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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5-02)

 


거듭된 바울의 재판에 하나님의 섭리

사도행전 25장 13-27절


 

눈에 보이는 법만 지키려는 세상 사람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거룩한 법을 지키는 자들의 삶은 존경받을 만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도 인정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은 세상에서도 바른 사람을 살아갑니다.

 

  • 바울은 신임 총독 베스도에게 재판을 받으면서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항소할 것임을 천명했습니다. 베스도가 이를 수용했지만, 당장 로마로 보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베스도는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자신을 예의 차원에 방문했을 때, 바울에 관한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이 기회로 아그립바 왕 앞에 서게 되고, 예수님께서 바울을 부를 때 하셨던 말씀처럼 세상 임금 앞에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바울의 무죄를 인정한 베스도(13-22)

 

하나님의 복음에 강렬한 체험을 한 사람, 말씀의 깊은 은혜를 받은 사람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담대하게 나갈 수 있습니다. 상황 속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13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14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15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16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17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18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19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20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21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22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13-22)

 

본문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재판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 의해서 고발당해서 가이사랴에서 2년 이상이나 미결수 상태로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그립바 왕과 총독 베스도의 만남을 통해 바울이 다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1) 총독 베스도를 축하하려온 아그립바(13-15)

 

분봉왕 헤롯 아그립바 왕은 총독 베스도의 부임을 축하하기 위해 가이사랴를 방문합니다. 이때 베스도는 바울 사건을 아그립바 왕에게 이야기 합니다. 이 ‘이야기’는 예상과 다르게 자세합니다. 그래서 마치 예루살렘 방문, 가이사랴 재판이 본 이야기의 서막처럼 보입니다.

이곳에 등장한 ‘아그립바’ 왕은 헤롯 아그립바 2세(주후 50-93년)로, 헤롯 아그립바 1세(주후 41-44년)의 아들입니다. 그의 아내 ‘버니게’는 아그립바의 여동생인(13), 철저하게 친로마적인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때 베스도는 바울의 소송 문제로 고만하고 있었습니다(14). 바울이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했기 때문입니다. 베스도는 황제에게 보낼 고소장에 죄목을 적어야 하는데, 마땅한 죄목을 찾지 못했습니다. 바울에 대한 소송은 로마의 실정법으로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유대인의 종교에 관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스도는 유대인의 종교를 잘 알고 있는 아그립바왕에게 조언을 구하려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다수의 힘으로 총독 베스도를 압박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소당할 만한 죄를 저지르지 않았지만, 유대교 지도자들은 배신자 바울을 정죄하고 고소했습니다(15). 베스도 입장에서 그들의 요구를 쉽게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법과 양심이 아닌 힘의 논리에 재판이 좌우되고 있습니다.

 

(2) 예수님 때문에 고소당한 바울(16-19)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실정법을 어기면서까지 바울의 제거를 요구했습니다(16). 바울은 로마 시민으로서 로마법에 의해 정당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판단으로 바울을 넘겨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바울을 심문한 베스도는 바울이 로마 실정법을 위반한 일이 없음을 알았습니다(18).

유대인의 고발이 결국 유대교 문제에 관한 다툼임을 파악한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께서 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시며 부활하시고 살아 계심을 전했습니다. 유대인은 이러한 바울의 주장에 분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고소한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고소당한 것입니다.

 

(3) 핍박 중에도 하나님의 뜻(20-22)

 

하나님께서 이미 바울을 부르실 때부터 예수님께서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9:15)고 소명을 주셨습니다. 바울을 특별히 택하셔서 이방인들과 여러 왕들과 유대인들에게 주의 이름을 전하기 위해서 택한 그릇이었습니다. 이처럼 그는 총독과 왕들 앞에서 복음을 변호하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변호해야할 자리에서 자신보다 복음을 위해 변호합니다. 이러한 위대한 바울 사도의 모습을 보면서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의 대화를 통해 바울과 복음에 대한 영향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벨릭스를 대신해서 베스도가 새로운 총독으로 부임했을 때, 당시 유대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아그립바 왕이 새로운 총독에서 인사하려 가이사랴로 찾아왔습니다. 수일동안 인사와 교제를 하고 있을 때, 베스도가 아그립바에게 바울의 소송 문제를 끄집어냅니다.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황제에게 상소하지 않았다면 총독 베스도는 아마도 바울을 유대인에게 넘겼을 것입니다(21). 빌라도처럼 다수의 요구에 따라 바울을 그들에게 넘겨주고 적당하게 타협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 섬(23-27)

우리가 전하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사람들에게 흠 잡히지 않으려면 우리의 삶에 흠 잡힐 만한 일들이 없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해서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며 종종 전도의 현장에서 어쩔 수 없이 만나는 일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깨끗한 양심과 정결한 삶 가운데 간직되어 있다가 우리의 깨끗한 양심과 정결한 삶 가운데 간직되어 우리의 거룩한 인격의 통로를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23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24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25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 26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27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23-27)

 

베스도는 진리나 인권에 자신의 목숨을 거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베스도에게 바울의 사형을 요구했습니다(24).이들이 영적으로 얼마나 깊은 어둠에 빠진 상태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가운데서 다시 부활했다는 바울의 주장이었다. 바울이 성전을 더럽혔다는 혐의는 문제의 핵심에서 사라지고 부활이라는 주제가 문제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되었다. 베스도는 부활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는 바가 없었고 어떻게 부활이라는 주제가 고발의 대상이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표명한다. 그러나 사실 이 사건의 핵심은 바울이 예수의 부활을 전했기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근본적으로 부활을 부인하고 바리새인들은 모든 자들의 최종 부활을 받아들이지만 예수의 부활은 수용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스도는 이 사건의 핵심이 유대인들의 신앙과 관련이 있고, 구체적으로는 예수라는사람이 죽었는데 다시 살아났다는 바울의 주장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베스도는 예루살렘에서 바울 건에 대한 재판을 열것을 제안한다. 사도행전 25:9에 나타난 그의 제안의표면상의 이유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였다.그러나 베스도는 아그립바 왕과의 사적인 대화에서자신이 이 제안을 하게 된 동기는 피의자를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망설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무죄 판결을 내려 피의자를 석방하기를 꺼렸기 때문에 그가 망설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바울은베스도 총독의 제안을 거부하고 로마 황제에게 항소하기로 결정한다. 누가는 바울이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주기를 호소했다'고 기록한다. 바울은유대인들로부터 로마 정부가 자신을 보호해주기를 원했으며, 로마의 최고 사법 기구가 자신에게 무죄 판결을 내려 자신의 신앙을 자유롭게 표출하고 전파할 수있도록 해주기를 원했다.

 

아그립바 왕은 자기도 바울의 진술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원한다는 뜻을 전합니다. 이 사건에 대한 아그립바 왕의 관심은 아마도 지금까지 진행된 이야기를 베스도로부터 전해 들으면서 생겼을 수도 있지만, 이미 소문을 통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수도있다. 베스도는 아그립바 왕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그립바 왕은 예수를 면담한 헤롯 안티파스처럼(눅 23:8) 이 사건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튿날 바로 바울을 면담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 자리에는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뿐만 아니라 천부장들과 도시의 고위 인사들도 동석합니다.

 

곧이어 바울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비록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이 자리에 서게 되었지만, 누가에게 그는 주인공과 같은 인물입니다.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바울은 이 자리에서조차도 가장 중요한 인물인 것입니다. 바울은 누가복음 21:12의 예언을 성취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21:12에서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가려니와”라고 하신 말씀과 사도행전 9:15의 예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인물로 바울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총독 베스도는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는 자”로 바울을 소개합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가 ‘유대의 모든 무리’를 대표하는 것처럼 과장되게 묘사합니다.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를 제외하면 모두 유대인이 아닌 청중에게 베스도는 자신의 소견으로 바울은 사형에 처할 만한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밝힙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항소하였으므로 그를 로마로 보내기로 결정했다고 덧붙입니다.

베스도는 26절에서 바울을 아그립바 왕을 비롯해 여러 고위 인사 앞에 세운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는 이 심문을 통해 바울을 로마 황제에게 보낼 때 피고인에 대한 죄목을 좀 더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는 증거와 자료를 얻으려 한다고 말합니다. 죄수를 보내면서 혐의가 없다는 보고서를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일입니까? 그 역시 자신의안위만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사명자의 삶에도 무수한 위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명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함께 하는 동료가 있고,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여 결단하는 마음이 있다면 마침내 사명을 완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사명을 완수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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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5-01)

 


후임 총독 베스도에게 재판 받은 바울

사도행전 24장 24절 - 25장 12절


 

미국 장기 베스트셀러로 [아직도 가야할 길](M.스캇 펫)에 유명한 문장인 ‘삶이란 문제의 연속이다.’라는 있습니다. 사람은 평생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문제를 해결해서 한 고비 넘기면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에게는 허락하신 문제를 통해 항상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은 알 수 있도록 하십니다. 바울은 끝임없이 많은 문제들을 만났지만, 그것들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진짜 문제는 그 문제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도하신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할 것입니다. 바울에게 많은 문제들이 자신을 성숙시켜 주는 도구로 쓰임 받았던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는 그 사람을 성숙하게 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 베스도는 총독으로 부임했습니다. 아그립바 왕이 총독 베스도에게 문안하려 오자, 베스도는 바울의 소송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이튿날 베스도는 아그립바와 친부장들과 성의 높은 사람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한 사실과 황제에게 보고할 바울의 죄목이 없음을 말합니다.

 

바울을 면담한 총독 벨릭스(24-26)

복음을 듣는 사람은 대부분 변화가 일어납니다. 포악했던 강도가 순한 사람으로, 두려움에 쌓였던 사람이 담대한 사람으로 그리고 무기력한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듣는다고 모두 변하는 것 아닙니다. 총독 벨릭스를 통해 변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24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들 25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26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24-26)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은 바울을 살해하려고 했지만, 예루살렘을 관할한 천부장 루시아를 통해 구출하여 총독 벨릭스가 있는 가이사랴로 압송되었습니다. 바울을 넘겨받은 총독 벨릭스는 재판하였지만, 그에게서 별다른 죄목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을 의식해서 계속 바울을 구금시켜 두었습니다. 바울은 그 상태에서도 쉬지 않고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특별히 이번에는 총독 부부에게 더욱 신나게 전했습니다.

 

(1) 바울을 불러드린 총독 벨릭스(24)

 

총독 벨릭스는 이미 바울이 전한 ‘도’를 알고 있었습니다. 천부장 루시아로부터 추가 증언을 듣겠다는 말을 실행합니다. 수일 후에 그는 자기 유대인 아내와 함께 바울을 초청했습니다. 이것은 공적인 일이 아니라 사적인 면담입니다.

 

총독 벨릭스의 세 번째 부인은 사도행전 12장에 언급된 헤롯 아그립바 1세 막내딸인 미모가 뛰어난 드리실라였습니다. 드리실라의 오빠, 아그립바 2세는 그녀를 수리아 작은 나라 에메사의 왕 아지주스와 결혼시켰습니다. 총독 벨릭스는 드루실라의 미모에 홀딱 반해 짝사랑에 빠졌고,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마술사 아트모스를 통해 그녀를 설득했습니다. 당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던 드루실라에게 남편을 버리고 자신과 결혼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녀의 나이가 16세였습니다. 총독은 아내로 드리실라 맞이하고, 그녀로부터 기독교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듣습니다.

 

총독 벨릭스 부부는 바울이 이방인 교회로부터 구제 헌금을 가지고 왔다는 것을 알고서 뇌물을 받을까 하여 바울을 자주 불렀습니다. 바울은 총독 부부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속적으로 증거 하면서 또한 의와 절제에 대해 말했습니다. 멀쩡한 남편을 버린 드루실라, 그리고 벌써 세 번이나 결혼한 것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것이란 메시지도 전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석방을 좌우하는 최고, 권력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주의 복음을 전합니다.

 

(2) 복음을 들은 총독 벨리스 부부(25)

 

바울은 벨릭스와 그의 아내 드루실라가 반드시 들어야 하는 것을 말했습니다. 즉 ‘의’와 ‘절제’ 그리고 ‘장차 올 심판’에 대해 전했습니다. 바울이 전한 내용을 들은 벨릭스는 두려워했지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벨릭스는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두려운 마음이었습니다. 두려워서 복음을 받아 들릴 가능성이 생기지만, 회개까지 이르지 못했습니다.

 

(3) 복음보다는 현실을 선택한 벨릭스(26)

 

로마 대 제국 안에는 많은 총독들이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 입장에서 수많은 총독 중에 어느 총독이 유능한 총독처럼 보였겠습니까? 통치한 곳의 사람들을 억압하고 핍박하여 다스리는 지역에서 자주 반란이 일어나는 지역의 총독은 무능해 보였을 것입니다. 오히려 통치하는 지역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평온하게 다스리는 총독이 유능해 보였을 것입니다.

 

벨릭스는 세상적인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울이 무죄하다는 것을 알았고 복음으로 말미암은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세상을 향한 욕망이 더 컸습니다. 어떻게든 자기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컸던 것입니다. 벨릭스는 자기에게 뇌물을 바치고 석방시켜달라고 요구하기를 은근히 바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영혼에 위태로움을 느끼면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여전히 그 권력을 이용해서 한몫을 챙기려는 욕심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당시 총독은 죄수를 무작정 감금해둘 수도 있었고, 사법절차를 빠르게 진행해 석방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뇌물 수수는 당시도 엄연한 불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밝혀내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흔한 관례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자기 자리를 지키는 생각 밖에 없습니다.

그는 자기 책임을 유기한 채, 재판을 열지 않아서 죄 없는 바울을 2년 동안이나 감금시켜 두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바울은 자신의 진로를 알 수 없습니다. 로마에 가려고 약속했던 하나님의 약속이 잊힌 듯 보였습니다.

 

후임으로 부임한 총독 베스도(27)

무능한 지도자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망칠 수 있습니다. 지도자는 간신배들에게 끌려 다니고 상황을 바르게 보지 못합니다. 사실을 왜곡하여 불의가 판칩니다. 지도자는 판단력이 흐려서 상황과는 전혀 다른 결정을 합니다. 그 밑에 따르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중시켜줍니다. 이런 사람은 빠른 시간에 교체되어야 합니다.

 

27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27)

 

그렇게 2년이 흐른 후, 유대 지방을 총괄하는 총독이 교체되었습니다.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 후임으로 재임하게 됩니다. 로마 제국은 벨릭스의 시절에 유대인들과의 악화된 관계를 수습하기 위해서 베스도를 그의 후임으로 보냈습니다.

 

신임 총독 베스도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기록 외에 다른 역사적 기록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전반적으로 베스도는 벨릭스보다 좀 더 공정한 정치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은 2년 정도로 그리 길지 못했습니다. 27절에서 누가는 2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여전히 구금 상태에 있다고 밝힙니다. 벨릭스는 재임 기간 안에 미결 사건들을 종결지을 수도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유대인들과의 관계를 고려해 바울을 석방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는 그 이유를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라고 밝힙니다. 유대인들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은 자신이 로마로 돌아간 이후 자기에게도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방문한 베스도(25:1-5)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지만, 구원을 받기 위해 예수의 이름을 부를 만큼 자신에 대해, 세상에 대해 절망한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세상 즐거움을 다 버린 사람들,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을 수 있는 갈채를 거절한 사람들은 의로우신 하나님으로부터 의의 면류관을 선물로 받습니다(딤후 4:8).

 

1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2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3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러라 4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멀지않아 떠나갈 것을 말하고 5또 이르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고발하라 하니라(1-5)

 

벨릭스는 떠나면서 바울을 풀어 주지 않았습니다. 무죄한 바울이 자유를 얻는 것보다 유대인에게 인기를 얻는 것이 그에게는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1) 예루살렘의 방문한 총독 베스도(1)

 

베스도 총독은 부임한지 삼일 만에 예루살렘을 방문합니다. 그는 유대 지방이 문제의 소지가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항상 예루살렘은 용광로와 같이 위험한 도시였습니다. 그곳에 치안 유지를 실패하면, 총독 베스도 역시 그 자리를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을 엄하게 다스리면서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지 않게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좋은 관계 맺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2) 바울에 대한 요청한 유대 지도자(2-5)

 

유대인들은 2년 동안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에 관한 사건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신임 총독 베스도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총독에게 유대인의 민원을 넣습니다. 가장 크게 생각하는 문제는 바울 문제였습니다. 바울을 고소했는데 자신들이 요구한데로 재판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들은 가이사랴에 있는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속셈이 있었습니다. 지난번 계획처럼 대복해 있다가 길에서 죽이려는 음모를 구미고 있었습니다.

 

총독 베스도는 전임 총독에서 바울을 인수인계를 받았을 것입니다. 전반적인 바울에 대한 상황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쉽게 내주지 않습니다. 원칙대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대신 유대 지도자들이 가이사랴로 내려오면, 바울 문제에 대해서 재판하겠다고 합니다.

 

가이사에게 상소한 바울(25:6-12)

정치인들의 의사결정은 다수결의 원칙을 사용합니다. 한 두 사람의 의견보다 다수의 의견을 이루어줄 때 통치가 수월해 집니다. 그래서 소수의 의견은 무시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수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소수에게도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신임 총독 가이사도 다수의 의견을 따라서 정치를 해나가고 있습니다.

 

6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은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7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한지라 8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9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10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11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 대 12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6-12)

 

바울은 일찍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을 방문한 후, 로마까지 방문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가 있습니다(19:21). 이 계획은 바울의 개인적인 바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이었습니다(23:11). 신입 총독인 베스도는 바울에 대한 사안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해 당혹스러워했습니다. 그래서 소송할 장소를 유대인들이 요구한 것처럼 예루살렘으로 바꿀 의사가 있는지 물었지만, 바울은 이를 거절하고 로마에 있는 황제 가이사에게 가겠다고 말합니다.

 

(1) 재심된 바울의 재판(6-8)

 

새로 부임한 총독 베스도는 인사 차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8-10일을 보내고 다시 가이사랴로 돌아옵니다(6). 다음날 곧 바로 공식적으로 바울에 대한 재판을 재계합니다. 전임 총독 벨릭스가 차일피일 미룬 재판을 신임 총독 베스도가 곧장 재개한 이유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 때문입니다.

 

총독 베스도는 바울을 재판정으로 불러드립니다. 예루살렘 유대인들은 공식적인 재판을 통해 다시 한 번 바울을 기소할 기회를 얻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재판이 이루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내려옵니다(7). 유대인의 종교법과 로마의 실정법 모두를 고소 사유로 언급했습니다. 기존의 고소 사유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로마의 실정법까지 추가해 로마인인 재판장을 설득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객관적인 증거에 의해 바울을 고소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한 가지 바울을 제거해야 한다는 전략적 목적에 맞추어 고소 사유를 덧붙였습니다. 그러니 증거가 있을 리 없었습니다(7). 주장만 있고 증거는 없습니다. 적개심만 있고 사랑하는 마음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세월이 2년이나 흘렀지만,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오직 나사렛 이단인 바울을 죽이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모습은 전혀 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혈안이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의 부죄는 명백한 것이었지만, 원고 측은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거하려 했습니다. 바울이 눈엣가시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버울을 죽이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부활이 계속 전파되어 본인들의 이권이 침해하리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바울을 고소한 것은 결국 복음을 방해하고 차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 대항해 스스로 변호하는 바울의 태도를 보시길 바랍니다(8). 그는 유대인들을 욕하거나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무죄함을 역설했을 뿐입니다. 복음의 가치와 힘을 알았기 때문에 복음을 훼방하는 자기 민족이 언젠가는 복음을 받아들이길 간절히 바랐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기소에 대해 다시 한 번 자신의 무죄를 변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는 유대인들의 율법을 어긴 적도 없고 성전을 더럽힌 적도 없다며 무죄를 호소합니다. 그리고 로마의 범도 어긴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2) 다음 장소로 예루살렘을 제안(9-10)

 

베스도의 경우는 바울보다 유대인들에게 호감을 가져야 통치가 쉬어 집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라’(9)고 기록합니다. 여기서도 벨리스의 재판 때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무죄 판결로 석방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베스도 역시 벨리스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재임 초기에 유대인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최종적인 판결을 유예합니다.

 

베스도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 받을 것을 제안합니다. 일의로 결정할 수 있지만, 바울이 로마 시민이기 때문에 배려 차원에서 묻는 것입니다. 당연히 바울은 유대인들의 궤계를 짐작하고 단호하게 베스도의 제안을 거절합니다(10). 베스도의 제안은 예루살렘에서 재판하면 몇몇 산헤드린 공회원을 재판의 자문 위원으로 두겠다는 의미였습니다. 당시 로마 법정에서도 재판장은 판결을 돕기 위한 자문 위원들을 두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배심원과 같은 역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되면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거부합니다. 바울의 이러한 요구는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3) 가이사에게 상소하는 바울 (11-12)

 

바울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11)고 표명합니다. 로마 시민의 마땅한 권리입니다. 이 말은 순간적으로 떠오른 말이 아니라 지난 2년 동안 구금 기간 동안에 준비한 제안일 것입니다. ‘로마에 가서도 증인이 될 것이라’(23:11)는 예수님의 약속을 한 순간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가이사랴나 예루살렘에서는 승소할 가망성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가이사께 상소한 것입니다. 상소는 공식적으로 로마 시민에게 어떤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황제에게 상소할 수 있습니다(12). 이것을 법정 전문용어로는 프로 보카티오(provocatio)라고 부릅니다. 프로보카티오는 판결이 이미 내려진 후에 항소하는 아펠라티오(appelatio)와는 다른 절차입니다. 과거에 전자는 공직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판결을 내렸던 반면, 주후 1세기에 이르러서는 황제가 이 판결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이 아니라 로마에서 황제 가이사 앞에서 재판을 받겠다는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생각이었습니다. 사역을 해 나가면서 무조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주변 상황을 고려하여 스스로 선한 결정하길 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명을 따라 움직이는 자입니다. 그 부르심에 순종할 때, 감옥이든지 광장이든지, 환영을 받든지 거절을 당하든지, 그 자리가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요 자유의 자리임을 믿는 자들입니다. 복음에 사로잡히고 사명에 사로잡히는 증인으로 살 때 가장 행복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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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4-02)


총독 벨릭스 앞에서 변호하는 바울

사도행전 24장 10-23절


 

복음을 전하는 길은 꽃길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때를 얻던지 못얻던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유대인은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모함하고 무고했습니다. 없는 사실을 만들고 증거를 왜곡하고 조작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가해지는 박해는 교묘하고 악랄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한 죄로 고소당했습니다.

 

  • 거짓 변호사 더둘로는 사도 바울을 벨릭스 총독 앞에서 짜맞추기식 고소의 모든 내용이 끝났습니다. 바울은 더둘로의 발언 구조를 따라 차분하면서도 논리정연하게 사실이 아님을 변론합니다. 고소 내용에 대한 증거나 증인도 없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변증합니다. 벨릭스는 천부장이 올 때까지 재판을 연기합니다.

 

세 가지 고소에 대한 반박(10-20)

「나는 정직한 자의 형통을 믿는다」란 책에 보면, ‘정직하면 항상 손해 본다. 그러나 결국 정직 때문에 흥한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당신은 살아가면서 정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복음 증거자들은 억울한 일을 만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왜곡된 사실로 모함을 당할 때, 간사한 불의 앞에 좌절하지 말고 바울처럼 당당한 태도로 변호하시길 바랍니다.

 

10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 11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이틀밖에 안 되었고 12그들은 내가 성전에서 누구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 또는 시중에서 무리를 소동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13이제 나를 고발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들이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14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15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16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17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18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그들이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19그들이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고발하였을 것이요 20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10-20)

 

총독 벨릭스 앞에서 재판은 계속 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재판에서 유대인들의 고발에 적극적으로 대처합니다. 그의 증언에는 변호사 더둘로와 반대로 일체의 아첨이나 간사함이 없습니다. 사실을 논리적으로 대처하고 있습니다.

 

(1) 소요와 선동에 무고함을 변증함(10-13)

 

예루살렘에 가이샤라로 후송해 온 후, 예루살렘에서 고소했던 사람들이 내려와서 정식 재판이 이루어집니다. 총독 벨릭스는 유대인들은 유대인 측 변호사 더둘로로부터 바울에 대한 고발 내용을 모두 들었습니다. 고소 내용을 모두 듣고 난 후에, 이제 바울에게 신호하여 변론을 듣기 원합니다.

바울은 총독 벨릭스의 허락을 받아 변론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변론하는 모습은 변호사 더둘로와 같이 아첨이나 장황한 거짓말로 총독의 환심을 사려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짧지만 예의를 갖춰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라고 인사합니다(10). 실제로 벨릭스는 약 서기 52년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유대 총독으로 파견되어 유대-시리아 전체 주 총독으로 5년을 다스렸습니다. 그는 총 8-9년 동안 유대 민족의 사안을 다루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시간 동안 유대를 통치하면서 유대에서 일어난 일들은 많이 재판했기 때문에 공정하게 재판할 것이란 정도 인사를 전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고발한 사람들에 대해 흥분하지 않고 매우 절제된 언어로 진실에 입각하여 변론을 시작합니다. 바울은 벨릭스 통독과 무리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증명합니다. 그는 자신을 향한 고소가 사실이 아닌 증거들은 담대하게 피력합니다.

 

첫째 증거는,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이틀밖에 안 되었고’(11)라며,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지 12일이란 기간 동안 소요를 조직하기에 부족한 시간입니다. 7일 동안 나실인의 결례를 행하고 있었고, 나머지 5일은 로마군 구금되어 있었습니다. 더 나가서 자신을 고발한 유대인들 중에 자신이 누군가와 변론하거나 회당 또는 성내에서 무리를 소동케 하는 것을 목격한 증인이 없다고 합니다(12). 그들이 고발한 대로 불법을 행하거나 공중을 선동하지 않았으니 재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유대인들이 고소 사유에 대한 증거를 제시할 수 없다고 항변합니다(13). 여기까지 더둘로의 고소 항목 중 소요 선동죄에 대한 반박이었습니다. 이것은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가 편지에 써 보낸 내용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그들의 고소가 거짓됨을 증명했습니다. 그는 거짓 증언에 감정적으로 대처하지 않았습니다.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대처했습니다.

 

(2) 바른 신앙을 소유함(14-16)

 

다음으로 바울은 신앙적인 부분으로 이어갑니다. 이 말 중 ‘이단’이란 말만을 취하고 나머지는 매우 긍정적으로 확장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라고 당당하게 고백합니다. 그는 이단이라고 하는 그 도를 믿고 있다고 주저 없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은 유대인들과 조상들이 믿었던 하나님과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성경, 같은 신앙이라고 강조합니다(14). 만일 한 하나님과 한 성경을 믿는다면, 한 신앙의 내용을 가질 것입니다. 그 조상이 믿었던 메시아, 그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란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가리키는 그림자였던 구약과 율법 그리고 선지자들이 전한 말을 다 믿고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15)라고 구약에서도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했는데, 이제 예수님을 통해 의인과 악인의 부활, 그리고 그 후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자신도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열두 사도들과 바울의 일관된 주장입니다(17:18; 눅 24:26-27, 44).

바울은 이것을 ‘그들이 이단이라 부르는 도를 따르는 것’이라고 말하며 복음이 새로운 ‘길’에 대한 계시인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과 원리, 즉 잃어버렸던 길이요, 율법과 죄로 덮인 정통 신의 회복이라는 주장입니다.

 

그의 결론은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라는 것입니다(16). 나아가 그는 자신에게 주신 계시, 하나님을 섬기는 새로운 길, 이스라엘의 소망에 대해 ‘하나님과 사람을 향해 항상 다치지 않는 양심으로 노력한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자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노력한다’(ασκέω)라는 말은 ‘수고하고 분투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이 온전한 양심의 분투 중 가장 최근 일을 소개합니다.

 

(3) 성전 모독죄에 대한 반박과 역고소(17-20)

 

바울은 자기 민족 유대인의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사람이 아니라 유익을 주는 사람입니다. 그 증거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방문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는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18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그들이 보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17b-18).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목적은 전체 이방인 교회에서 모금한 구제금을 전달하기 위해서였습니다(20:1-4; 고전 16:1-4). 그는 이방인 교회들에게 오해를 받으면서라도 구제헌금을 모아서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려고 왔습니다. 바울 서신들을 보면, 헌금하는데 잡음이 안 날 수 없습니다. 자기 쓰려고 헌금을 모은다고 하는 비난을 들으면서 까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비를 모금해서 찾아왔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했던 일은 구제 헌금을 전달하고 결례를 행한 것뿐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아무런 소동 없이 결례만 행한 것을 그들도 보았습니다.

물론 바울이 방문한 목적인 내적으로는 이방인과 유대인 교회가 ‘하나 됨’이라는 신학적 목표가 있었지만, 기근에 처한 유대 교회를 구제하는 일이 일차적인 목적이었습니다. 그는 신학을 객관적인 사실에 담았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한 벌 더 나가서 사건의 발단은 아시아에서 온 어떤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19그들이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고발하였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18b-20)라고 말합니다. 진짜로 고소 내용을 들어야할 사람들은 고발한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란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소동케 하려고 했던 일이 있다고 하는데, 그들이 직접 이곳에서 와서 증언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없고,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이 증거나 증인도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발한 사람들이 고소해 놓고 재판에 출두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아 항의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당당한 사람은 아무도 이길 수 없습니다. 폭행을 하고 구금을 하고 협박할 수 있지만, 이길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힘을 사용해서 겁박하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은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은 고소를 포기하거나 취소하는 것으로 ‘데스티소치오’라고 불렀습니다. 로마법은 고소를 포기하는 원고에게 엄격했습니다. 아시아계 유대인 고소자들이 법정에 출두하지 않는 것은 고소 철회를 뜻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소요죄와 성전 모독죄로 고소당했는데, 고소인은 성전 모독죄에 대해서는 입증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아시아계 유대인들이 소송을 철회했을 때, 바울은 확실히 제시할 수 있는, 법률상 성립하는 반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역고소입니다.

 

소송 처리를 연기함(21-23)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고 믿습니다. 죽음 후에는 영생 혹은 영벌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 믿음에 근거해 이 땅에서의 삶을 신중히, 거룩하게 살려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성경적 가치관과 다른 것을 맹렬히 비난하고 파괴하는 기독교 근본주의는 우리가 지양해야 할 태도입니다.

 

21오직 내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만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22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이르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23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니라(21-23)

 

바울은 이방인 교회들에게서 구제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왔습니다. 성전에서 소요를 일으킬 어떤 동기도 없습니다. 소동은 흥분한 율법주의자들과 유대주의자들이 일으킨 것입니다.

 

(1) 바울이 심문을 받는 이유(21)

 

바울은 결론적으로 ‘오직 내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만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라고 말합니다(21). 총독 벨릭스는 바울이 무슨 내용인 부활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총독은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화제가 되는 사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다니면서 전하고 있다는 정보는 이미 보고 받아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 공회에서 ‘나는 죽은 자의 부활로 인해 오늘 너희 앞에서 심문받는다!’라고 외친 것을 원고인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몇몇 장로들도 이미 들었습니다. 이것은 1-2차 변증의 요약이요. 바울 변증의 뼈대입니다. 바울은 죽은 자들의 부활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으며, 따라서 그의 변증은 부활에 대한 증거입니다.

 

(2) 재판을 연기하는 총독 벨릭스(22-23)

 

총독 벨릭스는 여기까지 듣다가 심문을 중단합니다. 그리고 ‘연기’합니다(22). 이 ‘연기’는 법적 결정을 연기하는 일을 뜻하는 전문용어입니다. 그러면서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면 너희에 관한 일을 처결하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통해 루시아의 증언이 필요한 것 외에는 바울의 혐의가 무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풀어주어야 마당한데도 대수의 유대인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시간을 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총독 벨릭스는 바울이 소요를 선동했는지 여부를 루시아가 증언할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벨릭스 치하에서 후속 재관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총독 벨릭스는 바울을 예우했고, 친구들이 바울의 편의를 돌보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형이 확정되지 않는 로마 시민의 합당한 대우를 받은 것입니다.

이런 표현들을 하나님께서 바울을 계속적으로 도와주시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수이지만 죄수가 아닙니다. 그는 로마까지 미결수 신분으로 갈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략이었습니다. 복음 앞에서 당당한 사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양심을 깨끗하게 지킨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지키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사명자의 삶에도 무수한 위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명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함께 하는 동료가 있고,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여 결단하는 마음이 있다면 마침내 사명을 완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사명을 완수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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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4-01)

 


총독 벨릭스 앞에 선 바울

사도행전 23장 31절-24장 9절


 

어둔 세상은 진리의 빛을 미워합니다. 어둠은 어둠의 방법과 과정으로 또 하나의 어둠을 만들어 냅니다. 바울을 고소하는 자들도 증거와 증인들 대신에 거짓과 선동에 능한 자를 데려왔습니다. 그들이 바울을 고소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 로마 경비대의 경호를 받은 바울은 무사히 가이사랴에 도착합니다. 천부장의 편지를 받은 총독 벨릭스는 바울에게 출신지를 묻고 분봉왕국 출신이 아님을 확인 후 바울의 기소 사건을 맡기로 결정하고 바울을 헤롯 궁에 구금할 것을 명령합니다. 닷새 후 재판이 시작되고 대제사장 측 변호사 더둘로는 총독 앞에서 바울을 기소합니다. 그러나 그의 기소는 지나치게 아부적인 발언만 넘쳐날 뿐 바울의 혐의를 입증할 만한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바울이 가이사랴에 도착(31-35)

때로는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의 마지막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당장에는 재앙이나 시련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돌아가며 막히는 듯 보이는 길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당신께서 원하시는 길에 우리를 인도하실 것을 믿고 항상 주님만을 의지하여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31보병이 명을 받은 대로 밤에 바울을 데리고 안디바드리에 이르러 32이튿날 기병으로 바울을 호송하게 하고 영내로 돌아가니라 33그들이 가이사랴에 들어가서 편지를 총독에게 드리고 바울을 그 앞에 세우니 34총독이 읽고 바울더러 어느 영지 사람이냐 물어 길리기아 사람인 줄 알고 35이르되 너를 고발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리라 하고 헤롯 궁에 그를 지키라 명하니라(31-35)

 

천부장의 지시로 시작된 로마 군대의 바울 호송작전을 준비했습니다(23). 준비된 작전이 이제 31절에서 다시 재개됩니다. 누가는 백부장 두 명에게 야밤에 출발할 경비대를 준비하라는 천부장의 지시를 언급한 후 여섯 절을 할애해 천부장이 벨릭스 총독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을 기록합니다(25-30).

 

(1) 안디바드리에 도착함(31-32)

 

해가 저물고 밤 9시경(밤 제 삼 시) 예루살렘을 출발한 경비대는 다음 날 아침 안디바드리에 도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안디바드리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60킬로미터 떨어진 도시입니다. 목적지까지는 절반을 넘게 갔습니다. 밤에 신속하게 행진을 강행했다면 불가능하지는 않는 거리입니다. 보병들이 예루살렘의 위험한 지역을 벗어난 후에 영내로 되돌아왔을 것이라 추정한다면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안디바드리는 가이사랴에서 남쪽으로 약 40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했습니다. 그러니까 목적지까지 절반 넘게 간 것입니다. 안디바드리에서 보병은 다시 예루살렘 영내로 되돌아오고 가아사랴까지 나머지 40킬로미터 정도는 기병이 바울을 호송하기로 했습니다. 이 지역은 이방인들이 거주하는 곳이므로 음모자들의 공격으로부터 안심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1:8-17에 의하면 약 2주 전 바울과 그 일행은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누가도 이 여행의 동행자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그 여정에서 지금과 동일한 길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온 바울 일행이 이제는 밤에 그 길을 다시 가이샤라까지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길은 단지 피신하여 간 길이 아닙니다. 이 길은 로마로 가는 긴 여정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바울은 그 길이 로마행이 될 것이란 것을 몰랐습니다.

 

(2) 가이사랴에서 바울이 총독을 대면함(33)

 

가이사랴에 도착한 기병은 바울을 안전하게 총독 벨릭스에게 넘겨주었고 천부장의 서신도 함께 전달해 주었습니다. 천부장의 편지를 읽은 벨릭스는 바울에게 로마 제국의 어느 속주(개역개정은 ‘영지’) 출신인지를 묻습니다.

만약 바울이 시리아 혹은 아나톨리아 지방의 분봉왕국 출신이었다면 벨릭스 총독은 그 지방의 분봉왕에게 먼저 자문을 구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외교적으로 올바른 절차였습니다. 이와 같이 유다 지방의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 역시 나사렛 예수가 갈릴리 출신인 것을 알고 갈릴리 지방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티파스에게 그를 보낸 바 있습니다(눅 23:6-12).

 

그러나 바울은 로마 제국의 속주인 길리기아 출신으로 로마 제국의 총독인 벨리스가 이 사건을 외부 자문 없이 직접 다룰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벨릭스는 바울을 기소하는 고소인들이 도착하면 고소 사건을 공식적으로 다루겠다고 말합니다. 그동안은 바울을 헤롯 궁에 구금할 것을 명령합니다.

 

(3) 바울이 헤롯 궁에 갇힘(34-35)

 

‘헤롯 궁’은 헤롯 대왕이 본래 자기 자신을 위해 가이사랴에 지은 왕궁이었지만, 지금은 로마 총독의 관저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은 유대인의 손에서 벗어나 로마 총독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성난 유대교 열성분자들과 자기들의 책임을 면하려는 로마인들 사이에서 바울이 이토록 차분하고 담대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는 우리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사도행전 23:11에 기록한 것 같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사도 바울처럼 상황은 비록 어려울지라도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확신과 위로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총독에게 기소(1-9)

하나님의 뜻을 알면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삶을 해석하는 안경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을 판단하는 기준도 하나님의 부르심인 소명입니다.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행복이고 삶의 의미입니다. 그것보다 더한 것이 있다면, 아마 우리는 것을 위해 살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과 죽음을 나누어 놓을 것입니다.

 

1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니라 2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고발하여 이르되 3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4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5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6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7(6하반-8상반 없음) 8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9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1-9)

 

세상은 우리보다 항상 강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자신들이 원하는 데로 그리스도인들을 잡을 수도 있고, 괴롭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상상 외로 빈약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것을 보지 못하면 힘 있는 자들에게 아부할 수 있습니다. 더둘로는 총독에게 잘 보이려고 상투적인 인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1) 더둘로가 바울을 기소함(1-2)

 

이제 바울이 구금된 지 닷새 만에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일부 산헤드린 공회원과 더둘로라 하는 변호사 한 명을 대동하고 가이사랴에 도착했습니다(1). 오늘날 법정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대변해 변호사 더둘로가 발언을 시작합니다.

누가는 더둘로의 기소 내용을 매우 간략하게 기술합니다. 그러나 더둘로는 당시의 관례를 따라 아부성이 다분한 발언을 적절하게 섞어가면서 총독에게 좋은 인상을 얻어내려고 노력합니다. 그는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평화를 누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더둘로의 아부적 발언과는 정반대로 벨릭스 총독은 유대 사회에 심각한 불안을 초래했습니다. 권력자들만 누리고 있는 나라인데, 총독이 잘해 주었다고 마음에도 없는 치사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총독으로 재임하는 기간 동안 로마 제국과 유대인들 간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유대는 불안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와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한결같이 벨릭스 총독의 무능한 통치에 대해 기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둘로는 로마가 베푸는 평화를 바울이라는 작자가 해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기소 내용을 간략하게 하겠다는 표현을 비롯해 재판관의 관용을 구한다는 발언 역시 당대 법정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내용 중 하나였습니다.

 

(2) 더둘로의 기소 내용(3-9)

 

3-4절에서 지나치게 긴 아부적 발언을 한 변호사 더둘로는 5절에서 바울에 대한 기소 내용을 간략하게 세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 바울은 전염병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바울을 상습적으로 법을 어기며 공공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소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사역을 할 때 받은 고소 내용과 흡사합니다(행 17:6-7).

당시에는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죄 혐의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면, 이번에는 암시적으로 나타납니다. 누가가 이 사실을 두 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기록하는 이유는 바울뿐만 아니라 당시 일반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시된 반역죄 혐의가 얼마나 사실과 동떨어진 것인지를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둘째, 바울은 로마 제국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선동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기소보다 내용이 더 구체적이긴 하지만, 그 근거는 역시나 매우 빈약합니다. 예를 들어 최근 유대인이 많이 거주하는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에서 민란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바울이 그 민란을 주도했다는 근거는 제시하지 못합니다. 물론 때로는 바울이 방문한 도시의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소동이 벌어지곤 했던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남부 갈라디아와 데살로니가, 고린도, 에베소 등에서 이러한 소동이 벌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떤 정치적인 의도를 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셋째, 바울이 나사렛파 우두머리라는 것입니다. 벨릭스 총독이 더둘로의 이 표현을 얼마나 잘 이해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앞의 두 기소 내용과 함께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소동을 일으키는 조직의 우두머리 정도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기서 개역개정이 ‘나사렛 이단’으로 번역한 헬라어 단어 ‘나자라이오스’는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예수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유일하게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더둘로의 기소 내용 중에서 가장 구체적이며 중요한 내용은 6절에 나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더럽히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소도 단지 소문에 의한 것이지 입증할 만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서방 사본에는 6b절과 8a절 사이에 천부장 루시아를 향해 불만을 표출하는 내용이 추가로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율법대로 재판하려고 했으나 천부장 루시아가 와서 그를 우리 손에서 강제로 빼앗아 갔나이다. 그러고는 그를 고발하는 사람들에게 각하께 가라고 명하였나이다.’

그러나 이 내용은 비록 역사적으로는 사실일 수 있지만, 사본학적 근거는 매우 빈약합니다. 후대 필사자가 본문의 의미를 분명하게 하려고 추가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약 이 추가 내용이 원문에 속했다면 8절의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은 ‘루시아를 심문하시면’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총독이 더둘로의 발언 이후에 바울의 발언을 들으려 한 것으로 보아 ‘바울을 심문하시면’의 뜻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둘로의 말에 유대인들은 확실히 제시할 만한 증거도 없으면서 자기들의 주장을 밀어붙이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독자들에게 상당히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칠 것입니다.


거짓을 드러내기 위해 거짓을 사용한다면 과연 그 의도를 신뢰할 수 있습니까! 어둠의 세상은 진리를 거짓으로 만들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쓰고 있습니다. 진리가 살게 한다고 믿기보다는 진리에 의해 자신의 거짓이 폭로되지 않아야 산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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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3-02)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 열성분자들

사도행전 23장 12-30절


 

세상은 자신이 맞고 타인이 틀려서가 아니라, 타인이 제거되어야 자신이 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인을 죽이려고 합니다. 생명이 생명답게 살아가는 것이 싫은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남을 험담하고 비판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 그리하여 남을 죽이려는 사람, 그래야 속이 시원한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유대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 바울을 잡은 데 실패한 일부 유대교 열성분자들은 바울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찾아가 바울을 영외로 유도할 것을 요청하고, 자신들은 매복해 있다가 바울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그들의 음모는 바울의 조카의 귀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천부장은 바울을 로마 총독 벨리스에게 회부하기로 결정하고 삼엄한 경비대와 함께 그를 가이사랴로 보냅니다.

 

살해 음모를 꾸밈(12-15)

악인들은 생각하는 것이 죄악입니다. 하루 종일 죄악을 모의하며 죄악을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나름 그들은 자신의 생각이 훌륭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런 오만한 자리에 안자서 악을 도모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12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13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여 명이더라 14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15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물어보려는 척하면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하더니(12-15)

 

바울은 공의회에서 일어난 큰 다툼 때문에 로마군이 주둔하고 있는 병영으로 옮겨져 보호받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말씀을 받은 밤이 지나고(11) 다음 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바울을 아쉽게 놓치게 되자 유대인들 가운데 일부 열성분자들은 그를 다시 살해할 기회를 얻기 위해 음모를 꾸밉니다. 개역개정은 ‘당을 지어’라고 번역하지만, ‘음모를 꾸며’가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이들은 40여 명이 넘는 유대인이 바울을 죽이려고 ‘암살단’을 조직했습니다. 지난 밤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이 음모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은, 이렇게 많은 유대인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음식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할 만큼 사태가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결단이 종교적인 신념에서 나오는 극단적인 경건의 표현이었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바울을 빨리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맹세에 참여한 자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찾아가 협조를 부탁합니다(14-15). 이 부분에서 ‘서기관들’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서기관들은 대부분 바리새인들이었는데 아마도 이 열성분자들은 산헤드린 공회원 가운데 자기들의 음모를 좀 더 흔쾌히 받아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간 것으로 보입니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위한 열정이고 율법을 수호하기 위한 결의입니다. 아무리 순수해도 그릇된 지식이 낳은 열정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줍니다. 바른 지식과 분별력이 없는 순수함은 사탄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고, 자기애에 사로잡힌 인간은 항상 선한 의도로 불의한 과정을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관계를 깨뜨리고 진리를 거스르는 열정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그들이 산헤드린 공회의에 바울을 죽이기로 맹세한 사실을 알리면서 공회가 바울에 대해 조사할 일이 있으니 바울을 보내 달라고 천부장에게 부탁하면 그들이 매복하고 있다가 단숨에 그를 제거하겠다고 공모한 것입니다(15). 이틀 전에 공회에서 있었던 바울에 대한 심문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분열과 다툼으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산헤드린 공회가 바울을 좀 더 철저히 조사하겠다는 것은 그럴 뜻한 명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후대 랍비 문헌에 의하면, 산헤드린 공회는 어떤 음모에도 공조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와 현실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누가는 그들이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식음을 전폐할 것을 맹세했다는 표현을 두 번 반복해 기록하면서 그들의 강한 의지를 강조합니다(12,14). ‘맹세하다’는 단순히 맹세의 의미를 넘어서 ‘저주를 받다’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음모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도 마땅하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15절은 열성분자들의 구체적인 음모 내용이 나옵니다. 그들의 음모는 산헤드린 공회가 바울을 영외로 유도하면, 몰래 잠복해 있다가 그를 살해해버리겠다는 일종의 테러 작전입니다.

 

살해할 음모가 탄로 남(16-2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계획이나 일을 막을 수 있는 권력이나 음모는 세상에 없습니다. 악인들이 음밀한 계획을 세우고 주도면밀하게 작전을 세운다고 할지라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유대 열성분자들이 은밀하게 바울을 암살 계획했지만, 단 한번 등장하지 않았던 바울의 조카에게 발각되면서 계획이 들어나게 됩니다.

 

16바울의 생질이 그들이 매복하여 있다 함을 듣고 와서 영내에 들어가 바울에게 알린지라 17바울이 한 백부장을 청하여 이르되 이 청년을 천부장에게로 인도하라 그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다 하니 18천부장에게로 데리고 가서 이르되 죄수 바울이 나를 불러 이 청년이 당신께 할 말이 있다 하여 데리고 가기를 청하더이다 하매 19천부장이 그의 손을 잡고 물러가서 조용히 묻되 내게 할 말이 무엇이냐 20대답하되 유대인들이 공모하기를 그들이 바울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을 묻기 위함이라 하고 내일 그를 데리고 공회로 내려오기를 당신께 청하자 하였으니 21당신은 그들의 청함을 따르지 마옵소서 그들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사십여 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지금 다 준비하고 당신의 허락만 기다리나이다 하니 22이에 천부장이 청년을 보내며 경계하되 이 일을 내게 알렸다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고(16-22)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은밀한 음모가 놀랍게도 바울의 조카에게 탄로가 나게 하셨습니다(16). 열성분자들이 꾸민 이 음모의 내용이 바울의 조카 귀에 들어갑니다. 이 조카가 어떻게 이 음모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고 어떻게 영내에 있는 바울에게까지 가서 알릴 수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의 조카가 이렇게 손쉽게 영내에 들어갈 수 있었다면, 바울을 살해하려던 자들은 왜 들어가지 못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감옥 상황에 대해 알려진 바에 의하면, 친인척들은 수감자가 먹을 음식이나 필요한 물건들을 비교적 자유롭게 전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단순히 하나의 우연한 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 일이 바울의 조카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흔히 말하는 우연(偶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번 일에 직접 개입하셔서 그분의 계획 하에 모든 일이 진행되는 필연(必然)임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누가가 이 단락에서 보여주려는 요지이고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일을 통해 병자를 고치시고 베드로를 옥에서 구해내시고, 바울과 실라를 옥에서 풀어주시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이루려 하실 때 언제나 이러한 기적적인 방법이나 비상한 방법만을 사용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경우와 같이 매우 자연스러운 방법을 사용해 자신의 뜻을 성취하기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늘에 나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은 참 진리입니다. 들에 핀 백합화도 친히 가꾸시고 기르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자녀 삼아주신 우리의 삶 속에서도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참된 믿음의 삶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사도행전의 추후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되겠지만, 사실 이들의 살해 음모가 바울의 조카에 의해 발각되었기 때문에 바울이 궁극적으로 로마 호위대의 보호를 받고 로마까지 가게 되고, 거기서 복음을 자유롭게 전하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열성분자들의 음모가 바울에게까지 전해지고, 더 나아가 천부장의 귀에 까지 전달되어 집니다(17-21). 천부장은 바울의 조카를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내게 할 말이 무엇이냐?’(19)라고 묻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바울이 백부장에게 지시를 내리거나 천부장이 바울의 조카를 손잡고 데리고 가는 모습이 과연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있는 것인지 의구심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아마 그는 은밀히 할 말이 있다는 말에 그는 착각했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그의 조카를 이용해서 바울을 석방하기 위한 뇌물을 주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조용한 장소로 갔을지 모릅니다. 또 한 가지는 이와 같은 살해 음모가 로마 군대의 지도부에게 중대한 사안일 수 있음을 감안한다면, 이 사실을 입수한 로마 군대가 이 사안을 신중하면서도 신속하게 처리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조카는 천부장에게 자신이 들었던 바울을 죽이려 했던 음모를 자세하게 전합니다(20-21). 바울의 조카는 그들의 음모를 꾸구체적으로 밝히면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요청을 결코 들어주어선 안 된다고 당부했습니다(21). 개역개정의 20절 번역은 다소 어색합니다. 이 구절은 ‘유대인들이 그(바울)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을 알아보기 위함이라고 하면서 내일 그를 공회로 데려와 달라고 당신에게 청하자고 합의했습니다.’과 같이 번역이 가능합니다.

 

생각 밖에 바울의 조카로부터 유대 열성분자들의 음모를 전해들은 천부장의 반응과 그의 지시를 서술합니다. 먼저 자신에게 소식을 알린 청년에게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경계하며 보냈습니다(22).

당시 로마 속주에 주둔해 있는 로마 군대의 주된 임무는 공공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으며 피의자를 사법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천부장은 조카의 말을 들으면서 이 사건을 상부기관으로 회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는 바울을 자기 선에서 석방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바울의 신변에 위협이 될 만한 상황임을 감지하고 그를 보호하기 위해 즉각적인 행동을 취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의 결과였습니다.

 

천부장이 신속하게 결정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이 바울을 석방하게 되는 경우에는 두 가지 어려운 일에 직면하게 됩니다. 첫째는, 분노에 찬 유대인들의 불만이 자기에게로 향할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바울은 로마시민권자인데, 로마시민을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죽게 되면 그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문제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을 안전하게 감금하는 편을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자신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바울의 신병을 직속상관에게 무사히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울의 신변을 철저하기 보호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음모가 발각된 사실도 숨겨야 했습니다.

 

바울을 통독 벨릭스에게 보내기로 함(23-24)

사람들은 자신의 욕심이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악한 계획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 계획일수록 철저하게 비밀스럽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방법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반대로 사용하시여 하나님의 선한 사역을 이루어 가십니다. 열성분자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것은, 결국에 바울을 로마로 가도록 하는 길을 열어 주는 결과를 맺습니다.

 

23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 삼 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과 기병 칠십 명과 창병 이백 명을 준비하라 하고 24또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로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짐승을 준비하라 명하며(23-24)

 

천부장은 이제 신속하게 바울을 가이사랴에 후송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합니다. ‘밤 제삼 시’는 오늘날로 하면 밤 9시를 가리킵니다. 그는 어두움을 틈타 바울을 가이사랴에 있는 총독부까지 무사히 보내야 합니다.

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보병 200명과 기병 70명과 창병 200명, 도합 470명이라는 경호부대가 동원되었습니다. 이 숫자는 거의 예루살렘에 주둔하는 부대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입니다. 죄수 한 명, 아니한 명을 호송하기 위해 과연 이렇게 많은 군인이 동원되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부 병력은 가장 위험한 예루살렘을 벗어나는 지점까지만 동행하고 다시 병영으로 복귀했다면, 병력의 과잉 동원과 관련한 의구심은 어느 정도 해소된다고 생각됩니다.

천부장의 입장에서 그는 바울이 체포될 당시에 로마시민을 무참히 구타한 실수를 범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뜨거운 잠가를 신속하고 안전하게 후송하는 것 상책이라고 생각했던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악행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바울은 이제 로마로 출발하고 있습니다(11).

 

천부장이 벨릭스에게 서신을 보냄(25-30)

하나님께서는 악한 음모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분입니다. 항상 우리 곁에 계시며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시면 됩니다. 악인들의 계획은 결코 하나님의 계획을 이길 수 없습니다.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은밀하고도 치밀한 계획이 실패한 이유는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 때문이었습니다.

 

25또 이 아래와 같이 편지하니 일렀으되 26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께 문안하나이다 27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 줄 들어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였다가 28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알고자 하여 그들의 공회로 데리고 내려갔더니 29고발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 30그러나 이 사람을 해하려는 간계가 있다고 누가 내게 알려 주기로 곧 당신께로 보내며 또 고발하는 사람들도 당신 앞에서 그에 대하여 말하라 하였나이다 하였더라(25-30)

 

25절을 보면 그는 죄수와 함께 편지 한 장이 전달됩니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유일무이한 세속적인 편지입니다. 물론 누가는 이 편지를 읽어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는 그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참작하고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공문 형식을 따라 로마 천부장이 작성했을 법한 문체로 편지의 내용을 작성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26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천부장의 이름을 알게 됩니다. ‘글라우디오’는 그가 로마 시민권을 취득하면서 당시 황제의 이름을 따라 지은 로마 이름이고, ‘루시아’는 그의 본래 헬라 이름일 것으로 보입니다.

 

26절의 전형적인 인사말에 이어 27절부터 30절까지 편지 내용이 서술됩니다. 편지 내용은 얼핏 보면 천부장이 이번 사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사실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중에 바울이 로마 시민임을 알게 되어 그를 구해준 것임에도 불구하고, 편지에서는 마치 바울이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에 보호해준 것처럼 쓰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편지가 대부분 일인칭 단수로 되어 있다는 점은 그가 얼마나 이 편지를 자기중심적으로 썼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아직 이 사건의 전말이 확실히 밝혀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편지의 내용은 천부장이 내린 일차적인 결론을 알려줍니다. 즉 이 사건이 형사법에 의해 처벌받아야 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 아니라 단지 쌍방 간의 신학적 견해차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부장의 결론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처음 유대인들이 바울을 기소할 때 바울에게 적용되었던 혐의는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는, 곧 당대 법에 따라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혐의는 사라지고 오로지 종교적인 문제만 남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아직 미결수이기 때문에 어떻게 로마에 갈 수 있는 길을 알 수 없습니다. 그는 어떠한 결정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로마 제국의 공권력을 도움으로 생명의 안전을 보장받도록 역사하시며, 로마까지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큰 그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계획도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뜻에 순종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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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52-01)


영원한 하나님의 인자하심

시편 52편 1-9절


 

성경은 종종 사람을 나무에 비유합니다. 특히 시편 1편은 의인을 시냇가에 심긴 나무로, 악인은 바람에 날리는 겨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편 1편의 나무와 겨의 이미지처럼, 시편 52편도 의인과 악인의 삶을 선명하게 비교하고 있습니다. 시편 52편을 통해 하나님께 뿌리를 내릴 사람들의 행복을 묵상해 보도록 합시다.

 

  • 선보다 악을 더 사랑하면서 악한 계획과 거짓을 꾀하는 포악한 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악으로 자기를 강하게 하므로 하나님께서 멸하시되 땅에서 나무의 뿌리를 빼듯 완전히 멸망시키십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는 의인은 하나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처럼 번성하게 하실 것을 확신하며 이를 감사하고 더욱 주님을 사모합니다.

 

파괴적인 악과 거짓을 꾀하는 악인(1-4)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도엑과 같이 자신의 이적인 목적을 위해 권력에 아부하며 다른 사람의 고통에 상관하지 않는 자들이 유명한 자, 힘 있는 자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언젠가 땅에서 뽑혀 나갈 날이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악인들이 영웅 대접받는 현실을 살아간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모습 앞에서 결코 낙망해서는 안 됩니다.

 

1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2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3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셀라) 4간사한 혀여 너는 남을 해치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1-4)

 

시인이 악인을 향하여 고발하는 질문을 하면서 시를 시작합니다.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포악한 자”는 히브리어의 ‘용사’ 또는 ‘강한 자’를 의역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전쟁의 무사로서 힘이든 또는 재물의 풍부함(7)으로든, 어쨌든 권세를 가진 힘 있는 자요 강한 자입니다. 그런데 이 강한 자는 자신의 악행을 자랑하는 자입니다. 말하자면, 자신의 강한 힘뿐만 아니라 그 힘과 능력으로 악을 행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이 강한 자의 악하고 교만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개역개정에서는 이 강한 자를 “포악한 자”라고 부릅니다.

 

(1) 악인에 대한 고발 질문(1)

 

악인을 고발하는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시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라고 말합니다(1). 강한 자가 힘과 악을 무기로 교만하게 세상에 영향력을 미칠 때 이에 대한 대안은 변치 않고 항상 지속되는 하나님의 사랑(인자하심)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변함없는 인자하심으로 세상을 통치하시므로 포악한 자가 힘과 악행으로 세상을 좌지우지하지 못하도록 하실 것이라는 확신의 표현입니다. 1절은 악인과 의인이 인생에서 안전이든 성공이든 무엇이든 그들이 추구하는 방법의 차이를 대조합니다. 악인은 악을 행하는 것 속에서 자신의 안전과 성공을 추구하지만, 의인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찾습니다.

 

(2) 악과 거짓을 사랑하는 악인 묘사(2-4)

 

2절은 “포악한 자”가 행하는 악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냅니다. 그가 마음속으로 파멸의 계획을 짜고 거짓말을 하여 이를 실행합니다. 거짓말로 파멸을 일으키는 그의 혀는 마치 사람에게 치명적인 해를 입히는 날카로운 칼과 같습니다. 그는 거짓의 일꾼이요. 거짓의 달인입니다. 4절에서 더 구체적으로 말해주는데, 마치 맹수가 짐승을 잡아 삼키듯 그는 사람을 삼키는 말, 즉 남을 해치고 파멸시키는 말들을 좋아합니다. 따라서 “포악한 자”라고 불렀다가 이제는 그를 “간사한 혀”라고 부릅니다. 이는 그의 인격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입니다. 거짓말을 해서 다른 사람을 파멸로 이끄는 자입니다. 그의 됨됨이를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는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바른 것을 말하는 것보다 거짓말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자입니다(3).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 거짓말로 다른 사람을 파괴하고 희생시키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갖지 않습니다. 무엇이 어떻게 파괴되든 상관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선과 악, 참과 거짓의 기준이 없습니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5)

거짓과 악한 말로 악을 행하며 해를 끼치는 포악한 자들은 일시적으로 승리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멸망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포악한 자들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확신했기에 악인의 심판도 확신했습니다.

 

5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 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셀라)(5)

 

시인은 이러한 “포악한 자”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합니다. 거짓으로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며 악행으로 이룬 삶을 자랑했던 자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을 선고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네 개의 단어를 통해 표현됩니다. 멸하고, 붙잡아내고, 장막에서 뽑아내고, 뿌리를 빼실 것입니다. 쌓아놓은 것을 산산조각으로 깨뜨리거나 무너뜨리듯 그를 완전히 멸하겠다고 하십니다. 그가 든든하게 여기는 그의 장막에서 그를 붙잡아내어 마치 맹수가 먹잇감을 갈기갈기 찢듯 그를 찢어버리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치 나무를 뿌리째 뽑아내듯 산 자들의 땅에서 제거되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말합니다. 심판의 표현들이 모두 무서운 파국을 당하되 완전하게 파멸되어 다시 회복할 수 없도록 영원히 멸망할 것을 말합니다.

 

악인에 대한 의인의 경계(6-7)

악인의 심판은 공의를 실현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아니라 다른 것을 의지하면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재물이나 자기 실력을 의지하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아이러니입니다. 그렇게 사는 교인들이 많다는 사실은 더 놀라운 아이러니입니다.

 

6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7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6-7)

 

6절과 7절에서는 “포악한 자”의 심판에 대해 확신하는 의인의 반응이 나옵니다. 여기서 의인은 시인이 속한 그룹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악인을 완전하게 멸망시키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보고 의인들이 두려워하며 경계로 삼을 것입니다. 또한 악인들의 삶을 돌아보며 인생의 교훈을 삼을 때 그의 삶이 가소로워 그를 비웃을 것입니다. 1절에서는 그를 부를 때 ‘용사’ 또는 ‘강한 자’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이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살아있을 때는 용사요, 스스로를 자랑하는 자신만만한 강한 자였으나 멸망 후에는 평범한 한 사람일 뿐입니다. 같은 어원의 단어를 사용하여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파멸을 강하게 대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악인의 삶의 특징을 살펴보면, 그는 하나님을 자기의 힘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힘”은 원어에서는 ‘피난처’의 뜻입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자신의 전 존재와 미래를 맡긴다는 뜻입니다. 이 악인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는 자입니다. 자신이 가진 돈으로 성공이든 안전이든, 무엇이든 가능하고 안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재물을 좋아하고 추구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고,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에 눈에 보이는 재물만을 추구하고 자신의 삶을 다 쏟아붓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을 파멸시키는 악행으로 자신을 강하게 하고 든든하게 지킬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물을 위해 그리고 재물을 무기로 다른 사람을 착취하고 파멸로 몰아가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악한 자에게 악이 임하고 파멸을 불러일으키는 자에게 파멸이 임합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끊이지 않고 영원히 있다는(1)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는 의인(8-9)

성도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고 공의로운 심판을 확신함으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포악한 자들이 득세하는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확고하게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같이 형통할 것입니다. 어찌 보면 세상은 모순투성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합니다. 인자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며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8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9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8-9)

 

시인은 “포악한 자”와 대조적으로 자신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시인은 절의 의인의 무리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는 의인은 하나님의 집에 심긴 푸른 감람나무와 같다고 칭송합니다(8), 감람나무는 올리브나무로 열매도 귀하지만 번성함과 긴 수명을 특징으로 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심겼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생명을 공급받는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뿌리가 뽑힌 나무와 같은 “포악한 자”와 달리 시인은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뿌리를 박고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 영원히 번성하며 삶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복을 받게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때문에 영원히 감사하겠다고 서원합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들, 곧 경건한 자들 앞에서 주의 이름을 사모하겠다고 선포합니다(9). 이름은 존재 자체를 나타내므로 주의 이름이 선하다는 것은 주님의 선하심을 말합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포악한 자”들에게 심판하실 것이라는 확신은 의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사모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호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그 이름을 지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는 두 종류의 삶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와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는 자, 선과 의를 사랑하는 자와 악과 거짓을 사랑하는 자, 그 삶이 뿌리째 뽑히는 자와 생명의 근원에 든든히 뿌리를 내리는 자가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는 다양하고 복잡한 삶의 형태가 있는 것 같으나 인생은 이렇게 크게 둘로 대변됩니다. 이런 면에서 시편 52편은 인생의 두 가지 길,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이 있으며, 그 각각의 길들의 결과를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1편의 교훈을 그대로 반향합니다. 더 나아가 이 시편은 진정한 안전과 부와 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세상에는 악한 계획을 세우고 자랑하는 강포한 영웅들이 많습니다. 그들 때문에 의인들은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낙심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영웅들은 잠시 번영하는 것처럼 보일 뿐, 곧 그 뿌리가 뽐혀 버려진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뢰하며 그분의 말씀과 은혜에 뿌리를 내리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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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3-01)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의 증언하는 바울

사도행전 22장 30절 - 23장 11절


 

‘공평(公平)’은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입니다. 모든 일을 공의롭게 이뤄나가십니다. 그런데 세상은 타락하여 이기적인 탐욕과 죄악으로 공의롭지 못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공의롭지 못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재판장들을 세우셨습니다. 따라서 재판장은 하나님의 공의와 공평을 세상에 심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재판정(裁判廷)하는 곳은 공평을 만드는 기관입니다. 모든 사람은 법 아래에서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불공정한 재판은 나라는 혼돈스러워지고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할 경우가 많습니다. 불공정한 재판은 공평한 세상을 파괴하며 불이익을 당한 사람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입니다.

 

  • 바울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자신의 소명을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이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한 것으로 인해 대제사장과의 충돌이 야기됩니다(1-5). 바울은 자신이 심문받는 이유가 부활에 관한 이슈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로 인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신학적인 이유에서 크게 충돌합니다(6-9). 예수님은 병영에 갇힌 바울 곁에 서서 바울이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함을 알리십니다(10-11).

 

산헤드린 공의회에 선 바울(22:30-23:9)

오늘날 인문학들은 인간의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고 ‘질병’이라고 어린 시절의 상처로 발생한 실수라고 합니다. 그래서 범죄한 후에 회개하기보다 억울함을 토로합니다. 그 결과로 죄를 해결 받지 못한 사람들은 두려움 속에 살아갑니다. 진실로 양심에 거리낌 없이 담대하길 원한다면 먼저 자신의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22:30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 30:1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2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3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4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5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6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7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8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9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22:30-23:9)

 

바울이 성벽에서 말한 변론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은 더욱 분노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죽이고 서야 가라앉힐 것 같았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 그것도 자신과는 달리 태어나면서부터 시민권을 가진 것을 알고는 바울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이전까지는 이 소요의 모든 책임을 바울에게 전가시키려고 했습니다. 바울한 사람만 제거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것으로 여겼습니다.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조용해지기만 기다렸던 것입니다.

 

(1) 바울의 증언과 대제사장 반응(22:30-23:5)

 

바울의 기소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천부장은 먼저 유대 군중이 격하게 반응한 이유를 파악하려고 합니다(행 22:30). 천부장은 바울에 대한 의심을 풀고 있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고발한 바울의 죄목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려고, 정식적으로 예루살렘 공의회를 열어 바울을 그들 앞에 세우고 심문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유대인이 중심이 된 정식 재판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무죄 판결을 받기 위해 재판에 참석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바울과 회집한 사람들이 모여 주고받는 공방은 사적인 영역이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 정치 지도자들, 그들의 대표들이 듣고 반응하는 역사적인 현장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소요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천부장의 요청을 받은 유대 지도자들은 바울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부각하려 합니다. 바울은 공회 앞에 서서 참석자들을 당당하게 바라보면서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그러고는 자신이 항상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회고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바울의 행위는 선한 양심에 따른 것이며 유대인들이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전에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고 확신했지만, 오히려 그때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선한 양심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즉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서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하나님의 참된 계시를 깨닫게 되자 이전의 핍박하는 삶이 아니라, 그 이후의 고난 받는 삶이 양심에 따른 행위였음을 강조합니다. 그러자 바울의 말을 듣고 있던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옆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입을 때리라고 명령합니다(2). 주후 47-59년에 대제사장직을 수행한 아나니아는 바울이 하늘의 환상을 통해서 계시를 받았다는 것과 그의 선교 활동이 선한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긴 것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아나니아를 ‘회칠한 담’(참조, 마 23:27)으로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치실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는 예수가 마태복음 23:27-28에서 율법 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경고하셨던 내용입니다. 아나니아는 자신이 율법에 따라서 심판한다고 하였지만, 바울은자신을 치라고 하는 것이 곧 율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꾸짖습니다. 이는 바울이 아나니아의 위선을 책망하는 표현입니다. 바울의 눈에는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고 확신하는 산헤드린의 구성원들, 특히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처럼 명령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어떤 점에서 율법을 어겼습니까?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자 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레 19:15). 모세의 법에 따르면 법을 어긴 것으로 고소당하더라도 죄가 입증되기 전까지는 죄인으로 취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바울이 대제사장을 모욕했다고 반응합니다(4). 그러자 바울은 그가 대제사장인 줄 몰랐다고 말합니다. 천부장의 요청으로 산헤드린 공회가 비공식적으로 모였기 때문에 아나니아는 대제사장의 의복을 입지 않았을 것이고, 바울은 그가 미처 누구인지 식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대제사장을 모욕하는 행위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으므로(출 22:28), 바울은 자신이 알지 못하고 그런 말을 했다고 인정합니다. 이는 바울이 유대의 율법과 관습을 여전히 존중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이 분노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바울이 분노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판단한다고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들의 위선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에 대해 분노하셨습니다. 위선은 영광을 얻으려고 경건한 사람처럼 보이는 행동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자신이 잘 알며 순종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태도, 즉 ‘자기기만’까지 포함합니다.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은 자기기만에 빠져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바울을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모욕하는 사람으로 정죄합니다. 우리는 바울의 담대함을 통해서 위선에 맞서는 용기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위선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얼마나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는지 분별하고 위선에 대해 분노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신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지도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지위에 스스로 속지 말고,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을 도리어 고통스럽게 하지는 않았는지 늘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바울의 분노를 통해서 위선이야말로 신앙공동체의 가장 큰 위협 중 하나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심문받는 이유가 부활이라고 주장하는 바울(6-9)

 

바울에게는 이것 역시 복음을 전할 기회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바울을 통해 전해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다시 한 번 듣고 믿을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 구성된 사실을 알고 자신은 바리새인이며 바리새인의 아들이기에,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 때문에 심문받는다고 외칩니다(6). 누가는 바울이 변호의 전략으로 부활을 사용한 것이라 묘사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유대적인 신앙이 바리새 전통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바리새인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통해 밝힙니다(참조. 행 26:5; 빌 3:5).

 

바울이 부활을 언급하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서로 싸웁니다(7). 사두개인은 부활과 천사와 영의 존재를 믿지 않은 반면, 바리새인은 이 모두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서 서기관 몇 명은 바울에게 문제가 없다고 평가합니다(8). 그들은 천사나 영이 바울에게 말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서기관들은 부활한 예수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바울이 다메섹과 성전에서 천사나 영의 음성을 들은 것일 수는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바울의 주장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명을 받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부활의 예수가 바울을 부르셨기에 부활은 소명의 이유가 됩니다. 이는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에 해당합니다. 약속된 메시아이자 구원자이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하나님께서 신원하신 사건이 예수의 부활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예수의 부활을 증언해야 합니다.

 

유대인들 앞에 변론하는 바울(23:10-11)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자기 양심에 떳떳해야 합니다. 온갖 고난에도 바울이 담대히 맞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혹시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 있다면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가시길 바랍니다.

 

10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11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10-11)

 

바울이 전한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부활신앙은 서로의 구속자가 되어 하나님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도록 힘을 부여합니다. 부활신앙은 하나님께서 죄와 시망의 세력을 이기신 것을 믿고 전진하는 것입니다.

 

두 진영 사이에 분쟁이 심해지자 천부장은 군인들에게 명령해서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도록 합니다(10). 그리고 그날 밤 주님이 바울 곁에 서십니다. 11절의 ‘주’는 바울이 다메섹으로 갈 때 찾아오셨던 부활의 ‘주’를 가리킵니다.

‘담대하라!’ 바울이 선포한 대로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 살아 계셔서 위로하기 위해 그의 곁에 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재 명령형(동작의 계속을 강조)을 사용하여, 계속되는 시련을 겪고 있는 바울에게 용기를 갖도록 격려하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주의 일을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하게 될 것을 알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증언한 것 같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가 예루살렘에서 지금까지 고난을 겪은 것처럼, 로마에서도 고난 가운데 예수님에 대한 내용을 증언하게 될 것이라 암시하십니다.

 

바울은 고난의 시기를 거쳐 자신이 로마에서 예수님을 증언하게 될 것을 알게 됩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있던 바울에게 오셔서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을 떠나기 전에 세상의 권세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을 거쳐서 로마에 가길 소원했으나 동족에게 얻어맞고 로마 군인들에 의해 구금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옆에서 ‘담대하라!’고 말씀하시고 격려하시며, 로마에서 바울이 증언하게 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결국 바울은 체포된 몸으로 로마에 가게 될 것입니다. 증인 옆에 예수님께서 계시므로 고난은 섭리의 수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증인으로 부르신 사람을 찾아오시고 격려하시고 섭리로 이끌어 가십니다. 이 사실이 성도들의 소망입니다.


‘세상보다 못한 교회’는 복음의 공공성이 주는 힘과 영광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성경에 충실한 구별된 삶과 윤리가 없다면 교회의 선교는 힘을 잃게 됩니다. 상식과 양심을 통한 선한 행실과 복음은 제국의 문턱을 넘어 새로운 나라의 실체를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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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2-02)


영내 성벽에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

사도행전 22장 12-29절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제 사명(부르심)은 무엇입니까? 제가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시류에 떠밀려 살아가는 삶만큼 고달프고 무의미한 시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보냄을 받았고 선교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 바울은 아나니아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부르심을 설명합니다(12-21).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바울은 성전에서 예수를 만나는 신비한 체험을 합니다(17-21). 예수님은 바울을 이방인들에게 보내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방인이라는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 했고, 천부장과 로마 군인들은 바울이 로마 시민인 사실을 듣고 두려워했습니다(22-29).

 

아나니아와 바울의 새 인생(12-16)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의지와 뜻으로 복음의 일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사람을 부르시고 일꾼으로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굴레에 빠져 있던 바울을 부르셔서 복음의 일꾼으로 세우셨습니다.

 

12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13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14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15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16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12-16)

 

예수님께서는 앞을 보지 못하는 바울을 다메섹에 사는 아나니아에게로 보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만난 아나니아가 어떤 사람인지 먼저 소개합니다(12). 사도행전 9:10에는 아나니아가 예수님의 제자로 소개되지만, 바울은 유대 청중을 생각해서 아나니아가 율법에 따라 경건하게 살았고 다메섹의 유대인들에게서 칭찬을 받던 사람인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경건하고 존경받는 사람이 바울의 경험을 인정한 것은 청중에게서 신뢰를 얻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나니아는 바울 곁에 와서 ‘형제’라고 부르며 그를 동료 그리스도인으로 환대합니다(13).

아나니아가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라고 말하자 바울이 시력을 회복해서 즉시 아나니아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사도행전 9:17에서는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다고 기록합니다. 큰 빛의 영광을 보고 시력을 잃었던 바울이 아나니아의 말로 시력을 회복했으므로, 바울은 아나니아가 앞으로 말하는 것 역시 주께서 주시는 메시지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택하신 분을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부릅니다. 아나니아와 바울은 구약의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이며 기독교인들은 구약의 진정한 상속자들입니다. 아나니아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바울을 택하신 목적을 세 개의 부정사(~을 위하여)로 알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깨닫게 하려고, 그 의인을 보게 하려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려고 바울을 택하셨습니다. 바울은 이제부터 부활하신 예수를 모든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는 증인, 목격자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15). 모든 사람은 유대인과 이방인(행 22:17-21)을 모두 포함합니다. 근접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에게 적대적으로 반응하는 유대인들(행 23:11)과 이방인 통치자들(24-26장) 앞에서 예수를 증언합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부르고 세례를 받아 죄를 씻으라고 지시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을 의미하며, 세례는 죄를 씻음 받은 사건(참조. 고전 6:11; 엡 5:26; 딛 3:5; 히 10:22), 곧 구원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롬 6:3-11; 고전 6:11: 갈 3:27), 바울은 박해자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로 믿고 있음(‘주의 이름을 불러’)을 공적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또한 세례는 교회의 교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택하셨고(14) 예수가 파송하신(15, 17-21) 사도입니다. 예수님은 보고 들은 것을 사람들 앞에서 전하도록 바울을 구원해서 증인으로 보내십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 즉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으며, 예수님을 만났고 그의 음성(또는 말씀)을 들은 사람입니다(14).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의 죄를 씻음 받은, 곧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 모든 것이 보냄 받은 자가 증언하고 전달할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예수를 만나고, 회심의 은혜를 간직한 사람이 참된 증인의 역할을 수 할 수 있습니다.

 

성전에서 환상을 경험하는 바울(17-21)

 

부르심을 받은 일꾼들은 저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일꾼은 주님이 명령하시는 대로 순종하여 섬기면 됩니다. 그 사명은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가르치고 그 사명 앞에 순종하도록 지도하는 것이 건강한 영적 성장을 돕는 최선의 길입니다.

 

17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8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19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21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17-21)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자기 동족에게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까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는 그동안의 습관으로 성전에서 올라가 기도했습니다. 기도던 중에 황홀경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이 시기는 다메섹의 경험이 있은 지 3년 후로 보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사건은 베드로가 환상을 통해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행 10:10; 11:5). 구약에서 사무엘(삼상 3:1-18)이나 이사야(사 6:1-9)는 환상을 경험했습니다. 바울은 황홀경 상태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다메섹 사건에서 ‘주’는 예수였기 때문에 본문의 ‘주’를 예수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을 나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예수님께 대해 증언해도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핍박을 받으면서 이전에 성전에서 예수님이 경고하신 내용을 떠올립니다. 바울의 핍박은 이미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것이며, 바울은 이제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인들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바울의 부르심이 명확히 언급됩니다. 바울은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는 인생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소명이 성전에서 주어진 장면은 특별히 이사야 6장에 자세히 묘사된 이사야의 환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 유대인들은 바울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뜻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참조. 28:24-28의 사 6:9-10). 이사야 6장과 본문을 연결해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에 나타난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위로 바울에게 명령하십니다.

 

바울은 자신의 이전 행적을 말하면서 예루살렘에 있어도 위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바울이 주를 믿는 사람들을 투옥했고 회당에서 때렸고 주의 증인인 스데반을 죽일 때 찬성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20). 그러나 주님은 바울을 멀리 이방인에게 보내십니다(행 13:46 18:6; 롬 11:13; 갈 2:2.7). 예루살렘에서 멀리 떠나갈수록 이방인들은 많아지고 유대인들은 적어집니다. ‘내가 너를 보낼 것이다’라는 표현은 다시 한 번 이사야 6:9을 떠올리게 합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참여할 정도로 하나님의 율법에 열정적이었던 바울이 이방인들을 향해 멀리 가게 된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의 개입하심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주신 소명을 바울이 거부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대 청중 중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율법에 열심이었던 자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일어났음을 담대히 증언합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왔으나 다시 이방인들에게 보내집니다. 선지자 이사야처럼 부름 받은 종은 하나님의 손에 맡겨진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목적을 갖고 사람을 부르시며, 그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알게 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의 예배와 기도는 자신을 향한 예수의 뜻을 깨닫는 통로였습니다.

 

유대인들의 부정적인 반응과 로마 시민인 것을 밝히는 바울(22-29)

특정 프레임에 갇히면 그것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은 율법주의와 유대주의라는 편견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프레임 속에 예수님을 통한 진리를 거절할 뿐 아니라 예수님을 이단자로 정죄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그 생각은 변함없이 바울에게도 적용하고 있습니다.

 

22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23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24천부장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고 그들이 무슨 일로 그에 대하여 떠드는지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심문하라 한대 25가죽 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26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이르되 어찌하려 하느냐 이는 로마 시민이라 하니 27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이르되 그러하다 28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 29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고 또 그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니라(22-29)

 

유대인들은 바울을 성전에 이방인을 동반하여 더럽힌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방인에게 율법을 전하는 그를 이단자로 단정하고 폭행했습니다. 그들은 죽을 지경에 이르게 폭행했습니다. 로마 천부장에 의해 겨우 영내로 끌려 들어간 바울은 영내 성벽에서 자기 동족에게 변명을 하게 됩니다.

 

(1) 유대인들의 부정적인 반응(22-23)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는 말을 듣다가 ‘멀리 이방인에게로’라는 말에 인내심을 잃었습니다(21). 이 말까지 들은 청중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습니다. 더구나 바울의 입에서 나온 이방인이라는 말에 더욱 흥분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방금 전에 이방인으로 성전에 더럽혔다고 생각해서 폭행했는데, 또 이방인을 두둔하는 말에 더 이상 그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더욱이 이러한 전반적인 일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방인을 위해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하자, 유대인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저런 자는 세상에서 없애야 한다고 외칩니다(22). 유대 청중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위해 바울을 보내셨다고 말하자 분노하면서 더 이상 말을 못하게 막습니다. 군중은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립니다(23).

 

(2) 로마 시민인 것을 밝히는 바울(24-29)

 

군중이 광분하자 그 자리에 있던 천부장은 몹시 놀랍니다. 군중이 더욱 소리를 지르며 바울을 죽여야 한다고 소란을 피웠습니다. 천부장은 자기 휘하의 군인들을 동원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도록 명령합니다(24). 천부장은 부하를 시켜 군중을 자극한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바울을 채찍으로 때려서 심문하라고 명령합니다. 채찍질로 심문하는 것은 사실을 파악하려고 외국인에게 가하는 고문의 형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천부장의 부당한 대우에 맞서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백부장에게 분명히 알렸습니다(25). 그리고 그에 걸맞은 대우를 요구하였습니다. 백부장은 천부장에게 바울이 로마 시민인 사실을 알리면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에게 로마 시민이 맞는지 직접 확인합니다.

천부장은 자신은 많은 돈을 사용해서 로마 시민권을 샀다고 말합니다(28). 심문하려던 군인들은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물러갑니다(29). 천부장도 로마 시민을 보호하지 못하고 도리어 결박한 것 때문에 염려합니다. 로마 시민이라고 할지라도 공공의 질서를 침해하는 것으로 보이면 체포해서 결박할 수 있지만,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하도록 만드는 것은 합법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군인들이 정의를 행하도록 자신의 시민권을 밝힙니다.

지금도 많은 신자들이 불의한 권력의 희생자가 되고 있습니다. 불의한 정치 질서는 선량한 사람들을 부당하게 대하도록 만듭니다. 예수의 제자는 바울처럼 공의가 실현되도록 자신에게 있는 권리를 활용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냄을 받은 신자는 세상의 정의가 실현되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 포함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부름을 받아 사명을 갖고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가 가치와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폐쇄적이고 닫힌 공동체는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교회의 자기중심적 내향화는 교회를 안으로부터 썩게 만들 것입니다. 부르심과 사명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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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2-01)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에게 간증

사도행전 22장 1-11절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일을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귀한 일을 계획해도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끈기가 없는 사람들은 무엇을 하다가 중단합니다. 그리고 변명을 늘어놓거나 주변 탓할 때가 많습니다. 귀한 일을 계획하는 자는 그 계획에 따른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눅 14:28). 바울은 희생을 각오하고 복음 전파를 포기하지 않은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복음 전하는 일에 전력투구했습니다.

 

  • 바울이 무리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누가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한 이야기까지 다룹니다. 박해자로 지냈던 시절과 회심한 사건을 설명합니다. 바울은 신실한 유대인이며, 자신을 이끄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임을 강조합니다.

 

바울의 유대교 시절(1-5)

성도들에게는 열정도 필요하지만 그 방향이 예수의 뜻에 맞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열정이 다른 사람들을 해치게 되고 결국 자신도 망가뜨립니다. 예수를 향한, 성령이 주시는 열정은 사람을 회복하고 살리고 하나님을 향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열정의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열정이 공동체와 이웃을 살리는 쪽으로 향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1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2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 3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4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5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1-5)

 

유대인들에게 심하게 폭행을 받던 바울은 로마 군대들에 의해서 로마 군인들이 주둔한 영내로 들어갑니다. 끌려가고 있던 바울은 천부장의 허락을 얻어 성벽 위에서 자신을 폭행했던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향해 아람어로 이야기합니다. 바울이 자신들이 사용하고 있는 아람어로 유창하게 말하는 것을 들은 유대인들은 조용해지고 바울의 말을 청종합니다.

 

(1) 바울의 말을 청종한 유대인들(1-2)

 

바울은 동족을 향해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겠다고 말합니다(1). 바울은 허락을 받아 ‘부형들아!’라고 부르며 변호를 시작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아버지와 형제로 부름으로써 자신을 핍박했던 유대인들을 향하여 여전히 한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말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유창한 아람어를 말하자 귀 기울려고 더욱 조용히 듣습니다. 그들은 이미 바울이 손짓할 때 크게 조용해진 상태였지만(행 21:40) 그가 자기들의 언어인 아람어로 말하자 더욱 조용해졌습니다.

 

(2) 과거 자신의 모습을 설명한 바울(3-5)

 

바울은 동족을 향해 과거에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명학하게 밝힙니다(3-5). 자신의 출신, 교육, 신앙에 대해 변증합니다. 바울이 제시한 증거들은 그가 얼마나 정통적인 유대인인지를 입증해 주었습니다.

 

① 태생적인 유대인으로 성장한 바울(3)

 

첫째,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난 유대인입니다(행 9:11; 21:39). 둘째, 바울은 유대인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아마 유대인으로 정통 교육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자랐습니다. 3절의 ‘이 성’은 다소가 아니라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셋째,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에게서 조상들의 율법을 철저하게 배웠습니다(행 5:34). 바울은 자신의 유대교 신앙이 디아스포라 유대교가 아니라 팔레스타인 유대교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립니다. 곧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청중에게 자신의 신앙이 정통적인 유대교에 입각하고 있음을 알립니다. 특히 가말리엘은 바리새파의 율법 교사였고 산헤드린 공회에 속했으며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았습니다(행 5:34). 또한 바울은 자신을 공격한 유대인들처럼, 율법에 열성을 보인 유대인들처럼, 자신도 하나님에 대해 열심을 보였다고 증언합니다(참조. 롬 10:2; 갈 1:14; 빌 3:4-7). 그래서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자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고 밝힙니다(빌 3:5). 나중에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고 천명합니다(행 23:6).

 

② 정통적인 유대인으로 살아온 바울(4-5)

 

이어서 바울은 자신이 율법을 엄격하게 교육받고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보인 증거를 제시합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이 도’,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박해했음을 고백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남자들과 여자들을 체포해서 옥에 넘겼습니다. 바울이 이 정도 수준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려 했다면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모임을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 군중을 향해 자신이 유대교의 고위 관계자들을 알고 있음을 밝힙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서 다메섹으로 보내는 공문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의 열심을 입증할 수 있는 증인들이라고 밝힙니다. 그가 다메섹에 간 이유 역시 ‘이 도’를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예루살렘으로 끌고 와서 벌을 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열정과 질투심으로 바울은 비느하스처럼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데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유대인에게 있는 열심과 자신의 열심을 비교할 수 있다고 바울은 외칩니다(3). 바울이 이전에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가졌으나, 그 열심은 바른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바른 지식을 얻게 되자 박해를 위해 사용되던 열정이 복음을 전하는 열정으로 뒤바뀝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바울(6-11)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진리에 이를 수 없습니다. 유대인은 율법주의에 빠져 진리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바울을 율법의 속박에서 건져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은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고 불러 주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있음을 기억합니다.

 

6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7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8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9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10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11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6-11)

 

6-11절은 다메섹 경험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참조.19:1-18; 26:13-18)로서, 바울이 자신의 언어와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6절부터 바울은 어떻게 자신이 예수를 믿게 됐는지 설명합니다(6-16). 그는 다메섹에 도착할 즈음에 예수를 만났습니다(행 9:1-19). 9장에 묘사된 사건을 바울은 1인칭으로 설명합니다.

 

바울은 정오 무렵에 하늘로부터 비친 큰 빛을 보았습니다. 태양이 가장 밝게 보이는 시간에 태양보다 훨씬 밝은 빛은 초자연적인 빛입니다. 그는 그 빛 때문에 한동안 앞을 볼 수 없었습니다(11). 큰 빛을 본 바울은 땅에 쓰러졌습니다. 쓰러진 바울은 하늘에서 들린 음성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바울은 ‘주님 누구시이니까?’라고 묻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다’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바울이 들은 음성은 부활하신 예수의 음성이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에 대한 박해를 자신에 대한 박해로 여기셨습니다. 예수의 이 말씀은 예수와 제자들, 예수와 교회가 동일시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는 고난 중에 있는 신자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에(참조, 눅 10:16; 마 25:40) 그들을 핍박하는 것이 곧 예수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도 바울에게 비친 빛을 보았지만 예수의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9:7에 따르면, 동행하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었습니다. 9절은 그들이 하늘에서 들린 어떤 소리(sound)를 들었으나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말씀하시는 분의 음성(voice)을 듣지 못했다고 묘사합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어떤 사건이 일어난 것을 목격했지만 바울이 이해한 것처럼 알아들을 수 있는 예수의 말씀, 즉 음성의 내용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이때 바울은 예수를 주로 부릅니다(10). 바울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가 부활해서 살아 계시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로 말씀하시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자신이 따라야 할 대상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쓰러져 있는 바울에게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다메섹으로 가면 어떤 사람이 그가 해야 할 모든 것을 알려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빛 때문에 앞을 볼 수 없었고, 그와 동행하던 자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에 들어갔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음성을 들었지만 함께 다메섹으로 가던 유대인들은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 채 소리만 들었습니다. 이는 마치 같은 말씀을 들어도 그 의미를 깨닫는 사람이 있고 그저 지나치는 소리로만 느끼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여러 경로와 방법으로 우리에게 들립니다. 우리가 단지 소리로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면 이는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사람은 무엇을 해야 했습니까? 바울과 같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의미 없이 우리를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에 머물러 우리의 행동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며,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이 질문들에 대한 바른 답을 얻어 그 답에 합당하게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실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님과의 첫 만남에서 던졌고, 일생 동안 반복했던 그 질문을 우리 인생의 화두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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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1-03)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되는 바울

사도행전 21장 27-40절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일을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귀한 일을 계획해도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끈기가 없는 사람들은 무엇을 하다가 중단합니다. 그리고 변명을 늘어놓거나 주변 탓할 때가 많습니다. 귀한 일을 계획하는 자는 그 계획에 따른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눅 14:28). 바울은 희생을 각오하고 복음 전파를 포기하지 않은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복음 전하는 일에 전력투구했습니다.

 

  •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성전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선동해서 바울을 붙잡고 죽이려합니다. 유대인들은 여론몰이를 통해 바울을 죽이려 하지만, 천부장과 군인들이 출동해서 바울을 체포하고, 영내로 데리고 갑니다. 바울은 천부장에게 요청해 허락을 받아 백성 앞에서 말할 기회를 얻어 히브리 말로 말합니다.

 

성전에서 일어난 폭동(27-30)

성령의 사람들에게는 ‘시기’와 ‘질투’하는 모습이 없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있으면, 조금만한 흠이 발견되면 크게 부풀려 업혀 씌우는 모습을 봅니다. 슬프기는 믿은 사람들 가운데서 가끔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바울을 체포하기 위한 유대인들은 거룩한 성전에서 거룩함은 사라지고 혈기가 가득했습니다.

 

27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8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9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30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27-30)

 

바울은 정결례를 위한 7일을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결박을 당하고 고초를 당합니다. 그들은 바울에 대한 소문이 진실인지 물어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1)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의 고소(27-28)

 

정결례를 위한 7일을 마칠 무렵,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붙잡고 무리 앞에서 외칩니다. 공개적으로 고소한 것입니다. 고소 내용은 유대 민족, 율법, 성전을 비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누구입니까? 전 세계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오순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오는데, 이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아마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중 고린도에서 시리아로 가려 할 때, 바울과 고린도 또는 겐그리아에서 마주친 유대인들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은 거기서 바울을 암살하려 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려던 유대인들이 그들과 같이 시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바울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과 복음, 유대인과 율법이 당시 얼마나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었는지, 나아가 바울이 전한 복음이 유대교의 근간인 율법과 성전, 유대인(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흔들고 불안하게 했는지 보여 줍니다. 이들이 바울을 고소한 내용은 유대인이 스데반을 고소했던 내용과 유사합니다(6:11-13).

 

(2) 고소 이유(29)

 

유대인들이 고소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오해 때문입니다. 누가는 그들이 바울과 에베소인 ‘드로비모’Trophimus가 함께 성전 안에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이방인인 그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왔다고 섣불리 결론을 내려 버렸습니다. 진실 여부를 확인하려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한 가지, 바울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바울을 죽이려는 결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설명을 하고 변명을 하여도 그들의 마음에는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 전에 보았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성전에 있기 전부터 바울과 그가 함께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함께 성전에 있는 드리비모는 당연히 바울이 그를 성전으로 데리고 왔을 것이라는 추측한 것입니다. 드리비모는 본문에서는 에베소 사람으로 나오는데, 20장 4절에 따르면 그는 아시아 출신이라고 소개합니다. 누가는 아시아와 에베소를 동일하게 보고 있습니다. 에베소는 너무나 특출한 도시임으로 아시아를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정의라는 이름으로 바울을 정죄합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해서 십자가에 처형했듯이, 바울도 그러한 모습으로 정죄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바울을 죽이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어떤 죄목을 붙여서라도 죽이고 싶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데반을 죽일 때와 똑같이 바울을 향해 몰려들어 폭행을 가했던 것입니다.

 

(3) 소요의 발발(30)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의 선동은 소요로 이어졌습니다. 온 예루살렘 도시가 요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극도로 흥분한 군중은 바울을 성전을 이방인의 더러운 발걸음으로 유린한 범죄자라고 단정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죽이기 위해 성전 밖으로 끌어내자마자 즉시 성전 문이 닫힙니다. 이것은 성전 내에서 추가적인 소요를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군중심리에 휩싸이면 누구든 이성이 마비됩니다. 그래서 폭력성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때도 군중심리를 이용했습니다. 악한 세력이 자주 사용하는 요소가 바로 군중심리입니다. 다수가 모였다고 해서 진리를 결정하고 진행한 것은 아닙니다.

 

체포를 당하는 바울(31-36)

우리에게 위기가 닥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떤 위기 가운데서도 우리를 지키고 건져 주십니다. 전혀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역사하시기도 합니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을 인도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손길을 믿을 때 주의 뜻에 순종하며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31저희가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의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32저가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저희가 천부장과 군사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33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누구며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34무리 가운데서 어떤이는 이 말로, 어떤이는 저 말로 부르짖거늘 천부장이 소동을 인하여 그 실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35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포행을 인하여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36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 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31-36)

 

사실도 따져보지도 않고 군중심리에 휩쓸린 예루살렘의 군중들은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어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오순절 명절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장면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찬성하며 동조하고 있었습니다. 이 소요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1) 천부장을 파송한 로마군(31-32)

 

바울은 성전에서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어 이유 없는 매를 맞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죽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 일로 예루살렘이 요란해졌습니다. 큰 소동은 예루살렘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안토니아 성채에 들어갔습니다. 이곳은 예루살렘에 일어나는 소요를 통제하기 위해 로마군 수비대가 주둔하는 곳이었습니다. 이 안토니아 성채는 높이가 약 25미터로, 성전보다 높이 있어 성전 안을 잘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성전 북쪽, 바깥뜰과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바로 군대를 투입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로마군에서는 소요가 난 곳에 천부장을 급파했습니다. 천부장은 도시의 치안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급하게 군대를 거리고 그곳에 파송되었습니다. 군사들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바울을 치는 것을 멈추었습니다(32).

 

(2) 바울을 체포한 천부장(33-34)

 

천부장은 성난 군중의 손에서 바울을 건져 냈습니다. 그는 바울을 두 사슬로 결박했고, 바울의 신분과 소요의 경위를 보사하려고 물었습니다. 군중들이 흥분한 채로 말하므로 천부장은 진상을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울을 막사로 데려가도록 명령합니다(34).

 

(3) 몸을 가눌 수 없는 바울(35-36)

 

바울은 군중의 폭행으로 큰 상처를 입어 스스로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이 그를 들고 가야 했습니다. 바울과 군인들의 뒤로는 ‘그를 제거하라!’(22:23)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누가는 바울의 체포를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신 모습을 투영시키고 있습니다. 즉 바울이 당하는 핍박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매를 맞고 찢기고 결박을 당합니다. 그의 삶은 따라가고 싶지 않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행 26:29)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진실된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고난을 넉넉히 이기도 남는 열정이 안에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이 아닌 천부장을 보내어 구원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그 자리에서 생명을 마치게 두지 않으시고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렸습니다. 그는 급하게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갔습니다. 바울을 때리고 있던 사람들은 군사들을 보고 멈추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맞고 있는 바울을 체포해서 영문 안으로 데려가고 명합니다. 그리고 그를 포박해서 층계 위로 올라갑니다. 사람들은 로마 군대의 천부장 앞에서는 예수님 때와 마찬가지로 ‘그를 없애라!’라고 쉬지 않고 외쳤습니다. 진리에서 멀어져 복음을 대적하는 인간은 악하고 어리석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들이 소리를 질러 진상을 파악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군대에 끌려가게 되었지만, 사실상 그를 죽이려 하는 군종으로부터 보호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전도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믿고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시길 바랍니다. 천부장은 바울을 잡아 쇠사슬로 결박하고 어떻게 된 일인지 일의 시작과 끝을 물었습니다.

 

복음을 위한 열정(37-40)

고난 속에서도 예수님의 삶과 비슷한 삶을 살아감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바울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채찍에 맞고 계속적으로 똑같은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바울 주변에는 돌을 든 군중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과 어려움 중에서도 끝까지 복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의연하게 선포한 모습이 닮은 모습입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분들이었습니다.

 

37○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38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39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40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37-40)

 

바울 사도는 심하게 매를 맞고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여전히 곁에는 아무도 변호해줄 사람이 없는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유창한 헬라어로 로마 천부장의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자신은 애굽(이집트)인 반란군 지도자가 아니라는 의혹을 벗기는 놀라운 기지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그는 오해를 풀고 위기를 벗어난 데 만족하지 않고 좀 더 적극적으로 방금 전까지 가기를 죽이려 했던 자기 민족, 그것도 흥분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사도 바울은 “부형들아!”(22:1)라고 층계에 올라선 바울은 자신을 때렸던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열정이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자신에게 매우 위협적인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쇠사슬에 맺어가면서도 천국 복음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종교적인 체험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증언하는 것을 간증이라고 합니다. 간증은 변화된 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킨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언제나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바울은 사람들의 폭행을 피해 군인들에게 들려가면서도 복음 전파의 기회를 엿보는 바울을 발견합니다. 바울과 같은 복음에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불리할지라도 목격한 것을 진실하게 고백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복음을 전하도록 비둘기 같이 정결함과 뱀 같은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자신의 유익보다 진리가 드러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죽음도 그를 포기하게 말들 수 없습니다.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복음의 용사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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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52-02)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심령

시편 52편 10-19절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로 죄인인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제사(예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드릴 때에, 짐승을 죽이거나 곡식을 곱게 갈아서 제물로 드리도록 했습니다. 그 짐승과 곡식은 우리를 대신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제물인 짐승처럼 죽어야 하고, 곡식처럼 갈아지는 존재인 것을 고백하는 것이 제사였습니다.

 

  • 통렬하게 자기 죄를 인정하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했던 시인(1-9)은 이제 다시는 죄의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과 영을 새롭게 창조해달라고 청하며 주의 영을 자신에게서 거두지 말고 예전에 누렸던 구원의 기쁨을 회복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사죄의 경험을 선포하며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주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회개를 하고 있으니 용서해 달라는 간구로 마칩니다.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10-15)

물질이 많아져도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고 형편이 나아진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행복은 물질과 큰 상관이 없습니다. 물질이 없어도 정신이 풍요로운 사람도 많습니다. 또한 건강을 잃고 오히려 깊은 행복을 되찾는 사람도 많습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과 사랑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물질이 마음이나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물질보다 정직한 마음과 사랑이 더 중요합니다.

 

10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14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15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10-15)

 

다윗이 하나님께 범죄하고서 느낀 감정은 하나님께 쫓겨난 기분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외면을 당해도 속이 상하고, 짓눌림을 받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이겠습니까? 또한 구약시대에는 성령은 특정한 사람에게, 특정한 때만 임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섬겼던 사울왕에게서 주의 성령이 떠나고 났을 때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1) 주의 영으로 내 마음을 새롭게 창조하소서(10-12)

 

이제 시인은 용서를 간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위한 방안을 간구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새롭게 창조해주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주의 영이 지배하시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표현합니다. ‘마음’은 지, 정, 의를 다 포함한 한 인격의 본질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 마음이 정결하게 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없는 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새 마음을 주시도록 간구합니다. 특히 ‘창조하다’라는 하나님만의 창조를 표현하는 단어를 쓴 것 역시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뒤에 나온 “새롭게 하다”와 병행을 이룹니다. 시인은 정결하고 견고한 새 사람으로 만들어지기를 소원합니다. 5절에서 날 때부터 죄의 영향권 아래 놓인 자신을 고백했는데, 새로운 출발은 첫 창조를 하신 하나님께서 새 창조 해주실 때만 가능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11절에서 시인은 이것을 부정적으로 표현합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라는 것은 내 죄를 인하여 하나님과의 교제를 끊지 말아 달라는 요청입니다. 여기서 ‘나를’은 직역하면 ‘나의 얼굴을’이며 이것은 인격을 가리키는 제유법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쫓겨나는 것은 친밀한 교제를 잃고 그분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을 다시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말라”고 바꿔 표현합니다. 사울에게서 떠난 영이 자신에게서는 떠나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영의 내주만이 범죄의 길로 다시 들어서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12절은 긍정적인 표현으로 돌아섭니다. 시인은 죄를 짓기 전에 하나님과 누렸던 구원의 즐거움이 회복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또 자원하는 심령을 주셔서 자신이 넘어지지 않도록 버팀목이 되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자원하는 영은 이제 하나님 주신 자유의지를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는 영이며, 이것은 죄의 용서를 통해 정결해 진영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말씀에 매임으로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유를 누리는 역설적 존재입니다. 시인은 그 자유를 오용하는 것이 얼마나 노예된 삶이었는지를 경험적으로안 것입니다.

 

(2) 주를 가르치고 찬양하며 선포하리이다(13-15)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시고 회복해주시면 어떻게 살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서원 형태로 아룁니다. 13절에서는 자신과 같은 범죄자들에게 주의 도, 주의 길을 가르쳐서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게 하겠다고 서원합니다. 자신의 체험담을 통해 용서와 회복의 기쁨을 그들이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이 회개의 길잡이가 될 수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시인은 자신이 흘리게 만든 ‘피’가 가져올 처벌에서 구원해 달라고 요청합니다(14a). 그러면 자신의 혀로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겠다고 다짐합니다(14b). 이 의는 언약에 충실한 것을 가리킵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헤세드의 사랑으로 깨어져야 마땅한 언약을 이어주신 하나님의 참다운 ‘의’를 노래하겠다는 것입니다. 훗날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보내셔서 마땅히 죽어야 할 우리 죄인들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의’를 바울이 찬양했듯이 말입니다. 15절에서는 이것을 다시 입술을 열어 주를 찬송하며 전파하겠다는 서원으로 바꾸어 표현합니다. 이 찬양은 감사의 찬양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찬양입니다. 따라서 모든 찬양은 하나님과 그분이 하신 일에 대한 선포입니다.

 

주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겠나이다(16-19)

어떤 사람은 몸은 불편하지만 마음은 자유를 만끽하며 삽니다. 몸의 자유보다 마음의 자유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원하는 심령이 중요합니다. 좋은 일도 억지로 하면 불행한 일이 됩니다. 강요된 상태에서 일하는 노예는 힘들게 노동하지만 기쁨이 없습니다. 땀은 많이 흘리지만 즐거움이 없습니다. 일은 이루지만 보람과 행복은 없습니다. 자원하는 심령으로 봉사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그때 깊은 만족과 기쁨과 행복이 주어집니다.

 

16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18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19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16-19)

 

다윗이 밧세바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만들라고 하면 만들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고, 인간이 하나님께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상한 심령,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16-17)

 

여기서 시인은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자신을 받아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다른 방식으로 고백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자신은 비록 죄로 인한 통증으로 밤잠을 못 이룰 정도로 아파하고 주님 뵈올 면목이 없지만, 그래서 감히 제사의 자리로 나아가봐야 소용없을 만큼 가망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주께서 정말 원하시는 제사는 제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바로 그 참회하는 마음으로 주를 찾는 것임을 알기에 소망을 갖고 나아간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주께서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는 곡언법 수사학으로 ‘크게 진노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는 제사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발언처럼 들리기에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하지만 시인이 부정하는 것은 제사제도 자체가 아니라 마음의 진심을 담지 않은 형식적 제사를 의미합니다. 죄라는 것이 제물 제사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면 시인이 이미 드렸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으로 자기 마음을 위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관계에 변화를 줄 수 없음을 시인은 부인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제사의 양도 아니고 종류도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구절을 암시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12:1)라고 그 의도를 간파하고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번제를 보시는 대신에 사람 자체를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는 일을 보기 전에 내 본질을 꿰뚫어 보십니다. 그것을 ‘상한 심령(루아흐)’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렙)”으로 표현합니다. 용서를 받고 싶은 마음보다 자기 죄로 인하여 깨어지고 부서지고 상한 마음을 먼저 보신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나서야 10절에서 시인이 간구했던 “정한 마음(랩)”과 “정직한 영(루아흐)”이 창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한 (니쉬바르)은 ‘깨다’(샤바르) 동사에서 나온 말로, 우상이나 뭔가 소중한 것을 깨뜨릴 때 쓰입니다. 하나님 대신 소중하게 여긴 것이 남김없이 깨어질 때 찾아온 겸손한 상태가 ‘상한 심령’입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은 예수님의 비유에서 “가슴을 치며 나에게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라고 기도한 세리의 마음입니다. 여기 ‘마음’은 일부로 전체를 대표하는 제유법으로 자아 전체, 시인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런 마음으로 주 앞에 나아가도 시인은 주께서 업신여기지 않고 받아주시리라 믿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기뻐하고 수용해주시리라 믿었습니다.

 

(2) 시온을 위한 간구(18-19)

 

시편 51편에서 1-17절은 하나님과 내가 맺는 관계를, 18-19절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는 관계를 보여줍니다. 나의 죄악을 씻기시고, 정결한 마음을 내 안에 창조하시는 하나님께서 시온과 예루살렘에도 은총을 베푸십니다. 내가 받은 은총(1)이 증폭되어 믿음의 공동체(18)를 덮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고(13)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외치고(14), 하나님을 찬양한(15) 결과입니다. 시인은 주의 은택, 즉 주의 기쁨, 내키심, 호의 선의로 시온에 선을 행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이는 시온을 잘 보살펴달라는 뜻입니다. 또 예루살렘 성을 쌓아달라고 합니다. 이는 무너진 성벽을 다시 견고하게 세워달라는 부탁입니다. 시인은 쇠락한 이스라엘의 한 왕일지 모릅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어짐과 나라의 죄와 허물어짐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회복만이 아니라 국가의 회복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께서 기뻐하시는 ‘의로운 제사’와 ‘온전한 제사’를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본질에 충실한 제사, 마음을 먼저 드리는 제사를 드리겠다는 뜻입니다. 다시 기회를 주시면 올바른 영과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를 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


회개는 단순히 내가 지은 죄를 후회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게 그 죄의 책임이 있음을 철저히 인정하되 내 안에는 어떠한 선한 것도 없으므로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이 유일한 소망임을 고백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또한 회개는 내 마음 속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회개입니다. 또한 회개는 내 마음속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 안에는 어떤 죄가 있는지 돌아보고, 나의 회개를 통해 공동체가 회복되는 역사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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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51-01)

 


상한 심령, 통회하는 마음

시편 51편 1-9절


 

하나님의 사람들은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죄를 짓지 않도록 몸부림쳐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 속에 내재한 죄의 습성은 우리를 끔찍한 죄로 몰아갈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욕심 때문에 그 죄가 더 쉽게 틈을 탑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지었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입니까?

 

  •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단 한 점도 자신의 죄를 숨길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죄’의 동의어를 4가지나 달리 표현하고 또 모태에서부터, 출생하면서부터 죄가 시작되었다고 고백하며 철저한 죄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만이 자신을 용서하실 수 있다고 고백하며 그 용서로 말미암아 건강과 영적 활기를 되찾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죄 고백(1-6)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기억하시지만, 한 번 용서하신 죄는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역시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철저히 회개하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회개는 자신이 용서받을 가치가 없는 죄인임과, 하나님의 용서 외에는 어떤 한 희망도 없음을 고백하며 철저히 뉘우치는 것을 시작합니다.

 

1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2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6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1-6)

 

이 시는 다윗이 밧세바를 빼앗고 우리아를 죽음에 이르게 한 죄에 대해 나단 선지자에게 혹독한 책망을 들은 후 지은 것입니다. 이 시를 읽어 보면, 다윗이 그 죄를 얼마다 철저하게 회개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1) 인자와 긍휼을 따라 죄를 제하소서(1-2)

 

시인은 간절함과 애잔함을 가지고 “은총을 베푸소서 나에게 하나님이여”라고 외치며 시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반역죄(페샤)와 죄악(아온)과 죄(하타트)를 고백하고, 이 모든 더러움을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따라 지워주시고 씻어주시고 깨끗이 제하여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시인이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요 ‘용서’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은총만이 잃어버린 자신, 소외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멸망과 죽음과 잊힘에서 건져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시인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서기로 합니다. 절망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내맡기기로 합니다. ‘은총을 베푼다’는 히브리어 ‘하난’은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좋으신 하나님께서 그냥 주시는 것으로 강요하거나 주장할 수 없습니다. 시인이 은총을 요구하는 근거는 “하나님의 인자를 따라”입니다. ‘인자’(헤세드)는 변치 않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의미하기에 은총의 근거가 되기에 적당합니다. 이것은 병행적으로 나오는 하나님의 많은 긍휼과도 연결됩니다. ‘많은’은 질적인 개념으로, 하나님의 한없이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긍휼은 원래 자궁(레헴)을 가리키는 명사의 복수형으로 태 안의 아이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반역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과 한없이 불쌍히 여기는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더군다나 이 ‘죄악’(페샤)은 하나님께서 절대 주권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고의로 저지른 반역으로 희생제물로 제사를 드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중죄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노력으로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반역죄(1)가 지워지기를 바라며, 자신의 죄악(2)은 말갛게 씻기길 바라고, 또 자신의 죄(2)가 깨끗해지길 바란다고 함으로써 모두 ‘정결’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사죄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뒤에 나오는 ‘우슬초로 정결하게 하고’, ‘눈보다 희게 하고’(7), ‘죄악을 지워달라는 간구’(9)로 이어집니다. 이는 정결 의식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레 14:1-9; 민 19:1–22). 말갛게 씻긴다는 것은 ‘여러 번’ 씻는다는 뜻으로, 앞에 나온 ‘많은’ 긍휼과 연결됩니다.

 

(2) 주 앞에서 범한 죄, 주께서 의롭게 판단하실 죄(3-4)

 

시인은 여기서 앞에서 사용한 반역죄(‘죄과’는 1절의 ‘죄악’과 같은 단어)와 ‘죄’라는 단어를 가져와 철저히 자신의 죄악을 고백합니다. 시인의 죄는 시인도 알고 하나님도 아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는 결국 하나님을 향한 죄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죄가 자기 앞에 있다고 하는데, ‘나의 앞’은 ‘나를 거슬러’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시인의 깊은 죄의식을 반영합니다. 죄가 시인을 고발하고 있는 것을 시인은 깊은 감수성으로 매순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인은 그것이 어쩔 수 없이 무의식중에 지은 실수가 아니라 “내 죄”라고 분명히 책임소재를 밝힙니다. 3절과 4절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자기 자신을 정죄하는 죄가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 감춰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절대 주권자임을 알면서 범한 변명의 여지없는 잘못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용서하지 않으시면 그 죄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죄입니다. 그러니 주께서 어떤 판결을 내려도 그것은 정당하며 또 완벽한 판결이 될 것입니다. 4절 하반절은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유죄를 선고하실 때 당신은 의로우시고, 심판하실 때 당신은 완전하십니다.” 우리 성경에서 말씀과 심판이 병행을 이루고, 의로우시다와 순전하시다 역시 병행을 이룹니다. 모두 법정적인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3) 모태로부터의 죄악, 주께서 중심에 가르치실 지혜(5-6)

 

시인의 자기 고백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갑니다. 이제 그 죄의 뿌리가 얼마나 깊고 철저한지를 인정합니다. 어쩌다 한 번 범한 잘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용서해주시면 다시는 안 그러겠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이 죄의 감옥에서 나올 수도 없고 앞으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 지속적인 사랑 한없이 불쌍히 여기심이 아니고는 가망이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용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이길 수 있는 지혜,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와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있는 지혜, 죄악의 결과가 가져다주는 참담함을 아는 지혜,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알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그것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여기서 자신이 ‘죄악 중에 출생’하였고, ‘어머니가 나를 죄중에 잉태하였다’라고 합니다. 이 구절은 성적 열망으로 인한 오염의 전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보편성에 대한 문학적 표현입니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죄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나올 때부터 죄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해법은 ‘주께’(당신께) 있습니다(6). 모태의 은밀함과 비밀스러움에서부터 죄의 영향을 받았으니, 시인의 ‘중심’에서 주께서 무언가 일을 하셔야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 중심은 시인의 양심의 세계를 가리킬 것입니다. 다행히도 주님은 시인의 마음이 진실하기에 기뻐하시고 그래서 남모르게 지혜를 가르쳐주시는 분입니다. 시인이 철저한 자기 절망 가운데 기대하는 것은 바로 그 하나님의 성품이고 기대입니다.

 

죄 용서를 간구(7-9)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상한 심령이 있는지 살피십니다. 상한 심령 없이 기도하고 회개하는 것은 외식이며,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뿐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아무리 큰 죄라도 상한 심령으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고 용서하시지만, 상한 심령 없이는 아무리 작아 보이는 죄라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7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9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7-9)

 

다윗은 자신이 죄악 중에서 출생했고, 어머니가 죄 중에서 그를 잉태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죄에 대해 얼마나 나약한지, 죄의 유혹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를 고백합니다. 평생 경건하게 살아온 그가 한순간에 유혹에 무너진 것이 그것을 잘 말해 줍니다.

 

(1) 우슬초로 정결하게 하소서(7)

 

시인은 이제 하나님의 성품에 기대어 1-2절에서 드렸던 기도를 좀더 구체적으로 반복합니다. 시인은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나의 죄를 씻어주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우슬초는 나병에서 나았을 때(민 19:18), 죽음으로 부정해진 자를 씻을 때(민 19:18) 쓰입니다. ‘정결하게 하다’라는 동사도 마찬가지 경우에 쓰이고 있습니다. ‘씻어주소서’(카바스)란 동사는 2절에 나온 바 있습니다. 이것은 ‘빨래하다’란 의미입니다. 자신을 걸레 같은 존재로 본 것입니다. 더러움과 주홍빛 죄가 덮어도 하나님께서 빨래하시면 ‘눈보다 희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흰색은 순수, 정결함, 깨끗함, 기쁨을 의미하기에 용서를 상징하는 색입니다.

 

(2)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8)

 

그렇게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즐겁고 기쁜 소식’을 들으면 주님께서 징계하심으로 말미암아 꺾인 시인의 뼈들이 즐거워할 것이라고 합니다. ‘뼈’는 힘의 근원입니다. 뼈들에 힘이 넘치면 온몸에 힘이 넘칩니다. 그래서 이사야도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58:11)이라고 축복합니다. 시인은 잃었던 건강이나 혹은 깊은 죄책감에서 해방되어 육적으로, 영적으로 치유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3) 죄악을 지워주소서(9)

 

이를 위해 시인은 다시 한번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죄악을 지워’ 달라고 간구합니다. 아무것도 주님 눈에서 감출 수 없으니 이제 방법은 주께서 얼굴을 돌려서 죄를 보지 않으시는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1절에서처럼 자신의 죄(값)를 지워달라고 간청합니다. 반역죄뿐만 아니라 그 죄의 실상까지도 흔적 없이 없애달라는 것입니다. 모든 죄가 하나님 앞에 드러나니(시 90:8) 용서와 죄악 지움을 다 함께 주시도록 간구합니다.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는 사람이 귀한 시대입니다. 겉으로는 잘못했다고 말하고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만, 실상은 제스처만 보이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다윗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철저하게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보다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하심이 더욱 크다는 것을 믿고, 어떤 죄를 지었든지 다윗처럼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용서받는 자유함과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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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1-02)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의 사역

사도행전 21장 17-26절


 

사람들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살아가면서 그 다양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옳고 그른 일은 개인의 차원은 넘어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관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배려할 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에서는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21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롬 4:20-21)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덕을 위해 배려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믿음의 행동입니다.

 

  •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야고보와 장로들에게 그동안 선교 여행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낱낱이 보고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후에, 바울에게 율법을 파괴한다는 유대인들의 오해를 풀기 위한 일을 위해 정결례에 동참하길 제안합니다. 바울의 그 제안에 순종해서 정결례를 진행합니다.

 

선교 보고와 예루살렘의 반응(17-20a)

영적인 부분이 자신의 신앙과 다른 사람을 만날 때, 그들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 때마다 인위적인 판단으로 정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심이 무엇인지를 깊이 살펴야 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온 것은 유대 지도자들이 이방인들은 한 형제로 받아들이느냐에 대한 중요한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다행이도 그들은 바울의 사역을 받아 들렸고, 이방인 지역에서 이루어진 역사에 대해 하나님께 찬양했습니다.

 

17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18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19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20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17-20a)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면 환란과 결박이 기다리는 여러 사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바울은 사명에 대해서는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고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 전파를 위한 사명은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 바울을 환대하는 예루살렘(17)

 

바울은 마음 한편에 우려를 가지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이방인 지역 사역에 대한 반응에 따라 복음의 역사가 중요한 기로에 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예루살렘 공의회(행 15장)에서 공식적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함은 공인(公認)되었지만, 실제적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성도들이 이방인 성도들을 형제로 받아들이느냐는 매우 중요한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예루살렘 형제들이 바울 일행을 환대했습니다. 의례적인 환영이 아니라 기꺼이 환영했습니다. 이것은 바울 신학과 바울이 전한 복음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전한 역사(役事)에 대해 성령의 역사로 인정한 것입니다. 만약 인정받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이방인 지역에 사역했던 모든 일들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우려와는 다르게 예루살렘 유대 성도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한 바울은 흔쾌하게 환영하며 받아 주었습니다.

 

(2) 바울의 선교보고(18-19)

 

이튿날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자격인 야보고를 만나로 갑니다. 그리고 야고보와 장로들이 다 모여 있는 자리에서 선교 여행의 놀라운 결과를 보고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 하신 일’을 낱낱이 고했습니다. 지금까지 이방지역에서 이루어진 사역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이라고 보고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 받았음을 강조합니다. 온갖 핍박을 겪으면서 사명을 성공적으로 감당한 사람이 이렇게 고백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작은 공로도 드러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청지기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 주었습니다.

 

(3) 예루살렘 교회의 반응(20a)

 

바울의 3차에 걸친 이방 지역의 선교 보고에 대해 예루살렘의 유대 장로들의 반응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사역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인정한 것이었습니다.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20b)

종종 교회의 분열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 분열의 근원은 대부분 견해 차이로부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은 인정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이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고 주장함으로부터 분열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이 세상에 살 동안 ‘화평케 하는 자들’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영적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 이해하고 양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동체가 하나 되기 위해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20b…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20b)

 

바울의 우려하는 마음과는 달리,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성도들은 바울이 지금까지 이방인 지역에서 선교 사역에 대한 보고를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바울의 우려는 예루살렘에는 개종한 유대인들이 수만 명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유대인으로서 선민의식으로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지만, 아직 유대교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으로 바울의 사역을 오해를 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울의 사역에 대해 부정적인 소문이 항간에 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방 지역에서 모세의 율법을 배반하고 할례를 행하지 말며,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주장했다고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 오해로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주장한 것은 이방인 성도들이 굳이 할례를 받고 율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 유대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을 금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율법을 준수한 사람입니다.

 

복음의 보편성이 충분하게 이해되지 못한 과도기의 초대 교회에는 구약 율법과의 연속성을 놓고 신학적 대립이 심각했습니다(10~11, 14~15장). 복음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게 된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당수의 유대인 신자들은 야고보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여겼고, 반대 입장에서 있던 바울은 율법 파괴자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신학적 대립 가운데서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진리를 발견해 나가게 됩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일행과 함께 유대의 전통 결례를 행하기를 했습니다. 야고보의 제안에 따라 이 모든 오해를 풀고 불필요한 갈등을 예방하기 위해 나실인 서원을 했던 네 명의 유대인과 함께 정결을 위한 율법의 예(禮)를 행합니다. 또한 그들을 위한 엄청난 제물 비용(민 6:13~21)을 감당해 주었습니다. 이는 구원과는 상관없이 연약한 성도들을 위한 배려였습니다.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갖고 지혜로운 접근을 했습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 서로 다양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획일적으로 같은 모양을 가질 순 없습니다. 각자의 개성과 달란트를 인정하고 그것의 특색에 따라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 안에 분파가 생기고, 더 나가서 분열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연약한 자들을 위한 배려(21-26)

교회 안에서 생활하면서, 당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상대방의 의견을 들어주고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자신의 의견과 다르다고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겸손히 좋은 점을 수용하십시다. 당신은 교회의 제안이나 권고에 겸손하게 순종합니까? 믿음이 연약한 지체들을 위해 당신이 포기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21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22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23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4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25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26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21-26)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한 이방인 지역에서 행하신 일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다만, 바울에 관한 나쁜 소문에만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성도들까지도 아직까지 율법에 대한 닫힌 사고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바울이 이방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했다는 거짓 소문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성도들까지 오해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1) 세평에 대한 우려(21)

 

바울은 이방 지역에 대한 모든 3차 선교 사역을 보고를 들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것은 야고보와 예루살렘 장로들이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들 가운데 사도직을 행하게 하시고, 복음의 열매를 거두게 하셨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예루살렘 공회가 열렸을 때도 이방인 사역에 대한 보고가 있었습니다(15:12; 갈 2:8-9). 그들은 영광을 돌리면서도 한편으로 바울에 대한 잘못된 세평을 우려합니다. 당시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도들까지도 바울의 사역에 대해 오해가 있었습니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전에 잘못된 소문만으로 판단한 것을 참으로 큰 실수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오해한 바울에 대한 악평은, 이방 각 지역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모세의 율법을 배척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며 유대인 관습도 지키지 말라고 가르친다는 잘못된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악평이 점점 더해지면서 예루살렘까지 전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반신반의하면서 바울의 사역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을 모함하는 자들은 악평을 더해 갔던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그렇게 유대교와 율법을 파괴하면서 가르쳤다면, 이는 엄청난 문제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디에도 유대인에게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율법을 폐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율법주의’를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을 모함하는 죄는 유대인에게는 다가오는 세계,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심각한 죄였습니다.

 

(2) 장로들의 정결례 제안(22-25)

 

바울에 악평 때문에 유대인들은 계속적으로 기회만 있으면 바울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마침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감진한 유대인들은 그를 제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여행한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움직임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바울에 대한 소문이 헛소문임을 증명하기 위해 바울에게 나실인의 정결례를 제안합니다. 정결례를 통해 율법을 파괴하는 사람이 아님을 보여 주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실인의 정결례는 단순하게 머리만 깎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과 유대 문헌에는 나실인에 대한 규정과 서원을 마칠 규정은 민수기 (6:13-21)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정결례를 행하려면, 숫양 두 마리와 암양 한 마리, 소제물과 전제물들이 필요했습니다(민 6:14-15). 그만큼 상당히 많은 비용이 지불되어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 안에 있던 네 사람들도 비용 때문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야고보와 장로들은 바울에게 권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적인 방법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유대인들 앞에서 사도 바울이 정결례를 행한다는 것은 율법을 준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권고는 인간의 두려움에서 유대인들의 마음을 달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교회의 제안을 겸손하게 따릅니다. 바울이 서원을 기다리는 네 사람의 비용까지고 지불할 것을 제안에 대한 받아들입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유대 율법주의자처럼 율법을 성실히 행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사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도 새 시대가 열린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에게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은 것과 음행을 파하라고 결의하고 편지를 보냈습니다(15:20). 유대인의 율법의 기준이 아니라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방식의 삶을 이해하고 시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연약한 자들을 위해 율법의 결례를 행하도록 한 것은 모두를 배려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러한 지혜로운 권면에 바울은 적극적으로 순종했습니다.

 

(3) 정결례를 마침(26)

 

바울은 정결례의 제안을 받아들여 7일을 보냈습니다. 그 다음날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이 제안한 네 사람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 정결례를 온전히 행하고 정결례의 절차에 따라 마쳤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이것은 이미 정결례를 마친 후 보고라기보다는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완결하기 직전의 보고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민 6:13-14).

바울은 정결례를 행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장로들의 제안을 받아 들렸던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위해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바쳤던 바울은 이제 유대인들을 얻고자 유대인의 모습을 보이며,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고전 9:19-20). 바울은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자기 시간과 재물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연약한 자들을 위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만의 신앙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단점을 보안해주며 세워주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바울은 연약한 성도들에게 배려함으로 분란을 잠재우도록 노력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정결례를 행함으로 주위와의 마찰을 없애고 복음만 증거되도록 철저히 헌신했습니다. 믿음은 사랑 안에서 표현입니다. 연약한 자들도 섞여 있으므로 그들을 기억하고 지혜롭게 행동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적극적으로 배려하는 성도들이 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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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1-01)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는 두로 성도들

사도행전 21장 1-16절


 

여행을 할 때, 고난의 길을 즐겨 가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는 고난의 길일지라도 감수해야 합니다. 고난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믿음의 각오가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을 보면, 고난의 길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는 것보다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가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본문은 하나님 앞에 가치 있는 인생을 위해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 본문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은 두로의 성도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루살렘을 향해 떠납니다. 가이사랴에서는 선지자 아가보의 예언 때문에 성도들이 바울을 만류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굳은 각오를 밝히고 떠납니다.

 

밀레도에서 두로까지의 여정(1-6)

믿음이 무엇입니까? 어떤 어려운 환경이 닥쳐왔을 때, 그것에 대한 반응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시련과 고난이 닥쳐왔을 때, 당신이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믿음의 실체입니다. 믿음의 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평상시에는 잘 믿고 있는 것 같지만, 어려운 고난의 폭풍이 다가왔을 때는 하나님께 원망하는 반응이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순종하기로 작정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1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2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4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5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6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1-6)

 

본문은 바울 일행이 밀레도에 2차 선교 여행을 결산하는 과정을 소개합니다.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작별한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1) 밀레도에서 바다라까지(1-3)

 

밀레도를 떠난 바울 일행은 곧바로 고스Cos를 경유해서 다음 날 로드Rhodes를 거쳐 고로 성 바다라Patara에 이릅니다. 그들은 해변을 따라 이동하는 작은 배를 탄 것으로 보입니다. 작은 배는 수심이 얕고 암초가 많은 지역에서 참으로 편리한 수단이었습니다.

배는 로도 섬을 거쳐 루기아 지방의 항구 바다라에 도착했습니다. 이 항구는 지중해 여러 지역을 운행하는 대형 무역선들이 정규적으로 정박하는 곳이었습니다. 바다라는 애굽의 알렉산드리아 항구와 정반대 편에 있어서 애굽에서 곡식을 수입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큰 항구에서는 지중해 여러 지역으로 가는 배를 타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2) 두로에서 7일간 머묾(4-6)

 

바울 일행은 여기서 베니게, 곧 돌레마이로 가는 배에 탔습니다(2,7). 이 배는 당시 거의 모든 배와 같이 화물선이었기 때문에 중간 기착지 두로에 도착해 왼편에 두고 수리아 방향으로 향해해 두로에 상륙했습니다(3). 배는 두로 항에 정박해 화물을 하역하고 새로운 화물을 선적하면서 7일간 머물게 되어 있었습니다(4a). 배의 항해 계획에 따라 바울 일행 역시 이 기간 동안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그들은 수소문하여 두로 지역에 있는 제자들을 찾아 그들과 함께 머물렀습니다(4a). 두로는 바울이 한 번도 사역 기간 동안 방문한 적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곳 제자들은 아마도 여러 경로를 통해 바울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두로에 있는 형제들은 바울 일행을 환대하고 그들에게 숙식을 제공했습니다.

 

두로의 제자들은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4)고 바울에게 말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예루살렘에서 닥칠 환난을 알게 되었습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막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인간의 정에 끌리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갑니다. 그는 정한 뜻을 돌이키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을 통해 로마까지 복음을 전파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두로 성도들에게 바울의 고난당할 것을 보여주신 때는 바울의 사역을 못하도록 방해라고 주신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사도 바울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고 준비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마음으로 바울과 동행하라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닥칠 것이라는 상황에서 바울의 신앙은 확실했습니다. 그는 어떤 고난이 닥쳐올지라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계획대로 복음 증거하는 일을 실천할 것을 작정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갈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예수께서 순종하며 예루살렘의 십자가를 향해 가셨듯이(눅 18:31) 바울도 핍박과 고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피하지 않습니다(20:22~23).

 

믿음은 아름다운 반응입니다. 두로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바울을 배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갑니다(6). 결연한 심정을 공유하는 이들은 배에 오르기 전에 같이 무릎을 꿇고 서로를 위해 기도합니다. 배를 타는 사람이나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나 한결같이 주님과 교회를 위해서 자신들의 사역 현장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아마 그것이 두로 바닷가에서 같이 올린 기도의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가이사랴에서의 예언(7-11)

현실 때문에 사명을 갈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길입니다. 아무리 무거운 짐과 같은 사명이라 할지라도 각오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가볍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세미하게 당신에게 들립니다. 갈등은 사단이 주지만 평안은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지금 당신에게 하나님을 위해 충성스러움이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7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8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9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10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7-11)

 

가이사랴에 도착한 바울은 빌립 집사의 집에 머뭅니다. 빌립 집사의 넷 딸도 성령 충만한 딸들이었습니다. 처녀들이지만 하나님의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도 바울이 당할 고난을 구체적으로 환상으로 보게 되어 집니다.

사도행전 11장에서 ‘천하에 크게 흉년이 들리라’(28)고 예언했던 아가보까지 이제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11)고 말합니다. 가이사랴에서 빌립의 집에 머무는 동안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고난 받을 것을 예언합니다. 구체적으로 선지자 아가보가 바울이 체포되어 로마 당국의 손에 넘어갈 것이라는 좀 더 구체적인 예언을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시련을 주시는 까닭은

오직 나의 믿음을 자라게 하기 위함이다

- 허드슨 테일러 -

 

이런 모습을 보고 바울의 동행자들과 빌립의 가족들도 합세해서 그의 예루살렘 가는 것을 막으려합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두 번씩이나 이런 예언이 나온 것이기 때문에 가지 말라는 것으로 인식했을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을 충분하게 약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요지부동입니다. 마음은 아프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중심에 심어 두신 섭리의 의지가 확고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최종 결론에 도달합니다.

 

사도 바울의 결심(12-14)

살아가면서 삶의 기준을 어느 곳에 맞추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당신의 뜻과 맞지 않는 주변 사람들의 뜻으로 갈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12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12-14)

 

바울은 주 예수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순교할 각오까지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깊은 믿음의 확신이며 철저한 사명감입니다. 이것이 바울을 사도로 기름부고 이방인에게로 보내게 된 귀중한 이유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태도에 사람들은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반응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인간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을 통해서 그의 사명에 충실한 모습을 닮기를 원합니다. 복음을 위해서는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들어야할 음성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 잡고 싶은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겠다는 의지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것에 매달려 있을 때에 ‘너의 헛된 생각을 포기하라’고 말씀합니다. 주님 뜻대로 나의 삶이 이루어지길 원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바울의 믿음을 통해 바울과 같은 믿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이 중요한 선택을 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결정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그러한 결정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안일함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사랑을 생각하면서 성도들은 살아있는 믿음의 반응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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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0-03)


말씀으로 듣든히 서 가는 교회

사도행전 20장 28-38절


요즘 사람들에게 관심 있는 것은 ‘리더십’입니다. ‘리더십’은 ‘영향력’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고, 악한 나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지도자들은 성도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시고 말씀 자체이십니다. 따라서 지도자들이 말씀 위에 든든히 세어질 때 교회 안에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 사도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마지막 권면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감독자로서 교회를 잘 지킬 것을 당부합니다. 그리고 이단들의 출몰에 대해 경고하고 물질에 대한 교훈을 이야기합니다. 에베소 장로들은 크게 울며 바울을 전송합니다.

 

장로들의 역할(28)

교회는 하나님의 공동체이지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사람들과 관 속에서 속상한 일이 있거든 바울과 같은 태도를 취하시길 바랍니다. 그들을 향하여 무엇을 얻을 것인가가 아니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언약한 성도들을 위해 수고하고 있습니까? 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있습니까?

 

28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28)

 

바울은 이별을 고하며 에베소 장로들에게 교회의 감독자로서 어떻게 행해야 할지 권면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 모습은 건강한 리더십이 무엇인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에 닥칠 위기를 말하기 전에 교회가 어떤 존재이며 교회의 책임자들에게 어떤 역할이 주어졌는지 가르칩니다. 첫째, 교회는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의 피로 사신 것입니다. 헬라어 본문에서 의미하는 ‘자신의 것’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사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주셨습니다. 주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잔을 가리키며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눅 22:20). ‘사다’라는 용어는 칠십인역 이사야 43:21에서도 사용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를 칠십인역은 ‘내가 산 나의 백성’으로 번역합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속죄의 의미를 경제적 개념을 사용해서 설명합니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백성과 마찬가지로 교회는 하나님께서 사신 하나님의 재산입니다. 교회는 희생제물인 예수의 피로 사신 것이기 때문에 값을 매길 수 없으며, 하나님의 재산이기에 장로들이 좌지우지 할 수 없습니다.

둘째, 장로들의 임무는 양 무리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토록 값비싼 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성령은 교회를 지키는 감독자들을 세우십니다. 이들은 목자가 양을 지키듯이 교회를 보호해야 합니다(29). 소중한 교회를 위한 사역을 완수하기 위해 바울은 자신의 목숨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책임을 부여받은 리더는 교회가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아들의 피로 사신 공동체이므로 우리는 교회를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로 생각해야 하고, 교회를 보호하는 일에 쓰임 받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야 합니다.

 

사나운 이리를 조심하라(29-32)

교회를 다니면서 말씀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지 못해 영적 갈증을 해소하지 못한 나머지 이단 교리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지지 않도록 교회는 말씀을 가르치고, 성도는 배우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말씀에 대한 갈망과 영적 진리에 대한 목마름으로 우리에게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언제든지 진리의 말씀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29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31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29-32)

 

바울은 자신이 떠난 후에 사나운 늑대들이 양 떼를 해치려고 교회 안에 들어올 것이라고 경고합니다(참조, 마 7:15; 눅 10:3), 교회가 늑대의 공격을 받는 양 떼이기 때문에, 바울은 28절에서 성령이 교회를 보호하고 목양하시도록 감독자를 세우셨다고 말했습니다. 늑대들은 교회의 존귀함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따르도록 만들려고 진리를 왜곡해서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입니다. 이들은 바울이 가르친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을 가르칩니다.

 

장로들이 늑대들의 거짓 가르침에서 벗어나 양 떼를 보호하려면 바울을 본받아야 합니다. 31절의 헬라어 문장에서는 ‘기억하라’라는 단어 앞에 ‘깨어 있어라’ 혹은 ‘주의하라’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거짓 교사들의 출현을 주의해야 합니다. 바울이 밤낮으로 쉬지 않고 교회의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한 장면을 떠올리고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이는 목자가 양 떼를 보호하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지도자들이라고 해서 자신들의 힘으로 교회를 보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을 주(=하나님)와 그의 은혜의 말씀에 맡깁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맡긴다는 뜻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말씀으로 교회를 보호하시고 성숙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인내하는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유업을 받게 됩니다. 유업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울이 가르쳐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거짓 교사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진리를 왜곡하고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에서 이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교회의 가치를 모르는 거짓 교사들은 시대마다 교회 안에 있는 약점을 파고듭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아무리 많은 설교를 전한다고 할지라도 은혜의 말씀을 정확하게 가르치지 않는다면, 거짓 교사들의 유혹에 교회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했던 것처럼 교회의 지도자들은 은혜의 말씀을 정확하게 가르쳐야 하고 성도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대화하시고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혼탁한 시대에 제대로 살아갈 통찰력과 능력을 가져다줍니다. 말씀의 부흥이 진정한 교회의 부흥입니다.

 

돈을 탐내지 말라(33-35)

바울은 인간의 죄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가만히 나누면 자연스럽게 죄로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육신이 편한 곳으로 택하기 되어 있고, 귀에 좋은 말을 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죄성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말씀을 가지고 깨어서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33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35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33-35)

 

거짓 교사들의 출현 외에도 교회 지도자들의 그릇된 모습들이 교회에 위기를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지도자들이 탐욕을 추구할 때 교회는 위기에 빠집니다. 위기의 원인은 교회 내부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위기를 막아야 할 사람은 위기를 만들기 가장 쉬운 자리에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교회를 섬겼는지 설명하면서 교회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합니다. 바울은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도 탐내지 않았습니다. 돈과 옷을 거론하는 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가르치신 내용과 비슷합니다(눅 12:13-34; 16:1-15). 바울의 삶은 그리스-로마 세계의 순회 철학자들과 종교사기꾼들이 가르침의 대가로 부를 축적한 모습과 대조됩니다. 바울은 탐내기보다 직접 일해서 자신과 동료들의 필요를 채웠습니다(34).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울의 삶을 따라서 약한 사람들을 지원해야 합니다. 약한 사람들은 재정적으로 궁핍한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행위는 탐심에 끌려가는 것을 막아줍니다. 따라서 타인을 위한 자선은 자신을 구하는 길입니다. 교회가 궁핍한 사람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엉뚱한 목적을 위해 돈을 축적하는 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삶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삶에 근거합니다(35). 이 말씀은 복음서에 기록된 내용이 아니지만, 바울과 에베소 장로들과 여러 초기 교회들에 알려진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베푸는 인생이 복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물론 생활의 궁핍함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삶을 낮게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약한 사람들’이란 재정적으로 궁핍한 형편에 처한 사람들로서, 타인의 도움에 의존해야만 생활할 수있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궁핍한 사람들을 위해 직접 노동에 참여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할용해서 탐심을 채울 위험성을 차단해야 합니다. 이때 바울의 삶은 그러한 위험성에 경종을 울리는 하나의 좋은 예입니다.

 

눈물의 작별 인사(36-38)

교회 안에서 나누는 교제를 돌아봅시다. 성공적인 인간관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당신이 떠날 때 바울과 같이 서로 안고 눈물을 흘리는 성공적인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지체가 아파할 때 당신의 가슴도 아픕니까? 지체들을 위해 얼마나 간절히 기도합니까? 지금 당신의 손이 필요한 사람은 없습니까?

 

36○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37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8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36-38)

 

바울은 설교를 마치고 나서 무릎을 꿇고 장로들과 함께 기도합니다. 장로들은 크게 울면서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작별 인사를 나눕니다. 특히 장로들은 다시 바울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말 때문에 더욱 근심하고 배를 타는 곳까지 바울을 전송합니다.

 

바울과 장로들 간의 작별 인사는 진정한 감동과 우정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어떻게 이토록 아름다운 장면이 그려질 수 있습니까?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 교회를 사랑한 바울의 삶 때문입니다. 바울은 눈물 없이 딱딱하고 건조한 방식으로 지도하는 선생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깨달은 자의 반응이었고, 그의 헌신은 박해자를 구원하신 예수의 은혜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향한 그의 가르침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바울의 삶과 가르침을 목격하고 경험한 지도자들은 에베소 교회를 대표해서 눈물로 작별 인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탐심을 채우기 위해 교묘히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노동을 해서라도 궁핍한 사람을 도왔던 바울, 존귀한 교회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은 바울의 삶이 재현될 때, 교회는 감동의 친교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에 근거한 사랑은 건강한 교회를 만듭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아 줌으로 성도들이 세워지고 교회가 하나 되어 부흥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수고를 통해 얻은 것으로 연약한 사람들을 돌보고 섬기는 심령들에게 은밀히 갚아 주십니다. 그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에게 존경을 받은 지도자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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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50-01)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

시편 50편 1-23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자주 예배를 들립니다. 하지만 자주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면서 예배드릴 가능성이 많습니다. 알맹이가 빠져 버린 껍데기와 같은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됩니다. 과연 어떤 에배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입니까?

 

  • 이 시편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과 관계성에 초점을 둔 노래입니다. 언약은 예배와 삶의 갱신을 위한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입니다. 시인은 예언자처럼 온 세상의 재판장이요 빛으로 오시는 하나님을 노래하고 언약 백성의 그릇된 예배를 꾸짖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합니다. 따라서 시인은 참 예배의 본질이 하나님을 잊지 않고 감사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에 있음을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재판을 위해 오시는 하나님과 부르심(1-6)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면 하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고 예배하는 것이 제일 주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무턱대고 예배하는 것을 전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자신을 알리셨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도 말씀을 통해 구체적으로 알려주셨습니다.

 

1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2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 3우리 하나님이 오사 잠잠하지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삼키는 불이 있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4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5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6하늘이 그의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셀라)(1-6)

 

시인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예배할 자들을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곧 모든 세상에서 부르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공간적으로 모든 땅에 속한 것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한다는 의미이며, 시간적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즉 모든 시대에 속한 피조물들이 다 부름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1) 빛으로 시온에 오시는 하나님(1-2)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1a)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여호와가 ‘엘 엘로힘’으로는 데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에레츠)을 부르셨습니다(1bc).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14절의 ‘지존하신 이’(엘욘)와 어울려 출애굽의 하나님과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가르침을 주신 하나님을 떠올립니다. 하나님께서 그때처럼 오셔서(출 19장) 시온으로부터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빛나셨습니다(2). 위대하신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시온은 아름다움 그 자체가 됩니다. 빛을 비추시는 것은 일반적으로 구원을 상징하지만, 시인은 심판을 위해 오시는 하나님을 말하려 합니다.

 

(2) 언약백성을 부르시는 하나님(3-6)

 

시인은 하나님께서 오시는 광경을 묘사합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오셔서 잠잠하지 않으십니다. 그분 앞에는 삼키는 불이, 그분 사방에는 광풍이 붑니다(3). 하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맹렬한 불 또는 소멸하는 불로 그려집니다(신 4:24; 9:3; 히 12:28). 하나님의 오심은 옛적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와 비슷합니다(출 19:1-6,8,16,18). 그가 위의 하늘을 부르시고 백성을 판결하려고 땅을 부르십니다(4). 자기 백성을 재판하시려고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호출하시는 것입니다(참조. 신 32:1; 사 1:2; 미 6:1-2). 하나님께서 증인을 호출한 후 말씀하십니다. ‘나의 성도들을 내 앞으로 모으라/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을 맺었다’(5). 시편에서 성도들은 주로 ‘헌신된 자’로 언급되지만, 문맥상 이들은 언약 백성의 후예들로서(출 24:1-11), 새롭게 갱신된 언약에 참여하는 백성 모두를 가리킵니다. 이제 성도들을 향해 ‘하늘이 그의 공의를 선포할 것이다/이는 하나님, 그가 재판장이기 때문이다’(6). 하나님의 법정에서 증인으로 호출된 하늘이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는 주체가 됩니다. 6절 시행은 하늘에 사무치는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인격화한 엄숙한 표현입니다.

 

재물보다 하나님 언약 백성의 재물 경고와 참 예배(7-15)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자기 백성에 의해 세상에 공의가 선포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배의 이유를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저 매주 예배만 참석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자들을 통해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가 선포되어야 합니다.

 

7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8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9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10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11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12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13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14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15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7-15)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제물을 드리지 않아서 책망하시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드리는 번제가 항상 하나님 앞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형식만 남고 중심이 빠져 버린 데 있습니다.

 

(1) 재물에 대한 왜곡된 생각(7-12)

 

성도들의 잘못을 꾸짖는 하나님 말씀은 계속됩니다. ‘들어라 나의 백성아, 내가 말하겠다/이스라엘아,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겠다/나는 하나님, 너희 하나님이라’(7; 참조. 신 6:4). 이후에 하나님은 ‘내가’를 반복하여 이스라엘의 재물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증거를 제시하듯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희생제물 때문에 책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8).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었다’(8b)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백성들은 제사에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네 집의 수소나 네 우리의 숫염소가 필요 없다’(9)라고 하십니다. 수소나 숫염소는 값나가는 제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값비싼 제물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산의 모든 새들도 짐승들도 하나님께서 아시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11). 여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설령 내가 굶주려도 네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왜냐하면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이기 때문이다’(12). 이는 하나님이 고대 근동 세계의 여러 신들과 다름을 표명한 것입니다. 바벨론 홍수 신화에서 신들은 배고파하며 바쳐진 제사 음식을 먹으려고 파리 떼처럼 몰려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도 다른 신들처럼 물을 먹는다고 생각했다면 오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것을 ‘나의 것’이라고 세 번이나 반복하십니다.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2) 참 예배에 대한 교훈(13-15)

 

풍자성이 강한 하나님 목소리입니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고,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13). 하나님께서는 다른 신들처럼 배고파하며 피에 굶주려 인간들로부터 먹거리를 요청하는 신이 아닙니다. 12절처럼 하나님께서는 매우 익살스럽고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질문으로 제사에 대한 오해를 교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제사는 무엇입니까? ‘감사를 하나님께 바치라/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라’(14). ‘감사’와 ‘서원’ 제사는 예배자의 자발성에 기초한 자원 예물입니다. 감사 제사의 동물 제사 자체를 부정하는 뜻은 아닙니다(참조. 대하 29:31; 렘 17:26-27). 제사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강조한 것입니다. 제사의 본질은 물질적 희생보다 자발적인 마음에 있습니다. 제물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제물을 바치는 사람을 위한 것이 됩니다. 제사와 성전은 예배를 위한 수단이지 본질이 아닙니다. 본질은 다른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구원할 것이고,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할 것이라’(15) 약속하십니다. 마치 시인의 요청에 응답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의 순간에 당신을 부르라고 격려하십니다. 이처럼 언약 관계 안에서 결합된 상호 신뢰는 하나님을 부르는 성도의 부름에서 시작됩니다. 성도의 부름은 구원이며, 구원받은 이후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감격의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것, 그것이 성도들에게 요청하신 제사이며 예배의 본질입니다.

 

악인 심판과 올바른 예배(16-23)

성도들이 세상에서 존중을 받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또 그 말씀을 귀하게 여기는 것 같지만 실제로 살아가는 방식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귀 기울여 보고, 엄중한 경고롤 삼도록 해야 합니다.

 

16○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17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18도둑을 본즉 그와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동료가 되며 19네 입을 악에게 내어 주고 네 혀로 거짓을 꾸미며 20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머니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21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 22○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23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16-23)

 

앞에서 이스라엘의 제사에 대해 책망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악한 삶에 대해 책망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악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례를 전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죄뇌는 자들입니다.

 

(1) 악인을 향한 경고(16-20)

 

하나님이 ‘악인에게’ 말씀하십니다(16a). 악인은 누구입니까? 16절 시행의 핵심은 악인의 정체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이 시의 주된 흐름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 특히 율법 운운하는 자에게 엄중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데 있습니다. 대체 왜 네가 내 율례를 열거하고 네 입에 내 언약을 담느냐?(16bc) 하나님께서 악인이라고 부르는 자들이 ‘율례’를 열거하고 높이는 사람들이라니 아이러니합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자들, 곧 제사장이나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들을 향한 혹독한 경고입니다. 악인의 내면이 들춰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진다’(17)고 하십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도둑과 불의한 결탁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한 패거리가 됩니다(18). 악에게 입을 내주고 혀로는 거짓을 꾸미며(19) 끝없이 자기 형제를 비방하고 앉아 있습니다(20). 결국 악인은 율법을 떠들어대면서 음흉한 타락의 길에 주저앉은 언약 백성이요 종교 엘리트 집단에 속한 자였습니다.

 

(2) 하나님의 심판과 올바른 예배(21-23)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죄를 열거하셨지만 그동안 참으시며 잠잠하셨습니다. 악인은 그동안 하나님의 침묵과 연기된 심판을 착각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인내는 끝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죄를 낱낱이 드러내겠다’고 하십니다(21). 마지막으로 백성 전체에게 호소하십니다. ‘제발 이것을 깊이 생각하라, 하나님을 잊은 자들아’(22a).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을 것이고, 건져낼 자가 없을 것’이라 경고하십니다(22b). 옛적 모세가 여러 번 ‘하나님을 잊지 말라’ 반복했지만(신 6:12; 8:11,14,19), 사람들은 입으로만 떠들었을 뿐입니다. 그러면 구원은 불가능합니까? 다행히 길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로 예배하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할 것이라고(23a; 14-15)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언약의 요구 사항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가장 중하게 여기신 것은 백성들의 자발적인 감사였습니다. 감사는 일방적으로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감사를 통해 삶의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따라서 감사는 하나님을 향함이면서 자신을 위함입니다.


진정한 감동과 뜨거움이 있는 예배는 예배 장소나 순서, 음악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상 가운데 최선을 다해 주님의 길을 따르다가 모인 예배자들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시편 50편은 외적인 형식만을 갖춰 놓고 진정한 감사와 찬송이 없는 제자, 곧 내면적인 준비가 없이 제물만을 준비해서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께서는 형식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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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49-01)


유일한 소망이신 하나님

시편 49편 1-20절


 

물질만능주의에 젖어 있는 세상은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물질이라고 말합니다. 물질이 많아야 힘이 있다고 생각하고, 물질이 많아야 성공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질이 절대적인 신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교회마저 물질에 흔들립니다.

 

 

  • 이 시는 구약의 지혜서처럼 삶의 진실과 진리를 노래한 이른바 지혜시입니다. 무엇보다 보편적 인간의 죽을 운명과 재산 축적과 부를 향한 집착의 허망함, 삶의 오묘함을 악기로 연주하며 노래로 전합니다. 시인은 사람이 존귀하나 수수께끼 같은 삶의 오묘한 진실을 깨닫지 못하면 짐승과 같을 뿐이라고 노래합니다. 마치 낭만을 옷으로 입는 저항시인처럼 말입니다.

 

서문: 들어라, 뭇 백성들아(1-4)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인생의 진리를 깨닫고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지혜의 교훈을 무시하면 어리석은 삶을 살게 됩니다. 지혜의 말씀은 인생에 깊은 통찰력을 줍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인생의 분명한 길을 보여줍니다. 지혜의 말씀을 사랑합시다.

 

1뭇 백성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모두 귀를 기울이라 2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3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로다 4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1-4)

 

‘이것을 들어라, 뭇 백성들아’(1a). 첫마디가 잠언에 등장하는 지혜 교사의 부름 같습니다(잠 1:6,8). 둘째 소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들어라, 세상의 모든 거주민들아’(1b). 시인은 지혜 교사가 학생들을 부르듯 모든 백성과 세상 거주민들에게 듣기를 청합니다. 귀천빈부를 막론하고 다 들으라고 합니다(2). 귀한 사람이건 천한 사람이건 ‘하나 되어’(야하드) 들어야 합니다. 시인은 높고 낮거나 가난하거나 부하거나를 막론하고 일심동체가 되어 평등하게 지혜 교훈을 듣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언어는 간단하고 함축적입니다. ‘내 입이 지혜를 말하겠고/내 마음의 묵상은 명철이라’(3). ‘입’은 ‘마음의 묵상’을 밖으로 말로 분출시키는 신체 기관입니다. 복수명사 ‘지혜들’(호크모트)과 ‘명철들’(테부노트)이 평행관계로 배열되어 동의어나 마찬가지입니다. 둘 다 총명함과 관계된 말로, 분별력이나 깨달음, 삶의 기술이나 예술적인 능력까지 관련됩니다. 때문에 지혜와 명철은 잠언에서 자주 한 쌍으로 언급됩니다(잠 2:2,6; 3:13,19; 5:1;8:1; 10:23; 21:30; 24:3). 특히 지혜는 삶에서 경험의 총체를 반영하기에 사전적인 의미를 넘어섭니다. 시인은 삶의 깊은 지혜를 말하려고 자기 자신도 ‘비유’(마샬)에 귀를 기울일 것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겠다(4)고 합니다. ‘비유’(마샬)는 지혜서의 대표인 잠언의 제목과 같습니다. 실제로 잠언은 많은 비유의 말들로 넘쳐납니다. 이때 비유는 해석하기 까다로운 ‘수수께끼’(삿 4:12)와 난제(왕상 10:1)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시인이 지혜 교사처럼 삶의 난제들을 악기를 연주하며 풀어준다고 하니 삶의 낭만과 난제가 교차하는 흥미로운 광경입니다.

 

사람은 존귀하나 짐승 같은 존재(5-12)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떠받들어 숭배합니다. 하나님보다 돈과 물질을 좇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돈에게 지배를 당하며 살아갑니다. 돈에 의한, 돈을 위한, 돈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재물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사용하도록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유가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인생 최대의 오산입니다.

 

5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6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7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8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9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10그러나 그는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 11그러나 그들의 속 생각에 그들의 집은 영원히 있고 그들의 거처는 대대에 이르리라 하여 그들의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부르도다 12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5-12)

 

시인은 생명을 속량하는 값은 너무나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지구상의 모든 재물을 다 소유했다고 해도 단 하나의 생명도 속량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생명의 속전을 영원히 마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당에 오신 것입니다.

 

(1) 대체 불가능한 생명(5-8)

 

시인은 노래합니다. ‘어찌 내가 환난의 날들을 두려워할까/악이 내 뒤꿈치를 에워쌀 때’(5). 매우 모호한 시적 표현입니다. 질문 형식이지만, 이는 온갖 악이 발끝 가까이 집요하게 에워싸는 불의한 세상살이에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시인은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6). 재물의 불필요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재물’은 단순히 물질적인 풍요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물질적 풍요가 지닌 힘, 곧 권력을 의지하는 욕망과 자랑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따라서 시인은 힘과 많은 재산을 가졌어도 생명을 구할 수 없는 무능함을 강조합니다(6-8). 사람은 누구 한 사람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 몸값을 치르는 대가를 지불한다 해도 한 생명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위한 목숨(생명)값을 하나님께 드리지도 못합니다(7). 목숨 값은 너무 귀중하여 그 값은 영원히 마련될 수 없습니다(8). 이는 돈과 권력의 정점을 찍은 사람조차 자기 생명 값을 치르고 생명을 연장시킬 수 없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시인은 인간의 무능함을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2)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9-12)

 

시인은 인간의 필연적인 운명을 노래합니다. 사람이 영원히 살면서 죽음을 피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9). 지혜자들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똑같이 망하고, 그들의 재물은 다른 사람들에게 남기고 갈 뿐입니다(10).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이 똑같이 존재합니다. 죽음은 모든 차이와 불평등을 없애는 수평 장치입니다. 그리고 부자들은 속으로 자기들의 집이 영원할 것이라고, 자기들의 거처는 세대를 거듭하며 영원히 있을 것처럼 자기들 땅에 자기 이름을 붙여 부릅니다(11). 이는 자기 토지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입니다. 부자들은 세대를 거듭하여 토지에 이름이 새겨지듯 영원히 기억되길 바라는 열망을 가졌지만, 시인은 결정적인 한마디로 소유의 무상성과 허망함을 꼬집어 노래합니다. ‘사람은 존귀하나 오래 머무르지 못할 것이요/짐승들과 똑같이 소멸될 것이라’(12). 인류를 뜻하는 ‘아담’, 곧 사람은 하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존재입니다(창 1:27). 그러나 사람은 다시 땅의 먼지로 돌아갈 운명을 지닌 채 살아갑니다(창 3:19). 인류는 도축될 짐승처럼 죽음을 맞이할 뿐만 아니라 언제 소멸될지도 모르는 지독히 허무한 존재입니다(참조. 전 3:19).

 

깨달음 없는 사람의 짐승 같은 운명(13-20)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들의 소유한 재물을 소망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많은 재물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도 역시 부하게 되는 것을 바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재물은 죽음 앞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인생의 유일한 소망이십니다.

 

13○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셀라) 14그들은 양 같이 스올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그들의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들이 아침에 그들을 다스리리니 그들의 아름다움은 소멸하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되리라 15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셀라) 16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17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18그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19그들은 그들의 역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20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13-20)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을 믿고 사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어떤 대상을 우상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그 대상은 바로 ‘돈’입니다.

 

(1) 어리석은 자의 운명(13-15)

 

시인에게 보편적인 인류의 운명이나 어리석은 자의 길들이 다를 게 없습니다(13a). ‘어리석음’(케쎌)은 아둔함이지만, 동시에 지나친 자기 확신을 뜻합니다. 어리석음은 곧 지나친 자기 확신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을 뒤따르며 그들의 말을 즐기는 것도(13b) 마찬가지입니다. 시인은 어리석은 자의 길들이 마치 스올로 향하는 양 무리처럼(14a), ‘사망이 그들의 목자’라고 합니다(14b). 목자가 양 떼를 돌봄이 마땅한데 죽음이 어리석은 자들을 돌봅니다. 충격적입니다. 더군다나 정직한 자들이 아침에 그들을 다스린다 해도(14c), 그들의 아름다움은 시들어버리고(14d),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됩니다(14e). 그러니까 정직한 자들이 고통의 밤을 지나 희망을 기대할 아침이 찾아와도, 죽은 자들이 거처하는 ‘지하세계’(스올)는 어리석은 자의 마지막 종착지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운명은 악인과 다릅니다. ‘실로 하나님이 나의 생명을 속량할 것이라/스올의 땅으로부터 참으로 그가 나를 건져내실 것이라’(15). ‘영접하시리니’는 ‘속량하다’(파다)라는 말인데 몸값을 치르고 자유롭게 함을 뜻합니다. 시인은 사람이 아무도 생명을 속량할 수 없음을, 생명은 너무 귀중하여 값을 매길 수 없다는 점을 다시 반복합니다(7-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들의 세계’(스올)에서 생명을 구해주실 뿐만 아니라 꼭 붙드실 것을 믿습니다.

 

(2) 영광에서 분리되는 죽을 운명(16-20)

 

시인의 첫마디는 ‘두려워하지 말라’입니다. 어떤 사람이 부자가 되어 그 집의 영광이 장엄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16). 일반적으로 우리는 재산가들을 부러워합니다. 부러움이 지나치면 부자에게 이용당하거나 고용되거나 노예가 됩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 이유를 말합니다. 부자라도 죽으면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고 그 영광을 무덤까지 가져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17; 참조. 전 5:15). 아무리 갑부라도 사는 동안 자축하며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을지언정(18) 영원히 빛을 볼 수 없는 곳에 묻힌 조상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19).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부자든 빈자든 누구나 맞이해야 할 운명, 죽음을 누가 거스를 수 있습니까? 따라서 시인은 다시 강조합니다. 12절 시행을 살짝 변형시킨 반복입니다. ‘사람이 존귀하나 깨달음이 없으면/죽게 될 짐승들과 똑같다’(20). 시인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죽게 될 공동운명체라고 말하지만, 분명히 다른 점이 있음을 봅니다. 사람과 짐승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은 같지만, 인간에게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깊이 생각하고 이해하고 상상하고 질문하고 자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깨달음 없는 사람은 짐승입니다.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할 수 없는 일이 많습니다. 재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물질은 세상의 주인이 아닙니다.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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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0-02)

 


살아있어 능력 있는 복음

사도행전 20장 13-27절


 

엣날에 신문을 받아보면 많은 사람이 먼저 보는 것이 ‘오늘의 운세’였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자신들의 미래와 또 어떤 방향으로 나갈까 하는 궁금한 의문들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확실한 미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다 죽습니다.’ 그리고 때문에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관심은 어떻게 이 세상을 편하고 안락하고 멋있게 그리고 잘 살 것인지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삶은 그런 삶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았겠습니까?

 

  • 본문에는 사도 바울은 오순절이 되기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여행을 재촉합니다. 그는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하여 석별의 정을 나눕니다. 장로들은 에베소에서의 사역과 위험이 기다리는 앞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명에 대한 결의를 다지고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별을 고합니다.

 

에베소에서의 목회를 회고하는 바울(17-21)

사명자로서 일생일대의 결단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인입니다. 증인이 입을 다물고 있거나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은, 또 다른 죄입니다. 지금도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듣지 못해 죽어 가는 사람이 이곳저곳에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현장에 보냄을 받은 예수님의 증인들입니다.

 

17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18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19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17-21)

 

에베소에 가면 예상치 않은 일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배가 출항하기까지 남은 시간에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러서 권면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17). 이를 위해 바울은 동역자 중 한 명을 에베소에 보냅니다. 장로들의 주된 역할은 교회를 목양하고 진리에 따라 성도들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아시아 지역에 도착한 첫날부터 어떤 태도로 목회했는지를 장로들에게 상기시킵니다. 바울은 이런 태도를 설교의 시작(18-21)과 마지막(31-35)에 배치함으로써 장로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모본으로 삼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19절에서 종으로서 주를 섬긴 것을 강조합니다. 종으로서의 사역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입니다(참조. 눅 22:26-27). 바울은 종으로서 복음을 증언하는 일(행 20:24)과 동료들의 필요를 채우는 섬김의 일(행 20:34)을 하였습니다. 섬기는 삶은 세 가지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곧 겸손과 눈물과 시험을 견디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시험으로 생긴 시련을 겪으면서도 처음부터 겸손과 눈물로 주를 섬겼습니다(행 13:50; 14:2–7,19; 17:5-9,13; 18:6,12-17; 19:9; 20:3).

 

바울이 헌신적으로 전한 메시지는 교회에 ‘유익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죄가 용서함을 받고, 믿는 자들은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게 되고, 다가올 심판에서 구원을 얻게 된다는 측면에서 복음은 매우 유익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복음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따라 살도록 인도하기 때문에, 즉 거룩하지 않은 세상에서 거룩한 인생을 살도록 돕기 때문에 모두에게 유익합니다. 복음이 이처럼 유익한 것이므로 바울은 침묵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서 장로들이 복음의 진리 전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복음의 진리를 희석시킬 위험성이 있었습니다(참조, 고전 2:17: 4:2-5: 4:16).

21절은 20절과 평행을 이룹니다. 바울이 20절에서 공개적인 장소와 가정에서 물러서지 않고 담대히 전하고 가르친 ‘유익한 것’은 21절에서 ‘회개’와 ‘믿음’으로 표현됩니다. 말하자면, 회개와 믿음은 바울이 20절에서 말한 ‘유익한 것’을 요약하는 내용입니다. 회개는 방향의 전환, 즉 돌이키는 것을 의미하므로, 회개에는 떠나야 할 대상이 있으며 돌아가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회개(행 17:30:26:18, 20)와 믿음(행 11:17; 14:23; 16:31; 20:21; 24:24; 갈 2:16; 3:26; 빌 1:29)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행 2:38; 3:19; 14:15; 17:30-31). 바울은 회개를 ‘하나님을 향한’ 것으로(개역개정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대상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밝힙니다. 회개는 의존하던 것에서 돌아서서 예수께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적대적인 방향(우상: 행 14:15; 17:30-31)에서 돌아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습니다(행 13:38-41; 16:31; 17:2-3).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을 향해 돌아와야(return) 하고 이방인들은 그들이 섬기던 신들에서 참 하나님을 향해 돌이켜야 합니다(turn). 이처럼 회개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필요한 메시지로서(참조, 롬 3:19-4:25; 10:8-13), 바울은 성도들이 모인 가정과 믿지 않는 자들이 모이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회개와 믿음을 전했습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곧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마다 각기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의존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복음이 진정으로 유익한 것이라고 이들을 가르치려면, 겸손과 눈물과 시험을 견디는 것이 뒤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외의 것이 유익한 줄 알고 그런 것에 의존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언제나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유익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일이라는 확신을 갖습니다. 또한 성도들은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것으로부터 계속해서 돌이켜야 합니다. 그래서 회개와 믿음은 신자들에게도 불변의 명령입니다(참조, 롬 2:4; 고후 7:9-10; 12:21: 딤후 2:25-26).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은 언제나 진정으로 유익한 것을 겸손과 눈물과 참음으로 가르치는 데 있습니다.

 

미래를 하나님의 말씀에 맡겨진 바울(22-27)

오늘날 물질만능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인생을 즐기며 자신을 위한 삶을 살라는 유혹을 받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러한 분위기에 휩쓸려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오직 성도의 길을 걸어가라고 가르쳐 줍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에 충성하여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죽기까지 충성한 사도 바울의 본을 끝까지 따라가야 합니다.

 

22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5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26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22-27)

 

사도 바울은 거리낌 없이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복음에 유익한 것이라면 어디에 있든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복음 증거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울 때도 있었지만 그것이 사명이었기에 결코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1) 예루살렘에 있게 될 바울(22-24)

 

바울은 성령이 인도하시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말합니다(21:4, 11). ‘매다’, ‘사로잡다’, ‘묶다’ 등의 뜻인 ‘데오(δεω)’의 수동태를 사용해서 자신의 계획과 뜻이 아니라 성령님에 의해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는 것임을 표현합니다. 아울러 완료형(데데메노스,δεδεμενος)을 사용하여 성령의 뜻이 이미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성령의 뜻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향하지만, 그곳에서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고 말합니다(22b). 투옥되고 환난을 겪게 되는 것(23)은 분명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합니다. 바울의 관심사는 자신의 목숨이 아닙니다. 운동장의 육상 선수처럼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코스를 완주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고난이 있다고 하여 경주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끝내 로마까지 완주할 것을 결심합니다(19:21). 자신이 이 사명을 예수님께로부터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사명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하고 이 사명을 마치는 것이 자신의 일임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께 소속된 육상 선수와 같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목표, 곧 예수님께 받은 사명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를 통해 죄를 용서받게 되고 새 생명을 얻게 된다는 사실은 참 은혜이며, 복음의 핵심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인생이란, 내 계획을 단순히 성령이 도와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성령의 인도하심에 내가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 계획대로 잘 풀리지 않거나 난관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믿는 신자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조바심을 내며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과 역경이 찾아오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코스를 완주할 용기를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2) 과거 사역에 대한 확신(25-27)

 

바울의 에베소 사역은 ‘그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한 것으로 요약됩니다(행 19:8; 28:23,31). 복음이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소식입니다(사 52:7).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 곧 하나님 나라를 전한다는 것은 복음을 전한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목회에서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 깨끗하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 깨끗하다는 표현은 에베소에서 영적으로 (영원히) 죽은 자들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에스겔 3:17-21에 있는 파수꾼과 같이 생각합니다. 만일 백성에게 경고하지 않아서 악인이 ‘죄악 중에서’ 죽게 되면, 선지자는 악인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겔 3:18). 그러나 파수꾼이 악한 자들에게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악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으십니다(19).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울은 다가을 심판의 위험을 알려야 하는 영적인 파수꾼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뜻(계획)을 물러서지 않고 전했습니다(27). 만일 에베소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아 심판을 받는 운명에 처한다면, 그것은 바울의 책임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 나라, 즉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역을 신실하게 수행했음을 확신합니다. 파수꾼의 역할은 하나님 나라(25), 즉 하나님이 통치하다는 소식(=복음)을 물러서지 않고(27) 증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식만이 개인과 사회의 유일한 소망임을 담대히 전하지 않는 교회와 복음의 일꾼들하거나 그런 것을 열심히 가르치는 사람들이 받을 책에게 하나님은 책임을 물으십니다. 복음 아닌 것에 의존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복음 증거자는 복음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자기 인생에 대한 진지한 각오를 다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바울 사도로부터 이러한 확신과 각오를 본받아야 합니다. 험한 세상에서 열매 맺는 인생이 되기 위해 일사각오의 믿음으로 달려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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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0-01)


환난 중에도 편만하게 확산된 교회

사도행전 20장 1-16절


 

복음의 능력은 단순히 전달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 나타나는 능력입니다. 성령은 복음의 증거를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동역자들을 주시며,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복음의 열정이 가득할 때 그 만큼 시험도 가득합니다.

 

  • 3차 선교여행 중에 있는 바울과 선교팀은 마게도냐, 헬라, 드로아의 교회들을 격려합니다(20:1-12). 복음 증거에 따른 능력이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 헬라, 드로아로 이어지는 선교 여행을 수행합니다. 드로아에서는 바울의 강론을 듣던 청년 유두고가 졸다가 떨어져 죽는 사건이 발생하지만, 바울이 유두고를 다시 살리고, 교회는 이 사건으로 큰 위로를 받습니다.

 

중단할 수 없는 복음(1-3)

길이 순조로울 때든지 막힐 때든지 하나님을 더 깊은 뜻을 그때마다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경우든지 우리는 충성할 뿐이고, 하나님의 더 깊은 지혜를 신뢰하면서 막히면 낙담하기보다는 돌아가고 물러나고 멈추었다 가면 됩니다. 바울은 사역에는 여러 가지 난관이었습니다. 난관이 있을 때, 그곳을 피하여 새로운 길로 나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2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3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1-3)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요 사태는, 바울을 에베소를 떠날 시간이 되었다는 사인이었습니다. 서기장의 탁월한 개인으로 대소동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바울은 원래 의도대로 마게도냐로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소요로 두려움을 느꼈을 정들었던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마게도냐로 떠났습니다(1).

마게도냐에 도착한 바울은 목적지인 예루살렘(행 19:21)에 가는 도중에 2차 전도여행 때 세운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제자들을 권면했습니다. 저자는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라 애매하게 기록하지만, 빌립보(행 16:11-40), 데살로니가 (행 17:1-9), 베뢰아(행 17:01-15) 등의 교회들을 방문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곳에서 또한 제자들을 많은 권면을 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을 때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마게도냐로 먼저 보내 사전 준비 작업을 하게 했습니다. 이들이 미리 가서 준비한 대로 각 도시 방문을 추진했을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그리스, 아가야 지역에서 3개월 동안 머물렀습니다(주후 56-57년). 아덴(행 17:16-17,32-34), 겐그레아(롬 16:1; 참조. 행 18:18). 고린도(행 18:1-22)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권면과 격려는 바울의 사역과 설교에서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사도행전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마게도냐에서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그리스의 고린도에서는 로마서를 작성합니다(참조 롬 16:1,23). 바울은 언제나 자신의 안전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곧 교회의 굳건함에 관심을 두고 이 일을 위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그 후에 바울은 배를 타고 수리아 지역으로 가려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3). 그곳에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가 있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의 여행 여정을 파악하고 배에서 은밀히 암살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여정을 바꾸어 다른 지역에서 사역을 계획합니다. 그 결과로 마게도냐로 돌아가서 드로아로 돌아온 것입니다. 간략하게 설명된 여정이지만, 부지런히 교회와 영혼을 돌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모든 부분에서 열정의 지도자였습니다. 열정적인 전도자에게도 큰 시험거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항상 그렇게 순조롭지 않습니다. 순조로울 때든지 막힐 때든지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복음 증거는 결코 중단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충성할 뿐이고, 하나님의 더 깊은 뜻을 순종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신뢰면서 나간다면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성취할 것입니다. 복음 증거에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은 지치지 않도록 능력을 입혀 주십니다.

 

함께 사역하게 하는 복음(4-6)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동역자를 보내 주십니다. 동역자들로 인해 복음 증거는 더욱 효과적으로 중단 없이 이뤄집니다. 여러분의 동역자는 누구입니까? 그와 함께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군들에게 동역자를 허락하셨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증거를 하는 동안 이처럼 선교한 지역 출신의 여러 사람들과 동행합니다(4). 바울에게는 그와 함께 전도자의 길을 가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함께 움직였고, 최선을 다해 바울을 섬겼습니다.

 

4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5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6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4-6)

 

바울 주변에는 돕는 동역자들이 많았습니다. 그중 몇몇은 다른 기록에도 나와 있듯이 바울의 제자로서 또는 돕는 사람으로서 여러 가지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복음의 증거는 힘든 일이지만 동역자가 있으면 외롭지 않습니다.

디모데와 에라스도는 먼저 마게도냐로 먼저 가서 바울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을 마련했습니다(사도행전 19:22). 그곳에서 이방인 성도들 중에 대표할 만한 일곱 명을 세워 드로아에서 바울을 기다립니다. 그들은 “우리”라고 표현된 바울의 측근들은 빌립보에서 무교절(유월절)을 지킨 뒤 배를 타고 그곳으로 건너갑니다.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아내는 바울의 모습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이방인을 제물로 바치는 복음의 제사장으로서(로마서 15:16), 이방인들과 유대인 사이의 장벽을 허무는 평화의 중재자로 알고(에베소서 2:13-15), 살기 가득한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다시 살리는 두기고 사건(7-12)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큰 시험거리들이 있습니다. 시험 앞에서 당신의 열정을 포기하지 마시고, 다시 일어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사역은 다른 영혼뿐 아니라 자신의 영혼도 살릴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살립니다.

 

7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8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9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10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11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2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7-12)

 

바울 일행은 드로아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 기간에도 지역 성도들과의 고별의 만남을 가졌습니다(6). 사역을 멈추지 않고 계속적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떠나기 전날 바울의 일정 때문에 강론은 밤중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바울의 설교를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말씀을 듣기가 쉽지 않는 상황이 연출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큰 시련이 자신을 기다릴 줄 알았기 때문에 더 열정적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때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창에 걸터앉아 있던 유두고라는 청년이 변을 당합니다. 바울의 길어진 설교를 견디지 못해 졸다가 그만 삼 층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말씀을 듣다가 창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바울의 강론은 중단되었고 사람들은 두려움 가운데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것은 공동체에 큰 시험거리가 되었습니다. 열정에 사람이 열정적으로 말씀을 전하려하고, 그 말씀을 열심히 들으려고 했던 공동체가 큰 시험거리가 다가 온 것입니다.

 

바울이 강론 중단하고 죽은 청년의 몸을 안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10)라고 청중에게 말했습니다. 분명히 다른 사람들이 살펴 볼 때는 유두고는 죽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변에 비아냥거린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유두고는 다시 살아났고 강론은 진행되었습니다. 이 일로 사람들은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시간은 “그 주간의 첫날”(7)이라고 소개합니다. ‘주일(主日)’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모인 날입니다. 생명이 있어야할 날에 죽임이 있자, 공동체는 큰 시험에 빠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일에 부활의 예수님의 생명을 다시 유두고에게 주심으로서 그 공동체를 위로하신 것입니다.

 

드로아에서 밀레도에 도착하는 ‘우리’(13-16)

성도는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시간을 아끼고 충성해야 합니다. 성도에게는 하나님께 받은 사명과 계획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여유로운 여행이기보다 주님께 받은 사명을 이루기 위한 경주입니다(히 12:1). 바울에게는 속히 가야 할 곳이 있고, 마쳐야 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13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14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가서 15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16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13-16)

 

바울은 3차 선교 여행의 귀환 경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3-15절에서 5개 도시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는 바울의 신속한 이동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서두른 이유는 오순절 이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3-16절은 드로아에서 밀레도까지 이어지는 선교팀의 여정을 기록합니다. 이 과정에서 선교 방식이 드러납니다. 첫째, ‘우리’, 즉 선교팀이 강조됩니다. 독자들은 14절에 다시 한 번 등장하는 ‘우리’라는 용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여정의 계획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13-16절에 나타난 선교팀의 여정을 보면, 바울은 앗소에서 ‘우리’ 일행을 만났고, 모두가 배를 타고 미둘레네에 갔습니다. 미둘레네를 떠나 다음 날 기오(호머의 출생지)에 이르렀고, 다음 날에는 사모(피타고라스의 출생지)에, 다음 날에는 밀레도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모습은 세 달을 머문 헬라(행 20:2-3)와 일주일을 머문 드로아(행 20:6)의 경우와 다릅니다. 선교팀은 성도들이 있는 곳에서는 시간을 보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급히 이동했습니다. 물론 선교팀은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급히 움직였는데, 이후에도 두로(행 21:4-6)와 가이사랴(행 21:10-12)에서 여러 날을 머물렀습니다. 이처럼 바울과 선교팀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세우는 목적을 위해 시간을 집중했습니다. 선교와 목회의 최우선 과제는 사람을 살리며 회복하고 세우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시간을 아끼고 집중해야 합니다.

셋째, 설교뿐 아니라 형제애가 신자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바울은 오순절(주후 57년 5월 29일)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 서둘렀습니다. 누가는 여기서 ‘에베소를 지나’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있는 에베소를 방문하고 싶었음을 암시합니다. 큰 도시인 에베소에 가면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줄 알고 있는 바울은 에베소로 가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이방 교회들을 대표하는 일곱 명이 헌금을 직접 전달할 때 예루살렘 교회가 말할 수 없는 용기와 위로를 얻게 될 것이라 바울은 확신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가족과 공동체에서 멀어져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예루살렘의 기근은 성도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행 11:27-30). 바울은 이방 교회의 선물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가 오순절이라는 명절에 기쁨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도록 서둘렀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의 임재로 감격을 경험했던 교회(행 2:42-47)는 새로운 오순절에도 위로와 기쁨의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유대 교회의 헌신으로 이방 교회가 개척됐고, 이제는 이방 교회의 헌신으로 유대 교회가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이 마음으로 쏟는 헌신이 어려움 가운데 있는 형제에게는 엄청난 힘이 된다. 형제애를 통해서 헌신과 위로가 끊임없이 순환될 수 있습니다.


복음은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 증거는 사람이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사람을 통해 전달됩니다. 복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쉼 없이 전하기 위해 동역해야 합니다. 이로써 잃어버린 영혼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은혜가 나타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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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9-03)

 


우상 장사 데메드리오에 의한 에베소 소동

사도행전 19장 23-41절


 

믿음 생활은 장애물 경주와 같습니다. 목표를 향해 달려갈 때 우리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있음을 예상해야 합니다. 달리면서 장애물을 뛰어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목표를 향해 가지 위해서는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한순간 한순간 힘차게 달려가면 장애물 하나 하나를 넘어서면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해 큰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 에베소에서 바울의 성공적인 선교 사역을 이루어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막 에베소를 떠나려 할 시점에 큰 소동에 직면합니다. 바울의 사역 때문에 경제적인 위기를 느낀 은장색 데메드리오(Demetrius)는 사람들을 선동해 소요를 일으킵니다. 흥분한 무리가 바울의 동역자들을 붙잡고서 연극장에 모입니다. 하지만 일촉직발의 위험한 상황에서 에베소 관리인 중 한 사람 서기장의 지혜로운 발언으로 소요는 그치고 흩어집니다.

 

선한 결심의 장애물(23-27)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자신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 가치관이 공동체를 생각하는 것보다 더 자신의 이익을 대변할 때, 이기주의자라고 말합니다. 성도들은 성경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갑니다. 자신의 이익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회피하거나 거부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회피하기 위해 어떻게 자신을 합리화하곤 합니까?

 

23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24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25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26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27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23-27)

 

바울은 에베소에서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작정하고 또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얼마간 에베소에서 잠시 머물면서 복음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를 위한 바울의 원대한 계획은 뜻하지 않은 장애물에 부딪혔습니다. 에베소 내에 많은 사람이 우상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이것 때문에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은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바로 그동안 우상을 만든 사람들이었습니다.

 

(1) 데메드리오에 의한 소동(23-24)

 

당시 에베소의 주요 사업은 아데미(Artemis)의 신상 모형을 파는 것이었습니다. 우상을 만들고 상업적인 수익을 얻던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 데메드리오 사람은 수익이 점점 감소 되자, 그는 같은 업종에 일하는 세공업자들을 충돌 질해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바울 때문에 이 사업에 지장이 생겼다면서 사람들을 선동해 에베소에 소동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에베소에서 생긴 소요는 다른 도시들에서 바울이 경험했던 위기나 어려움과는 다른 원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의 폭동 원인이 지극히 종교적인 이유에서였다면, 에베소에서는 종교적인 색채로 위장한 경제적인 손실이 근본적인 이유였습니다.

 

(2) 소공품은 신이 아니다(25-26)

 

은 세공업자 대표인 데메드리오는 직공들과 판매업자들을 소집했습니다. 27절까지 이어지는 그이 연설은 바울의 기독교 선교 활동으로 인해 아데미와 관련된 종교적·문화적·경제적 영향력이 위축되고 있다는 위기를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데메드리오는 먼저 그들이 여기 모인 이유를 확인합니다. 그들은 모두 여신 아데미 숭배와 연관된 산업에 생활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활동은 이 산업에 막대한 타격을 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에 감화되었다는 사실을 데메드리오는 알고 있습니다(10). 그는 바울이 사람들에게 아데미는 신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17:24-25, 29). 에베소와 아시아 속주민 중 이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은 은으로 만든 아데미 신상 혹은 신전 모형을 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바울의 사역이 가져온 변화(27)

 

데메드리오가 하는 말에 따르면, 바울의 선교 활동은 세 가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첫째, 아데미 신상과 신전의 모형을 만드는 일의 가치가 폄하되고 직공과 판매업자 들의 생계도 위협받았습니다. 둘째, 에베소 시민과 각 속주에서 에베소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아데미 신전에 더 이상가고 싶어 하지 않게 됩니다. 이 또한 매출 감소로 이어질 것입니다. 셋째, 아데미에 대한 경외심이 빠른 속도로 사자집니다. 이로 인해 아데미를 도시의 신으로 모시고 있는 에베소의 영향력이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능력이고 살아 운동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능력을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악한 세력은 두렵고 놀라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해 귀한 결심을 할 때 사탄의 공격이 뒤따릅니다. 바로 영적 전쟁의 시작입니다. 장애물이 나타난다고 해서 포기하면 안 됩니다. 선한 결심은 귀한 희생을 통해 열매를 맺습니다.

 

복음으로 인한 소동(28-32)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장애물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에 의지한다는 것은 장애물을 넘어서는 결정할 때마다 말씀을 통한 결정을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의 결정권을 가질 때 주변 환경으로 경정하십니까? 군중심리에 의해 결정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결정합니까? 결정하는 방법은 당신의 인생의 가치관이 됩니다.

 

28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29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30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31또 아시아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32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28-32)

 

믿는 자들은 종종 세상의 반대를 경험합니다. 그것은 때로 우리를 낙심시키고 주눅 들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복음의 능력과 그 실제적 도전을 방증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욕망과 무리의식에 사로잡힌 자들을 구원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 아데미를 부르는 에베소 사람들(28-29)

 

데메드리오의 선동으로 에베소 사람들은 소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28)라고 외치며 무서운 폭도로 변하기 했습니다. 이 외침에서 에베소 시민들이 지니고 있던 그 시에 대한 자긍심과 아데미에 대한 경외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데미는 에베소를 세웠고 보호해 주는 수호신으로 여겨졌고, 그 신의 얼굴은 주화와 공문서에 그려져 있었습니다. 이 외침은 순전히 종교적 신앙을 독려하는 것만이 아니라 애국심을 자극하는 구호였습니다.

곧 온 시내가 요란해졌고, 군종들은 바울을 찾았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함께 다니던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고전 1:14)와 아리스다고(20:4; 27:2; 골 4:10; 몬 1:24)를 잡아 원형극장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 극장은 2만 명쯤 모인 곳입니다.

 

(2) 바울을 말리는 제자와 친구들(30-32)

 

바울의 동역자들이 죽게 될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광경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광란으로 변한 군중에게 들어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만류했습니다. 그래서 ‘아시아 관리’인 그의 친구들도 바울을 만류했습니다. ‘아시아 관리’는 1세기 에베소의 고위 공무원을 의미합니다. 그만큼 바울의 영향력이 상류층까지 미쳤음을 사사합니다. 군중심리는 무섭게 난폭해졌고,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 중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했다”는 묘사는 이 모임의 혼란과 무질서를 짐작하게 합니다.

 

피할 길을 주는 하나님(33-41)

진리는 어두움을 방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두움에 속한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자들은 자신의 이권을 방해하는 진리를 비난합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들은 진리를 위해 방어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 어떤 생각이 듭니까? 그들이 아무리 기세등등해도 종국에는 꺾일 것을 확신합니까?

 

33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변명하려 하나 34그들은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더니 35서기장이 무리를 진정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시가 큰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36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37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비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붙잡아 왔으니 38만일 데메드리오와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고발할 것이 있으면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39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할지라 40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는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자료가 없다 하고 41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33-41)

 

복음은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들춰내고 그것을 버리라고 요구합니다. 우리 안에 숨겨진 우상, 특히 돈에 대한 탐욕과 익숙한 죄의 습관들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와 영적 부요함을 더욱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1) 두 시간 동안의 외침(33-34)

 

군중 가운데에는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은 세공업자나 판매업자의 공동체에 고소된 사람들일 수도 있고, 단순히 거리에서 우연히 군중에 가담한 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 중 알렉산더라는 사람이 유대인의 대표자로 추천받아 나섰습니다. 이 이름은 바울이 에베소에 있던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들에 두 번 등장하고(딤전 1:20; 딤후 4:14), 그 중 두 번째 구절에 ‘구리 세공업자’라고 언급되지만, 그가 그리스도인인지 혹은 여기 사도행전에 언급된 알렉산더와 동일 인물인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아마 추측건대, 동일 인물인 듯싶습니다.

알렉산더는 군중 앞에서 발언하려고 시도했지만, 군중은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는 구호를 두 시간 동안 계속 외쳤습니다. 알렉산더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해쓴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 바울이 전하는 도가 유대인들의 신앙과 다르며 에베소 시민들의 공공이익에 해가 된다는 주장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2) 서기장의 활약(35-41)

 

마침내 시정 당국의 대표자인 ‘서기장’이 나섰습니다. 그는 먼저 아데미의 ‘신전지기’로서 에베소의 특권을 상기시킵니다(35). 그렇게 군중의 공감을 얻고 난 후, 그는 당일 군중의 집회가 합당한 사유와 목적이 없는 경솔한 행동이며(36), 데미드리오가 대표하는 직공 공동체의 주장은 공식 재판을 통해 제출될 수 있다고 설득합니다(38). 만약 바울이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했거나 아데미를 공식적으로 비방했다는 증거가 없다면, 데메드리오와 그의 동료들의 주장은 법적 효력을 가지지 못합니다(37). 그는 책임 있는 공무원답게 이 소요 사건이 시 치안에 위험 요소라는 점도 지적합니다. 합당한 이유 없이 많은 사람이 모여 소란을 일으킨 일은 로마제국의 기준에서 불법 행위이기 때문입니다(40). 흥분한 에베소 군중은 이렇게 공권력의 개입으로 흩어졌습니다(41).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있다면 장애물을 두려워하지 말고 전진해야 합니다. 장애물이 아무리 크고 어려워 보여도 무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담대해 지시길 바랍니다. 믿음으로 전진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방법으로 역사하셔서 그 장애물을 통과하게 해주십니다. 용기 있는 믿음의 사람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해 하나님이 주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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