼풀을 찢어발기십니다. ‘염통 꺼풀’은 갈비뼈로 감싸 심장을 보호하는 흉곽을 가리킵니다. 배은망덕에 진노하신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의 가슴을 찢어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으십니다.

 

왕권의 종말(9-11)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권력이나 물질적 성공이 아니라, 참된 평안을 주십니다. 환경이나 상황이 어려울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구하고, 그 평안으로 삶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걱정과 두려움을 아시고, 그분의 평안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매일 기도를 통해 그 평안을 경험하고,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9이스라엘아 네가 패망하였나니 이는 너를 도와 주는 나를 대적함이니라 10전에 네가 이르기를 내게 왕과 지도자들을 주소서 하였느니라 네 모든 성읍에서 너를 구원할 자 곧 네 왕이 이제 어디 있으며 네 재판장들이 어디 있느냐 11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9-11)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죄로 인해 스스로를 멸망으로 이끌었음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왕을 구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셨으나 이제 그 왕들을 없애버릴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결국, 하나님만이 그들의 참된 구원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 구원자를 대적하는 이스라엘(9)

 

유일한 구원자 여호와를 대적하고 왕권에 의존하는 이스라엘에게 멸망이 선포됩니다. 도와주시는 분을 적으로 만들었기에 멸망 외의 다른 길은 없습니다. 전쟁은 이스라엘이 그처럼 의지했던 왕과 재판장들의 무능력만 보여줄 뿐입니다. 제 목숨 보존하기에 급급할 뿐, 이들은 적의 침략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지 못합니다. 완료시제 ‘패망하였나니’는 이스라엘의 멸망이 어떤 경우에도 되돌려질 수 없게 확정된 결정임을 보여줍니다. ‘너를 도와주는 나’는 다른 한편으로 패망 이후에라도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도움을 구한다면 도와주실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해줍니다. 이스라엘의 배반이 여호와의 질투를 유발했지만, 그럼에도 그분은 출애굽의 하나님이십니다.

 

(2) 여호와 진노의 둑인 왕권(10-11)

 

“전에 네가 이르기를 내게 왕과 지도자들을 주소서 하였느니라”는 사무엘상 8장의 왕정 도입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왕정은 여호와의 선물이기는 하지만 은총의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왕권은 하나님의 진노의 도구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권력욕에 사로잡힌 자들의 모반을 허락해 사회를 폭력과 혼란에 빠뜨리게 하시고, 이를 통해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사람들로 당신의 진노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에브라임의 종말(12-16)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며,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또한 자비로우시며,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아올 때 용서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죄악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결단할 때, 그분은 우리를 받아주시고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12에브라임의 불의가 봉함되었고 그 죄가 저장되었나니 13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그에게 임하리라 그는 지혜 없는 자식이로다 해산할 때가 되어도 그가 나오지 못하느니라 14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눈 앞에서 숨으리라 15그가 비록 형제 중에서 결실하나 동풍이 오리니 곧 광야에서 일어나는 여호와의 바람이라 그의 근원이 마르며 그의 샘이 마르고 그 쌓아 둔 바 모든 보배의 그릇이 약탈되리로다 16사마리아가 그들의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어린 아이는 부서뜨려지며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라지리라(12-16)

 

이스라엘이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임을 경고합니다. 그들의 죄악은 쌓였고, 하나님은 그들을 무자비하게 벌하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특히 그들의 거짓된 안전과 번영이 파괴될 것이며,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1) 마지막 기회를 상실한 에브라임(12-14)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에 대한 모든 기대를 거두십니다. 더 이상의 기다림도, 책망도, 경고도, 위협도 아무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마치 중요한 문서나 값진 물건을 잘 묶어 안전한 곳에 보관해놓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범한 불의와 죄를 잘 싸서 따로 보관하십니다. 에브라임의 죄는 재고할 여지가 없어졌습니다. 너무도 많은 죄악이 수집되었기에 또 다른 증거가 불필요해졌습니다. 저지른 악한 죄에 대한 판결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개역개정의 13절 번역은 일부 불충분합니다. ‘그를 위한 해산의 진통이 와도, 그는 어리석은 아들이다. 때가 되어도 그는 자궁 입구로 나오지 않는다.’ 출산의 진통이라는 비유를 통해 에브라임의 어리석음을 고발합니다. 원래 출산의 진통은 해산하는 여인이 경험하는 고통이지만 여기서는 태아에게 적용됩니다. 자궁의 문이 열리고 해산의 진통이 시작되었는데도 자궁 안에 있는 아이가 나오려 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에브라임은 목숨을 건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마저 놓쳐버립니다. 죽는 순간까지 여호와의 손을 뿌리치는 에브라임에게 구원의 문이 최종적으로 닫힙니다. 14절 전반절은 문맥에 따라 수사적 의문문으로 옮겨야 합니다.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로부터 속량해야 하겠는가? 내가 그들을 사망으로부터 구속해야 하겠는가?” 여호와께서 이제 구속자의 역할이 끝났음을 선언하십니다. 그분은 오직 죽음의 길로 내닫는 에브라임을 스올의 권세로부터 속량해야 할 어떤 동기나 이유도 찾지 못하십니다. 그분은 지금까지의 구원 노력을 포기하시고 어리석은 에브라임을 사망에게 넘겨주십니다. 사망이 역병(흑사병)으로 에브라임을 멸망시켜 스올로 데려갈 것을 허락하십니다. 마지막 문장 “뉘우침이 내 눈 앞에서 숨으리라”는 여호와의 심판 결정이 취소될 수 없음을 선언적으로 보여줍니다. 에브라임에게 더 이상 연민을 느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2) 사마리아의 멸망(15-16)

 

주전 733년 앗수르의 침략으로 온 나라가 전화에 휩싸이기는 했지만, 다른 지파들에 비해 에브라임은 전쟁의 피해를 상대적으로 적게 받았습니다. 앗수르의 직접적인 공격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던 에브라임은 다른 지파들보다 비교적 빠르게 전란의 상처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이릅니다. “광야에서 일어나는 여호와의 바람”이 불어올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보내신 동풍이 근원과 샘을 말려 에브라임을 죽입니다. 보물 창고에 쌓아둔 모든 값진 기구가 약탈을 당하고, 남자나 여자나 아이나 할 것 없이 모두 무자비한 살육에 넘겨집니다. 사마리아는 여호와를 배반한 죄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잊고 교만해지는 것은 결국 파멸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번영과 안전의 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각자가 하나님 앞에 돌아와 회개하고, 그분을 다시 삶의 주인으로 모셔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돌아오는 자를 기꺼이 용서하시고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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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12-01)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회복

호세아 11장 12절-12장 14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불순종과 교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의 성공이나 부유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회복시킵니다.

 

  •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적으로 간주하고 거짓과 속임수로 공격합니다. 정치에서는 여호와를 떠나 앗수르와 애굽 사이에서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합니다. 경제에서도 재물을 얻기 위해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고, 거짓 저울로 부를 축적하면서도 무죄를 주장합니다. 종교적으로는 제사에만 열중하고 여호와의 예언자의 경고를 무시합니다. 결과적으로 거짓과 속임수가 정치, 경제, 종교 모든 영역을 지배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회복(11:12-12:1)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불순종과 배반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면,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돌아보고,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하나님께 진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회복의 기회를 붙잡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12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속임수로 나를 에워쌌고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 1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서 종일토록 거짓과 포학을 더하여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11:12-12:1)

 

이스라엘과 유다는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을 잃어버리고, 그들의 불신앙과 배반으로 인해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호세아 11:12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지적하시며, 유다는 하나님께 대해 속이는 자가 되었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잃고 자신들의 길을 선택했지만,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호세아 12:1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기회를 주시며, 그들의 행동을 돌아보라고 촉구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보호를 잊고, 세상의 것들에 의존하며 자신만의 길을 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회복의 기회를 제공하며,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다툰 조상 야곱(2-6)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것들에 의존하거나,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면,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돌아가고, 그분의 길을 따르는 것이 진정한 회복과 축복의 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2여호와께서 유다와 논쟁하시고 야곱을 그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 3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4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5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께서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 6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2-6)

 

호세아의 야곱은 큰 틀에서 창세기의 야곱에 대부분 일치하지만, 후자를 그대로 따르지는 않습니다. 호세아의 야곱 이야기가 그 전체 구조에 있어 창세기의 야곱 이야기와 일치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조적 불일치는 호세아의 의도와 해석에서 기인합니다.

 

(1) 기억할 이름 여호와(2-4)

 

호세아 12장 틀 안에서 보자면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에 아람으로 도망합니다. 창세기에서 야곱의 아람 체류는 벧엘에서 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어가는 하나의 과정이지만, 호세아서에서는 약속과 권면(6)을 무시한 도망이 됩니다. 호세아는 야곱의 아람 체류 이야기와 출애굽 사건을 함께 연결시킵니다. 12절과 13절을 함께 보면 다시금 야곱(이 한 일)과 여호와(께서 하신 일)의 대조를 읽을 수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호세아는 창세기의 야곱 이야기를 비교적 자유롭게 활용하면서, 야곱 이스라엘을 여호와를 거역한 자기시대 이스라엘의 원형으로 보여줍니다.

호세아는 족장 야곱 이스라엘을 모델로 활용해 에브라임을 고발합니다. 먼저 이름 ‘야곱’과 ‘이스라엘’에서 출발합니다. 고대적 사고에 따르면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을 대표했습니다. 원래 독립적이었던 야곱의 출생 이야기와 얍복나루의 씨름 이야기를 결합시켜 야곱 이스라엘의 성품과 본성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소개합니다. ‘모태에서부터 한창힘을 쓸 때까지’ 이웃과 불화하고 하나님과도 다툰 자가 바로 야곱이었습니다. 호세아는 에브라임의 조상 야곱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면서 자기 시대 사람들을 고발합니다. 지금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서로 싸우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은 그 조상 때부터 기원하는 뿌리 깊은 죄입니다.

천사와 겨루어 이긴 야곱은 울면서 그에게 (축복을) 간구했고, 하나님께서는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야곱의 긴 여정의 처음에 속하는 벧엘에서의 만남이 야곱 인생의 후반으로 옮겨집니다. 호세아에게 벧엘의 계시 사건은 울며 간구하는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자애로운 응답입니다. 출생 이야기와 씨름 이야기가 쌈꾼 야곱의 본질을 보여준다면, 벧엘에서의 만남은 야곱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4절 하반절에 동사의 시제가 미완료로 사용되고, 하나님의 대화상대로 ‘우리’가 등장함은 우연이 아닙니다. “벧엘에서 그분께서 그를 만나시고 거기서 우리와 말씀하시리라.” 벧엘에서의 만남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사건임을 시사해줍니다. 지금 벧엘은 송아지를 숭배하는 벧아웬이 됐지만, 원래 벧엘은 쌈꾼이었던 야곱이 울며 간청하자 여호와께서 만나주셨던 곳입니다. 에브라임이 배교 했을지라도 울며 간청한다면 조상 야곱이 만났던 벤엘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2) 권면의 말씀(5-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는 벧엘에서 조상 야곱에게 나타나셨던 분으로, 에브라임이 알고 섬겨야 할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님과도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았면 야곱이 울며 간구하자 그(죄인)에게 은총을 베푸셨던 여호와는 야곱의 하나님께서실 뿐만 아니라 현 세대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조상에게 베푸신 은총에 후손도 참여해야 합니다.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은 문자적으로는 ‘그분의 기억’입니다. 에브라임이 기억해야 할 이름은 송아지 형상 속에 숨은 가나안의 신 바알이 아니라, 야곱에게 은총을 베푸셨던 ‘여호와’이십니다. 호세아는 아람으로 도망하는 야곱에게 준 무사 귀환의 약속을 자기 시대의 이스라엘에게 주는 약속과 권면의 말씀으로 옮깁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처럼, 그의 후손 이스라엘은 그분의 도움을 받아 그분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옴’은 구체적으로는 ‘인애와 정의’의 준수를 의미합니다. ‘거짓과 속임수’를 버리고 ‘인애와 정의’를 실천하며 사는 삶이 돌아옴의 참모습입니다. 제의적으로 여호와를 찾는 관습화된 신앙을 버리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을 실천하면서 파괴된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옴’은 또 삶의 방향을 그분께 고정하고 항상 그분만 바라보며 사는 삶이기도 합니다.

 

상인이 된 에브라임(7-9)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부유함을 경험하는 길입니다. 세상의 재물과 성공이 우리의 가치와 자아를 정의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의 은혜에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길을 따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진정한 부유함을 얻는 길입니다.

 

7그는 상인이라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속이기를 좋아하는도다 8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내가 수고한 모든 것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내게서 찾아 낼 자 없으리라 하거니와 9네가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 너로 다시 장막에 거주하게 하기를 명절날에 하던 것 같게 하리라(7-9)

 

하나님께로 돌아와 살길을 찾으라는 예언자의 호소는 무시됐습니다. 에브라임은 손에 거짓 저울을 든 상인의 길을 택했습니다. “상인”의 히브리어는 ‘가나안’으로 ‘가나안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거짓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상인이 됐다는 점에서 에브라임은 가나안 사람과 차이가 없었습니다. 장사꾼 에브라임에게 인애와 정의는 사치였고, 이웃은 없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재물이었습니다. 죄가 될 만한 어떤 잘못도 범하지 않았다고 무죄를 주장하는 에브라임에게 출애굽의 하나님께서 징벌을 선언하십니다. 에브라임은 초막절에 그러하듯이 장막에 거주해야 합니다. 척박한 유복 생활로 돌아가야 합니다. 온갖 방법으로 애써 모은 재산은 다 빼앗기고, 거주지는 폐허가 됩니다.

 

참 예배와 거짓 예배(10-11)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이 단지 외적인 의식이나 형식적인 행위에 그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진정한 회개와 신앙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고, 올바른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형식적이지 않고, 진정한 회개와 변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신앙의 진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외적인 의식과 형식에 집중하기보다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우선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삶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는 것입니다.

 

10내가 여러 선지자에게 말하였고 이상을 많이 보였으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비유를 베풀었노라 11길르앗은 불의한 것이냐 과연 그러하다 그들은 거짓되도다 길갈에서는 무리가 수송아지로 제사를 드리며 그 제단은 밭이랑에 쌓인 돌무더기 같도다(10-11)

 

여호와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당신의 의지를 제시하셨지만, 이스라엘은 그분 말씀을 청종하기보다는 형식적 제의에 매달렸습니다. 여호와께서 원하는 인애와 정의는 이스라엘의 모든 영역에서 철저히 무시됐습니다. 그분께서 길르앗을 멸망시켜 바알화된 제의 종교를 심판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길갈의 제단들은 여전히 많은 희생제물로 넘칩니다. 사람들은 양 대신 값비싼 황소를 드리는 것으로 답합니다. 여호와는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시지만, 이스라엘은 제사와 번제로 그분을 찾을 뿐입니다(6:6). 제도화된 죽은 제의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대체합니다.

 

야곱과 여호와(12-13)

야곱의 여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계획과 노력도 중요하지만, 결국 하나님께 의존하고 신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자손을 애굽에서 구속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 안에 있으며, 그분의 약속을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보호하실 때, 우리는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12야곱이 아람의 들로 도망하였으며 이스라엘이 아내를 얻기 위하여 사람을 섬기며 아내를 얻기 위하여 양을 쳤고 13여호와께서는 한 선지자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고 이스라엘이 한 선지자로 보호 받았거늘(12-13)

 

아내를 얻기 위해 아랍에서 종이 된 이스라엘과 종이 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신 여호와가 대조됩니다. 야곱은 특정 목적을 위해 (라반의) 종이 되어 양 떼를 돌보았습니다. 야곱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누구의 종도 될 수 있고, 누구/무엇이라도 섬길 수 있는 인물입니다. 에브라임이 재물을 얻기 위해서면 거짓 저울도 사용하는 것처럼, 조상 야곱은 여자를 얻기 위해 이방 땅에서 종살이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여호와는 모세를 보내 이방 땅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해 돌보셨습니다. “쳤고”와 “보호 받았거늘”의 동사는 히브리어로는 동일합니다. 야곱은 여자를 얻기 위해 누구/무엇인가를 돌보고,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보내신 예언자를 통해 돌봄을 받습니다.

 

종결부: 징계의 심판(14)

하나님의 승리에 대한 신뢰는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하시고 승리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회복의 약속을 붙잡는 것은 하나님이 고난 중에도 새로운 시작을 주실 것임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승리와 회복의 약속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14에브라임이 격노하게 함이 극심하였으니 그의 주께서 그의 피로 그의 위에 머물러 있게 하시며 그의 수치를 그에게 돌리시리라(14)

 

여호와를 괴롭히며, 이웃에게 피를 흘리게 하고 수치를 가한 에브라임에게 남은 유일한 것은 여호와의 진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행위에 따라 그대로 같으실 것입니다. 예브라임은 자신의 악행에 책임을 지고 상용하는 징벌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면 교만과 자아를 내려놓고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의지하며 인애와 공의를 지키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미와 방향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회복을 기다리시며, 회개와 순종을 통해 진정한 회복과 평안을 경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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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11-01)


하나님의 아버지 사랑과 그리움

호세아 11장 1-11절


 

종종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세상의 것들에 더 마음을 빼앗겨 그분의 사랑을 외면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그분의 품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그 사랑을 잊고, 하나님을 떠나 다른 것들을 추구하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시며, 우리를 그분의 사랑으로 붙들고 계십니다.

 

  • 여호와께 돌아감을 허락하지 않는 에브라임의 완악함과 무능력이 구속사를 파탄에 빠뜨립니다. 에브라임의 행위에 상응하여 여호와께서 진노하실 경우 에브라임은 (여호와를 알지 못했던) 출애굽 이전 단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막다른 골목에 처한 여호와는 에브라임과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는 대신에 자기희생을 선택하십니다.

 

여호와의 사랑과 이스라엘의 배반(1-4)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박에서 구출하셨고, 그들에게 자유와 약속의 땅을 주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구출을 넘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구속의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하셨고, 이스라엘은 그 사랑의 결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2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3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4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1-4)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어린 시절 애굽에서 구출되었음을 회상하시며, 그들을 사랑으로 양육하고 돌보신 것을 상기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었으나, 이스라엘은 그 사랑을 알지 못하고 우상 숭배로 배신했습니다. 그들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을 돌보고 인도하시려는 깊은 사랑을 표현하십니다.

 

(1) 아버지께 등을 돌리는 아들(1-2)

 

여호와께서 바로의 압제 아래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는 진술은 이스라엘의 원초적 신앙고백에 속합니다. 출애굽의 해방 사건을 통해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은 그분의 백성이 됐습니다. 호세아는 출애굽 사건을 가족관계의 시각에서 새롭게 조망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당신 아들로 불러내셨습니다. 출애굽 사건이 이스라엘을 양자로 선택한 여호와의 부성적 사랑을 보여주신 사적 사건이 됩니다. 출애굽 사건을 통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시고, 이스라엘은 그분의 아들이 됩니다. “어렸을 때”는 아직 제 힘으로 서지 못하고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할 때를 가리킵니다. 시선을 끌 만한 매력이나 남다른 자질이 전혀 없었음에도 여호와의 일방적 사랑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거의 시작부터 어긋났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버지의 보호와 인도를 거절하고 가나안에서 알게 된 바알을 따랐습니다. 개역개정은 모두 과거시제로 옮겼지만, 동사 ‘멀리하다’는 완료가, ‘제사하다’와 ‘분향하다’는 미완료가 사용됩니다. 이스라엘은 반복적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떠난 것이 아니라 한 번 떠난 후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배교는 일시적 이탈이 아니었습니다. 의도적이며 지속적이었습니다.

 

(2) 아버지의 사랑(3-4)

 

여호와의 사랑은 출애굽의 구속사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애정과 헌신을 갖고 계속 에브라임을 돌보셨습니다. 그러나 에브라임은 보호와 인도를 받으면서도 여호와의 사랑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가르치시고 돌보실 뿐만 아니라 아들을 고쳐주기도 하셨습니다. 여호와는 에브라임의 병을 고쳐주려 애쓰시지만 에브라임은 거절할 뿐이었습니다. 에브라임은 자신이 환자임을 알지 못했거나, 설혹 알았다 할지라도 여호와가 아닌 다른 곳에서 치료를 받으려 했습니다. 호세아서는 농부의 비유적 표상을 사용해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애정 어린 돌봄을 기술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에브라임을 이끄셨습니다. 농부가 줄을 당겨 소나 송아지를 제 길로 이끄는 것처럼 여호와는 아직 길에 익숙하지 못한 에브라임이 빗나가지 않고 바른 길을 가도록 계속 관심을 갖고 이끌어주셨습니다. ‘사람의 줄’과 ‘사랑의 줄’에서 때로는 율법과 예언자를 보기도 하지만, 아마도 에브라임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인간적이고도 애정이 넘치는 방법으로 인도하셨음을 시사해주는 것 같습니다. 또 여호와는 에브라임에게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셨습니다. 팔레스티나에서 농부는 보통 소 두 마리에 멍에를 씌우고 밭일을 한 후에 일이 끝나 집으로 돌아오면 목에서 멍에를 벗겨 편히 쉬면서 꼴을 먹을 수 있게 해줍니다. 농부가 가족의 일원처럼 소를 아끼고 돌보듯이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을 정성껏 보살펴주셨습니다.

 

심판의 선고(5-7)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한 결과를 통해 우리는 불순종이 가져오는 파괴적인 결과를 이해해야 합니다. 회개와 순종의 삶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 돌아오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이해하고,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회개하는 자세를 가져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5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 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6칼이 그들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하리니 이는 그들의 계책으로 말미암음이니라 7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5-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미래를 예언하시며, 그들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고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불순종과 회개하지 않는 태도로 인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시며, 그들의 경향성을 지적하십니다.

 

(1) 앗수르에 의한 멸망(5-6)

 

아버지의 사랑과 호의를 짓밟은 배은망덕한 아들 에브라임에게 징벌의 심판이 선포됩니다. 서두의 ‘애굽 땅으로 돌아가지 못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아마도 애굽에서 도움을 찾으려는 자들에게 주는 경고의 말씀 같습니다. 여호와께로 돌아오기를 거절하고 애굽으로 돌아가려 한다면, 에브라임은 앗수르의 종살이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돌아오기를 완강히 거절한 에브라임은 전쟁의 참혹한 재앙에 떨어집니다. 성읍들이 여호와께서 보내시는 칼로부터 백성을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합니다. 성의 가장 약한 곳이 빗장을 걸어 닫아놓은 성문이기에 일반적으로 공성은 성문에 집중됩니다. 적이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며 성문을 낍니다. “그들의 계책”은 아마도 적의 침략에 대비해서 세워놓은 동맹정책이나 방어계획과 같은 정치적군사적 계획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에브라임의 맹목적 거절에 여호와께서 탄식하십니다.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는 문자적으로 옮기면 ‘내 백성은 내게서 떠나려는 일에만 매달린다’ 정도가 됩니다.

 

(2) 마지막 기회의 상실(7)

 

에브라임은 마치 여호와로부터 떠나는 것을 생존 목표로 삼은 것처럼 완강하게 그분으로부터 떠나가기만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돌아오라고 호소하시지만 아무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에브라임은 높은 곳에 계신 여호와께서 내미는 구원의 손길을 단호하게 뿌리치고 멸망의 길로만 내달렸습니다. 심판하시는 것 이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어졌습니다.

 

진노를 억누르는 여호와의 사랑(8-9)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인자와 긍휼로 이스라엘을 회복하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과 계획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회복의 길을 열어두시는지를 보여줍니다. 회복의 약속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회복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회복과 구원의 약속을 붙잡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8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9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8-9)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깊은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십니다.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기로 결심하시며, 자신의 거룩함으로 인해 극진한 긍휼을 베푸십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용서하고 회복시키려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1)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8)

 

비극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려야 하는 마지막 순간에 여호와에 의해 극적 반전이 이뤄집니다. 이스라엘이 되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해졌지만, 그렇다고 멸망의 심판이 여호와의 최종 답변은 아닙니다. 은혜를 배반한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영원한 멸망에 넘겨져야 하지만,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공의의 진노를 억누르고 아들에게 무조건적인 구원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내 마음이 내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는 아들 에브라임을 두고 심각한 내적 갈등에 빠진 아버지 여호와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긍휼”(니후밈)은 ‘앞서 품었던 의도를 다시 거둬들이는 의지의 전환’과 관련된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의지의 전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려는 그분의 결정이 모든 면에서 정당함에도 이를 실행하지 않으시고 거둬들이시는 그분의 신비스러운 내적 전환을 가리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태도와 상관없이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자기극복이기도 합니다. 부정부사 ‘아니’를 네 번 사용하면서 결정된 심판의 취소를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배반한 에브라임을 진멸하시려는 여호와의 진노가 그분의 사랑에 의해 극복됩니다. 완전한 멸망으로부터 에브라임을 구원하기 위해 여호와께서 자신의 심판 의지를 거슬러 행동하십니다. 심판 포기에 관한 이유나 배경은 달리 제시되지 않습니다.

 

(2)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9)

 

단지 그분의 본질에 근거하여 선언적으로 선포됩니다.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절대주권과 절대자유의 선언입니다. 행위와 보응의 상관관계는 공의의 전제이지만, 여호와는 이러한 윤리적 원칙에 구속당하지 않으십니다. 여호와는 공의를 판단하시는 최고의 재판관이지만, 공의에 종속당하지 않으십니다.

 

흩어진 자들의 귀환(10-11)

우리가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났을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다시 받아주시며, 우리의 삶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삶은 평안과 안전이 약속된 삶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하나님께서는 주시며, 그분의 집에서 우리는 참된 안식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시 그분의 품으로 돌아와 함께 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10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11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10-11)

 

유배의 심판을 전제하는 이 단락은 심판포기 선언이 사랑에 의한 공의의 극복이지, 공의를 무시하는 임의적 결단이나 변덕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에브라임에 선포된 심판이 무효화한 것은 아닙니다. 에브라임과 관계를 정리하시려는 여호와의 의지가 변경되었을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포기하신 것은 심판 자체가 아니라 관계의 단절입니다. 출애굽에서 시작된 관계가 회복불능의 파탄에 직면했지만 그분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출발점에서 새롭게 시작하십니다. 사자처럼 에브라임을 덮쳐 갈기갈기 찢으셨던(5:14; 13:7) 여호와께서 죽음에 떨어진 당신 자녀들을 위해 다시사자처럼 포효하십니다. 첫 번째 출애굽 때 기사와 이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여호와가 이번에는 자의 포효로 유배민들을 구출하십니다. 북서쪽 지중해 연안과 애굽과 앗수르로부터 자녀들을 인도해 내려서 다시 제 집으로 돌아가 살게 하십니다.


호세아 11:1-11절은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그리움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버지의 사랑으로 돌보시고, 우리가 그분을 떠날 때에도 여전히 우리를 그리워하시며,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우리는 그분의 자비와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그분께로 돌아가는 결단을 내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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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10-01)


심판과 회복의 하나님

호세아 10장 1-15절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때, 오히려 그 축복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물질적 풍요나 성공이 하나님을 잊게 만들 수 있으며, 그 결과는 파멸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며, 우리가 우상화한 모든 것들은 결국 무너질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심판받은 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불의와 폭력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은 우리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할 때 받을 수 있는 경고입니다.

 

  • 송아지가 여호와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하나님의 집이었던 벧엘이 죄악의 소굴인 벧아이되고, 그 영향으로 이스라엘의 종교와 왕정도 여호와를 떠납니다. 제의는 번성하지만, 여호와는 부재합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는 왕권은 아무 유익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하나님 백성이 송아지의 백성이 되어 송아지와 함께 수치를 당합니다.

 

제의의 고발과 심판(1-8)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 오히려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잊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축복을 감사히 여기고, 그분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들을 의지하고, 세상의 가치를 쫓아가면 결국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된 보호자이시며, 그분께 돌아가야 합니다.

 

1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2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 3그들이 이제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므로 우리에게 왕이 없거니와 왕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 하리로다 4그들이 헛된 말 내며 거짓 맹세로 언약을 세우니 그 재판이 밭이랑에 돋는 독초 같으리로다 5사마리아 주민이 벧아웬의 송아지로 말미암아 두려워할 것이라 그 백성이 슬퍼하며 그것을 기뻐하던 제사장들도 슬퍼하리니 이는 그의 영광이 떠나감이며 6그 송아지는 앗수르로 옮겨다가 예물로 야렙 왕에게 드리리니 에브라임은 수치를 받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계책을 부끄러워할 것이며 7사마리아 왕은 물 위에 있는 거품 같이 멸망할 것이며 8이스라엘의 죄 곧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니 그 때에 그들이 산더러 우리를 가리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1-8)

 

이스라엘이 번영하면서 우상 숭배에 빠져 하나님을 배신했음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에 대해 심판을 내리실 것이며, 이스라엘은 두려움 속에서 우상들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의지했던 산당들이 파괴되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1) 제단과 주상(1-2,8)

 

역설적이게도 여호와의 축복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여호와를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이스라엘은 축복에 감사하여 제단을 많이 만들고 주상(기념기둥)을 아름답게 치장합니다. 이스라엘은 땅의 축복에 나름대로(!) 정성껏 응답하지만, 이들의 경건과 감사는 가나안의 제의적 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혼합주의에 물든 이스라엘에게 심판이 선포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 당신께 만들어 바쳤던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고 주상을 허물어버리십니다. 죄악(아웬)의 소굴이 된 산당이 파괴되고 제사를 드리던 제단이 황폐해져 가시와 찔레로 뒤덮입니다. 생존 기반이 철저하게 파괴되기에 심판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차라리 산과 작은 산에 있던 산당과 제단이 파괴될 때 함께 죽지 못한 것을 원망하며 죽기를 소망합니다.

 

(2) 왕권의 고발과 심판(3-4.7)

 

이스라엘의 종교가 여호와를 잃어버리고 제의라는 껍질만 붙잡고 있었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정치도 여호와를 완전히 떠났습니다. 제단과 산당이 부서질 때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왕권도 마찬가지로 그분의 징계에 떨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심판하실 때 백성들은 왕권의 무능력과 한계를 분명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왕권이 가져다준 유익함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설혹 새로운 왕이 세워집니다 할지라도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빈말이나 즐기며 거짓 맹세나 무의미한 조약을 남발하고 백성을 미혹하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독초가 밭이랑을 못 쓰게 만들듯이 왜곡된 재판이 이스라엘 사회를 속속들이 부패시켰습니다. 벧아웬의 송아지에게서 영광이 사라질 때 ‘사마리아 왕’도 멸망 당합니다. ‘사마리아 왕’은 벧엘의 송아지보다는 사마리아 왕궁의 왕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예언자는 아마도 부정적 어감을 갖고 이스라엘 왕을 ‘사마리아 왕’이라 부른 것 같습니다. 사마리아의 정치가들이 당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세운 왕일 뿐입니다. 홍수가 밀려오듯이 앗수르가 침략하여 에브라임 산지를 뒤덮을 때 왕은 나무에서 잘려 물에 떠내려가는 가지(거품)와 같은 신세가 됩니다.

 

(3) 송아지상(5-6)

 

예언자는 이제 벧엘의 송아지에게로 눈을 돌려 사마리아 국가종교의 핵심을 조롱하며 그 멸망을 선포합니다.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벧아웬의 송아지 조각을 두려운 마음으로 경배합니다. 송아지 조각을 숭배하는 벧엘은 ‘죄악의 소굴’(벧아웬)일 뿐입니다. 5절 하반절은 다음과 같이 옮길 수 있습니다. “그(송아지의) 백성은 그(송아지) 때문에 슬퍼하고, 그(송아지의) 제사장들은 그(송아지의) 영광을 환호하리라. 그것(그 영광)이 그(송아지)에게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주민과 제사장들이 송아지 때문에 슬퍼하고 또 환호합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과 제사장들이 아니라, 송아지에게 속한 백성과 제사장들입니다. ‘슬퍼하다’와 ‘기뻐하다’는 바알의 풍요제의를 암시해줍니다. 벧아웬의 제의는 바알 제의일 뿐입니다. 벧아의 송아지는 숭배자들을 보호해주기는커녕 제 자신도 지키지 못하고 수치 가운데 사로잡혀 갑니다. 이스라엘은 파국을 모면하기 위해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지만, 그 계획은 부끄러움을 가져다줄 뿐입니다.

 

멸망의 전쟁(9-15)

우리가 과거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반복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직시하고 회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인내가 무한하지 않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도 계속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9이스라엘아 네가 기브아 시대로부터 범죄하더니 지금까지 죄를 짓는구나 그러니 범죄한 자손들에 대한 전쟁이 어찌 기브아에서 일어나지 않겠느냐 10내가 원하는 때에 그들을 징계하리니 그들이 두 가지 죄에 걸릴 때에 만민이 모여서 그들을 치리라 11에브라임은 마치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하나 내가 그의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에브라임 위에 사람을 태우리니 유다가 밭을 갈고 야곱이 흙덩이를 깨뜨리리라 12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13너희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14그러므로 너희 백성 중에 요란함이 일어나며 네 산성들이 다 무너지되 살만이 전쟁의 날에 벧아벨을 무너뜨린 것 같이 될 것이라 그 때에 어머니와 자식이 함께 부서졌도다 15너희의 큰 악으로 말미암아 벧엘이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이스라엘 왕이 새벽에 정녕 망하리로다(9-15)

 

이스라엘 백성이 길갈에서 죄를 짓고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경고합니다. 그들의 불의한 행위로 인해 전쟁과 파괴가 닥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벌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따랐기 때문에 그들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난 대가로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1) 두 가지 죄악(9-10)

 

호세아는 기브아 시대를 자기 시대의 예표로 사용하면서 현재의 악한 형편을 과거의 사건 안에 위치시킵니다. 기브아에서 공공연히 자행됐던 파렴치한 악행은 일과성의 범죄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이후에도 하나님의 법을 유린한 기브아의 불법에 그대로 머물렀습니다. 기브아의 범죄는 그 이후 이스라엘이 자행한 모든 악의 뿌리가 됩니다. 길손을 접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삿 19:15) 욕정에 사로잡혀 그의 소실을 강제로 끌어내 강간하여 능욕한(삿19:22-25) 기브아의 범죄는 과거가 아니라 진행 중인 현재에 속합니다. 패역한 기브아 사람들 때문에 지파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범죄가 다시금 전쟁을 초래합니다. 기브아를 징벌할 때는 형제를 두둔하는 베냐민 지파에 맞서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들이 모여(삿 20:11, 14) 전쟁에 나갔지만,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을 징계할 때는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심판의 도구로 사용됩니다.

 

(2) 하나님의 실망(11-13a)

 

소의 비유적 표상을 사용해 에브라임의 처음과 나중을 대조적으로 기술합니다. 한때 에브라임은 여호와께 기쁨이었습니다(참조, 9:10a). 에브라임은 마치 길든 암소와 같아서 힘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타작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지금은 ‘완강한 암소’(4:16)가 되었지만 에브라임은 한때 유능하고 쓸모 있는 암소였습니다. 원래 ‘배워 익힌’을 의미하는 “길들인”과 자발적 순종을 뜻하는 “좋아하나”는 선택의 정당성을 시사해줍니다. 에브라임은 처음부터 고집 센소가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의 의지에 부응할 만한 자질과 배움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순종적이었습니다. 개역개정의 번역 “내가 그의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에브라임 위에 사람을 태우리니”는 에브라임의 종살이를 말하는 듯하다. 원문을 문자적으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름다운목 곁을 지나갈 때 나는 에브라임에게 쟁기를 끌도록 맘을 먹었다.” 암소 에브라임은 여호와의 시선을 붙잡기에 부족함이 없는 든든한 목덜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농부가 힘세 보이는 소를 만나면 그 소를 어디에 쓰면 좋을지 생각해보는 것처럼, 여호와께서도 에브라임을 만나자 먼저 그에게 맡길 과제를 찾으셨습니다. 타작마당에서 곡식을 밟고 있기에는 아까운 소였습니다. 에브라임은 여호와에 의해 가나안 땅을 개간하는 일에 투입할 만한 자질과 힘이 있는 소로 택함을 받았습니다. 소에게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처럼 유다와 야곱에게도 맡겨진 사명이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경작하는 것이 이들에게 맡겨진 사명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선택이 책임을 수반하는 특권임을 보여줍니다. 땅의 개간과 관련된 세 개의 동사는 역할 분담이 아니라, 경작의 전체과정을 보여줍니다.

가나안에 정착해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될 이스라엘에게 여호와는 공의의 씨를 뿌리고 인애의 열매를 거두도록 권면하셨습니다. 풍성한 결실을 기대하며 곡식의 씨를 뿌리는 가나안 사람들과 달리 에브라임은 공의를 뿌리고 인애를 그 열매로 거둬야 했습니다. 열매로서의 인애는 여호와께서 주시는 구원의 선물이기에, “인애를 거두라”는 명령은 약속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호와의 의지와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으로 그분의 보호와 축복을 즐길 수 있게 됩니다. 또 이스라엘은 묵은 땅을 농경지로 개간해 씨를 뿌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부푼 기대는 고통스런 실망으로 끝납니다. 공의와 인애를 바라신 분께 이스라엘은 악과 죄와 거짓으로 응수하였다. 공의를 심는 대신에 악으로 밭을 갈고, 인애를 거두는 대신에 죄를 거두고, 여호와를 찾는 대신에 거짓 열매를 먹었습니다.

 

(3) 멸망의 길(13b-15)

 

악의 씨를 뿌리면 죄의 열매를 거둬야 하는 것처럼, 여호와를 찾지 않고 제 능력과 군사력에 의존하는 이스라엘은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네 길”은 아마도 강대국 의존책이나 군사동맹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죽임을 당하고 여자와 아이들이 침략군의 무자비한 칼에 희생당합니다. 동시대에 잘 알려진 살만에 의한 벧아벨의 파괴처럼 처참하게 멸망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그 속에서 여전히 우리를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과거의 죄를 반복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불의와 거짓이 아니라, 정의와 사랑을 심고, 하나님의 길로 돌아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시지만, 그 목적은 우리를 다시 그분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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