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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48-01)

 


하나님의 거룩한 성 시온

시편 48편 1-14절


 

찬양은 교회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가장 귀한 제사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찬양의 향기로 늘 가득해야 합니다. 이 시는 하나님의 성, 곧 교회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가 하나님께서 위대하시기 때문이라고 선포합니다. 우리가 극진히 찬양해야 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십니까?

 

 

  • 이 시편은 시온의 영광과 그 주체이신 하나님을 아름답게 찬양합니다. 겉으로는 큰 왕의 성, 곧 시온 성의 견고함과 높음과 아름다움을 노래하지만, 그곳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합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과 명성은 인자하심과 정의로우심을 밝히는 심판으로 드러납니다. 때문에 시인은 주의 모든 백성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을 확신하며 노래합니다.

 

시온성에 계신 하나님을 찬양(1-3)

아무리 교회 건물이 웅장하고 아름다워도 그곳에 하나님을 찬양함이 없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고백이 넘치는 교회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입니다. 온 우주를 바라보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위대하십니다. 이 높으신 하나님을 늘 기뻐 찬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1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 2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 3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요새로 알리셨도다(1-3)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극진히 찬양받으시리라’(la). 시인은 여호와의 크심을 선포하며 최고 수준으로 찬양받으심을 노래합니다. ‘극진히’는 47편 마지막 절, 마지막 소절에서도(9) 가장 높임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노래할 때 반복됩니다. 자연스럽게 47편과 48편이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시의 기획적인 연속물처럼 보입니다. 첫 소절은 하나님을 높이는 최고의 찬양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찬양받으시는 곳이 명시됩니다. ‘그의 거룩한 산,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입니다(16). 그의 거룩한 산, 하나님의 성은 어디입니까? 북방의 시온 산에 있습니다(2). 거룩한 산에 있는 하나님의 성이 네 가지로 묘사됩니다. ‘높고 아름다워/온 땅이 즐거워함이여/북방의 시온 산/큰 왕의 성이라’(2). 히브리 본문에 ‘터’라는 말은 본래 없지만, 의미를 완결시킵니다. 하나님의 성은 첫째, 마치 우뚝솟은 봉우리처럼 그 높음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성은 ‘온 땅’, 곧 온 세상의 기쁨입니다. 셋째, 북방에 있는 시온 산입니다. ‘북방’은 북쪽 주변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가나안 신화에서 가장 최고의 신 ‘엘’이 머무는 곳이 ‘차폰’ 산이었습니다. 시인은 당대 사람들에게 가장 높고 아름다운 산으로 인식된 장소를 시온산과 연결 시킵니다. 그러니까 ‘시온 산’을 새로운 ‘차폰산’으로 당시 독자들에게 각인시킨 셈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성은 큰 왕의 성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는 ‘큰 왕’이며, 그곳의 주인임을 선포합니다. 이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장 높은 곳에 계신 위대한 왕이요, 그분만이 풍성하시고 충분히 넉넉한 왕이심을 선포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께서는 여러 궁전들에 계시고, 높은 요새로 알리셨습니다(3). ‘높은 요새’는 안전한 피난처입니다(46:7,11). 하나님 자신이 시온을 찾는 이들의 은신처가 되셨음을 강조한 말입니다. 하나님 스스로 높고 강하고 견고한 요새가 되셨습니다.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접근하기 어려운 강고한 요새이신 하나님께 피할 수 있는 특권이 하나님을 찾는 이들에게 부여되었습니다.

 

시온성을 견고하게 하신 하나님(4-8)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요새가 되십니다. 견고하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교회는 세상 속에서 견고합니다. 세상이 감히 무너뜨릴 수 없는 견고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교회는 더욱 든든히 설 것이고, 악한 영들의 유혹이나 공격에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4왕들이 모여서 함께 지나갔음이여 5그들이 보고 놀라고 두려워 빨리 지나갔도다 6거기서 떨림이 그들을 사로잡으니 고통이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 같도다 7주께서 동풍으로 다시스의 배를 깨뜨리시도다 8우리가 들은 대로 만군의 여호와의 성,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 보았나니 하나님이 이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리로다(셀라)(4-8)

 

시온은 끊임없이 열방의 침략을 받았지만, 전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요새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왕들이 연합해서 시온을 차지하려고도 했지만, 결국에는 혼비백산 달아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1) 열국의 침공과 좌절(4-7)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성에(2) 왕들이 힘을 규합하여 함께 전진했습니다(4). 시인은 이것을 생동감 넘치게 표현하려고 ‘보라!’라고 외칩니다. ‘보라’는 왕들이 함께 공격하기 위해 진군하는 장면을 강조하려는 문학적인 장치입니다. 그때 그들은 성을 보고 놀라 공포에 휩싸여 재빨리 지나갔습니다(5). 하나님께서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이신 것을(3) 왕들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그분의 현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참조, 시 46:6; 삼상 14:15; 사 17:13; 29:6; 33:3). 큰 왕 곧 하나님의 나타나심 자체가 왕들에게 두려움이었습니다. 왕들의 떨림과 두려움은 마치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과 같았습니다(6). 시인은 하나님의 성을 본 왕들의 두려움을 극적으로 표현하려고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을 빗대어 표현했습니다. 구약 본문들은 극도의 고통을 해산이 임박한 여성의 고통에 빗대어 표현하곤 합니다(예. 사 13:8; 21:3; 렘 4:31; 6:24). 그러고서 시인은 하나님께 말합니다. ‘동풍으로 당신이 다시스의 배들을 깨뜨려 부수십니다'(7). 왜 갑자기 다시스의 배들입니까? 맥락을 벗어난 듯하지만, 왕들의 공포를 현실감 넘치게 말하기 위함입니다. 당시 다시스의 배들은 지중해 무역을 책임지는 크고 견고한 배입니다. ’다시스의 배들‘은 견고함과 화려함의 상징이었습니다(사 2:16). 따라서 이것은 크고 화려하고 웅장한 무역선들을 바람으로 부수시는 공포감만큼이나 왕들이 본 하나님의 성이 두려움 그 자체가 되기를 바라는 시인의 간절한 마음이 발현된 것입니다.

 

(2) 순례자들이 본 견고한 성(8)

 

시인의 선포에 예배 공동체의 회중이 응답합니다. ‘우리가 듣고 본 것처럼/만군의 여호와의 성에서/우리 하나님의 성에서/하나님은 영원토록 이것을 견고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들, 곧 순례자들은 열방의 왕들이 공격하려고 해도 ‘하나님의 성’(1)이요, ‘큰 왕의 성’(2), 곧 시온 산(2)이 건재함을 듣고 보았습니다. 그 성을 보고 공포에 떨며 신속히 달아났던 왕들과 순례자들의 반응이 엇갈립니다. 순례자들이 직접 듣고 본 것은 미래를 여는 확신의 고백이 되었습니다.

 

시온성의 승리와 기쁨(9-11)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장래까지 모두 아시는 완전한 인도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따라갈 때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완전히 인도자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위대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찬양에 기쁨으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9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10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며 주의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였나이다 11주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시온 산은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지어다(9-11)

 

이제 예배하기 위해 모여든 순례자들이 직접 하나님께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당신의 인자하심을 깊이 생각했습니다/당신의 성전 한가운데서’(9) 순례자들은 모두 성전 안에 있습니다. 성전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헤세드)을 곰곰이 헤아려봅니다.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 곧 실패하지 않는 사랑을 깊이 묵상합니다. 순례자들은 깊은 헤아림 끝에 자기들이 발견한 것을 직접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의 이름처럼/당신의 찬양은 땅 끝까지 미쳤습니다/당신의 오른손은 정의로 충만합니다’(10). ‘이름'(쉘)은 명성이나 평판을 뜻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 곧 ‘영광’이 땅 끝까지 미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두 시행에서 분명한 것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깊이 헤아려 묵상할 때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명성과 영광, 그리고 하나님의 활동에서 드러나는 정의(체데크)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로움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손으로 펼쳐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전을 찾는 순례자들에게 하나님의 정의는 곧 그분의 이름이며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심판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순례자들은 노래합니다. ‘시온 산이 기뻐합니다/유다의 딸들이 즐거워합니다/당신의 심판으로 인하여’(11). 시온 산이 마치 사람처럼 인격화되어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이 즐거워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 때문입니다. 유다의 딸들은 딸들만 지목한 것이 아니라 유다 여러 성읍에 사는 주민들을 가리키는 대유법적인 표현입니다(시 97:8). 따라서 열방의 왕을 심판하시고, 영광의 상징인 시온과 주의 백성들을 구인한 것 때문에 순례자들 모두 함께 기뻐합니다.

 

시온 성 행진과 하나님의 인도하심(12-14)

사람은 내일을 모르기에 어디로 가야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과 염려 때문에 사람들은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에게 빕니다. 그러나 우상은 우리를 인도할 수 없습니다. 여기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인도자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12너희는 시온을 돌면서 그 곳을 둘러보고 그 망대들을 세어 보라 13그의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의 궁전을 살펴서 후대에 전하라 14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12-14)

 

시인은 예배에 참여한 순례자들을 향해 순례 행진에 참여하라고 권합니다. 시온 주변을 걷고 둘러보며 성의 망루를 세어보라(12) 말하는 것은, 시온 성의 높고 견고한 아름다움을 만끽하라는 뜻입니다. 또 성벽을 자세히 보고, 성의 궁전들을 살펴서 후대에 전하라(13) 말합니다. ‘전하라’는 것은 하나하나 열거하며 자세히 말하는 것입니다. 꼼꼼하게 자세히 보는 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전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보는 것은 헤아림을 위한 첫 단계입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는 실체가 됩니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은 영원토록 우리의 하나님이시고/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이라’(14). 시인이 지시대명사를 사용하면서까지 ‘이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순례자들이 듣고, 보고, 깊이 헤아린 시온성의 아름다움이 어디를 향하는지 강조한 것입니다. 또 열방의 공격도 방어할 수 있는 견고함과 능력을 유지하시는 그분이 우리 하나님 되심을 강조한 것입니다. 시온 성의 견고함은 건물 자체의 뛰어난 위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공동체를 끝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 그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시온의 영광은 건축물 자체에서 발현되는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십니다. 세상이 이길 수 없는 견고한 능력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 인생을 인도하시는 완전한 인도자이십니다. 그 위대한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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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47-01)


찬양을 담을 우리의 신앙고백

시편 47편 1-9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찬양은 단순히 듣기 좋은 음악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입니다. 그 신앙고백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믿음의 고백을 찬양에 담아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 이 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며 동시에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지존하신 왕이심을 선포하고 찬양합니다. 시인은 만민이 함께 손뼉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나팔 소리로 왕이신 하나님을 기뻐하고, 왕권을 기념하는 축제를 통해 열방이 하나 되는 것을 상상합니다. 한마디로, 거룩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왕권과 우주적인 주권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만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외쳐라(1)

우리는 하나님의 범궤 앞에서 춤추고 찬양한 다윗을 본받아야 합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전능하심을 온 땅에 선포하며 노래해야 합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큰 사랑과 은혜를 찬양해야 합니다. 그렇게 이 세계의 참된 주인이시요 통치자이신 하나님께 합당한 경의를 표해야 합니다.

 

1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1)

 

이 시 전체 주제의 통일성은 세 개의 반복되는 단어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직접적인 요청을 중심으로 ‘백성’(2,3,9), ‘왕’(2,6,7,8), ‘땅’(2,7,9)이 반복됩니다. 이 어휘들은 ‘만민들’을 호명하며 즐겁게 기쁨의 함성을 외치라는 초청과 연결됩니다. 시행의 첫 단어 ‘모든 백성들’, 곧 ‘만민들’에게 손바닥을 마주치며 즐거움의 함성을 부르라는 초청에서 ‘하나님’께서는 완전하고 보편적이며 우주적인 왕권을 천명하는 이름입니다. 그러면 ‘만민들’은 누구입니까? 3절의 ‘만민’은 정관사를 덧붙인 1절의 ‘하암밈’과 달리 특정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1절의 ‘만민들’은 하나님과 언약 맺은 백성 이스라엘을 특정한 셈입니다. 언약 맺은 그 모든 백성을 향해 시인은 우주적인 왕을 향해 손뼉을 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향해 함성 소리로 외치라 합니다.

 

지존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은 온 땅의 왕(2-5)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그저 이스라엘만 주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 삶의 자리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큰 왕이십니다. 우리는 온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찬양합니다.

 

2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 3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나라들을 우리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며 4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 (셀라)(2-4)

 

함성을 지르고 즐거운 목소리를 높여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2절의 첫 글자는 ‘왜냐하면’(키)입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가장 높으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온 땅에 큰 왕이시라’(2) ‘지존하신’을 뜻하는 ‘엘욘’은 이스라엘 안에서만이 아닌 국제적인 맥락에서 최고의 신을 묘사할 때 불리는 칭호인데, 시인은 이를 하나님께 적용합니다(참조, 창 14:18-20; 민 24:16; 32:8; 9:2; 21:7; 46:4; 77:10; 78:17,35, 56;82:6 등).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는 지존하신 주님이며(2a) 온 땅의 큰 왕이십니다(2b). 이방신들과 비교 불가한 하나님의 통치권이 시의 평행관계 안에서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을 큰 함성 소리로 찬양하는 또 다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나라들을 우리 아래 복종하도록 만드셨기 때문입니다(3). 시인이 말하는 이 승리는 조상들이 가나안 땅 정복 전쟁에서 승리한 때를 회상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때의 전쟁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 뿌리 깊이 내재된 전쟁이며, 약속의 땅 위에 나라의 기초를 수립하는 승리였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완벽하게 차지하고, 가나안 땅과 이웃 나라들이 이스라엘에게 완전히 굴복한 것은 다윗 시대에 이르러 가능했습니다. 시인은 지금 ‘만민’과 ‘나라들’이 우리 발아래 복종하도록 하나님께서 완벽한 승리의 근원임을 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한 기업을 택하셨고, 이는 그가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입니다(4). 하나님의 구속의 과정이 ‘야곱의 영화’입니다. ‘기업’은 하나님께서 상속 재산처럼 이스라엘에게 주신 가나안 땅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또 다른 이름 야곱의 영화는 이스라엘의 ‘높아짐’입니다. 더욱이 온 땅의 왕이신 하나님, ‘그가 사랑하시는 야곱’(4b)으로 특정하여 지목합니다. 그리하여 그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5-6)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찬양을 들으시고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세상의 왕은 시간이 지나면 모두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왕이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왕 중의 왕이십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이 믿음의 찬양을 언제나 부르며 하나님께 나가시길 바랍니다.

 

5하나님께서 즐거운 함성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 6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5-6)

 

하나님께서 기쁨의 함성 속에,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가운데 오르셨습니다(5). 이 부분은 여호와가 언약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을 높이는 찬양의 절정입니다. 하나님 곧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로 올라가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보좌를 두셨지만(시 103:19), 땅으로 내려오셔서 자기 백성 가운데 함께 계신 분입니다. 이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법궤가 성전을 향해 올라가는 것일 수 있습니다(참조. 시24:3; 132:8; 삼하 6:15). 이때 백성들의 기쁨의 함성과 양의 뿔로 만든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뿔 나팔은 왕의 즉위식이나(왕상 1:34,39) 신년 축제에서(레 23:24; 민 29:1) 사용되는 악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장면은 천상의 왕을 향해 지상에서 기쁨의 함성과 나팔 소리로 환호하며 왕이신 하나님을 높이고 공표하는 의식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왕으로 높이는 절정의 중심에서 시인과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왕이신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네 번 반복합니다. ‘찬송하라 하나님께 찬송하라/찬송하라 우리의 왕께 찬송하라’(6). 시인은 하나님께서 곧 우리의 왕이시라는 고백을 담아 찬송합니다. 이 찬송은 목소리만이 아닌 악기들의 연주와 감격에 찬 백성의 목소리로 가득한 장엄한 광경입니다. 다 함께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가슴 벅차오르는 찬양의 시간입니다.

 

거룩한 보좌에서 높임을 받으시는 하나님(7-9)

하나님께서는 찬양 가운데 거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의 찬양을 기뻐하십니다. 사람들이 인정하든 하지 않든, 하나님께서 창조주시라는 사실은 변함 없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지혜의 시로 하나님을 노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인지, 어떤 일을 행하셨고,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를 지혜의 말로 고백하며 노래해야 합니다.

 

7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8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9뭇 나라의 고관들이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세상의 모든 방패는 하나님의 것임이여 그는 높임을 받으시리로다(7-9)

 

시인이 기쁨의 함성을 높이며(1) 하나님 찬양의 이유를 밝혔지만(2), 그는 찬양의 이유를 더 강조하고 싶었습니까? 시인은 다시 시행을 강조하는 히브리어 불변화사 ‘키’를 반복합니다(7).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온 땅의 왕이시니 ‘지혜의 시’로 찬송하라(7)고 외칩니다. ‘지혜의 시’는 ‘마스킬’입니다. 이 말은 45편의 제목 고라 자손의 ‘마스길’에서 사용된 말과 같습니다(32,42,44편). 정확한 의미는 알려지지 않지만, 음악 용어이며 제의적인 노래나 교훈이나 배움을 위한 악절로서 ‘지혜의 노래’인 셈입니다. 이 노래는 관조적이고 깊은 생각에 잠기는 명상을 위한 것입니다. 악기가 동원된 웅장한 광경이 아니라 이제 시인은 신앙공동체가 깊은 묵상으로 하나님 찬양하기를 권합니다. 깊음 심호흡처럼 심장에 새기는 조용한 시간도 찬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무엇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까? 이미 시인은 하나님께서 온 땅의 왕이심을 말한 것처럼(7a), 하나님께서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심을 선포합니다(8). 시인은 언약 백성을 위해 건축된 지상 성전의 중심인 법궤에 임재하신 하나님만이 아니라, 뭇 백성을 다스리시는 그분의 거룩한 보좌를 상상합니다. ‘다스리신다’와 ‘앉으신다’는 평행 관계를 이루는 같은 의미입니다. ‘뭇 백성’, 곧 이방인 취급하는 모든 사람과 민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모두의 하나님이요 모두의 왕이십니다. 온 세계 모든 이들의 왕이 앉으신 ‘거룩한 보좌’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주권을 드러냅니다. 이는 지상의 성막이나 성전의 법궤로부터 발현되는 통치 너머에 있는 하늘 보좌입니다(참조. 시 103:19; 렘 3:16; 사 66:1). 시인의 언어를 통해 이스라엘의 중심이며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지상의 성전이 하늘로 확장됩니다. 상상해보시길 보시기 바랍니다. 온 땅의 큰 왕(2,7) 앞에 권력을 가진 모든 이들이 모여들고, 그들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시인은 마지막으로 뭇 나라들의 고관들이 소집되어 아브라함의 하나님께 속한 백성 됨(9ab)을 노래합니다. 세상의 모든 방패, 곧 모든 군사력이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9cd). 시인은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의 경계를 넘어 이방인들까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장면을 상상합니다. 이처럼 뭇 나라 고관들과 아브라함에게 속한 백성이 함께 왕좌에 모이는 것은 구약의 세계관에서 매우 대담한 발상입니다. 물론 시인은 이미 ‘온 땅’을 반복하며 민족적 경계를 넘는 하나님의 왕권을 노래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세상’(9, 에레츠)을 반복하여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로 ‘온 땅의 왕’(2,7)이심을 강조하려고 ‘키’를 반복한 것처럼, 시행 마지막 두 소절도 같은 방식입니다. ‘지존하신 여호와’(2), 곧 하나님께서 가장 높임을 받고, 찬양을 받으실 것입니다(9d). 이는 지상에서의 하나님 왕권과 통치를 반영하기에 장차 메시아 예수의 가르침에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로 확장됩니다. 하나님의 통치 범위가 범세계적이고 보편적인 것처럼 예수의 구원 사역도 인간 중심적인 경계를 벗어난 우주적인 수준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 자녀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찬양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온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권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는 하나님 덕분에 이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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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46-01)


완전한 피난처이신 하나님

시편 46편 1-11절


 

현대인들은 늘 분주하고 복잡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도 피할 곳조차 없이 힘겹게 살아갑니다. 환난의 바람이 불고, 고난의 비바람이 몰아칠 때 피할 곳이 없는 많은 사람이 지쳐 쓰러지고 무너집니다. 우리에게는 온전한 피난처가 필요합니다.

 

  • 이 시편의 핵심은 창조 이전의 무질서와 혼돈을 제압하시고 질서와 안전을 수립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에 있습니다. 피난처이며 보호자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인은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의 위엄뿐만 아니라 언약 백성을 위한 위대한 용사로서 만군의 여호와가 행하신 일을 노래합니다. 곧 이 시는 전쟁을 멈추고 궁극적인 평화와 안전의 피난처 되신 하나님을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피난처(1-3)

고난이나 어려움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난과 어려운 일들은 결코 우리를 피해 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환난을 이기는 길을 터득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는 환난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도움을 구하곤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에게 완전한 피난처가 될 수 없습니다.

 

1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3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셀라)(1-3)

 

시인은 하나님께서 피난처, 힘, 큰 도움이라고 선언하며 시를 시작합니다. 세 가지 유사한 단어를 반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정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분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위기 상황이 닥친다 해도 하나님게 피하면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피난처 큰 도움이라(1)

 

이 시의 주제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1,7,11)라는 고백적인 선언 반복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피난처와 힘이시라/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1; 참조. 61:3; 71:7; 62:7). 자연적인 재해든지 인생에 갑자기 불어닥치는 폭풍 같은 위기, 곧 가난이나 불행에 봉착 했을 때에도 시인에게 하나님께서는 몸을 숨길 수 있는 피난처 곧 은신처요 요새이시며, 힘이십니다. ‘힘’은 안전하고 견고한 요새와 동의어처럼 쓰였습니다(참조, 시 59:17). ‘피난처’와 ‘힘’, 두 어휘의 결합을 통해 하나님보다 더 강력한 은신처가 없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의 때에 도움이 되십니다. ‘도움’은 돕는 자(helper), 지원하고 지지해주는 조력자로서의 하나님을 담아냅니다. 따라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환난의 때, 그 곁을 지키며 지지해주시는 하나님보다 더 견고한 피난처와 조력자는 없슨비다.

 

(2)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2-3)

 

첫마디가 강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2). 두렵지 않다. 나 홀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으로 한 목소리를 내는 공동체적인 의지가 표명되었습니다. 개역개정은 히브리어 본문 순서와 달리 2절의 첫 소절을 3절 끝에 배치했습니다. 의미의 차이는 없지만 강조의 차이는 있습니다. 시인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를 분명히 하려고 네 가지 잠정적인 상황을 덧붙여 구체화합니다. ‘땅이 흔들리고/산들이 바다의 심장에 빠질지라도(2)/바닷물이 으르렁거리며 격노할지라도/그 맹렬함으로 산들이 흔들릴지라도(3)’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2a). ‘환난’이(1) 혼돈의 바다와 격노한 파도 같습니다. 땅이 흔들릴 정도의 지진이 발생한 상황에 빗댄 환난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산들이 바다 중심으로 무너져 내리고 바다의 격랑과 파도가 산들을 뒤흔듭니다. 땅이 흔들리고 산이 붕괴되는 혼돈의 세력 앞에서도 두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고백까지 쩌렁쩌렁 울려 퍼집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실 때 혼돈을 제압하신 것처럼(창 1:1-2), 혼돈의 물을 통제하셨던 것처럼(출 15:5,8) 시인이 위대한 일들을 눈으로 목격한 듯 현재의 환난을 태곳적 혼돈처럼 재현하여 믿음으로 승화시키고 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성(4-7)

어려울 때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위로를 받습니다. 고난의 길을 갈 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누군가 우리와 함께해 주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함께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 간다는 것입니다.

 

4○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5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6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 7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4-7)

 

여기서 시인은 보호받는 직접적인 안전한 장소인 하나님의 성을 찬미합니다. 이곳은 위협적인 혼돈의 바다가 아니라 흐르는 시내가 있습니다. ‘흐르는 시냇물이 있어 하나님의 성을 기쁘게 하며/가장 높으신 이의 거룩한 성막을 기쁘게 하도다’ (4). 숲과 숲에 사는 모든 생물들의 목마름을 해소하는 시냇물의 이미지, 하나님의 성, 거룩한 성막이 한데 어우러집니다. 태곳적 혼돈의 위협을 제거하고 만드신 에덴동산을 연상시킵니다(창 2:10-14). 하나님의 안전한 돌봄을 이보다 더 간결하고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하나님의 성’과 ‘성소’에 계신 ‘지존하신 이’를 기쁘시게 하는 생명의 물은 안전과 평화와 위로와 은총의 표시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은 예루살렘, 곧 시온을 가리킵니다. 이때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 성에 계셔서 그 성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요, 하나님께서 새벽에 그 성을 도우실 것이라(5) 믿습니다. 땅과 산이 흔들릴 수 있으나(2), 하나님의 성이 흔들려 무너지지 않는 것은 그 성에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내산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때 그 순간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셨기 때문에 거룩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시인은 갑작스런 군사적 위협이 예측되는 새벽에도 하나님께서 성을 지키시며 보호하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왕국들을 침략하기 위해 요란스럽게 떠들어대는 나라들로 인해 흔들렸지만, 하나님께서 목소리를 발하시자 땅이 녹았다(6)고 합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는 ‘천둥소리’로 묘사되곤 하는데(욥 37:4; 시 18:13; 29:3-9), 그 목소리로 지축이 흔들려 땅도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일 만큼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이 그 백성과 함께하셨습니다. 시인은 만군의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계시고, 야곱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 되심을(8) 다시 반복합니다(참조. 1). 수많은 나라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했지만, ‘만군의 여호와’는 조상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그분이 ‘피난처’, 곧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바위 성벽 같은 든든한 ‘요새’가 되셨습니다. 이는 창조 세계의 혼돈을 제압하신 것처럼 역사 속에서 열방을 굴복시키는 하나님 왕권에 대한 찬양입니다.

 

우리의 피난처이신 하나님(8-11)

세은 영적 전쟁터와 같습니다. 죄의 유혹과 악한 영들의 끊임없는 공격은 그리스도인들을 지치게 합니다. 영적 전쟁터와 같은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피해야 합니다. 세상 권세와 악한 영들의 세력이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께서는 넉넉히 이기게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백성을 향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8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 9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10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11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9-11)

 

시인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 공동체를 향해 외칩니다. ‘와서 보라, 여호와의 행적을/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신 것을’(8). 언약의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직접 보라고 합니다. 여호와가 하신 일, 곧 땅을 황무지로 만드신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황무지’(샴모트)는 여호와 심판의 파괴적인 힘을 드러내는 말이며(참조. 왕하 22:19, ‘빈 터’; 렘 25:18, ‘멸망'), 전쟁으로 인한 황폐함을 뜻합니다(시 73:19; 사 5:9; 렘 2:15).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파괴적인 힘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보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시고,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는 분입니다(9). 시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위해 파괴적인 힘을 발휘하시지만, 그 반대의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전쟁을 그치게도 하십니다. 시인에게 하나님께서는 호전적인 나라와 민족들의 무기를 쓸모없게 하셔서 전쟁을 그치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무기를 농기구로 만들어 나라들 사이에 전쟁이 그치는 환상을 보기도 했습니다(사 2:4; 참조. 겔 39:9-10).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전쟁의 특징은 살상과 땅의 황무함에 있지 않고 궁극적인 평화에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전쟁을 ‘쉬게 하신다’(마슈비트)는 것은 단순한 멈춤이 아니라 땅의 안식처럼(레 26:34) 모든 억압의 굴레에서 풀려나고 해방되어 자유롭게 쉬는 것입니다. 인간의 제국은 스스로의 탐욕 때문에 호전성을 버리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전쟁 무기를 파괴하시는 힘은 영구적인 평화와 안식이 됩니다. ‘와서 보라’는 초대 후에 시인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소개합니다. 그 목소리는 한때 전쟁상황에서 언약 백성에게 들려주셨던 말씀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내가 뭇 나라들 가운데 높임을 받으리라/내가 이 땅에서 높임을받으리라’(10). ‘가만히 있으라’(하르푸)는 명령은 홀로 있는 것이요, 하던 일을 멈추는 것이요, 손에 든 것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긴장을 풀고 편히 마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옛 이스라엘 후손들은 홍해를 건너기 전 모세가 한 말을 들었다(출 14:14; 참조, 대하 20:17).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을 위해 직접 싸울 것이니 백성들은 마음을 가다듬고 그의 구원하시는 행위를 보기만 하면 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시인에게 주신 신탁입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모세에게서 시작된 ‘바다의 노래’(출 15:1-18)가 면면히 회자되고 전승되어 공동체 안에 이미 공유된 믿음의 노래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언약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높임을 받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여러 나라들로부터 높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후렴구처럼 이미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하시니/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라’(11,7,1). 이 시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라는 고백적인 선언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은 창조세계 이전의 혼돈을 제압하시고(13), 인간 역사의 폭력적인 모든 상황으로부터(4-7,8-11) 구원하시는 하나님만이 가장 완전한 쉼과 완전한 평화의 주체라는 깨우침에서 나옵니다.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세상의 그 어떤 힘과 권세도, 그 어떤 사람도 우리의 완전한 피난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피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맞아 주시고, 완전한 쉼을 주시며, 새롭게 하십니다. 완전한 피난처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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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9-02)

 


바른 신앙을 회복시킨 하나님

사도행전 19장 13-22절


 

유명한 명품일수록 가짜(짝퉁)가 많습니다. 위대한 인물일수록 거짓으로 흉내 내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가짜가 진짜의 진정성을 헤치기도 합니다. 복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를 왜곡하는 가짜 신앙이 오늘날도 독버섯처럼 곳곳에 자라고 있습니다. 그 가짜는 진리를 훼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거짓 신앙으로부터 진정한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능력을 행하시자, 마술사의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바울과 예수의 이름을 빙자해 악귀를 쫓아내려 했습니다. 하지만, 악귀 들린 사람에게 봉변을 당합니다. 이 사건 때문에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바울은 에베소를 떠날 계획을 세우고 동역자들을 먼저 마게도냐로 보냅니다.

 

예수를 빙자한 마술사들(13-16)

예수님의 이름은 마법으로 사용되는 이름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되는 이름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만이 그 능력을 온전하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이름만 빌려온 거짓 사역자를 거짓 아비인 마귀가 먼저 알아볼 것입니다. 거짓 신앙은 결국 벌거벗겨져 적나라한 불신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13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14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13-16)

 

에베소 사역은 말씀 사역과 더불어 축사의 영역에서도 놀라운 열매를 맺었습니다. 사람들이 바울의 물건을 가져다가 병자의 몸에 얹기만 해도 치유가 일어나고 악귀가 떠나가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 축사 사역은 또 다른 사역으로 인도했습니다. 바울과 같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사 사역을 시험 삼아 흉내를 내려는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당시에 에베소는 교통의 중심지답게 헬라 문화와 종교의 중심지로 온갖 종교 장사꾼, 사기꾼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역사를 오용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1) 예수의 이름을 빙자한 사람들(13)

 

이제는 바울의 사역은 전도와 논쟁 같은 ‘말씀의 사역’뿐 아니라 ‘능력의 사역’을 포함했습니다. 바울의 능력은 하나님의 수단일 뿐입니다. 이곳에서 병든 자들이 낳았고, 심지어는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지고 병든 사람들이 낳았고 악귀는 떠났습니다(9:12). 이 일들은 소문이 나고, 에베소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2) 거짓 스게와 아들들(14-16)

 

바울의 치유 사역은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사역을 보면서 에베소에게 종교적 마술하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중 유대인 순회 ‘마술사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방 종교와 마술에 심취한 유대인들인 듯합니다. 이들은 바울의 축사 사역을 모방하려고 악한 영을 지닌 사람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으로 시험 삼사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문처럼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명한다”라며,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명령했습니다. 바울과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했지만, 웃지 못할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 중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그런 일을 시도해보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있어야 할 제사장의 아들들이 속주 아시아의 수도인 에베소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지만, 제사장 가문의 사람들이 이런 일을 행하고 있다는 것은 유대교에 대한 배교(背敎)입니다.

 

악귀는 그들이 사기꾼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악귀가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15) 라며, 그들이 예수님 및 바울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 그리고 바울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하나님의 참된 종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악귀 들린 사람은 스게와의 아들들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는 혼자였지만, 그들에게 올라가 눌러 이겼습니다. 그들은 물리적으로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16). 그들은 혼쭐이 나서 상처를 입고 벌거벗은 몸으로 집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원한다면, 예수님과 영적인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반응하는 에베소인들(17-20)

진정한 믿음의 삶이 아니라면 겉모습은 비슷해도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자기 육체를 위해 심는 자는 결국 썩어질 것만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을 위해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두게 됩니다(갈 6:8). 마귀를 이길 수 있는 힘이 당신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영적인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버려야 할 옛 습관이 있습니까?

 

17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8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19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20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17-20)

 

복음이 선포되는 현장에서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 중 하나는 사람들의 마음에 회개를 불러일으키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 그의 능력을 보고 들은 사람 중에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능력에 굴복합니다.

 

(1) 두려워 자복하는 에베소인들(17-18)

 

이 일이 에베소 사람들에게 알려지자,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단지 악귀 들린 사람의 초인적인 힘과 난동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진짜인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이 그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주 예수의 이름을 높였다”(17) 라고 소개합니다. 이 표현은 회심을 의미하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인지하고 경외심을 갖게 된 것은 분명합니다. 그중에는 회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행한 일’을 공깨적으로 밝히면서 자복하기 시작했습니다(18).

 

(2) 불사르는 마술책들(19)

 

이 일은 우상에 찌들었던 에베소 사람 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고,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회개의 고백은 말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마술과 관련된 책을 모아 불태웠습니다. 주술적 생각과 말, 행동은 에베소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에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당시에 다른 이들에게 악한 일이 일어나도록 저주하거나, 누군가가 자신과 사랑에 빠지도록 하거나, 불운을 액땜하기 위한 주문, 부적, 약의 제조법과 사용법이 기록된 책들이 많이 유통되고 있었습니다. 회심한 사람들이 불태운 마술책들의 가치는 오늘날 화폐 가치로 수십억 원에 달아는 ‘은 오만’에 달했습니다.

 

(3) 강력해진 주의 말씀(20)

 

기적과 이적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누가는 20절에서 기적 이야기를 기록한 자신의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지적과 이적이 필요한 이유는 말씀이 힘을 얻도록 하려 합니다. 바울과 관련된 이야기(행 19:11-12)와 스게와의 일곱 아들 이야기(19:13-16), 그리고 그로 인한 에베소 사람들의 영적 변화에 고나한 이야기(19:17-19)는 모두 20절로 요약됩니다.

에베소에서는 다시 한번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다”(6:7;12:24)라고 소개합니다. 헬라어 원문을 직해하면, ‘주의 힘에 의해 말씀이 계속 자라났고 강해졌다’라는 직역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에 하나님의 말씀이 부흥이 일어났습니다(20). 큰 능력이 나타난 것은 주의 말씀 때문임을 강조합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바울의 손을 통해 나타난 비상한 능력이었지만(11), 사도행전의 기록자인 누가는 그것을 바울에게 집중시키지 않고 ‘주의 힘’으로 돌리고 있고, 결과적으로 자라나고 강해진 것은, 바울의 사역이 아니라 주의 말씀이었다고 서술합니다.

 

새로운 선교 계획(21-22)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할 때나, 개인의 일을 할 때, 위험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조금만 성공적이면 만족하고 안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항상 깨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안주하는 순간, 위대한 하나님의 사명과 영적 능력은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주신 사명을 점검해보고 하나님의 일에 매진해야 합니다.

 

21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22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21-22)

 

바울은 몇몇 지역에서 복음화되고 변화 받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만족하지 않고 항상 새로운 사명에 불타올랐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현세에 안주하지 않고 더 큰 비전을 안고 살아갑니다. 좀 더 성장하고 싶어 하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진정한 사역자의 모습은, 에베소에서 2년 3개월 동안 사역을 감당한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에베소를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선교 여행을 계획합니다. 이 일을 계기로 마게도냐,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갔다가 궁극적인 목적지인 로마(참고 롬 15:22-25)까지 갈 것을 작정합니다(21). 이곳에서 ‘작정한다’를 직역하면 ‘그 영 안에 혹은 그 영을 통해 정했다’라는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쓰인 ‘영’이라는 단어가 성령을 의미한다면, 바울이 로마로 가기로 한 결정은 스스로 한 게 아니라 성령의 작용에 따른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아시아에서의 사역이 성장하고 안정되어 갈 때, 바울은 익숙한 곳을 떠나 새로운 경계로 나아갔습니다. 마게도냐로 떠나기 전 바울은 동역자 두 사람, 곧 디모데(고전 16:10; 빌 2:19-23)와 에라스도(롬 16:23; 딤후 4:20)를 먼저 보냈습니다. 이때 바울의 나이가 50대 중반쯤으로 추정됩니다. 적지 않는 나이에 비교적 안정된 에베소 사역을 내려놓고 새로운 사역으로 떠난 것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열정은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열정은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점점 더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그 불꽃이 이제 우리 가운데 활활 타올라야 합니다.


바울은 현실에 안주하고 작은 성공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선교 지역이 안정적으로 성장하면 자신이 손길이 필요한 곳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더 새로운 큰 비전을 가지고 소아사이와 유럽을 돌며 전도한 후 당시 세계의 심장부인 세계의 심장인 로마를 전도 목표로 삼고 달려갔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효과적인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안주하는 삶에서 벗어나서 당신에게 맡길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을 기대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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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45-01)


왕의 혼인 잔치를 찬양하는 노래

시편 45편 1-17절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는 영원합니다. 만민이 왕이신 예수님을 찬양할 것이고 그 앞에 경배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는 그 그날에 기쁨과 감격 속에 신랑이신 예수님을 맞이할 것이고, 그 나라의 영광에 동참할 것입니다. 그날을 소망하며 순결한 신부로 살아가야 합니다.

 

  • 시편 45편은 시편에서 유일하게 결혼하는 왕에게 헌정하는 ‘사랑의 노래’입니다. 특정 왕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았지만, 두로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는 왕을 위한 결혼 축가입니다. 시인은 인간 왕의 아름다움과 덕과 위엄을 빼어난 솜씨의 문장으로 칭송하고, 왕조가 끊어지지 않기를 기원하면서 왕의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시인의 말(1)

본문은 왕의 결혼을 축하하는 시롯거 신약의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 된 교회를 보여줍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의 신부와 같습니다. 나아가 성도는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주님과 하나된 교회가 되기 위해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부가 신랑을 바라보는 것처럼, 교회는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1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글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1)

 

먼저 시를 쓴 의도를 밝힙니다. 시인은 내 마음이 흥분되고 흥겨워서 왕을 위해 ‘좋은 말’, 곧 기쁘고 즐겁고 아름답고 멋진 말을 해야겠다고 밝힙니다(lab). 시인은 스스로 나의 말(“내 혀”)이 뛰어난 서기관의 붓 끝과 같다(1c)고 할 만큼 능숙한 말솜씨를 지녔습니다. 시인은 왕의 혼인식에서 왕을 위한 축가를 헌정할 정도로 특정 계층에 속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시인이 뛰어난 말솜씨를 전문 서기관의 붓에 비교한 것은 서기관들이 왕정 시대에 존경받거나 뛰어난 필력을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인은 학자 에스라처럼(스 7:6), 왕실 출입이 가능했던 서기관이나 왕실에 속한 예언자였을지 모릅니다.

 

왕(신랑)을 위한 선언과 영광(2-8)

한 사람의 신부가 된다는 것은 그 사람만 사랑하고 그 사람만 바라보겠다는 약속입니다. 거룩한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신랑이신 거룩한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만 경배해야 합니다. 주님보다 더 높일 것은 없습니다. 큰 권력을 가진 사람도,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도 겸손함으로 주님만 자랑하고 높이는 곳이 거룩한 교회입니다.

 

2왕은 사람들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원히 복을 주시도다 3용사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 4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왕의 위엄을 세우시고 병거에 오르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놀라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5왕의 화살은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 6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7왕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왕에게 부어 왕의 동료보다 뛰어나게 하셨나이다 8왕의 모든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으며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2-8)

 

왕의 권력과 위엄은 의로우신 하나님에게서 왔으며, 하나님처럼 악을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여 통치하는 왕에게 하나님께서는 다른 열국의 통차지들보다 그를 더 높이시고 기쁨의 향유를 부어 주셨습니다.

 

(1) 왕을 향한 선언(2-5)

 

시인은 신랑인 왕의 아름다움을 선포합니다. ‘당신은 사람들보다 아름다워/당신의 입술에서 은혜가 흘러넘치도다/그러므로 하나님이 당신에게 영원히 복을 베푸셨도다’(2). 시인은 왕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데, 그 본질은 입술의 ‘은혜’에 있습니다. 왕의 아름다움은 외모가 아니라 은혜로운 말에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지혜자들이 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처럼(전 10:12; 잠 22:10),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은 인격을 반영합니다. 말은 내면의 외적 표현입니다. ‘그러므로’(2c)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 왕에게 복주심이 마땅하다고 노래합니다. 이어서 시인은 왕이 용사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권면합니다. ‘당신의 칼을 허리에 차고/용사여, 당신의 영화와 위엄을 매소서’(3). 고대 사회에서 왕은 전쟁에 능하고 용맹성을 지닌 용감한 전사입니다. 칼을 찬 전사의 용맹성은 하나님께 속한 ‘영화와 위엄’과 일치하도록 요구받습니다(참조, 시 21:5; 96:6). 그래서 시인은 왕에게 ‘진리와 온유와 공의’ 위에 번성하고 그 위에 올라타기를 청합니다(4ab). 또한 왕의 오른손이 두려운 일을 당신에게 가르칠 것이라 말합니다(4c). 이는 하나님께서 크고 두려운 일을 행하시고 보이신 것처럼(신 10:21; 삼하 7:23) 용맹스러운 왕답게 원수들을 정복하여 혁혁한 승리를 거두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왕의 화살은 날카로워 왕의 원수들의 ‘심장’(“염통”)을 찌르고, 원수의 나라들은 왕의 발 앞에 완전히 제압됩니다(5). 이처럼 시인은 왕의 군사적 능력이 정밀하고 정확하게 발휘될 것을 기대합니다.

 

(2) 왕의 영광(6-8)

 

시인은 인간 왕의 능력을 노래하다가 갑자기 하나님 통치의 영원성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의 보좌는 영원하며/당신 왕국의 홀은 공평한 규입니다’(6). 이는 왕의 아름다움과 영광이 하나님의 주권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혼돈의 세력을 굴복시킨 우주의 왕이시듯, 인간 왕의 보좌를 하나님 보좌에 대한 지상의 그림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의 하나님이시기에 서로를 반영합니다. 시인은 다시 왕에게 그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니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기쁨의 기름을 부으셨다고(7ab; 참조. 사 61:3) 칭송합니다. 또 하나님이 왕의 덕을 높이며 왕의 동료들, 곧 열국의 왕들보다 뛰어나게 하셨다고(7) 노래합니다. 8절에 결혼하는 신랑에게 기름을 붓고 향기 넘치는 왕복을 입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화려한 혼인식을 상상하게 합니다. 왕의 옷은 값진 향품들(올리브유, 알로에, 계피)의 향기로 가득하고, 상아로 장식한 궁궐에서 현악기 연주는 왕을 즐겁게 합니다.

 

신부(왕후)를 향한 선언과 영광(9-15)

거룩한 교회는 예수님만 높이고 경배하는 곳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쏙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물질이 신앙의 기준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물질이 많으면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물질을 많이 드리면 주님이 귀하게 쓰시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만을 높여야 할 교회가 주님보다 물질을 더 높이고 있습니다.

 

9왕이 가까이 하는 여인들 중에는 왕들의 딸이 있으며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오른쪽에 서도다 10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11그리하면 왕이 네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그는 네 주인이시니 너는 그를 경배할지어다 12두로의 딸은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얼굴 보기를 원하리로다 13왕의 딸은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의 옷은 금으로 수 놓았도다 14수 놓은 옷을 입은 그는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시종하는 친구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 갈 것이라 15그들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9-15)

 

왕과 혼인하는 신부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오른쪽에 섭니다. 왕의 신부는 이전의 삶을 잊어야 합니다. 그리고 왕께 경배해야 합니다. 왕은 신부를 아름답게 여기고 사랑할 것입니다.

 

(1) 신부를 향한 선언(9-12)

 

결혼식이 시작됩니다. 왕이 아니라 왕후가 될 왕의 신부에게 초점이 맞춰집니다. 왕의 국제적 지위를 높여주려는 듯 여러 왕들의 딸들이 왕 주변에 있고, 왕후가 될 신부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오른쪽, 곧 영광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9). 시인은 이제 가장 화려하게 치장한 왕후에게 말합니다. ‘딸이여, 듣고 보고 당신의 귀를 기울이십시오/당신의 백성과 당신의 아버지 집을 잊으십시오’(10). 매우 친밀하게 왕후가 될 신부에게 딸이라고 호명하며 교훈합니다. 애정 어린 호칭입니다. 왕후는 새 나라의 일원으로서 자기 나라의 삶의 방식을 잊어야 합니다. 그러면 왕이 그대의 아름다움을 사모할 것이라(11a)고 조언합니다. 이때 ‘사모한다’는 말은 강렬한 성적 열망이 포함된 말입니다. 시인은 신부에게 권면합니다. ‘참으로 그가 당신의 주인이니 그대는 그를 경배하십시오’(11b). 왕의 아내로서 남편에게 복종과 존경을 표하라는 뜻입니다. 이때 갑자기 등장하는 ‘두로의 딸’(12)은 ‘왕들의 딸’(9)에 속한 공주이고, 시인이 ‘딸’(10)이라고 부른 왕후가 될 신부입니다. 이제 두로의 딸은 왕후가 되면 항상 예물에 둘러싸여 있고, 백성들 중 부자들은 왕후의 얼굴 보기를 원할 것입니다(12). 시인은 왕후의 총애를 얻으려고 귀족들이 속속 방문하게 될 것을 내다보며 노래합니다.

 

(2) 신부의 영광(13-15)

 

시인은 왕후의 영광을 노래합니다. 두로의 딸은 왕궁에서 온갖 영화를 누리고, 옷은 금으로 수놓아졌습니다(13). 왕후의 영광은 금실로 수놓은 화려한 옷으로 집약됩니다. 금빛 찬란한 옷을 입은 공주는 왕에게 인도함을 받고, 결혼하지 않은 그녀의 친구들이 신부의 뒤를 따릅니다(14). 왕후가 될 공주의 친구들이 신부의 결혼식 들러리를 위해 함께 왔습니다. 개역개정에서 “시종하는 친구 처녀들”이라고 번역한 것은 오역입니다. 왕께 이끌린 여인들은 신부의 하녀가 아니라 ‘그녀를 위해 데리고 온 미혼의 친구들’입니다. 그들(여성복수형), 곧 신부의 친구들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안내를 받으며 왕궁으로 들어갑니다(15). 왕후가 될 친구의 결혼식 들러리가 되어 즐겁게 신부와 입장하는 장면입니다. 음악이 연주되고 화려하게 치장된 왕실 결혼식 풍경은 즐거움으로 가득합니다.

 

신랑 신부를 위한 축원(16-17)

 

교회는 착한 사람들을 배출하는 곳이 아닙니다. 목사 닮은 사람을 만드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가르치고 훈련하는 곳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예수님을 닮게 돕지는 않고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만 찾습니다. 교회는 거룩하신 예수님을 거룩한 성도가 되는 곳입니다. 이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으면 작은 어려움만 생겨도 교회가 흔들리고 무너집니다.

 

16왕의 아들들은 왕의 조상들을 계승할 것이라 왕이 그들로 온 세계의 군왕을 삼으리로다 17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하게 하리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원히 찬송하리로다(16-17)

 

왕실의 결혼식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고조되어 무르익어갈 즈음, 시인의 축원이 뒤따릅니다. 시인은 왕의 왕조가 영원히 지속되길 바라고 왕의 통치가 온 세상에 기억되길 기원합니다. ‘당신의 후손들은 당신의 조상들을 계승하고/당신은 그들을 온 땅의 군왕들로 삼을 것입니다’(16). 시인은 결혼식을 치르는 왕에게 조상으로부터 후손에 이르기까지 단절 없는 왕권의 지속적인 계승을 빌어줍니다. 마지막 말은 축복의 절정입니다. ‘내가 모든 세대 가운데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게 할 것입니다/그리하여 만민이 당신을 영원히 찬양할 것입니다’(18). 시인은 처음에(1) ‘내 마음’이 흥겨워 왕의 결혼식을 위해 시 한편을 헌정하겠노라 밝혔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경계를 넘어서는 표현, ‘만민’이 왕을 영원히 찬송할 것이라고 축원합니다. 이런 말은 시편에서 주로 하나님께 드리는 표현입니다(42:5,11; 43:4,5). 그러면 이 말이 신랑 왕을 위한 것입니까, 왕이신 하나님을 향한 찬미입니까? 간헐적으로 이러한 말이 사람에게 사용되곤 했지만(창 49:8; 시 49:18), 이는 왕의 통치가 하나님의 통치를 반영하여, 모든 열방으로부터 왕이 칭송받기를 바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인간 왕의 나라는 하나님 왕국의 통치를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세속화되어 가고 있는 오늘의 교회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교회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교회를 사랑하시고 복 주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높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주님을 닮아가는 주님의 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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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9-01)


에베소 두란노 서원에서 사역한 바울

사도행전 19장 1-12절


 

성령 충만이란 성도들에게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열매 맺는 인격은 물론이고,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역사하심으로 복음이 증거 되기도 합니다. 복음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전 1:8). 이 능력의 복음이 우리 안에 있을 때 강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능력의 복음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 바울은 약속대로 다시 에베소에 도착해서 회당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두란노 서원로 옮겨서 2년 동안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능력을 임합니다. 아시아의 많은 사람들이 이 복음을 듣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합니다.

 

성령을 체험한 에베소의 제자(1-7)

 

목회자는 선수의 트레이너와 같습니다. 트레이너란 자신이 담당한 선수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단점을 보안해 줌으로 선수가 온전하게 운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트레이너처럼 영적으로 성도들의 장점은 살리고 단점을 보완해줌으로서 성도들이 하나님 안에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한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도착해서 성도들의 부족한 점을 발견하고 그들은 온전하게 세우고 있습니다.

 

1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3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4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1-7)

 

바울은 2차 선교 여행이 마친 후, 얼마나 되지 않아 다시 본격적으로 3차 전도 여행을 시작합니다. 먼저 2차 전도 여행 때 약속했던 대로 에베소에서 다시 찾아갑니다. 전에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바울에게 더 오래 있어 달라고 간청했지만, 급히 에베소를 떠났습니다. 바울은 간청하던 성도들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18:21). 그래서 그는 다시 소아시아를 거쳐 가능한 한 빨리 에베소로 돌아왔습니다.

 

본문은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에는 두 번째 방문하면서 사역한 일입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라는 언급은 이 기사가 아볼로와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 합니다(1).

바울이 에베소에 열 두 명의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성경 말씀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 안에 무엇인가 문제점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에베소에서 아볼로를 만난 것과 비슷합니다. 아볼로와 에베소 사람들은 모두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는 점이 공통점이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차이점은 이들은 마치 세례 요한이 메시아인 것처럼 믿고 있었으나 아볼로는 요한이 전한 메시지의 심이 메시아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중요한 두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2-3) 바울에 대한 그들의 대답에 의하면 성령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 진정한 복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요한의 세례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성령의 존재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성령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그 믿음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예수님을 주로 고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전 12:3).

 

바울은 그들에게 요한이 말한 분이 예수님임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열 두 사람쯤 되는 사람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들에게도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진 그들의 입에서 방언과 예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로소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게 된 r서입니다. 능력 있는 삶,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복음은 사람의 말이나 지식이 아닙니다. 주의 말씀을 통해 성령이 임하시고 내주하시는 능력입니다.

 

신앙생활에도 좋은 지도자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다. 지도자만큼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구역장과 구역원들을 만나는 것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배우고 그 간증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눈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신앙이 제한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신앙이 제한적인 영역 안에 가쳐서 신앙이 성장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볼로에 의해서 성장한 에베소의 성도들은 성령에 대해 전혀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성경의 지식도 있었고, 구원에 관한 이해도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성령님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부족함은 약간의 부족함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회개의 세례 즉 세례 요한의 교육을 통한 믿음의 결단은 있었지만, 성령을 통해 생동력 있는 신앙생활은 경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성령을 바지 않았다는 것은 그 믿음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대답을 듣고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4)고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인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권세’를 제안했습니다.

 

건강하고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두 가지 요소는 ‘말씀에 바른 이해’와 ‘성령 충만’입니다. 첫째는 말씀에 바른 이해는 성경의 지식인 교리가 튼튼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때,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때,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할 수 있고, 바르게 섬겨 나갈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이 있습니다. 이 ‘열심’이 말씀에 근거하지 못할 때, 교회의 어려움이 되고, 주변 사람들에게 아픔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른 교리가 중요합니다. 다음으로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능력을 공급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권능(두나미스)를 부어 주십니다. 그래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멈추지 않는 바울(8-10)

설교는 전하는 사람이 문제가 듣는 사람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지만 많은 조건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항상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도들은 상황에 상관없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해야합니다. 복음 전파의 장애 앞에서 당신은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하나님보다 환경을 바라보진 않습니까?

 

8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10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8-10)

 

바울이 전도여행 중에 가장 오래 머문 곳이 에베소입니다. 처음에는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말기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에 방문했던 그 회당이었습니다(행 18:19). 그때 유대인들은 바울의 메시지에 아주 긍정적으로 반응하면서 좀더 머물러 달라고 요청했었습니다(행 18:20). 바울은 다른 일 때문에 급히 에베소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떠나면서 하나님의 뜻이면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행 18:21). 바울은 그 약속대로 다시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유대의 회당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강론하며 권면했습니다. 그 기간이 무려 3개월이나 집중되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강론한 내용을 모든 사람들이 호응했던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공개적으로 비방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9). 그들을 본문에서는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라고 영적으로 심각한 상태라고 소개합니다. 상당한 기간 동안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회복이 불가능한 불신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바울이 선포한 복음을 계속적으로 비방했습니다.

 

바울은 더 이상 회당에서 복음을 절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게 된 제자들을 데리고 나와 새로운 장소, 곧 두란노 서원에서 가르침을 계속합니다. ‘두란노’라는 이름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여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공공장소였습니다. 이곳에서 날마다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2년 동안 쉬지 않고 강론했습니다. 성령의 생명력 있는 역사는 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이 주어지기에 증거 할 수밖에 없습니다(렘 20:9). 바울은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증거 했습니다. 방해자가 있었지만 듣는 사람들 또한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믿고 있는 말씀도 살아 운동력 있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성령의 능력을 받기 시작하면, 권세가 되고 그것이 기적을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증거는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치유가 일어나는 에베소 사역(11-12)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하면 심령을 변화시키고 인생을 새롭게 합니다. 더 나가서 주변 사람들에게 능력(권세)로 들어나는 것입니다. 영적인 믿음의 성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납니다(롬 10:11). 그러므로 성도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 예배와 성경공부에 최선을 다해 참석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들을 성장시키는 지름길입니다.

 

11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12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11-12)

 

사도행전 기록자 누가는 바울이 말씀을 전하는 사역하는 동안 기적적인 사역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소개합니다. 본문에서 사역의 근원을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라며, 사도행전 5장 12절에서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라는 말씀과 동일하게 표현합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사용하셨던 것처럼 바울을 사용하신 것을 소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능력은 바울 스스로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이루시는 사역이었음 소개합니다. 더욱 그 기적적인 능력의 역사는 바울이 말씀 전파하는 동안 계속적으로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두란노 서원까지 따라온 사람들은 말씀뿐만 아니라 말씀과 함께 사역하고 있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손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심지어 그 능력은 사람들이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사람의 병이 떠나고 악귀가 떠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 고침을 받았던 병자들이 연상되는 역사였습니다(마 14:36). 또한 베드로에게도 그의 그림자가 병자를 스치기만 해도 병이 낫고 귀신이 떠나갔던 기록과 비슷합니다(행 5:15-16). 이러한 역사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보여주시며,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적적인 역사는 인간의 노력과 행위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뤄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치유 사역을 통해 바울이 사도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살아있음을 사람들에게 보여 줌으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고 있음을 증거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사역을 통하여 에베소에는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와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우상과 잘못된 종교를 버리고 주께로 나왔습니다. 영적으로는 두란노 서원의 사역을 통해 에베소 교회가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교회 공동체로 그치지 않고 지역 사회를 변화시키는 복음의 진원지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사역으로 인해 수많은 유대인과 헬라인이 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에베소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까지 확장된 것입니다.


생명력을 품고 있는 씨앗은 작은 것이라도 새로운 생명을 띄웁니다. 반대로 생명력이 없는 씨앗은 아무리 많이 있어도 생명을 내지 못합니다. 생명력이 없으면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무기력할 뿐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발아됩니다. 그리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복음 증거를 통해 놀라운 능력을 일으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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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8-02)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

사도행전 18장 12-23절


유명인들은 모든 일정을 혼자 감당할 수 없으므로 도움을 수 있는 도우미 ‘매니저’나 ‘비서’를 동반합니다. 매니저나 비서는 그들의 스케줄을 관리하면서 삶이 꼬이지 않도록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인 성도들에게도 매니저가 있습니다. 바로 그는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매니저가 되십니다. 바울에게도 성령님께서 삶을 인도하는 매니저였습니다.

 

  • 바울이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갈리오가 아가야의 총독이 되자 유대인들이 바울을 ‘국가 질서 파괴’ 혐의로 고소합니다. 하지만 갈리오는 유대 민족의 일로 여기고 이 재판을 묵살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더 머물다가 에베소로 가서 말씀을 전하고 안디옥으로 돌아옵니다. 얼마 후에 다시 3차 선교 여행을 준비하고 떠납니다.

 

갈리오 앞에 선 바울(12-17)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그 일을 실패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하시면 어떤 실패도 인생의 자산이 될 것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자신을 신뢰하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새로운 도전하는 모든 것이 오직 자신을 위한 일이라면 그것은 성공해도 망하는 것이고 실패해도 망한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고 말해도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12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13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14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15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고 16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 17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12-17)

 

이제 고린도에 새로운 총독 갈리오가 부임해 옵니다(12). 고린도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새로운 총독에게 바울을 고소할 기회로 삼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유대교가 아닌 로마법에 위배 되게 포교활동을 한다는 구실로 삼아서 고소합니다. 그 고소로 바울은 동역자 없는 가운데 혼자서 갈리오의 법정 앞에 서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일제히 공격합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전혀 다른 어려움이 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각대로 되는 상황을 인도하지 않습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 들어가더라도 두려워 하지않고 담대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어려운 때에라도 복음을 전파할 때,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사실에 바울은 억울함을 느끼고 호소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변명하기 위해 입을 열기도 전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바울이 말하려는 순간에 총독 갈리오의 입을 통해 이 환경들을 선하게 이끌어 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리오의 마음을 들어서 대적하는 자의 송사를 꺾어버리신 것입니다.

 

총독 갈리오는 유대인들의 송사를 듣고, 그 송사가 언어와 명칭과 유대법에 관한 것은 재판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15). 당시에 총독들이 인종 내의 문화적, 종교적 문제들이 로마법에 위배되지 않는 한 간섭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바울에게서 로마법 위반의 사안을 찾지 못한 갈리오는 귀찮은 이 일에서 손을 떼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어 버립니다(16).

바울을 고발하려 했던 사람들은 바울을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게 했다는 이유로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서 재판 자리 앞에서 폭행함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17). 아가야의 질서를 위협하지만 않으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로마법에 의하면 오히려 아무 잘못 없는 바울을 고소한 유대인들을 무고죄로 처벌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총독 갈리오는 더 골치 아픈 일이 생기게 될까 봐 이러한 사실을 묵인하고, 그들을 쫓아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세속 권력의 속성입니다. 이러한 총독 갈리오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10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사도행전 18:10)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지켜주시고, 해할 자가 없게 하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총독 갈리오는 최소간섭주의 원칙과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분파적 논쟁으로 오해함으로 로마 제국의 견제에서 벗어나 오랜 동안 자유롭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니엘서에서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왕을 통해 역사를 이루어가셨습니다. 이방인의 왕인 고레스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켜 주셨고(역대하 36:22; 스 1:1), 새로운 성전을 짓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과 에스더 같은 사람들 주변에 이방에 권세자들을 들어서 사용하셨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들어내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전하는 전도자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을 믿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명자는 끝없는 사역이 있습니다. 수많은 방해들이 있겠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헤쳐 나가야할지 모르는 상황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동행하심으로 대적의 계획을 무산시키고 보호하십니다. 우리들의 삶속에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면,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모든 상황을 변호해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사역 속에서 걱정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바울의 에베소 방문(18-21)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에 어떤 것에게도 매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 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유인으로서 모든 것이 가하지만, 연약한 자들 앞에서는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고전 10:23-24). 바울은 이방인에게 율법으로부터 자유할 것을 말하면서도 자신은 유대인으로서의 율법에 충실했습니다. 왜 이러한 이중적인 행동을 했겠습니까?

 

18바울은 더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19에베소에 와서 저희를 거기 머물러 두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20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21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18-21)

 

고린도에서 소동 후에 바울은 곧바로 그곳을 떠난 것 같지 않습니다. 적어도 몇 개월을 더 있으면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1약 1년 6개월 동안 고린도에서 사역한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위해 출발했습니다. 그는 겐그레아를 통해 에베소, 가이사랴, 예루살렘을 거처 2차 선교 여행을 시작했던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선교여행을 마무리 합니다. 그 여행에는 신실한 동역자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도 동참하였습니다.

 

(1) 겐그레아에서 삭발(18)

 

바울 일행이 겐그레아에 도착했을 때, 바울은 자발적으로 머리를 깎았습니다. 이는 그의 서원(誓願)이 종료되었음을 알리는 머리를 깎은 것입니다. 그의 서원이 무엇입니까? 사적인 서원이었습니다. 이는 바울의 서원이 감사와 관련된 것임을 암시합니다. 주후 1세기 당시에는 전통적인 방식의 감사 표현으로 서원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실인 서원을 정리하면서 머리를 깎습니다. 특별한 계기로 일시적인 나실인의 서원이었을 것입니다(참고/민수기 6:2-5). 바울의 각오는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나실인의 각오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고 주님 앞에 가리라는 서원이고 바울의 결단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였기에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준수의 의무가 없다는 점을 강하게 주장하여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본래 유대인으로서의 율법 준수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고전 9:19-23). 바울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가 범하기 쉬운 자기 합리화를 잘 극복한 것입니다.

 

(2) 에베소에세의 사역(19-21)

 

바울은 겐그레아에서 에베소로 이동합니다. 소아시아의 에베소에 들러 유대인들과 변론합니다. 그는 쉬지 않고 열심히 전도 여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전에도 그랬듯이 회당을 찾아가 복음을 전합니다. 개역재정에는 바울이 유대인들과 ‘변론했다’라고 번역했지만, 정확하게 ‘강론했다’는 뜻으로 해석한 것이 좋습니다.

 

바울의 강론은 여러 사람들에게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바울에게서 더 듣고 싶었습니다. 바울에게 더 머물러 달라는 요청했지만, 그는 거절합니다. 그가 거절하고 빨리 에베소를 떠나고 싶어싶던 이유는 서방 본문은 바울이 유대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기 원했다고 전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빨리 움직여야 했을 것입니다. 배 운항이 제한되는 시기가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로 바울은 에베소를 빨리 떠났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누가는 바울이 지금 이 여행을 빨리 마무리 지으려 하고 있다고 전할 뿐입니다.

 

계속되는 바울의 선교여행(22-23)

사명을 맡은 사람들은 그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도 ‘맡은바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전 4:2)고 하셨습니다. 충성을 다하기 위해서는 환경이나 사람들에 움직이면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나가는데 무엇이 방해를 놓습니까? 사명보다 사람들의 말이 주관합니까?

 

22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23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22-23)

 

한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도 고린도를 떠나 바울 일행과 함께 에베소를 방문합니다. 이 부부는 복음을 위해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에베소 선교에 크게 기여합니다. 바울은 에베소를 다시 방문할 것을 소망하며 배를 타고 가이사랴, 예루살렘을 방문한 후 자신을 파송했던 안디옥 교회로 귀환합니다.

 

이 구절은 바울의 2차 선교 여행의 마지막과 3차 선교 여행의 시작을 구분 짓습니다. 이제 바울은 선교 여행의 보루였던 안디옥 교회를 떠나 다시 에베소로 향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3차 선교 여행을 떠난 것입니다. 그는 복음에 대한 열정 때문에 한곳에 눌러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가는 동안에 2차 선교 여행지인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지역을 방문합니다. 그곳은 2차 선교 여행에서 설립된 교회들을 돌아보면서 연약한 교회들을 세워가면서 3차 선교 여행을 시작합니다.

 

바울 사도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교회를 바르게 세우고 그리고 성도들은 말씀으로 굳건히 서는 것이 있습니다. 주변에 사람들의 말과 상황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우선순위를 가지고 결단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명자의 삶에도 무수한 위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명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함께 하는 동료가 있고,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여 결단하는 마음이 있다면 마침내 사명을 완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사명을 완수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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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8-01)

 


고린도에서 사역하는 바울과 일행

사도행전 18장 1-11절


 

사람들은 모두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을 주고 받음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심령 가운데 두 개의 자루를 주셨습니다. 하나는 전능자인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자루이고, 또 하나는 피조물 되는 사람들끼리 채워줌으로 안정감을 누리는 자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변에 좋은 사람들을 붙여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함께 이루어가게 하십니다. 위대한 사람 바울에게도 친구가 필요했고, 동역자가 필요했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친구와 동역자를 붙여주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 바울이 아덴을 떠나서 고린도에 이르러 복음을 전합니다. 아덴에서는 혼자 사역을 했지만 이곳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납니다. 베뢰아에서 헤어졌던 실라와 디모데까지 다시 만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지만, 박해를 겪습니다. 하나님이 환상 중에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1-3)

신앙생활을 해 나갈 때, 동역자들은 큰 힘이 됩니다. 어려울 때 기도를 부탁할 수 있고, 즐거운 일이 있을 때 같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당신과 함께 하나님의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갈 동역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셔서 당신에게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과 갈등 없이 잘 협력하며 사역을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1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1-3)

 

비록 많은 열매를 맺지 못했지만, 성공적인 사역을 아덴에서 마치고 바울은 고린도에 이릅니다. 고린도는 당시 로마 제국의 3대 항구였습니다. 그만큼 물문과 교류가 활발했고, 외지에서 사람들이 유입되었습니다. 바울에게 그곳은 황금어장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세계복음화를 위한 중요한 전략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혼자서 고린도에 도착했습니다. ‘고린도’라는 도시는 고대에 부의 상징으로 간주되면서 호머(Homer) 이후 그리스의 광채, 영광이라고까지 불렸습니다. 그러나 동방 종교와 그리스 종교가 만나는 십자로에 있었기에 종교적 혼합주의의 양상도 뚜렷했습니다. 항구 도시가 갖는 타고난 특성과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행해진 성전 노예들의 성적인 제사 행위들은 이 도시가 문란한 곳으로 알려지게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부터 쫓아온 유대인들을 피해 베뢰아에서 도망가듯이, 아덴으로 떠난 이후 바울은 계속 혼자였습니다.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의 사역은 충분히 성공적이었지만, 바울은 적대적인 유대인들의 거센 반대와 핍박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아덴에서는 홀로 아레오바고 언덕에 모여든 수많은 이방인 앞에서 복음을 변증했습니다.

 

사도행전 17:15에서는 바울이 실라와 디모데를 속히 만나고 싶어 했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바울도 서로 격려하고 위로가 될 동역자가 필요했다는 뜻입니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선교팀을 대신하여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함께할 새로운 믿음의 동역자들을 예비하셨습니다(2). 그들도 글라우디오의 추방령에 로마로부터 쫓겨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부부였고 이름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였습니다. 그들은 로마에서 살던 사람들인데, 황제가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라는 명령에 따라 고린도로 이주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3절에 보면, 절묘한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세심한 하나님의 배려가 나타납니다. 이는 바울의 직업과 부부의 직업이 서로 같다는 사실에서 확인됩니다. 바울처럼 그들은 천막 만드는 일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이 노동하면서 선교하였다는 것은 그의 서신(고전 4:12)에도 나타납니다. 아마도 바울은 유대 랍비들이 당시의 율법 교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 가지 전문 직종에 대한 훈련을 받았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로마 군사들이 주둔해 있는 곳곳마다 텐트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텐트 만드는 일이 유망 직종이었을 것입니다. 그 일을 하면서 같이 일을 할 사람을 만났는데,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신 사람이 아굴라와 브리스굴라입니다.

 

직업을 나타내는 ‘스케노포이오스’는 ‘천막 제조 및 피혁 노동자’를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아들에게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 자는 도적이 되게 하는 것’이라는 어느 랍비의 경구(비록 주후 2세기의 글이지만)를 생각해볼 때, 아마도 바울이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있을 때 그러한 기술을 습득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작업 환경을 선교의 장소로 인식하고, 노동의 현장에서 사람을 만나 대화하고 설득하고 토론을 하였습니다. 또 생계를 직접 해결함으로써 아무에게도 속박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역하였습니다. 게다가 ‘일을 한다’라는 뜻의 ‘에르가제토’가 미완료 형태인 것을 볼 때, 바울이 부지런히 일을 계속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위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위해 바울을 준비하셨습니다.

 

고린도에서 얻은 회심자(4-8)

하나님의 택함을 입었으나 아직까지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하고, 그분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일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자신은 자신이 생각하는 일만 사역이라고 한정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더 큰 사역을 준비해 놓은 것은 무엇일까요? 그러한 모든 사역들을 기다리며 사역하는 사명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4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5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6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7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8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4-8)

 

바울은 혼자서도 계속적으로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4). 얼마 후 한동안 헤어졌던 실라와 디모데가 드디어 고린도로 합류했습니다(5). 그들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고(살전 3:7-10), 빌립보 교회가 보낸 후원금도 가져왔습니다(고후 11:9, 빌 4:14-15).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통해 바울을 격려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적극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힘차게 사역하였습니다.

 

고린도에서의 바울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함으로써 복음 전파에 나섰습니다(4). 평일에는 작업장에서 노동하며 사람을 만났고, 안식일에는 회당을 찾아 유대인과 하나님의 경외자를 대상으로 토론과 설득을 통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런 선교 활동은 동료들이 도착한 이후로도 계속되었습니다(5). ‘말씀에 사로잡혀’에서는 ‘말씀’이 의인화되어 바울을 사로잡아 증언하게 한다는 강한 표현이 쓰였습니다. 이는 바울의 선교가 갖는 신적 기원과 복음에의 집착을 강하게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두 동역자가 도착하자 노동을 중단하고 말씀 전파에만 전념했다고 본 것입니다.

 

바울에게 적개심을 품은 유대인들은 예수가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바로 그 그리스도(메시아)라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을 비방하며 대적했습니다. ‘비방하다’(블레스폐메인)는 비난하며 모욕적 언사를 내뱉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은 심한 좌절과 모욕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습니다. 옷을 털어버리며 그들에게 심판이 이를 것이라 경고합니다. 이런 행동은 이미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 보여준 적이 있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일전에 유대인의 선동에 의한 폭력적 행위 때문에 추방되면서,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갔습니다(행 13:51). 발의 먼지를 터는 것과 옷의 먼지를 터는 일은 유사합니다. 거부와 단절, 거리감과 항의를 뜻하는 상징적 행동입니다. 바울은 이제 자신이 이방인들에게로 가겠다고 선언합니다. 이런 강력한 의지는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라는 바울의 말에서 확인됩니다. 즉, 그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강력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거기서 장소를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 디도 유스도의 집에 들어갑니다(7). 그의 집은 회당 옆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디도 유스도는 아마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로 알려진 회당 주변의 우호적인 이방인 출신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회당장 그리스보에 대한 언급이 이어집니다(18). 그와 그의 온 집안 식구가 믿었고, 그 밖의 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 믿어 세례를 받기에 이릅니다. 이는 그의 고린도 사역이 적잖이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라는 주님의 말씀과도 일치합니다(행 18:10). 누가는 바울의 고린도 사역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회당장 그리스보의 회심은 사도행전 안에서 특별합니다. 가말리엘(행 5:34-39)을 제외하고, 사도행전에서 유대지도자들 중에 바울의 복음에 우호적인 경우는 그가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는 고린도전서 1:14과 16절에서 바울이 그리스보, 가이오, 스데바나의 집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진술과도 일치합니다.

 

바울의 고린도 사역에 언제나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반대자들이 훼방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적극적으로 복음에 전념하게 되었을 때, 여전히 복음을 훼방하는 세력도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빛이 어두움이 함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주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하면, 힘들고 손해 보는 일들을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회당 중심 유대인 선교에서 이방인의 선교로 전환합니다. 이 결심은 바울이 이방인 선교에 중심하는 결정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 후에 고린도 교회는 이방인들이 많이 합류해서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놀라운 것은 회당을 떠나서 복음을 증거 했는데, 회당장이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의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 받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세운 바울(9-11)

하나님의 사역을 하려고 한다면 하나님과 친밀해야 합니다. 시간마다 사역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사역하게 되면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역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습니까? 사역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에 받기고 있습니까?

 

9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10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1일년 육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9-11)

 

바울이 복음을 증거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길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방해가 있기는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역의 열매로 바울을 격려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일을 감당하려는 자들에게 인생길을 여시고 인도하십니다.

 

바울은 밤에 환상 가운데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9)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므로 해할 자가 없다는 확신을 갖게 했습니다. 누가는 고린도에서 바울의 고난을 미리 준비시키기 위해 주님이 환상 중에 나타나 말씀하시는 내용을 싣고 있습니다. 바울과 관련해서 누가는 ‘환상’이라는 표현을 세 번 사용합니다. 사도행전 16:9-10에 두 번 나오는 것을 제외하면, 마지막으로 본문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6:9-10에서 환상은 답보 상태에 있던 바울 일행을 위로하고 다음 진로로 인도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바울을 위로하기 위한 방법으로 환상을 사용하십니다.

 

주님은 이 성에 하나님의 백성이 많다고 말씀하십니다(10). 그러니 이것은 그가 당할 고난이 많을 것이란 의미일 수도 있고, 그들을 돕기 위해 길게 체류해야 한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11절에서 그가 1년 6개월이나 고린도에 머물렀다는 언급을 구체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또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는 극한 반대가 닥칠 것임을 냅니다. 사역자가 침묵을 강요받는 상황을 예측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담대하게 복음을 계속 선포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지키셔서 그를 해할 자가 없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이 담대한 선교를 가능케 합니다. 믿는 고린도인들이 많기 때문에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하려면, 바울은 역경 속에서도 이 도시에 머물러야만 했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말씀대로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11). 복음 증거자에게는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따릅니다. 이는 복음 증거자가 받는 축복 중 하나입니다.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과의 동행은 우리가 영광중에 보호 받으며 인도함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인생이 누릴 최고의 복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파할 때, 고난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사명자들에게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주십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위로의 음성을 듣고 다시 일어섭니다. 그는 고린도에서 유대인으로부터 떠나 이방인들에게 전도할 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열매들을 얻었습니다. 성도들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담대하게 일어서야 합니다. 고난을 축복으로, 좌절을 희망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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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7-02)

 


아덴 아레오바고에서 복음을 전한 바울

사도행전 17장 16-34절


 

수많은 우상을 섬기고 허탄한 논쟁과 사변에 심취해 있는 이들에게 바울은 분노합니다. 아무런 자유와 생명도 주지 못하면서 인간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성의 심장이라는 아테네에 예수님과 부활을 전하여 생명을 위한 참 메시지를 던집니다.

 

 

  • ‘아레오바고의 설교’(행 17:22-31)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타문화권 선교에 있어서 어떻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좋은 모델입니다. 아덴 사람들이 자랑하던 철학을 통해 복음을 변증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설교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을 넘나들면서 그들로 하여금 영적인 무지함을 스스로 깨닫게 하였습니다. 바울은 헬라적인 개념을 사용하면서 매우 조심스럽게 복음을 전달했습니다.

 

아덴에서 복음 전하는 바울(16-21)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최고의 지식입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다른 어떤 도시보다 지식을 사랑하고 높은 지식을 자랑했지만, 정작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지혜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창조주와 주관자이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공부하고 지식들을 활용해야 할까요?

 

16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17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19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20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16-21)

 

베뢰아를 떠난 바울 일행은 아덴(아테네)로 이동합니다.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 남아서 그곳 성도들을 보살피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혼자서 아덴에 도착해서 아덴을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전도를 하기 전에 전도 대상들과 풍속 그리고 종교 등을 살폈습니다. 당시에 아덴은 학문적으로 매우 발달한 지식이 있었지만, 영적인 상태는 바울을 분노케 합니다. 아덴 도시 전체가 우상들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아덴을 철학의 본고장이며, 민주주의의 시장이라고 칭송하였지만, 복음의 측면에서 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 숭배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에 불과했습니다.

 

참담한 아덴의 영적 상황에 대한 바울의 분노는 복음을 전하는 열정으로 이어졌습니다(17). 바울은 여기서도 회당에 먼저 들어가 유대인들을 만나 설득하였습니다. 회당과 장터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서 날마다 변론하였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회당과 달리 광장에서는 ‘날마다’ 만났습니다. 그가 얼마나 선교에 전념하였는지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변론하다’는 데살로니가, 고린도, 에베소, 드로아 등을 선교하는 장면에서도 나오는 단어입니다(행 17:2,17; 18:4,19; 19:8). 이것은 구약을 근거로 하여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바울의 논쟁 대상은 주로 에피쿠로스 철학자들과 스토아 철학자들이었습니다(18). 두 학파는 정반대의 주장을 하는 철학 사조로 알려졌는데, 바울은 그들의 자연관, 우주관, 신관 등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을 지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가?’하고 바울에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말쟁이’는 새가 모이를 주워 먹듯이 이야깃거리를 모으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말들을 떠들어대는 웅변가를 가리킵니다. 또 그들은 바울이 외국의 신들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당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호기심 많은 그들은 바울과 논쟁한 후 그에게서 더 자세한 것을 듣기 위해 아레오바고로 데려갑니다(19-20). 이곳은 법정이 아니라 다양한 민간 활동이 멸쳐진 공의회 같은 곳이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겠느나?’ ‘알고자 하노라’ 같은 표현을 통해 강압적인 분위기보다 예의를 갖춰 바울을 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새로운 교리, 즉 새로운 종교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의 이야기를 ‘이상한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20, 참조 행 2:12), 이는 아테비인들의 지적 호기심과 탐구심을 다소 긍정적으로 누가가 묘사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아테네인들의 호기심은 이어지는 21절에서도 확인되고, 그 호기심 때문에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가 전개될 수 있었습니다. 21절에는 아테네 사람들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바울의 설교에 단순한 호기심 차원을 넘어 탐닉하고 있었다고 누가는 평가합니다.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22-31)

성도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구원에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의 학문이나 지혜를 공부하는 이유는, 그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음을 줄 알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세상을 하나님께 인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22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6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8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22-31)

 

바울의 설교는 다섯 부분으로 나뉩니다. 서언(22-23), 제사가 필요 없는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24-25), 사람들에게 계시 되신 하나님 (26-27), 우상숭배 금지(28-29). 종결부(30-31)가 그러합니다. 아레오라고 설교는 철학적이고 논리적이면서 감동적입니다. 아덴 사람들의 호기심에 대해 답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바울은 먼저 아덴 사람들이 가진 종교심을 칭찬합니다. 앞에서(16)는 그들의 종교성에 분노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청중의 호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수사법적인 전략일 것입니다. 이어서 그는 아테네에서 볼 수 있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을 설교 전개의 실마리로 삼습니다. 이제 바울은 이방인들이 알지 못하고 섬기는 그 대상을 선포하여 알리려 합니다. 바울이 알게 하리라'(23)라고 한 단어는 직역하면 선포하다'(카탕겔로)의 뜻입니다. 이는 그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선포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바울의 설교는 세 단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만물의 근원한 관심이 가득한 아덴 사람들에게 그 근원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선언합니다. 둘째,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26). 바울은 인간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주관하심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셋째, 하나님과 사람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충분한 기회가 사람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바울은 축구합니다. 모든 것을 만드는 신의 개념은 앞서 사도행전 4:24에 등장한 바 있습니다. ‘만드시는 분’이라는 개념도 사도행전 14:25에 나옵니다. 24절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는 사도행전 7:48에 제시된 스데반 설교를 연상시킵니다. 여기서 바울이 묘사한 하나님은 만유와 만인의 하나님이지만, 유대인과 같은 특정 민족의 하나님으로 강조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보편적인 하나님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만유, 만인과 같이 ‘모든’이라는 헬라어 표현이 이 단락의 24, 25, 26, 30, 31절에서 나옵니다. 루스드라 설교(행 14:6-23)와 달리 이 설교에서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적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바울의 설교를 좀 더 객관화하고 보편적인 입장에서 이해시키려는 시도입니다. 이어서 25절에서는 하나님의 자기완결성과 완전함을 강조합니다. 26절에서 바울은 인간이 사는 시간적 연대와 공간적 영역을 결정한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밝힙니다. 바울은 이런 창조의 목적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려는 데 있다고 선포합니다(27). 뒤집어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셨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주전 6세기 시인 에피메니데스의 시구를 인용하여.우리는 신의 소생으로서 그 신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한다고 바울은 선언합니다.

 

이 설교의 결론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29) 바울은 이 구절에 자신이 섬기는 참 하나님을 그들이 바르게 인식하고 믿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습니다. 그들은 이 ‘하나님’을 ‘신’이라는 말로 들었겠지만, 바울은 여호와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30-31절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나란히 등장합니다. 과거 무지의 시대에 하나님은 지나치셨지만, 오늘은 회개하라고 명령하시며, 내일은 심판하실 것입니다. 심판의 확실한 근거로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덴 사람들의 반응(32-34)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자신을 알려주시고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것으로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분으로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만물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더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찾고 있고, 알고 있습니까?

 

32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34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32-34)

 

이 단락은 바울의 설교에 대한 아덴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반응은 둘로 나뉩니다. 부활에 대한 바울의 언급이 아덴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바울은 그들에게 조롱을 당하였습니다(32).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들 가운데 몇몇은 바울을 따라가 회심의 은혜에 동참하게 됩니다(34: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가운데 아레오바고의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는 여인의 이름이 언급됩니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디오누시오는 후일 최초의 아덴 감독이 되었습니다.

아레오바고에서 행했던 바울의 설교는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복음적인 설교를 준비하는 사람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청중의 욕구를 잘 분석했습니다. 그 시대의 종교적인 면과 문화적인 면을 통합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청중과의 접촉점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그들을 초대하는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전도자들은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할 뿐입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을 더러운 존재로 여겼습니다. 만약 바울이 일반적인 유대인처럼 행동했다면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어떻게든 그들과 멀리 떨어져 지내며 실라와 디모데가 도착하기만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상을 숭배하는 저들에게까지 에수님의 부활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는 내게 주어진 일상의 삶 가운데서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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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7-01)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의 전도 여행

사도행전 17장 1-15절


 

같은 복음을 들어도 사람에 따라 복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다릅니다. 그런 이유는 말씀을 듣는 자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세의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거부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이든지 실망하지 말고 계속해서 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사명 때문입니다.

 

  • 본문은 데살로니가(1-9)와 베뢰아에서의 사역(10-15)으로 다룹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관례대로 회당으로 가서 말씀을 강론하여 많은 회심자들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성공적인 사역은 전통 유대인들을 자극하였습니다. 결국, 바울은 베뢰아로 이동해서 사역해야만 했습니다. 베뢰아에서는 데살로니가에서보다 더 성공적이었지만, 데살로니가로부터 온 적대자들로 인해 다시 아덴으로 이동해야만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의 사역(1-9)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다스리신 왕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분을 따라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를 건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바울은 회당에서 구약의 말씀을 강론으로,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 의해 고난 겪어 돌아가신 후에 다시 살아나는 것이 예정된 사실임을 증명합니다.

 

1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5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6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7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8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9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1-9)

 

본문 1-9절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하는 바울(1-4)과 그 사건으로 적대적인 유대인들에게 고난 당하는 바울(5-9)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선교 전략에 바울의 전략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1)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1-4)

 

바울과 동료들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의 수도로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이곳은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 최고 지휘관인 카산더(Cassander)에 의해 알렉산더가 죽은 후에 건설되었습니다. 당시 로마 점령하에 있던 이 도시는 로마에 충성한 대가로 자유 도시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자체 정부와 법률을 가지도록 인정되었습니다. 지리적으로 자연적인 항구가 있었고, 로마로 통한 에그나티아(Egnatia)가 놓여 있었습니다. 로마에서 출발한 큰 길은 아드리아해에서 중동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무역과 상업 외에도 대도시에 있던 사회의 제반 악들도 번성하였습니다.

 

바울은 이제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가지고 데살로니가로 들어온 것입니다. 이제 복음은 데살로니가를 통해 전 세계에 빠르게 퍼질 것입니다. 이때 바울과 동행한 사람은 실라(10)와 디모데(14)였습니다. 저자가 바울과 실라의 투옥 시점부터 주어를 ‘우리’ 대신 ‘그들’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세 사람이 데살로니가로 왔을 때, 저자는 루디아의 가정에서 갓 시작된 빌립보 교회를 보살피기 위해 그곳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나중에 바울 일행과 다시 합류합니다(행 20:6). 훗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바울과 드로아에서 다시 만나기까지 빌립보에 머무는데, 이 기간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사역한 1년 6개월(행 18:11)과 에베소에서 사역한 2년 3개월(행 19:8-10)을 합산해 적어도 3년 9개월 이상이 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바울은 ‘관례대로’ 회당으로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누가는 이 단락에서 바울의 선교가 일상적인 방식대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면서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방식과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바울은 성경을 강론하는 방식으로복음을 전하기로 합니다.

 

바울의 강론은 두 과정으로 이루어집니다. 첫째, 뜻을 풀어서 성경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3). 이 구절은 누가복음 24:32에서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 제자들이 깨닫게 하셨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뜻을 풀다’라는 헬라어는 ‘활짝 열다’의 의미인데, 3절에서 사용된 동사의 형태가 분사이므로 ‘열면서’(opening)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여기서 ‘열다’라는 동작을 단순히 성경을 펼치는 행동으로 제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메시지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하나하나 보여주고 설명하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즉, 바울의 강론이 성경에 기초한 것임을 암시합니다.

둘째, 성경의 내용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증언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앞에 혹은 옆에 놓다’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앞에 놓으면서’(setting before)를 뜻합니다. 무엇인가를 상대방의 눈앞에 가져다놓고 눈으로 확인하게 하는 행동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강론을 듣는 사람들의 눈앞에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펼쳐놓았습니다. 바울의 강론이 결코 바울 자신의 생각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강론한 성경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바울이 풀어서 증언하면서 강론했던 복음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과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었던 것들입니다. 그 예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것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고 선포합니다(3).

 

개역개정은 바울의 선포를 ‘전하는’(카탕겔로)으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사도행전에서 ‘선포하다’라는 의미로 빈번하게 사용되었습니다(행 3:24; 4:2; 13:5,38; 15:36; 16:17,21; 17:13,23; 26:23). 이는 바울의 강론이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동시에 강력한 영적 도전이었음을 암시합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의 사역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경건한 헬라인(회당예배에 참석한 이방인들)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에 감동되었기 때문입니다(4). ‘권함을 받고 따른다’는 것은 설득당해 따른다는 뜻으로, 두 단어는 설득과 따름이 대단히 강력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귀부인들은 상류층 여인들로 일정한 권력과 부를 향유한 사람들입니다.

 

(2) 데살로니가에서 당한 어려움(5-9)

 

둘째 부분(5-9)은 바울과 실라에게 찾아온 고난에 대한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에게 가장 적대적인 그룹은 동족인 유대인들이었다. 유대인들이 바울 일행을 시기했다고 말합니다(5: 행 5:17; 참조. 행 13:45). 그들의 시기 이유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 경외자들을 바울 일행에게 빼앗긴 것 때문일 수도 있고, ‘복음을 믿지 않은’ 유대인들이 시기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불량한 사람들을 선동하여 소동을 일으키게 하고, 기어이 바울을 백성 앞에 세우려고 했지만 실패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야손의 집을 불량배들이 급습하기 전에 바울이 피하여 붙들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울과 실라를 찾지 못하자 야손과 그의 형제들에게 위해를 가합니다. 여기서 ‘형제들’의 존재를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야손이 영접하고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한 것으로 보아 그 지역의 유력자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6-7절에는 유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고소한 두 가지 이유가 나옵니다. 6절에서 유대인들은 바울 일행을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로 규정합니다. 그 구체적인 혐의가 7절에 나옵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바울이 로마 황제 대신에 예수님을 ‘임금’(바실류스 Basties)이라는 호칭으로 불렀다고 고소합니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7). 야손과 형제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그를 영접했기에 같은 혐의를 씌우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것과 가이사의 칙령을 어기는 것, 그리고 예수님을 임금이라고 부른 것은 모두 하나의 위반사항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빌립보에서 간수에게 ‘주(퀴리오스) 예수를 믿으라’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사실 이러한 고소는 다른 어떤 것보다 데살로니가행정관들 앞에서는 치명적일 수 있었습니다. 로마에 편재했던 황제숭배 사상은 로마 황제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로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없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두 번째 고소는 바울과 실라에게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 나라’와 ‘다시 오실 왕’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하는 것이 바울을 비롯한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야손과 형제들은 보석금을 내고 풀려납니다. 그들이 결코 바울이 범한 죄와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로 향해야만 했습니다.

 

베뢰아에서의 사역(10-15)

복음이 세상 권력을 쟁취하려는 운동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틀린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궁극적으로 세상의 가치관을 거부하고 힘을 숭배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세상 나라와는 달리 사랑과 자기 분인과 은혜의 나라라는 점에서, 세상의 폭압적인 질서를 교란하는 대안적인 세력이며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를 그리스도의 통치 앞에 복종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맞는 말입니다.

 

10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3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14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15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10-15)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을 간절히 받고 날마다 성경을 통해 확증하고자 상고했습니다. 차분한 묵상이 없는 갈급함이나 열정은 거짓 목자의 노략물이 되기 쉽습니다. 묵상의 자리를 지킨 이들이 말씀 기갈의 시대를 감당할 해갈의 사명자가 될 것입니다.

 

(1) 베뢰아 사람들의 회심(10-12)

 

베뢰아는 데살로니가에서 서쪽으로 75km 이상 떨어진 베르미우스 산기슭에 있는 도시입니다. 바울은 에그아티아 도로를 계속 따라가는 여정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베뢰아에서도 유대인의 회당으로 맨 먼저 들어갔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의 반응은 데살로니가 사람들과는 현저하게 달랐습니다. 바울이 전한 말씀에 대한 반응은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둘째,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 셋째, 믿는 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도행전의 서사에서는 바울이 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이 믿었다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베뢰아의 선교 보고에서만은 그들이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라는 언급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상고했다’는 단어는 '상세히 연구하면서 따져 물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강론했던 성경의 구절들이 정말 그런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지 꼼꼼하고 상세하게 연구하고 질문하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자발적인 말씀 연구가 신앙 형성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음을 보여줍니다. 또 진리에 대한 열정이 말씀을 향해 열린 자세를 갖고 생각하는 신앙을 품게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결과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이 사람들은 당연히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데살로니가보다 호의적이었던 이유를 11절에서 그들이 ‘더 너그러워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높은 신분의 헬라 여인들과 헬라 남자들이 믿음을 얻습니다(12). 이들이 상류층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은, 그들의 반응이 그것 자체로 기독교 신앙의 평가와 선교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초대교회에서 이런 상류층의 회심은 희소했고 이례적이었음을 반증합니다.

 

(2) 베뢰아에서 당한 어려움(13-15)

 

하지만 베뢰아에서의 복된 사역의 열매에도 불구하고 바울에게는 위험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던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찾아와서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베뢰아는 데살로니가에서 약 7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꽤 먼 거리임에도 유대인 적대자들은 바울의 일행을 추격하여 위협했습니다. 이미 사도행전 14:19에서도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 유대인들의 집요한 반대와 추적이 루스드라에까지 이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결국 바울은 아덴을 향해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적대자들의 서슬 푸른 위협을 피하는 것도 선교적인 방법이 될 수 있음을 바울은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면서 하나님 나라 복음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현실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단순한 신학적 주제가 아닙니다. 구원과 신앙의 근본원리이며 토대입니다. 예수님께서 남의 삶 속에서 왕노릇 하신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주 구체적으로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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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6-03)


빌립보 감옥에서부터 사역한 바울과 실라

사도행전 16장 27-40절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 가지 고난을 만나게 됩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왜 이런 고통이 나에게 임하는지 의아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 안에서는 그분을 믿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 중에 의미 없는 고난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주님께서 당신의 넘치는 위로로 우리를 채워 주심으로써, 고난당하는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한 주님의 통로로 우리를 사용하시려는 주님의 신비로운 인도하심입니다.

 

  •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귀신 들린 여인에게서 귀신을 쫓아냄으로 많은 매를 맞고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감옥에서 기도와 찬양을 드림으로 지진이 나며 차고가 풀리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이 일들을 통해 간수와 그의 가족이 구원을 받습니다. 새로운 아침이 밝았습니다. 바울 일행을 투옥시켰던 판사는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생각하며 바울 일행을 풀어주려 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27-34)

복음 전파는 그 누구에게도 정죄 받을 일이 아니며, 그 누구도 복음 전파를 막을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복음 전파자를 정죄하지만 그 정죄는 옳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복음 전파로 인한 세상의 정죄에 요동하지 않습니다.

 

27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28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29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30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31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32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33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34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27-34)

 

옥문이 열린 것을 보고 간수는 죄수들이 도망했는지를 살피지도 않고 자결하기로 작정합니다(12:19). 베드로와 바울은 복음의 증언을 위해서 동일한 경험을 갖습니다. 간수의 행동을 목격한 바울은 큰소리로 “우리가 다 여기 있으니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라고 말합니다(28). 이처럼 전도자는 생명을 살리는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 바울의 동정심과 폭력에 대한 저항은,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의 오른편 귀를 칼로 쳐서 떨어뜨린 것을 보고 예수님이 꾸짖으시고 다시 붙여 주신 모습을 기억나게 합니다(눅 22:49~51).

 

바울과 실라의 소리를 들은 간수는 그제야 횃불을 들고 옥으로 들어가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립니다. 그는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며 찬송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것이 주문을 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간수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묻습니다. 이러한 반응은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들은 무리가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2:37)라고 말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간수의 요청에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간단명료하게 답합니다(31). 감옥이라는 최악의 장소에서 복음 메시지를 이렇게 명료하고 간결하게 소개하는 장면은 가히 감동적입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직무는 장소나 시간이나 어떤 조건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언제나 복음의 메시지를 핵심적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장면이 바뀌어 바울과 실라를 통해 간수와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주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복음에 대해 더 소상하게 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로마 시민임을 밝힌 바울(35-37)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죄인 취급당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고 바울과 실라처럼 옥에 갇히기까지 할지라도 절대로 낙심하지 말라야 합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정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분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야 합니다.

 

35날이 새매 상관들이 부하를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니 36간수가 그 말대로 바울에게 말하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 하거늘 37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 대(35-37)

 

전날 밤에 이루어진 사건을 뒤로하고 바울과 실라는 다시 옥으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두 전도자가 로마제국에 위해를 주는 위협적인 존재가 아님을 확인시켜 줍니다. 기적이 일어나 탈출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오히려 간수를 살렸을 뿐 아니라 그의 가족에게 복음을 증언하는 증인의 책무를 거뜬히 해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석방된 것은 이 점을 상관들이 확인하고 인정한 셈입니다.

 

다음 날 아침 상관(아마, 치안 판사)들은 법 집행관들을 보내 바울과 실라를 석방하라고 통보했습니다(35). 개역개정 성경에는 상관들이 보낸 사람이 한 명인 것처럼 번역되었지만, 실은 38절에서와 같이 여러 명이었습니다. 이들은 상관들의 판결에 따라 바울과 실라에게 체벌을 가했던 법 집행관이었을 것입니다(22-23).

 

상관들이 부하들을 보내, 바울과 실라에게 석방하라는 명령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간수는 “평안히 가라”라고 말합니다(36). 바울은 예상 밖에 강경한 반응을 보입니다. 이 제안에 수긍하지 않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재판을 받을 때는 잠잠했던 바울이 스스로 로마 시민이라고 당당하게 밝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는 로마 시민이다’(Civis Romanus sum)라고,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고 더욱이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라며 자기의 법적 권리를 주장했습니다(37). 로마 시민으로 특별대우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실라는 부당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로마 사람인”이라는 문구입니다. 이를 보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로마 사람임에도 불구하고’입니다. 이는 점치던 여종의 주인들이 두 선교사에 대해 한 주장과 정반대입니다(20).

당시 상관들은 바울과 실라를 무리의 선동으로 고소가 적법하게 처리되거나 심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불합리한 상태에서 부당하게 매질을 당하고 옥에 갇혔습니다. 로마법에 따르면, 로마 시민은 품위를 손상시키는 처벌에서 면제되었고 여러 특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율리우스법(Lex Julia)은 로마 시민을 처벌할 때 채찍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때로 이 법은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로마 시민임에도 불구하고 심한 체형을 당하기도 해 이 법의 적용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음을 시사 합니다. 그러므로 고대 기록에 따르면, 사도행전은 1세기 로마 속주의 법적인 상황을 잘 반영합니다. 실제로 바울과 실라가 채찍으로 맞고 감금되고 상관들이 석방시켜 줄 때까지 로마 시민임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은 어색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명예와 수치라는 도식으로 볼 때, 바울과 실라는 복음을 위해서 속국의 국민으로 취급되는 수치까지도 기꺼이 참았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복음에 대한 열정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결단 때문에 신분이 추락하는 수치까지도 감수합니다. 그들은 수치를 당함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헌신합니다.

 

여기서 ‘로마 시민권’은 복음의 전달 매체로서, 수치를 명예로 반전시킵니다. 그들의 시민권은 수치를 끝까지 당하고 난 후 결정적인 순간에 복음의 수호자로 우뚝 서게 합니다. 그들의 명예는 이 세상이 제공하는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허락하시는 천상의 명예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고백했습니다(빌 3:20), 그의 복음 증언 과정을 보면 세상의 시민권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복음을 증언하는 것만이 최고의 가치였습니다.

 

빌립보를 떠나달라는 요청(38-39)

복음 전파자는 세상을 해롭게 하는 죄인이 아닙니다. 세상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쌍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당당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복음 전파가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38부하들이 이 말을 상관들에게 보고하니 그들이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39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그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38-39)

 

상관들에게 부하들은 바울의 주장을 보고했습니다(38). 즉 바울과 실라가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들은 상관들은 그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에서 떠나기를 요청합니다(39). 그들은 바울과 실라가 전도자이면서 선량한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물론 지난밤 간수의 집에서 이루어진 사건을 묘사한 후, 다음 날 아침 그들을 석방하는 장면은 어색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울과 실라는 이미 자유의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상관들이 직접 와서 바울 일행을 호위하며 빌립보에서 떠나게 합니다. 관리들은 군중의 호응을 얻지 못한 이 전도자들을 보호할 책임이 없다고 느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처럼 로마 시민이라는 바울과 실라의 신분은 ‘우리 로마 사람들’(21)이 받지 못할 풍습을 전한다는 귀신 들린 여종의 주인들의 고발을 일거에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여기서도 분위기 반전과 역전이라는 누가-행전의 핵심 주제가 다시 확인됩니다. 로마 시민 신분을 드러낸 바울 일행을 통해 로마의 고위 계층과 시민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장면이 이제 펼쳐질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를 떠남(40)

복음을 전하는 것은 높임을 받아야 할 영광스러운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자들이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아야 할 영광스러운 자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복음이 힘 있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세상 사람들이 전도자를 높이기는커녕 멸시하며 박해할지라고 언젠가는 이 땅에서 전도자를 높이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40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40)

 

바울과 실라는 상관의 정중한 요청을 받고, 옥에서 나와서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 형제들을 만나 위로하고 떠납니다(40). 속주의 치안 담당자들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요청한 바울과 실라는 자신들이 아니라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사과를 요구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일로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이 보호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교회와 바울의 관계가 오래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빌립보서는 확인시켜 줍니다. 특히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후원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빌 4:14-16).

바울과 실라는 선교후원자 루디아의 집으로 갑니다(40). 루디아는 그에게 후한 대접을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친밀한 관계가 바울과 교회 사이에서 계속 이어졌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만난 형제들을 격려하고 빌립보를 떠납니다. 누가는 뒤에 남았다가 20장의 빌립보 장면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복음 전파는 정죄 받을 일이 아니며, 복음 전파자는 세상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녹치 않습니다. 세상을 해롭게 한다고 생각해서 핍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복음 전파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이며, 우리는 복음을 전해 세상을 이롭게 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도자를 귀하게 여기며 높여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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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6-02)


초대교회 빌립보 교회의 탄생

사도행전 16장 6-18절


일을 해나갈 때 나름대로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지만, 때로는 전혀 엉뚱한 결과를 맺은 경우도 있습니다. 정말 당황스럽습니다. 지금 성도들 중에 어떤 분은 하나님과 자신의 뜻 사이에서 방황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빨리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기시길 바랍니다. 그런 분들에게 오늘 성경은 분명한 대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방법을 선택해야 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그 일행들을 마게도냐로 이끄십니다. 원래 바울의 목적지와는 달랐지만 바울의 선교팀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게서 인도하시는 곳으로 향했으며, 순종은 곧 열매를 맺습니다. 빌립보에서 두아디라 성 출신의 루디아와 그 가족이 회심합니다. 또 귀신 들려 점치는 여종을 고쳐줍니다. 이제 2차 선교 여행이 분격적으ㅗ 시작됩니다.

 

2차 선교 여행의 시작(6-10)

사람은 자신의 이성의 한계에 갇혀 자신이 세운 계획이 최선이며 전부라 착각하여 이를 수행하기 위해 애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세운 계획이 최고가 아님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인도하시는 계획은 우리 자신이 세운 계획보다 완전하고 유익한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심하지 말고 온전히 신뢰합시다.

 

6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6-10)

 

성령이 바울의 아시아 전도를 막으셨습니다. 성령이 함께하시면 항상 승승장구하는 줄로 알았지만 아닙니다. 바울 일행은 북부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을 거쳐 무시아 맞은편에 있는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이번에도 막으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일행은 실망하지 않고 순종하며 나갑니다.

 

(1) 성령의 인도하심(6-8)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선교팀을 그들의 계획과는 다르게 인도하셨습니다. 바울의 계획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바울과 그 일행은 아시아로 가려는 계획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 계획을 성령이 막으셨기 때문입니다(6).

이런 일은 7절에서도 반복됩니다. 무시아에서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으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 계속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2) 환상으로 인도하심(9-10)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른 곳으로 인도하신 이유는 9절에서야 밝혀집니다. 바울이 환상 중에 도움을 요청하는 마게도냐 사람을 보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마게도냐로 가야 했습니다.

이 단락은 성령이 자기 백성과 소통하시는 방식을 두 가지 형태로 보여줍니다. 첫째, ‘인도하심’이다. 누가는 성령이 바울의 계획에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관여하셨다고 기록합니다. 6절에서 성령은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막으셨습니다. 7절에서 성령(예수의 영)은 바울이 비두니아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10절에서는 하나님이 바울을 마게도냐로 부르셨습니다. 누가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어떤 구체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하여는 함구합니다. 다만 성령이 바울의 길을 인도하셨다고 기록할 뿐입니다. 물론 성령의 인도하심이 나타날 때 초자연적 방식을 동반했을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9절과 10절에서 ‘환상’이라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지만 앞선 구절들에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특정한 방식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이 이런 방식의 인도하심에 익숙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누가는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구체적인 방식에 대한 언급이 없는 성령의 인도하심은 사도행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행 4:31: 8:29,39: 10:44: 13:2,4). 누가의 표현과 기록들은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성령의 인도하심은 매우 익숙한 일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인도하심에 대한 방식보다 중요한 것은 성령이 인도하시는 이유와 목적에 대한 깨달음과 반응입니다. 바울은 다만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했고 순종했습니다. 10절에 기록된 ‘힘쓰니’와 ‘인정함이러라’는 바울과 그 일행이 그들의 계획과 다른 인도하심에 대하여도 적극적으로 순종했음을 보여줍니다. 순종하지도 않으면서 인도하심을 기대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인도하심에 대한 기대는 순종을 전제로 합니다.

 

둘째, ‘환상이다’(9-10). 환상은 신비롭기에 아주 매력적이면서도 흥미로운 방식입니다. 비록 오늘날의 교회에 익숙하지는 않지만, 9절과 10절에 연속하여 기록된 ‘환상’을 초자연적 계시가 아니라고 부인할 근거는 없습니다. 환상을 언급하는 신약성경의 다른 용례들(행 7:31: 9:10; 10:3,17; 11:5; 16:9; 18:9)과 비교해볼 때, 이 단락에 나오는 ‘환상’이 초자연적 계시인 것은 분명합니다. 환상이란 단어가 이 단락에 두 번씩이나 나타나고 있는 점은 장면의 중요도를 높이는 효과를 갖습니다. 또 사도행전에서 이 단어가 쓰인 용례를 보면 모두 주요 지도자인 모세, 베드로, 바울에게만 적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드로아에서의 환상이 갖는 의의와 누가가 부여하는 중요성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 열두 번 나오는데, 사도행전에서만 열한 번 사용됩니다. 이런 신적인 개입은 선교 동역자의 행선지 선택과 그들의 향로 결정이 목적 없는 우연이나 자의에 의하지 않고 하나님의 개입하심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즉 바울 일행의 활동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며 또 하나님의 허락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지리의 좌표 설정과 향로 결정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드로아에서의 환상은 오순절 설교에서 인용한 요엘의 예언, 곧 ‘너희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꾸리라’라는 말씀을 성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개입하심에 의한 진로 결정은 누가가 특별히 이 마게도냐 행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것은 복음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갔기 때문이 아닙니다. 당시로 보면 여전히 그들은 그레코-로마 세계 안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문화권을 넘는 선교적인 도약을 했다고 보는 것은 시대착오적 인식일 수 있습니다.

 

빌립보에서의 사역(11-18)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의 예비하심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도자와 사역을 홀로 두시지 않습니다. 복음 증거에 필요한 만남을 주시고 물질적 지원도 하십니다. 복음 증거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이긴 싸움을 하는 것임을 기억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승리입니다.

 

11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3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14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5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16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17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8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11-18)

 

빌립보에 도착한 바울에게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여인 루디아를 만나게 하십니다. 루디아의 마음을 여시어 그 가정을 빌립보 선교의 전진기지로 삼으십니다. 잘 준비된 전도자 바울을 통해 예비된 영혼 루디아를 바꾸셨듯이, 우리가 복음에 대한 확신과 말씀의 능력으로 구비될 때, 준비된 영혼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1) 루디아의 회심(11-15)

 

11-12절은 바울의 여행이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드로아에서 빌립보까지 약 240km의 여행을 거의 이틀 만에 끝냈습니다. 돌아오는 길이 오 일 정도 걸렸던 것에 비하면(행 20:6) 빌립보까지의 여행은 아주 빠른 속도로 이루어진 셈입니다. 드디어 바울의 선교팀은 마게도냐 지역의 첫 번째 도시였던 빌립보라는 선교지에 도착합니다. ‘첫 성’은 지리적인 위치를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중요도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마게도냐의 행정 수도는 데살로니가였지만, ‘작은 로마’라고 불렸던 빌립보는 매우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물론 가장 큰 도시는 ‘암피폴리스’(Amphipolis)였습니다. 따라서 여기 ‘첫’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한’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바울 일행은 먼저 기도처(프로쉬케)를 찾습니다(13). ‘여자만’ 모인 것을 볼 때 이곳이 회당일 가능성은 낮고 비교적 공식화된 기도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빌립보에는 회당을 세울 수 있는 최소 단위인 유대인 남자열 명이 없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야외나 강가, 바닷가에 기도처를 마련하여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 것이 유대 관습이었습니다(스 8:15; 시 137:1). 이 단락에 나타나는 강가 기도처 또한 회당은 아니지만 회당의 기능을 수행한 유대인의 모임 장소였을 것입니다. 그만큼 빌립보는 매우 로마화한 도시였으며, 이것은 복음을 전하기에 녹록치 않은 현실을 반영합니다. 바울은 여건과 상관없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13절 ‘모여 앉아 말하다’에서 세 동사는 가르침과 배움, 즉 설교의 상황과 연결됩니다. 이 모임이 정기적인 모임이었을 것이라는 암시를 이 세 개의 동사를 통해서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바울의 사역에 루디아의 회심으로 응답하셨습니다. 루디아는 이미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인이었습니다(14). 그녀의 이름 ‘루디아’는 아마 자신의 출신지인 두아디라가 속했던 지역 ‘루디아’에서 유래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름이 아니라 ‘루디아 출신의 여인’이란 뜻일 수도 있습니다.

루디아는 이방인으로서 유대교에 관심을 가졌던 이른바 ‘하나님 경외자’였을 것입니다. 그녀는 집을 소유하고 있었고, 그 집에 바울 일행을 유숙시킬 만한 여유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공중 모임’을 하는 것을 보면(행 16:40) 부유한 사업가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바울은 루디아를 비롯한 하나님 경외자들을 일차적인 전도의 대상자로 삼았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 성령은 루디아의 가족들에게까지 전도의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15). 이 여인은 이방(빌립보) 속에서도 이방(두아디라) 출신의 여인입니다. 그런 소외를 이기고 복음이 그녀에게 들어간 것입니다.

 

(2) 귀신 들린 여종을 고침(16-18)

 

16-18절까지는 귀신 들려서 점을 치는 한 여종을 고쳐주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3-15절까지의 루디아 회심 사건과 이 사건을 비교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바울 일행은 루디아 집에 들어가서도 안락하게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16). 그들은 기도하러 가다가 귀신 들려 점치는 여종을 만났습니다. 이 여종은 점으로 사람들의 미래를 예언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귀신에 의한 역사였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능력에 주목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악한 악령의 역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악령의 목적은 사람을 마침내 파멸시키는 것입니다(요 10:10). 이런 귀신들의 역사를 대적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악령이라도 자신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귀신 들린 여종은 바울 일행을 따라오며 소리치고, 괴롭히며 선교 사역을 방해했습니다(17). 아마도 바울 일행을 따라다니며 괴롭히면 필시 선교팀이 빌립보를 떠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귀신은 복음을 방해하며, 복음 증거자들을 괴롭힙니다. 그것은 귀신들이 영생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귀신을 꾸짖어 여종에게서 나올 것을 명하였습니다(18b). 예수의 이름에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은 쫓겨납니다(막 16:17). 우리는 당당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약 4:7). 예수의 이름으로 악한 권세들을 이깁시다.

 

이 사건은 군사적인 목적으로 건설된 로마의 식민지 빌립보에서 일어난 기적입니다. 대표적인 이방 도시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의도치 않았지만 기적이 행해졌고 복음의 능력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바울 일행이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이 사건이 빌립보에서의 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경외자였던 루디아의 회심에 말씀을 풀어서 해석하는 방식이 사용되었다면,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 지식과 이해가 없는 도시의 사역에서는 기적이 사용되었습니다.


선교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시고 우리는 그분의 이끄심을 받아 순종할 뿐입니다. 어떤 상황도 이 하나님 앞에서는 장애물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사정이 어떠하든지 우리는 주님만 의지하여 세우신 자라에서 애쓰면서 주님의 인도에 주의를 기울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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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6-01)


바울의 2차 선교 사역을 위한 준비

사도행전 15장 36절-16장 5절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일꾼들은 획일적이지 않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매우 다양합니다. 다양한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지으신 그대로 각자의 달란트를 따라 다양한 일꾼들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주신 은사와 특성을 하나님 나라에 귀하게 쓰임 받아야 합니다.

 

  •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한 유다와 실라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지만, 그들이 가져온 예루살렘 편지는 안디옥 교회를 거쳐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으로 전달되었습니다. 그 지역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면에서 모범적으로 보였던 안디옥 교회가 예상치 못한 아픔을 겪게 됩니다. 마가 요한의 일로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갈라선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36-41)

 

하나님의 사역을 해나갈 때, 마음에 맞지 않으면 서로 결별하는 것도 좋습니다. 갈등이나 결별 자체가 문제를 안고 계속 불편한 상태로 지속하기보다는 서로 각자의 사명을 따라 분리되어 사역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반드시 같이해야 선한 것만은 아닙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가 안정을 찾아오자 2차 선교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36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7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36-41)

 

예루살렘에서 온 유다와 실라는 돌아가고, 안디옥 교회는 할례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고 안정적으로 성장합니다. 얼마간 시간이 흘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상당한 기간을 머물면서 교회와 성도들을 세웠습니다(행 14:28). 바울은 바나바에게 자신들이 1차 선교 여행 때 세웠던 교회들과 형제들을 방문하여 돌아보고 양육하러 방문하자고 제안합니다. 즉, 2차 선교 여행을 준비하자고 요청합니다.

 

(1)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36-39)

 

하나님의 선한 사역임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발생합니다. 문제는 바나바가 그의 조카 마가 요한(골 4:10)을 동참시키자고 주장한 것으로부터 논쟁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바울은 마가를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을까에 대해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반대합니다.

 

바울이 다툼이 일어날 정도로 마가를 반대하게 된 이유는, 사도행전 13장에서 바울 일행이 선교 사역이 한참일 때로 돌아갑니다. 구브로 바보에서 밤빌리아를 통해 아시아 지역에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 마가는 갑작스럽게 일방적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아마 그는 이 사역이 힘든 것을 생각했기 때문에 혼자만의 결정으로 돌아 가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생각에는, 마가가 동참하였다가 2차 선교 여행 도중에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또 포기할 가망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지난번 마가의 당황스러운 행동이 선교 일행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이 또 반복되면 선교 사역에 동력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마가를 동참시킬 수 없다고, 바나바는 한 번 실수는 용서하고 동참시키자고 사로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 다툼으로 비화했을 것입니다.

39절의 ‘심히 다투었다’는 표현은 바울과 바나바가 도저히 의견 일치를 이루 수 없는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음을 의미합니다. 최후에는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에 이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계속해서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상대방과의 소통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결과만 놓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결과와 과정을 모두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성숙함입니다.

 

아쉽게도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이 결별한 채 각자의 길을 갔다고만 기록합니다. 바나바는 자신의 고향 구브로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의 행적은 더 이상 거론되지 않습니다. 먼 훗날 바울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마가를 향해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장면을 다른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딤후 4:11).

 

(2) 바울이 실라를 선택(40-41)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과 맞는 동역자들을 선택한 후에 서로 다른 지역으로 선교여행을 떠납니다. 바울은 실라를, 바나바는 누가를 선택합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은 초대교회의 입장에서는 매우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누가는 이 사건에 크게 비중을 두지 않습니다.

오늘날 이 사건을 대하는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당혹스러울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이 이야기를 통해서 몇 가지 교훈을 찾는 것도 유익하다고 생각됩니다. 첫째, 열정에는 어려움이 따른다는 점입니다. 만약에 바울이 선교지를 다시 방문하려는 열정이 없었다면, 바울과 바나바에게는 문제가 생길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바울의 열정은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바울은 마가라는 실패자를 오랜 시간 바라보며 참아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충분히 예상되는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바울의 결정은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바로 바나바의 결별 선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의 열정을 그다지 긍정적으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열정은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바울은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잘 극복하고 나중에는 인격적으로 성숙하게 됩니다.

둘째, 영적 훈련은 멈출 수 없다는 점입니다. 초대교회의 훌륭한 영적 지도자들이었던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존재했다면, 일반 성도들로 이루어진 오늘날의 교회에서 신자들 상호간에는 불화가 발생할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성도들 사이에 불화가 생긴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특히 한 쪽의 일방적인 고집으로 인해 타협점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은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자 하다’라는 뜻을 가진 ‘에불레토’가 미완료시제인 것은 바나바가 계속해서 바울과 소통하려고 했던 흔적을 보여줍니다.

 

혹자는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이 선교팀을 한 쌍에서 두 쌍으로 늘어나게 했기에 긍정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섭리하심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결과적으로 바울의 사역은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40-41). 그렇더라도 공동체에서 발생한 분열을 정당화하기는 어렵습니다. 누가는 어느 누구의 편을 들지 않습니다. 누가의 이후 기록이 바울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누가가 바울을 옹호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입니다. 누가는 다만 지도자들의 분열과 연약함을 그대로 묘사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에 초점을 맞출 뿐입니다. 이는 복음 전파가 사람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 그 성패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임을 강조하려는 누가의 의도일 것입니다.

 

바울의 새로운 동역자 디모데(16:1-5)

사역자에는 따뜻한 가슴과 더불어 단호한 결단도 필요합니다. 진리의 문제는 양보할 수 없지만, 그 외 문제는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사역자에게는 일반 성도들보다는 좀 더 높은 기준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그런 부분에서 마가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런 기준에 맞는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만한 일꾼을 보내십니다.

 

1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2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3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4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5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1-5)

 

하나님의 사역을 진행하는 과정에 구성원은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은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디모데를 선택하여 동역자로 세워갑니다. 이 단락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디모데가 바울의 선교팀에서 새로운 일원이 되는 것(1-3)과 바울의 선교팀이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을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에게 전달한다는 것(4-5)입니다.

 

(1) 디모데를 선한 바울(1-3)

 

누가는 바울이 디모데를 선택한 이유를 형제들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합니다(2). 마가로 인해 바나바와 결별한 바울이 새로운 동역자의 기준으로 삼은 것이 ‘사람들의 평판’이었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또한 그는 말씀으로 잘 교육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외할머니 로이스와 유대인 어머니 유니게에게 성경을 배웠던 사람입니다(딤후 1:5, 3:15). 성경을 기초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확신 있게 증거 할 수 자질이 준비되었습니다.

특히 바울은 이방-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유대주의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시행하면서까지 그를 선교팀의 구성원으로 선택했다는 점은 아주 놀랍습니다. 이는 바울의 입장에서 검증된 사람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강했는지 알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바울은 선교사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측면에서 모험과 가능성을 우선적인 가치로 두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동역자로 디모데를 선택한 기준은 ‘검증된 사람’이었습니다. 마가와 관련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긴 것이라고 해석하기에는 바울의 행동이 충분히 납득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바울이 바나바와의 결별 사건을 기회로 삼아서 선교사 선발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한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게 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미 이방인이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했을 때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 한 봐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게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크게 두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선교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디모데가 평판이 좋았지만 그는 혼혈 유대인이었습니다. 더구나 할례를 받지 않았다면 다른 유대인들에게 그는 결코 유대인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의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던 바울의 선교 패턴을 고려했을 때, 디모데의 무할례는 적대적인 유대인들의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은 선교 전략상 디모데가 할례를 받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할례의 시행 여부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바울의 모습은 복음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고집과 생각을 버리고 조절할 수 있다는 유연성을 갖춘 선교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둘째, 목양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무척이나 아꼈던 것 같습니다. 디모데가 차세대 지도자로 성장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흔히 바울은 업무 중심적이었고 바나바는 사람 중심적이었다고 평가하지만, 적어도 디모데와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바울의 성품은 업무 중심적이지 않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효율적으로 사역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하였습니다. 무엇이 디모데에게 필요하고 유익한지 바울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함으로써 그의 영적 부담을 덜어주려고 하였습니다. 결국 선교는 사람을 얻고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사람을 무시하거나 잃으면, 올바른 선교의 모습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2) 두 번째 갈라디아 교회 방문(4-5)

 

결론적으로 갈라디아의 교회를 방문했던 바울의 사역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정한 규례를 교회들에게 잘 전달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방문을 통해 교회들은 믿음에 더욱 굳건해졌고 성도들의 숫자가 날마다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질적 성장과 양적 성장이 동시에 일어나는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바울의 갈라디아 지방 사역이 성공적이었던 이유는 그의 전략적 선택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요한 마가 대신에 검증된 일꾼 디모데를 선택한 전략, 디모데의 약점을 보완해주었던 전략이 주효한 것입니다. 비록 바나바와의 결별이 아쉬움으로 남게 되었지만, 바울은 성공적인 선교의 모델을 오늘날의 교회들에게 하나의 지침으로 제공합니다. 복음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검증된 사역자들, 그리고 실제적인 전략은 언제 어디서나 꼭 필요한 필승 조합입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성향이 다르다고 믿음이 다른 것은 아닙니다. 스타일이 다르다고 다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사람을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하십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상대방을 나보다 낫게 여기면서 하나님을 섬겨 나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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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44-01)

 


영원히 찬양받으실 하나님

시편 44편 1-26절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 정착한 과정을 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 시편 44편은 공동체적이고 민족적인 애가입니다. 전쟁에서의 철저한 패배 후에, 이스라엘의 옛 조상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구원을 간청하는 기도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향해 신뢰를 고백하며 수치를 당하지 않고 위축되지 않기를 간구합니다. 신앙 공동체인 왕과 백성이 함께 언약을 어기지 않은 진실을 하나님께 호소하며 일어나 도우시기를 간청하는 기도입니다.

 

구원 역사를 회고(1-3)

신앙은 전수가 잘되어야 합니다. 세대는 계속될 것이고 신앙은 이어져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 주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언제든지 패배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결과입니다.

 

1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2주께서 주의 손으로 뭇 백성을 내쫓으시고 우리 조상들을 이 땅에 뿌리 박게 하시며 주께서 다른 민족들은 고달프게 하시고 우리 조상들은 번성하게 하셨나이다 3그들이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그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이니이다(1-3)

 

하나님을 부르며 ‘우리’로 표현한 백성들의 목소리로 시작됩니다. ‘하나님, 우리가 우리의 귀로 들었습니다’(1a). 백성이 들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이들은 조상들이 자기들에게 했던 말, 곧 그들 시대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오래전에 들었다고 합니다(1bcd). 이와 같은 표현은 어떤 신과도 비교 불가한 하나님을 찬양하는 다윗의 기도에도 등장합니다(삼하 7:22; 대상 17:20). 그러면 긴긴 세월 조상들로부터 받아온 교육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당신이 당신의 손으로 뭇 백성을 내쫓으시고 우리 조상들을 심으셨습니다’(2ab). 가나안 정복과 정착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조상들이 자기들의 칼로 땅을 차지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힘으로 자기들을 구원한 것도 아님을 압니다(3ab). 그래서 백성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의 손과 당신의 힘으로, 당신의 얼굴빛으로 하신 것이니 이는 당신이 그들을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3bc).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자기조상들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기뻐하셨기 때문이요(참조. 신 4:37-38), 하나님의 능력에 기초한 것임을 압니다.

 

옛 구원이 현재화하기를 바라는 확신과 찬양(4-8)

 

하나님께 승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기억할수록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값없이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찬양하며, 그 사랑에 영원히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께 영원히 영광을 돌립니다.

 

4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5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6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7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 8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셀라)(4-8)

 

발화자가 ‘우리’에서 ‘나’로 바뀝니다. 이러한 구성은 후에 예배 인도자와 회중이 번갈아가며 교독했겠지만, ‘나’는 공동체를 대표하는 ‘왕’일 것입니다. 최고 권력자인 왕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허히 낮추어 말합니다. ‘당신은 나의 왕이십니다. 하나님, 야곱의 구원을 명령하소서!’(4)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이스라엘의 또 다른 이름 야곱의 구원을 ‘명령하소서’ 청하는 것은, 인간 왕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신복이라는 겸손한 자기 인식의 표현입니다. 왕은 실제로 전쟁터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 명령을 받는 사람입니다. 발화자가 다시 우리로 바뀝니다. ‘당신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의 대적을 밀어내고,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가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짓밟겠습니다’(5). 백성들도 동일하게 왕처럼 하나님과 그 이름의 명령을 따라 싸우고 승리할 것이라는 다짐이며 확신입니다. 다시 왕이 말합니다. 왕은 ‘진심으로’ 나의 활을 의지하지 않을 것이며, 나의 칼도 자기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고(6) 선언합니다. 다시 ‘우리’의 목소리로 바꾸비니다. ‘오직’ 당신이 우리의 원수들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를 증오하는 자들이 수치를 당하게 하셨습니다(7). 백성들이 왕의 말에 화답하듯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을 고백하며 노래합니다. 백성들은 ‘하나님 안에서’ 온종일 우리가 찬양했고, 당신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겠노라고(8) 선포합니다. 왕과 백성이 서로 화답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광경이 아름답습니다. 백성들은 모두 과거의 구원 경험이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동력이 되고, 지금 하나님의 구원이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현재 위기에서 수치와 결백(9-22)

성도는 하나님의 언약을 버림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상실합니다. 백성의 수치는 언약을 버린 대가입니다. 형통한 삶을 원한다면 하나님의 언약 안에 거해야 합니다. 언약 안에서 광명의 빛으로 인도받던 이들에게 이제 죽음의 어두움이 임합니다. 언약을 떠나 타락한 이들에게 이제 빛은 사라졌습니다. 언약 안에 사는 삶은 빛 가운데 거하는 삶입니다.

 

9○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10주께서 우리를 대적들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나이다 11주께서 우리를 잡아먹힐 양처럼 그들에게 넘겨 주시고 여러 민족 중에 우리를 흩으셨나이다 12주께서 주의 백성을 헐값으로 파심이여 그들을 판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13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웃에게 욕을 당하게 하시니 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14주께서 우리를 뭇 백성 중에 이야기 거리가 되게 하시며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하게 하셨나이다 15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16나를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 때문이요 나의 원수와 나의 복수자 때문이니이다 17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18우리의 마음은 위축되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19주께서 우리를 승냥이의 처소에 밀어 넣으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20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21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22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9-22)

 

9-16절은 전반부에 나오는 내용과는 대조적입니다. 시인은 민족적 재난 앞에 탄식하고 절망합니다. 원수들의 압제로 수치와 비참함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해 주셔서 고통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호소합니다.

 

(1) 선언 백성의 탄식(9-14)

 

‘그러나’로 시작하는 백성의 목소리는 전쟁에서 패한 후에 부르는 애가이며 탄식입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당신이 우리를 버려 비참하게 되었고, 당신은 더 이상 우리 군대와 함께 출전하지 않으신다고 호소합니다(9). 전쟁터에서 함께 싸우시며 승리를 주셨던 하나님을 찾습니다. 전쟁의 패배만큼 하나님이 자기들을 버렸다는 인식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적들에게 쫓기고 빼앗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10). 백성들은 이 원인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잡아먹힐 양처럼 적들에게 넘겨주시고, 여러 민족들 가운데 흩어버리셨다고 생각합니다(11). 백성들의 언어는 더 거세집니다. ‘당신이 당신의 백성을 헐값에 파셨으나, 그들을 판값으로 이득을 얻지 못했습니다’(12). 하나님께서 백성을 파셨다는 표현은 언약을 파기한 백성을 심판하실 때 사용된 말이었습니다(참조. 삿 2:14; 3:8; 4:2).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웃들에게 불명예스럽게 하셔서 그들이 조롱하고 비웃는다고 합니다(13). 격렬하게 항의하는 목소리입니다. 이웃의 경계를 넘어 이들의 수치스러움이 확장되었음을 호소합니다. 뭇 백성들 사이에서도 이야깃거리가 되어 사람들이 보고 머리를 흔드는 상황입니다(14절; 참조. 시 22:7; 64:8; 109:25; 렘 18:16; 애 2:15). 영광은 없고 치욕만 남은 현실을 낱낱이 진술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이웃 나라들의 조롱과 멸시 받는 민족으로 전락된 때가 언제였습니까? 주전 586년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던 때와 관련된 것입니까?

 

(2) 왕의 수치를 선포(15-16)

 

백성의 탄식을 이어받아 왕이 애가를 이어갑니다. ‘온 종일 나의 능욕이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습니다’(15). 왕은 자기를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 자기 원수와 보복하려는 자들 때문에(16) 더더욱 수치스럽습니다. 백성의 수치 못지않은 불명예가 왕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전쟁에서 패배한 왕의 어깨에 놓인 짐의 무게만큼이나 수치심은 더 컸을 것입니다.

 

(3) 백성의 결백 선언(17-22)

 

그렇다면 왕과 백성은 이웃과 뭇 나라들로부터 수치와 모욕을 당해 마땅했습니까? 백성의 결백 선언이 살짝 당혹스러울 정도로 당당합니다(17). 백성들은 자기들의 마음이 정도를 벗어나 다른 길로 가지 않았고, 발걸음도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18). 백성들은 하나님께 오히려 당신이 우리를 승냥이의 소굴에 밀어 넣으셨고, 죽음의 그늘로 몰아넣으셨다고(19) 항변합니다. 백성들의 항변은 점점 더 거세집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우리의 손을 이방의 신에게 펼쳤다면/하나님이 이것을 알아내지 못하셨겠습니까?’(20ab-21a) ‘손을 편다’는 것은 예배 행위와 관련된 행동입니다(참조. 출9:29, 33; 스 9:5; 시 88:9; 141:2).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난 행위뿐만 아니라, ‘그분은 마음의 숨겨진 것들을 아시는 분’(21b)이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속마음까지 속속들이 아시는 하나님께 항변하고 하소연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위해 온종일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고, 도살당할 양처럼 되었다고(22) 탄식합니다.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을 위한 번제단의 희생제물인 양 애타는 심정인 것과, 죽음의 심판만 남은 존재처럼 절박함을 표시합니다. 무엇이 되었든 죽음의 위협 앞에서의 부르짖음은 하나님의 정의에 기댄 인간의 존엄을 확인받는 일입니다.

 

주님, 일어나십시오! 우리의 도움이 되십시오!(23-26)

 

하나님의 이름을 잊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끝까지 믿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 앞에 악한 영들은 물러갑니다. 환난을 이기는 능력이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견디기 힘든 고난의 자리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부르짖으시기를 바랍니다.

 

23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24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25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26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23-26)

 

모두 다급해져 신속한 하나님의 개입을 원합니다. ‘일어나십시오, 어찌하여 주무시고 계십니까, 나의 주님/깨어나십시오!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십시오’(23). 응답 없는 주님을 향해 주무시는 하나님인 양 일어나 깨어나시기를 재촉합니다. 주무시는 하나님이라니. 너무 절박하여 격식을 차릴 마음의 겨를이 없습니다. 백성들은 어찌하여 당신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셨습니까, 질문합니다(24). 하나님께서 외면하신 이유를 묻습니다. 이는 생명이 진토 속에 파묻히고 몸은 땅속에 붙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25). 주무시는 하나님을 다시 흔들어 깨우는 것처럼 다시 외칩니다. ‘일어나십시오! 우리의 도움이 되십시오!’(26). 우리의 ‘도움’이 되라고 호소합니다. 마지막으로 백성들은 실패하지 않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구원해주시길 기도합니다. 백성의 마지막 희망은 언약에 근거한 사랑이며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랑, 곧 ‘인자하심’에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과거는 묻혔고, 치욕스러운 현실 앞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뿐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백성입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우리를 주님은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심으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왕이 되셔서 우리를 지켜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베푸십니다. 주님의 은혜를 날마다 자랑하며 살아가는 은혜의 증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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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43-01)

 


절망의 골짜기에서 부르는 노래

시편 43편 1-5절


 

환난을 만날 때 우리는 절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절망은 환난을 극복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절망의 골짜기가 깊어질수록 더욱 슬퍼질 뿐입니다. 절망의 골짜기에서 성도가 해야 할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찬양은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 시편 42편과 하나처럼 이어지는 43편은 억울함을 항변하기 위해 법정적인 용어를 사용하면서 하나님께 불의한 자를 심판하시기를 간청하고 호소하는 시입니다. 생명의 물을 찾는 사슴처럼 간절했고, 혼돈과 죽음의 물로부터 구원받기를 간절히 기도했던 시인은 하나님의 빛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라 다짐합니다.

 

하나님 나를 변호해주소서(1)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맡길 때 불경건한 자들의 핍박과 조롱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경건하지 않은 불의한 자들의 자의적인 판단과 비방에 낙담하지 맙시다. 침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고 마음의 평안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1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1)

 

시인의 첫마디는 간결하지만 강력합니다. ‘나를 판단해주소서, 하나님’(1a). 시인은 자신의 생명을 건 내적 목마름(42:1-2)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42:3,10) 조롱하는 원수들 때문에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스스로에게 왜 낙심하는지 집요하게 질문하면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42:5,11). 이제 시인은 자신과의 내적 몸부림을 끝내고 결심한 듯 하나님을 향해 판결을 구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무슨 문제 때문에 판결 받고 싶은 것입니까? 시인의 이어지는 말에서 분명해집니다. ‘경건하지 않은 나라에 대한 내 송사를 변호해주소서/간사하고 불의한 사람에게서 나를 건지소서’(1bc) 시인의 말을 문자 그대로 읽고 해석하면, 그는 소송에 얽혀 법적 투쟁 중입니다. 거짓되고 사악한 사람과의 개인적인 송사와 경건하지 않은 ‘나라’와 얽힌 국가적인 소송 문제에 연루된 상태입니다. 이러한 법적 투쟁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공정한 재판관이면서도 자기의 변호를 맡아주시길 간청합니다. 여기서 ‘나라’는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이방 사람들을 언급한 것일 수 있지만(출 34:24; 겔 5:6-8; 시 44:3), 본문의 맥락을 넓혀 시인이 국가 지도자로서 왕이라면 이웃 나라들과 맺은 계약 파기 같은 문제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경건하지 않은 나라? 표현이 다소 어색합니다. 왜냐하면 형용사 ‘경건하다’는 주로 하나님께 신실하게 헌신된 자들, 곧 ‘성도’를 일컫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경건하지 않은 나라’는 시인 주변의 특정한 사람들을 집합적으로 일컫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습니다. 더군다나 셋째 소절, ‘간사하고 불의한 사람’과의 평행관계를 고려하면 ‘경건하지 않은 나라’보다는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이 적절합니다. 따라서 시인은 거짓되고 불의한 자들, 곧 경건하지 않은 이들에게 휘말린 법적 공방에서 하나님의 변호가 절실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 편 되어주시는 것, 그것이 불의한 자들로부터 구원받는 길이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2)

빛은 어두움 속에서 길을 안내하는 등불입니다. 아무리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해 줍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약속의 약속이 곧 진리입니다. 빛과 진리의 말씀만이 흑암을 밝혀 구원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2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2)

 

하나님께서 재판관으로서, 시인의 변호인으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으셔서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향해 호소합니다. ‘참으로 당신은 나의 하나님 나의 산성이십니다’(2a). 시인은 언약의 이름 여호와가 아니라, 신들 중의 가장 위대한 신, 완전한 신을 언급하는 명칭, ‘엘로힘’에 1인칭 소유격을 덧붙여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분은 누구도 침략할 수 없는 ‘나의 산성’, 곧 나의 피난처임을 고백합니다. 그러고서 시인은 부르짖으며 호소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어찌하여 내가 비탄에 빠져 다녀야 합니까?/원수의 압제 때문에요’(2bcd). 시인은 왜 아직도 여전히 상복을 입은 사람의 비통한 심정처럼 슬퍼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응답을 듣고 싶습니다. ‘어찌하여’를 반복하며 거절당한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어 하나님을 향해 탄원합니다. 탄식의 본질은 분명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로부터 잊힌 존재 같아 고통스럽습니다. 그렇다고 침묵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억압하는 원수로부터의 구원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믿습니다. 따라서 원수를 향한 증오심에서 허우적대며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을 열망하는 목소리를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거친 부르짖음은 믿음 없이 불가능합니다.

 

빛과 진리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소서(3-4)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자에게 주시는 기쁨은 세상이 알 수 없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원수들의 핍박과 조롱을 압도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불경한 자들의 공격에 연연하지 않고 예배의 자리를 사모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소망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생각하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가 없습니다.

 

3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4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3-4)

 

시인은 다시 간구합니다. ‘당신의 빛과 당신의 진리를 보내소서’(3a). 매우 독특한 간청입니다. 히브리 시인들은 보통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과 신실하심, 곧 ‘인자와 진리’를 구합니다. 그런데 ‘빛과 진리’가 한 쌍입니다. 슬픔의 어둠을 헤매는 사람처럼 다녔던 시인(2)이 빛을 구하고, 불의한 자들의 거짓으로부터로 악기를 연주하며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진리’(진실)를 구합니다. 시인은 빛과 진리로 자기를 인도해주시길 청한다(3b). 시인은 체계적이고 단계적으로 요청합니다. ‘빛과 진리가 나를 당신의 거룩한 산으로 데려가게 하소서’(3c)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계신 거룩한 산에 오르기까지 빛과 진리의 안내를 받고 싶습니다. 신실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빛이고, 빛은 곧 생명입니다(참조, 미 7:8). 시인은 어둠과 죽음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빛과 생명의 활력이 넘치는 안전한 공간으로 인도받고 싶습니다. 그곳을 시인이 ‘당신의 거룩한 산’으로, ‘당신의 장막’으로 부릅니다(3). 시편에서 거룩한 산은 시온산이며(시 2:6; 15:1), 주님이 거하시는 곳, ‘장막’도 시온을 가리킵니다(46:4; 84:1; 132:5,7). 시인이 빛과 진리의 안내를 받아 궁극적으로 가고 싶은 곳은 하나님 임재의 처소입니다. 시인은 한때 많은 무리와 동행하며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발하며 ‘하나님의 집’, 곧 성전으로 올라갔을 때를 회상하며 슬픔에 젖기도 했었습니다(42:4). 이곳은 낭만적인 추억의 장소가 아닙니다. 시인은 현실에서 다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희망을 다짐하듯 말합니다. ‘그때 내가 하나님의 제단으로 나아갈 것입니다/내 기쁨의 극치이신 하나님을 향해’(4ab). 하나님의 ‘제단’은 제물을 드리는 곳입니다. 그런데 어떤 제물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것인지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하나님을 향해 가는가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시인은 ‘내 기쁨의 극치이신 하나님’, 곧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개역개정)을 향해 갑니다. 그는 기쁨의 극치이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더 이상 슬프지 않습니다. 이전처럼 부재의 하나님께서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환호하는 시인의 모습이 상상이 됩니까? 시인은 기쁨의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수금으로 당신을 찬양합니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여’(4cd). 탄식의 언어는 사라지고 기쁨으로 악기를 연주하며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시편 2권을 시작하는 42편과 43편에 유달리 하나님의 완전성을 표시하는 명칭, ‘엘로힘’이 반복되는 것은 주로 언약의 이름 ‘여호와’가 많았던 1권(1-41편)과 비교되는 대목입니다. 왜입니까? 포로의 땅에서 온갖 이방 신들에 둘러싸여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시인은 신들 중의 최고이며 완전한 신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복수 형태 ‘엘로힘’을 자주 사용한 것 아닙니까?

 

나의 구원 나의 하나님을 찬양하리라(5)

고통 중에도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로 나아가기를 갈망합니다. 원수들의 송사를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고 빛과 진리를 간구해야 합니다. 예배의 감격이 그의 절망적인 상황을 압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떠한 시련도 이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5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5)

 

42편 마지막 절(11) 시행과 똑같습니다. 시인은 이미했던 말을 반복하지만, 이전과 다릅니다. 마음이 용해되어 사라질 정도의 고통스러움을 입으로 쏟아냈지만(42:5,11), 탄식의 목소리를 터트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제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시인이 장차 하나님의 산과 하나님의 장막에 이르러 기쁨과 찬양의 제사를 드릴 것이라 확신하며 다짐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42, 43편의 아름다움은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탄식과 희망의 절묘한 어울림에 있습니다. 유리하고 방황하는 인생을 이보다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까? 세 차례 반복하는 말의 절정은 43:5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5ab) 탄식하고 탄원하고 질문하며 답을 찾아가는 집요함 자체는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며, 그 자체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노래합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라, 진실로 여전히 내가 그를 찬양하리라, 나의 구원 나의 하나님을’(5cde). 절망과 불안이 엄습하는 골짜기에서 스스로 하나님을 기다리며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기다림이 곧 믿음입니다. 절망의 복판에 섰던 시인의 긴긴 기다림은 절망하며 흔들리는 모든 이들에게 가장 큰 위로입니다. 영혼의 깊은 강을 건너며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43편은 삶의 슬픔과 기쁨의 비밀이 교차하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인생을 사는 동에는 고난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환난의 순간마다 우리가 절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면 절망의 골짜기만 깊어질 뿐입니다. 절망의 골짜기에 빠진 사람은 환난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절망의 골짜기에서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건지시고, 힘을 주시며, 바른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니 환난을 당하는 순간에도 다윗처럼 주님을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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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42-01)


앞날이 캄캄한 때에

시편 42편 1-11절


 

인생의 길은 광야와 같습니다. 메마른 길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길이 없어 보이는 벼랑을 만나기도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 벼랑 끝에서 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벼랑 끝에서도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시고 길을 열어 주십니다.

 

  • ‘영혼의 어두운 밤’을 노래하는 이 시는 인간 내면의 갈증과 고단함 속에서 힘과 위로가 되는 아름다운 시입니다.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시인 내면의 고독은 믿음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입니다. 이는 읽는 이의 마음 깊은 곳을 어루만져 어둡고 차가운 현실에서 새 힘을 줍니다.

 

목마른 사슴처럼 하나님을 찾으나(탄식)(1-4)

불신앙의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신자들에게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응답이 즉시 임하면 좋겠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믿음을 잃어버릴 만큼 힘든 상황에 빠졌을 때 우리는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요?

 

1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3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1-4)

 

시인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하나님을 찾습니다. 사슴은 시냇물을 찾지 못하면 죽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갈급함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생도 하나님을 찾지 못하면 죽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인생의 갈급함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다른 것들로 인생의 갈급함을 해결하려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1) 시냇물을 찾는 사슴처럼(1-2)

 

시인은 하나님과 분리된 실제적 고통을 자연의 이미지와 직유로 표현합니다. 시인의 첫마디는 ‘사슴처럼’입니다. ‘시냇물을 갈망하는 사슴처럼/그렇게 내 영혼이 하나님 당신을 갈망합니다’(1). 히브리어 본문의 소절과 소절 사이에서 생략해도 무방한데 생략하지 않고 반복한 ‘갈망하다’(‘갈급함 같이’, 개역개정)동사 형태는 시편에서 두 번 반복되며, 구약 다른 곳에서는 찾기 어려운 드문 표현입니다(참조. 욜 1:20, ‘헐떡거리오니’). 하나님 만나기를 열망하는 시인의 절박함을 표현한 말입니다. ‘내 영혼’, 곧 내 목숨처럼 절실합니다. 시인은 물을 찾아 헤매는 사슴 같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이의 마음을 이보다 더 간절히 표현할 수 있습니까? 시인은 또 반복합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습니다’(2a). 시인이 찾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내 생명’은 곧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처럼 하나님을 시인의 생명과 연결 짓습니다. 그는 질문합니다. ‘언제 내가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습니까?’(2b) 2절에서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자 하나님, 곧 ‘엘로힘’이 두 번 반복됩니다. 구약 시대 모세를 제외하고 누구도 하나님 얼굴을 마주 대하며 볼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 임재의 처소인 성전에서 예배드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형편과 처지를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2) 사람들의 조롱과 순례의 기억(3-4)

 

시인은 내 눈물이 밤낮으로 나의 음식이 되었다고(3a) 탄식합니다. 사람들은 ‘온종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3) 묻습니다. 시인이 밤낮 눈물을 음식처럼 삼키는 이유는 비아냥거리는 질문 때문입니다. 이러한 조롱은 이방인들이 침입하여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했을 때 주로 하던 말입니다(시 79:10; 115:2; 2:17; 미 7:10).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조롱하는 말이어서 포로로 잡혀간 상황이거나 시인이 당면한 위기 속에서 그를 미워하는 원수들일 수도 있지만, 이어지는 시행은 포로기 상황처럼 보입니다. 시인은 옛일을 회상합니다. 그가 기억하는 일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일 때문에 ‘내 마음이 상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숨을 토해내듯 절망적인 고통을 표현할 때 쓰는 말입니다. 시인은 지난 시간을 회상합니다. 시인은 많은 무리와 함께 ‘하나님의 집’까지 동행했었습니다. 그때 기쁨과 감사의 소리로 흥분된 축제가 계속되었습니다(4). 시인은 무엇보다 성전이 있는 곳까지 많은 이들과 동행하며, ‘기쁨과 감사의 소리로’ 충만했던 때가 그립습니다. 성전으로 행하는 순례의 발걸음에서 터져 나왔던 환호성과 기쁨에 넘쳤던 축제 현장이 그립습니다.

 

[후렴]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는가?(소망)(5)

하나님께서는 절망 중에 있는 시인은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구원의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 있다 해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음이 크게 상한 시인은 믿음이 사그라질 위기에 처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을 단호하게 꾸짖습니다.

 

5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5)

 

시인은 스스로 반문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는가, 내 영혼아/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5ab) 낙심 가득한 자신을 향해 꾸짖는 말입니다. 이 말은 마치 시 전체의 후렴구처럼 기능을 합니다. 시인은 스스로 답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라/내가 잠잠히 그 앞에서 구원을 찬양할 것이라’(5cd). 시인은 당장 죽을 것처럼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지난날 하나님의 집을 향해 가며 기뻐했던 축제를 추억한 것처럼(4), 자신에게 하나님의 임재, 그의 구원을 찬양할 날이 올 것을 믿습니다. 절망 끝에 희망을 주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보다 더 큰 희망은 없습니다.

 

죽음의 바다와 원수의 압제 속에서(탄식)(6-10)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고난을 당합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 절망의 유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시고,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는 그분이 구원해 주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도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6○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7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8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9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10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6-10)

 

두 번째 연에서 시인은 먼저 낙심한 상태에 하나님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있는 곳은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요단 땅, 헤르몬 산, 미살 산입니다. 이는 공간적인 거리뿐 아니라 심리적인 거리를 나타내면서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진 시인의 고통을 극대화합니다. 고통이 극심한 때야말로 하나님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1) 위협적인 폭포와 깊은 바다(6-7)

 

다시 탄식의 언어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절망과 희망 사이를 반복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고통의 깊이를 드러낸 구성입니다. 시인의 내적 고통은 점점 깊어집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녹아내립니다/그리하여 내가 당신을 기억합니다’(6a). 생명이 녹아내리듯 고통스러운데도 당신을 기억한다는 매우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이때 시인은 특별한 지명들을 언급합니다. 요단과 헤르몬 땅과 미살 산에서부터 내가 당신을 기억할 것이라고 합니다(6). 이 세 개의 지역이 시인에게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특별한 장소입니까? 헤르몬 산과 미살 산은 약속의 땅 밖에 위치했지만, 요단과 공통점이 있다면 물입니다. 요단강의 수원지가 헤르몬 산입니다. 이후 시인은 헤르몬 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를 원시의 바다, 곧 깊음(테홈)과 연결시킵니다. ‘당신의 폭포 소리를 따라 깊음이 깊음에게 소리를 발하고, 당신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습니다’(7). 깊음이 깊음을 부르는 것이나, 모든 파도와 물결은 모두 물의 모티프에 근거합니다. 그 근원은 하나님의 폭포 소리에 연결되었습니다. 폭포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현상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혼돈을 상징하는 원시의 바다, ‘테홈’으로 연결됩니다. 이 혼돈은 급류에 휩쓸리는 시인과 연결되었습니다. 결국 내 영혼이 녹아내려 당신을 기억한다고(6a) 말한 시인의 진짜 의도는 파괴적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시인은 생명의 물을 찾는 사슴처럼 간절했지만(1-5), 이와 대조되는 혼돈과 죽음의 물, 곧 ‘깊음’의 위협에 버려진 것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가 아니라 죽음의 물이 자기를 덮쳐오는 것처럼 절박한 상태입니다.

 

(2) 시인의 기도와 대적들의 비아냥거림(8-10)

 

그러나 시인의 두려운 마음이 하나님 사랑을 노래하는 것으로 바뀝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시행입니다. ‘낮에는 여호와가 그의 신실한 사랑을 명령하시고, 밤에는 그의 노래가 나와 함께 있으니, 내 생명의 하나님을 향한 기도라’(8). 하나님을 향한 솔직한 두려움이 하나님 사랑 예찬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은 거짓 없는 마음, 진실한 때문에 가능합니다. 시인은 ‘신실한 사랑’이나 ‘실패하지 않는 사랑’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헤세드가 발휘되는 낮의 질서를 찬미합니다. 시인이 고요한 밤 동안 낮에 행하신 하나님의 일들을 묵상하며 그를 향해 기도하는 장면은 아름답고 숭고합니다. 시인은 1인칭 직설법으로 자기의 고통을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내가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께 아룁니다. 어찌하여 당신은 나를 잊으셨습니까?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 때문에 비탄에 빠져 다녀야합니까?’(9) 시인은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흔들리며 불평을 쏟아냅니다. 자신이 왜 이토록 어둠 속을 헤매는지 알고 싶습니다. 시인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은 또 있습니다. 뼈를 찌르는 칼처럼 온종일 대적이 비방하는 말을 견딜 수 없습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10) 시인의 대적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시인을 돕지 않는 것처럼 보여 조롱합니다. 시인은 응답 없는 하나님, 멀리 계신 하나님, 숨어 계신 하나님,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절망적인 상황을 탄식하고 탄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숨어 계심을 부재가 아니라 현존의 다른 방식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후렴]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는가?(소망)(11)

하나님께서 외면하신 것같이 느껴져도 의지할 대상은 하나님뿐입니다. 그래서 시민은 그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하나님께서 생명과 반석이시고 인자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것이 진리이기에 시인의 호소는 의미 있는 기도가 됩니다.

 

11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11)

 

하나님의 숨어 계심과 침묵이 하나님의 부재는 아닙니다. 침묵은 현존의 또 다른 방식입니다. 따라서 시인은 다시 마음을 추스르며 자신에게 질문하면서 성찰의 시간을 갖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구약성경에서 42편과 43편에서만 나오는 독특한 말,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는가?’(5,11; 43:5)는 자신을 향한 꾸짖음이면서 하나님을 향한 희망의 언어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길고 긴 기다림 끝에서 그분의 임재와 구원을 여전히 잠잠히 찬양할 것이라 고백합니다. 깊은 절망과 내적인 고뇌가 구원의 희망과 교차하여 아름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물 없는 사슴이 살 수 없듯이 하나님 없는 인생도 죽음을 맞을 뿐입니다. 절망의 바닥에 있을 때, 그 또한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 아래에 있음을 기억합니다. 절망의 나락에서 우리를 건져 주실 분도 역시 하나님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소망이십니다. 우리가 메일 보좌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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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41-01)


복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삶

시편 41편 1-13절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그 마음에 깊게 담아두시고 자기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보시는 분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복 받기를 원하지만,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주시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한 번 더 사랑을 증거하려고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 시는 가난한 자를 돕는 이의 행복을 기원하며 시작됩니다. 악인을 따르지 않는 자의 행복을 노래하는 시편 1편의 자매 시편 같습니다. 41편은 질병으로부터 치료되기를 바라는 기도와 외로움과 원수로 인한 탄식이 어울려 있습니다. 동시에 자신을 괴롭히는 원수의 패배를 믿으먀 하나님 임재의 기뿜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초청하는 시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이의 행복(1-3)

현시대에 우리도 다윗처럼 악을 만나는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는 이웃을 존중하는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보살피듯이, 하나님처럼 성도들도 가난한 자의 필요를 적극적으로 돌아보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께서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1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2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3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 4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1-4)

 

이 단락은 시편 41편의 핵심적인 선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지금 고난 중에 있지만,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국 은헤를 입게 될 것이라는 믿음의 선언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1-3)

 

41편 첫 절의 첫마디는 ‘행복하다’(아쉬레)입니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행복한(시 1:1) 것처럼, 가난한 사람을 보살피는 자는 행복합니다(1). 악인들의 꾀와 그들의 길을 따르지 않음은 가난한 사람을 보살피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시인은 ‘가난한 자를 돌보라’고 직접 명령하지 않고 우회합니다. 가난한 자 위에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입장에서, 그들보다 낮은 데서 이해하고 공감하도록 안내합니다. 구약의 지혜 교훈은 명령보다는 묘사를 통해 독자의 선택을 유도합니다. 재앙의 날에 여호와가 그를 건지실 것입니다(1b). ‘가난한 자’는 경제적으로 궁핍한 자뿐 아니라 무력한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헌신하는 사람을 여호와가 모른 척하실 리 없습니다. 시인은 여호와가 그를 보호하시고 지키시며 이 땅에서 복 받게 하시며, 그를 원수들에게 넘기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2). 1절의 ‘행복하다’와 2절의 ‘행복하게 되다’(웃샤르)가 서로 연결됩니다. 이는 물질적인 풍요의 복이나 소유가 아니라 존재로서의 행복입니다. 이와 같은 말은 보통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말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인은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사람을 여호와가 병상에서 붙드실 것이라(3a) 말한 후 여호와께로 대상을 바꿔 말합니다. ‘당신은 그의 병으로 인한 모든 병상을 뒤집어 엎으셨습니다’(3b).

시인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보살피는 자가 병에 걸렸을 때 그 병상을 ‘뒤짚어 엎으신다’고 말할 만큼 완전한 치료의 경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완벽한 치료뿐 아니라 타인을 보살피는 친절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까지 둘 다를 선포한 것입니다.

 

(2) 내게 자비를 베푸소서(4)

 

가난한 자들을 보살폈던 자가 마치 시인 자신인 듯 경험과 믿음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청합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 내가 당신께 범죄했으니 내 생명을 치료하소서.’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베푸시길 바라는 은혜는 병 고침입니다. 시인은 자기 질병의 원인이 범죄 때문이라고 공적으로 고백합니다. ‘범죄했다’는 말은 매우 광범위합니다. 마땅히 할 일을 놓쳤거나 흠 잡힐 만한 무엇이 있거나,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말 못한 일에 대한 고백입니다. 사람의 질병과 죄의 인과관계가 결코 기계적이지 않지만, 고대인들은 질병과 죄를 연결시키곤 했습니다. 이것은 시인이 어떤 특정한 죄를 말한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내재된 죄의 성향에 대한 철저한 자기 점검의 고백입니다.

 

원수들의 악담과 친구들의 배신(5-10)

성도들은 ‘복수’의 사람이 아니라 ‘용서’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거짓 고소와 악한 비방대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쓰러져 버려서는 안 되기에 우리도 다윗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은 온통 거짓이고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기 위해서도 성도들이 쓰러져 버려서는 안 됩니다.

 

5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그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의 이름이 언제나 없어질까 하며 6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의 중심에 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널리 선포하오며 7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하나같이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8이르기를 악한 병이 그에게 들었으니 이제 그가 눕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오며 9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10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으키사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 이로써(5-10)

 

다윗이 병들었을 때 어떤 사람들은 그를 위로하고 돌보기보다는 악담하고 저주했습니다. 병과 고통 자체도 물론 견디기 힘든 일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며 성처에 소금을 붓는 식으로 조롱하는 자들의 말 한 마디는 화살처럼 다윗의 가슴 깊숙이 박혔을 것입니다.

 

(1) 악한 자들의 행동(5-9)

 

시인은 혹시 범죄한 것이 있을까 염려하고 죄를 고백합니다. 그가 돌연 자기 원수가 ‘나에게 악이 있다’(5a)라고 악담한 것을 인용하며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그가 언제 죽을까, 그의 이름이 언제 사라질까?”(5b) 원수가 내뱉은 악의적인 말에서 강한 적대감이 느껴집니다. ‘그의 이름’이라고 할 때 ‘이름’은 명성과 평판을 가리킵니다. 시인의 명성이 죽음과 함께 끝나길 바랄 만큼 적대적인 원수가 곁에 있습니다. 더군다나 원수가 자기를 보러 와서 거짓말하고, 마음에 거짓된 온갖 정보들을 모아서 거리에 나가 떠들어댈 것이라고 호소합니다(6). 시인의 고통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시인의 탄식 어린 호소는 더 거세집니다. 시인은 나를 미워하는 모든 자들이 연합하여 수군거리며 그들이 내게 해를 입히려고 궁리한다고 호소합니다(7). 그들의 비방을 직접 들은 것처럼 인용하기도 합니다. ‘그가 나쁜 병에 걸렸으니 그가 누우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거야’(8). 시인은 더 기막힌 상황을 호소합니다. 자기가 신뢰했고 완벽한 관계를 자부했던 친구들, 그와 함께 음식을 먹었던 자들이 배반한 것입니다(9). ‘가까운 친구’(9)로 번역된 말은 직역하면 ‘나의 평화의 사람’입니다(렘 20:10). 나와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샬롬’은 허물없이 아주 가깝게 지내는 친구나 언약관계를 함축한 말이며, 생명을 나눌 정도의 우정을 약속한 동반자처럼 가까운 사이를 가리킵니다(참조. 삼상 18:3). 그런데 그 신성한 연대감이 깨지고 배신만 남은 상태입니다.

 

(2) 내게 자비를 베푸소서(10)

 

시인은 다시 하나님께 자비를 청합니다. ‘그러하니 당신 여호와여, 내게 자비를 베푸소서/나를 일으키시고 내가 그들에게 되갚아주게 하소서.’ 자신을 위해서 은혜롭게 대해주시기를 바라면서 원수들과 배신한 친구의 행위를 그대로 되갚아주시길 간청합니다. 대체로 번역 성서들이 시행 맨 첫 글자 접속사 ‘바브’를 반의 접속사(‘그러하오나’)로 번역합니다. 하지만 이전 시행들에서 시인은 원수들의 음모와 우정을 약속한 친구의 배신을 호소했기에 ‘그러하니’, ‘단연코’ 내가 보복할 수 있게 해달라는 간청의 기도를 강조하려는 의도로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면 이처럼 강력하게 하나님께 보복을 간청해도 괜찮습니까?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과 배치되지 않습니까? 본문의 ‘되갚아주다’에 해당하는 기본형 동사 ‘샬람’의 강조능동형의 뜻은 ‘끝내다’, ‘완결하다’, ‘회복하다’라는 뜻을 포함합니다. 이 때문에 ‘되갚아주다’라는 표현은 긍정과 부정의 의미를 모두 포함한 중의적인 말입니다. 따라서 이는 시인이 악에 대한 보복을 선으로 갚겠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물론 시인이 어떤 방식을 원하는지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자기 억울함을 끝내고 완결시키길 바라는 간절함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찬양 받으시길(11-13)

성도들은 인간의 삶과 긴밀히 함께하시는 하나님꼐서는 영원하시고 광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악인들에게 시달리는 왕중에도 믿음의 시야가 좁아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또렷한 분별력과 뿌리 깊은 신앙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신뢰를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11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12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13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11-13)

 

원수 갚음을 탄원했던 시인은 자신감에 차 있습니다. 당당합니다. ‘이것으로 나는 당신이 나를 기뻐하심을 알았습니다/왜냐하면 나를 향해 내 원수가 승리를 외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11). 시인은 하나님 기꺼이 자기를 받아들이셨음을 확신이 합니다. 더군다나 병상의 시인을 비방하고 거짓을 유포했던 원수는 물론 가까웠던 사람에게 배신을 경험한 시인의 고통과 호소를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이것이 전제되었기에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음을 압니다. 또한 원수 갚음이 어떤 방식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기꺼이 수용하시고 기뻐하셨다면 보복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식이었을 것입니다. 억울함에 몸서리치면서도 선을 행할 능력이 없으면서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기에 가능하지 않았습니까. 시인의 이어지는 말에서 그것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질병의 고통보다 더 처절한 조롱과 배신의 아픔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이제 나의 온전함 중에 당신이 나를 붙드셨고/당신 앞에서 내가 영원히 서게 되었습니다’(12). 시인은 당당하게 ‘나의 온전함 중에’라고 말할 만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온전함’은 신앙적인 고결함과 마음의 깨끗함을 뜻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든든한 후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나의 온전함 중에 당신이 나를 붙드셨습니다.’ 이 말, ‘베툼미타마흐타’에는 비슷한 자음 글자들의 조합이 만들어낸 언어유희가 활용되었습니다. 시인은 ‘항상’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있습니다. 죽음의 위협을 넘어 온전히 하나님 임재 앞에 사는 현실의 감격을 고백한 것입니다. 시인은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해 선포합니다. 시인의 마지막 외침은 아멘, 곧 ‘틀림없이!’입니다(참조, 시 106:48). 41편이 1권의 마지막이기 때문에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마무리하는 후대의 편집적인 의도가 엿보이는 시행입니다. 이 마지막 외침은 질병과 배신의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믿음으로 견뎌내고 하나님과 회중 앞에서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높이며 찬미하는 모든 신앙인의 외침입니다.


그동안 삶에 있어서 숱한 이기와 적대를 물리치고 주께서 어떠한 환대와 은혜를 베푸셨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환대와 은혜가 필요한 이들에게 다가가 주께서도 흡족하실 마지막 복된 발자취를 남겨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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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40-01)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시편 40편 1-17절


 

밀폐된 공간만큼이나 위험한 것이 밀폐된 시간입니다. 1시간에 30%만 공기를 갈아쥐도 감염위험이 20분의 1로 떨어진다는 세계보건기구의 실험 결과처럼, 우리에게도 숨죽이며 보낸 시간에 새 노래를 불어넣을 환기가 필요합니다. 저마다의 밀폐된 시간 속에서 마침내의 시간을 주실 주를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 40편은 찬양과 탄식이 어울려 새롭게 하나님의 도움과 구원을 갈망하는 기도입니다. 불확실성으로 넘쳐나는 현실 세계에서 주님의 인애와 진리를 회중 가운데서 선포하고 보호해주시기를 간청하며 미래의 기쁨을 내다보는 시입니다. 무엇보다 시 전체는 감사, 예배초청, 말씀, 찬양, 그백과 간청, 확신이 언어들이 어울려 개인과 예배공동체의 구원의 긴박성과 심각성을 알립니다.

 

[찬양] 하나님의 구원 찬양과 예배(1-11)

우리는 때로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하곤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 할 때마다 지은 죄가 생각나 숨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은 오히려 주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인자와 진리로 자신을 항상 보호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1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2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3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4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5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6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7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8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9내가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10내가 주의 공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감추지 아니하였나이다 11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1-11)

 

하나님께서는 기다리며 부르짖는 자에게 마침내의 시간을 안겨주십니다.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지시는 시간, 반석 위에 세우시는 구원의 시간 말입니다. 나아가 우리로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선포할 시간을 허락해 주십니다.

 

(1) 하나님의 응답과 구원 찬양(1-3)

 

시인은 개인적인 구원 경험을 고백하며 노래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내게 기울이사 도움을 구하는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1). 길고 긴 기다림은 어두운 현실을 견디는 믿음의 표시입니다. 시인은, 그가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셨다고 합니다(2ab). 그러니까 시인은 ‘황폐한 웅덩이’와 ‘수렁’, 곧 생명을 위협하는 늪이나 진흙탕에서(렘 38:6) 하나님께서 건지셔서 죽다 살아났습니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 깊은 구덩이와 온통 진흙탕이어서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은 죽음의 땅, 죽은 자들의 세계에 대한 비유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시인은 그가 나의 발을 반석 위에 세우시고 나의 발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다(2cd)고 말합니다. 수렁과 반석이 서로 대비되고, ‘일으켜 세우셨고’와 ‘견고하게 하셨다’라는 두 개의 동사가 서로 어울려 더 이상 생명을 위협하는 늪에 빠지지 않도록 완벽하게 구원하신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새노래를 내 입에 두셨으니/곧 우리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라/많은 이들이 보고 두려워할 것이요/여호와를 의지할 것이라’(3). 흥미롭게 ‘새 노래’(시 33:3: 96:1; 98:1; 144:9; 149:1; 42:10; 5:9; 14:3)와 찬송을 부르는 주체는 시인이지만, 새 노래를 주신 분은 여호와입니다. 새 노래와 찬송은 구원의 감격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감이며 선물인 셈입니다.

 

(2) 하나님을 의지하는 행복과 하나님의 위대하심(4-5)

 

시인은 자신의 구원 경험에서 지혜와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의 언어가 지혜 가르침을 닮았습니다. 첫 마디가 시편 1편의 첫 절로 안내합니다. ‘행복하여라 여호와를 간직한 사람은’(4ab). 행복한 사람은 여호와를 ‘의지하고’(개역개정) 삽니다. 이는 여호와를 향한 그의 확신을 마음에 보물처럼 ‘간직한’ 사람을 뜻합니다. ‘행복한’(시 1:1; 32:1; 33:12; 렘 17:7) 사람에 대한 묘사는 계속됩니다. 교만한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지 않고, 거짓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4cd). 오만하고 교만한 자들, 허위와 거짓과 기만에 치우친 자들은 거짓된 힘에 휘둘림을 당하게 됩니다. 행복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여호와를 간직한 사람은, 곧 행복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의 행적을 찬미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두고 ‘많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많음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많습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 당신이 행하신 비범한 일들이’(5ab). 시인은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많은 일을 열거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당신의 생각이 많아, 내가 하나하나 열거하여, 자세히 말하려 해도 못한다. 그 일들을 내가 자세히 말하기에는 너무 많다’ (5cdef). 이처럼 시인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행적과 업적을 말로 다 할 수 없음을 ‘많다’라는 형용사를 반복하면서 강조합니다.

 

(3)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와 성실과 구원 선포(6-11)

 

이제 시인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 곧 예배가 무엇인지 말합니다.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에게 모세를 통해 주셨던 희생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은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않으셨고,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않으셨음을 내 귀에 들려 주셨습니다(6). 짐승을 죽여 바치는 희생제물의 제사를 전면 거부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는 오용된 예배에 대한 비판이며, 형식적인 제사보다 순종의 가치를 강조한 것입니다(참조, 출 15:26; 삼상 15:22; 시 50:8-14; 암 5:21-22; 미 6:6-8). 이후 시인의 말은 해석하기 까다롭습니다. ‘내가 여기 왔다. 나에 대해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다’(7). 두루마리 책은 아마도 신명기 17:24-30에 기록된 왕의 자격과 임무를 기록한 이른바 ‘왕의 규례’일 가능성이 큽니다. 곧이어 시인이 ‘법’에 대해 말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나의 하나님’을 부르며, 당신이 기뻐하시는 것 행하기를 내가 기뻐하고 당신의 법이 내 마음 가운데 있다고 합니다(8). 이는 하나님의 법, 곧 ‘토라’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마음 판에 새겨진 ‘새 언약’(렘 31:33)과 오래전 모세가 언약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라고(신 6:6) 했던 고별설교를 떠올리게 합니다. 또한 시인은 많은 회중 가운데서 ‘의’를 알렸고, 내 입을 다물지 않겠다고 다짐할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 여호와 당신이 알고 계신다며 호소합니다(9). 이뿐만 아니라 시인은 하나님의 ‘공의’, ‘성실’, ‘구원’을, 그리고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를 많은 회중 가운데서 숨기지 않고 모조리 다 말했습니다(10). 여기 열거된 다섯 단어들은 시인 개인의 경험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에게 행동으로 보이시는 은총입니다. 시인은 여호와를 부르면서 당신의 긍휼을 거두지 마시고 당신의 인자와 진리로 항상 지켜주시기를 간청합니다(11). 시인은 하나님의 은총과 관련된 단어들을 나열함으로써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의 성품이 철회되지 않고 발휘되어야 함을 강하게 촉구합니다.

 

[탄식] 재앙에서 나를 구하소서(12-17)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 속에 어떤 바람이 있는지 이미 다 아십니다. 하나님을 어려워하며 예의를 갖춘 모습을 보이기보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 앞에 마음을 토하십니다. 본문을 통해 다윗이 대적들의 수치와 낭패를 당하게 해 달라는 기도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12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 13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14내 생명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는 다 수치와 낭패를 당하게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는 다 물러가 욕을 당하게 하소서 15나를 향하여 하하 하하 하며 조소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놀라게 하소서 16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17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12-17)

 

시인은 시련과 죄책에 사로잡힌 시간을 용서와 구원의 시간으로 바뀌 주시길 기도합니다. 자신의 죄에 지치고 타인의 조롱에 상처 입은 시간 속으로 찾아와주시길 간구합니다.

 

(1) 죄의 고백과 은총을 간구(12-13)

 

시인은 갑자기 다가올 위기를 예측한 것처럼 말합니다. 시인은 많은 재앙과 머리털처럼 많은 죄악들이 자기를 둘러싸고 덮쳐 낙심한 상태입니다(12). 11절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와 진리가 떠나지 않기를 촉구했던 이유입니다. 시인은 다시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는데, 이때 첫마디는 독특합니다. ‘나를 기뻐해 주소서’(‘은총을 베푸사’, 개역개정). 이 말은 자기를 친구처럼 기쁘게 맞이해주시기를, 호의적으로 다뤄주시기를 간청하는 말입니다. 더군다나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13b)라는 말에서 절박한 상황이 짐작됩니다.

 

(2) 생명을 해하려는 자들로 인한 탄식(14-15)

 

하나님께 ‘속히 나를 도우소서’(13b)라고 호소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시인은, 나의 목숨을 찾아서 공모하여 해하려는 자들, 나의 비참함을 기뻐하는 자들이 있음을 밝힙니다. 그러니 이들이 모두 수치와 낭패를 당하고 물러가게 해주시기를 호소합니다(14). 시인은 이들의 악의와 조롱의 심각성을 전달하려고 그들의 웃음을 표현하는 의성어(‘하하 하하’)까지 흉내 내며 고통의 생생함을 표현합니다. 이들이 자기들의 수치로 공포에 떨게 해주시기를(15) 청합니다.

 

(3) 여호와를 찾는 자들의 구원(16-17)

 

시인은 방향을 바꿔 자기를 해하려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당신을 찾는 모든 이들은 당신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16). 또한 시인이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 많음을 선포한 것처럼(5), 하나님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여호와는 위대하시다’라고 지속적으로 말할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16b). 소절 사이의 평행관계에서, 기쁨과 즐거움은 여호와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삶의 태도이며 방식입니다. 1인칭 발화자 ‘나’를 반복하는 절실함은 애잔하면서도 아름답습니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니/나의 주님(아도나이)은 나를 생각하시는/나의 ’도움‘이시며 나를 건지시는 분입니다/나의 하나님, 지체하지 마소서!’(17) 구약에서 가난과 궁핍은 비천함과 비참함을 대표하는 말입니다. 극도로 비참한 상태를 호소하는 시인은 하나님께서 지체하지 않기를 간청했고(13), 여전히 즉각적인 하나님의 개입을 바라며 구원의 긴박성을 아룁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만이 비참함에서 건져주실 구원자라는 사실과 사태의 심각성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무수한 죄라도 용서해주실 하나님의 너그러움이 간절한 때가 있습니다. 억압된 시간에 쉴 만한 자유를 주실 주님의 손길이 간절한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시간이 하나님의 구원과 연결되어 있음을 의심하지 말고 새 노래로 마침내 주실 시간을 기다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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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5-03)


권위를 존중하는 공동체

사도행전 15장 22-35절


 

예루살렘 교회의 성숙함이 드러나는 본문입니다. 모교회로서 안디옥 교회에 찾아온 교리적인 혼선을 지혜롭게 해결하는데, 회의 결과를 통보하는 장면에서도 성숙함이 묻어납니다. 우리 교회도 이렇게 성숙하고 뭄위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 예루살렘 교회는 야고보의 제안을 한마음으로 받아들였고, 이 결정을 전달하기 위해 유다와 실라를 선택하여 안디옥으로 보냅니다. 이들은 특사의 자격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 사항이 담긴 편지를 가지고 수리아 지역의 교회들을 방문합니다. 안다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을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복음으로 인한 평안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유대주의자들 때문에 어려웠던 안디옥 교회는 제자리를 찾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대표자를 보냄(22)

살면서 판단하고 선택해야 하는 상황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가치관과 인생관에 따라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바로잡기 위해 시시비비를 가리기를 선합니다. 그러다 보면 관계는 깨지고 공동체는 혼란 가운데 분열됩니다. 왜 이와 같은 시도가 안 좋은 결과를 낳겠습니까? 사도들은 정죄보다 위로와 격려로 교회를 세워 갔습니다.

 

22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22)

 

예루살렘 교회는 야보고의 제안인 이방인들에 대해 어떠한 유대인들과 구별 없이 받아 들리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안디옥 교회에게 전달하기 위해 사절단을 보내는 과정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사도행전 15:4은 바울과 그 일행이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고 기록합니다. 사도행전 15:6은 이방인의 율법 준수와 관련된 문제를 사도와 장로들이 중심이 되어 논의했다고 알려줍니다.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안디옥 교회로 보낼 사람을 선택하고 결정했음에 대해 언급합니다. 종합하면, 누가의 기록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의사결정 구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려줍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회중과 지도자의 역할이 잘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22절은 예루살렘 교회가 대표단을 선출하는 과정이 안디옥 교회가 선교사를 세워서 파송했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이는 예루살렘 교회가 전체 회중의 의견을 최대한 수렴하려고 노력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를 논의함에 있어서 회중의 역할은 어느 정도 제한되고 있었다는 점 또한 흥미롭습니다. 23절에서 안디옥 교회로 편지를 보내는 주체는 사도와 장로로 제한됩니다. 이런 의사결정 구조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이었습니까? 서로에 대한 신뢰가 그 바탕에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일반 회중이 지도자를 신뢰하지 못하거나 지도자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으면 이러한 결정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반대로 지도자들이 회중을 존중하고 배려하지 않으면 진행하기 힘든 의사결정 구조입니다. 초대교회는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갈등이 생겼을 때 그 갈등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음을 보여줍니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여기에 있습니다. 부르심을 따라서 알맞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모일 때 교회는 본연의 모습을 갖게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교회 안에서 영향력이 있는 인물들을 택하여 안디옥 교회로 보냅니다. 그곳에서 야고보의 권위를 사칭하는 자들을 상대하려면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사회적으로도 준비된 지도자들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누가는 그들을 일컬어서 정확히 인도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22절에서 갑자기 새롭게 등장한 단어지만, 예루살렘 교회에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마무리 짓고 안디옥교회와 그곳의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려고 합니다. 이 일을 위해 인도자들 가운데서 사람들을 택하여 파송합니다.

 

이방인들을 향한 편지(23-29)

모세의 율법과 하례 문제를 두고 베드로와 야고보는 인간적, 정치적 판단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하나님의 뜻과 성령의 인도하였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찾아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그들이 표준으로 삼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3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24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25-26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며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27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28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29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23-29)

 

유대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아직까지도 유대교처럼 할례와 율법 준수를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대해 24절이 시사하고 있는 바는 매우 큽니다. 개역개정이 ‘마음을 혼란하게 하다’라고 번역한 구절의 원어적인 의미는 ‘영혼을 약탈하다’입니다. 이는 유대주의자들에 의한 공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어떤 의미에서 유대-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열심과 열정을 따라 복음을 이해하고 가르쳤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정은 이방-그리스도인들이 영혼을 약탈당하는 것 같은 고통을 겪도록 만들었습니다. 진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어떤 태도로 사람들의 영혼에 접근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할례를 지키고 유대교 전통을 따르라는 요구가 큰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와 유대주의자들의 논쟁은 얼마 되지 않은 초대교회의 기초를 뒤흔들 수도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24절은 누가가 유대주의자들의 위협에 대해 매우 강경한 어조로 책망하는 장면입니다.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24-26절은 예루살렘 교회의 매우 성숙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첫째, 형제 교회의 어려움이 자신들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된 후에 예루살렘 교회가 보이는 태도는 매우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적어도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에 대해 어느 정도의 책임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24). 둘째, 예루살렘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후하게 평가함으로써 안디옥 교회를 존중하고 있음을 충분히 보여줍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생명을 아끼지 않은 사람으로 묘사합니다(26). 셋째, 예루살렘 교회는 ‘만장일치’로 야고보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만장일치는 원어적인 표현이라기보다는 의역에 가깝습니다. ‘마음을 같이했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는 유대주의자들을 지지하는 소위 바리새파에 속한 유대-그리스도인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회중이 야고보의 결정에 동의하고 따르기로 결정한 것은 참으로 성숙한 결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8절은 이런 성숙한 태도의 원인이 ‘성령’이심을 말한다. ‘성령과 우리’라는 표현에 주목해봅시다. 이는 그들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성령이 역사하셨음에 대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물론 사도행전 15:6-21까지 진행된 회의의 진행과정에서 성령에 대한 언급이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독자의 입장에서 약간 당혹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성령이 이 모든 과정에 개입하여 함께하셨다고 선언합니다. 초대교회가 직면한 신학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이 있었고, 이에 대한 지도자들과 성도들의 순종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교회였다는 증거는 안디옥 교회를 배려하는 그들의 마음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28절의 요긴한 것들이라 부득이한 혹은 불가피한이란 의미입니다. 이는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에 아무 짐도 지우지 않기를 원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안디옥 교회를 최대한 배려하고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비록 그늘이 네 가지 금지조항을 정해서 안디옥 교회에 전달했지만, 그것은 형제 된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을 배려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금지 조항들은 적극적 인 요구사항이라기보다는 이방-그리스도인들의 부담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다독여주는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편지를 받은 안디옥 교회(30-35)

잘못 적용된 말씀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아픔이 되기도 하지만, 올바로 선포된 말씀은 교회를 하나 되게 하고 성도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회복시킵니다.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로 어수선해진 초대교회가 예루살렘의 선한 결정으로 질서를 잡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결정된 결정문을 가지고 이방인 중심인 교회 안디옥교회로 내려가서 위로해 줍니다.

 

30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31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32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33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34(없음) 35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30-35)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한 바울과 바나바, 유다와 실라는 안디옥에 도착합니다. 먼저 그들은 안디옥에 내려가 안디옥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루살렘에서 결정된 내용이 담긴 편지를 읽어 주었습니다. 오늘날처럼 통신이 발달되었다면 즉시 알았겠지만, 그런 상황도 아닌 데, 그 동안 안디옥 그리스도인들은 회의 결과를 얼마나 노심초사 기다리고 있었겠습니까! 아마 큰 병인 줄 알고 검진 받고, 담당 의사가 검진 결과를 발표해 주는 날 환자의 긴장보다 더 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회의 결과에 편지가 열릴 때, 그들은 숨이 머질 정도로 긴장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가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유대인과 동등하다는 결과가 읽혀지는 순간, 이 소식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뛸 듯이 기쁜 소식이 이었고,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31). 이제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용이하게 되었습니다. 이 결과의 편지는 안디옥을 거쳐 다른 수많은 이방 교회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누가는 예루살렘 교회가 보낸 편지를 안디옥 교회가 읽고 그것을 위로로 받아들였다고 기록합니다. 이런 해석은 몇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 예루살렘 교회가 우월적인 위치에서 안디옥 교회를 대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둘째, 비록 네 가지 금지 조항들에도 불구하고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이 옳지 않은 것으로 증명되었다는 점입니다. 셋째, 이 모든 과정이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쁨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32절은 어려움을 겪은 형제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유다와 실라는 ‘여러 말’로 안디옥의 형제들을 권면하고 굳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여러 말’이란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이 이루신 모든 사역을 의미할 것입니다.

누가는 유다와 실라를 ‘선지자’라고 소개합니다. 그의 부연 설명은 그들의 말이 단지 인간의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려움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마음을 견고하게 만듭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유대주의자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던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을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했다는 사실은 시사한 바가 큽니다. 그들은 모든 사역을 마치고 파송된 예루살렘 교회로 돌아갑니다(33).

 

그리고 안디옥에 남은 바울과 바나바는 그곳에서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계속해서 주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합니다(35). 신학적인 걸림돌이 제거된 후 교회가 복음 전파에 힘을 얻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이제 이방인들에게도 유대인들과 동등하게 더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파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아름다운 교회와 성숙한 사도들로 빚어냅니다. 예루살렘 사도들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정직함과 겸손함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녹여주는 결과였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뜻을 바르고 정화하게 분별하며, 더욱 더 방황하는 형제들에게 위로를 전할 수 있는 성도로 더욱 성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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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5-02)

 


새 시대를 여는 공동체의 결정

사도행전 15장 12-21절


 

요즘 네비게이션은 기능과 성능이 좋아서 길을 벗어나면, 바로 검색해서 새로운 길을 가르쳐 줍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업그레이드를 시키지 않으면 오래된 길을 가르쳐준 경우가 있습니다. 새로운 길로 가면 계속해서 끝까지 옛길만을 가르쳐줍니다. 많은 성도들이 오래된 네비게이션처럼 이러한 실수를 범합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옛날 습관에 젖어서 자기 고집대로 잘못된 길을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새로운 조언을 해주면 싫어합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성도들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내려놓고, 항상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구하고 날마다 새로운 길을 따라 살아갑니다. 초대교회는 새로운 전기(轉機)를 마련해서 복음 사역의 넓은 길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바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려야 하느냐는 문제였습니다.

 

 

  • 베드로의 연설 이후,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 앞에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는지를 보고합니다. 교회는 잠잠히 그들의 보고를 들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가 나섰습니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된 것이 선지자 아모스의 예언과 일치함을 강조합니다. 동시에 이방인들이 최소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불편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이 논쟁을 끝내려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보고(12)

하나님 나라의 역사나 개인의 역사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께서 순간순간마다 동행하고 일하시고 계시다는 임재의식과 동행의식이 꼭 필요합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행할 일에만 집중하고, 사람들의 찬사와 사람의 시선만 집중하면 하나님께서 소외되십니다.

 

12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12)

 

앞에서 바리새파 그리스도인이 주장을 듣고 난 후, 베드로가 반박했습니다. 그에 대한 결론적으로 ‘10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고 책망했습니다.

 

베드로의 연설은 예루살렘 회중을 잠잠하게 만들었습니다. 본문에 청중들이 ‘가만히 있어’라는 의미는 ‘말하기를 멈추다’ 혹은 ‘침묵하다’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논쟁적인 회중을 침묵하도록 만듭니다. 서로가 날카롭게 대립하는 심각한 논쟁에서 적절한 대응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논쟁 당사자들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후에 회중이 바울과 바나바의 간증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던 이유는 베드로의 연설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연설에는 성령께서 역사한 일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이어 이제 바나바와 바울은 이 기회를 포착해서, 1차 선교여행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방인 가운데 성령께서 행하신 일들의 증거를 제시 합니다. 그것이 표적과 기사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라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행하신 사역을 보고합니다. 이러한 보고까지도 예루살렘 회의 참석자들은 모두 조용히 이 이야기를 경청하였습니다. 아마 바나바와 바울의 보고 중에는 유대인들이 얼마나 적대적이었으며 교만하고 악했는지에 대해서도 말했을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방인들의 마음을 여시고 그들에게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셨는지에 대해서도 보고했을 것입니다.

본문은 바울과 바나바의 간증과 보고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들의 간증은 베드로의 간증과 거의 일치했을 것이며, 베드로가 이미 내린 결론에 대해 보충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3장 이후로 유일하게 바나바의 이름을 바울 앞에 둡니다. 이는 아마도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나바의 위치와 영향력 때문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선교의 장벽을 허무는 것은 소통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방인 선교’를 보고합니다. 그리고 보고를 받은 유대인 성도들은 하나님이 이방인을 얼마나 아끼시는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소통하지 않으면 선교의 상승효과를 높일 수 없습니다. 어렵고 힘든 문제일수록 더욱 소상하게 공동체와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공동체와 함께 소통해야 할 선교 사역의 현안들은 무엇입니까?

 

야고보의 연설(13-21)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 공동체라는 의미는 서로 의견이 달리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근근거로 합의를 이루어가며, 서로 합의되어진 뜻은 서로 수용하고 협력해서 사역해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13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15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16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19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20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라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21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13-21)

 

이 본문은 세 가지 장면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장면은 논쟁에 개인하는 야고보의 출현합니다. 야고보는 베드로의 연설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내면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할 준비 합니다. 두 번째 장면은 야고보의 구약 인용이고, 세 번째 장면은 야고보가 첨예한 논쟁의 종지부를 찍으면서 결론을 내리는 부분입니다.

 

⑴ 베드로를 지지하는 야고보(13-14)

 

바나바와 바울의 보고가 끝나자 바로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 사도가 등장합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예루살렘 박해가 심해서 사도들까지도 모두 피했을 때, 예루살렘 교회를 지키며 성도들을 양육하면서 지도자로 부상했을 것입니다. 그는 회의를 결론짓는 듯한 권위 있는 발언을 합니다.

 

야고보가 베드로의 연설 내용만을 언급하는 것은 매우 지혜로운 행동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이방인들의 율법 준수와 관련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대척점(對蹠點)에 서 있는 성도들이 상당수 있었습니다(5). 게다가 바울과 바나바는 이 논쟁의 당사자들이었습니다.

 

야고보는 먼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어떤 결론이 나더라도 형제 공동체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논쟁의 당사자들을 직접적으로 지지하기보다 예수의 수제자로서 존경받는 베드로의 입장을 회중에게 상기시킵니다. 이는 다른 입장에 있는 성도들을 배려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교회의 지도자로서 최대한 중립적인 입장에 있음을 알리려는 행동으로 보입니다. 야고보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배려하여 매우 지혜롭게 행동합니다.

 

야고보는 고넬료 사건을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이방인은 구원을 받았지만, 초대교회에서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은 공식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자기 백성으로 취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이방인 중에서 늘 선택 받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제 이방인이 선택 받았습니다.

 

이방인이 선택 받은 이유는 ‘자기 이름을 위할’이라고 소개합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이방인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돌보셨다’는 ‘심방하였다’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고넬료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심방하신 사건입니다.

 

야고보가 이 문제를 어떤 관점에서 보고 있는지를 잘 설명해줍니다. 야고보는 회중에게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장면을 떠올려보라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⑵ 구약을 인용한 야고보(15-18)

 

야고보는 베드로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구약 아모스 9장 11-12절까지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이는 최종적인 결정에 앞서 성경의 권위에 호소하는 ‘엘람머비누’ 방식으로 보입니다.

 

11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12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아모스 9:11-12)

 

야고보는 베드로에게 일어난 사건들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약속의 성취임을 강조합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은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하신 내용들이었습니다. 야고보는 구약을 인용함으로써 베드로의 경험과 자신의 결정이 성경과 일치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야고보의 모습은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속한 지도자의 자격입니다. 지도자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진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성경을 통해 문제를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⑶ 야고보의 최종 제안(19-21)

 

마지막 부분에서 야고보는 자신의 의견을 정리하여 결론을 제시합니다. 야고보는 ‘내 의견에는’라고 말했지만, 단순히 자신의 생각만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은 최종 결정권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의견과 판결 사이에 강한 주장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통해 초대교회 안에서 어떻게 리더십이 작동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사도들과 장로들이 서로 상의해서 결정하는 것을 보면, 어느 한 사람의 의견에 따라서 좌지우지 되는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나 베드로의 말이 권위 있게 다가오는 것은 보면, 누구나 인정하는 권위 체계는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인 리더십이 있어야만 공동체는 건강할 수 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야고보의 결론은 베드로와 견해와 같습니다. 야고보의 지혜로운 표현은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19)라는 구절입니다. 야고보는 이방인들의 입교 시에 유대인의 전통을 요구하는 것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는 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는 어느 정도 절충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제시합니다. 또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만 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상실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비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준수할 네 가지를 준수하도록 제안 합니다. 그 네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상숭배’와 ‘음행’, ‘목매어 죽인 것’과 ‘피 자체를 멀리할 것’입니다.

 

야고보가 요구한 네 가지의 금지 조항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정결의식과 관련된 정체성의 문제였지만, 이방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야고보는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절충점을 찾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을 활짝 열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요구됩니다. 따라서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당연히 지난날의 방식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야고보는 이 점을 분명히 했던 것입니다.

 

야고보의 금지 조항 네 가지가 윤리적 삶의 개선과 관계되어 있다는 분석은 야고보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우상숭배는 이방 신전에서 이루어졌고 음행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원인이었습니다. 또한 목매어 죽이는 방식의 도축으로 인해 피가 고기 안에 남아있던 당시의 풍습을 생각할 때, 피를 멀리하는 것은 적어도 동물에 대한 윤리적 소비를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야고보의 제안은 이렇게 해석될 수 있다. ‘우상숭배, 음행, 살해를 삼가고 다른 사람들에게 받기 싫은 대접을 너도 다른 사람들에게 하지 말라.’ 야고보는 할례와 다른 유대교의 의식들을 지키는 대신에 윤리적 명령을 요구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삶의 방식에 있음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조건들이 자신을 우월하게 만들거나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정죄하는 이유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초대교회가 서로 다른 생각을 모아가는 과정을 보면서, 자신의 교회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 다른 생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실천하는 공동체입니다. 말씀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은 말씀을 통해, 말씀이 다루지 않는 것은 성숙한 회의를 통해, 주님의 뜻이 성취해 가야 합니다. 생각이 달라도 한 형제와 자매로 좋은 하나님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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