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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20-02)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이스라엘

출애굽기 20장 18-26절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깊은 기도와 묵상으로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 모세의 인도로 산기슭에 모여 하나님께 직접 십계명을 들은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말씀 전달의 중재자로 나서 달라고 요청합니다. 모세는 백성들을 안심시키면서 왜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강림하셨는지를 말해줍니다. 모세를 ‘통해서’ 언약의 말씀, 곧 ‘언약서’라 불리는 언약 법전(20:22-23:31)이 주어집니다. 십계명이 부여된 후, 모세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이 더욱 견고해집니다.

 

하나님의 강림하심(18-21)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하지만, 그분은 또한 경외와 존경을 받아야 할 거룩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죄를 멀리하고자 하는 동기가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경외심은 우리의 신앙 생활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18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19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20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21백성은 멀리 서 있고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가니라(18-21)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두려워하며 모세에게 중재를 요청했고, 모세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백성들은 멀리 서 있었고, 모세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1) 두려워하는 백성들(18-19)

 

피조물이 하나님의 존전에 서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거듭 드러내신 것을 열 재앙과 홍해 도하를 통해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 아래에서도 하나님의 임재와 현현이 얼마나 두려운지 경험합니다. 산 정상과 그들이 서 있던 장소 간에는 거리가 꽤 멀었는데도 시내산 위의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공포심은 극에 달했습니다. 하나님의 강림에 나무가 흔들렸고 땅이 요동쳤습니다.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도 그 임재 앞에서 다리가 떨리며 오금이 저립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모세에게 간곡히 중재를 요청합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말하십시오. 우리가 들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지 말게 하십시오. 우리가 죽을 것입니다”(19). 간청을 담은 히브리어 문장의 뉘앙스는 매우 애절합니다. 동시에 화자(話者)의 결연한 의지가 담긴 의지법동사(cohortative)인 “우리가 들으리이다”(니쉬마아)에서는 말씀을 경청에 대한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2) 중재자 모세의 격려와 시험(20-21)

 

모세는 그들을 안심시키면서 하나님께서 왜 강림하셨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들을 시험하기 위해 오신 것이며, 그분을 두려워하여(경외하여) 죄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시험’에 관해 어떤 사람은 ‘시험하다’의 동사 ‘나소트’를 ‘(두려운 영광을) 경험케 하다’ 혹은 ‘단련시키다’로 해석하자고 제안합니다. 필자는 르비딤에서 백성들이 하나님을 ‘시험’한 것처럼(17:1-7), 이제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백성을 ‘시험’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백성들은 불평을 터트리며 하나님의 보호의 약속을 시험한 반면, 하나님께서는 장엄한 현현과 능력을 보여주시며 그들의 순종 약속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장엄한 임재와 경고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경계선을 지키고 두려워하며 모세를 통해 응답합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19). 백성들의 강력한 중재의 호소를 들은 모세는 백성을 멀리 두고 흑암, 즉 먹구름 속으로 하나님을 만나러 갑니다(21). 중재자 모세의 역할이 더욱 중대해지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여기에 나타난 ‘두려움’(야레)이란 단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공포심과 경외심입니다. 해밀턴은 두려움의 감정적 측면과 의지적 측면을 구분합니다. 백성들은 감정적 두려움은 버리고 의지적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초자연적 현상 앞에서 두려워한 것이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감정적 공포심이라면, 순종의 결단을 하게 하는 것은 의지적 경외심입니다. 하나님의 압도적인 현현과 십계명을 반포하시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들은 백성에게는 이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하며 요동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단순히 공포에 사로잡혀 벌벌 떨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여호와 경외는 계명 준수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 자체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진정 두려워해야 합니다.

 

언약서의 서론적 명령들(22-26)

우리의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하며, 어떤 다른 우상이나 세속적인 것들이 우리 예배의 중심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때, 세상의 다른 가치나 우상들을 배제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우리의 마음과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마찬가지로, 외적인 요소보다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22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 스스로 보았으니 23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나 금으로나 너희를 위하여 신상을 만들지 말고 24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 25네가 내게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26너는 층계로 내 제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22-2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고, 흙으로 단순한 제단을 쌓아 겸손하고 순결한 마음으로 예배드릴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제단을 장식하거나 계단을 사용하지 말라는 지시는 예배의 외형보다 진실한 마음이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1) 우상을 만들지 말라(22-23)

 

모세가 받아온 것은 ‘언약서’, 즉 언약의 책이었습니다. 이것은 구약 최초로 율법들을 모아놓은 법전인데(20:22-23:33), 그 공식 명칭이 24:7에서 “언약서”로 명명됩니다. 이 언약서의 법들이 하나씩 나열되기 시작합니다. 언약서의 첫 번째 지시는 우상 제작 금지와 합법적인 토단과 돌단의 제작 규정입니다. 이것은 십계명과 더불어 언약 백성에게 최초로 주어진 용법들입니다. 의미 있게도 언약서는 십계명의 제1, 2계명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언약서의 율법들은 십계명이 여러 분야에 확장되어 적용된 것들임을 암시합니다. 한편, 금과 은으로 제작한 신상들이 금지되는데(23), 이것은 분명히 나중에 나오는 황금 송아지 제작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2) 토단과 돌단의 규정(24-26)

 

● 토단과 돌단의 정체

여기서 제단과 관련하여 몇 가지 문제가 제기됩니다. 우선, 성막(성전)의 제단이 아닌 이 제단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구약은 여러 곳에서 이런 합법적인 제단들의 존재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습니다(출 20:23-26; 레 26:31; 신 27:4-8). 분명 현재의 토단과 돌단은 조각목과 놋으로 제작한 성막/성전의 제단이 아닙니다(출 25:1-8). 한편, 제단 형태와 관련하여 어떤 사람은 토단과 돌단이 별개라고 말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돌단은 토단에 돌이 섞인 형태라고 말합니다. 신명기 27:4-8에는 돌단만 나타나고 토단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그러나 출애굽기의 토단/돌단과 신명기의 돌단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잠정적인 임시 제단으로 보이지만, 신명기는 분명히 에발 산에 짓도록 명령된 고정되어 있고 규모가 있는 공적인 돌 제단입니다. 따라서 토단과 돌단은 별개 양식의 제단이었을 것입니다.

 

● 자연석이 사용된 제단

토단과 돌단이 별개였든 혼합된 형태였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다듬은 돌, 정으로 손질한 돌이 사용되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그것이 가나안의 제단 형식이었기 때문에 금지되었다고 하나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에 의해 가나안의 제단들도 자연석 그대로 사용되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사람 손이 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것이 여호와 앞에 바쳐지고, 원형이 보존되는 것을 가치 있게 보는 사례들이 자주 나타난다. 첫 열매와 첫 새끼의 헌물, 멍에를 메지 않은 소(민 19:2; 신 21:3: 삼상 6:7), 처녀성의 간직, 흠 없는 짐승들, 아마도 제단을 위한 자연석의 요구는 이러한 신학적 배정이 깔려 있을 것이다. 화려했던 성막/성전과 달리 토단/돌단은 매우 단순하고 간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어떤 여호와의 제단이든 '내 이름을 기념하는 그곳에 임재하시어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신다(24절). 하나님의 임재를 위해서는 화려하고 장엄한 제단과 초라해 보이는 제단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다.

 

● 제단의 계단 구축 금지

층계로 제단에 오르지 말라는 명령에는 충계 구축 금지가 암시되어 있습니다(26): “층계로 내 제단에 오르지 말라.” 성막(성전)에 설치된 제단을 오를 때와 내성소 안에 입장해서 직무를 수행할 때 제사장들이 속옷을 입어야 한다는 규정이 나타납니다(출 28:42-43;레 6:10). 이것은 직무 중에 무심코 발생할 수 있는 하체 노출이 여호와를 욕되게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제사장이 제단에서 내려온다는 진술들이 등장합니다(레 9:22). 이것으로 볼 때, 제단에 계단이 아닌 경사로가 마련되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에스겔 43:17은 종말론적 성전에서 제단의 “충계는 동쪽을 향하게 할지니라”라고 규정합니다. 에스겔 성전에는 그 외에도 여러 계단들이 존재하는 등(겔 40:22,26,31,34,37,49) 제사장이 직무를 수행하는 성전 내에 층계 시설물이 허용되고 있습니다. 일단 이것은 전혀 달라진 성전 모형의 설계 도면임을 고려해야 합니다. 물론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본 성전 도면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경외심과 순수한 예배의 중요성을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단순하고 겸손한 제단에서 예배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예배는 외형보다 마음의 정결함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며, 겸손하고 순결한 자세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위한 바른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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